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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성장, 위기 그리고 수요와 공급의 제약들에 대한 연속적 돌파구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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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성장, 위기 그리고 수요와 공급의 제약들에 대한 연속적 돌파구들(2)

admin | 토, 2021/09/11- 20:35

내가 방금 개관한 수요공급에 대한 사고방식은 특히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1936)에서 정식화된 케인스의 경제이론과 대조적이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적 이단을 정식화한 케인스의 작품 배경은 1930년대 경제의 붕괴였다. 작품의 중심 주제는 수요와 공급이 조정에 실패하여 낮은 수준의 고용과 활동에서 균형을 이루게 된 양태였다. 그의 작품은 당시의 형태로나 지금의 형태로나 시장경제가 자체적으로 수정하고 모든 자원을 가장 효율적인 용처에 배정하는 기대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불신할 이유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내가 방금 간략히 제시한 견해와 비슷하다. 노동력을 포함한 모든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시장경제는 완전고용을 유지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방금 간략히 제시한 접근법이 케인스의 견해와 어떻게 다른지를 표시하는 한 가지 방법은 내가 제안한 대안적 시각에서 케인스의 교리와 이러한 교리가 제공한 정책적 처방들이 어떤 점에서 결함을 가지는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케인스 이론의 첫 번째 제약은 그의 이론이 특수 사례의 이론이라는 점이다. 즉, 그의 이론은 수요와 공급이 조정에 실패하거나 고용과 활동의 위축된 수준에서만 조정을 이루는 많은 양상들 중 하나의 사례에 관한 이론이라는 점이다. 케인스의 이론이 다루었던 특수 사례는 세의 법칙148에 어긋나는 사례, 즉 공급이 그 자체로 수요를 창출하지 못하는 사례이다. 일정한 가격의 고정성(마셜149과 그의 제자인 피구150가 연구한 임금의 하방경직성)으로 인해 가능해진 저축의 생산적인 투자로의 전환 실패(결과적으로 퇴장(退藏))는 총수요의 유지 실패로 귀결될 수도 있다. 유동적인 화폐시장 균형들의 성향에 대한 의기양양함이나 낙담과 같은 인간의 불안정한 기질의 영향은 침체를 확대하고 연장시킬 수도 있다. 신뢰 실패로 시작된 것이 자생적인 수정기제가 있을 수도 없는 실물경제 활동에서 쇠퇴로 마감될지도 모른다. 그 경우 정부는 재정정책 또는 직접적인 정부지출과 활동을 통해 부족한 수요를 만회하고 경제를 다시 활성화시켜야만 할지도 모른다.

여기에 수요와 공급이 상호조정에 실패하거나 침체된 활동 수준에서만 균형을 이루는 하나의 양상에 관한 하나의 설명과 하나의 이론이 있었다.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이 실패하는 많은 양상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앞의 초보적이고 추상적인 개요에서도 이미 시사하였다. 우리는 케인스가 자신의 일반이론을 출판하기 전 몇 년 동안 가끔씩 쓴 글들을 통해 시대의 위기에 대한 다른 대응들과 위기를 이해하는 다른 방식들을 고려했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러나 케인스는 실질적이고 이론적인 이유보다는 전략적이고 정치적인 이유로 (예컨대, 투자 부족보다는) 수요 부족을 강조함으로써 침체의 특징을 규정하려고 선택했다. 케인스는 수요 부족을 탓하고 재정확장 정책을 해법으로 요구하는 대응이 투자결정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을 주장하는 대응보다 정치적으로 더 매력적이고 따라서 이행하기도 더 쉽다고 생각하였다.

2007년부터 2009년 사이에 미국과 여타 선진국들은 금융위기를 겪었고 실물경제 활동에서 뚜렷한 쇠퇴로 이어졌다. 이러한 혼란이 1930년대에 케인스와 그의 동시대인들이 다루었던 경제적 붕괴만큼 심각하지 않을지라도 이 혼란은 이 시대의 표준적인 “경기순환”의 차원을 초월하였다. 나아가 이 혼란이 재정부양책과 통화확장 정책의 표준적 대응(케인스의 처방들의 취지와는 반대로, 재정부양책보다 훨씬 더 많은 통화확장 정책)을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혼란은 케인스가 직면했던 경제적 붕괴와는 결과적으로 다르지 않을지 모르지만 성격과 인과관계에서는 다른 붕괴로 곧 인식되었다. 혹자는 이러한 혼란상을 가계부채와 기업부채가 금융 불안을 촉발하고 이러한 금융 불안이 이어서 실물경제까지 악영향을 끼치게 된 “대차대조표불황”151이라고 규정하였다.

미국은 세계의 나머지 국가들이 원하는 충분한 상품과 서비스의 공급을 중단했다. 수십 년 동안 소득과 자산의 급격한 역진적인 재분배가 나타났다. 역진적 재분배는 미국에서 경제성장의 잔여 전략인 저금리정책뿐만 아니라 미국과 중국 간의 통상과 금융 거래에서 나타난 무역 및 자본 적자로 보증된 특히 가계 부분의 부채와 신용의 과도한 팽창을 통해 상쇄되었다. 그 직접적인 원인들의 성격상 이러한 침체는 1930년대의 더 극단적인 위기가 요구했던 것보다 훨씬 더 명백하게 경제의 공급측면에 대한 행동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침체는 케인스의 걸작의 표제와 상관없이 케인스의 교리가 적중하지 못한 것, 즉 수요공급간 상호조정의 실패들에 관한 일반이론을 요구하였다.

케인스 이론의 두 번째 제약은 그 이론이 구조적 내용이나 제도적 비전을 갖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케인스 이론은 배교를 의도하였지만 영국의 정치경제학 전통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들 중 하나(즐겨 쓰는 설명 방식에서 제도를 심리학에 종속시키는 특징)를 과장하였다. 케인스 체제의 핵심 개념들(유동성 선호, 소비 성향, 장기적 기대상태)은 완전히 심리학적이다. 인간의 충동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유동적인 화폐시장 균형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도록 유도하고 이렇게 활용함으로써 실물경제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유도한다.

제도적인 것보다 심리적인 것을 우선시하는 것과 경제의 공급측면을 도외시하고 수요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케인스 교리의 심리학주의와 (한계주의 전통과 일치하여) 경제학을 생산이론이라기보다는 시장에 기초한 교환이론으로 파악한 견해 사이에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용과 경제활동의 쇠퇴에 대한 실천적 대응이라는 흥미로운 관점에서 이 문제를 고찰해보자. 경제의 제도적 안배들이나 생산조직에 대한 어떠한 변화를 수반하지 않은 채 공적자금을 투입하거나 민간지출에 영향을 미치는 정부정책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케인스가 말하는 총 수요의 부족 문제에 대처할 수 있다. 경제의 수요측면에 대한 더욱 효과적인 조치는 구조변화(경제적 기회와 능력에 대한 접근을 확장함으로써 경제적 편익의 일차적 분배를 쇄신하는 제도적 혁신)를 필요로 한다. 어쨌든 적어도 구조변화를 유발할 어떠한 시도도 회피하면서 수요 부족을 처리하는 방식을 상상하는 것은 가능하다. 구조변화가 없어도 된다는 시각은 케인스와 그 추종자들에게 견해와 정책적 제안들의 초점을 수요에 맞추게 한 요인들 중 하나였다.

우리가 불황의 원인이 경제의 수요측면과 공급측면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정을 알아낸 이상 우리는 시장의 제도와 생산의 안배에 대한 관심을 스스로 접어버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경제의 공급측면에서의 조치는 필연적으로 구조적인 조치이다. 북대서양의 부국들에서 전통적으로 보수적이거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이 그러했듯이, 비록 그 목적이 경제적 제도들을 개혁하기보다는 시장경제의 소위 표준적인 형태를 순수한 또는 좀 더 순수한 형태로 복원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조치는 구조적이다.

케인스 시각의 세 번째 결함은 다른 두 가지 결함에서 비롯된다. 케인스의 견해가 특수한 사례를 일반적인 해명으로 착각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구조적일 수밖에 없는 문제들을 구조적인 비전도 없이 취급함으로써 싹이 잘려 버렸기 때문에 그의 견해는 미완의 이론이다. 케인스 이론은 노동과 경제의 다른 자원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활동 수준에서 수요와 공급이 어떻게 균형을 이룰 수 있는지에 관한 이론[고전파 경제이론]보다 낫다. 그러나 케인스의 이론은 경제에서 영구적인 불균형이론보다 못하다. 이러한 영구적 불균형, 달리 말하면 붕괴에 대한 취약성은 내가 여기서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는 구조변혁을 통해서만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케인스 이론은 내가 설명한 처음 두 가지 제약 때문에 그와 같은 이론이 될 수 없다. 첫째로 케인스 이론은 일반이론이 아니다. 케인스 이론은 노동과 자본의 상대적 권력들, 실물경제에서 금융의 위상 나아가 경제주체들의 문화와 의식의 더욱 무형적인 변형들을 통제하는 제도적 법적 안배들이 어떤 모습인지에 따라 가변적인 의미를 지니게 될 임금의 하방경직성이나 퇴장성향과 같은 요인들에 결정적인 비중을 부여한다.

둘째로 케인스 이론은 시장경제의 대안적인 조직방식에 관한 비전을 갖고 있지 않다. 결과적으로 케인스 이론은 실물경제 활동에서 붕괴들(공급과 수요의 상호조정이 자생적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붕괴들)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거나 낮은(다소간) 경제조직 방식(어떤 경제조직방식이 실물경제 활동에서 붕괴에 이를 가능성이 높은지 혹은 낮은지)을 공급측면에서도 수요측면에서도 구별할 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이론에서는 경제가 수요와 공급의 상호조정의 실패에 당연히 취약한 것인지 아닌지를 말할 근거가 없다. 어떤 특수한 가정들(예컨대, 임금인하에 맞서 임금을 방어하는 노동의 힘, 투자 결정을 통제하는 자본의 힘, 생산적인 투자에 저축을 유보하는 저축자의 힘 등에 대한 가정들)을 고려할 때, 여건들의 예측가능한 결합 때문에 완전고용은 항상 달성될지는 않는다는 것만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결합에 대해서는 특수한 처방이 존재한다.

이와는 달리 내가 여기서 요약한 견해에 따르면 경제는 어떤 것이 일어날 때까지는 영구적 불균형(공급과 수요는 서로 조정하지 못하고 수요공급의 제약들에 대한 반복적인 돌파구들을 위한 기제를 제공하지도 못한다) 상태에 있다. 여기서 말한 어떤 것은 전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구한 경제적 진화의 산물이고 또한 이러한 진화를 완성하기 위해 분권적 경제를 조직하는 제도뿐만 아니라 그 생산방식에서도 변화를 요구한다. 나는 이러한 변화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른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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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한국정치학계의 큰 기둥역할을 하고 계신 임혁백 교수님이 코로나 사태에 대하여 문명사적 시각으로 매우 소중한 글을 남겨 주셨다. 아래의 글은 첫 번째로 현재의 팬데믹 이전에 있었던 유럽중세의 흑사병에 대한 회상적 성찰이고, 이후 두 번째 글은 현재 진행중인 사태에 대한 분석, 그리고 마지막에는 향후 전개될 인류사회의 미래 모습에 관한 전망으로 향후 격 주간 세 번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이 그림은 부뤼겔이 그린 Triumph of Death입니다. 패스트 창궐로 엄청난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해골이 되어 춤추는 그림에서 부뤼겔은 패스트의 비극과 참상을 너무도 리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에드워드 기본은 “칭기스칸과 그 후손들이 지구를 흔들자 카리프들은 넘어졌고 카이사르들은 왕좌위에서 떨었다”고 하면서 칭기스칸과 후손들의 유럽침공으로 일어난 황화(yellow peril)를 두렵게 바라보았다. 몽골과 타타르인들의 유럽침공은 중동과 유럽의 중세군주들의 권자를 무너뜨렸고, 유럽인구의 1/3을 몰살시킨 흑사병으로 중세의 봉건적 생산양식을 종언시켰고, 중세 소작농과 농노를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킴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지배적으로 만들었고, 구빈법이라는 국가복지제도를 출현시켰다.

몽골군대에 의한 황화는 역설적으로 중세를 끝장내고 근대의 도래를 앞당기는 “의도하지 않은” (unintended consequences) 진보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몽골군은 1346년에서 1348년 사이에 크리미아반도의 카파Kaffa시를 포위, 공격하였고 카파의 슬라브 군주가 결사항전하자 몽골군은 페스트 시체를 투석기로 성안으로 던져놓았고 카파성은 페스트가 퍼져 모든 사람들이 죽었고, 이웃 성과 도시로 번졌고, 카파를 탈출한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 시실리, 제노아, 베니스로 1347년에서 1348년에 도망하자 페스트는 이태리 반도로 확산되었고 베니스와 제노아의 상선에 탄 페스트 환자들이 프랑스, 스페인, 노르웨이의 번화한 항구에서 내리자 페스트는 유럽대륙으로 확산되었고, 1348년 5월 8일 영국에 상륙하자 흑사병은 유럽전역을 전염시킨 판데믹이 되었다. 흑사병으로 불리는 뷰보닉 플레이그 (bubonic plague)로 유럽인구의 1/3이 사망하는 대재앙이 발생하였다.

지오반니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에서 “교회 뒤뜰에 거대한 참호가 파졌고, 수백구의 시체가 배의 수하물칸처럼 차곡차곡 계속 쌓여져 갔다” 증언하였고, 이븐 할둔은 “파괴적 전염병은 나라를 황폐화시키고 수많은 인구를 소멸시켰다, 모든 인간이 거주하는 땅을 변화시켰다.”

뷰보닉 플레이그는 유럽전역을 휩쓸면서 유럽 전체 인구의 1/3의 생명을 앗아갔다. 페스트는 신분과 계급을 가리지 않았다. 고귀한 분들이 빈민들과 함께 속수무책으로 병마에 쓰러졌다. 엄청난 인구 감소는 봉건제적 생산양식을 파괴하고 중세를 종언시켰다.

인구감소는 엄청난 노동력 부족사태를 불러왔고, 임금을 폭등시켰다. 토지의 가치가 폭락하자 영주와 토지귀족들은 기존의 현물지급에서 현금지급으로, 물납제에서 금납제로 바꾸는데 동의하면서까지 농민들을 자신의 땅에 묶어 놓으려했으나, 그러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지주들은 농민들이 자신의 장원을 탈출해서 자유 노동자로 변신하여 높은 임금을 주는 농장으로 이동하는 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봉건제적 생산양식이 변화하면서 봉건적 계급관계도 변화하였다. 농민들은 지주의 땅에 묶여 현물급여를 받는 농노와 소작인에서 화폐임금을 받는 농촌임금노동자로 변신하여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의 주체가 되었다. 페스트로 인한 엄청난 인구감소는 살아남은 농촌노동자의 협상능력을 강화시켰다. 지주들은 기존 임금의 3배를 주고라도 노동자를 고용하려 했다.

대토지귀족과 영국 왕은 노동조례(Statute of Laborers, 1351)를 통해 노동자들의 이동을 제한하고 임금을 흑사병 이전 수준으로 고정시키려 했으나, 노동시장이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두 배 이상 상승시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임금상승과 지대하락으로 영주와 기사들의 재정은 압박을 받은 반면 노동자들은 귀족들이 입던 옷과 먹던 음식을 소비할 수 있었다. 기득권 영주와 지주들과는 달리 새로운 젠트리라는 신중산계급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토지귀족 출신은 아니나 도시에서 투기를 통해 번 돈으로 파산한 지주의 토지를 사들였고 상업적 농업의 선두에 섬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의 전환을 주도하는 부르주아지를 형성하였다. 노동력부족은 국가와 토지귀족으로 하여금 농촌빈민들을 땅에 묶어놓는 조치를 강구하게 하였다. 그들은 농촌빈민들의 이동과 유랑을 금지시키고, 그 대신 그들에게 최소한의 구빈을 제공하는 잔여적 복지를 제공하였다.

그 결과 영국에서 최초로 빈민을 위한 구빈법이 출현하였다.(Poor Law Act and Statue of Artificiers, 1388) 뷰보닉 플레이그의 “의도되지 않은 결과”로 서구의 농민들은 봉건적 예속에서 해방되었고 해방된 자유노동자들과 몰락한 토지귀족의 땅을 사들인 젠트리 중산층에 의한 농업의 상업화로 봉건제 생산양식과 그에 기반한 중세의 복합시스템은 종언을 고하고, 유럽의 도시화와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앞당겨졌다. 동구의 국가와 토지귀족들의 대응은 달랐다. 동구의 국가와 토지귀족은 장원에 예속된 농민들이 자유노동자로 해방시켜줄 것을 요구하자, 강압력을 동원하여 그들을 다시 장원의 노예로 가두어놓는 재농노화(reserfdom)를 강요함으로써 봉건제의 종식이라는 시대정신에 역행하였다.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 지스트 석좌교수

금, 2020/05/01-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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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2001-2002년 간에 유엔안보리(UNSC) 의장을 맡았고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외교인으로 국제사회에 잘 알려진 인물인 Kishore Mahbubani가 아래 사진의 신작을 발표하면서 코로나 이후 세계질서를 미국이 아닌 중국이 주도할 것이라고 주장하자, 서구사회가 깜작 놀랐다. 이에 대해 FT의 아시아판 책임자를 역임했고 현재 미래혁신분야의 편집을 지고 있는 John Thornhill이 아래와 같은 서평을 게재하였다.


국제사회의 회의 자리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구인들이 싫어하는 아시아인의 선호 발언을 직선적으로 해 왔던 Kishore Mahbubani가 자신의 소신을 책으로 출간했다. 제목으로 뽑은 “중국이 결국 승리했나?”라는 책자는 분명히 미국인 독자들을 당황하게 하고 화까지 돋우겠지만, 이는 한편정당한 일이다.

우선적으로 이 책은 세계의 패권국으로 굴림해온 미국을 중국이 이번 세기에 강자에 자리에서 쫓아낸다는 애메한 가정을 미국 독자에 강요한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 쓴 서적에서 Mahbubani는 미국의 지배계층들이 중국을 안이하게 냉전시대의 소비에트의 재판(결말은 모두가 아는)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시간의 문제이고 정치적 중심의 주제이지만 자유를 사랑하고 시장의 전능한 힘이 주제넘게 살아남은 공산주의 지도력을 날려버릴 것으로 확신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냉전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역할이 뒤바꾸었다고 주장하는 그는 미국을 유연성을 상실하고 이념에 갇혀있으며 체제적으로 도전을 받고 있는 수퍼-파워 국가로 묘사하는 반면에, 중국을 매우 유연하며 실제적이고 전략적으로 스마트한 경쟁자라고 비유한다. “미국이 예전의 소비에트와 같고, 중국이 예전의 미국과 같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단순화시켰지만, 저자는 미국의 가장 예민한 부문들을 규명해 간다. 워싱턴에서 터져 나오는 많은 적대적 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굴기하는 중국을 제대로 다룰 일관된 전략을 개발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냉전시기의 초기였던 1946년 미외교관이었던 George Kennan에 의해 적용되었던 봉쇄전략이라는 특허와 분명하게 대비시킨다.

저자는 미국의 현재 외교관들이 궁지에 몰려 있다고 지적한다: 전직 국방부 장관인 Robert Gates가 잘 지적하였듯이 미국의 전문적 외교관들보다 훨씬 많은 군부의 인물들이 국제외교 분야에서 설쳐 된다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외교관이었던 그는 미국의 국내정치는 단시안적 금력(plutocracy)의 탐욕에 사로 잡혀 왔으며, 해외에 근무하는 공직자의 뇌물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해외부패실행법안(Foreign Corrupt Practices Act)를 국내에 적용하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전략적 사고의 부재로 인해 미국은 군부의 근육질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중동에서 ‘끝낼 수 없는 전쟁(perpetual war)’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전세계 방위비에 절반을 사용하고 있지만 소프트웨어의 시대에 군사적 물리력이 과연 얼마나 소용이 있을 것인가? 130억불을 들여서 건조한 미국의 항공모함은 수십만 불에 만들 수 있는 중국의 DF-26 미사일 한방에 쉽게 침몰될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는 많은 지면을 할당하면서 미국의 사회경제적 모델은 운용의 성과를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지난 30여 년 동안 소득순위 50%이하의 시민들 소득이 감소되어온 유일한 국가이다. 같은 기간에 중국인민들은 중국 역사상 가장 괄목하게 생활의 수준을 향상시킨 경험을 체험했다”고 적고 있다.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증거하는 모든 사례를 최대로 활용하고 이에 반하는 사실들을 가능한 축소하는 것이 논객의 특징이듯이 저자 Mahbubani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미국의 실패에 대해서 난타를 가하는 반면에, 중국의 명백한 실책에 대해서 옹호하려고 한다.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으로 수천 만 명이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 한 줄로 언급한다. 홍콩에서 진행되고 있는 소요사태를 무주택자들과 부동산거부 간의 투쟁으로 간단히 치부한다.

