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김경승이 제작해 남산에 자리한 동상들. ⓒ 김종훈▲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김경승이 제작해 남산에 자리한 동상들. ⓒ 김종훈▲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김경승이 제작해 남산에 자리한 동상들. ⓒ 김종훈
‘조각 김경승 민복진 / 1969년 8월 23일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세움’
서울 남산공원에 세워진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 뒤쪽에 붙은 머릿돌 내용 중 일부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대표적 친일 작가 김경승이 조각했다고 새겨졌다. 그리고 백범 동상 우측 하단부에는 김경승과 마찬가지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만주군 출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건립기념글도 새겨져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친필로 새겨진 건립기념글에는 “위국성충은 일월과 같이 천추만대에 기리 빛나리”라는 글과 함께 “서울 백범김구선생동상건립에 즈음하여 일천구백육십구년 팔월 대통령 박정희”라고 적혔다.
잘 알려졌듯 백범 김구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에 항거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1919년 3.1운동 후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끈 인물이다. 무엇보다 1940년 오늘(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될 수 있도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자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주도적인 역할했다.
실제로 1940년 9월 15일 백범은 자신의 명의로 한국광복군선언문을 발표하는데, 선언문에는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라고 적혔다. 그리고 이틀 뒤인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창군행사가 중국 충칭 가릉빈관에서 열린다.
남산 백범 동상 뒤쪽 우측에 새겨진 백범 김구 선생 약전에도 “1940년에 임시정부를 중경(충칭)으로 옮기고 한국광복군을 조직해 (1941년)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도 독립보장을 받았다”라고 강조됐다.
한 마디로 백범을 필두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일제에 맞서기 위해 한국광복군이 창설됐다는 뜻. 그러나 해방 후 백범이 1949년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한 뒤 백범을 둘러싼 상황은 아이러니 그 자체가 된다.
백범은 1962년 우리 정부로부터 1급 훈장은 대한민국장을 받았지만 7년 뒤인 1969년 박정희 정권은 친일파 김경승이 조각한 백범 동상을 현재의 자리인 남산 자락에 세운다. 만주군 출신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백범동상 아래쪽에 직접 건립기념글을 썼다.
이후 90년대 문민정부를 거치며 남산에 위치한 백범 동상을 포함해 친일민족 반역자의 작품을 철거하고 국민들의 뜻을 모아 작품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졌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친일파 김경승이 만든 백범 동상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태다.
한국광복군 창립일을 이틀 앞둔 지난 15일, 광복회는 성명을 통해 “친일작가 김경승이 만든 남산 백범동상을 철거하고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는 작품을 제작 설치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친일파 김경승, 어떤 길 걸었나?
▲ 일제강점기 도쿄미술대학교를 재학하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바 있는 친일 조각가 김경승씨. ⓒ <친일인명사전>
김경승, 1915년에 태어나 1992년 사망했다.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손꼽히는 유명 조각가다. 해방 후 친일행위가 문제돼 미술가들의 단체인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이후 경성사범학교, 경성정신여학교, 풍문여자중학교 교사를 거쳐 서울시 문화위원회 및 국전 창설위원 등으로 참여했다. 이후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이승만 정권 당시인 1958년 서울시문화상 미술부문상을 받았고, 박정희 정권 때인 1969년 3·1문화상 예술본상, 대한민국예술원 공로상을 받았다. 전두환 정권 당시인 1982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김경승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제에 충성했던 인물이다. 일본 유학 후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 조선미술가협회의 평의원과 조각분과 역원으로 참여했다. 1944년 경성일보사가 주최하고 조선총독부와 국민총력조선연맹 등이 후원한 ‘결전 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도 맡았다.
또 ‘대동아 건설의 소리’라는 일제를 찬양하는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친일미술단체에 소속돼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이어가면서 전시회로 벌어들인 돈을 국방헌금으로 내는 등 일제강점기 후반부 작가로서 협력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백미는 김경승이 1942년에 만든 ‘여명’이라는 작품. 1942년 제21회 조선미전에 출품한 것으로 젊은 노동자가 망치를 어깨에 메고 노동현장에 가는 모습을 표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으로 김경승은 그해 총독상을 수상한다. 1942년 6월 3일 자 <매일신보> 인터뷰에서 김경승은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는데 새 생명을 개척하는 대동아전쟁하에 조각계의 새길을 개척하려 했다. 나는 이같은 중대한 사명을 위해 미력이나마 보답하겠다”라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김경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44년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미전 마지막 대회에 <제4반>이라는 작품을 선보여 다시 한번 수상의 영광을 차지한다. 이 작품은 상체를 드러낸 여성 노동자가 작업도구를 어깨에 메는 모습으로 표현돼 당시 일제 수탈의 상징이었던 여성 근로정신대를 형상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철거되는 김경승 작품… 서울시 “철거 관련법 없다”
▲ 서울 강북구 4.19국립묘지에 설치된 4월 학생 혁명 기념탑 안쪽 화신상. 작가 김경승(1910~2001). ⓒ 권우성
이런 가운데 지난 13일 정북 정읍시는 김경승이 1987년에 제작한 황토현 전적지 전봉준 장군 동상을 철거했다. 학계와 시민사회는 지속적으로 김경승의 작품을 철거해야 한다고 요구했고 정읍시는 국가지정문화재 구역에 있는 전봉준 동상을 지난 4월 문화재청의 현상변경허가 승인을 받아 철거를 결정했다. 그 자리에는 동학농민군 행렬을 형상화한 작품이 들어선다.
앞서 김경승이 1959년 제작해 남산 일대에 세워졌던 안중근 의사 동상은 지난 2010년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새로이 건립되면서 새 작품으로 교체됐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내에 있던 김경승 제작 이순신 장군 동상 역시 김경승의 친일행적 등을 이유로 지난 2015년 교체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친일파 기념물 철거 등 문제는) 지자체의 의지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며 “기준을 마련할 확실한 법안이 필요하다. 법안에 맞춰 제도적으로 관련 사안을 풀어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오마이뉴스>가 확인한 결과 김경승이 제작한 동상은 현재 서울 남산 백범 김구 동상을 비롯해 서울 신사동 도산공원에 위치한 안창호 선생 동상, 서울 종묘광장 이상재 선생 동상, 서울 강북구 국립4.19민주묘지에 자리한 4.19혁명기념탑,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앞 세종대왕상, 서울 양화대교 정몽주 동상, 경남 통영 남망산 정상에 위치한 이순신 동상 그리고 서울 남산 백범 동상 아래쪽에 위치한 김유신 동상 등이 있다. 다수 작품이 이승만, 박정희 정권 때 김경승 손으로 제작됐다.
▲ 10월 30일 난징 교외에 있는 천녕사(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유적지)에 방문한 단성중학교 2~3학년 학생들과 교직원들. ⓒ 유지영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었던 길을 좇으면 좇을수록 아쉬움이 계속 커졌다. 항일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던 애국지사들은 너무나도 힘겹게 투쟁을 이어갔건만 끝내 영광을 잇지는 못했다. 영광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평가조차 받지 못했다.” – <임정로드 4000KM> 15쪽에서
지난 10월 말, 나흘 동안 상하이와 자싱, 항저우, 난징까지 임시정부 독립투사들이 갔던 길을 따라서 갔다. 때로는 일제의 탄압을 받으며 숨어서, 또 때로는 희생을 각오하고 당당하게 중국을 누볐던 독립운동가들의 길에는 이제 아주 작은 흔적만이 남아있다. 그 100년 전의 흔적을 따라 좇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상황이었다.
한국교직원공제회가 주최하고 <오마이뉴스>가 주관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이 지난 10월 28일 상하이에서 출발해 31일 난징에서 마무리했다. 충북 단양의 단성중학교 학생과 교사 총 38명이 함께 했다.
학생들은 꼬박 3박 4일 동안 100년 전 독립운동가들이 밟았던 길을 다시 밟아나가면서 이들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이번 역사탐방은 독립운동가들이 100년 전 떠났던 길을 재구성한 책 <임정로드 4000KM>(필로소픽 출판)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동방명주’ 없는 상하이 여행
▲ ‘서금이로’ 1919년 4월 11월. 이 서금이로 어딘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 유지영
1919년 4월 최초로 임시정부가 만들어진 길 ‘서금이로’에는 이 길 어딘가에 임시정부가 만들어졌다는 기록을 제외하고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두 번째 임시정부가 만들어졌던 회해중로에는 기념관 대신 스웨덴 의류 브랜드 H&M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화려한 불빛으로 번쩍였지만 정작 임시정부의 흔적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학생들은 상해에서 임시정부로 사용된 마당로의 마지막 청사까지 가서야 임시정부의 자취를 볼 수 있었다.
▲ 지난 10월 28일 방문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로 사용됐다. 크기가 작고 낡았으며 옆에는 옷가게들이 즐비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 유지영
그마저도 낡고 양옆으로는 옷가게들이 있어 지나치기 쉬운 건물에 있었다.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에 동행한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이 임시정부 기념관마저도 개발 논리 때문에 없어질 수 있다”면서 학생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주문했다.
단성중 3학년 이우석 학생은 이날 임시정부를 둘러보고 “항상 책으로만 임시정부를 배워왔고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그런데 ‘임시정부’라고 하기에는 협소했다”며 “(독립투사들이) 어렵게 활동하셨던 것 같고 그만큼 감사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학생들은 하루종일 상하이를 떠돌아다녔지만 철저하게 독립운동가들이 누빈 길로만 다녔다. 상하이의 명물인 방송 수신탑 ‘동방명주’가 여행코스에 없는 탐방이었다.
대신 학생들은 와이탄 야경을 보면서 의열단원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의 의거 장소를 먼저 알았다. 1922년 3월 28일 의열단원인 오성륜이 일본 육군 대장에게 권총을 발사했으나 다른 사람이 총에 맞았고 곧바로 김익상이 폭탄을 던졌지만 터지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한국인이 몇 없었던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세워진 이유가 있다. 국제도시인 상하이에서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사정을 알리고 외교 정책을 펴서 일본을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가장 인기 많은 장소는 위안소 유적 진열관
▲ 리지샹 위안소 유적 전시관 건물 외관. 평안도 출신 박영심 할머님은 여기에서 3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다고 증언했다. ⓒ 유지영
학생과 교사들에게 이번 역사탐방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장소는 난징에 있는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이었다. 역사탐방을 마치고 난 뒤 이어진 설문조사에서 38명 중 무려 32명이 리지샹 위안소가 ‘기억에 가장 남았다'(3순위까지 선택 가능)고 했다.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은 이번 역사탐방에서 들른 총 19개의 장소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난징대학살기념관(20표)이었고 3위는 윤봉길 의사가 김구와 의거를 밀의한 상해의 홍커우공원(17표)이었다.
중국의 한 대학에서 유학 중인 강하나씨가 지난 10월 31일 가이드로 나서서 단성중 학생들에게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을 소개해주었다. 강씨는 “벽면을 따라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 이는 위안부 할머님들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고 소개했다.
