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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일본 전범기업 상대 소송서 또 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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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일본 전범기업 상대 소송서 또 패소

admin | 수, 2021/09/08- 20:06

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강제동원 피해자 정아무개씨의 자녀들이 일본제철(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마친 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왼쪽)과 전범진 변호사가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이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또다시 패소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에 대한 하급심 판단이 엇갈리는 가운데 또다시 패소 판결이 나온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5단독 박성인 부장판사는 8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인 정아무개씨의 자녀들이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피해자 유족들은 아버지인 정씨가 1938년 일제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강제동원돼 1940∼1942년 일본제철 가마이시제철소에서 일했다고 주장하며 2019년 4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앞서 지난달 박 부장판사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5명이 미쓰비시마테리아루(옛 미쓰비시광업)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도 민법상 소멸시효(3년)가 지났다며 원고 패소 판결한 바 있다.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 기산점을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이 있던 2012년으로 본 것이다. 반면 2018년 12월 광주고법 민사2부(재판장 최인규)는 “2012년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은 환송 판결로,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즉시 확정되지 않았다. 대법원이 2018년 10월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강제동원 피해자 등의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확정했다”며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로 판결이 확정된 시점을 소멸시효 기산점으로 판단했다.

피해자 유족들을 대리한 전범진 변호사는 1심 선고 뒤 기자들을 만나 “지난달 소멸시효 경과를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 재판부와 같은 재판부인 만큼 비슷한 취지의 판결이라고 예상된다. 광주고법 판례의 경우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 시점을 소멸시효 기산점이라고 판단했고, 파기환송 판결은 잠정적인 판결이어서 항소심에서 충분히 다퉈볼 만하다고 생각된다”며 항소를 시사했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도 “대법원 확정판결 뒤에도 일본 전범기업들이 대화에 응하지 않아 피해자들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다”며 “법원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 확정판결 취지를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윤영 기자 [email protected]

<2021-09-08> 한겨레

☞기사원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일본 전범기업 상대 소송서 또 패소

※관련기사

☞뉴시스: “시효 지났다” 선고한 판사, 日징용소송 또 패소 판결(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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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6)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만세열전1부

☞ (2.19)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4편 “심우섭” 한 시대 형제의 다른 삶, 기회주의자 지식인의 원형

☞ (2.12)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_2편_한일청구권협정의 쟁점은?

☞ (2.05)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3편 “오현주”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를 밀고한 배신자, 반민특위 법정에 선다

☞ (1.29)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2편 “노덕술” 고문으로 유명한 악덕 친일경찰, 대한민국 훈장을 받다

☞ (1.2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1편 “이종형” 의열단 행세하며 독립군 때려잡은 악명 높은 밀정

☞ (1.15)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 우리의 과제는?_1편

☞ (1.08) ‘내역사’ 시즌 3: 프롤로그 – 70년만에 부활하는 반민특위 친일파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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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3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화, 2019/02/26-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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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민족문제연구소 공동발표
친일인명사전 등재된 인물 동상도 7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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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서울지부 관계자가 26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전교조 대회의실에서 ‘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1차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의 초∙중∙고교 100곳 이상이 친일인사가 등재된 인물이 만든 교가를 사용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의 동상을 세운 학교도 7곳이나 됐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서울지부와 민족문제연구소는 26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전교조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3.1운동 100주년, 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1차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는 서울지역 모든 초∙중∙고교를 대상으로 이뤄졌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 교가를 작사 또는 작곡한 학교는 113개교에 달했다. 초등학교가 18개교, 중∙고등학교는 95개교였다. 설립유형으로 보면 사립이 73개교(64.6%)로 40개교인 공립(35.4%)보다 두 배 가까이 많았다. 여기엔 서울대사범대학 부설초, 영훈초, 창덕여중, 숙명여고, 휘문중∙고 등이 포함됐다. 성남중∙고교는 친일인사가 작사∙곡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교가에 친일파였던 이 학교 설립자 원윤수와 김석원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사의 동상 등 기념물이 있는 학교는 7곳으로 파악됐다. 중앙고와 고려대에는 두 학교의 설립자로 알려진 김성수의 동상이 있는데, 김성수는 조선방송협회 평의원 등 친일단체 간부를 역임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고려대 학생들은 꾸준히 김성수 동상 철거를 요구해왔다. 휘문고에는 대표적 친일 자본가로 알려진 민영휘의 동상이, 상명대에는 친일단체 간부로 활동한 배상명의 동상과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전교조 관계자는 “서울시교육청과 서울시가 관련 시민사회단체와 공동 TF팀을 꾸려 교육계 친일잔재에 대한 전수조사와 청산작업을 벌여야 한다”고 말했다.

조아름 기자 [email protected]

<2019-02-26> 한국일보 

☞기사원문: “서울 초중고 100여곳 친일파가 만든 교가 사용” 

※관련기사 

☞연합뉴스: “서울 학교 곳곳에 친일잔재…일왕 찬양 의혹 교가도” 

☞뉴시스: “서울 초중고 113곳, 친일파 작사·작곡 교가 사용” 

☞KBS: “서울 초·중·고교 113곳 교가, 친일파가 작사·작곡”

☞노컷뉴스: 학교에 ‘친일파’ 동상·기념관·교가…서울에만 100곳 넘어 

☞뉴스1: “서울 초·중·고 100여곳 친일인사 작사·작곡 교가 써”

화, 2019/02/26-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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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전국 곳곳에 3·1운동과 항일투쟁을 기리는 기념비들이 세워져 있는데요.

이 기념비마저 일제식으로 세워진 곳이 많습니다.

친일 잔재가 아직도 우리 주변에 많다는 건데 서둘러 바로 잡아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보도에 유승용 기자입니다.

[리포트]

3·1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1970년대 세워진 기념비입니다.

당시 투쟁을 소개하고 이끌었던 인사들의 이름도 새겨 넣었습니다.

그런데 비석의 사각뿔 모양이 일본 황실의 무력을 상징하던 일제의 충혼비와 같습니다.

바로 옆에 세워진 독립운동 인사 숭모비도 마찬가집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세워진 기미독립선언 기념비도 같은 모양을 했습니다.

일제가 ‘황국신민’이 되기를 강요하며 전국 곳곳에 세웠던 비석 모양 그대로 독립운동으로 내용만 바꿔 다시 만든 겁니다.

이처럼 일제식으로 세워진 독립운동 기념비는 보훈처에 등록된 현충시설에만 10여 개,

미등록 시설의 기념비와 군대와 경찰 충혼비까지 포함하면 일제식 기념비는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김순흥/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 : “기단은 넓고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고 위에는 뿔 모양이 이런게 일본의 충혼비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모르고 이런 걸 세웠단다 하는 안내판을 세울 필요는 있죠.”]

독립운동 기념비에까지 스며 있는 일제의 잔재.

선조들의 항일 운동 의미를 올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라도 정확한 실태 조사를 통해 바로잡는 일이 시급합니다.

KBS 뉴스 유승용입니다. 

<2019-02-26> KBS 

☞기사원문: 독립운동 기념비마저 ‘일본식’…“서둘러 바로잡아야”

화, 2019/02/26-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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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연합뉴스) 노승혁 기자 = 경기도 고양시는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김동진 작곡가가 지은 ‘고양시의 노래’를 사용 중단한다고 26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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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시청
[연합뉴스 자료사진]

김동진은 194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일제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노래를 작곡하는 등 친일행위를 한 인물로, 친일인명사전에 공식 등재돼 있다.

그는 고양시의 노래 외에도 대한민국 군가 등 다수의 곡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전국 초중고 교가, 시가 등 많은 관공서의 공식 노래에 김동진을 비롯한 친일 음악인의 손길이 미쳐 있다.

고양시는 ‘고양시의 노래’를 시가(市歌)로써 사용하는 것을 중단하고, 시민 공론화 작업을 거쳐 새로운 시가를 보급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시는 올해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시민이 잘 알지 못하지만 도시 곳곳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 찾기’에 나선다.

일본군 군사기지로 추정되는 고양 시내 육군 A 사단 탄약고, 조선인을 강제 동원해 건설한 덕은동 쌍굴터널 조사 등이다.

이재준 시장은 “역사의 청산은 정치적 논쟁이 아닌 성장의 토양을 다지는 작업”이라며 “점차 잊혀져 가는 일제의 흔적은 역사의 아픔으로 생생하게 보존하고, 항일운동의 정신은 3·1운동 100주년을 기점으로 남북이 하나 되는 평화의 정신으로 승화해 그 불씨를 되살리겠다”고 밝혔다.

[email protected]

<2019-02-26> 연합뉴스 

☞기사원문: 고양시, 친일파 김동진 작곡한 ‘고양시의 노래’ 사용중단

※관련기사 

☞뉴시스: 이재준 고양시장 “친일파가 작곡한 고양시歌 사용 중단”

화, 2019/02/2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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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7월 청주상고 교사등 100여명 집단학살 매장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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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지난 2009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청주청원 합동위령제가 처음으로 열렸다.

충북도는 올해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사업으로 보은 내북면 아곡리를 선정했다. 아곡리는 2006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선정한 도내 우선 발굴 대상지 6곳에 포함됐으며 충북도와 도내 유족회 간담회 때 최종 대상지로 선정됐다.

도내 민간인 학살 매장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87곳이며 2007~2008년 청주 분터골과 지경골 2곳에 대한 유해 발굴이 이뤄졌다. 이후 MB정부 출범이후 근거법 기간 만료돼 발굴사업이 중단됐다.

도는 올해 자체 사업으로 5000만원의 예산을 확보하고 보조사업자 공고와 심의를 거쳐 ㈔민족문제연구소를 사업자로 선정했다. 아곡리에서 희생된 민간인은 청주지역에서 소집된 150여 명으로 추정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3월초 유해 발굴작업을 시작해 수습된 유해는 보존 처리를 거쳐 세종시 ‘추모의 집’에 안치할 예정이다. 충북도는 국회 계류 중인 과거사 관련법(7건) 제·개정이 이뤄지면 국가사업과 연계해 추진할 방침이다.