저자는 중국의 지도자들을 칭찬하는 데는 열정이 넘쳐나면서도 미국의 지도자들에게는 저주를 던진다. 시진핑 주석이 임기제한(隔代指定)을 폐지한 것은 분파주의와 부패와 싸움을 위해 불가피한 조처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통치는 세계에 다음 세 가지의 공공선을 선사한다고 한다: 1) 중화민족주의를 적정하게 통제하고, 2) 기후위기에 신속히 대응하며, 3) 대국굴기의 중국은 혁명의 수출기지가 현상유지를 보장한다.

현자인 통치자에 의한 지배라는 자혜로운 정치(德治)를 시진핑 주석이 중국에 실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평한다.

결론부에서 저자는 책의 제목에서 던진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변하길 회피한다. 미국에 대한 신랄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많은 강점을 나열한다: 개인주의적 문화: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있는 대학들 세계의 영재들을 흡인하는 매력( 35만 명의 중국인을 포함하여): 비록 트럼프가 엉망으로 만들고 있지만 잘 정비된 제도들 등. 그는 “국제정치라는 무대에서 미국과 중국과 경합은 불가피하기도 하지만 서로 피할 수도 있다”며 글의 매듭을 짓는다.

그의 저서를 읽으면서 동의하지 못하면 자극이라도 받으시길 바란다 – John Thornhill, FT innovation editor.

# by Kishore Mahbubani, Public Affairs, RRP$28, 320 pages

 

John Thornhill

FT의 아시아판 책임자를 역임했고 현재 미래혁신분야 편집인

일, 2020/05/03-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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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한국은 미국과 더불어 G20 중 양극화와 부의 집중도가 가장 심각한 나라이다. 지난 십수 년간의 가계부채증가 역시 두 나라가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 이에 대하여 오랫동안 공공금융과 부채문제를 깊이 연구해온 필자는 기본소득의 필요성과 유효성을 통화재정정책과 연계하여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아래의 이야기는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 관한 도움말이며 팬데믹이 가져온 경제위기를 대처하기 위해 현재 진행되는 재난긴급지원 정책이 미래의 기본소득으로 반드시 연결되어야 할 이유를 들어보자.


CNBC.com의 지난 4월 6일자 보도에 의하면, 스페인이 유럽에서 장기적인 기본소득제도 UBI를 도입하는 것을 준비하는 최초의 국가가 될 것 같다. 스페인의 경제담당 장관은 전(全)시민들에게 지속적으로 기본임금을 국가단위에서 지불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UBI 계획을 조속한 시일 내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런던대학의 연구 교수로 재직중인 Guy Standing은 CNBC와 인터뷰에서 UBI의 도입이 없이는 세계경제의 회복이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서 ‘조만간 이루어질 UBI에 어떤 방식을 도입할 것인지에 대하여 아직 충분히 연구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어디에서 정부가 재정을 마련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국민들에게 경제적 안전망을 제공하는데 실제적인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지금의 위기 상황에서 미국 내 자국기업들과 월가를 위해 중앙은행이 5조 달러를 발행하듯이 정부는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면 된다. 한 평론가가 언급하였듯이 지난 4월 9일 CARES법(구제지원 관련법안)에 근거하여 1.77조 달러가 월가에 지원되었는데, 이를 130백만 미국 내 가구에 배분하면 가구당 13,600 불이 돌아가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의 헬리콥터-모니(비정상적 지원금)은 오직 월가와 기업가들만을 위해 뿌려졌다.

그러나 중앙은행이 경제회복을 위해 발행하는 헬리콥터-모니는 실제로 다양한 용처로 사용될 수 있다: 인프라 건설, 각종 간접시설을 위한 개발은행에 대한 지원, 주정부 산하 대학의 등록금, 의료지원, 사회적 안전망과 UBI 등.

정부가 강제로 실시하는 방역봉쇄에 따른 현재의 위기상황은 1930년대의 대공황이래 시민들의 가계 사정을 가장 취약하게 방치하고 있고 있기 때문에, UBI는 이를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에 직접적이고 가장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제도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그룹은 UBI가 인플레를 야기하고 달러의 지위를 붕괴시킬 것이라고 비판한다. 금본위제를 지지하는 Mike Maloney는 4월 16일자 팝캐스트에서 다음과 같이 불평을 토로했다. “콤퓨터에 추가적인 수치를 더하는 것(화폐발행)으로 우리가 부유해지지 않는다. 모두를 위한다는 구실로 비정상적인 방식을 통해 지속적으로 돈을 찍어내는 것은 당신의 주머니와 지갑에 들어있는 달러의 가치를 갉아먹는 것이고……”

이 문제점에 대해 줄곧 연구를 해온 나는 상기의 언급을 일종의 도전으로 받아들이면서, 중앙은행이 지원하는 UBI방식이 달러의 가치를 갉아먹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제대로 작동하는 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자 한다.

 

부채에 의존하는 제도에 있어서는 소비자의 경제는 만성적으로 돈이 부족하다

우선, 현대금융(MMT)의 기본원칙을 들어다 보자. 우리는 고정적이며 안정적인 통화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매일 은행에서 발행하고 소비되는 화폐통화라는 신용에 기초하고 있다. 은행이 대출을 일으키면 돈은 예금계좌로 들어가고, 대출금이 회수되면 사라진다. 한 시점에서 회수되는 금액보다 대출금이 적게 되면, 통화공급은 위축되고 이를 ‘부채디플레’라고 부른다. 디플레가 발생하면 불황과 불경기를 야기한다.

위에 언급한 헬리콥터-모니는 이러한 현상(syndrome)을 치유하기 위해 발행된 것이다. 밀턴 프리드만은 ‘디플레는 간단히 치유될 수 있으며 헬리콥터로 사람들에게 비를 내리는 듯이 돈을 뿌리면 된다’고 언급했다.

현재 화폐공급은 돈이 존재하는 방식에 문제가 생기면서 만성적인 디플레 상태에 빠져 있다. 은행들은 계좌를 만들면서 이루어진 대출금을 단순히 회수하는 것에 관심이 없으며, 이에 따라 최초의 대출금액보다 더욱 많은 액수가 항상적으로 누적되어 간다. 따라서 대출금액은 화폐공급량보다 빠르게 증가하게 되는데, 아래의 차트에서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https://workableeconomics.com/the-debt-based-economy/>

대출 부담이 채무자가 감당하기에 너무나 커지면, 이들은 새로운 대출을 일으키지 않고 기존의 채무를 갚게 되면, 통화량이 줄어 들면서 디플레가 발생한다.

채무 바이러스(Debt virus)의 비판자들은 채무부담과 이를 갚을 수 있는 자금력 사이에 발생하는 격차를 통화의 속도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약정 기한에 따라 채무자가 대출을 상환되면 대부자(은행)들은 총체적으로 이를 다시 경제영역으로 되돌려 빌려주면서, 해당자금은 다음 기한의 재무대차표를 담당할 채무자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이 가지는 결함은 대출로 창출된 자금은 상환이 이루어지면 소멸되는 것이지, 다시 경제영역으로 되돌아가 순환되지 않는다는 간단한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창출된 부채는 갚는 순간에 제로가 되면서 돈(통화)은 사라진다. 또한 ‘통화의 속도’가 지니는 문제점은 대부자들이 획득한 이윤을 단순히 소비자 경제로 투입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실제 우리는 두 개의 경제영역에 살고 있다 – 하나는 실물경제로 재화와 서비스가 생산되고 거래되는 소비/생산의 실물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금융의 영역으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서도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다. 금융의 영역은 본질적으로 실물경제에 기생하면서 시스템 내부에 대부분의 자금을 총괄하고 있다. 문건으로 공식화 되어있지 않은 ‘연방제도의 역할’은 중앙은행의 통화량을 일상적으로 조작하여 금융시장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신가와 투자자들이 산업의 노동자와 생산시설에 투자하는 것보다 금융의 영역에 투자하면 더욱 빠르고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은행가들과 투자자들 그리고 자산가들은 그들의 돈을 주식과 채권에 투자하거나, 세금을 회피하는 조세천국을 찾아 외국으로 숨기거나, 또는 현금으로 보관한다. 2018년 현재 미국 기업들의 현금 보유액은 1.7조 달러에 이르고, 100불자리 지폐의 70%은 외국으로 빠져나가 있다.

 

기본소득제도는 생각보다 용이하다

반면에 생산/소비영역의 실물경제는 투자와 수요의 부족에 상시적으로 시달린다. 루즈벨트 재단에서 발간한 2017년 보고서의 제목은 ‘경제회복이란 무엇인가? 연방제도의 지속적인 통화확장의 정책에 관하여’이다.

이의 내용을 보면 GDP는 예측한 수준을 밑돌면서 하향의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16년 당시의 실질 GDP는 십년 전에 이루어진 연방의회 예산처(CBO)의 예측보다 10% 낮은 수치를 보였으며, 이를 회복할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보고서에 따르면, 빈혈병적인 성장세는 부족한 수요에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임금은 정체되어 있었고, 생산자들이 생산을 논하기 이전에 이를 소비할 수요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래 전 역사인 메소포타미아 시절에는 부채와 이를 갚을 자금 사이의 격차는 주기적으로 시행된 탕감, 즉 누적된 채무기록을 말끔히 지우면서 극복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채권자(은행)는 당시의 왕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다. 단지 이들은 민간은행인으로 부채를 탕감시켜줄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더구나 이들에게 주어진 역할이라는 것이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므로, 파산에 처할 위험을 스스로 저지를 이유가 없다.

반면에 부채를 갚을 자금의 격차를 메우는 방안의 하나는 바로 UBI같이 부채의 의무가 없는 자금을 정기적으로 공급해 주는 것이다.

 

통화량을 안정시키기 위해 얼마만큼 돈을 풀어야 할까?

팬데믹에 따른 강제적 방역봉쇄는 위기의 부채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지만, 사실 경제상황은 이전부터 전례가 없는 과다한 부채의 누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소비자들의 부채와 상환능력간의 격차를 해소할 해법으로 UBI가 검토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부채에 의한 디플레가 인플레로 전환되기 전에, 헬리콥터-모니의 정책에 여유를 제공해줄 기업들의 부채, 국가와 공공기관들의 부채의 격차 역시 만만치 않다.

소비자들(가계)의 사정을 들여다 보면, 2019년 현재 가계의 80%는 생계유지를 위해 돈을 빌려야만 한다. 2019년 4월에 작성된 Lance Roberts의 차트를 참조해 보자.

2008년 이후 금융위기가 진행되면서 개인들은 소독과 부채를 합쳐도 생계유지 비용을 채울 수 없었다. 2019년 4월이 되자, 학자금과 자동차 구입용 대출은 이미 상환불능의 상태에 있거나 불능상황이 진행 중에 있었다. 마치 파도처럼 순서에 따른 개인파산, 은행파산, 그리고 부채디플레가 예측되어 있었다.

두번 째로 소개한 차트에 따르면, 개인당 소득과 생계비의 연간 격차는 15,000 불이 넘었고, 대출융자를 받아도 메울 수 없는 연간의 부족액이 3,200불을 넘어 섰다.

만약에 국가가 배당금으로 각 개인의 계좌로 매달 1,200불 즉 연간 14,200불을 입금시켜준다고 가정해 보자. 이는 위에서 보듯이 필요한 생계비와 가처분 소득간의 격차인 15,000불을 거의 메울 수 있는 수준이다. 만약 수취인들의 80%가 입금된 돈으로 생계유지를 위해 차용한 소비용 부채(신용카드, 학자금, 병원비 등)를 갚는데 사용하면, 풀린 돈은 부채를 상환하면서 사라진다.

이러한 부채의 상환(전부는 아니더라도)은 의무적일 수도 있고 자연적일 수 있다. 나머지 수취인 20%는 부채를 만들 필요가 없는 그룹으로 채무상환을 위한 국가배당금의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들은 부채상환 대신 저축을 하거나 비소비적 영역에 투자를 할 것이다.

소비재와 서비스 분야에 사용된 돈은, 물가를 인상시키지 않으면서 수요를 촉발하여 생산을 유도하고, GDP의 잠재적 예측치와 현실수치의 격차인 10%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줄 것이고, 소비자 물가에는 변동이 없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현재의 경제적 봉쇄는 공급의 부족을 가져오고 부족한 상품 및 서비스 가격의 인상을 가져오게 될 것이지만, 이는 헬리콥터-모니에 따른 수요/창출(pull)에서 오는 결과가 아니다. 반대로 공장의 조업중단과 공급의 혼란에서 야기된 거래비용의 증가에서 발생하는 비용/중가(push)의 인플레이다.

 

국제적인 선례

중앙은행의 통화공급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과거 바이마르 시절의 독일과 짐바브웨, 베네수엘라 등에서 나타난 악명높은 초-인플레의 역사를 언급하지만 이러한 사례들은 경제를 진작하려고 정부가 통화를 팽창시켜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광범위하게 연구한 Michael Hudson 교수에 따르면, “역사에 나타난 모든 초-인플레 현상은 환율의 붕괴에 따라 외채가 과다해지면서 발생했으며, 국내소비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의 과정에서 형성된 외국환율의 문제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최근 국가의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돈을 풀어낸 사례로 중국과 일본 같은 나라를 들 수 있다. 지난 20여 년간 중국은 M2 통화량을 11조 중국우안에서 1800%를 증가시킨 194조 우안으로 늘려 왔지만, 같은 기간에 소비자 물가는 연간 2-3%선에 머물렀다. 풀려난 돈은 물가의 인상을 자극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GDP가 같은 속도로 성장하면서 이에 따른 통화의 수요와 공급을 동시에 맞추어가며 조절해 온 것이다. 별도로 고려할 사항은 중국인들의 저축성향으로 이들은 소득이 중가하는 만큼, 재화와 서비스에 사용하던 소득의 비중이 비례적으로 내려간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소위 ‘아베노믹스’라는 대규모 경제진작 정책을 통하여 일본은행이 정부의 채권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풀었다. 일본은행은 재무제표상으로 정부발행 채권을 구매하면서 정부부채의 절반에 해당하는 액수의 화폐를 추가 발행하여 경제부문에 돈을 공급하였다. 만약 미국의 연방제도가 같은 방식을 채택하였다면, 현재의 미재무부 채권액수인 3.6조 달러의 3배에 해당하는 12조달러를 보유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이 인플레의 목표인 2.0%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오히려 유례가 없는 화폐를 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인플레가 아니라 디플레를 걱정하게 생겼다.

 

UBI와 보모국가에 대한 두려움

걱정이 많은 비판가들은 UBI를 도입하는 것이 혹 전체주의로 가는 것이 아닌지, 아니면 현금을 사용하지 않는 사회, 혹은 과잉보호의 보모국가 또는 의무적인 디지털 ID국가로 가는 통로가 될 것을 경고한다. 그러나 이중 어느 것도 UBI와 동반할 필요는 없다.

제대로 작동하면 시민 개인들이 국가에 의존해야 할 일은 없다. 마치 투자자들이 주식에 따른 배당을 받듯이, 자신의 수입에 UBI가 추가되는 것이다. 이미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검증되었듯이 사람들이 게을러 지지 않는다. 반대로 UBI가 도입되기 전보다 더욱 적극적이며 생산적으로 변한다. 또한 현금사용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UBI가 아니어도 현재 통화량의 90%는 이미 디지털로 이루어진다. UBI의 지급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방식 그대로 따르면 된다.

UBI는, 곤경에 빠진 시민들에게 활력적인 안전망을 제공해주는 동시에, 통화 정책에 있어서도 안정적으로 자금을 공급해 주는, 재정정책의 양 측면의 목표를 모두 만족시켜줄 수 있다. 수요/공급의 실물경제영역에서 지속가능성을 유지하면서도 생산성을 촉진하기 위해서, 그리고 불경기에서 오는 디플레를 방지하기 위해서, 헬리콥터-모니의 자금살포가 주기적으로 필요하다.

 

출처 : from writor’s own The Web of Debt Blog.

Ellen Brown

변호사 출신으로 공공금융제도의 의장이자 ‘Web of Debt’, ‘The Public Bank Solution’, ‘Democratizing Money in the Digital Age’ 등 13권의 책을 펴낸 저자

월, 2020/05/04-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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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조직, 국회사무처

국회 지원부서는 폐쇄적이다. 언터처블이다. 행정부의 감사감찰, 수사기능이 여기에 미치지 않는다. 국회입법고시 출신들이 강한 결속력으로 승진이나 혜택을 독점하고 비리는 서로 감춰준다. 국회의 주인은 국회의원이 아니라 국회사무처 직원이라고 생각한다.”

2017년 11월 국회운영위원회 회의에서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경기 남양주시갑)이 한 발언이다.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극심한 불신은 국회가 그 만큼 힘 있는 기관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웅변한다. 국회가 반대하면 그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다는 일종의 ‘패배감’도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찬찬히 그 실상과 근원을 들여다보면, 국회 시스템의 기본을 장악한 세력은 “4년 계약직인 국회의원”이라기보다 오히려 붙박이 공무원인 국회 입법관료 집단일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국회의원은 빙산의 ‘일각(一角)’이고, 그 빙산의 ‘근저(根底)’는 입법 관료들이다. 이들 입법관료들의 힘은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이상으로 강하다. 사실상 입법권을 좌지우지하는 국회 전문위원의 검토보고를 비롯하여 국회 예산과 운영에서도 실질적 지배자는 바로 입법관료라 해도 결코 지나친 과장이 아니다.

국회사무처란 마땅히 명실상부하게, 문자 그대로 국회의 사무 및 관리(administer)라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해야 한다. 의회 시스템에서 행정 사무관리 업무를 보조, 지원하는 기관이 비대해짐으로써 결과적으로 행정부를 연상하도록 하는 제2의 관료체제로 전환되어서는 안 된다. 국회 사무처의 경우, 바로 이러한 행정관리 업무를 중심으로 관료적 질서를 구축하면서 사실상 제3의 세력 집단으로 성장해 있다. 이는 입법관료가 대표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국회사무처가 단지 국회의원을 보조하는 입법지원 기구일 뿐이라는 점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비선실세, 법원행정처와 국회사무처

법원의 행정을 지원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설치된 법원행정처가 실제로는 법원의 최고 권력을 장악한 사례에서 잘 알 수 있듯이, 국회사무처와 같이 본래 행정과 사무의 보조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의 권한이 점점 확대되어 전도본말의 행태가 나타나기 쉽다. 법원행정처와 국회사무처를 연속 취재해 보도했던 모 방송국 PD는 필자와의 통화에서 “취재과정에서 드러난 국회사무처의 여러 행태는 법원행정처와 완전히 동일했다.”고 밝혔다. 정보공개운동을 실천하고 있는 전진한 씨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적폐가 어디냐는 온라인매체 ‘오마이뉴스’의 기자에게 질문에 서슴없이 국회사무처라고 단언한 바 있다.

국회 예산 운영도 사실 문제다. 상식적으로 말해서, 어느 기업이든 국가 기관이든 ‘돈줄’을 쥔 자가 가장 힘이 센 사람이고 사실상 주인인 셈이다. 정부에서 기재부가 힘이 센 것은 바로 돈의 힘이 아닌가?

그런데 국회의원도 국회 사무처로부터 월급을 비롯하여 각종 운영 경비를 받는다. 커다란 문제로 부상되었던 ‘특활비’도 사무처로부터 받고 각종 활동에 대한 각종 명목의 비용 역시 사무처로부터 수령한다. 또 ‘우수’라는 평가와 지출 모두 사실상 사무처의 ‘권한’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거꾸로 국회의원들이 사무처에 잘 보일 수밖에 없다. 물론 지금 국회의원에 대한 불신이 너무 깊고 큰 것이어서 국회의원에게 돈까지 맡기는 것은 절대로 사회적 지지를 받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국회사무처가 검토보고 권한과 함께 이렇게 예산과 관련 운영을 ‘독점’하기 때문에 그 권한 역시 크게 강화된다는 사실이다. 주객전도의 적나라한 현장이다.

이들 국회 사무처를 비롯한 이들 국회 기관들이 사실상 유일하게 감사를 받는 곳은 국회 운영위원회 회의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대개 “자기 식구”라는 차원에서 매우 온정적인 분위기로 처리된다. 그러니 사실상 그 어디에도 국회기관들을 감독, 감사하는 곳이 없다. 이른바 무풍지대이자, ‘온실 속 화초’다. 하지만 감시와 견제가 없는 곳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것은 만고의 철칙이다.

그러는 가운데 그간 국회에서는 2천 억 원 예산 규모를 넘는 의원회관을 비롯하여 의정관, 국회 한옥, 어린이집 등등…… 그 아름답던 숲과 아름드리나무들을 베어내고 파괴하면서 건물들은 계속하여 새로이 지어졌다. 지금도 국회 한 켠에서는 신축 건물들이 또 지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다지 투명하지 못한 이 과정에 상당한 예산이 낭비되고 있다. 특히 2천 억대 규모로 진행되었던 의원회관 공사에서는 국회 고위층 비리설이 파다하게 퍼지기도 하는 등 국회에서 새 건물이 올라갈 때마다 어느 누구를 위한 사업이라는 풍문이 돌곤 한다. 그 명칭부터 이미 국적 불명인 ‘국회 스마트워크센터’는 총 646억 원이라는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었지만 시작부터 낙찰가가 입찰 예정가격을 초과해 말썽을 빚기도 했다.

