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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열린 청와대 100m앞, 반갑지만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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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열린 청와대 100m앞, 반갑지만 않다

익명 (미확인) | 목, 2016/12/08- 14:49

– 그곳에서 다시 만나기 위한 조건 –

그토록 오고 싶었다. 우리 가족들이 그동안 이 막혔던 청운동 입구를 지나서 청와대 100미터 앞으로 행진하고 있다. 여기를 들어오고 싶어서 그 동안 우리 가족들은 많은 수모를 당했다. 내팽겨쳐지기도 했다. 얻어 맞기도 했다.”

청와대 경계 100미터, 그 곳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은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 냈다.

지난 3일 헌정 사상 최대 인파가 모인 집회로 기록된 6차 범국민행동에는 주최측 추산으로 서울 170만 명, 전국 232만 명이 결집했다. 10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첫 촛불이 광화문에 켜진 후, 촛불의 행렬은 청와대에서 직선거리로 약 1.3킬로미터 떨어진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을 시작으로 주를 거듭할수록 900미터, 400미터, 그리고 200미터 청와대를 향해 나아갔다.

6차 촛불이 켜진 3일에는 집시법에서 제한하는 청와대 100미터까지 나아갔다. 성역이 무너졌다. 깃발을 든 외국인 관광객이 아닌 깃발을 든 그 어느 누구도 허락치 않았던 청와대 경계 100미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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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대교에서 청와대 100미터까지 2년 7개월

2014년 4월 20일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겠다며 청와대로 향했던 그 날, 유가족들은 청와대에서 384킬로미터가 떨어진 진도대교에서 발이 묶였다. 그리고 2년 7개월, 비로소 청와대 경계 100미터에 설 수 있었다.

잔인했던 어버이날 밤을 넘긴 새벽을 걸어 청운동사무소 앞까지, 그리고서도 수백 명이 연행되어도 열리지 않던 길이었다. 해를 넘겨 4월 광화문 앞에서 농성을 하고서도 병풍처럼 경찰의 차벽에 가려져 닿지 못했던 그 길이었다. 유가족들과 집회 참가자들의 손에 든 위험한 물건이라고는 ‘박근혜’ 이름 석자가 새겨진 피켓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전부였다.

집시법상 집회시위가 허락된 곳은 청와대 경계 100미터였지만, 세월호 참사가 난 후 경찰의 심리적 저지선이었던 광화문에서 청와대로 이르는 모든 지역은 경찰이 보호하는 ‘성역’이 되었다. 모든 집회는 금지되었고, ‘박근혜’ 이름 석자가 들어간 피켓은 ‘위험’으로 인지되어 청와대로의 접근이 불가했다.

백남기와 한상균

청와대로 가는 길이 막혔던 것은 세월호 유가족들만이 아니었다. 노동자와 농민들도 길이 막혔다. 작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가 열렸다. 집회는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정부 각부처가 참여하는 공안대책회의가 열렸고, 정부 공동담화가 발표되었다. 경찰은 갑호비상령을 내렸다. 곧 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증폭되었고 경찰은 노동자 농민의 시위에 ‘불법’과 ‘폭력’의 딱지를 붙여서 언론 플레이를 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공약을 지키라 했던 농민들의 상여는 처참히 깨졌다. 그 길에서 백남기 농민은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의식을 잃었다. 집회 참가자들이 청와대에 닿지 못하게 세종로와 종로 1가에 발을 묶는 데 경찰버스 679대와 물대포 19대가 동원됐다.

그 날 오후부터 늦은 밤까지 6시간 40분 동안 거리에 쏟아 부은 물의 양만해도 202톤이고, 백남기 농민을 향했던 충남 살수차 9호가 6시 30분부터 백남기 농민이 쓰러지기까지 불과 40분 동안 최루액과 함께 쏟아 부은 물은 4000리터였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에게는 올 해 7월 이 날의 책임을 물어 1심에서 징역 5년이 선고 되었다.

길이 다르지는 않았다. 작년 민중총궐기에 있었던 수 만 명도 청와대를 가려했었다. 요구가 그리 다르지도 않았다. 아니 2016년의 11월에는 이보다 더 많은 수십 배의 인파가 청와대로 향했다. ‘하야’와 ‘퇴진’이라는 요구도 오히려 작년 보다도 더욱 구체적이었다. 그러나 정부 공동담화도 갑호 비상령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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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불편한 법원의 결정

10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불거지면서 권력의 정당성에 금이 가고 거리에 촛불을 든 시민들이 압도하면서 경찰은 “나라를 걱정하는 국민”들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청와대는 성역이었다. 청와대 인근에 집회신고를 하면 경찰이 금지통고와 조건 통보를 했다. 그러나 법원이 길을 열었다.

