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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활동가 인터뷰] 민생희망본부 자원활동가 김홍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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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활동가 인터뷰] 민생희망본부 자원활동가 김홍진님

익명 (미확인) | 수, 2016/05/18- 15:16

[시민참여팀] 참여연대의 자원활동가는 상근 활동가들과 손발을 맞춰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10대 청소년부터 일흔이 넘으신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학생, 주부, 직장인, 은퇴자 등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원활동가들의 숨은 활약을 자원활동가 인터뷰를 통해 알려드립니다.

 

"책상에 앉아서만은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민생희망본부 자원활동가 김홍진님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자원활동가 김홍진

민생희망본부 자원활동가 김홍진님

 

 

 기나긴 휴일이 지나고 홍진님을 만났다. 활짝 웃는 표정, 어딘가 들떠 보이는 분위기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말부터, 인터뷰도 처음이고 참여연대 들어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아서 할 말이 많지 않을 것 같다는 말까지 쏟아내는 그를 보며 재미있는 대화가 될 것 같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그는 물론 기대 이상이었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A. 저는 24살이구요, 3학년입니다. 전공은 글로벌리더학부라고, 처음 들어보셨을 거에요. 예전에 법학과로 있다가 로스쿨 생기면서 없어졌거든요. 약간 대체하는 학과 느낌으로 법학과 연계해서 글로벌리더학부가 생겼어요. 전공은 법학이랑 국가정책이에요. (글로벌 리더로 거듭나시려고!) ‘글로벌’까지는 아니고, 대한민국 리더 정도....? 하하하하...
 참여연대에서는 민생팀에서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요. ‘소소권’이라고 해서 작은 권리들을 하나씩 지켜나가는 일을 말하는 건데요. 자료도 찾고 아이디어도 내고 그런 일을 하고 있어요. 아직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제가 낸 아이디어로 무언가를 해본 일은 없습니다. 그니까... 아이디어를 내긴 했는데 그게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어가지고...(웃음) 이제 막, 열심히!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Q. 무슨 아이디어를 내셨기에 채택되지 않으셨나요?
A. 대학교 학생회비 같은 경우에 4년 치를 한꺼번에 내고 그런 경우가 있는데 사실 그건 작은 권리가 아닌 큰 권리라서 이미 다른 분들이 다 하셨더라고요. 또, 커피숍 같은 경우에도 가게마다 가격도 다 다르고 용량도 다 달라서 애매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용량이나 이런 것들을 좀 규격화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제가 자영업자분들을 너무 힘들게 하는 것 같아서 포기한 적도 있었습니다.

 

Q. 3학년이면 사실 꽤 바쁜 시기일 텐데, 참여연대 자원활동가는 어떻게 지원하셨나요?
A. 제가 작년에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로 돌아오면서 먼저 제대한 친구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걸 봤어요. 저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공부하는 것도 물론 중요한데 그것보다 사회에 나가서 더 많은 경험을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책상에 앉아서만은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고 제가 공부를 하는 목적 자체도 사회참여적인 일을 하고 싶어서였거든요. 목적은 분명 학교 밖에 있는데 과정에서 너무 안에만 집중하면 의미가 퇴색될 것 같았어요. 또 제가 이쪽 일과 잘 맞는 사람인지 테스트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Q. 언제부터 공부의 목적을 사회 참여적·기여적인 가치에 두셨던 건가요?
A. 어릴 적 꿈도 변호사였어요. 인권 운동하는 변호사. 군대에 가면서 더 확고해 진 것 같아요. 군대에 있을 때 뉴스를 보는데 김무성 의원이 나와서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었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보여줬던 태도나 언행, 내용까지 너무 터무니없고 심지어 예의까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그런 사람이 대선 후보 중 지지율이 1위였거든요. 정말 당황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저런 사람이 대선 후보, 심지어 1위를 달리고 있는 걸까. 또 같이 군생활 했던 친구 중에 저와 생각이 비슷한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와 대화를 나누면서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정치가 중요하고 사회문제가 중요한 거구나. 사실 군대라는 사회가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구조기 때문에 자유나 인권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많았다고 생각해요. 

 

Q. 참여연대는 언제 알게 되신 건가요?
A. 군대 가기 전부터 알고 있긴 했어요. 아는 형이 여기서 6개월 정도 자원활동을 한 적이 있어서 그 때는 곧 군대에 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부러워만 했었어요.

 예전에는 참여연대가 운동을 엄청 심하게(?) 하는 단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솔직히 조금 꺼려지는 것도 있었고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까 전혀 그렇지 않더라고요. 극단으로 치우친 집단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언제 그걸 느끼셨어요?) 일단 간사님들이 인격적으로 너무 잘해주셨고, 어떠한 주장을 하실 때 근거에 정말 많은 공을 들이시는 걸 봤어요. 학술적인 근거부터 책, 논문 할 것 없이 꼼꼼하게 살펴보시는 모습을 보니까 신뢰가 많이 갔어요. TV에 나오는 피켓이나 이런 구호·문구는 자극적이잖아요. 그 구호에 맞는 근거들이 탄탄하다고 딱 느껴지니까 멋있다,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Q. 참여연대에서 하는 자원활동이 고민을 키워나가는데 도움이 되고 있나요?
A. 아무래도 주변의 불합리한 일들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또 발견하려고 한다는 부분에서는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최근에 저도 깜짝 놀랄 만한 궁금증이 하나 생겼었는데, 유아들이 차량에 탑승할 때 카시트 사용이 의무화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명백한 재산권 침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런 궁금증을 간사님께 말씀드렸더니, 건강보험도 사실 국가가 돈을 내도록 강제하는 건데 카시트도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볼 수 있냐는 말을 해주셨어요. 그 설명을 들으니까 이해가 가면서 이런 질문이나 고민들이 생길 때마다 여쭤볼 분들이 계신다는 것도 좋았고 명쾌하게 설명해주시는 것도 좋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제가 자원활동하는 것도 이런 일들이 나에게 맞는 일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측면도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간사님들 일하시는 것 보면 겁이 나는 부분도 있어요. 워낙 많은 일들을 처리하시고 휴식을 취하기도 힘든데 버틸 수 있을지, 남을 위해 일한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을지. 고민되는 부분들이 있죠.

 물론 제 성격 때문이라도 그런 생각을 길게, 깊게 하진 않을 것 같아요. 이런 활동을 계속 하고 싶은 이유가 제 스스로한테 있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마주한다거나 사회의 부족함·부당함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거나, 뭐 그런 것들이 있으면 저 스스로가 참기 힘든 느낌을 받거든요. 나라는 사람은 아마도 절대 못 참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혼자서 행동하지 않고 있는 시간들이 더 힘들 것 같아요. 

 

Q. 활동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은 생각인가요?
A. 아직 확실하게 결정된 건 아니지만 다음 학기 휴학도 생각하고 있어요. 사회문제 관련한 일들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싶은 생각도 있구요. 물론 참여연대에서 하고 싶긴 한데, 간사님들이 받아주셔야 할 수 있는 거니까. (웃음) 활동하는 건 좋을 것 같은데 참여연대에서 일할 때 사실 조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요. 아무래도 제가 간사님들한테는 손님이다 보니까 갈 때마다 엄청 챙겨주시거든요. 그래서 자주 가고 싶어도 부담될 것 같아서 마음이 쓰이는 것도 있고. 또 사실 참여연대 사무실 채광이 좋잖아요, 낮에 일하면 햇살 때문에 나른해지는 기분도 있어서 졸리기도 하더라구요. (웃음) 빨리 간사님들과도 친해지고 뭐 분위기도 익숙해지고 그러면 더 활기차게 일할 수 있을 것도 같아요. (웃음)

 

Q.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으셨던 것 같다.(웃음) 보통 인터뷰 말미에 꿈을 물어보고 끝내는데 홍진님은 특별히 간사님들께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으시니, 꿈과 함께 간사님들께 하고 싶은 말을 들어보고 싶다.
A. 꿈...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싶은 공간에서 무엇이라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중에 내가 죽었을 때 내 장례식에 올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나에게 대해서 말을 할 때, 그래도 홍진이는 참 여러 일들을 이뤄냈고 사회에 도움이 된 사람이었다고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그게 꿈인 것 같아요. 

