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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젊은피, 마크롱 전 경제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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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젊은피, 마크롱 전 경제장관

익명 (미확인) | 목, 2017/03/16- 14:12

프랑스 대선의 유력 후보인 에마뉘엘 마크롱은 지난해 11월 대선 출마 공식 선언을 앞두고 혁명(R´evolution)’이라는 책을 냈다.  1977년생으로 40살이 안 된 젊은 정치인과 어울리는 제목이다. 

하지만 마크롱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프랑스 대선에 도전장을 던진 정치인들 가운데 가장 온건한 성향을 보인다. 극우 성향의 마린 르펜(국민전선) 후보에 맞서 ’중도’에 닻을 내리고 대선 경쟁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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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유럽에는 네덜란드(3월), 프랑스(4월), 독일(9월)이 선거를 앞두고 있다. 오는 4월 프랑스 대선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 마크롱 전 경제장관이 지난 2월 프랑스 중부 리용에서 유세를 하며 두 팔을 치켜들고 있다. (사진 출처: AFP)

민심을 잃은 집권 사회당을 뒤로하고 좌우를 아우르겠다며 지난해 ’앙마르슈(En Marche·전진)’을 창당한 마크롱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르펜을 결선 투표에서 꺾을 유력한 후보로 부상했다. 

르펜의 돌풍에 우려를 표하던 유럽 사회와 언론도 39살 젊은 후보의 혜성 같은 등장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로 치면 최근 ‘중도’를 내세워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선전하는 안희정 충남도지사와 비슷한 전략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좌우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중도노선은 언제나 어려운 실험이다. 극단주의로 치닫고 있는 프랑스 대선에서 마크롱의 실험은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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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프랑스 대선은 중도우파 피용(맨 왼쪽), 극우파 르펜(가운데), 중도파 마크롱의 3파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피용은 가족의 세비횡령 스캔들로 고전하고 있고, 르펜은 극우파 집권을 우려하는 여론에 의해 당선 가능성이 낮다. 현재로서는 이래저래 마크롱의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올랭드정부에서 경제부장관…친기업 성향

마크롱은 프랑스는 물론 유럽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정치인이다. 그는 파리정치대학과 국립행정학교를 나온 전형적인 엘리트로 투자은행 로스차일드에서 일한 은행원이다. 

2012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대통령 부실장으로 발탁하며 정치권에 발을 들였고, 2014년 36살의 나이로 경제산업부 장관이 됐다. 

‘올랑드 키드’로서 그는 사회당의 금기를 건드리며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대통령실 부실장 당시 “상위 1%에게 75%의 고세율을 부과하겠다”던 올랑드 대통령의 대선공약을 백지화하고 고용을 늘리는 기업에 400억 유로(약 49조9940억 원) 세금을 감면해주는 ‘책임 협약’을 추진했다.

진보 정당인 사회당 정부의 장관임에도 주 35시간 노동을 비판하며 노동시간 연장을 밀어붙였고, 해고 조건 완화 등 친기업 정책을 추진하며 노동계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주 35시간 노동제는 사회당의 상징과 같은 정책이기도 하다. 이에 공개 행사에서 노동법 개정에 반대하는 노조원들이 던진 달걀에 머리를 맞고, “꺼져”라는 야유를 듣기도 했다. 경제 활성화 대책으로 파리 샹젤리제 등 관광지구에 있는 상점의 일요일, 심야영업 제한을 완화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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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엘리제궁에서 경제장관 시절의 마크롱이 생태, 지속가능성장 장관인 세골린 루야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장 왼쪽의 올랭드 대통령은 루야얄과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다 결별했었다.

그는 티셔츠를 입고 시위하는 노동자에게 “정장을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하는 것이다”라고 말해 분노를 사기도 했고, 젊은이들에게 “백만장자가 되려고 노력하라”고 권하는 등 좌충우돌 행보를 보였다. 

결국 친기업 정치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사회당 내부에서 강한 반반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우클릭’에 영국 <가디언>은 “사회당 옷을 입은 우파 늑대”라고, 프랑스 <르몽드>는 “좌파에겐 짜증 나는 아이러니, 우파에겐 호기심”이라고 평가했다.

경제-보수, 사회-진보…중도전략

하지만 이러한 그의 전략은 그를 단숨에 대선후보의 지위에 올렸다. 이에 그는 독자 노선을 택했다. 마크롱은 장관 재직 중이던 지난해 4월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앙마르슈를 창당하고 8월에는 장관직을 사임한 뒤 대선 경쟁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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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En Marche)은 정당이라기 보다는 정치운동단체에 가깝다. 사진은 마크롱이 지난 4월, 전진 출범대회에서 연설하는 모습.

마크롱 전략은 ‘경제는 보수, 종교·평등·이민 등 사회 현안에 대해 진보’다.

유럽연합(EU)에 대해서도 지지를 보내며 르펜과 각을 세우고 있다. 르펜으로 대표되는 극단주의의 물결을 막고, 보수·진보 모두를 만족시키겠다는 ‘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로 포지셔닝 한 것이다. 

실제로 “좌파도 우파도 아닌 새로운 정치운동에 도전하겠다”고 중도에 깃발을 꽂자, 우파 쪽에서 그에게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국민전선 등 극우세력의 돌풍에 우려를 표하거나 기성 정치인들에게 염증을 느끼는 사회당, 공화당 중도파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중이다.

25살 연상과  결혼

그는 정치 이력보다 25살 연상의 아내인 브리지트 트로뉴의 존재로 유권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기도 하다. 17살이었던 마크롱은 3명의 자녀를 둔 40살의 교사 트로뉴를 처음 만난 뒤 적극적인 구애로 2007년 결혼에 이르렀다. 

마크롱은 현재 7명의 의붓손자가 있기도 하다. 그는 지난해 <파리마치> 인터뷰를 가지며 부부가 해변을 걷는 사진을 공개하는 등 자신의 러브스토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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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살 연상의 여선생님이었던 브리지트 트로뉴와의 로맨스는 마크롱의 주요 득표요인 중 하나이다. 그러나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게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위장결혼이라는 풍문도 흘러나온다.

프랑스 여론조사기관 ‘IFOP’와 ‘피 뒤 시알’이 3월10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르펜의 1차 투표 지지율은 26%, 마크롱의 지지율은 25.5%를 기록했다. 

우파의 유력 후보인 프랑수아 피용 전 총리(공화당)가 세비 횡령 혐의와 불법 정치자금 의혹에 휩싸이면서 추락하는 가운데 마크롱은 르펜을 막을 대안으로 떠오르는 모양새다. 

극우세력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르펜이 확장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마크롱이 2위로 결선 투표에 오를 경우 프랑스 대통령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문제는 그의 중도전략이 계속 위력을 발휘하느냐에 달렸다. 중도 노선은 일단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쉬우나 복잡하게 꼬인 개별 사안에서 “이도 저도 아니다”, “애매모호하다”는 공격을 받으며 지지를 잃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당장 마크롱은 지난 2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를 방문해 프랑스 식민통치가 “반인권적 범죄”라고 했다가 보수파의 집중 공격을 받고 사과했다. 피용은 “우리 역사에 대한 이런 증오와 회개는 공화국의 대선 후보로서는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도저도 아니거나…혹은 미래의 대통령?

파리정치대학의 뤼크 루방 교수는  <파이낸셜 타임스>에 “마크롱은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전략 때문에 덫에 빠질 것이다.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국내에도 출간된 <극단적 중도파>에서 영국 좌파 지식인 타리크 알리는 “내가 유럽 및 북아메리카 주류 정치에 이름 붙인 ‘극단적 중도파(extreme centre)’는 바로 이렇게 체제에 봉사하면서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겁 많고 고분고분한 정치인들을 뜻한다”고 중도 노선을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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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대통령인 올랭드는 낮은 인기때문에 재선을 포기했다. 그는 오랜기간 마크롱의 멘토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 ‘새정치’라는 기치를 내걸고 중도 노선을 취한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가 시행착오를 겪고, 최근 안희정 지사가 ’선의’ 발언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 연상되기도 한다.

