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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통치기간에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일제 신사가 만들어졌을까? ‘1군 1신사(神社)’와 ‘1면 1신사(神祠)’의 건립을 강요하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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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통치기간에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일제 신사가 만들어졌을까? ‘1군 1신사(神社)’와 ‘1면 1신사(神祠)’의 건립을 강요하던 시절

admin | 토, 2021/08/28- 00:18

[식민지 비망록 73]

식민통치기간에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일제 신사가 만들어졌을까?

‘1군 1신사(神社)’와 ‘1면 1신사(神祠)’의 건립을 강요하던 시절

 

이순우 책임연구원

 

2020년 정초 무렵에 경기도 양주시 남면행정복지센터(옛 남면사무소) 앞에 일제 때 만들어진 비석 하나가 남아 있다는 얘길 듣고 서둘러 그곳을 탐방하러 길을 나선 적이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곳은 분명 ‘남면(南面)’인데 그 위치가 정작 양주시의 제일 북쪽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다. 알고 봤더니 원래 이 지역은 경기도 연천군에 속했으나 해방 이후 1945년 11월 3일에 이르러 군정청 법령 제22호 「북위 38도 이남에 연접한 군촌면읍시(郡村面邑市)의 관할구역 임시이전」에 따라 ‘파주군 남면’으로 조정되었다가 다시 1946년 2월 5일 ‘양주군’ 관할로 이관 처리된 내력을 지녔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에 이곳은 어디까지나 연천군 남면이었던 것이다

경기도 양주시 남면행정복지센터에 남아 있는 ‘히라누마 젠쵸(윤선장) 송덕비’의 모습이다. 1940년 11월에 건립된 이 비석은 신산체육공원과 남면사무소의 구내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친일잔재논란과 관련하여 2019년에 철거되어 별도로 보관중인 상태이다.

 

아무튼 양주시 남면행정복지센터의 창고 옆쪽에서 바닥에 뉘어놓은 옛 비석 하나를 살펴보았더니 거기에는 “학무위원 겸 면협의회원 히라누마 젠쵸 송덕비(學務委員兼面協議會員 平沼善長頌德碑)”라는 글씨가 또렷하다. 이를 단서로 관련 자료를 뒤져보니 이 이름은 윤선장(尹善長, 1879~?)의 창씨명이며, 그가 연천군 남면 상수리 구장(1937.6)을 지냈다거나 양주세무서 관내 조선주 제조업자 총회에서 탁주 1등상을 수상(1937.10)했다거나 연천군 남면 면협의회원(1939.5)의 당선자라거나 하는 등의 경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비석의 뒷면에도 별도의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그 뜻을 간추려보니 대략 이러하다.

옥전(신사)을 지어/ 숭신의 기풍을 일으키고/ 쌀과 재물을 내어/ 이웃을 돌보며 흉년을 구제하네/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익에 봉사하여/ 한 고을에서 본보기가 되었으니/ 그 공적을 간략히 적어/ 부족하나마 송덕을 표하노라/ 연천군 남면 일동/ 히라누마 아마네가 적고/ 소화 15년(1940년) 11월에 이를 세우다(營造玉殿 興起崇神 捐出米財 保隣救歉 滅私奉公 垂範一鄕略記功蹟 聊表頌德 / 漣川郡南面一同 / 平沼周識/ 昭和十五年十一月 建之)

 

여기에 나오는 옥전(玉殿)은 여러 가지 의미로 풀이될 수 있는 표현이지만, 그 뒤에 나오는 숭신(崇神)이라는 구절과 맞물려 생각건대 이는 필시 일제가 각 고을마다 설립을 강요했던 ‘신사(神祠)’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 시절 ‘경신숭조(敬神崇祖)’라거나 ‘숭신경조(崇神敬祖)’라거나 하는 것은 널리 통용되던 관제용어(官製用語)의 하나였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그가 신사의 건립과 관련하여 상당한 비용을 부담했다는 뜻으로 읽혀지는 대목이기도 한 것이다. 이 비문을 정리한 이로 표시된 히라누마 아마네(平沼周)는 1933년 이후 연천군 남면 면장(面長)을 지낸 윤태혁(尹太赫, 1896~1959)의 창씨명으로 확인되는데, 그의 이름은 <조선총독부관보> 1940년 12월 8일자에 수록된 「휘보(彙報)」의 ‘신사설립허가(神祠設立許可)’ 관련 항목에서도 포착되고 있다.

 

경기도 연천군 남면(京畿道 漣川郡 南面)에 신사 설립의 건(件) 윤태혁(尹太赫) 외 11명의 원출(願出)에 대해 본년 11월 28일부로 이를 허가함.

<조선총독부관보> 1940년 12월 3일자에 수록된 ‘경기도 연천군 남면 신명신사’의 신사설립허가내역이다. 여길 보면 연천군 지역의 경우 관인면, 삭녕면, 영근면, 중면, 미산면 등이 동시에 신사설립허가(대표 원출자는 그 지역의 면장)를 받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1면 1신사’ 조영계획과 맞물려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매일신보> 1940년 12월 24일자에는 ‘황기2600년’에다 ‘황태자 탄생일’에 맞춰 경기도 연천군내 11개면 신사의 진좌제(鎭座祭)가 일괄하여 거행되었다는 소식이 실려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와 고스란히 겹치는 때에 나온 <매일신보> 1940년 12월 24일자에는 「연천군(漣川郡) 일면일신사 완성(一面一神祠 完成), 23일, 일제 진좌제 집행(一齊 鎭座祭 執行)」 제하의 기사가 수록된 것이 퍼뜩 눈에 띈다. 여기에 나오는 ‘산와 군수’는 1939년 1월에서 1942년 6월 사이에 연천군수를 지낸 최탁(崔卓, 1892~?)을 가리키며, 그의 창씨명이 바로 산와 타쿠(三和卓)였던 것이다.

