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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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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admin | 토, 2021/08/28- 00:30

[후원회원 마당]

 

식민지역사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김선태

효창공원에서 백범묘소, 삼의사 묘소와 임정요원 묘소까지 둘러보면서 참배도 하고나자, 이제 우리 일행을 식민지역사박물관으로 안내하였다. 우리 역사의 아픈 매듭이자 가장 슬픈 역사가 되어야 할 일제침탈의 역사를 살피고 그 아픔을 새겨 민족의 앞날을 밝히자는 뜻의 박물관이지만, 참으로 슬픈 ‘식민지’라는 이름이 미리 그 아픔을 전달하고 있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아가는 길은 대로변도 아닌 이곳 청파동 골목길 중에서 중앙이라 할 숙대앞길에서 다시 골목길로 들어서서도 한참이나 더 들어가야 하였다. 슬픈 이름의 박물관이 위치까지도 ‘이건 아닌데…’하는 마음이 절로 들게 만들었다. 멀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한 ‘식민지역사박물관’이란 간판을 보고 반가운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입구에 들어서는데 눈길을 사로잡은 동판에는 이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도움을 주신분들의 이름을 새긴 것으로 모두 10개 안팎이나 걸려서 여기 이름을 올리지 못한 나에게 ‘부끄러워하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아서 위압감을 주었다. 박물관으로 들어서기 전에 입구 한 켠에 ‘반민특위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전시되어 있었다. 너무 뜻밖이어서 의아하였는데, 본래 있던 자리에 새로 호텔건물을 짓고 있는데, 그래도 다행스럽게 공사장에서 연락해주어서 여기에라도 보관하고 있는 것이라며, 호텔이 완성되면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싶지만 과연 받아줄 것인지 의문이란다. 호텔이라면 외국 손님들이 드나들게 되고 거기엔 일본사람들도 있을 텐데 호텔 측에서 리스크를 안고 이 표지석을 세워주려 할는지 걱정이란다. 국가에서 지정하여 세우면 모르지만 학술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그럴만한 힘이 없어서 걱정이란다. “보훈처나 문광부 같은 정부기관에서 추진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학진 님의 간단한 박물관 소개와 민족문제연구소 직원들의 소개를 한 다음에 “박물관이 협소하여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함께 관람이 어려우므로 반으로 나누어서 일부는 먼저 관람을 하시고 절반은 여기에서 잠시 대기하고 계시다가 관람을 하시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관람을 하실 분은 손들어 주세요.” 하
여 먼저 출발하였다. 나는 손자를 독촉하여 얼른 우리도 따라 가자고 하여 첫 해설사를 따라 나섰다. 얼른 마치고 국립중앙박물관의 석조물 정원에 있는 <홍제동 5층 석탑>을 찾아가서 사진도 찍고 자료를 수집하여 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관람 순서에 따라 중점적으로 해설해주셨지만 40분 정도면 자세한 해설의 1/3 수준이므로 무척 바쁘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순서에 따라 1부 일제는 왜 한반도를 침략했을까라는 전시장에서는 제국들의 전쟁터가 된 한반도라는 패널을 중심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상황 들을 해설해주는데, 러일전쟁시에 독도가 중요 거점이 되어서 러시아 극동함대를 일본이 격파하였다는 전황을 이야기 해주었다. 재작년 11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모집하는 독도체험관 해설사 교육을 받고 울릉도와 독도를 답사할때에 일본이 러일전쟁 시에 울릉도에 설치하였던, 4개의 일본해군 관측소 <석포전망대 외3>가 있어서 러시아 함대의 움직임을 몰래 관측하였다는 곳들을 돌아보았는데, 독도에도 이런 관측소를 마련하여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들었다. 이어서 조선총독부에 관한 자료들이 있었고, 특히 우리 국민을 괴롭힌 새로운 지배자, 조선총독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음 코너에서는 <총칼로 누르고 동화와 차별로 어르다>라는 주제로 어린이들의 놀이판으로 만든 조선 침략의 길, 그리고 일본화하기 위한 놀이판 등까지 수집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 코너 <빼앗긴 들, 황폐한 삶>에서는 일본의 수탈을 알리는 여러 가지 자료들이 있어서 한참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1평으로 체험하는 식민지 : 학교 · 감옥’은 독립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지하에 있는 고문과 형틀 등을 전시한 곳에서 보았던 작은 형틀(1인감옥 ; 서 있게 만든 것과 쭈그려 앉게 만든 것)을 생각케 만들었다.
