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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고 든든한 ‘울 언니’ 같은 위은진 변호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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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고 든든한 ‘울 언니’ 같은 위은진 변호사를 만나다

익명 (미확인) | 금, 2017/01/2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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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어도 따뜻한 기억으로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 기억만으로도 온기가 전해지는 사람. 균형감각과 여유, 그리고 온기를 동시에 가지면서도, 술도 세고 스피드를 즐기는 반전 있는 멋진 여자, 위은진 변호사님을 만나기 위해 잰걸음으로 사무실을 찾았다. 2년 연속 큰 상을 받았다고 하니 그 신공이 궁금하기도 하고! 자랑스러운 민변의 울 언니, 어디 한 번 만나 볼까요?

이혜정(이하 이): 2015년 첫 번째 사회공헌대상을 수상하신데 이어 2016년에는 변호사공익대상까지 수상하셨네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먼저 간단한 소개 부탁드릴게요.

위은진 변호사(이하 위) : 감사합니다. 저는, 기수는 31기이고 위은진입니다.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드려요. 상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제가 변호사로 활동한 기간이 길고, 지속적으로 했기 때문에 주신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는 변협 산하 이주민이나 외국인 관련 위원회 활동 위주로 공익활동을 했기 때문에, 변협 입장에서 다른 변호사들보다 제가 활동하는 게 더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이 사람이 계속해서 활동을 하고 있구나’ 해서 남들보다 쉽게 보이는 위치에 있어서 받은 상 아닌가 싶어요.

: 이주민과 관련된 공익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 이주민 관련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처음엔 사업적인 이유였어요. 초보 변호사로 막 개업한 이후에 앞으로 시장 상황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고, 일반적인 변호사 업무 외에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 라고 생각하다 찾은 게 이민에 관련된 업무였거든요. 한국에서 미국, 캐나다 등으로 이주하려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사업도 괜찮을 거 같은데, 아직 변호사들이 이 분야에서는 활동이 많지 않구나, 내가 한 번 해보자, 이런 식으로 이주민 관련 업무를 시작했죠.

처음엔 우리가 이민을 보내는 나라인줄로만 알았지 우리나라로 이민을 오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몰랐거든요. 그런데 이주노동자나 이런 분들은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 위치에 있어서 인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오히려 들어오는 이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니 이분들이 경제력이 없었어요. 법률 상담은 물론이고 변호사라는 사람을 한국에서 처음 만난 거죠. 돈이 없으니까 만날 생각도 안 했었고. 굉장히 작은 일에서부터 한국 법을 모르니까 무조건 불이익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자기가 받는 부당한 처우에 대해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사업으로, 영리목적으로 이 사람들을 만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영리 목적으로 일을 할 만큼 잘 하거나 잘 아는 것도 아니었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이주민들을 만나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듣고, 돌아오면 다시 공부를 했어요. 법전도 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그런데 혼자 공부하는데 한계가 있잖아요. 공부를 하려고 해도 하다못해 참고할 책도 없었고요. 그때 판례 등을 공부하기 위해서 법률신문, 대한변협신문 같은 것들을 굉장히 열심히 봤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대한변협신문에서 UN 이주노동자 권리협약 비준을 준비하는 공청회가 있다는 기사를 봤어요.

이 기사를 스크랩해놓고, 기사에 위원장으로 나온 변호사님한테 그냥 전화를 했는데, 그 변호사님이 그렇게 연락이 잘 안 닿더라고요. 제가 좀 끈질긴 구석이 있거든요. 그래서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점심 먹고 전화를 했어요. 메모도 남겨놓았는데 리턴 콜이 잘 안 되더라고요. 결국 ‘오늘도 연락이 안 되면 포기해야겠다’고 맘먹고 전화를 했는데, 그날 전화 연결이 된 거예요.

제가 ‘공청회를 같이 준비하고 싶다’고 하니까 간사변호사를 통해서 연락을 주겠다고 하셨어요. 그때 간사변호사가 황필규 변호사였어요. 그렇게 공청회 준비를 같이 하기 시작해서 12월에 공청회를 치르고, 처음으로 UN 이주노동자 권리협약을 소개하는 책자도 만들었고요. 그때 참여했던 사람들이 외부 토론회 등에 발제자, 토론자로 활동하면서 관심을 환기시켰던 거죠. 공청회 때도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오셨고, 국회 보좌관들이 관심을 갖기도 하고 그랬어요. 물론, UN 이주노동자 권리협약은 아직도 비준이 안 되긴 했지만.

이 공청회 준비를 통해 변호사들 중에 이주민 활동을 하시는 분들을 처음 만났어요. 황필규 변호사님이 공감에 계시잖아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공감에 있는 회원들하고 일을 많이 하게 됐어요. 소라미 변호사님은 이주여성 관련 활동을 하시고, 장서연 변호사님도 이주노동자 관련 일을 하시고. 이런 식으로 공감의 그룹과 조금씩 같이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그분들이 100% 하실 때 저는 10%, 20% 일을 늘려 나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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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사업으로 이주민 업무를 시작하시다가 변협 활동으로 그 폭을 넓히셨는데, 그러면 민변 활동은 어떤 식으로 시작하시게 된 건가요?