 간사님들께 하고 싶은 말은...간사님들 안보시겠죠....? (웃음) 
 항상 고생도 많으시고, 다크서클도 깊게 보이고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먼저 전하고 싶어요. 그럼에도 제가 갈 때 마다 챙겨주시는 것도 정말 감사해요. 이제부터는 좀 막대해 주셔도 좋다, 알아서 커나가겠다, 뭐 이런 말을 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웃음)


 인터뷰가 끝난 후 너무 편하게 대해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하는 그를 보니 왠지 뿌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무겁고 거대한 이야기만으로 인터뷰가 채워지지 않아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기도 했다. 담론이나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 ‘소소권’, 다시 말해 일상의 권리들을 고민하고 실천해나갈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한 발자국의 의미를 아는 그가 목적지까지 지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걸어 나갔으면 좋겠다. 꼭 꿈을 이루길 바라요, 간사님들과도 더...!
  

 

작성 자원활동가 박영민 (활동가를 위해 활동하고 싶은 대학생)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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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사 처우 개선을 위한 10년의 걸음

_곽경인 서울사회복지사협회 사무처장

 

인터뷰 및 정리 | 이경민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지난 9월 17일, 제18회 사회복지의 날을 맞아 여러 지자체에서 기념행사가 진행되었다. 1년에 하루, 기념일에 열리는 화려한 행사 뒤에는 365일을 하루 12시간 노동, 저임금, 불안한 고용을 경험하는 사회복지사들이 있다. 수년 전, 사회복지 공무원이 잇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자 사회복지사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처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으나,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회복지사들이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새정부는 사회복지 분야에서 상당한 규모의 일자리를 만들어내겠다고 계획하고 있다. 양적인 증가가 예상되는 가운데, 과연 사회복지사 노동의 질적인 개선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회복지사의 처우 개선을 고민하고, 개선에 앞장서 온 곽경인 서울시사회복지사협회 사무처장을 만나 문제의 원인과 해결을 위한 노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참여연대

자기소개 부탁한다

현재 서울시사회복지사협회(이하 서사협) 사무처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올해가 10년차다. 2010년 7월 결성된 서울시사회복지단체연대회의 사무국장 7년째 맡고 있다. 연대회의는 2010년에 조직한 회의체인데, 현재 서울지역 17개 직능협회가 회원단체로 참여하고 있으며, 서울시민의 복지향상을 위해 사회복지시설 직원 처우개선과 운영보조금 현실화를 위해 협력하고 있는 연대체다.

 

서사협은 어떤 활동을 하는 곳인가?

서사협은 서울지역 사회복지사 약 9천 명이 함께하는 회원조직이다. 사회복지사의 권익향상과 전문성 향상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사회복지시설 단일임금체계 수립, 사회복지정책 제안, 사회복지사 법정 보수교육 실시, 회원조직사업 등의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1년에 160회를 진행하고 있는 사회복지사 보수교육은 매년 약 10,000명이 교육을 받고 있으며, 전국에서 교육 잘하기로 소문나 있다. 질 높은 교육을 위해 좋은 강사와 커리큘럼 개발에 노력하고 있다.

사회복지사의 처우개선을 위한 성과로 최근 5년간 서울시와 함께 전국 최초의 사회복지시설 단일임금체계 도입을 마무리했다. 몇 년전만 해도 사회복지의 각 영역, 장애인, 아동, 노인 등이 서로 다른 임금체계를 갖고 있었으나 이를 하나의 임금체계로 통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아쉬운 점은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가 책임지고 있는 사회복지시설과의 임금격차가 심해지고 있는 점이다. 전국 어디서 근무하던지 어느 분야에서 근무하던지 교사나 공무원과 같이 하나의 임금체계를 적용받는 것이 꼭 필요하다.

 

서울시 사회복지사의 임금과 처우가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사회복지사는 근로기준법에 의해 특례 업종에 속한다. 사회복지사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근로기준법 제59조 대통령령에 따라 사회복지사업은 특례 업종에 속하고 있어 사회복지시설 직원들의 장시간 노동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관련하여 지난 6월에 서사협은 한국사회복지사협회(이하 한사협)와 함께 사회복지사업을 근로시간 특례업종에서 제외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9월초에 사회복지계가 모두 모여 국회에서 토론회를 진행한 바 있다. 사회복지사업의 근로시간 제외 요구가 많은 만큼 관련 법률이 개정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사회복지사업은 소규모시설이 많다.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서울시 1,500개 사회복지시설 중 5인 이하 시설이 약 53%이고, 지역아동센터, 아동그룹홈, 보호작업장, 주간보호센터, 사회복귀시설, 노숙인시설 등이 대부분 2~4명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10인 이하의 시설까지 합산하면 약 70%에 달하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렇다보니 근로기준법을 지키며 좋은 노동환경에서 운영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해결과 대안이 필요한 상황이다.

 

ⓒ서울시사회복지사협회

 

노동자로서 사회복지사가 의무와 권리 이행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사회복지 노동조합의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직률이 미미하다. 현실적인 대안으로 사회복지사협회 조직 강화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서사협에서는 근로기준법 등이 바뀔 때마다 사회복지시설 노무 가이드북을 만들어서 배포하고 교육을 하고 있다. 2015년에는 노무사를 보수교육 강사로 섭외해서 1년에 60회 정도 근로기준법, 노동권 등의 주제로 의무교육을 편성하기도 했다. 사회복지사를 양성하는 교육계에서도 노동에 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본다. 대학교육과정에서 노동권 교육이 너무 부족하게 이뤄지다보니 노동에 대한 이해 없이 복지현장에 투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가 사회복지 영역을 포함한 공공부문 일자리 확충과 사회서비스공단 설립 등의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어떻게 평가하는가?

사회서비스공단은 보육과 요양분야에 꼭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정신건강복지센터와 같이 고용불안에 처해있는 기관들은 광역단위의 공단에서 운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공단이 생기면 임금뿐만 아니라 노동환경의 개선도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사회서비스공단이 기존시설을 견제할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한다면 우리나라 사회서비스 분야의 질적 개선이 가능해 질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회서비스공단이 양적인 측면에서의 논의가 아닌 보다 현장중심으로 접근해야함을 강조하고 싶다.

 

활동하면서 겪는 어려운 점 또는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다면?

지난 5년간 서울시와 단일임금체계, 보조금 현실화, 위탁 문제 등의 내용으로 협의 해 왔으며 성과도 있었다. 그 중 서울시 사회복지시설 단일임금체계는 사회복지사의 처우개선 역사에 큰 의미를 가지는 일이며, 앞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기를 기대해 본다.

9천 명의 회원 확대, 17개 사회복지직능단체와의 의견 조율, 서울시 담당 공무원들과의 협의과정 등이 늘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각자의 입장에서 임금문제를 접근하고 주장할 때,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 어려웠다.