 

성전하(聖戰下)에 맞이한 황기(皇紀) 2600년의 심원(深遠)한 의의(意義)를 자자손손에게까지 전하고자 연천군 8만 군민이 계획하여온 군내 11개면 신사 어조영공사(神祠 御造營工事)는 산와 군수(三和郡守)의 열의와 군민의 적성(赤誠)을 다한 근로작업과 소에 나오지(副直司) 씨의 헌신적인 공사봉사로 이즘 전부 준공되었으므로 23일 황태자전하 어탄신(皇太子殿下 御誕辰)의 가일(佳日)을 기(期)하여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부터 어영대(御靈代)를 봉천(奉遷)하와 전신사(全神祠)에서 일제히 진좌제(鎭座祭)를 엄숙히 거행하였다. 이에 대하여 산와 군수는 여좌(如左)히 말하였다.
“각 면민의 간절한 열망에 의하여 일면일신사(一面一神祠) 어조영의 계획은 작년말경부터 시작되어 꼭 1개년이 되었는데 기간 면민의 눈물겨운 봉사와 소에(副) 씨의 희생적 공사봉사로 드디어 준공을 보게 되었다. 특히 작년의 한해(旱害)로 인하여 식량의 고통을 받으면서도 면민이 신사에 대하여 진지한 봉사를 한 것은 실로 그들이 얼마나 경신관념(敬神觀念)이 불타고 있는가를 표시하는 것으로 깊이 감사한다.”

 

이 기사는 연천군 남면에 만들어진 신사라는 것도 사실은 ‘1면 1신사’ 조영계획에 따라 연천군 전역에서 일괄 조성된 결과물의 하나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일제패망기에 이르러 이처럼 면 단위의 지역까지 소규모 신사들이 광범위하고 촘촘하게 설립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 땅에 건립된 각종 신사들의 연혁을 살펴보면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가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이전에도 이미 여러 신사들이 두루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여기에는 일본 최초의 해외신사(海外神社)로 일컬어지는 용두산신사(1678년)를 비롯하여 원산신사(1882년), 인천신사(1890년), 경성신사(1898년), 진남포신사(1900년), 군산신사(1902년), 용천신사(1905년), 대구신사(1906년), 대전신사(1907년), 삼랑진신사(1907년), 성진신사(1909년), 마산신사(1909년), 송도신사(1910년)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1915년 8월 16일에 조선총독부령 제82호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이 제정되면서 신사의 창립은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 엄격한 조건에 따라 이뤄지도록 바뀌게 된다. 특히 부칙규정에 따라 “본령 시행 당시 현존하는 신사는 시행일(1915.10.1일)부터 5개월 이내에 신사창립의 허가수속을 할 것”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기존의 신사들도 모두 일괄하여 이 절차에 따라 재창립되었다.
이를테면 이를 기점으로 새로운 신사의 제도적인 창립절차가 비로소 적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아울러 1917년 3월 22일에는 별도의 조선총독부령 제21호 「신사(神祠)에 관한 건(件)」을 제정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신사(神祠)라고 칭함은 신사(神社)가 아니면서 공중(公衆)에 참배를 시키기 위해 신기(神祇)를 봉사(奉祀)하는 곳을 말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신사(神社, 진쟈)와 신사(神祠, 신시)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용어로 간주되었고, 조선총독에 의한 허가(許可)에 있어서도 각각 창립(創立)과 설립(設立)의 형태로 다르게 처리되었다.
그리고 신사(神社)의 명칭은 대개 그 지역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 것이 보통이지만, 신사(神祠)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신명신사(神明神祠, 신메이신시)’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흔한 방식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메이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별칭(別稱)이므로, ‘신메이신사’는 이를테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총본산으로 삼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주된 제신(祭神)으로 모시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신사(神祠, 격이 낮은 소규모 신사)인 셈이다. 일제 패망기에 접어들수록 신설되는 신메이신사마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 곁들여 ‘메이지천황(明治天皇)’도 함께 제신으로 설정되는 사례들이 급증하는 현상도 확연히 드러나는 특징의 하나이다

신사(神社)의 창립 요건과 신사(神祠)의 설립 요건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의 <조선종전의 기록> (1964)에 수록된 조선 관련 신궁(神宮), 신사(神社), 신사(神祠) 집계표이다. 관폐사는 조선신궁과 부여신궁을 말하며, 국폐사는 경성신사(1936), 용두산신사(1936), 대구신사(1937), 평양신사(1937), 전주신사(1939), 함흥신사(1939), 광주신사(1941), 강원신사(1941) 등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이 땅에 존재했던 신사의 총 숫자에 대해서는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 1910~1992)가 지은 <조선종전의 기록 ― 미소양군의 진주와 일본인의 인양(朝鮮終戰の記錄 ― 米ソ兩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1964), 108쪽에 수록된 것을 가장 유용한 근거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이 내용은 조선신궁 권궁사(朝鮮神宮 權宮司)를 지낸 타케시마 요시오(竹島榮雄) 소장자료를 바탕으로 정리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여기에는 조선신궁(朝鮮神宮)과 부여신궁(扶餘神宮)을 포함하여 조선 전체의 각종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를 합쳐 모두 1,141개소(1945년 6월말 현재)가 존재했던 것으로 적고 있는데, 이 당시 부읍면(府邑面)의 총수(總數)가 2,346개소였으므로 얼추 잡아 면(面) 단위로 보면 하나 건너 한 곳마다 이러한 일제의 신사가 두루 포진했다는 말이 된다. 이를 다시 지역별로 살펴보면, 부읍면의 숫자에 대비하여 전라남도(100%), 황해도(87.7%), 평안북도(80.8%), 충청북도(69.8%), 경기도(69.2%)의 순서로 집약도가 유난히 높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관보>의 「휘보(彙報)」에 수록되는 ‘신사 창립 허가’와 ‘신사 설립 허가’의 내역을 전부 취합하여 이를 도표로 만들어 그 추이를 살펴보면, 이러한 숫자라는 것도 대개 1930년대 중반 이후에 집중적으로 늘어난 것이라는 사실이 포착된다.

