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시민단체, 간토대지진 진상규명·명예회복 성명 발표 1일 오후 충남 천안시 소재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 역사관’에서 임광순 ‘기억과 평화’ 이사가 한일 양국 정부의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진상규명과 사과, 명예회복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낭녹하고 있다.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제공]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1923한일재일시민연대(대표 김종수)는 1일 일본 간토(關東)대지진 조선인학살 제98주기 추도 행사에서 한일 양국 정부에 진상규명과 사과, 명예회복 등을 요청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간토학살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발생한 규모 7.9의 간토대지진이 일본 수도권 일대를 강타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재일 조선인과 중국인, 일본인 사회주의자 등이 다수 살해된 사건이다. 특히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방화한다’ 등의 유언비어가 퍼져 자경단, 경찰, 군인에 의해 6천661명(독립신문 기록)이 희생된 참사이기도 하다.
성명서는 일본 정부의 조선인 학살 사건의 책임 인정과 사과, 한국 정부의 진상규명·명예회복 조치와 국회의 특별법 제정, 한일 역사학계·교육계의 조선인 학살 사건 연구와 교육 등을 촉구했다.
이 성명에는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1923제노사이드연구소, 사회적협동조합 ‘기억과 평화’ 등 한일 양국의 시민단체, 대학, 연구소, 종교계 등 200여 명이 참여했다.
임광순 사회적협동조합 ‘기억과 평화’ 이사는 이날 충남 천안시 동남구 소재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 역사관’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성명서를 낭독했다.
성명서는 “간토대지진은 자연재해였지만 뒤이은 피해는 인간이 만들어낸 비극”이라며 “당시 일본 내무성은 전국 지자체에 ‘조선인 폭동’을 사실화하는 유언비어를 타전했고, 피해지역인 사이타마(埼玉)현 경찰서는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한 조선인)의 망동이 있으므로 급히 상당한 조처를 해야 한다고 전파해 치안 당국뿐만 아니라 일본인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에 불을 붙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1923년 이후 조선인 학살은 은폐되는 듯했으나 여러 연구자와 시민운동 덕분에 진상이 널리 알려졌고 2013년에는 한일 공동학술회의가 열려 진상규명 과제를 제시하기도 했다”며 “그런데도 여전히 일본 정부는 당시의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은 채 추도 메시지도 거부하고 있고 한국 정부와 국회도 진상규명과 피해복구에 눈을 감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행사에는 다나카 마사타카 일본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 사무국장, 이유재 독일 튀빙겐대 교수, 조정현 1923재일시민연대 운영위원, 이용길 천안역사문화연구회 대표가 추도사를 했다.
배영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이재선 천도교 청년회 중앙본부 회장, 구와노 야스오추금 일본 닛코리회 대표, ‘엿장수 구학형’·’간토대진재 조선인학살의 기록 번역팀이 연대사를 발표했다.
김종수 대표는 “2년 앞으로 다가온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에 맞춰 진상을 널리 알리고 추모하는 다양한 사업에 양국 시민단체가 함께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2006년 8월, KBS는 광복절을 맞이하여 ‘야스쿠니 신사’와 관련된 쟁점을 다루는 다큐 를 제작, 방영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특별한 장면이 연출된 탓에 13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야스쿠니 관련 이슈로 회자되곤 한다.
바로 태평양전쟁 A급 전범 ‘도조 히데키’의 손녀 ‘도조 유코(2013년 사망)’가 출연했기 때문인데, 그녀는 방송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으로 희생된 피해자 유족들(한국, 대만)과 야스쿠니 신사와 관련된 대담을 나눴다.
이희자(한국 측 피해자 유족): “…왜 내 아버지가… 일본의 전쟁에 끌려가서 죽어야 했던 그 당시 2만 1000명의 조선인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야 하는가 (중략) 지금도 그 당시 대만이나 한국, 남의 나라를 지배했던 그 정신을 그대로 가지고 하려고 하니까 문제 삼는 것입니다.”
도조 유코: “그럼 나라의 룰로 그 사람들을 차별해서 당신들의 아버지들을 그 당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하지 않았다면 ‘일본인으로 싸웠건만 왜 합사시켜주지 않는가?’라고 화내지 않았을까요? 어찌 됐든 일본인으로 싸워주셨으니까… 일본인으로 싸우다 돌아가신 분은 모두 야스쿠니에 모신다는 것이 전쟁에 나가셨던 당신 아버지 같은 병사와 국가 간의 약속이었어요.”
(중간 생략)
이희자: “그것이 (한국인을 야스쿠니에 합사하는 것) 자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조 유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 사람을 차별 없이 신으로 모시는 일본의 시스템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도조 유코: (이희자 씨) 당신의 슬픔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당신 아버님의 영혼이 평온하게 쉬고 계시는데 이런 식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흔들어대면 아버님이 좋아하시리라 생각하시나요? 분명히 아버님은 슬퍼하고 계실 겁니다.
기막힌 대화가 이어졌다. A급 전범 도조 히데키의 손녀, 도조 유코는 “야스쿠니 신사에 왜 강제 징용된 조선인이 합사되어야 하느냐”는 물음에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인 신분으로 싸웠으므로, 또 죽어서는 야스쿠니에 간다는 약속을 하고 싸웠으므로 합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요지로 답했다.
나아가 ‘이런 야스쿠니의 시스템이 자랑스럽다. (죽은 이들의) 영혼이 평화롭게 쉴 수 있으리라 믿는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도조 유코, 그녀에게 야스쿠니 신사는 할아버지 도조 히데키를 제신으로 평안히 모시고 만나며 자부심을 보상받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처럼 비쳤다.
반면 그녀의 망언에 마주한 이희자(76)씨는 1944년 일본군의 강제징용에 의해 아버지를 잃었다. “피할 수 없으니 빨리 다녀오겠다”던 아버지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남겨진 가족들은 그대로 태평양전쟁 피해자 유족이 됐다.
세월이 흘러 이희자씨가 강제 징용된 아버지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1997년에 들어서였다. 그러나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었다. 일제는 살아 있는 아버지를 빼앗았고, 야스쿠니는 죽은 아버지까지 빼앗아 갔다. 이러한 이희자씨에게 야스쿠니 신사는 현존하는 지옥이 아닐 수 없다.
