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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무책임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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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무책임한 침묵

익명 (미확인) | 목, 2016/06/02- 17:24

노땡큐

무책임한 침묵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1981년 황석영과 김종률, 광주 지역 노래패는 5월18일을 그냥 지나 보낼 수 없었다. 그 전해 벌어진 항쟁을 기억하며 노래극을 만들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노래극에 삽입된 곡이었다. 계엄군에게 사살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야학을 운영하다 사망한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곡이었다. 둘은 연인이었다. 가사는 당시 서울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된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의 일부를 차용해 황석영이 붙였다. 곡은 이듬해 1982년 윤상원, 박기순의 유해를 합장하는 영혼결혼식에서 처음 공개됐다. 조악한 테이프에 녹음된 노래는 빠르게 번져나갔다. 5·18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올해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에 대한 국가보훈처의 입장이 나왔다. 알아서 따라 부르든지 말든지, 였다. 기념식에 참석한 황교안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쪽 인사들은 합창이 되어 흘러나오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따라 부르지 않았다. 완고하게 다문 입은 벌어지지 않았다.


뒤질세라 항쟁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전두환은 말했다. “나는 발포 명령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침묵과 그의 말 사이 간격은 좁았다. 항쟁의 마지막 날 새벽, 옛 전남도청 옥상에 있던 대형 스피커를 통해 광주 시내에 울려퍼졌던 “광주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진주해오고 있으니, 시민 여러분은 도청으로 와주십시오.” 목소리의 주인공 박영순씨는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 복역하다 6개월 만에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날 그녀는 마지막 방송을 한 뒤 내용이 적힌 쪽지를 삼켰다. 그 목소리를 들었던 이들은 죽기도 했고, 살아남기도 했다.


5·18의 어머니들이 세월호 어머니들을 안아주며 말했다.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통곡을 품은 자들이 서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입을 다문 자들과 입을 연 자, 그들은 5·18 광주에서 죽은 자, 살아남은 자들의 상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4살 남자아이 목을 관통한 총상, 주검을 집에 가져와서도 숨진 사실을 숨겨야 했던 이들의 비참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살돼 암매장된 비무장 민간인과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진압경찰과 군인 사망자를 바라보는 고통도 모른다.


그들이 침묵하거나 입을 놀리는 이유는 같다. 책임지지 않는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해 5월20일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사장에게 사직서를 낸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서슬 퍼런 시절에도 침묵이 부끄러워 펜을 놓았던 기자들이 있었다. 36년이 흘러 노래하지 않는 이 정부의 침묵은 어떤 부끄러움일까. 노래조차 부르지 못하는 곳에서, 노래는 주어다. 그러하기에 죽은 자가 앞서 간 길, 산 자들은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2016.5.28  한겨레21 '노땡큐'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이 글은 <한겨레> 2014년 12월5일치에서 ‘5·27 도청 방송’이 확인된 박영순씨 사례와 위키백과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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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책임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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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이 화제다. 표절은 타인의 글 일부나 전부를 베끼거나 모방하며 제 것인 양 외부에 공표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문제 된 작품의 문장들은 비전문가가 아닌 눈으로 읽어도 표절 아니라 부정하기 힘들더라.

그 작품과 작가의 소란에 한마디 얹으려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사족으로만 의견을 붙이자면, 고뇌에 찬 제보와 이어지는 성토는 문단 권력과 시장 이윤에 지친 한국 문학의 현재로 보인다. 숨 넘어가기 일보 직전 뱉은 울분의 자리임에 분명하다.

거기서도 바꾸지 못하면 한국문학은 표절을 한 장르로 인정하거나 수치심에 둔감하기로 작정했거나…, 둘 중에 하나일 거다. 그건 그렇고! 표절이 문제가 아니라, 복사의 시대는 아닌지 묻고 싶어졌다.

중학생 딸이 논술시험을 보았다. 문제가 이해되지 않아, 친구들에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더니 “답을 외워!”라는 조언을 들었다 한다.