▲ 지난 10월 31일 방문했던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 건물 외벽을 따라 눈물이 흐르는 것 같은 그림이 그려져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눈물이 연상되게끔 조성했다. ⓒ 유지영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은 지금은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지만 실제 위안소로 사용됐던 공간이다. 평안도 출신 박영심 할머니가 여기 19번 방에서 3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지난 10월 31일 단성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방문한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 위안부 피해자인 박영심 할머님의 증언으로 2015년 12월 만들어진 아시아 최대 규모의 유적지다. 학생들이 위안소 유적 진열관 앞 위안부 피해자들의 얼굴 사진을 담은 건물을 보면서 묵념하고 있다. ⓒ 유지영
지난 2003년 박영심 할머니가 이곳에 와서 직접 현장 증언을 했고 중국 정부는 유적 진열관을 만들었다. 난징시에서는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을 복원하고 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한 동은 박영심 할머니의 증언을 바탕으로 전쟁 당시와 비슷하게 만들었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당시 난징에는 위안소가 60개 정도 있었다고 한다.
단성중학교 학생들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생각하면서 관람에 앞서 잠시 묵념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장난을 치거나 소리를 내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위안부라는 무거운 역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 옆에 있는 돌. 구멍 뚫린 돌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구멍 뚫린 심장을 상징한다. ⓒ 유지영
중학교 3학년인 유정희 학생은 “중학교 2학년 때 포스터 그리기 대회를 했을 때 위안부 관련 그림을 그렸던 적이 있어서 미리 조사를 했다”며 “그때 참고했던 자료들이 기억에 남아서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이 더욱 기대됐는데 오늘을 계기로 많은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난징에 60개의 위안소가 설치돼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 슬픈 역사를 잊지 않고 꼭 기억해두고 나중에 후손들에게도 이런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에게 이런 짓을”
▲ 지난 10월 30일 단성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방문한 난징대학살기념관. 이명 가이드가 난징대학살 기념관에서 가장 크게 적힌 한자의 뜻을 설명해주고 있다. 위에 적힌 한자는 ‘전사불망 후사지사’ 앞에 있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 뒤에 오는 사실을 교훈으로 삼자는 뜻이다. ⓒ 유지영
또 학생들은 난징에서는 다크투어리즘의 결정체인 난징대학살 기념관을 방문했다. 가이드는 난징대’학살’을 ‘도살’로 표현했다. ‘학대하고 살해’한 것이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죽였다는 의미에서다. 난징대학살 당시 3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해있고 현재 증언을 할 수 있는 생존자는 17명밖에 남지 않았다.
▲ 난징대학살기념관 앞에 있는 동상. 엄마가 죽은 아이를 움켜쥐고 절규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난징대학살의 끔찍함을 잘 보여준다. ⓒ 유지영
신우정 학생은 “사람이 어떻게 사람에게 이렇게 잔혹한 짓을 할 수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걸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 같으면 무서워서 못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다른 나라에 (독립 등) 소식을 알리는 게 대단해 보였다”고 소감을 털어놓았다.
이 밖에도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참여자들은 김구가 망명 이후 생활했던 상하이의 영경방(황피남로350농)과 자싱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 거주지, 김구 피난처(매만가 76호), 항저우의 오복리(임시정부 요원 가족 거주지), 김구의 숙소 군영반점 등을 둘러보았다.
▲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에 일제를 피해다니던 김구 선생의 피난처 중 한 곳. 재청별장. 김구 선생은 1932년 7월부터 반 년 동안 재청별장에 머물렀다. ⓒ 유지영
또 학생들은 실제로 1933년 당시 백범 김구와 장제스가 만남을 위해 머물렀던 호텔 중앙반점에 하룻밤 머무는 등 여러 각도로 체험을 해보았다.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은 단성중 원효연 교사가 교직원공제회 사이트에 신청해 선발됐다. 원효연 교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올해가 큰 의미를 갖는 해라고 생각했고 가르치는 학생들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했다”고 신청 이유를 밝혔다.
▲ 9일 서울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 행사기 진행됐다. ⓒ 김종훈
“우리의 현대사는 친일인명사전이 나오기 전과 후로 나뉜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이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서울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임 소장은 “친일인명사전이 나오기 전에는 친일파들이 오히려 자신의 경력을 자랑스럽게 쓰기도 했지만 2009년 11월 8일 이후 이것이 죄악이라는 것을 느끼게 됐다”면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이후 대한민국 사회의 변화를 설명했다.
“친일파와 후손들로 구성된 정당조차 이제는 모든 (인사) 심사에서 친일파를 골라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친일파 여부를 가장 먼저 따진다. 세상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임 소장은 “근래 들어 화가 나는 것이 하나 있다”면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를 옹호하는 세력들의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최후의 발악이라고 보고 있지만 이들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것도 우리들의 과업”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9일 서울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 행사기 진행됐다. 좌측부터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장병화 임종국기념사업회 회장. ⓒ 김종훈
이날 기념식 현장에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과 독립유공자 후손,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등이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윤 전 총장은 친일인명사전 발간식 하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 듯 “예정됐던 발간식 장소가 여러 압박으로 대관 취소되면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백범 선생에게 가서 사전을 올리는 결정을 내렸다. 그때 백범 선생께 ‘드디어 해냈습니다’라는 말을 한 것이 여전히 생생하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윤 전 총장은 “지금까지 사전이 전국적으로 1만 2000권이 판매됐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여전히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친일인명사전이) 인지도가 낮은 편”이라면서 “국민들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보급판이든 개정증보판이든 새롭게 준비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친일인명사전이 탄생하기까지
윤 전 총장은 2004년 1월에 쓴 글에서 “친일인명사전이란 구한말 이래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지지·찬양·협력하고, 식량과 토지를 비롯한 수탈행위와 징병·징용·정신대 등 강제동원에 앞장섰으며,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훼손하는 등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부문에서 일제의 통치에 협력한 인물들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정의했다.
실제로 친일인명사전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에 부역하고 민족에 반역한 4776명 인사들의 친일행각이 상세히 기록됐다. 친일인명사전의 뿌리가 된 고 임종국 선생이 1966년 <친일문학론>을 세상에 공개한 후 만 43년 만에 해낸 일이다.
임종국 선생은 1965년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분노해 그 다음 해인 1966년 이광수 등의 친일행각을 파헤친 <친일문학론>을 썼다. 이후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을 구축한 친일세력들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일생을 친일행적 추적에 바쳤다.
▲ 9일 서울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 행사기 진행됐다. 임종국 선생의 육필 원고. ⓒ 김종훈
1989년 임종국 선생이 생을 마감한 뒤, 선생의 과업을 잇기 위해 ‘반민족문제연구소’가 1991년 2월 탄생했다. 4년 뒤인 95년 지금의 이름인 ‘민족문제연구소’로 개칭했고, 2001년 12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러나 2004년 1월 16대 국회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 예산 5억 원이 전액 삭감됐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반대가 거셌다.
예산이라는 암초에 부딪혔을 때 국민들이 직접 나섰다. <오마이뉴스>가 관련 소식을 전하며 친일인명사전 편찬 국민(누리꾼)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모금운동 열흘 만에 목표액 5억 원 전액을 모금했고 이후에도 계속 성금이 쌓여 7억여 원에 달하는 편찬기금이 조성됐다.
그러나 2005년 보수단체를 중심으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은 이적 행위’라는 비판적인 기자회견이 이어졌다. 출간을 막으려는 친일사전 발행 금지 가처분 신청도 계속됐다. 하지만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9년 11월 8일 서울 효창원 백범 김구 선생의 묘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식이 진행됐다.
발간 10년, 무엇을 했나?
▲ 9일 서울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 행사기 진행됐다. ⓒ 김종훈▲ 9일 서울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 행사기 진행됐다. ⓒ 김종훈
이날 기념식에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후 지난 10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이 활동한 내용을 보고하는 시간도 있었다.
대전에서 올라온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은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를 이장시키는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면서 “지난 2월에 현충원 전수조사를 거친 뒤 김창룡 무덤 앞에서 규탄대회를 했고 최종적으로는 친일파들이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를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라고 말했다.
전북에서 활동하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역시 “전북 지역에 산개한 친일파를 찾아내 단죄비를 세우고 있다”면서 “최근에는 전주 동산동의 이름을 여의동으로 바꾸는 쾌거를 이뤄냈다”라고 전했다.
전주시 동산동은 전범기업인 미쓰비시 기업 창업자의 장남이 1907년 자신의 아버지 호 ‘동산(東山)’을 따 창설한 ‘동산농사주식회사’ 전주지점이 위치했던 데서 유래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동산리로 변경돼 오늘에 이르렀다.
이들은 또 “전북 고창에서 매년 열리는 미당 서정주 문학제를 막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라면서 “입구에 50m짜리 욱일기를 깔아놔 입장객들은 반드시 욱일기를 밟아야만 들어갈 수 있게 했다. 행사를 고사시키는 작전을 세워 행동한다”라고 강조했다.
1915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미당 서정주는 일제강점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가미카제와 같은 전쟁범죄를 찬양하며 조선 청년들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시와 글을 썼다. 해방 후 이른바 순수 문학의 기치를 내걸고 우익 성향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해 활동했다. 서라벌예술대학과 동국대학교 등에서 오랫동안 교수를 역임하다 2000년 12월에 사망했고 친일인명사전 문학 부문에 이름이 실렸다.
▲ 9일 서울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 행사기 진행됐다. ⓒ 김종훈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10주년을 기념해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라는 제목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기획전을 열고 있다.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 등 국립묘지에 안장된 68명의 친일파 명단과 위치, 시민 박기서가 김구 선생을 시해한 안두희를 처단하는데 사용된 정의봉 등이 전시됐다.
고 3때인 1977년 3월 어느 날, 김준태 시인을 전남 함평 학다리고 교정에서 처음 만나뵐 수 있었다. 학다리고 영어교사로 부임해온 선생님은 그해 7월, 창비에서 첫 시집 <참깨를 털면서>를 출간했다. 이 시집을 읽고서 나는 점차 문학(시)에 뜻을 두게 되었고, 이후 문예반 활동을 통해 시인의 꿈을 키웠다. 김준태 선생님의 인솔로 함평 촌놈이 광주에서 열린 조선대 백일장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고교 은사인 김준태 선생님과 인연을 맺은 지가 어언 42년이 흘렀다.
조선대 사대 독어과 2학년 때인 1969년 1월, 김준태 선생님은 광주의 <전남일보>(현, 광주일보)와 <전남매일신문> 그리고 <삼남교육신문> 신춘문예를 모두 석권하여 3관왕이 되었고, 이어 월간 <시인>지 11월호를 통해 중앙문단에 등장했다. <전남일보> <전남매일신문> 신춘문예와 <시인> 지의 심사를 본 사람은 다름 아닌 박목월, 김현승, 조태일 시인이었다. 약관 21살 때 한국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김준태 시인은 기존의 한국시와 전혀 다른 새로운 목소리와 방향성으로 1970년대의 민족문학 형성에 기여했다. 1980년 5월 민중항쟁 당시 광주 전남고 교사였던 김준태 시인은 5월항쟁의 전 과정에 참여했다. 말하자면 김준태 시인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광주 5월이 처참하게 학살당할 때 눈 부릅뜬 현장 목격자였다.