법원은 “집시법을 엄격하게 해석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 사건 집회를 조건 없이 허용하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했고, “집회의 자유가 가지는 헌법적 가치와 기능, 집회에 대한 허가 금지를 선언한 헌법정신” 등을 언급하며 청와대 앞을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에 내주었다.

반가운 법원의 결정에도 한편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다. 지난달 12일 3차 촛불을 앞두고 법원은 “특정 이익집단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어른·노인을 불문하고 다수의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집회이고 “집회 참가인들이 그동안 보여준 성숙한 시민의식 등에 비춰볼 때 평화적으로 진행될 것이라 능히 예상할 수 있다”고 했다.

26일에도 법원은 “그 간의 집회가 평화적으로 진행됐다”며 집회 참가자의 손을 들어 주어 청와대에서 200미터 지점까지 허용했다. 또 법원은 “대통령에게 국민의 목소리를 전달하고자 하는 이번 집회의 특수한 목적상 사직로. 율곡로가 집회 및 행진 장소로서 갖는 의미가 과거 집회들과는 현저히 다르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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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또 청와대 앞에서 만나려면

그러나 지금 우리가 든 촛불이 과거의 집회와 그리 다를까? 백남기 농민과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거리에서 외치고 싶었던 이야기가 촛불을 든 시민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와 무엇이 그리 달랐을까.

모든 사람은 평화적 집회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헌법상 보장된 평화적 집회의 자유는 마땅히 누리는 권리지 경찰과 법원이 허락해야 하는 특권이나 시혜가 아니다. 청소년·어른·노인을 불문한 다수의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집회이건, 혹은 특정 집단의 집회이건 가리지 않고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정치인과 보수언론들은 민주노총과 같은 조직된 노동자들의 투쟁을 비롯한 정부에 반대하는 많은 투쟁을 ‘전문시위꾼’의 싸움으로 매도했다. 이런 프레임은 이들의 투쟁을 경찰 차벽으로 가로막고, 최루액과 물대포를 쏘며 청와대로 가지 못하도록 정당화 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니 백 만이 넘는 이들이 촛불을 들고나서야, 혹은 정권의 정당성에 균열이 생기고 나서야 열린 이 길이 마냥 반가울 수는 없다. 백 만의 촛불이 아니어도, 오히려 많은 국민들이 알지 못해 널리 지지를 받지 못하는 ‘목소리’ 없는 이들에게도 당연히 청와대 100미터는 열려 있었어야 하는 길이었다.

법원이 그동안 평화적으로 집회를 했으니 조금 더 허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밝힌 것 역시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모든 집회는 집회 주최자가 평화적으로 집회를 개최할 의도를 표현한 이상 평화적인 집회로 간주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내 기억 대부분의 집회는 그러했고,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찾는 싸움도, 그 어느 노동자, 농민들의 싸움도, 작년 민중총궐기 역시도 평화적 집회 개최의 의지를 표명했었다.

과거에 평화적인 집회를 했는지 여부를 평가해 경찰이든 법원이든 다음 집회를 ‘허가’하는 근거로 삼는다면 이후의 집회 역시 여러 번의 집회를 통해 평화적이라는 것을 입증해서 경찰과 법원이 ‘허가’를 받아야 하는 특권과 시혜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 집권 이후 민주주의의 결여는 거리에서 말할 자유 ‘없음’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시민들은 거대한 경찰과 대통령을 엄호하는 권력에 균열을 만들어 내며 그 공간을 되찾아 가고 있다. 촛불이 청와대 앞 100미터로 갔다. 그러나 경찰이 금지통고를 하고 비로소 법원이 금지통고에 대한 가처분 결정이라도 내야 집회를 할 수 있는 현실을 그대로 놓고서 우리가 언제까지 청와대 100미터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백 만이 모이지 않더라도, 그 수가 100명이라도 그 낮은 ‘목소리’들이 청와대 앞에서 대통령이 듣고 보도록 구호를 외치고, 촛불을 들고 행진을 할 수 있는 권리는 빼앗길 수 없는 인권이다. 이를 지켜야 우리가 어렵게 되찾아가고 있는 민주주의의 공간을 잃지 않는다.