무관심 속에 방치된 야스쿠니의 한국인
일반적으로 한국인이 인지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라 함은, 일제의 침략전쟁과 전쟁범죄를 미화, 선전하는 데 앞장선 군국주의 시설이다. 이는 주지의 사실로, 야스쿠니 신사를 거론할 때 언론과 매스컴이 가장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이슈이기도 하다. 하여, 정부와 민간 차원의 대응도 상당히 활발한 편이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에 2만 1000여 명에 이르는 한국인이 무단으로 합사되어 있다는 사실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학계의 연구가 본격화된 것도 비교적 최근 일이며, 이희자씨와 같은 활동가들의 노력을 통해 조금씩 이슈화되기 시작했다. 국회 차원의 관심은 2005년 당시 강창일 의원 등 79명이 낸 ‘야스쿠니 신사의 한국인 합사 취하 및 일본 각료 등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중단을 촉구하는 대한민국 국회 결의안’이 거의 유일하다.
이러한 무관심 속에 결국 문제 해결의 공은 유족, 즉 야스쿠니 신사의 무단 합사로 피해를 입고 있는 후손들에게 돌아갔다. 유족들은 2001년, 2007년, 2013년 3회에 걸쳐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에 한국인 합사 철회 소송을 제기했으나 앞선 2건은 기각, 마지막 2013년 소송은 1심 패소한 상태다(2019년 5월 28일 도쿄 지방법원 판결).
▲ 지난 5월 28일, 야스쿠니 신사 한국인 합사 철폐 소송 패소판결에 눈물을 흘리는 유족들(민족문제연구소 영상 갈무리) ⓒ 최우현
야스쿠니가 자행한 무형의 폭력과 강압
야스쿠니 신사 합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행위가 유족들의 동의를 전혀 받지 않은 ‘무단’ 합사라는 점이다. 실제 야스쿠니 신사가 식민지 출신(조선, 대만)의 군인, 군속 출신의 전사자 합사에 착수한 것은 1959년경. 그러나 이 행위는 매우 위법적인 행위였다.
왜냐하면 1959년 한국은 더 이상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으며 ‘국적(國籍)’도 일본에 소속돼 있던 과거와는 달랐다. 1952년, 일본 법무부 통지에 의거 일본 내 거주하는 한국인은 일본 국적을 박탈 당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국적 조항을 근거로 조선 출신 강제징용 희생자들을 전후 보상 대상에서 배제했다. 쉽게 말해, 이제 국적도 바뀌고 국가의 지위 등도 바뀌었으므로 보상 등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일본 정부가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는 이러한 국제적 지위의 변동과 인식의 변화를 아예 무시하고 조선 출신 강제징용 희생자들을 무단 합사한다. 실상 이는 매우 폭력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일본의 역사학자 아카자와 시로 교수는 자신의 저서 <야스쿠니 신사>에서 당시 야스쿠니 신사의 행위를 비판했다. 그는 야스쿠니 신사가 “식민지 출신의 합사를 천황과 국가로부터 받는 은혜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등 패전 후 발생한 커다란 변동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 1940년경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참배객들(야스쿠니 신사 홈페이지) ⓒ 최우현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나서 잘못된 상태를 시정해야 하지 않을까?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유족들의 요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유족들에게 일체의 통지도 하지 않았던 폭력적 무단 합사를 철폐하고 조상들의 넋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스쿠니 신사의 입장은 무엇일까?
납득할 수 없는 야스쿠니의 논리
앞서 소개한 다큐에서 야스쿠니 신사의 입장을 대변한 도조 유코씨가 발언을 통해 야스쿠니 신사의 입장을 소개한다, 실제로 도조 유코 씨의 주장은 야스쿠니 신사의 입장과 대부분 일치한다.
도조 유코: “당신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마음대로 합사했다고 주장하시지만… 이것은 일본의 룰이었어요. 전사한 사람은 어떻든지 야스쿠니에 모신다는 것은 일본의 룰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타이완도 한국도 말할 필요도 없이 ‘일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차별하지 않고 합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도조 유코: “(이희자 씨에게) 아버님의 심정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당신의 척도로 아버님의 심정을 전부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당시 한국, 타이완의 아버님들은 정말로 용감하게 싸우셨습니다. 그것을 60년도 지난 지금 아버님을 야스쿠니에서 빼내려고 하는 것은 아버님의 의사를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그래도 아버님을 빼내고 싶으신가요?
그리고 또 하나, 일단 합사를 하면 영혼들은 하나의 방석처럼 되어버립니다. 이 사람을 빼내고 저 사람을 빼내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합사(合祀)라는 말은 사전에 있어도 분사(分祀)라는 말은 없습니다.”
* (2006.8.13. 방영)
정리하자면 ▲그 당시(전사한 시점)에서는 조선 출신자도 모두 일본인이었으므로 죽은 후에도 일본인이라는 점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모셔진다는 생각으로 싸우다 죽었다는 점 ▲교리상 하나의 영혼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한국인 합사’를 철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인이 수천 년간 이어 내려오고 지켜온 전통적인 사생관과 죽은 자를 위로하던 풍습 따윈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야스쿠니 신사의 사생관, 종교 교리를 강요하는 논리다. 이에 대해 “야스쿠니 신사 합사 문제는 민간 풍습에 대한 일본 국가 권력의 폭력적 개입으로 인해 치유되지 않는 평생의 한”이라는 지영임 교수의 비판이 있기도 했다(지영임(2013), 야스쿠니 재판을 통해 본 한일 종교관의 쟁점과 해결방안).
위자료 ‘1엔 소송’
이러한 마음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유족들은 오랜 기간 주위로부터의 오해와 편견에 시달려 왔다. 무엇보다 뼈아픈 것은 전후 사정은 알아보지 않은 채 이들을 친일파라고 매도하는 시선들이다.
“어떤 사람은 속 모르고 야스쿠니에 있다고 하면 뭐라고 말하는 줄 알아요? 친일이라는 소리를 합니다. 얼마나 일본에 충성을 다했으면 야스쿠니에 모셔놓고 그렇게 잘 대접하는데 무슨 그게 한이 되냐고 합니다. 아주 죽을 것 같아요. 그 소리를 들으면…”
*출처: 박남순 / 야스쿠니 무단합사 피해자 후손 인터뷰( ‘19.3.5.)
민족문제연구소 등에 따르면 위 박남순(76)씨의 아버지 박만수씨는 1942년 11월에 군속으로 징용되어 남양군도 브라운 섬에서 희생됐다. 그와 함께 야스쿠니 합사 철폐 소송에 참여하고 있는 이명구(81)씨의 아버지 이낙호씨도 마찬가지로 1944년 군속으로 징용, 남양군도 팔라우 섬에서 사망했다. 모두 일제의 강제징용에 의해 가족을 빼앗겼다. 이들의 이야기는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라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증언집을 통해서도 자세히 알 수 있다.