 

향후 활동계획은 무엇인가?

전국적인 사회복지시설 단일임금체계를 만드는 게 꿈(?)이다. 서울에 사회복지시설 직원이 1만 3천 명이 있다. 이 중 9천 명은 서울시 단일임금체계 적용을 받는다. 나머지 4천 명은 여전히 적용받지 못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지역아동센터, 아동그룹홈, 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있다. 아동그룹홈 관계자들은 현재 광화문 앞에서 2주째 노숙농성 중이다. 지역차별 없이, 영역 상관없이 하나의 임금체계를 적용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리고 서사협에서는 2012년부터 기관방문을 시작했다. 첫해는 약 300곳을 방문하였고 작년에는 700곳을 다녀왔다. 회원들을 만나 복지현장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리고 조직화 하는 것이 회원조직의 가장 기본이라 생각한다. 회원들과 함께 성장하고 회원들의 생각이 협회의 정책이 되는 조직이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다.

일, 2017/10/01-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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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에서 움직이는 자원활동가를 모집합니다.   ​사람들에게 꼬옥 필요한 환경과 관련한 정보를 알기 쉽고 읽게 쉽게 영상이나 인포그래픽, 카드뉴스등의...
목, 2015/08/20-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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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열_총장

 

환경정의 먹거리팀은 먹거리정의적 관점에서 생산자-유통-정책-소비자들을 인터뷰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생산자대표로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김정열 사무총장님을 관악구 사무실에서 인터뷰했습니다. 멀게 만 느껴지던 농업에 대한 궁금증을 쉽게 설명해주셔서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인터뷰 재밌게 읽어주세요.

 

-가족들과 자주 집밥을 드시는지 궁금합니다.

보통 평일에는 전여농 사무실에 있고 주말에 집에 내려가기 때문에 그때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어요. 저는 상주에서 유기 벼농사를 하고 있어서 남편이 농사일을 하고 있고 저는 사무실에서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일을 하고 주말에 집에 내려가요. 내가 맡은 일이기 때문에 임기 동안은 열심히 해야죠.

 

-의식주 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당연히 농사짓는 사람이기 때문에 먹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여농 사무총장 하기 전에 언니네 텃밭을 6년 정도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먹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건강뿐만 아니라 ‘내가 먹는 것이 나’라는 말도 있듯이 그 사람을 규정하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요즘은 먹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많아요. 안타깝게도 우리 아이들과 주변에 젊은 사람들만 보아도 먹는 것은 패스트푸드같이 정말 간단한 것을 배만 부르면 될 정도로 먹고 있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에게 먹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먹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정신세계까지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른이 되어서 육식을 좋아하는 사람, 채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보면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돼요. 그런 것을 보면서 먹는 것 자체, 먹는 과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저의 남편은 채식주의자에요. 7-8년이 되었는데 제가 볼 때는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채식을 한다는 것은 생명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고 자기 성격이나 내면도 더불어 변하겠죠. 꼭 음식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런 사상을 갖고 있으니까 태도도 변하고 먹는 것을 추구하다 보니까 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에요.

 

-그런데 요즘은 그런 의미가 많이 퇴색되는 거 같아요.

지금 사회시스템을 따라 살다 보면 먹는 것에 집중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거기에도 여러 가지 모순이 있죠. 예를 들면 여성 식량주권 지킴이단이 식량문제를 같이 의논하기 위해 여성노동자분들을 만나는데 그럴 때 그분들이 호소하는 것은 “우리도 먹는 것에 신경 쓰고 싶다. 바른 먹거리, 제대로 된 먹거리, 원재료 사서 제대로 된 먹거리 아이들에게도 먹이고 싶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지 못하다.”라는 것이에요. 제 생각에는 운동에 약간 소외감도 느끼는 것 같아요. ‘이런 운동하는 사람은 시간이 있고 여유가 있는 사람 아닌가.’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먹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것을 줄여서라도 먹거리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하지만 앞으로 계속 만나서 협의해야 하는 부분이에요.

 

-농사를 짓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제가 49살인데 농사를 지은 지 25년 정도 되었어요. 상주 농민회를 창립하면서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간사로 들어갔고 그때 지금 살고 있는 마을에 자리를 잡게 되었어요. 그때 100평 정도 텃밭 농사를 시작해 결혼하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애초에 농민운동을 하려고 했었고 농민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농사를 지은 것이죠. 대학교 때 학생운동을 했었고 ‘학교를 졸업하면 무얼 할까’ 하다가 농민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대학교 1학년 때 농활을 갔었던 경험이 저는 너무 좋았어요. 그전에는 농사를 접하지 못했고 농활 가서 접하게 되었거든요. 처음 호미를 잡고 일을 하는데 그곳에서 일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때의 경험이 되게 좋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아마 난 전생에 농부였나 보다. 처음 시골에 왔는데도 너무 좋다’고 말하고 다녔어요. 농활의 경험이 농민 운동을 하도록 이끈 것 같아요. 그때는 농사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지 못하고 무모하게 내려갔어요.

 

-농업이 한국 상황에서 소외된 것처럼 느껴지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농업의 소외는 전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발달의 역사가 그러하기 때문이죠.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농업은 소외되고 다른 기계나 산업들이 발달하는 게 자본주의 발달 과정이잖아요.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농업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국가들이 많아졌다. 왜냐하면 먹거리가 가장 중요한 국민들의 생명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이에요. 유럽 같은 경우 농민 보호 정책도 많이 하고 수치로 보면 식량자급률이 미국과 유럽은 거의 백 퍼센트 공급을 합니다. 이 또한 식량 자급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이 24-25%인데요, 약간 올라갔다고는 하지만 나머지 75%는 수입해서 먹는 거죠. 먹거리 자체가 위험한 상황이고 농업을 장려하고 발전시켜서 국민들이 식량 자체를 양적인 측면에서 확보 해야 하는 데 우리나라 정부는 그렇지 않아요. 여러 가지 농업 개방정책을 80년대부터 펼쳤고 최근에 여러 가지 FTA, TPP를 시행하려고 합니다. 자유무역협정을 맺을 때마다 정부는 농업이 항상 피해를 본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다른 산업을 위해 농업이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논점입니다. 농업이 과연 희생을 전제로 해야 하는 산업인지 생각해봐야 하고 농민을 위한 정책을 어떤 게 있는지 대책이 없습니다. 잘 모르는 시민들은 농민들을 이기주의로 인식하죠. 이런저런 농업 지원을 한다고 하지만 현실적인 지원 대책도 아니고 소수의 농기업이라 든지 소수의 대농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쓰고 있어요. 다수의 소농들을 희생시키는 정책을 쓰고 있는 거죠.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양적인 문제에서 식량 확보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정부가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그것조차도 쉽지 않습니다. 언론들을 봐도 사 먹으면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해요. 그러나 사 먹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가 양상 될 수 있는데 돈만 있으면 되는 것처럼 간단하게 말하는 거 같아요.

