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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통치기간에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일제 신사가 만들어졌을까? ‘1군 1신사(神社)’와 ‘1면 1신사(神祠)’의 건립을 강요하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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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통치기간에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일제 신사가 만들어졌을까? ‘1군 1신사(神社)’와 ‘1면 1신사(神祠)’의 건립을 강요하던 시절

admin | 토, 2021/08/28- 00:18

[식민지 비망록 73]

식민통치기간에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일제 신사가 만들어졌을까?

‘1군 1신사(神社)’와 ‘1면 1신사(神祠)’의 건립을 강요하던 시절

 

이순우 책임연구원

 

2020년 정초 무렵에 경기도 양주시 남면행정복지센터(옛 남면사무소) 앞에 일제 때 만들어진 비석 하나가 남아 있다는 얘길 듣고 서둘러 그곳을 탐방하러 길을 나선 적이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곳은 분명 ‘남면(南面)’인데 그 위치가 정작 양주시의 제일 북쪽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다. 알고 봤더니 원래 이 지역은 경기도 연천군에 속했으나 해방 이후 1945년 11월 3일에 이르러 군정청 법령 제22호 「북위 38도 이남에 연접한 군촌면읍시(郡村面邑市)의 관할구역 임시이전」에 따라 ‘파주군 남면’으로 조정되었다가 다시 1946년 2월 5일 ‘양주군’ 관할로 이관 처리된 내력을 지녔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에 이곳은 어디까지나 연천군 남면이었던 것이다

경기도 양주시 남면행정복지센터에 남아 있는 ‘히라누마 젠쵸(윤선장) 송덕비’의 모습이다. 1940년 11월에 건립된 이 비석은 신산체육공원과 남면사무소의 구내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친일잔재논란과 관련하여 2019년에 철거되어 별도로 보관중인 상태이다.

 

아무튼 양주시 남면행정복지센터의 창고 옆쪽에서 바닥에 뉘어놓은 옛 비석 하나를 살펴보았더니 거기에는 “학무위원 겸 면협의회원 히라누마 젠쵸 송덕비(學務委員兼面協議會員 平沼善長頌德碑)”라는 글씨가 또렷하다. 이를 단서로 관련 자료를 뒤져보니 이 이름은 윤선장(尹善長, 1879~?)의 창씨명이며, 그가 연천군 남면 상수리 구장(1937.6)을 지냈다거나 양주세무서 관내 조선주 제조업자 총회에서 탁주 1등상을 수상(1937.10)했다거나 연천군 남면 면협의회원(1939.5)의 당선자라거나 하는 등의 경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비석의 뒷면에도 별도의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그 뜻을 간추려보니 대략 이러하다.

옥전(신사)을 지어/ 숭신의 기풍을 일으키고/ 쌀과 재물을 내어/ 이웃을 돌보며 흉년을 구제하네/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익에 봉사하여/ 한 고을에서 본보기가 되었으니/ 그 공적을 간략히 적어/ 부족하나마 송덕을 표하노라/ 연천군 남면 일동/ 히라누마 아마네가 적고/ 소화 15년(1940년) 11월에 이를 세우다(營造玉殿 興起崇神 捐出米財 保隣救歉 滅私奉公 垂範一鄕略記功蹟 聊表頌德 / 漣川郡南面一同 / 平沼周識/ 昭和十五年十一月 建之)

 

여기에 나오는 옥전(玉殿)은 여러 가지 의미로 풀이될 수 있는 표현이지만, 그 뒤에 나오는 숭신(崇神)이라는 구절과 맞물려 생각건대 이는 필시 일제가 각 고을마다 설립을 강요했던 ‘신사(神祠)’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 시절 ‘경신숭조(敬神崇祖)’라거나 ‘숭신경조(崇神敬祖)’라거나 하는 것은 널리 통용되던 관제용어(官製用語)의 하나였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그가 신사의 건립과 관련하여 상당한 비용을 부담했다는 뜻으로 읽혀지는 대목이기도 한 것이다. 이 비문을 정리한 이로 표시된 히라누마 아마네(平沼周)는 1933년 이후 연천군 남면 면장(面長)을 지낸 윤태혁(尹太赫, 1896~1959)의 창씨명으로 확인되는데, 그의 이름은 <조선총독부관보> 1940년 12월 8일자에 수록된 「휘보(彙報)」의 ‘신사설립허가(神祠設立許可)’ 관련 항목에서도 포착되고 있다.

 

경기도 연천군 남면(京畿道 漣川郡 南面)에 신사 설립의 건(件) 윤태혁(尹太赫) 외 11명의 원출(願出)에 대해 본년 11월 28일부로 이를 허가함.

<조선총독부관보> 1940년 12월 3일자에 수록된 ‘경기도 연천군 남면 신명신사’의 신사설립허가내역이다. 여길 보면 연천군 지역의 경우 관인면, 삭녕면, 영근면, 중면, 미산면 등이 동시에 신사설립허가(대표 원출자는 그 지역의 면장)를 받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1면 1신사’ 조영계획과 맞물려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매일신보> 1940년 12월 24일자에는 ‘황기2600년’에다 ‘황태자 탄생일’에 맞춰 경기도 연천군내 11개면 신사의 진좌제(鎭座祭)가 일괄하여 거행되었다는 소식이 실려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와 고스란히 겹치는 때에 나온 <매일신보> 1940년 12월 24일자에는 「연천군(漣川郡) 일면일신사 완성(一面一神祠 完成), 23일, 일제 진좌제 집행(一齊 鎭座祭 執行)」 제하의 기사가 수록된 것이 퍼뜩 눈에 띈다. 여기에 나오는 ‘산와 군수’는 1939년 1월에서 1942년 6월 사이에 연천군수를 지낸 최탁(崔卓, 1892~?)을 가리키며, 그의 창씨명이 바로 산와 타쿠(三和卓)였던 것이다.

 

성전하(聖戰下)에 맞이한 황기(皇紀) 2600년의 심원(深遠)한 의의(意義)를 자자손손에게까지 전하고자 연천군 8만 군민이 계획하여온 군내 11개면 신사 어조영공사(神祠 御造營工事)는 산와 군수(三和郡守)의 열의와 군민의 적성(赤誠)을 다한 근로작업과 소에 나오지(副直司) 씨의 헌신적인 공사봉사로 이즘 전부 준공되었으므로 23일 황태자전하 어탄신(皇太子殿下 御誕辰)의 가일(佳日)을 기(期)하여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부터 어영대(御靈代)를 봉천(奉遷)하와 전신사(全神祠)에서 일제히 진좌제(鎭座祭)를 엄숙히 거행하였다. 이에 대하여 산와 군수는 여좌(如左)히 말하였다.
“각 면민의 간절한 열망에 의하여 일면일신사(一面一神祠) 어조영의 계획은 작년말경부터 시작되어 꼭 1개년이 되었는데 기간 면민의 눈물겨운 봉사와 소에(副) 씨의 희생적 공사봉사로 드디어 준공을 보게 되었다. 특히 작년의 한해(旱害)로 인하여 식량의 고통을 받으면서도 면민이 신사에 대하여 진지한 봉사를 한 것은 실로 그들이 얼마나 경신관념(敬神觀念)이 불타고 있는가를 표시하는 것으로 깊이 감사한다.”