물론 아주 드물게, 자발적으로 전쟁터에 나가 전사하고 야스쿠니의 제신으로 모셔진 한국인 영령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특수한 경우를 일반적인 일로 전제하고 2001년 이래 20년 가까이 일본 정부, 야스쿠니와 싸워온 유족들을 친일이라 매도할 순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악질적인 오해는 이들 유족들이 ‘돈’을 위해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전혀 맞지 않은 사실이다. 실제 소송에 참여한 한국인 유족들은 매번 위자료(손해배상)를 요구하긴 했지만 그 액수는 불과 ‘1엔'(약 10원). 그야말로 상징적인 액수다. 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유가족들은 다시 소송(2차 항소심)을 준비 중이다. 1심 도쿄 지방법원 패소의 아픔을 넘어 주저 없이 상급 재판소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른다. 1심 판결까지만 해도 5년 7개월이란 긴 시간이 소요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항소심에는 유족들이 납득할 만한 답변이 나올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도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지난 5월에도 일본 도쿄 지방법원은 판결 당일 5초가량의 판결문 낭독만 하고 판결 이유조차 설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참으로 무책임하다. 그 한마디를 하려고 5년 7개월을 기다리게 했단 말인가.
이처럼 현 일본 정부와 사법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야스쿠니 신사를 향해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일본이 한국인 합사의 잘못됨을 인정하려면 강제징용의 잘못된 역사를 다시 한번 들추어내고, 무단 합사와 같은 무형적 폭력 행위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극우 정치를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지금의 일본 정부가 스스로 나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운 실상이다. 광복 후 7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지만 국제사회가 인정한 전쟁 범죄의 가해자는 여전히 당당하고 피해자는 그 몰염치에 상처받고 있다.
10월 17일(목)부터 3일간 야스쿠니 신사의 제사, ‘추계예대제’가 거행된다. ‘야스쿠니 뉴스’가 또 한 번 포털의 메인을 차지할지도 모른다. 올해는 한일 양국의 역사 전쟁 한가운데 방치된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는 건 어떨까.
▲ ‘진지하게’
(서울=연합뉴스) 이지은 기자 = 한일 역사를 배우기 위해 방한 중인 일본 주오대학부속 고등학생들이 22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아 전시실을 둘러보며 연구원의 한일 식민지배 역사 관련 설명을 듣고 있다. 2019.10.22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장우리 기자 = “야스쿠니(靖國) 신사는 어릴 때 도시락 싸서 소풍 가던 아름다운 곳이라고만 생각했는데….”
22일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만난 일본인 여고생 카와세 아스카(17)양은 숙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박물관에서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인 이희자 할머니의 역사 강연을 들은 카와세 양은 “몇 년 전에도 한국을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 방문은 사뭇 다르다”며 “일본에서는 배우지 못했던 식민지배 역사를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일본 도쿄의 주오(中央)대학부속고등학교 학생 40명은 이날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방문해 일제강점기의 상흔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들뜬 표정으로 전시실 관람을 시작한 이들은 식민지배의 실상에 대한 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을 들으며 이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은 자료집에 틈틈이 필기를 하기도 했다.
이번 역사 답사를 기획한 재일교포 교사 고화정(40)씨는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한일 간 과거사를 배우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며 “학생들이 스스로 역사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는 걸 보고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사회 과목을 가르치는 카미무라 아키코(33)씨는 “그동안 학생들이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K팝과 드라마를 활용해 한국 문화를 가르쳐 왔다”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의 역사적 배경을 직접 현장에서 배워보자는 취지로 이번 일정을 기획했다”고 밝혔다.
학생들 역시 이번 답사가 한국을 더 깊게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했다.
자신을 ‘아미'(방탄소년단의 팬클럽)라고 밝힌 카토우 유나(17)양은 “전시실에서 벽관(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기 위해 벽에 홈을 파서 만든 투옥실) 문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며 “직접 눈으로 보니 더 와닿는 게 많았다”고 말했다.
다카츠 유스케(17)군은 “일본에 돌아가서 관련 역사를 더 전문적으로 공부해보고 싶다”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했다.
▲ 한일 역사 투어 나선 일본 고등학생들
(서울=연합뉴스) 이지은 기자 = 한일 역사를 배우기 위해 방한 중인 일본 주오대학부속 고등학생들이 22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아 전시실을 둘러보며 연구원의 한일 식민지배 역사 관련 설명을 듣고 있다. 2019.10.22 [email protected]
일본 학생들을 만난 이희자 할머니는 “일본 때문에 겪었던 불행한 이야기를 먼저 하게 돼 미안하다”면서도 “일본에 끌려갔다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가 아직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돼 있다”고 불행한 가족사를 설명했다.
이어 “몰랐던 사실을 알아간다면 (한국과 일본이)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여러분의 마음 한구석에 내 이야기가 남는다면 정말 보람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학생들은 남영동 대공분실, 서대문형무소 등을 더 돌아본 후 오는 24일 일본으로 돌아간다. 앞서 21일에는 명성황후 시해 현장과 평화의 소녀상도 방문했다.
중고교 <역사> 국정교과서 진필진으로 유일하게 참여했던 장교를 국방부가 진급시키려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역사단체들이 ‘취소’를 요구하고 나섰다.
22일, 역사정의실천연대는 성명을 내고 “국정교과서 현대사 집필진이었던 나종남 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 군사사학과 교수가 무려 1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대령 진급 심사를 통과했다고 한다”면서 “국방부는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반 헌법적인 역사관을 지닌 인사를 대령으로 진급시킨 데 대해 국민 앞에 사죄하고, 진급 결정을 즉각 취소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역사정의실천연대는 “국방부가 적폐청산은커녕 박근혜 정권의 교육적폐 중의 적폐인 국정 역사교과서의 집필자에게 대령 진급이라는 ‘훈장’을 달아 줌으로써,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의지를 무색케 했다”고도 지적했다.
역사정의실천연대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전국역사교사모임, 흥사단 등 450여 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이 단체 관계자는 이날 “국방부가 나 교수에 대한 승진을 취소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육사를 항의 방문할 예정이며, 1인 시위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오마이뉴스>는 지난 21일자 기사 “국정교과서 집필 장교, 15 대 1 경쟁 뚫고 대령 진급?”(http://omn.kr/1le84)에서 “국방부가 2016년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교과서 집필에 참여했던 현역 장교를 대령으로 진급시킬 예정인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역사교육단체 대표자들은 물론 군 안팎에서도 ‘적폐 교과서 ‘복면’ 집필자에 대해 책임을 묻기는커녕 진급을 시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처음 보도한 바 있다.