물론 기성 정치인과 차별화된 젊고 스마트한 이미지를 가진 마크롱의 돌풍은 계속될 전망이다. 세계적 석학 자크 아탈리는 과거 마크롱을 두고 “정말 똑똑한 젊은이”라며 “언젠가 대통령이 될 재능이 확실히 있다고 믿는다.”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의 대선 행보에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의 관심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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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라는 용어에 대하여

설 연휴 잘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지난번 편지에서도 많은 문제제기를 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쓸 내용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논의의 범위가 방대해서 제 생각을 다 쓸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먼저 저는 ‘한국사상사’라는 제한된 문맥에서 ‘근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개벽’이라는 자생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근대’라는 번역어를 빌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책 제목도 ‘세계 근대’나 ‘동아시아 근대’가 아닌 ‘한국 근대’라고 한 것이고요. 부제를 “개화에서 개벽으로”라고 했던 것은 종래에 개화 중심으로 근대를 생각했던 관점에서 개벽 중심으로 근대를 생각해 보자는 취지였습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분들과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은 ‘중국’이나 ‘세계’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근대’ 개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근대의 대상도 사상이나 철학보다는 ‘체제’(관료제)나 ‘시스템’(자본주의)과 같은 제도적 측면에 주목하고 있고요. 반면에 저는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한국사상사를 서술하는 범주로서 ‘근대’라는 개념을 빌려오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종래의 실학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고, 동학이라는 새로운 ‘학’에 주목하였던 것입니다.

실학담론 자체의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실학담론을 주창한 1930년대의 조선학운동가들은 “전통으로부터 근대(=지금과 ‘가까운’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한 사상가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개벽파와 문제의식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고요. 다만 양자의 차이가 있다면 조선학운동가들이 유학이라는 틀을 유지한 채로, 즉 유학 안에서 새로운 시대를 찾고자 했다면, 개벽파는 말 그대로 유학을 개벽해서, 유학과는 다른 ‘학’을 창조해서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똑같이 유학을 사상자원으로 활용하고는 있지만 개벽파의 경우에는 ‘학’ 자체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조선유학 500년이 끝나는 하나의 사상적 전환점으로 볼 수 있고, 그것을 저는 ‘근대’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한된 범위에서 ‘근대’라는 개념을 쓰고 있기 때문에 선생님처럼 동아시아사나 세계사와 같은 거시적 시각에서 ‘근대’를 논하는 분들에게는 혼란스럽고 납득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왜 굳이 그런 혼란스런 ‘근대’ 개념을 고집하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개벽’의 사상적 획기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근대’라는 용어의 도움을 받지 않고 곧바로 ‘개벽’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우리에게 ‘개벽’은 낯설고 ‘근대’는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익숙한 용어로 낯선 용어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종의 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벽에 담긴 사상적 획기성으로 말하면 사실 ‘근대’라는 말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근대’는 고대나 중세와 같은 단계적 시대구분론에서 나온 개념인데 반해, 개벽은 ‘개벽 전’과 ‘개벽 후’로 양분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 이전과 이후로 나누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사상사는 크게 동학 이전과 동학 이후로 양분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이 사상의 ‘작’입니다. 개화파는 중국으로부터의 탈피는 했을지언정 여전히 ‘술’의 관행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1876년 강화도조약, 개항을 시발로 삼는 ‘개화기’라는 시대구분”을 탓하시면서 “1860년 동학 창건으로부터 시작하는 ‘개벽기’라는 시대인식을 바로 세워야겠다”고 설파하신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동학에서 시작되는 한국사상의 ‘근대기’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개벽기’와 상응합니다.

이와 같이 ‘한국’ 근대의 기점을 동학으로 잡는 것은 저의 개인적인 한국사상사 서술 방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코 이 구분이 다른 나라나 인류 문명 전체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과는 다른 한국사상사 서술방식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요.

예를 들어 최제우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최한기도 근대를 준비한 사상가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기’ 개념을 중심으로 서양의 천문학과 정치체제 등을 수용하여 ‘기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만들었으니까요. 그리고 최한기 기학의 선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홍대용도, 『의산문답』을 보면, 서양의 천문학을 받아들이면서 전통적인 유불도 삼교와 성인의 권위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최한기처럼 새로운 학문체계를 수립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흔적이 뚜렷합니다. 이 두 사람만 보아도 확실히 조선후기는 뭔가 새로운 사상의 바람이 불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아직 저의 역량이 부족해서 이런 사상가들을 본격적으로 논의에 포함시키고 있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기학과 동학이 동시대에 나왔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김태창선생님께서 “앞으로 한국철학의 과제는 기학과 동학을 융합‧접목시켜 새로운 ‘학’을 만드는 일이다”고 하셨다고 들었는데, 탁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업이야말로 21세기 한국에 필요한 새로운 ‘개벽학’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근대’라는 용어를 고집하는 두 번째 이유는 실천적인 관심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한국인들은 ‘근대’라는 정신적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 번째 편지에서 소개한 중국인 학자의 표현을 빌리면, “서구 근대의 독을 가장 많이 먹은 나라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근대화’되지 못해서 ‘식민지’ 지배를 당했다는 역사적 사실도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을 부정하면서 서구를 추종하고, 한편으로는 일본을 도덕적으로 미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근대화를 평가하는 상반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중국철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노자는 노자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근대는 근대로 치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근대로 상처받은 영혼을 근대로 치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동학을 비롯한 개벽파를 ‘자생적 근대’나 ‘토착적 근대’로 규정하는 이유입니다. 식민지 경험으로 인해 비어 있는 ‘전통’과 ‘현대’의 사이를 ‘개벽’으로 채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통(유학중심)-근대(개벽중심)-현대(서학중심)”의 구도로 한국사상사를 나름대로 균형있게 서술하고 싶습니다. 최근에 이러한 저의 문제의식(‘치유로서의 개벽근대’)에 공감해 준 서평이 하나 나왔는데,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박지영(인전) 교무님이 쓰신 「근대의 재발견으로 개벽종교를 치유하다」(『개벽종교』 80호)입니다. 저보다도 제 마음을 더 잘 알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개벽사상’과 종래의 ‘탈식민주의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종래의 탈식민주의론은 또 하나의 ‘술(述)’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상을 빌려다가 거기에 기대어서 자신이 처한 사상적 곤경을 해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선생님이 맑시즘 역시 개화좌파에 불과했다고 비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는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중심주의에 갇히거나 그냥 공부로 끝날 뿐입니다.

반면에 개벽은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고자 했습니다. 최근에 유상용선생님이 “개벽은 나로부터 세계를 보는 눈을 여는 것”이라고 했는데, 탁월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편협한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에 빠진 것도 아닙니다. 유학과 서학을 시야에 넣으면서 ‘한울’이라고 하는 세계주의를 지향했습니다. 이런 사상은 개벽 이전에도,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한국사상계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홍대용이나 최한기는 예외라고 하고). 물론 개벽이 사상적으로 완벽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학과 동학의 관계

유학과 동학의 관계는 저로서는 언제나 논란의 중심에 있는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동학은 거의 대부분 유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 왔습니다. 확실히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유학자였고, 이 점은 증산교의 교조로 알려져 있는 강증산이나 대종교를 창시한 홍암 나철, 그리고 원불교를 이론화한 정산 송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증산은 동학을 평가하면서 “유학을 버리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하였고, 실제로 동학 통문(通文)에는 ‘도유(道儒)’라는 표현도 보이고 있습니다. 아마 전봉준과 같은 동학접주의 대부분이 서당 훈장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부의 탄압도 피하려는 목적도 있었겠고요.