 

이 기사는 연천군 남면에 만들어진 신사라는 것도 사실은 ‘1면 1신사’ 조영계획에 따라 연천군 전역에서 일괄 조성된 결과물의 하나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일제패망기에 이르러 이처럼 면 단위의 지역까지 소규모 신사들이 광범위하고 촘촘하게 설립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 땅에 건립된 각종 신사들의 연혁을 살펴보면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가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이전에도 이미 여러 신사들이 두루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여기에는 일본 최초의 해외신사(海外神社)로 일컬어지는 용두산신사(1678년)를 비롯하여 원산신사(1882년), 인천신사(1890년), 경성신사(1898년), 진남포신사(1900년), 군산신사(1902년), 용천신사(1905년), 대구신사(1906년), 대전신사(1907년), 삼랑진신사(1907년), 성진신사(1909년), 마산신사(1909년), 송도신사(1910년)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1915년 8월 16일에 조선총독부령 제82호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이 제정되면서 신사의 창립은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 엄격한 조건에 따라 이뤄지도록 바뀌게 된다. 특히 부칙규정에 따라 “본령 시행 당시 현존하는 신사는 시행일(1915.10.1일)부터 5개월 이내에 신사창립의 허가수속을 할 것”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기존의 신사들도 모두 일괄하여 이 절차에 따라 재창립되었다.
이를테면 이를 기점으로 새로운 신사의 제도적인 창립절차가 비로소 적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아울러 1917년 3월 22일에는 별도의 조선총독부령 제21호 「신사(神祠)에 관한 건(件)」을 제정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신사(神祠)라고 칭함은 신사(神社)가 아니면서 공중(公衆)에 참배를 시키기 위해 신기(神祇)를 봉사(奉祀)하는 곳을 말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신사(神社, 진쟈)와 신사(神祠, 신시)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용어로 간주되었고, 조선총독에 의한 허가(許可)에 있어서도 각각 창립(創立)과 설립(設立)의 형태로 다르게 처리되었다.
그리고 신사(神社)의 명칭은 대개 그 지역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 것이 보통이지만, 신사(神祠)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신명신사(神明神祠, 신메이신시)’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흔한 방식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메이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별칭(別稱)이므로, ‘신메이신사’는 이를테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총본산으로 삼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주된 제신(祭神)으로 모시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신사(神祠, 격이 낮은 소규모 신사)인 셈이다. 일제 패망기에 접어들수록 신설되는 신메이신사마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 곁들여 ‘메이지천황(明治天皇)’도 함께 제신으로 설정되는 사례들이 급증하는 현상도 확연히 드러나는 특징의 하나이다

신사(神社)의 창립 요건과 신사(神祠)의 설립 요건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의 <조선종전의 기록> (1964)에 수록된 조선 관련 신궁(神宮), 신사(神社), 신사(神祠) 집계표이다. 관폐사는 조선신궁과 부여신궁을 말하며, 국폐사는 경성신사(1936), 용두산신사(1936), 대구신사(1937), 평양신사(1937), 전주신사(1939), 함흥신사(1939), 광주신사(1941), 강원신사(1941) 등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이 땅에 존재했던 신사의 총 숫자에 대해서는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 1910~1992)가 지은 <조선종전의 기록 ― 미소양군의 진주와 일본인의 인양(朝鮮終戰の記錄 ― 米ソ兩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1964), 108쪽에 수록된 것을 가장 유용한 근거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이 내용은 조선신궁 권궁사(朝鮮神宮 權宮司)를 지낸 타케시마 요시오(竹島榮雄) 소장자료를 바탕으로 정리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여기에는 조선신궁(朝鮮神宮)과 부여신궁(扶餘神宮)을 포함하여 조선 전체의 각종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를 합쳐 모두 1,141개소(1945년 6월말 현재)가 존재했던 것으로 적고 있는데, 이 당시 부읍면(府邑面)의 총수(總數)가 2,346개소였으므로 얼추 잡아 면(面) 단위로 보면 하나 건너 한 곳마다 이러한 일제의 신사가 두루 포진했다는 말이 된다. 이를 다시 지역별로 살펴보면, 부읍면의 숫자에 대비하여 전라남도(100%), 황해도(87.7%), 평안북도(80.8%), 충청북도(69.8%), 경기도(69.2%)의 순서로 집약도가 유난히 높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관보>의 「휘보(彙報)」에 수록되는 ‘신사 창립 허가’와 ‘신사 설립 허가’의 내역을 전부 취합하여 이를 도표로 만들어 그 추이를 살펴보면, 이러한 숫자라는 것도 대개 1930년대 중반 이후에 집중적으로 늘어난 것이라는 사실이 포착된다.

 

신사(神社)와 신사(神祠)의 창립, 설립, 폐지 허가에 관한 연도별 추이

(✽) 이 자료는 <조선총독부관보>의 「휘보(彙報)」에 게재된 내역을 취합하여 정리하였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주면 오관리에 조성된 홍성신사(洪城神祠)의 전경을 담은 엽서자료이다. 입구의 토리이는 1931년 10월에 세워진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 대한 신사설립허가는 1923년 10월 25일에 있었던 것이 맞지만, 정작 <조선총독부관보>에는 관련사실이 전혀게재된 바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즈시 미노루 기증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여기에 취합된 자료에 나타난 숫자(즉, 2+80-3+886-16=949개소)와 모리타 요시오의 책(1964)에 수록된 그것(즉, 1,141개소)이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은 신사 창립과 신사 설립에 관한 허가 사항이 <조선총독부관보>에 100퍼센트 다 게재되는 것이 아니라 누락된 사례들도 제법 존재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예를 들어, 경기도 지역의 경우에도 <조선총독부관보>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지만 <경기도보(京畿道報)>를 통해 ‘신사설립허가’의 내역이 확인된 사례가 무려 14곳이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대륙신도연맹(大陸神道聯盟)의 <대륙신사대관(大陸神社大觀)>(1941)에 정리된 신사 목록을 대조해 본 결과, 여기에서도 동일한 사례가 3곳 더 포함되어 있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르러 신사 설립의 건수가 두드러지게 증가세를 나타낸 것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 1935년 4월 6일자에 수록된 「전반도(全半島)에 고조되는 경신열(敬神熱), 신사(神祠)의 인가 격증(認可 激增), 작년(昨年)부터 33신사 늘어, 심전개발(心田開發)의 일증좌(一證左)」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이유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일본정신(日本精神)의 고양(高揚)과 심전개발(心田開發)의 기운(機運)에 사로잡혀 최근 선내 각지(鮮內 各地)에 신사(神社)의 건립이 많아지고 있는데, 수년 전까지는 손에 꼽을 정도였던 것이 작년9년(1934년)에는 충주신사(忠州神社) 외에 27신사(神祠)의 설립이 인가되었으며 금년에 들어와 다시 6신사(神祠)가 인가(認可)되고 또한 출원중(出願中)인 것이 14곳에 달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이것의 특이한 현상으로서 종래 그 출원자는 전부 내지인(內地人)뿐이었으나 최근에는 건설발기인(建設發起人) 가운데 조선인 유지(朝鮮人 有志)의 이름이 동반되기에 이르렀던 것인데, 조선인 방면의 경신열(敬神熱)이 고조되어왔다는 증좌(證左)로서 총독부도 가능한 한 인가의 방침(方針)을 취하고 있다

 

<조선신문> 1935년 4월 6일자에 수록된 관련기사에는 이른바 ‘심전개발(心田開發)’과 관련하여 신사의 인가 건수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담겨 있다.

