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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광복군 창립일, 광복군 창설 이끈 남산 김구 동상 직접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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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광복군 창립일, 광복군 창설 이끈 남산 김구 동상 직접 가보니

admin | 월, 2021/09/20- 00:10

[현장] 친일파 김경승이 조각, 만주군 출신 박정희 대통령 건립기념글 그대로 있어

▲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김경승이 제작해 남산에 자리한 동상들. ⓒ 김종훈
▲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김경승이 제작해 남산에 자리한 동상들. ⓒ 김종훈
▲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김경승이 제작해 남산에 자리한 동상들. ⓒ 김종훈

‘조각 김경승 민복진 / 1969년 8월 23일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세움’

서울 남산공원에 세워진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 뒤쪽에 붙은 머릿돌 내용 중 일부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대표적 친일 작가 김경승이 조각했다고 새겨졌다. 그리고 백범 동상 우측 하단부에는 김경승과 마찬가지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만주군 출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건립기념글도 새겨져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친필로 새겨진 건립기념글에는 “위국성충은 일월과 같이 천추만대에 기리 빛나리”라는 글과 함께 “서울 백범김구선생동상건립에 즈음하여 일천구백육십구년 팔월 대통령 박정희”라고 적혔다.

잘 알려졌듯 백범 김구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에 항거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1919년 3.1운동 후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끈 인물이다. 무엇보다 1940년 오늘(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될 수 있도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자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주도적인 역할했다.

실제로 1940년 9월 15일 백범은 자신의 명의로 한국광복군선언문을 발표하는데, 선언문에는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라고 적혔다. 그리고 이틀 뒤인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창군행사가 중국 충칭 가릉빈관에서 열린다.

남산 백범 동상 뒤쪽 우측에 새겨진 백범 김구 선생 약전에도 “1940년에 임시정부를 중경(충칭)으로 옮기고 한국광복군을 조직해 (1941년)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도 독립보장을 받았다”라고 강조됐다.

한 마디로 백범을 필두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일제에 맞서기 위해 한국광복군이 창설됐다는 뜻. 그러나 해방 후 백범이 1949년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한 뒤 백범을 둘러싼 상황은 아이러니 그 자체가 된다.

백범은 1962년 우리 정부로부터 1급 훈장은 대한민국장을 받았지만 7년 뒤인 1969년 박정희 정권은 친일파 김경승이 조각한 백범 동상을 현재의 자리인 남산 자락에 세운다. 만주군 출신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백범동상 아래쪽에 직접 건립기념글을 썼다.

이후 90년대 문민정부를 거치며 남산에 위치한 백범 동상을 포함해 친일민족 반역자의 작품을 철거하고 국민들의 뜻을 모아 작품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졌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친일파 김경승이 만든 백범 동상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태다.

한국광복군 창립일을 이틀 앞둔 지난 15일, 광복회는 성명을 통해 “친일작가 김경승이 만든 남산 백범동상을 철거하고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는 작품을 제작 설치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친일파 김경승, 어떤 길 걸었나?

▲ 일제강점기 도쿄미술대학교를 재학하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바 있는 친일 조각가 김경승씨. ⓒ <친일인명사전>

김경승, 1915년에 태어나 1992년 사망했다.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손꼽히는 유명 조각가다. 해방 후 친일행위가 문제돼 미술가들의 단체인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이후 경성사범학교, 경성정신여학교, 풍문여자중학교 교사를 거쳐 서울시 문화위원회 및 국전 창설위원 등으로 참여했다. 이후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이승만 정권 당시인 1958년 서울시문화상 미술부문상을 받았고, 박정희 정권 때인 1969년 3·1문화상 예술본상, 대한민국예술원 공로상을 받았다. 전두환 정권 당시인 1982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김경승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제에 충성했던 인물이다. 일본 유학 후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 조선미술가협회의 평의원과 조각분과 역원으로 참여했다. 1944년 경성일보사가 주최하고 조선총독부와 국민총력조선연맹 등이 후원한 ‘결전 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도 맡았다.