10일간의 항쟁이 신군부에 의해 진압된 후 1980년 6월 2일, 김준태 시인은 <전남매일신문> 1면에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신문에 발표 당시 이 시 제목은 계엄사의 검열조치로 <아아, 광주여!>로 개제됨)를 발표했다. 항쟁 당시 5월 21일 <전남매일신문>은 기자들의 제작거부로 발간이 중지되다가 13일 만에 속간될 때 이 신문사의 문순태 편집부국장(소설가)이 오전 10시경 김준태 시인에게 전화하여 오전 11시까지 써줄 것을 청탁한 그 원고였다. 김준태 시인은 청탁받은지 불과 1시간 만에 수많은 광주 영령들과 <엑시타시>(접신)하여 이 시를 썼다고 회고한 바 있다. 김준태 시인의 <아아, 光州여!>는 독자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안겨주었다.
계엄사의 검열로 시 제목은 물론 원문 시 105행 중 2/3가 삭제되어 불과 34행만이 신문에 실렸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삭제되지 않은 시 전문(全文)이 비밀리에 수천 수 만장이 인쇄되어 국내외에 유포될 수 있었다. 5월 항쟁이 피의 학살로 마감되자 실의와 좌절에 빠졌던 광주시민들과 이 땅의 국민들에게 김준태의 시는 패배의 아픔을 딛고 다시금 일어설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한 편의 시가 국내외에 몰고 온 파장은 대단했다. 신문과 방송 등 전국의 모든 언론을 장악했던 신군부에 의해 광주의 참상과 진실이 모두 유언비어로 취급되어 철저히 왜곡당할 때 김준태 시인의 이 5월시는 거짓권력과 가짜언론에 비수의 칼을 들이댄 광야의 목소리, 바로 그것이었다.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光州)여, 우리나라의 십자가(十字架)여!>는 한국문단이 낳은 최초의 5월시다. 그리고 이 시는 AP와 UPI, 로이터통신, 신화통신 등 외신을 타고 영어 일본어 중국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어 광주항쟁(Kwangju Upring)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김준태>라는 한국시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김준태 시인은 이 시를 썼다는 이유로 1980년 6월 2일부터 계엄사에 의해 전격 수배조치 되었고, 25일간의 긴 잠행 끝에 전남고로 출근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더 이상 숨어 다닐 수 없다. 죽은 사람도 있는데 구속되더라도 학교로 가자.”
김준태 시인은 1980년 6월 25일 오후 곧바로 전남고로 출근했다가 잠시 머문 다음 신안동 자택으로 갔다. 바로 그날 광주 화정동의 505보안대로 끌려간 김준태 시인은 20일간 모진 곤욕을 치러야 했고, 보안사의 강요 로 교사직에서 강제로 퇴출되었다. 이로써 김준태 시인은 1980년대 최초의 필화(筆禍)사건의 당사자가 된 것이다. 1980년 5월 직후 한국문학은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였다. 바로 이때 김준태의 <아아, 광주여!>는 한국문학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데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광주에서는 1981년 7월, <5월시> 동인이 활동을 시작했고, 1982년 12월에는 <5월시> 아랫세대가 <광주 젊은 벗들>을 결성하여 광주의 참상과 진실을 문학화하기 위한 소집단 운동을 펼쳐냈다.
이후 서울 대전 대구 마산 부산 강릉 등지에서도 소집단 문예운동이 전개되었다. 1984년 12월 19일 서울 흥사단 강당에서 채광석 시인의 주도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재창립되었고, 이 단체에 소속된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시의 시대>가 도래되었다. 이후 5공정권의 폭압과 금기를 뚫고 은밀하게 수많은 5월시편이 창작됨으로써 광주의 진실이 점차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즉, 김준태 시인의 그 5월시가 단초가 되어 문학을 통한 광주의 진실 알리기 투쟁이 전국화될 수 있었다.
허나 신군부의 강요로 졸지에 교단에서 쫓겨난 김준태 선생님은 이후 거리의 교사로, 신문사 기자로, 조선대 객원교수로 당신의 삶을 전환, 확장하면서 수많은 후생들을 키웠고, 이제 광주문단의 최고 어른이 되었다.
요즘 김준태 선생님은 <광주평화포럼> 이사장과 <국립한국문학관> 이사로 한반도 평화와 한국문학의 부활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지금껏 시집과 산문집, 평론집 등 수십 권의 저서를 펴낸 김준태 선생님은 고희를 넘긴 연치에도 여전한 현역시인으로 후생 문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2019년 11월은 김준태 선생님의 등단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후생들이 뜻을 모아 한판 걸게 잔치상을 마련해 드려야 했건만 그리하지 못했다. 다만 지난 10월, <광주전남작가회의>의 김완 회장, 주영국 사무처장이 중심이 되어 조촐한 축하연을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광주의 계간지 <문학들>(송광룡 대표) 여름호는 김준태 등단 50주년 특집을 실었고, 서울의 계간지 <푸른사상>(한봉숙 대표, 맹문재 주간) 가을호도 “김준태 50년” 특집을 게재했다.
그리하여 11월 8일 오후 6시 30분부터 1시간 동안 맹문재 시인이 주도하는 <민족문학연구회> 주최로 민족문제연구소 5층 강당에서 강연회가 열렸고, 뒤풀이 모임도 가졌다. 한국문단의 경사이자, 축복인 <김준태 문학 50주년>을 온몸으로 축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먼저 떠난 고인(故人)들을 기리고 추모한다. 떠난 이를 향한 그리움을 표현함과 동시에 그의 생애를 회고해보는 것이다. 가끔씩은 고인이 떠난 시점을 기점으로 시간사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1주기, 10주기, 30주기… 이처럼 말이다. 이런 경우 그만큼 고인이 관철한 삶이 강렬했거나, 사상과 행적을 기념할 필요가 높았다고 판단해볼 수 있다.
지난 11월 9일 천안 일원에서 열린 ‘임종국 선생’의 30주기에 특별한 추모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임종국 선생은 친일문제 연구에 선구자적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평생을 통해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의 행적을 조사했으며 관련 자료를 집대성하다시피 골몰하여 후대 연구의 기반을 조성했다.
우리가 흔히 ‘친일파’로 알고 또 지칭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기록이 그가 작성한 1만 2천 장에 달하는 ‘친일인명카드’ 속에 담겼고, 후일 이는 <친일인명사전>의 뿌리가 됐다. <친일문학론>(1966), <일제 침략과 친일파>(1983), <일제하의 사상탄압>(1985) 등 실증에 입각한 저서들도 남겼다.
특히 올해가 <반일종족주의>, 류석춘 교수 논란 등 친일 논란이 두드러진 한 해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임종국 선생의 사상과 정신을 되짚어보는 일은 더욱 의미가 있다. 이날 추모를 위해 모인 시민들의 행렬은 선생이 영면한 천안공원묘원과 필사의 연구를 이어나간 요산재(樂山齋) 등 공간의 발자취를 따라 이어졌다.
시민들 깊은 추념… 생존 당시 인터뷰 녹음본도 공개
▲ 30주기 당일 임종국 선생 묘소. 문재인 대통령의 조화도 눈에 띈다. ⓒ 최우현
임종국 선생은 생애 마지막 9년여 시간을 천안에서 보냈다. 건강문제도 있었거니와 친일파 연구와 집필에 전념할 공간의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천안이라는 고장과 선생의 인연이 깊은 이유다. 2016년에는 임종국 선생을 기리는 조형물(흉상)도 천안 신부공원 광장에 들어섰다.
참고로 천안 신부공원에는 임종국 선생의 조형물과 더불어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과 ‘6월 민주항쟁 30주년 표석’이 함께 자리해 있다. 민족, 민주, 평화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있는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이날 80여 명에 이르는 시민, 자원봉사자,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이 선생의 영면지인 천안공원묘역(무학지구 철쭉 4-1)에 운집했다. 임종국 선생의 막내 누이동생인 임경화 여사를 비롯해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차영조 독립유공자 유족회 부회장(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 외아들), 이용길 천안역사문화연구회장 등 각계, 지역의 인사들도 자리했다.
30주기를 맞이하여 현장에서는 임종국 선생의 육성이 담겨있는 인터뷰 녹음본이 공개되기도 했다. 해당 녹음본은 1988년 CBS 라디오에 출연한 임종국 선생과 임헌영 소장(당시 문학평론가)의 대담을 담은 것이다. 해당 녹음본 속의 임종국 선생은 당시 폐기종 등으로 몸이 좋지 않아 어렵게 말을 이어가면서도 친일 청산이 왜 필요한가를 강하게 피력하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의 영향이란 것은 (우리 일상에) 알게 모르게 상당 부분 파고 들어와 있어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나라의 주체성을 완전히 마비시켜 놓은 이런 상태가 돼있거든요.” – CBS 라디오, 임종국 선생 인터뷰(1988년)
그런 한편, 임종국 선생의 막내 누이동생인 임경화 여사는 재야에서 오직 연구에만 전념하며 가난한 삶을 살았던 선생의 모습들을 설명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실제로도 선생은 연구비가 없어 여동생에게 돈을 빌릴 정도로 어려웠다고 전해진다(https://www.minjok.or.kr/archives/77896).
치열한 삶의 현장, 요산재
▲ 요산재 시절의 임종국 선생 ⓒ 민족문제연구소
다음 일정은 요산재(樂山齋)로 이어졌다. 요산재는 선생이 천안에서 기거한 동안 집필실이자 일터(밤 농사), 잠자리이자 부엌으로 역할을 한 삶의 현장이다. 이러한 고로 요산재는 우리가 흔히 아는 고상한 연구실이나 향기로운 서재와는 다른, 치열한 생존의 공간이다.
3<총독부 관보> 35년분 2만 매 이상, <매일신보> 10년 필사분 등을 연구할 정도로 정열적이었던 선생의 학열과 연구과정을 상상해보면 이곳 요산재의 공간적 의미가 더욱 각별해진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임종국 선생 연보에 따르면, 선생이 요산재에 머무른 1980년~1989년 사이 발간된 선생의 연구 저작은 <일제침략과 친일파>, <밤의 일제 침략사>, <일제하의 사상탄압>, <한국문학의 민중사> 등 9권에 달한다.
3그러나 지금의 요산재는 새롭게 리모델링되어 당시의 대략적인 집 형태만 남아있으며, 현 거주민 또한 임종국 선생과 관계가 없는 민간인이다. 즉, 사유지이므로 접근이나 답사는 어렵다. 다만 이날은 30주년 관계로 주최 측(민족문제연구소)과 거주자의 협의가 이루어진 상황이었음을 기사를 통해 밝힌다.
이후 30년, 선생이 남기고 간 뜻
이어 천안중앙고등학교에서 열린 임종국 선생 30주기 추모문화제를 마지막으로 이날의 추모식 일정은 모두 마무리됐다.
