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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 나라에 대통령이 둘” 그 하나는 쫓겨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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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 나라에 대통령이 둘” 그 하나는 쫓겨나고

admin | 화, 2021/09/07- 00:21

[김종성의 히,스토리: 라이벌 열전] 이범석 vs. 박마리아

해방 직후의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했지만 그 뒤 상당히 많이 잊힌 인물이 있다. 1948년 8월 정부수립 때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이었던 이범석(李範奭, 1900~1972년)이 바로 그다. 참고로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아웅 산 묘소 폭발 참사로 희생된 외무부 장관 이범석(李範錫)은 다른 사람이다.

대한제국 종결 10년 전에 태어난 이범석은 지난 8월 15일 전 국민의 환영을 받으며 사후에나마 ‘장군의 귀환’을 이룬 독립투사 홍범도(1868~1943년)의 동지였다. 봉오동 전투와 더불어 홍범도가 참여한 또 다른 대첩인 청산리대첩 때 이범석도 함께했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김좌진과 홍범도가 백두산 인근의 만주 땅에서 거둔 청산리대첩 당시, 만 20세의 이범석은 이 대첩의 일부인 천보산 전투를 이끌었다. 이범석의 활약상에 관해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의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의 독립전쟁>은 이렇게 기술한다.

홍범도 부대원의 일부와 이범석이 이끄는 1개 중대는 10월 24일 저녁 8시와 9시경 두 차례 그리고 25일 새벽 한 차례 천보산 서남쪽을 지나다가 은동광(銀銅鑛)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 1개 중대를 습격하였다. 이 가운데 24일의 전투는 이범석 등 군정서 부대가 수행한 전투였다. 그리고 25일 새벽의 전투는 식량을 구하러 간 소수의 홍범도 부대원들이 적을 습격하여 벌어진 전투였다.

이범석은 김원봉(1898~1958)과도 인연이 있었다. 한국광복군 하에서 김원봉은 부사령 겸 제1지대장이고 이범석은 제2지대장이었다. 이범석은 김원봉이 주목한 인물 중 하나였다. 김원봉은 이범석이 미국전략정보국(OSS) 등의 지원을 받아 해방 뒤 최고 지도자 반열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한상도 건국대 교수가 쓴 <대륙에 남긴 꿈: 김원봉의 항일 역정과 삶>은 “당시 미군 측 정보 자료에는 김원봉이 ‘일제 패망 후 OSS가 한국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이범석을 전후(戰後) 한국인의 우두머리로 추대하려 한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고 파악했다”라고 서술한다.

거물이 됐지만

▲ 이범석 장군 ⓒ 국가보훈처

김원봉의 예견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45세에 해방을 맞이한 이범석은 승승장구하면서 대통령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 그런데 그는 결국 좌절했다. 이승만에게 두려움을 줄 정도로 막강해졌던 그는 그 뒤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갔다. 전두환 정권 때의 이범석과 그를 구분할 수 있는 한국인들도 지금은 많지 않다.

이범석은 독립운동가 출신치고는 비교적 이례적으로 미군정과 이승만의 호응을 받았다. 이들이 그를 필요로 한 이유는 군대를 통솔한 경력이 있다는 점 외에도 더 있었다.

