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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고 든든한 ‘울 언니’ 같은 위은진 변호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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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고 든든한 ‘울 언니’ 같은 위은진 변호사를 만나다

익명 (미확인) | 금, 2017/01/2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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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어도 따뜻한 기억으로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 기억만으로도 온기가 전해지는 사람. 균형감각과 여유, 그리고 온기를 동시에 가지면서도, 술도 세고 스피드를 즐기는 반전 있는 멋진 여자, 위은진 변호사님을 만나기 위해 잰걸음으로 사무실을 찾았다. 2년 연속 큰 상을 받았다고 하니 그 신공이 궁금하기도 하고! 자랑스러운 민변의 울 언니, 어디 한 번 만나 볼까요?

이혜정(이하 이): 2015년 첫 번째 사회공헌대상을 수상하신데 이어 2016년에는 변호사공익대상까지 수상하셨네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먼저 간단한 소개 부탁드릴게요.

위은진 변호사(이하 위) : 감사합니다. 저는, 기수는 31기이고 위은진입니다.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드려요. 상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제가 변호사로 활동한 기간이 길고, 지속적으로 했기 때문에 주신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는 변협 산하 이주민이나 외국인 관련 위원회 활동 위주로 공익활동을 했기 때문에, 변협 입장에서 다른 변호사들보다 제가 활동하는 게 더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이 사람이 계속해서 활동을 하고 있구나’ 해서 남들보다 쉽게 보이는 위치에 있어서 받은 상 아닌가 싶어요.

: 이주민과 관련된 공익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 이주민 관련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처음엔 사업적인 이유였어요. 초보 변호사로 막 개업한 이후에 앞으로 시장 상황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고, 일반적인 변호사 업무 외에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 라고 생각하다 찾은 게 이민에 관련된 업무였거든요. 한국에서 미국, 캐나다 등으로 이주하려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사업도 괜찮을 거 같은데, 아직 변호사들이 이 분야에서는 활동이 많지 않구나, 내가 한 번 해보자, 이런 식으로 이주민 관련 업무를 시작했죠.

처음엔 우리가 이민을 보내는 나라인줄로만 알았지 우리나라로 이민을 오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몰랐거든요. 그런데 이주노동자나 이런 분들은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 위치에 있어서 인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오히려 들어오는 이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니 이분들이 경제력이 없었어요. 법률 상담은 물론이고 변호사라는 사람을 한국에서 처음 만난 거죠. 돈이 없으니까 만날 생각도 안 했었고. 굉장히 작은 일에서부터 한국 법을 모르니까 무조건 불이익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자기가 받는 부당한 처우에 대해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사업으로, 영리목적으로 이 사람들을 만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영리 목적으로 일을 할 만큼 잘 하거나 잘 아는 것도 아니었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이주민들을 만나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듣고, 돌아오면 다시 공부를 했어요. 법전도 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그런데 혼자 공부하는데 한계가 있잖아요. 공부를 하려고 해도 하다못해 참고할 책도 없었고요. 그때 판례 등을 공부하기 위해서 법률신문, 대한변협신문 같은 것들을 굉장히 열심히 봤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대한변협신문에서 UN 이주노동자 권리협약 비준을 준비하는 공청회가 있다는 기사를 봤어요.

이 기사를 스크랩해놓고, 기사에 위원장으로 나온 변호사님한테 그냥 전화를 했는데, 그 변호사님이 그렇게 연락이 잘 안 닿더라고요. 제가 좀 끈질긴 구석이 있거든요. 그래서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점심 먹고 전화를 했어요. 메모도 남겨놓았는데 리턴 콜이 잘 안 되더라고요. 결국 ‘오늘도 연락이 안 되면 포기해야겠다’고 맘먹고 전화를 했는데, 그날 전화 연결이 된 거예요.

제가 ‘공청회를 같이 준비하고 싶다’고 하니까 간사변호사를 통해서 연락을 주겠다고 하셨어요. 그때 간사변호사가 황필규 변호사였어요. 그렇게 공청회 준비를 같이 하기 시작해서 12월에 공청회를 치르고, 처음으로 UN 이주노동자 권리협약을 소개하는 책자도 만들었고요. 그때 참여했던 사람들이 외부 토론회 등에 발제자, 토론자로 활동하면서 관심을 환기시켰던 거죠. 공청회 때도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오셨고, 국회 보좌관들이 관심을 갖기도 하고 그랬어요. 물론, UN 이주노동자 권리협약은 아직도 비준이 안 되긴 했지만.

이 공청회 준비를 통해 변호사들 중에 이주민 활동을 하시는 분들을 처음 만났어요. 황필규 변호사님이 공감에 계시잖아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공감에 있는 회원들하고 일을 많이 하게 됐어요. 소라미 변호사님은 이주여성 관련 활동을 하시고, 장서연 변호사님도 이주노동자 관련 일을 하시고. 이런 식으로 공감의 그룹과 조금씩 같이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그분들이 100% 하실 때 저는 10%, 20% 일을 늘려 나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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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사업으로 이주민 업무를 시작하시다가 변협 활동으로 그 폭을 넓히셨는데, 그러면 민변 활동은 어떤 식으로 시작하시게 된 건가요?