여기서도 김지철 충남 교육감, 윤일규 국회의원 등 공직인사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장병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 등 시민단체 인사들의 다양한 의견 표명이 있었지만 논점은 모두 비슷했다. 친일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이 떠난 지 30년, 그 이후 우리 주변의 친일 청산은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반성해보자는 것이었다.
임종국 선생은 어찌 그토록 치열할 수 있었을까? 선생은 자신의 저서 <친일문학론>을 통해 그 문제에 대한 답을 내어놓고 있다. 선생은 우민화, 민족말살을 기조로 한 식민교육이 자신을 역사와 민족에 무지한 ‘천치’로 만들었음을 지적한다.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선생은 친일문제 연구에 몰입했다.
식민지 교육 밑에서, 나는 그것이 당연한 줄만 알았을 뿐 한번 회의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한국어를 제외한 모든 관념, 이것을 나는 해방 후에 얻었고 민족이라는 관념도 해방 후에 싹튼 생각이었다. 이제 친일 문학론을 쓰면서 나는 나를 그토록 천치로 만들어 준 그 무렵의 일체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임종국, <친일문학론>(1966)
‘친일파’라는 말 자체를 금기시하던 당시(1965년)의 풍토는 선생의 연구를 외면했고 선생은 가난했다. 하지만 굴하지는 않았다. 그의 붓끝은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건 없건, 관료이건 문필, 예술가이건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육친(아버지 임문호)과 스승(유진오)의 친일행적까지 가리지 않고 고발했다. 선생으로서는 뼈를 깎아내는 아픔이었겠지만 그것이 친일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의 공정이고 입장이었다.
“야인이요, 백면서생으로 고독한 육십 년을 살았지만 내게 후회는 없다. 중뿔난 짓이라도 누군가 했어야 할 일이었다면 내 산자리가 허망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 임종국 어록에서
그 말대로 누군가 했어야 할 일이었기에, 우리 후대 사람은 선생에게 모종의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작지 않다.
▲ 정의당 서산태안위원회가 서정주 시비 건립계획을 철회할 것을 태안군에 요구했다. 정의당 서태안위는 11일 태안군이 최근 원북면 학암포에 친일파 시인 미당 서정주 시비를 건립하기로 한 것과 관련해, 이같은 논평을 내고 시비 건립을 반대한다고 밝혔다.(사진은 태안군청 전경) ⓒ 태안군 누리집 갈무리
정의당 서산태안위원회(아래, 서태안위)가 서정주 시비 건립계획을 철회할 것을 태안군에 요구했다. 정의당 서태안위는 11일 태안군이 최근 원북면 학암포에 친일파 시인 미당 서정주 시비를 건립하기로 한 것과 관련해, 이같은 논평을 내고 시비 건립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 5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태안군은 서정주가 1990년대 중반 학암포를 찾아 ‘학’이라는 시를 쓴 것을 기념하고, 이곳을 관광명소를 만들기 위해 12월 중으로 높이 2m, 폭 1m 크기의 시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시비 제작에는 2천여만 원이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서정주는 주로 시·소설·잡문·평론 등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으며, 1942년 7월13일부터 17일까지 ‘매일신보’에 평론 ‘시(詩)의 이야기-주로 국민시가(國民詩歌)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 대열에 합류했다.
정의당 서태안위는 “일본의 무역 보복에 맞서 전 국민이 노 아베 운동을 벌이는 와중에 터져 나온 소식”이라면서 “부끄러움은 오직 태안군민의 몫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시비가 건립될 곳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참여했던 이종일 선생의 생가와 동학 북접의 농민혁명군 기포지가 인접해있는 곳”이라면서 “일제에 분연히 맞섰던 태안의 선조들이 지하에서 땅을 칠 일”이라고 개탄했다.
이어 “태안 시민사회 진영이 이에 대해 태안군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고 있다는 점은 환영할 일”이라며 “언제나 그렇듯 관청에서 친 사고를 시민들이 해결하는 양상”이라며 태안군을 비난했다.
정의당 서태안위는 태안군과 더불어민주당과 당 소속 가세로 태안군수에게 명확한 입장을 요구했다.
끝으로 이들은 “이 사태의 추이를 계속해서 지켜볼 것”이라며 “서정주 시비 건립에 반대하는 시민사회와 공동보조를 취할 것임을 밝힌다”고 덧붙였다.
친일인명사전에는 서정주의 신군부 때 행적도 나와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987년 1월 18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생일 축하장에서 그는 자작시 ‘전두환 대통령 각하 제56회 탄생일에 드리는 송시’를 낭독했다.
한편 이같은 태안군의 계획이 발표되자 지역 시민단체는 즉각 반발했다. 또한 태안시민사회단체 대표 10여 명은 이날 오후 긴급 모임을 열고, ‘서정주 시비 건립 반대 태안군민 모임’을 결성했다.
시즌4는 기존처럼 친일파를 소환하여 그들이 식민지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이번시즌부터 인물을 확장하여 친일파 뿐 아니라 식민지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좀 더 입체적으로 식민지 시기를 다룰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지속적인 청취 부탁드립니다.
방통심의위, 다큐 방영한 RTV에 관계자 징계…RTV가 행정 소송하자 1·2심 모두 패소 판결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행적을 비판적으로 다룬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감독 김지영)을 방송한 시민방송RTV에 법정제재 처분을 내린 방송통신위원회의 판단이 정당했는지 대법원이 오는 21일 결정한다. RTV가 2심 판결에 불복해 2015년 8월 상고한 지 4년 만이다.
▲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포스터
역사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해 제작한 ‘백년전쟁’은 한국 근현대사 100년을 다룬 4부작 다큐멘터리다. 2012년 11월 1부 ‘두 얼굴의 이승만’과 박정희 경제성장 신화의 허실을 파헤친 번외 편 ‘스페셜에디션 프레이저보고서’ 등을 공개했다. RTV는 해당 영상을 2013년 1월부터 3월까지 총 55차례 방송으로 내보냈다.
이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2013년 8월 해당 방영분들을 심의 안건으로 상정했다. 방통심의위는 ‘백년전쟁’이 방송심의규정 공정성, 객관성, 명예훼손 조항 등을 위반했다며 이를 방송한 RTV에 대해 법정제재인 ‘관계자 징계 및 경고’를 결정했다.
그러자 RTV는 방송통신위원회를 상대로 방통심의위의 제재를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1·2심 재판부 모두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해당 방송은 특정 자료만을 근거로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전직 대통령을 폄하했다”며 “해당 프로그램이 전체 관람가로 두 달에 걸쳐 55회나 방영돼 위반의 정도가 중하다”고 판단했다.
또 해당 방송들이 사자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봤다. 재판부는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 평가 없이 부정적 사례와 평가만으로 내용을 구성하고, 이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은 의도적으로 배제해 사실을 왜곡하고 사자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방통심의위 제재가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RTV는 2심 판결에 불복해 2015년 8월 상고했고, 4년만인 오는 21일 대법원 판결이 결정된다.
김영준 RTV 팀장은 20일 미디어오늘에 “대법원이 파기 환송하면 방송의 독립성과 객관성, 표현의 자유 등을 확인받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패소의 경우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만일 패소한다면 판결에 대해서는 존중할 것이나 앞으로 방송사들이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과가 나오는 대로 어떤 식으로든 입장을 낼 것”이라고 밝혔다.
경기도 주최 ‘3·1운동 100년 역사콘서트’ 수원 강연, 한홍구·함세웅·이완배…“만주·국내 항일투쟁 주목 못 받아”
구한말을 다룬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10회에 이런 장면이 있다. 노비 출신 유진 초이(이병헌 분)가 “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엔 누가 사는거요.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라고 묻자 고애신(애기씨, 김태리 분)은 “그는 그저 제게 물었을 뿐인데 물은 이도 물음을 받은 저도, 다쳐서요”라며 얼어붙은 강바닥에 주저앉을 뿐 유진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경기도 주최로 19일 수원 경제과학진흥원에서 열린 ‘3·1운동 100년, 깨어있는 시민의식을 위한 경기도 명사초청 역사 콘서트’에서 이 장면을 예시로 들며 “잃어버린 나라를 찾겠다고 용감하게 싸웠는데 망해가던 대한제국을 그대로 살리는 건 아닌지 독립운동가들의 고민이 있었다”고 말했다.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경기도 주최로 19일 수원 경제과학진흥원에서 열린 ‘3·1운동 100년, 깨어있는 시민의식을 위한 경기도 명사초청 역사 콘서트’에서 강연하고 있다. 사진=김용욱 기자
한 교수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선생이 한국 최초 공산당인 한인사회당 당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임시정부는 용공(공산주의 용인)을 넘어 연공정부 정도 되는데 이런 사실과 임시정부가 꿈꿨던 나라가 뭔지, 어떤 조국을 세우려 했는지 등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국가정체성을 보여주는 제헌헌법을 묻는 시험 문제가 있었느냐”며 “지금 어떤 진보적인 얘길 해도 우파들이 만든 제헌헌법보다 보수적일 정도인데 이게 독립운동가들이 꿈꾸던 나라”라고 말했다.
역사에서 잊힌 소중한 존재들은 더 있다. 한 교수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이름도 못 남긴 채 사라졌지만 치열하게 싸웠던 의병을 ‘의병 아무개’라고 표현한 대목을 인용했다. 의병장 중에서도 이름이나 얼굴이 알려진 이는 극소수다.
“광주 5·18을 말할 때 1980년 5월26~27일 새벽 ‘내가 광주에 있었다면 도청에 남았을까’란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싸웠겠나. 의병들도 그렇다. 의병이 100명쯤 나타나면 (군경) 서너 명이 슬슬 나가 소탕할 정도였다. 처절한 죽음이었다.”
한 교수는 이렇게 말하며 ‘미스터 션샤인’의 한 대사를 인용했다. “빼앗기면 되찾을 수 있으나 내어주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어떤 여인도, 어떤 포수도, 지키고자 아등바등한 조선이니 빼앗길지언정 내어주진 마십시오.” 한 교수는 “광주에서 텅 빈 도청을 내주면 80년 5월이 우리 마음에 진하게 남았을까”라고 말했다.
▲ 함세웅 신부가 경기도 주최로 19일 수원 경제과학진흥원에서 열린 ‘3·1운동 100년, 깨어있는 시민의식을 위한 경기도 명사초청 역사 콘서트’에서 강연하고 있다. 사진=김용욱 기자
이날 함세웅 신부(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도 잊힌 이들을 소환했다. 함 신부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들을 ①만주 지역 항일무장 투쟁 ②국내 투쟁 ③상해임시정부의 국제승인투쟁과 독립항쟁 ④하와이 등 해외 독립투쟁 등 네 부류로 나눴다. 그는 “김구로 상징되는 ③과 이승만으로 상징되는 ④가 일제 패망 이후 한국의 주류가 되면서 만주와 국내에서 투쟁한 이들이 수면 아래에 있다”며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100주년, 의열단 100주년을 맞은 올해 우리의 책무”라고 말했다.