 

<매일신보> 1940년 12월 21일자에 수록된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의 ‘신명신사’ 진좌제 모습이다. 신사(神社) 규모 이상의 것은 제법 사진자료들이 남아 있으나, 면(面) 단위에서 조성된 신사(神祠)는 이러한 모습이나마 제대로 관련자료가 남아있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여기에 나오는 ‘심전개발’은 우가키 총독(宇垣 總督) 시기에 조선총독부가 주창한 일종의 정신계몽운동이었다. 1936년 1월 15일에 경성부민관 중강당에서 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심전개발관민간담회’의 결과를 담아 최종 공표한 내용에 따르면, 심전개발은 “(1) 국체관념(國體觀念)을 명징(明徵)케 할 것, (2) 경신숭조(敬神崇祖)의 사상(思想) 및 신앙심(信仰心)을 함양(涵養)할 것, (3) 보은(報恩), 감사(感謝), 자립(自立)의 정신(精神)을 양성(養成)할 것”을 3대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때 이를 실천하는 방안의 하나로 크게 부각된 것이 바로 각지에 신사 또는 사원(寺院)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일본정신(日本精神)을 고취하는 동시에 농산어촌(農山漁村)의 자력갱생(自力更生)에 심적 조성(心的 助成)을 이루게 하려고” 했으며, 특히 ‘1군 1신사(一郡 一神社)’니 ‘1면 1신사(一面 一神祠)’니 하는 표현이 본격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신사설립허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은 1939년 이후의 일인데, 이 당시의상황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39년 3월 29일자에 수록된 「1군 1신사(一郡 一神社)를 목표(目標)로 강원(江原)서 건립을 계획, 명(明) 14년도부터 동(同) 20년까지, 1면 1신사(一面 一神祠)도 촉진(促進)」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

 

[춘천(春川)] 강원도내에는 현재 신사(神社)가 건립되어 있는 곳이 춘천, 강릉 두 곳뿐이므로 도당국에서는 소화 14년도(1939년도)부터 동 20년(1945년)까지 1군 1신사주의로 신사를 세우고자 계획중인데 14년도에는 우선 원주와 철원 2개 군에 건립하기로 내정되었다 한다. 그리고 명년이 마침 황기(皇紀) 2600년에 해당하므로 각군(各郡)에서 그의 기념사업으로 신사를 건립하겠다는 희망이 상당히 있을 모양인데 신사 1사를 세우자면 약 3만 원의 경비가 들게 되므로 급속한 실현은 보기 어렵게 될 터이라 한다. 그리고 신사(神祠)는 현재 30개소가량 되는 바 1면 1신사를 계획한 일도 있었으나 경비관계로 역시 속히 실현할 수 없으므로 도(道)로서는 될 수 있는 대로 각군에서 분발하여 1면 1신사를 실현하기 바란다 하며 철원(鐵原) 같은 곳에서는 벌써 황기 2600년 기념사업으로 관하 각면(各面)에 1신사를 건립하고자 계획을 세웠다 한다.

 

여기에서 보듯이 1940년은 이른바 ‘황기 2600년(기원 2600년; 초대 천황의 즉위를 기점으로 계산하는 방식)’이 되는 해가 되므로 이를 기념하는 사업으로 곳곳에서 ‘1면 1신사’의 형태로 신사의 건립을 추진하는 통에 자연히 허가건수가 급증세를 나타내게 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러한 흐름은 그 이후에도 여러 해에 걸쳐 이어졌는데, <매일신보> 1942년 5월 2일자에 수록된 「경신사상(敬神思想)을 발양(發揚), 경기도(京畿道)의 일면일사(一面一祠) 완성불원(完成不遠)」 제하의 기사는 경기도 일대에서 벌어진 신사 설립의 추세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유구 3천 년을 꿰뚫고 내려오는 경신숭조(敬神崇祖)의 황국정신을 한층 빛나게 하여 성전관철에 3백만 도민이 돌진케 하는 도움이 되게 하려고 경기도에서는 일찍부터 1면(面) 1사(祠)를 제창하고 황기 2천 6백년 기념사업으로 계속하여온 이래 도내 일 면민들은 앞을 다투어 정재를 모두어서 신사(神祠)어조영에 총후의 적성을 바치고 있다. 그리하여 지난 소화 15년(1940년) 4월 이래로 금년 4월 11일 현재까지의 만 2개년 사이에 73개면에서 새로이 면진호(面鎭護)의 신사 어조영을 완성시켜 현재 도내의 총신사는 111사에 이르렀다. 그중 수원군(水原郡)에는 15사, 연천군(漣川郡)에는 11사, 김포군(金浦郡)에는 8사, 시흥군(始興郡)에는 6사를 각각 어조영하여 1면 1사를 벌써 완성시켰다. 그런데 이 많은 신사에 봉사할 신직(神職)이 부족하여 경기도에서는 금년도에 3천 원의 예산을 세워 각 관공립학교의 교원, 군관리, 경찰관리와 및 신사의 숭경자 총대(總代) 중에서 희망하는 자를 선발해서 황전강구소(皇典講九所) 조선분소에 의뢰하여 신직의 봉무를 수강케 하기로 되었다.

 

(좌) 이른바 ‘국민정신작흥운동’이라는 명분 아래 천조황대신궁(天照皇大神宮, 이세신궁의 내궁을 일컫는 말)이라고 쓴 이러한 신궁대마(神宮大麻, 진구타이마)가 광범위하게 배포되어 이를 카미다나(神棚)에 봉안하도록 강요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우) 조선신기학회(朝鮮神祇學會)가 펴낸 <대마의 제사방법(大麻の 祀り方)>(1938)에 수록된 ‘대마봉안 표준도(大麻奉安 標準圖)’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이를 보관하는 카미다나(神棚)의 형태도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이와 아울러 국민정신을 작흥(作興)하고 경신숭조의 관념을 철저히 하기 위해 집집마다 신궁대마(神宮大麻; 신궁에서 배포하는 일종의 종이부적)를 봉안토록 하는 일이 광범위하게 권장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실제로 대륙신도연맹에서 펴낸 <대륙신사대관> (1941), 176쪽에 수록된 신궁대마의 반포(頒布)에 관한 통계 추이를 살펴보면, 1937, 8년도의 시기에 이르러 급증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궁대마의 반포 추이

이러한 신궁대마의 반포와 함께 각 가정과 학교, 그리고 관공서와 직장마다 이를 모시는 공간으로서 카미다나(神棚; 찬장이나 선반 형태의 작은 제단)의 설치가 강요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자료의 말미에는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더 한층 분발하여 지속적인 대마반포의 확산을 독려하는 내용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 유달리 눈길을 끈다.

 

…… 이와 같이 반도(半島, 조선)에 있어서 대마반포는 실로 약진일로(躍進一路)의 호성적(好成績)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소화 15년도(1940년도)의 반포수 126만 3,640체(體)는 이를 반도의 총호수(總戶數) 428만 2,754호(戶)에 비하면 약 4분의 1에 지나지 않으므로 대마반포의 진정신(眞精神)인 것으로서 일호일체봉재(一戶一體奉齋)의 견지(見地)에서 본다면, 반도에 있어서 대마반포는 더욱 일층(一層)의 노력과 열의로 대중(大衆)에 대해 그 진정성의 체득(體得)과 봉재배수(奉齋拜受)의 이해를 다시 일단(一段) 깊이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특히 이 시기는 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으로 촉발된 비상시국(非常時局)이 지속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신사라는 공간은 무엇보다도 전시체제 아래 내선일체와 황국신민의 정신을 한층 더 고조시키는 일차적인 수단으로 사용되곤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새로운 임지(任地)를 부여받은 관리들은 으레 부임 첫날에는 제일 먼저 그 지역의 신사를 찾아 참배를 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정착되었고, 지원병에 선발되는 경우에도 입영기(入營旗)를 앞세우고 관내 신사에 봉고제(奉告祭)를 올리는 것이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의 하나가 되고 있었다.

 

<매일신보> 1937년 3월 4일자에는 신임 경기도 광주군수인 전예용이 부임 즉시 ‘광주신사’를 먼저 참배하고 군청에 초등청(初登廳)하였다는 소식이 수록되어 있다.