딸은 논술이란 문제를 이해한 후 자신 생각을 쓰는 것이 맞다 믿기에 신념대로 시험을 보았다. 선생님은 딸을 불러 물어보았다. “너는 답을 외우지 않고 네 생각을 썼지? 읽는 동안 너무 재미있었다. 그래서 너에게 최대한 점수를 주기 위해 노력했단다.

그런데 좋은 점수를 주지는 못했단다.” 천편일률적인 외운 답 중에 좋은 말로 담백하고 나쁜 말로 거친 글이었으리라. 비논리도 한몫했을 것이다. 평소 말버릇대로 썼으면 분명 재미있는 발상이 담겼을 테지만, 좋은 점수는커녕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다.

선생님을 성토하려는 게 아니다. 선생님의 노고를 이해한다. 대학에서 강의 하나 하고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똑같은 딜레마에 처한다. 과제를 내 주면 대게 학생들은 자신들 생각이 아니라, 어디선가 나옴직한 글을 복사하고 붙여서 온다.

그래서 원칙을 세워준다. “컨트롤 씨(Ctrl-C)와 컨트롤 브이(Ctrl-V)한 글은 무조건 F학점이다. 아무리 어설퍼도 자기 생각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그러나 익숙지 못한 학생들의 글은 대학생이라 해도 봐줄 만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조금이라도 논리적 구조로 문장 뼈대를 세웠다 생각하면 여지없이 복사 문장이다. 한국 교육의 참혹한 무덤이다.



“무조건 외우라”는 복사 교육에서 사유는 자랄 수 없다. 학생만을 탓할 수 없다. 두 장을 겹쳐 고대로 쓴 생각을 정답으로 인정해주는데, 어떻게 외우지 않을 도리가 있는가.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다.

수백만 명 유태인을 가스실로 보낸 아이히만은 지극히 정상적 상태였음을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진단했다.

“적어도 그를 진찰한 후의 내 상태보다도 더 정상이다.” 평범했던 아이히만에게는 ‘말하기의 무능, 생각의 무능 그리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판단력의 무능’이 있었고 이 세 가지 무능은 대량 학살을 지시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기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감각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악마 되기는 생각보다 쉬운 일임을 반복되는 역사가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복사는 사유의 불능을 낳을 수밖에 없다. 사유의 불능은 판단의 불능, 공감의 불능으로 이어진다. 아이히만의 예가 극단적이었으면 좋겠다.

딸은 앞으로도 논술과목 답을 외우지 않겠다고 한다. 문제를 이해한 후, 자신의 생각을 쓰겠다 한다. 나무랄 데 없는데 걱정이다. 원칙과 양심을 지킬수록 풍요로운 미래와 반비례로 살아야 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응원할 수밖에 없다. ‘사람’으로 커 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2015. 623. 경기일보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원문보기>

표절과 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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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5/06/2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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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수많은 광주시민들은 계엄군에 의해 포승줄에 묶인 채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다. 상당수 시민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광주교도소에) 군인들이 배치되고 우리는 퇴근을 못 하게 돼 있었지. 저녁 무렵에 트럭으로 사람을 싣고 왔는데 사람을 퍼 놨다고 할까 뭐랄까… 쌀가마 자루처럼 던져 놓으니까. 누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처음에는 구별을 못 했어요.

민경덕 / 5.18 당시 광주교도소 의무과 직원

이렇게 끌려온 곳은 광주교도소였다. 5.18 당시 광주교도소는 계엄군의 작전본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순용 씨는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된 제3공수여단 11대대 지역대장이었다. 그는 당시 광주 교도소 곳곳에서 시신 20여 구가 암매장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시체를 수거해서 구덩이를 파고몇 군데 묻는 것을 제가 봤죠. 몇 구씩 두,세구 많게는 서,너구씩 구덩이 파기 좋은 곳에 담벼락에서 약간 떨어지거나 언덕길 높은 곳에 묻은 걸 제가 목격을 했죠.