: 처음에 어소로 변호사를 시작할 때 대표가 “민변 이런 데 가입하면 안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저는 당시 민변을 잘 몰랐는데, 이때 ‘민변’이라는 단체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웃음)지금은 창원에 계신 손명숙 변호사님이 제가 막 개업하던 그 즈음에 회원팀으로 활동하고 계셨는데, 손변호사님이 저한테 밥이나 한 번 같이 먹자고 하셨어요. 옆 건물에 있는 여자 선배가 밥을 먹자고 하시니까 당연히 먹었죠. 그렇게 그날 밥을 얻어먹었어요. 비싼 건 아니지만. 밥을 사주시면서 ‘민변에 가입하는 게 어떠냐’고 하시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고, 제가 친했던 분들 중에 민변에 이미 가입하신 분들도 많아서 ‘알았다’고 대답했죠. 활동은 바로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고, 그때는 제가 돈을 좀 벌 때였으니까 회비 10만 원도 낼만한 것 같고요. 아무 생각 없이 회비회원으로 가입했던 거죠. 그러다 이주민 활동을 하면서 공익활동을 더 하게 됐는데, 변호사 5년차를 지나던 즈음에는 ‘내가 돈 벌려고 변호사 됐나?’ 그런 고민이 밀려왔어요. 그런데 공익활동을 하고 싶다고 해도 이런 활동을 혼자 막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던 차에 민변이 공익활동을 한다고 하니까 2006년에 처음으로 여성인권위원회 송년회에 갔어요. 처음 자기소개를 하면서 ‘가입한지는 조금 됐는데, 공익활동을 더 활발하게 해보고 싶어서 송년회도 왔다’고 했더니 선배들이 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러시더라고요. 이제부터는 민변 활동을 좀 더 하겠다고 했더니 여성인권위원회 빈곤노동팀 김진 변호사님이 바로 전화를 하셨어요. 그래서 빈곤노동팀에서 스터디를 시작했고, 그러면서 민변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여성인권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점차 민변 활동을 하게 됐고, 이후 사무차장으로 활동하면서 제가 민변 성원이라는 걸 더 느꼈던 거 같아요. 여성인권위원회 할 때는 여성 인권에 관심 있는 변호사들의 모임이라고 느꼈다면, 사무차장을 하면서는 민변 전체가 활동하는 모습이 보이니까 제가 ‘정말 민변 회원, 성원이구나’ 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 남편인 김차곤 변호사님도 민변 회원이시잖아요. 요즘 노동위 뿐 아니라 특위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 그 유명한 민변 내 김&김 변호사님! 김차곤 변호사님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어요?

: 제가 96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무작정 고시공부를 한답시고 신림동으로 간 적이 있었어요.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 상황이라 진짜 열심히 공부했어요. 내 인생에서 제일 공부를 열심히 했던 시절이었죠. 1차 시험에 막 합격한 뒤에 독서실 총무 중에 한 분이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걸 눈여겨보고 저한테 스터디를 같이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때가 공부 시작한지 2년째였는데, 2년 동안 혼자 공부를 하니까 정말 폐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전공이 문과가 아니라 그때까지만 해도 글을 길게 쓰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어요. 그러던 중에 누가 스터디를 같이 하자고 한 거예요. 그때 그 분이 데려온 멤버가 저희 남편과 몇 명이었어요.

남편하고는 처음엔 그냥 스터디 내에서 좀 친한 오빠동생이었어요. 둘 다 지구과학에 관심이 있고, 스포츠도 좋아하고 해서 말이 잘 통한다고 느껴서 친해졌죠. 그러다 2차 시험을 치르고 결과가 발표됐는데 남편은 떨어지고 저는 붙은 거예요. 전화를 했더니 남편이 “너는 붙고 난 떨어졌는데 술이라도 한 잔 사야하는 거 아니니” 그러더라고요.

일주일 후에 만나서 술을 마셨는데, 마시다 보니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뭔가 분위기가 묘한 게 거기 더 있으면 안 될 거 같더라고요. 그런데 남편이 그때 저한테 “시험에 떨어진 건 괜찮은데 앞으로 널 못보는 게 너무 맘이 아프다”고 하는 거예요. 아 이 소리를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웃음). 저는 붙고 오빠는 떨어지니까 안쓰럽고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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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러면 딱 한 달만 만나보자”고 제안을 했고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네 번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런다고 없는 감정이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한 달 뒤에 “내가 특별히 감정이 안 생긴다”고 솔직히 말하고는, 둘이 소주를 세 병을 마시고 헤어졌어요. 그때 남편은 한 달 후에 1차 시험 봐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집에 돌아오고 나니 ‘이러다 그 오빠 한 달 후에 시험 못 보면 어떡하지? 시험 볼 때까지만 만나야 하나?’ 그런 걱정이 또 막 드는 거예요.

결국 ‘다시 한 달만 더 만나고, 시험 끝나고 결정하자’고 맘먹고 한 달을 더 만났어요. 그러고 나서 한 달 후에 남편이 1차에 또 떨어졌네? 그래서 당시 남편은 바로 취직하고, 저는 연수원에 들어갔는데 연수원에 남편 아는 사람들이 “어머 너 누구랑 사귄다며?” 이러는 거예요. 저는 그냥 오빠 동생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런 식으로 남편하고도 연애를 못하고 연수원에서 누굴 만나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시간이 흘러흘러 여름이 됐어요. 같은 조 사람들하고 지리산을 가기로 하고 남편한테 얘기했더니 “처음 맞는 휴가인데 어떻게 딴사람들이랑 갈 수 있냐”고 자기랑 지리산을 가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조 사람들이 아닌 둘만 따로 지리산에 갔는데, 그 날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거에요. 산에 다 오르지는 못하고 산장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자게 되었는데, 아침에 남편이 저를 깨우는데 이마를 손가락 하나로 톡톡 치면서 깨우더라고요. 그때 사람이 되게 깔끔한 거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웃음) 또 내려갈 때 비가 갑자기 쏟아져서 계곡물이 불어났는데 남편이 저를 보호하면서 건너게 해주더라고요. 지리산에 갔다 온 후로 이 사람 좀 괜찮은 거 같다, 그런 생각이 조금씩 들었어요.