<매일신보> 1938년 6월 13일자에 수록된 최초 지원병 합격자인 최덕윤(崔德潤)이 관내 ‘숭인신사(崇仁神祠)’에서 봉고제를 올리는 장면이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38년 6월 1일자에 수록된 「지원병 경성합격자(志願兵 京城合格者) 봉고제(奉告祭)와 축하회(祝賀會), 12일 숭인신사(崇仁神社)에서」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초년도 지원병 전형시험에 합격된 202명 중 경성부내에도 영예의 군문을 돌파한 자가 두 명이나 있다는 것은 기보하였거니와 그 중 부내 제기정(祭基町) 137번지 최덕윤(崔德潤) 군의 영예의 합격을 신전(神前)에 봉고하는 봉고식(奉告式)은 12일 오전 8시부터 부내 숭인신사(崇仁神社)에서 소관 당국대표, 동정회 대표, 생도 대표, 국방부인, 방호단원, 기타 유지 참렬하에 엄숙히 거행하기로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경마장(競馬場) 장내에서 축하회도 개회할 터이라 한다.

 

그리고 1941년 12월에 이르러 이른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태평양전쟁)’의 개전에 따라 침략전쟁의 또 다른 양상이 펼쳐지고, 그 이후 전세가 패망을 향해 치닫게 되면 될수록 그에 비례하여 신사라는 존재의 효용가치를 강조하는 식민통치자들의 목소리는 높아져갔다. <매일신보>1943년 8월 6일자에 수록된 「일면인사(一面一祠) 목표로 하여 신사(神社), 신사(神祠)를 어건조(御建造), 경신숭조사상(敬神崇祖思想)을 철저(徹底)히 주입(注入)」 제하의 기사는 이러한 전시체제기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망의 징병제도와 해군지원병제도는 드디어 실시되어 반도청년도 내지동포와 어깨를 겨누고 육지로 바다로 나라의 방패가 되어 마음껏 싸울 때가 다가왔다. 이 얼마나 영광이며 영예인가. 그러나 우리는 영예를 치부하고 감격에만 잠겨서는 안 된다. 부르심을 받자올 청년은 수양연성을 하고 그 가정 또한 훌륭한 군인의 가정이 되어 무적황군으로서 손색이 없는 군인이 많이 나오도록 힘써야 된다. 일본은 신국(神國)이오, 만세일계의 천황폐하가 다스리시는 황국(皇國)이라는 국체의 근본을 경신숭조(敬神崇祖)의 실천에 의하여 체인(體認)하는 것이 훌륭한 군인이 되는 길이다.
총독부에서는 경신사상의 근본인 신사를 일면일사(一面一社)를 목표로 어건조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지금 2,346 부읍면 가운데에 신사 신사(神社 神祠) 수는 9백 사밖에 안 되는 부와 읍은 전부 어건조를 보았으나 면에는 3분지 2나 경신사상의 중심되는 시설이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신사의 어조영(御造營) 같은 존엄한 일은 각 지방민의 적성에 의함이 마땅하므로 당국으로서는 직접 어조영을 하는 것은 아니고 지방관민의 경신사상을 앙양하는데 도움이 되는 시설과 운동을 일으키기로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전국에 걸쳐 횡행했던 이러한 신사들은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이 점에 관해서는 세세한 사례들까지 다 추적하기는 어렵지만 우선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의 <조선종전의 기록>(1964), 111~113쪽에 정리된 내용에서 몇 가지 개략적인 단서를 얻어낼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승신식(昇神式)’은 신사를 폐쇄하면서 제신(祭神)의 신령(神靈)을 하늘로 돌려보내는 의식절차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총독부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경성신사(京城神社)는 8월 16일 오후 3시에 승신식(昇神式)을 행하였다. 원산신사(元山神社)는 16일 오후 8시, 강원신사(江原神社)는 17일 오전 5시, 인천신사(仁川神社)는 17일, 대구신사(大邱神社)는 18일 밤, 전북의 이리(裡里), 군산(群山), 남원(南原), 대장(大場), 김제신사(金堤神社)는 18일, 전남의 순천신사(順天神社)는 17일, 완도신사(莞島神社)는 18일, 황해도의 해주신사(海州神社)는 17일, 사리원신사(沙里院神社)도 그 무렵에, 평남의 진남포신사(鎭南浦神社)는 17일, 평북의 강계신사(江界神社)는 19일, 강원도의 장전신사(長箭神祠)는 18일에 각각 승신식을 행하였다. 평북의 만포신사(滿浦神社)는 8월 18일에 승신식을 행하고, 신체(神體)를 소각했다. 마산신사(馬山神社)는 9월 4일, 밀양신사(密陽神社)는 10월 5일에 승신식을 행하였다.
…… 조선인의 손에 의해 불태워진 것으로 15일 밤에 평양신사(平壤神社), 16일에 정주신사(定州神社), 안악신사(安岳神社), 온정리신사(溫井里神祠), 17일에 안주신사(安州神社), 삭주신사(朔州神祠), 영변신사(寧邊神社), 천내리신사(川內里神祠), 재령신사(載寧神祠), 18일에 겸이포신사(兼二浦神社), 선천신사(宣川神社), 박천신사(博川神社), 소록도신사(小鹿島神社), 21일에 용천신사(龍川神社), 22일에 희천신사(熙川神社), 신막신사(新幕神社)도 그맘때였다. 신막신사의 신체는 17일경 씨자총대(氏子總代)의 손에 소각되었다. 8월 말에 안동신사(安東神社, 경상북도), 9월 2일에 강계신사(江界神社), 9월 7일에 해주신사(海州神社) 등이 불태워졌다는 보고가 있었다. 장연신사(長淵神社)는 8월 20일 무렵 재주민(在住民)과 일본군(日本軍)의 손으로 소각했고, 몽금포신사(夢金浦神祠), 태탄신사(苔灘神祠)는 조선인에 의해 부서졌다. 만포신사(滿浦神社)의 봉재전(奉齋殿)은 19일밤 조선인에 의해 소각되었다. (하략)

 

<대륙신사대관> (1941)에 수록된 평양신사(平壤神社, 1937년에 국폐사로 승격)의 전경이다. 이곳은일제가 패망하던 1945년 8월 15일 바로 그날 밤에 전국에서 제일 먼저 조선인의 손에 의해 불태워졌다고 알려져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일제 패망 직후의 시점에 <경성일보> 1945년 9월 22일자에 게재된 미군정장관 일반명령 제5호의 내용이다. 여기에는 즉시 폐지될 일제의 대표적인 악법(惡法)으로 치안유지법과 사상범보호관찰령, 사상범예방구금령 등과 더불어 ‘신사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의 405~406쪽 부분에는 신사처리방침의 개요에 관해 다음과 같은 내용도 함께 정리되어 있다

…… 9월 21일, 일반명령 제5호에 따라 신사에 관한 규정이 폐지되고, 신궁 신사의 재산은 미군정청(米軍政廳)에 접수되었다. 조선신궁(朝鮮神宮)의 회계는 세출(歲出)은 이해 8월 31일, 세입(歲入)은 8월 22일로서 중지되고, 9월 22일에 결산보고서, 자금명세서와 현금을 군정청에 건넸다.
각지(各地)의 신사(神社)도 재산목록, 결산보고서 등을 지방의 군정청에 보고하였고, 토지건물은 군정청에 접수되었다. 11월 2일에 군정청은 각도지사(各道知事)에 대해 “각 신사의 본전은 당국의 허가를 얻어 소각(燒却)해도 지장이 없다. 다만, 신사 소유의 서류 및 재산은 도지사가 보관한다. 소각에 있어서는 관리(官吏)의 입회가 필요하고, 또한 10마일 이내에 주류(駐留)하고 있는 미군 부대장에게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통달(通達)했다. 이에 근거하여 지방의 신사 본전은 대다수 일본인(日本人)의 손에 의해 해체, 소각되었다. 신사는 대체로 경승지(景勝地)에 있으므로 이것을 혹은 도서관(圖書館, 춘천신사)으로, 혹은 양로원(養老院, 광주신사)으로, 혹은 학교(學校) 등으로 이용하고 싶다고 하는 요망(要望)이 있었다. (하략)