김원봉과 달리 우파 성향을 갖고 있었다는 점, 미군정의 후원을 받아 1946년 10월 결성한 민족청년단(족청)이 100만 이상의 회원을 보유한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조직을 결성하고 이끄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점 등이 이범석의 강점이었다. 정부수립에 앞서 1948년 8월 4일 구성된 초대 내각에서 그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이 된 데는 그런 요인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김원봉의 예견대로 이범석은 거물이 됐지만, 이범석은 얼마 뒤 한계에 봉착했다. 이범석을 도운 요인들이 어느 순간부터 도리어 족쇄가 된 것이다. 미국은 불가피하게 그를 이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극도로 경계했다. 일반적인 보수가 아니라 극우 성향까지 띤 그가 자신이 보유한 군사 역량을 위험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약간 다른 이유에서 이범석을 경계했다. 자신을 도와 극우 청년조직을 육성하는 모습을 지켜본 이승만은 이범석이 그 능력을 바탕으로 자신까지 위협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2003년에 <역사와 사회> 제31집에 수록된 정치학자 박영실의 논문 ‘해방 이후 이범석의 사상과 정치활동’은 “이 나라에 대통령이 둘이다. 실제적인 대통령은 이범석이다”이라는 풍문이 한국전쟁 이전에 존재했다고 소개한다. 이랬으니 이승만은 한편으론 이용하면서 한편으론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기집권을 위한 1952년 발췌 개헌 때, 이승만은 불법적인 이 개헌을 관철할 목적으로 이범석을 내무부 장관으로 기용했다. 이범석이 경찰력을 동원해 국회를 무력화하고 개헌안을 통과시키자, 이승만은 이범석에게 책임을 돌리며 그를 토사구팽했다. ‘사냥개’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항상 경계했던 것이다.

이범석은 그해 8월 5일 대통령 선거 때 이승만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놓고도 이승만의 버림을 받아 낙선했다. 이승만과 경찰의 지원을 받은 부통령 후보는 자유당 후보 이범석이 아니라 무소속 함태영이었다. 자신에 대한 이승만의 견제 심리를 이범석이 절감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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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이범석에 대한 이승만의 견제는 더 거세지고, 이범석은 자유당에서 밀려 나갔다. 이범석을 따랐던 족청계(민족청년단계) 역시 정치적으로 무력해져 갔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족청과 이범석은 더 이상 빛을 보기 힘들게 됐다.

박마리아·이기붕 부부의 집요한 공격

▲ 경무대에 모인 이승만-이기붕 가족. 왼쪽부터 이기붕 민의원의장 장남 이강석,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이 대통령, 이기붕 의장, 이 의장 아내 박마리아, 이 의장의 차남 이강욱. 이강석은 이 대통령의 83세 생일에 맞춰 대통령의 양자로 입적됐다. 1957. 5 ⓒ 국가기록원

미국과 이승만이 이범석의 힘을 뺄 때 앞장섰던 이들이 있다. 그중의 대표는 이승만 최측근 그룹의 이기붕이었다. 이범석에 대한 이기붕의 경쟁심은 이범석이 1956년 대선을 앞둔 1955년 11월 17일 경무대를 찾아가 이승만을 만나고 돌아간 뒤에 이기붕 측근들이 보인 반응에서도 나타난다.

이범석의 경무대 방문이 이승만과의 재결합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인가 하는 설왕설래가 오가는 상황에서, 자신있게 ‘아니오’라는 대답을 내놓은 이들이 바로 이기붕 측근들이었다. 1955년 11월 21일 자 <조선일보> 1면은 “자유당 주류파와 이기붕 씨 측근들은 이범석 씨의 정계 재등장은 있을 수 없다고 자신 있는 어조로 일소에 부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이범석에 대한 이기붕의 견제는 ‘부부 동반’의 양태를 띠었다. 이범석의 부인인 독립운동가 김마리아(1903~1970)와 이기붕의 부인인 친일파 박마리아(1906~1960)도 관련돼 있었다. 이 중에서 박마리아는 김마리아와 대립할 뿐 아니라 김마리아의 남편과도 직접 충돌했다. 이범석을 자유당에서 밀어내기 위해 남편 이기붕 못지않게 앞장을 섰던 것이다.

강릉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를 잃은 박마리아는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어머니와 함께 가난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기독교인들의 도움으로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중학교 수준)와 이화여자전문학교(고교 수준)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학사 및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의사 원용덕(1908~1968)과의 연인관계를 청산한 그는 미국 유학 중에 만난 이기붕을 배우자로 선택했다.