아곡리 민간인 희생자 매장지는 이미 2014년 6월 청주·청원 보도연맹유족회, 충북역사문화연대가 일부 발굴작업을 진행했었다. 정부와 지자체가 외면하는 가운데 민간단체가 장비를 동원해 20여구의 유해를 수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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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청주청원유족회의 보은 내북면 아곡리 보도연맹 양민학살 매장지 자체 발굴작업 모습.

당시 발굴 현장에서 취재진을 만난 주민 신덕호씨는“그때 (1950년 7월10일께) 군인·경찰이 논밭에서 일하던 주민들을 전부 집에 들어가게 하고 산골짜기 쪽에서 총소리가 나구 비명이 들렸다. 트럭이 서너대 왔으니까 한 100명쯤 되는 것 같다. 총살 한 뒤에 마을 사람들 불러놓구 ‘빨갱이 잡아놨으니 장례 치르라’고 해서 우리가 가까운 야산 3곳에 시신을 매장했다”고 증언했다.

보은 아곡리 민간인 학살 피해 사실은 지난 1994년 <충청리뷰>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취재진을 만난 목격 주민 황성철씨는 “7월7일 오전 10시께 아곡리에 트럭 5~6대가 들어와 여기서 내린 사람들을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총살시켰다. 마을주민들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의 지시를 받고 구덩이에 시신을 묻었다. 여자들도 몇명 보였다”고 진술했다.

또한 아곡리에서 희생된 보도연맹원 가운데 청주 가족들이 유일하게 시신을 수습한 경우도 확인됐다. 당시 청주상고 교사였던 고 강해규씨(당시 30세)는 청주경찰서 무덕관(강당)으로 소집된 뒤 몇일후 아곡리까지 끌려가 죽임을 당한 것. 강 교사의 경우 가족들이 뒤늦게 시신을 수습하고 현장 인근 산자락에 위령비를 세운 것이 확인됐다.

94년 취재진과 연락이 닿은 미망인 이숙용씨(당시 72세)의 기억은 생생했다. “전쟁나고 얼마 안 지났을 땐데. 전날 밤에 학교에 숙직하러 간 애들 아빠가 다음날 낮이 됐는데도 안오길래 걱정이 됐어요. 근데 친구분이 부리나케 찾아와서 경찰에 붙잡혀갔다고 그러더라구요. 얼른 경찰서로 가보라고 하길래 음식 준비할 새도없이 빵을 사가지고 달려갔어요”

이씨가 청주경찰서 앞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군용트럭 4∼5대를 둘러싸고 가족을 찾느라 아우성이었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트럭안에는 젊은 나이의 보도연맹원들이 힘없이 앉아있었다. 남쪽으로 먼저 피난시켜 준다는 헌병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은 가족들은 이들에게 음식, 옷등이 담긴 보퉁이를 건네주며 안부를 빌었다. “가까스로 남편을 찾았는데 왜 이제서야 오느냐구 물었어요. 미안한 마음에 빵하고 쓰고있던 우산을 건네줬더니 ‘당신 비맞으면 안된다’면서 그냥 비를 맞구 떠났는데…”이씨가 다시 남편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4∼5일 뒤. 학살 소문을 들은 보은 친정집에서 전갈을 해주는 바람에 용케 아곡리까지 찾아나선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이승과 저승의 사람으로 재회했고 어수선한 난리통에 경황도 없이 끔찍한 그 자리에 묘를 쓰게 된 것.

권혁상 기자 [email protected]

<2019-02-28> 충북인뉴스 

☞기사원문: 69년만에 전쟁 원혼 풀리려나? 보은 아곡리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관련기사 

☞뉴시스: 충북도,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보은 내북면 아곡리 

☞아시아뉴스통신: 충북도,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추진 

☞중부매일: 충북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3월부터 유해발굴 추진

목, 2019/02/28-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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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 묻고, 임헌영 답하다 

여성독립운동가 조명 영화 많다
‘암살’ 모델 남자현 열사 외에도
기생들 만세 동참·독립자금 대
독립운동가 가족 희생도 엄청 나
도운 여성들 훈장 주자는 말도

친일-친미 독재세력 이어졌는데?
지배세력 오랜 선거로 단련
개혁세력 더 치밀한 논리로 맞서야
혁명은 결국 국민의식 변화
극우파 5%로 줄이는 게 혁명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다. 문재인 정부는 3·1운동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2019년을 한반도 평화의 원년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밝혔고, 때마침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평화의 마중물이 될 ‘제2차 북미회담’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고 있다. 3·1 독립선언서에 담겼던 ‘세계평화의 정신’이 100년의 시차를 두고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 정착이라는 결실로 맺어질 수 있을지 온 겨레와 세계의 이목이 쏠린다.

<한겨레>는 3·1운동 100주년의 현재적 의미와 아직 이루지 못한 친일청산의 중요성 등을 짚어보는 다양한 기획을 연재 중이다. 그 중 하나로 최근 각종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배우 정우성과 친일인명사전 편찬 등의 활동을 통해 역사청산 문제에 앞장서 온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의 대담을 마련했다. 이번 대담은 ‘정우성이 묻고 임헌영이 답하다’라는 주제로 27일 오후 용산구 청파동에 위치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진행됐다. 이날은 마침 1991년 창립한 민족문제연구소가 28살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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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우성-임헌영 대담

3·1운동과 난민인권운동 닮았나?
우리도 30여년 나라밖 떠돌아
이웃나라 도움으로 독립운동
나라 잃은 난민 돕는 건 당연

정우성(이하 정) 지난해 <한겨레>와 ‘난민 문제’ 관련한 인터뷰를 하다 평소 관심이 많았던 민족문제연구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고, 연말을 맞아 존경하던 임헌영 소장님을 찾아뵈었다. 그 자리에서 이런 대담을 제안받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응했는데, 막상 이 자리에 오니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앞선다.

임헌영(이하 임) 젊은 독자들에게 3·1운동 100주년 이야기를 전하는 편안한 자리다. 오히려 저를 만나고 (정 배우의) 인기가 떨어질까 걱정이다. (웃음)

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는 한반도 역사의 중요한 날에 소장님과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갖게 돼 기쁘다. 벌써 100주년이 됐는데, 3·1운동의 현재적 의미에 대해 소장님께서 한 번 짚어주시며 시작하면 좋겠다.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100년을 기다렸을 것 같다. 지난 100년을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는 오히려 3·1정신을 매장하고 지우는 데 시간을 허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복 이후 분단과 독재정권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면 “3·1정신은 잊고 돈벌이 잘하고, 잘 먹고 잘살자”는 의식에 매몰돼 있었다. 100년 만에 제대로 3·1정신을 기념하는 자리니 그분들도 이제서야 제삿밥 먹어도 되겠다 싶으실 터다. 모든 언론과 정부 기관이 총동원돼 각종 행사를 기획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3·1정신이 무엇인지 의미를 되살리는 데 신경을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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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오른쪽)과 배우 정우성(왼쪽)이 27일 오후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3·1운동 100주년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백소아 기자 [email protected]

‘삼쩜일절’이라 읽는 세대에게?
독립운동한 분들 존경하라
친일사전 오른 이는 0.0176%
교장도 면장도 친일이냐 반발은
서민이 재벌 걱정하는 격

민족정신을 다시 한 번 다져야 하는 시점이라는 말씀으로 들리기도 하고, 그동안 기득권 세력들이 왜곡하고 폄훼한 독립 선열들에 대한 가치를 되새김질해야 한다는 뜻으로도 들린다. 불과 1년 반 전에 ‘광화문 혁명’도 일어났고 정부가 바뀌었다. 3·1운동의 정신과 촛불 혁명을 연관 지어서 그 의미를 찾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소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3·1만세운동은 겉으로는 ‘고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했지만, “왕(고종) 만세”를 외친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외친 것은 “조선독립 만세”였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김으로써 한 왕조가 끝이 났고 미래와 희망이 사라진 시대였다. 하지만 국민 절대 다수는 이념, 신분, 학벌, 빈부의 차이를 넘어서 한마음으로 만세를 외치며 우리가 살아 있음을 선포했다. 광화문 촛불 혁명 때도 똑같이 모든 차이를 넘어서 모두가 하나였다. 당시 집회에서 만날 거라고 생각못했던 지인들을 만난 경우가 많지 않나. 이런 건 3·1운동 이후 거의 처음이 아닐까. 100년 만에 민중이 다 함께 촛불을 들었던 것이다.

3·1운동 당시 청년들이 많이 나섰다고 들었다. 당시 대다수 민중은 태극기를 본 적도 없을 정도였다던데. 광화문 때도 청소년들이 많이 거리로 나왔다. 당시나 지금이나 청년들이 나라를 이끌 주인공인데, 요즘 청년들은 먹고 사는 문제 등 고민이 더 많은 것 같다. 지금 청년들에게 3·1운동에 대해 가져야 할 가치관에 대한 당부 말씀을 해주신다면?

청년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항상 역사의 주역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신문화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청년들에게 “어른들 말씀 잘 듣고 가만히 있어라”라고 교육했다. 하지만 개화기를 겪고, 국운이 기울면서 청년들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됐다. 식민지 시대 독립운동에 앞장선 것은 결국 청년들이었다. 우리는 3·1만세운동을 떠올리면 항시 ‘민족대표 33인’을 말하는데, 그분들도 아마 청년을 비롯해 일반 민중들이 그렇게까지 들고 일어날 줄 몰랐을 것이다. 독립선언서가 굉장히 문학적이긴 하지만, 어렵기도 하다. 당시 그걸 읽고 완벽히 독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2%도 안 됐을 거다. 지금 대학 나온 사람들도 잘 못 읽을 정도인데. 독립선언서에 감화된 것이 아니라 생활에 어려움을 느끼고 나라 잃은 설움을 느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일어선 것이다. 어느 시대나 아직 타락하지 않은 청년들이 더 올곧은 역사의식을 가진 셈이다.

말씀하신 것처럼 당시 3·1운동에는 각종 직업을 가진 민중들이 다양하게 참여했고, 각자의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최근 출간된 <만세열전>(조한성 지음)이라는 책에서는 “3·1운동은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 100년 전 민초들이 이룩한 촛불”이라고 정의했다. 

제가 감동을 한 것은 당시 흔히 기생이라 불렸던 여성들이 만세운동에 많이 동참했다는 것이다. 그 여성들은 유흥업소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상류층의 부정부패를 더 많이 보고 알았다. 그리고 그분들은 당시 ‘일정한 수입이 있는 여성 직업군’이기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그 여성분들로부터 상당히 많은 독립운동 자금이 전해졌다.