 

위의 내용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군정장관(軍政長官) 아놀드 소장 명의로 공포된 미군정청 「일반명령 제5호(1945년 9월 21일)」의 앞머리에는 특별법의 폐지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경성일보> 1945년 9월 22일자에 수록된 관련보도에는 일제의 의해 생성된 특별법의 목록이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イ)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1919년 4월 15일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6권 제14집 1024엽)
(ロ) 예방구금규칙(1941년 5월 15일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2권 제8집 8엽)
(ハ) 치안유지법(1925년 5월 8일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2권 제8집 16엽)
(ニ) 출판규칙(1910년 1월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2권 제8집 255엽)
(ホ) 사상범보호관찰규칙(1936년 12월 12일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2권 제8집 230엽)
(ヘ) 신사에 관한 건(1919년 7월 18일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2권 제6집 188엽)

 

이 내용은 그 이후 「미군정청 법령 제11호」 ‘일반명령 제5호의 개정(1945년 10월 9일)’에 그대로 재반영되었는데, 여기에 즉시 폐지의 대상으로 언급된 특별법이란 것은 일제가 조선인 탄압의 통치수단으로 사용해왔으며 대표적인 악법(惡法)으로 간주되었던 것들을 가리킨다. 여기에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이라든가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朝鮮思想犯豫防拘禁令)이라든가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朝鮮思想犯保護觀察令)이라든가 하는 것들과 동일한 반열에 ‘신사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기간에 신사라는 존재가 이 땅의 사람들에게 끼친 폐해가 그만큼 깊었고 또 고약했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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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지난 5월 15일부터 방송을 시작한 역사 전문 팟캐스트 채널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1 ‘역적’(역사적폐청산)이 회를 거듭할수록 회원들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시민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1부에서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이 역사적폐의 주범이 누구이고 이들의 역사쿠데타 배경과 논리가 무엇인지를 심층적으로 파헤쳐서 재미있는 입담으로 청취자들의 귀를 사로잡고 있다면, 2부의 ‘이게 실화냐’
에서는 매회 다양한 전문가를 초대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역사문제를 짚어주어 관심을 받고 있다.

13이제 ‘시즌 1 역적’은12화(8월 7일) 마지막 본방송과 8월 여름특집, 그리고 9월 에필로그를 끝으로 마
감하고 ‘시즌 2’를 준비할 예정이다. 앞으로 남은 시즌 1 여름 특집 방송에도 회원들이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기를 기대한다. 팟캐스트 ‘역적’은 팟캐스트 전문채널 팟빵과 유투브, 아이튠즈에서 ‘역적’을 검색하면 쉽게 찾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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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은희 교육팀장

월, 2017/08/07-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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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기념관은 10월 20일(금)부터 21(토)까지 1박 2일 청소년 역사캠프 ‘순례길의 독립운동가를 찾아서’를 개최했다. 이번 캠프는 근현대사기념관 상설전시를 역동적인 체험을 통해 새롭게 접근하고, 강북구의 애국선열 묘역에 잠든 독립운동가를 만나며 선열의 생애와 활동을 되새겨 청소년들이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는데 도움을 주고자 마련했다. 캠프는 금요일 저녁 6시부터 토요일 오후 1시까지 진행되었고, 사전에 홈페이지와 전화로 선착순 모집한 13~16세 청소년 33명이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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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근현대사기념관에 모인 청소년들은 식사 후 특별히 야간 개장한 기념관에서 첫번째로 독립운동가가 남긴 명언과 제헌헌법의 내용과 관련해 빈 칸에 들어갈 단어를 찾아 문장을 완성하는 퀴즈를 풀
고 전시물을 본 후 사발통문에서 사라진 격문을 완성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두 번째로 비밀리에 독립운동가, 민중, 일본 순사로 각각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코너별로 태극기 타투, 의병 책갈피 만들기, 독립민주기념비에서 기념사진 촬영 등의 체험활동을 포함한 독립운동 런닝맨을 시행했다. 마지막으로 4·19혁명 당시 상황을 재연한 그림자 연극을 함께 만들었다.
이튿날, 청소년들은 순국선열 애국지사 묘역을 답사하며 시대별 태극기를 그려보았다. 또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전 재산을 처분하고 일가족과 함께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중국으로 떠난 이시영 선생의 가족사를 스톱모션으로 표현하고, 독립운동가가 되어 자신만의 어록을 남기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캠프에 참가한 한 청소년은 “새로운 친구들과 친해져서 함께해서 좋았고, 학업 스트레스를 잠깐 내려놓고 놀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역사에 관한 지식도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밝혔다. 주어진 시간이 짧아 더 많은 프로그램을 할 수 없었던 점이 아쉽다고 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은 이번 캠프를 계기로 청소년 프로그램 다양화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 최인담 학예사

목, 2017/11/16-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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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학진 기획실장 인터뷰 • 이홍관 정리

현재 국제운송회사 로드 원(ROAD 1) 로지스틱스를 운영하고 있는 홍남화 아산지회장은 2000년 9월부터 연구소 회원에 가입했다. 2016년 5월에는 아산 둔포면에 있는 친일파 윤웅렬, 윤치호 공덕비를 제보하였고, 아산지역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사업(2017년 1월~5월)을 제안하고 이끌었다. 우리에게 ‘톨레랑스’라는 화두를 각인시킨 <나는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선생과사촌지간이다. 찾아간 날, 마침 홍남화 회원은 업무상 무언가 바쁜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이곳저곳으로부터 쉴 새 없이 전화를 받고 처리하면서도, 성의 있고 진지하게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인터뷰는 아산의 신정호수 인근에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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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아산지회의 회원은 몇 명이나 되나요?

답 : 저희가 80명 정도 되요. 3년 전까지만 해도 천안아산지회였는데 분리하고 보니까 좀 아쉽게 느껴집니다. 열성적이고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분들이 지회의 발전을 전망하면서 힘들더라도 각자 독자적으로 가보자는 취지였습니다.

 

문 : 천안아산지회로 활동하셨을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지요?

답 : 그때나 지금이나 주로 임종국 선생님 추모사업을 했었죠. 오랫동안 노력이 쌓이니 2016년에는 천안 신부공원에 임종국선생의 조형물을 세웠고 앞으로 지역의 명소로 가꿔 나갈 계획입니다.

 

문 : 아산에 내려오시기 전에 이미 연구소와 인연을 맺으셨지요?

답 : 제가 수원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였는데요. 1997년 또는 1998년 무렵 수원 북문 부근에서 북한동포돕기 캠페인을 보고 그 단체가 어디인가 하고 찾아갔더니 연구소 경기남부지부와 관련되어 있더라구요. 그것이 연구소와의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북한동포돕기 성금으로 5만원을 송금했습니다.
그 무렵 수원지역에서 열린 강연들을 많이 찾아다녔습니다. 수원역전의 경기서적에서 리영희 선생님 강연에도 참가해 제가 “DJ와 YS는 둘 다 민주화운동을 했는데 왜 차이가 납니까” 하고 질문했더니 리영희 선생님께서 “한 사람은 철학이 있고, 다른 사람은 철학이 없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수원청소년문화센터에서 노동은 교수님의 친일음악 강연도 참석했습니다. 노동은 교수님 강연은 화성시가 홍난파기념관 건립을 계획하자 반대운동 차원에서 연구소 경기남부지부가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그 강연에서 방학진 사무국장을 처음 만났는데 현재 방학진 기획실장은 기억을 못하시네요. 그 후 오산으로 이사해서 2001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 선거운동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문 : 수원에서 오산으로 다시 천안에서 고향인 아산으로 계속 내려오셨네요?