이러한 ‘전근대적이고’ ‘비정상적인’ 행태는 이제 그만 둘 때가 되었다.

 

국회사무처, 문자 그대로 사무와 보조에 그쳐야 할 조직

그러나 선진국 의회에서는 이와 전혀 반대다.

예를 들어, 독일 의회 사무처의 역할은 회의 준비 혹은 회의장 정리 등 그야말로 보조적인 차원의 업무를 수행하고 직원 역시 대부분 실무자 수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무처가 그 명칭과 실질이 부합하는, 명실상부한 ‘사무처’이다.

독일 연방의회조직도 처국과

덧붙이자면, 프랑스나 독일 그리고 영국 등 국가의 의회에서는 의장과 양당 대표들로 구성되는 “이사회”(영국의 경우에는 하원위원회가 이에 해당하고, 독일의 경우는 최고평의회가 이와 유사하다)가 국회 내 조직의 인사와 예산을 총 관리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산의 경우에는 ‘이사회’의 ‘재무회의’가 매주 1회 개최되어 재무회의의 승인 없이는 의회의 모든 지출이 될 수 없다. 사실 이러한 시스템이 정상이다. 이렇게 ‘돈줄’을 장악함으로써 의원들은 의회의 진정한 ‘주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국회사무처란 마땅히 명실상부하게, 국회의 사무 및 관리라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함으로써 그 명(名; 이름)과 실(實; 내용)이 부합되게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타이완 입법원에는 별도의 사무처가 없고 대신 입법원 산하에 비서처, 의사처, 공보처, 총무처, 자문처를 비롯하여 법제국, 예산중심(中心), 국회도서관 그리고 의정박물관을 두고 있다.

미국 의회의 사무처 역시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의회의 행정조직은 예외 없이 이러한 형태의 조직으로 구성된다. 의원을 행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설치된 의회 사무처가 오히려 의원 본연의 업무를 침해하는 월권의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차단되어야 한다. 미국 의회의 경우, 1946년과 1970년 두 차례에 걸쳐 ‘입법부 재조직법’을 제정하고 입법지원 조직을 획기적으로 강화시켰다. 우리도 이를 모델로 하여 국회의원들로 구성되는 가칭 ‘입법부강화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입법부 재조직법」을 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거기에서 현 국회 행정조직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진정한 입법지원 조직으로서의 국회 공무원 조직을 정립시켜야 한다.

특히 국회 전문위원은 이제 본래의 취지대로 ‘전문가’로 구성되어야 한다. 우리 국회도 처음에는 ‘국회 전문위원’은 의원들을 지원, 보좌하기 위하여 각 분야의 유능한 전문가를 상임위원회에서 의원들이 직접 선발했었다. 하지만 이는 유신 정권에 의하여 결국 전문가가 아니라 관료들이 독점하도록 ‘변형’되었다.

이러한 왜곡은 이제 바로잡혀야 한다. 그리하여 국회의원이 진정으로 국회의 주인이 되고 명실상부한 ‘전문가’들의 입법지원 활동에 토대하여 진실로 국회다운 국회, 일하는 국회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화, 2020/05/05-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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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주요한 축의 하나가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이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평가되어온 미재무부 발행 채권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이와 연동된 달러의 가치가 위협받고 있다. 아래의 글은 파이낸스타임지(FT)의 두 경제평론가 (Ms. R. ForooFar & Mr. E. Luce) 간에, 미국의 경제 위축 및 코로나 충격에 따른,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가 흔들리는 시나리오에 대해 서신 형식의 대화를 번역한 것이다. 다만 두 사람 모두 자산의 수익성 실현을 일차적 목표로 삼는 자본제에 익숙한 경제학자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금 또는 토지에 투자하라고? 금과 토지의 사적 소유는 해당국가와 동시대적 인류의 미래를 절대로 보장할 수 없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 대한 해법으로 다른백년은 규범으로서 공동체의 품격을 높이고 제도로서 국가의 역할을 새로이 하는 것만이 유일하다고 믿는다.


독자 여러분 중에 혹은 내가 작년에 언급한 ‘달러의 우울한 미래’ 시나리오를 기억해 낼지 모르겠다. 여기서 나는 화폐로서의 달러와 주식가치가 급격히 떨어질 가능성을 예측했다. 동시에 미국의 신용위기에 연동된 달러가치의 하락과 정부예산을 지원하기 위한 연방은행의 무제한적 화폐의 발행으로 부채의 위기를 동반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금에 대한 가수요를 분석하기도 했다.

2020년을 맞이하여 미국의 부채가 국내총생산액의 세자리(%) 수가 예상되는 가운데 (일부 전문가들은 상황이 종료되는 시점에 400%에 이를 수 있다고 전망한다), 증권시장에서 주식가치가 1929년 이래 처음으로 급격히 하락하고 있고 연방준비위는 모든 이와 모든 분야를 구제 지원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미국이 긴축정책을 채택하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 결과로 달러가치는 떨어지고 금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는 것을 보고 있다(지난 며칠간 금값이 떨어진 것은 투자자들이 시장의 추락에 대응하기 위해 좋은 자산이던 나쁜 자산이던 일단 현금화해야 했던 사정 때문이다).

동시에 중국당국이 위안화의 안정책을 취하고 있으며 금의 공급량을 늘리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유럽연합의 경우에는, 결국 코로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공동의 부채라는 채권을 발행하는 것에 합의를 이룰 것이고,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유럽 내 재정적 연합을 이루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한가지 더 주목할 것은, 비록 COVID-19가 현재 대체로 창업자본의 형성을 가로막고 축소시키고 있다 하더라도, 가상화폐에 대한 기대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대체재가 없는 상황에서 기축통화로서 달러가 지위를 곧바로 상실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고, 실제로 현재의 달러가 가지고 있는 유동성을 지닌 대체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투자자들은 미국이 시행하는 헬리콥터-모니(비정상적 통화발행)가 미래의 성장을 보장하지 못할 것이고(COVID-19의 대응으로서 통화의 비정상적 발행은 케인즈의 생산적인 정책이라기 보다는 긴급한 상황에 대한 변통이다), 이로 인한 비생산적 부채는 성장속도를 낮추면서 미래의 미국이 누적된 부채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다.

이는 이제껏 일어나리라고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최근 만난 고위직 인사의 전언에 의하면 아시아의 큰손 투자자들이 1935년 대공황 시기에 미 연방대법원이 미국행정부가 발행한 채권의 지불조건을 변경하는 것을 동의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 미재부무가 발행하는 미국채의 투자자들은 헬리콥터-모니의 정책이 점차 현대화폐이론(MMT, 필요에 따라 무제한적 화폐발행)의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미국달러이후(post-dollar world, 기축통화지위의 상실’)의 세계로 진입할 것으로 염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투자자들은 자산의 안전을 위해 유로채권, 금, 가상화폐 등 다른 가치로 위험을 분산하리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발생하려면 십 년 이상의 시간에 걸쳐 걸릴 것이고, 우리의 자식세대가 다루어야 할 부채이다. 그러나 이미 여기저기서 우리는 부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희년과 같은 부채탕감(로마제국의 시절, 시저는 당시 로마시민의 저당부채를 40% 탕감해 주었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으며, ‘달러이후’의 세계에서 미국패권의 모습에 대해서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나의 동료인 E. Luce에게 묻는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거주지 조지타운(미국에서 투자가치가 가장 높은 지역의 하나)과 달러라는 자산의 미래가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지난 과거 국제적 가치의 보존수단으로 달러가 파운드의 지위를 대체하는데 15년이 걸렸듯이 비슷한 상황이 전개될 것이지? 이 모든 것이 그저 말잔치로 끝나버릴 것인지? 아니면 마법의 대체 수단(magic money tree)이라도 있는 것인 것인지?

 

April 20, 2020

Rana Foroohar

파이낸스타임지(FT)의 경제평론가

 

Edward Luce 의 짧은 답변

라라양,

내가 사는 조지타운은 미국에서 가장 멋진 이웃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지역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봄마다 꽃들이 화사하게 핀 공원을 지나노라면, 나는 이곳에 산다는 것이 축복이라고 느끼곤 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방역봉쇄가 나로 하여금 답답하게 밀집된 도시에서 이토록 멋지고 푸른 공간을 빼앗아 간 좌절감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질문에 대해 나는 자신있게 답변할 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만 일생을 경제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받은 수입의 대부분을 나의 주택에 투자하였다.

분명한 것은 나의 주택은 달러에 기반한 것이고, 이제 달러와 함께 나의 주택의 가치도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결국 나의 투자 역시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성급하게 판단한다. 조지타운이 슬럼화되는 것을 결코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믿지만, 그렇다고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거시적 측면에서 당신이 제기하는 달러에 대한 인상적인 시나리오에 두 가지의 미숙한 의견을 보태고자 한다.

첫 째는 코로나 사태는 뜻밖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달러화는 지난 세월에도 그러했듯이 당분간 지배적인 지위를 유지할 것이다. 그러나 미래에도 그러할 것인지, 두 가지 점에서 세심하게 지켜보고자 한다, 우리는 두 달 전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초현실적 새로운 세계에 살고 있다. 마치 초신성의 별이 사라지기 전에 가장 빛나듯이, 달러 역시 그러한 과정을 밟아갈 것인가?

현재 많은 경제학자들은 중국이 미국의 경합자로서 취하는 조용한 행보를 지켜보고 있다: 수익성이 매우 유동적인 채권시장에서 움직임, 앞서 나가는 온라인 지불방식의 거대기업들의 존재와 신용상태. 중국이 공개자본시장에 취약하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는 곧 변해 나갈 것이다.

두 번째는 자산가로서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면(hedging), 나는 토지에 주목할 것이다. 현재 경제의 위축상황이 얼마나 심각할지 얼마나 오래갈지 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공간은 확장되지 않을 것이며, 많은 자산가들이 이를 차지하려는 경쟁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dward Luce

파이낸스타임지(FT)의 경제평론가

화, 2020/05/05-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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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단서를 앞서 최원식 교수의 “분단체제를 상정한 남북연합”이라는 구절에서부터 풀어가 보기로 하자. 남북연합이란 분단체제론에서 제기해온, 분단체제 극복과 변혁을 위한 핵심적인 방법론이다. 그런데 그 남북연합은 분단체제를 “상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분단체제론은 분단체제 부정론, 극복론, 변혁론이지만, 그 부정, 극복, 변혁을 위해서는 분단체제의 존재와 존속이 상정되어야 한다. 이러다 ‘분단체제’가 ‘분단체제 극복’의 과업 안에 포함돼 어느덧 그 일부가 되어버린다. 그러다 보니 분단체제론과 분단체제를 혼동하는 현상도 생겨난다. 결국 부정했던 대상을 인정하고 공존하게 되는 딜레마가 분단체제론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를 ‘분단체제론의 곤경(딜레마)’이라 부르자.

그런데 최원식 교수가 보여주었듯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분단체제는 ‘분단된 남북을 연계시키는 불일불이의 상태’, 즉 그 자체가 “통일의 최종형태”가 될 수도 있는 상태로 격상되는 단계로 나갈 수도 있다. 부정의 대상이었던 분단체제가 소극적인 인정을 넘어 이제 적극적인 긍정의 대상으로 완전히 탈바꿈해버린다. 이것을 분단체제론의 역설(패러독스)이라 부르기로 하자. 이 분단체제론의 역설은 최 교수의 언급을 통해 그 순수한 형태를 드러냈지만, 그 역시 분단체제론의 이론 구조 안에 잠재해 있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애초부터 백 선생의 분단체제 개념 자체에 부정과 긍정의 2중 계기가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분단체제의 부정적 현상을 강조해왔지만 이는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었고, 이론적으로 핵심적인 지점은 분단체제란 ‘둘이 아닌 하나의 체제’라는 발상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하나의 체제’라는 발상 속에는 ‘분단의식’ 또는 ‘반쪽국가의식’의 강렬한 ‘분단부정의 정언명령’이 ‘무의식적 금압’으로 깊이 깔려 있었던 것이고,(이 책, 37~46쪽) 그렇기 때문에 ‘한 민족이 이룬 두 개의 국가’, ‘두 개의 코리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양국체제론에 대해 그토록 강한 거부감을 보이게 된 것이다.

분단체제론에서 ‘분단체제’란 ‘하나’의 체제이기 때문에 ‘하나(분단체제)에서 하나(통일)로’ 갈 수 있게 한다. 여기서 양국체제에 대한 반발의 근원이 있다. 양국체제론은 한반도 상태를 ‘하나’의 체제가 아니라 두 국가 상태라 하니, 이것은 애초부터 통일을 하지 말자는 것 아니냐고 단정해버린다. 너무나 단순한 이해가 아닐 수 없다. 하나가 되자면 우선 둘이 서로 인정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것이 양국체제다. 그런데 그렇게 둘임을 서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나가 되자고 하면 ‘먹느냐 먹히느냐’의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남북이 경쟁적으로 적대와 불신을 고조시켜왔던 체제가 분단체제였고, 그 분단체제가 통일을 가로막아왔던 것 아니냐고 묻는다. 그 장애물을 치우고 양국체제가 정착되어야만 통일로 가는 길이 열린다고 했다.

분단체제론은 비원(悲願)의 언어인 ‘분단’을 동시에 희원(希願)의 언어로도 사용하고 있다. 분단체제론에서 분단체제는 고통이자 동시에 희망이다. 그렇다 보니 분단체제론의 서술 속에서는 이렇게 한쪽으로는 비원과 고통 그리고 다른 쪽으로는 희원과 희망이라는 정반대의 가치와 정서가 ‘분단체제’라는 하나의 개념을 통해, 이때와 이 장소에서는 이 얼굴로, 저때와 저 장소에서는 저 얼굴로, 번갈아가며 널뛰기 하듯 나타난다. 분단체제론 측에서야 그것이야말로 ‘분단체제’의 양면성과 복합성의 전체상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자부할지 모르겠지만,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분단체제가 도대체 이것인지 저것인지 자꾸만 헷갈리게 만드는 식자들의 악취미이거나 고질적인 병통이 아니냐고 항의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순전히 이론적으로만 보자면 무슨 악의나 악취미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고, 분단체제론에 내재한 곤경과 역설이 필연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일 뿐이다.

시간적으로 보면, 분단체제론을 처음 제기했던 90년대 초반에는 분단체제의 부정성에 대한 비판과 민중주도 분단극복의 운동성에 대한 강조가 논의의 표면을 압도하여 ‘하나의 체제로서의 분단체제’라는 이론적 핵심이 갖는 함의를 덮고 있었다. 그러다 1997년 「분단체제극복운동의 일상화를 위해」라는 글에서부터 분단체제의 부정적 파생 현상보다 ‘둘이 아닌 하나의 체제’로서 갖는 분단체제의 적극적 의미에 대한 인정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이는 1999년에 쓴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새 발상」에서 ‘과정으로서의 통일’과 ‘국가연합’에 대한 적극적 강조로 이어진다. 분단체제 상태에서 연합을 하다 어느 순간 문득 통일이 된다는 발상이다. 2005년에 쓴 「6·15 시대의 한반도와 동북아평화」에서도 둘이 아닌 하나의 체제로서의 남북 상태가 연방·연합제의 조건이 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기조는 이후 출간된 저서들에서 일관되게 유지되어 2012년의 「‘포용정책 2.0을 향하여」에서 종합된다. 그러다 2018년에 이르면 백 선생은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말에 “과정으로서의 남북연합 건설”이라는 말까지 더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최 교수의 표현대로 ‘남북연합이 분단체제를 상정’하는 것이라면, ‘과정으로서의 남북연합 건설’이라는 말을 새로 도입하여 ‘불일불이의 분단체제 상태의 장기화’에 대한 적극적 인식을 한 단계 더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분단체제론 30년 궤적 속에서 분단체제는 그 30년간 흔들리고, 허물어지고, 해체되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불사의 존재가 되었다. 분단체제에 대한 백 선생 자신의 기왕의 표현을 통해서 그러하다. 먼저 2006년 출간된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의 머리말이다.

벌써 8년 전의 일이 되었지만, ‘흔들리는 분단체제’라는 책 제목을 달면서 당시로서는 약간의 모험심을 발휘했다. 분단체제가 안 흔들리면 어쩔 거냐는 주위의 은근한 귀띔도 없지 않았다 …… 지금 돌이켜 보면 — 이것이 이번 책의 주장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데 —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남북에서 그것을 받쳐주던 군사독재가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1987년 6월부터 이미 동요하기 시작했었다. 따라서 1997~1998년께 가서야 ‘흔들리는 분단체제’라는 제목을 생각해낸 나는 현실에 뒷북이나 치며 따라가는 지식인의 한 표본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그런 지식인들의 세계에서는 2000년 6월의 남북공동선언으로 ‘6·15 시대’가 열리기 이전에 분단체제의 흔들림을 공언했다는 점에서 얼마간 앞서간 형국이 되었다 …… 6·15 공동선언 이후의 세월 동안, 애초의 부푼 기대가 갖가지 난관으로 좌절을 겪는 가운데서도 남북관계가 꾸준히 진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진작에 흔들리던 분단체제가 드디어 허물어지기 시작했으며 ‘6·15 시대’가 곧 분단체제의 해체기에 해당한다는 믿음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분단체제는 이렇듯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고, 허물어져도 허물어지지 않고, 해체되어도 해체되지 않았다. 이렇게 글을 쓴 지 12년이 흘러 이제 촛불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2018년에도 백 선생에게 분단체제는 여전히 마찬가지다.

세월호 때나 탄핵행동 때 무작정 ‘가만있으라’던 권력자들은 몰락했고 그들의 노골적인 ‘좌파·종북’ 몰이는 자유한국당 내에서조차 신용을 잃었다. 그러나 분단체제는 반공수구세력보다 훨씬 뿌리가 깊고 신축자재한 것이어서 일반민중더러 ‘가만있으라’는 기득권층의 논리는 얼마든지 다른 형태로 재생될 수 있다.

과연 그토록 신축자재한 분단체제에 대응해야 하는 분단체제론 역시 최소한 그만큼은 신축자재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래야 분단체제를 극복·변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신축자재한 분단체제론이 본 2018년의 분단체제는 단순히 “일반민중더러 ‘가만있으라’는 기득권층의 논리”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다.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닌” 무엇이 되었다.

통일 못한 것은 아쉽지만 그러나 전쟁을 또 한번 하는 것보다는 지금 상황이 차라리 낫다 하는 게 거의 국민적인 합의사항이 돼버렸어요. 그게 분단체제의 한 기반이죠. 그러니까 분단체제라는 게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어쨌든 1953년부터 지금까지 전쟁이 다시 안 일어나고 살아왔으니까 세계의 다른 분쟁지역과 비교해보면 굉장히 행복한 편입니다. 아주 행복한 것은 아니고 그래도 상대적으로 다행스러운, 중동의 여러 지역이나 발칸반도 어디하고 비교하더라도요.

아무리 불만족한 현실이더라도 그래도 거기서 만족할 구석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이 인간이고 인간의 삶일 것이다. 현상 인정의 심리적 장치가 없다면 삶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렇듯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상에 ‘분단체제’라는 이름을 내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분단체제’가 마치 ‘삶의 조건’, ‘인간 조건’ 수준으로 범박화되기도 하고, 동시에 초월화되기도 한다. ‘분단체제’란 민족 간의 참혹한 전쟁을 일으키고야 말았던 체제다. 전쟁 후의 평화도, ‘경제성장’도 항상 조마조마한 전쟁 위기의 칼끝에서 이뤄져야만 했던 체제였다. 분단체제란 바로 그러한 남과 북의 항상적 위기와 비정상 상태, 즉 영구적 비상 상태(permanent state of emergency)의 구조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체제가 “굉장히 행복한 편”이고, “상대적으로 다행스러운” 것이었다니. 도대체 분단체제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개념이 초점을 잃으면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모든 것이 되는 순간 무의미해진다.