 

인권10대뉴스 투표에 참여하며 올해의 후보로 올라온 사건들을 되돌아보면 좋겠다. 올해 인권의 이름으로 있었던 많은 싸움들이 거리로 나오려 할 때, 헌법에서 기본권으로 보장하는 이 권리가 어떻게 가로막혔었는지를 “과거의 집회”들을 살펴보며 한 번 더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청와대 100미터를 민주주의와 인권의 공간으로 지키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 청와대를 향해 평화로운 집회와 행진을 할 자유는 빼앗길 수 없는 인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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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인권10대뉴스와 숨겨진인권뉴스 투표는 12월 11일(일)까지 진행된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전략캠페인팀 변정필 팀장이 기고한 글입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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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지닌 힘은 무엇일까? 정확히 말해, 편지가 지닌 힘은 무엇일까? 바빌론 시대에 쓰인 인류 최초의 편지에서부터 오늘날 오프라인에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광고 우편물에 이르기까지, 편지의 가치는 극적으로 상승했다 추락하기를 거듭해 왔다. 소중한 사람의 말을 담아오는 반가운 존재에서, 기업의 광고 문구만이 실린 삭막한 존재로 전락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이제 편지는 ‘한 물 간’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12월 10일, 세계 인권의 날마다 전 세계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편지를 쓰고 있다. 부당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게 지지를 보내고, 그들을 감옥에 몰아넣은 정부 지도자들에게 석방을 요구하는 편지를 쓰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세상에서 잊혀진 채 비좁은 감방에 갇혀 두려움에 떠는 이에게 바깥 세상에서 온 편지는 희망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정부 지도자와 권력자들에게 바깥 세상에서 온 편지는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는 경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그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여 더욱 큰 힘과 위안이 되고, 감옥의 문을 열어젖힐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국제앰네스티의 세계적인 편지쓰기 마라톤 캠페인, Write for Rights 활동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다.

550만 건의 지지 메시지

2017년, 학생과 어린이, 교사, 청소부, 시장 가판대 주인 등 수많은 앰네스티 지지자들은 Write for Rights 캠페인에 참여해 550만 건이라는 전례 없는 참여도를 보였다. 직접 정성스레 꾸민 편지와 그림, 엽서를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의 집단적인 효과는 부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1. 자유를 되찾은 마하딘

4월, 날조된 혐의로 18개월 이상 수감되어 있던 차드의 온라인 활동가 마하딘(Mahadine)이 마침내 석방되었다. 마하딘은 페이스북에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종신형을 선고받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지지자들은 마하딘을 지지하며 69만 건 이상의 액션에 참여했다. 마하딘의 아들이 읽고 있는 이 연대 카드도 마찬가지다.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인류 모두에게 감사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 마하딘, 차드의 온라인 활동가

 

2. 더욱 안전해진 니 율란

중국의 니 율란은 수십 년 동안 폭력적인 괴롭힘에 시달리면서도 강제 퇴거된 사람들을 용기 있게 옹호하고 나섰다. 수십만 명이 니 율란을 지지하며 편지를 보낸 덕분에, 그녀가 처한 상황은 한층 개선되었다.

(본인의 처지에) 국제적인 관심이 쏠리면서, 경찰이 내게 폭행과 언어폭력을 행사하고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 줄어들었습니다. 저를 위해 편지를 써 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관심이 저를 도운 것은 물론, 중국의 인권 상황도 진일보 시켰습니다.”

– 니 율란

 

3. 긴급 치료를 받게 된 하난

하난 바드르 엘 딘은 2013년 7월 남편이 정부의 손에 실종된 이후로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해 왔다. 하난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집트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가족을 잃은 사람들과 함께 공동으로 단체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7년 5월, 정부가 거짓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그녀를 체포하면서 하난의 활동은 갑작스레 중단되고 말았다. 교도소 생활 중 하난의 건강 상태는 더욱 악화됐지만,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녀를 지지하는 액션에 참여한 덕분에 하난은 필요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난의 가족은 Write for Rights 캠페인을 통해 세계적인 관심이 하난에게 집중되었고, 그로 인해 이와 같이 직접적인 결과를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

 

4. 클로비스의 활동, 보답을 받다

클로비스는 마다가스카르의 귀중한 열대우림을 보호하기 위해 헌신했다가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Write for Rights에 그의 사례가 소개되면서 세계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고, 덕분에 클로비스가 모국에서 처한 상황은 크게 변했다. 현재는 곳곳의 지역단체에서 클로비스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고, 환경운동에 헌신한 그의 노력을 기리며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편지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수천 통에 이를 정도였어요. 캐나다의 어린 학생이 쓴 편지부터, 저 멀리 암스테르담에서 보낸 편지도 있었어요. 매우 감동적이었고, 제게 큰 용기가 되었습니다. 앰네스티의 캠페인 활동으로 제 이야기가 전 세계에 알려졌고, 덕분에 제게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어요. 지금은 2017년 ‘용감한 마다가스카르인상’을 받으러 가는 길입니다. 덕분에 저는 스스로에게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계속해서 투쟁하고 싶은 의욕도 샘솟아요.”

– 클로비스

 

5. 술하즈의 가족, 위안을 얻다

술하즈 만난(Xulhaz Mannan)은 방글라데시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용기 있게 옹호하고 나섰다가 결국 자택 거실에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술하즈의 이야기는 전세계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수천, 수만 명이 술하즈 피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했고, 술하즈의 가족들에게는 연대와 지지의 메시지를 보냈다.