▲ 부산지역 교육단체인 부산학부모연대가 23일 부산시교육청 본관 앞에서 친일파 교가 사용 부산지역 학교 전수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민중의소리 김보성 기자
“과거사 청산하자면서 학교 행사 때마다 친일파 교가를 부르고 있다는 게 말이 되나요”
23일 부산시 교육청 본관에 모인 부산지역 학부모들은 “친일파가 만든 교가를 반드시 교체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부산 학부모들은 역사를 배우고, 정의를 세워야 할 학교에 친일잔재가 버젓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다.
일본의 강제징용 배상 거부에 이은 수출제재, 경제전쟁 본격화로 곳곳에서 일본 규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아이들의 배움터인 학교에서 일제잔재 청산은 여전히 더디다. 특히 학교를 상징하는 교가가 친일파 작곡·작사가의 손을 거쳐 현재까지 불리고 있다는 것은 돌아봐야 할 지점이다.
부산지역 교육단체인 부산학부모연대는 친일파 작곡·작사자들이 만든 교가임에도 이를 바꾸지 않고 있는 학교 명단을 전수 조사해 이날 부산시교육청 본관 앞에서 공개했다. 명단을 보면 친일파들의 교가를 지금껏 사용 중인 부산지역의 학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등 16곳에 달한다.
이들 교가는 군국가요의 나팔수였던 이흥렬,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참전을 선동했던 김성태와 김동진, 일제 전쟁물자 공출의 공신인 이항녕이 각각 작사·작곡을 맡았다. 이흥렬은 일제 강점기 시기 내내 전국을 돌며 군국가요를 보급한 친일파다. 김성태 역시 ‘용사가 되는 날’, ‘우리들은 제국군인’ 등 노래로 전쟁참전을 선동했다.
김동진은 만주악단협회, 신징음악단 공동주최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악국 발표회’에서 일본을 찬양하는 내용의 작품을 내놓는 등 친일 행적을 일삼았다. 관료였던 이항녕은 경성제국대 졸업과 동시에 조선총독부에 들어가 친일 활동을 펼쳤고, 1941년 하동군수로 부임해 식량공출에 앞장선 바 있다. 이들은 모두 일제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을 수록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이다.
더 큰 문제는 친일파 작곡 교가에도 이를 칭송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A 고교의 경우 교가 소개란에 “한국의 중견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로 활동했던 이흥열 교수에 의해 (교가가) 고쳐졌다”며 “전자의 곡은 고음 위주나 후자의 것은 정중하고 장중한 느낌을 줘 힘에 넘친다”고 설명했다. 곡에는 학업정진으로 민족의식 고취 등을 노래한 내용을 담았다고 밝혔다.
이밖에 성차별과 군사풍 분위기의 교가 내용 역시 문제가 됐다. ‘부덕의 선봉, 고운 요조들, 행실을 닦아, 순결한 목련처럼’, ‘대한의 일꾼, 충성의 우리의 넋, 애국충성 가슴에 새겨, 함포연기 자욱한데, 태평양에 전선을 띄우고’ 등 시대에 동떨어진 표현이 많았다. 일제 문화 통치 시기 교가 제정 확산으로 일제 군가와 비슷한 군가, 행진곡 형태의 노래도 여러 학교에서 발견됐다.
이에 대해 부산학부모연대는 “친일파가 만든 교가를 아직도 학교 행사 때마다 부르고 있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며 “시 교육청은 우선 교가부터라도 청산되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구포초등학교의 학부모인 이인수 씨는 “친일파 재산조차 제대로 환수 못 하고, 국어책에는 친일 시인의 시가 있고, 친일파가 장학사업을 하고, 일제를 찬양하는 곡을 쓴 친일파의 노래를 배운다”며 “아직도 우리는 일제의 그림자 속에 있다”고 비판했다.
D고교의 졸업생인 박강우 씨도 “최근에야 우리 교가가 친일파의 손에서 탄생한 것을 알게 됐다”며 분개했다. 그는 “항일 운동을 강조하고 이를 자긍심으로 삼는 학교에서 침략전쟁을 찬양한 자의 곡이 교가라는 사실을 누구도 알려준 적이 없다”면서 “즉각 교가를 교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정은 부산학부모연대 대표는 “사회적으로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지 못하면서 친일파 교가 외에도 다수의 교가에 잔재가 남아있다”면서 “과거사를 바로잡고, 정의를 세워야 할 미래세대의 공간에 청산되지 못한 역사의 그늘이 드리워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친일 작사·작곡자의 교가 사용 학교는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 있다. 최근 바른미래당 이찬열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친일파 교가를 사용 중인 학교는 충남 31곳, 경북 30곳, 전북 25곳, 충북 23곳, 전남 18곳, 부산 16곳, 광주 13곳, 강원 10곳, 대구 6곳, 경기 6곳, 경남 5곳, 대전 2곳, 울산 3곳, 서울 1곳 등 전국적으로는 모두 189곳에 이른다.
▲ 광복절인 8월 1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아베규탄 촛불문화제에서 시민들이 경제 도발을 일으킨 일본의 아베 정권을 규탄하는 손피켓과 친일인명사전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9.08.15ⓒ정의철 기자
▲ 10월 22일 장남 노관우씨가 고 노동은 교수 대신 문화체육관광부 박양우 장관으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고 있다.
[평택시민신문] 평택시가 22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린 ‘2019 문화예술발전 유공자 시상식’에서 고 노동은 교수가 문화예술분야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장관으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고 밝혔다.
평택의 위인 지영희의 숨겨진 업적을 최초로 발굴해 평택시와 인연이 깊은 고 노동은 교수는 우리 민족의 근현대음악사를 방대하고 깊게 연구한 대학자다. 그는 민족음악학·친일음악·항일음악·동아시아음악·근현대음악가·음악교육 등 수많은 자료를 수집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 생전에 평택시의 열정적인 음악문화 사업에 감동받아 한 평생 수집한 근현대음악사료 7만점을 평택시에 기증한 바 있다.
현재 평택시는 기증자료를 전 국민에게 알릴 수 있도록 한국민족음악도서관(가칭)을 조성 하고 있으며 내년 상반기에 개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장선 시장은 “한민족의 문화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헌신한 고 노동은 교수의 유지를 받들어 미군기지가 있는 평택시가 한국을 대표해 한류음악을 알리는 국제문화도시로 거듭나겠다”고 밝혔다.