역사오류와 왜곡을 바로잡을 필요도 있다. 동아일보가 외신을 인용해 1945년 12월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소식을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보도한 기사를 두고 함 신부는 “동아일보의 오보라고 배워왔는데 사실 가짜뉴스, 거짓보도”라며 “보도 이후 한민당(한국민주당)이 신탁통치 반대 관제시위를 일으키며 좌우가 대립하는 등 아직도 영향이 있다”고 말했다.
해당 보도는 정부 수립 이후 첫 좌우 대립으로 친일파를 애국자로 좌익을 매국노로 규정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함 신부는 “내년에 조선일보·동아일보 100년인데 이런 오보를 분명히 기억하고 민족분열을 바로 잡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 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가 경기도 주최로 19일 수원 경제과학진흥원에서 열린 ‘3·1운동 100년, 깨어있는 시민의식을 위한 경기도 명사초청 역사 콘서트’에서 강연하고 있다. 사진=김용욱 기자
친일파이자 독재의 상징인 박정희가 한국 경제를 성장시켰다는 ‘박정희 신화’의 허구를 지적한 연사도 있었다. 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는 ‘오히려 박정희 때문에 한국이 이렇게 힘들게 산다’고 했다.
이 기자는 영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의 “자유무역이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는 비교우위론으로 이날 강연을 시작했다. 선진국은 고부가가치 산업, 후진국은 저부가가치 산업을 각각 담당해 이를 교환하면 서로 이득을 본다는 이론이다. 이 기자는 “전 세계 분업체계를 공고화하기 위한 이론”이라며 “이에 따르면 50년, 100년이 지나도 아프리카·동남아는 못 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자유무역 경제에서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성장한 국가가 있는데 이는 미국 이해관계와 관련이 있다.
전쟁 직후 한국을 필리핀 등과 비교하며 박정희 덕에 잘살게 됐다는 이들이 있다. 이 기자는 비교 대상이 적절치 않다고 했다. 필리핀은 미국이 중요하게 생각한 나라가 아니란 뜻이다. 이 기자에 따르면 미국은 2차대전 이후 지정학적 위치 등을 이유로 한국·일본·독일 등 세 나라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프레이저 보고서에서 미국은 “반정부 심리가 강력한 반미 감정으로 폭발해 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판단해 경제성장을 결정한다. 이에 세 나라는 자유무역 흐름 속에서도 미국의 허락(?)하에 자국산업을 보호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경제성장을 이뤘다. 이 기자는 1970년대 정부가 국민들이 양담배를 피우거나 외제차 타는 걸 비판하고 해외여행을 금지한 사례 등을 말하며 “한국은 보호무역 국가였다”고 했다.
이 기자는 “독일은 자유주의자들인데도 대기업이 횡포를 부리면 정부가 개입해 공정경제를 이끌고 있고, 일본의 경우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젊은 경제학자(뉴딜러)들이 패전 이후 미군정과 함께 일본으로 가 재벌을 해체했다”고 말했다.
이 기자는 박정희 신화를 거짓이라고 했다. ‘박정희 신화’는 박정희 독재·장기집권을 비판하는 이들 중에도 일부가 믿고 있다. 그는 “지정학적 이유로 풍요롭게 경제발전을 할 기회를 얻었는데도 박정희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박정희 정부가 재벌에 특혜를 주는 방식으로 성장해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기업생태계가 망가졌다는 분석이다.
이날 강연들은 ‘경기도 온라인 평생학습 지식사이트(www.gseek.kr)’에서 다시 볼 수 있다.
경기도 명사초청 역사콘서트 다음 일정은 오는 25일 부천 부천시청 어울마당에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김진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전 EBS PD), 전우용 한국학중앙연구원 객원교수의 강연, 오는 30일 고양시 아람누리 아람극장에서 최태성 역사 강사, 주진오 역사박물관장, 싱어송 라이터 안예은씨의 강연으로 이어진다.
행사 홈페이지 www.history100.kr
행사 사무국 문의-3·1운동 100년, 깨어있는 시민의식을 위한 경기도 명사초청 역사 콘서트.
전화 : (02) 2644-9944 (내선번호 103)
[서울=뉴시스]나운채 기자 = 이승만·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그린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의 제재는 부당하다고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판단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1일 백년전쟁 방송사인 재단법인 시민방송이 방통위를 상대로 “제재 조치를 취소해 달라”며 낸 소송 상고심 선고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백년전쟁’ 방송이 심의 규정상 객관성과 공정성, 균형성 조항을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며 “공적 인물과 관련된 공적 관심사를 다루고 있고, 역사적 사실과 인물에 대한 재평가 등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시민방송은 지난 2013년 1월부터 3월까지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백년전쟁-두 얼굴의 이승만’과 ‘백년전쟁-프레이저 보고서’ 등 두 전직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이 전 대통령 사생활과 독립운동 성금 횡령 의혹, 박 전 대통령의 친일 발언 등의 내용이 담겼다.
방통위는 해당 프로그램이 특정 자료만을 근거로 편향된 내용을 방송했거나 직설적이고 저속한 표현을 사용했다는 등의 이유로 방송심의 규정상 공정성과 객관성 등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징계 및 경고 조치 등 제재를 가했고, 시민방송은 재심이 기각되자 소송을 냈다.
1·2심은 “특정 자료와 특정 관점에만 기인한 역사적 사실과 위인에 대한 평가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전제하지 않는 한 그 자체로 의도적인 사실 왜곡이 될 가능성이 있다”며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사안을 다루면서 공정성과 균형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다양한 의견을 균형 있게 반영하지 못했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애초 이 사건은 대법원 1부에 배당됐으나, 전원합의체로 회부됐다. 전원합의체는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한 대법관 12명과 대법원장으로 구성되며, 소부에서 의견이 일치되지 않거나 판례를 변경해야 할 때, 법리 등 중요 사안을 다룰 때 회부된다.
이 사건의 쟁점은 역사적 인물을 대한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인정될지, 방송 형태의 역사 다큐멘터리에 대한 공정성·객관성 여부의 심의 적절성 등이다. 전원합의체가 제재가 부당하다고 판단함에 따라 또 다른 방송 매체 및 프로그램 등 유사 사례에 적잖은 영향이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징용·징병에 동참하라며 일제에 적극 ‘부역’한 세력이 ‘강제징용 배상’ 판결한 대법원과 우리 정부를 헐뜯고 아베를 편들고 있다.
민족과 국민 앞에 한번도 사죄한 적 없이 ‘숨은 권력’으로 군림하며 이제는 ‘반개혁’에 앞장서는 그들과의 백년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판결은 때로 한 사건을 통해 시대의 진면목을 들춰낸다. 최근 대법원이 ‘문제 없다’고 판단한 <백년전쟁>은 2012년 11월 유튜브로 처음 공개된 이래 400만뷰 이상 기록한 화제작이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미 중앙정보국(CIA) 기밀문서 등 국내외 자료까지 찾아내 이승만·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조명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 ‘저항세력’과 부역했던 ‘협력세력’ 사이엔 아직도 전쟁이 진행 중이라며 ‘백년전쟁’이라 이름 붙였다. 좀 거칠긴 해도 굴곡진 100년사를 쉽게 이해하는 데는 그런대로 유용한 잣대를 제공한다.
‘백년전쟁’이 법적 심판대에 오르는 과정 자체가 ‘전쟁’이 현재 진행형임을 보여준다. 방송 4개월 만에 친일 협력세력 후손인 한국방송 이사장(이인호)이 사회 원로 자격으로 역시 협력세력의 딸인 대통령(박근혜)과 만난 자리에서 “역사 왜곡”이라며 “국가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한다”고 부추겼다. 이틀 뒤부터는 또 다른 친일 협력세력 후손들이 소유한 언론들이 달려들었다. 미국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처럼 패러디 기법을 활용했다는 작품에 현미경을 들이대며 지엽적인 표현 하나하나를 따지고 들었다.
결국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징계하고 검찰이 기소까지 했지만 소송전은 협력세력의 참패로 끝났다. 서울중앙지법은 검찰이 유일하게 허위라며 기소한 사자 명예훼손 혐의조차 인정하지 않고 지난해 8월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역시 방송통신심의위 제재에 대해 “외국 정부의 공식 문서와 신문기사 등 자료에 근거해 중요 부분이 객관적 사실과 합치된다”며 취소하는 게 맞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이 정권 정치기구가 됐다’는 등 억지 주장에도 작은 전쟁은 ‘사필귀정’으로 막을 내렸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역시 의도치 않게 친일 협력세력의 민낯을 까발렸다. 아무 근거 없이 ‘전략물자가 북한 등으로 흘러갔다’고 보도해 한-일 갈등 초기 일본에 수출규제의 핑곗거리를 제공한 것도 이들이었다. 그래놓고 아베 정부 대신 우리 정부를 겨냥해 ‘경제 보복을 자초했다’고 비난했다. 지소미아 종료의 조건부 유예로 두 나라가 파국을 피한 뒤에도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일본의 유력 언론(아사히)마저 일본 정부에 ‘이성적 사고로 돌아가 수출규제를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판에 우리 정부의 ‘외교적 완패’ 운운하며 사실상 아베 편을 들었다.
따지고 보면 80년 전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강제징용·징병에 동참하라고 꼬드겨 일본 제국주의에 적극 ‘부역’한 것도 이들이다. 민족 앞에 석고대죄해도 모자랄 판에 거꾸로 ‘배상’하라고 판결한 대법원과 뒤늦게나마 우리 국민 지키겠다는 정부를 헐뜯었다. ‘일본은 한번 각오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나라’라며 ‘힘이 부족하면 굴욕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라도 있어야 한다’고 조롱했다. 숨어 있던 ‘친일 부역’ 유전자가 되살아난 게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든 망동, 망언이다.
최근에 나온 ‘장자연 사건’ 수사 외압 관련 판결은 이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우울한 증거다. ‘조선일보를 대표해서 말한다’는 사회부장 한마디에 경찰의 수사 책임자는 수사기밀도 다 건네줬다. 판결문은 ‘(사회부장의) 협박은 허위가 아니’라며 사실로 인정했다. 한 젊은 여배우를 죽음으로 몰아간 성착취 사건이 왜 묻힐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적반하장으로 진실을 파헤치는 언론들을 고발했다. 판결에 따르면 알면서도 거짓 고소를 한 것이니 똑떨어지는 무고죄에 해당한다. 피고소인 조사까지 마쳤다니 사건이 곧 검찰로 넘어갈 것이다. 사법농단 사건에서 보듯이 전직 대통령 둘과 직전 대법원장까지 줄줄이 구속한 ‘윤석열 검찰’도 언론 권력 앞에선 꼬리를 감췄다. 이번에야말로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친일 협력 언론은 민족과 국민 앞에 한번도 제대로 과오를 인정하거나 사죄한 적이 없다. 오히려 정치·경제·사법 분야까지 아우르는 기득권 동맹을 이끄는 ‘숨은 권력’으로 군림하며 이제는 ‘반개혁’에 앞장서고 있다. 내년이면 100년을 맞는 이들의 반민족·반민주 과거사를 국민들에게 다시 알리고 청산하기 위해 지난 9월 ‘조선 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청산 시민행동’이 출범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절실하다.