답 : 제 회사 이름이 로드 원(ROAD 1)입니다. 1번 국도를 타고 대륙까지 오가자는 뜻입니다. 우리 가족사를 살펴보니 큰 집은 북한 진남포에서 해방을 맞고 소련군에 쫓겨 인천으로 내려옵니다. 우리 집안을 보면 수백 년간 한 곳에서 살다가 개화기를 거치면서 할아버지는 천안, 아버지는 홍성, 저는 아산에서 태어납니다.
지난 100여 년의 격동과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 집안이 이리저리 내몰렸던 거죠. 그렇게 집안 어른들의 기억 조각들을 하나하나 연결하다보니 다시 고향인 아산으로 오게 되었고 그동안 잘 몰랐던 가족사를 80% 정도는 복원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고, 이름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오명으로 남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렇게 가족사를 복원했던 것 같습니다.

 

문 : 아직 복원하지 못한 가족사의 20%는 무엇입니까?

답 : 6·25전쟁 전후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의한 망각이 그 20%입니다. 그래서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에 더욱 관심이 많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그 당시 희생될 뻔 하셨습니다. 아산 현충사 부근의 황골이라는 마을은 대대로 남양 홍씨(홍남화 지회장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홍대용 집안이다) 집성촌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와중에 황골에서 우익에 의한 학살이 벌어진 것은 1950년 추석 무렵입니다. 새벽에 아버지가 화장실을 가던 중 요란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돌아와 보니 아버지의 사촌이며 큰어머니가 모두 끌려간 후였습니다. 우익 청년들이 동네 사람들을 공회당에 가두어놓고, 좌익 혐의자에 대해 인민재판을 거꾸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운좋게도 친척 되시는 할머니가 두둔해주어 살아남았지만 아버지의 큰어머니를 비롯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일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홍세화 선생도 그때 죽을 뻔했습니다. ????나는빠리의택시운전사????에그 내용이 실려 있구요. 그 후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가해자들과 한평생 사셨습니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집과 살림살이는 풍비박산 났습니다. 그렇게 저는 어릴 적부터 6·25 이야기를 알음알음 알아 오면서 자랐고, 숙명처럼 민간인 학살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됐을까, 시골마을에 두레패가 왜 둘이나 있는지 의문을 품었지요. 난리가 끝나고 마을 한켠을 지키던 왜가리떼도 사라지고 맙니다.

 

문 : 그래서 이번에 설화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에 열심히 참여하셨군요?

답 : 네. 6·25전쟁기에 민간인 학살은 학살의 주체나 피해 유형이 다양합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요시찰대상처럼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은 좌익사상자들을 전향시켜 보호한다는 구실로 보도연맹을 만들고, 이들을 살해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산지역에서 보도연맹건으로 희생된 사례를 접하지 못했습니다. 아산의 경우 UN군이 들어오면서 북한군 지배가 끝나가는 2~3일 전후 치안 공백기에 우익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무차별 학살을 벌였고 이후 치안이 확보된 상황에서 경찰이 좌익 혐의자들을 검거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발굴한 설화산 민간인 희생자 유골은 1951년 1월 평택까지 중공군이 내려오자 후퇴 직전의 경찰이 학살한 좌익 혐의자들의 유골인 거죠.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기록에는 아산지역 민간인 희생자를 800명 정도로 추산했지만, 일부에서는 피난민들의 희생이 컸던 점을 들어서 1,300명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천안의 경우 당시 천안경찰서 김종대 서장이 희생을 줄이려고 노력했다는 미담이 전해지고 있는데. 아산에서는 그렇지 못했기에 엄청난 희생자가 나왔다는 점에서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문 : 내년에 제2기 진화위가 출범할 것 같기도 한데요. 그러면 현재 직업을 잠시 접어두고 조사관 활동하면서 민간인 학살 진상을 조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답 : 이번 설화산 유해 발굴 현장에 진화위 당시 아산지역 조사관으로 활동하신 경찰관이 휴가를 내고 조용히 찾아주었는데 본인도 당시 조사가 미흡했다고 말하더군요. 여하튼 2기 진화위에서는 1기와 달리 위원회뿐 아니라 아산시 등 지자체의 적극적인 협조가 예상되는 만큼 더 이상의 논란이 없도록 명확한 조사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한 이번에 당선된 아산시장이 후보 때 공약으로 내건 민간인 학살 실태 파악과 공청회 개최, 인권기념관 건립이 반드시 이뤄지길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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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아산지회는 이밖에도 친일파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교체운동도 열심히 벌이고 계시지요?

답 : 우선 새로 출범한 아산시의회와 충남도의회 차원의 결의안이 채택되도록 노력하고 표준영정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다행히 표준영정 퇴출 서명운동에 함께 했던 아산지회 회원들 중에 각각 아산시의원(홍성표 회원)과 충남도의원(안장헌 회원)에 당선되어 아주 든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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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끝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 이문구의 「관촌수필」에는 바다에 마을사람을 수장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산 구성리에서도 마을사람들을 좌우로 길게 세워서 바닷가로 나가게 하고, 물이 차서 더 이상 못가겠다고 하자 총을 쏴 살해해서 그대로 수장된 일이 있었는데, 당시 현장을 목격한 희생되신 분의 딸이 노인이 되어 증언합니다. 엄마한테 동네 청년들이 남편이 어디 있냐고 묻자, 마당에서 놀던 어린 아이가 자기 아버지가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그 길로 아버지는 불귀의 객이 됩니다.
현재 이 같은 증언을 할 분들은 찾기 어렵고, 생존해 계신 분들이라 하더라도 후손들에게 당시 상황을 여간해서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6·25전쟁 때 학살된 유가족이 아닌 사람이 거의 없고, 반대로 한 사람을 통하면 가해자와 연결되지 않을 사람도 별로 없을 겁니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며 어설프게 덮기보다는 민족사의 상혼을 드러내 근원부터 차근차근 치유하면서 서로에게 응어리진 아픔을 보듬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수, 2018/08/0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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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민족문제연구소 명예이사장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있은 지 10여 년 만에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려 민족사회는 물론 전 세계적 관심거리가 되어 있다. 제1·2차 정상회담의 합의가 무위로 되고 개성공단이 폐쇄된 중요 원인을 말해보면 ‘북핵’ 문제를 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 이번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는 과정에서 북녘에서 ‘선대 유훈’이란 말이 나왔다. 남쪽 구성원들 중에 이 말이 왜 나왔는지 또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고 김일성 주석의 ‘유훈’을 말한다.
한반도 또는 조선반도로 불리는 우리 땅이 제2차 세계대전 후 남북으로 분단되어 성립된 두 개의 나라가 서로 대립하거나 다투지 않고 평화적으로 하나로 통일됨으로써 그만큼 강대해지는 것을 주변 나라들이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을 것인데, 남북 어느 쪽이라도 핵무기를 가지면 주변 나라들의 통일 반대와 방해가 훨씬 심해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 땅의 평화로운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 어느 쪽도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유훈’이고, 북녘도 이 ‘유훈’을 지켰었다.
그러다가 세계정세가 바뀌어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짐으로써 북녘 정권의 정치·경제적 배후 세력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고, 북녘의 어느 인사가 말한 것 같이 종래는 미국 달러 한 푼 없이도 살 수 있던 것이 하루아침에 달러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더욱이 남녘 정권은 러시아 및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져서 적대관계가 해소되었는데도 조·미 수교와 조·일 수교는 이루어지지 않아서 적대관계가 계속된 데다가 6·15남북공동선언 후 어렵게 개통된 남북 철도는 녹슬고 개성공단이 폐쇄되는 한편, 김일성 주석의 ‘유훈’과는 달리 ‘북핵’이 개발되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우리 땅은 불행하게도 21세기에 들어서서까지도 ‘극동의 화약고’요, 세계에서 전쟁 위험이 가장 높은 지역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역사 진행이 정직해서 남녘 사회에 ‘촛불혁명’이 일어나,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성립시킨 김대중 정부 및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노무현 정부와 노선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을 문재인 정부가 성립되었다. 그 결과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어 ‘북핵’ 폐기가 논의되고 우리 땅의 평화체제를 수립해 가겠다는 쌍방의 약속이 일단 성립되었다. 북녘의 처지에서는 김일성 주석의 손자 정권에 의해 그 ‘유훈’이 되살아나고 남녘의 경우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후계라 할 수 있을 문재인 정부에 의해 ‘핵 없는 통일론’이 받아들여진 것이라 하겠다.