한편, 문화훈장은 문화예술발전에 공을 세워 국민문화 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는 훈장(5개 등급: 금관·은관·보관·옥관·화관)이다.
아사히신문 마쓰이 야요리와 함께
국제여성법정서 세기의 판결 받아내
12개국 여성 희생자 기림비 세우며
한일 넘어선 전시 성범죄 보편성 강조
“일본에 속아 끌려온 한반도 여성들
피해자 동의없는 국가정상 간 합의
해결도 그 무엇도 아니라고 생각”
▲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법정’을 주도했던 나카하라 미치코 와세다대 명예교수가 21일 오후 서울 중구 의주로의 한 호텔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email protected]
“식민지배를 받은 한국인들이 위안부 문제를 민족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과 전쟁의 문제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제의 잔혹했던 36년 식민통치의 아픔을 고발하는 대표적인 ‘역사적 상징’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오랜 시간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며 현실참여 활동을 해온 여성운동가인 나카하라 미치코 와세다대 명예교수(‘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리서치 액션센터’ 공동대표)가 강조하는 것은 ‘전시 여성에 대한 범죄’라는 위안부 문제의 보편성이다. 그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초청으로 22일 열린 ‘2000년 여성국제법정’ 19주년 기념 콘서트에 참여하기 위해 21일 방한해 와 만났다.
“저는 원래 말레이시아사를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1990년대에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 집회를 열었는데 말레이시아 기자에게 집회를 취재해보라고 권했죠. 그 기사가 마침 현지 신문 1면에 실려서 말레이시아에서도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중에 로자린 쏘우라는 피해자를 지원하면서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게 됐습니다. 할머니를 만나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면서 친해진 뒤 제 ‘대모’가 되어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저와 위안부 문제의 시작이네요.” ▲ 나카하라 미치코 와세다대 명예교수. 그와 동료들은 2000년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민간 법정을 준비하며 심각한 협박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김명진 기자 [email protected]
그 뒤 나카하라 교수는 일본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여성운동가였던 마쓰이 야요리(1934~2002) 기자와 함께 세기의 재판에 나서게 된다. 2000년 12월8일부터 사흘간 열린 ‘여성국제법정’이란 이름의 민간 법정이었다. 그는 “당시 우리는 위안부 문제에 엄청나게 큰 충격을 받아서 이를 다른 일본인들에게 알리고 전하는 일에만 집중했지만, 마쓰이는 달랐다”고 말했다. “갑자기 마쓰이가 ‘위안부 문제는 여성에 대한 국가와 일본군의 범죄’라며 이를 (확인하는) 재판을 하자고 했어요. 우리는 그런 재판이 가능할까 몹시 두려웠지만, 어쨌든 시작을 한 거죠. 마쓰이는 지금 생각해봐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나카하라 교수 등은 재판 실무 준비를 위해 1998년 6월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일본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하지만 걱정거리가 너무 많았다. 가장 큰 두려움은 전쟁의 최고 책임자이자 군 통수권자였던 히로히토 일왕을 법정에 올린다는 사실이었다. 재판을 주도한 마쓰이 등에게 우익의 협박장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한동안 안전한 곳에 몸을 숨겨야 했다.
더욱이 아시아 각국에 흩어진 피해자들을 도쿄로 불러 모으는 것은 엄청난 비용과 끈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총 64분의 피해자를 증인으로 법정에 불렀습니다. 할머니들 대부분이 고령이어서 가족이나 운동가들이 최소 2명 정도는 붙어야 했어요. 항공료와 체재비, 통역·번역비 등도 필요했어요. 중간에 ‘내 퇴직금을 부어야 하나’란 생각도 했지만, 일본의 한 고령 여성이 ‘천황의 죄를 물어야 한다’며 거액을 기부하셨어요.”
이 민간 법정에선 위안부 제도에 책임이 있는 일왕 등 9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위안부 제도가 나치 시절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에 맞먹는 ‘인도주의에 대한 범죄’임을 명명백백하게 선언한 세기의 판결이었다.
그 뒤 나카하라 교수에게 또 하나의 전기가 찾아온다. 와세다대 박사과정의 제자 홍윤신( 저자)씨가 오키나와 위안소 조사 연구를 위해 미야코지마를 방문했다가 중요한 증언을 채록했기 때문이다. 섬 주민 요나하 히로토시는 홍씨에게 12살 때 섬에서 피부가 하얀 조선인 여성들이 물을 긷거나 빨래를 하러 우물에 들렀다 잠시 쉬던 장소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갑자기 섬에 왔다가 전쟁 뒤 사라진 누나들이 누굴까 의아해하던 요나하는 이후 그들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조사 결과 미야코지마에만 총 17곳의 위안소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나카하라 미치코 와세다대 명예교수가 21일 오후 서울 중구 의주로의 한 호텔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email protected]
이 장소에 위안부 여성들을 기억하는 비를 만들고 싶다는 요나하의 얘기를 들은 홍씨는 한국 여성운동의 ‘대모’ 윤정옥(94) 선생과 나카하라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나카하라의 주도로 시민 모금이 이뤄져 2008년 9월7일 비를 세울 수 있었다. 나카하라는 위안부 희생자가 된 12개국 여성들을 모두 기억하기 위해 12개국 언어로 비를 새겼다. 비의 이름은 ‘여성들에게’다.
나카하라는 위안부 문제가 일본 정부와 군이 저지른 ‘국가 범죄’임을 부인하려는 한·일 양국의 사회 분위기에도 일침을 놨다. “규슈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산부인과 의사였던 아소 데쓰오(1910~1989)라는 의사가 1937년 11월 군에 소집이 됩니다. ‘나는 부인과 의사인데 왜 소집을 할까’ 의아해하던 그가 상하이에 도착해 보니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아소는 군으로부터 그곳에 있던 여성 100여명의 신체검사를 하라는 명령을 받은 뒤, 일기에 ‘일본인 위안부들은 성매매를 해본 이들이었지만, 한반도 출신 여성들은 성경험조차 없어 보이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적었다. 나카하라는 “(한반도 출신 여성은) 좋은 일거리가 있다고 속여서 끌고 온 것이다. 이는 사기다. 성경험이 없는 여성이 어떻게 위안부가 되기 위해 오겠냐”고 말했다. 나카하라는 한·일 양국 정부의 2015년 12·28 합의에 대해서도 “피해자들의 동의 없이 국가 정상끼리 한 합의는 해결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본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 아베규탄시민행동이 23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소미아’(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를 예정대로 종료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지난 8월 22일 지소미아 종료를 선언했지만, 정부 안팎에선 지소미아 효력이 끝나는 11월 23일 이전 한일 정상회담을 열어 일본 수출규제 철회와 지소미아 연장을 맞바꾸는 안이 제기되고 있다. ⓒ 김시연
‘지소미아'(GSOMIA: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 한 달을 앞두고, 정부 안팎에서 일본 수출규제 철회와 지소미아 연장을 맞바꾸는 방안이 나오고 있다. 이에 시민사회단체들이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 없이 지소미아 연장은 있을 수 없다며 ‘대못 박기’에 나섰다.