문제는 저는 첫눈에 반한 건 아니더라도 불꽃같은 연애를 하고 싶단 로망이 있었는데, 저희 남편하고는 너무 평탄한 관계가 쭉 이어졌다는 거예요. 남들이 공인한 남자친구는 늘 있는데 우리 둘은 너무 뜨뜻미지근하고. 계속 “이렇게 해서 결혼까지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뭔가 매듭을 짓겠다고 생각을 하고 밤에 전화를 해서 헤어지자고 했죠.

그랬더니 남편이 “그럼 그건 내일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더라고요. 다음날 만났더니 저희 남편이 결혼하자고 하는 거예요. 난감하잖아요? 바로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그래서 ‘그럼 한 시간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카페에서 나와서 한 시간 동안 같이 산책하면서 한 마디도 안 하고 각자 생각을 했어요. 이 사람하고 결혼을 했을 때, 아니면 이 사람하고 헤어지고 딴 사람하고 연애를 할 때, 시나리오를 계속 생각해봤어요.

지금 불꽃같은 연애를 못하지만, 이 사람하고 결혼하면 죽을 때까지 평온하게 살 거 같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내 성격을 봤을 때 불꽃같은 연애에 휘말리는 일은 없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한 시간쯤 산책하면서 생각하다 ‘불꽃같은 연애는 이 생에는 틀렸다, 다음 생에 태어나서 하자’고 결정하고 ‘결혼하자’고 대답했어요.(웃음)

: 두 분의 연애 이야기 너무 재밌네요. 너무도 평온하면서도 살짝 심쿵하면서도 애뜻한 느낌도 있고. 그런데 그런 두분 실제 결혼하고 나서도 진짜 평온하신가요? 두분 싸우실까요?

: 실제로 지금도 잘 안 싸워요. 결혼하고 한 번도 안 싸우다가 이라크 파병 때 의견이 서로 달라서 한 번 싸웠나. 그 정도?(웃음). 그리고 제가 남편에게 배운 것이 제가 약간 욱하는 성격도 있는데 그 때 남편이 ‘어떻게 가족에게 화를 내냐’고 그 말을 듣고는 반성도 했어요. 정말 처음에 남편을 만날 때 ‘이 사람과 결혼하면 정말 평온하게 끝까지 함께 살 것 같다’ 그런 느낌이 있었는데, 실제 그랬어요.

: 와 ‘어떻게 가족에게 화를 내냐’. 전 가족이라 화 더 많이 내는데…반성되네요(웃음). 김차곤 변호사님 정말 멋있으시네요! 변호사님은 제가 옆에서 보기에도 변협 활동도 많이 하시고 민변 활동도 정말 많이 하시고 계시는데..이렇게 활발한 공익활동과 생계이자 직업으로서의 송무의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지는 않으신가요? 공익활동을 하기엔 시간이나 여건이 안 되는 젊은 변호사들도 많은데, 조언을 좀 해주신다면?

: 이런 얘기를 하게 되면 사실 후배 변호사님들한테 되게 죄송해요. 어쨌든 저는, 시장 상황이 나쁘지 않아서 제가 그냥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면 생계를 유지하는 것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 변호사 일을 시작했거든요.

저는 2002년에 어소로 변호사를 시작했는데, 남들보다 좀 빨리 개업을 했어요. 연수원 다닐 때부터 개업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연수원에 있을 때 선배 언니들에게 ‘개업할 때 꼭 나랑 같이 하자’ 라고 해놨거든요. 사실 주변 교수님들이나 선배들은 젊은 여자변호사가 개업을 한다는 걸 되게 불안해하시더라고요. 교수님도 내심 걱정이 되셨는지, “어디 인터뷰 있다더라, 가봐라” 이러시면서 취업 자리도 알아봐주셨고. 그래서 어소로 취업을 한 다음 어쨌든 1년여 정도 기본 업무를 배운 게 당시 개업하려던 저한테 굉장히 도움이 됐던 거 같아요.IMG_7356

연수원에 같이 있었던 선배 언니들 중에 저하고 비슷하게 한 1년 정도 어소 변호사로 활동하다 개업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언니가 있었어요. 그 언니가 개업을 준비하면서, 제가 항상 “개업하려면 저 좀 껴주세요”라고 얘기하고 다녔던 걸 생각해내고는 저하고 같이 개업할 생각을 한 거예요. 그 선배 언니가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서 갔더니 대뜸 “사무실을 보러 가자” 그래서, 2002년 12월에 어소 변호사로 1년을 채 안 채우고 전격적으로 개업을 하게 됐어요.

제가 변호사가 되었던 시점이, 여성 변호사가 다 합쳐 100명을 막 넘긴 상황이었어요. 변호사 시장 상황도 나쁘지 않았고, 여성 변호사라는 점도 사건 수임하기에 나쁘지 않았어요. 여성 변호사라는 것 때문에 찾아오시는 분도 있었고요. 그리고 굉장히 열심히 성실하게 일을 많이 했죠. 저는 한 번도 사무장한테 상담을 시켜본 적이 없어요. 제가 처음 개업했을 때는 거의 매일 밤 11시까지 일했고, 휴가도 딱 세 번 갔고. 그런데 지금은 시장 상황이 달라졌으니, 어떻게 보면 이런 말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얘기에요.