그런 점에서는 분명 선생님이 지적하신대로, 동학과 개벽파는 유학이나 불교와 같은 전통사상의 자산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만든 ‘학’을 ‘개신유학’이나 ‘급진유학’ 또는 ‘민중불교’라고 하지 않고, ‘동학’이나 ‘증산교’ 또는 ‘원불교’라고 새로운 이름을 붙였던 이유는 ‘학’의 내용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즉 전통을 자산으로 삼고는 있지만, 그 전통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학’을 만든 것입니다. 최제우가 ‘다시 개벽’을 주창하거나 강증산이 ‘묵은 하늘’을 뜯어고치자고 한 것은 이런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학’이 나오게 된 이유는 종래의 유학적 세계관으로는 더 이상 시대적 전환기에 대처할 수 없다는 위기감과 절박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들이 제가 동학을 말할 때 유학과의 연속성보다는 단절성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무엇보다도 유학 경전을 버리고 독자적인 경전을 만든 이상 이미 유학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유학을 유학이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조건은 『시서(詩書)』라는 경전을 신봉하는 것인데 – 마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경』을 신봉하듯이요 – 동학교도들은 『시서』나 『논맹』이 아닌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경전으로 받들었습니다. 물론 교양으로는 유교경전도 공부했을 수 있습니다만, 농민들이 사서삼경이나 성리학 문헌을 공부한 경우는 드물었다고 생각됩니다. 전봉준과 같이 유학자의 신분에서 동학에 입도한 경우라면 당연히 유교경전은 기본소양이었겠지만요 -.

그래서 이들에게 ‘유학’이라는 아이덴티티를 부여하기는 어렵습니다. 천도교인인 모시는사람들의 박길수대표님에게 “당신은 유학자입니까?”라고 물어보면 아마 “아니다”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그냥 “천도교인이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원불교 성직자도 마찬가지고요(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학을 배척하거나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만), 그런데 ‘개신유학’이나 ‘급진유학’이라고 규정해 버리면 여전히 유학자라는 타이틀을 붙여주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마치 주자학이나 양명학을 신유학이라고 하듯이요. 그래서 제가 이 표현에 위화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증산교가 선도(仙道)를 개벽하고, 원불교가 불교를 개벽한 것처럼, 동학이 유학을 개벽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향벽설위에서 향아설위로의 전환”입니다. 유교에서 중시하는 제사를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는 제사를 거부하는 것보다 더 큰 불경죄를 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벽’으로 상징되는 성인이나 조상보다 ‘나’를 더 존귀한 존재로 설정하고 있으니까요. 동학이 당시의 유학자들에게 ‘사교’로 지목당하고 최제우나 최시형이 처형당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습니다. 유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명분(名分), 즉 예적(禮的) 질서를 무너뜨렸으니까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동학은 ‘개신유학’이라고 하기보다는 ‘개벽유학’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원불교를 ‘개벽불교’라고 부를 수 있듯이요. 요즘에 저는 원불교를 ‘동학불교’라고 소개하기도 합니다. ‘개벽/동학’과 ‘불교’를 다 알아야 이해될 수 있는 사상체계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동학도 개벽과 유학을 다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사상체계라는 뜻에서 ‘개벽유학’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신’이나 ‘급진’은 하나의 독립된 사상체계를 뜻하는 말은 아닙니다. ‘새롭거나 과격하다는 수식어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개벽’은 하나의 역사적인 사상조류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개벽유학’은 ‘개벽’이라는 사상과 ‘유학’이라는 사상의 합성어를 의미합니다. 마치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이 한편으로는 최제우를 개벽의 선지자로 존경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법을 주체로 한다고 말하였듯이 말입니다. 아일랜드의 젊은 한국학자인 캐빈 콜리는 정약용의 사상체계를 ‘개신유학’이라고 하지 않고 ‘기독유학’(그리스도교+유교)이라고 규정하였는데, 이것도 비슷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개신유학’이라고 하면 사상적 아이덴티티가 ‘유학’ 하나로 한정되지만, ‘개벽유학’ 또는 ‘기독유학’이라고 하면 사상적 아이덴티티가 두 개로 늘어납니다. 이 중에서 ‘유학’을 강조하면 유학과의 연속성이 강조되고, ‘개벽’이나 ‘기독(교)’을 강조하면 유학과의 단절성이 강조됩니다(물론 정약용의 사상은 유학적 요소가 그리스도교적 요소보다는 훨씬 크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동학에는 두 측면이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강조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동학이 유학의 연속선상에서 논의된 측면이 강했다면, 저는 단절성을 강조해서 균형을 잡으려는 것이고요.

아울러 어떤 A라는 사상을 만들기 위해서 B라는 사상자원을 활용했다고 해서, 새로 만들어진 A라는 사상을 반드시 B라는 사상 계열로 분류해야 하는 필연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상자원으로만 활용할 뿐, 내용 자체는 전혀 다른 사상체계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동학과 서학의 문제

제 생각에 동학은 단지 서학의 도전에 대한 대응일뿐만 아니라 전통적 세계관의 붕괴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였습니다. 최제우는 『동경대전』에서 “인의예지는 성인의 가르침이지만 수심정기는 내가 새롭게 정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학뿐만 아니라 분명히 유학도 의식하고 있습니다. 동학이 유학도 아니고 서학도 아닌 제3의 길을 갔다고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동학의 ‘동’에는 ‘서’에 대한 ‘동’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한 ‘동’의 의미도 담겨있습니다. 이러한 ‘용례’는 일찍이 신라시대의 최치원에게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최영성교수님의 선행연구에 의하면, 최치원은 신라는 ‘동국(東國)’이고 중국은 ‘서국(西國)’이라고 하면서, 신라인을 ‘동인(東人)’이라고 하고, 한반도를 ‘동방(東方)’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에 고려시대든 조선시대든, 한반도에 사는 지식인들이 자신들을 지칭할 때에는 ‘동방’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동인, 동국, 동방은 모두 서세동점이 시작되기 이전의 개념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동학’은 ‘동양학’이 아니라 ‘한국학’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어떤 분들은 동학은 서학, 즉 천주교의 영향으로 탄생했다고들 말합니다. 『동경대전』에 나오는 ‘천주’나 ‘상제’ 개념을 예로 들면서요. 주로 그리스도교신학을 연구하시는 분들의 주장이라고 생각되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동학은 서학의 ‘자극’을 받아서 탄생했다고 할 수는 있어도,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자로는 ‘상제’나 ‘천주’라고 쓰고 있지만 한글로는 ‘하늘님’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 ‘하늘님’은 전통적인 한국인의 하늘신앙을 대변하는 말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상제나 천주는 그것을 한자로 표현하기 위해서 빌린 말이고요. 그래서 오히려 천주교의 신관이 이런 토착적인 하늘신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야 하고, 동학도 마찬가지로 그런 토착적 신관 위에서 성립한 신종교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서학의 자극을 받았을 수는 있는데,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다산 정약용이 서학적 신관을 수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부족하지만 ‘근대’와 ‘유학’의 문제에 대해 제 나름대로 답변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제기하신 문제의 취지에 어느 정도 부합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여전히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개벽학의 모색

 마지막 부분에 제시해 주신 “술이 아닌 작의 필요성,” “개벽기에 대한 시대인식,” “밖보다는 안을 살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개벽문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작’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개벽문화와 개벽학을 만드는 일이라고 보고요. 지난주부터 페이스북에 『개벽일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개벽에 대해서 남에게 들은 이야기나 자신이 생각한 단상 등을 글로 남겨두고 있는데, 이것이 죽을 때까지 쌓이면 개벽학의 얼개가 대충 짜여질지 모르겠습니다.