신순용 (5.18 당시 3공수여단 11대대 지역대장)

지난 1995년 전두환 노태우 내란죄 등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검찰진술조서에도 광주교도소 암매장 증언이 나온다. 당시 3공수여단 본부대장 김 모 소령은 “전남대학교에서 광주교도소로 호송한 차량의 문을 열었을 때 2~3명이 밟혀 죽어 있었던 것을 확실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 당시 계엄군의 3공수여단 본부대장이었던 김 모 소령의 진술조서와 약도 (1995년 5월 29일 서울지검이 전두환의 내란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진술조서다.)

▲ 당시 계엄군의 3공수여단 본부대장이었던 김 모 소령의 진술조서와 약도 (1995년 5월 29일 서울지검이 전두환의 내란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진술조서다.)

2017년 11월 4일 옛 광주교도소에 대한 발굴작업이 시작됐다. 암매장에 관한 증언과 기록을 토대로 5.18기념재단에서 진행하고 있는 이번 유해 발굴 작업은 2009년 3차 조사 이후 8년 만이다.

▲5.18 행방불명자 암매장 추정지인 광주 북구 옛 광주교도소 북쪽 담장 인근 발굴 작업 현장

▲5.18 행방불명자 암매장 추정지인 광주 북구 옛 광주교도소 북쪽 담장 인근 발굴 작업 현장

5.18 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으로 신고된 건수는 441건이다. 이 가운데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행방불명자는 81명이다. 암매장과 관련된 군 기록이 전면 공개돼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군의 특성상 지시와 보고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직접 암매장에 가담했던 군 관련자에 대한 재조사도 필요하다.

뉴스타파 목격자들은 지난 한 달동안 암매장 지역으로 추정된 옛 광주교도소에서진행한 5.18 희생자의 대한 유해발굴 작업을 취재했다.


취재작가 김지음
글 구성 김근라
취재연출 김한구

금, 2017/12/29-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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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폄훼, 이렇게 시작되었다

진실의 주인은 누구인가?

유경남 5.18민주화운동기록관 학예연구사
 


5.18 민주화 운동에서 진실은 1980년 광주항쟁 기간, 그리고 '5월 운동'의 전 과정에서 끊임없이 요구·실천되었던 의제였다. '5.18 진실 규명'의 구호는 책임자 처벌과 함께 1980년 광주 문제를 해결하는 선결 조건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한국 민주화 운동의 주요 동력이었다. 민주화 운동의 주체들은 '5.18의 진실규명이 곧 한국의 민주화'와 직결되는 과제였다.

 

이에 1980~199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5.18의 진실을 억압하는 세력에 저항하여, 5.18의 진실을 밝혀내는 담론 투쟁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5월 운동'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5월 운동, 민주화 운동을 통해 1988~1989년 광주 청문회가 이루어졌고,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를 통해 5.18 항쟁의 사실들은 법적·제도적 차원에서 진실의 위상을 부여받았고, 정치적 복권과 기념사업 등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지만원을 비롯한 보수세력들이 '광주 사태는 북한 특수부대의 소행이다' 등의 5.18 왜곡 사례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실정이다.

 

1980년 신군부의 5.18 왜곡 – 왜곡의 기원

 

5.18 왜곡의 기원은 1980년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차지하는 계획에 따라 전국적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 5월 21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계엄군의 잔악한 진압이 원인이 되어 시민들의 시위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고 단순히 불순분자들의 유언비어에 의해 시위가 발생했다며 광주 시민들의 분노와 저항을 소수의 조종에 의한 것으로 폄하했다.