학위를 받고 돌아온 그는 친일파로 변신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에 따르면, 1941년 12월 19일 자 <매일신보>에 ‘내가 본 미국 여성’이란 글을 실어, “충군애국이란 그들에게는 이해키 어려운 문구”이며 “어느 날인가 그들의 빳빳한 개인주의, 이기주의, 자존심은 머리를 굽힐 날이 단연코 있을 줄 압니다”며 미국의 몰락을 예언했다. 그는 일왕(천황)의 황은에 보답하기 위해 징병에 응하자며 대중을 선동했다.

미국 유학 경력을 이용해 ‘반미투사’로 활약했던 그는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동일한 경력을 이용해 친미파로 변신했다. 남편이 미국에서 이승만을 보좌한 적이 있다는 점, 미국에서 영어 실력을 쌓았다는 점 등을 바탕으로 이승만 부인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와 친분을 쌓고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서 힘을 축적해갔다. 의사에서 만주국 군의관을 거쳐 대한민국 장교로 변신한 친일파 원용덕과의 옛정을 발판으로 군부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박마리아는 이범석과는 정치적 공존이 힘들었다. 이범석은 독자적 기반과 실력이 있었던 반면, 박마리아는 이승만 부부와의 친분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박마리아 같은 가신그룹은 이범석 같은 테크노크라트 그룹과 거리를 둬야 했지만, 권력욕이 강한 박마리아는 가신그룹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의 권력을 추구했다. 그러다 보니 이범석이 눈엣가시처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이 둘의 공존은 힘들었다.

박마리아는 남편을 돕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남편과 함께 이범석 밀어내기에 앞장섰다. 민족청년단(족청) 충북지부 부단장을 지낸 신형식은 1983년 4월 15일 자 <중앙일보> ‘자유당과 내각 (34)’과의 인터뷰에서, 족청에 대한 탄압 양상을 “자유당 내 비족청계와 야당뿐 아니라 백성욱·윤치영·박마리아 등 이 박사 측근들도 가세해 있었다”고 설명한 뒤, 박마리아가 신형식 자신의 신변을 위협하는 일도 있었다고 진술했다.

신형식은 “뒤에 들으니, 나와 대립해 있던 충북 출신의 이충○ 의원이 이기붕 부인 박마리아에게 ‘신(형식)은 빨갱이’라고 얘기했고, 그 말이 프란체스카 여사한테도 전달되었다는 얘기들도 나돌았다”고 말한다. 박마리아가 프란체스카를 이용해 이승만과 이범석 그룹의 사이에 이간을 붙인 것이다.

박마리아의 대단함은 다른 데도 있었다. 그의 탐욕은 권력뿐 아니라 재물까지도 지향했다. 남편과 함께 정치활동에 여념이 없었을 그 시기에 재산 불리기에도 치중했다.

1962년 5월 2일 자 <경향신문> 기사 ‘이기붕 씨 일가의 최후’는 박마리아 집에 들어온 뇌물이나 선물과 관련해 “박마리아 씨는 성격이 세밀하고 꼼꼼해서 이러한 물건을 간수하는 데 빈틈없는 배려를 했다”며 이 집안 창고에 관해 “보통 사람이 도저히 손댈 수 없게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이 도저히 손댈 수 없게 만든 그의 창고는 4월혁명 때 털렸다. 시위대는 이 집에서 은그릇·구슬방석·금십자가·목걸이·녹용 등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그의 재산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1960년 8월 21일 자 <동아일보> ‘이승만·이기붕 재산 대체로 판명’에 따르면, 그는 이기붕과 별도로 차명 부동산까지 갖고 있었다. 일례로,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와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김영운 명의의 대지 및 건물이 있었다.