2005년~2006년 즈음에는 제가 변호사 5년차가 되면서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한 시기였어요. 많이 벌어서 많이 쓸 건지, 적게 벌어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건지에 대해서요. 제가 변호사 일을 하면서 많이 벌어서 명품 가방 같은 것들 사고, 만족감을 느끼고 그런 생각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가방을 사도 좀 지나면 그 가방이 그 가방이다 싶고, 결국 적게 벌더라도 원하는 일을 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리게 됐죠.

이주민과 관련된 공익 활동을 시작할 때에는 그 분들이 경제적 능력이 없어서 일단 내가 무료로 하거나 소송 구조를 받아서 변호를 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10년 후에는 이분들이 상황이 나아져서 고객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죠. 의뢰인들 중에 작은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사건을 마무리할 때 헤어지면서 “당신이 성공하면 꼭 나를 고문변호사로 선임해달라”고 인사하기도 하고요. 제가 많지는 않지만 외국인 사건을 계속 하다 보니 실제로 돈이 있는 분들도 소문을 듣고 유료로 사건을 맡기시는 분들도 계세요. 이태원 커뮤니티에 제 연락처가 알려져 있대요. “어떻게 오셨냐” 물으면 이태원 커뮤니티에서 제 연락처 보고 왔다고 답하시는 분들도 있고.IMG_7349

지금은 사건을 좀 가리게 되기도 해요. 다시함께센터에서 성매매 여성들을 도운 적이 있는데, 그 반대의 업무를 맡기시면 거절하기도 하죠. 사건 내용을 들어봤을 때 무죄일 것 같은 경우에는 맡기도 하지만 제가 듣기에 처음부터 좀 아니다 싶은 사건들은 안 맡아요. 가령 “저는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많이 대리하는 변호사이기 때문에 선생님 사건을 맡는 건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고 설명하거나, 제가 보기엔 무죄가 아닌데 무죄를 주장하시는 경우엔 “방향이 맞지 않아 제가 적절한 변호를 제공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면 그분들이 알아서 저를 변호인으로 선임하지 않기로 결정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공익활동을 하다 보면 그것도 변호사 업무잖아요? 변호사는 결국 사람을 많이 만나고, 네트워크를 통해서 사건이 생기기도 하니까요. 저는 오히려 공익활동을 2006년부터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시간을 내서 10%, 20%, 나중엔 50%까지 공익활동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조율하고 있어요.

: 마지막 질문이에요. 민변을 전혀 모르고 회비 회원으로 가입하시다가 지금은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시잖아요. 변호사님에게 민변이란,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IMG_7347

: 뭐랄까, 마음이 되게 편해지는 공간이에요. 함께 활동하는 변호사님들도 항상 감사하고 존경하는 분들이고. 누가 ‘존경하는 변호사가 누구냐’고 물으면 전 항상 민변 변호사님들이라고 대답해요.

제가 민변하고 결이 굉장히 다른 변호사님들하고도 잘 지내는 편이에요. 그런데 그 분들이 나중에 제가 ‘저 민변이예요’라고 했을 때 깜짝 놀라시는 분들도 있어요. 저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민변 변호사에 대한 변호사 내의 편견들이 좀 있는 거 같아요. 선거 같은 게 있으면 저한테 도와달라고 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었는데, 한 번은 “저 민변에서 사무차장을 하고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되물었어요. 그랬더니 그 분이 “아 그럼 안 되겠네?” 하시는 거예요. 민변하고 꽤 친한 편이신 분인데도 그랬어요. 그때 정말 ‘민변에 대한 변호사들의 편견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어떤 변호사님들은 변협 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민변에 대해 제 앞에서 노골적으로 욕하시는 분들도 있었고요. 어떨 땐 ‘내가 그렇게 민변 티가 안 나나?’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는데.(웃음)

그래서 제 역할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민변에 대한 편견을 깨는 것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해요.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저는 민변 선배들 다 존경스럽고 대단하다,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 분들 많지 않다”고 얘기하기도 해요. 제가 다른 데서도 일해 봤지만 민변처럼 일을 펑크 내지 않고 열심히 해주시는 분들이 없어요. 회원들끼리 서로 사정을 아니까 서로 “이번엔 제가 할게요”라고 적극 나서주고. 정말 일하는 모습, 평소 행동이 선배든 후배든 다 존경스러워요.

그래서 저에게 민변은 점점 더 애정도 가고, 내가 편하게 마음을 둘 수 있고, 얘기할 수 있고, 존경하는 분들이 계시고 그 분들과 함께 일하는 것 자체가 기쁜 그런 곳이에요. 여기서 만나는 선배님들, 동료, 후배님들, 밖에서 만나도 한 식구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너무 애정을 듬뿍 담은 대답이었나?(웃음)

: 애정 어린 말씀 너무 감사드려요. 다시 한 번 막강한 후보를 제치고 큰 상을 받으신 거 정말 축하드리고, 이렇게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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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위원회 신입회원 간담회 후기

- 구현주 회원

지난 7월 13일 월요일에 언론위원회 신입회원 간담회가 있었습니다. 신입회원 간담회는 6월 월례회에 이어 제가 두 번째로 참석한 언론위원회 행사였는데, 웃다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였습니다. 간담회 후기를 쓰려고 한글 창을 띄워놓고, ‘그 날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생각하니 웃던 기억밖에 나지를 않아 한동안 기억을 되새겨야 했습니다.