2부 일제의 침략전쟁,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전시장에서는 맨 먼저 우리 민족을 배반한 대표적인 친일언론의 민낯을 보여주는 코너로 <‘천황’을 위해 기쁘게 목숨을 바쳐라>라는 주제로 그들의 친일행적을 전시하여 두었다. 다음으로 <숟가락 하나도 남김없이 총동원하라>는 코너에서는 일본이 전쟁 물자를 대기 위해 밥그릇까지 모두 빼앗아 갔던 이야기이다. 이때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놋그릇들과 먹을 식량을 지붕 위에 멍석을 깔고 용머리를 들추고 지붕의 이엉을 파내고서 그곳에 쌀과 그릇들을 감추시었다는 지혜로운 분이셨다. 그리하여 그릇들을 지키셨고, 10여 명이나 되는 가족들이 굶주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단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또 하나 독립기념관을 개관할 때에 내가 <공출보국(供出報國)>이라는 글씨가 써진 사기 밥그릇을 기증하였었는데, 갑자기 그 그릇 생각이 났다. 놋쇠 밥그릇을 빼앗아 가고 대신에 밥을 담아 먹으라고 준 그릇이었다니 말이다. 다음 <청춘만장 앞세우고 끌려간 사람들>과 <돌아오지 못한 영혼, 남겨진 사람들>에서는 일본군으로 징병되어 끌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시되어 있는데, 이때 “살아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아 입혀 주었던 옷에 새겨진 글씨 무운장구(武運長久)와 천인침(천사람이 한 뜸씩 바느질을 한 허리띠)을 만들어서 꼭 살아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아 보냈지만, 수없이 사라져 버린 우리 젊은이들의 모습과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3부 한 시대의 다른 삶 – 친일과 항일라는 전시장에서는 이 코너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웹툰 책의 제목과 같은 것이어서 일단은 대충 둘러보며, 같은 시대에 부끄러운 친일을 하고 살아생전 호사를 누리던 친일파들과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구국의 투사들의 삶을 비교하고 있다. <망국의 한 독립의 꿈>에서는 독립운동을 한 의사, 열사, 지사들의 삶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누린 그들>에서는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사람들의 친일행각을 그리고 그들의 벼슬, 자손들의 대한민국에서의 출세와 권세를 부리며 살았던 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천황’의 신민으로 거듭난 그들>은 친일 행각으로 벼슬을 한 사람들과 작위를 받은 사람들을 보여주며 마지막으로 <고백과 성찰을 위한 기록, 친일인명사전> 편에서는 인명사전의 기초 작업을 하셨던 임종국 선생 사진과 그 육필원고가 전시되어 있어서 그 연구자의 엄청난 노력에 머리가 숙여졌다.
4부 과거를 이겨내는 힘,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전시장에서는 <반민특위의 좌절, 친일파의 귀환>에서 친일파들의 재등장의 역사를 보여주며, 입구에 있던 반민특위의 터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분단과 독재, 지연된 역사정의>에서는 친일정권의 40년 집권의 흔적과 그런 사이 우리 민족정신의 망가짐을 일깨우고 있었고, <공감과 연대의 힘> <나는 싸우고 있다> 등에서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일깨우고 있다. 중간에 영상으로 보여주는 <내가 역사의 증인이다>는 수많은 영상을 교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가장 관심이 가는 것들은 <살아있는데 야스쿠니에 합사된 강제동원피해자, 故 김희종 할아버지>와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이희자 “김학순 할머니 이야기”> 그리고 일제와 끝까지 싸우고 계시는 <일본제철 재판 원고 故 김규수 할아버지>, <야하타 제철소 노무동원 주석봉> 등이 눈길을 끌었다, 물론 영상을 골라서 볼 수는 없었고, 시간에 쫓겨 다 보고 있을 시간도 없어서 차분하게 하루쯤 잡아서 보아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장손 윤재가 유난히 관심을 가지고 해설을 열심히 들어 주어서 고맙고 감사하였다.

