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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기획은 불평등, 노동 탄압, 특권 세습, 권력 독점, 법치 실종, 부정부패, 대의제 한계 등 ‘민주공화국’의 부재와 위기를 7회에 걸쳐 진단합니다. 웹·모바일 특집페이지에 지면에 담지 못한 이야기를 싣습니다. 경향신문 취재팀이 지난 8~9월 만난 노동자, 장애인, 활동가, 지식인 등 100여명의 육성을 르포와 인터뷰로 올립니다. 특집 페이지는 시대를 진단하는 아카이브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일 오전 8시 서울 관악구 한남운수 대학동차고지 입구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비롯한 각종 민중가요가 울려퍼진다. 노래가 나오는 스피커 옆에는 한남운수 버스정비 해고노동자 이병삼씨(46)가 동료 3명과 함께 ‘한남운수 대표이사는 부당해고 부당징계 즉각 철회하라’ ‘한남운수 박복규, 박진성 대표이사님! 시민안전, 정비사 임금 쪽 빨아 드시어 부자되셨습니다’ 등의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입구 앞에서 501번 버스를 기다리는 출근길 시민들은 익숙한 광경이라는 듯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차고지 앞 횡단보도 가운데 위치한 한남교에는 이씨가 묵고 있는 검은색 천막농성장이 있다. 농성장 입구에는 파란색 냉장고 한 대가 있다. 물이 들어있지 않은 물통 3병은 갈색 장판 위에 어지러이 놓여있다. ‘해고는 사회적 살인! 한남운수 대표이사는 부당해고 즉각 철회하라’고 적힌 현수막이 농성장 벽면에 걸려있다. 한남교는 차고지로 복귀하는 버스들이 좌회전하는 곳이다. 좌회전하는 버스 앞머리가 농성장 벽면에 닿을듯 말듯하다. 그만큼 농성장은 위태로이 자리하고 있다.
2010년 10월 한남운수에서 해고당한 이씨는 2011년 2월 차고지 앞에서 피켓 시위를 시작한 이후, 2014년 10월30일부터 한남교 위에 농성장을 꾸리고 부당해고 반대 및 복직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투쟁 6년차, 천막농성 2년차에 접어든 장기농성 해고노동자이다.

■ 폭염·소음·돈…농성장에서 생존의 문제에 직면하다
지난 8월 농성장을 찾았을 때 최고기온이 35도에 달할 정도로 폭염이 절정이었다. 이씨는 찌는듯한 더위를 견디기 힘들다면서 건강 악화를 우려했다. “해고 당한 직후에는 정신과 상담을 받고, 약을 먹어야만 잠들 정도로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했어요. 야외 투쟁과 천막농성을 하면서부터 유독 두통이 심해졌죠. 편두통이 악화될 때는 벽에 머리를 막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습니다. 위와 장도 안좋아지면서 설사를 반복하고, 그러다보니 음식을 못먹어 70㎏였던 몸무게가 50여㎏까지 내려갔어요”라며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토로했다.
천막농성장에 머물다보면 소음문제가 가장 크다고 한다. “천막농성장이 횡단보도 다리 가운데, 도림천 위에 있어요. 24시간 소음에 시달려요. 농성장에 있으면 천막 농성장 옆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발소리가 바로 들려요. 무엇보다도 차 소음이 심각하죠. 이 주변이 신림동 고시촌 번화가라 하루종일 차들이 많이 다녀요. 좌회전하는 버스 소리도 엄청납니다. 사람들이 농성장에 한 번 와서 자면 버스 소음 때문에 다시는 안 오려고 할 정도에요.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는거죠. 특히 좌회전하는 버스들이 갑자기 천막으로 돌진하거나, 겨울에 차들이 미끄러져 천막을 덮칠까봐 두렵습니다. 목숨을 내놓고 있다는 생각으로 항상 위험을 감수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농성장 유지 비용도 만만치 않다. “천막농성이 2년째에 접어들면서 유지비가 만만찮게 나옵니다. 농성장 유지 비용, 먹는 비용 하나하나가 다 돈이죠. 아침에 차고지 앞에서 함께 피켓 농성하시는 분들 밥 한끼 대접하는 비용도 크게 다가와요. 전기 같은 경우는 한남교 건너에 있는 ‘그날이 오면’ 서점에서 전기를 빌려주어 사용하고 있는데, 한 번도 돈을 드린 적이 없어요. 죄송한 마음 뿐이죠”라고 말했다.