 

-한국에서 농민과 소수자인 여성 농민의 현안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우리나라 농민은 지금 인구의 6%, 280만 명 정도입니다.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에요. 제가 25년 전에 내려갔을 때는 7-800만 명 정도였으니까요. 사실은 농업 희생 정책 때문에 줄어들 수밖에 없죠. 농사를 짓겠다는 후배 세대가 없잖아요. 10년 뒤에는 농민이라는 사람 자체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해요. 안타까운 상황이죠. 그중에서 특히 여성 농민은 더욱 어려워요. 농촌에는 전통적인 문화가 가부장적이니까요. 지금 많이 변하긴 했지만 농촌에는 남성 중심, 가부장 중심의 문화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전여농이 89년도에 만들어져서 제일 먼저 한 이야기가 ‘여성농민’이란 말을 한 거예요. 이런 계급적 집단을 칭하는 용어가 그전에는 없었어요. 여성농민 단체가 몇 개 있는데 전국적인 조직 모임인 ‘농가주부모임’과 ‘생활개선회’가 있어요. 우리가 보기에 여성농민은 농가 주부도 아니고 생활개선회도 아니거든요. 여성이면서 농업에 종사하는 여성농민이죠. 전여농이 처음으로 여성농민이라는 계급적 집단을 드러낸 것입니다. 여성이 있긴 있지만 사회적으로 대두된 적이 없었어요. 우리는 분명히 여성이면서 농민인 하나의 계급입니다. 생산의 주체인 것을 인정하고 우리 스스로도 그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생산의 주체, 삶의 주체에요. 그 속에서 우리의 활동들이 시작되는 것이에요. 가까이서 보고 이해하시는 분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저희를 지지해줍니다. <언니네 텃밭> 만들면서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면서 중요하다는 것이 알려지고 지지,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 알려져 감사해요.

저희는 여성농민에 대한 정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어요. 내년이 여성농업인 육성 5개년 기획 4차를 만드는 해라서 전여농도 어떤 정책이 여성농민에게 도움이 되는가에 대해 고민 중에 있습니다. 현재는 두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 여성 농민을 공동 경영주로 인정하는 것, 두 번째, 행복 바우처 확대가 그것입니다. 요즘은 지원과 파악을 위해 농가 가구가 다 경영체 등록을 해야 해요. 그런데 보통 부부가 농사를 지으면 남편은 경영주가 되고 부인은 ‘경영주 외 농업인’으로 등록이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당하다고 보지요. 남편이 경영주면 부인도 경영주이지 외 농업이 아닙니다. 때문에 공동경영주가 맞다고 문제 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성농민들은 존재가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있고 농업 인력으로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요. 이 부분이 고쳐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행복 바우처는 지자체가 진행하는 것인데요, 여성농민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문화적 소외가 심합니다. 여러 가지 여건상 문화적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에 소외된 여성 농민에게 문화 소비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제도입니다. 현재 경기·강원·충북에서 시행 중이에요. 금액은 크지 않지만 우리는 중요하다고 봅니다. 다른 도로 확산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모르는 농민들이 많기 때문에 홍보도 적극적으로 시행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그리고 생산자로써 식량주권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식량주권은 ‘먹을거리가 중요하다.’라는 의제를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확산하는 것입니다. 먹거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기 때문에 농업, 농민에게도 새로운 접근이 될 수 있어요. 먹거리가 공장에서 찍혀져 나오는 것이 아니고 농업의 과정에서 생산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농민이라는 사람이 있어야만 하고 이 먹거리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농업도 안정이 되어야 합니다. 농민에 대한 지속 가능한 삶이 보장되어야만 먹거리 자체가 안전해지는 거죠. 결국 인식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어요.

식량주권 운동은 이런 것들을 서로가 같이 공유하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운동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잖아요. 식량주권 운동이 사회를 보다 더 아름다운 사회, 인간적인 사회, 조금 더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데 있어서 식량주권으로 접근하는 것도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보다 더 나은 사회로 바꾸기 위한 것이니까요.

농민들한테는 식량주권 운동을 하면서 농업의 가치, 농민의 가치를 우리 스스로 더 깨닫게 되기도 하고요. 우리 농민은 ‘공판장에 물건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우리 이웃에게, 아는 사람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 해야 하는 사람이구나.’ 라는 사명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식량주권 운동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식량을 생산하는 농업이 생계, 하나의 직업만은 아니다. 이 농업을 통해서 내가 또한 더 변화 발전될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먹거리 정의(먹거리가 생산, 유통, 소비의 과정에서 모두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의 관점에서 현 농업문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먹거리 정의 개념은 언니네 텃밭이 추구하는 농생태학 개념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농생태학은 생산적인 개념인데요, ‘지금과 같은 농업방식은 옳지 않다.’는 것이 주요 골자입니다. 현재의 농업방식은 계속 자연을 착취하고 자원을 낭비하는, 즉 화학비료와 농약을 많이 사용하면서 땅을 착취하는 농업 방식이라는 거죠. 생산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하는 것들이 더욱 땅을 악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토양 자체가 온전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런 농사가 계속되면 지속 가능하지 못 하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농생태학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생산과정에서부터 그런 게 있어야 하고 유통과정은 지금과 같이 사슬이 긴 구조 때문에 자원의 낭비가 심해지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알 수 없고 농업이 산업으로 변질되는 것이죠. 분배의 문제도 많이 고민해요. 환경정의와 할머니네 텃밭 하면서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을 제공하는 것 또한 식량주권 운동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하다고 생각했어요. 소외되고 질 좋은 음식을 섭취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건강한 먹거리가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식량주권 운동이어야 하고 국가적으로 그런 정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니까요. 이런 것들이 먹거리 정의라 생각하고 식량주권운동은 그것들을 다 포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땅콩 호박이나 방울 양배추같이 익숙하지 않고 새로운 채소들이 시장에 나오고 있어요. 이런 것들이 농민들에게 도움이 될까요?

그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토종씨앗 이야기를 할 수 있겠네요. 전여농에 토종씨앗 지키기 운동이 있어요. 씨앗은 농사의 시작이며 끝이라 할 수 있죠. 이 씨앗이 이제는 농민들 손에 없고 다 기업의 손에 들어가 있습니다. 기업이 농사 자체를 좌우하게 된 거죠. 농민들이 원하는 농작물을 심는 것이 아니라 기업에서 판매하는 씨앗을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업들은 외국계 기업이에요. 그래서 새로운 품종의 씨앗이나 가격이 비싼데도 살 수 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예를 들어 작년에 심었던 고추 품종을 심으려고 했는데 기업에서 안 팔면 심을 수 없고 가격을 올리면 살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요즘 보면 고추씨가 한 봉에 천개 정도 들어있는데 2-3만 원이었는데 작년부터는 한 봉에 10-15만 원 씨앗이 나와요. 토마토 씨는 그 보다 더 비싼 씨앗도 있죠.

농민들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종자를 개량시켜 왔는데 기업에서 파는 씨앗은 불임 종자여서, 그다음번에는 나오지 않게 만들어요. 갈무리를 해 다음 해에 심어도 원하는 만큼의 수확량과 품질의 작물을 수확할 수 없습니다. 토종종자를 지키는 것이 그래서 더 중요한 것입니다. 토종종자의 가치를 소비자들이 알아주어야 합니다. 수량도 적게 나오고 모양이 떨어지기도 하고 단점이 있지만 이 가치가 중요하기 때문에 지켜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농민들만으로는 부족하죠. 토종종자의 가치를 인정해 줄 소비자가 필요해요.

 

-앞으로의 활동 목표는 어떻게 되시나요?

여성농민이 농업 생산에 있어서 주체라는 것을 사회적으로 인식 받는 것이 제일 큰 목표입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 여성농민회 조직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고요.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아요. 이제는 활동할 여성 활동가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이 활동 자체가 정의로운 운동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전여농 총장 임기가 끝나면 지역에 내려가서 토종씨앗 지키기 중심으로 소비자들과 어떻게 교류할까 고민입니다. 요즘은 상품생산으로써 농사가 아니고 여러 가지 소통, 교류 더 나아가 치유 이런 것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농사일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 힘든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은 자기 치유를 경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저도 농사일을 하면서 마음으로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이런 마음으로 토종 텃밭이든지 토종으로 농사짓는 것을 가지고 지역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FTA와 TPP가 궁금하다면?