결국 백 선생의 분단체제론에는 분단체제의 지속을 수동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고, 더 나아가 분단체제의 성격 자체에 긍정이 포함되기에 이르는 곤경과 역설의 싹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 곤경과 역설은 분단체제론에서 분단체제라는 개념이 2중의 모습을 띠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으로 부정의 대상이며, 다른 한편으로 긍정의 대상이 된다. 후자, 즉 긍정의 대상으로서의 분단체제는 ‘남북연합을 허용하게 해주는 조건으로서의 둘이 아닌 하나의 체제’라는 우회적인 표현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백 선생의 글 속에서는 그것이 직접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보다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분석에 들어가기에 앞서 백 선생의 분단체제론의 이론사적 위상을 먼저 짚어둘 필요가 있다. 이론에도 장강의 앞 물결 뒷 물결이 있고, 생애 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걸 보아야 이론의 전체 풍경을 볼 수 있다. 백 선생이 분단체제에 대한 단편적인 발상을 내놓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이라 하지만, 이론적인 구성을 갖춘 체계적 입론으로서 ‘분단체제론’을 처음 내놓은 것은 1992년 《창작과비평》 78호(겨울호)에 발표한 「분단체제의 인식을 위하여」였다. 이 시점은 묘하다. 소련·동구권의 붕괴로 동서 냉전이 종식된 이후이며, 그 여파로 한반도에서 분단 이래 최초로 열렸던 양국체제의 가능성이 내외의 ‘북한붕괴론 – 흡수통일론’ 유포 세력의 반격을 받아 급격하게 닫혀가는 시점이었다. 다시 말해, 당시는 분단체제가 그 절정을 지나 크게 흔들리던 위기의 시기였고, 그 위기는 분단체제가 붕괴하고 양국체제가 열리는 첫 계기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분단체제에서 양국체제로의 전환을 완수해낼 내적 역량의 부족(주로 민주진영의 분열로 야기된 것)과 외적 조건의 한계(주로 미국의 대북정책이 강경일변도였던 점)로 인해, 그 가능성이 급격히 닫히고 있던 시점이었다. 아울러 이 시기는 동구권 붕괴와 87년 대선 패배 이후 야권과 운동권이 분열하고 약화되면서 80년대의 ‘사회구성체’ 논쟁을 비롯한 여러 혁명 이론들이 급속히 쇠퇴해가던 때이기도 했다.

위기와 혼란은 새로운 이론을 요청한다. 그러나 분단체제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분단체제론이 등장했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더구나 이렇게 등장한 분단체제론은 뜻밖에도 분단체제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하위체제로서,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그러한 것처럼, 장기지속의 존재임을 설파했다. 80년대 ‘사구체 논쟁’이 러시아 혁명 이후 자본주의 – 사회주의 양대 진영의 대결논리와 그 연장인 반제국주의 – 민족해방투쟁의 혁명이론인 NLPDR(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의 양 측면(NL과 PD) 사이의 논쟁이었던 만큼, 자본주의 – 사회주의의 진영 대립이 붕괴된 새로운 상황에서 미래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새로운 시각이 요청되던 때였다. 그런데 왜 다시 ‘장기 자본주의’이고 더구나 ‘장기 분단체제’인가?

자본주의 – 사회주의 양 진영의 대립, 즉 냉전의 붕괴는 단순히 사회주의(현실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를 알리는 신호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깊은 수준에서 세계사적 격변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소위 ‘아메리카 발견’으로부터 시작된 서구 자본주의적 근대의 긴 여정과 그 격발점이 된 ‘긴 유럽내전’, 그리고 그 유럽내전을 배경으로 한 유럽 – 서구의 세계지배의 역사가 비로소 종식되어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러한 사실이 이제 서서히 학계를 중심으로 인정되고 확산되고 있지만, 분단체제론이 처음 모습을 보인 1990년대 초반에 이러한 인식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백 선생의 분단체제론이 크게 의지한 세계체제론자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도 2001년의 가히 묵시론적인 9·11 이후에야 (그가 500년 되었다고 본)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막장에 이르렀다는 것, 세계사는 미지의 새로운 단계(가지치기, bifurcation)로 접어들고 있다는 생각을 굳힐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새로운 단계가 자신의 입론인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론 자체에 대한 상당한 수정을 요구한다는 사실에는 여전히 인식이 미치지 못했다.

나는 백 선생의 분단체제론에 대한 비판에 앞서,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분단체제론이 처음 제기되었을 당시인 80년대 말~90년대 초반에 그토록 크게 변화했던 현실에 대한 완전한 조망을 가질 수 없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된다고 본다. ‘사구체 논쟁’의 주도자들 대부분이 이론적인 혼란과 좌절 속에서 물러나 앉는 상황에서 백 선생이 새로운 종합의 무거운 짐을 지려 했던 용기는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아울러 그 이후 거의 30년 동안 담론의 확산을 넘어 ‘6·15 민족공동위’ 등 현실의 통일촉진운동의 주요 행위자의 하나로 적극적 역할을 해온 것 역시 그렇다. 이 글은 이러한 인식을 전제한다.

다만 공적과 함께 그러한 시대상황에서 나왔던 이론의 한계 역시 짚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2018년)은 또 하나의 새로운 시대적 전환기다. 그런 작업 없이 미래는 정확히 포착되지 않는다. 분단체제론이 처음 제기된 1990년대 초반은 오늘날보다 더 큰 변화가 진행 중이었고, 당시의 현실과 미래는 오늘날보다 훨씬 더 불투명하고 불확실했다. 당시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처음 겪는, 어느 역사책에도 전례가 없는 새로운 상황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단체제론은 ‘길’을 제시해야 했는데, 이때 현실과 미래에 대한 탐색은 ‘인간의 조건’ 속에서 필연적으로 과거의 의상과 언어를 빌려 행해질 수밖에는 없었다. 이 또한 백 선생이 제기했던 분단체제론의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의상과 언어를 빌린다’는 말은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유명한 풍자적 언어이지만, 나는 결코 단순히 풍자적인 뜻으로 이 말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 말을 했던 때의 마르크스는 아직 젊었다. ‘빌린다’보다는 강물처럼 ‘잇는다’가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자연적 질서와 같다. 반드시 빌리고 이어갈 수밖에 없되, 또한 그것을 넘어서 가야 하는 것이 무거운 사명이다.

백 선생이 이었던 흐름의 하나는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었다. 이 이론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체제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붕괴 이전부터) 이 체제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예견하고 있었다. 소련·동구권 붕괴 직후 이러한 세계체제론에 근거한 분단체제론이 나름의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소련 해체 이후 미국 중심의 일극주의적 세계질서는 세계체제론이 설파해온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일성(專一性)을 입증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9·11 이후 이라크 전쟁의 실패, 그리고 연이은 금융 위기로 미국 일극주의는 급격히 막을 내렸다. 이후 세계는 명백하게 다극화로 가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전일성 대신 국가, 시장, 호혜 공동체가 다양하게 조합되는 ‘혼합체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어받을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앞 물결은 백 선생 자신이 그 가운데 있기도 했던 70년대 재야 민주화운동의 ‘분단시대론’과 ‘분단체제론’이었다. 엄혹한 냉전, 유신시대의 절정기에 제기된 이 견해들은 외세에 의해 강요된 분단이 안으로부터 이에 ‘상응하는’ 세력이 생기면서 ‘분단체제’로 발전했다고 보았다. 70년대 분단시대/체제론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는 남과 북 모두의 정부·체제·국가에 대한 강한 불신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주도자들은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투쟁을 이끌면서 투쟁의 궁극적 목표를 통일에 두고 있었는데, 그 통일이란 남과 북의 현존 체제, 국가를 부정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입장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남과 북의 기왕의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한 공모(共謀)에 불과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냉전의 절정기에 남과 북 모두를 정당성 없는 ‘반쪽국가’(1971년 함석헌 선생의 표현으로는 “둘 다 가짜”)로 보는 것은 그 시대에는 그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두 개의 가짜’를 걷어내고 ‘민중의 힘’으로 하나의 진짜를 찾아내자는 것이 당시 재야운동권 분단체제 극복론의 논리요 정서였다. 70년대 재야 민주화론, 통일론이 한국 민주화운동에 커다란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하다. 그 논리와 정서는 모든 코리안에게 ‘무의식적 금압’으로 깊이 깔려 있던 ‘분단부정의 정언명령’의 강렬한 표현이었고, 백낙청 선생의 분단체제론은 그 흐름을 이었다. 그러나 ‘둘 다 가짜’라는 논리와 정서는 동서 냉전이 종식되고 남북 유엔 동시가입이 이뤄졌으며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어 분단체제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 이후에는 더 이상 자명한 명제일 수가 없었다.

필자가 양국체제론을 제기하게 된 것은 87년 이후 30년에 대한 뼈아픈 반성, 복기(復碁)의 결과였다. 그때는 촛불혁명 전이었고 상황은 암담했다. 우선 어찌하여 87년의 희망이 이렇게까지 어두운 지경으로 곤두박질쳤는지 그 이유를, 그 뿌리를 정확히 알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도달한 것이 한국 현대사에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마의 순환고리’가 30년 주기로 작동해왔다는 생각이었고, 그 ‘마의 순환고리’를 깨기 위해서는 반드시 ‘분단체제를 끝장내고 양국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던 촛불혁명이 일어났다. 이제 그 촛불혁명의 힘으로 ‘분단체제에서 양국체제로의 전환’은 막연한 희망을 넘어 현실의 발판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체제전환’이 이루어져야 촛불은 진정 혁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제기된 양국체제론에 대해 뜻밖에 창비 분단체제론 그룹이 그렇듯 강하게 반발해온 이유가 무엇일까? 문제제기의 전후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다만 양국체제론을 제기한 목적이 단지 창비 분단체제론을 비판하는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필자가 ‘잃어버린 30년’을 복기하면서 분단체제 – 분단체제극복의 논리가 ‘분단체제의 반복강박’의 일부가 되었다고 이야기했던 것은 맞다. 그러나 그 비판은 창비 분단체제론을 특정한 것이 아니라 87세대 운동권 일반, 아니 60~80년대에 형성된 민주화 운동권 일반의 분단극복 논리에 내재된 모순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런 논리로는 ‘마의 순환고리’를 깰 수 없었고, 그 결과 87년은 결국 다시 독재로 회수되고 말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 없이, 다만 창비 분단체제론을 비판했다는 사실 자체에 반발하고 있었다. 그 반발의 내용도 들여다보면 ‘분단체제’ 비판을 ‘분단체제론’ 비판과 등치하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애초부터 양국체제론 구상의 동기가 무슨 ‘창비 비판’에 있지도 않았고 분단체제와 분단체제론은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처음에는 그렇게 특이할 정도로 강하게 반발하는 것은 분명히 내가 이야기하려고 했던 본지(本旨)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단순한 오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반발의 배경에 필자와 창비 그룹 사이에 ‘분단체제’ 개념에 대해 매우 큰 이해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서서히 그리고 이제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양국체제론은 분단체제론과 마찬가지로 분단체제를 비판하며 이를 극복하자고 한다. 그런데도 양국체제론에 그렇듯 반발하는 이유는 실제로 ‘내가 생각하는 분단체제’와 ‘분단체제론이 생각하는 분단체제’가 실제로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읽어 보니 분단체제와 분단체제론은 분명 서로 구분이 안 되는 바 있다. 분단체제를 비판하고 극복하자고 시작한 분단체제론이 어느덧 분단체제와 동반(同伴)하자는 이론이 되어버린 것 아닌가. 양국체제론의 핵심은 마의 순환고리를 끊자는 것이고, 마의 순환고리의 핵심에 분단체제가 있다. 따라서 양국체제론의 입장에서는 분단체제를 확실히 끝장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분단체제론은 어느덧 분단체제와 적당히 공생하자는 주장이 되어버린 것인가. 분단체제론은 어느덧 ‘분단체제 현상유지론’이 되어버린 것인가. 그렇다면 정말 문제는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게 된다. 중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를 차근차근 밝혀보기로 한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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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5/06-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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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셰일가스 생산업체들이 수지의 타산을 따져야 할 시점이다. 에너지 수요의 축소와 코로나사태의 봉쇄로 인해 발생한 역사적인 사태에 직격탄(perfect storm)을 맞고 있으면서 주요 산유국들은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산유량의 축소에 합의를 해야 하는 상황인 반면에, 사우디와 러시아는 오히려 가격을 낮추려고 추가적인 생산량의 조치를 통해 원유를 시장에 퍼붓고 있다.

지난 3월 초, 러시아가 사우디의 석유감축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자, 사우디는 자신의 동맹들과 연합하여 러시아와 가격전쟁을 촉발하였다. 이후 원유가격은 폭락을 거듭하였고, 4월 20일은 서부텍사스 원유(WTI)값이 배럴당 -37.6달러를 기록하는 재앙의 날이 되었다. 이는 1983년 미국상품교환시장이 원유를 선물로 취급한 이래 가장 낮은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대부분의 미국셰일가스 생산업체들은, 축출비용이 상대적으로 높은 까닭에, WTI의 배럴당 원유가격이 40-45불을 유지하여야 사업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에 사우디는 세계에서 생산원가가 가장 저렴하여 배럴당 8.98달러 수준이고, 러시아는 19.21달러이면 생산을 유지할 수 있다. 현재같이 세계적인 불황의 경제환경 속에서 미국의 세일가스 업체들이 생산을 지속하면서 투자자들에게 배당을 지급하고 기본생산비용을 감당하려면 유동자금이 곧 고갈될 것이다.

이러한 징후는 이미 나타나고 있으며, WTI가격이 배럴당 40달러 밑으로 형성되면, 내년에 약 100여 개의 업체들이 파산을 신청하게 될 것이다. 3월에서 오는 5월 사이에 미국 원유의 일간생산량은 127백만 배럴에서 119백만 배럴로 8십만 배럴의 축소를 가져올 것이다.

실제로는 이미 수 년 전부터 미국의 셰일가스산업의 전성기는 지나가고 있었다. 미국의 오일 붐의 중심지인 서부 텍사주의 Permian Basin은 가장 저렴한 유전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조차 문제가 터져 나오기 직전이다. 이미 과다한 부채에 시달리고 시장에서 가격이 내려가자, 돈줄인 은행들이 대출을 차단하면서 해당 산업은 역사적인 파산에 직면하고 있다.

4월초 G20에서 논의되었듯이 주요 산유국들은 세계적 공급량을 10% 줄이는 거래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석유산업의 주요 업자들이 가격을 올리자는 것에 합의하고 부과된 의무를 실행할 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해당 업자들의 이해와 생산능력이 천차만별한 가운데 미국의 산유업자들의 차이가 특히 심하다. 감축합의라는 거래는 너무나 하찮은 것이었고 너무나 늦게 진행되었다.

원유가격은 계속 떨어지고 미국의 개별 생산업체들이 파산에 직면하면서 에너지의 자급이라는 미국의 꿈이 갑자기 사라질 위험에 처했다. 그간 셰일가스의 붐으로 일간 생산량이 17.9백만 배럴까지 높아져 세계최대의 원유생산량을 보였던 미국은 2020년 말이 되면 생산량이 2-3백만 배럴 수준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에너지담당 장관 Dan Brouillette은 예측한다.

2014 년에 이미 셰일가스 산업을 봉쇄하려고 시도를 했다가 실패한 사우디의 경험으로 사우디와 러시아는 미국이 석유산업에 무임승차하는 것을 유례없이 허용하고 말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트럼프가 사우디에게 생산량을 줄이도록 요청하고 연방상원이 사우디 왕국에게 온갖 위협을 가한다 하더라고, 미국 내 생산량은 당분간 지속적으로 축소될 것이다.

에너지 자급의 목표가 멀어져 가면서, 미국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석유에 의존하며 대량의 원유을 뿜어내는 국가들을 한편에서는 달래가며 한편에서는 협력과 편이를 제공하여야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우디는 새로운 매장량의 발견으로 석유시장의 흐름을 제어할 수 있는 국가이다. 결국 매우 취약해진 미국 석유산업의 미래는 사우디 왕국의 석유정책에 달려 있다. 새롭게 전개되는 환경 속에서, 미국은 에너지의 자급 대신에 상호의존이라는 새로운 현실에 대응하는 외교 및 경제정책으로 선회하도록 강요를 받을 것이다.

 

Nawaf Obaid

2002-2015 년간 사우디 정부의 고문을 역임했으며, 2012-2018년간 하버드대학의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The Failure of the Muslim Brotherhood in the Arab World” 의 저자이기도 하다.

수, 2020/05/06-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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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역격리가 오래 지속되면서 폐쇄된 공간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서로에게 싫증을 내기 시작할 지경이 되었다. 사회적으로 크게 확대하여 보면, 이러한 미친 짓 같은 대규모 봉쇄 속에 사람들은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내기 시작한다.

이젠 대안의 미디어 매체까지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특히 독일의 반체제 언론들은 코로나 사태가 몇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정부와 주류 매체가 만들어 내는 거짓뉴스라고 믿고 있다. 이들은, 트럼프가 그러하듯이, 봉쇄에 대해서 저항시위를 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이는 마치 자신들이 나치가 행한 강압에 굴복하지 않은 진정한 반체제인사라도 되는 것처럼 고집스런 소란을 피우는 꼴이다. 대규모의 공공보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무제한적인 개인의 자유를 선언하자는 것인가?

 

The Limits of Power

강제력의 한계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주장의 동기가 무엇인지 밝히고자 할 것이다. 신앙적으로 신이 코미디 같은 각본을 진행했다고 믿는 극단적인 신비주의자들 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에겐 홍수, 전염병의 창궐, 지진 등이 전능하신 존재가 죄지은 인류에게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징표인 셈이다.

현재 대부분 주류 언론들의 해설가들은 절대적 힘은 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맘몬(재물의 신)에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월가의 권력 속에, 정치의 배후에, 그리고 군사력과 대중매체 속에 있는 맘몬을 가리킨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현재의 위기는 바로 자기중심의 이기적 탐욕이라는 세속의 힘에 의해서 벌어진 것이다.

누군가 이야기 한다 “맘몬은 경제를 망가뜨려 아주 극소수들에게 모든 것을 몰아준다. 나가서 맘몬은 공포스런 코로나-19를 창궐시켜 우리를 가두면서 마지막 남은 자유마저도 빼앗아가려 한다. 아니면 바이러스를 이용하며 결국은 백신을 접종하여 우리 모두를 ‘좀비화’시키려는 음모일지도 모른다.”

정말일까? 상식적으로는 그럴 수 있다. 우리가 아는 맘몬은 사악하여 도덕적으로 타락한 모든 범죄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맘몬이 지진이나 홍수나 전염병을 일으키지 않았듯이 이번 사태는 맘몬이 기획한 것이 아니라 그냥 터져 나온 것이다.

“다만, 우리가 격리되는 것을 증오하듯이 지배계층을 증오하는 것을 결합시켜 다음 같은 구호를 만든 것이다: 이들은 우리를 가두려고 현재의 벌어진 (거짓) 위기를 이용하여 것이다!”

그런데 대체 무엇 때문에? 무슨 이득이 있다고 전체 인구를 격리시킨다는 것인가? 그저 스스로 즐기기 위해 ‘우리가 원하니까 모두 집에 머물라’고 했나? 대중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대체 무슨 대중 반란? 억압받아야 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대중을 왜 억압한다는 것인가?

대중을 가두려는 의도가 도대체 무엇인가? – 아마도 미국이라면 – 여러 세대를 거쳐 조작된 자신의 조국이 모든 면에서 최고라는 거짓 이데올로기에 의해 분열되고 혼란스럽고 당황하면서 대중을 무자비하게 수탈하는 현재의 시스템의 진행형 요구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일까? 자신에게 충실했던 종복이 당신을 물어뜯기라도 한단 말인가?

하기사, 현재의 트라우마적 상황이 최면에 걸렸던 대중들에게 현재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도록 깨우칠지도 모르겠다.  이전의 격리에 대한 모든 경험에 비추어, 이번 격리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오히려 연장을 거듭하는 격리상황은 결국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로 유도할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이러한 폭발이 과연 건설적이냐는 것이다.

파리의 벽에 쓰인 글 “우리의 분노를 가두지는 못할 것이다”

 

Blinded by Hubris

오만과 맹신

맘몬의 절대적 힘이라는 본성을 연구하는 것보다는, 맘몬이 가지고 있는 결함, 약점을 찾아 내는 것이 더욱 건설적이며, 그런 방식으로 그를 대대적으로 불신하고 비난하고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맘몬은 모든 것이 너무 쉽게 이루지는 탓에 오만해지면서 가끔은 어리석고 무능하며 앞일을 잘 보지 못한다. 폼페이오나 마이크 펜스 같은 자들을 예로 들어보자 – 이들이 전능한 천재들일까? 천만에! 반푼이 멍청이들이어서, 권력의 구조 속에 도덕적 또는 지적인 수준이 결여된 무리들과 함께, 진실과 덕성과 지성을 무시하는 부패한 시스템과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이다.

이런 종류의 쓰레기들이 권력의 최상부에 오른 것은 일반 시민들이 정치를 혐오하여 사회적 책임을 멀리한 현상을 반영하는 권력구조(정치시스템) 때문이다.

서구의 정부들이 격리봉쇄를 선언한 것은 권력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력함을 표출한 것이다. 사실 이들은 격리를 서둘러 시행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경제활동에 재앙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저하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시점에 이르자 결국은 시행하였고 준비상태는 엉망이었다. 이들은 중국이 봉쇄를 통해서 훌륭한 결과를 가져온 것을 지켜보았고, 더욱이 스마트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봉쇄를 취하지 않고도 마스크와 테스트와 의료행위를 통해서 상황을 극복하는 것을 배우면서도,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었다.

서방의 정부들은 전문가 집단이 상황을 설명하고 기하급수적인 곡선을 제시하자 그제야 봉쇄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반면에, 팬데믹 상황에서 취해야 하는 기본적이고 고전적인 방역 매뉴얼에 따라 정부가 적정한 조치를 의무적으로 시행해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감각이 여전히 우리사회에는 존재한다.