수입이 없어진 이씨에게 먹고사는 문제는 곧 ‘생존의 문제’로 다가왔다. “수입이 없다는 점이 가장 힘들죠. 돈이 없으니 예전에 살던 1억3천만원짜리 집을 급매로 헐값에 넘겼어요. 기존에 있던 빚도 갚기 힘들어 택시 운전하는 지인에게 급히 천 만원을 빌리기도 했구요. 지금은 가족들과 함께 방 두 개 있는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40만원짜리 집에 살고 있어요. 겨우 은행대출 받아도 집세로 나가는 마당에 우리 가족들 생활은 계속 어려워지고 있죠. 올해 초부터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지회에서 투쟁기금으로 매달 100만원씩 들어와서 그나마 낫지만 쉽지 않습니다”라며 한숨 지었다.

■ 정비직 노동자의 위태로운 삶…“시민 안전도 위협받는다”
이씨는 정비직 노동자로 한평생 살아온 삶을 이야기했다. “1986년에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버스회사에 입사했어요. 당시 임금이 굉장히 낮았는데, ‘이 일 아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얼차려 받아가며 힘들게 정비일을 배웠습니다. 당시 3D 직종 중 하나인 정비일을 하던 ‘공돌이’였죠. 어디가서 정비일 한다고 떳떳하게 내세우지도 못하고, 새까매진 손을 숨기고 다니느라 바빴죠. 일이 힘들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정비 업무에 자부심을 느끼며 열심히 살아왔습니다”라며 자신의 삶을 회고했다.
2004년 서울시가 버스준공영제를 실시하면서 정비사로서의 삶이 위협받기 시작했다. “버스준공영제 전에는 버스 사업주들이 개인 대 개인으로 경쟁하는 상황이었어요. 정비사들이 버스를 잘 고쳐야 사고 없이 운행할 수 있기에 회사에서 정비사들을 우대하는 면이 있었죠. 하지만 버스준공영제 이후 시에서 버스회사에 고정적으로 돈을 지급하면서 회사는 ‘버스가 굴러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정비업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버스회사들은 직원 100명 당 정비사 15명만 있으면 된다는 규정을 악용해 그 이상되는 정비인원들을 해고하기 시작했어요. 남은 사람들은 기술을 가진 전문 정비사가 아닌, 단순 수리사로 취급 받았어요. 언제 해고될지 모르니 정비사들끼리 경쟁하면서 인간적 유대도 없어지고… 우리들끼리 ‘준공영제는 지옥이다’라는 말을 많이 하죠”라고 말했다.
이씨는 버스준공영제로 인해 버스를 이용하는 시민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버스에 문제가 생기고 사후에 고치는 것은 수리에 불과합니다. 정비사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예방정비에요. 문제가 생기기 전에 미리 문제를 파악하고,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정비하는 것이죠. 하지만 버스준공영제 이후 정비사 인원이 줄고 환경이 열악해지면서 예방정비가 힘들어졌어요. 이렇게 되니 버스를 이용하는 시민들의 안전이 더욱 위험해진거죠”라고 설명했다.