방금 꾸러미 여러 개를 받았어요. 그 안에서 한두 개를 열어보니 전부 카드와 편지더군요. 정말 놀라워요. 술하즈에게 이렇게 많은 염려와 사랑을 보내 주시다니,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어요. 편지를 보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 민하즈 만난, 술하즈의 형제

 

6. 밀파MILPAH의 투쟁은 계속된다

밀파 선주민 운동은 온두라스에서 영리추구를 위해 자원을 착취하려는 기업과 맞서 선조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위협과 협박에 시달려 왔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보내온 격려 덕분에, 회원들은 이전보다 훨씬 안전한 환경에서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오늘도 이렇게 살아 있는 건 국제앰네스티를 비롯한 국제 단체 덕분이에요. 보내주신 편지를 전부 읽지는 못했지만, 전 세계 수많은 나라에서 온 편지라는 건 알 수 있었어요. 어린이, 청소년, 성인까지 세계 곳곳에 동지가 있다니 정말 기쁘고 자랑스러워요. 여러분의 지지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힘을 얻고 있어요. 우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지지로 더 많은 용기를 얻어, 앞으로도 인권과 환경을 계속해서 보호해 나갈 것입니다.”

– 밀파의 회원들


7. 사크리스, 수천 명에게 지지를 받다

사크리스 쿠필라Sakris Kupila는 핀란드의 트랜스젠더 인권을 옹호하는 의대생이자 청년 활동가다. 앰네스티가 처음 사크리스와 함께 활동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상황은 쉽지 않았다. 사크리스는 괴롭힘을 당하며 고립된 기분을 느꼈고, 대학에서도 수많은 적대적인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그러나 Write for Rights 사례자로 참여하게 되면서 그에게도 기회가 주어졌고,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을 받게 되었다.

저는 이상한 존재가 아니라, 어쩌다 트랜스젠더가 되었을 뿐 그 외에도 많은 개성을 지닌 한 사람의 개인일 뿐이에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액션에 참여하고 저를 걱정해준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 사크리스 쿠필라

 

8. 세계로 전해진 샤켈리아의 메시지

오빠 나키에아가 피살된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샤켈리아Shackelia의 목소리에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힘을 보탰다. 긴 세월 동안 멈추지 않았던 그녀의 캠페인 활동과 Write for Rights 활동이 미친 영향을 돌이켜 보며 샤켈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전국에서 쏟아졌던 연대 표현이 이제는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밀려들고 있습니다. 총리에게 편지를 보내는 정성과, 그 덕분에 이룰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하면 내가 정의를 추구하는 데 최적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이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어떤 자원이 필요한지 확인할 수 있었어요. 국제앰네스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9. 보호받는 있다고 느끼는 파리드와 이사

인권옹호자 이사 암로(Issa Amro)와 파리드 알 아트라쉬(Farid al-Atrash)는 헤브론을 비롯한 서안지구 점령지역에서 이스라엘이 불법 정착촌을 형성하고 있는 것에 반대하며 수 년 동안 평화적인 활동을 벌여 왔다. 그 수 년 동안의 활동으로 괴롭힘은 물론 거듭되는 체포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Write for Rights에 이들의 사연이 소개되면서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덕분에 두 사람은 보호 받는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전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지지를 보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파리드는 자신들에게 도착한 수많은 연대 카드를 들고 포즈를 취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적용된 혐의를 모두 취소하고, 팔레스타인 점령지역의 인권 활동가에 대한 가혹행위를 중단하라고 이스라엘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힘을 보태 주셨어요. 우리와 연대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Write for Rights 캠페인에 소개해 주셔서 앰네스티와 지지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10. 세계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타네르와 이스탄불 10

국제앰네스티 터키지부의 이사장인 타네르 킬리스(Taner Kiliç)와 이스탄불 10의 자유를 요구하며 약 875,000명이 편지를 썼다. 그러나 이스탄불 10은 감옥에서는 풀려났지만 그들의 자유는 지금도 위협받고 있으며, 타네르는 여전히 석방되지 못한 상태다. 타네르가 석방되고 모든 혐의가 취소될 때까지 우리는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스탄불 10 중 한 사람인 귀날 쿠르션(Günal Kurşun)은 1월 재판을 받을 당시, 처음으로 받았던 연대 편지를 행운의 부적으로 뒷주머니에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15~20년 전쯤 저도 앰네스티 캠페인에 참여하며 콜롬비아와 이집트, 미얀마 등지에 엽서와 편지를 썼던 게 기억이 나요. 20년이 지난 지금은 제가 그 편지를 받고 있네요.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게는 매우 소중한 것들이에요.”