※ 6월 후원회원 초대의 날 참석 후기로 김선태 회원의 네이버 블로그 ‘70대 수퍼맨의 아름다운 노년’에 실린글이다. https://blog.naver.com/ksuntae/222408001759 김선태 회원은 78세로 이날 손주와 참석했다. 디지털문학 전자출판사를 운영했고 노년유니온 위원장, 국가인권위원회 노인인권지킴이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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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친일파 흉상 철거, 고등학생의 민원에 보훈처가 답하다

임승관 전남동부지부장

김정태 흉상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작년, 전국적으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행사가 있었다. 전남교육청의 경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전남청소년 역사탐구대회’를 진행해 왔으며 작년
으로 9회째를 맞이했다. 작년도 주제는 ‘임정 100주년·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 전라도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의 실상과 해결방안’ ‘전남지역 친일잔재의 실상과 해결방안’이었으며 도내 중·고교 70여 팀이 참가했다.
참가팀 중에는 고흥 녹동고등학교 팀도 있었는데 이 학생들은 대회 과정에서 자신들의 고장에 김정태의 흉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정태(1869~1935)는 강제합병 후, 전남 영광군수, 광주군수, 순천군수 등을 지냈으며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전남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에 협력했다. 1924년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한국병합기념장(1912),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15), 쇼와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28) 등을 받았다.
김정태의 아들 김상형(1897~?) 역시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내며 일본의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전조선시국강연반 연사로 참여하였다. 중추원 의원 시절에는 내선일체 정신의 구현은 “반도민중의 일본화”에 달렸다고 주장하며 “천황폐하를 경모하여 받드는 정조(情操)를 고양”시키기 위해 “마을에서 학교에서 황거망배(皇居望拜)와 천양무궁(天壤無窮)을 기원하고 마음을 정화해 황국신민임을 맹세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 자각을 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상형은 해방 후, 1949년 반민특위에 송치되었다.
이와 같은 김정태의 친일행적을 확인한 학생들은 2019년 8월 고흥군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광복 74년이 지났음에도 이런 역겨운 동상이 주민들의 휴식공간인 옥하공원에 버젓이 세워져 있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는 죽어서도 고흥 군민들을 내려다보며 분명히 비웃고 있을 것입니다. 동상이 철거된다면 주민들의 애국심과 지역 역사의식이 한층 더 함양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친일파 동상이 버젓이 세워진 채로 우릴 내려다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 학생의 민원 글 발췌

 

