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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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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admin | 토, 2021/08/28- 00:30

[후원회원 마당]

 

식민지역사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김선태

효창공원에서 백범묘소, 삼의사 묘소와 임정요원 묘소까지 둘러보면서 참배도 하고나자, 이제 우리 일행을 식민지역사박물관으로 안내하였다. 우리 역사의 아픈 매듭이자 가장 슬픈 역사가 되어야 할 일제침탈의 역사를 살피고 그 아픔을 새겨 민족의 앞날을 밝히자는 뜻의 박물관이지만, 참으로 슬픈 ‘식민지’라는 이름이 미리 그 아픔을 전달하고 있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아가는 길은 대로변도 아닌 이곳 청파동 골목길 중에서 중앙이라 할 숙대앞길에서 다시 골목길로 들어서서도 한참이나 더 들어가야 하였다. 슬픈 이름의 박물관이 위치까지도 ‘이건 아닌데…’하는 마음이 절로 들게 만들었다. 멀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한 ‘식민지역사박물관’이란 간판을 보고 반가운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입구에 들어서는데 눈길을 사로잡은 동판에는 이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도움을 주신분들의 이름을 새긴 것으로 모두 10개 안팎이나 걸려서 여기 이름을 올리지 못한 나에게 ‘부끄러워하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아서 위압감을 주었다. 박물관으로 들어서기 전에 입구 한 켠에 ‘반민특위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전시되어 있었다. 너무 뜻밖이어서 의아하였는데, 본래 있던 자리에 새로 호텔건물을 짓고 있는데, 그래도 다행스럽게 공사장에서 연락해주어서 여기에라도 보관하고 있는 것이라며, 호텔이 완성되면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싶지만 과연 받아줄 것인지 의문이란다. 호텔이라면 외국 손님들이 드나들게 되고 거기엔 일본사람들도 있을 텐데 호텔 측에서 리스크를 안고 이 표지석을 세워주려 할는지 걱정이란다. 국가에서 지정하여 세우면 모르지만 학술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그럴만한 힘이 없어서 걱정이란다. “보훈처나 문광부 같은 정부기관에서 추진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학진 님의 간단한 박물관 소개와 민족문제연구소 직원들의 소개를 한 다음에 “박물관이 협소하여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함께 관람이 어려우므로 반으로 나누어서 일부는 먼저 관람을 하시고 절반은 여기에서 잠시 대기하고 계시다가 관람을 하시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관람을 하실 분은 손들어 주세요.” 하
여 먼저 출발하였다. 나는 손자를 독촉하여 얼른 우리도 따라 가자고 하여 첫 해설사를 따라 나섰다. 얼른 마치고 국립중앙박물관의 석조물 정원에 있는 <홍제동 5층 석탑>을 찾아가서 사진도 찍고 자료를 수집하여 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관람 순서에 따라 중점적으로 해설해주셨지만 40분 정도면 자세한 해설의 1/3 수준이므로 무척 바쁘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순서에 따라 1부 일제는 왜 한반도를 침략했을까라는 전시장에서는 제국들의 전쟁터가 된 한반도라는 패널을 중심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상황 들을 해설해주는데, 러일전쟁시에 독도가 중요 거점이 되어서 러시아 극동함대를 일본이 격파하였다는 전황을 이야기 해주었다. 재작년 11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모집하는 독도체험관 해설사 교육을 받고 울릉도와 독도를 답사할때에 일본이 러일전쟁 시에 울릉도에 설치하였던, 4개의 일본해군 관측소 <석포전망대 외3>가 있어서 러시아 함대의 움직임을 몰래 관측하였다는 곳들을 돌아보았는데, 독도에도 이런 관측소를 마련하여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들었다. 이어서 조선총독부에 관한 자료들이 있었고, 특히 우리 국민을 괴롭힌 새로운 지배자, 조선총독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음 코너에서는 <총칼로 누르고 동화와 차별로 어르다>라는 주제로 어린이들의 놀이판으로 만든 조선 침략의 길, 그리고 일본화하기 위한 놀이판 등까지 수집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 코너 <빼앗긴 들, 황폐한 삶>에서는 일본의 수탈을 알리는 여러 가지 자료들이 있어서 한참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1평으로 체험하는 식민지 : 학교 · 감옥’은 독립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지하에 있는 고문과 형틀 등을 전시한 곳에서 보았던 작은 형틀(1인감옥 ; 서 있게 만든 것과 쭈그려 앉게 만든 것)을 생각케 만들었다.
2부 일제의 침략전쟁,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전시장에서는 맨 먼저 우리 민족을 배반한 대표적인 친일언론의 민낯을 보여주는 코너로 <‘천황’을 위해 기쁘게 목숨을 바쳐라>라는 주제로 그들의 친일행적을 전시하여 두었다. 다음으로 <숟가락 하나도 남김없이 총동원하라>는 코너에서는 일본이 전쟁 물자를 대기 위해 밥그릇까지 모두 빼앗아 갔던 이야기이다. 이때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놋그릇들과 먹을 식량을 지붕 위에 멍석을 깔고 용머리를 들추고 지붕의 이엉을 파내고서 그곳에 쌀과 그릇들을 감추시었다는 지혜로운 분이셨다. 그리하여 그릇들을 지키셨고, 10여 명이나 되는 가족들이 굶주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단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또 하나 독립기념관을 개관할 때에 내가 <공출보국(供出報國)>이라는 글씨가 써진 사기 밥그릇을 기증하였었는데, 갑자기 그 그릇 생각이 났다. 놋쇠 밥그릇을 빼앗아 가고 대신에 밥을 담아 먹으라고 준 그릇이었다니 말이다. 다음 <청춘만장 앞세우고 끌려간 사람들>과 <돌아오지 못한 영혼, 남겨진 사람들>에서는 일본군으로 징병되어 끌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시되어 있는데, 이때 “살아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아 입혀 주었던 옷에 새겨진 글씨 무운장구(武運長久)와 천인침(천사람이 한 뜸씩 바느질을 한 허리띠)을 만들어서 꼭 살아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아 보냈지만, 수없이 사라져 버린 우리 젊은이들의 모습과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3부 한 시대의 다른 삶 – 친일과 항일라는 전시장에서는 이 코너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웹툰 책의 제목과 같은 것이어서 일단은 대충 둘러보며, 같은 시대에 부끄러운 친일을 하고 살아생전 호사를 누리던 친일파들과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구국의 투사들의 삶을 비교하고 있다. <망국의 한 독립의 꿈>에서는 독립운동을 한 의사, 열사, 지사들의 삶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누린 그들>에서는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사람들의 친일행각을 그리고 그들의 벼슬, 자손들의 대한민국에서의 출세와 권세를 부리며 살았던 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천황’의 신민으로 거듭난 그들>은 친일 행각으로 벼슬을 한 사람들과 작위를 받은 사람들을 보여주며 마지막으로 <고백과 성찰을 위한 기록, 친일인명사전> 편에서는 인명사전의 기초 작업을 하셨던 임종국 선생 사진과 그 육필원고가 전시되어 있어서 그 연구자의 엄청난 노력에 머리가 숙여졌다.
4부 과거를 이겨내는 힘,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전시장에서는 <반민특위의 좌절, 친일파의 귀환>에서 친일파들의 재등장의 역사를 보여주며, 입구에 있던 반민특위의 터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분단과 독재, 지연된 역사정의>에서는 친일정권의 40년 집권의 흔적과 그런 사이 우리 민족정신의 망가짐을 일깨우고 있었고, <공감과 연대의 힘> <나는 싸우고 있다> 등에서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일깨우고 있다. 중간에 영상으로 보여주는 <내가 역사의 증인이다>는 수많은 영상을 교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가장 관심이 가는 것들은 <살아있는데 야스쿠니에 합사된 강제동원피해자, 故 김희종 할아버지>와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이희자 “김학순 할머니 이야기”> 그리고 일제와 끝까지 싸우고 계시는 <일본제철 재판 원고 故 김규수 할아버지>, <야하타 제철소 노무동원 주석봉> 등이 눈길을 끌었다, 물론 영상을 골라서 볼 수는 없었고, 시간에 쫓겨 다 보고 있을 시간도 없어서 차분하게 하루쯤 잡아서 보아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장손 윤재가 유난히 관심을 가지고 해설을 열심히 들어 주어서 고맙고 감사하였다.

※ 6월 후원회원 초대의 날 참석 후기로 김선태 회원의 네이버 블로그 ‘70대 수퍼맨의 아름다운 노년’에 실린글이다. https://blog.naver.com/ksuntae/222408001759 김선태 회원은 78세로 이날 손주와 참석했다. 디지털문학 전자출판사를 운영했고 노년유니온 위원장, 국가인권위원회 노인인권지킴이 등을 역임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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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강북구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는 근현대사기념관에서 9월 12일부터 28일까지 2017년 특별강좌 ‘순례길의 독립운동가’를 개최했다. 강북구에서 처음으로 인근 순국선열 애국지사 묘역에 잠든 독립운동가 5인의 생애와 활동을 집중 조명한다는 면에서 의미가 컸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2시 총 6강에 걸쳐 무료로 진행되었으며 강좌별 30명 내외를 선착순 모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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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위해 한국 근현대사 전문가들이 강사로 나섰다. 독립운동가 이시영을 주제로 한 첫 강좌는 신주백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교수가 맡아 명문가의 후손들이 국외 독립운동 기지를 세운 과정을 사료와 현장 사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조재곤 서강대 연구교수는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
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된 이준 열사의 활동을 다뤘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천도교 지도자이자 민족대표 33인을 이끌어 3‧1운동을 주도한 의암 손병희 선생을 주제로 강연하였다. 장원석 몽양여운형기념관 학예연구사는 풍부한 사진과 영상 자료로 여운형 선생의 독립운동과 정치활동을 살펴보았으며,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며 앉은뱅이가 된 심산 김창숙 선생을 주제로 홍윤정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학예실장이 강연을 이어갔다. 마지막 강좌는 근현대사기념관 관람과 순국선열 애국지사 묘역 중 일부인 ‘초대(初代)’길을 걸으며 마무리되었다.
이번 강좌는 평일 오후 2시에 시작되고 무료 강좌의 특성상 출석을 강제하지 않았지만 1강 25명, 2강 31명, 3강 23명, 4강 37명, 5강 26명으로 모집 정원 30명에 가까운 출석률을 보였다. 강좌마다 설문을 진행한 결과, 강좌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고, 수강생 전원이 향후 기념관의 다른 역사 강좌에 참가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개선점으로는 정원 24명의 강의실이 협소한 점과 기념관 주차 시설 확대, 강의 시간을 연장하거나 같은 주제로 2회 이상 진행해달라는 의견이 있었다. 이번 강좌는 평상시 이름만 들었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시대상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었으며, 전문가가 준비한 풍부한 시청각 자료를 통해 이해하기 쉬었던 점을 높이 평가했다.
현재 근현대사기념관은 일제강점기 저항과 협력의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을 주제로 개관1주년 기념 기획전 ‘한 시대 다른 삶’을 준비 중이다. 또한, 기획전 주제에 맞춰 연속강좌를 진행할 예정이니 관심 있는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린다.