또 ‘대동아 건설의 소리’라는 일제를 찬양하는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친일미술단체에 소속돼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이어가면서 전시회로 벌어들인 돈을 국방헌금으로 내는 등 일제강점기 후반부 작가로서 협력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백미는 김경승이 1942년에 만든 ‘여명’이라는 작품. 1942년 제21회 조선미전에 출품한 것으로 젊은 노동자가 망치를 어깨에 메고 노동현장에 가는 모습을 표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으로 김경승은 그해 총독상을 수상한다. 1942년 6월 3일 자 <매일신보> 인터뷰에서 김경승은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는데 새 생명을 개척하는 대동아전쟁하에 조각계의 새길을 개척하려 했다. 나는 이같은 중대한 사명을 위해 미력이나마 보답하겠다”라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김경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44년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미전 마지막 대회에 <제4반>이라는 작품을 선보여 다시 한번 수상의 영광을 차지한다. 이 작품은 상체를 드러낸 여성 노동자가 작업도구를 어깨에 메는 모습으로 표현돼 당시 일제 수탈의 상징이었던 여성 근로정신대를 형상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철거되는 김경승 작품… 서울시 “철거 관련법 없다”

▲ 서울 강북구 4.19국립묘지에 설치된 4월 학생 혁명 기념탑 안쪽 화신상. 작가 김경승(1910~2001). ⓒ 권우성

이런 가운데 지난 13일 정북 정읍시는 김경승이 1987년에 제작한 황토현 전적지 전봉준 장군 동상을 철거했다. 학계와 시민사회는 지속적으로 김경승의 작품을 철거해야 한다고 요구했고 정읍시는 국가지정문화재 구역에 있는 전봉준 동상을 지난 4월 문화재청의 현상변경허가 승인을 받아 철거를 결정했다. 그 자리에는 동학농민군 행렬을 형상화한 작품이 들어선다.

앞서 김경승이 1959년 제작해 남산 일대에 세워졌던 안중근 의사 동상은 지난 2010년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새로이 건립되면서 새 작품으로 교체됐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내에 있던 김경승 제작 이순신 장군 동상 역시 김경승의 친일행적 등을 이유로 지난 2015년 교체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친일파 기념물 철거 등 문제는) 지자체의 의지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며 “기준을 마련할 확실한 법안이 필요하다. 법안에 맞춰 제도적으로 관련 사안을 풀어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오마이뉴스>가 확인한 결과 김경승이 제작한 동상은 현재 서울 남산 백범 김구 동상을 비롯해 서울 신사동 도산공원에 위치한 안창호 선생 동상, 서울 종묘광장 이상재 선생 동상, 서울 강북구 국립4.19민주묘지에 자리한 4.19혁명기념탑,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앞 세종대왕상, 서울 양화대교 정몽주 동상, 경남 통영 남망산 정상에 위치한 이순신 동상 그리고 서울 남산 백범 동상 아래쪽에 위치한 김유신 동상 등이 있다. 다수 작품이 이승만, 박정희 정권 때 김경승 손으로 제작됐다.

<2021-09-1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광복군 창립일, 광복군 창설 이끈 남산 김구 동상 직접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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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우 작가 사진 52점 전시 해외 독립운동가 후손, 독립운동 사적지 담겨…온라인 또는 전화로 사전 예약 후 관람 가능

[아시아경제 박종일 기자] 강북구(구청장 박겸수)가 8월18일까지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특별사진전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를 개최한다.

근현대사기념관 주관으로 열리는 이번 사진전은 쿠바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마련됐으며 김동우 작가가 촬영한 52점의 사진이 준비됐다.

김 작가는 오랜 기간에 걸쳐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인터뷰해 왔다.

독립운동가들은 먼 타국의 땅에서 굶주림, 차별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한인교회, 한글학교 등을 세워 정체성을 유지하고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서도 자금 모집 등 활동을 해 왔다.

전시회에서는 쿠바 마나티 항구와 멕시코의 애니깽 농장 등 한인 이주 역사의 상징적인 장소와 3·1운동 2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던 미국의 타운홀,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의 인도 레드포트 훈련지, 네덜란드 헤이그의 이준 열사의 묘적지 등 여러 나라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살펴 볼 수 있다. 쿠바와 멕시코,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작품 속에서 만날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전시는 사전 예약제로 운영된다.

관람 희망자는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를 통해 온라인으로 예약하거나 전화신청 후 이용할 수 있다. 비용은 무료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이번 전시회가 세계 곳곳에서 광복을 위한 눈물겨운 노력을 했던 숨은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내고 기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관심 있는 시민 여러분의 많은 관람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2021-05-21> 아시아경제

☞기사원문: 강북구 ‘쿠바 이민 100주년 기념 특별사진전’ 개최

화, 2021/05/25-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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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거래’ 의혹 [연합뉴스TV 제공]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소송이 박근혜 정권 당시 ‘재판거래’로 지연돼 피해를 봤다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씨와 피해자 고(故) 김규수씨의 배우자가 최근 국가를 상대로 1인당 1억원씩 총 2억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제기했다고 27일 밝혔다.