물론 모든 위기 상황에도 재앙을 악용하는 무리들이 있다. 독수리는 먹이감을 직접 죽이지 않아도 썩은 고기를 즐길 수 있다. 월가의 금융권력은 재빨리 연방의회가 자산들을 지원 구제하도록 입법을 추진하는 동안, 소기업들은 파산하고 많은 이들이 절망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러나 길게 보자면, 소기업들이 파산하고 물건을 사야 하는 소비자들이 소득이 없어지고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월가 자신이 수탈하고 탐식할 대상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경제적 강자들이 현재의 파괴적인 위기를 자신들에게 절묘한 혜택의 기회라고 간주하는 것은 정말로 몰상식한 짓이다.

유럽연합 내에서도 이탈리아와 스페인처럼 심하게 타격받은 국가들을 금융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유럽은행이 발행하는 ‘코로나채권’의 제안에 대해 독일과 네덜란드 같은 채권국가들이 거절하고 있다. 이는 어려움에 처한 국가들이 민간자본시장에서 고율의 이자로 빌려야 한다는 것이고 결국 해당국가들을 파산으로 이끌고 갈 것이다.

이는 국제민간금융시장에는 단기적으로 이익이 될지 모르겠지만, 회수가 불가능한 채무를 쥐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유럽연합은 결국 갈라서게 될 지 모른다.  이런 결과는 맘몬이라는 강력한 주인들의 이익에도 보탬이 되지 않는 일이다.

 

Public Health Is Not an Individual Choice

공공보건은 개인적 선택(자유)이 아니다

서구사회에서는 인권을 이야기할 때, 이는 개인 또는 소수자의 권리를 뜻하며, 서구가 아닌 다른 나라의 방식을 ‘레짐’이라고 표현하면서 이에 대한 저항권을 의미한다. 특히 미국은 자신의 세계패권을 거부하는 나라들에게 제재 또는 군사적 행위를 가하는 구실로 인권을 절대적 가치로 사용한다. (반미적) 체제에 도전하는 것에 대해 구체적인 사항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이를 ‘저항’이라고 찬양한다.

그러나 실상 대부분 문명화된 사회의 여러 측면을 살펴보면 개인적 권리를 지지하는 절대적 입장과는 상반되게 진행된다. 모든 문명화된 사회는 법치적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모든 시민이 반드시 준수해야만 하는 기본적 규칙이 있다. 문명화된 대부분의 국가들은 공공 교육시설과 모든 국민이 혜택을 누리도록 설계된 공공의료보험(미국을 예외로 하고)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개인적 자유에 일정 수준의 제약을 포함한다.

문명화된 사회가 주는 혜택을 모두가 누리려면 개인에게 가해지는 일정 수준의 제약을 수용해야 한다. 개인의 건강은 공동체의 건강에 의존하며, 그런 까닭에 대부분 서구사회에서는 건강보험에 대한 개별부담을 받아 들인다. 오직 유일한 예외 국가는 미국이며, 이는 철저한 개인이기주의를 미국시민 대부분이 매우 중요하게 받아드리기 때문이다.

Mammon and His Slave. <출처: Wikimedia Commons>

전염병의 창궐은 갑자기 검역조치와 같이 매우 비정상적이며 반갑지 않은 제재를 동반한다. 이는 공공선을 위하여 개인적 자유가 희생되는 대표적 예이다. 개인은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 그리고 모든 인류의 공공선을 위하여 제약을 감수한다.

오늘날처럼 과학이 발달한 사회의 역설은, 일반시민들이 해당 이슈의 심각한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질수록 그래서 전문가들과 해당기관에 더욱 의존해야 할수록, 일반인들은 전문가들과 해당기관을 점점 믿지 못하게 되고, 이들이 비밀스런 수작을 벌릴까 의심을 더한다. 보이지 않는 권력의 힘이 점점 수수께끼로 남을수록 해당사회는 내재적 의심증에 시달리게 된다.

이러한 역설은 공공보건과 처방약이라는 이슈에 대해 매우 심하게 나타나면서, 책임을 지는 해당기관들 내부에 왕왕히 의견들이 충돌한다. 특히 독일과 같이 코로나 위기가 상대적으로 심각하지 않은 나라에서, 한 의사가 엉뚱하게 COVID-19에 대한 공포는 조작된 것이고 건강한 사람들은 무사할 것이고 어차피 죽을 사람은 죽도록 그대로 방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기의 견해는 모든 정부의 조처는 개인적 해방에 대한 임의적 제재라고 생각하는 일단의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이는 전문의사 집단의 주류적 의견일 수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번 바이러스의 감염된 현장을 직접 목격하였다. 단순히 심한 감기나 계절적 독감의 수준이 아니었다. 가벼운 경우도 더러 있긴 했지만, 심각한 경우가 많았다. 살만큼 산 노인들만 죽어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격리봉쇄만이 유효한 것인지 질문을 던지는 것은 합리적이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프랑스에서는 약간 지체되기는 했지만 정부는 격리봉쇄를 실시하였는데, 실제로 전염병은 퍼져나가는데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스크는 구할 수도 없었다: 국내에 마스크와 의료장비를 공급하던 공장이 Brittany에 있었는데 Honeywell 사에 인수되면서 조업이 중단되어 있었다. 이것이 프랑스의 탈산업화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서구사회는 지식과 아이디어 그리고 혁신적 창업으로 얼마든지 경제를 꾸려갈 수 있고 제조활동은 가난한 나라의 저임금에 의존하면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마스크의 재고는 없었고 즉각 생산할 시설도 없었다. 인공호흡기도 없고 병원의 병상도 부족하여, 질병이 퍼지는 와중에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외출금지령과 해열진통제를 권하는 것뿐 이었다.

상황에 더욱 잘 대응하고 제대로 처리할 방식이 분명히 있었기에, 봉쇄가 풀리면 정부의 위기대응 능력에 대해 겉잡을 수 없는 비난이 쏟아지면서 공공의료시스템의 극적인 개선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어차피 많은 사람들이 독감이나 암 등 다른 질병으로 죽어 나갔을 거야’ 라고 변호할지 모르겠으나, 이번 유행전염은 기존질병에 추가되어 폭발한 것이며 의료체계의 한계를 넘어 이의 붕괴를 가져왔다. 이탈리아 경우에는 발발 한달 만에 수백 명의 의료진이 희생당했다. 이들은 전염질병이 아니었으면 죽어야 할 하등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정상적인 시기에는 ‘SAMU15’라는 응급서비스를 전화로 요청하면 구급팀이 몇 분 이내로 현장에 도착한다. 그러나 코로나 위기를 겪는 동안에는 응급전화를 하여도 당신의 위급상황에 상관없이 답변을 얻는데 한 시간이 넘도록 걸리거나 아예 답신을 얻을 수도 없는 경우도 생겨 났다.

방역격리의 주요 목적은 과부화가 걸린 의료시스템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다. 격리조치가 없었으면 과부화로 인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위기는 현존 시스템이 부적격이며 공공의료체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절대적 필요를 확인해 준 것이다.

 

Irrational Fear of Vaccination

백신에 대한 비이성적 공포

대량의 백신을 사용하는 것이 이런 치명적인 질병을 퇴치하는 확실한 길이다. 이 경우에도 공공선을 위하여 개인적 자유를 희생해야 하는 하나의 예가 된다. 우스꽝스럽게도 많은 지식인조차도 바이러스를 무서워해야 하는데 정작 바이러스와 싸우는 백신을 두려워한다.

백신을 반대하는 이유 중에는 이익에 집착하는 거대 제약기업들이 질병을 핑계로 돈을 벌어 들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제약산업 자체를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문제는 거대 제약기업들이, 국가의료보험제도가 결핍된 미국에서 그리고 신자유주의를 핑계로 공적 통제가 안되는 풍토 속에서, 보편적인 의료행위를 지원하기 위해서 약품을 만드는 것과는 별도로 보다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해서 제품에 지나친 이익을 추가하는 점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은 의료행위와 약품생산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적 감시와 가격통제를 강화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결론은 제약산업은 수익을 위한 사업이 아니라 공공보건을 위해서 운용되어야 하며, 따라서 자금을 투자해온 금융산업에 배당을 우선할 것이 아니라 이를 공유기업으로 전환하여 발생하는 수익을 신약의 개발에 재투자하도록 해야 한다.

향후 전개된 전망은 나라마다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미국과 같은 곳에서는 ‘자유기업’이 유일한 방식임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의료체제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실제로 불가능할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혼합경제에 대한 긍정적인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에, 유럽연합 또는 덜 직접적이겠지만 미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면, 제약산업의 국유화가 가능할 것이다. 반면에 미국은 세계 어느 곳이든 사회주의적 방식이 도입되는 것을 봉쇄하려고 온갖 노력을 하고 있다.

 

No Longer the Center

서구는 더 이상 중심이 아니다

이젠 서구사회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COVID-19 사태에서 세계는 동아시아의 역량과 인상적인 인도주의 활약을 목격하였다. 아마도 백신은 NATO 회원국이 아닌 중국 또는 러시아 등에서 먼저 개발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로써 서방의 거대제약기업들의 독점시대는 지나갈 것이다.

유럽의 경우,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이 유럽연합이라는 기구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면서 개별국가의 주권시대로 복귀하려고 할 것이다. 동시에 개별 주권국가들은 시민들의 요구에 따라서 거대금융의 독재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를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개선해 나갈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노동조합과 진보단체들이 연합하여 기본적인 노동인구들에 대한 보호망의 개선을 요구하는 동시에 서비스 분야의 종사자들, 병원과 소매업, 버스운전사와 배달원들 (임시직노동자)들에게도 공공 서비스의 혜택을 더욱 강화하도록 단합된 연대를 통해서 관철하려 할 것이다.

Yellow Vests protest, March 7, 2020 in Paris before lockdown

아마도 프랑스는 사회투쟁의 오랜 관행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주춤한 ‘노란조끼운동’을 포함하여, 격리해제 이후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환상을 포기하고 시민들의 안녕과 복지를 우선하라는 요구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을 것으로 예상된다.

독일의 경우에는 오히려 반대의 현상이 예상되는데, 좌파에 속하는 일부의 그룹에서 젊은 세대를 우선하여 의료조치를 취한 후 여력이 있을 때 아픈 75세가 넘은 노인들을 돌보도록 요구할 개연성이 있다. 이는 나치가 시행한 악질적 우생학의 부활을 예고하는 것으로 시민들을 그룹별 분류하려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의 뒤틀린 행태이다.

모두에게 동일한 의료행위를 시행하는 것과 나이로 분류하여 차등을 두고자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문명적이고 어느 것이 야만적인지 분명하지 않은가? 재물의 신인 맘몬을 즐겁게 하기 위해 (비용을 아끼려고) 인간을 분류하여 희생시키려는가?

 

For Civilization

문명화를 위하여

지배계층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존재인지 경고음을 울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현실적이고 확실한 대안 – 단순히 저항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 즉 기존 것과 다르고 보다 나은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이를 위해 싸워 나가야 한다.

우선 백신이라는 현재 마주치고 있는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주제부터 시작해 보자. 공공의료의 다른 주제들과 마찬가지로 이는 개인적 권리가 아니라 공동체의 안전에 관한 이슈이다. 이는 ‘억압의 저항(미국이 자주 쓰는)’이 아니라 ‘문명화의 설계’라는 주제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백신이 필요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백신은 반드시 개발해야 되며 이러한 과정이 BlackRock같은 거대제약기업의 주요 투자자에 대한 배당을 위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공동체의 안녕을 위한 공적 감시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백신의 문제는 백신을 사용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장악하려는 미국의 자본주의에 있다. 한때는 식량기구와 식약청이 제약산업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신뢰가 가능한 조직들이었으나,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는 거대 기업들의 손에 장악되어 그저 도장만 찍어주는 기구로 전락되었다.

또한 빌 게이츠처럼 인류박애주의자로 알려진 억만 장자들이 운용하는 기구들의 역할에도 경각심을 가져야 하며 숨겨진 사악한 음모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처방전은 의료행위와 백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배후에서 작동하는 거대한 독재권력을 제거하고, 개인과 공동체의 안녕을 균형있게 유지할 수 있도록 문명화가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물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하는 것과 어떻게 해야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실한 아이디어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A Mixed Economy

혼합 경제에 대하여

미국의 경우, 적정한 수준의 의료행위를 공공서비스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미국의 상황으로 보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마르크스 혁명은 아니라도, 혁명에 준하는 개혁의 물결을 요구한다. 제약과 의료 산업은 공공서비스의 영역이고 반드시 공공적 통제를 받아야 한다. 마치 인터넷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자신의 영역에서 독점과 통제력의 명성을 누리며 자유시장의 기제에 익숙했던 혁신발명가들에게 이제 조언자의 입장으로 은퇴를 권하면서 자신이 편히 머물 주택을 고를 선택권을 부여하는 대신, 그들이 부적절하게 벌어들인 수입을 공공적 자산으로 전환해야 한다.

나는 미국을 위해서라도 공산주의적 혁명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는 1960년 대의 프랑스에서 그리고 현재의 중국이 채택하고 있는 ‘혼합경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경제의 중요한 결정과정은 사회적 통제 하에서 진행되고 주요한 투자 역시 사회적 목표를 가지고 이루어져야 한다.

통제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 우선 미국을 예로 들면, 결정과정에서 낭비적이고 비정상적인 국방에 대한 투자를 국내의 인프라로 돌리고 모든 시민들이 제대로 문명화된 사회에 통합되도록 하는 조처를 취해야 한다. 이러한 혼합경제는 소규모의 독립된 기업들이 마음대로 혁신할 수 있는 친화적 환경을 만들어 준다.

현재의 미국처럼 극심한 양극화에서 복권의 당첨이나 꿈꾸는 자본주의보다는, 모든 시민이 건강과 주거를 걱정하지 않는 것이 보다 실제적인 자유를 가져다 준다. 이러한 문명화 프로젝트는 사회의 모든 계층을 막라하여 성실하고 건전한 시민들의 지지를 얻을 것이다.

물론 조국인 미국이 나의 상식적인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수 년 또는 수십 년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반면에 이미 다른 나라들은 거대제약기업들의 위협과 미국의 억만장자들의 개입에 대응할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진행과정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다극화 multipolarization.’이다.

이 구호를 2007년 러시아의 푸틴이 사용했다. 그러나 단극적 세계화의 주요 세력인 서구진영은 ‘다극화’라는 관점을 받아들이는 대신, 분노에 빠져 ‘유럽방어 Defender Europe 20’라는 핵전쟁을 설정한 비정상적이고 도발적인 군사훈련을 러시아 국경 근처에서 실시하려고 했는데, 때마침 COVID-19로 인하여 잠시 중단되었다.

미국과 유럽의 위성동맹들은 자유국가 – 미국의 지배에서 자유롭다는 뜻에서 – 들을 위협하는 전쟁을 실제로 수행하는 중이다. 그것도 조작된 선거로 탄생한 권력에 의해 승인된 금융의 지배, 즉 신자유주의라는 전선을 형성하면서 ‘망상적 세계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수행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극적인 세계화는 파열과 대립의 과정에 있다. 중국에 대한 온갖 허위 선전은 사실을 바꿀 수 없다. 미국의 거대 미디어 매체들이 굴기하는 경쟁자를 비난하는 동안에도, 세계는 중국이 서구사회보다 팬데믹 상황을 보다 전문적인 노하우로 훌륭히 대처한 것을 목격했다. 미국이 통제하는 국제기구들은 이제 굴기하는 중국의 영향에 압도당하고 있다 – 특별히 WHO가.

다극적 세계는 거대제약기업들에겐 커다란 위협이 된다. 빌 게이츠와 미국의 제약산업은 COVID-19를 퇴치하는 백신개발에 더 이상 독점적 지위를 누리지 못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서 다극적인 주권국가로의 극적인 전환은 백신개발뿐만 아니라 사회조직에 있어서 정당한 경쟁을 회복시킬 것이다.

서구국가들은 자신들이 처한 문제에 집중하고 해결해야 하며, 다른 국가들로 하여금 각자의 역사에 맞는 나름대로의 모델에 따라 발전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오만한 미국식의 자유시장 민주주의는 지구상의 어떤 국가에게도 강요해서는 안되는 방식이며 더구나 미국 자신을 위해서도 적용해서는 안된다.

혼합경제 방식은 다양한 형태를 지닐 수 있다. 어떤 국가에서는 이를 사회주의라고 부르겠지만, 다른 국가들은 이를 거부할 것이다. 작은 나라들은 아이슬랜드처럼 독립을 만끽하게 해야 하고 모두가 각자의 길을 스스로 모색하도록 해야 한다. 들판에 피는 수 만 가지의 꽃들처럼 말이다!

 

출처: Consortium News. 2020-04-11.

Diana Johnstone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는 미국인 작가, 최근 ‘Queen of Chaos’ ‘Circle in the Darkness’ 등 저술을 출간하였다.

목, 2020/05/07-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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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여왕은 최근 1939년에 유행했던 노래를 회상시키며 ‘우린 다시 만날 거예요, We will meet again”라고 말했다. 우리를 고무시키는 발언이며 정말 필요한 언급이었다. 그런데 팬데믹 이후 우리가 기대하는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위기를 함께 대처해온 경험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사실 코로나바이러스 이전의 세상은 온갖 종류의 문제로 가득 차 있었다. 불평등은 국가 간뿐만 아니라 개별국가 안에서도 만연했다. 가장 부유하다는 미국 내에서 수천 만 명이 의료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불필요한 질병에 시달렸다. 잘못된 긴축정책으로 유럽연합 내 취약한 시민들이 공적 지원과정에서 소외 당했다.

브라질과 볼리비아부터 폴란드와 헝가리에 이르기까지 반-민주적 정치가 성행하고 있다. 팬데믹 과정에서 공유한 경험들이 상기에 언급한 문제들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인가?

여왕이 위에 인용한 노래가 나온 지 오래지 않아, 유엔과 통화기금 그리고 세계은행 등이 1944-5년 사이에 탄생하면서 ‘다시 만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세계대전을 경험한 후 나라마다 발전을 이루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몇 년간 식량부족을 겪었던 영국의 경우, 심각한 영양실조라는 사태에 직면했다. 필요한 식량의 절대적 부족이라는 문제에 직면하여, 영국은 합리적인 사회적 지원책을 통하여 부족하나마 식량을 골고루 나누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를 통해 전통적으로 영양실조에 있던 계층은 어느 때보다 상태가 개선되었다. 비슷한 일이 의료분야에서 전개되어 함께 나누는 건강관리가 시작되었다.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전쟁을 겪은 1940년대를 지나면서 영국과 웨일즈 지역의 신생아 평균수명이, 이전 십 년간에 1.2년이 늘어난 반면에 6.5년이 늘어났으며, 여성의 경우에는 1.5년에서 7년이 연장되었다.

복지국가라고 알려진 새로운 시스템이 출현하면서 평등이 추구되고 빈민계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전쟁 중에도 이후에도 보다 개선된 평등을 주장해온 Aneurin Bevan은 1948년 맨체스터에 있는 the Park Hospital에서 처음으로 국가의료서비스(NHS)를 시작하였다.

현재의 위기를 경험하면서 상기에 언급한 것과 같은 긍정적인 무엇이 전개될 수 없을까?

과거에서의 교훈은 위기를 어떻게 대처했으며, 무엇을 핵심적으로 다루었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지점에서 정치가와 일반 시민간의 관계를 포함하여 정치가 매우 중요하다. 영국이라는 공화국이 전쟁과정에 식량부족과 의료관리를 잘 해결하고 개선시킨 반면에, 같은 시기인 1943년 영국 지배하에 있던 인도의 벵갈지역에 지독한 기근이 발생하여 3백만 명이 아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의 통치자였던 Raj 는 사태를 방지하는 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현재 진행중인 팬데믹에 대응하는 정치과정에 평등이라는 주제는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미국 내 사망자를 보면 백인보다 흑인이 비교할 수 없는 비율로 죽어가고 있다. 시카고의 예를 보자면 주민 구성의 1/3도 안되는 흑인들이 사망자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빈민계층에 대한 불평등한 상황은 브라질과 헝가리 그리고 인도 등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실정이다.

인도는 특히 심각하여 불평등한 상황이 광범하게 존재한다. 인도가 독립하여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한 이후에는 기근사태가 다시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억압 받는자들의 주장을 들어주고 위험에 처한 이들을 보호하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인, 공공적 토론을 다양한 직간접적인 수단을 통하여 여론의 자유를 억제하고 정부기관이 여러 제약을 강화하고 있다.

부유층에는 현대적 의료가 진행되는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인 의료조치도 이루어 지지 않는 대비(contrast)와 현대화된 카스트 제도의 불평등에 가져오는 치명적인 비대칭 상황에 대하여, 이번 계기를 구실로 삼아 팬데믹의 대처를 평등하게 전개할 수 있는 모범의 기회로 삼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등에 관한 관심은 보이지 않고 있다. 반대로 기차와 버스 등 공공교통수단을 포함하여 갑작스런 봉쇄조치를 극적으로 취하면서, 고향에서 수백 마일 떨어져 일하고 있는 타지역 이주 노동자들, 가난 중에 가장 가난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는 상황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다.