: 처음에 어소로 변호사를 시작할 때 대표가 “민변 이런 데 가입하면 안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저는 당시 민변을 잘 몰랐는데, 이때 ‘민변’이라는 단체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웃음)지금은 창원에 계신 손명숙 변호사님이 제가 막 개업하던 그 즈음에 회원팀으로 활동하고 계셨는데, 손변호사님이 저한테 밥이나 한 번 같이 먹자고 하셨어요. 옆 건물에 있는 여자 선배가 밥을 먹자고 하시니까 당연히 먹었죠. 그렇게 그날 밥을 얻어먹었어요. 비싼 건 아니지만. 밥을 사주시면서 ‘민변에 가입하는 게 어떠냐’고 하시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고, 제가 친했던 분들 중에 민변에 이미 가입하신 분들도 많아서 ‘알았다’고 대답했죠. 활동은 바로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고, 그때는 제가 돈을 좀 벌 때였으니까 회비 10만 원도 낼만한 것 같고요. 아무 생각 없이 회비회원으로 가입했던 거죠. 그러다 이주민 활동을 하면서 공익활동을 더 하게 됐는데, 변호사 5년차를 지나던 즈음에는 ‘내가 돈 벌려고 변호사 됐나?’ 그런 고민이 밀려왔어요. 그런데 공익활동을 하고 싶다고 해도 이런 활동을 혼자 막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던 차에 민변이 공익활동을 한다고 하니까 2006년에 처음으로 여성인권위원회 송년회에 갔어요. 처음 자기소개를 하면서 ‘가입한지는 조금 됐는데, 공익활동을 더 활발하게 해보고 싶어서 송년회도 왔다’고 했더니 선배들이 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러시더라고요. 이제부터는 민변 활동을 좀 더 하겠다고 했더니 여성인권위원회 빈곤노동팀 김진 변호사님이 바로 전화를 하셨어요. 그래서 빈곤노동팀에서 스터디를 시작했고, 그러면서 민변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여성인권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점차 민변 활동을 하게 됐고, 이후 사무차장으로 활동하면서 제가 민변 성원이라는 걸 더 느꼈던 거 같아요. 여성인권위원회 할 때는 여성 인권에 관심 있는 변호사들의 모임이라고 느꼈다면, 사무차장을 하면서는 민변 전체가 활동하는 모습이 보이니까 제가 ‘정말 민변 회원, 성원이구나’ 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 남편인 김차곤 변호사님도 민변 회원이시잖아요. 요즘 노동위 뿐 아니라 특위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 그 유명한 민변 내 김&김 변호사님! 김차곤 변호사님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어요?

: 제가 96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무작정 고시공부를 한답시고 신림동으로 간 적이 있었어요.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 상황이라 진짜 열심히 공부했어요. 내 인생에서 제일 공부를 열심히 했던 시절이었죠. 1차 시험에 막 합격한 뒤에 독서실 총무 중에 한 분이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걸 눈여겨보고 저한테 스터디를 같이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때가 공부 시작한지 2년째였는데, 2년 동안 혼자 공부를 하니까 정말 폐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전공이 문과가 아니라 그때까지만 해도 글을 길게 쓰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어요. 그러던 중에 누가 스터디를 같이 하자고 한 거예요. 그때 그 분이 데려온 멤버가 저희 남편과 몇 명이었어요.

남편하고는 처음엔 그냥 스터디 내에서 좀 친한 오빠동생이었어요. 둘 다 지구과학에 관심이 있고, 스포츠도 좋아하고 해서 말이 잘 통한다고 느껴서 친해졌죠. 그러다 2차 시험을 치르고 결과가 발표됐는데 남편은 떨어지고 저는 붙은 거예요. 전화를 했더니 남편이 “너는 붙고 난 떨어졌는데 술이라도 한 잔 사야하는 거 아니니” 그러더라고요.

일주일 후에 만나서 술을 마셨는데, 마시다 보니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뭔가 분위기가 묘한 게 거기 더 있으면 안 될 거 같더라고요. 그런데 남편이 그때 저한테 “시험에 떨어진 건 괜찮은데 앞으로 널 못보는 게 너무 맘이 아프다”고 하는 거예요. 아 이 소리를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웃음). 저는 붙고 오빠는 떨어지니까 안쓰럽고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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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러면 딱 한 달만 만나보자”고 제안을 했고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네 번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런다고 없는 감정이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한 달 뒤에 “내가 특별히 감정이 안 생긴다”고 솔직히 말하고는, 둘이 소주를 세 병을 마시고 헤어졌어요. 그때 남편은 한 달 후에 1차 시험 봐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집에 돌아오고 나니 ‘이러다 그 오빠 한 달 후에 시험 못 보면 어떡하지? 시험 볼 때까지만 만나야 하나?’ 그런 걱정이 또 막 드는 거예요.

결국 ‘다시 한 달만 더 만나고, 시험 끝나고 결정하자’고 맘먹고 한 달을 더 만났어요. 그러고 나서 한 달 후에 남편이 1차에 또 떨어졌네? 그래서 당시 남편은 바로 취직하고, 저는 연수원에 들어갔는데 연수원에 남편 아는 사람들이 “어머 너 누구랑 사귄다며?” 이러는 거예요. 저는 그냥 오빠 동생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런 식으로 남편하고도 연애를 못하고 연수원에서 누굴 만나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시간이 흘러흘러 여름이 됐어요. 같은 조 사람들하고 지리산을 가기로 하고 남편한테 얘기했더니 “처음 맞는 휴가인데 어떻게 딴사람들이랑 갈 수 있냐”고 자기랑 지리산을 가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조 사람들이 아닌 둘만 따로 지리산에 갔는데, 그 날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거에요. 산에 다 오르지는 못하고 산장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자게 되었는데, 아침에 남편이 저를 깨우는데 이마를 손가락 하나로 톡톡 치면서 깨우더라고요. 그때 사람이 되게 깔끔한 거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웃음) 또 내려갈 때 비가 갑자기 쏟아져서 계곡물이 불어났는데 남편이 저를 보호하면서 건너게 해주더라고요. 지리산에 갔다 온 후로 이 사람 좀 괜찮은 거 같다, 그런 생각이 조금씩 들었어요.