푸드앤저스티스 박진희 인터뷰 보기

수, 2015/08/26-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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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정의 먹거리팀은 먹거리정의적 관점에서 생산자-유통-정책-소비자들을 인터뷰하고 있습니다. 먹거리 정의는 생산자에서 소비자에 이르기까지 혜택과 위험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공유되고 보장되어야 함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생산 노동자들의 인권도 정의로워야 먹거리 정의가 실현됩니다. 마지막 인터뷰로 생산자의 관점에서 지구인의 정류장을 방문해 농장 이주노동자와 크메르 노동권 협회 자원봉사자 무니 뭇씨를 인터뷰했습니다. 지구인의 정류장은 안산을 중심으로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노동법 교육과 비디오 강의, 한국어 교육 등을 진행하는 인권단체입니다.

*번역은 무니 뭇씨가 진행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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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윈칸야라고 합니다. 2013년 4월부터 한국에 들어와서 일을 했습니다. 논산에서 딸기, 상추, 양파, 콜라비 등 다른 채소들을 기르는 농장에서 일을 했어요. 한국에 들어온 계기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족생활을 도와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은 일을 하지 않고 농장에서의 일을 법적 해결 중에 있습니다.

한국생활에서 어떤 장단점이 있었나요?

장점부터 말하면 가계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서 번 돈으로 고향에 집도 새로 짓고 밭도 살 수 있었어요. 그리고 채소 심는 방법들을 배울 수 있었고요. 하지만 농장사장은 하면 안 되는 일을 너무 많이 시켰습니다. 남자가 들어도 힘들 비료 등을 혼자 나르게 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월급을 계약금 보다 덜 주었어요. 기숙사비도 너무 조금 주었고요. 거기서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는 건 힘든 일이었습니다. 법적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지만 잘 될지는 모르겠어요. 타협하려고 한 번 만났고 다음 달에 또 만날 예정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임금문제 때문에 고생하던 중 같이 일했던 사촌이 지구인의 정류장을 알려주었어요. 덕분에 김이찬 선생님을 통해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법적인 문제가 빨리 해결 되서 다시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일단 한국에서 체류할 수 있는 3년의 기간이 다 끝나면 고향에 가서 장사 등을 해서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 갈 예정입니다.

(※관련 비자의 체류기간은 3년이다. 고용주가 연장 해줄 경우 최대 1년 10개월 추가적으로 체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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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무니 뭇이고 2009년에 일을 하기 위해 처음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도금회사와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4년 5개월 간 일을 했고 현재는 한국의 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는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가족을 도와주기 위해 들어왔고 후에는 저의 인생을 바꾸고 싶어 대학을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지구인의 정류장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지구인의 정류장과 크메르노동자협회는 분리되어있습니다. 크메르 노동자 협회는 지구인의 정류장을 모태로 하고 있으며 2013년에 분리되었어요. 지구인의 정류장에서는 김이찬 선생님이 노동법 강연을 주로 해주고 계십니다. 비디오 교육과 한국어 책읽기 모임, 안전 교육도 정기적으로 진행되고 있어요. 크메르 노동자 협회는 여성쉼터와 남성쉼터를 분리해서 사용하고 있고 외부 기금 없이 크메르인들의 회원가입비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조합 회원이 아닌 크메르인들에게는 하루 2000원을 내면 머무를 수 있고요. 저는 크메르 노동자 협회 1기로 활동했었고 지금은 학교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지구인의 정류장 상근활동을 하고 있진 않아요. 대신 남성쉼터에 거주하면서 반장 역할을 하고 있어요.

 

한국생활에서 어떤 장단점이 있었나요?

본국과 한국을 왔다 갔다 하며 사는 것은 괜찮지만 완전히 정착하고 싶진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고생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가능하면 고향에 가서 직업도 찾고 결혼도 하고 또래 친구들처럼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관리자 역할을 하는 것도 힘들었고요. 크메르 노동자 협회의 설립의의 등을 매번 설명하고 있지만 정착하지 않고 가는 사람들도 있어서 전달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또 공동체 생활의 규칙을 잘 지키지도 않는 사람들도 있고요. 그런 경험들 덕분에 앞으로 사람으로서 사는 방법과 공동으로 사는 방법 등을 알 수 있었어요. 친구 만드는 법도 그렇고요.

 

 

매년 많은 수의 이주노동자들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정당한 노동의 가치와 기본적인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인권이 보호되지 않는다면 먹거리 정의는 실현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관련 기사

-이전 인터뷰들

소비자_영양교사 지니

정책_전여농 사무총장 김정열

유통_푸드앤저스티스 지니스 테이블 박진희

 

수, 2015/10/14-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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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우선,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동화 저는 이동화 혹은 셀림이라고 하구요. 민변에서는 2007년 1월부터 근무하고 있고, 국제연대위와 국제통상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사무처에서는 회원팀, 입법감시TF 등 여러 가지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안혜성 저희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요르단 대학에서 아랍어를 공부하셨다고 하는데, 방금 한 자기소개를 아랍어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동화 아 진짜 이거 몇 년 만에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مرحبا، اسمي سليم، وأنا أعمل في minbyun منذ عام 2007 باعتباره المنسق الدولي. تشرفت بمقابلتك. وداعا. (앗 쌀람 알라이쿰 이쓰 미 셀림. 아나 다라쓰투 루가 아라비아 피 마르카주 루가 피 알 아루두니야. 알 안 아나 알 아말 피 민변 민 투싸나아 세바하. 슈크란 좌질란……)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셀림입니다. 저는 2007년부터 민변이라는 곳에서 국제연대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뭐 이런 뜻입니다.(웃음)

일동 우와~ (웃음)

안혜성 2007년부터 민변에서 일하셨다고 했는데, 민변과 함께 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동화 요르단에서 공부도 하고, 캐나다에서 자격증도 따고. 그러다 2006년 10월 경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저는 그 때, 오래전부터 제 ‘길이자, 꿈이자 계획‘이라고 생각했던 국제연대 활동, 그 일을 할 수 있는 곳을 물색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국제연대 활동을 하며 단체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지는 않았고, 민변과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정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둘 모두에 합격했지만(웃음) 민변으로 오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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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코이카와 민변 중 왜 민변을 선택하셨나요?

이동화 아무래도 제가 활동할 수 있는지를 따져 봤을 때, 민변이 훨씬 더 유리할 것 같고, 민변에 대해 이전부터 좋은 일을 하는 단체라고 생각했기에 여기서 활동하기로 결정했죠. 그땐 제가 뭘 잘 몰랐던 것 같아요.(웃음)

안혜성 국제연대 활동이 왜 본인의 ‘길이자 꿈이자 계획’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자세하게 듣고 싶습니다.

이동화 대학교와 대학원 시절, 교수님의 말씀 및 여러 시민사회 활동가분들과의 교류를 통해 국제연대의 중요성에 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전에는 국내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고 가장 처절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눈을 한번 돌려보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정말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국제연대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계기는 이라크 전쟁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그 사건이 저한테 길을 보여준 것이죠.

박재홍 전쟁을 지켜보셨던 당시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동화 저는 전쟁이라는 것이 처절한 이미지로 다가왔어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려오는 느낌이랄까요. 사람이 죽고, 부상당하고, 삶이 쪼개지는, 사람의 상식과 논리를 뛰어넘는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진행되죠. 그래서 치열하게 반전을 외쳤습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전에 세계 곳곳의 반전 여론을 보며, 전쟁을 시민과 민중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정치적 논리로 전쟁이 발발하고야 말더군요.