한남운수의 최대 채권자였던 박복규씨가 부도 위기에 처한 한남운수를 2009년 인수하면서 정비사들의 처지는 더욱 위태로워졌다. 정비직원들의 임금 15%를 삭감하고, 버스 운전 가능한 대형면허를 가진 정비사 6명을 운전기사로 전환했다. “정비사들은 차고지에 주차된 버스를 차고지 내 정비공간으로 이동시키려는 목적으로 대형면허를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노선을 따라 버스를 운행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죠. 하지만 회사는 일방적으로 정비사들을 운전직으로 발령냈습니다. 견습기간도 주지 않고 운전일을 시키니 사고가 많이 났죠. 정비사들은 운전이 적성에 맞지 않으니 당연히 운전직으로의 전환에 반대했죠. 같은해 10월 다시 일부 정비직을 운전직으로 발령낸다는 소문이 돌면서, 정비직 전원이 대형면허를 반납하기로 했어요. 회사 측에서는 제가 이런 움직임을 다 주도했다며 계속 괴롭히다가 2010년 5월에 정직 3개월을 통보했어요. 저는 정직 기간의 마지막 달에 대형면허를 반납했고, 결국 회사는 같은해 10월에 운전직으로의 발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저를 해고시켰습니다”라고 말했다.

■ 마지막으로 선택한 천막농성…“여기서 물러날 수 없다”
해고당한 후 억울함에 술로 나날을 보내던 이씨는 이렇게 지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으로 피켓시위를 시작했다. “피켓을 직접 만들어 2011년 2월부터 회사 앞에서 2시간씩 혼자 피켓시위를 했어요. 회사 관리자들이 나와서 ‘그래서 밥은 먹고 살겠냐’는 등 비아냥대기 일쑤였어요. 지나가던 시민들이 ‘고생한다’며 여름에는 음료수, 겨울에는 핫팩을 건내주곤 했지만, 당시 민주노총 같은 상급 노동조합에 속해있지 않았기에 관심 갖고 찾아주는 사람들은 없었죠. 그러다가 2012년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버스지부 아래 정비지회를 결성하면서 동력을 얻어 사람들이 피켓시위 현장에 많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시민단체, 진보정당 등에서 저의 부당해고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었죠. 서울시의회 교통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서울시 행정감사 때 관련 문제를 제기하면서 관련 자료도 공개되고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동력삼아 곧 해결될거라 생각했던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씨는 아침마다 차고지 입구에서 피켓 선전전을 하고 서울시청 앞에서 시위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시민들에게 부당해고 문제를 알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천막농성을 결심한 이유다. “정비사들끼리 모여 협의한 끝에 회사 밖에 있는 시민들에게도 이 문제를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문제는 한 개인의 해고를 떠나 버스준공영제와 관련한 사회적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죠. 천막농성은 이러한 문제를 시민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기회라고 봤습니다. 한남운수 차고지 앞 한남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닙니다. 그 곳에 천막농성장을 차리면 시민들에게 알리는 효과가 클거라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그러면서 “천막농성은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어요. 재산도 다 날리고 오갈데도 없는 상황에서 ‘마지막 투쟁’이라 생각해 필사적이었어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저는 ‘목숨을 건’ 선택이었습니다. 작년 10월 경찰과 관악구청 공무원들이 찾아와 천막을 철거하려고 했어요. 워낙 절박했기에 제가 목에 밧줄을 묶고 한남교 아래 도림천으로 뛰어내리려고 했어요. 