고흥군은 학생들의 민원을 국가보훈처에 이첩했다. 김정태 흉상이 자리했던 옥하공원 내 토지를 비롯해 약 56만㎡의 토지가 김정태 후손들의 소유였으나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재산조사위원회에 의해서 국가로 귀속된 이후 현재까지 국가보훈처가 관리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민원 전까지 국가보훈처는 그 땅에 친일파의 흉상이 있었다는 사실은 파악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민원을 넘겨받은 국가보훈처는 김정태의 후손에게 흉상을 자진 철거할 것을 통보했다. 그러나 후손들이 흉상 철거를 미루자 국가보훈처는 행정대집행을 통보했고, 결국 후손들은 4월 28일 오전 흉상을 철거했다. 철거는 국가보훈처와 고흥군청 관계자들이 오기 전에 신속히 진행 되었지만 필자는 오전 일찍 현장에 가 있었기에 다행히 철거의 모든 과정을 영상에 담아 지역언론사 등에 제공할 수 있었다.
김정태 흉상 철거는 아마도 친일파 기념물 철거를 학생들이 요구하고 고흥군과 국가보훈처 등 공공기관이 응답한 첫 번째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흉상 철거를 담당한 국가보훈처 담당자는 배움을 실천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행동과 민원 내용에 진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민원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백방으로 철거 방법을 알아내어 결국 성과를 이룬 보훈처 관계자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희망이 있음을 증명해 준 녹동고등학교 학생 여러분,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화, 2020/05/26-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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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창군 80주년 광복군 합동추모제전

 

한국광복군 창군 80주년을 맞아 한국광복군동지회 주최로 6월 1일 국립서울현충원 대한독립군 무명용사위령탑에서 ‘창군 80주년 광복군 합동추모제전’이 봉행됐다. 김영관(97) 한국광복군동지회장이 추념사를 했는데 현재 생존 광복군은 15명으로 그나마 거동이 자유로운 분은 김영관 회장뿐이다.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로 불리고 있으나 회원들이 점점 나이 들어가며 동지회 사무실 운영조차 어렵게 꾸려가고 있어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특히 이날 추모제전에는 국방부 등 유관 기관의 참여와 후원이 눈에 띄지 않아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이 무색했다. 이날 추모제전에는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가 참석했다.

•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20/06/23-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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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2020년도 1차 사원총회 열려

코로나 19 감염증으로 연기를 거듭했던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사원총회가 5월 30일 오후 4시 30분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열렸다.
여건이 나아지지 않았지만 현안 처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날 회의에는 법정회원 정수 49명 중 26명이 참석하였으며, 2019년도 결산을 승인하고 2019년 12월〜2020년 4월 기간 입금된 기부금사용 승인 신청안건도 통과시켰다. 2019년 사업성과와 2020년 사업계획에 대한 보고와 검토도 진행됐다.
임기 만료된 함세웅 임헌영 윤경로 이사와 최수전 감사의 연임안도 승인되었으며, 지난 3월 18일 별세한 이이화 선생 후임으로 한상권 역사정의실천연대 상임대표(전 덕성여대 교수)를 신임이사로 보선했다. 이어 개정 정관에 의거해 1차로 이민우 운영위원장을 비롯해 권위상 김순흥 김희원 박동규 이순옥 조승현 운영위원을 선출하고 운영위원회 세칙안을 검토했다. 한편 올해 전국회원대회와 수련회는 안전상의 문제 때문에 개최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회원대회 보고서는 별도로 발송할 예정이다.

화, 2020/06/23-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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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김세형 매일경제 고문이 6월 9일자 매경닷컴에 게재한 ‘한국의 친일파, 토착왜구는 누구인가?’라는 칼럼에서 사실과 다른 내용을 기술하여 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의 신뢰를 크게 손상시켰다. 즉 칼럼에서 “일개 시민단체가 정치권의 보수・진보의 합의도 없이 입맛대로 정하다보니” “만해 한용운, 춘원 이광수까지 모조리 친일 명단에 들어가고” “민주당 고위층 할아버지는 을사오적에 버금가는 고위급 관료 출신이었는데도 빠졌다.” 등등 〈친일인명사전〉 발간 취지나 수록자 선정기준, 사전 내용과 전혀 맞지 않는 허위 사실을 기사화했던 것이다. 연구소는 이러한 허위 왜곡보도를 바로잡고자 6월 18일에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를 신청했다. 이어서 7월 2일과 15일 두 차례의 조정심리를 가졌는데 2차 심리기일에 처음 출석한 매경닷컴측은 연구소의 입장을 전면 수용하였다. 이에 언론중재위원회는 ‘반론보도’ 형식으로 김세형 칼럼 하단에 다음 문구를 영구적으로 게재하도록 결정했다.
연구소는 앞으로도 〈친일인명사전〉과 연구소를 허위 비방하거나 음해하는 세력과 언론매체
에 강력히 대응할 방침이다.