 

신사(神社)와 신사(神祠)의 창립, 설립, 폐지 허가에 관한 연도별 추이

(✽) 이 자료는 <조선총독부관보>의 「휘보(彙報)」에 게재된 내역을 취합하여 정리하였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주면 오관리에 조성된 홍성신사(洪城神祠)의 전경을 담은 엽서자료이다. 입구의 토리이는 1931년 10월에 세워진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 대한 신사설립허가는 1923년 10월 25일에 있었던 것이 맞지만, 정작 <조선총독부관보>에는 관련사실이 전혀게재된 바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즈시 미노루 기증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여기에 취합된 자료에 나타난 숫자(즉, 2+80-3+886-16=949개소)와 모리타 요시오의 책(1964)에 수록된 그것(즉, 1,141개소)이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은 신사 창립과 신사 설립에 관한 허가 사항이 <조선총독부관보>에 100퍼센트 다 게재되는 것이 아니라 누락된 사례들도 제법 존재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예를 들어, 경기도 지역의 경우에도 <조선총독부관보>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지만 <경기도보(京畿道報)>를 통해 ‘신사설립허가’의 내역이 확인된 사례가 무려 14곳이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대륙신도연맹(大陸神道聯盟)의 <대륙신사대관(大陸神社大觀)>(1941)에 정리된 신사 목록을 대조해 본 결과, 여기에서도 동일한 사례가 3곳 더 포함되어 있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르러 신사 설립의 건수가 두드러지게 증가세를 나타낸 것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 1935년 4월 6일자에 수록된 「전반도(全半島)에 고조되는 경신열(敬神熱), 신사(神祠)의 인가 격증(認可 激增), 작년(昨年)부터 33신사 늘어, 심전개발(心田開發)의 일증좌(一證左)」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이유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일본정신(日本精神)의 고양(高揚)과 심전개발(心田開發)의 기운(機運)에 사로잡혀 최근 선내 각지(鮮內 各地)에 신사(神社)의 건립이 많아지고 있는데, 수년 전까지는 손에 꼽을 정도였던 것이 작년9년(1934년)에는 충주신사(忠州神社) 외에 27신사(神祠)의 설립이 인가되었으며 금년에 들어와 다시 6신사(神祠)가 인가(認可)되고 또한 출원중(出願中)인 것이 14곳에 달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이것의 특이한 현상으로서 종래 그 출원자는 전부 내지인(內地人)뿐이었으나 최근에는 건설발기인(建設發起人) 가운데 조선인 유지(朝鮮人 有志)의 이름이 동반되기에 이르렀던 것인데, 조선인 방면의 경신열(敬神熱)이 고조되어왔다는 증좌(證左)로서 총독부도 가능한 한 인가의 방침(方針)을 취하고 있다

 

<조선신문> 1935년 4월 6일자에 수록된 관련기사에는 이른바 ‘심전개발(心田開發)’과 관련하여 신사의 인가 건수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담겨 있다.

 

<매일신보> 1940년 12월 21일자에 수록된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의 ‘신명신사’ 진좌제 모습이다. 신사(神社) 규모 이상의 것은 제법 사진자료들이 남아 있으나, 면(面) 단위에서 조성된 신사(神祠)는 이러한 모습이나마 제대로 관련자료가 남아있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여기에 나오는 ‘심전개발’은 우가키 총독(宇垣 總督) 시기에 조선총독부가 주창한 일종의 정신계몽운동이었다. 1936년 1월 15일에 경성부민관 중강당에서 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심전개발관민간담회’의 결과를 담아 최종 공표한 내용에 따르면, 심전개발은 “(1) 국체관념(國體觀念)을 명징(明徵)케 할 것, (2) 경신숭조(敬神崇祖)의 사상(思想) 및 신앙심(信仰心)을 함양(涵養)할 것, (3) 보은(報恩), 감사(感謝), 자립(自立)의 정신(精神)을 양성(養成)할 것”을 3대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때 이를 실천하는 방안의 하나로 크게 부각된 것이 바로 각지에 신사 또는 사원(寺院)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일본정신(日本精神)을 고취하는 동시에 농산어촌(農山漁村)의 자력갱생(自力更生)에 심적 조성(心的 助成)을 이루게 하려고” 했으며, 특히 ‘1군 1신사(一郡 一神社)’니 ‘1면 1신사(一面 一神祠)’니 하는 표현이 본격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신사설립허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은 1939년 이후의 일인데, 이 당시의상황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39년 3월 29일자에 수록된 「1군 1신사(一郡 一神社)를 목표(目標)로 강원(江原)서 건립을 계획, 명(明) 14년도부터 동(同) 20년까지, 1면 1신사(一面 一神祠)도 촉진(促進)」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

 

[춘천(春川)] 강원도내에는 현재 신사(神社)가 건립되어 있는 곳이 춘천, 강릉 두 곳뿐이므로 도당국에서는 소화 14년도(1939년도)부터 동 20년(1945년)까지 1군 1신사주의로 신사를 세우고자 계획중인데 14년도에는 우선 원주와 철원 2개 군에 건립하기로 내정되었다 한다. 그리고 명년이 마침 황기(皇紀) 2600년에 해당하므로 각군(各郡)에서 그의 기념사업으로 신사를 건립하겠다는 희망이 상당히 있을 모양인데 신사 1사를 세우자면 약 3만 원의 경비가 들게 되므로 급속한 실현은 보기 어렵게 될 터이라 한다. 그리고 신사(神祠)는 현재 30개소가량 되는 바 1면 1신사를 계획한 일도 있었으나 경비관계로 역시 속히 실현할 수 없으므로 도(道)로서는 될 수 있는 대로 각군에서 분발하여 1면 1신사를 실현하기 바란다 하며 철원(鐵原) 같은 곳에서는 벌써 황기 2600년 기념사업으로 관하 각면(各面)에 1신사를 건립하고자 계획을 세웠다 한다.