다음으로 신군부는 항쟁을 진압하고 6월부터 '김대중 음모론'을 조작해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김대중 음모론을 적용하여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을 처벌하는 공식적 죄목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당시 군부가 구속자들을 김대중 음모론으로 기소한 죄목들은 많은 증언을 통해 날조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유언비어론과 김대중 음모론은 '이창용 간첩 사건'과 같이 북한의 사주에 의한 광주사태로 귀결된다. 결국 신군부는 분단이라는 정치적 조건을 활용하는 반공주의에 5.18 항쟁을 집어넣어, 대한민국의 분열과 갈등의 요소로 낙인찍어 버렸다. 5.18 항쟁을 통해 남한 사회를 반공의 이데올로기로 몰아넣으며, 5월의 시위 상황을 광주지역에 한정시켰고, 광주 시민의 저항을 '지역 감정' 문제로 유폐시켜버렸던 것이다.

 

과거 청산 운동으로서의 5.18 – 왜곡의 조건

 

1980년 5월 27일 5.18 항쟁이 진압된 이후 5.18 유가족 및 관련자 그리고 지역민들은 그리고 다수의 민주화 운동 세력은 5.18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신군부 및 정부가 5.18의 사실들을 정치적으로 유폐시키고자 사용했던 '광주 사태'라는 함의를 '의거', '항쟁', '민주화 운동'으로 재정립하려고 노력하였고, 우리 사회는 이를 '5월 운동'이라고 말한다. 1987년 6월 항쟁은 5.18의 진실을 전국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1988~1989 '광주 청문회'를 계기로 관 주도의 진실규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요 관련자들은 진술을 거부하였고, 관련 자료에 접근하는 데 현실적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건의 진상들이 밝혀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김영삼 정부 시절은 5․18특별법이 만들어 지면서 전두환, 노태우가 구속되었고, 관련자들에 대한 법적 처벌이 이루어졌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이었다. 이렇게 5.18 항쟁을 폭력으로 진압한 전두환·노태우 등 사건 관련자들이 군사반란 및 내란죄로 구속되어 처벌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5월 21일 전남도청 앞 발포 명령, 지휘권 이원화, 외곽봉쇄 과정에서의 민간인 살상, 실종자 등의 문제 등이 미해결로 남았다. 이러한 미해결 과제를 해결하고자 노무현 정부는 지난 2007년 국방부 내에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하여 자체적으로 과거에 해결되지 못한 사건들을 재조사하여 규명하도록 했다. 국방부 과거사위는 국회청문회, 검찰 수사와 법원의 재판 등에서 공개되지 않았던 국방부 내부 자료를 수집·검토하고, 관련자를 인터뷰하는 등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진상에 접근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5.18 항쟁에 대한 다방면의 조사와 사법적 집행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보상 및 정치적 복권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5.18 항쟁에 대한 진실규명과 과거사 청산이 때로는 정치적 타협에 의해, 때로는 사법적 절차에 따라 진행되면서 많은 한계점이 지적되고 있다.

 

민주화 운동의 부인과 5.18 왜곡의 재등장 – 왜곡의 성격

 

5.18 항쟁을 필두로 한 국가의 진상규명 작업은 제주 4·3 항쟁, 70년대 민주화 운동 관련자, 여순 사건, 의문사 사건, 85년 미문화원점거 사건, 군산 오송회 사건 등 과거 독재정권이 조작했던 정치적 사건들의 진상규명을 가능하게 했다. 동시에 국가기구로서 국가인권위원회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이 설치되면서 과거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사건과 관련자들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과 명예회복 그리고 이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이 진행되었다. 또한 이러한 진상규명의 성과에 힘입어 과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했던 사람들이 복직되거나 개인적 명예를 회복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5.18 항쟁에 대한 왜곡의 경우 1990년대 후반 지만원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지만원은 "5․18광주폭동은 반미주의의 뿌리이며 북괴군의 적화전략이다"라든지 "5.18도 5.18묘지에 묻힌 민주열사도 다 좌익들의 자산이다" 등의 글을 인터넷에 유포시켰고, 다른 보수 웹사이트는 "왜 우리는 광주사태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가?"(2010년 1월8일), "집단발포를 한쪽은 5.18무장단체였다", "광주사태를 간첩이 선동했다고 보는 50개의 이유!"등의 글을 웹상에서 유통시켰다. 급기야 <12․12와 5.18>,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과 같은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처음 이들의 주장이 등장했을 때 5․18의 사실관계를 무시하여 자의적으로 배치·조작하고 있다는 점, "~했다는 이야길 전해 들었다"와 같이 간접 참여자의 증언을 직접 참여자의 증언으로 과장하고 있다는 점, 일부 보수세력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은 그저 미비한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대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이명박 정권 시절 '친북반국가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등장했고, 이들은 일련의 과거청산 작업을 "좌파진영이 정부권력을 끼고 '역사 뒤집기'를 진행하는 것"으로 부인했다. 또한 일련의 민주화 운동 관련자의 정치적 복권과 명예 회복을 국가정체성, 대한민국의 정통성 문제로 몰아갔다.