문제는 저는 첫눈에 반한 건 아니더라도 불꽃같은 연애를 하고 싶단 로망이 있었는데, 저희 남편하고는 너무 평탄한 관계가 쭉 이어졌다는 거예요. 남들이 공인한 남자친구는 늘 있는데 우리 둘은 너무 뜨뜻미지근하고. 계속 “이렇게 해서 결혼까지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뭔가 매듭을 짓겠다고 생각을 하고 밤에 전화를 해서 헤어지자고 했죠.

그랬더니 남편이 “그럼 그건 내일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더라고요. 다음날 만났더니 저희 남편이 결혼하자고 하는 거예요. 난감하잖아요? 바로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그래서 ‘그럼 한 시간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카페에서 나와서 한 시간 동안 같이 산책하면서 한 마디도 안 하고 각자 생각을 했어요. 이 사람하고 결혼을 했을 때, 아니면 이 사람하고 헤어지고 딴 사람하고 연애를 할 때, 시나리오를 계속 생각해봤어요.

지금 불꽃같은 연애를 못하지만, 이 사람하고 결혼하면 죽을 때까지 평온하게 살 거 같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내 성격을 봤을 때 불꽃같은 연애에 휘말리는 일은 없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한 시간쯤 산책하면서 생각하다 ‘불꽃같은 연애는 이 생에는 틀렸다, 다음 생에 태어나서 하자’고 결정하고 ‘결혼하자’고 대답했어요.(웃음)

: 두 분의 연애 이야기 너무 재밌네요. 너무도 평온하면서도 살짝 심쿵하면서도 애뜻한 느낌도 있고. 그런데 그런 두분 실제 결혼하고 나서도 진짜 평온하신가요? 두분 싸우실까요?

: 실제로 지금도 잘 안 싸워요. 결혼하고 한 번도 안 싸우다가 이라크 파병 때 의견이 서로 달라서 한 번 싸웠나. 그 정도?(웃음). 그리고 제가 남편에게 배운 것이 제가 약간 욱하는 성격도 있는데 그 때 남편이 ‘어떻게 가족에게 화를 내냐’고 그 말을 듣고는 반성도 했어요. 정말 처음에 남편을 만날 때 ‘이 사람과 결혼하면 정말 평온하게 끝까지 함께 살 것 같다’ 그런 느낌이 있었는데, 실제 그랬어요.

: 와 ‘어떻게 가족에게 화를 내냐’. 전 가족이라 화 더 많이 내는데…반성되네요(웃음). 김차곤 변호사님 정말 멋있으시네요! 변호사님은 제가 옆에서 보기에도 변협 활동도 많이 하시고 민변 활동도 정말 많이 하시고 계시는데..이렇게 활발한 공익활동과 생계이자 직업으로서의 송무의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지는 않으신가요? 공익활동을 하기엔 시간이나 여건이 안 되는 젊은 변호사들도 많은데, 조언을 좀 해주신다면?

: 이런 얘기를 하게 되면 사실 후배 변호사님들한테 되게 죄송해요. 어쨌든 저는, 시장 상황이 나쁘지 않아서 제가 그냥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면 생계를 유지하는 것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 변호사 일을 시작했거든요.

저는 2002년에 어소로 변호사를 시작했는데, 남들보다 좀 빨리 개업을 했어요. 연수원 다닐 때부터 개업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연수원에 있을 때 선배 언니들에게 ‘개업할 때 꼭 나랑 같이 하자’ 라고 해놨거든요. 사실 주변 교수님들이나 선배들은 젊은 여자변호사가 개업을 한다는 걸 되게 불안해하시더라고요. 교수님도 내심 걱정이 되셨는지, “어디 인터뷰 있다더라, 가봐라” 이러시면서 취업 자리도 알아봐주셨고. 그래서 어소로 취업을 한 다음 어쨌든 1년여 정도 기본 업무를 배운 게 당시 개업하려던 저한테 굉장히 도움이 됐던 거 같아요.IMG_7356

연수원에 같이 있었던 선배 언니들 중에 저하고 비슷하게 한 1년 정도 어소 변호사로 활동하다 개업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언니가 있었어요. 그 언니가 개업을 준비하면서, 제가 항상 “개업하려면 저 좀 껴주세요”라고 얘기하고 다녔던 걸 생각해내고는 저하고 같이 개업할 생각을 한 거예요. 그 선배 언니가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서 갔더니 대뜸 “사무실을 보러 가자” 그래서, 2002년 12월에 어소 변호사로 1년을 채 안 채우고 전격적으로 개업을 하게 됐어요.

제가 변호사가 되었던 시점이, 여성 변호사가 다 합쳐 100명을 막 넘긴 상황이었어요. 변호사 시장 상황도 나쁘지 않았고, 여성 변호사라는 점도 사건 수임하기에 나쁘지 않았어요. 여성 변호사라는 것 때문에 찾아오시는 분도 있었고요. 그리고 굉장히 열심히 성실하게 일을 많이 했죠. 저는 한 번도 사무장한테 상담을 시켜본 적이 없어요. 제가 처음 개업했을 때는 거의 매일 밤 11시까지 일했고, 휴가도 딱 세 번 갔고. 그런데 지금은 시장 상황이 달라졌으니, 어떻게 보면 이런 말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얘기에요.

2005년~2006년 즈음에는 제가 변호사 5년차가 되면서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한 시기였어요. 많이 벌어서 많이 쓸 건지, 적게 벌어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건지에 대해서요. 제가 변호사 일을 하면서 많이 벌어서 명품 가방 같은 것들 사고, 만족감을 느끼고 그런 생각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가방을 사도 좀 지나면 그 가방이 그 가방이다 싶고, 결국 적게 벌더라도 원하는 일을 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리게 됐죠.