∷ 최인담 학예사

목, 2017/10/1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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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58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52점 보내와
8월 22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제58차 자료기증을 했다. 이번기증자료는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저축예금통장, 보험료영수증, 보증서 등이다.

기타무라 메구미씨, 제4차 일본 청각장애우들의 소장자료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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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수화 통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회원이 청각장애우들의 소장자료를 전달받아 9월 8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조선총독부 교통국에서 발행한 기관차 기념품, 금강산 화보 등 총 5점이다. 기증자들은 소장자료를 기증하면서 이 자료들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생산한 자료이기 때문에 원래 자리로 가야 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목, 2017/10/19-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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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교조 소속 교사 윤희찬 회원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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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1995년 3월에 연구소 회원으로 가입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답 : 평소 친일문제에 관심을 갔고 있었는데 마침 1995년 3·1절 무렵 경희대학교 부근 세탁소 2층에 위치한 연구소(당시 이름 반민족문제연구소)에 직접 방문하여 회원 가입을 하였습니다. 1995년이 한일협정 체결 30주년이 되는 해라,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재평가하자는 여론이 크게 일었습니다. 연구소도 그때 ‘친일협정, 30년 동안의 굴욕’이라는 학술회의를 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문 : 할아버지께서 3·1운동 독립유공자라고 알고 있는데,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그리고 그 후 평탄치
않았던 가족사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답 : 할아버지 함자가 윤영주(1893~1988)입니다. 경상북도 의성 출신인데 3·1운동 당시 26세의 나이로 대구에 있는 동산 기독교성경학교에 재학중이었습니다. 3월 8일 계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대구 시위에 참석한 후 고향인 의성군 금성면 대리동으로 귀향했습니다. 대리동 기독교회 박낙현 목사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했어요. 그리고는 태극기 100여 장과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비밀리에 제작했습니다. 의성군 장날인 3월 18일, 장터에 모인 수천 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지요. 보안법 위반으로 1년 간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출옥 후 할아버지는 목사가 되어 목회활동을 하셨는데 ‘불령선인’으로 찍혀 일경에게 항상 감시를 받았습니다. 1988년 96세의 연세로 부산에서 돌아가셨습니다. 1992년 애족장을 추서받았고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져 있습니다.
한편 아버지는 가정형편이 어려운데다 감시받는 생활이 싫어 만주에 건너가 지내시다 해방 후 귀향했습니다. 의성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는데 좌익활동을 하셨습니다. 1949년 보도연맹으로 대한민국 군경이 보도연맹관련자들 학살할 때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부산으로 도망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그 당시의 학살의 공포를 한평생 트라우마로 안고 사셨습니다. 잠을 못 주무시고 잠들었다가도 한밤중에 갑자기 깨어나 두려움에 떨기도 하셨습니다.

문 : 지난 9월 21일 대법원으로부터 복직 판결을 받으셨는데 그 과정을 설명해 주십시오.

답 : 2001년 전교조 서울지부 교권국장으로 있을 때 상문고 비리와 관련해 재단 퇴진을 요구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2001년 7월 교육청 앞에서 상문고와 관련해 민주 관선 이사 선정과 파견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는데 이때 경찰이 저를 비롯해 전교조 서울시지부장 김재석 용산고 교사(용산고)와 이을재 교사(한천중), 우삼동 교사(신정여상)를 구속 기소했습니다. 2004년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고 2005년 광복절 때 특별사면을 받아 복권되었습니다. 하지만 공정택 교육감 시절이어서 복직이 안 되었습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때 두 번째 구속을 당해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런 저런 사유로 그동안 복직 발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2015년 조희연 교수가 서울시 교육감에 당선된 후, 복직 신청을 하여 서울 숭곡중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한두 달 근무했습니다. 하지만 교육부의 직권 취소로 말미암아 다시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2016년 교육부를 상대로 한 임용취소처분 취소소송에서 두 차례 승소했고 이번에 대법원에서의 확정 판결로 마침내 복직하게 된 것입니다.

문 : 17년 만에 복직하시는데 감회가 어떠신지요.

답 : 물론 기쁩니다. 서른 살 무렵인 1985년에 서울 고려대 사대부고 국어교사로 부임한 것이 엊그제 같은 데 벌써 제가 환갑이 다 되었습니다. 이제 정년이 1년 5개월쯤 남았습니다. 2015년에 잠깐 재직했던 숭곡중학교로 갈 것 같습니다. 비록 남은 기간이 아주 짧지만 비정상적이고 특권층만을 위한 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문 : 전교조 가입은 언제 하셨고 어떤 부문에서 중점적으로 활동하셨습니까?

답 : 1989년 전교조 출범 때부터 활동한 창립멤버입니다. 전교조 서울지부에서 교권부장, 조직부장, 부지부장 등 여러 직책을 역임했습니다. 제가 전교조에 들어와서 주안점을 둔 것은 사학비리 척결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학비리재단은 대체로 일제시대 친일파와 닿아 있습니다. 김달하라고 아시죠. 북경에서 밀정짓을 하다가 다물단에 의해 처단된 사람 말입니다. 김달하는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창숙 선생에게 총독부 경학원 부제학 자리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김달하의 사위인 조 아무개(초대 교장을 겸함)와 친일교육자 김활란이 공동 설립자로 있었던 동구학원이 대표적인 세습비리사학입니다. 조 아무개의 아들이 현재 이사장으로 있습니다. 2008년 11월 동구여상(현재의 동구마케팅고)에서는 교육청 예산으로 200여 권의 도서를 구입하기로 했는데, 학교측이 국어·역사 교사들이 신청한 <친일파 99인>(연구소 기획) 등 3종의 근현대사 관련책에 대한 구입목록을 무단으로 제외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2014년에는 동구마케팅고 이사장과행정실장의 비리 관련 민원을 교육청에 제기한 교사를 파면하기도 했습니다.
전교조는 사학비리를 막기 위해 꾸준히 입법 청원을 했습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이 발의한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2006년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격렬한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고,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서는 사립학교법이 재단측에 유리하게 개악되고 말았습니다. 박근혜 자신이 박정희가 불법으로 탈취한 영남대 이사장으로 재직했었으니 가재는 게편이란 속담이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09

문 : 2015년에 잠깐이나마 복직하셨는데 전교조 해직교사에게 특혜를 줬다는 등 종편과 보수언론으
로부터 인신공격을 받지 않으셨나요?

답 : 엄청난 인신공격을 받았지요. 종편과 보수언론에서는 제 과거 발언과 SNS에 올린 글까지 철저히 뒤져 꼬투리를 잡았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인민재판정을 만들어야”와 “세월호 범인 박근혜”입니다. 전자는 김정훈 전교조 전 위원장의 징역 1년 반에 집행유예 선고를 내린 사법부를 비판한 내용입니다. 후자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박근혜의 잃어버린 7시간이 없었으면 세월호 최악의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음은 온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TV조선, 채널A 등은 북한식 표현이니 하며 저를 친북 용공분자 혹은 파렴치한으로 몰았습니다. 이러한 종편과 보수언론의 여론몰이로 인해 교육부의 임용 취소 결정이 훨씬 앞당겨진 것 같습니다.
저에 대한 공격의 이면에는 진보 진영의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을 흠집 내려는 의도도 다분했습니다. 더구나 이 무렵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대통령 명예훼손 사실에 대해 저를 조사하였는데 그후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문 : 요새 이명박·박근혜 집권기의 적폐청산이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교육계에서 시급히 청산
해야 할 적폐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시급한 현안은 불공정한 입시제도 개선입니다. 이명박·박근혜 집권 동안 교육계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더욱 더 심하게 기울어졌습니다. 입시사정관제도, 자사고·특목고 활성화 등 교육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악화시킨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교육계 적폐를 바로 잡아 참다운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실현해야 합니다.
한편 박근혜 정권하에서 전교조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법외노조’가 되었습니다. 전교조의 합법화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가 행정통보를 취소하면 바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해고당한 노조 전임자가 50여 명이나 되는데 이들이 교단에 설 수 있도록 신속한 조치가 취해져야 하겠습니다.

문 : 끝으로 연구소 회원들께 드릴 당부 말씀은?.

답 :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폐해는 일제 교육제도를 답습한 데서 옵니다. 사학 비리가 대표적이죠. 또 자사고다 특목고다 하여 교육의 불평등을 조장하는 학제가 시정되어야 하겠습니다. 회원들께서 우리 학생들이 좋은 환경에서 인간다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성원해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목, 2017/10/1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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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 28

국회프락치사건의 시작

그것은 프레임이었다. 만들어지는 순간 각인되고 부인할수록 견고해졌다.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빠져들어 온몸을 옥죄었다. 그것은 흡사 개미지옥과 비슷했다.
1949년 5월 9일 동아일보는 ‘의정 단상의 1년 회고’라는 코너에 민국당 국회의원 김준연의 글을 실었다. ‘회고’라기보다는 반대파에 대한 일방적 매도로 가득 찬 글이었다. 그는 주장했다.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협상 운운하며 5·10선거에 불참하고 대한민국의 성립을 방해했다고,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소위 ‘소장파’라 불리는 무리들이 대한민국을 부정하며 남로당의 선전방침을 추종하고 있다고. 그의 주장은 놀라웠다. 국회 내에 김일성을 추종하는 세력이 있고, 그들이 남로당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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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당 중진 김준연 의원. 1949년 5월 9일 동아일보 기고를 통해 국회프락치사건을 예고했던 그는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88구락부의 일원으로도 알려져 있다.