구체적인 활동 이야기를 하자면, 제 대학원 선배 중에 전쟁을 막기 위해 ‘인간방패 운동’에 참여한 선배가 있었어요. 세계 각지에서 활동가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이라크에 들어가서는 포격 대상이 될 만한 시설에 투입되는 방식의 운동을 말하는데요. 이게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방식은 아니었지만 당시 사람들이 꽤나 참여를 했습니다. 저 역시 ‘저렇게라도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생각하며 출국 일정이 잡았었습니다. 그런데 이라크 전쟁 전에는 입국이 가능했었는데, 개전 이후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포기해야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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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직접 참여는 못하셨지만, 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들겠다고 결심하신 건데요. 그에 따른 두려움은 없었는지, 두려움을 이기게 한 원동력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동화 철없음? (웃음) 현지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보다, 당장의 참혹한 일을 막아야겠다는 절박함이 컸기에 그런 두려움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앞서 가있는 사람들이 있었고요. 또 당시에 저는 당시 싱글이었죠. (웃음) 지금 가라고 하면 같은 결정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박재홍 ‘인간방패 운동’이 좌절된 이후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라크에 가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이동화 이라크는 예상보다 빠르고 쉽게 몰락을 해요. 이후에는 나라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했습니다. 재건 노력을 시민사회가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었고, 이에 동의했던 저는 2003년 6월 4일에 이라크에 입국을 했습니다. 도시가 예상보다는 황폐하지 않았지만 미국이 주요 관공서, 도로 등을 정밀하게 타격해놓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폭격의 상흔이 남은 도시에 사람들이, 그 말도 안 되는 공간에서 그대로 살고 있더라고요. 그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매우 빈곤했던 한 마을에 들어가 어린이를 위한 시설과 진료소를 지었습니다. 당시 한겨레신문을 통해 모금 받은 금액으로 진행을 했고요.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사고도 있었고, 금전 문제도 있었던 바람에 함께 했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떠나갔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시에 시간적 여유도 있었고, 거기가 너무나 좋아서, 혼자였지만 남아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예상과 정말 다른 매력, 사람이 주는 매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시골 사람들 보면서 순박하고 정이 많다고 하죠. 그 사람들이 정말 그랬습니다. 또 그 때가, 셀림이라는 이름을 받은 계기이기도 한데요. 제가 당시 시설을 지을 때 일을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그때 사람들이 저를 셀림이라 불렀어요, 친구한테 그게 무슨 뜻인지 물었더니, 한국의 마당쇠, 돌쇠처럼 우직하게 일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거라고 하더군요. 그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지금까지도 저를 그렇게 불러달라고 합니다.

안혜성 그 때 셀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셨군요. (웃음) 이라크에서의 나머지 이야기도 마저 듣고 싶습니다.

이동화 이라크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게 됩니다. 너무 더워 지붕에 앉아있는데 총알이 날아다니는 게 보이더군요. 폭탄이 터지는 게 일상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더 최악이었던 건, 2003년 12월에 한국에 들어왔다가 2004년 6월에 다시 이라크에 들어가는데, 그 때부터는 외국 사람들이 인질로 납치가 되는 게 유행이 되고 있었던 겁니다. 2004년 정도부터 현지에서는 NGO나 언론, 혹은 외국 기업 관계자를 납치하고 각국 정부와 협상을 벌여 외화를 버는 형태의 범죄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고 김선일씨의 일도 그 때 당시의 일이었어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습니다. 활동가로서 현지에서 죽음을 당한다는 데는 두 가지 차원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히 내가 죽는 것을 넘어 현지 사람들에게 힘듦을 안겨줄 수도 있고, 운동의 의미도 많이 깨지게 되니까요.

바그다드에 있는 허름한 호텔에 머물렀을 때, 어느 날 새벽에 무장괴한이 사람들을 끌고 가는 모습을 바로 맞은편에서 목격했었습니다. 그 일을 겪고 대사관에서 머물렀었습니다. 활동을 보장해준다더니, 아예 나가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같이 있던 형이 대사관 담을 넘으려고도 했었죠(웃음) 그러던 중, 여권법이 개정되었습니다. 현지 정부의 승인 없이 체류한다면 영구적으로 추방될 수도 있게 된 거죠. 다시 이라크에 가지 못하는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한국에 입국했었습니다. 이후 이라크는 여행 금지국으로 지정되더군요. 그렇게 이라크에서의 생활이 끝났네요.

안혜성 간사님께 큰 영향을 미쳤던 이라크에서의 생활을 마친 소회와 그 이후 중동 유학시절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이동화 한국에 돌아와 저는, 이라크에 있을 때 왜 사람들과 소통이 생각만큼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을까에 관해 고민했었습니다. 언어의 문제 때문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당시 영어를 썼는데 아무래도 현지에서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대학교육을 받은 남자라는 대단히 소수집단에 불과했기 때문이죠. 중간 매개자를 끼고 소통을 한다는 건 내용이 변질되는 부분도 있고 전달이 잘 안 되는 부분도 있잖아요. 저는 어쨌든 다시 가서 활동을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랍어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까지 돈이 좀 필요해서 반월공단에서 7개월쯤 일하기도 했었어요. 그러고서 요르단에 가서는 아랍어를 공부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처음 간 것도 그때였어요. 원래는 이라크 옆이라서 요르단을 간 건데요. 가보니까 요르단 옆에 이스라엘이, 그리고 팔레스타인이 있더라고요. 물론 팔레스타인은 지도상에 없지만 요르단 인구의 1/3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 지역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대개 한국 활동가들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입문하는 방식이 저와 비슷해요. 요르단을 통해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접하는데, 현지에 가보면 새로운 문제들을 알게 됩니다. 기회가 생겨 저도 팔레스타인에 가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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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팔레스타인에 가셔서 어떤 걸 보고 느끼셨나요?

이동화 팔레스타인은 1948년부터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지날 수밖에 없는데요. 이라크에서는 높은 벽이 있는 경우 그 내부에는 미국 대사관 같이 무언가 지켜져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높이 10m의 두꺼운 벽이 800km 길이로 팔레스타인을 감싸고 있어요. 여기를 들어가려면 이 장벽에 있는 체크 포인트를 한 명씩 들어가야 해요. 이렇게 들어가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벽 안에도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정착촌이 있어요. 그러면 그것들을 연결해서 또 블록으로 싸죠. 이것을 보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총을 발사하거나 폭탄을 투하하는 것과는 다른 충격이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동의 자유를 제한받는 것이죠. 어떤 사건만 생기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사가 아닌 처벌의 목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활에 불편함을 가중시켜 왔습니다.

또한 2006년 초, 팔레스타인은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하마스 정권을 수립했습니다. 선거감시인단의 감독 하에 민주적으로 치러진 선거였으나 이스라엘은 이 정권이 테러정당이라고 발표한 뒤 통화 제재를 시작합니다. 팔레스타인은 자체 통화를 갖지 않고 원조를 받거나 송금을 받아 사용하는데, 이스라엘이 이를 막습니다. 또한 이외로도 수도를 막고, 나무를 베고 하는 식으로 삶을 옥죄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떠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말해주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리의 사정을 알려 달라!”며 입을 모아 말하죠.

박재홍 그래서 알리셨나요?