“문희상안 반대” 강제동원공동행동, 정의기억연대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27일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일제 강제동원 문제 해결을 위한 문희상 국회의장안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또 피해자 배제 합의 안돼” 항의 서한 전달 뒤 면담
문 의장 “정해진 것 없어”“논평 삼가” 일본은 관망
한·일 갈등의 핵심적 요소인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의 해법으로 문희상 국회의장이 내놓은 제안이 국내 시민단체와 피해자들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해 실제로 성사될 가능성이 불투명해졌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강제동원공동행동, 정의기억연대 등 강제징용·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측 시민단체들은 27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문 의장이 제시한 ‘일본군 위안부·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입법안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문 의장이 연내 대표발의를 추진하고 있는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은 한·일 양국 기업과 국민이 자발적으로 기부금을 내고 현재 활동이 종료된 화해·치유재단의 기금 잔액 60억원 등을 포함해 기억인권재단을 설립, 강제징용 및 일본군 위안부 등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대리인 임재성 변호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한국 정부가 재단을 만들어 한·일 국민과 기업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으는 방안은 일본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게 아니다”라며 “전혀 연관 없는 쪽을 끌어들이면서 일본 책임이 모호해지고 여러 과거사 피해자가 청산되는 게 이 안의 핵심”이라고 비판했다. 임 변호사는 이어 “유족들은 가해자가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문 의장 안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고 지적했다.
2015년 말 피해자들이 배제된 채 이뤄진 ‘한·일 위안부 합의’와 유사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중앙대 교수)는 “피해자 의사를 배제한 채 이뤄진 한·일 합의가 또다시 반복되려 한다”며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한 문재인 정부가 재단에 남은 60억원에 의미를 부여하며 일본 책임을 면탈하려 한다”고 말했다. 이들 단체는 “피해자 모욕하는 문희상안 폐기하라”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동원 문제 법적 책임 이행하라” “반인권 반역사적인 입법 추진 중단하라”는 요구사항을 외쳤다.
이들은 기자회견 직후 문 의장에게 항의 서한을 전달하고 국회의장실에서 5분간 면담을 가졌다. 이 이사는 면담 직후 “문 의장이 12월 안에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했다”며 “다른 의원들과 회의한 결과 의원들이 문 의장 안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문 의장은 일본이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내용이 법안에 포함돼 있지 않다는 지적에 대해 “얼마든지 안에 포함할 수 있다. 아직 정해진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 문은 열려 있다”고 말했다고 임 변호사는 전했다.
일본 측은 관망하는 분위기다. 니시무라 아키히로(西村明宏) 일본 관방부(副)장관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문 의장의 구상을 일본 측이 받아들일 여지가 있느냐는 물음에 “타국 입법부에서의 논의이므로 (일본) 정부로서 논평하는 것은 삼가고 싶다”고 답변했다.
강제동원공동행동, 정의기억연대 등 피해자 시민사회단체 관계자가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를 방문, 문희상 국회의장에게 문 의장이 제시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해법에 대한 항의서한을 전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 기업의 강제동원 배상 책임을 한·일 기업과 국민의 자발적 기부금, ‘화해·치유재단’에 일본이 냈던 기금의 잔액 60억원으로 대신 부담하자는 문희상 국회의장의 제안, 이른바 ‘문희상안’에 강제동원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피해자 단체가 연일 반발하고 있다. 가해의 역사를 청산하는 게 아니라 외교적 갈등을 만들 여지가 있는 피해자를 청산하고 일본 정부의 책임을 지우는 발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문 의장은 지난 4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국회의장 회의에서 한·일 양국 국민과 기업을 대상으로 모금해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돈을 지급하는 법안인 이른바 ‘1+1+알파(@)’ 안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문 의장이 제안한 안은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한·일 기업과 국민의 자발적 성금, 2015년 한·일 정부 간 합의로 만들어졌다 해산된 ‘화해·치유재단’에 일본이 낸 기금 잔액 60억원으로 대신 부담하자는 방안이다. 이 재원으로 피해자들에게 ‘위자료’가 지급되면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이 ‘대위변제’되는 것으로 간주해 ‘재판상 화해’가 성립되는 방식으로 문제를 푼다는 것이다. 문 의장은 ‘1+1+알파’ 안을 한·일기업과 양국 정부, 국민의 자발적 기부금과 화해치유재단 기금 잔액을 통해 ‘기억인권재단’을 설립하자는 ‘2+2+알파’ 안으로 수정해, 이를 기초로 한 특별법 입법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강제동원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와 아베 총리의 사죄를 받아내겠다는 피해자들의 핵심 요구가 빠진 방안”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양금덕(90) 할머니는 27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우리의 목적은 아베로부터 당당히 사죄를 받아내는 것이다. 사죄가 없는 기부금은 필요도 없으니 이야기도 꺼내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거지인 줄 아느냐”고 잘라 말했다. 양 할머니는 이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에 끌려가 동물 취급을 받으면서 일하고 돌아왔다. 사과를 받는 것이 가장 먼저”라고 강조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옥선 할머니도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쪽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 “사죄가 먼저다. 그리고 배상은 일본 정부가 할 일인데 왜 한국 정부와 국회가 이래라저래라 하나. 또 박근혜가 한 돈은 일절 못 받으니 돌려주라”라고 전했다.
피해자 단체들도 이번 ‘2+2+알파’ 안에 대해 “일본 정부에 면죄부를 주고 지난해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판결이 인정한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 권리를 소멸시키는 법안”이라고 입을 모은다. 일본제철·미쓰비시·후지코시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 대리인인 임재성 변호사는 이날 오후 2시 국회 정문 앞에서 열린 ‘문희상 안에 대한 피해자·시민사회단체 공동 기자회견’에서 “문 의장의 제안에 따르면 일본 기업은 법적·역사적 책임이 아닌 자발적인 방식으로 돈을 모으고, 심지어 그 돈에 한-일 기업과 국민의 돈까지 교묘히 섞이게 된다”며 “이는 대법원 판결을 무효화하고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책임지라는 일본 정부의 요구에서 조금 진전된 수준의 안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이런 방식은 결코 대법원 판결의 이행이 아니며 가해의 역사를 청산하는 게 아니라 외교적 갈등을 만들 여지가 있는 피해자를 청산하기 위한 방안”이라고 꼬집었다.
기억인권재단 설립에 화해치유재단 기금 잔액을 사용하는 건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되살리려는 발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의기억연대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문 의장은) 기억인권재단 설립 기금에 화해치유재단 기금 잔여금 60억을 포함시켜 피해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안보와 경제라는 현실 논리를 내세우는 커다란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며 “배상금도 아닌 위로금으로 10억엔으로 만든 화해치유재단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야기했느냐”고 반문했다. 이 교수는 그러면서 “피해자 중심주의를 내세우며 화해치유재단을 해체한 문재인 정부가 다시 잔액을 들고 와 이 재단에 의미를 부여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최근 한-일 관계가 경색된 가운데 지소미아 연장 문제와 함께 일제하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 방법을 놓고 청와대, 외교부, 국회의장 등의 행보가 두드러졌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정신적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 달리 말해 위자료청구권을 인정했다. 하지만 일본 기업은 판결에 따르지 않고 협의 요청마저 거부해 판결에 대한 강제집행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피해자들은 오랜 법정 투쟁 끝에 권리를 인정받았음에도 한·일 사이의 분주한 움직임을 마음 졸이며 불편하게 지켜봐야 하는 처지다.
이런 상황을 만든 직접적 계기는 대법원 판결이지만 그 판결을 가져온 근본적 원인은 일제의 강제동원이라는 역사적 사실이다. 80년이 다 되도록 상처는 남아 있고 문제는 풀기 어려운 매듭처럼 보인다. 해법은 진실, 정의, 피해 회복(배상), 재발 방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나오는 해법들에는 이 모두를 아우른 ‘사죄’라는 단어가 들리지 않고 돈 이야기만 무성하다. 그것도 누가 내느냐를 놓고 1+1, 2+1, 2+2에 알파까지 공식도 다양하다. 현실적으로 일본이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벌써부터 많은 우려가 제기되고 있지만 먼저 말하기 껄끄러운 돈 문제부터 따져보고 싶다.
1991년 고 김학순 여사가 ‘위안부’ 피해자로 증언을 한 이래 일본에서 여러 건의 재판이 있었다. 피해자들은 법이 알아듣는 언어는 돈일 것도 같고 하여 사죄 요구와 함께 피해액으로 얼마를 산정해야 할지 고통스러운 선택을 해야만 했다. 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생활안정지원자금이 제공될 때도,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이 지급될 때도 마음이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들이 속한 국가가 내는 돈이었기에 배상도 보상도 아닌 위로금이었고 인도적 명분의 지원금이었다. 한편 1995년 일본 정부의 관여 속에 일본 시민들이 내놓은 국민기금은 배상도 보상도 아닌 애매한 이름(償い金)을 가진 또 다른 위로금이었고, 2015년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가 내건 일본 정부의 10억엔이라는 출연금 역시 성격이 불투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해자인 일본 쪽에서 나온 돈이라면 배상금이나 보상금이어야 할 것인데 역시 법적 책임은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피해자에게 주는 돈이었기에 위로금 차원을 넘지 않는다. 문제를 국제사회나 법정에 제기하지 말라는 속내도 엿보이므로 이들을 무마하기 위한 돈이라고 할 만도 하다. 그런데 2019년인 현재 다시 일본이 책임을 인정하는 것도 아닌데 위자료를 일본 기업만이 아니라 한국 기업과 뜻있는 한국 국민들도 돈을 내어 기금을 만드는 것이 어떠냐는 안이 나오고 있다.
피해자들을 괴롭히는 것 중 하나는 얼마를 받아야 하는 지와, 주면 받아도 괜찮은 지의 문제가 있다. 한국 민법은 불법행위에는 손해배상이 따른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독일 민법은 불법행위가 있으면 원상회복부터 하라고 한다. 국제인권법은 손해배상이 아닌 배상 또는 피해회복을 말하며, 여기에는 원상회복, 금전배상, 사죄,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 조치 등이 포함된다.
위자료는 권리로서 당연히 받아내야 할 돈이란 의미를 가지며 금전배상에 속한다. 그런데 판결이 정한 위자료를 판결을 받은 일본 기업 대신 내줄 테니 권리를 포기하라는 식의 논의도 들린다. 개인청구권을 아예 소멸시키면 한·일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배상의 권리가 먼저 인정돼야 포기할 것도 생긴다. 피해자가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재판을 제기하는 것이라는 사정을 생각해보면 재판할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 되고 위자료와 재판할 권리 사이에는 이제 대가관계가 성립한다. 이렇게 되면 일본이 사죄를 하건 말건 재판을 제기할 일이 없게 되고, 일본이 괴로울 일도 없게 되며, 한-일 관계가 위협받는 일도 없게 된다. 자칫 인권피해의 실상과 역사는 실종되고 마치 피해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처럼 뒤집혀 버린다.