 

김준연이 누구인가? 일제강점기 ML파임을 숨기고 서울파 고려공산동맹의 책임비서를 꿰찬 후,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철수 몰래 당 중앙을 탈취하여 선전부장에 올랐던 자이다. 체포 후 전향하여 우익의 논객이 되었고, 동아일보와 긴밀한 연관 속에서 해방 후 민국당(한민당의 후신)의 중진이 되었다.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과거를 지우고 싶었던 것일까. 얼굴에 올라오기 시작한 검버섯처럼 그는 어느새 독기 가득한 극우 인사가 되었다.
김준연의 주장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이날 동아일보엔 심상치 않은 기사가 하나 실렸다. 최근 남로당원 3명이 검거됐는데, 그들이 소장파 국회의원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황윤원과 접촉했다는 것이었다. 남로당원들은 이들 국회의원들에게 외군(外軍) 완전 철퇴, 남북 정치범 석방, 남북통일정치회의 개최, 선거에 의한 최고입법기관 구성과 중앙정부 수립, 조국방위군 재편 등을 주장하여 동의를 얻었다고 한다. 후일 남로당 7원칙으로 알려진 사항이다. 남로당원들은 국회의원들이 소속된 정당 내에서 프락치 활동을 벌이고 국회의 원들을 조종하여 남로당의 세력 확대를 꾀했다고 한다.
두 개의 글로 프레임이 완성되었다. 내부에 적이 있고 그 배후에 남로당이 있다는 프레임이었다. 실상 동아일보는 두 개의 글로 중대 사건을 암시한 셈이었다. 무속인들도 부러워할 예지능력이었다. 8일 후인 5월 17일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의원이 체포되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의 시작이었다.

 

이승만과 민국당의 연합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권은 내외 양면에서 강력한 도전에 직면했다.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도전은 공산주의자들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내부의 ‘적’도 만만치 않았다. 제도권 밖에는 김구와 김규식 세력이 건재하고 있었고, 이들과 공명하는 국회 내 ‘소장파’ 의원들이 반민법과 지방자치법, 진보적인 농지개혁법 등을 견인하며 신생 정부에 도전하고 있었다. 가장 뼈아픈 것은 반민특위였다.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권의 가장 강력한 힘인 경찰력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할 수 있었다. 더구나 내각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소외당한 한민당도 야당을 선언하고 이승만 정권에 반기를 든 상황이었다. 내부의 ‘적’을 제압하기 위해선 변화가 필요했다.
1948년 말부터 변화의 조짐이 있었다. 여순사건 이후 추진된 국가보안법 제정이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한민당과 다시 손을 잡는데 성공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초래한 위기가 두 세력을 하나로 묶는데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기꺼이 손을 잡고 극우반공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함께 했다. 1949년 들어 이승만 정권은 부분적 조각을 단행할 때마다 한민당 세력을 정부 안으로 끌어들였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다른 ‘적’에 대적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민당은 한민당대로 신익희와 지청천 세력을 끌어들여 세력 확대를 꾀했다. 이제 한민당은 민주국민당(민국당)이 되었다. 이승만과 민국당의 연합으로 전선은 명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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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21일 이문원 등 소장파 국회의원의 구속을 보도한 기사. <경향신문> 1949.6.23.

 

정부 vs 국회

1949년 5월 21일 임시국회가 열렸다. 5일 전인 5월 16일 80여 의원들이 중대한 안건이 많다고 임시국회 소집을 요구했지만, 국회의장 신익희는 웬일인지 국회 개원을 지연시켰다. 의원들이 지방에 있다는 등의 이유를 댔지만 일부 의원들에 국한된 얘기여서 납득하기 어려웠다. 결국 국회는 시작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국회의원 3명이 구속된 후에야 국회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신문 기사를 보고 동료 의원들의 체포를 알게 된 국회의원들은 국회가 열리자마자 검찰총장 권승렬에게 체포 경위를 따져 물었다. 권승렬은 이들 국회의원이 3월 하순부터 좌익계열 인사와 내왕하는 것을 탐지하고 내사에 착수했으며, 이들이 남로당 7원칙에 동의하고 이를 남한에 적용하는 것을 협의한 혐의로 구속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권승렬의 답변은 더 큰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물적 증거 여부에 대해 답변하면서 “이 사건은 물적 증거라는 것은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마는 다소는 있습니다마는 … 없습니다마는 …” 하고 심하게 말을 더듬은 탓이었다. 사실상 증거도 없이 국회의원들을 체포했음을 은연중 드러낸 답변이었다.
더구나 당국은 구속영장이 발부된 4명의 의원 가운데 한 명을 체포하지 못했다. 황윤원 의원이었다. 지방에 있다가 체포를 피하게 된 황윤원 의원은 5월 24일 국회에 출석해서 자신의 무죄를 호소했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 공산당과 열렬히 싸워왔으며 죄라면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된 죄밖에 없다고 울먹였다.
상당수의 국회의원들은 체포된 국회의원들이 실제로 국가보안법에 걸릴만한 행동을 했는지 의심했다. 당시 경찰의 자의적 공권력 행사가 드문 일이 아니었던 데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에 대한 공격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장파 의원들은 체포된 국회의원에 대한 석방 결의안을 제기했다. 격론 끝에 투표 결과는 재석 184명 가운데 가 88표, 부 95표,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재석이 184명이나 되었다는 것은 이 문제가 얼마나 첨예한 문제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석방에 찬성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지지세력 확보를 위해 역량을 총동원한 결과였다.
이후 양측의 싸움은 김준연 의원의 제명에 관한 긴급동의안 제기로 옮겨 붙었다. 김준연 의원이 석방동의안 토의 과정에서 체포 의원 석방을 요구하는 자는 모두 대한민국을 부인하는 자라고 매도한데다 5월 9일자 동아일보 기고문과 기사가 소장파를 모략하려는 모종의 음모로 읽혔기 때문이었다.
갈등은 국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5월 31일 파고다공원에서 세 의원의 석방동의안에 찬성한 88명의 의원을 적색분자로 규탄하는 ‘민중대회’가 개최되었다. 집회를 개최한 이들은 손빈과 허일 등 반민법 대상자들이었다. 이들은 연일 ‘민중대회’를 개최하며 국회를 압박했다. 동네 반장들까지 동원되어 주민들을 동원했지만 당국은 사태를 방조했다. 시위대는 6월 2일 국회가 있는 중앙청까지 행진했고, 6월 3일에는 반민특위로 몰려가 난동을 벌였다. 이쯤 되자 이들의 진짜 목적이 드러났다. 88명의 의원에 대한 공격은 표면이고 실상은 반민특위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민특위는 난동을 부린 주도자를 검거하는 한편, 이들의 배후로 밝혀진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장 최운하와 종로경찰서 사찰주임 조응선을 구속했다. 최운하는 노덕술 만큼이나 유명한 일급 친일 경찰이었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움직임을 기다린 자들이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격의 빌미였다.

 

반민특위 습격, 국회의원들의 체포, 그리고 암살

6월 6일 새벽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경찰을 인솔하고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이들은 반민특위 소속 특별경찰대를 무장해제하고, 반민특위 직원들을 연행해 무자비한 린치를 가했다. 우연히 그곳을 방문했던 검찰총장 권승렬도 경찰들에게 수모를 당했다. 몸수색을 당하고 권총을 빼앗겼던 것이다. 한 의원은 경찰의 반민특위 테러를 ‘경찰의 쿠데타’라 명명했다.
국회는 분노했다. 국회는 경찰의 테러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국무총리 이하 전 각료의 퇴진, 반민특위의 원상복구를 결의했다. 그러나 친일 판사 출신인 장경근 내무차관은 국회에 출석하여 반민특위 습격이 내무부 책임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도 6월 7일 AP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특경대의 해산은 자신이 지시한 것이라고 밝혔다. 사태가 이러하자 경찰들은 반민특위 인사의 쇄신, 경찰관 신분의 보장을 주장하며 이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총퇴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었다. 대통령부터 일개 경찰관들까지 불법을 저지르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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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의 유해. 1949년 봄, 김구의 현실정치 참여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치테러의 피해자가 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공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국회가 폐회한 다음날인 6월 21일 체포되지 않았던 황윤원의원과 노일환, 강욱중, 김옥주, 김병회, 박윤원 의원이 추가로 체포되었다. 6월 25일에는 국회부의장 김약수가 체포되었다. 이들 국회의원의 혐의는 남로당 공작원의 회유에 넘어가 남로당에 가입하고 국회 내에서 정부 파괴 공작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국회 밖에서 발생했다.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된 것이다.

독재의 연원, 6월 공세
일련의 사건들은 명확히 하나의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극우반공체제 강화였다.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권력 기반인 경찰 조직을 뒤흔드는 반민특위를 해산시키고, 반민특위의 인적 배경이자 국회 내 반정부 중심세력인 소장파 국회의원을 체포해 세력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1949년 봄부터 부쩍 정계로 진출할 가능성이 점쳐졌던 잠재적 최대 라이벌김구를 제거했다.

이승만 정권은 반대파를 공격하는데 좌익사건을 활용하고, 관변의 힘으로 민을 동원하여 반대파에게 압박을 가했으며, 최후의 방법이라 할 ‘암살’을 시행했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그 후에도 유사한 사건들을 손쉽게 목도할 수 있다. 부산정치파동이 그러하고 장면암살미수사건이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1949년 6월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은 이승만 독재의 연원이라 할만하다. 이후에 달라지는 점이 있다면 소장파 대신에 민국당이 새로운 탄압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1950년 4월에 있었던 대한정치공작대사건이 그 시작이었다. 대한정치공작대사건이란 김성수, 김준연, 백관수, 조병옥 등 민국당 지도자들이 군과 경찰에 잠입한 남파간첩들과 내통하여 선거를 방해하고,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요인을 살해하고, 정부를 전복할 음모를 꾸몄다고 조작하려다 이 사실이 들통 나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는 백성욱 내무부장관과 신태영 육군총참모장, 최영희 헌병사령관, 김병완 치안국장 서리 등 이승만 정권의 주요 인사가 관련되어 있었는데, 조작의 정도가 너무 노골적이고 저급하여 이내 들통이 나고 말았다. 이렇게 이승만 독재의 역사는 대상을 바꿔 반복되었다. 한번은 비극이었고, 한번은 희극이었다.