“개벽기에 대한 시대인식”은 삼일운동의 사상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삼일운동’하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떠올리기 십상인데, 이것 역시 개화의 시선으로만 사태를 바라보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삼일독립선언서」의 사상적 내용들을 분석해 보면, 개척정신(“자가의 신운명 개척”), 도덕주의와 시대전환 의식(“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온다”) 등이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요소들이야말로 개벽사상의 특징이었습니다. 개화파들은 쓸 수 없는 문장입니다. 이 개벽정신이 바로 삼일운동의 내적인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외적인 요인이었다고 한다면요).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삼일운동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독립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독립은 물론이고 사상적 독립까지 아우르는 ‘독립’ 말입니다. 지금은 정치적으로 독립한 상황이지만 사상적 독립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사상적 독립은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것이 개벽의 자세입니다. 삼일운동에서 만개했는데, 아쉽게도 해방 이후로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세대는 이런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젊은이들이 깨어있어야 하겠지요.

선생님과 하자센터의 김현아 선생님이 기획해 주신 ‘개벽학당’이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저로서는 10대 후반의 젊은이들과 함께 한국사상과 개벽정신을 얘기할 수 있는 첫 번째 자리이자 시험의 무대입니다. 아울러 원광대학에서도 박맹수총장님이 중심이 되어 개벽의 일꾼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신라시대에 화랑들이 사회를 이끌어 갔듯이, 한국사회도 개벽의 일꾼들이 진취적이고 창조적으로 바꾸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개벽이 이처럼 하나의 사회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개벽학’이라는 체계적인 ‘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언문」으로는 아무래도 지속가능성이 떨어지고 단발적으로 끝나기 쉽습니다. 주자학이 동아시아를 700년 이상 이끌어 갔듯이, 그에 상응할만한 개벽학이 요청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것이 선생님께서 제기하신 ‘민주화’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개벽화’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금, 2019/02/08-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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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올해는 ‘천당에서 지옥으로’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지지율의 부침이 극심했다. 2006년 지방선거 참패의 완벽한 복수라고 할 대첩의 기억은 이제 희미하기만 하다. 전운이 감돌던 위기감, 남북 정상의 연이은 만남이 가져온 감동과 기쁨, 사상 초유의 북미 정상회담이 야기한 흥분도 기억 저편에 있다. 눈 밝은 시인의 표현을 빌어 말해 보자.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근본적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를 미룬 결과는 지지율 폭락

이 정부의 가장 큰 패착은 참여정부 당시의 경험을 오독했다는 사실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포스트를 맡고 있는 사람들은 대통령을 포함해 많은 경우 참여정부 당시에 포스트를 맡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참여정부 실패(낮은 지지율, 연이은 선거패배, 정권채창출 실패, 노 대통령의 서거 등)의 가장 큰 원인을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정책(물론 참여정부의 정책패키지가 근본적이고 급진적이었는가는 논쟁적인 주제다)의 추진에서 찾는 것 같다. 즉 ‘시간이 한참 경과한 후에 나타나는데다 다수 유권자들에게 소구되지도 않는 정책들을 펼치다가 지지율 하락과 선거 참패를 불러왔고 급기야 노무현을 잃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의 인식이 이런 수준이라면 펼 수 있는 정책 조합과 선거전략은 자명하다.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남북 관계의 획기적 개선(남북 경협이 비약적으로 증진되면 투자와 고용, 성장의 돌파구가 열릴 수도 있다)에 올인하고, 사회경제적 모순과 개혁은 관리하는 수준에서 운용하며, 가급적 적을 만들지 않는다는 방향으로 정리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적어도 사회경제 개혁에 관한 한 문재인 정부가 그간 보인 스탠스를 보면 이같은 분석이 타당해 보인다.

문제는 문재인 정부의 인식과 처방이 모두 틀렸다는 데 있다. 남북 관계라는 마차로 사회경제적 모순이라는 말을 견인할 수는 없으며, 양극화로 집약되는 대한민국의 사회경제적 모순은 국민적 일체감과 유대감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정치적 반대자를 만들지 않는 정치는 반(反)정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처음부터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정책과 정무를 복무시키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그 힘으로 남북관계를 힘있게 추동해야 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올인하면 적극적 지지자들과 격렬한 반대자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단언컨대 지속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위태롭기 그지 없는 지지율 80%보다는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올인하며 획득한 콘크리트 지지율 55%가 압도적으로 힘이 세며 바람직하다. 문재인 정부는 근본적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를 미루고 그 대신 지지율을 얻으려고 했지만, 결과는 재앙으로 나타났다. 한 마디로 ‘게도 구럭도 잃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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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공화국 혁파부터 시작하자

부동산 문제야말로 문재인 정부가 실패한 대표적 영역이다. 집이 없는 중산층과 서민들은 문재인 정부 시절에 집값에 신경쓰지 않고 살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었다. 물론 그 믿음은 완전히 배신당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경제는 압도적으로 부동산이다. 작년 7월 이후 본격화 된 문재인 정부 지지율 하락이 서울 아파트 가격 폭등과 타이밍을 같이 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놀라운 대목은 문재인 정부가 이런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부동산 정책 실패에 책임이 큰 김수현 수석을 정책실장으로 승진시킨 것을 보면 말이다.

좋다. 지나간 것은 잊자. 앞으로가 중요하다. 사면초가 상태에 몰린 문재인 정부가 다시 비상할 수 있는 길은 자명하다.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올인하면서 그걸 지렛대로 정치적 지지층을 강력히 복원시키는 길이 그것이다. 어렵고 힘든 길임을 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올인한다고 해서 그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예컨대 문재인 정부가 부동산공화국 혁파에 나서면 당장은 건설투자가 줄고, 고용지표가 악화되며, 부동산 자산이 감소할 것이다. 정치적 후폭풍도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완화되는 대한민국’, ‘공정과 혁신이 가능한 대한민국’, ‘지속가능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부동산공화국을 혁파하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공화국 혁파로 생기는 정치적 반대자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정치적 지지자들(그들의 수는 압도적으로 많다)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부동산공화국 혁파의 수혜자들(언뜻 비조직적으로 보이고 미덥지 않게 여길 수도 있는)에 대한 믿음을 지녀야 한다. 그런 안목과 믿음 없이 어떻게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하는 노무현 정신이란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역사와 대의에 헌신하는 태도 그리고 그런 태도를 지닌 정치인과 정당을 시민들은 끝내 지지하고 지켜준다는 믿음의 결합이다. 노무현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노무현을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 정신의 계승자이길 간절히 바란다. 나는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 정신을 계승해 올해부터 부동산공화국 혁파의 담대한 길을 뚜벅 뚜벅 걷길 희망한다.