 

진실의 주인은 누구인가?

 

일련의 5.18 왜곡은 과거 신군부세력이 5.18 항쟁의 진실을 은폐하고 실상을 지역에 고립시켜 전국화시킴으로서 당대의 민주화 요구를 차단했던 정치적 전략의 산물이었다. 또한 최근의 왜곡 담론은 5․18의 진실을 폄훼하면서 궁극적으로 진보세력을 반정부·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함으로써 반대로 보수세력의 집결을 도모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깔려 있다. 특히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보수 단체들의 5.18 왜곡 활동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눈감아 주는 듯 했다. 박근혜 정부는 역사교과서를 국정화시키면서 일부 보수단체의 입장을 공식화하려 했다.

 

지만원의 왜곡을 배경으로 조선일보의 5.18 왜곡 보도, 인터넷 뉴스매체 <뉴스타운> 등 인터넷상의 왜곡이 사회 문제로 등장하자, 최근에는 이를 바로 잡고자 하는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학살의 책임자인 전두환이 5.18을 왜곡하는 내용을 담은 회고록을 출간하고 옛 전남도청 앞 전일빌딩에서 공중 사격한 탄흔이 무더기로 발견되면서, 밝혀지지 않은 사건들을 비롯한 5.18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가 주목받고 있다.

 

5.18 왜곡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하기 위해 비공개 문서의 공개와, 위원회 구성을 통한 재조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자칫 일련의 대응이 왜곡 담론과의 대결 구도를 형성함으로써 이들을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해 주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지난 10년의 보수 정권을 보면, 이들은 보수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해 다양한 이해관계를 하나로 귀결시키는 반공주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또한 정부가 주도하는 5.18담론은 정권에 따라 그 내용이 좌우되면서 지역적 갈등과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다.

 

2011년 5.18 민주화 운동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서 5.18 항쟁과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세계 인권운동으로서 공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5.18 담론이 사회적 문제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 스스로 5.18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유가족과 항쟁의 참여자 그리고 광주 지역민들이 바라는 것은 희생자와 유가족들이 제대로 인정을 받고, 우리 사회가 제대로 인정하고 공감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으로 제시했던 바와 같이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포함시키는 등 근본적인 권위와 역사적 당위를 인정해주는 것. 그리고 최근 추가적인 진실규명을 통해 제대로 된 사실을 밝히고 이를 전국에 다음 세대에게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5.18이 더 이상 지역 간 갈등의 주제가 아니라는 점을 사회의 구성원들이 제대로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올바른 역사로 남게 해야 할 것이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월, 2017/05/22-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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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혁명을 주장하고 계급을 얘기하는데, 고작 사랑 따위 타령을 운동씩이나 해야 하다니, 한심해서….” 기운 빠진 목소리가 기억난다. 그는 성소수자 인권운동가였다. 한숨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에 입바른 위로도 해주지 못했다. 감추어야 하는 감정과 감당했던 슬픔, 두려움에 대해서도 말했다. 정체성이 일상 속에 부대꼈다. 빚어낸 갈등이 발목을 오래 붙잡았다. 밝히지 못했기에 거짓말쟁이 같았다, 했다.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말해야만 하는 강박 같은 것이 있었어. 운동하면서도 나는 겉돌았지, 세상을 바꾸자고 얘기하면서도 말이야. 그런데 이제 다 밝혔는데, 또 드는 생각은… 언제까지 나는 정체성에, 사랑 따위에 묶여 있어야 하는지 말이야.”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애인 있어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고 시절, 책상 서랍 속 “언니가 좋아요”라는 고백 담긴 쪽지가 떠올랐다. 밸런타인데이, 누군가 아침 일찍 넣어둔 편지와 초콜릿들이 있었다. 선머슴 같은 외모 때문이었는지 쫓아다니는 여자애들이 꽤 있었다. 동성에 대한 애정이었는지, 이성을 대체하는 감정이었는지 굳이 따지지 않았다. 일종의 환경이고 문화였다. 무엇보다 나는 가슴이 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야기 듣던 다른 레즈비언 친구는 “당신한테 했던 고백 때문에 뼈가 녹는 고통을 당한 이가 있었을지 몰라” 했다. 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사랑이니까…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받고 싶은 것이 사랑이니까.