얼마 전 본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에도 유관순 열사와 함께 투옥된 기생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가 나온다. 사회가 천시했어도 그분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했다. 소장님께서 여성에 관해 말씀을 해주셨으니, 자연스럽게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해보겠다. 영화 <암살>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환기됐고, <항거>를 통해 유관순 열사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최근 정부가 유관순 열사의 서훈이 3등급에서 1등급으로 상향 조정하기도 했다.

영화의 영향도 있었고, 그후 연구도 많이 이뤄져서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암살>의 실제 모델인 남자현 열사가 대표적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그간 선양사업이 남성 위주로 추진되면서 관심에서 빗겨나 있던 여성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하고 기념하자는 취지의 행사나 흉상 건립 등의 기념사업도 이뤄지고 있다. 올바른 현상이다.(2018년 12월 기준으로 국가보훈처에서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 수를 보면, 남성은 1만5180명, 여성은 357명이다.)

반민특위와 친일청산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고 임종국 선생의 책을 읽다 보니, 가족의 희생이 엄청났다. 우리는 독립운동가 개인만을 기억하지만, 그 노력 뒤에는 믿고 옆에서 지지해 준 가족들의 희생이 있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얼마 전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이 “독립운동할 수 있게 도운 여성들의 공적을 인정해서 따로 훈장을 줘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가족과 그 자녀들이 경제적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가부장제 사회였어도 가족들의 지지와 도움이 없이 독립운동은 못 했을 것이다.

사실 친일청산이 안 되면서 그 세력이 독립운동가 가족들도 많이 핍박했다고 들었다. 그 세력이 결국 친독재 세력으로 이어져서 우리나라의 정치·사회지형에도 엄청난 악영향을 미쳤다. 소장님만 해도 박정희 정권 시절 문인간첩단조작 사건과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에 연루돼 두차례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되시지 않았나. 이런 잘못이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도 이어져 블랙리스트라는 이름 아래 문화예술가들도 많은 핍박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지난 100년은 3·1정신을 지우고 역사적으로 매장시키는 데 소진된 시기였다. 분단 이후 친일세력이 그대로 친미세력으로, 이후로 독재 세력으로 이어지면서 대대로 지배계급으로 자리했다. 그들은 대대로 선거운동에 단련된 사람들이다. 가끔 “일제식민시대 때 우리 집안은 징역 간 사람도 없고, 다친 사람도 없고, 일본군 강제위안부 끌려간 사람도 없다”고 자랑삼아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생각해보면 그런 집안은 멀쩡한 집안이 아니다. 민주정권이 들어서고도 늘 수세에 몰리는 게 가슴이 아프다. 민주세력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비유하자면, 레슬링장에 레슬링 선수들이 버티고 섰는데, 거기에 무용수들을 집어넣고 싸우라고 해봐라. 싸움이 안 되는 거다. 과거로부터 지배세력으로 자리를 굳히고 선거에 단련된 세력들을 갈아치우려면, 개혁세력이 얼마나 더 논리를 세우고 독립운동보다 더 치열한 각성을 해야 하는지 깨달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가 중요한 시기가 아닐까 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고 “이젠 다 됐다”는 착각 속에 다시 이명박·박근혜 정권으로 돌아가면서 국민들도 시대적 학습효과를 얻은 것 같다. 혁명이 끝나면 혁명이 완성됐다고 생각하는데, 혁명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 같다.

정권이 바뀐 것이 역사의 변수가 되기는 하지만, 저는 혁명이라는 것은 결국은 국민의 의식 변화라고 생각한다. 국민들이 세계 시민으로서 가지는 의식 말이다. 인권의 중요성, 남녀평등의 중요성, 세계평화의 중요성, 환경의 중요성…. 이런 것들을 중심에 놓고 관심을 가지는, 그런 국민 의식의 전환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이다. 우리 사회엔 일부 극우파들이 있다. 극우파가 20%를 넘어서면 썩은 사회다. 한 사회에는 별종들이 많기 때문에 한 5% 정도 있는 건 봐 줘야 한다. 그건 다양성이다.(웃음) 그런데 20%가 넘으면 불행한 사회다. 그 세력을 5% 이하로 줄이는 것이 결국 혁명이라고 본다. 세월호 가족들을 보면서 “참 안 됐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보편적인 인간이고 맹자가 말하는 ‘사단칠정’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선천적이며 도덕적 능력과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인데,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극우로 불러주는 것도 아깝다.

소장님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저는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우리 국민은 짧은 시간 안에 변화의 주체가 됐다. 친일·친독재 세력들이 물질숭배와 성장 우선 논리를 설파하고 젊은 세대의 역사교육을 단절시켰지만, 결국 우리 국민은 자연스럽게 미래를 올바르게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왔다. 젊은 세대들도 좀 더 현명한 길을 찾지 않을까, 저는 긍정적으로 본다.

동감한다. 우리나라는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를 하는 미국보다, 메이지유신 이후 제대로 된 정권교체가 거의 없었던 일본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정치의식을 갖고 있다. 이승만이 불과 12년, 박정희가 그렇게 독재를 했어도 18년밖에 정권 유지를 못 했다. 전두환은 간신히 임기 채웠다. 87년 6월 항쟁, 그 이후로는 5년 단임이다.

정우성 배우 주연한 ‘증인’ 봤다
“넌 자폐아, 네 말 못 믿어” 대사
“넌 빨갱이” 독재자 말과 겹쳐
차별적 색 입혀 말 못하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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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헌영 민족문제 연구소 소장(왼쪽)과 배우 정우성(오른쪽)이 27일 오후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진행한 ‘3·1운동 100주년 관련 대담’에 앞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백소아 기자 [email protected]

결국 1900년대 조선 역시 제국주의의 희생양이었다. 저는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 활동을 하면서 난민 사태가 벌어지는 많은 국가를 가보면 그들은 역사적으로 제국주의의 희생양이었고, 그 후유증을 아직도 앓고 있다. 난민 이야기를 할 때 우리 독립운동가 이야기도 많이 하는데, 많은 이들에게 와닿지 않는 것같기도 하다. 소장님께서는 3·1운동과 난민 인권 운동의 연결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 모두가 당시 난민이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국외에서 활동하면서 중국 사람, 러시아 사람, 심지어 일본 사람들 도움도 많이 받았다. 30여년을 나라 밖에서 떠돌며 고생한 우리 선조들을 도와준 다른 나라 사람들을 생각하면 우리도 지금 난민을 돕는 것은 당연하고 정당하다.

최근에는 조선어사전 편찬 과정을 다룬 <말모이>나 당시 일본인을 이기고 자전차대회에서 우승한 <자전차왕 엄복동> 등 총이나 칼이 아닌 다른 방식의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도 많이 나오고 있다. 소장님께서 보시기에 앞으로 독립운동에 관련한 작품을 만든다고 할 때, 어떤 점에 집중해야 할지 말씀해달라.

요즘은 영화·드라마가 끼치는 영향이 문학의 영향력을 넘어선 지 오래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도 한 회도 안 빼놓고 다 봤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젊은이들이 역사청산이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는 건 훌륭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정신을 고취하는 음악인은 아직 안 나오는 듯하다. 이탈리아 베르디의 오페라가 가장 민족의식이 강한 음악으로 평가받는데, 국민의 역사적 정서를 일깨워주고 민족의식을 일깨워주는 음악을 하는 시대를 앞서가는 가수도 좀 나오면 좋겠다. 내가 문학평론가이기도 해서 글쓰기 강의를 제법 하는데, 항상 모든 예술은 젊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젊은 감각으로 소통하고 역사를 바라보는 젊은 시각을 제시할 수 있는 예술작품이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젊어진다는 것은 시대의 핵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 정 배우가 주연한 <증인>을 봤다. 자폐를 가진 아이가 주인공이더라. 영화를 보면서 “넌 자폐아잖아. 네 말은 믿을 수 없어”라고 하는 장면에서 독재자들이 “너 빨갱이잖아. 네 말을 믿을 수 없어”라고 했던 것이 겹쳐 읽히더라. 우리 정치가 그랬다. 진실과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어떤 차별적인 색을 입혀 말하지 못하게 하지 않았나.

소장님께서 민족문제연구소에 몸담고 계시기 때문에 자폐아 지우가 놓인 상황을 일제시대, 독재시대에 바른말을 하는 지식인들에게 말을 못 하게 했던 핍박으로 해석하신 듯하다. 감사하다.

이제 교육에 관한 문제로 옮겨가서 이야기를 해보겠다. 요즘 어린 학생 중에 ‘3·1절’을 ‘삼쩜일절’이라고 읽는 친구도 있다고 한다. 역사교육이 부족하다고 할 수도 있고, 밀레니얼 세대라 불리는 새 세대의 눈높이에 맞춘 소통방식이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친일을 바라보는 시각도 “당시 친일은 어쩔 수 없던 일이다”라는 보수의 논리도 판을 친다. 어린 세대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교류해야 할까.

영화·드라마 통한 역사청산은?
‘미스터 션샤인’ 한회도 안빼고 봐
베르디같은 음악가도 나왔으면
모든 예술은 젊어야 한다젊다는 건
시대의 핵을 본다는 것

젊은 세대들에게 ‘애국’에 대한 의무를 말하고 싶지는 않다. 역사를 공부하고, 민족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바로 “너희들이 잘살기 위해서”다. 남의 나라에 업신여김받거나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짓밟히지 말고 행복하게 평화롭게 살려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거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모든 사람이 한 건 아니다. 나머지는 독립운동을 한 사람을 존경할 줄 알면 된다. ‘바보처럼 왜 그렇게 살아’라고 하지 않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면 된다. 친일인명사전을 만들 때 ‘우리 할아버지가 당시 면장을 했고, 교장을 했는데, 친일이냐’고 반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지 않다.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사는 4389명이다. 당시 조선 인구가 대략 2500만 정도였으니 0.0176%에 불과하다.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자의에 의해 친일을 했을 때”에 오르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사를 걱정하는 것은 노숙자나 서민이 재벌 걱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마지막 질문드리겠다. 28일 2차 북미정상회담이 한반도 역사에서 어떤 의미가 될지, 또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소장님 의견을 듣고 싶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큰 틀에서 보면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정착을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한국전쟁의 종식’이라는 ‘종전선언’, 더 나아가 ‘부전(不戰)선언’에 방향성을 두고 노력하면 된다. 기차를 타고 (평양, 신의주, 만주, 몽골, 러시아를 지나) 런던까지 갈 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 회담 결과가 어떻든 앞으로도 최대한 남북화해의 모드를 이어가야 하고, 무엇보다 미국이나 다른 주변 세력이 아닌 우리 민족의 이익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처해 나갔으면 좋겠다.