결국 노조원들과 지역주민들, 인근 서울대생들이 도와줘 농성장 철거는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구청이 농성장을 철거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천막농성이 지역민들과 버스 이용자들의 공감대를 얻고 있기에 쉽게 철거하지 못하는거라 생각합니다”라며 천막농성의 정당성을 설명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수백번 농성을 그만두려고 생각했다는 이씨는 여기서 물러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농성을 그만둔다고 해도 딱히 살아갈 방법이 없어요. 다른 버스회사에 재취업하려고 해도 이미 ‘블랙리스트’로 찍혀 있어서 어느 회사에서도 저를 고용하지 않을거에요. 다른 회사에서는 제가 나쁜짓 해서 해고됐다고 보기 때문에 저를 환영하며 받아주지 않겠죠. 쉽지 않아요. 생명줄이 끊겨 버린겁니다. 그리고 내일이면 나이 50인데 아무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일을 배우고 적응하는게 쉽지 않다고 봐요. 결국 앞으로 일할 수 없는 환경이 되었기에 이 투쟁을 더더욱 그만둘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 “함께하는 동지들이 있어 포기하지 않았다”
이씨는 함께 투쟁하는 동료들이 없었으면 진작에 농성을 포기했을거라 말한다. “혼자였으면 일찍이 무릎꿇었겠죠. 억울한 마음에 스스로 목숨을 끊던가 누군가를 해코지 하지 않았을까요. 동지들이 옆에서 저의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어요. ‘너 진짜 힘들겠다’ ‘울화통 터지겠다’며 제 처지에 공감해주는 동료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큰 힘이 된거죠. 그러면서 일주일 혹은 한 달에 한 번 농성장에 찾아오는 동료들을 보며 투쟁의 힘을 얻습니다. ‘좋은일 한다. 아무나 하는일 아니다’면서 생계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의 관심도 고마울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함께하는 동지들이 생기면서 이씨는 ‘연대’의 가치를 깨닫게 됐다. 처음에는 투쟁하는 모습이 궁금해 다른 농성장들을 찾았지만, 연대하면서 점점 투쟁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됐다고 말한다. “정직 당했을 때 시간 여유가 생기면서 여러 투쟁 현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어요. 먼저 가까이 있는 쌍용자동차 노조 투쟁과 기륭전자 투쟁 현장을 방문했어요. 가서 그들이 왜 싸우는지 지켜봤습니다. 2011년 김진숙 민주노총 위원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를 반대하며 35m 높이의 크레인 위에서 투쟁할 때에는 희망버스를 타고 무작정 부산으로 향했어요. 그 곳에서 ‘여성분도 저렇게 열심히 투쟁하고 있는데, 술만 먹으며 세월을 보내서는 안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면서 용기를 갖고 피켓시위를 시작하게 된거죠”라고 말했다.
농성이 장기화되면서, 이씨의 농성장에도 연대 투쟁을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지지를 외치며 연대방문한 사람들이 100명이 넘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정말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마음이 들었어요. 비록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이후에도 사태가 극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방문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 달 간 뿌듯한 마음이 들었어요. ‘연대의 힘’을 느낀 이후로는 몸이 고단해도 다른 농성장에 더 많이 방문하려고 했어요. 농성하는 사람들이 저처럼 연대를 통해 힘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죠. 여러 곳에서 함께 연대하면서 많은 분들을 알게 됐어요. 새로운 친구, 누나, 형님을 만나며 동지라는 ‘자산’을 쌓게 되었습니다”라며 웃음지었다.