화, 2019/01/0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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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이르러 인간은 종교 철학에 있어서 개벽의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는 21세기의 존재론이 실체론에서 생성론으로 전환을 하게 되면서 종교철학 또한 이 영향으로 벗어날 수 없기에 당연한 결론입니다. 하여 실체론에 입각한 유일신 종교들은 이제 소명을 다하게 되면서 21세기의 종교는 표층종교에서 심층종교로, 믿음의 종교에서 깨달음의 종교로, 타력의 구원에서 자력의 체험으로 근본적인 전환을 다시 모색할 수 밖에 없는 시점이기에 필자는 새로운 종교철학의 태통을 위한 단서를 찾아내기 위해 인류 사고의 원형태인 신비주의에 대하여 먼저 모색을 시도해보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신비주의(Mysticism)라 함은 절대적 존재(ultimate reality)와의 합일을 의미하는 종교적 양식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존재론에 따라 신비주의의 의미가 전혀 다르게 갈라지는데, 예를 들면 실체론의 입장중 하나인 일원론의 관점을 따르면 개체는 태생적으로 본래 하나인 실체가 단지 다른 양태들로 변용되어 나타났기에 절대적 존재인 실체와 개체는 속성상 완전히 같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데 이런 관점을 일관한 철학이 스피노자의 범신론pantheism이라할 것이며, 실체론의 입장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인 이원론의 입장을 따르는 유일신 사상은 절대적 존재와 개체는 서로 다른 실체이므로 존재론적으로 간극이 있을 수 밖에 없어 속성상 일치라는 개념은 성립될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원론을 극복하고 신과 인간의 일치를 주장하는 이면의 흐름이 있는데 이에 부합하는 종교철학으로 네오플라토니즘에서 비롯된 기독교 신비주의, 이슬람 수피즘, 유대교의 카발라신앙, 힌두교의 베단타 신학 등으로 이루어진 신비주의들을 들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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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

한편 실체론에 반대하는 비실체론, 즉 생성론의 입장을 견지하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과 불교의 불성사상도 네오플라토니즘의 신비주의적 유출론 체계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넒은 의미에서 신비주의에 포함시켜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신비주의는 단지 특정한 종교적 양식이 아니라 인종이나 지역 또는 시대의 차이를 뛰어넘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인류 정신문명의 보편적 구조라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구조주의자 레비 스트로스가 인류의 보편적 사고의 양식으로서 주장한 ‘야생적 사고’(그는 근친상간의 법칙을 야생적 사고의 가장 보편적이고 원초적 형태라고 주장하였습니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비주의는 세계 모든 인종이나 종교나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기에 이를 인류의 보편적 문화유산으로 인정하고 더욱 확산, 심화시켜 나가야하지 않을까하는 바램을 갖게 되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신비주의는 절대적 존재와 인간과의 본래적 일치 또는 합일 체험을 중시하는 종교적 양식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신과 인간 나아가 초월과 내재의 합치, 즉 직접적 합일체험을 통해 신과 인간의 이분법적 분리를 전제로 하는 실체론에 입각한 유신론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현대종교의 문제점인 중간적 존재인 성직자와 종교적 공간 및 상징 등을 통하지 않으면 신을 만날 수 없도록 제도화된 오늘날의 종교적 장치로 인해 발생하는 폐해들도 극복할 수 있지 않을 까 생각합니다.

한편 신비주의와 유사한 종교적 형태가 샤마니즘이라할 것인데 다만 기존 보편적 신비주의와 다른 것은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무당(shanman)이 있기에 합일체험을 간접적으로 전달받는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는 유사 신비주의라 할 것인데 오늘날 기성 종교들의 폐해는 이러한 매개자들을 마치 신의 대변인인양 왜곡하는 종교적 형식과 장치에서 비롯된다할 것인데 특히 한국의 종교적 유전자는 우랄알타이 산맥에서 발원한 샤마니즘shamanism에서 발원하였기 때문에 기성종교의 성직자들이 신도들에게 자신들을 마치 샤먼처럼 신의 전달자라고 세뇌시킴으로서 종교의 폐해를 키우는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샤머니즘화하고 있는 한국 기성종교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비주의의 올바른 부활이 반드시 필요하다할 것입니다.

또한 신비주의는 합리적 이성(철학)과 종교적 직관(종교)의 결합, 즉 분별과 직관 또는 이성과 감성의 결합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과학(이성)만능의 현대에도 과학의 한계를 뛰어 넘는 종교가 왜 필요한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할 것입니다. 나아가 신비주의는 신과의 일체를 보여줌으로서 신과 인간, 초월과 내재, 이성과 감성, 인간과 자연, 정상과 비정상, 동일자와 타자 등의 이원성을 극복하고 인간의 존엄성 자체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제시하고 있으며 또한 바울의 초월적 종말과 구원이 아닌 역사적 예수의 현세적이고 내적인 구원을 더욱 빛나게 한다 할 것입니다. 하여 예수를 신화적 예수로서의 구원Christos자가 아니라 성육인의 화신Incarnattion으로 사건화된 인간, 즉 역사적 예수로 재해석하게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할 것입니다. 하여 예수를 성육신의 사건event으로 해석하고 또한 모든 인간도 같은 성육신의 사건event으로 본다면 우리는 예수와 같이 성육화된 사건이기 때문에 인간도 예수와 동질적인 동지가 될 수 있는 기반이 닦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성육화된 예수가 되기 때문에 신화적 예수를 도반으로 하여 그가 걸었던 십자가의 길을 같이 걸어가야만 하는 신학적 토대를 마련할 수가 있다할 것입니다(이에 대해서는 추후 알랭바디우의 진리의 신학과 안병무 선생의 사건의 신학과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을 융합 하여 다시 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신비주의의 가장 중요한 장점은 기성종교의 결정론을 버리고 인간의 주체적 지향과 자유의지를 중시한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신과의 합일체험은 반드시 인간의 의지와 수행을 통하여만 가능한 것이 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신의 선택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결정론은 폐기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신비주의의 또다른 특징은 자연의 존재법칙에 가장 부합하는 종교적 양식이라 할 것입니다.

이는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비주의의 범주에 속하는 필자가 주장하는 일심사상도 자연법칙인 현대물리학(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과 천체물리학 나아가 복잡계 이론과 인지과학의 융합에서 얻어낸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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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신비주의 양태를 검토해보고합니다.

무엇보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네오플라토니즘Neo platonism의 플로티누스의 유출론에서 비롯되는데 궁극적 실체로서 제 1원인자인 헨Hen으로부터 제 2의 실체인 인격신(유일신) 누스Nous가 출원 하며 다시 누스로부터 제3의 실체이자 인간의 영혼인 프시케Psyche로 흘러드는데 이 영혼에는 우주적 영혼(니르구나 브라만)과 개인적 영혼(사구나 브라만)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결국 그의 철학의 방점은 유출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에 방향을 역류하여 영혼의 최초의 고향인 헨Hen으로 돌아가서 정화하는 과정, 즉 환원하는 과정을 그리면서 결국 자의식을 정화purification하여 신의 순수의식에 몰입되는 일치체험을 중시하게 됩니다. 이는 이후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유출론을 더욱 심화, 확장시키면서 제 1원인을 신성Gottheit라 불렀습니다만 그 구조는 위 유출론과 큰 차이는 없다할 것이며 역시 그도 자아의식을 버리고 절대적 존재와의 합일unification을 도모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갈파한 것입니다.

그 외에 이슬람교의 수피즘은 성자인 만수르에서 그 절정을 보는데 ‘그는 내가 사랑하는 나이고 나는 그가 사랑하는 그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신비주의의 극단을 보이고 있으며 나아가 유대교에는 카발라신앙이 있으며 힌두교에는 상카라가 주창한 불이론의 베단타 신앙(위에서 본 니르구나 브라만Nirguna Brahman과 사구나 브라만Saguna Brahman의 일치)이 있으며 불교에는 불성사상이 있어 세상은 여래성기, 법성현기이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편 현대에 들어와서 신비주의의 특징을 유지한 채 나타난 비실체론적인 생성론에 기반한 신학이 화이트헤드의 과정 철학이라 할 것입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보게 되면 신God의 위상과 역할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유출-환원론과 유사하다할 것인데 그는 현실적 실재actual entity들의 합생concrescence에 신도 참여를 하는 데 신은 자신의 ‘원초적 본성’을 이용하여 현실적 실재들에게 자신의 주체적 지향aim으로서의 목적인을 부여하고 과 영원한 객체everalsting object를 통하여 작용인을 부여하는 ,즉 유출작용을 시작합니다. 이후에는 자신의 ‘결과적 본성’을 통하여 현실적 계기들을 구제하는 역할, 즉 환원작용을 마무리합니다.