정리/유선희 기자 [email protected]

<2019-03-01> 한겨레 

☞기사원문: [영상] ‘삼쩜일절’이라 읽는 세대에게…정우성이 묻고, 임헌영이 답하다

금, 2019/03/0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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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역 광장서 강제징용노동자상 합동 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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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일철주금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1일 서울 용산역에서 열린 강제징용노동자상 합동 참배행사에서 신일철주금 강제징용 피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와 이희자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 추진협의회 공동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2019.3.1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제가 내년이면 100살이 됩니다. 3·1절 날 모여서 이렇게 행사를 해주시니 감사하고 눈물이 납니다.”

신일철주금 강제징용 피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는 1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강제징용노동자상 합동 참배행사’에서 이같이 말했다.

힘겹게 지팡이를 짚고 무대에 선 이춘식 할아버지는 감동에 북받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이 주최한 이번 행사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춘식 할아버지에 이어 마이크를 잡은 이희자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 추진협의회 공동대표는 “이춘식 어르신이 하시고 싶은 말씀이 많은데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고 하신다”며 “함께 투쟁하고 재판에 참여한 동료들이 다 세상을 떠나서 마음이 아프다고 하신다”고 할아버지의 말씀을 대신 전했다.

이 대표는 “지난해 10월 30일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난 날을 잊을 수 없다”며 “많은 분의 도움으로 승소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다른 나라 사법부를 존중하지 않는 일본은 정말 파렴치하다”며 즉각적인 배상 이행을 촉구했다.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은 추도사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오늘 억울하게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며 “비극적인 역사를 되돌아보고 억울한 희생에 대해 일본 정부의 사죄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눈물이 마르기 전에, 분노가 힘을 잃기 전에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와 통일로 나갈 때 우리 역사는 바로 세워진다”고 강조했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70년이 넘도록 미뤄진 미완의 해방을 온전한 해방으로 완성해야 한다”며 “일본의 죄악을 완전히 청산하고 군국주의 부활 책동을 분쇄하자”고 강조했다.

그는 또 “과거 일본이 우리 민족에 행한 인권 유린에 대한 사죄와 배상 없이 새로운 관계 정립도 불가능하다”며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email protected]

<2019-03-01> 연합뉴스 

☞기사원문: 아흔아홉 할아버지의 눈물…”일본 강제징용 사죄·배상해야”

금, 2019/03/0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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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지금 제 뒤로 보이는 건물, 일제 식민통치 기구였던 조선총독붑니다. 실제 건물이 있던 경복궁 바로 앞에 KBS가 당시 모습을 증강현실로 재현했습니다.

일본의 의도는 명확합니다. 조선과 조선 왕실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에 총독부를 세워 민족적 자존심을 짓밟고, 일제의 지배력을 보이고자 한 것입니다.

이제 KBS가 단독 보도할 역사적 사료도 바로 이곳 총독부에 만든 것입니다.

조선총독부가 만든 이른바 ‘3.1운동 계보도’를 KBS 탐사보도부가 일본 현지에서 최초 발굴했습니다.

3.1운동을 이끈 주도자급 인물 한 명, 한 명 140명을 계보 형태로 조선총독부가 그려놓은 자료입니다. 여기엔 우리가 몰랐던 독립운동가도 등장합니다.

이 자료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또 잊힌 독립운동가는 누구인지 집중 보도합니다.

탐사보도부 이재석, 유원중, 이세중 세 기자가 차례로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일본 외무성이 생산한 문서 자료가 한데 모여 있는 외교사료관.

3.1운동 이후 경계심이 한층 높아진 일제가 밀정을 활용해 촘촘한 감시망을 마련한 흔적이 공문서로 포착됩니다.

[김광만/역사저술가 : “일본 관헌이 다수의 밀정을 사용해서 선교사의 가정에에 출입하는 다수의 조선인을, 앙래하는 사람들의 동향을 보고했다는 내용입니다 (1919년 4월)”]

취재진은 일본 공공기관뿐 아니라 분야별로 전문화된 고서점에서도 3.1운동과 밀정 관련 자료를 수개월 동안 추적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도쿄의 한 고서점에서 이른바 ‘3.1운동 계보도’를 찾아냈습니다.

3.1운동을 주도한 사람들 140명의 이름이 빼곡하게 계보 형태로 그려져 있습니다.

[김광만/역사저술가/공동 발굴 : “(말하자면 원본 계보도가 들어가 있었던 거죠?) 그렇죠. 수십 장 속에 들어 있었던 겁니다. 그중에 이제 소요(3·1운동)에 관계된 것만 빼낸 거죠.”]

천도교를 이끌었던 손병희 선생을 맨 위로 놓고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 측 인사들이 아래로 배치됩니다.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천도교 조직망이 각 지역 책임자들 이름으로 이어집니다.

기독교계를 이끈 이승훈 선생을 시작으로 각급 주도자들을 거쳐, 6개 학교 학생운동 대표자들로 이어집니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 모인 청년들을 이끈 사람들입니다.

특히 정주조, 평양조, 의주조 등 북한 지역 목사들을 주축으로 3.1운동의 동력이 북쪽으로 전해집니다.

이번엔 불교 한용운 선생.

“한용운의 명을 받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자들”이라는 설명과 함께 당시 배포 책임자였던 중앙학림생도의 이름이 나열됩니다.

[김승태/한국 기독교 역사연구소장 : “(일제가) 어떻게 3·1운동을 보고 어떻게 사건을 구성하려고 했나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굉장히 중요한 자료입니다.”]

백 명이 넘는 3.1 운동 주도자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계보도가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전문가들과 함께 계보도의 구체적 내용을 검증하고 일본 외무성 자료를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이 계보도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22일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걸로 확인됐습니다.

[최우석/독립기념관 연구원 : “경찰에서 조사가 일차적으로 끝난 다음에 그것을 총정리해서 만든 문건 속에 이 표도 같이 제작해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1운동이 조직화된 독립운동이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해주는 한편, 특히 기존 사료에서 찾기 힘든 ‘3.1운동의 숨은 주역’들이 적잖이 포함됐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박찬승/한양대 사학과 교수 : “3.1운동을 기획하고 실행한 사람들 가운데 묻혀 있는 분들이 많죠. 각 인물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확인할 때 도움이 되는 자료입니다.”]

KBS는 3.1운동 계보도를 서울역사박물관에 제공해 오늘(1일)부터 시민들에게 선보이고 있습니다.

계보도를 통해 새롭게 등장한 ‘3.1운동의 주역’들을 이어서 유원중 기자가 보도합니다.

▼ 우리 역사에서 잊힌 ‘3·1운동 주역’ 더 있었다!

들불처럼 번진 3.1 만세 운동으로 당시 조선총독부는 크게 당황합니다.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고문과 조사가 이어졌고, 경찰과 밀정들의 정보를 더해 3.1운동 전모 파악에 나섰는데요.

이렇게 해서 총독부가 20여 일 만에 만든 게 바로 이번 계보도입니다.

계보도에는 기존에 알려진 3.1운동 주역들보다 더 많은 140명이 등장합니다.

이미 훈장을 받았거나 아니면 친일파로 변절해 서훈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 정부가 역사적 평가를 마친 사람들을 제외하고 34명의 새로운 인물이 드러났습니다.

저희는 이 34명이 누구냐고 보훈처에 질의해봤습니다.

그러자 9명은 현재 독립유공자 심사가 진행 중이고 10명은 친일 또는 월북 등 이상 행적을 보인 사람들로 파악하고 있다는 답변이 왔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15명은 수수께끼로 남습니다.

일제가 3.1운동의 주역이라고 파악했지만 우리 정부 기록에는 없는 이 15명은 누굴까요?

백 년 전의 기록, 탐사K는 지난 2달에 걸쳐 이들의 흔적을 추적했고 일부이지만 의미 있는 사실을 찾아냈습니다.

이 얘기는 이세중 기자가 전하겠습니다.

▼ ‘3·1운동 계보도’ 단독 발굴…‘숨은 주역’ 있었다

전문학교 학생대표자 중 한 명으로 기록된 주익 선생,

보성전문학교, 현 고려대학교에서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자료보존고 깊숙한 곳에 보관된 졸업앨범,

[서명일/고려대 박물관 학예사 : “(지금 이게 전부 졸업 앨범인 건가요?) 네. 1917년부터 2018년까지의 100년간의 앨범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빛바랜 앨범 속 주익 선생의 사진,

생년월일과 본관 등 구체적인 정보를 찾아냈습니다.

[“본관이 신안이고, 그러니까 신안 주씨라는 뜻이죠. 그리고 학과가 법과이고…”]

후손은 어디에 있을까.

주익 선생의 본관인 신안 주씨 종친회를 찾았습니다.

주익이라는 이름 옆에 적힌 그의 활약상,

[주범석/신안주 씨 종친회 사무국장 : “항일 투사라고 나오네요. 그리고 신간회라고 나오고, 그리고 보전이니까 보성전문을 졸업했다고 나오네요.”]

족보에 나오는 주익 선생의 아들과 손자, 증손주들.

이를 토대로 수소문한 끝에 부산에 후손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남쪽으로 피란 오면서 호적 하나 챙기지 못한 가족들,

취재진이 가져간 사진으로 난생처음 할아버지를 뵈었습니다.

[주진령/’주익 선생’ 증손녀 : “진짜 사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너무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얘기로만 들었지.”]

주익 선생이 학생대표로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고 신간회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간 이야기는 취재진을 통해 처음 들었습니다.

[주격림/’주익 선생’ 손자 : “독립운동하시고, 함경도 대표로 참가하셨다, 그 정도만 알지. 그 이상은 나도 모르지.”]