 

본 신문(매경닷컴)은 지난 6월9일 게재한 <한국의 친일파, 토착왜구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김세형 칼럼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대해 사실과 다른 내용을 기술했습니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은 국민성금으로 학계를 망라한 180여명의 교수 연구자들이 8년간의 지난한 작업 끝에 이뤄낸 소중한 성과입니다. 친일인명사전의 객관성 공정성은 학계가 공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법부의 판결에서도 여러 차례 입증된 바 있습니다. 나아가 보수 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정부기관에서도 공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는 데서 그 엄밀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본 칼럼에서는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선생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고 허위의 사실을 서술하고, ‘민주당 고위층 할아버지는 을사오적에 버금가는 고위급 관료 출신이었는데도 빠졌다’는 등 근거 없는 내용을 기재하여 친일인명사전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신뢰도를 크게 손상하였습니다. 이에 본 칼럼에서 위 내용을 삭제하고, 친일인명사전의 선정기준을 수록합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 국세현 회원사업부팀장

월, 2020/07/27-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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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 │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3)

부역언론의 ‘산파’, 두 사주(社主)의 민낯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기획전을 마련했다. 영광과 오욕의 100년 가운데 ‘오욕’이 사라진 100년을 비판하기 위해 기획됐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에 맞춰 3월에 개막하고자 했으나 코로나 19 감염병 확산으로 박물관을 잠정 휴관함에 따라 전시를 8월로 연기했다. 민족사랑에 3회에 걸쳐 미리 전시회의 주요 내용과 자료를 소개한다.

 

1939년 12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하시 고이치로(三橋孝一郞)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를 자기 관사로 불렀다. 조선일보의 경영에 관한 내용을 청취하고 총독부의 ‘언문신문’ 관리 의향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최고의 실세 중 하나였던 미하시와 방응모의 만남을 「언문신문통제에 관한 건(諺文新聞統制ニ關スル件)」이라는 극비문서로 자세히 기록했다. 이 문서에 ‘협의(協議)’로 정의된 둘의 만남은 이날부터 무려 10차에 걸쳐 이어졌다. 
12월 22일 첫 번째 만남에서 방응모는 먼저 이렇게 고백했다.

“신문사업을 경영한 지 6년여에 그 실비(失費)가 많아서 곤란함에 빠져 오히려 교육 기타 사회사업 등의 문화 사업으로 전환하기를 희망한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자진’ 폐간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미하시는 반색했다. 2차대전 발발 등으로 어수선한 정국을 ‘언론통폐합’을 통해 다잡으려 했던 조선총독부의 모략을 언론사 사주(社主)가 스스로 나서 도와주는 셈이었다. 미하시는 실제로도 이 같은 방응모의 제안이 고마웠던지 통제방침에 잘 응하면, 방응모의 희망에 대해서도 “상당한 고려를 할 수 있다”며 선심을 썼다. 이에 방응모 또한 “그 뜻이 크게 움직”였다고 문서는 적고 있다.
12월 24일 두 번째 만남, 이틀 전의 면담을 통해 조선총독부가 협상에 응할 여지가 있음을 포착한 방응모는 이날부터 본격적인 사업상의 조건을 조선총독부에 요구하기에 이른다. 당시 방응모가 총독부에 희망한 조건은 아래와 같다.