목, 2017/10/19-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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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현 연구위원

지난 9월 21일 대법원은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장관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이로써 올해 5월 12일에 나온 서울고등법원의 판결(민족사랑 5월호 참조)이 확정되어 전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를 둘러싼 친일논쟁은 사법적인 차원에서 일단락되었다.
방응모의 친일행적은 해방후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1948.9.22. 공포, 법률 제3호)에 따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다루지지 못하다가 50여 년이 흐른 뒤인 2004년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하 반민규명법)이 제정되고 이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에 의해 2009년 6월 29일 방응모의 행위들이 친일반민족행위인 것으로 결정되었다. 구체적으로 반민규명위는 그동안 밝혀진 그의 행위들이 반민규명법 제2조의 13, 14, 17호에 해당된다고 했다.


13.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
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4.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돕기 위하여 군수품 제조업체를 운영하거나 대통령이 정하는 규모 이
상의 금품을 헌납한 행위
17.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
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방응모는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랐다. 이 사전의 발간에 대해 조선일보가 11월 9일 오피니언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갉아먹는” 것이라고 하는 가운데 2010년 1월 방응모의 양자인 방우영, 방우영이 죽자 그의 아들 방상훈이 원고로 또한 이들의 회사인 조선일보사가 원고 보조 참가인으로 위원회의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서울행정법원에 냈다. 서울행정법원의 1심판결에 비춰보면 조선일보사의 일제시기 행위가 어느 국가기관에 의해서도 문제되지 않았는데도 조선일보사가 원고측에 선 이유를 약간 짐작할 수 있다. 판결에 따르면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2005.12.29. 제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선정할 때 반민규명위
의 결정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고 이에 따라 “재산권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구사주의 행적과 재산상속, 언론사라는 상속된 회사의 성격과 활동, 뉴라이트, 건국절, 국정교과서 파동, 이른바 ‘역사전쟁’, ‘역사적폐’ 등 많은 것들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반민규명위는 2005년 5월 31일 발족하여 2009년 11월 30일 활동을 종료하였기 때문에 위원회의 결정과 관련된 헌법소원이나 행정소송의 수행 등은 행정자치부 산하의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이 맡게 되어 방응모결정 취소소송의 피고 역할을 하였다. 방응모의 상속자들과 조선일보사의 소송은 그 후 2010년 12년 22일 서울행정법원의 1심 판결,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의 항소심 판결, 2016년 11월 9일 대법원의 상고심 판결, 다시 2017년 5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의 항소심 판결과 이번의 대
법원 판결까지 6년여의 재판과정을 거쳐 5개의 판결문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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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관이 내무대신에게 전투기 제작 군수회사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주식인수에 관한 승인을 요청하면서 이 회사 유일의 조선인 감사인 방응모를 ‘경성유력자’로 표시하였다.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주식인수의 건을 승인함」(일본내무대신, 1944.10.6.) 출처: 아시아역사자료센터

 

반민규명법 제2조가 열거하는 친일행위결정과 관련하여 결국 13호에 관한 위원회의 결정만이 적법한 것으로 판결되었다. 17호 관련은 2012년의 단계에서 절차적인 이유로 위법하게 되었고, 14호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투어졌지만 역시 위법한 것으로 이번 판결로 확정되었다. 법원이 인정한 구체적인 방응모의 친일행위는 잡지 ????조광????의 발행, 여기에 논설 투고한 것, 임전대책협력회와 조선임전보국단의 간부로서의 활동에 국한되었다. 조선항공공업의 주주와 감사로 활동한 것(14호 해당)이나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직과 선전부 위원이었던 사실(17호 해당)은 반민규명법의 문구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형식적 논리로 친일이 아니라고 한 셈이다. 결국 위원회와 달리 법원이 볼 때는 방응모의 과거 행적은 일부만이 친일에 해당하는 것으로 범위가 대폭 축소되게 되었다. 어렵게 친일반민족행위규명에 관한 입법이 이루어지고 국가기구인 반민규명위가 활동했지만 사법부에 의하여 그 의미와 효과는 반감된 것이다. 이번 대법원의 기각 판결에서는 ‘심리불속행’이라고 하여 상고심 자체를 열어주지 않았다. 아쉬움을 떠
나서 친일반민족행위 규명이라는 역사적 책무를 일부 대법관들과 판사들이 배반하고 방응모에게 부분적으로 면죄부를 발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서 분노의 마음까지 든다.
이제 이해승의 친일재산에 대한 사건을 제외하고 방응모 재판이 종료됨에 따라 반민규명위와 관련된 소송들도 끝나고 친일반민족행위 문제에 대한 성찰과 실천은 다시 시민사회로 넘겨지게 되었다. 친일문제에 대한 입법, 위원회의 활동, 사법 판결에 이르는 국가의 관여가 한 바퀴 돈 지금, 시민사회측에서 식민지배와 부역협력자들이 남긴 역사적 과제들을 다시금 점검해볼 때이다.

목, 2017/10/19-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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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사 · 25

대한의원 100주년,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
안중근의사 순국 104주년 기념우표

SNS가 사람들 간에 절대적인 소통 수단으로 자리 잡으면서 우표는 그만큼 대중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표 수집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수집가들에게는 새로운 우표 발행이 큰 관심거리다. 특히 특별한 날이나 역사적 사건을 오랫동안 기념하고 싶을 때 가장 떠오르는 것이 바로 우표 발행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난데없이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으로 논란이 일었다. 박근혜 정권 때인 2016년 5월 결정된 사안이었고 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기에 연구소의 대응도 늦었지만 다행히 발행 결정을 취소시키는 성과를 이뤄냈다. 이번 달에는 우표와 관련된 연구소의 몇 가지 활동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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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15일 우정사업본부는 서울대학교병원의 요청으로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우표’ 160만 장을 발행했다. 당시 서울대병원 측은 1907년 설립된 대한의원이 현재 서울대병원의 전신이라고 하면서 서울대병원 100주년 기념사업을 벌였고 기념사업의 하나로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을 신청했던 것이다. 1907년 대한제국 당시 일제의 통감부는 광제원, 의학교와 그 부속병원, 대한적십자사병원 등 세 병원을 통합해 대한의원을 설립했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 대한의원은 조선총독부의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을 거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일조했다. 이 같은 사실을 지적하며 연구소와 의학사 연구자들은 “대한의원은 일제 통감부가 한국인 회유책의 일환으로 설립한 것으로 일제 식민통치를 미화할 소지가 있”기에 기념사업 재고를 요청했다. 한국정부의 전신이 통감부나 조선총독부가 아니듯이 국립 서울대병원의 전신이 통감부가 설립을 주도한 대한의원일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연구소는 우표 발행 저지를 위해 서울대병원, 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에 대한 감사원 감사를 청구하는 한편 우표발행 중지 가처분신청을 서울지방법원에 냈다. 이 당시 가처분신청은 현 성남시장으로 연구소 자문 변호사였던 이재명 변호사와 김한규 변호사(전 서울변협 회장)가 맡았다. 그러나 3월 21일 가처분신청은 기각되었다. 기각 결정이 난 바로 다음날 우정사업본부에 ‘반민특위 출범 60주년 기념우표 발행 요청’ 공문을 보냈다. “반민특위 출범 60주년인 2008년에 기념우표를 발행하여 국민들에게 반민특위의 정신을 널리 알려 민족정기를 확립하고 친일청산과 역사정의 실현의 큰 뜻을 되새기는 기회를 마련”하자는 취지였고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과 같은 일제 식민통치 미화정책에 맞선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정사업본부는 5월 21일 반민특위 기념우표가 2008년 발행대상에 선정되지 않았다고 알려왔다.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우표의 경우와는 반대로 연구소가 신청하여 기념우표를 제작한 적이 있다. 바로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 기념우표’로 2011년 6월 10일 100만 장이 발행되었다. 우표에 들어갈 그림과 문구, 설명 등 거의 전반적인 내용을 연구소가 제안했다. 신흥무관학교 당시 사진이 전무한 탓에 우표에 들어갈 이미지는 독립기념관 제5전시관에 있는 ‘무명독립군상’에서 따왔으며 신흥무관학교의 지향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신흥무관학교 교가의 3절 가사를 넣었다.

03

칼춤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 새로운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 내어 / 새나라 세울 이 뉘뇨 / 우리우리 배달나라의 / 우리우리 청년들이라 / 두팔 들
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 자유의 깃발이 떳다