월, 2018/04/23-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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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은 애플이고, North Face는 노스페이스, STARWARS는 스타워즈인데
왜 Amnesty International(국제앰네스티)는  국제사면위원회인가?


국제앰네스티는 국내에서 ‘국제앰네스티’로 불리지 못한 채 주요 언론사나 교과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국제사면위원회’로 알려져 있다.

언론에 나온 '국제사면위원회' 캡처 화면

TV 뉴스에 나온 국제앰네스티. 주로 국제 발 뉴스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국제사면위원회’라는 명칭이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각종 백과사전과 교과서, 뉴스 기사에 “국제사면위원회”로 표기되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1972년 3월 28일,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창립총회. ‘앰네스티 한국위원회’라고 쓰여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설립 초기에는 영문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한국지부, 앰네스티 한국위원회, 한국 앰네스티를 혼용하였으나, 회원들의 결의를 통해 ‘국제사면위원회’라는 명칭을 쓰지 않기로 합의하고, 2006년 한국지부가 사단법인 등록을 할 때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라는 국문명칭으로 통합했다.

1978년 12월 23일 동아일보.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날)이 당시 양심수 김대중 석방을 환영한다는 내용이 실렸다.

1998년 2월 5일 한겨레.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이 100여 명의 양심수 명단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전달했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국제 ‘사면’ ‘위원회’의 문제점

국제앰네스티를 ‘국제사면위원회’로 부르는 것은 의미상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사면’은 정치 권력의 시혜 조치라는 뜻을 담고 있어, 인권운동 단체 이름으로 부르기에 적절하지 않다. 또, 국제앰네스티는 회원으로 구성된 조직이므로 ‘위원회’라는 표현은 조직 성격과도 맞지 않는다.

근래에는 ‘국제사면위원회’보다는 ‘엠(!)네스티’라고 쓰이는 것을 더 자주 보곤 한다. 발음상 [앰-네스티]여서 그런지, 알파벳 M [em]의 국문 표기인 ‘엠’으로 자주 쓰인다. 영국에서는 [암-네스티]로 발음하는데, 이것만큼은 피하고 싶다. 

공식 명칭이 ‘앰’네스티이기 때문에 소셜미디어 공식계정을 홍보하거나, 공문서를 수정할 때 종종 곤란한 경우가 있다.

“카카오톡에서 앰네스티를 검색하시면..”
“아.. 어이 엠 말고요, 아이 앰이요.”
“개미할 때 ㅐ 예요.”
….

엠넷(Mnet)이요?

사실 ‘앰네스티’로 쓰던, ‘엠네스티’로 쓰던 앰네스티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니 반가울 따름이다. “앰네스티요.”라고 하면 “엠넷이요?”라는 반문을 듣는 경우도 많으니까.

나는 얼마나 많이 이름을 알고 있는가! 그러나 그 이름을 내가 잊을 때, 나는 무엇에 의하여 이 많은 것을 기억해야 될까? 모든 것은 그 자신의 이름을 가지지 않으면 아니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것의 태반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름이란 지극히도 신성한 기호다.

– 김진섭 수필, 명명철학 중에서

김치찌개가 생각날 때 찌게인지 찌개인지가 중요한가. 그저 인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엠네스티든 앰네스티든 떠올려 주는 것이 고마운 일인 것을.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을 패러디해 <나의 이름은> 포스터

국제앰네스티..

화, 2017/09/05-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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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매월 말마다 앰네스티 사무국의 소식을 간략히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앰네스티의 ‘꿀곰’ 간사가 말하는 앰네스티 사무실의 2월은 “소란한 민주주의”입니다.

한국지부 사무실은 헌법재판소와 매우 인접해있어 2월 내내 ‘멸공의 횃불’ 같은 군가를 강제로 듣거나 탄핵을 둘러싼 크고 작은 집회시위를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에도 “국회해산” “탄핵을 탄핵하자” 같은 시위 구호가 사무실로 들려옵니다. 집중하기 힘든 업무 환경이지만 모든 집회시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니까요.

2017년 2월 27일 헌법재판소 앞 사거리. 탄핵 반대 시위가 있었다.

“앰네스티가 박근혜 대통령을 양심수로 선정했다는 가짜 뉴스를 만들어서 퍼트려보면 어떨까”라는 어줍잖은 농담이나 하며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매주 토요일 광장에 나서는 시민들과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 단체 활동가, 그리고 굉장한 피로도가 쌓였을 경찰들도 마찬가지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앰네스티는 2016년의 사업을 정리, 평가하고 새해의 사업을 시작하느라 분주한 2월을 보냈습니다.