이동화 글쎄요. 현지 활동가도 많아졌고 우리나라도 예전만큼 팔레스타인에 부정적이진 않지만 세상을 바꿀 정도 수준은 못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팔레스타인이 제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온 거기도 하고요. 이라크나 팔레스타인이나 모두 무슬림이고, 모두가 피해자죠. 당시 저는 ‘미 제국주의’ 이런 용어를 즐겨 썼는데요. (웃음) 지금은 그 정도로 날 서 있지는 않지만 강대국에게 핍박받는 부분들에 대해 많이 공감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당시에는 말도 못할 수준의 억압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대부분 무슬림들이더라고요. 제가 원래 종교를 안 믿는데 당시엔 그들 때문에 무슬림이 되기도 했었어요. 두 국가, 두 나라가 제 시선을 붙잡았고 제 길이 되었습니다.

박재홍 그러다가 이제 한국으로 들어오셨고요?

이동화 그렇죠. 그리고 이제 민변 활동가가 됐죠.

박재홍 민변에서는 주로 어떤 일들을 해 오셨나요?

이동화 처음에는 국제연대위원회와 민생경제위원회, 사법위원회를 담당하는 활동을 했어요. 이후에 민변 사무국이 사무처로 개편이 되면서 위원회는 국제연대위원회와 국제통상위 그리고 사무처에서는 회원팀, 그리고 입법감시 tf 활동을 하게 되었고 또 사무처에서 일어나는 단기적 사업(총회나 인권보고대회 등)에도 다른 상근자와 함께 진행하였어요. 연차가 조금씩 쌓이면서 주어진 일 외에도 여러 일을 담당했던 것 같아요. 회원분 들에게는 주로 문자나 메일로 각종 행사나 회의에 참석 및 회신을 요청하는 ‘스팸문자’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어요.

박재홍 민변에서 8년을 지내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을 꼽으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동화 아무래도 광우병 고시무효 헌법소원과 이어지는 촛불집회인 것 같아요. 민변차원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활동일 것 같은데, 광우병 헌법소원은 정말 별다른 고민 없이 제안되었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1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참여를 해주었어요. 그 와중에 서버도 몇 번이나 다운되고, 시민들이 사무국으로 문의하는 내용에 답변을 주면 바로 다음 아고라에서 Top으로 논의되고.. 조금 무섭더라고요. 그리고 2박3일간 2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밤낮으로 도장작업을 했던, 지금 생각하면 조금 기이한 현상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리고 헌법소원 이후 매일 밤 이어진 촛불집회, 정말 많은 민변 회원들과 함께 노란색 인권침해감시조끼를 입고 광화문과 종로를 누볐던 기억이 나요. 거의 한달 이상을 거리에서 시민들과 함께 했었던 정말 가슴 뜨거웠던 기억인 것 같아요.

안혜성 현재 회원팀장을 맡고 계신 걸로 아는데 1,000명이 넘는 민변 회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혹은 가장 인상 깊은 회원이 있을까요?

이동화 너무 난감한 질문인데요. 솔직히 너무 많은 회원 분들과 현재도 친분을 나누고 있기에 누군가를 한명 찍기가 너무 어렵구요. 다만 가장 가슴이 아팠던 회원은 같은 상근자이기도 했던 故 어중선 간사입니다. 같이 근무하면서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저를 많이 따랐고 저도 늘 마음이 갔던 동생 같은 녀석이었어요. 뜻한 바 있어 귀농을 했는데 몇 개월 되지 않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죽기 1주일 전에 저희 집에서 진탕 술을 먹고 같이 곯아 떨어졌는데 그 다음 주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안혜성 자원활동가 1기부터 쭉 지켜봐 오셨을 텐데 간사님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원활동가의 상은 어떤 것인가요?

이동화 무엇보다 민변의 자원활동가(이전 인턴)분들은 자신들의 시간과 노력을 민변에 쏟아주시는 분들이기에 기본적으로 훌륭하신 분들이고, 반면에 민변이 조직적으로 그 분들의 노력과 활동에 비하여 제대로 된 평가와 인정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그분들에게 무언가를 더 바라는 건 조금 죄송스러운 기분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생각하는 자원활동가의 상은 자원 활동하는 그 기간 동안은 민변에 한 번 깊이 빠져드는 그런 자원활동가인 것 같아요. 민변은 정말 다양하고 많은 활동을 하잖아요. 저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을 정도이기에, 많이 경험하고 체험하려 노력하는 자원활동가면 더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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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민변은 변호사 단체인데요. 변호사가 아닌 활동가로서 생활하면서 한계를 느끼신 점 혹은 불편한 점은 없으셨나요?

이동화 이거 얘기 잘해야겠네.(웃음) 활동가는 기본적으로 organizing(조직)과 coordinating을 담당해야 합니다. 거기에 더하여 물론 전문성도 필요한 거죠. organizing을 하고 coordinating을 하는 것에 있어서는 다른 단체와 별반 차이점이 있지는 않아요. 어디에서 활동하던 회원들의 활동을 끌어내고 행사를 조직하는 역할은 비슷합니다. 법률 전문가 단체에서 법률 전문가가 아닌 상태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어려운 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비전과 연관이 된다면 사실을 활동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게 민변 활동의 한계로 작용하지는 않아요. 민변이 변호사 협회거나 학술단체이면 법률에 대해 전문성이 없는 우리가 비전을 갖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민변은 인권단체이고 운동단체이기 때문에 그 활동의 대상은 변호사가 아니라 피해 받는 일반, 다수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민변에 있으면서 순간 순간 어려운 점을 겪기도 했지만, 내가 많이 부족해서 제대로 안 된 거지 내가 변호사가 아니기 때문에 안 됐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아요.

게다가 민변의 활동은 굉장히 다양해요, 지금 생각나는 것만 해도 기자회견, 토론회, 집회 내부 행사, 시위 선전, 기고, 면담 등이 있네요. 상근자들이 잘 해야 되는 것들은 1000명을 넘는 회원 분들의 역량을 끄집어내는 영역이죠. 저는 회원 분들의 힘들을 끌어내는 일, 그것이 조직 내 활동가가 가져야 할 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박재홍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에 계시다가 한국에 들어오셨고, 민변으로 들어와서 활동을 하게 되셨는데요. 그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2007년 이후로 지금까지 하고 계시는 일, 그리고 그것이 중동지역에서 겪으신 일들과 어떤 맥락에서 이어지는 것인지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동화 기본적으로 단체로 일하는 활동가이기 때문에 그 정체성 측면에서 이전 활동들이 다 민변 활동의 밑거름이 되죠. 민변은 2008년 이후로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됩니다. 특히 시민들과 만나고 하면서 촛불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저는 그 틈에서 밀알이 되었던 것 같아요. 잇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리고 저는 스스로가 행사를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일부러 일을 만들기도 했고, 열심히 했었어요. 민변의 국제연대위 소속으로서 연대활동을 하면서 제 활동, 활동의 정당성 등을 보장받을 수 있었구요,

또 운동이라는 것들이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이 중심에 있지만, 사실 그것들만 볼 수는 없어요. 아시아 지역에도 다양한 문제점이 있어요. 예를 들어 필리핀에서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했다고 길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기도 하고요. 말레이시아에서는 승려들이 기름 값 올랐다고 시위하다가 총 맞아 죽었습니다. 티벳과 같은 경우는 중국과 종교적으로 달라 중국에 독립을 요청했는데, 또 총을 맞는 거죠. 이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 정말 많은 인권침해 사례이 있어요. 이러한 사례들로 제 시야가 넓어지면서 이러한 일들에 대해 회원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시아 인권 팀도 생겼고요. 한국 내에 있는 해외 대상 단체들과 연계해서 일하는 것도 시작되었습니다. 필리핀 연대, 버마 연대 등등 말이죠.