이주민과 관련된 공익 활동을 시작할 때에는 그 분들이 경제적 능력이 없어서 일단 내가 무료로 하거나 소송 구조를 받아서 변호를 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10년 후에는 이분들이 상황이 나아져서 고객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죠. 의뢰인들 중에 작은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사건을 마무리할 때 헤어지면서 “당신이 성공하면 꼭 나를 고문변호사로 선임해달라”고 인사하기도 하고요. 제가 많지는 않지만 외국인 사건을 계속 하다 보니 실제로 돈이 있는 분들도 소문을 듣고 유료로 사건을 맡기시는 분들도 계세요. 이태원 커뮤니티에 제 연락처가 알려져 있대요. “어떻게 오셨냐” 물으면 이태원 커뮤니티에서 제 연락처 보고 왔다고 답하시는 분들도 있고.IMG_7349

지금은 사건을 좀 가리게 되기도 해요. 다시함께센터에서 성매매 여성들을 도운 적이 있는데, 그 반대의 업무를 맡기시면 거절하기도 하죠. 사건 내용을 들어봤을 때 무죄일 것 같은 경우에는 맡기도 하지만 제가 듣기에 처음부터 좀 아니다 싶은 사건들은 안 맡아요. 가령 “저는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많이 대리하는 변호사이기 때문에 선생님 사건을 맡는 건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고 설명하거나, 제가 보기엔 무죄가 아닌데 무죄를 주장하시는 경우엔 “방향이 맞지 않아 제가 적절한 변호를 제공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면 그분들이 알아서 저를 변호인으로 선임하지 않기로 결정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공익활동을 하다 보면 그것도 변호사 업무잖아요? 변호사는 결국 사람을 많이 만나고, 네트워크를 통해서 사건이 생기기도 하니까요. 저는 오히려 공익활동을 2006년부터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시간을 내서 10%, 20%, 나중엔 50%까지 공익활동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조율하고 있어요.

: 마지막 질문이에요. 민변을 전혀 모르고 회비 회원으로 가입하시다가 지금은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시잖아요. 변호사님에게 민변이란,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IMG_7347

: 뭐랄까, 마음이 되게 편해지는 공간이에요. 함께 활동하는 변호사님들도 항상 감사하고 존경하는 분들이고. 누가 ‘존경하는 변호사가 누구냐’고 물으면 전 항상 민변 변호사님들이라고 대답해요.

제가 민변하고 결이 굉장히 다른 변호사님들하고도 잘 지내는 편이에요. 그런데 그 분들이 나중에 제가 ‘저 민변이예요’라고 했을 때 깜짝 놀라시는 분들도 있어요. 저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민변 변호사에 대한 변호사 내의 편견들이 좀 있는 거 같아요. 선거 같은 게 있으면 저한테 도와달라고 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었는데, 한 번은 “저 민변에서 사무차장을 하고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되물었어요. 그랬더니 그 분이 “아 그럼 안 되겠네?” 하시는 거예요. 민변하고 꽤 친한 편이신 분인데도 그랬어요. 그때 정말 ‘민변에 대한 변호사들의 편견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어떤 변호사님들은 변협 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민변에 대해 제 앞에서 노골적으로 욕하시는 분들도 있었고요. 어떨 땐 ‘내가 그렇게 민변 티가 안 나나?’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는데.(웃음)

그래서 제 역할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민변에 대한 편견을 깨는 것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해요.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저는 민변 선배들 다 존경스럽고 대단하다,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 분들 많지 않다”고 얘기하기도 해요. 제가 다른 데서도 일해 봤지만 민변처럼 일을 펑크 내지 않고 열심히 해주시는 분들이 없어요. 회원들끼리 서로 사정을 아니까 서로 “이번엔 제가 할게요”라고 적극 나서주고. 정말 일하는 모습, 평소 행동이 선배든 후배든 다 존경스러워요.

그래서 저에게 민변은 점점 더 애정도 가고, 내가 편하게 마음을 둘 수 있고, 얘기할 수 있고, 존경하는 분들이 계시고 그 분들과 함께 일하는 것 자체가 기쁜 그런 곳이에요. 여기서 만나는 선배님들, 동료, 후배님들, 밖에서 만나도 한 식구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너무 애정을 듬뿍 담은 대답이었나?(웃음)

: 애정 어린 말씀 너무 감사드려요. 다시 한 번 막강한 후보를 제치고 큰 상을 받으신 거 정말 축하드리고, 이렇게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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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5월 17일,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는 국제 질병 분류에서 정신질환으로 분류되던 동성애를 제외했다. 이를 기념하며 5월 17일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Transphobia and Biphobia로 지정되었다. 31번째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이하며,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의 사무국장이자 사업운영팀장인 보통 활동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Q. 안녕하세요, 보통님과 띵동에 대한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에서 활동하는 보통입니다. 제가 활동하고 있는 띵동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위기를 지원하는 센터에요. 청소년 성소수자에게는 다양한 위기가 있습니다. 성적 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이유로 따돌림이나 가정 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요. 정체성이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내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생길까’ 라는 두려움 때문에 불안하거나 우울감이 높은 경우도 많고요. 그 외에도 진로나 대인관계 등 청소년으로서 겪는 여러 고민과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띵동은 어떤 종류이든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 청소년 성소수자가 있다면 이들을 만나 상담과 위기 지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의 보통 활동가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의 보통 활동가

Q.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더 이상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 이 힘든 시기를 넘기고 같이 살아가자는 마음을 모아 시작되었어요.