 

여기에서 보듯이 1940년은 이른바 ‘황기 2600년(기원 2600년; 초대 천황의 즉위를 기점으로 계산하는 방식)’이 되는 해가 되므로 이를 기념하는 사업으로 곳곳에서 ‘1면 1신사’의 형태로 신사의 건립을 추진하는 통에 자연히 허가건수가 급증세를 나타내게 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러한 흐름은 그 이후에도 여러 해에 걸쳐 이어졌는데, <매일신보> 1942년 5월 2일자에 수록된 「경신사상(敬神思想)을 발양(發揚), 경기도(京畿道)의 일면일사(一面一祠) 완성불원(完成不遠)」 제하의 기사는 경기도 일대에서 벌어진 신사 설립의 추세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유구 3천 년을 꿰뚫고 내려오는 경신숭조(敬神崇祖)의 황국정신을 한층 빛나게 하여 성전관철에 3백만 도민이 돌진케 하는 도움이 되게 하려고 경기도에서는 일찍부터 1면(面) 1사(祠)를 제창하고 황기 2천 6백년 기념사업으로 계속하여온 이래 도내 일 면민들은 앞을 다투어 정재를 모두어서 신사(神祠)어조영에 총후의 적성을 바치고 있다. 그리하여 지난 소화 15년(1940년) 4월 이래로 금년 4월 11일 현재까지의 만 2개년 사이에 73개면에서 새로이 면진호(面鎭護)의 신사 어조영을 완성시켜 현재 도내의 총신사는 111사에 이르렀다. 그중 수원군(水原郡)에는 15사, 연천군(漣川郡)에는 11사, 김포군(金浦郡)에는 8사, 시흥군(始興郡)에는 6사를 각각 어조영하여 1면 1사를 벌써 완성시켰다. 그런데 이 많은 신사에 봉사할 신직(神職)이 부족하여 경기도에서는 금년도에 3천 원의 예산을 세워 각 관공립학교의 교원, 군관리, 경찰관리와 및 신사의 숭경자 총대(總代) 중에서 희망하는 자를 선발해서 황전강구소(皇典講九所) 조선분소에 의뢰하여 신직의 봉무를 수강케 하기로 되었다.

 

(좌) 이른바 ‘국민정신작흥운동’이라는 명분 아래 천조황대신궁(天照皇大神宮, 이세신궁의 내궁을 일컫는 말)이라고 쓴 이러한 신궁대마(神宮大麻, 진구타이마)가 광범위하게 배포되어 이를 카미다나(神棚)에 봉안하도록 강요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우) 조선신기학회(朝鮮神祇學會)가 펴낸 <대마의 제사방법(大麻の 祀り方)>(1938)에 수록된 ‘대마봉안 표준도(大麻奉安 標準圖)’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이를 보관하는 카미다나(神棚)의 형태도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이와 아울러 국민정신을 작흥(作興)하고 경신숭조의 관념을 철저히 하기 위해 집집마다 신궁대마(神宮大麻; 신궁에서 배포하는 일종의 종이부적)를 봉안토록 하는 일이 광범위하게 권장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실제로 대륙신도연맹에서 펴낸 <대륙신사대관> (1941), 176쪽에 수록된 신궁대마의 반포(頒布)에 관한 통계 추이를 살펴보면, 1937, 8년도의 시기에 이르러 급증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궁대마의 반포 추이

이러한 신궁대마의 반포와 함께 각 가정과 학교, 그리고 관공서와 직장마다 이를 모시는 공간으로서 카미다나(神棚; 찬장이나 선반 형태의 작은 제단)의 설치가 강요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자료의 말미에는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더 한층 분발하여 지속적인 대마반포의 확산을 독려하는 내용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 유달리 눈길을 끈다.

 

…… 이와 같이 반도(半島, 조선)에 있어서 대마반포는 실로 약진일로(躍進一路)의 호성적(好成績)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소화 15년도(1940년도)의 반포수 126만 3,640체(體)는 이를 반도의 총호수(總戶數) 428만 2,754호(戶)에 비하면 약 4분의 1에 지나지 않으므로 대마반포의 진정신(眞精神)인 것으로서 일호일체봉재(一戶一體奉齋)의 견지(見地)에서 본다면, 반도에 있어서 대마반포는 더욱 일층(一層)의 노력과 열의로 대중(大衆)에 대해 그 진정성의 체득(體得)과 봉재배수(奉齋拜受)의 이해를 다시 일단(一段) 깊이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특히 이 시기는 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으로 촉발된 비상시국(非常時局)이 지속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신사라는 공간은 무엇보다도 전시체제 아래 내선일체와 황국신민의 정신을 한층 더 고조시키는 일차적인 수단으로 사용되곤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새로운 임지(任地)를 부여받은 관리들은 으레 부임 첫날에는 제일 먼저 그 지역의 신사를 찾아 참배를 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정착되었고, 지원병에 선발되는 경우에도 입영기(入營旗)를 앞세우고 관내 신사에 봉고제(奉告祭)를 올리는 것이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의 하나가 되고 있었다.

 

<매일신보> 1937년 3월 4일자에는 신임 경기도 광주군수인 전예용이 부임 즉시 ‘광주신사’를 먼저 참배하고 군청에 초등청(初登廳)하였다는 소식이 수록되어 있다.

<매일신보> 1938년 6월 13일자에 수록된 최초 지원병 합격자인 최덕윤(崔德潤)이 관내 ‘숭인신사(崇仁神祠)’에서 봉고제를 올리는 장면이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38년 6월 1일자에 수록된 「지원병 경성합격자(志願兵 京城合格者) 봉고제(奉告祭)와 축하회(祝賀會), 12일 숭인신사(崇仁神社)에서」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초년도 지원병 전형시험에 합격된 202명 중 경성부내에도 영예의 군문을 돌파한 자가 두 명이나 있다는 것은 기보하였거니와 그 중 부내 제기정(祭基町) 137번지 최덕윤(崔德潤) 군의 영예의 합격을 신전(神前)에 봉고하는 봉고식(奉告式)은 12일 오전 8시부터 부내 숭인신사(崇仁神社)에서 소관 당국대표, 동정회 대표, 생도 대표, 국방부인, 방호단원, 기타 유지 참렬하에 엄숙히 거행하기로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경마장(競馬場) 장내에서 축하회도 개회할 터이라 한다.