750여 개 시민사회·노동·종교단체가 참여한 ‘아베규탄시민행동’은 23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에 지소미아를 예정대로 종료하라고 촉구했다.
“강제동원 사죄 배상 문제, 한일 정부 야합해선 안돼”
우리 정부는 지난 8월 22일 일본이 한국을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자 지소미아 종료를 선언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지소미아를 연장하라고 우리 정부를 지속해서 압박해왔고, 우리 정부도 최근 이낙연 총리가 일왕 즉위식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지소미아 효력이 끝나는 11월 23일 이전 한일 정상회담을 열어 일본 수출규제 철회와 지소미아 연장을 맞바꾸는 안이 논의될 수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시민사회단체는 단호했다.
박석운 아베규탄시민행동 공동대표는 이날 “지금 강제동원 사죄 배상을 미봉하거나 은폐하고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에서 아베와 문재인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해서 지소미아를 연장할 것이라는 보도가 흘러나오는데 명백한 가짜뉴스이길 바란다”면서 “아베 정부의 경제침략과 역사 부정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는데 이 문제를 미봉하려는 건 역사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일본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대신한 김진영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사무국장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나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도 사과를 받는 것도 거래처럼 이뤄져선 안 된다”면서 “정부 간 야합으로 문제를 덮으면 한국 사회도 일본 사회도 이 문제를 어떻게 기억하고 무엇을 책임질 것인가란 문제가 계속된다”고 밝혔다.
김 사무국장은 “1965년 한일협정이 그랬고 95년 아시아여성기금,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합의가 그랬듯 피해자와 국민 뜻을 무시하고 정부 간 야합으로 덮어 지금 일본 정부는 아직 식민 지배하는 것처럼 한국을 대하고 있고 피해자들은 아직 해방을 맞지 못한 고통 속에 살고 있다”면서 “정부는 강제동원 문제를 일본과의 정치적 협상 지렛대로 이용하려고 하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실제 오는 24일 아베 총리 면담을 앞둔 이낙연 총리는 지난 18일 일본 언론 인터뷰에서 일본이 수출규제를 철회하면 지소미아 종료를 재검토할 수도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다만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21일 국정감사에서 한일정상회담 가능성에 대해 “정상회담이 가능하려면 일본의 전향적 태도와 성과가 담보돼야 한다”면서 “그 성과를 만들기까진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밝혔다.
아베규탄시민행동은 이날 기자회견문에서 “아베 정권이 아무런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일왕 즉위식을 계기로 한일 관계를 복원하려 시도하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면서 “진작에 파기됐어야 했을 협정을 두 번이나 연장한 뒤, 수출규제와 결부해 연장을 종료하고 다시 이와 결부해 재연장한다면 문재인 정부가 촛불 민의에 반해 박근혜 정권의 적폐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며 스스로 적폐정권 행태를 닮아가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들은 “우리는 문재인 정부에 보다 단호한 태도로 미국의 압력, 아베 정권의 도발에 맞설 것을 촉구하며 박근혜 적폐인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예정대로 종료시킬 것을 요구한다”며 오는 26일 오후 6시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아베규탄 9차 촛불문화제’를 예고했다.
시즌4는 기존처럼 친일파를 소환하여 그들이 식민지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이번시즌부터 인물을 확장하여 친일파 뿐 아니라 식민지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좀 더 입체적으로 식민지 시기를 다룰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지속적인 청취 부탁드립니다.
▲ 서산시 지곡면 안견기념관 입구에는 친일부역자로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올라있는 황산 이종린의 문학기념비(빨간 원안)가 세워져 있다. ⓒ 신영근▲ 친일인명사전 자료에 따르면 이종린(李鍾麟 1883 ~ 1950)은 당시 서산군 출생으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언론인·종교인이며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이종린에 대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기록은 무려 4페이지에 이른다. 지난 2004년 세워진 문학기념비에는 일제강점기 후반 친일 행적이 빠진 그의 일생(사진 왼쪽)과 함께 그의 작품(사진 오른쪽)이 적혀 있다. ⓒ 신영근
3.1 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은 올해 서산시에서는 친일파 기념비가 세워진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서산시 지곡면 안견기념관 입구에는 친일부역자로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올라있는 황산 이종린의 문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친일인명사전 자료에 따르면 이종린(李鍾麟, 1883~1950)은 서산군 출생으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언론인·종교인이며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이종린에 대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기록은 무려 4페이지에 이른다.
독립운동 후 변절… 소년들에게 ‘지원병 지원’ 선동
이종린은 변절한 지식인이었다. 친일인명사전 등 현재 남은 기록을 통해 그의 행적을 따라가보면 일제강점기 3.1 운동과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의 주필로 참여하는 한편, 물산장려회와 신간회에서도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하며 독립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주력하다가 옥고를 당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종교인과 문인으로 활동했다.
여운형, 안창호와 함께 3대 웅변가로 일컫어진 그는 변절 후에 일제를 위해 강연회에 나섰다. 당시 천도교 기관지인 <신인간>을 통해 일본 식민으로서 지원병에 참여하는 것이 내선일체 완성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주장을 담은 글을 여러 편 발표하기도 했다. 나아가 각종 월간지에 “제군들은 머리와 눈이 있는 청년들이다. 일제히 지원병을 지원하라” “징병제가 실시되어 지금 서울 거리거리에는 반도 민중이 모인 자리마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소리로 가득찼다”라고 선동했다.
이종린은 일본 패망 직전인 1945년 7월 조직된 친일단체인 국민동지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친일행위와 관련해 소환장을 발부하자 자진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조직적인 방해로 제대로된 친일청산이 이뤄지지 못했고 그 역시 무죄로 풀려난다.