부채춤 앞에서 사랑을 외친 그대들

한국 사회는 서울시민인권헌장, 동성결혼 합법화, 퀴어 퍼레이드를 통해 성소수자의 사랑과 삶에 대해 이야기 중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다. 이야기 중이라고. 12년 전 인권활동가 대회를 처음 시작할 때 인권운동에서도 성소수자운동은 낯설었다. 성소수자는 사진 촬영에 담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서울시청을 점거한 성소수자들을 보았다.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이 들어간 서울시민인권헌장 선포를 거부한 서울시에 대한 ‘무지개 농성단’의 항의 행동이었다. 인권활동가들만 있는 장소에서도 얼굴 밝혀지기 꺼리던 이들이 혐오세력이 득실거리는 시청 안을 일주일 동안 당당히 점거했다. 감격스러웠다. ‘벽장 속에서 나오다’(come out of the closet)라는 ‘커밍아웃’이 이렇게 당당히 실현되는 장면이라니!


“남자친구 있어요?”라는 질문조차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배웠다. “애인 있어요?” 정도 질문이면 된다고 가르쳐주었다. ‘이성애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배제와 소외가 시작됨을 알려주었다. 그들로 인해 내 인생은 얼마나 풍요로워졌는지. 그 시절 고백한 그녀들이 여성이라서 두근거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모든 남성에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이유와 같았겠지. 사랑이 뭔지 아직 모르는데, 앞으로 무엇에 흔들릴지 내가 나를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아니지만, 너를 인정한다’는 어줍지 않은 타자의 말을 거두라. ‘고작 사랑 따위 타령을 운동씩이나 해야’ 하는 고뇌를 품은 이들이 곁에 있다. 국제사회에서 인권 등급이 거침없이 추락하는 ‘아몰랑’ 사회에서 유일한 위로가 되는 이들이다. 그들이 얼굴 내밀고 퀴어 축제를 벌인 오늘, 우리 모두의 인권 수준이 높아졌다. 그 힘은 정체성으로 인한 부끄러움과 갈등과 수치심 그리고 뼈를 녹이는 사랑에서 나왔다. “똥구멍으로 그 짓 하는 게 지금 잘하는 짓이냐”는 절망의 부채춤 앞에서 혐오보다 사랑을 외친 그대들. 세상은 사랑으로 바뀌지 않겠는가. 어쩌면 혁명보다 사랑!