 

그리고 1941년 12월에 이르러 이른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태평양전쟁)’의 개전에 따라 침략전쟁의 또 다른 양상이 펼쳐지고, 그 이후 전세가 패망을 향해 치닫게 되면 될수록 그에 비례하여 신사라는 존재의 효용가치를 강조하는 식민통치자들의 목소리는 높아져갔다. <매일신보>1943년 8월 6일자에 수록된 「일면인사(一面一祠) 목표로 하여 신사(神社), 신사(神祠)를 어건조(御建造), 경신숭조사상(敬神崇祖思想)을 철저(徹底)히 주입(注入)」 제하의 기사는 이러한 전시체제기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망의 징병제도와 해군지원병제도는 드디어 실시되어 반도청년도 내지동포와 어깨를 겨누고 육지로 바다로 나라의 방패가 되어 마음껏 싸울 때가 다가왔다. 이 얼마나 영광이며 영예인가. 그러나 우리는 영예를 치부하고 감격에만 잠겨서는 안 된다. 부르심을 받자올 청년은 수양연성을 하고 그 가정 또한 훌륭한 군인의 가정이 되어 무적황군으로서 손색이 없는 군인이 많이 나오도록 힘써야 된다. 일본은 신국(神國)이오, 만세일계의 천황폐하가 다스리시는 황국(皇國)이라는 국체의 근본을 경신숭조(敬神崇祖)의 실천에 의하여 체인(體認)하는 것이 훌륭한 군인이 되는 길이다.
총독부에서는 경신사상의 근본인 신사를 일면일사(一面一社)를 목표로 어건조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지금 2,346 부읍면 가운데에 신사 신사(神社 神祠) 수는 9백 사밖에 안 되는 부와 읍은 전부 어건조를 보았으나 면에는 3분지 2나 경신사상의 중심되는 시설이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신사의 어조영(御造營) 같은 존엄한 일은 각 지방민의 적성에 의함이 마땅하므로 당국으로서는 직접 어조영을 하는 것은 아니고 지방관민의 경신사상을 앙양하는데 도움이 되는 시설과 운동을 일으키기로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전국에 걸쳐 횡행했던 이러한 신사들은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이 점에 관해서는 세세한 사례들까지 다 추적하기는 어렵지만 우선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의 <조선종전의 기록>(1964), 111~113쪽에 정리된 내용에서 몇 가지 개략적인 단서를 얻어낼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승신식(昇神式)’은 신사를 폐쇄하면서 제신(祭神)의 신령(神靈)을 하늘로 돌려보내는 의식절차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총독부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경성신사(京城神社)는 8월 16일 오후 3시에 승신식(昇神式)을 행하였다. 원산신사(元山神社)는 16일 오후 8시, 강원신사(江原神社)는 17일 오전 5시, 인천신사(仁川神社)는 17일, 대구신사(大邱神社)는 18일 밤, 전북의 이리(裡里), 군산(群山), 남원(南原), 대장(大場), 김제신사(金堤神社)는 18일, 전남의 순천신사(順天神社)는 17일, 완도신사(莞島神社)는 18일, 황해도의 해주신사(海州神社)는 17일, 사리원신사(沙里院神社)도 그 무렵에, 평남의 진남포신사(鎭南浦神社)는 17일, 평북의 강계신사(江界神社)는 19일, 강원도의 장전신사(長箭神祠)는 18일에 각각 승신식을 행하였다. 평북의 만포신사(滿浦神社)는 8월 18일에 승신식을 행하고, 신체(神體)를 소각했다. 마산신사(馬山神社)는 9월 4일, 밀양신사(密陽神社)는 10월 5일에 승신식을 행하였다.
…… 조선인의 손에 의해 불태워진 것으로 15일 밤에 평양신사(平壤神社), 16일에 정주신사(定州神社), 안악신사(安岳神社), 온정리신사(溫井里神祠), 17일에 안주신사(安州神社), 삭주신사(朔州神祠), 영변신사(寧邊神社), 천내리신사(川內里神祠), 재령신사(載寧神祠), 18일에 겸이포신사(兼二浦神社), 선천신사(宣川神社), 박천신사(博川神社), 소록도신사(小鹿島神社), 21일에 용천신사(龍川神社), 22일에 희천신사(熙川神社), 신막신사(新幕神社)도 그맘때였다. 신막신사의 신체는 17일경 씨자총대(氏子總代)의 손에 소각되었다. 8월 말에 안동신사(安東神社, 경상북도), 9월 2일에 강계신사(江界神社), 9월 7일에 해주신사(海州神社) 등이 불태워졌다는 보고가 있었다. 장연신사(長淵神社)는 8월 20일 무렵 재주민(在住民)과 일본군(日本軍)의 손으로 소각했고, 몽금포신사(夢金浦神祠), 태탄신사(苔灘神祠)는 조선인에 의해 부서졌다. 만포신사(滿浦神社)의 봉재전(奉齋殿)은 19일밤 조선인에 의해 소각되었다. (하략)

 

<대륙신사대관> (1941)에 수록된 평양신사(平壤神社, 1937년에 국폐사로 승격)의 전경이다. 이곳은일제가 패망하던 1945년 8월 15일 바로 그날 밤에 전국에서 제일 먼저 조선인의 손에 의해 불태워졌다고 알려져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일제 패망 직후의 시점에 <경성일보> 1945년 9월 22일자에 게재된 미군정장관 일반명령 제5호의 내용이다. 여기에는 즉시 폐지될 일제의 대표적인 악법(惡法)으로 치안유지법과 사상범보호관찰령, 사상범예방구금령 등과 더불어 ‘신사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의 405~406쪽 부분에는 신사처리방침의 개요에 관해 다음과 같은 내용도 함께 정리되어 있다