04

2014년 3월 26일에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안중근 의사 순국 104주년 기념우표’를 기획, 제작했다. 2010년 우정사업본부가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을 기념한 우표를 제작한 적은 있지만, 민간이 주도해 안중근 의사 우표를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는 우정사업본부가 심의를 거쳐 제작
하는 기념우표와 달리 ‘나만의 우표’라는 우표발행 서비스를 통해서 가능했다. 보통 ‘나만의 우표’는 가족이나 기업들이 소량 제작 하지만 ‘안중근 의사 순국 104주년 기념우표’는 이례적으로 우표세트 1만 매(1세트 14장)를 제작했다. 우표 발행 소식이 알려지자 판매를 맡은 연구소에는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주문 전화가 넘쳐났다. 우표 수익금 전액을 안중근 의사 기념·연구 사업에 기부했다.
촛불시민혁명으로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적폐청산’은 시대적 요청이 되었다. 기념우표라는 아주 작은 것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 곳곳에서 무엇을 기념하고 무엇을 기억하고 또 무엇을 청산할지 두 눈 부릅뜨고 살필 일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금, 2017/07/2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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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일이 다가올수록 이렇게 떠나도 되는 건가? 하는 어색함이 자꾸 밀려왔다. 대안학교 교사로 어디를 가든 여러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던 것이 몸에 배어 단체여행 전엔 늘 이것저것 챙길 것들과 인솔교사의 책임감으로 팽팽하게 긴장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내 여권만 잘 챙겨오면 된다는 말에 여권을 잘 챙겨두고도 왠지 모를 불안감이 남았다. 직업병이라고 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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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낯가림 하는 성격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수십 명이 함께 하는 답사를 덜컥 신청한 것은 일정 중에 난징 위안소 진열관이 눈에 들어와서였다. 간디마을학교 봄을찾기 프로젝트 수업 중 아이들과 간마소녀상 봄이를 만들며 일본군 ‘위안부’와 일제 강점기에 특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한·중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서〉란 제목을 단 답사는 아이들과 나눌 것을 풍성하게 해주리라는 기대가 컸다.
4박 5일 동안 고속열차로도 7시간이나 걸리는 난징과 광저우를 누비며 임정주화대표단본부, 항공열사공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훈련지, 민족혁명당 거점, 난징대학살기념관, 신해혁명기념관, 황포군관학교 등 역사의 현장을 빡빡한 일정으로 다녔다. 이동하는 중간 중간 이준식 근현대사기념관장님의 알찬 설명으로 답사지 한 곳 한 곳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깊이 있는 설명을 들으며 답사지 어느 한 곳도 허투루 지나간 곳이 없지만 내게는 난징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이 가장 강렬하게 남았다. 봄을찾기 아이들과 다시 와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난징 시내의 금싸라기 넓은 땅에 오래된 건물과 수천 점의 많은 자료, 할머니들의 슬리퍼에서 화장품 통 같은 소소한 유물까지도 소중하게 보존해 전시하고 입장료도 없이 유적관을 개방하는 중국정부에 놀라움과 감사함을 느꼈다. 난징 위안소에는 조선인 위안부가 많았는데 특히 2006년 돌아가신 박영심 할머니께서 끌려왔던 곳이다. 박영심 할머니 방은 당시 모습으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으며 위안소 입구에는 잘 알려진 할머니의 임신한 사진 모습이 커다란 동상으로 재현되어 있었다. 동상 뒤 외벽 위로 흐르고 있는 눈물이 입구 한 쪽 벽을 가득 메운 흑백사진 속의 한·중 위안부 할머니들의 슬픔을 대변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실제 위안소 현장의 생생한 유물들을 통해 드러나는 할머니들의 무거운 고통과 아픔에도 꾹 참고 있던 눈물이 툭 터진 시점은 위안부 할머니의 흉상에서 끝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과 마주했을 때였다. 흉상 아래 준비되어 있던 흰 수건으로 계속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렸지만… 정말로 정말로 그 눈물 다 닦아 드리고 싶었는데… 끝없이 흐르는 할머니의 눈물을 다 닦아 드리지 못하고 아픈 마음을 간직한 채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여러모로 보람 찬 답사였지만 4박 5일 동안 수많은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 덕분에 나로서는 더욱 뜻깊었다. 사람과 사람의 작은 만남이 모든 변화의 시작이라고 했던가. 그 옛날 비바람 속에 만주벌판을 달리며, 남의 나라 깊은 산 속에서 독립을 위해 군사 훈련을 하며, 목숨 걸고 싸울 수 있었던 것도 다 뜻을 함께하는 동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답사지를 함께 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듣고, 밤이 깊도록 감흥을 함께 나누었다. 마치 여러 권의 명작 사람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통!하는 좋은 인연들로 후기를 적고 있는 지금까지도 마음 한편이 따뜻하다. 좋은 인연으로 인해 과거를 이해하러 갔는데 과거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현재를 공감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왔다.
아이들을 위해 떠난 답사에서 내가 더 충만해져서 돌아왔다. 아이들에게 더 좋은 선생이 되어야겠다. 앞으로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아픈 우리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그리고 행동해야겠다.

• 알차고 보람찬 역사 답사를 기획해 주신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와 민족문제연구소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 김제영 간디마을학교 교사

월, 2017/09/25-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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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35

 

“찌는 듯이 무더운 남방에서는 아귀 같은 미국과 영국을 쳐물리기 위한 싸움이 매일같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조선의 더위쯤은 문제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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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반회보 뒷면>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43년 8월 1일, 국민 총력조선연맹에서 발간한 제32호 애국반 회보 다. 애국반 회보는 1941년 9월 인가를 받아 매 월 1일에 발행되던 간행물로 내용은 전시상황 에서 후방은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 특히 32호는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8월에 발행한 것으로 주요 기사의 내용도 여름 철 후방의 전시준비태세에 관한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더위에 지지 말고 몸 을 튼튼히 해서 근로보국에 힘씁시다’에서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더 덥게 느껴지니 더위를 잊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하며, 전투 중 인 병정들을 생각하면 덥다는 생각조차도 하 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도 몸이 약하면 더 위에 지게 되니 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방법 으로 ‘신사나 절, 공원을 청소’, ‘개천이나 하수 도, 농촌이나 공장에 근로봉사’, ‘5리쯤 되는 데 는 걸어 다닐 것’ 등을 소개한다. ‘전시살림은 이러케!’에서는 전쟁은 제일선의 병사들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가정, 일터, 거리 등 싸움터가 아닌 곳이 없으며 특히 부엌에서 밥 지어 먹는 것도 ‘전쟁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으로 생 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싸움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활전선에서는 일찍 자고 일찍 일 어나고 지각과 결근하지 말라고 선동한다. 저금은 나라의 힘이며 시중에 돈이 돌지 않게 되면 물 건값도 올라가지 않고 살림살이도 안정되며 결국 이는 집안이 부자가 되는 것이고 곧 나라가 부 자가 된다는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각 가정에 강제저축을 독려했다. 또한 옷감을 만들기 위해 쓰는 양잿물을 화약으로 만들면 대포알 630만 발, 총알 17억 7천 8백 만 알이나 되니 각 가정에서는 헌 옷을 고쳐 쓰고, 애국반원끼리 돌려가며 나눠 쓰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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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반회보 앞면>

특히 ‘언제나 전장에 나간 병사와 갓튼 생각으로’에서는 화려한 옷을 입지 말고 ‘미국과 영국식 옷차림을 좋아하는 자는 우리의 원수’라고 지칭하며 전시 물자절약을 ‘전쟁승리’와 ‘애국’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날은 왓다 징병준비는 다되엿슴니까’에서는 곧 실시될 징병제에 대해 ‘반도 2천5백만 동포의 감격’으로 칭하며 징병대상자는 호적을 정리하고 국어(일본어)를 배우며, 대상자가 아니더라도 만17세 이상의 남자는 지망하라고 독려하며 조선의 청년들을 일제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마지막으로 “여러분 다 읽으섯거든 뒷면에 있는 그림을 하나식 따로 오려서 눈에 잘 띄이는 곳에 부쳐 두십시요”라는 문구를 따라 회보의 뒷면을 보면 전시생활에서 지켜야 할 일들을 만화와 함께 설명하고 있다. ‘으싸! 결전생활로’라는 구호 아래 일찍 일어나 출근하고 음식을 남기지 말며, 무지각 무결근하고, 옷을 기워 입으며, 출장 갈 때는 각반을 준비해 비상시를 대비하고, 옷소매 폭을 줄여 옷감 낭비를 줄이고, 출정 군인 집이나 그 유가족의 일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애국반’은 전쟁동원을 선전·선동하고 민간인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할 목적으로 각종 관변기구와 친일단체를 흡수해 조직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최말단 기구로 주민 통제와 조선총독부의 정책 홍보, 물자와 노동력동원 등에 활용되었다. ‘애국반 회보’는 바로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시책을 말단 주민조직까지 전달·관철시키는 수단이었다.

∷ 강동민 자료팀장

월, 2017/09/25-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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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조민 평화재단 평화교육원장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

 

북한은 지난 7월 두 차례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급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마침내 미국 본토 타격 가능성이 현실화되었다. 동북아 전략 구도의 게임체인지 순간이 다가왔다.
ICBM은 현대 군사 기술의 집약체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속옷도 제대로 못 만드는 북한의 ICBM 개발이 미스터리라고 하면서, 성공 요인을 크게 세 가지로 봤다. 첫째, 지난 수십 년 간 ICBM 관련 과학자들을 꾸준히 관리했으며, 둘째 스스로 확보한 비공식 글로벌 금융 네트워크를 활용해 미사일 개발 비용을 감당했고, 마지막으로 김정은이 미사일 개발에 정권의 사활을 걸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연합뉴스???? 2017.7.10). 그러나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는 워싱턴포스트 분석보다 뿌리가 더 깊다.
북한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 고립무원의 외톨이가 됐다. 이에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에 올인했다. 모든 국가자원을 다 쏟아 부었다. 북한 스스로 핵개발 의도를 미국의 핵위협 대처, 재래식 무기의 엄청난 비용 부담에 따른 코스트 측면에서 핵개발, 그리고 민족통일의 원동력 구축임을 밝히고 있다. 북한의 ‘피포위 의식’과 미국의 대북 핵위협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통일 무기로서의 핵’이라는 데에 북핵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의 북한 비핵화 전략은 실패했다. 왜 실패하고 말았는가? 미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우려하면서도 적극적인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가 군산복합체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상황일 수도 있었고, ‘불량국가’와의 협상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제국 미국의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미국은 좀체 북한과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체결의 세 이벤트가 주목된다. 그해 말 전술핵무기가 철수되었다. 독일 통일(1990.10.3)을 전후하여 한소수교(1990.9.30), 한중수교(1992.8.24)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북한과 미일과의 교차승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2년 초 북한은 주한미군 주둔 용인을 전제로 북미수교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거절했다. 그러자 북한은 핵프로그램 추진으로 돌아섰다.