3월 11일 예정된 정기총회를 특히 열심히 준비중이구요, 전략캠페인팀은 국회 안행위 소속의 여러 의원실과 공동주최하는 집회시위 국제컨퍼런스 준비로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는 새 정부에서 경찰의 집회시위 관리가 보다 인권친화적으로 이뤄지도록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예비작업입니다.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아서도 뭔가(!)를 준비중입니다. 지난해에는 김보통 작가의 그림으로 머그&스티커를 준비했었는데요, 올해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김보통 작가님 더 유명해져도 앰네스티와 계속 함께 해주셔야 해요..

한편, 북한인권을 연구하고 활동하고 있는 전문가들을 초청해 비공개 포럼을 갖고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대안적인 북한인권 접근법을 모색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연례 인권보고서 발표가 있었고, 또 아놀드 팡 동아시아 조사관이 한국에 들러 몇 가지 사안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아놀드 팡 동아시아 조사관

그 어느 때보다도 이렇게 3월이 기다려진 적이 있었던가요. 유달리 긴 겨울입니다. 다가오는 봄에는 기다리는 좋은 소식이 모두를 찾아가기를 바랍니다. 늘 앰네스티와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2월의 안국에서, 안국(安國)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화, 2017/02/2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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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앰네스티는 여덟 명의 여성에게 2018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이야기하고 싶은 여성 인물에 대해 글을 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SF 칼럼리스트 심완선님은 한국의 여성 문인 지하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 Amnesty International X 자선

지하련(池河蓮)은 1940년대 일제 말기에서 해방 직전까지 작품을 발표한 한국 여성 문인이다. 짧은 활동 기간과 적은 작품 수에도 불구하고, 워낙 문예 창작이 어려웠던 시기에 탁월한 글을 써서 이름이 남았다. 지하련의 대표작 <도정>(1946)은 뛰어난 완성도와 당대 지식인을 묘사한 작품 중 유일하게 양심의 가책을 다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지하련의 소설은 여성주의적 측면에서 특히 의미가 깊다. 그녀의 글에서는 자유연애와 ‘신여성’이라는 개념이 새로이 전파된 근대 조선에서 실제 여성들이 겪었던 혼란과 내적 투쟁이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지하련은 결혼제도를 둘러싼 허위의식과 그 붕괴, 새로운 자아를 향해 꿈틀거리는 여성들의 내적 욕구와 갈망, 이를 절망적으로 감내하거나 암시적으로 갈무리해야만 했던 시대상 등을 단편 안에 담았다.

한편 지하련은 임화의 부인으로 더욱 유명하다. 아내의 이름은 종종 남편에게 부수되는 것처럼 취급되기 때문에, 지하련 역시 임화의 유명세로 덩달아 이름을 알린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유명한 남편 때문에 지하련이 제 평가를 못 받았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하련을 마냥 수동적으로 희생한 아내로 보기는 어렵다. 집안의 강경한 반대를 무릅쓰고 배우자를 택하고, 그에게 인생을 걸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하련은 도쿄 유학을 거친 신여성으로, 남편과 함께 월북한 사회주의자로, 여성을 관찰하고 여성에 대해 쓴 여성 예술가로서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지하련의 인생을 살펴보는 것은 지난 격동의 세기에 삶을 마친 뛰어난 여성을 다시금 알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한국문학사가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여성 소설의 여백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파시즘과 해방: 시대적 배경

지하련의 작품 수가 적은 이유는 그녀가 늦게 등단한데다 오로지 한국어로만 작품을 발표하길 고집했기 때문이다. 지하련이 등단한 1940년대는 익히 알려졌다시피 식민 통치가 가장 엄혹하던 시절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41년 조선사상범 예방 구금령을 내려 ‘사상범’으로 지목된 사람을 강제 수용했다. 그리고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노동력을 강제로 징용하며 집단 학살을 자행했다. 그 해 12월에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했고, 전쟁으로 인해 1944년에는 수많은 이들이 군인으로 강제 징집되고 여자정신대 근무령을 받았다.

국내 문학계도 암흑기였다. 1939년에 일제의 명으로 만들어진 조선문인협회의 취지는 문인들이 군국주의적 정책에 이바지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수두룩한 잡지가 폐간되어 글을 발표할 곳이 마땅찮아졌고, 이름 있는 문인들이 전쟁을 찬양하는 글을 썼다. 당시 평론가들은 신인들의 소설이 내용보다 기교 중심으로 발전했다고 평했다.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 추상적으로 침잠하며 암시와 은유 위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지하련의 소설에서도 과거가 없어 정체가 불분명한 지식인들이 조소, 방관, 윤리적 결벽증을 내보인다. 그러나 지하련의 <도정>은 유일하게 당대 지식인의 양심의 문제를 다뤘다는 평을 받는다. 소설의 화자는 옥살이를 했을 정도로 충실한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소 부르주아’라고 결론짓는다. 지하련 작품집 [도정]에 신간평을 쓴 정태용은 화자가 이러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심리적으로 동요하는 과정의 묘사가 극히 정확하며 지하련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지하련의 냉정한 관찰력은 식민지 지식인의 무력한 고뇌를 꿰뚫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에는 남성의 허위의식을 간파하는 여성의 시선이 공존한다. 지하련이 발표한 단편소설 6편 중 3편은 당시 ‘아내’로 살아야 했던 여성들을 조망한다. 그럼에도 지식인의 초상만이 문학사적으로 가치 있는 주제라는 양 바라보는 것은 식상한 일이다.