 


우리 땅이 제2차 세계대전 후 남북으로 분단되어 성립된 두 개의 나라가 서로 대립하거나 다투지 않고 평화적으로 하나로 통일됨으로써 그만큼 강대해지는 것을 주변 나라들이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을 것인데, 남북 어느 쪽이라도 핵무기를 가지면 주변 나라들의 통일 반대와 방해가 훨씬 심해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 땅의 평화로운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 어느 쪽도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유훈’이고, 북녘도 이 ‘유훈’을 지켰었다.


 

 

그런데 이 땅의 남북 정권 사이에 평화통일론이 처음 합의된 것은 반세기 가까이 전인 7·4남북공동선언부터이며, 그 후 평화통일의 방법론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다시피 ‘1국가 2정부 2체제안’으로서 북녘의 연방제 통일방안과 당분간 ‘2국가 2정부 2체제’로 두고 2국가 위에 협의체 같은 것을 두자는 남녘의 연합제 통일방안 등이 제시된 지도 오래되었다. 북녘에서 바로 하나로 하자는 국가는 군사권과 외교권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이 시기상조이니 군사권은 당분간 둘인 채로 두되 쌍방이 모두 군사의 이동과 훈련을 상대방에 알림으로써 군사행위가 침략 목적이 아님을 명백히 하고, 외교권은 당장 하나로 할 수는 없다 해도 국제외교 마당에서 종래처럼 대립하지 말고 협조하자는 안이 제1차 남북정상회담의 6·15남북공동선언 때 합의되었다.
돌이켜 보면, 불행하고도 불행한 분단 과정은 1945년에 38선 획정으로 국토가 분단되고 1948년에 두 개의 정부 수립으로 국가가 분단되고 1950년에 6·25전쟁 발발로 동족이 서로 적이 되어 민족이 분단되었는데, 6·15남북공동선언에서 남북이 화해하고 협력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먼저 민족이 통일되기 시작하더니, 금강산 관광길이 열리고 남북 철도가 연결되고 개성공단이 조성됨으로써 국토가 통일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가의 통일도 군사권과 외교권 대립 해소에 합의함으로써 당장은 아니라 해도 통일의 길이 일단 열리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위에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조·미 수교, 그리고 조·일 수교까지 이룰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이 회담은 6·25전쟁의 후유증을 없애고 우리 땅의 남북평화,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는 역사적 장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21세기 세계사의 큰 방향으로서 지역 평화공동체 형성에 동조해서 동북아시아 공동체 및 그 확대기구로서 동아시아공동체 형성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월, 2018/05/2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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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39

이순우 책임연구원

 

4·19민주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당시의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景武臺)’가 청와대(靑瓦臺, 1960년 12월 30일 변경)로 이름을 바꾼 지도 벌써 6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워낙 독재정권의 아성(牙城)이라는 오명이 점철된 탓인지 아직도 경무대라고 하면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경무대는 일찍이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신무문(神武門) 너머에 있는 후원(後苑) 지역을 일컫는 표현으로 정착된 ‘유서 깊은’ 명칭이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도 이 이름이 그대로 통용된 탓에 운동회와 주일학교 집회와 기념연회와 같은 갖가지 행사나 모임 장소로 이곳이 거론된 자료를 흔히 접할 수 있고, 특히 1939년 8월 남산에 있던 총독관저가 이 지역에 새집을 지어 옮겨왔을 때도 이곳은 ‘경무대 총독관저’로 호칭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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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순종 국장 당시 순화방 사재감계(順化坊 司宰監契) 계원들이 대여(大輿) 운반 예행연습을 위해 경무대 마당에 모여든 광경이다. 왼쪽 뒤로 월대 위에 보이는 건물이 융문당이다. (<순종국장기념사진첩>,1926)

 

근대시기에 포착된 옛 사진자료를 살펴보면, 이곳에는 연병장 같은 너른 마당이 있고 그곳의 북쪽과 동쪽 가장자리에 각각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이라는 이름의 누각이 월대(月臺) 위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종실록>과 같은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열무(閱武, 임금이 몸소 군대를 사열하는 것), 연조(演操, 군사를 조련하는 일), 호궤(犒饋,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는 것) 등의 일이 벌어졌고, 특히 식년문무과전시(式年文武科殿試), 정시(庭試), 알성시(謁聖試)와 같은 여러 종류의 과거시험이 치러진 것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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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제10책(1930)에 수록되어있는 경복궁후원 융문당과 융무당의 원래 모습이다. 융문당은 남향(南向)이고, 융무당은 서향(西向)으로 배치된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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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시민위안 단오운동대회’ 안내광고에는 행사장소가 ‘경복궁 후원광장 경무대’라는 표시가 또렷이 적혀 있다.(<매일신보>1925년 6월 20일자)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경복궁이 사실상 빈 궁궐로 변하게 되는 한편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하면서 이곳 역시 그들에 의해 훼손되거나 해체되어 사라지는 운명에서 크게 비껴나지는 못하였다. 경복궁 일대에서 벌어진 궁궐문화재 수난사에 대해서는 경기도 편찬 자료인 <경기지방의 명승사적>(1937)에 수록된 「경복궁의 정리」 항목에 잘 정리되어있다.