이후 이종린은 제1, 2대 제헌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제헌국회에서 헌법 기초위원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공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한국전쟁 때 납북돼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친일인명사전에는 이종린의 이 같은 독립운동과 함께 친일행적이 고스란히 기술되어 있다. 그는 당시 천도교 기관지인 <신인간>을 통해 일본 식민으로서 지원병에 참여하는 것이 내선일체의 완성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주장을 담은 여러편의 글을 발표했다고 기록되어있다. ⓒ 신영근▲ 친일인명사전에는 1942년 조선에 징병제가 실시될 것이라는 소식에 조선신궁에서 징병제실시감사제를 거행하고 “징병제가 실시되어 지금 서울 거리거리에는 반도 민중의 모인 자리마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라고 외쳤다(홍은감읍(鴻恩感), <대동아> 1942년 7월호)“고 전했다. 특히, 이종린은 일본 패망 직전인 1945년 7월 조직된 친일단체인 국민동지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빨간 네모안) ⓒ 신영근
이종린 문학기념비는 당시 서산시와 지곡면 등을 중심으로 ‘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2004년 건립되었다. 이 비는 건립 당시 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와 서산시의 보조금으로 세워졌으며, 서산시 소유 부지에 건립되었다.
기념비에는 이종린의 독립운동 활동 내용은 비문에 상세히 담겨 있으나, 이후 변절해 일본에 부역한 사실은 쏙 빠져 있다.
당시 문학비 건립 추진위원이었던 A씨는 지난 18일 통화에서 “우리 지역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뛰어난 작품을 남긴 이종린 선생을 기리기 위해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건립했다”면서도 “당시에 이종린 선생이 친일을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A씨는 당시 문학비 건립에 약 2천만 원이 들었으며, 추진위가 모금을 하고 서산시가 일부를 지원해줬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功)과 과(過)를 볼 때 공이 많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건립했다”며 “당시 천도교 수장을 맡은 (이종린) 선생이 천도교를 말살하겠다는 일본의 위협에, 종교를 살리기 위해 부득이 한번 강연을 한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A씨는 “당시 한번 강연한 것을 가지고 친일부역이라고 하면 당시에 친일 안 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문학과 친일은 관계가 없다. (친일이라 하더라도) 주민들이 다 이해하기 때문에 투표를 해서 두 차례나 국회의원으로 시켜줬다. 당시 독립운동으로 정부에서도 훈장(이종린은 지난 1967년 12월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 받았다)을 준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는 파악조차 못하고 있어… “철거는 법규 확인해봐야”
▲ 친일파의 문학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것과 관련해 24일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 권희용 지부장은 “이종린은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독립운동과 3년 옥고를 치른 부분“이 있지만, ”후반에는 일본을 찬양하는 강연 등을 한 인물로 당시 신문과 문헌에 많은 자료로 나와있다”라고 말했다. ⓒ 신영근▲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는 이종린 문학기념비는 서산시 지곡면 안견기념관 앞에 설치되어 있다. 기념관 뒤로 지곡면행정복지센터가 보인다. 하지만 지곡면 행정복지센터는 이종린이 친일파 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신영근
서산시는 해당 문학비가 시의 지원을 받아 시 소유 부지에 세워져 있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었다. 시 관계자는 “정확히 얼마가 지원됐는지 당시 문서를 확인해야 알 수 있다”면서 “법적인 5년의 문서보존기간이 끝나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라고 해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 권희용 지부장은 “이종린은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독립운동으로 3년 간 옥고를 치렀지만 후반에는 일본을 찬양하는 강연을 한 인물로 당시 신문과 문헌에 많은 자료로 나와있다”면서 “공(功)이 있다고 봐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오히려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변절하면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권 지부장은 이어 “변절한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을 위한 강연에 나서면, 국민들은 ‘독립운동가의 말이 옳은 게 아니냐”하면서 부화뇌동할 수 있다”면서 “(변절로) 더 나쁜 결과를 초래했던 사람을 공만 평가해서 기념비를 건립한 것은 너무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다.
문학비 철거에 대해선 의견이 팽팽하게 엇갈렸다. 당시 건립추진위원 A씨는 “주민들과 많은 분들의 성금으로 건립된 문학기념비 철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당시 서산시에서도 승인을 해줘 시소유 부지에 건립한 것”이라고 반발했다.
시 관계자는 “원칙적으로 시소유 부지에 개인 기념비가 세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당시에 묵시적 협조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철거를 위해서는) 관련 법규를 확인 후에 처리하는 게 맞다”고 신중한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 권 지부장은 “잘못된 것을 인정 안 하고 잘한 것만 말하면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철거보다는 서산시 또는 시의회에 동의를 얻어 친일행적을 자세히 기록한 단죄비를 기념비 옆에 세워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한편 최근 충남교육청을 비롯해 전국에서는 교육청에서는 친일파가 작사·작곡한 교가와 학교에 걸린 일본인 교장 사진 등을 교체하는 등 친일잔재 청산에 나서고 있다.
▲ 근로정신대 피해자 이춘면 할머니가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후지코시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이후 입장을 밝히고 있다. 2019.01.23.ⓒ사진 = 뉴시스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 이춘면(88) 할머니가 별세했다. 이 할머니는 일본 기업 측에 자신의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지만, 어떤 사과나 배상도 받지 못한 채 작고하게 돼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할머니가 지난 26일 오전 0시 20분 서울 동대문구 소재 한 요양병원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28일 밝혔다.
이 할머니는 13세 때인 지난 1944년 “일본 후지코시 공장에 가면 돈도 벌고 중학교와 전문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국민학교 교장의 거짓말에 속아 근로정신대에 들어갔다.
이후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를 거쳐 도아먀시의 후지코시 공장에 갔고, 일요일을 제외하고 하루 10~12시간에 달하는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그곳에 있는 동안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하고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배고픔에도 시달렸다.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에서야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이 할머니와 같이 후지코시 공장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피해자는 1600여명, 이 가운데 여성이 1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지난 2015년 5월, 이 할머니는 자신이 입은 정신적·육체적·경제적 피해를 보상하라며 일본 후지코시 사에 1억원을 청구하는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2017년 3월, 한국 법원 1심 재판부는 후지코시 사측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며 이 할머니에게 1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당시 후지코시 사측은 ‘이 할머니의 손해배상청구권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소멸했다’는 취지로 항소했다.
지난 1월 항소심 재판부 역시 후지코시 사측에 “1억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또다시 후지코시 사는 항고했고, 지난 3월 22일 대법원은 이들에게 ‘상고 기록 접수통지’를 보냈다.
7개월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후지코시 사 측에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재판 절차도 진척이 없다.