띵동은 2013년에 모금을 시작해서 2014년 겨울에 개소했어요. 띵동이 왜 모금을 하면서 시작되었는지 혹은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전문적인 센터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궁금한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다른 사회 집단들도 그렇듯) 성소수자도 자신들만의 커뮤니티가 있고, 이를 통해 서로 교류하면서 친밀하게 지내요. 수십 년 전부터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은 너무 많은 친구와 동료, 지인들의 안타까운 선택을 목격한 아픔이 있어요. 이로 인해 우울에 빠지기도 하고요. 그중에서도 특히 10대의 자살 위기가 높아요. 실제로 10대에 자신의 친구를 떠나보낸 경험도 정말 많고요. 10대 성소수자의 정체성이 밝혀졌을 때, 주변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움받을 곳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동안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성소수자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많이 애썼지만, 그럼에도 죽음으로 떠나보낸 청소년 성소수자가 많았어요. 띵동이 개소하기 전에도 소중한 청소년 한 명을 잃었습니다. 그때 더는 안 되겠다며 성소수자 인권 단체들과 이런 위기에 공감한 여러 사람이 모여서 모금 활동을 시작한 거죠. ‘우리가 돕자. 상담센터든 쉼터든 뭐든 만들자. 더 이상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 이 힘든 시기를 넘기고 같이 살아가자.’라는 마음을 모아 시작되었습니다.

Q.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정체성이 밝혀졌을 때, 주변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움받을 곳이 없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학생에게 ‘다른 학생들이 너의 특수함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괴롭힘을 감수하라.’며 학교 폭력을 정당화하는 선생님이나 자녀의 따돌림을 걱정하기 이전에 ‘네가 어떻게 성소수자냐. 너를 내 자식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집 밖으로 쫓아내거나 폭력을 가하는 부모님들이 계세요.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이렇게 내몰렸을 때 도움받을 곳이 없는 거예요.

한국에는 청소년 쉼터가 있어요. 청소년들이 집을 나가게 되었을 때 쉼터에 갈 수 있는 제도도 마련되어 있고요. 하지만 찾아온 청소년이 성소수자일 때는 쉼터에서 입소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가정 폭력을 당해서 집을 나왔다고 입소 상담을 했는데, 해당 쉼터에 성소수자가 입소할 경우 다른 청소년에게 해를 미칠 것 같아 입소가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온 적도 있고요. 트렌스젠더 청소년은 성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져 있는 쉼터의 특성상 어느 쉼터를 가야 할 지부터 고민해요. 고민 끝에 입소 상담을 받더라도 우리 쉼터에 못 들어오실 것 같다는 응답을 받기도 하고요.

Q. 쉼터 외의 청소년 센터는 어떤가요? 말씀해주신 쉼터들과 유사하게 청소년 성소수자가 원활하게 이용하기 어려운 상황인가요?

네. 구체적 사례를 인용할 수는 없지만, 이와 관련된 사례가 너무 많이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학교 안에도 위(Wee)클래스 상담이 있고 학교 밖에도 청소년 상담센터가 많이 있으나 복불복이에요. 그건 꼭 청소년 상담 센터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상담 센터도 그렇고요. 어느 센터의 어느 상담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상이해요. 어떻게 문제를 다뤄야 하는지 모르는 상담자들도 많고요. 어떤 상담자는 정체성 이야기만 해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부모님께 연락해 내담자를 아웃팅(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에 대해 본인의 동의 없이 밝히는 행위)시켜요. 정체성에 대한 정보 공개는 본인의 동의와 충분한 확인이 필요한 문제인데 말이에요.

상담자가 혐오 표현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직 어리니까 좀 더 생각해보고 치료를 받아보라’는 혐오 발언을 했던 인권침해적 상담이 띵동에 제보된 적도 있습니다. 이 사례는 해당 청소년의 동의를 얻어 기사화하고 운영 기관에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를 했었습니다. 당시 띵동의 문제 제기로 인해 해당 기관에서 전체 상담자 대상 성소수자 인권 교육이 1회 시행되었는데,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모니터링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청소년쉼터 종사자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는 보통 활동가

청소년쉼터 종사자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는 보통 활동가

Q.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전문 기관의 부재로 생겨난 띵동은 주로 위기 상황에 놓인 청소년 성소수자를 만나는 것 같은데요. 한 해에 대략 몇 명의 청소년을 만나고 상담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궁금합니다.

띵동의 연간 상담 건수는 첫 해 220건에서 매해 점차 늘어나 2020년에는 487건이 되었어요. 이번 2021년은 500건을 넘길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 상담 이전에 카카오톡을 통해 상담 문의나 접수를 하고, 간단한 정보를 나누거나 일상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작년 한 해 2,400건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6명의 활동가가 매일 투입되고 있지만, 활동가들이 상담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캠페인·인권 교육·모금 등 비영리 민간 단체 운영을 위한 전반적인 업무를 함께 하다 보니 소화할 수 있는 상담의 수에 한계가 있어요. 상담 요청과 위기는 많은데 그 건수를 조절하며 운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담은 카카오톡 채널을 이용하여 신청을 해주면 상담 활동가와 일정을 잡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띵동 센터에 방문하셔서 대면 상담으로 진행하는 것을 권해 드리지만, 센터 방문이 어려운 분들을 위해 전화 상담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방에 살고 있거나 부모님의 감시가 있는 청소년 혹은 성소수자 센터에 방문하기 두려운 분들이 주로 전화 상담을 이용합니다. 작년부터는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줌 상담도 추가되었습니다.

Q.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청소년’이자 ‘성소수자’이기에 복합적으로 겪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은데요. 코로나19 이후 가중되는 어려움도 있나요?

(코로나19 이후)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느끼는 고립감도 굉장히 높아졌어요.
일상 공간에 있기만 해도 성소수자들은 외로울 수밖에 없거든요.
진짜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니까요.

기존의 상담 주제부터 말하자면, 띵동의 가장 많은 상담 주제는 정신건강(심리문제)입니다.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가 일상인 사회니까요. 본인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성소수자 혐오 표현이 학교나 가정에서 들리면 상처받게 돼요. 우울감과 함께,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죠.