후손들은 취재진이 건넨 자료를 토대로 서훈을 신청해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경기 이천 지역에서 3.1운동을 주도한 이강우 목사, 계보도가 가리킨 이천중앙교회부터 찾았습니다.

전도사로 몸담았다는 기록만 남아있을 뿐, 당시 문서는 모두 사라진 상태.

[김응호/이천중앙교회 원로 장로 : “그분이 이제 3·1 운동에 관련해서 뭐 활동을 했다고 그러는데 분명한 기록이 없어요.”]

지역 원로 장로로부터 이 목사의 후손을 찾아낼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30년 전 이강우 목사의 기록을 찾고 있던 가족으로부터 호적을 건네받은 적이 있다는 겁니다.

[홍석창/원로 목사 : “가지고 있는 자료를 좀 드리면 자기 아버지가 더 널리 선전될 수 있으리라 기대를 가지고 내 집을 찾아온 거지.”]

호적에 나온 정보를 토대로 막내딸 이경애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흔을 넘긴 나이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지만 그리움은 여전합니다.

[이경애/’이강우 목사’ 딸 : “아버지 흔적을 찾은 거 같은 게 기쁘더라고. 아버지하고도 일찍 헤어졌어요, 우리가… 저기 독립운동 한다고 맨날 돌아다니고…”]

이외에도 탐사K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조사한 결과 15명 가운데 일부의 흔적을 찾아냈습니다.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대표인 김문진 선생은 대구지방법원의 조사를 받았고, 함경도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다 숨진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충남 홍성에서 3.1운동을 이끈 김병제 목사는 목회활동을 이어가다 광복 직후 숨졌고, 중앙학교 생도였던 장기욱 선생은 신간회와 조선 공산당에 참여해 항일운동을 이어갔습니다.

3.1운동 밀서를 평북 의주 책임자에게 전달한 송문정 목사는 상해 임시정부에도 참여했습니다.

3.1 운동의 주역이었지만 역사 속에서 사라진 사람들,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용창/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당 : “여태까지 조금 보류됐던 인물들에 대해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만큼 더 이제 적극적으로 (서훈 검토)해야 될 필요는 있죠.”]

정부는 지난해 행적이 일부 입증되지 않더라도 친일 활동이 없으면 서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관련 규정을 바꿨습니다.

KBS 뉴스 이세중입니다.

[앵커]

앞서 보신대로 조선총독부는 독립운동가 한 명, 한 명을 계보로 그렸습니다. 3.1운동으로 인한 위기감이 그만큼 컸고 갈수록 탄압의 강도는 높아졌습니다.

지금 흘러나오는 있는 사진들, 참혹한 수난의 역사입니다. 그 고통,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잊어선 안될 저항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36년의 세월을 보내고서야, 주권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총독부 건물은 꽤 오랜 시간 살아남았습니다. 1996년, 광복 50년이 넘어서야 총독부 건물은 철거됐습니다.

이렇게 무너지고 나서야, 그 뒤로 치욕을 강요당한 경복궁이 제모습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해방이후 220명이 넘는 친일파 인사가 대한민국 훈장을 받았습니다.

역사의 제모습은 언제 되찾을지, 여전히 남는 질문입니다.

<2019.03.01> KBS NEWS 

☞기사원문: [탐사K] 총독부가 만든 ‘3·1운동 계보도’ 단독 발굴

금, 2019/03/01-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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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내 김백일 동상 옆에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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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내 김백일 동상 옆에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웠다.ⓒ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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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식”을 열었고, 류금렬 집행위원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윤성효

시민들이 3·1혁명 100주년이 되는 날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행적을 낱낱이 새긴 ‘단죄비’를 세웠다. 1일 경남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를 건립한 것.

친일김백일동상철거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집행위원장 류금렬, 아래 대책위)는 이날 낮 12시 “김백일 친일행적단죄비 건립식,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내 흥남철수작전기념비 앞에 김백일 동상이 세워진 때는 2011년 5월 27일.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가 “김백일 장군은 한국전쟁 때 흥남 철수 과정에서 미군을 설득, 피란민 10만여 명을 배에 태운 인물”이라며 동상을 세웠다.

그런데 당시 동상은 행정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은 경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이곳에 동상을 건립하려면 경남도과 ‘문화재 형상변경 검토’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당시 거제시가 이를 이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경남도는 동상 철거를 요청했다. 이에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는 거제시를 상대로 동상철거 명령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냈다.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거제시가 패소했고, 이는 2013년 10월 11일 대법원(당시 대법원장 양승태)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거제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2018년 9월 대책협의회를 구성해 동상 철거운동을 다시 벌이기로 했다. 38개 단체가 참여해 ‘대책위’가 결성되었다. 대책위는 지난 2018년 10월부터 지난 2월 28일까지 거제시청 앞에서 117일 동안 동상 철거를 위한 집회와 1인시위를 이어왔다.

그리고 대책위는 김백일 동상 옆에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우기로 하고, 거제시와 거제시의회, 유적공원을 관리하는 거세지해양관광개발공사 등과 간담회를 열어 논의해 왔다.

대책위는 경남도와 단죄비 설치에 따른 ‘문화재 형상 변경 검토’ 과정을 거쳤다. 2011년 당시 거제시의 잘못된 행정과 대법원의 판결로, 친일 김백일의 동상을 철거할 수 없게 되자 우선 그 옆에 ‘단죄비’를 세운 것이다.

단죄비는 김백일 동상과 같은 3미터 높이로 되어 있다. 단죄비에는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취지문’과 함께,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라고 적혀있다. 그 옆에 단재 신채호 선생이 남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새겨 놓았다.

그리고 단죄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밝힌 김백일의 친일행적을 새겨 놓았고, ‘연도별 친일행적’과 ‘간도특설대 죄상’도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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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우 통영거제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이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열린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식”에서 취지문을 읽고 있다.ⓒ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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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식”을 열었고, 참가자들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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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식”을 열었다.ⓒ 윤성효

기념식에서 이종우 통영거제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은 취지문을 읽었다. 취지문에는 “3·1독립운동 100주년, 광복 70년이 지난 대한민국에 아직도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동상이 버젓이 서 있다”며 “김백일은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 간도특설대 중대장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고 훈장까지 받은 자”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대책위는 “우리는 3·1독립운동 100주년 전에 김백일 동상 철거를 위해 노력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거제시민들의 힘을 모아 이 단죄비를 건립하였다”며 “우리는 김백일의 동상이 철거될 때까지 ‘단죄비’를 세움으로써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자 한다”고 했다.

또 대책위는 “국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현양행위금지법’ 등을 제정하도록 하여, 전국의 모든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기념물이 철거되고 다시는 건립되지 못하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라며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우리의 운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김동성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장은 경과보고를 통해 “38대 참가단체의 헌신적 노력과 류금렬 집행위원장의 집요한 노력이 단죄비 설치를 가능하게 되었다”며 “하지만 아직 우리는 성과를 논하고 공로를 치하할 수 없다. 우리 앞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 김백일의 동상이 아직 버젓이 서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그래서 대책위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고 동상이 철거될 때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현양행위금지법이 제정될 때까지 부단한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류금렬 집행위원장은 기념사를 통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은 이 시대의 독립운동가들이다. 여러분이 이 시대의 애국지사다”고 말했다.

그는 “일제시대에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한다. 그 말은 틀렸다. 일제강점기 때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았다”며 “단죄비는 친일행적에 대한 단죄이고 교육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류 집행위원장은 “김백일 동상이 근본적으로 없어져야 한다. 그의 유족들이 부끄럽다며 스스로 동상 철거를 요구하길 기대하고, 아니면 우리의 노력에 의해 동상을 없애도록 해야 한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동상 철거를 위한 소송 진행도 검토하겠다”고 했다.

이날 행사에는 ‘파라미타’ 청소년들이 참석해 <독립운동가>를 불렀고, 참가자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도 했다.

원종태 집행위원은 “단죄비 건립은 그동안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건립에 필요한 재정은 모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며 “어제(2월 28일) 단죄비 건립 계획을 공개했다. 혹시나 단죄비 건립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어 대책위 몇 분이 어제 저녁부터 밤새도록 이곳을 지켰다”고 말했다.

김백일은 1938년 12월 일제 간도특설대 창설 창설요원이었고, 일제 침략에 적극 협력한 공로로 1943년 9월 일제 ‘만주국’ 정부로부터 ‘훈5위 경운장’을 받았으며, 해방 이후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육군5여단장, 육군보병학교 교장, 육군3사단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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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내 김백일 동상 옆에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웠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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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식”을 열었고, 청소년들이 <독립운동가>를 부르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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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식”을 열었고, 류금렬 집행위원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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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식”을 열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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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식”을 열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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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식”을 열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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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내 김백일 동상 옆에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웠다. ⓒ 윤성효

<2019-03-0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3·1혁명 100주년, ‘친일행적 단죄비’ 세운 거제시민들 

※관련기사 

☞연합뉴스: 거제시민들, 김백일 장군 동상 옆에 ‘친일’ 단죄비 세워 

☞프레시안: 거제 김백일 동상 옆에 ‘친일단죄비’ 세웠다

토, 2019/03/02-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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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 [보도자료]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0년이 넘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에 대한 유해들은 전국 곳곳에 아직까지 방치되어 있다. 이에 한국전쟁유족회, 4.9통일평화재단, 민족문제연구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장준하특별법제정시민행동, 포럼진실과정의 등 시민단체들은 지난 2014년 2월 18일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 단장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을 출범시켰다.