미국과 이승만뿐 아니라, 이처럼 권력욕과 재산욕이 많은 박마리아와 그의 남편 이기붕도 이범석의 몰락을 부추겼다. 이범석이 감당해야 할 무게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공격을 받고 서서히 몰락해가던 이범석은 이승만 정권이 몰락한 1960년에 부활 조짐을 보였다. 4·19 직후 참의원에 당선되면서 재기의 조짐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이듬해 5월 16일 선글라스 낀 친일 장군의 출현과 함께 그는 다시 움츠려들었다. 1963년에 국민의당을 창당하는 등의 안간힘을 써봤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러다가 1972년에 세상을 떠났다.

한때 홍범도의 동지였던 이범석은 여느 독립투사들과 달리 해방 뒤에도 승승장구했다. 그것은 그가 미군정 및 이승만 정권에 협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립투사 출신이라는 점, 극우 성향을 갖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조직 능력이 너무 출중하다는 점 때문에 미국과 이승만의 견제를 받더니 급기야 박마리아·이기붕 커플의 집요한 공격까지 받아 자유당 정권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김종성(qqqkim2000)

<2021-09-0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이 나라에 대통령이 둘” 그 하나는 쫓겨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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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종성의 히,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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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민단체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과 미군이 격전을 벌인 오키나와(沖繩)현 본섬 남부 지역에서 새 미군 기지 매립지에 쓸 토사를 채취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평화를 기원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전몰자 유족 모임’은 오늘(7일) 일본 방위성과 후생노동성을 찾아 “헤노코(邊野古) 연안 매립 공사에 쓸 토사를 희생자 유해가 묻힌 곳에서 채취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의 서명 용지를 전달했습니다.

서명에는 일본 전역에서 1만 1천여 명이 동참했습니다.

이들은 “희생자의 피가 스며든 토사를 미군 기지를 만드는 매립에 사용하는 것은 유골이라도 돌아와 달라는 유족의 염원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전쟁 막바지이던 1945년 일본군이 본토를 지키기 위해 오키나와 본섬 남부 등에서 미군을 상대로 벌인 싸움입니다.

당시 일본군이 방패막이로 내세운 오키나와 주민과 미군 병사 등을 포함해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오키나와대 지역연구소 특별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에는 조선인도 3천461명이 군인이나 군속으로 동원돼 701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는 노무 동원된 이들이나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이들을 제외한 숫자입니다.

기록으로 파악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실제 동원되거나 사망한 조선인은 더 많을 수 있고, 이들 대부분은 희생된 주변 지역에 묻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그동안 희생자 유해 수습이 미흡해 이토만(絲滿)을 비롯한 격전지에서 발굴이 계속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본섬 남부의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을 이전할 곳인 중부 헤노코 연안의 매립에 쓸 토사 일부를 당시 격전지였던 이토만 등에서 채취하려 하고 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유골이 섞인 토사가 매립용으로 투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입니다.

지난 3월부터 오키나와 현청 앞에 단식 투쟁 등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 시민단체 ‘가마후야’(ガマフヤ-)의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67) 대표는 최근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그간 수습된 희생자 7백여 명의 유골을 가족에게 돌려주기 위한 후생노동성 주도의 DNA 감정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한국의 유족들도 DNA 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달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가마후야’는 한국 단체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02-2139-0462)와 민족문제연구소(☎ 02-969-0226)를 통해 오키나와 유골 발굴 및 DNA 감정에 참여할 한국인 유족의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황현택 기자 [email protected]

<2021-07-07> KBS NEWS

☞기사원문: “조선인 등 묻힌 토사 채취 반대”…日시민단체, 1만여 명 서명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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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피가 스며든 흙으로 軍기지 만드는 건 인도적으로 용납 불가”

☞한겨레: “희생자 유골 섞인 흙으로 오키나와 미군기지 건설, 반인도적 행위”

☞연합뉴스: “피가 스며든 흙으로 軍기지 만드는 건 인도적으로 용납 불가”

☞연합뉴스: 조선인 유골 공사장에 묻히나…日NGO “한미 유족과 반대운동”