■ 노동자가 종북 빨갱이?…“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공동체”
이씨에게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노동법과 헌법의 노동3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1998년 IMF 위기 이후 노동법이 개악되면서 노동자들의 삶이 어려워졌어요. 이명박, 박근혜 정권 들어오면서 상황은 더 악화됐습니다. 근본적으로 노동 현장에 노동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용자 측에서는 노동조합과 합의해 만든 단체협약마저도 지키지 않아요. 이미 노동환경이 최악인데 더 악화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에 노동3권이 어딨습니까. 말로만 노동3권이죠”라며 열악한 노동 현실에 분노했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을 이른바 ‘종북 빨갱이’로 낙인찍고, 파업 등 노동자의 기본권을 부정하는 사회 분위기에 대해 “어이없다”고 말했다. “저도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어봤어요. 어느 날은 술에 만취한 사람이 농성장에 찾아와 ‘이런 빨갱이 새끼들’ ‘니들은 북한으로 가서 살아야 돼’라며 행패를 부렸어요. 저 북한 안좋아해요.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는 말들은 이제 신경쓰지도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원리에 따라 행동합니다. 한 사람의 노동자인 동시에 집안의 가장으로서 민주적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해 제대로 배웁니다. 노동자들이 이야기 하는 것은 결국 ‘공동체’에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잘 살자는거죠. 우리 버스 정비사들은 버스를 정비해서 시민들을 안전하게 모시고, 다른 부문 사람들은 나름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같이 살자는거에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 “국민을 우습게 보는 대한민국, 진정한 국가가 아니다”
이씨는 부당해고를 당한 뒤 투쟁하면서 국가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굉장히 일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노동부는 노동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근로 감독관은 사업주들의 잘못을 제대로 관리하고 감독한다고 믿었죠. 하지만 노동부에 근로환경의 부당함을 호소해도 근로감독관이 현장에 잘 방문하지도 않아요. 언제 한번 잠깐 방문한 적이 있는데, 방문한 이후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어요. 근로감독관은 회사 측에 근로환경 개선을 ‘요청’할 뿐, 강제로 해라 마라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회사 측의 의지에 달렸다면서… 화가 나서 노동부 지청에 항의 방문도 했죠. 하지만 바뀐건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노동자들을 위한다고 만들어놓은 장치가 작동하지 않은거죠. 국가를 못 믿게 됐어요. 그리고 법치국가라고 해서 최소한 법을 중시할거라 생각했는데, 어딜가나 ‘법의 저울’이 평평하지 않다는걸 느꼈어요. 경찰, 검찰, 법원 어디에서도 제 목소리를 들어주질 않아요. ‘나 같은 사람들은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구나’라는 불편한 진실만 깨달은거죠”라고 말했다.
그는 목소리 높여 대한민국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국가가 하는 일에 국민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아요. 국가가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는데 어떤 국민이 국가를 믿고 따를수 있겠어요. 헌법 제1조에 보면 권력은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돼있는데, 국가는 국민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어요. 지금 대한민국은 진정한 국가가 아닙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씨가 생각하는 민주공화국은 모두가 배불리 먹으며 함께 살아가는 나라이다. 그가 보기에 힘들고 불공평한 삶이 만연해 있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여동생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여동생 자녀 중에 미숙아로 태어난 딸아이가 있어요. 팔, 다리, 치아 등 많은 부위에 건강상 문제를 안고 태어나 지금도 앞가림을 못합니다. 여동생 부부가 열심히 일하며 죽어라 돈을 벌지만 그 아이 병원비조차 마련하지 못해요. 늘어나는건 빚 뿐이죠. 제 여동생은 왜 저렇게 경제적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나 생각이 듭니다. 공평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여동생 가족이 어느 정도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끔 국가에서 도와줘야 하는데 그런 것도 마땅치 않아요. 진료 받으러 큰 병원에 한 번 가면 기본적으로 몇 십만원이 나가는데, 국가는 20-30만원 정도만 보조해줄 뿐이에요. 이러니 제대로 된 삶을 살기 힘들죠”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관료들과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를 꼽았다. “공무원들과 정치인들은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들 이외의 것들에 욕심을 부리면서 계속 비리를 저지르고 부패하게 됩니다. 가지면 가질 수록 더 가지려 하고, 부를 계속 쌓아가려는 것이죠. 예전에 방송에서 보니 우리나라 부패 수준이 심각한 정도이더라고요. 부정부패가 빨리 해소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권력을 가진 자들이 국민 위에 군림하려 들지 말고, 욕심을 버린 후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사람 위에 사람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생각을 항상 해요. 사람은 높고 낮음이 없다는 뜻이죠.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은 국민을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이 공무원과 정치인들의 역할이에요. 무엇을 가졌는지에 따라 국민을 차별하지 말고, 모두 똑같이 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인식이 정착될 때, 대한민국이 비로소 모두가 공평하게 먹고 사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이 되리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출처 : 경향신문 박광연 기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1091040001&code=9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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