 


 

① 동아일보도 함께 처분될 것
② 본사 발행의 3종(조광·여성·소년) 출판물은 계속 간행될 수 있게 할 것
③ 폐간 당일까지 본 협의에 응하는 것에 대해서는 외부에 대해 극비에 부쳐질 것
④ 종업원의 취직·전직의 알선 및 수당 지급에 유감이 없게 할 것
⑤ 건물을 포괄 약 100만 원 정도로 양도하는 데 차질이 없게 할 것
⑥ 장래 교육 또는 사회사업 방면에 활동하고자 희망함에 대해 원조해 줄 것

 


 

정리하자면 경쟁 언론사를 제거하고, 조선일보의 바통을 이어받을 출판사업은 유지하며, 새 사업으로의 진출과, 총독부의 원조 보상금 등을 충분히 얻어내려 했던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자기네들은 사업은 유지하면서 경쟁사는 제거해버리는, 치밀한 ‘이면공작’이다. 방응모는 총독부의 약속을 토대로 조선일보의 출판부를 따로 독립시켜 ‘주식회사 조광사’를 발족시킬 수 있었다(1940.4). 즉, 조선일보의 중요한 알맹이는 살아남은 것이다. 잡지 <조광>은 원색적 친일과 전쟁선동의 논조를 유지하며 한글 신문과 잡지가 폐간당한 상황에서도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살아남는다.
세 번째 만남인 12월 28일, 방응모는 마침내 자신의 요구사항이 대부분 반영된 각서를 조인한다. 폐간계 제출은 이 같은 협상이 일단락된 뒤 이뤄졌다. 조선일보의 폐간은 사실상 사주 방응모의 자발적 의지로 결정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와 방응모의 협상은 10차에 걸쳐 계속됐고 이어진 협상과정에서도 폐간에 저항 따윈 없었다. 그저 폐간의 형식을 만들고 각종 이권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확답을 받아내는데 진력했을 뿐이다.
한편, 조선총독부가 조선일보와 중요한 협상안들을 마무리한지 한 달여 지난 시점에서야 동아일보와 첫 협상이 시작됐다. 「언문신문통제에 관한 건」에 따르면 동아일보가 “(폐간에) 응하는 기색이 없”었다는 총독부 당국의 평가와 경무국장이 사장 백관수, 고문 송진우를 불러 ‘권설(勸說)’했다는 내용 등이 적시되어 있다. 조선일보와의 ‘협상’ 기록에 비해서는 대조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폐간’이라는 총독부의 극단적 조치를 대하는 두 신문사의 태도는 다소 달랐다. 그러나 두 신문은 이미 총독부 기관지와 다름없는 논조의 기사와 일본 동맹통신사로부터 제공받은 전쟁 보도 기사들로 지면을 도배하고 있었다. 이렇게 조선‧동아 두 언론사가 총독부의 언론통제 방침에 충실했음에도 1940년 언론통폐합의 칼날을 비켜가지 못했다. 전황이 복잡해지고 장기화되는 국면에서 총독부는 <매일신보>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두 한글신문의 활용가치를 더 이상 못 느꼈을지도 모른다

 