두 번째로는 가족과의 갈등도 높습니다. 학대도 많이 다뤄지는 주제에요. 진로, 취업, 학업 등도 많이 다뤄지고요. 원래 청소년 상담에서 많이 다뤄지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내가 취업을 할 수 있나? 내가 성소수자인 게 밝혀지면 나는 어떻게 되지?”와 같은 걱정도 가지고 있어요. 진로와 학업에 대한 고민이 더 막막한 거예요. 성소수자로서의 롤모델이 부재하고 자립을 꿈꿀 수 있는 것들이 너무 없어요.

자립 상담도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되자 마자 집을 나가 자립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들이요. 성소수자인 자신을 가족이 받아들여 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많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스무 살이 되자마자 독립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어요. 아니면 연애 고민도 있습니다. 짝사랑 혹은 연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으니까요.

코로나19 이후에는 대면이 어려워져 프로그램을 많이 줄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 건수는 늘어났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가정에서 폭력을 겪을 위기가 증가했어요. 실제로 이로 인한 탈가정 사례도 늘었는데, 코로나19로 청소년 센터들도 이용 인원에 제한을 두다 보니 탈가정한 청소년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나 지원이 줄어들어 위기가 높았던 2020년이었습니다.

성소수자 친구와 카톡을 하거나 전화를 할 때 가족이 보는 등 사생활에 대한 보호가 낮아지니까 아웃팅 위험이 커졌어요. 코로나19로 인해 외출 시마다 동선을 부모님에게 공유하면서 오프라인으로 성소수자 친구를 만나기도 어려워졌고요. 이렇듯 가정 폭력과 탈가정 문제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또래 친구와 어울릴 기회가 줄어들어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느끼는 고립감도 굉장히 높아졌어요. 일상 공간에 있기만 해도 성소수자들은 외로울 수밖에 없거든요. 진짜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니까요. 성소수자 모임을 나가거나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이러한 외로움을 해소해줄 수 있는데, 그걸 못하게 되니까 우울감과 고립감이 높아진 거에요. 코로나19 발생 이후 탈가정과 정신건강, 우울 문제의 상담 건이 굉장히 많이 증가했습니다.

2020-2021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활동보고서 ‘2020년 주요 상담 주제’ (p.12)

2020-2021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활동보고서 ‘2020년 주요 상담 주제’ (p.12)

Q. 청소년 성소수자를 지원하기 위해 띵동이 설립된 지 7년 정도가 흘렀는데, 점차 위기 지원이 필요한 청소년들이 많아진다는 게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요.

말씀하신 내용에 동의하면서도, 저는 다행이다 싶기도 해요. 시간이 흐르면서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의 수가 늘어난 게 아니라, 그동안 도움이 필요하지만 고립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던 청소년이 이제 띵동에게 연락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띵동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청소년이 혼자 고립되어 있지 않고 저희와 연결되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띵동을 모르는 청소년 성소수자들도 많으니까, 더 많이 연결되기를 희망하고 있어요.

Q. 청소년 성소수자를 지원하는 공적영역이 부재한 상태인데요,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국가와 국제사회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성소수자가 우리 시민이자 동료라는 인식이 필요해요. 이 인식에서 시작한 국가와 국제사회의 변화가 필요하고요. 2022년에 ILGAThe International Lesbian, Gay, Bisexual, Trans and Intersex Association라는 협회에서 LGBTIQ YOUTH: Future Present Change를 주제로 국제 컨퍼런스를 개최해요. 현재 청소년 성소수자의 삶과 미래를 주목하고 있는거죠. 국제 사회도 이들이 행복해야 하고, 삶을 유지할 수 있어야 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그래야 하죠. 이미 한국은 UN에게 경고를 많이 받아왔어요. 2019년 9월 유엔아동권리협약의 이행에 대한 제 5·6차 심의에서 한국 정부에게 아동의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고했고 실질적인 정책 시행을 요구했어요. 지금 느린 거죠.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지 10여 년만에 서울시교육청에서 2기 학생인권종합계획성소수자 학생을 보호하고 지원하겠다는 문구를 추가했습니다. 띵동에서 이를 질책하기도 했지만, 응원도 많이 했었죠. 그러나 예산표를 보니, 성소수자 학생 보호 지원 예산이 0원으로 편성되어 있었어요. 단지 명시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해요. 작년과 올해 극심한 트렌스젠더 혐오로 고통받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러고 있으면 안 되죠. 국제 정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이 답답합니다.

2021년 서울시교육청 제 2기 학생인권종합계획에 '성소수자 학생 보호 및 지원'이 포함된 것을 환영하는 현수막을 설치했다. (서울시교육청 정문 앞)

2021년 서울시교육청 제 2기 학생인권종합계획에 ‘성소수자 학생 보호 및 지원’이 포함된 것을 환영하는 현수막을 설치했다. (서울시교육청 정문 앞)

Q. 국가뿐만 아니라 성소수자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시민들, 특히 청소년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시민(앨라이)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일단 앨라이분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어요. 사실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게 대단한 일도 아니고, 칭찬받아야 하는 일이 아닌 게 맞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는 지지한다는 마음조차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요.

일단 앨라이분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어요. 사실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게 대단한 일도 아니고, 칭찬받아야 하는 일이 아닌 게 맞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는 지지한다는 마음조차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요. 그런 사회에서 ‘그래도 나는 앨라이다, 나는 성소수자를 지지하고 관심을 가질 거야’라고 말씀해주시는 분은 성소수자들에게 정말 큰 도움이 돼요.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너무나 위로가 될 테니, 만약 성소수자를 지지하고 계신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알려주세요. 누군가 성소수자 차별적인 말을 할 때 적극적으로 반대해주시는 것도 큰 힘이 되고요.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국민 청원도 계획 중에 있으니 많이 동참해주시길 바라요. 무엇보다, 성소수자가 우리 동료이자 시민이고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주위에 많이 알리고, 여러분들도 동료로서 같이 잘 살아주세요.