…… 9월 21일, 일반명령 제5호에 따라 신사에 관한 규정이 폐지되고, 신궁 신사의 재산은 미군정청(米軍政廳)에 접수되었다. 조선신궁(朝鮮神宮)의 회계는 세출(歲出)은 이해 8월 31일, 세입(歲入)은 8월 22일로서 중지되고, 9월 22일에 결산보고서, 자금명세서와 현금을 군정청에 건넸다.
각지(各地)의 신사(神社)도 재산목록, 결산보고서 등을 지방의 군정청에 보고하였고, 토지건물은 군정청에 접수되었다. 11월 2일에 군정청은 각도지사(各道知事)에 대해 “각 신사의 본전은 당국의 허가를 얻어 소각(燒却)해도 지장이 없다. 다만, 신사 소유의 서류 및 재산은 도지사가 보관한다. 소각에 있어서는 관리(官吏)의 입회가 필요하고, 또한 10마일 이내에 주류(駐留)하고 있는 미군 부대장에게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통달(通達)했다. 이에 근거하여 지방의 신사 본전은 대다수 일본인(日本人)의 손에 의해 해체, 소각되었다. 신사는 대체로 경승지(景勝地)에 있으므로 이것을 혹은 도서관(圖書館, 춘천신사)으로, 혹은 양로원(養老院, 광주신사)으로, 혹은 학교(學校) 등으로 이용하고 싶다고 하는 요망(要望)이 있었다. (하략)

 

위의 내용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군정장관(軍政長官) 아놀드 소장 명의로 공포된 미군정청 「일반명령 제5호(1945년 9월 21일)」의 앞머리에는 특별법의 폐지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경성일보> 1945년 9월 22일자에 수록된 관련보도에는 일제의 의해 생성된 특별법의 목록이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イ)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1919년 4월 15일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6권 제14집 1024엽)
(ロ) 예방구금규칙(1941년 5월 15일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2권 제8집 8엽)
(ハ) 치안유지법(1925년 5월 8일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2권 제8집 16엽)
(ニ) 출판규칙(1910년 1월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2권 제8집 255엽)
(ホ) 사상범보호관찰규칙(1936년 12월 12일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2권 제8집 230엽)
(ヘ) 신사에 관한 건(1919년 7월 18일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2권 제6집 188엽)

 

이 내용은 그 이후 「미군정청 법령 제11호」 ‘일반명령 제5호의 개정(1945년 10월 9일)’에 그대로 재반영되었는데, 여기에 즉시 폐지의 대상으로 언급된 특별법이란 것은 일제가 조선인 탄압의 통치수단으로 사용해왔으며 대표적인 악법(惡法)으로 간주되었던 것들을 가리킨다. 여기에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이라든가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朝鮮思想犯豫防拘禁令)이라든가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朝鮮思想犯保護觀察令)이라든가 하는 것들과 동일한 반열에 ‘신사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기간에 신사라는 존재가 이 땅의 사람들에게 끼친 폐해가 그만큼 깊었고 또 고약했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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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8일 첫 방송을 시작한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내역사) 시즌2가 2018년 8월 20일 마지막 방송으로 9개월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시민들의 많은 관심으로 좋은 성과를 냈던 시즌1 〈역적〉을 발판삼아 시즌2는 연구소가 보유한 콘텐츠를 활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외부단체와 제휴를 통해 청취자를 늘려 장기적으로 연구소 미디어로 발전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내역사 시즌2에서는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의 대중역사강의 ‘근현대사 100년의 역사여행’(아쉽게도 개인사정으로 중단됨)을 필두로 조한성 연구원, 방은희 교육팀장, MC노가 사건과 인물 중심으로 역사를 알기 쉽게 풀어간 ‘역전다방(역사를 전하는 수다방)’과 이순우 연구원의 식민지시대 자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돋보인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가다)’ 그리고 역사이슈에 대한 뒷담화를 나누는 ‘방학진 기획실장의 바하인드히스토리’까지 4개의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총 55개의 에피소드를 방송하였다.
국민TV와 협력하여 3개월간 영상방송을 제작하여 영상방송의 가능성도 타진하였다. 특히 역사적인 4.27남북정상회담에 맞춰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와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을 모시고 특별대담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청취자들의 많은 관심을 이끌어냈다. 그 결과 내역사 시즌2는 5천여 명의 고정 청취자를 확보해 월 8만 이상의 다운로드를 기록했고, 역사 팟캐스트 분야에서 10위권에 진입하여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는 시즌1, 2를 거치면서 안정적인 제작노하우를 습득해 향후 장기적인 방송을 할 수 가능성을 열었다. 연구소는 두 달 간 충전기를 갖고 나서 10월말쯤 시즌3에 들어갈 예정이다. 회원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내역사 시즌2의 모든 에피소드는 오디오 팟빵, 아이튠즈 팟캐스트, 유튜브와 팟티를 통해서 다시 들을 수 있다.

• 김세호 PD

목, 2018/09/06-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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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회 회원인 박노정 시인이 7월 4일 6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박 시인의 부고기사가 여러 언론에 났지만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가 쓴 기사 제목에 가장 공감이 간다.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 별세〉.
박 시인을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박 시인이 ????진주신문????대표이사 시절 그의 소개로 진주의 어른인 남성(南星) 김장하 선생을 만났으니 아마도 1990년대 후반으로 짐작한다.