 

덧붙여 이 서두에 기술하여 둘 일은 경복궁 터 약 13만 평의 땅이 현재와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된 대체적인 경위이다. 명치 43년(1910년)에 이르러 경회루, 근정전 등 거대한 건물과 기타 여러 개의 누전(樓殿)을 남기고 대부분의 건물 약 4천 칸을 철거하여 그 중에 다수가 민간에 불하되면서 구태(舊態)는 크게 변하였다. …… 또한 한강통(漢江通, 한강로) 11번지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는 소화 4년(1929년) 5월 신무문 밖의 융무당(隆武堂, 용광사 본당)과 융문당(隆文堂, 이 절 동북쪽의 객전)을 이축(移築)했던 것이며, 동사헌정(東四軒町, 장충동 1가) 박문사(博文寺)의 고리(庫裡, 거실)는 소화 7년(1932년) 10월 건춘문의 서북에 있던 선원전(璿源殿)을 옮긴 것이다. (하략)

 

여길 보면 융문당과 융무당이 용광사로 옮겨진 때는 1929년 5월이라고 적고 있으나,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해체 당시의 사진자료와 더불어 관련기사가 수록된 사실이 있으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록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용광사 본당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건물은 ‘융무당’이 아니라 ‘융문당’이라야 맞는 서술이 될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용광사라는 절은 원래 진언종 고야파(眞言宗 高野派)에 속하는 일본인 사찰이며, 1907년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에 처음 터를 잡았을 때의 이름은 ‘용산사(龍山寺)’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다가 ‘진언종 고야파 용광사(영정 8번지)’로 이름을 바꿔 조선총독부에 창립 신청을 제출하여 1917년 6월 8일에 허가를 받았으며, 그 후 1932년 5월 17일에 ‘한강통 11-131, 132, 133번지’로 주소지 이전 허가를 받은 내역이 <조선총독부관보>를 통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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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융문당과 융무당 해체 이전 당시의 모습이다.이 기사에는“이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일본인 사찰에 무상대여가 이뤄졌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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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경복궁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관련 기념엽서에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사라진 구역을 ‘경성협찬회의 여흥공간(식당, 매점, 흥행물)’이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절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숨진 이른바 ‘전몰장병(戰歿將兵)’의 유골을 봉안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던 사실이 눈에 띈다. <매일신보> 1942년 7월 3일자에 수록된 「전몰장병추도제, 6일부민회장에서」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억 국민이 감개 깊게 맞이하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 제5주년에 당하여 군사원호회 경성부 분회에서는 일찍이 대동아건설의 초석으로 산화된 전몰황군장병의 위령과 추모를 겸하는 두 가지 행사를 하기로 되었다.
첫째는 사변기념일에 앞서 6일 아침 장병의 유골이 안치된 부내 약초정(若草町) 서본원사(西本願寺), 용산정(龍山町) 대념사(大念寺), 용광사(龍光寺) 이 세 절을 방문하고 생화(生花)를 공진하여 영령을 위로하고 이날 또한 부민회장(府民會場)에서 전몰장병추도회를 행하기로 되었다. (하략)

 

말하자면 경복궁에서 옮겨진 융문당과 융무당은 난데없는 일본인 사찰로 둔갑하여, 그것도 하필이면 죽은 일본군인들의 영혼을 달래고 그들이 남긴 유골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여기에 함께 나오는 ‘대념사’라는 절은 1927년 7월 14일에 사원창립허가를 받았으며,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가 대표 출원자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사람은 용산 지역에 근거를 둔 실업가로 창덕가정여학교(彰德家庭女學校, 한강로 1가 50번지)의 설립자인 동시에 경기도회 관선의원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의 창립신청(1943년 10월 20일 허가) 때도 대표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을 아울러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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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고야산(龍山 高野山, 용광사)으로 옮겨진 이후에 일본인 사찰의 법당으로 변한 융문당의 모습이다. (<경성과 인천>,1929)

 

일제가 패망한 뒤 1946년에 이 절은 귀속재산으로 처리되어 원불교 측에 넘겨져 서울교당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리고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각각 대각전(大覺殿, 법당)과 대각사(大覺舍, 생활관)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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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지와 한강통 주변 약도에 표시된 ‘용광사’(오른쪽 중간)의 위치이다. 이곳은 중간 위쪽에 보이는 대념사(大念寺)와 더불어 침략전쟁 과정에서 생긴 이른바 ‘전몰장병의 유골안치사원’으로 활용된 공간이기도 하다. (자료출처 : 京城龍山公立小學校同窓會, <龍山小學校史 龍會史>,1999)

 

이 와중에 지난 2006년 6월 10일자 <관보>를 통해 등록문화재 등록예고의 대상이되면서 이곳의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이 다시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이다.
문화재청 공고 제2006-163호에 수록된 ‘등록사유’를 보면, “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강점기에 훼철된 경복궁의 전각 중 그 존재가 확인된 몇 안 되는 건축물로 조선 후기 궁궐의 건축양식을 확인할 수 있어, 그 역사성과 함께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통상 이러한 등록예고가 의례적인 통과절차 정도로 여겨지던 여느 등록문화재의 사례들과는 달리 이곳의 융문당과 융무당은 최종적으로 문화재 지정고시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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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6월 원불교 재단의 소관으로 바뀐 융문당과 융무당에 대한 등록문화재 등록예고가 있었으나 소유자 측의 반대로 최종 등록 고시는 무산되고 말았다. (<대한민국관보> 2006년 6월19일자)

 

이 당시에는 이미 원불교 측에서 이 건물들을 이전하고 그 자리를 재개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 자리는 신축된 원불교 서울교당과 하이원빌리지가 서 있는 상태로 변하였다. 이에 따라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에 해체되었다가 이듬해 9월에 전라남도 영광의 영산성지에 복원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지금은 이 건물들이 ‘원불교 창립관’과 ‘옥당박물관 문화체험관’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를테면 경복궁에 그대로 남아 있었어야 할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에 의해 한 번 해체 이전된 것도 모자라 또 다시 수백 킬로 떨어진 낯선 땅으로 옮겨지는 이중의 수난을 겪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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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원불교 서울교당에 있던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이 해체되어 전라남도 영광으로 이전되기 직전의 모습(왼쪽)과 그 자리에 새로 건립된 하이원빌리지(서울교당)의 전경(오른쪽)이다. 왼쪽에 보이는 전봇대와 건물 전면에 있던 보호수 은행나무 3그루만 그대로인 채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대목에서 하나 궁금해지는 것은 거의 ‘기적적으로’ 남아 있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질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그러한 일의 당위성이야 재론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더라도 다음의 한 가지 사항만큼은 꼭 상기시켜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원래 이 건물은 “원형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무상 대여한 것”이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소유권 관계를 따진다면 총독부 소유의 국유물인 상태에서 일본인 사찰인 용광사에 빌려준 것일 뿐이었으므로, 해방 이후 일반적인 귀속재산처리과정에 따라 원불교 측으로 소유권이 넘겨진 자체가 원천무효에 해당하는 일이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고자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유서(由緖)깊은 옛 과거(科擧)터, 융무 융문 양당(隆武 隆文 兩堂) 철훼(撤毁), 문무의 과거를 보던 융무당 융문당을 일본 절에 빌려주어 곡괭이에 헐려가, 진언종(眞言宗)에 무상대여(無償貸與)」 제하의 기사 내용을 여기에 덧붙여 두기로 한다.

 

…… 지난 11일부터 시내 입정정(笠井町)에 있는 일본 사람의 절 진언종 융흥사(隆興寺, ‘용광사’와 일본음 발음이 동일한 관계로 빚어진 착오)에서 다수의 인부를 데리고 와서 헐기에 착수하였다 한다. 내용은 전기 융흥사에서 총독부에 출원하여 동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심지어 주춧돌까지 전부 가져다가 용산 경성부출장소 옆에 있는 빈터에다가 새로 건축하고 불상을 안치하여 소위 선남선녀들이 출입하며 명복을 빌게 되리라는바 문무(文武) 과거를 보이던 곳이 갑자기 부처님 두는 곳으로 변하여 가는 것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적지 아니한 감개를 일으키게 하였다. (하략)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여기저기로 흩어진 궁궐문화재 가운데 그 원형이 아직도 남아 있는 사례는 지극히 드문 형편임을 감안하면, 이들 건물의 가치는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겠다. 그런 만큼 설령 그것이 전혀 별개의 공간으로 옮겨진 상태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등록문화재로 등재하는 문제는 서둘러 재추진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어쨌거나 그러한 시도가 더 이상의 원형 훼손이나 건물 자체의 멸실을 막아주는 최소한의 제도적 보호장치가 될 테니까 말이다.

목, 2018/09/2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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