일본이 줄지도 모를 돈이 위로금이라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책임 문제는 영원히 괄호 안에 들어가 버린다. 과거 국민기금이나 화해·치유재단의 돈을 거부한 분들도 있었다. 왜 안 받느냐는 압박과 함께 성의를 무시하는 반일민족주의라는 비난마저 있었다. 이쯤되면 타협의 강요라고 할 만하다. 게다가 위로금을 받을 경우 배상을 요구하는 입장에서 거꾸로 돈 준 사람에게 고맙다며 머리를 숙여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주객이 전도되고 상하관계 또는 위계질서마저 생긴다.
어떤 이름의 돈이 오간다 해도 돈으로 피해자의 상처를 다 치유할 수는 없다. 돈을 아무리 받아도 달래지지 않는 마음이 남아있다. 거북이와 아킬레스의 경주처럼 이 남은 부분은 배상금이라고 해도 따라잡을 수 없다. 가해 책임의 인정과 사과가 피해자들에게는 자기 삶에 대한 의미가 된다. 가해자로선 돈을 주더라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자기반성의 전제가 되는 자기부정이다. 과거 잘못을 저지른 자기를 부정하고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이 드러날 때 상대는 용서와 화해를 생각해보게 된다. 역사와 정의를 부정하면서 흥정하듯 내놓는 사과에는 진정성이 없다. 강제동원 해법 마련을 위해서는 먼저 피해자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들의 어릴 적 삶을 뒤튼 것이 개인이 견뎌야 할 운명이 아니라 국가범죄의 역사였다는 성찰이 전제돼야 할 것이다.
[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9년 12월 4일 (수요일) ■ 대담 :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친일파 4389인의 기록 “깜짝 놀랄 의외의 인물, 왜?”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박정희 전 대통령, 장면 전 국무총리, 언론인 방응모, 김성수, 장지연. 음악가 안익태, 홍난파.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인물들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4000여 명의 친일 행적 인사들을 찾아 인명사전을 만들었습니다. 벌써 10년 전 일이죠. 친일 인사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 인사를 비롯해 판·검사, 경찰, 언론인, 예술가 등 분야도 다양합니다. 개탄스러운 현실은 이 사전에 이름을 올린 친일 인사 가운데 68명은 여전히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는 것입니다. 갈 길이 먼 친일 청산과 친일인명사전 발간 10년의 성과,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이하 방학진)> 네, 반갑습니다. 방학진입니다.
◇ 이동형> 친일인명사전, 10년 됐다고 하는데요. 시작은 꽤 오래 전부터 기획됐죠?
◆ 방학진> 그렇습니다. 시작은 1991년도 민족문제연구소가 출범하면서부터 저희의 일성이 친일인명사전을 만들겠다고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것으로 따지면 18년 만에 인명사전이 발간된 거죠.
◇ 이동형> 지금 보이는 라디오에 오신 분들은 친일인명사전을 볼 수 있는데, 총 세 권으로 구성됐습니다. 총 세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정희님께서 “친일인명사전, 가나다순입니까? 아니면 제일 나쁜 사람순입니까?” 이렇게 물으셨는데요.
◆ 방학진> 가나다순입니다. 아직 사전을 안 보셨군요.
◇ 이동형> 가나다순으로 세 권이 이렇게, 굉장히 방대한 양입니다. 이게 결국은 친일 행적이 어떤 것이냐, 그리고 그 자료는, 증거자료가 있어야 하니까요. 그런 것들을 나열한 것이죠?
◆ 방학진> 네, 보시면 인명 가장 아래 출전이 나오거든요. 이것은 평전이 아니라 사전이기 때문에 개인의 주관이 배제된, 아주 드라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전히 핵심이고, 그 출전이 없었다고 하면 저희가 줄소송을 당했겠죠.
◇ 이동형> 마곡주님께서 “지금 구입 가능합니까?”
◆ 방학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 이동형> 지금도 구입이 당연히 가능하고요. 이 책, 판매는 많이 됐습니까?
◆ 방학진> 영업비밀인데요. 공공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에는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요. 그다음에 뜻 있는 교육감님들이 학교 예산으로, 교육청 예산으로 보급한 곳은 있고. 또 보급 안 된 교육청도 꽤 있습니다.
◇ 이동형> 처음에는 이거 만든다고 했을 때 일반 대중들이 다 박수를 쳤는데, 발간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왜 그랬을까요?
◆ 방학진> 저희 민족문제연구소가 예나 지금이나 학술단체인데, 그래서 학술면에 언론에서 많이 나와야 하는데, 주로 정치면, 사회면에 많이 나옵니다. 연구영역을 자꾸 정치화 만들려고 하는 세력 때문에 민족연구문제소의 활동들을 정치 편향적이라고 하는 그런 덧씌우기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죠.
◇ 이동형> 소위 말하는 좌파 세력들이 우파를 공격하려고 만든 거 아니냐, 이런 논란이죠?
◆ 방학진> 그렇습니다.
◇ 이동형> 이거 처음에 국회 예산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 방학진> 처음에는 시민들 모금으로 하려고 하다가 그다음에 저희가 할 수 없는 영역들이 있었습니다. 인명사전을 만들기 위한 기초 예산들, 과거 신문, 잡지들을 사야 하고, 그런 것들을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그런 것들은 저희만이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대한민국의 근현대 연구자들에게 활용될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런 기초 조사사업으로 저희가 예산을 신청했는데, 그게 전액 삭감된 경우가 있었죠.5억 원 정도 예산을 상정했는데, 전액 삭감해서 한 푼도 못 받았는데요. 그것을 안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을 해주셨죠. 그것보다 더 많은 예산을 모금해주셨죠.
◇ 이동형> 예산 삭감해서 0원으로 만들어서 그것에 대해 분노한 시민들이 그러면 우리가 직접 모금을 해주겠다.
◆ 방학진> 국민이 만들자.
◇ 이동형>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등재된 인물이 4000여 명.
◆ 방학진> 4389명.
◇ 이동형> 가장 논란이 된 인물은 역시 박정희 전 대통령입니까?
◆ 방학진> 그렇습니다. 저희야 박정희 전 대통령은 4389명 중 한 명이고, 굳이 등급을 따지자면 특 A급은 아니라고 보는데, 오히려 박정희 대통령을 빼려고 하는 정치인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중요한 인물로 만들어버린 거죠.
◇ 이동형> 박 전 대통령은 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겁니까?
◆ 방학진> 친일인명사전은 각 분야별로 기준이 다르지만, 가장 관통하는 기준은 뭐냐면 친일의 적극성, 자발성, 다목성이 되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23살 문경초등학교 교사 시절에 일본 만주육군사관학교를 지원하죠. 혈서 지원. 이미 교사이기 때문에 군대를 안 가도 되는 면제사유이고, 이미 19이 넘었기 때문에 군대를 갈 수가 없는데, 혈서를 두 번이나 써서 일본의 사관학교에 입대한 그런 자발성, 적극성이 있기 때문에 등재되었습니다.
◇ 이동형> 기준 계급이 있지 않습니까?
◆ 방학진> 기본적으로 소위, 소위라고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본인이 군대에 입대하려고 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계급이기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 소위와 비교하면 안 됩니다만, 엄청나게 높은 직위라고 할 수 있고요. 박정희 대통령이 혈서를 써서 군대 가겠다고 하는 시기는 1939년이기 때문에 중일전쟁 이후에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 전 영토가 전쟁통에 있는 상황에서 굳이 군대를 가겠다고 하는 그런 자발성, 적극성이 반영돼서 인명사전에 등재된 것이죠.
◇ 이동형> 그 혈서 논란이 있지 않았습니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혈서를 주장했는데 가짜다, 이렇게.
◆ 방학진> 조작이다, 라고 해서 많은 보수적인, 수구적인 인사들이 말씀을 하셨지만, 결국은 판결을 통해서 가짜 논란은 이미 종식됐죠.
◇ 이동형> 가짜가 아니고 진짜로 있었다. 관련 기사도 나왔고요.
◆ 방학진> 네, 그렇습니다.
◇ 이동형> 또 논란이 된 사람은 백선엽 장군인 것 같아요.
◆ 방학진> 지금 가장 핫한 인물이고, 최근에 주한미군 사령관이 백선엽 전 장군을 찾아가서 생일 축하, 셀카도 찍고 한 모양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현재 광복회장님이 분개하셨는데, 살아있는 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 중에 가장 고령이면서 가장 유명한 분이 백선엽이죠.
◇ 이동형> 백선엽 장군 같은 경우에는 만주군 중위. 거기다가 간도 특설대 복무했기 때문에.
◆ 방학진> 간도 특설대는 쉽게 말하면 이이제이죠. 조선인을 통해서 조선인 독립군을 때려잡아야 한다고 하는 특수부대이고요. 아주 잔악하고, 행위가 악질적이기 때문에 그 당시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중국인들도 대단히 두려움에 떨었던 부대죠.
◇ 이동형> 이 간도 특설대가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108차례 작전을 벌여서 항일 무장세력과 민간인을 172명 이상 살해했으며 많은 사람을 체포하거나 강간, 약탈, 고문했다. 그리고 백선엽 장군 본인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와 같은 과거에 대해서 스스로 쓴 글이 있지 않습니까?
◆ 방학진> 있었고요. 어쩔 수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 이동형> 이 부분도 논란이 될 수 없다고 보시는 거고. 의외의 친일파도 있습니까?
◆ 방학진> 개인적으로는 그런 게 있었을 것 같아요. 친일파는 DNA 자체가 친일파의 DNA가 있을 것이다, 라고 많은 분들이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고요. 어떤 인물은 독립운동가의 동생이 친일파인 경우, 또는 그 반대인 경우. 또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인데, 아들이 친일파인 경우, 또 그 반대인 경우. 보니까 역시 친일의 문제는 개인의 판단의 문제이고, 개인의 사회적 책임이 가장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이 듭니다.
◇ 이동형> 장지연 같은 경우에는 우리 학교 다닐 때 시일야방성대곡, 독립운동가로 배웠는데요.
◆ 방학진> 그렇습니다. 장지연 같은 경우에는 많은 분들이 충격을 받았죠.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고, 장지연 이름을 딴 언론상도 오랫동안 있었는데요. 그분이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한 이후에 변절하게 되고, 그 변절의 증거가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고요. 그 후손들이 가처분 신청을 했어요, 법원에. 그렇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수록이 되어 있는 인물입니다.
◇ 이동형> 성훈님께서 “혹시 사전에 후손이 누군지도 나오나요?”
◆ 방학진> 그런 것은 저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아까 말씀드렸듯이 어떤 인물이 독립운동가이지만, 그 독립운동가의 동생은 또 친일파인 경우도 있고요. 그 반대의 경우도 있기 때문에 친일의 문제, 역사의 문제를 가족의 문제, 혈통의 문제로 연관시키는 것은 오히려 피해야 할, 연좌제를 범할 수 있는 우려가 있습니다.