다른 사건의 사례에 비추어 보면, 해당 서류를 일본 외무성이 송달하지 않고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외무성은 법원행정처가 지난 1월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에 송달해달라며 보낸 자산 압류 결정문을 전달하지 않고 있다가 지난 7월 19일 대구지법 포항지원에 돌려보낸 바 있다. 심지어 이 서류에는 아무런 반송 사유도 적혀있지 않았다.
한편, 이 할머니는 작고했지만, 이 할머니의 소송은 유족들이 계속 이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 30일 서울 서초동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열린 일제강제동원 문제해결을 위한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춘식 할아버지와 양금덕 할머니가 손팻말을 들고 있다. / 김창길 기자 [email protected]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일본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를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유엔에 진정을 넣었다. 30일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일본 철강기업 일본제철이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씨(95) 등 4명에게 각 1억원씩 배상하라는 원심 판결을 확정한 지 1년이 흘렀다.
민변과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은 이날 오후 서울 서초구 민변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유엔 인권이사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강제징용 문제가 불거진 후 유엔에 직접 진정을 제기한 건 처음이다. 진정서에는 ‘일본 정부와 기업에 강제징용 사실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죄하며 즉각적으로 배상할 것을 요구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김기남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위원장은 “진정서를 제출하면 고문 방지, 인권 등 주제별 특별 보호관들이 일본 정부에 서한을 보내는 특별 절차에 들어가게 된다”며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계기”라고 했다.
민주노총은 일본 정부와 기업에 책임을 묻기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내년 6월 국제노동기구(ILO) 총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엄미경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1999년과 2015년에 ILO전문가위원회에서 일본 정부의 강제징용을 ‘강제노동’이라 규정했다”며 “위원회에서 ‘일본 정부가 강제노동의 책임성을 받아들이고 희생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고 믿는다’는 의견서를 제출했지만 일본은 한 번도 이행하지 않았다”고 했다.
▲ 이춘식 할아버지가 인천 도림초등학교 학생들이 보낸 편지 내용을 들으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email protected]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씨와 양금덕씨(88)도 참석했다. 이씨는 “국민들이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양씨는 “1944년 5월31일 여수에서 배를 타고 6월1일에 나고야 미쓰비시 중공업에 도착했다. 목포, 나주, 여수, 순천 등 5개 도시에서 138명이 동원됐다”며 “이 숫자를 아직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아베 총리와 미쓰비시는 하루빨리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외쳤다. 이씨는 인천 도림초등학교 학생들이 쓴 편지 내용을 듣고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학생들은 이씨에게 “할아버지 잘못이 아니다. 강제징용을 한 일본이 잘못이다”라고 적었다.
민변은 일본 정부가 고의적으로 한국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는 절차를 방해하고 있다고 했다. 김세은 민변 강제동원대리인단 변호사는 “지난 1월 한국 대법원이 이춘식 할아버지를 채권자로 해 일본제철에 국내 주식 압류 명령서를 보냈다. 6개월 뒤인 7월에 반송받았다”며 “일본 외무성이 강제동원 손해배상 서류들을 송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팀장은 “헤이그 송달협약에 따라 반송할 경우 반드시 사유를 밝혀야 한다. 일본은 사유를 밝히지 않았다”며 “외무성이 고의적으로 지연시키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 법원은 지난 8월 압류 명령서를 다시 보냈다. 일본 외무성이 6개월 뒤인 내년 2월 압류 명령서를 재차 반송하면 한국 법원은 공시송달(송달할 서류를 법원에 보관하고 그 취지를 공고하는 방식)로 주식 압류와 매각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일본제철에 압류 명령서가 도달했다고 간주하고 주식 감정을 거쳐 매각 절차를 본격적으로 밟는다. 매각이 진행되고 주식이 현금으로 바뀌면 이씨 등 4명의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지급된다. 김 변호사는 “외무성에서 6개월 후에 반송한다고 예상했을 때 내년 상반기는 돼야 현금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변 강제동원대리인단은 지난해 10월 대법원 판결 이후 추가로 강제동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30일 기준 서울중앙지법에 제기된 추가 소송 건수는 21건이다. 광주지법에는 9건이 추가로 제기됐다. 주식회사 쿠마가이 구미, 니시마츠건설 주식회사 등 소송에 걸린 일본 기업도 11곳으로 늘었다. 최용근 민변 강제동원대리인단 변호사는 “현재도 기록 검토가 진행되고 있다”며 “소송 규모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 이춘식 할아버지와 양금덕 할머니가 시민들의 응원이 담긴 사진과 글을 전달받고 있다. / 김창길 기자 [email protected]
1일 푸르미르호텔에서 독립운동 연구자 등 100여명 참석 판결문과 GIS(지리정보시스템),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등 다양한 자료로 화성3.1운동 돌아봐
화성시청 전경. /사진 = 화성시 제공
[뉴스프리존,화성=임새벽 기자] 화성 3.1운동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 하는 학술세미나가 1일 푸르미르호텔에서 개최됐다.
학술세미나에는 독립운동 연구자와 화성시 3.1운동 100주년 추진위원회, 관내 광복회 회원, 문화관광해설사 등 100여 명이 참석해 화성 3.1운동의 위상 재정립에 나섰다.
이동언 선인역사문화연구소장의 사회로 ▲화성 3.1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장) ▲판결문을 통해본 화성 3.1운동(전병무 강릉원주대 교수) ▲GIS를 통해서 본 화성 3.1운동(이홍구 국사편찬위원회) ▲일본 소재 화성 3.1운동 자료현황과 분석(김도형 독립기념관 연구원) 등 주제발표가 진행됐다.
특히 이들 발표는 화성 장안·우정면 3.1운동 참여자에 ‘내란죄’를 적용한 판결문과 일본 방위성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사진자료, 지리정보시스템(GIS) 등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면서 그 어느 지역보다 강렬하게 전개됐던 화성 3.1운동을 재조명해 눈길을 끌었다.
종합토론에서는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이 좌장을 맡고 김주용 원광대교수,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최자영 한신대 연구원, 서민교 동국대 교수가 화성 3.1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논했다.
시는 이번 학술세미나를 통해 발표된 논문들은 올 연말 ‘화성독립운동연구’연구총서로 발간할 계획이다.
시즌4는 기존처럼 친일파를 소환하여 그들이 식민지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이번시즌부터 인물을 확장하여 친일파 뿐 아니라 식민지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좀 더 입체적으로 식민지 시기를 다룰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지속적인 청취 부탁드립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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