 

북핵, 협상 실패의 역사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몇 차례의 협상 타결이 있었다. 1994년 10월의 제네바 기본합의로 제1차 핵위기가 봉합되었다. 그러나 당시 클린턴 행정부와는 달리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의 발목잡기에 걸려 경수로 건설의 첫 삽을 뜨는데 3년 가까이 걸렸다. 1998년 8월 31일 대포동 미사일 발사로 다시 미국의 주목을 끌었다. 2000년 10월 12일 워싱턴의 「북미 공동코뮤니케」(US-DPRK Joint Communique)로 한반도의 새 역사의 장이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공동코뮤니케는 다음해 부시 대통령에 의해 찢겨지고 말았다.
2002년 10월 고농축우라늄(HEU) 핵개발 의혹으로 제2차 핵위기가 불거졌다. 우여곡절 끝에 다음해 8월 다자간 협상틀인 6자회담이 개최되어 커다란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2005년 「9·19 공동성명」으로 거의 완벽한 합의문이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 합의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북한 자금을 묶은 BDA(방코델타아시아)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북한은 다음해(2006.10.9) 마침내 제1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에 놀란 미국은 다시 북미 양자 협상을 서둘렀다.
2008년 6월 영변 5MW 원자로 냉각탑 폭파, 10월 테러지원국 해제 등 북핵 협상이 순항하는 듯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6자회담은 2008년 12월의 6차 회담을 끝으로 지금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김정일이 2008년 8월 스트로크(뇌졸중)를 맞았다. 갑자기 건국기념일(9월 9일) 행사가 취소되었다. 그러자 김정일 사망 관련 예측 보도가 봇물을 이루었다. 미국 정보기관을 중심으로 김정일 사망 후 대책이 얘기됐고, 미국과 한국에서 북한붕괴론이 크게 부각되었다. 학술 세미나, 언론은 호들갑을 떨었다. 미국은 협상 판을 걷어 치웠다.
김정일은 ‘유감스럽게도’ 3년이나 더 살았다. 그 3년 동안 중국과 러시아를 수차례 방문했고, 핵미사일 소요 첨단 소재와 장비들을 구입했다. 2009년 1월 김정은을 세습 후계자로 내세웠다. 김정일은 3년의 후견 기간을 통해 절대 미국을 믿어서는 안 되고, 핵미사일만이 살 길이라는 점을 확신시켜주고 떠났다. 김정일의 사망이 급변사태나 붕괴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북한 비핵화, 2단계 접근
미국은 본토 침공을 두 번 당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1941.12.7), 2001년의 9․11 테러가 그것이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과 언어폭탄으로 미국 시민의 충격은 크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오바마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는 사실상 전략적 무대책으로 실패했다. 그렇다고 선제타격(preemptive strike), 예방전쟁(preventive war) 카드를 함부로 휘두를 형편은 못된다.
북미 간 치킨게임이 진정 국면에 들어서는가? 북한의 협박 자제와 한미연합훈련 축소로 일단 긴장국면을 넘긴다면, 이제 본격적인 협상 모멘텀을 찾아 나서야 한다.
2단계 접근이 가능하다. 1단계는 위기 봉합과 핵·미사일 상황 악화 방지에 초점이 있다. 이는 ‘동결 vs 제재·압박 해제(완화)’의 맞교환이다. 2단계는 장기전망 구도 위에서 ‘핵폐기 vs 평화체제’ 협상틀이 예상된다. 1단계 진입이 쉽지는 않지만, 협상 이외에 다른 길이 있겠는가?

편집자주 – 이 시론은 8월 25일 접수된 글이라 이후 북핵 위기의 변동 사항이 반영되지 않았다.

월, 2017/09/25-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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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공무원노동조합 우정사업본부 이형철 위원장

04인터뷰어 :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 조한성 선임연구원

지난 7월 12일 우정사업본부는 서울중앙우체국에서 열린 우표발행심의위원회 회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년 기념우표의 발행 계획을 철회했다.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은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추진되었던 대표적인 역사적폐 중 하나로 꼽혀 왔다. 이번 기념우표 발행 철회에는 1년여 간 발행 철회를 끈질기게 요구해온 우정사업본부 소속 공무원노동조합의 가열찬 투쟁이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도 이
에 적극 동참한 바 있다.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 철회를 이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공무원노동조합 우정사업본부 이형철 위원장을 만났다.

문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공무원노동조합 우정사업본부 노조는 어떤 노조인지 소개해 주세요.
답 : 사실 우정사업본부에 노조가 상당히 많습니다. 집배원과 우체국 창구에서 근무하는 분들로 구성된 전국우정노조가 있는데 이분들은 2만 7천여 명 되구요. 저희는 2선에서 행정 관리를 지원하는 행정기술직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입니다. 정 조합원이 5천여 명 되구요, 후원회원까지 포함하면 7천여 명이 됩니다.

문 : 어떻게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년 기념우표 발행 철회 운동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답 :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우표 발행 문제는 작년 9월 국정감사에서 처음 불거졌습니다. 기념우표 발행에 대한 심의는 작년 5월에 있었는데, 심의 사실을 꽁꽁 숨겨놓고 있다가 국정감사에서 심의 사실이랑 발행 계획이 드러나면서 문제가 된 거죠. 신경민 의원 등이 문제 제기를 하자 우정사업본부는 절차대로 합법적으로 진행한 것이라고 변명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원래 정치적 학술적 종교적 논쟁이 있는 경우에는 우표 발행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원칙이 있는데, 우표발행심의원회의 회의록을 보니 이러한 원칙이 제대로 설명되지도 않았고, 사실상 논의자체도 제대로 한 것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9월 29일 우리 노조는 우정사업본부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한편, 노조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를 거쳐서 기념우표 발행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우정사업본부는 우리의 문제제기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어요. 본부장 등 관리자들을 여러 차례 만났는데 당시는 박근혜정부가 아직 살아있는 권력이었고 대통령의 아버지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에 말도 못 꺼내게 했습니다. “과거에 친일을 했어도 해방 후 조국 근대화에 큰 공로가 있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합리화하기까지 하더군요.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언론에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과 최명길 의원 등 야당 의원들을 통한 지속적인 문제제기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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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기념우표 발행 철회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였겠군요?

답 : 네. 올해 3월 9일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난 후 우리 노조는 4월 3일 다시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념우표 발행 문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재차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우정사업본부 본부장과 임원들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상급단체인 국가공무원노조에 기념우표 발행 문제를 과잉 의전 문제와 함께 우정사업본부 내 적폐사례로 보고하고 공동 투쟁을 요청했습니다. 내부 문제를 외부로 확대시키는 것이었으니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우리는 6월 12일 기념우표 발행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우표발행을 책임지는 우편사업단장과 면담하여 발행 취소를 하지 않으면 반대투쟁에 나설 것이고 발행을 강행할시 우표발행정지 가처분신청을 내겠다고 밝혔습니다. 우리는 6월 13일부터 7월 12일까지 광화문에서 1인 시위를 진행했고, 국가공무원노조에서는 6월 29일부터 정부세종청사 우정사업본부와 광화문에서 1인 시위를 했습니다. 6월 22일에는 광화문1번가 국민인수위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규탄 집회도 가졌습니다. 우리는 언론사들과 여러 번 인터뷰도 했는데, CBS 권민철 기자가 자세히 다뤄주면서 여론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결국 6월 29일 좋은 소식이 들려왔어요. 당시 심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심의위원들의 문제제기로 재심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7월 12일 재심의가 이루어졌는데 장소는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어요. 우리는 광화문우체국 앞에서 피케팅을 했는데 민족문제연구소도 함께 해주셨죠. 원래는 광화문우체국에서 하기로 했었는데 1시간 전에 서울중앙우체국으로 바꿨다고 해요. 우리가 광화문우체국에 모여 있으니 회의 장소를 바꾼 거 같아요. 결국 참석한 심의위원 12명 중에 발행철회 8명, 발행찬성 3명, 기권 1명으로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이 취소되었습니다.
투쟁에는 승리했지만 노조 입장에서는 잃은 것도 많았습니다. 우정사업본부장이 8월 16일 퇴임하면서 노사간 이미 합의했던 12개 사항에 대한 사인을 해주지 않고 갔거든요. 적지 않은 희생을 통해 얻은 소중한 승리인 만큼, 아무쪼록 우리의 투쟁이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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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2009년 9월에 민족문제연구소에 가입해주셨는데 어떤 계기로 가입하셨나요?

답 : 당시 친일인명사전 발간이 사회적 이슈이기도 했구요. 처음 민족문제연구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조정래의 <한강>에서 임종국 선생님의 이름을 발견하면서였어요. 얼마나 대단한 분이길래 소설에 실명으로 등장할까, 궁금한 마음에 임종국 선생님이 쓴 『친일문학론』도 구해 읽고, 인터넷도 뒤져봤어요. 그런데 그분이 친일연구를 하다가 자기 아버지의 친일 사실을 발견하고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묻자, 친일연구서를 쓴다면서 나를 빼면 그 책은 죽은 책이 된다고 하셨다고 해요. 이런 분을 기리는 단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해서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문 : 원래 역사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답 : 학창시절엔 그다지 역사에 관심은 없었는데, 아이들 키우면서 박물관 같은 데를 자주 갔어요. 박물관에 가서 책도 사주고 그러다 보니 아들이 전북대 사학과에 들어가더라구요. (웃음) 원래 저희 아버지가 역사에 관심이 많으셨는데, 자연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저는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을 보면 좀 그렇더라구요.

문 : 요즘 시대 화두가 적폐청산인데 앞으로 우정사업본부 노조의 계획은 어떤 것이 있나요?

답 : 제가 지난번에 민족문제연구소 여름수련회에 참가하면서 아산 현충사 표준영정 문제에 대해 처음 알게 됐어요. 이런 문제도 공무원들이 제대로 협조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인데요. 문화재청 출신인 국가공무원노조 안정섭 위원장과 얘기를 나눠보니 표준영정 문제도 담당이 문화체육부와 문화재청으로 나눠져 있어서 사정이 복잡하더라구요. 그래도 해당 부처 일이니 한번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해서, 얼마 전에 안정섭 위원장이 저와 함께 민족문제연구소를 방문했습니다. 그 결과 이번 8월 15일 국가공무원노조에서 친일청산과 표준영정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논평을 발표했습니다.

문 : 노조측에서 친일청산운동에 적극 나서 주시니 저희로선 큰 힘이 되네요.

답 : 사실 지금까지 노동조합운동을 하면서 노조가 사회적 이슈에 적극 동참해야할 필요성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흔히 노조들이 처우개선이나 연금문제 같이 자기 문제에만 매몰될 때가 많은데요. 그럴 경우 국민들에게 도와달라고 해도 통하지가 않거든요. 저희가 작년부터 계속 얘기해온 것이 우리 노동조합도 뭔가 사회적인 이슈에 참여하고 국민들이 호응할 수 있는 일에 함께 나서야 우리들이 우리의 문제를 풀어갈 때 국민들에게 부탁도 할 수 있는 거라는 거예요. 이번 박정희 기념 우표 발행 취소 운동을 하면서도 느낀 것이 우리 노동조합의 힘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민족문제연구소와 같은 시민단체와 연대하고, 국회의원실, 언론과 힘을 합친 것이 승리의 원동력이 된 것이지요.