공동조사단은 지난 2014년 2월 24일부터 3월 4일까지 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리 “진주지역 보도연맹사건 관련 민간인 학살 희생자”에 대한 1차 유해발굴조사를 통해 최소 39명의 유해와 탄두와 탄피, 버클 등 다수의 유품을 발굴한 바 있으며, 2015년 2월 23일부터 3월 2일까지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 “대전형무소사건 관련 민간인 학살 희생자”에 대한 2차 유해발굴조사를 통해 최소 20구의 유해와 탄두, 탄피, 의안 등 다수의 유품을 발굴한 바 있다. 또한 2015년 11월 15일 충남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 산 92번지에 대한 시굴조사를 통해 다수의 유해와 탄두를 발견함에 따라 2016년 2월 25일부터 29일, 3월 4일에서 8일에 걸쳐 3차 유해발굴조사를 벌여 최소 21명의 유해와 라이터 등 다수의 유품을 발굴하였다. 이어 2017년 2월 24일부터 3월 2일 간에는 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리 제2학살지에 대한 4차 유해발굴조사를 통해 최소 38명의 유해와 안경, 탄두, 버클 등 30여 점의 유품을 발굴하였다. 지난 2018년에는 지방자치단체로서는 처음으로 아산시가 유해발굴사업을 지방보조사업으로 선정함에 따라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 일대에 대한 5차 유해발굴 조사를 벌였다. 5차 발굴지는 아산지역 부역혐의사건의 희생지로서 희생자의 상당수가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었으며, 최소 208명의 유해를 비롯해 M1과 카빈의 탄두와 탄피, 비녀, 귀이개 등 다수의 유품을 발굴하였다.

공동조사단은 지난 다섯 차례의 유해발굴조사에 이어 오는 3월 8일부터 3월 16일까지 충북 보은군 아곡리 15-1번지 등에서 제6차 유해발굴조사를 벌인다. 특히 이번 발굴조사는 충청북도의 지방보조금 지원사업이며, 충청북도가 광역자치단체로서는 처음으로 유해발굴조사를 지원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공동조사단이 한국전쟁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의 유해를 발굴하기 시작한 2014년경부터 많은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에서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들의 위령사업 등을 지원하기 위한 조례가 제정되어 왔다. 이번 6차 발굴조사 예정지인 충청북도는 2016년에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였다.

청주․청원지역 국민보도연맹원 및 예비검속자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에 걸쳐 청주경찰서와 청주형무소에 구금되었거나 청원군의 각 면에 소집되었다가 충북 청원군 분터골, 쌍수리 야산, 보은군 아곡리 등지에서 희생되었다. 청주․청원지역의 보도연맹원 희생자는 1,500명에 달한다고 하는데, 특히 이번 6차 발굴조사지역인 충북 보은군 아곡리 15-1번지 등에서는 150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죽임을 당한 뒤, 지하 광산이나 이름 모를 산속에 수 십 년 동안 버려진 채 방치되어 왔다. 그나마 진실화해위원회가 일부 유해와 유품을 수습해 충북대학교에 임시 안치하였다가 2016년 세종시 추모의집으로 옮겨 모셨으나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된 후에는 국가 차원의 아무런 후속조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가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마땅히 가져야 할 법적․정치적 책임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조차 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사회통합을 이뤄내 인권국가로 발돋음하기 위해서는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분들의 진상규명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번 유해발굴 공동조사는 노무현 정부 이후 중단된 과거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민간인 희생자들의 유해를 인도적 차원에서 발굴 · 안치하는데 있다. 또한 실질적인 과거청산에 필요한 법과 제도가 구비될 수 있도록 국민적 관심을 모아내는 한편, 이후 민간 차원에서 과거청산 작업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 추진하는 것이다. 현재 20대 국회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개정안” 등이 의원입법으로 발의되어 행정안전위원회에서 법안심사 중에 있으나 법안 심사만 2년이 넘고 있다. 국회는 국민의 대의기관으로서 조속히 개정안을 처리해 국가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향후 공동조사단은 지속적인 유해 발굴을 통하여 민간인학살 사건의 실상을 기록하고, 하루속히 국가가 나설 수 있도록 강력하게 촉구하고 요구할 것이다. 이를 위해 국민들 또한 힘과 지혜를 모아줄 것을 기대한다.

화, 2019/03/05-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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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작곡가 교가’, ‘일제 용어·문화’.. 시민사회·부산교육청 “바로 잡자” 한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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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 잔재 청산에 나선 부산시민사회, 부산시 교육청. 자료사진 ⓒ민중의소리 김보성기자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부산지역 시민사회와 시교육청이 각 학교에 남아 있는 친일 잔재 청산운동에 나선다.

부산지역 교육단체 등으로 꾸려진 부산교육희망네트워크(이하 교육희망넷)는 4일 “교육, 시민사회와 함께 학교에 남아있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교육희망넷은 “100년 전 일제에 항거해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지만 오늘날의 현실은 어떠하냐”며 “일본은 여전히 군국주의 야욕을 불태우고, 우리 안의 친일 잔재는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배움터인 학교에서 친일 잔재 청산은 무엇보다 시급한 역사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3·1운동의 정신을 강조하면서 일제 강점기 친일 작곡가의 노래를 아직도 부르게 하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일본식 용어를 그대로 쓰게 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지적이다.

김선양 부산교육희망넷 집행위원장은 “어떤 고등학교에선 친일 작곡가의 교가가 계속 불리고, 심지어 일본인 교장을 사진을 전시놓고 있는 초등학교까지 있다”면서 “이 외에 학교 현장에서 일제식 용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이 일상생활 속 친일 잔재에 노출되어 있는 현실은 그대로 둔 채, 몇 가지 이벤트 행사로 항일의 역사적 의미를 바로 세우는 데는 한계가 분명하다”고 꼬집었다.

이어 “이제라도 학부모와 교사, 교육청이 힘을 모아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야 한다”면서 시 교육청에 ▲친일 잔재 청산 TF 구성 ▲각 학교별 전수조사 ▲4월 임시정부 수립일 등에 계기교육 등을 제안했다. 교육희망넷은 이날 이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교육청에 전달하고, 간담회를 가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시 교육청도 이에 호응하는 계획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부산시 교육청은 3일 “학교에 남아있는 유·무형의 일제강점기 잔재를 청산하는 등 새로운 미래 100년을 위한 학교문화 바로세우기 운동을 펼친다”고 밝혔다.

우선 시 교육청은 전문가로 구성한 ‘학교 속 일제 잔재 청산지원팀’을 꾸리는 등 행정적 지원을 본격화 한다. 또 학생, 교사, 학부모, 시민들이 학교 속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자료수집과 공론화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홈페이지에 ‘학교 속 일제잔재 청산 참여마당’ 코너를 설치, 운영한다. 이밖에 올바른 역사관을 위한 친일인명사전 각 학교 보급, 임시정부수립일·경술국치일·부산항일학생의날 등 계기교육자료 개발·지원 등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유·초·중·고등학교별 교사로 꾸려진 ‘일제 잔재 청산 교사연구회’도 운영한다. 연구회는 일제 잔재 조사와 고증을 거쳐 청산작업 활동을 지원한다.

<2019-03-05>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부산 학교 곳곳 친일잔재 청산 나선다 

※관련기사 

☞아시아투데이: 부산시교육청, 일제잔재 청산운동 펼친다 

☞부산일보: 자녀와 함께 되새기는 3·1 운동 100년 큰 뜻 

☞굿데일리: 부산교육청, ‘학교 속의 일제잔재 청산 나서’

화, 2019/03/05-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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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듣기]

☞ (3.05)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좌담회 1부

☞ (2.27)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만세열전2부

☞ (2.26)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만세열전1부

☞ (2.19)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4편 “심우섭” 한 시대 형제의 다른 삶, 기회주의자 지식인의 원형

☞ (2.12)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_2편_한일청구권협정의 쟁점은?

☞ (2.05)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3편 “오현주”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를 밀고한 배신자, 반민특위 법정에 선다

☞ (1.29)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2편 “노덕술” 고문으로 유명한 악덕 친일경찰, 대한민국 훈장을 받다

☞ (1.2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1편 “이종형” 의열단 행세하며 독립군 때려잡은 악명 높은 밀정

☞ (1.15)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 우리의 과제는?_1편

☞ (1.08) ‘내역사’ 시즌 3: 프롤로그 – 70년만에 부활하는 반민특위 친일파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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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3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화, 2019/03/05-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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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형 태극기를 청사에 내걸었다. 안산시 제공

경기지역 일부 기초자치단체들이 시를 대표하는 ‘시가(巿歌)’ 사용 중단을 선언하고 나섰다. 이들 시가는 친일인명부에 등록된 김동진씨가 모두 작곡한 것으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의미에서 추진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 안산시는 시가인 ‘안산시민의 노래’를 사용중단하기로 했다고 7일 밝혔다.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들의 정신을 이어받고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서다.

‘안산시민의 노래’ 작곡자는 김동진씨로 1930~40년대 만주작곡연구회 회원으로 가입·활동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고, 일본의 대동아공영 건설을 찬양하는 ‘건국 10주년 경축고’ 등을 작곡한 바 있다. 이같은 사실이 확인돼 민족문제연구소가 1989년 개정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공식 등재됐다.

이 노래는 1989년 10월 안산시가 시(巿)로 승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곡으로 당시 김씨가 직접 작곡했다고 한다. 시는 작사가는 친일행적이 없는 만큼 가사는 그대로 곡만 바꿀지, 가사와 곡 모두 바꿀지 등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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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파 작곡가인 김동진씨가 작곡한 ‘안산시민의 노래’ 악보. 안신시 홈페이지 캡처

앞서 지난달 28일 여주시와 포천시가 시가인 ‘여주의 노래’, ‘포천시민의 노래’ 사용을 각각 중단한 바 있다. 이들 곡 역시 김씨가 작곡한 것이다.

경기도내에서는 이들 3곳 외에 △의정부(의정부시 시가) △동두천(동두천시민의 노래) △고양(고양시의 노래) △오산(시민의 노래) △안양(안양시민의 노래) 등 5곳이 더 있다.

윤화섭 안산시장은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뜿깊은 해”라며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시가 사용을 중단하고 우리 시의 자랑과 비전을 담은 새로운 노래를 제정해 친일잔재 청산에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임명수 기자 [email protected]

<2019-03-07> 한국일보

☞기사원문: 친일행적 김동진 작곡한 시가 사용 중단…경기 여주, 포천, 안산시 중단

※관련기사 

☞한겨레: 여주·고양·안산, ‘친일논란’ 김동진 작곡 시가 사용 중단 

☞연합뉴스: 안산시, 친일인명 등재 김동진 작곡 시가 사용중단 

☞오마이뉴스: 안산시, 친일 인사 작곡’안산시민의 노래’사용 중단 

☞동포투데이: 안산시, 친일파 작곡 ‘안산시민의 노래’ 사용중단 결정 

☞서울뉴스통신: [뒤늦은 독립] 안산시, ‘안산시민의 노래’사용중단 결정

목, 2019/03/07-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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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진실, 정의, 배상, 재발방지 특별보고관 초청 국제 심포지엄…19일 제주 KAL호텔

제주4·3 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4·3 희생자유족회는 오는 3월 19일 제주 KAL호텔에서 ‘국제 인권기준에서 본 한국의 과거사 청산’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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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간제주

특히, 이번 행사에는 파비앙 살비올리(Fabian Salvioli) 유엔 진실, 정의, 배상, 재발방지 특별보고관이 참석해 과거사 해결에 대한 국제 기준 및 전환기적 정의 조치에 대한 통합적 접근의 중요성에 대해 발표할 예정이다.