▲ 박노정 시인./경남도민일보DB

????진주신문????은1990년진주시민들이모여창간한신문으로지역의수구적인여론에맞서 정론직필 그리고 ‘진주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정신을 ‘신분해방운동인 형평, 임진왜란 때 2차례에 걸친 진주성 전투에서 민관군이 일체가 돼 보여준 주체, 남명 조식 선생의 호의’ 등 3가지를 꼽았다.
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이사뿐아니라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진주민예총회장,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 진주문인협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를 빼놓고 진주의 시민운동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로 있던 2005년 5월, 박 시인은 지역의 후배들과 함께 진주성 촉석루 옆 의기사에 있던 친일화가 김은호의 ‘미인도 논개’(일명 논개영정)을 뜯어내 박 시인을 포함해 4명이 각각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선고가 부당하다며 모두 노역장 유치를 자원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벌금 대납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다. 당시 4명의 벌금은 2,000만원이었지만 나중에 보니 성금이 이보다 더 많은 2,370만원이나 모아졌다. 박 시인 등은 나중에 이 성금 중 일부를 연구소 진주지회 결성(2012년 3월) 자금으로 내놓았다. 실제로 박 시인은 연구소 진주지회의 숨은 설계자였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시절이던1990년대초부터논개영정폐출운동을시작해 2008년 충남대 윤여환 교수가 그린 새로운 논개 영정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기까지 거의 20년이 걸렸다. 박 시인은 2006년에 친일잔재청산을위한진주시민운동을 만들어 진주 출신 친일가수 남인수의 이름을 딴 ‘남인수 가요제’를 ‘진주 가요제’로 바꾸기도 했고 ‘을사늑약 100년 남북공동사진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친일잔재 지도’ 제작도 추진했다. 이처럼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의 일생은 올바른 ‘진주정신’의 발굴과 계승이었다. 그와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을 간직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방학진 기획실장

 

수, 2018/08/0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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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57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50점 보내와
7월 26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제57차 자료기증을 했다. 주요자료는
1942년생 황OO가 경기도 강화국민학교, 강화중학교, 강화여자상업고등학교, 경기도농촌진흥
원 등을 거치면서 받은 상장과 수료증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자료 기증 잇달아
8월 2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의 히구치 유이치 공동대표가 연구소를 직접
방문하여 ????해협????, ????재일조선인사연구???? 등 소장자료 10점을 기증하였는데, 일본으로 돌아간 후인
8월 8일, 자택에서 소장자료를 정리하다가 기증자료를 발견하여 <조선신궁연보>(1936), <조선문
학사>(1981) 등 26점을 추가로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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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의 유족들과 오랫동안 교류를 가지고 있는 사노 미찌오 호우센 대학 교수가 「야스쿠니의 집靖國の家」 문패 1점을 기증했다.
8월 12일 야노 히데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이 <구일본군조선반도출신군인·군속사망자명부>(2017) 1권을 기증했다.

27

8월 9일 홍종화 작가가 <혈의 누> 등 도서 3권을 기증했다.

8월 18일 김민철 책임연구원이 단행본 등 다수의 책을 기증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 피해를 입은 후 현재까지 피폭자들의 권익을 확보하고
인권을 옹호하는 운동에 앞장서 온 곽귀훈 회원(경기동부지부)이 8월 21일 <世界>(2016~2017)
총 14권을 기증했다.

8월 25일 김승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民族日報>(1990) 1권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월, 2017/09/25-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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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수화 통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회원이 교류하고 있는 청각장애우들의 소장자료를 전달받아 5월 29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이번에전달한 기증자료는 도서, 엽서, 박물류이고 기타무라 메구미씨도 <日鮮同祖論>(1943) 등 소장 도서 2권을 기증하였다. 뿐만 아니라 메구미 씨는 역사관 홍보용 사탕을 제작하여 일본인을 상대로 홍보활동을 펼치고 있다.

 

심정섭 지도위원 자료기증(54, 55차) 도서류, 문서류 총 100점 보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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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은 4월 26일과 5월 23일 각각 54번째와 55번째로 자료를 정리해 보내왔다. 조선총독부체신국에서 발행한 보험증서, 보험료영수장와 해방 후에 발행된 생활통
지표, 저축예금통장 등 문서류와 도서들이다.
특히 1938년에 비안(比安)공립 심상소학교에서 발행한 「학교가정통신부」에는 학업성적과 학교 출석상황 및 신체검진상황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학생들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금, 2017/07/28-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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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 교수가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 ‘군함도의 진실’이라는 영상을 홍보해 여론의 주목을 끌었다. 유네스코세계유산위원회가 유네스코산업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근대산업시설 중 한국인 등의 강제동원 관련 시설에 ‘역사의 전모’를 밝히라고 일본정부에게 권고한 사항을 이행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영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영상에는 몇 가지 부정확한 사실이 담겨 있다. 영상에서는 군함도에 강제동원되어 죽은 한국인이 120명이라 한다. 그러나 1984년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찾아낸 〈화장인허증하부신청서(火葬認許證下附申請書)〉 등 일명 ‘하시마자료’에 따르면 1925년부터 1945년까지 하시마에서 죽은 한국인은 123명이다. 여기에는 여자와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사망한 수가 64명이니 굳이 따지자면 강제동원 희생자는 50여 명이라 해야 맞다.
영상에 사용된 사진들도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누워서 탄을 캐는 장면은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정확한 연도와 지역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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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①


이 글은 2017년 7월 25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군함도의 진실 공방과 한국 정부가 할 일〉을 수정·보완한 글이다. 분량상 싣지 못한 내용을 추가하면서 기고 후에도 계속 유포되고 있는 잘못된 정보를 교정하기 위해서다.


 

(사진①) 한겨레신문에 글을 썼을 때는 연도 미상의 후쿠오카탄광에 는 연도 미상의 후쿠오카탄광에서 일하던 일본인 광부라 했으나 이 또한 정확하지 않다. 유사한 사진으로 훈도시를 입고 누워서 탄을 캐는 사진도 있다.