아내의 서사

지하련이 그린 여성들의 초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남녀관계의 양상을 알 필요가 있다. ‘연애’는 국내에서는 1920년대에 만들어진 개념이다. 1910년대 일본 메이지 문학의 ‘고상하고 신성한 연애’가 유입되고, 자유연애를 칭송하는 20세기 초 연애담론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시인 노자영이 엮어 1923년 출간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연애서간집 <사랑의 불꽃>은 사회와 가족이 맺어주는 중매결혼에 맞서 자신의 영혼과 마음에 충실하겠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여성의 자유연애는 여성 자신이 근대인이라고 자각하고 구시대적 관습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했다. 신여성 문인들은 마음으로 교류하는 평등한 관계를 공개적으로 추구했다. 나혜석의 일생은 물론이고, 잡지 <신여성>의 편집자였던 김원주는 “정조는 사랑이 있을 때만 존재하는 것”이라며 평생 지키는 게 아니라고 선언하는 글을 발표했다. 경성에는 분명 뾰족구두를 신고 모피를 두르고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여성들이 존재했으며, 이러한 문화적 변화는 정치 및 사회 변화와도 궤를 같이 했다.

신여성과 교육, 자유연애의 조합은 구여성 및 중매결혼과 대척점에 서는 것처럼 보인다. 배명훈의 소설 [고고심령학자](2017)는 근대 조선에 있었던 일본 여성 인물을 묘사하며 이런 말을 한다. “신식 교육을 받은 구식 여자가 되거나, 신식 교육을 받은 못돼먹은 여자가 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신여성과 구여성 같은 이분법은, 성녀와 창녀, 개념녀와 된장녀라는 비교에서 보이듯 실제로 여성 집단을 둘로 나눈다기보다는 여성에게 부과되는 이중의 역할을 대비시킨 것에 불과했다. 오히려 신여성과 구여성의 모습을 조합한 이상적인 ‘양처’와 같은 개념이 등장하며 여성에게 이중의 족쇄를 씌웠다. 여성과 똑같이 근대적 개념을 받아들인, 구습에서의 해방을 추구하는 남성 지식인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아동을 존중하여 어린이라 부르자던 방정환은 은파리라는 필명으로 통속소설을 연재하며 신여성의 ‘괘씸함’을 탓했다. 여성 작가 김명순의 독신주의는 처녀가 문란한 생활을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더군다나 연애 개념은 남성의 외도를 합리화하는 핑계로 작용하기도 했다. 도시로 상경한 여러 남성 지식인이 고향에 본처를 두고 신식 여성을 첩으로 맞이했다.

지하련의 소설은 연애를 다루지만, 연애감정에서는 한 발 물러나 결혼제도라는 틀에서 비어져나오며 불협화음을 내는 여성에게 주목한다. 지하련 전집을 엮은 서정자 교수는 지하련의 소설을 “아내의 서사”라고 말한다. <양>(1942)에서, 여학교를 나왔음에도 신여성 차림을 하지 않고 지내는 정인은 작중 성재가 아니라 양품점 청년과 결혼하겠다는 이유로 “하천한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을 꼽는다. ‘연애’ 담론이 찬양하는 열린 교류나 평등한 관계는 없다. 지하련의 데뷔작 <결별>(1940)의 형예는 남편이 잠든 곁에서 벌레 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완전히 혼자라는 것” 깨닫는다. 친구 정히네 부부가 늦게 결혼했어도 연애관계로 맺어진 것과 달리 형예의 남편은 형예를 아내 역할을 할 사람으로 볼 뿐이기 때문이다. <가을>은 반대로 아내의 친구에게 연모를 받는 남편 입장에서, <산길>은 자신의 친구와 남편이 연애관계에 빠진 것을 지켜보는 아내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여성이 보는 여성의 모습이 있다. 행실이 어떠니 살림이 어떠니 하는 남편 입장의 평가가 아니라, 날카로운 농담을 하며 까르르 웃는 새댁들이나 결혼보다 연애를 말하며 곧고 정한 태도를 유지하는 여자 친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시대를 압도하는 절망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 하 결혼제도로 인한 신산함은 폄하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엄혹한 시기였기에 ‘아내’된 여성의 내적 갈등은 한층 복합적인 양상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한국근대문학사는 이 모두를 중요치 않은 일로 폄하해온 감이 없지 않다. 국어 교과서에서 여성 소설을 보기 힘든 이유가 정말로 여성 문인이 드물었기 때문일까. 여성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졌던 만큼, 우리 세상에 존재했으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들에게 귀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지하련의 삶