2015. 7. 9. 한겨레 21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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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보다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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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5/07/13-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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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도 심지어 배우조차 떠오르지 않는데 제목과 줄거리가 뚜렷이 기억나는 드라마가 하나 있다. ‘그 넋의 그림자’라는 제목이었다. 여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다른 관계, 심지어 남편에게조차 아버지 흔적을 찾는다. 꼬이고 꼬인 갈등의 근본 원인을 헤쳐보니 아버지가 그리워 무의식중에 모든 관계를 아버지에 빗대고 있더라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꽤 어린 나이에 봤는데 왜 기억하는지 모를 일이다. 제목이 강렬했고 이해 불가능한 감정의 정체가 궁금했던가보다. 최근 들어 대통령을 볼 때마다 드라마 생각이 자주 난다. 저 양반이야말로 ‘그 넋의 그림자’에 포획된 딸이 아닌가.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집착으로 역사까지 바꾸겠다는…

사람은 집착의 동물이다. 내 오랜 화두도 ‘집착’이다. 사건과 현장에 대한 집착, 심지어 술에 대한 집착도 있다. 하루에 대여섯 번 설사하면서도 끊지 못하는 집착이니 문제는 장기에 있는 게 아니라 뇌에 있을 것이다. 무릇 성숙한 인간은 집착의 원인을 찾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에 대한 집착은 관계의 파탄을 낳고 부담감과 지울 수 없는 상처도 안긴다. 자식에 대한 집착은 사랑의 이름으로 포장된다. 연심에서 비롯된 집착은 스토킹이 되고, 폭력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여기에 대통령의 아버지에 대한 집착은… 역사를 바꾸겠다는, 오 마이 갓! 상상조차 못해본 상황에 이르렀다.


취임 이후 줄곧 궁금했다. 자기 아버지 넋으로부터 왜 저토록 자유롭지 못할까? 청와대 안주인으로 20대를 보냈으니 청춘이 없었을 것이다. 불행하게 양친을 잃은 안타까운 개인사도 안다. 그런데 그 이유만으로 설명이 될까. 심지어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 아닌가. 정말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대통령이 된 것일까. 이렇게 해석하니, 대한민국에 사는 한 방울의 나들은 도대체 무슨 존재인가 싶어, 낯이 뜨겁다. 왜 이 때문에 내가 이렇게 초라해지지?


세상은 의외로 복잡한 듯 보이지만 단순하다. 서로의 욕망이 뒤얽혀 있는데 욕망을 욕망이 아닌 듯 보이게 하는 것이 포인트다. 욕망을 공적 이익쯤으로 보이게 하는 능력들이 탁월하다. “내 아버지를 비밀독립군으로 불러라”라는 욕망과 자자손손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 이들의 욕망이 만났다. “지금까지 교과서는 좌편향이다.” “하나의 교과서로 공부해야 국론 분열을 막을 수 있다.” 반대하는 인간들은 원래 반대할 것이고, 갸우뚱하는 인간들은 그렇게 한두 번 ‘이상하다~’ 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우리 욕망을 얼마나 세련되게 잘 표현할 수 있을지 연구하도록! 그렇게 그들은 나름 설득력 있는 포장지를 뒤집어썼다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면 애초에 그런 것은 염두에 없을지도. 정말 중요한 것은 강한 주먹이다. “대항하려면 운동 좀 하고 나오든지, 아니면 꺼져! 물론 니들이 힘 기를 틈은 주지 않아.”


당신 직업은 효녀가 아니야


집권 이후, 어떠한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여기까지 온 뚝심이다. 교과서 국정화도 그렇게 할 것이다. 스무 살 청와대에서 배운 대로, 아버지가 나라를 통치해온 방식대로 그렇게 할 것이다. 김기춘 삼촌 없어도 나는 안 울어. 입맛 맞춰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나 그들 계산법에 들지 못한 채 유신으로 ‘커밍순’ 당하는 나는,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 울화가 치미니 불우한 가정사 가진 당신에게 모진 말 하고 싶네. 당신 직업은 효녀가 아니라 대통령이라고. 아버지 넋에서 벗어나야 철드는 거라고. 당신네는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 고.


2015.10.26 한겨레 21

박진(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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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넋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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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5/10/2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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