앞서 이씨와 김씨를 비롯한 4명의 강제동원 피해자는 2005년 2월 신일본제철(현 일본제철)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당시 1·2심에서는 패소했지만, 2012년 5월 대법원이 원심을 파기하고 피해자들의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파기환송심에서도 2013년 대법원 판단대로 일본제철이 1인당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사실상 결론이 달라질 가능성이 없는 재상고심에는 5년이란 시간이 소요됐고, 원고 4명 중 이씨를 제외한 3명은 세상을 떠났다. 대법원은 2018년 10월 원고 승소 판결을 확정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검찰 수사에서 재판 지연이 박근혜 정권과 사법부의 재판거래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대법원 법원행정처 간부들이 정부 인사들과 강제동원 소송 재상고심 결과를 ‘피해자 패소’로 바꾸거나 진행을 미루는 방안을 논의한 정황이 발견된 것이다.

이에 이씨 등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받았다”며 소송을 냈다.

이들은 소장에서 “재판거래 피해자들은 아직도 사건의 진상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며 “손해를 배상받지도 책임 있는 주체로부터 어떤 공식적 사과나 의사 표시를 받지도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공권력 행사 중 가장 높은 독립성을 가져야 할 재판이 부정됐고 불법이었다는 것이 확인됐지만, 피해자들의 고통은 어떤 절차로도 회복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보도자료를 내 “재판거래 혐의로 기소된 것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소수이며, 1심 판결도 선고되지 않았다”며 “불법행위자 각각을 피고로 삼기보다 재판 과정에서 이들의 불법행위를 입증하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email protected]

<2021-05-26> 연합뉴스 

☞기사원문: “재판거래로 피해”…日강제동원 피해자들 국가 상대 소송

※관련기사 

KBS: 강제징용 피해자, ‘불법 재판거래’ 국가배상 소송 제기

목, 2021/05/27-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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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대종교를 중광해 독립운동가들의 스승으로 불렸던 홍암 나철의 일대기인 <나철평전>을 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조현 기자

청산리전투의 김좌진, 봉오동전투의 홍범도,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역사가 신채호,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과 국무령 이상룡, 작사가 이은상, 최초 비행사 안창남, 마라토너 손기정, 이동휘, 정인보, 안희제, 지청천, 이범석, 지석영, 이동녕, 김규식, 신익희…. 독립운동사의 주역인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대종교인으로, 대종교를 부활시킨 스승 홍암 나철(1863~1916)의 대의를 따랐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종교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나철의 삶을 조명한 <나철평전>(꽃자리 펴냄)을 낸 김삼웅(78) 전 독립기념관장을 지난 4일 만났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꼽은 친일부역자 5천명 가운데 종교인이 200여명인데, 대종교인은 한 명도 없었다”며 “그런데도 나철과 2대 교주 김교헌, 청산리전투를 이끈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종사 등 대종교 지도자 3인의 묘소가 아직도 간도 들판에 방치돼 있으니 한민족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통탄했다.

대종교 부활시킨 스승 ‘나철평전’ 펴내
김좌진·홍범도·이회영·신채호 등등
수많은 항일지사들 대부분 ‘대종교인’
“친일부역자 종교인 중엔 한명도 없어”

박정희때 고문 후유증으로 집필 힘들어
“알수록 ‘놀라운 인물’ 전율 느끼며 써”

대종교를 중광한 독립운동 지도자 홍암 나철. <한겨레> 자료사진

“2·8독립선언과 3·1혁명을 촉발한 대한(무오)독립선언은 대종교가 주도했다. 또 3·1혁명 이후 중국 상하이에 세운 임시정부의 의정원 35인 중 28인이 대종교인이다.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등 항일투쟁의 주력도 대종교인들이었고, 국학·역사·한글운동도 대종교가 주도했다. 그 뿌리가 나철 대종사다. 독립운동사에서 기억해야 할 첫번째 인물로 꼽힐 만한 나철의 이름만이라도 들어본 사람이 몇명이나 될지….”

김 전 관장은 말문을 잇지 못했다. 온몸을 민족의 재단에 바쳐 신자 10여만명이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고 종단 자체가 산산이 부서져 버린 대종교와 나철을 언급할 때마다 그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지금까지 최제우, 황현, 전봉준, 김개남, 손병희, 안창호, 김성숙, 한용운, 안중근, 김창숙, 여운형, 함석헌, 장준하, 장일순, 송건호, 김대중, 노무현, 신영복 등 줄잡아 40여명의 평전을 썼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타자를 칠 줄 모른다. 오직 손글씨로만 써왔다. 근래 들어서는 손이 많이 떨려 원고 작업이 더욱 어렵다. 박정희 독재 시절 <민주전선>을 발간하면서 끌려가 고문 당한 후유증 때문이다. 떨린 것은 손만이 아니었다. <나철평전>에는 ‘한 놀라운 인간’에 대한 필자의 전율이 스며있다.