박재홍 활동가로 한 단체에서 10년 가까이 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상근활동가로서 반복되는 업무에 지칠 때도 있었을 텐데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인가요?

이동화 언젠가 아내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도 있지만 저는 민변과 잘 맞는 거 같아요. 위원회 내에서 많이 배우기도 하고 제 활동에 대한 인정과 배려도 있고, 사무처 일도 보람 있고, 특히 제가 활동한 시기가 대체로 이명박 박근혜 정부와 겹치기 때문에 민변이 사회적으로 큰 역할을 했고, 하고 있거든요. 그 활동의 어느 지점에 저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면 활동가로서 만족도 있고요. 결국은 민변에서 좋은 사람들 만나서 지금까지 즐겁게 활동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안혜성 2014년 안식월을 가지셔서 팔레스타인에 가신 것으로 아는데, 그 이야기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이동화 아, 이 얘기 해야겠네요. 민변은 7~8년을 근무하면 3개월간 유급 안식월을 주는 제도가 있습니다. 아주 감사하고 좋은 제도에요. (웃음) 저는 언제부터인가 셀림이라는 말을 쓰기가 많이 창피해졌습니다. 그 사람들은 너무나 고통 받고 잇는데, 지금 나는 내 안위를 위해서 너무 편한 활동만 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미안한 생각 이 커졌기 때문이에요.그래서 민변에서 7년 딱 있다가 생각한 것은 다시 현장을 가보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안식월에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향했습니다.

예전과 달리 그 당시에는 현지에 ISM이라는 국제 활동가들이 가입해서 자원 활동하는 단체가 있는데요. 물론 저도 가입을 했고요.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무고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을 막는 활동, 장벽 반대 활동을 했었고 또 야간 공습이 있으면 그걸 카메라로 찍는 활동 등을 했어요. 당연히 활동 중에 죽는 사람들도 여럿이고요.

현장은 늘 그런 것 같아요. 예전처럼 울컥하는 느낌도 있지만, ‘어쨌든 제 평생 안고 갈 주제인데… ’ 라는 생각도 들고. 거기 있는 사람들도 또 다 굳건하게 일상을 살아내고 있거든요.

박재홍 지금 카톡 프로필을 보니 ‘다시 그 길 위를 걷다’라는 상태 메시지를 설정해 두셨네요. 살아오신 길과 관련하여 의미하는 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동화 카카오톡까지 보시다니, 무슨 제 뒷조사 하시나요? (웃음) 이라크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의 처참한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으면서, 이 얽힌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낼까 계속적으로 고민해왔었어요. 결론은 이건 내가 평생 가면서 풀어내야 할 문제, 평생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것이었어요.

저는 평생 활동을 하려고 해요. 거기에 있어서 민변 활동들이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지만 자칫 하다간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다시 팔레스타인을 다녀오면서 그게 명확해졌던 것 같아요. 나는 혼자 울컥했다가 가라앉았다가 오르막 내리막을 겪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평생을 계속 거기서 살아내고 있더라고요. 그 때 든 생각이에요. 이제는 그 간격을 좁혀서 길을 나아가야겠다는 거에요. 또 중요한 것은 나는 비록 갈지자로 가고 있다고 느끼곤 있지만 어쨌든 나도 이 길을 가고 있다는 거. 지금 당장 내가 현장에서 활동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고요. 예전만큼 예봉이 날카롭진 않더라도, 운동이 제 평생의 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안혜성 지금 가정도 있으신데, 이번에 다시 팔레스타인에 들어가실 때 아내 분의 반대 등은 없었나요? 저희가 알기로 아내 분이 참여연대 활동가시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이해를 많이 해주는 편인가요?

이동화 와이프가 제 걱정을 가장 많이 하죠. 와이프랑 함께 살아오면서 서로의 길과 꿈에 대한 인정과 이해가 있어 왔다는 생각을 해요.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고 이해를 해주지 않았나 합니다. 물론 약간의 뻥도 쳤죠. 안 위험하다고. 그런데 가자마자 폭격이. (웃음)

김서영 아내 자랑 좀 해주세요!

이동화 참여연대가 민변보다 훨씬 힘든 곳이에요. 내부의 날선 비판도 많고요. 무언가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문화가 있죠. 그런데도 아내는 10년 이상 버텨온 저력이 있는 사람이에요. 전형적인 외유내강 형이라고 보면 돼요. 사실 저랑 살기로 한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모험이었을 거에요. (웃음) 늘 고맙고요. 이쁘고 사랑스럽고 착한 사람이죠. 현명하고…

김서영 두 분은 어떻게 만나신 건가요?

이동화 소개팅이요. (웃음) 절박했죠.

김서영 술을 엄청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주량은 얼마나 되시나요?

이동화 편차가 크긴 한데, 굳이 말하자면 소주 2병정도인 것 같네요.

박재홍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 보면 대부분 사람을 좋아하더라고요. (웃음) 이라크 복구사업 당시 그 곳에 홀로 남았을 때도 아이들이 좋아서 그랬다고 하셨고. 인터뷰를 하면서 간사님께서 매우 일관된 삶을 살아오셨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동화 저는 사람 각자가 주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만났던 이라크,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다른 것을 생각하기 힘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어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조건 속에서도 정말 평화롭게 살거든요. 제가 처음에 이라크에 있던 7개월 동안은 제가 살았던 시간 중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어요. 역설적으로 너무 좋았다. 그들 속에 마약과 같은 느낌이 있었고요. 그들과 떨어지니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방황도 했던 거죠.

거기는 돈 많고 힘 있는 것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곳입니다, 전기도 없고, 시장, 학교 가려면 목숨 걸어야 될 때도 있고요. 폭탄이 어디서 터질지 모르니까요. 그럼에도 가족끼리, 마을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선 다들 잘 될 거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들이 사는 모습은 정말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제가 살면서 뭘 하고 있더라도 그걸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아요. 그들과 함께 있든 그렇지 않든 저는 항상 그곳을 생각하고 있을 거에요.

김서영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먼저 활동을 하셨던 선배님으로서 로스쿨을 꿈꾸는 사람들이나 활동가 지망생들, 혹은 저희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어떤 걸까요?

이동화 진짜 현장운동을 많이 하신 선배님들도 많아 제가 선배로 이야기하는 건 적절치 않고, 함께 활동하는 측면에서 이야기 하자면, 나중에 활동가가 되건 법률가가 되건 끊임없이 눈과 귀는 현장에 두라는 거죠, 한국이든 팔레스타인이건 이라크건, 제가 갔고 봤고 들었기 때문에 알 수 있던 문제들이었어요. 사람은 자기 주변을 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본인을 현장에 둬야할 필요성이 있는 거죠. 국회 앞에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농성을 해요. 그럼 가서 봐야죠. 기자회견을 한다, 농성을 한다, 가서 직접 보고 이야기를 들어봐야죠. 여러분이 나중에 변호사가 될 수도, 기자가 될 수도, 사업을 할 수도 있을 거예요. 다만 민변을 거쳐 가며 얻어야 할 것들은 기본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은 대단히 많은 차원이 얽힌 채 존재합니다. 현장과 함께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느끼려고 하는 것이 그래서 필요한 거죠. 신념과 열정만 가지고서는 알 수 없는 차원들이 있어요. 끊임없는 자극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어요. 함께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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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5/09/25-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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