◇ 이동형> 과거에 소위 말하는 빨갱이 활동을 했다. 그러면 그 자식도 연좌제로.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죠.
◆ 방학진> 그것을 피하자고 하는 것이 저희의 목적이니까요.
◇ 이동형>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후손이 누구인지 나오지 않는다. 아까 말한 것처럼 굉장히 드라이하게 적혀 있는 것이죠.
◆ 방학진> 그렇습니다.
◇ 이동형> 친일활동을 어떻게 했고, 나중에 해방 후에 활동은 어떻게 했고, 이 정도로 나와 있는 겁니다. 정치인, 언론인, 예술인. 법조인도 상당 부분 들어갔습니다.
◆ 방학진> 네. 전체 법조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많지 않지만 그 인명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대단히 한국 사회에서 많은 족적을, 어떻게 보면 악명을 남긴 분들인데요. 대표적으로 민복기 대법관하고, 홍진기 장관을 꼽을 수 있는데. 민복기는 아시겠지만 일제 때 판사였고, 해방 이후에 인혁당 사건의 장본인 아니겠습니까? 대법원 판결을 내릴 때 대법원장이었고요. 홍진기 씨는 4.19 당시에 내무부 장관으로서 3.15 부정선거에 앞장 선 분이고, 그로 인해서 혁명 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분인데, 복권이 돼서 나중에 중앙방송, 지금 JTBC, 중앙일보, 이것을 설립하고, 그 공로인지 모르겠지만 죽기 전에 국가에서 금관문화훈장까지 받았습니다.
◇ 이동형>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가운데 국립묘지에 안장된 인물들도, 아까 제가 68명이라고 이야기했는데요. 맞습니까?
◆ 방학진> 그동안 저희가 63명설, 65명설이 있었는데요. 이번에 저희가 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서 다시 한 번 정밀하게 조사를 해봤더니 68명이었습니다. 서울에 35명, 대전에 33명인데요. 그중에서 특이한 것이 서울에 장군 제2묘역에 가면 6명의 장군들이 안장되어 있는데, 그 6명 중에서 3명이, 신태영, 이응준, 임충식, 3명이 친일인명사전에 임명된 분입니다.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국민들에게 동작동 국립묘지, 특히 장군 묘지에 이 묘역을 꼭 가보시라고 전해주고 싶어요. 저도 가보고 깜짝 놀랐는데, 가장 좋은 명당자리이고, 다른 장군 묘역은 수백 명의 장군이 안장되어 있는데, 여기는 딱 여섯 분만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분들 위해서 내려다 본 위치가 바로 임정요인 묘역이에요. 바로 임정요인 묘역을 발 아래로 내려 보고 있는 그곳에 있는 것이죠.
◇ 이동형> 지금 장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김창룡, 김백일 같은 경우에는 친일 행적은 당연한 것이고, 훗날에는 독재에 부역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이거 어떻게 우리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쳐야 합니까?
◆ 방학진> 이런 현실을 빨리 우리가 개선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법 개정을 할 수밖에 없는데요. 현재 이 68명의 친일파들을 국립묘지에서 이장하려면 유가족의 동의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제 법 개정을 통해서 유가족 동의 없이 직권으로, 정부가 스스로 직권으로 이장하는 그런 법이 매 국회 때마다 발의는 됩니다만,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그다음에 특정 정치 세력의 반대 때문에 이 법 개정이 여전히 안 되고 있습니다.
◇ 이동형> 우리가 지난번에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 분들을 모시고 방송도 했었는데, 그분들에게 간첩이 아닌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넣고 고문을 자행하고, 죄 없는 사람을 사형시키고, 또 감옥에 보내고, 그 사람들이 나중에 훈장 받았거든요, 다들?
◆ 방학진> 제가 조금 전에 홍진기 씨에 대해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홍진기는 일제 때 판사로서 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고, 3.15 부정선거 당시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는데, 언론문화창달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마 중앙일보를 만들고, TBC를 만들었다고 하는 그런 명분으로 국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받습니다. 그런 훈장을 취소하는 문제도 많은 국민들이, 저희가 이번에 여론조사를 했거든요. 10주년을 맞아서 많은 국민들이 그 지점에서 많이 분노하고 계셨습니다.
◇ 이동형> 일제에 부역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에게 훈장을 줄 수 있느냐.
◆ 방학진> 그렇습니다.
◇ 이동형> 또 민주주의를 반대하고, 독재에 부역한 사람에게 훈장을 줄 수가 있느냐. 그런데 훈장은 추서가 되어 있고, 그것을 박탈하는 것은 힘들고, 이런 차원이네요?
◆ 방학진> 훈장을 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애를 국민들에게 모범으로 삼아서 배우라고 하는 것인데, 정말 그분들이, 친일파들이 정말 배울 점이 있는 것인지. 정말 모순적인 행태라고 할 수 있는 거죠.
◇ 이동형> 우리가 사과하지 않은 일본을 상대로 해서 계속해서 주장하는 게 독일한테 배워라,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도 독일한테 배울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반나치법, 혹은 독일 같은 경우는 나치를 옹호하거나 이러면 정말 큰일 나잖아요?
◆ 방학진> 네, 과거에는 김완섭이라든지, ‘친일파를 위한 변명,’ 그다음에 세종대학교 박유하 교수, 이런 분들이 친일을 옹호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폄훼했을 때는 그냥 학계의 논쟁으로 이길 수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 단계를 넘어섰거든요. 우리가 ‘반종족주의’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분들이 더 이상은 학계 토론회에서 하는 문제가 아니고, 형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고. 이번에 저희가 진행한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 70%가 이분들은 형사처벌을 해야 한다, 라는 것이고. 독일의 경우에는 독일 형법 86조와 86조 A항이 바로 그런 해당 조항이 되거든요. 나치를 찬양한다든지, 옹호한다든지 하는 것은 가차 없이.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바로 형사처벌의 대상이 됩니다. 이런 법을 만들자고 하는 것을 광복회가 열심히 추진하고 있는데요. 지금 김원웅 광복회장께서 친일 미화 금지법을 내년 총선 때 주요한 화두로 만들어야겠다, 이런 입장을 강하게 가지고 계십니다.
◇ 이동형> 친일 잔재도 여전히 여러 곳에 남아 있습니다.
◆ 방학진> 친일 잔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보이는 친일 잔재와 보이지 않는 친일 잔재가 있을 텐데요. 일단 보이는 친일 잔재부터 우리가 솎아낼 필요가 있는데, 그러려면 전수조사가 필요하거든요. 전국적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다 조사할 수 없기 때문에 해당 지자체, 특히 광주광역시가 가장 모범이고요. 그다음에 경기도, 충남, 이런 곳이 선도적으로 그 지역 내에 있는 보이는 친일 잔재를 조사하려고 하고 있고, 거기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열심히 돕고 있습니다.
◇ 이동형> 안익태 작곡가의 애국가는 계속 불러야 하느냐, 이런 논란도 있습니다만, 보수 진영에서 이거는 강력 반발하고 있는 부분인 것 같긴 합니다.
◆ 방학진> 이건 민감한 부분이기는 한데요. 그렇지만 안익태의 애국가 문제는 오랫동안 표절 시비, 또는 작곡가 안익태의 친나치 시비가 오랫동안 돼왔기 때문에 이것을 부른다, 부르지 말자고 하는 결론부터 내지 말고, 안익태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 친나치 행적에 대해서 공론회장을 만들어서 계속 토론하는 게 중요하겠다. 여기서 멀지 않은 숭실대학교에 가면 음악대학교 이름이 안익태 기념관이거든요. 그러면 안익태 기념관이라고 하는 음악대학이 있는 숭실대학교 그 기념관 내에서 안익태의 이런 문제, 애국가, 논란이 되는 문제를 공동으로 연구하고, 토론하고, 우리가 정치 영역이 아닌 순수한 학술의 영역에서 토론이 지속적으로 됐으면 좋겠습니다.
◇ 이동형> 네, 학술 영역에서의 토론이 중요한 것이죠. 아까 훈장 이야기도 했습니다만, 이종찬. 일본군 공병소자로 근무했는데, 일본군 최고 영예 금치훈장을 받았습니다. 이종찬이 유일하게 조선인으로서 받은 일본군 최고 훈장인데요. 이 사람도 지금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단 말이죠.
◆ 방학진> 네, 국립묘지에 되어 있고요. 지금 아까 말씀드렸던 장군 2묘역, 6명 중 3명은 제가 설명을 드리면 이응준, 그다음에 신태영, 임충식인데요. 임충식은 간도 특설 때 멤버이고, 그다음에 해방 이후에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고요. 이응준의 경우에는 초대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육군을 세팅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분이 무슨 말을 하냐면 이런 말을 합니다. 조선 청년에게 가장 큰 꿈이 있다면 천황폐화를 위해 죽는 것이다, 이런 발언을 하고요. 그다음에 신태영의 경우에는 군인으로 첫 번째 목표는 바로 야스쿠니 신사에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 군인으로서 죽는다고 하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야스쿠니 신사의 신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라고 하기 때문에 그런 죽음을 선동했던 그런 분들이 장군 2묘역에 3명이나 안장되어 있는데, 가서 비문을 보면 더군다나 기가 차는데요. 애국 일념으로 일평생을 사셨다, 이런 식의 그런 비문이 여전히 쓰여 있죠.
◇ 이동형> 간도 특설대, 또 만주군에 복무했던, 일본 육사에 복무했던, 이런 사람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나중에는 다 국회의원도 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또 장군도 하고요. 천수를 누리면서 훈장도 타고, 이러면서 살았단 말이죠.
◆ 방학진> 그렇습니다. 내년이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입니다. 광복군 총사령관인 지청천 장군이 바로 장군 2묘역에 있는 이응준, 임충식, 신태영의 발아래 묻혀 계세요.
◇ 이동형> 그래요. 그런 게 참 안타깝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텐데요. 그런데 이게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우리가 문제제기를 했고, 논쟁이 됐고, 논란이 됐습니다만, 여전히 바로 잡아지지 않는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 방학진> 그렇지만 사실 저희가 이번에 여론조사를 하면서 많이 느꼈던 것은 많은 국민들이 여전히 친일 문제가 청산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 그다음에 친일 문제가 단순히 사회적 논란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통합의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라고 하는 것이 70% 가까이 답이 나왔기 때문에요. 많은 국민들은 그 해답을 이미 알고 있다. 이렇게 기대해보고 있습니다.
◇ 이동형> 그리고 친일 논란이 있었던 인물들은 어쨌든 대부분 지금 사망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람들을 다시 잡아다가 처벌을 하자, 이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기록으로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후대에 떳떳한 선대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은 이념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보입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방학진 실장하고 이야기는 여기까지 들을게요. 수고하셨습니다.
◆ 방학진> 네, 고맙습니다.
* 인터뷰 중 언급된 여론조사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11월 1일~4일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무작위 추출 웹조사를 통해 설문조사한 결과입니다. 응답률은 12.8%, 95% 신뢰수준 표본오차 ±3.1%p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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