물론 ‘거리두기’가 바이러스의 전염을 억제한다는 것은 확실하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 이러나 이는 봉쇄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 상응한 조치인 수입, 식량, 의료제공과 접근성 등이 함께 결합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다른 많은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인도에는 NHS같은 시스템이 도입되어야 한다.

거대한 불평등을 방치한 채, 팬데믹에 대처한다면 얻을 교훈은 없다. 현재대로라면, 슬프게도 우리가 다시 만나는 장소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불평등한 세상보다 나아질 것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 우리는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현재의 위기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평등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은 많은 나라에서 고통을 줄일 뿐만 아니라, 미래에 더욱 평등해진 세상을 설계하는 일에 많은 아이디어를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다. 이제 반도 진행되지 않은 듯한 위기의 과정 속에 감히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꿈꿀 수는 없을까?

 

아마티야 센(Amartya Sen)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유엔의 인간개발지수(HDI)를 주도하였고 현재 하버드의 Nobel Thomas W Lamont 과정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참고자료

<보충자료. 한겨레 신문사와 몬드라곤 협동조합의 인터뷰기사> 협동조합 가치, 위기 때 더 빛나 “코로나 해법도 연대·협력에서 찾자”

금, 2020/05/08-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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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스탠더드, 미국?

봉준호 감독은 미국 매체 ‘벌처’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영화는 지난 20년 동안 큰 영향을 발휘했음에도 왜 단 한 작품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오스카는 국제적인 영화제 시상식이 아니라 로컬시상식”이라고 대답했다. 봉감독의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오스카상이 로컬인데도 국제영화제로 오인되어 왔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오스카상은 로컬일 뿐이다. 또 하나의 의미는 트럼프 정부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면서 글로벌 리더십을 노골적으로 내팽개치고 있는 현실과 이의 결과로 아메리카 스탠더드가 곧 글로벌 스탠드라는 공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봉감독의 발언이 이것을 염두에 둔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 더. 미국연방정부는 4월 3일(현지 시간) 미국 보건복지부의 공식 웹사이트에서 국가전략물자비축량( Strategic National Stockpile)의 용어 정의도 변경했다. 이전에는 공중 보건 비상시 필요한 의약품과 물자를 연방정부가 비축하는 것으로 정의되었지만 이번에 주정부의 물자 부족시 연방정부가 보충한다는 식으로 변경되었다. 비상시 1차적 책임을 주정부로 넘긴 것이다. 그 결과 미국의 주정부는 진단키트, 인공호흡기, 의료용 방호복, 마스크 등 방역물자를 구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말 그대로 주정부마다 각자도생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글로벌 리더십은커녕 국내에서 내셔널 리더십조차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경제활동 재개 시점을 두고도 트럼프와 주지사가 실랑이를 벌이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미국의 현주소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숙주가 된 G7G20 국가들

코로나19 팬데믹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고속도로를 타고 순식간에 확산했다. 아래 <표 1>은 ‘코로나19(COVID-19) 실시간 상황판’【1】의 확진자 랭킹 중 25위까지를 나타낸 것이다. 이 표를 기준으로 G7 회원국과 G20 회원국(EU를 제외하면 19개 국가)의 코로나19 랭킹을 보면, G7 회원국이 확진자 수 랭킹 10위안에 5개이고, G20 회원국은 확진자 수 랭킹 20위안에 11개 국가가 속해 있다. 이 표들에서 보듯 이들 G7, G20 회원국들은 소위 말하는 선진국들이다. 물론 G20 회원국들은 좀 다르지만 G7 회원국들은 ‘부자 국가 클럽’이다. 세계에서 의료 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이며 코로나19에 대응하는 능력 또한 가장 높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G7과 G20 국가들이 코로나19 팬데믹의 허브가 되었다. 이렇게 된데는 이들 국가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핵심 국가들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무서운 속도로 팬데믹이 된 이유다. 그리고 이 피해자들은 이들 신자유주의 핵심 국가들의 빈민층이 1차적이지만 시차를 두고 변변한 방역 시스템과 물자가 없는 빈곤한 국가들의 몫이 될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에서 이를 대처하는 글로벌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다. 중국은 그렇다치고 미국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제각각 제 코가 석자인양 각자도생의 모습만 보이고 있다.

 

마스크가 계급을 가르다

미국과 EU 국가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추악하기조차 한다. 코로나19가 걷잡을 수 없이 이들 국가에 확산되자 초기에 강건너 불구경하다가 확산방지의 타이밍을 놓쳤다. 뒤늦게 자국내에서 전면적으로 확산되자 자국 국민들에게 사실상 가택연금과 같은 강제적인 자가격리 조치로 대응하고 있을 뿐이다. 지역감염이 되면 개인이 방역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 개인 방역의 핵심 물자는 손세정제와 마스크 착용이다. 이들 물품을 구하지 못해 선진국들은 마스크 확보에 비상이 걸린 나머지 하이재킹도 마다하지 않는다. 마스크를 환자들이나 착용하는 물자로 인식하거나, 과학적인 개인 방역물자임에도 불구하고 오리엔탈리즘에 사로잡혀 미개한 동양인이나 착용하는 것으로 여겼던 마스크를 국민들에게 착용하라고 뒤늦게 권고하고 있다. 코로나19의 전면적인 확산으로 공포감에 사로잡힌 시민들은 마스크를 구하려 애를 쓰지만 마스크 공급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마스크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해당 국가들은 고가에라도 마스크를 구입할 수 있는 부자들과 마스크를 구입할 수 없는 빈자들로 사회가 양분되고 있다. 한마디로 정상적인 마스크를 착용하는 사람들과 스카프 같은 대용품으로 마스크 대신 착용하는 사람들로. 일본은 가구당 천마스크 2장을 공급하겠다고 발표하여 국제적인 코미디를 보여주었다. 이런 모습이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세계다.

 

코로나19가 글로벌 가치사슬(GSC)의 허상을 벗겼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가 있다. 미국이나 유럽국가들이 마스크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어도 자국 국민들에게 마스크 착용을 미리 권고하지 못하고 뒤늦게 한 것은 그들 국가에서 마스크를 제조하여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이 왜 이런 곤경에 처하게 됐을까. 간단하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글로벌라이제이션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교의에 따라 글로벌 공급사슬(GSC)은 지구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생산성을 더 이상 높일 수 없는 범용적 기술에 기반한 산업은 가차없이 해외로 이전했다. 선진국 내에서는 채산성을 맞출 수 없어서 기업들이 값싼 노동력 확보가 가능한 해외로 이전한 것이다. 이 글로벌 가치사슬이 이번 코로나19가 팬데믹되면서 방역물자의 글로벌공급망(GSC)이 작동되지 못하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선진국들은 자국내에서 이들 물자를 비상명령으로 생산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시간이다. 전염병 확산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지만 생산시스템을 갖추고 생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전염병 확산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마스크, 인공호흡기, 의료용 방호복 등 지금 당장 코로나19에 대처할 기본적인 장비의 글로벌 수급 문제를 놓고 국제사회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코로나19 앞에서 제 앞가림도 못하는 미국을 비롯한 소위 선진국들에게 글로벌 리더십 발휘는 기대난망이다. 코로나19 확산 속에서 글로벌 리더십 조건은 간단하다. 임상경험 등 코로나19와 관련한 다양한 정보와 경험을 다른 나라들과 공유하고 진단키트와 방역물자를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제공하는 것이 글로벌 리더십의 내용을 이룬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있듯 선진국들은 이런 리더십은커녕 자국내 확산 방지에 허둥대고 있고 국제 사회에서 방역물자를 놓고 낯 뜨거운 행동을 서슴치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이 이렇게 된데는 아래의 그림들을 보면 명확하다. <그림 1>은 주요 6개국의 자국 GDP중에서 제조업의 몫을 나타내는 그래프다. 전반적으로 자국내 제조업 비중이 낮아지고 있다. 저부가가치 제조는 해외로 나간다는 의미다. 물론 서비스업과 같은 산업의 성장에 따라 제조업 비중이 낮아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림 2>를 보면 세계 제조업 부가가치 생산액에서 중국은 그 비중을 늘려가고 있지만 미국 등은 그 비중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저부가가치 제조는 미국 등 선진국에서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코로나19 검체 채취에 사용하는 면봉조차 미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전통적인 국제적 비교우위론을 강타한 것이다. 비교우위론에 따르면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에서 마스크나 방호복 등을 만들면 미친 짓이다.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비교우위론과 신자유주의 글로벌 밸류체인의 허상을 드러낸 것이다. 전면적인 전쟁 상황에서 이같은 교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팬데믹된 코로나19는 한 순간에 세계 제2차대전 후 세계적인 전면전이 되었다. 글로벌 밸류체인이 무너지면서 당연하게도 방역물자를 둘러싸고 전세계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일극체제의 종말?

이러한 지구촌의 무정부적 상황은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극명하게 드러났지만 이런 흐름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동구권 사회주의 블록이 시장경제로 체제전환하자 1992년 출판된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냉전의 역사는 끝났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의 이면에는 냉전 종식 이후는 미국이라는 일극체제가 전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다. 하지만 공고할 것 같은 미국 일극체제는 2008년 금융위기와 중국의 등장으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오바마 정부는 아시아 재균형정책(Pivot to Asia)을 내걸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추진하였다. 일종의 현대판 합종책(合縱策)【2】이라 할 수 있는 반중국연합이었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 정부는 TPP를 탈퇴하고 신자유주의 교의를 내던지며 중국에 대한 경제적 압박정책을 추진했다. 군사적으로는 중국봉쇄를 위해 인도-태평양전략에 따라 기존 태평양사령부를 2018년에 인도태평양사령부로 재편하고 한국을 편입시키고자 노력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eneral security of military information agreement)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중국의 굴기를 억누르기 위해 미국은 대중국 관세정책을 지렛대 삼아 중국에 대한 무역전쟁을 시작하였다. 1차 합의를 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그 합의가 지켜질지도 의문이다. 무역전쟁 외에 중국의 ‘Made in China 2025 strategy【3】’ 전략을 무산시키기 위해 화웨이에 제재를 가하는 등 5G 통신, IoT, AI 등 첨단분야에 대한 중국의 굴기를 억누르는데 총력을 다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은 신자유주의가 구축한 세계화와 양립할 수 없다. 한마디로 중국의 전국시대에 진나라를 두고 연횡책과 합종책이 씨줄과 날줄로 얽히고 설키면서 미국과 중국은 두 국가 사이에 낀 국가들을 줄 세우고 있다.

또한 트럼프 정부는 미국 우선주의에 따라 오바마정부가 주도하여 체결한 ’파리기후변화협정【4】‘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하였다. ’파리기후변화협정‘은 전지구적인 국제적 공조가 반드시 필요한 문제다. 기후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하는 것은 재앙에 성큼성큼 다가가는 것이기에 속도감 있는 국제공조가 절실함에도 트럼프 정부는 이를 내팽개쳤다. 글로벌 리더십의 역할을 스스로 내팽개친 것이다. 그동안 ’Pax Americana‘라는 세계 경찰국가의 모습에서 뒷골목 갱스터 국가 같은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이런 변화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해외 미군주둔비용 전가다.

미국의 이러한 미국 우선주의 정책은 기실 트럼프만의 독특한 캐릭터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단지 트럼프라는 캐릭터가 그 속도를 빠르게 했을 뿐 미국이라는 파워의 현주소를 반영하고 있다. 아래 <그림 3>은 1990년부터 2019년까지 미국, 중국, 일본, 독일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준다. 그래프에서 보듯 미국은 정보통신혁명으로 IT붐이 일어나면서 세계 GDP 중 30%를 넘게 점유한 이후 하락하다가 2014년 이후 약간 높아졌다. 미국의 비중이 낮아진 것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굴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미국은 신자유주의 종주국이다. 미국내 제조업 채산성 약화로 전통적인 굴뚝 산업 기업들이 해외로 이전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금융자본과 IT기업들을 중심으로 한 플랫폼 경제【5】가 미국을 특징지우고 있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생산직 노동자(블루 칼라)는 일자릴 잃게 되었고, 바로 그들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된 사람이 바로 트럼프다. 트럼프의 미국내 정치적 지지세력과 글로벌 리더십은 상충된다. 트럼프는 이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파리기후변화협정에서 탈퇴하고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어 글로벌 리더십 발휘를 구조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코로나19는 인류공동의 위기다. 국경 없는 코로나19에 인류공동의 대응이 필요하므로 국제적 협력이 절실하다. 코로나19가 지구촌 어딘가에 남아있다면 결코 끝난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중국은 협력은커녕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협력이 아니라 각을 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지난 3월 26일 화상으로 진행된 G20 특별정상회의에서 우아한(?) 공동성명을 채택했지만 그 실행이 뒷받침될까에 의문이다. 공동성명은 국제적 연대정신을 강조하면서 첫째 팬데믹에 대한 대응, 둘째 세계경제 보호, 셋째 국제무역 붕괴에 대한 대응과 국제협력 증진 등을 담고 있다.

먼저 팬데믹에 대한 대응으로 진단도구, 치료제, 의약품, 백신을 포함한 의료품의 공급을 포함하여 국제적인 팬데믹에 대응하는 WHO의 임무를 더욱 강화할 것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하였으나, 트럼프는 WHO가 중국 중심적이며 미국에 잘못된 조언을 했다고 비난하면서 WHO에 대한 자금지원을 일시 중단했다. 세계 방역전선의 사령탑인 WHO를 무력화 한 것이다. 다음으로 세계경제 보호는 사실 자국 경제 보호다. 이건 합의하지 않아도 국가별로 각종 경제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저소득 국가들의 채무취약성 위험을 지속적으로 다룰 것이라 했지만 구체적인 방안은 없다. 국제무역 붕괴에 대한 대응에서는 필수 의료품, 주요 농산물, 그리고 국경을 넘는 여타 상품과 서비스의 흐름을 보장하고, 글로벌 공급체인에 대한 붕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했지만 해결 수단 없는 공허한 발표였다.

마지막으로 국제협력 증진에서는 난민, 개발도상국, 최빈개도국, 아프리카의 보건상황을 우려하고 개발과 인도적 재원을 마련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했지만 말잔치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당장 확진사와 사망자가 급증하는 이란이 4월7일 긴급하게 코로나19 대응으로 50억달러(약 6조1000억원)의 긴급자금을 국제통화기금(IMF)에 신청했지만 미국이 이를 반대하는 것으로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G20의 국제협력 정신은 쓰레기통에 내던져졌다. 그것도 모범을 보여야 할 미국이 주도하여 말이다.

긴급하게 소집된 G20 특별정상회의에서 공동성명을 채택했지만 그 내용의 빈약함은 차치하더라도 그조차 이행을 담보할 수 없는 것은 가장 책임있게 리더십을 보여야 할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은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공고할 것 같은 미국이라는 일극체제가 흔들리면서 무역전쟁을 위시하여 정치군사적인 분야 등 모든 면에서 충돌하고 있다. 중국은 커가는 국력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 영향력을 넓히려 하고 반대로 미국은 중국의 굴기를 억누르려는 구조적 패권경쟁을 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패권경쟁은 국제적인 협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코로나19 사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COVID-19’라는 정식 명칭 대신 트럼프는 ‘우한바이러스’ 혹은 ‘중국 바이러스’라고 부르면서 중국을 자극했고, 이에 중국은 코로나19 발원지가 중국이 아닐 수 도 있다고 하는 등 신경전을 벌렸다. 중국에서 코로나19 초기에 중국이 코너에 몰렸지만 3월 하순에는 중국이 진정되고 미국에서 전면적으로 확산되자 미국이 수세에 몰렸다. 이에 미국은 이러한 팬데믹을 WHO 탓으로 돌리면서 WHO가 중국에 기울어 있다고 비난하는 등 WHO를 사이에 놓고 미국과 중국이 다투고 있다.

 

세계대공황의 교훈을 기억해야

푸드뱅크 앞에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시민들은 줄을 서기 시작했다. 반면에 농촌의 농장에서는 수요가 없어서 우유와 야채 등 신선식품을 버리고 있다. 지금 미국에서 보이는 풍경이다. 그런데 이러한 풍경은 교과서에 나오는 1929년에 시작된 세계대공황의 풍경이기도 하다. 세계대공황도 좀더 일찍 수습할 수 있었지만 국제적 협력 부재로 결국은 2차세계대전을 통해서야 극복된 것을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미국은 국내 상황 대처에 매몰되어 글로벌 이니셔티브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며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 중국 또한 국제적 연대강화보다는 자기 면피하는데 급급해 하고 있다. 국제적 연대가 필요한 시점에 미국과 중국은 패권경쟁에 책임공방 하느라 여념이 없다. 국제사회의 무정부성은 높아지는데 반하여 국제사회 공조를 이끌 리더십은 보이지 않고 있다. 20세기 냉전시대의 제3세계 비동맹운동같은 새로운 연대의 조짐도 없다. 결국 손해는 세계화하고 이익은 자국화하는 경향만 더욱 노골화될 것이다. 하지만 90년 전의 세계대공황의 교훈은 교과서의 얘기로 끝나지 말아야 한다. 코로나19가 진화한 것 이상으로 인류가 진화했음을 입증해야 한다.

 

【1】 ‘Coronaboard. kr’이 제공하는 통계로서 각 나라의 보건 당국이 공식적으로 매일 발표하는 수치를 집계하여 작성된 것이다.

【2】 중국 전국시대에 최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진나라를 제외한 6개 국가의 연합을 말한다. 반면에 연횡책(連橫策)은 6개 국가의 연합전전에 대항하는 진나라의 외교전략이다.

【3】 중국이 단순 제조업 대국에서 제조업 강대국으로 변화하기 위한 계획으로 첨단산업 등 육성 전략.

【4】 2015년 21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 본회의에서 195개 당사국이 채택한 협정으로 산업화 이전 기준에서 지구의 평균온도가 2℃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온실가스 배출량을 단계적으로 감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협정.

【5】 4차산업혁명에 따른 첨단산업의 융‧복합을 통해 빅데이터, AI, IoT 등의 인프라 생태계를 바탕으로 한 경제.

 

김서진

(사)개성공단기업협회 상무 / 북한학(경제·IT)

금, 2020/05/08-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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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코로나바이러스가 전세계에 창궐하자, 초기에는 방관으로 일관하던 구미 지도자들이 트럼프를 중심으로 중국에 대해 비난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로나-19의 근원적 원인은 자연적이거나 불명이며, 아마도 영원히 미제로 남을 공산이 크다. 아래의 칼럼기사에서 트럼프가 ‘중국바이러스’를 들고나온 정치적 배경을 살펴본다.


트럼프의 중국메모장 확대사진. 그는 팬데믹에 대한 브리핑을 받는 자리에서 참모들이 준비한 자료 중 코로나라는 단어를 지우고 Chinese라는 단어로 대체시켰다.

COVID-19에 의한 사망자와 실업자 수치가 급증하면서 트럼프의 재선 가능성은 다음의 3가지 요소에 의존하게 되었다: 1) 선거과정에 민주당이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는 경우, 2) 캠페인을 통해 민주당원들이 바이든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독려하는데 성공할 경우, 3) 중국에 대하여 대대적인 악선전을 진행하는 경우.

우리는 민주당과 바이든이 만들어 내는 돌발적인 사건들에 대해 익숙해 있고, 이는 한편에서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지만, 신중하게 생각해 보면 별 일도 아닌 것이다. 문제는 트럼프 캠프에서 이슈를 제기하면서 민주당 지지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분열시키는 것이다. 최근에 불거진 바이든의 스킨쉽이 도마에 올라 있지만, 사실과는 상관없이, 트럼프 참모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회언론 환경을 활용하여 대대적으로 공격을 퍼부을 것이다.

트럼프 진영은 진보적 성향의 민주당 지지자들이 바이든에서 등을 돌려 투표장에 나가지 않거나 제3의 후보에게 표를 찍도록 선동할 것이다. ‘손짓관행’의 바이든보다 ‘상습적인 성추행자’인 트럼프가 더욱 문제가 되겠지만, 이런 종류의 공격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침몰해가는 ‘트럼프’호를 구출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는 자신의 무능력이라는 결점을 감추고 대통령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중국에 대해 끊임없이 말폭탄의 비난을 지속하면서 국제적인 긴장을 조성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많은 독재자들이 그러하듯이, 트럼프는 비난해야 할 적과 적국을 만들어야만 한다. 이런 배경으로 그는 중국을 단순히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아간 나라일 뿐만 아니라, 미국에 바이러스를 퍼트린 적성국가로 비난해야 한다. 결국 그는 Waco(사이비 종교)가 아니라 Wuhan(우한)을 비난하기 시작할 것이고, 그것은 이미 시작되었다.

내게 이는 분명 미친 짓이다. 뉴욕에 있는 신경과민치료 클리닉의 관리자와 오랜시간 토론하면서 얻은 생각이다. 그녀는 내게 근거없이 말했다 “중국인들은 매우 치밀하게 우리를 바이러스로 죽이려고 해요” 순간에 나는 혈압이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신경치료 전문가들과 수십 년을 함께 일해 온 사람이 중국인들이 바이러스를 배양하고 퍼뜨려서 미국인들과 세계인들 그리고 중국인 자신들을 해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논쟁의 결점을 지적하려는 나의 노력은 그녀의 마지막 답변에 무너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대중매체들이 만들어 내는 수천 가지의 무책임한 견해(meme) 중의 하나인 것에 내기를 건다.