지하련은 필명이고 본명은 이현욱으로, 1912년 경남 거창에서 출생해 마산에서 성장했다.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그녀는 부유한 대지주 집안에서 자라 당대 여성으로는 드물게 근방의 학교가 아니라 일본 도쿄에서 학업을 마쳤다. 오빠들이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며, 지하련도 일찌감치 사회주의를 접한 것으로 보인다. 임화가 마산에서 요양 중일 때 만나서 1936년에 그와 결혼했다. 아이 딸린 이혼남과 결혼하겠다는 말에 큰오빠에게 뺨을 맞았지만, 혼인신고 4일만에 아들을 낳았다. 1940년에 <<문장>>에 단편 <결별>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임화가 동지 박헌영을 따라서 월북을 결심하자 1947년 고향도 가족도 버리고 임화를 따라 월북했다.

월북한 예술가들의 흔적은 남과 북 양쪽에서 말소됐다. 임화는 그나마 공식적으로 발표한 글 등 비교적 기록이 있지만 지하련의 삶은 그녀가 발표한 작품 일부와 다른 여성 문인들의 기록에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한국전쟁 중에는 만주에 머물러 있었고, 그래서 북에 남았던 임화가 박헌영 계열의 몰락과 함께 김일성 계열에 간첩 혐의로 처형된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지하련은 임화의 사망을 알고 실성하여 헤매다니다 평안북도 희천의 교화시설에 수용당했다가 병사했다고 추정된다.

글. 심완선
그림. 구자선

목, 2018/03/0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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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네스티는 지난 7월, 오랜만에 <퀴어토크>와 <퀴어문화축제> 등 대중행사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공교롭게 두 행사를 치른 날 모두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는데요, 행여나 사람들이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스태프들의 마음은 침수됐지만, 다행히도 행사는 성황리에 끝이 났습니다. 반가운 얼굴도 많이 만났고요!

이 자리에 아쉽게 함께 하지 못하신 분들은 기사를 통해서라도 꼭 확인해보세요!

퀴어토크 3부 패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손미나, 나비, 봉레오, 지미, 김도훈

퀴어토크 3부 – 「미운 우리 “퀴어” 새끼」

<퀴어토크>  3부 – 「미운 우리 “퀴어” 새끼」 셀프 영상


 

<퀴어문화축제> 이야기 보기 – 허프포스트코리아

올해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부스에서는 하트타투와 스티커, 자선 작가의 일러스트 엽서 그리고 야심 차게 준비한 깃발을 나눠드렸어요. 장대 빗물에 젖어 금세 너덜너덜해졌고, 스태프들의 마음도 추적추적 젖었습니다만, 이후 의외의 곳에서 앰네스티 하트 스티커를 확인하니 만감이 교차하면서도 뿌듯했습니다. //ㅅ//

SBS 『그것이 알고 싶다』작가 노트북에 붙은 여러 스티커 중 우측 상단에 앰네스티 하트 스티커가 떡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페미니즘 교육을 진행하고 계신 한 선생님의 책상에 앰네스티가 나눠드린 일러스트 엽서와 스티커가 붙어있다.

 


 

행사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 자리를 빌려 행사 치를 때마다 스태프들끼리 하는 하소연을 살짝 공개합니다.

해외에서 악명높다는 한국인의 ‘NO SHOW’ 현상은 정녕 NGO 행사도 예외가 아닌가 봅니다. 제한적인 현장 시설과 물품 준비, 행사 진행시간 등의 흐름 때문에 참가자 규모 예측은 행사 진행에 있어 아주 중요한데요, 그런데.. 참가비 없는 행사 신청자의 참석률을 어떤 행사이건 간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50% 내외입니다. 오죽하면 참석률을 높이고자 보증금 형식으로 참가비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일단 신청하고 보자 하신 분들, 참석이 어려울 때는 꼭 취소 연락을 주세요. 다른 누군가에게 그 기회가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더불어 무작정 찾아오시기 보다는 사전에 꼭 신청을 해주세요!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라는 마음은 좋지만, 이런 상황 역시 당일 행사 진행에서 저희를 난감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감된 행사일 경우에 거절당한 분들도 많으니까요. 가벼운 메일이나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합니다!

그럼 저희는 선선해진 날씨와 함께 더 좋은 행사로 찾아오겠습니다. 또 만나요!

금, 2017/09/01-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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