문 : 국가공무원노조는 26개 부‧처‧청의 노조가 모여 있는 곳이잖아요. 연구소가 적폐청산, 친일파 청산 문제를 다룰 때 대개 첫 번째 부딪치는 곳이 공무원조직인데, 그런 점에서 앞으로 연구소도 국가공무원노조와 연대할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답 : 네, 표준영정 문제가 두 번째 연대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외교부도 우리 국가공무원노동조합 지부니까 야스쿠니 문제도 다룰 수 있을 거구요. 앞으로 우리 공무원노조도 민족문제연구소와 연대해 친일청산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월, 2017/09/25-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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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령과 폭리로 미군정하 법정에 선 박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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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월 19일 횡령 및 포고령 위반 혐의에 대한 박흥식의 1차공판이 열렸다. <동아일보> 1946.3.20.>

1946년 2월 15일 화신백화점 사장이자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대표이사인 박흥식은 신내영 검사가 지휘하는 검사국에 의해 구속되었다. 그러나 당시 경기도경찰부장으로 있던 장택상의 농간으로 담임검사의 허락도 없이 풀려났다가 이튿날 다시 잡혀왔다. 그는 검사국에 구속된 지 열흘 만인 2월 26일 장물기장죄(贓物寄臧罪)·횡령·사기·포고령 위반 등의 죄명으로 기소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검사의 공소장에 의해 박흥식의 피의사실을 정리해보면 다음 세 가지다.
첫째, 박흥식은 1945년 8월 27일 조선군사령관 고쓰기 요시오 중장로부터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정리기금이란 명목으로 3,150만 원을 받아 식산은행의 차입금, 민규식 외 351명의 주주들에게 주식대금을 지불하고 남은 1,300만 원을 착복하였다.
둘째,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회사가 문을 닫게 되자 강제 징용되어 끌려온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퇴직금과 위로금 문제로 들고 일어났다. 그래서 8월 27일 박흥식이 조선군사령관에게서 노자문제 해결기금과 위로금 명목으로 2천만 원을 받았으나 노동자들에게는 전혀 주지 않고 조선은행과 식산은행 등에 가족, 친척, 회사 임원 명의로 차명 예금하여 이를 은닉하였다.
셋째, 1945년 11월 15일 화신백화점을 개업하면서부터 박흥식은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종업원에게 조선총독부가 배급해준 포목 등 생필품을 전부 매장으로 돌려 매입가의 최고 45배로 판매하여 1946년 2월까지 70만 원의 폭리를 취했다.

 

이 사건의 첫 공판은 3월 19일 오전 10시부터 서울재판소 대법정에서 이천상 판사의 주심 아래 개정되었다. 방청석에는 박흥식 가족과 화신 관계자, 박흥식의 심리광경을 보고자 몰려온 군중들이, 변호사석에는 강병순, 배정현, 백붕제, 김광근이 앉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박흥식은 고동색 두루마기에 회색 바지, 검정운동화, 귀를 덮은 머리에 용수를 쓰고 손목에 고랑을 차고 간수에게 끌리어 법정에 들어섰다.
이천상 재판장이 “피고는 어떠한 뜻으로 일본 군부가 관계하는 조선비행기회사 초대 사장에 취임하였는가”라고 묻자, “당시 총독부와 군사령부에서 강제적으로 시켜 피할 길이 없이 부득이 취임하였을 뿐이며 군부에서 받았다는 돈도 회사에서 당연히 받을 돈이며 이 돈 역시 나 개인을 위해 쓴 일은 없으며 앞으로 이것을 활용해서 과거를 청산하고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대학도 세우고 큰 병원도 설립하고 이외 여러 가지 대사업을 하려고 설계를 세우는 도중에 이런 일을 당하였다”고 유창하게 답변하였다.
제1회 공판에서 시작하여 7차 공판까지 열렸는데 그동안 박흥식이 복역하던 서울형무소 감방에는 전기히터 등 각종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감방이 아니라 별장이나 다름없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변호인단은 담당검사의 병환으로 공판이 연기되자 판사를 찾아가 공판 강행을 요청하거나 박흥식의 건강이 나빠졌다는 이유로 병보석을 강청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일삼아 사회적인 질타를 받기도 하였다.
3월 26일 제6회 공판으로 심리를 전부 마치고 신내영 검사는 “박흥식은 세상이 다 아는 민족반역자이므로 마땅히 극형에 처해도 가할 것이나 그 법적 근거가 아직 없음이 유감이다. 그러나 장물기장, 폭리 등 죄상이 뚜렷하니 징역 3년에 벌금 200만 원을 구형한다”고 준엄하게 논고하였다. 검사의 징역 3년 구형에 대해 사회적으로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박흥식에게 실형 언도가 내릴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천상 판사는 5월 3일 서울지방법원 제4호 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언도하였다. 그는 “미군정하에 있는 본 법정으로서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처단할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고 운을 뗀 후 검사가 제시한 피의사실 세 가지에 대해 모두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49년 반민특위 재판정에서도 박흥식은 전혀 반성함이 없이 모든 친일행위를 조선총독부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한 것이고,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덕택으로 2천 명의 동포가 목숨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고 오히려 큰소리쳤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철저히 망가진 반민특위는 결국 적반하장의 매판자본가 1호에게 무죄판결을 내림으로써 역사정의 실현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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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포 미곡상에서 ‘조선의 백화점왕’으로
박흥식은 1903년 8월 6일 평안남도 용강 지역 토호였던 부친 박제현과 모친 이선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1살 연상의 친형 박창식이 일찍 죽고 아버지도 39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어린 나이에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박흥식은 1915년에 용강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머물며 한학을 배우다가 17세 때 진남포로 나와 진남포상공학교를 다녔으나 중도에 그만두었다.
1919년 2월 박흥식은 진남포 비석리에서 미곡상을 시작했다. 19세 때인 1920년 2월에 평안남도 용강에서 선광당인쇄소를 설립했으며, 1924년 3월 자본금 10만 원의 선광인쇄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1925년 10월부터 1928년 5월까지 면화와 미곡 등 지역물산 매매와 알선을 하는 서선흥산주식회사를 경영하였다. 미곡상을 시작으로 상업활동에 투신한 박흥식은 천부적인 상술과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여 사업에 성공, 용강 지역 최대 지주로 성장하였고 이후 인쇄업과 무역업을 통해 향후 지물업을 시작할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박흥식은 1926년 서울로 올라와 그해 6월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서울 시내의 출판사와 인쇄소를 중심으로 영업하였는데, 인쇄용지를 다량 구입하는 고객에게 금강산 관광과 일본 유명 관광지 여행을 사은품으로 제공하는 판매전략이 기대 이상의 호응을 받아 전국 각지의 수백 군데 거래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인 1927년 지물업의 메이저 사업인 신문용지에 도전하였다. 박흥식은 신문용지를 공급받기 위해 일본에 건너가 굴지의 제지회사와 교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수입선 다변화를 꾀해 스웨덴의 제지회사와 교섭하여 양질의 신문용지를 훨씬 싼 가격에 공급받았다. 더욱이 조선총독부 외사과장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의 알선과 박리다매 전략으로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매일신보 등과 신문용지 전속구매계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1929∼1932년 매년 150만 원을 초과하는 판매액에 2만 원 안팎의 당기순이익을 얻었다. 25만 원의 소자본으로 출발한 선일지물주식회사는 이후 2배로 증자하고 연간 판매고가 500만 원에 이르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1930년대 초반은 1929년 세계대공황의 여파가 차차 가라앉고 서구자본주의경제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고, 일제는 상품시장 확대와 원자재 확보를 위해 만주 침략을 강행한 시기였다.
1920년대를 거치며 조선인들의 문화수준과 소비성향이 한껏 높아졌고, 이 무렵 호경기를 반영하듯이 서울에서도 미쓰코시, 조지아, 미나카이, 히라타 등 4곳의 일본백화점이 경합을 벌이며 성황 중이었다. 박흥식은 오랜 기간 관심을 두고 있던 자본주의의 꽃인 백화점사업에 진출하였다. 1931년 신태화가 경영하던 금은 잡화의 화신상회를 인수하여 자본금 100만원의 화신상회를 설립하였고, 1932년 5월 목조 2층 규모의 화신상회를 콘크리트 3층으로 증개축해 최신식 초대형 종합잡화상으로 탈바꿈시켰다. 하지만 두 달 뒤 바로 옆에 들어선 최남이 경영하는 동아백화점과 2개월간 전쟁 같은 혈투를 치렀다. 박흥식은 혈투 직후 염가양품(廉價良品) 전략 즉, 질 좋은 상품을 싸게 판다는 방침을 천명하고 일본 오사카에 3층 빌딩을 임대하여 그곳에 오사카 구매부를 설치하고 일본 제조업체로부터 각종 상품을 공장가격으로 직수입하였다. 그 덕택에 동아백화점은 물론 일본 백화점보다 훨씬 싼 가격에 물건을 내놓아승리할 수 있었다. 1932년 최남의 동아백화점을 인수해 종로 상권을 평정하였고, 평양에 세워진 평안백화점까지 인수하여 조선인 유일의 백화점 사장이 되었다. 1935년 연초에 화신상회가 화재로 전소하자 화신백화점 신축공사를 추진해 1937년 11월 지하 1층과 지상 6층, 연건평 2,034평, 엘리베이터 4대, 에스컬레이터 2대를 구비한 최신식 화신백화점을 개설하였다.
이로부터 광복 직후까지 화신백화점은 서울의 명물이자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1938년 6월에는 진남포에 3층짜리 화신백화점 진남포지점을 개설하였다.

 

09

 

111937년 11월 새로 신축된 화신백화점. 지하 1층과 지상 6층, 연건평 2,034평, 엘리베이터 4대, 에스컬레이터 2대를 구비한 최신식시설로서 당시 미쓰코시, 조지아 등 일본백화점의 규모를 능가했다. 옆의 도면은 1937년 개장시 화신백화점의 층별 매장 배치도.