Q. 마지막으로,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이하여 청소년 성소수자를 포함해 모든 사람이 인권을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회원과 지지자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청소년들에게는 “다시 생각해봐. 일시적인 혼란이야. 고칠 수 있어.” 등의 말보다는, “네가 어떤 사람이든 괜찮아. 행복할 수 있고, 아니면 네가 행복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라는 말이 필요합니다.

일단 성소수자가 낯선 분들도 많을 거에요. TV나 기사로 접하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고요. 사실 성소수자는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단지, 말하지 못할 뿐이죠. 그들은 외계인도 아니고 이상한 사람도 절대 아니에요. 여러분과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사람이죠. 성소수자가 오직 성과 관련된 사람이 아니라, 오늘의 식사 메뉴를 고민하고 일과에 피곤함을 느끼며 일상을 살아가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청소년이 성소수자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져요. “너 너무 혼란스러운 거 아니니?’, “넌 아직 어리니까, 그 때는 그럴 수 있어.”, “나도 네 나이 때 그랬어.” 등의 말씀을 하시기도 하고요. 청소년은 어려서 혼란스럽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주세요. 청소년기에 겪는 일시적인 혼란이 아닙니다. 정체성에는 혼란이 없어요. 내가 성소수자인 것 같을 때 그래서 앞으로 내가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 시작할 때 엄청난 혼란이 찾아오긴 합니다. 그러나 이건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아니라 ‘내가 성소수자로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내 주변 사람 혹은 이 사회가 나를 거부하지 않을까’라는 고민에서 오는 공포와 혼란입니다. 내가 성소수자가 아닐 수도 있어서 오는 혼란이 절대 아닙니다. 이때 청소년들에게는 “다시 생각해봐. 일시적인 혼란이야. 고칠 수 있어.” 등의 말보다는, “네가 어떤 사람이든 괜찮아. 행복할 수 있고, 아니면 네가 행복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라는 말이 필요합니다.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은 만큼, 혐오의 말보다 서로를 지지하고 도와주는 말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더불어 청소년 성소수자의 존재를 알고, 띵동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오직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무지개빛 에너지 뿜뿜! 청소년 성소수자 응원프로젝트!

국제앰네스티는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이하며,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스트레스컴퍼니와 함께 청소년 성소수자 응원프로젝트 [영롱한 무지개빛 당신을 응원해요!] 캠페인을 운영중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세상의 혐오와 차별에 분노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듬고 이에 맞서 나로 존재하는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응원합니다!

화, 2021/05/18-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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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간 국제앰네스티의 국제사무국 소속 동아시아 조사관Researcher으로 일했던 아놀드 팡Arnold Fang 조사관이 5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앰네스티를 떠났습니다. 코로나19로 직접 만날 수 없어 온라인 상에서 작별 인사를 해야 했는데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커뮤니케이션팀의 신한나 팀장이 아놀드 팡 조사관과 만나 그간의 소회, 한국지부 회원과 지지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들을 들어보았습니다.
아놀드팡 조사관과 국제앰네스티 신한나 팀장

아놀드 팡 조사관은 홍콩에서, 신한나 팀장은 서울에서 줌으로 만났다.

한나: 안녕, 아놀드.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 너무 아쉬워요. 아놀드를 잘 모르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회원과 지지자분들에게 본인을 소개해 주시겠어요?

아놀드: 안녕하세요 저는 아놀드 팡입니다. 앰네스티 국제사무국 소속 동아시아 조사관이고요. 홍콩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 북한, 몽골, 일본 지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전에는 각 나라를 방문하며 조사 활동을 펼치기도 했고, 한국도 자주 방문했었어요. 북한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 조사했고, 관련 단체의 역량 강화capacity building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고요. 북한 이슈를 알리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한나: 조사관으로는 얼마 동안 일하신 거죠?

아놀드: 2014년부터 7년 간 일했습니다. 생각해보니 꽤 오랜 시간이네요. 2014년에 입사하자마 한국지부에 방문했었어요. 노마(Noma) 조사관과 함께 갔었어요. 당시에는 사무실이 합정에 있었죠? (노마 조사관은 2007년 촛불집회를 다룬 <한국: 촛불 집회에서 경찰력 집행> 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다.)

국제앰네스티 아놀드팡 조사관이 한국지부 사무실에서 PROTECT THE HUMAN 피켓을 들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아놀드팡 조사관이 한국지부 사무실에서 “PROTECT THE HUMAN” 피켓을 들고 있다

한나: 저도 그 때 생각이 나네요. 저와 거의 입사 동기였네요. (전 그 후에 잠시 떠난 후 재입사하긴 했지만요) 조사관 업무는 그 전에도 경험이 있으셨나요?

아놀드: 당시 인권 단체에서 조사관으로 일한 것은 앰네스티에서의 경험이 처음이었어요. 그 전에는 국제개발단체에서 일했고, 북한과 관련한 업무를 진행했었습니다.

한나: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아놀드: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랬습니다. 처음엔 정말 어려웠습니다. 국제개발 분야에서 북한 프로그램을 담당할 때와는 전혀 다른 관점이 필요했거든요. 국제앰네스티 안에서도 북한이라는 주제는 뜨거운 감자였어요. 북한에 대해 전 세계 여러 지부가 알고 싶어하지만, 북한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쉽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북한에 대해 궁금하면 전 세계 지부에서 저에게 문의를 했었고요. (웃음)

한나: 한국지부에 4년 전부터 북한인권 담당자가 생겼어요.