26(사진②) 이 사진도 자주 한국인 강제동원피해자 사진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메이지시기 치쿠호탄광에서 탄을 캐는 일본인 광부의 모습이라 한다. 누워서 탄을 캐는 광부의 구도와 이미지가 거의 같기 때문에 두 사진이 혼용되고 있다. 영상에는 폭행을 당해 등에 상처가 나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쓰였다. 1926년 <아사히카와신문>에 실린 것으로 알려진 이 사진은 홋카이도 나카가와군에 있던 노동자 합숙소에서 학대당한 토목노동자를 찍은 것이라 한다.(사진③)
서교수가 사용한 사진①과 사진③ 모두 폭력과 학대, 열악한 노동조건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었던 노동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 실태를 직접 증명하는 사진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이 받은 차별과 학대, 가혹한 노동조건 등의 실태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은 없다. 통제된, 그리고 전쟁 홍보만 허용되던 시기에 그런 사진 자체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1920~30년대 일본 언론의 고발로 확인된 이런 사진들을 통해 강제동원된 한국인 피해자들의 삶을 유추해 볼 수 있으며, 수많은 증언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내친 김에 몇 가지만 더 지적해두자. ‘어머니 보고 싶어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배가 고파요.’라는 글이 탄광벽에 적힌 사진이 있다.(사진④)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한국인 탄광노동자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진으로 한때 언론에서도 많이 쓴 장면이다. 그러나 이 사진은 훗날 강제동원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탄광을 방문한 조사단들이 연출하기 위해 쓴 걸 찍은 것이라 한다. 그러니 굳이 사용해서 시비를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다. 앙상한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난 네 명의 한국인 사진도 강제동원 피해의 증거로 이용되고 있다.(사진⑤) 이 사진의 주인공들은 신기수(辛基秀)의 사진집 <韓國倂合と獨立運動>(1995)에따르면,1945년10월 효고현 오쿠보형무소를 출옥한 조선인들로 강제동원 피해와 직접 관련이 없다.
통계상의 잘못도 있다. 군함도와 함께 등재된 다카시마탄광에 한국인 4만 명이 강제동원되었다는 통계가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건 실무자의 단순 실수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외교부가 강제동원지원위원회에 관련 정보를 요청할 때 위원회 직원이 4천 명을 4만 명으로 잘못 적어 보고했다. 나중에 수정되긴 했으나 언론과 인터넷상에는 잘못된 숫자가 이용되었고, 지금도 계속 인용되고 있다. 한 가지 더, 일제시기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가 700여 만 명이라고 한다. 이 수치를 사용할 때는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현재까지 과거 일본 정부가 발표한 공식문서를 기초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본, 중국, 사할린, 남양군도 등으로 강제동원된 노동자는 최소 72만 명, 군인․군속으로 끌려간 청장년이 최소 36만 명, 일본군‘위안부’ 등 여성 동원이 십수 만 명으로 해외로 강제동원 수가 최소 120만 명에 이른다.
여기에 1~3개월 단위로 한반도내에 동원된 이른바 ‘도내동원’의 연 인원이 600여 만 명도 있다. 따라서 국내외를 포함해서 총동원된 700여 만 명이라는 수치는 집집마다 한 명씩 동원되었다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다만 한국정부와 일본정부가 1965년 한일협정에서 대상이 됐던 피해자는 ‘해외동원자’들이었고, 노무현정부 때 지원(사실상의 보상)을 받은 피해자들도 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도내동원의 경우 그 실태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인 데다 식민지 시기를 살았던 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법을 통한 진상규명과 지원 대상에서 뺀 것이다. 때문에 현재 우리가 강제동원의 피해를 말할 때 대상자는 120여 만 명이라 해야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숫자 몇 개 사진 설명 하나 잘못되었다고 강제동원의 본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일본의 우익들은 오류나 실수를 공격하면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처럼 군함도의 강제동원 자체를 부정하려 한다. 아니면 피해자들의 주장에 흠집을 냄으로써 한국의 주장이 과잉된 민족 감정에 근거하고 있어 뭔가 사실을 과장하거나 날조하고 있다는 불신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국내는 모르겠으나 국제사회에서는 이게 나름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어 문제다.
군함도를 놓고 국제사회를 향해 일본 정부와 우익은 세 가지 여론전을 펼칠 전망이다. 첫째, 2015년 유네스코 총회 석상에서 일본대사가 인정한 한국인 강제노동(forced to work)은 국제법에서 규정한 강제노동에 해당하지 않는다. 1910년 일본에 의한 조선 ‘강제병합’이 합법이며, 따라서 1938년의 국가총동원법과 1944년의 징용령에 의한 동원 역시 합법이므로 강제노동의 예외규정(전시하의 동원)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둘째, 군함도에서 한국인들은 차별 받지 않고 일본인과 사이좋게 지냈다는 당시 거주자들의 회고나 미담을 적극 발굴하여 알릴 것이다. 여기에 낙성대연구소 소속 연구원이 발표한 ‘강제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과 일본인 노동자들 사이에는 민족별 임금차별이 없었다. 다만 노동의 숙련도에 따른 차이가 있었다’라고 요약할 수 있는 논문을 영문으로 번역해 홍보전에 나설 것이다. 한국의 연구자가 강제동원에 따른 민족차별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나서니 일본으로서야 얼마나 반가운 일이겠는가.
셋째, 한국은 사태를 과장하거나 심지어 엉터리 자료를 만들어 역사를 왜곡·날조함으로써 일본을 때리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 증거로서 서교수의 광고 영상이 좋은 먹이감이 된 것이다.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이 점에선 한국의 언론들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강제동원 피해 통계를 두고 벌어지는 진실 논쟁에서 놓쳐서는 안 될 게 있다. 그것은 가해자인 일본정부와 기업이 스스로 진실을 밝힌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진상규명 대부분은 모두 피해자와 한일의 시민단체가 수십 년간 싸워서 얻어낸 것들이다. 여기에는 한국정부의 책임도 크다. 특히 지난 9년간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최악이었다. 피해자 유족과 시민단체가 직접 일본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유골조사와 봉환 문제를 협의해 해결의 물꼬를 텄지만, 정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초은행에 1945년 이전 일본 내에서 일했던 한국인 우편저금 통장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부는 모른 체 했다. 국제법에 따르면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국가가 지배국가로부터 관련 문서를 인계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 한다. 식민주의 극복을 위해 지속적인 진상규명과 자료 공개, 기념․기억 사업과 교육 등 새 정부가 해야 할 긴 목록 가운데 하나다.
영화 군함도가 개봉되었다. 무더운 여름이 더 더워질 것 같다.

∷ 김민철 책임연구원

월, 2017/08/0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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