이 날 간담회는 정해진 프로그램 없이, 언론위원회의 앞으로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야기, 일상과 일에 대한 이야기들이 격의없이 오고갔습니다. ‘즐겁고 자유롭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밤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가운데, 방송통신위원회의 자의적 사후심의에 대한 언론위 차원의 감시·비판 방안, 공영방송 경영진이 교체되는 시점인 올 해 언론위원회가 향후 공영방송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방법, KBS 시청자위원 후보 추천등과 같은 당면한 언론위의 과제들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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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위 선배 변호사님들의 신입회원들에 대한 따뜻한 환영과 기대와 함께, 저 역시 언론위에서 앞으로 함께 보낼 시간들을 기대하게 되는 밤이었습니다.

 

화, 2015/07/28-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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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위원회 활동소식

 

사법위원회는 그동안 군소 위원회, 신입회원이 가입하기 어려운 위원회라는 인식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매월 정기회도 항상 작은 회의실에서 했었죠^^::

그러던 사법위가 김선수 변호사님의 적극적인 신입회원 유치에 힘입어 드디어 대회의실에서 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신입회원들의 또랑또랑한 눈빛에 선배변호사님들도 자극을 받으셨는지 7월 정기회는 그 어느 때보다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다음 회의 발제를 자진해서 맡겠다는 모 변호사님을 막는 믿을 수 없는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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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위가 최근 주목하고 있었던 주제는 공소시효 폐지와 관련한 법안들과 대법관 인선 문제, 그리고 사시존치 여부입니다.

 

최근 강력범죄에 대한 대응책으로 공소시효를 폐지하자는 법안이 여럿 발의가 되었는데요. 사법위는 공소시효 폐지가 강력범죄를 예방하는 방안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공소시효의 적용을 배제하려면 공소시효 제도의 본질 및 근거에 비추어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하고 법적 안정성을 고려하여 신중히 운용할 필요가 있으므로 국제법상 반인도범죄, 전쟁범죄, 그리고 처벌의 필요성이 있으나 현실적으로 처벌에 장애가 있는 경우 등으로 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의견을 국회에 전달하기로 하였는데 그 사이 살인죄 일반에 대하여 공소시효가 폐지되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가 되었지요. 꼭 처벌해야 하는 강력범죄자를 시효의 도과로 처벌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은 동감하지만 자칫 이런 법안으로 인하여 초기 부실 수사가 합리화되지는 않을지, 강력범죄의 예방은 범죄자 처벌 이외에 아동, 여성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 등 사회정책이 병행되어야 하는 점을 도외시하게 되지는 않을지 염려스럽습니다.

 

지난 박상옥 대법관 임명 때부터 사법위는 대법관 인선과 관련한 성명, 논평, 기자회견 등을 통하여 현행 대법관 인선 구조의 문제점을 여러 차례 지적하였습니다. 이번 민일영 대법관의 후임 대법관 인선에서는 대법원이 공개 추천을 받겠다고 하였고 대한변협에서 김선수 변호사님을 추천, 사회 각계에서 지지 의견을 보내와 한 때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갖기도 했었지요. 그러나 역시 대법원은 구태를 벗지 못하고 법관순혈주의를 고집하며 이기택 서부지법원장을 임명 제청하였습니다. 앞으로 박근혜 정권이 끝날 때까지 6명의 대법관의 임기가 종료됩니다. 대법관 인선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우리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 들어 대법원 판결을 보며 알 수 있었습니다. 사법위는 앞으로도 민주주의와 인권, 정의를 수호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대법관이 임명될 수 있도록 관련 활동을 계속 해 나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법조계의 뜨거운 화두! 사시 존치와 관련하여 다음 정기회 (8월 21일, 19시)에서 찬반 양론의 발제를 들을 예정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화, 2015/08/11-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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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의 시대에 만나는 인권영화

다희 |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레고 |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인터뷰 및 정리 | 조준희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정부가 지난 4월 공개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초안에서 ‘성적 소수자’는 지워졌다. 차별금지 조항을 담은 인권조례가 폐기되는 것은 너무나도 순식간이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성주에서, 그리고 수많은 이들의 집과 가게에서, 삶터를 지키려는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오는 6월 6일 서울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릴 스물세 번째 영화제를 준비 중인 두 명의 서울인권영화제 활동가를 만나 지금의 인권현실과 인권영화의 의미를 물었다. 지금의 상황을 ‘적막’이라 말하는 두 활동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자기소개 부탁한다

레고 |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레고라고 한다. 서울인권영화제에서는 2012년 10월부터 상임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희 |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다희라고 한다. 2015년 영화제까지는 자원활동가로 활동하다가, 2016년부터 상임활동가가 되었다.

 

각자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나?

레고 | 상임활동가가 두 명밖에 없다. 거의 모든 일을 다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희 | 영화제 프로그래밍부터, 영상에 수어통역이나 자막을 넣는 기술적인 일, 대외 홍보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일을 한다. 또, 영화제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것 외에도 인권운동과 관련한 연대활동도 중요한 활동 중 하나다.

레고 | 상임활동가 외에도 스무 명 정도의 자원활동가들이 함께하고 있다. 자원활동가들은 영화제를 그 시작단계부터 같이 고민하고 만들어가는 역할을 한다. 6월에 진행될 영화제를 위해, 1월부터 2~3개월간 성소수자, 노동, 환경, 평화, 여성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세미나를 함께 진행하고, 상영작도 함께 선정한다. 이 과정 자체가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인권운동의 하나이다.

 

서울인권영화제라는 이름을 듣고, 1년에 한 번 열리는 영화제의 이름으로만 생각했다

레고 |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다. 서울인권영화제는 영화를 통해 인권운동을 하는 인권운동단체다. 1년에 한 차례 영화제를 치루는 것이 가장 큰 활동이지만, 표현의 자유와 누구나 인권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을 위한 다양한 인권운동을 벌이고 있다.