또한, 안병욱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이 한국의 민주화와 과거사 정리에 대해 발표를 진행해 나가게 된다.

이번 국제 심포지엄은 국제 인권 기준에 비추어 한국의 과거사 청산의 한계와 성과를 짚어 보고 향후 한국의 과거사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이에 행사 관계자는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일본군 성노예제, 일제 식민지기 강제동원, 제주 4·3을 비롯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군부독재 정권의 국가폭력, 형제복지원과 같은 국가 권력에 의한 강제수용 문제가 다뤄질 예정”이라며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이계성 한국전쟁유족회 대전형무소 재소자 유족, 강종건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실종자, 유가족 모임 대표 등이 참석해 피해자 증언을 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어 “특히, 무엇보다도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유엔 진실, 정의, 배상, 재발방지 특별보고관에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한국의 과거사 문제를 소개함으로써 국제사회에 이를 환기시키고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나갈 계획”아라고 덧붙여 피력했다.


한편, 이번 행사는 4·9평화통일재단,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민주열사 희생자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제주다크투어, (재)진실의 힘, 형제복지원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공동 주관한다.

김남훈 기자 [email protected]

<2019-03-07> 일간제주 

☞기사원문: “국제 인권 기준에서 본 한국의 과거사 청산” 

※관련기사 

☞미디어제주: 우리나라는 국제기준에 맞게 인권을 다루고 있나 

☞헤드라인제주: ‘국제 인권기준에서 본 과거사 청산’ 심포지엄 제주서 개최 

☞뉴스제주: 국제 인권기준에서 본 한국의 과거사 청산

목, 2019/03/07-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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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임정 100주년 특집]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1편 “만세운동을 막은 자, 자제단장 박중양”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9년 3월 7일 (목요일)
■ 대담 : 권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가만있으라” 만세운동을 막은 자, 자제단장 박중양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서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가 준비한 특집 코너입니다.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오늘부터 매주 한 번씩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 역사를 되짚어 볼 건데요. 첫 시간에 해볼 얘기는 만세운동을 막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친일파 박중양과 ‘자제단’에 대해서 도움 말씀 주실 분, 민족문제연구소 권시용 연구원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권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하 권시용)> 네, 안녕하세요. 권시용입니다.◇ 이동형> 3.1절 특집을 시작하면서 예민할 수 있는 친일 문제를 먼저 꺼낸 건 100년이 지난 지금도 청산하지 못한 현재의 역사이기 때문이죠. 우리 흔히 그럽니다. 우리 민족은 민족반역자를 한 번도 처단해 본 역사가 없다. 동의하십니까?

◆ 권시용> 네, 불행하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 이동형> 제일 큰 이유는 반민특위의 실패겠죠?

◆ 권시용> 그렇죠. 첫 번째 기회였는데.

◇ 이동형>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 아니었을까요?

◆ 권시용> 그래도 최근에 또 역사적인 처벌, 이런 것들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죠.

◇ 이동형> 물리적 처벌을 불가능할 거고요.

◆ 권시용> 그렇죠.

◇ 이동형> 물리적 처벌이었으면 그때가 딱 한 번의 기회였는데, 그 기회가 좌절된 것도 역시 친일파들, 민족 반역자들의 방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 권시용> 일차적으로는 미군정이 그들을 다시 등용했던 것이 큰 문제였던 거죠. 그리고 거기에 부합해서 친일 반역자, 친일 협력자들이 자기 살길을 찾기 위해서 또 노력을 많이 했던 것이죠.

◇ 이동형> 미군정이 그렇게 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우리의 독립 역사를 잘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 권시용> 무지의 소치일 수도 있고요. 한반도를 통치한다는 차원에서,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일본에 충성하고, 열심히 일했던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서도 협력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죠. 효율성을 따졌던 것 같습니다.

◇ 이동형> 우리 친일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디서는 친일파라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 민족반역자라고 해야 한다,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고유 명사는 친일파로 굳어졌으니까요.

◆ 권시용> 그 용어가 오랫동안 사용되었고요. 그 속에는 매국노, 매국적, 반역자, 일제 협력자, 반민족 행위자 등의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오랫동안 사용됐기 때문에 나름의 역사성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 이동형> 해방 이후에 친일파 처벌을 위해서 반민특위를 만들었고요. 2005년 노무현 시기에 만들어진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 위원회, 또 민간단체에서 만든 친일 인명사전. 이 모든 게 친일파 처벌, 혹은 역사적 처벌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처벌할 것이냐. 적극적 친일이냐, 소극적 친일이냐, 어디까지를 우리가 친일이라고 할 것이냐, 이런 논쟁은 끊임없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권시용> 그런데 이 시점에 와서 굳이 적극적 친일이냐, 소극적 친일이냐, 이런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할 때 거물급 친일파, 대표적인 친일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지만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우리가 이들을 대한민국 법정에 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역사적 평가만이 남아있다. 그렇게 생각하고요. 그래서 어떤 행적이 친일 반민족 행위인가,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 거기에 대한 합의, 이런 게 남겨진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 이동형> 처음부터 끝까지 친일한 사람이 있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해서 넘어간 사람도 있고, 다양합니다. 오늘 이야기할 사람은 박중양인데, 박중양이 어떤 사람인지 짧게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 권시용> 박중양은 일찍 일본 유학을 갔던 사람이에요. 일본 유학에서 돌아오기 전에 러일 전쟁에 참전해서 일본군을 위해서 복무했던 경력도 있고요. 그러고 나서 1906년 무렵부터 강제 병합되기까지 대구 군수를 지냈고, 평안북도 관찰사, 경상북도 관찰사, 이런 직책을 수행했던 것이죠. 그 기간 동안에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들 탄압하는 데도 앞장섰던 행적이 있는 인물이죠. 그리고 강제 병합되고 나서 그다음에는 도지사, 중추원 찬의, 중추원 부의장, 그리고 마지막에는 일본 제국 의회 귀족원 의원까지 탄탄대로 출셋길을 달렸던 인물입니다.

◇ 이동형> 협력의 대가로 그런 것을 받았겠죠.

◆ 권시용> 그렇죠.

◇ 이동형> 그런데 3.1운동도 비난하고, 탄압에 앞장섰던 인물이고, 그리고 4월 6일 자제단을 대구에서 처음 조직했다고 하는데, 이 자제단은 어떤 조직입니까?

◆ 권시용> 자제단은 말 그대로 당시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던 3.1운동, 만세시위 열풍을 잠재우기 위해서 조선인들로 조선인들을 막자, 이런 차원에서 조선인들을 회유하고, 만세시위를 탄압할 목적으로 만든 단체였던 것이죠.

◇ 이동형> 3.1 운동이 일어나고 한 달 만에 그런 것을 만들었다는 거네요?

◆ 권시용> 네. 그때부터. 처음으로 대구에서 만들어졌고, 그것을 시작으로 해서 전국적으로 만들어진 거죠.

◇ 이동형> 박중양은 당연히도 반민특위가 결성되고 체포됐습니다. 그런데 체포당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고요?

◆ 권시용> 네,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체포당할 때, 조사받을 때 당시 조사를 담당했던 조사관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광수나 최남선 같은 다른 기회주의형 친일파들과는 다르게 박중양은 몸은 한국인이지만, 마음과 행동은 완전히 일본인이었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고 해요. 기록도 있고요. 체포당할 때도 나는 당당하게 심판받겠다, 할 테면 해봐라, 이런 식으로 대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 이동형> 그러면 여기서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받았던 박중양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자신의 친일 활동에 대해서 박중양은 이렇게 강변했다고 합니다.

◆ 성우> 나는 시대의 변혁의 희생양으로 무능력한 조선 왕족보다야 문명국이었던 일본의 조선 통치가 훨씬 좋은 정치였어. 한일 병합을 주도하는 이완용을 매국노라 비난하는데, 그는 매국노가 아니라 국난을 당한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한 사람이요. 어차피 이완용이 없었다면,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을 책임졌을 뿐이오. 만국을 맞이하여 자살했던 순국자들의 의거는 사상계에는 자극을 줄 수 있었을망정, 부국제민의 방도로 보기에는 힘든 것 아니오?

◇ 이동형> 네, 순국자들의 의거까지 폄하하는 이런 일을 벌였는데, 이미 일본은 패망하고, 우리는 광복을 맞았고, 반민특위가 조직돼서 체포당하고, 조사받고, 재판받는데, 아직도 일제인 줄 알았을까요? 왜 이렇게 뻔뻔하죠?

◆ 권시용> 좋은 기억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일본에 대한. 당시에 경험했던 메이지 유신을 거친 일본의 근대화. 그런 것에 대한 좋은 기억? 그래서 해방 후에도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메이지 유신 시대에 인재를 배출하여 일본의 융성은 실로 불이 난 것 같았다. 드디어 삼대 강국의 일원으로 일본과 중국, 한국이 백인의 식민 지배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유일하게 일본 제국이 엄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 이동형> 그리고 본인 개인의 입장으로서는 그 시절이 가장 찬란했던 순간일 수도 있고요.

◆ 권시용> 그렇죠.

◇ 이동형> 무능력한 조선보다 일본의 통치가 훨씬 좋은 정치고,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라 국난에서 백성을 구한 사람이다. 일종의 신념형 친일파, 이렇게 말하면 되겠습니까?

◆ 권시용> 저도 동의합니다.

◇ 이동형> 조금 더 설명해주시죠.