결국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도 그 골격은 네오플라토니즘과 마이스터 에크하르의 유출-환원론을 철학적으로 갈무리한 것에 불과하다할 것입니다. 하여 필자는 생성론자인 화이트헤드가 기독교의 신을 다시 호출하여 신을 유일신인 누스Nous처럼 인격화하여 신에게 다른 현실적 실재를 출산하고 구원하는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신을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존재로 그리는 범재신론(panentheism)을 주창한 점에 대해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비록 중세의 오로지 ‘초월적인 기독교’의 인격신의 개념을 버린 점은 높게 사고 싶습니다.)

결국 그는 ‘초월’과 ‘내재’라는 이중적인 신의 개념을 새롭게 제시하기는 하였으나 근원적으로 종전의 기독교적 신God 개념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모순을 노정하고 있는데 특히 초월자로서의 신의 속성인 ‘동시성’ ‘영속성’ 문제는 오늘날 현대물리학 이론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어 그조차 제대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여 필자는 그러한 신의 초월성도 우주의 내재 속에서 찾아내야한다는 당위성을 자각하면서 신비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새로운 종교철학을 시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일심사상’이라는 종교철학을 구축하게 되었는데 그 큰 틀을 설명드리자면 여기서 말하는 ‘일심’은 그냥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우주 자체’를 의미합니다. 복잡계 이론에 의하면 우주 자체는 무한한 구성요소로 이루어져있지만 그러한 구성요소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창발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 자체는 구성요소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구성요소들의 합과는 전혀 다른 하나의 유기체, 즉 분리되었지만 분리되지 않은 한 몸the devided undevideness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주 자체는 구성요소와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하나의 생명체인 유기체이기에 그러한 유기체는 물리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를 모두 갖추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지과학, 특히 토토니의 정보통합이론에 의하면 마음은 정보의 통합처리시스템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주도 자신의 항상성 유지를 위해 쉬지 않고 자기-조직화를 수행하면서 우주내의 정보를 통합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우주는 당연히 마음을 가진 존재라는 결론을 도출하게 됩니다.

또한 우주는 정보로 이루어져있다고 주장하면서 대세로 떠오른 ‘정보우주론’에 의하면 우주는 정보로부터 출발하였는데 이를 존 아치볼트 휠러는 it from bit 즉 우주는 정보로부터 태어났다라는 것인데 오늘날은 bit(0 또는 1)가 아닌, Q bit(0 과 1)로 이루졌다고 보며 큐비트 256개만 주어지면 우주의 모든 정보를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쉬뢰딩거의 파동함수에 우주의 모든 정보가 담겨져 있다고 해석하는 것과 상통하는 것으로 결국 우주는 정보의 통합적 처리시스템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결국 우주 자체는 마음을 가진 존재이기에 물리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을 구유한 하나의 전일적인 유기체라 할 것입니다.

결국 우주 자체는 구성요소와의 합과는 전혀 다른 하나의 생명체, 즉 유기체이기 때문에 우주 자체는 화이트헤드의 ‘신의 원초적 본능’처럼 자신의 구성요소에게 작용인과 목적인을 부여하면서 우주안의 세계들을 설계designer하며 창도advocator합니다. 즉, 우주는 ‘항상성homeostsis유지’라는 ‘목적인’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 항상 ‘자기-조직화self organization’를 멈추지 않는 ‘작용인’을 가지고서 세계를 설계하며 창도하는 것입니다.

한편 우주 자체 또한 자신의 구성요소들에 의해 생성되기 때문에 우주 자체는 구성요소인 세계로부터 작용인과 목적인을 새롭게 부여받음으로써 우주와 세계는 서로 창조하면서 창조되는 상호작용을 하는 상호인과관계, 즉 연기적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런 상호 인과적 관점은 화이트헤드의 신의 위상에 대한 설명과 동일하다할 것입니다만 다만 일심사상은 신은 우주자체를 의미하기에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 즉 범재신론panentheism이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신의 초월성문제(즉, 신은 다른 현실적 실재와 동시적인 존재라는 ‘동시성’과 신은 다른 현실적 실재와는 달리 항상 초월적이며 영원하다라는 ‘영속성’의 문제)는 생길 여지가 없는 장점이 있다할 것입니다. 또한 이런 관점을 연장한다면 인간도 단지 신의 피조물로서 결정론을 따르는 대상이 아니라 신과 함께 우주의 ‘설계’와 ‘창도’를 아우르는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존재로 승격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일심사상은 굳이 초월적인(엄밀히 말하자면 ‘초세간’transcendent을 의미) 신의 개념을 동원하지 않고도 우주의 생성과정을 초월적이며 내재적인 ‘일심’만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기에 현대의 비실체론, 즉 생성론(사건론, 과정론, 관계론)에 가장 부합하는 종교철학이 된다할 것입니다.

오늘날 기성종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존재의 법칙을 무시한채 존재법칙과는 무관한 선험적인 당위법칙을 만들어 무조건적인 신앙을 강요하는 측면때문에 발생한다할 것인데, 즉 존재Sein를 벗어나 그와 어긋난 당위Sollen를 강요함으로써 종교가 도리어 족쇄가 되어버린 것이라 할 것인데 위에서 언급한 신비주의나 필자의 일심사상은 우주의 존재법칙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종교철학을 추출한 것이기에 몸에 딱 맞는 옷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할 것이며 또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원론이든 일원론이든 실체론에 입각한 종교로 인해 나타나는 폐해를 조금이라도 없앨 수 있는 ‘자연신학’이라할 것입니다.

즉 ‘일심사상’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의 ‘합생이론’과 양자역학의 ‘존재론’ 및 상대성이론의 ‘상호인과론’ 나아가 복잡계의 ‘창발이론’ 및 인지과학의 ‘마음’개념을 융합한 과학적인 종교철학으로 신비주의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종교철학이라 할 것입니다.

-존재에서 당위를!

월, 2019/01/2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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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이 합의문 없이 결렬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3월 4일부터 6일까지 모스크바에서 <9차 북-러 경제협력위원회>가 열렸다. 8차 경제협력위가 지난해 3월 평양에서 열린 것을 보면 정기적으로 열리는 회의이건만, 마치 북한이 하노이 북미 회담에서 기대하던 제재 해제가 안풀리자 대안으로 러시아와 경제협력을 꾀하는 듯한 양상으로 일부 언론에서는 묘사하고 있다. 이번 경제협력위에서는 두만강 자동차 전용 교량 건설 문제와 러시아내 북한 노동자 이슈 등이 논의됐다. 김정은 위원장의 방러 문제는 이번 경제협력위에서 논의되지 않았다는데, 러시아 정부는 김정은 위원장에게 방러 초청장을 전달하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또 실무선에서는 아직 구체적인 움직임이 없지만, 외교가에선 북한의 협상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 김정은 위원장이 이미 여러차례 방문한 중국에 이어 러시아를 조만간 방문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 직후, 러시아에 특사를 파견해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극동개발을 위한 협력방안을 논의했고, 러시아의 극동개발부에 맞춰 러시아와의 경제협력을 전담하는 ‘북방경제협력위원회’를 대통령 직속 기구로 설치했다. 또 2017년 9월, 3차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한 자리에서 ‘신북방정책’을 발표하고 한-러간 실질적 경제협력 방안을 푸틴 대통령과 논의했다. ‘신북방정책’은 러시아와 몽골, 카자흐스탄 등 북방 나라들과 정치.경제,사회분야의 협력 강화를 추진하는 외교정책을 말하는데, 역대 정부의 북방사업이 남북관계의 부침에 따라 자주 중단돼 추진 동력을 잃었다는 인식에서 시작됐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중국 등 G2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탈피하고 기존의 주력산업에서 벗어나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신북방정책이 필요하다고 주문한다. 지금 당장은 북방국가들과의 교역이 크게 늘지 않아 경제적 중요성이 커보이지 않지만, 북한의 문이 열려 국경의 개념이 없어지고 대륙을 바로 통과할 수 있게 되면 경제협력 규모가 획기적으로 커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2016년 9월 2차 동방경제포럼/ 블라디보스토크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유럽과 가까운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경제성장을 추구해온 러시아는 높은 유럽 의존도와 안보 위기를 줄이기위해 아시아.태평양으로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2012년 정부 내에 ‘극동개발부’를 신설하고, 러시아 극동 연해주 지역을 대대적으로 개발하는 한편 아.태 국가들과의 협력 강화를 꾀하는 ‘신동방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극동.시베리아 개발계획을 보면 2025년까지 9조 루블(390조 원)을 투입할 예정으로 돼 있다. 여기에는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0년 7월, 역대 소련 지도자들 중에서 최초로 북한을 방문했을 만큼 아태 지역, 특히 한반도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푸틴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돼 있다.