 

벌써 23번째 영화제를 앞두고 있다. 서울인권영화제가 걸어온 길을 간략하게 소개해준다면?

레고 | 1996년 시작한 서울인권영화제는 원래 인권운동사랑방에 속해있던 영화제팀이었다. 당시에는 영화제라는 것조차 드물던 시절이었고, 특히 독립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이다. 1997년 열린 2회 영화제에서는 제주 4ㆍ3항쟁을 다룬 <레드헌트>라는 작품을 상영하고자 했는데, 이 작품이 ‘이적표현물’이라며 상영장이 폐쇄 당했고 집행위원장이 구속, 인권운동사랑방은 압수수색을 당하는 등 탄압을 받았다. 기본적으로 우리 영화제에게는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운동이다. <레드헌트>에 대한 탄압에서 보듯이, 인권영화 상영과 표현의 자유는 뗄 수 없는 관계다. 그 기조는 지금까지도 인권영화에 대한 등급분류를 거부하고 정부와 기업의 후원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이어가고 있다.

다희 | 2008년도 우리 영화제에겐 중요한 시기였다. 2008년부터 상영관이 아닌 거리에서 영화제를 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영비법’)」을 개정해서 등급분류를 받지 않은 영상물을 상영관에서 상영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등급분류를 받지 않은 영화를 상영하면 그 상영관주가 처벌을 받게 법을 바꾼 것이다. 2008년 이전에는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등급분류를 거부하더라도 상영관에서 상영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결국 2008년 영비법의 처벌규정이 신설되고 난 뒤, 표현의 자유를 지키고, 누구나 인권영화를 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영화제의 원칙에 부합하는 공간이 어디일까 고민하다 거리로 나오게 되었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 정부나 기업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 재정적으로는 어려운 상황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재정운영은 어떻게 하고 있나?

레고 | 아주 가끔 소액의 비영리 목적 기금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거의 100% 개인 후원활동가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현재 320여 분의 후원활동가분들이 후원을 해주시고, 매월 270만 원 정도의 후원금이 들어오고 있다. 이 재정으로 사무실 월세와 최저임금의 50% 가량 밖에 안 되는 상임활동가 상근비를 충당하고, 남는 돈으로는 빚을 갚는다. 영화제를 한 번 치루고 나면 음향, LED스크린 대여, 기념품 제작 등에 들어간 빚이 생기는데 매월 후원금을 모아 아주 조금씩 갚아나가는 식이다.

 

영화제 상영작을 선정하는 기준과 과정도 중요할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레고 | 기획전에 포함되는 영화나 해외작품의 경우 따로 섭외를 하기도 하지만, 국내작의 경우 대부분 공모를 받아 결정한다.  상영할 작품은 상임활동가와 자원활동가가 수개월간 함께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결정된다.

다희 | 상영작을 선정할 때는, 영화가 갖고 있는 형식에는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 그보다는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간혹, 영화의 내용과 전혀 무관하게 상영 여부를 판단할 때도 있다. 그 영화를 둘러싼 사회적인 지형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가령 우리 단체는 이스라엘에 대한 BDS운동에 동참하고 있는데, BDS운동의 취지에 따라 영화 내용과 무관하게 상영을 취소한 적도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BDS운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소개해준다면?

다희 | 이스라엘에 대한 BDS운동은 이스라엘 제품이나 기업, 문화생산물에 대한 “Boycott(불매), Divestment(투자철회), Santion(제재)”운동을 뜻하는데,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팔레스타인 민중이 세계에 호소하고 있는 운동이다. 영화제와 관련지어 설명하자면, 현재의 점령 상황을 희석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거나, 이스라엘 정부 또는 정부가 관여하는 기관의 지원을 받은 영상물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재정적, 정책적으로 성소수자에 관한 영화나 행사를 많이 지원한다. 성소수자 영화 지원을 통해 중동에서 유일한 인권친화적 국가라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화가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상황을 ‘공존’으로 해석하는 등 점령 상황을 미화한다면 역시 상영 거부의 대상이다. 우리가 그런 영화를 상영하게 되면, 이스라엘 정부가 대외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메시지가 세계 어딘가에서 한 번 더 상영된다는 것이고, 결국 이스라엘의 반인권적 행태에 공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울인권영화제의 영화 선정기준은 영화의 내용과 함께, 그 영화를 둘러싼 사회적 지형을 함께 고려한다.

 

오는 6월 6일 마로니에 공원에서 제23회 서울인권영화제가 열린다. 이번 영화제 슬로건이 “적막을 부수는 소란의 파동”인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레고 | 올해는 슬로건을 정하는 데까지 참 오래 걸렸다. 슬로건은 보통 상영작 선정이 끝난 후 상임활동가와 자원활동가가 모여 상영작들의 분위기와 현재 한국사회를 나타낼 수 있는 것으로 고르곤 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슬로건을 결정할 때 아주 선명한 문제의식이 있었다. 가령 정부가 동성애에 반대한다면 뚜렷하게 그에 저항하는 슬로건이 나오는 식이다. 그런데 올해는  다들 무엇이 문제인지 선명하게 이야기하기 어려웠다. 인권과 관련한 문제는 여전하고, 오히려 더 후퇴하고 있는데도 사회적으로는 마치 모든 것이 평화롭고 행복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명 문제가 존재함에도 그것을 이야기하기 어렵게 만드는 현실을 ‘적막’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또, 그 적막을 부수어야 한다는 것에 활동가들의 공감이 있었고,  그것을 부수는 행동의 양상을 ‘파동’으로 표현했다. 파동이라는 것은 그 속성상 서로 만나면 더 커지기도 하고, 다른 모양으로 번져 나가기도 하지 않나. 파동과 같은 소란이 모여 지금의 적막을 부수어 보자는 취지다.