목, 2021/07/08-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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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세계유산위, ‘일본에 유감 표명’ 결정문 채택해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서울=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 1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는 주제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해당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하시마 탄광(군함도), 다카시마 탄광, 나가사키 조선소, 야하타 제철소, 미이케 탄광·제련소 등으로 동원된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공개했다. 하시마 탄광으로 강제동원된 고(故) 서정우씨 등의 영상은 최초로 공개됐다. 2021.7.16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송은경 기자 = “‘왜 여기에 와서 이런 일을 당하는가’ 혼잣말을 하면서 매일 죽을 생각만 했습니다. 바다를 내려다보면 너무 무서워서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군함도(하시마·端島) 강제동원 피해자 서정우 씨)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 산업시설에서 벌어진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 최근 국제사회에서 제기된 가운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육성 증언을 다루는 자리가 마련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공동 주최로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전시회를 11월 7일까지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연다고 16일 밝혔다.

전시 영상들은 강제동원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담고 있다. 열네 살에 하시마 탄광에 동원됐다가 이후 나가사키에서 원폭 피해를 겪은 고(故) 서정우(1928∼2001) 씨의 영상이 국내에서 공개되는 건 이번 전시가 처음이다. 사복형사에게 연행돼 다카시마 탄광으로 끌려갔던 손용암(78)씨, 후쿠오카 미이케 탄광·제련소로 강제동원된 류기동(79)·손성춘(76)·이영주(77)씨 영상은 올봄 촬영돼 이번에 최초로 공개된다.

징용 경험을 감추고 살아야 했던 피해자들은 자신만의 언어로 과거를 이야기한다. 군수시설에서 탈출하려던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을 잇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모습에선 그들이 겪었을 고통의 깊이가 가늠될 정도다.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은 “보통 강제동원을 떠올리면 ‘배고프다’ ‘아프다’ ‘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처럼 단편적으로만 안다”며 “이번 전시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누구였는지, 어떤 과정으로 가게 됐는지, 현장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 느낌은 어땠는지, 언어 소통은 어떻게 했는지 등을 느낄 수 있게 증언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일본 시민단체가 제공한 영상도 이번 전시에 포함됐다. ‘나가사키 중국인 강제연행 진상을 조사하는 모임’이 제공한 중국인 포로, POW연구회가 제공한 연합군 포로의 증언 영상을 함께 전시해 강제노동이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서울=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오른쪽 두 번째)이 1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는 주제의 전시 관련 브리핑을 마친 뒤 연구소 관계자들과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해당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하시마 탄광(군함도), 다카시마 탄광, 나가사키 조선소, 야하타 제철소, 미이케 탄광·제련소 등으로 동원된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공개했다. 2021.7.16 [email protected]

한편 유네스코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공동조사단은 일본 도쿄에 있는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시찰한 결과 센터가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사실상 부정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지난 12일 공개했다. 지난해 6월 개관한 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군함도 등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조사단은 일본이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을 일본의 관점뿐 아니라 한국인 강제징용 노동자 등 피해자의 시각까지 균형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번 조사를 토대로 일본에 강력한 유감을 표명하는 내용의 결정문을 이르면 이달 21일 열리는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공식 채택할 예정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강제노동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 온 우리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세계유산위원회가 공개한 권고를 지지하며 환영의 뜻을 표한다”면서 “세계유산위원회가 이 권고를 채택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email protected]

<2021-07-16> 연합뉴스

☞ 기사원문: 피해자 육성 담은 ‘일제 강제동원’ 전시회 서울서 개막

※관련기사

☞뉴스토마토: 민족문제연구소, 군함도 등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19인 증언 공개

☞이투데이: ‘군함도 강제노동의 역사’,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19인의 증언