끝까지 돈, 돈, 돈 … 퇴직사원들은 절망으로

이런 경과를 통해 두 신문은 1940년 8월 11일자 석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20년의 사사(社史)를 잠시 마감한다. 조동 100년사에 남긴 두 언론의 공백, 즉 ‘폐간기’는 해방 전까지 약 5년정도 지속된다.(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각각 1945년 11월 23일, 12월 1일에 복간을 선언했다)
물론 유력한 자본가였던 방응모와 김성수에게 ‘폐간’은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진정 타격을 받은 사람들은 20년간 실질적으로 신문사를 떠받치며 저널리즘의 현장에서 고생한 사원, 배달부들로 이들은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조선, 동아일보는 사원들에게 <매일신보>한테 받은 영업권 보상금에다 회사 차원에서 자금을 더 증액하여 퇴직금을 지급했다. 동아일보는 2년간의 봉급에 해당하는 퇴직금을, 조선일보는 1년간의 생활비를 지급하고 3년 이상 근무한 사원에게 법정퇴직금을 지급하기로 한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사원들에게 지급한 퇴직금의 실상은 참담했다. 불만이 쌓인 사원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결국 조선총독부가 관련 사안을 진상조사하기에 이른다. 경기도경찰부가 경무국장 앞으로 작성한 보고서 「폐간 양언문지의 사원 퇴직금 지급상황에 관한 건(廢刊 兩諺文紙ノ社員退職金 支給狀況ニ關スル件)」에는 조선일보가 사원들에게 지급한 퇴직금 현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일보는 350명의 사원들에게 총 23만 2,891원을, 동아일보는 303명의 사원에게 37만 968원의 퇴직금을 지급했다. 일단 총액에서부터 현격한 차이가 발생한다
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퇴직금 지급율이 가장 저조한 계층은 배달원으로 조선일보는 배달원에게 ‘평균 6원’의 퇴직금을 지급했다. 동아일보가 배달원에게 평균 734원의 퇴직금을 지급한 것에 비추어 보면 122배의 차이가 발생했다. 사원, 준사원, 공장종사원에게 지급한 평균액 또한 그 차이가 뚜렷하다. 1,473원의 동아일보 평균 지급액에 비해 조선일보의 평균 지급액은 801원에 불과해 여기서도 2배 가까운 차이가 발생한다. 다만, 퇴직금의 최고 지급액은 조선일보가 9,617원으로 동아일보 7,614원에 비해 높았는데 이 9,617원의 최고액을 가져간 주인공은 공교롭게도 사장인 방응모였다.

 

 

조선일보의 퇴직금 문제를 조사한 경기도경찰부는 “조선일보사의 지급율은 전자(동아일보)에 대해 비교도 안될 만큼 소액”이며 “양사의 차이가 너무나도 심하여 조선일보사원의 불평은 무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어 조선일보 사원들이 “방응모에 면회를 구하여 하등의 구제책을 요구”했으나 방응모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야말로 사주의, 사주에 의한, 사주를 위한 퇴직금 행정이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양사의 사주, 전쟁의 나팔수로 변신하다

신문이 폐간되고 사원들이 퇴직금 문제로 허덕이는 사이 김성수와 방응모 두 사주들 또한 분주했다. 바로 전쟁부역의 ‘나팔수’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은 진작부터 다양한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렸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 전쟁협력 관변단체에 참여했으며 시국강좌, 기사, 방송 등을 통해 전쟁 선동의 일익을 담당해 왔던 것이다. 폐간 이후에도 이들의 활동들은 더욱 두드러진다.
특히 교육자를 자처했던 김성수의 학병지원강요 행적은 충격적이다. 김성수는 1943년 10월 조선에 학도지원병제가 실시되자 자신이 맡고 있던 보성전문학교의 지원율을 높이기 위해 각종 활동에 나섰다. 그는 자신이 교장을 맡고 있는 보성전문학교의 학병 지원 실적이 신통치 않자 직접 조회에 나서 학생들을 설득하는가 하면 교내에 조선군 논객 ‘에가미(江上守彦)’ 중좌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열었다. 학병지원병 독려를 위한 교장회의, 좌담회에 참여하고 지원을 호소하는 글도 여럿 기고했다. 그 결과 보성전문은 학병지원을 강요하는 집회를 가장 많이 개최한 학교가 되어버렸다.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 석간 1면에 실린 김성수의 대표적인 친일논설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 조장하라’(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다른 학교 학생들에 비해 일제의 전시정책에 비협조적인 경향을 보인 보성전문 학생들에게 이 같은 ‘교장’ 김성수의 전쟁선동 행위는 상당한 혼돈을 주었다.
실제로 학병지원 마감시점인 11월 17일, 보성전문의 학병 지원율은 53.6%에 불과했다. 가장 많은 선전활동을 했음에도 학생들의 지원율이 저조하자 김성수는 “한명이라도 지원에서 빠지는 자에게는 원칙적으로 징용”되어야 한다는 모진 발언으로 학생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희생과 죽음을 강요하면서 거부하는 학생들의 의지를 ‘문약(文弱)’이라며 폄훼하기도 했다.
한편, 방응모는 일본 육해군의 ‘응원단장’과 같은 역할을 자처했다. 그는 1933년에 이미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제16호) 구입비로 1600원을 헌납한 바 있다.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한 직후의 일이었다. 조선총독부와의 거래에 밝았던 방응모는 중일전쟁이 터지자 적극적인 전쟁부역 행위에 나섰다. 1937년부터 경성군사후원연맹, 경성부지원병후원회,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 발기인, 이사 등으로 참여했으며 군수산업체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감사역을 맡기도 했다. 일제의 진주만 기습을 찬양하는가 하면, “일억국민의 총궐기”를 부르짖으며 침략전쟁에 감정적으로도 동화된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조선, 동아일보는 사라졌지만 사주들의 친일행각은 폐간 뒤에도 계속됐다. 아니, 신문을 통한 친일행위가 사라진 만큼 더욱 열심히 부역에 매진한 듯도 보인다. 특히 방응모는 조선일보의 후신인<조광>을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전쟁을 찬양하고 조선인 청년들에게 징병을 권유하는 논설과 문예물로 채워 완전한 친일잡지로 거듭났다.