무엇이 이런 망상을 강요하게 했을까?  중국은 단지 바이러스의 감염이 시작된 나라일 뿐만 아니라, 미국에게 강력한 경제적 국제정치적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중국인들의 외모가 대부분의 미국인들과 달라 보여서, 민족적인 혐오감을 자극하기 쉽기 때문이다.

팬데믹에 대처하면서 독불장군이 저지른 자신의 실수를 대신하여 비난하기 쉬운 대상의 적으로 중국인들이 마침 제격인 셈이다. 정보라인의 참모들이 중국인 과학자들이 바이러스를 배양하지 않았으며 자연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을 하였지만, 트럼프는 자신의 손에 묻은 핏자국을 중국인들에게 덧칠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런 인종차별적이고 파괴적인 음모에 대하여 민주당 지지자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이들 중에는 중국을 옹호하는 부류도 있을 것이고, 트럼프 못지않게 중국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반응 모두가 트럼프가 허튼 논쟁을 즐기게 허용한다. 그는 미국인들 모두가 중국을 좋아하던 싫어하던 중국에 대해서 생각하고 논쟁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류의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허튼 발언을 강화시키고, 그가 완화시키는데 실패한 대량사망자의 사태에서 주의를 돌리려고 의도하는 것이다. 중국계 미국인들은 용기를 내어 트럼프가 추구하는 인종차별과 폭력에 대하여 저항하여야 한다. 다만 이는 국제정치적인 것이 아닌 인권이라는 주제로 접근해야 한다. 증오범죄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

트럼프가 만들어 놓은 중국이란 함정에서 빠져 나오는 최상의 방법은 그를 자신이 만든 함정에 가두어 두는 것이다. 그를 가두는 방법으로 트럼프가 설명할 수 없는 두 가지 수단이 있다: 죽음과 일자리이다.

시민들은 지속적으로 트럼프와 지지자들이 주장했던 사실을, 팬데믹은 없었으며 바이러스는 곧 사라질 것이다(기적과 같이 사라진다), 지속적으로 환기시켜야 한다. 5월 2일 현재, 트럼프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 수치를 넘어서, 사망자가 67,000명에 달했으며 대통령 선거일에는 100,000명이 넘어갈 것이다.

민주당과 지지자들이 사망희생자들의 수치를 들이대면, 트럼프는 분명히 그가 하던 방식대로 자신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으면 희생자 숫자는 2백만 명이 넘었을 것이라고 응수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이런 수치를 언급하면 할수록, 그는 우리의 의도대로 논쟁을 되풀이하면서 자신이 고안해 만든 관속에 머물게 된다.

실업률이 조만간 1930년대의 대공황 수준을 넘어가고 이의 회복이 단시일 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민주당 지지자들은 트럼프와 공화당의 무능을 집중 공략하면서 어려움에 처한 수백 수천만 명의 사람들에게 일자리 제공과 생계지원을 요구해야 한다. 확신하건대, 이번 함정에서는 빠져나올 출구가 없다. 봉쇄를 풀고 경제활동을 재개하면, 곧바로 바이러스가 퍼져나가면서 사망자들은 늘어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자신이 제시한 활동제한의 지침에 반대하는 무장한 민병대들을 부추기며 경제활동을 재개하려고 안달을 할 것이다. 이러한 불일치한 행동은 자신이 스스로 실업문제라는 함정에 빠져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함정에서 빠져 나오려면 거대한 친-노동정책을 펼치며 기본소득을 도입하고 바이러스로 고립되어 있는 수백만 명의 비정규직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본성상, 그는 정치적 지원을 받으려는 기대감에 빠져 자신 주위의 부자들에게 자금을 공급해 줄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실업지원금으로 제안된 법안(3rd recapitalization bill)은 실제로는 43,000명의 백만장자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부동산업자들에게 1.6조 달러의 혜택을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대가행위는 그가 갇히는 함정을 더욱 강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트럼프가 현안을 무시하고, 게으르게 대응하며, 비난의 화살을 돌리면서 위기를 해결할 책임을 회피하는 행태를 민주당 지지자들이 비판하고 나서면 나설수록, 중국이라는 핑계의 음모는 그를 현안으로부터 도망치게 할 것이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트럼프를 죽음과 실업문제라는 함정에 가두고 열쇠를 멀리 던져버려야 한다.

 

Les Leopold

노동조합과 노동단체에게 경제교육을 제공하는 뉴욕 소재 노동기구의 책임자. 주요 저서는 Runaway Inequality: An Activist’s Guide to Economic Justice (Oct 2015)가 있다.


<보충기사>

뉴저지 시장이 작년 11월에 코로나에 걸렸다고 주장하다

뉴저지 주의 Belleville 시장인 Michael Melham은 자신이 코로나바이러스의 항체테스트에서 양성반응이 나왔으며, 미국이 첫 확진자를 보고하기 두 달 전인 지난 11월에 이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렸다고 언급하였다.

뉴저지의 지역 방송에 의하면, Melham 시장은 작년 11월에 아틀란틱 시에서 열린 뉴저지 시장단회의에 참석하면서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고 한다.

“회의에 참석하면서 몸이 아픈 것을 확실하게 느끼기 시작했으며, 회의진행 내내 고통과 싸웠다”라고 그는 지난 주 지역방송에서 말했다. 귀가 후 의사와 자신의 증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높은 열과 한기, 목의 통증, 환각증 등이 있었으며, 증상은 심한 독감처럼 3 주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지난 수요일 그는 COVID-19의 항체를 위한 혈액테스트를 받는 과정에서 양성반응이 나왔고, 자신이 심한 독감으로 생각했던 것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였다고 말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앓고 있으면서 이를 독감으로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라고 그는 언급했다. 이에 대해 뉴저지 주정부의 건강담당부서와 대변인실은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 지난해 11월경 대만 감염전문가가 작년 9-10월부터 이미 미국의 독감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섞여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으며, 자신이 아는 미국 내 기관과 친구들에게 알렸으나 묵살당했다고 확인했다. 상기의 Melham시장의 진술은 대만의사의 이야기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다른백년).

월, 2020/05/11-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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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이 글은 우리나라에 만연한 정치공학, 정치컨설팅 방법론을 추종하는 음모적 정치학을 반대하여 다수의, 다중의 힘을 근거로 시민을 위한 정치를 만들어가는 방법을 찾는 요량으로 쓴다. 그 일련의 내용 중 첫 번째 글이다.


) 포퓰리즘(Populism)의 의미

위키백과에 따르면, 포퓰리즘(Populism)은 이데올로기 혹은 정치철학으로서, “대중”과 “엘리트”를 동등하게 놓고 정치 및 사회 체제의 변화를 주장하는 수사법, 또는 그런 변화로 정의된다. 캠브리지 사전은 포퓰리즘을 “보통사람들의 요구와 바람을 대변하려는 정치사상, 정치활동”이라고 정의한다.

포퓰리즘은 라틴어 ‘포풀루스(populus)’에서 유래된 말로, 이는 ‘인민’, ‘대중’, ‘민중’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대중주의’, ‘민중주의’ 정도로 직역할 수 있는 말이다. 이는 ‘대중의 뜻을 따르는 정치행태’라는 점에서 쉽게 부정적인 의미로만 보기 어려우며 민주주의도 실은 포퓰리즘과 맥을 같이한다. 실제로 민주주의를 뜻하는 ‘데모크라시(democracy)’의 유래가 되는 ‘데모스(demos)’ 역시 그리스어에서 ‘인민’을 뜻하는 말로, 포퓰리즘과 데모크라시의 차이는 기원이 되는 언어의 차이에 불과하다고도 설명된다.

‘영국의 롱맨 사전은 ‘포퓰리스트'(Populist)를 부자나 기업가보다는 보통사람들을 대변하는 자’로 가치중립적 의미로 정의하고 있다.

위에서 포퓰리즘, 포퓰리스트에 대한 정의를 살펴 보았다. 이러한 정의에 따른다면 포퓰리즘이라는 것은 민주주의가 가치선으로 대접받는 사회에서는 당연히 좋은 의미가 되는 것 아닌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를 비난할 이유가 없는데, 우리 사회는 포퓰리즘이라면 막연히 대중추수, 나쁜 것이라고 치부해 왔다. 특히 보수 정치인들은 포퓰리즘을 격렬하게 비난하며 상대를 공격하는 정치적 수사로 사용하고 있다. 언론과 학계도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폐해라거나 심지어 민주주의와 배치된다는 식의 이미지를 심으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다. 하지만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의 하나라면, 이들 정치인과 언론, 학계는 실로 민주주의의 본질을 부정하고 싶었던 나쁜 의도를 가지고, 포퓰리즘을 매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우리 집 토끼, 남의 집 토끼

우리나라 일부 정치인, 특히 리버럴 인사들은 자신에게 표를 주고 지지한 지지층의 이익을 위해 제반 권리와 이익을 돌려주는 일에 몹시도 인색하다. 항상 포퓰리즘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펴서, 세금받은 돈으로 기업주나 상공인에게 집중적으로 이익을 만들어 주고 정작 표를 준 다중에게는 낙숫물만 바라 보라고 요구하는 상황이 당연시된다. 이들은 왜 ‘남의 집 토끼’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일까?

대단한 이유는 없다. 한마디로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를 관통하는 상식들은 포퓰리즘을 악으로 치부하고 개발경제, 토목과 건설업체를 먹여 살리는 정책으로 경제를 살린다고 주장하고, 기업과 학계에 막대한 보조금을 줌으로써 결국은 대중에게도 낙수가 우수수 떨어질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허무맹랑한 주장들일 뿐이다. 다수를 속이는 주장들이 득세하려 하니 이때 필요한 것이 정치공학이고 정치컨설팅이다. 정치공학은 소수가 다수를 속일 때 힘을 발휘한다. 이미지메이킹에 의존하는 정치가는 본질에 기반한 정치를 하지 않고 포퓰리즘을 거스러는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다.

여러 해 전, 국제 체육대회를 개최한 리버럴 지자체장이 있었다. 이 사람은 ‘자기 집 토끼’는 제쳐놓고 남의 집 토끼들에게 대회를 위한 조직의 운영과 진행과 관련한 기회들을 제공하였다. 그 결과, 남의 집 토끼들은 과연 그를 고마워하고 지지해 주었을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이 지자체장은 재선에 실패하고 자기 집 토끼들을 원망하게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보수 기반의 정치인, 즉 소수의 토끼를 대표하는 정치인들은 항상, 노골적으로 이 소수의 토끼들만을 위한 정책을 내놓고, 실로 노골적으로 서슴치 않고 실행한다. 그래 놓고는 그 정책과 실행 결과가 전체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사기를 친다. 세금을 깎아주고-나랏돈을 퍼서 기업에 나눠 주고, 필요치도 않은 토목공사를 벌인다. 나랏돈 100을 강에 파묻고 고작 30~40의 모래로 기업이 돈 벌 기회를 만들어 준다. 대기업이 부자가 되어도 비정규직 노동자가 부자가 되는가? 강남 집값이 오른다고 서울 시민 생활이 좋아지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그런데 이런 짓거리를 저질러 놓고는 자기에게 왜 표를 주지 않느냐고 원망을 하다니…

이번 선거에서 극보수세력인 미래통합당이 전국적으로 40%대를 얻은 것, 특히 대구나 부산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결과를 보면서 과연 우리는 어떤 결론들을 내릴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는 보수세력이 항상 그 정도는 있다고 생각하고 말아야 하나? 아니면 그 40% 안에 실은 우리 집 토끼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수는 없나?

토끼 수부터 세어 보자. 우리 집 토끼가 모두 몇이나 되는 지를 계산해 보자. 정치를 하겠다고 생각하고, 민주주의에 기반한 대중정치를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우리 집 토끼를 원망하기보다는 기초부터 다시 생각해 보자. 나에게 표를 주었으면 하는 계층은 누구이고 얼마나 될까?

우리 집 토끼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리고 나는 우리 집 토끼를 위해 뭔가를 해 주고 있는가? 의식주, 일용할 양식, 직업과 복지, 교육, 문화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어떤 이익을 주고 있는가?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제시하고 있는가? 포퓰리즘에 해당할 수도 있다고 주장할 만한 아주 작은 것이라도 제시하고 있는가?

길 닦고, 광장 만들고, 건물 짓고, 개발하는 것, 그런 것 말고 직접 입에 넣어 주는 무언가를 하고 있는가? 왜 못하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극보수세력들은 권력을 쥐는 족족 자기 집 토끼를 위한 세금감면과 규제 완화, 보조금과 억수같은 지원정책으로 입법과 행정을 도배해 놓았다. 그런 것들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위한 뒷거래도 하고, 자신들이 만든 법을 어기기도 하지만 대부분 운이 좋아서 그냥 해 먹고 세세연년 잘 살기까지 한다.

그런 반면, (자칭) 리버럴 정치인들은 중앙정권, 지자체를 막론하고 개별 시민들을 위한 직접적인 이익을 고려한 정책을 말하면 포퓰리즘이라고 공격을 받기 일쑤고, 자기 집 토끼는 배제하고 전체 토끼를 위한 정책을 써야 한다고 떠들어대는 스피커들에 굴복하여 남의 집 토끼만을 위한 정책들을 펴고 있다. 이제까지의 중앙정권에 의한 모든 경제 정책들은 100이면 100, 남의 토끼를 위한 정책들이다. 우리나라처럼 자본가에게 좋은 정책을 촘촘하게 만들어 놓은 나라는 드물다. 더욱이 정말로 잘 훈련된 셰퍼드, 관료집단을 갖추고 자본주의를 위해, 자본주의에 의해, 자본주의의 정치를 하는 나라도 없다.

토끼나라의 토끼들은 좋은 풀을 먹는 것에 명운을 건다. 우리 집 토끼를 위해 일하는 대표를 뽑자. 정치를 한다면 그냥 포퓰리즘을 해 보라. 그것이 민주주의이다. 포퓰리즘, 그것 참 좋은 것이다.

 

) 정치공학과 포퓰리즘

앞서 언급했지만 정치공학은 사실 부끄러운 단어이다. 한마디로 사기치는 것이다. 속살을 드러내지 못하고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것, 진짜를 내세우지 못할 때 들고 나오는 것이 정치공학이고, 어둡고 음흉하고, 그리하여 마타도어도 도배하는 것이 정치공학이다. 물론 프로는 이미지메이킹, 광고와 선전, 선동, 컨텐츠의 개발 등에 대해 거부하지 않고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렇다 프로페셔널한 광고와 선전은 당연히 오늘날의 정치에서 필수 요소이다. 하지만 그것이 기만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메시지 전달과 교육효과를 높이기 위한 캠페인인가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오바마식 흑색선전 대처법 참조)

우리나라 인구의 1%는 50만 명이다. 가구 수로는 대략 20만 정도. 사실 보통사람은 상위 1%인 50만 명 속에 포함되기는 참으로 어렵다. 강남에 아파트 한 채가 있다고 이 50만 명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소득이어야 1%에 포함되는 것일까? 상위 1%는 월급이 2,031만원, 순자산 23억원, 이중에 월급/보수가 1/3에 불과하다(2018년 국세청 자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50만 명,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이같이 부자들이다. 나머지 99%는 5000만 명이 넘는다. 하위계층의 수입은 거의 100% 월급/보수에 의존하며, 자산은 비교대상이 아예 되지 않으니 월급/보수로 인한 소득만 비교할 때, 상위 1%는 하위 30%가 받는 월급의 합과 거의 같다.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정책은 왜 이들 50만 명의 눈치를 보는 것일까? 나머지 5000만 명은 눈 가리고 귀 막고 살아온 것에 익숙하여 무시하고 괄시받아도 된다고 생각할까?

강가에 오페라하우스를 만들면 비디오 좋고 화면 멋있기는 한데, 딱 거기까지! 결국 그것으로는 배를 불려주지는 못한다. 더욱이 나에게는 가서 볼 기회를 만들어 주지도 않으면서 시민의 공간이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우기는 것이지 않은가? 처음부터 상업공간으로 만들어 사적 이익을 취하겠다고 하면 차라리 신경써지 않겠다. 99% 대중으로부터 세금 걷은 돈을 사용해서 1%를 위한 정책을 펴면 이것은 사기이며 공작이고 배임이다. 흔히 사용하는 도둑질이며 일방적인 1%를 위한 퍼주기이다.

모든 정치적 방책은 계층과 계급성을 포함한다. 우리 집 토끼인지 남의 집 토끼인지, 어떤 토끼를 위한 일이어야 하는지는 생각보다 명확하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는 ‘국민의 대표’라는 자들은 종종 ‘가치중립, 전체 시민을 위한, 우리나라를 위한’ 등등의 헛소리를 잘 한다. 이 말은 앞서서 남의 집 토끼 대표가 우리 집 토끼를 후릴 때 사용하는 말이다. 알고서 사용하면 정치공작이자 허위광고이고 모르고 사용하면 멍청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중, 99%는 사실 포퓰리즘에 굶주렸다. 제대로 복지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 1%를 지향하는 관료들이 정권을 잡고, 또 1%로 달려가고 싶은 언론과 학계, 전문가 집단이 끊임없이 역포퓰리즘, 반민주주의, 대기업지향적인 경제논리로 99%를 속여 왔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시민에 근거한, 절대 다중에 근거한 정치를 하고자 한다면 겁먹지 말고 포퓰리즘을 하라. 괜히 건물 짓고, 길 만들고, 광장 만드는 것 이외에는 표나는 일이 없다고 절망하지 말자(사실 이런 것 100날 해도 별 의미 없고, 이미지로 배가 부른 것은 아니다). 남의 집 토끼들은 좋아하겠지만, 그리고 잠시 잠깐 우리 집 토끼에게도 이게 뭔가, 나도 좋아할 만한 것인가 하고 속아 줄 수도 있지만(청계천 흐르는 물이 내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이 아니고 밥도 국도 되지 않는다는 것), 결국은 세금에서 출발하여 개발이익 형태로 소수에게 이익을 준 것 아니겠나? 우리나라 시민대중은 정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현명하다. 자세히 내막까지는 몰라도 제반 정책들이 자신과 다른 세상일이라는 것 정도는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차린다.

 

) 정신 차린 정치는 포퓰리즘에 기반해야 한다

그냥 대 놓고 99%를 위한 정책을 생각해 보라.

불황기의 정책이라도 1%를 위한 정책과 99%를 위한 정책은 다르다. 즉 법인세금을 깎아주고, 소비세를 낮춰주고, 이자를 낮추고 유동성을 높여 주고, 정부자금 상환을 미뤄주고, 산업은행에서 융자를 해주고, 대규모 토목사업을 앞당기고, 3기 신도시 사업을 앞당기고 등등 이제까지 너무나 당연하게도 진행되어 온 것들은, 알고 보면 1%를 위한 좀비경제 정책들이다. 이에 반해, 아동병원을 짓고, 기업탁아소를 의무화하고 기존 탁아소를 공립화하고, 노인요양시설을 공공화하고, 기술학교와 공과대학를 짓고 학비를 무상화하고, 중소기업 자립화/자동화를 지원하고, 시장현대화와 집합화를 지원하고, 노동자와 청년을 위한 협동조합 주택을 지원하고, 유기농을 조직하고 농작물 수급조절 시스템을 만들고 하는 등등…. 얼마나 많은 정책들이 있는가! 전에는 한번도 생각지도 못했던 수없이 많은 99%를 위한 정책들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포퓰리즘이라고 매도되고 사장되었던 것 아닌가?

도시와 관련된 정책들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용적률이라는 괴물을 직시해야 한다. 누가 이런 괴물을 만들고 숭상하게 만들었는가? 용적률 상향을 통한 개발이익은 왜 항상 부자와 기업 몫이 되어야 하는가? SH/LH, HUG/HF는 민낯을 공개해야 한다. 이들은 적폐 덩어리이자 99%의 적이다. 1%를 위한 룰을 만들어 놓고 100%를 위한다고 우긴다. 이들의 역할은 1%가 합법적으로 개발이익을 편취하도록 파이프라인을 제공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토지를 둘러싼 불공정한 거래, 불공평한 분배, 사장역행의 투기의 폐해에는 전부 그들이 관여되어 있다. 조성원가, 기금사용, 토지분양, 개발계획, 이 전부가 우리나라 부동산 관련 부의 형성과 발전의 출발점이 되었다. (1%가 자산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일에는 정말이지 혁혁한 공을 세웠다!)