나철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 석학 왕석보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29살에 과거 급제해 고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사관을 맡았다. 33살 때 징세국장에 임명됐으나 사양하고 낙향했다고 한다. 이후 10년간 민족의 뿌리인 단군사상을 기초로 입산수도한 나철은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비밀결사 ‘자신회’를 조직해 을사오적 처단을 주도했다가 1907년 10년 유배형을 받았다. 외딴섬인 전남 신안 지도로 유배를 갔다가 민심을 두려워한 고종의 특사로 석방됐다.

“나철은 일제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국조 단군을 구심점으로 삼아야 한다며 단군교를 ‘중광’했다. 중광이란 우리 민족이 믿었던 옛 종교를 되살린다는 것이다. 그러자 기라성 같은 지식인과 우국지사들이 몰려들었다. 일제는 국권침탈 뒤 제일 먼저 단군 관련 책 20여만권을 압수해 불태우거나 일본으로 밀반출하며 1918년까지 민족말살책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나철은 이런 일제의 탄압을 피해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고 1914년 망명해 백두산 인근 청파호로 본부를 옮겼다. 대종교 신자가 수십만명으로 늘자 일제총독부는 기독교, 불교, 유교만 공인 종교로 인정하고 대종교는 ‘유사종교단체’로 분리해 악명 높은 경무국에서 감시하게 했다. 더 이상 포교가 어렵게 되자 나철은 1916년 일왕과 총독, 신자들에게 글을 남기고 구월산 단군사당에서 순명을 택했다. 그의 죽음 뒤 대종교인들의 항일투쟁이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김 전 관장은 “일제 때 수많은 사이비 교주들과 달리 나철은 종교적 위세를 보이지 않았고 대단히 검소하고 서민적이었다. 주검도 상여가 아닌 지게로 옮겨 화장하고, 부고도 돌리지 말고, 제사에도 밥 한그릇 찬 하나만 놓으라고 유언했다”며 “박은식은 추도사에서 그를 ‘민족사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이란 뜻으로 ‘만세의 종사’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런데도 최근 여당 국회의원들이 교육이념에서 단군사상의 핵심인 ‘홍익인간’을 빼려는 시도를 했던 것에 대해 “역사 공부를 안한 것인지, 역사의식이 없는 것인지”라며 혀를 찼다. 그는 “목사인 규암 김약연의 용정 명동학교는 기독교학교임에도 교가에 ‘한배검 단군의 자손의 긍지’를 담았고, 교실 뒤엔 예수 사진과 함께 단군 영정을 걸었다. 기독교인 도산 안창호는 평생 단군상을 몸에 지니고,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대규모 단군 집회를 개최했다. 이승만도 1921년 <독립신문>에 ‘한배검은 인류의 스승이셨다’고 썼고, 기독교인 백범 김구도 조선인 치고 대종교인 아닌 사람이 없다고 했다”며 “해방 후 미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홍인인간을 ‘인간에 대한 최대한의 봉사’로 번역해 교육기본이념으로 삼게 한 것도 기독교인 백낙준 박사였다”고 설명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mail protected]

<2021-06-08> 한겨레

☞기사원문: “독립운동 정신적 지주 ‘대종교의 혼’ 아직도 간도 떠도니 통탄스럽죠”

화, 2021/06/15-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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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 격전지에서 미군기지 건설용 매립재 채취 추진
일본 정부 “채취 장소 미정…유골 안 들어가도록 눈으로 확인”

일본 오키나와(沖繩)현 소재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 일본 정부는 이 비행장을 대체할 군사 시설을 건설하겠다며 오키나와 헤노코(邊野古) 연안을 매립하는 공사를 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제 강점기 희생된 조선인 유골이 섞인 토사가 일본 오키나와(沖繩)현 미군 기지 공사에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유해 수습 운동을 벌여 온 일본 시민단체는 한국·미국 유족과 힘을 모아 공사 중단을 촉구할 계획이다.