문재인 대통령 러시아 두마 첫 연설 (2018년 6월 22일)

지난해 6월 21일 19년 만에 러시아를 국빈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러시아 국가 두마(하원)에서 연설을 통해 “푸틴 대통령의 ‘신동방정책’은 평화와 공동번영의 꿈을 담은 유라시아 시대의 선언입니다. 내가 지난해 발표한 ‘신북방정책’은 ‘신동방정책’에 호응하는 한국 국민들의 꿈입니다. 나는 한국과 러시아의 협력이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번영의 주춧돌이라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다. 2017년 190억 달러였던 한-러 교역규모는 2018년에는 248억 달러로 증가했는데, 양국 수교 30주년이 되는 2020년까지 양국간 교역액 300억 달러, 인적 교류 100만 명 시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한러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의 방한을 공식 초청했고, 푸틴 대통령은 이를 수락했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여러 가지 변수가 예상되지만 만일 2019년에 푸틴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다면, 한반도 및 동북아 정세에 러시아의 적극적인 개입과 역할이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2018 러시아 월드컵 주경기장 루즈니끼 경기장

필자는 2015년 7월 1일부터 2018년 6월 30일까지 만 3년 동안 KBS 모스크바 특파원을 지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직후 한러 수교 25주년 기념행사들을 치렀고 그해 9월엔 아태 진출을 열망하는 푸틴 대통령의 야심작 ‘제 1회 동방경제포럼’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맞이했다. 2016년은 소련붕괴 25주년, 2017년은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았고, 2018년엔 러시아 대선과 월드컵 경기를 동시에 치렀다. 그런가하면 2016년과 2017년 사이 북한은 3차례의 핵실험과 수십차례의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감행하면서 ‘핵 보유국’지위에 도전했고, 이에 상응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의 강도도 높아져 북한의 외교적 고립은 깊어지고 남북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다행히 2018년 들어 상황이 급반전돼 남북.북미, 북중 정상회담이 잇달아 열리면서 한반도에 해빙 무드가 진행되고 있다. 햇수로 4년간의 특파원 생활 기간 벌어진 숨가쁜 사건들을 목도하면서, 취재 현장에서 느낀 소회를 여기에 담았다.

크렘린궁 기자실에서 (2017년)

우선 첫 번째 글은, <남북한과 러시아>를 다룰텐데 북-러 관계와 남북러 3각 협력문제를 거론하면서, 특히 2016~2017년 사이 북한의 전략적 도발에 대한 러시아의 대응과 2018년 대반전 드라마를 서술하고자 한다. 두 번째 꼭지는 <푸틴의 극동개발 전략>으로, 동방경제포럼의 창설과 푸틴의 극동개발 노림수, 수교 30주년을 앞둔 한-러 관계를 짚어본다. 그 다음은 <푸틴과 러시아>로 20년째 장기집권중인 푸틴의 통치 비결은 무엇이고, 그 와중에 발생하는 반정부 시위는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우크라이나 사태. 크림반도 병합, 시리아 내전 개입 등 러시아의 대외현안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또 <시베리아의 보배>에선, 북극개발에 적극적인 푸틴과 시베리아 야말반도의 가스전 개발, 한국산 세계 최초 ‘쇄빙 LNG’ 선박에 대한 얘기를 담는다. 이밖에 시간이 허락한다면, 러시아와 CIS(독립국가연합)내 고려인 이야기와 러시아의 군사 분야에 대한 얘기들을 추가하고자 한다.

한국이 북방으로 진출하려는 길목에 위치한 러시아. 러시아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존재이고, 우리는 러시아와 어떻게 지내야할까.

필자는 한국에게 러시아는 아직도 저평가된 주식과 같다고 감히 평가하며 한러 관계가 더욱 긴밀히 발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화, 2019/03/12-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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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자 화이트헤드는 평소 자신의 철학을 철학과 종교와 과학을 융합한 유기체 사상philosophy of organism이라고 불렀습니다. 좀 더 자세히 그의 철학을 들여다보면 그는 자신의 과정철학을 현대의 존재론ontology으로 주창하였음과 동시에 유기체적 세계관을 새로운 우주론 cosmology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칼럼_181116
철학자 화이트헤드

한편 우주론을 논하는 경우에 존재론을 같이 거론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우주의 근거와 작용인 및 목적인을 설명하는 우주론을 구축함에 있어서 반드시 우주의 구성원인 개별적 존재의 성격을 설명하는 존재론이 전제되어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주는 개체들의 산술적 합이 아니라 그 이상의 속성을 발현하는 창발성을 갖는 복잡계이기때문에 단순히 대수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일단 존재론이 제시하는 존재의 속성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우주론이 전개되기때문에 같이 논할 수밖에 없지않나 생각합니다.

즉, 현대철학은 개체의 주체성과 공동체로의 귀속성과 연대성을 같이 논하지않을 수없기 때문에 존재론과 우주론을 같이 설명할 수밖에 없다할 것입니다!

한편, 현대의 존재론은 서구의 실체론을 과감히 폐기하고 생성론(이를 과정론,사건론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습니다!)을 과감히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간단히 다시 말씀드리면 생성론은 존재는 동일성을 지닌 실체substance가 아니고 단지 시공간상의 인과적 사건의 연속적 과정을 생성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실체론에 터잡은 우주론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확인해봅니다!

실체론에서 상정하는 우주는 2가지 요소(1개의 원인과 1개의 조건)로 이루어져있다는 단순계를 모델로 하고있기때문에 그 인과율은 선형인과 linear causality또는 단순인과라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태양계안의 지구의 운행을 설명할 때 태양과 지구만을 변수로 고려하고 나머지 다른 행성들을 고려대상에서 배제시켜버립니다. 따라서 역학관계를 2개의 변수로 단순화시키기에 설명의 유용성은 있으나 실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이는 무지의 유용성이라는 주제로 나중에 따로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체론의 가장 큰 문제는 선형인과율을 따르다보니 결정론과 목적론 또한 계서적인 지배,피지배관계를 본질로 한다할 것입니다. 이에따라 인간의 자유의지는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제1원인의 작용인과 목적인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뭇 존재는 선행원인으로부터 유래하였기 때문에 모사된 후행존재는 선행존재인 원본보다 열등하다할 수밖에 없으므로 선행원인이 제시하는 작용인과 목적인을 거부할 수가 없어 그가 제시하는 담론에 예속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하여 실체론에 비롯한 우주론은 선행 제1원인에 의해 작동되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지니지않을수 밖에 없습니다!

즉, 기계의 모든 구성요소는 기계를 작동시키는 제1원인의 지시에따라 움직이는 부품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할 것입니다.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에 의하면 강자만이 선행원인이 되어 후행원인인 약자는 그에 종속되는 계서적 질서를 받아들일수 밖에 없습니다.