도시는 필요하다면 공공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새로운 관점으로 과감하게 용적률을 적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적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용적률을 엄청나게 제공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던 도시행정이 공공/준공공적 이익을 위한 사업에는 왜 규제를 하는지는 묵묵부답이다. 청년을 위한 협동조합 주택을 짓기 위한 노력은 현재는 완전히 봉쇄되어 있다. 도시재생은 몇몇 활동가를 위한 호구지책으로 전락하였다. 왜 자동차 구입 시 주차장 의무화를 하지 않는 것이지? 기존주택 밀집지역에 주차장, 마을센터, 회의공간, 북카페, 공동식당, 청년주택 등이 함께 있는 집합적인 시설을 만들도록 허가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의도인가? 빈집을 사들여 고밀도 입체주차장을 만들고 그 주변에 공공시설과 청년주거공간과 근린상가를 조성하기만 해도 도시는 보다 활기찰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대구와 부산에서 재난 관련 지원금을 보다 신속하게 집행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적어도 서울과 경기도나 전남북처럼 집행 예정이라고 했어도 어떤 차이가 생겨 날 수 있지 않았을까? 99% 중에 1/2은 자기 집 토끼 아닌 남의 집 대표를 뽑았다. 우리 집 토끼를 대표로 뽑아도 내 입에 뭔가 좋은 풀이 들어 올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해서 아니겠나. 진짜 포퓰리즘은 적은 양이라도 직접적이고 손에 닿는 이익을 우리 집 토끼에게 제공하는 것이다(이 점에서 권영진 대구시장을 보고 배워야 한다. 중앙정부로부터 교부 받은 돈조차 절대 집행하지 않고 버티지 않던가). 이를 경시하는 것은 결국 ‘남의 토끼를 위한 포퓰리즘’을 실천하는 것이다.

불황기에 기업의 파산은 예견되는 것이고 이는 인위적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충격은 완화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구조조정, 합리화의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기업 간의 문제에 개입하기보다는 사회안전망의 확보에 관심이 집중되어야 한다. 의료서비스 확충, 공공서비스 확대, 기술교육/재교육, 공공일자리의 보급, 소상공인 지원 등에 세금이 사용되어야 한다. 포퓰리즘은 다른 무엇보다 이해와 관련된 정책에 초점이 맞춰진다. 즉 99%의 주머니에서 나온 세금이 다시 그 주머니로 돌고 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월, 2020/05/11-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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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코로나바이러스가 전세계에 창궐하자, 초기에는 방관으로 일관하던 구미 지도자들이 트럼프를 중심으로 중국에 대해 비난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로나-19의 발생원인은 자연적이거나 불명이며, 아마도 영원히 미제로 남을 공산이 크다. 생태운동가들은 자연생태의 파괴에 따른 자연적 보복이라고 설명하며, 대만의 감염병 전문자는 이미 작년 9월부터 미국의 신종독감에서 변이되어 나타났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혹자는 우한의 연구소 또는 미국 메리랜드 소재 포트 데트릭 군사기지에서 우발적 사고에 의해 발생하였다고 추정한다. 심한 경우에는 이해 관계자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하여 전파시켰다는 시나리오 설까지 나오고 있다. 다른백년은 이미 몇 번에 걸쳐 바이러스의 발생과 창궐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을 소개해오고 있다.


COVID-19를 일으킨 신종바이러스가 미국의 포트 데트릭 군사연구소에서 발원하였다는 온라인 상의 의구심에 대하여, 중국의 전문가들은 바이러스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여러 나라들의 과학자들이 협력하여 깊이 연구해야 할 주제라고 밝혔다.

“우리는 인터넷에 떠도는 여러 정보들에 대해 주목해 왔다….. 미국측은 이에 대해 공식적인 반응이 없었으며, 우리도 이를 판단할 방법이 없다”고 중국과학원 소속 미생물학연구소의 Shi Yi 연구원은 기자회견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바이러스 발병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과학적 주제이며, 이의 목적은 유사한 전염병의 재발을 막는 것에 있다”고 천명한 Yi 연구원 모든 나라들이 전염병의 원인을 찾아내고 이를 통제하는데 모든 정력과 관심을 집중하자고 제안하며 다음과 같이 첨언했다.
“이를 수행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며 불확실한 일들이 산재한 과학적 난제이다. 따라서 풍부한 생물학적 정보와 전염병의 증거들을 종합하여 증명하여야 비로소 과제를 완수할 수 있다”

그는 이미 여러 나라들의 과학자들이 발병의 원인을 규명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많은 가설들을 제안하고 있다고 밝혔다.

당연히 중국의 관련 과학자들도 국제적인 방역과 통제의 노력에 도움이 되는 과학적 근거들을 제공하고 있다. 하나의 주제로 날씨가 따뜻해 지면 COVID-19가 사라질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많은 사람들은 더위가 코로나바이러스를 억제할 것이며 여름이 오면 팬데믹이 주춤할 것이라는 가설에 의문을 제기한다. 한 연구자는 두 가지의 분석을 내어 놓았다 -바이러스의 성질과 전염의 특징.

우선적으로, 사스같은 종류의 코로나바이러스는 닫혀진 막의 형태를 지니고 있어 기온에 상대적으로 예민하여 더위에 생존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신종 바이러스의 경우 전염경로로 분석해 보면, 주로 기침과 직접 접촉에 의해 전염되므로 기온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반구의 국가들은 현재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고 있는데도 이 지역에서도 전염병이 퍼지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만 한다. 더위가 팬데믹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는 연구과제이다.

중국 CGTN의 보도


<보완 칼럼>

은폐이냐? 아니면 재발견이냐?

COVID -19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라고 밝혀지자, 중국은 신속하고 단호하게 우한지역을 봉쇄하였고 뒤이어 중국전역을 차단하였다. 봉쇄조치는 춘절이라는 매우 중요한 명절을 앞두고 취해졌으며, 문제의 심각함을 충분히 인지하고 신속히 대응한 증거이기도 하다.

서구의 많은 언론들은 이 조치가 너무 늦게 시행되었다고 주장한다. 비록 과학적인 분석은 아니지만, 서구언론들이 이렇게 의구심을 갖는 것에는 다음의 4가지 이유가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처음에는 일상적인 독감으로 생각하여 시간이 지체된 점이다. 신종독감에서 치명적인 팬데믹으로 판정하는 것은 일개 도시의 병원에서 취급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이다. 모든 나라들이 그러하듯이 국가적인 전염병의 위급함을 선언하기 위해서는 해당 질병통제센타의 절차가 요구된다.

두 번째 이유는 미국의 예이다. 미국에서 COVID-19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2월 6일 캘리포니아 북부지역이지만, 주지사 Newrom은 이를 12월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의심하고 있다. 당시까지 발생한 사망자의 경우를 치명적인 계절적 독감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바이러스를 재분류하여 확인하는 절차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보여 준다.

캘리포니아 경우의 일차적 관심은 전염과 방역시스템의 부족에 있다. 만약 우리가 우한과 이탈리아 그리고 미국에 걸쳐 퍼지게 된 COVID-19가 이와 같은 경우였다면, 캘리포니아의 지역에 이미 2월 경 대규모의 COVID가 발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는 캘리포니아 COVID-19의 감염은 바이러스의 초기 형태로 당시에는 쉽게 ‘사람과 사람’ 사이로 전염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 내린 결론과도 같은 것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초기에는 전염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의 확인은 세 번째 이유를 암시하는 것으로 SARS-Cov-2는 여러 형태의 다차원적 바이러스의 변종 가능성을 의미한다. . 연구자들에 의하면 4-6 종류의 변종 COVID-19가 확인되었으며, 지역에 따라 나타나는 주요 증상이 다른 것을 보여 준다.  일부 연구자들은 치사율이 지역에 따라 다른 것은 변종 때문인 것으로 추정한다.

1918년에 있었던 대유행 독감에 대하여 상세한 연구를 진행하여 책을 출간한 John M Barry는 바이러스가 매우 빠르게 진화하면서 변이를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초기에 동물에서 사람으로 감염되는 것은 매우 희귀한 현상이지만, 일단 새로운 전이가 발생하면 매우 빠르게 진행되어야 바이러스가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물과 사람간의 전이가 바로 우한에서 발생하면서 빠른 전염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을 것이다. 바이러스가 동물에서 사람에게 옮겨가면서 생존과 번식을 위하여 자신의 형질을 변화시켜야만 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COVID 변종이 보다 효과적으로 전이되는 모델로 발전하고 매우 높은 전염력을 가지게 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논리적이며, 최소한 하나의 변종이 치명적인 사망률을 지닌 변이의 과정을 진행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가설은 과학적 연구를 통하여 확인해야 한다.

이는 네 번째 이유의 가설을 뒷받침한다. 여러 나라들이 COVID-19에 대해 점차 이해를 넓혀가면서, 독감 등 다른 이유로 이미 기록된 사망자들을 재조사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런 작업들로 인해 뉴욕과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우한의 사망률이 새로이 수정되고 있다.  이러한 수정작업은 은폐의 증거가 아니라, COVID-19에 대한 이해를 넓혀 가면서 기존의 죽음들에 대한 재분류의 결과이다.

전염이 그리 심하지 않았던 지난 1월 초, 우한에서 발생한 죽음들에 대해서 당시에는 감염성이 높은 변종 COVID-19에 의한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분류했을 것이다.

1918년 독감을 연구한 Barry에 의하면, 바이러스가 지속적으로 변이의 과정을 거친다는 증거를 제공한다. 1918년 처음 발생한 독감은 사람에게 전이되면서 비로소 더욱 지독하고 치명적인 두 번째의 전염을 일으켰다. Barry는 당시의 독감이 백신이 개발되고 집단감염이 형성되어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숙주인 사람에게 너무 치명적이어서 스스로 자신을 태워버린 것으로 추정한다.

그가 제공하는 정보를 논리적으로 분석해 보자면, COVID-19가 처음 발생한 당시에는 독감보다는 심한 현상을 보였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감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COVID-19 초기 발생시에는 지금처럼 치명적이고 전염력이 강하지 않았다. 다른 류의 바이러스처럼, 숙주인 사람에게 적응하면서 자신의 취약성을 보완하려는 과정에서 최소한 하나의 변종이 치명적이고 전염력이 강한 변이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결론은 현재 접근 가능한 정보에 근거한 가설로, 과학적인 것은 아니며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중국은 초기 감염 당시 접근이 가능한 정보에 의해 매우 신속하고 적절하게 대응하였다. 정말로 문제가 되는 비극은, 중국이 춘절이라는 국가적인 명절임에도 봉쇄를 단행한 명백한 증거에 대하여, 이를 외면한 서구 국가들의 무책임에 있는 것이다. 아무런 대책을 준비하지 않은 채, 현재 탄식할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Daryl Guppy

호주 추신의 국제적인 재무기술 분석가. CNBS Asia에 자주 출연하여 ‘The Chart Man’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매주 상해주식지수의 분석을 진행하고 있다.

화, 2020/05/12-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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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세 강화법안이 미통당의 몽니와 패악으로 20대 국회를 통과 못하고 사실상 주저앉았다. 종부세 강화 법안이 무산되자 시장에선 즉각 매물을 거둬드리는 소유자가 등장했다.

 

확실한 신호를 줘야 부동산이 제자리 찾을 것

21대 국회가 개원하면 할 일이 차고 넘치지만 무엇보다 먼저 처리할 게 종부세 강화 법안의 처리다. 시장참가자들에게 확실한 신호를 줘야 부동산 시장이 제자리를 찾는다. 시장참가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부의 신호는 보유세에 대한 태도다.

기실 2012~2013년 대바닥을 찍고 2014년부터 상승하던 서울 아파트 시장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더 가파르게 상승한 데에는 시장참여자들의 광기를 제어하지 못한 문재인 정부의 정책실패 탓이 컸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실패는 시장안정 대책의 축차적 투입으로 인한 정책효과의 감소에서도 기인하지만, 보유세에 대한 극히 미온적인 태도 탓이 결정적이었다.

보유세 강화만큼 부동산에 대한 기대수익률을 낮추는 정책수단도 찾기 힘든데 문재인 정부는 한사코 이를 회피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직접 경험한 바와 같다. 서울 아파트 시장은 2014년부터 2019년까지 장장 6년 간의 상승랠리를 구가했다. 이는 역대 최장기간 상승기록이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2014년 9월 4억 6186만원에 불과(?)했던 서울아파트 매매중위가격은 올 4월 8억 3666만원을 찍었다. 무려 80%가 상승한 것이다.

그나마 이건 약과다. 신축아파트로 눈을 돌리면 정말 쇼킹한 장면들을 볼 수 있다. 서초의 랜드마크 신축 아파트가 평당 1억원을 돌파했다느니 하는 소식은 그들만의 리그로 여기면 된다 싶지만, 사정이 그리 녹록치 않다. 마포의 랜드마크 신축 아파트가 전용 84제곱미터 기준으로 15억원을 넘고 영등포와 중구의 랜드마크 신축 아파트가 13억원을 넘는다. 교통이 그리 좋지 않은 뉴타운의 신축아파트가 전용 84제곱미터 기준으로 12억 내외이며, 변두리로 불러도 좋을 로케이션의 신축 아파트도 10억원 내외를 호가한다.

시간을 거슬러서 2014년 10월로 가보자. 지금은 서울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라고 불러도 좋을 한강변 서초 아크로리버파크가 2회차 분양을 했을 때로 말이다. 당시 아크로리버파크의 평당 분양가는 5천만원이었는데 이는 당시까지 역대 최고가였다. 이 분양가가 현재 마포의 대장 아파트 매매가격과 비슷하다. 한마디로 불과 6년만에 ‘서울 아파트값의 강남화’가 진행된 것이다.

부동산에 관한 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대오각성해야

부동산만 놓고 보면 문재인 정부는 무주택자들에게 악몽을 선사한 정부, 꿈과 희망을 앗아간 정부다. 반면 문재인 정부 아래서 서울에 신축 아파트(전용 84제곱미터 기준)를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최소한 10억원대 부자로 비상했다. 투기에 가담하지 않은 무주택자들은 너무나 가난해진 반면 주택을 소유한 이들은 가치의 생산에 아무 기여도 없이 천문학적 부를 거머쥔 것이다. 이 대목에 대해선 정말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맹성해야 옳다.

각설하고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결자해지의 각오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서울 아파트값을 문재인 정부 출범 직전 수준으로 돌리겠다는 목표를 천명하고 이를 달성할 정책수단들을 투사해야 한다. 그 첫걸음이 종부세 강화임은 긴말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압도적 다수의 시민들에게 경제는 곧 부동산임을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한다.

화, 2020/05/12-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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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코로나바이러스가 전세계에 창궐하자, 초기에는 방관으로 일관하던 구미 지도자들이 트럼프를 중심으로 중국에 대해 비난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로나-19의 발생원인은 자연적이거나 불명이며, 아마도 영원히 미제로 남을 공산이 크다. 생태운동가들은 자연생태의 파괴에 따른 자연적 보복이라고 설명하며, 대만의 감염병 전문자는 이미 작년 9월부터 미국의 신종독감에서 변이되어 나타났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혹자는 우한의 연구소 또는 미국 메리랜드 소재 포트 데트릭 군사기지에서 우발적 사고에 의해 발생하였다고 추정한다. 심한 경우에는 이해 관계자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하여 전파시켰다는 시나리오 설까지 나오고 있다. 다른백년은 이미 몇 번에 걸쳐 바이러스의 발생과 창궐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을 소개해오고 있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는 공개적으로 인간의 삶보다 이윤을 우선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 개념이 세계경제의 고질적 질병으로 작용하면서, 세계화를 통하여 중국의 해산물시장과 미국시장 전역으로 COVID-19를 퍼트리는 동력을 제공한다.

황당하게도, 팬데믹이 시간에 따라 지역을 옮겨 가면서, 도날드 트럼프가 이를 ‘’중국바이러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이름을 사용한 것은 사태가 심각해진 3월부터 이미 브랜드가 되어버린 트럼프의 입방정에서 시작된 것으로 Ben Shapiro(미국 시사평론가)와 같은 보수주의자들이 이에 격찬을 보냈다. 그가 트럼프에게 칭찬을 보낸 의도는 분명하다: 백인들의 중국 문화에 대한 배제와 혐오라는 무엇(something)이 우리에게 전염되고 있다는 것이다.

Shapiro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국의 소위 해산물 시장은 뱀과 천산갑 같은 야생동물을 취급하는 곳으로 강장효과가 있다는 미신에 따라 비싼 가격으로 거래가 이루어 진다”. 그의 글에는 한마디로 편견에 가득 찬 것으로 “오, 뱀이네” “이 사람들 참 천박하다” “ 미련하고 미신을 신봉하는군” 등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사실에 대한 조작을 상기해 보자 – 미군이 무고한 시민들은 학살한 것에 대하여 기술적 용어를 들이대며 “불가피한 살상”이라고 작명하고, CIA가 행한 비인간적인 고문에 대해 “강화된 심문방식”이라고 변명하며, 이라크에 대한 불법적 침략행위를 “예방전쟁”이라고 명명했다).

Shapiro가 트럼프를 지지하며 ‘중국바이러스’라는 이름으로 중국정부를 비난한 것은, 본래 조 바이든 등이 합법성에 기반하여 바이러스를 잘못 처리한 중국정부를 비난한 그런 의도가 아니었으며, 14세기 중세의 흑사병에 대한 공포와 증오에 따른 희생양으로 유대인을 비난하였던 방식으로 특정 민족에게 질병의 원인을 돌리려는 것이었다.

이들은 질병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있고 있으며, 트럼프와 동맹들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질문을 전혀 던지고 있지 않다 – 어떤 원인과 방식으로 우한의 해산물시장에서 바이러스가 시작되어 미국의 해변으로 상륙했는가?

우한은 여행의 중심지이자 국제교역이 활달한 곳으로 비즈니스와 여행 방문자들이 몰려들면서 이로 인하여 세계도처에 질병이 퍼지게 된 것이다.

COVID-19는 중국이 아니라 유럽에서 미국으로 전파되었으며, 이탈리아가 유럽 내 전염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이는 중국과 이탈리아 간에 토스카니(이탈리아 주이름)의 유명한 가방과 저렴한 의류 생산 등의 거래를 통하여 급속하게 전파된 것에 기인한다.

유럽과 중국 간의 거래는 아주 깊숙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뉴욕타임즈가 보도하였듯이 중국은 유럽연합의 핵심적인 무역의 파트너이기에 유럽의 책임자들은 중국정부를 비난하는 보고서의 내용은 부드럽게 완화시켰다.

최근의 보고서에 의하면, 서부지역 전염의 주요 근거지는 라스베가스에서 지난 1월에 열렸던 소비자 가전전시회(CES)가 유력하다. 뒤에 확진자로 판명되었던 전시회 참석자는 다음과 같은 트위터를 남겼다 “라스베가스의 공항은 마치 응급진료소 같았다.”

우리가 이해하는 한, 바이러스는 우리들 삶의 도처에 존재하며 이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COVID-19는 생명이 만드는 자연계 현상에 의해 나타난 것이며, 미국에 광범하게 퍼지게 된 탓은 올해에 열렸던 CES 전시회를 통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더불어, Biogen이라는 제약회사가 중역들의 연간 정례회의를 통하여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미국 내의 여러 주와 많은 나라에 전파시킨 주역(superspreader)이 되었다. Biogen사의 정례임원회의는 팬데믹의 초기에 개최되었는데, 이를 연기할 수도 있었는데 그대로 진행하였다.

뉴욕타임즈는 연기될 수 있었던 회의를 진행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4명의 회사 중역진은 Cowen이라는 투자사가 초청한 대규모 의료관련 회의에 참석했었다. 보스톤소재의 메리어트 호텔에서 있었던 회의에는 많은 투자자들이 참석했었는데, 투자자 중 한 사람은 Biogen 중역이 매우 아파 보였다고 전언했다.”

대부분 제약회사들은 이런 “대규모 의료관련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취소하였으나, Biogen 중역진들은 자신들이 새로 개발한 알츠하이머 치료제를 홍보하기 위하여 개별적인 상담을 강행하였다.

델타항공사같이 수익추구의 회사들도 바이러스 전염을 확대시켰으며, 트럼프의 백악관과 여러 주정부들은 고집스럽게 바이러스의 전파를 차단시키기 위한 조처를 지연시키고 있었는데, 이는 자기과신과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인한 것이다 (쿠오모 뉴욕 주지사는 3월 2일 매우 솔직하게 고백했다. “뉴욕인의 오만함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우리는 뉴욕이 지구 상에서 가장 훌륭한 의료체제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자본주의는 소위 “집단면역”이라는 이름 뒤에서 작동하고 있다 – 텍사스 주지사인 Patrick은 동료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경제를 망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방역격리)보다 중요한 일들이 많다.”

이러한 발언은 인간의 삶보다 수익이 우선한다는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도된 가치개념이 세계경제를 전염시키고, 세계화를 통하여 중국의 해산물시장에서 미국의 자유시장으로 확산시킨 동력이다. 이 바이러스의 이름은 수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이며, 동력은 세계화이다. 사망자 숫자가 늘어나면서 비로소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부터 자신을 면역시키려 애를 쓰고 있는데, 이는 오래된 탐욕에서 나타나는 최근의 돌연변이 현상이다.

 

Richard Eskow

사회안전망과 관련하여 건강과 경제정의에 대한 전문적 자문역할을 해오고 있으며, RJ Eskow TV 프로그램을 직접 진행하고 있다.

수, 2020/05/13-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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