다희| 적막은 현재 정부의 태도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혐오를 ‘장난’이나 관행으로 치부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적막이라는 상태는 누군가 소란을 일으키기 전에는 매끈하고 평상적인 상태인 것처럼 보이는데, 한 예로 미투운동은 이런 적막을 깨는 큰 소란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소란들이 개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파동이 서로 만나 커지는 것처럼 서로 연결되는 것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슬로건에는 개별적인 것처럼 보이는 소란들이 서로 만나 연대해 이 사회의 적막을 부순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사진=서울인권영화제>

 

개막작은 용산참사 그 이후를 다룬 <공동정범>이다. 개막작으로 선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레고 | <공동정범>은 이번 영화제에서 개막작인 동시에, ‘투쟁의 파동’이라는 섹션에 포함되어 있다. ‘투쟁의 파동’ 섹션은 투쟁의 과정에서 생기는 관계의 변화에 주목한 섹션이다. 사람들은 흔히 투쟁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면 너무나도 쉽게 그 투쟁을 ‘망했다’고 표현하는 것 같다. 하지만 용산참사 이후 철거민들의 감정과 갈등을 다룬 <공동정범>을 통해 투쟁이 만든 관계의 변화가 결국 다시금 그 투쟁으로 매개된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같은 섹션의 <바위처럼> 역시 남아프리카공화국 마리카나 지역의 투쟁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관계의 변화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다희 | 이런 관점은 이번 영화제의 슬로건과도 연결된다.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끄집어 내어 이야기해보자는 것이다. 투쟁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다뤄져 왔지만, 투쟁 안에 있는 갈등을 드러내고 이야기하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개막작 외에 더 소개해주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레고 | 폐막작인 <잇다, 팔레스타인>이란 영화를 소개하고 싶다. 올해가 나크바 70주년이다. 나크바는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침공하면서,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추방당한 사건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침 오늘이 ‘나크바의 날’이다(인터뷰 날짜는 5월 15일이었다). <잇다,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에 살지는 않지만 팔레스타인 민족 정체성을 가진 12명의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잇다, 팔레스타인>에 등장하는 팔레스타인 여성들은 팔레스타인 전통 자수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지키고 증명한다. 자수를 하는 행위가 곧 그들이 팔레스타인 정체성으로 존재하는 방식이고 일종의 저항이기도 하다.

다희 | 모든 영화가 중요하지만, 꼭 한 두 작품을 소개한다면, ‘제주 4ㆍ3 70주년 특별전’ 섹션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을 소개하고 싶다. 어떤 사건이 이야기될 때, 그 현장의 많은 사람들은 주로 남성으로 대표된다. 제주 4ㆍ3의 경우에도 당시를 증언했던 화자는 주로 남성이었다. 4ㆍ3 특별전을 준비할 때, ‘피해는 여성에게 굉장히 다른 양상으로, 크게 작용했는데 이야기하는 사람은 왜 항상 남성일까’라는 고민이 있었다. 그래서 4ㆍ3에서의 여성은 어땠는지 그리고 그 당시를 여성이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고 싶었다. 이 섹션에서는 영화가 끝나고 ‘광장에서 말하다’라는 한 시간 가량의 프로그램도 진행해, 함께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장이 마련될 예정이다.

 

영화제가 끝나면 하반기에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나?

레고 | 하반기에는 월 1회 주기로 진행하는 정기 상영회에 집중하고 있다. 정기 상영회는 주로 실내 공간을 대관해서 진행하는데, 가끔은 투쟁의 현장에서 직접 상영하기도 한다. 작년에는 젠트리피케이션을 다룬 영화를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고 있는 해방촌에서 상영했다.

다희 | 정기 상영회 외에는 상영지원 활동을 한다. 영화제를 통해서는 1~2회 상영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 때를 놓쳐 영화를 보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모임이나 단체 등으로부터 상영지원 신청을 받아 영화제에서 상영했던 작품을 제공한다. 각 지역 인권영화제나 인권교육을 하는 모임 등에서 신청이 많은 편이다. 작년에는 여성인권과 관련한 작품을 많이 상영했다.

 

활동하면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

레고 | 돈이 없다는 것 아닐까. 재정적으로 조금만 더 여유가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 같다. 특히 상영지원이 가능한 작품을 늘리기 위해서는 아카이빙 비용이 필요하다. 1~2회 상영하는 상영 비용에 비해 작품을 보관하고 재상영할 수 있는 아카이빙은 그 비용이 더 많이 든다. 감사하게도 아카이빙 비용을 받지 않으시고 작품을 맡겨주시는 감독님들도 계시지만, 해외작의 경우 대부분 배급사에 아카이빙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상영했던 작품은 한글자막, 수어통역, 화면해설 등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아카이브가 커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더 쉽게 인권영화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다희 | 덧붙여서,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장애인 접근권에 대한 활동을 더 벌이고 싶다. 서울인권영화제는 한글자막, 수어통역, 화면해설을 영상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 외에도 영화제 현장에 활동 보조를 지원하고, 점자 리플렛을 만들거나, 휠체어 이동경로를 약도에 넣는 등 영화제를 거듭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더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제가 끝나면 장애인 접근권 보장을 위한 가이드북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한다. 영화에 대한 접근권은 물론이고, 어떤 행사에서든 장애인 접근권을 위해 참고할 수 있는 가이드북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여력이 없어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활동계획은 무엇인가?