오키나와 본섬 남부에 있는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을 같은 섬 중부 헤노코(邊野古) 연안으로 옮기는 사업이 진행 중인데 일본 정부가 공사 계획을 일부 변경하겠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오키나와의 미군 해병대 기지인 ‘캠프 슈와브’ 인근 바다에서 매립 공사 등이 진행 중이다. 일본 정부는 후텐마 비행장을 대신할 새로운 기지를 이곳에 건설 중이다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전쟁 희생자 유해가 다량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채취한 토사 등을 매립재로 사용할 가능성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일본 방위성은 오키나와의 미군 해병대 기지인 ‘캠프 슈와브’ 앞바다를 매립해 후텐마 기지를 대체할 새 비행장을 만들고 있는데 연약한 지반을 개량하기 위해 매립재 종류 등을 바꾸겠다며 작년 4월 21일 오키나와현에 공사 계획 변경 승인을 신청했다.

7일 연합뉴스가 계획서의 세부 내용을 확인해보니 2차 대전 말기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 현장인 오키나와 본섬 남부 이토만(絲滿)시와 야에세초(八重瀨町)가 매립용 토사 등을 채취할 장소로 기재돼 있었다.

[그래픽]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 공사 매립재 채취 장소 (서울=연합뉴스) 장예진 기자 = [email protected]

오키나와에서는 1945년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격렬한 지상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주민, 일본군, 미군 등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오키나와현 집계)된다. 희생자 중에는 한반도에서 동원된 조선인도 포함된다.

희생자 유해 수습이 미흡해 이토만을 비롯한 격전지에서 발굴이 계속 진행 중인 상황이다. 변경된 공사 계획이 승인되면 유골이 섞인 토사가 매립용으로 투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유해를 수습해 유족에게 돌려주는 운동을 하는 현지 시민단체 ‘가마후야'(ガマフヤ-) 등은 일본 정부의 공사 계획 변경에 반대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토사 등을 어디서 조달할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계획서가 “적정한 조사를 거쳐 채취 장소 등을 결정한다”며 여지를 남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존 계획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이토만과 야에세가 변경된 계획서에 파쇄된 암석을 채취할 후보지로 명시된 것을 보면 결국 이 지역에서 채취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19년 2월 15일 일본 오키나와(沖繩) 기노자손(宜野座村)의 미군의 옛 민간인 포로수용소 주변 유골 발굴 현장에서 오키나와의 시민단체 ‘가마후야’의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 대표가 유골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계획서는 이토만과 야에세에서 파쇄된 암석 3천160만㎥를 채취하는 방안이 기재돼 있다. 이는 오키나와현 내부에서 조달할 파쇄석(4천476만㎥)의 약 70% 해당한다.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67) 가마후야 대표가 올해 3월 단식 투쟁까지 하며 반대에 나서자 기시 노부오(岸信夫) 방위상은 “개발 전에 유골이 없는지 육안으로 사전 조사를 하고 유골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호(壕·구덩이)가 있는 장소는 개발하지 않는 등 유골을 배려하며 사업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맨눈으로 유골 유무를 파악하는 것이 현실성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오랜 기간 방치된 뼈는 전문가가 아니면 식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채취할 토사 등의 양에 비춰보면 유해가 포함됐는지 철저히 확인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가마후야는 한국 단체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02-2139-0462)와 민족문제연구소(☎ 02-969-0226)를 통해 오키나와 유골 발굴 및 DNA 감정에 참여할 한국인 유족을 모집하고 이들과 힘을 합해 일본 정부에 매립 계획 취소를 요구할 계획이다.

한국인 희생자 이름 (오키나와=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오키나와(沖繩)현 이토만(絲滿)시 소재 ‘평화기념(祈念:이뤄지기를 비는 것)공원’에 한국인 전쟁 희생자 이름을 새긴 비석인 각명비(刻銘碑)가 설치돼 있다.(위) 각명비에는 히코산마루 피격 사건으로 희생된 명장모(왼쪽 하단) 씨와 김만두(오른쪽 하단) 씨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이들은 미국 유족 참가자도 모집한다.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오키나와대 지역연구소 특별연구원이 현대사 연구자 다케우치 야스토(竹內康人) 씨가 발간한 명부 자료와 자체 조사를 토대로 분석한 바에 의하면 오키나와 전투에 조선인 3천461명이 군인이나 군속(군무원에 해당)으로 동원됐고 이 가운데 701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노무 동원된 이들이나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이들을 제외한 숫자다.

기록으로 파악되지 않은 이들을 포함하면 실제로 동원되거나 사망한 조선인은 이보다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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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7> 연합뉴스

☞기사원문: 조선인 유골 공사장에 묻히나…日NGO “한미 유족과 반대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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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21/06/15-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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