 

민족을 배반한 한 세기. 반성 없인 영광도 없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양사의 사주 방응모와 김성수는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언론재벌이 된 그 후손들은 2010년 당당하게 국가를 상대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취소’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럼에도 방응모는 2012년에, 김성수 2018년에 반민족행위자로 최종 확정되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 부역행위에 대한 반성은커녕 민족의 수난기를 함께 한 역사를 부각하며 ‘민족지’로서의 미화를 창간 100년이 된 이 시점에도 거듭하고 있다.
이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역사퇴행적 행태들을 볼 때마다 나치 부역언론을 단죄했던 프랑스의 사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는 나치에 부역한 언론인 개개인에 대한 숙청뿐만 아니라 언론사 자체에 대한 단죄도 강력하게 진행했다. 나치에 협력한 주류 언론은 모두 폐간되었으며 그들이 사용한 모든 시설과 공간 등 재산도 몰수하여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항을 지속해온 〈콩바〉, 〈데팡스 드 라 프랑스〉 등 지하언론이 사용하도록 조치됐다.
‘어쩔 수 없었다’ 식의 변명을 일삼던 언론인들도 가차 없이 심판을 받았다. 한 예로 나치독일을 미화한 일간지 〈르마텡〉의 편집국장 로잔은 (조선, 동아의 사주들처럼) “압력에 못 이겨”라는 변명으로 일관했지만 프랑스 재판부는 “독일 선전상 괴벨스의 품에 결국 안겼다”고 질타하면서 로잔에게 20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프랑스 나치청산에 대해 천착해온 주섭일은 “이 같은 (청산)과정들이 프랑스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자유와 사회정의, 인권이 참되게 존중받는 민주국가 건설에 이정표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렇듯 엄정했던 프랑스의 청산사례들과 우리 역사의 청산과제들을 비교해 볼 때면 ‘한발 늦었다’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선‧동아 100년을 맞은 지금 더욱 절실하게 언론개혁을 외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취지에서 조선‧동아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을 마련했다. 3회에 걸친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의 연재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은 오는 8월 11일 열리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에 전시될 예정이다. 이번 기획전과 연계한 특강 “지금, 언론개혁을 말한다”도 함께 진행되니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 참고문헌
박용규,
「일제 말기(1937~1945)의 언론통제정책과 언론구조변동」, 한국언론학보, 2009
장신, 「일제말기 김성수의 친일 행적과 변호론 비판」,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009
주섭일,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연대, 2004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1~3, 민족문제연구소, 2009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보유편>, 2017

월, 2020/07/27-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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