레고 | 앞서 이스라엘에 대한 BDS운동에 동참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다. 더 많은 문화운동 단체가 이 운동에 동참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문화운동에서 참고할 수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BDS운동 가이드북을 만들고 싶다.

다희 | 인권영화제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다른 단체들과 공유하고 싶다. 서울인권영화제의 자원활동가 모임이나 장애인 접근권을 위한 활동에 관심을 주시는 분들이 많다. 우리 또한 영화제를 할 때 마다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 늘 고민한다. 인권운동을 하는 단체가 서로의 운동 과정을 공유하다 보면 보다 민주적이고, 장애인 접근권이 보장되는 활동을 해나가는 데 서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레고 |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영화제에 많은 분들이 와주시고, 영화를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꼭 와주시길!

금, 2018/06/01-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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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정보위원회 소식

 

– 디지털정보위원회 송아람 변호사

 

회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따스한 햇볕이 곧 다가올 봄을 기대하게 만드는 2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계속될 것 같던 추위도 어느덧 지나가며 봄이 오는 것처럼, 적폐를 청산하고 새 시대를 만날 희망이 움트는 시기입니다.

디지털정보위원회는 위원회 내부 역량을 강화하여 산적한 현안에 대응하고자 지난 1월 12일에 있었던 1월 월례회에서 위원회 내부 스터디·IT 전문가 초청 강연·각종 현안에 대한 발제를 골자로 하는 2017년 주요 내부 사업계획들을 통과시켰습니다. 그에 따라 지난 2월 2일에 진행된 2월 월례회에서 김우중 위원의 “공인인증서의 문제점” 발제, 윤영태 위원의 “‘단통법’의 문제점” 발제로 우리 생활 속 깊게 자리 잡은 정보인권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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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김하나 위원의 위원회 소관 판례동향 발제, 이광철 위원장의 디지털증거의 증거능력 관련 하급심 판례 발제, 조지훈 부위원장의 위원회 소관 법률에 대한 발제가 이어지며 밀도있는 월례회를 마쳤습니다.

아울러 위원회에서는 사업 진행과 공부뿐만 아니라 위원들의 친목 도모와 단합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3월 중으로 경기도 인근에서 1박 2일의 MT를 진행할 예정으로, 이 글을 보시는 회원분들께서 함께 와주시면 더욱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빈번한 개인정보의 유출부터 국가기관의 사찰의혹까지, 정보인권의 문제는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디지털정보위원회는 정보인권을 옹호하는 전문가들의 모임으로 인권옹호의 새로운 영역을 함께 개척하실 신입 회원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민변의 미래가 될 디지털정보위원회에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가입 부탁드립니다.

수, 2017/03/08-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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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위 성주 방문기

미군위 에서는 지난달 정부의 사드배치 결정 이후, 사드 배치지역으로 지목된 성주의 상황을 살펴보러 대구와 성주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민주노총 대구지부에 방문하여 민주노총 위원들과 면담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사드 배치 반대 대구경북 대책위원회 집행위원회 결과보고’를 1부씩 받았습니다. 성주지역 사드 반대 투쟁 상황과 대구 경북지역 단체들의 조직상황, 지원 상황 등에 대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위원들은 현재 보수 매체들에 대한 언론대응이 가장 절실히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성주 시내에서 민변 대구지부 류제모 변호사님과 면담 시간을 가졌습니다. 황교안 총리 방문 때 일로 인해 조사받고 있는 군민들에 대한 근황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성주 군민들 중 민변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민변 명의가 아닌 류제모 변호사님 명의로 법률지원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대구변호사협회와 인권위원회 변호사들도 협조하여 법률지원을 할 예정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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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는 여기저기 사드반대 현수막이 매우 많이 걸려있고, 점포 창문에도 사드반대 포스터 등이 붙어 사드 배치 반대에 대한 주민들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녁에 성주군청에서 사드반대 대책 위원회 위원장 및 청년분과장과 사드배치 반대위원회 위원들과의 면담을 했습니다. 모두들 민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대책위원회는 예전부터 조직되어있던 농민회가 주축이 되고 있으며, 각종 시민단체들의 연대가 잘 이루어져 사드 배치 저지를 위한 든든한 조직이 되었다고 합니다.

방문 당시 성주 군민들은 ‘백악관 10만 서명운동’의 성패 여부를 사드배치 저지 성공의 첫 단계로 여기고 있다고 했는데, 당시에는 참여율이 저조 했지만, 이번 주 10만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주군민들이 다시 한번 힘을 얻고 나아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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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들과의 면담이 끝난 후, 성주군청 앞 촛불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집회에는 약 1000명 정도의 군민들이 참석했고, 밀양 주민들이 방문하여 송전탑이 건설됐을 때의 주민들의 심정과, 밀양과 성주 주민들간의 협력의 필요성 등을 호소하고, 성주군민들이 크게 호응해 주었습니다. 또 인터넷 BJ로 유명한 망치부인도 이번 집회에 참석해서 집회 전 실시간 방송을 하고, 집회 때 연설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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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배치를 저지해야 한다는 결의를 한 뒤에, ‘농민가’를 다같이 부른 후 간식으로 건빵을 받고 군민들은 해산했습니다.

앞으로도 힘들고 먼 여정이 되겠지만, 사드 배치를 꼭 저지하겠다는 국민들의 열의를 확인 할 수 있는 유익한 기행이었습니다.

금, 2016/08/12-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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