(이에따라 니이체는 절대적인 진선미는 존재하지않으며 진리의 척도는 오로지 힘Macht, 즉 진리에의 의지밖에 없다고 도덕계보학에서 밝히고 있는데 이를 기계론적 세계관에 적용하면 오로지 제1원인의 힘에의 의지가 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미의 기준은 강자인 성형자본의 힘,의지가 만들었기에 결국 힘의 의지,즉 강자의 힘에 의해 현대 진리는 만들어진다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특히 실체는 서로 내재적인 생성관계가 없는 독립된 존재들이기에 자신들의 생존은 반드시 강자가 약자를 약탈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어 결코 지배와 피지배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자아를 끊임없이 강자에 복종시키며 타자화하는 소외를 근원적으로 벗어날 수없으며 결국 강자의 일방적 지배와 약탈만 있을 뿐 강자와 약자의 순환성을 상실하게됨으로써 종국에는 호환적 생태계는 유지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한편 생성론에 근거한 우주론은 화이트헤드가 말했듯이 유기체적 세계관이라 할 것입니다!

여기서의 유기체란 생명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구성요소가 또는 구성요소와 구성요소가 정합적으로 꽉 짜여있으면서 상호 내재적인 생성작용을 멈추지않는 실재를 의미한다할 것입니다. 하여 세포단위의 유기체이던 우주 차원의 유기체이던 그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서로 시공간상 분리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내재적으로 분리되지않고 생성에 같이 참여하는 존재이기때문에 모든 요소가 생성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로 동등하고 평등하게 참여하는 전체로서의 하나a single totality인것입니다. 하여 유기체적 세계는 단순계가 아니라 최소한 3개이상의 구성요소가 상호영향을 미치는 복잡계이기에 상호인과율 또는 복잡인과율을 따르게 됩니다. 이는 불교의 연기법과 같다할 것인데 이러한 비선형 인과는 결정론이 아닌 확률론을 따르게 되어 있어 구성요소들의 자유의지도 인과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말하면 구성요소는 강약,대소,선후를 불문하고 똑같은 확률적 가치를 지니기에 모두 평등한 존재로 생성에 등가적으로 참여한다는 사실을 존재론적으로 보여준다할 것입니다.

 

그러면 유기체 사상의 과학적 근거를 알아봅시다!

우선 양자역학에서 찾아보면 양자얽힘quantum entanglement현상을 들 수있습니다. 이 이론은 아인쉬타인이 사물의 실재성과 국소성(분리성)을 증명하기위해 EPR패러독스라는 사고실험을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는데 결국 1982년 아스팩의 실험에 의해 우주는 비국소적이고 비실재적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이를 양자얽힘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고 영속적으로 생성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임을 물론 또한 우주는 분리된 것처럼보이나 실제는 분리된 것이 아니기에 분리되었으나 분리되지않은 하나! the devided undevidedness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힌 것입니다.

또한 우주는 그 구성요소가 모두가 내재적으로 연결된 유기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론으로 일반상대성이론을 들 수있습니다.

즉 우주의 시공간 형태는 물질의 분포가 만들고 또한 물질의 분포는 시공간의 모양이 만든다는 것으로 이는 상호연기,즉 유기체의 특징인 상호간 내재적 생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할 것입니다. 또한 극명하게 우주는 하나의 유기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론으로는 조지 가모브 박사가 주창한 빅뱅이론이 있는데 이는 우주는 하나의 특이점singularity에서 빅뱅하였다는 것으로 우주는 유기체로서의 한 몸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나아가 복잡계 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항상성homeostasis을 유지하기위해 항상 자기 조직화self-organization를 멈추지 않는데 그 과정에 우주의 모든 요소가 창발emergence과정이든 혼돈chaos의 과정이든 되새김feed back의 과정에 모두 구성요소가 참여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하기에 로렌쯔는 아마존의 나비날개짓이 카리브해에 폭풍을 만들 수도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 또한 세계 전체가 내재적으로 생성관계를 맺는 유기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예라할 것입니다.

또한 현대진화론, 특히 스튜어트 카우프만은 진화를 다윈주의 (자연선택) 와 신다윈주의(돌연변이) 와는 달리 생명체와 환경과의 상호작용의 산물이라고 보고 있으며, 특히 칼 세이건의 부인인 린 마굴리스는 공진화co-evolution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진화도 우주라는 유기체 내부의 구성요소들의 상호인과적 생성작용으로 보고있습니다.

한편 인지과학의 제3패러다임인 체화된 인지EM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은 정보처리 시스템으로서 두뇌,몸과 환경의 상호작용의 산물이라고 규정하는데 이는 마음이 복잡계이자 유기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한편 불교의 유식사상은 마음을 두뇌,몸과 우주의 상호작용으로 보는데 이에 따르면 우주도 정보처리시스템으로서 한 마음,즉 일심이라할 것입니다). 물론 과학은 아니지만 불교의 연기법도 우주를 유기체로 보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할 것입니다.

 

그러면 단지 이론적 관점이 아니라 실천론의 입장에서 왜 유기체적 세계관을 받아들여야하는지를 살펴봅시다.

우주가 구성요소들의 정합적인 연결망인 유기체라면 우주안의 모든 존재들은 개체로서 독립성뿐만 아니라 구성요소들간의 관계성도 생득적인 조건이기에 반드시인간들은 생활세계의 공동체를 구성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위한 대안으로 공동체를 제시하기도하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개체성과 관계성을 중첩적 속성으로 하기때문에 온전한 삶을 위해서는 소통과 상생의 공동체를 반드시 전제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동체는 영어로 community라고 부르는데 어원을 따지면 선물을 같이 나누는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이는 공동체안에서는 모든 존재가 선물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유기체에서 타자는 자아의 생성에 내재적으로 이바지하기에 타자는 항상 선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기체의 속성상 우리는 공동체를 만들지않을 수없는 것입니다)

또한 유기체사상은 자아와 타자가 내재적 생성관계를 맺기에 자타불이라는 불교의 교리가 단순한 종교적 구호가 아니라 실상이라는 것을 밝혀줍니다(한걸음 더 나아가 유기체사상은 우주와의 합일체험을 중시하는 뭇 종교들의 신비주의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할 것입니다). 하여 유기체사상은 사랑과 자비의 존재론적 근거도 되지만 사랑과 자비가 시혜적 동정이 아니라 평등성에 기초한 나눔이라는 것을 제시하며 나아가 사랑과 자비가 개체적 차원이 아니라 구조적 차원의 개혁으로까지 승격시켜야하는 근거가 된다할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횡행하는 이민족,특히 난민이나 다문화가정에 대해 배척하는 태도도 실체론적 존재론에 근거한 것으로 우주의 생성에 뭇 존재가 모두 평등하게 참여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알게되면 순혈주의는 설 자리가 없다할 것입니다. 하여 예맨난민과 카라반행렬은 바로 우리의 책임이기도한 것입니다.

나아가 오늘날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본과 노동을 고정되고 불변하는 실체로 보는 실체론을 벗어나서 자본과 노동이 동등한 생산성요소라는 생성론의 입장에서 자본과 노동의 일치 또는 호환할 수있는 새로운 생산양식을 반드시 모색해야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나비효과에서 언급하였듯이 아무리 작은 행동도 되새김을 통해 엄청난 결과를 이끌어내듯이 우리의 작은 행동이 역사를 바꾸는 혁명의 단초가 될 수있다는 것입니다. 하여 니이체는 노예의 도덕에서 벗어나기위해서는 자신의 위치에 맞는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키우라고 주문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되새김에의한 창발효과는 자연법칙일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도 적용될 수있기에 비록 지금은 초라해보일지 모르지만 지금 여기의 위치에서 참된 진리를 향한 권력의지를 강화하는데 최선을 다해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필자가 21세기의 우주론으로 유기체사상을 제시하는 이유라할 것입니다!

ㅡ따로 또 같이!

금, 2018/11/1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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