아놀드: 한국지부에 북한 인권 담당자가 있는 것은 큰 성과입니다. 저는 한국지부가 북한 관련 인권 문제를 조금 더 주도적으로 가져가서 전 세계에 알리기를 바라고 있어요.

2016년 3월 9일 북한 인권 보고서 기자회견 현장에서 아놀드 팡 조사관

2016년 3월 9일 북한 인권 보고서 <통제된 사회, 단절된 삶: 북한 내 휴대폰 사용 및 외부세계 정보 제한 실태> 기자회견 현장에서 아놀드 팡 조사관

한나: 북한인권 외에 또 어떤 업무를 진행하셨죠?

아놀드: 여러 국가의 ‘표현의 자유’ 문제를 담당했었어요. 7년 전 국제앰네스티에서 처음 일했을 때 한국 내 시위대를 향한 과도한 경찰력에 대해 다뤘었죠. 홍콩 사람으로 현재 홍콩에서 벌어지는 시위에 대한 과도한 공권력 남용을 볼 때마다 그 때가 떠오릅니다.

조사관이 아니라 한 명의 개인으로 말하자면 지난 7년간 저는 한국사회의 변화를 목격했습니다. 한국사회가 시민들의 투표로 정권을 바꾸는 모습, 2016년의 촛불집회, 시민들의 힘, 피플 파워people power를 봤죠. 그 이후 표현의 자유나 집회 시위에 대한 이슈를 많이 다루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한국사회 내 LGBTI성소수자 인권, 군형법, 트랜스젠더, 여성 인권 이슈 등을 더 다루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조사하는 영역은 아니지만요)

한나: 코로나19 이후에 조사관으로서 달라진 점이 있나요?

아놀드: 각 나라 지부를 방문하는 것은 언제나 좋은 경험이었어요. 물에 손가락을 넣고 온도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현장’을 직접 느낄 수 있었어요. 각 지부의 직원, 협업 파트너, 평범한 시민들을 통해 인권 문제에 대해 듣는 경험이 저에게 정말 중요했습니다. 코로나19로 여행이 제한된 것이 안타까웠어요. 그러고 보니 제가 한국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게 2020년 2월 국제앰네스티 세계인권현황 연례보고서 발표 기자회견 때였네요.

한나: 저도 아놀드를 보지 못해 아쉬워요. 이제 앰네스티 조사관이라는 직업에 대해 물어볼게요. 앰네스티 조사관이라는 역할을 누군가에게 추천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나요?

아놀드: 먼저, 인권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겠죠. 특히 국제앰네스티에 대해서도요. 국제법과 앰네스티만의 정책, 앰네스티의 입장에 대해 계속 배워야 해요. 글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엄청난 문서들을 작성해야 하거든요. (웃음). 읽는 사람이 누군지에 따라 각기 다른 글쓰기 방식도 필요해요. 유엔을 상대로 애드보커시 문서를 써야 할 때도 있고, 대중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써야 할 때도 있죠. 글쓰기 방식이 아주 다른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메시지를 읽는 이에 맞추어 잘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조사관은 많은 시간을 글쓰기에 쓰게 됩니다. 글을 쓰기 위한 미팅과 자료 조사, 또 다른 문서 읽기를 포함해서 말이죠.

보고서 『통제된 사회, 단절된 삶』의 표지

보고서 『통제된 사회, 단절된 삶』의 표지

한나: 조사관으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나요?

아놀드: 본인의 개인적인 의견이 있다고 해도 조사관은 앰네스티라는 단체를 대표해서 발언해야 합니다. 중립적인 입장을 표현해야 하고, 경청하는 것이 중요해요. 늘 자신에게 익숙한 주제만 다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파트너와 이해관계자의 이야기를 잘 듣고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나: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해 바라는 점이 있나요?

아놀드: 한국과 북한이 조금 더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도, 정보도요. 이산 가족들도 서로 만나고, 서로의 문화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사회 내에선 차별금지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봐요.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여러 소수자들을 위해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합니다.

한나: 한국지부의 회원과 지지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아놀드: 한국 시민들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어요. 이 변화는 희망을 주었죠. 홍콩의 많은 시민들도 한국의 사례를 보고 힘을 얻었고요. 우리가 모두 함께 변화를 위해 행동한다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시민들에게는 전 세계를 향한 사명이 있는 것 같아요. 시민들의 힘을 보여준 국가니까요, 이 어두운 세계 속에 계속 작은 빛을 내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한나: 마지막 질문이에요. 인권 단체의 조사관으로 일하는 것은 늘 스트레스와 마주하는 일일 텐데요. 본인만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나 인내심 유지 비법이 있을까요?

아놀드: 일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일 이외에 다른 활동을 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전 요즘 운동을 많이 해요. 음악을 만들기도 해요. (아놀드는 앨범을 발매한 뮤지션이다). 액티비즘 이외에도 나만의 활동이 있어야 해요. 코로나19로 야외활동을 잘 하지 못하게 되면서 베이킹을 시작했어요. 어제도 샌드위치 빵과 사워 도우sour dough를 만들었답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아놀드에게 보내는 굿바이 편지

앰네스티 한국지부 동료들이 아놀드에게 남긴 롤링페이퍼, 온라인 롤링페이퍼로 작성해 보내주었다.

7년간 함께 일하면서 한국사회 내 인권의 변화를 경험한 동료를 떠나보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멀어진 물리적 거리로 직접 전해주진 못했지만 한국지부의 동료들은 온라인 롤링 페이퍼로 아놀드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랜선 너머로 아놀드의 커다란 웃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놀드 팡 조사관, 수고 많았어요!
인터뷰: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커뮤니케이션팀 신한나
월, 2021/07/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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