◆ 권시용>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일본에 유학하면서 일본이 이룩하고 있는 근대화에 압도당했고, 그래서 일본이 가는 길을 긍정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 연장선에서 한국이 일본의 통치를 받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이동형> 어쨌든 이 사람도 반민특위가 실패함으로 해서 당연히 풀려날 수 있었고요. 그리고 59년에 사망했는데, 이때가 86세였어요. 천수를 다 누렸다.

◆ 권시용> 다 누렸죠.

◇ 이동형> 독립운동 하시던 분들은 19세 때, 20대에 그렇게 생을 마감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그런데 이 사람은 천수를 누리면서, 그것도 86세 때도 40세 이상 차이나는 일본 사람과 결혼해서 살고 있고, 한 번도 이분은 심판이랄까요? 그런 것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네요?

◆ 권시용> 40세 이상 차이나는 일본인과 결혼했다는 것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그때 이 사람이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신문 기사를 보면, 70이 다 된 일본인 아내가 찾아와서 우리 영감이 추운 데 떨고 있으니까 이불을 조금 넣어달라, 이런 부탁을 했다는 게 신문 기사에 실려 있거든요. 일본인 여자와 결혼했다는 건 맞는데, 그렇게 나이 차이가 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 이동형> 네, 박중양은 일기와 해방 후에는 ‘술회’라는 회고록을 통해서 일제 강점기를 찬양하고, 그리워하는 내용의 글을 남겼다고 하는데요. 그중 한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 성우>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 들어 현대의 조선으로 개신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 정치를 집행하는 외의 것이 아니었다. 일정 시대의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다.

◇ 이동형> 그런데 최근 들어서도 박중양의 이런 주장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시에 우리는 일본 때문에 발전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 권시용> 요즘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쪽에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죠.

◇ 이동형> 참 안타깝네요.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이. 그런데 우리가 자제단 살짝 이야기했는데요. 1919년 4월 6일에 대구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박중양이 앞장서서 만들었다. 그러면 이 이후에도 전국적으로 이게 퍼졌겠네요?

◆ 권시용> 그렇죠. 전국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잠깐 이야기를 하자면, 4월 6일에 대구 자제단이 만들어졌고, 그 뒤를 이어서 경북에서는 4월 10일에 안동, 11일에 성주, 16일에는 군위, 의성, 영일, 영천, 칠곡, 김천, 선산, 이렇게 곳곳에 자제단이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다른 도, 평안북도에서는 4월 8일, 함경남도에서는 4월 10일, 그다음에 전라남도에서는 4월 11일, 강원도에서는 4월 13일, 경기도에서도 4월 13일, 충북에서는 4월 15일부터 전라북도에서는 4월 20일부터 자제단, 자성단, 자위단 등 명칭은 조금씩 다르지만 곳곳에서 만들어졌고요. 작년에 발표된 논문이 하나 있어요. 이양희 선생님의 논문인데요. 거기 보면, 전국에 138개 군이 넘는 지역에서 자제단이 조직되었다는 연구를 하셨고요. 면 단위에서도 그런 자제단이 만들어졌거든요. 그러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 이동형> 조선인을 통해서 조선인을 감시하겠다, 이런 거잖습니까? 서글픈 일이었는데, 이런 자제단을 박중양이 만들었다, 그리고 다그치고 설득했다는 건데요. 특히 경북 지역을 누비면서.

◆ 권시용> 네, 아까 쭉 경북 지역에 만들어진 자제단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을 만드는 데 박중양의 역할이 컸어요. 먼저 대구 자제단을 만들고 나서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각 지역을 누비면서 설득, 다그치는 역할, 이런 역할들을 했거든요. 그 결과 이렇게 곳곳에서 자제단이 만들어졌던 것이죠.

◇ 이동형> 만세운동도 하지 말고, 독립운동도 하지 마라.

◆ 권시용> 일본의 통치가 좋은 거다.

◇ 이동형> 방금 박중양이 경북 지역 곳곳을 누비면서 자제단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 상황을 보여주는 편지가 있습니다.

◆ 성우> 백작 데라우치 원수 각하. 소생은 지난 15일, 대구를 출발하여 김천, 개령, 선산, 칠곡, 각 군을 순회하며 잘 타일러 이르고, 어제 21일 대구로 돌아와서 도청에서 순회 상황을 진술했습니다. 현재 각지가 모두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수많은 병사가 곳곳에 산재하여 총칼로 다스린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후에도 계속 불량자들을 청소하고 오해하는 자를 설득하여 양민을 보살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동형> 각지가 모두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도 불량자를 청소하고, 오해하는 자는 설득하겠다. 어떻게 보면 충성 편지처럼도 보이고요.

◆ 권시용> 충성 편지에요.

◇ 이동형> 자랑 편지인 것 같아요.

◆ 권시용> 네, 자기가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이때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일본에 있었어요. 거기에 편지를 보낸 거예요.

◇ 이동형> 데라우치는 초대 총독도 했잖아요?

◆ 권시용> 맞아요.

◇ 이동형> 내가 이만큼 일했으니까 알아봐 달라?

◆ 권시용> 그렇죠.

◇ 이동형> 그래요. 불량자를 청소한다는 표현이 굉장히 무서운데, 결국은 3.1운동,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분들, 그리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분들을 어떻게 하겠다, 이런 말이잖아요?

◆ 권시용>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죠.

◇ 이동형> 자제단은 만세시위를 억압, 탄압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들을 했습니까?

◆ 권시용> 어떤 활동들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자제단 규칙이라는 게 남아 있어서 알 수 있습니다. 도 단위에서는 경기도, 전라북도, 함경북도, 황해도 것이 남아 있고요. 군 단위에서도 남아 있는데, 지금 얘기하고 있는 대구 자제단 규약도 남아 있어요. 이 규칙, 규약을 통해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우리가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죠.

◇ 이동형> 결국은 이렇게 만들어서 서로서로 감시하고, 믿지 못하게 하는, 그리고 만약에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빨리 신고를 해라. 그러면 거기에 대한 포상이 있을 테고요.

◆ 권시용> 네, 밀고해라.

◇ 이동형> 일제의 잔인함이 엿보이는 것인데요. 이런 활동의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제단 서명에 날인하지 말라는 내용의 조선 독립신문 제26호 실린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 성우> 세계는 인도와 정의로서 세계를 개조하고자 하고, 일본은 위력과 잔인함으로써 우리는 종속한다. 아! 우리가 적의 폭력 아래 노예의 치욕을 인내한 게 10년이라. 일본은 죄 없는 우리를 포살과 방화와 감금과 자치단 등 가지가기의 악계로서 해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소위 자제단이라 거짓으로 칭하여 강제적 위력적으로 협박 시행하여 날인을 받으나 날인이 우리 민족에게 독립자에게 가당키나 할 것이냐. 우리의 사랑하는 동포여, 백절불굴의 용감함으로 분발하여 적의 압박에 굴복하지 말라. 일시의 평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날인하면, 수십의 구속자가 장래에 화를 면할 수 없다. 일시의 평화는 영구의 화인 것을 자각하여 면면촌촌의 단천을 배척하는 것은 독립자의 합당한 행위다. 낙심하지 말라. 우리의 공화국 정부를 세계가 용인하였다. 대사업이 빨리 성취하지 않는 것을 낙담하지 말라. 고통은 즐거움의 씨앗임을 기억하라.

◇ 이동형> 네, 가슴 뭉클한 그런 내용인데요. 조선 독립신문은 어떤 신문이었죠?

◆ 권시용> 조선 독립신문은 지하 신문이에요. 요즘으로 치면 유인물 같은 거예요. 만세시위 열기를 이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만들어서 배포했던 것이죠.

◇ 이동형> 박중양을 처단해야 한다. 이런 의지를 가지고 모였던 사람들도 있다고요?

◆ 권시용> 혜성단이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만세운동을 이어가고자 했던 그런 모임이었는데, 대구 지역 계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서 만든 조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혜성단에서 자제단 설립에 앞장섰던 박중양에게 경고장을 보냈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 이동형> 그때도 물론이고, 이렇게 일본에 협력하는 세력과 또 레지스탕스 간의 끊임없는 싸움이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 힘으로 해방이 안 됐다, 이런 이야기도 많이 하지만, 어쨌든 일본은 패망했으니까요. 아쉬운 게 45년에 일본이 패망하고, 지금 시간이 굉장히 많이 흘렀고, 3.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은 100년이나 지난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잔재들이 남았다는 것은 많이 안타깝네요.

◆ 권시용> 그렇죠. 해방된 공간에서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기회를 잃었죠. 미군정 시기에 친일 관련한 경찰과 군인들을 등용했고, 첫 번째 기회였던 반민특위에서 실패를 맛보았고요. 그리고 이후에 독재 정권, 군사 정권을 거치는 동안 친일 청산이라는 것은 말도 꺼내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던 것이죠.

◇ 이동형> 문재인 대통령도 100주년 3.1절 기념사에서 친일 잔재 청산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뿌리 깊은 친일 청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권시용>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할 것은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구하고, 그래서 그 결과를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그것이 지금 상황에서는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요. 현실적으로는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합당한 평가를 우리 사회에서 내릴 수 있도록 구속 조치들이 필요하다고 봐요. 이를테면 대한민국 정부에서 친일파가 서훈을 받는 일도 있었잖아요? 그리고 각종 친일파에 대한 기념사업도 진행되고 있고요.

◇ 이동형> 동상도 서 있죠?

◆ 권시용> 네, 그렇죠. 다행히 김정수와 같은 사례에서 보듯이 조금씩 역사적인 청산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다행이죠.

◇ 이동형> 알겠습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서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가 준비한 특집 코너.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첫 시간인 오늘은 민족문제연구소 권시용 연구원과 함께 만세운동의 자제를 외친 친일단체, 자제단에 대한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저희가 자제단 이야기를 하면서 박중양 한 명만 얘기했는데, 인터넷 검색하면 나올 겁니다. 자제단에서 어떤 사람이 활동하면서 친일 활동을 했는지요. 그것은 우리 청취자분들이 한 번 검색해서 살펴보시기 바라고요. 오늘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첫 시간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권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권시용> 네, 감사합니다.

<2019-03-07> YTN 

☞기사원문: “가만있으라” 만세운동을 막은 자, 자제단장 박중양

금, 2019/03/08-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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