금, 2021/07/16-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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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키 하시마(군함도) 전경. 김영민 기자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위원회가 일본이 ‘군함도’(하시마·端島) 등에서 벌어진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담긴 결정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일본 정부를 향해 ‘강한 유감(strongly regret)’ 등의 강도높은 표현이 담긴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고 22일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세계유산위원회는 결의문에서 군함도에 관해 설명하는 도쿄의 산업유산정보센터를 개선하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인 등이 강제노역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조치 역시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는 2015년 군함도 등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이 다수 포함된 일련의 근대 산업시설을 세계 유산으로 등재하는 과정에서 한국 등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 징용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알리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다. 하지만 군함도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도쿄에 설치한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물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나 인권침해가 없었던 것과 같은 이미지를 부각하고 있다.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운영하는 일반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는 인권 침해의 역사를 부정하는 내용의 옛 군함도 주민 동영상 등을 홈페이지에 게시하기도 하는 등 역사 왜곡에 앞장서고 있다. 한국 정부와 뜻있는 한일 시민단체는 일본 정부에 징용 등 강제 노역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도록 전시관을 개선할 것을 거듭 촉구했으나 일본 정부는 “약속한 조치를 성실하게 이행해 왔다”며 주장해왔다.

앞서 일본은 유네스코의 지적에 반발해왔다. 지난 12일 결정문이 최초 공개되자 일본 정부 대변인인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은 이튿날인 13일 기자회견에서 “일본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의·권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자국 정부가 약속한 조치를 포함해 성실히 이행해왔다”고 주장했다. 교도통신도 지난 17일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반론을 펼치기로 방침을 세우고, 일본은 (산업유산정보센터 관련 설명을) 성실하게 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히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하지만 결정문은 토의 없이 채택됐으며, 일본 측도 이에 대해 추가 발언을 신청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2021-07-22> 경향신문

☞기사원문: 유네스코, ‘일본 군함도 왜곡’ 결정문 만장일치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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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유네스코, ‘日군함도 역사왜곡’ 비판결의…”징용설명 부족”

☞한국일보: 유네스코, 군함도 역사왜곡 비판결의 채택… “강한 유감”

☞아시아경제: 유네스코, 日군함도 역사왜곡 비판 결의문 채택

☞뉴시스: 유네스코, 日 군함도 역사왜곡 비판 결정문 채택…”강한 유감”

☞MBC: 유네스코, ‘日 군함도 역사왜곡 비판’ 결의 채택

☞SBS: 유네스코, 군함도 역사 왜곡 비판결의 채택…”개선하라” 요구

금, 2021/07/23-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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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지진 희생 조선인 추도 비문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당시 일본인의 폭동으로 희생된 조선인 6천여 명을 추도하는 도쿄도 위령당 내의 비문.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정성조 기자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등 시민사회 원로들은 26일 성명을 내고 1923년 일본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의 진상규명과 추모사업 진행을 촉구했다.

이들은 “2023년은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가 되는 해로 이제라도 일본 정부는 진상을 공개하고 공식 사과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와 국회도 나서 자료 보존과 공개를 일본 정부에 요구하고, 9월 1일을 국가 추모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명에는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박만규 흥사단 이사장, 송인동 한국YMCA전국연맹 이사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이만열 시민모임 독립 이사장, 이종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장, 지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 원로 17명이 참여했다.

<2021-07-26> 연합뉴스

☞기사원문: 시민사회 원로들 “日간토학살 진상규명·추모사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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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최소 6600여명의 학살… 일본 의원도 나섰는데 우리 의원은 왜 말이 없나

☞오마이뉴스: “일본을 벌하라, 나는 죄가 없다” 예순 두군데나 찔린 조선인이 남긴 유언

화, 2021/07/27-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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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28일
[주진우 라이브] KBS 1 Radio FM 97.3MHz 월-금 17:05~19:00

▷[훅인터뷰]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 일본 군함도 유네스코 등재, 역사왜곡이 아닌 과거사 직시의 현장이 되어야

목, 2021/07/29- 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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