 

1934년 박흥식이 백화점사업과 연계해서 야심차게 준비한 것은 연쇄점 방식의 유통업 진출이었다. 당시 4대 일본백화점이 주요 지방도시에 지점을 설치해 현지 중소 상인의 타격이 컸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박흥식은 1934년 6월 연쇄점 모집 공고를 일간신문에 발표하였다.
조선 전역에 걸쳐 1천여 개소의 화신연쇄점을 개설하는 한편, 화신측이 이들 연쇄점에 자금과 상품을 공급하는 등 자금과 판매를 일원화한다는 구상이었다. 또한 지방의 소상인들로 구성된 가맹점의 자금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자금 대신 부동산을 받아 이를 담보로 식산은행에서 자금을 대출받았다. 이 자금으로 상품을 구입해 연쇄점에 공급하며 상품 결제도 현금이 아닌 장기 어음으로 하도록 하고 그 어음을 식산은행에서 할인받아 현금화하려는 것이었다. 1934년 11월 제1기 계획으로 350개의 연쇄점이 개설되었고(1937년 중일전쟁의 여파로 추가 모집을 중단함), 저가 상품 구매를 위해 일본 오사카지점을 신설하는 한편 개별 연쇄점에 대한 원활한 상품공급을 위해 주요 5개 도시에 상품배급소를 설치하였다. 연쇄점 사업이 확대되자 1936년 3월 자본금 200만 원의 화신연쇄점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화신백화점에서 독립시켰다.
1939년 시점에서 박흥식은 화신백화점을 필두로 한 6개의 화신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자본금 25만 원의 선일지물주식회사(용지도매업), 100만 원의 화신주식회사(화신백화점), 200만 원의 대동흥업주식회사(부동산), 200만 원의 화신연쇄업주식회사, 270만 원의 화신무역주식회사, 50만 원의 제주도흥업(부동산, 취체역 사장은 박준석)이 바로 그것이다. 1926년 상경하여 자본금 25만 원으로 시작한 사업을 13년이 채 되지 않아 총 850여 만 원의 재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박흥식은 ‘조선의 백화점왕’으로 불렸고 1938년 호별세 25,000원을 납부하여 서울 조선인 중 최대 납세자에 올랐다. 이와 더불어 그해 말 박흥식은 조선인 기업인 경성방직과 조선생명보험, 일본인 기업인 조선석유와 북선제지화학공업 등 8개 사의 중역도 겸직하였다.
조선비행기공업 설립 주도
1941년 일제는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됐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 시행으로 시작된 전시통제체제는 더욱 강화되어 1941년 ‘생활필수물자통제령’과 ‘물자통제령’ 1942년 식량관리법 등으로 철저한 가격통제와 생활필수품 배급통제가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1941년 9월 박흥식은 화신무역주식회사, 화신연쇄점주식회사, 선일지물주식회사를 합병해서 자본금 500만 원의 화신상사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대처해나갔다. 이 무렵 주력기업인 화신백화점은 일본산 수입의존도가 50% 정도여서 경성의 4대 일본 백화점에 비해 유리하여 미나카이, 히라다 두 백화점을 앞지르고 미쓰코시, 조지아 두 백화점과 대등한 영업실적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 수입품 비중이 80%를 차지한 화신연쇄점으로서는 총체적 위기였다. 앞서 말한 각종 경제통제령이 발동되고 물자공급이 중단되면서 1년 사이 350개의 연쇄점은 250개로 감축되었고 1943년에 거의 문을 닫게 되었다.
박흥식은 1942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산업경제인 대표자대회에서 일본 천황을 ‘배알’한 후 비행기 제작에 뛰어들 결심을 하였다.1) 1944년 7월 12일 박흥식의 주도로 조선비행기공업 설립을 위한 제1회 발기인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이하라 준지 참모장을 비롯해 군부 7명, 총독부 7명 등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설립 취의서를 확정하고 이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하였고 7월 17일 조선총독에게서 설립인가를 받았다. 설립 취의서에서 회사 설립 목적과 사업개요, 설립 이유, 예산 및 자금조달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첫째 회사 설립 목적과 사업개요는 조선군의 지도감독에 따라 군용비행기 제조를 목적으로 한다. 1차 사업년도에 제조에 필요한 건설 및 부품 가공설비를 시설하고 2차 사업년도부터 일관작업을 추진해 월 60기 이상 제작하고, 3차 사업년도부터 월 120기 이상 생산한다. 둘째 회사 설립 이유는 세계정세의 가열찬 전국(戰局)을 고려해서 비행기의 대량생산이 초미의 급무이며 국가적 요청이다. 셋째 자금은 자본금의 반액 납입과 일부를 전시금융금고 차입금으로 충당해서 시설하고 사업 확장에 따라 2회 자본금 납입을 통해 조달한다.”


  1. 흔히 반민특위 박흥식 공판자료에 의거해 박흥식이 비행기 제작에 참여한 이유가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의 끈질긴 회유와 종용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면도 작용했겠지만 극심한 전시통제기에 이르러 유통업의 전망이 어두워지자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고자 하는 박흥식의 야망이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다음은 7월 17일 조선비행기공업의 설립인가를 받은 후 박흥식 설립위원장이 앞으로의 포부를 밝힌 글인데, 비행기 제작 참여 계기와 그 과정을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재작년 12월 나는 산업경제계 대표자의 1인으로서 황공하옵게도 천황폐하께 배알의 분부를 받자옵는 파격의 광영을 입었는데 이때 나는 산업경제인으로서의 책무의 중대함을 깨닫고 국가를 위한 직접 봉공의 길은 없을까 하고 생각한 결과, 비행기 증산을 위하여 정신(挺身)하기를 결의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결의와 계획을 총독부 및 군부에 피력하였던바 파격적인 지원 아래 직간접으로 편달을 받고 또 재계 각위의 절대한 원조에 의하여 예의 본사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매일신보> 1944.8.19. 2면)

 

1944년 9월 임시발기인총회를 열어 총 자본금 5천만 원 중 제1회 납입자본금 2,500만 원의 출자관계를 결정, 주식총수 100만주 가운데 85만주는 발기인에게 배당하고 나머지는 조선금융단에 의뢰해 전국에서 공모하기로 하였다.
1944년 10월 조선비행기공업이 정식 설립하여 박흥식이 사장에 취임하였고, 12월에는 일본육군대신으로부터 군수회사로 지정받았다. 설립 직후 조선비행기공업의 출자구성을 보면, 법인주주로는 전시금융금고(지분율 17%) 조선식산은행(17%) 동양척식(16%) 화신주식회사(15만주, 15%) 등이고 발기인 주주 중 조선인으로는 박흥식(2만주, 지분율 2%) 박중양(0.1%) 장직상(0.3%) 한상룡(0.3%) 민규식(0.3%) 김연수(0.5%) 박춘금(1%) 백낙승(2%)이다. 박흥식과 화신주식회사는 총 100만주 중에 17만주와 17%의 지분율이고 금액으로는 400만 원으로 조선인 주주 중에 압도적 격차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비행기공업에서 만들고자 한 비행기는 ‘キ79丙’ 기종의 목철(木鐵)혼합기였다. ‘キ79丙’ 고등연습기는 만주비행기제조가 생산한 전투기 기종으로 1939년 노몬한 전투에 참가한 79식 전투기를 고등연습기로 개조한 것이다.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의 지도하에 이 기종을 생산하기로 결정하고 만주비행기제조와 기술협약을 맺고 비행기 생산자재를 수입하였다. 이와 별도로 박흥식은 10월 하순 기술진을 초빙하고 공작기계를 마련하기 위해 도쿄와 상하이를 찾아갔다. 도쿄에서는 중앙당국과 선진 비행기공장 임원들과 교섭한 결과 군수성 칙임기사 하타에 외 60여 명의 기술진을 확보하였다. 이어서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주둔 노보리부대와 교섭하여 비행기 부품 제작에 필요한 공작기계류 550대를 입수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조선직물과 동양방적의 안양공장 및 인근 토지 10만 평을 매수해 정비와 조립공장, 격납고와 비행장을 순차적으로 건설토록 하였다. 또한 기술자 양성을 위해 박흥식이 이사장으로 있던 광신상업학교를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전환해서 항공과와 기계과 두 학급 240명을 선발하여 기술교육에 힘썼다. 박흥식을 비롯한 조선비행기공업 임원들의 노력으로 1945년 5월 당시 1호기의 주익(主翼) 제작을 마치고 8월에 시험비행이 성공하였다. 이어서 제2·3호기의 부분품 제작도 9월말에 완료할 예정으로 안양공장의 비행기 양산체제가 완성될 즈음 일제 패망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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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キ79’ 고등연습기의 하나. 만주비행기제조(주)가 97식 전투기를 디그레이드하여 고등 연습기로 제작한 것이다. 박흥식의 조선비행기공업(주)도 이와 동일한 기종의 비행기를 생산키로 하였다.

 

정경유착과 그 귀결로서의 전쟁협력

박흥식의 성공 신화 이면에는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 곧 제국주의 권력과의 추악한 정경유착이 자리한다. 1926년 상경하여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차리고 신문용지의 거래처를 확보할 때 조선총독부 관료의 개입으로 가능했고, 1930년대에 들어와 화신백화점과 화신연쇄점의 설립자금과 운영자금을 국책은행이었던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으로부터 손쉽게 대출받았다. 사업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조선총독이나 총독부 관리와의 비밀 회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1935년 연초 대목 때 화신백화점이 화재로 전소되자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던 우가키 총독을 만나 구 종로경찰서 자리를 빌려 임시매장을 차리는 것을 허락받아 화신백화점의 영업 손실을 최소화했다는 일화는 총독부와의 유착관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통제기에 들어서자 박흥식은 관변단체, 친일단체 간부로서 활동하고, 전쟁협력을 위한 각종 강연과 기고, 국방헌금 헌납 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표적인 관변단체·친일단체 활동을 살펴보면 사상범의 전향업무를 담당한 경성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1937), 총독부 시국대책조사회 위원(1938),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전쟁협력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겸 이사(1938), 경성부 지원병후원회 이사(1939), 영국 타도를 목적으로 조직된 배영동지회 상담역(1939), 일제의 대표적인 경제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1941),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확대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1941),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겸 상무이사(1941) 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 연성위원회 위원 겸 국민총력 경기도연맹 참여(1943) 그리고 패망 직전인 1945년 2월 미영격멸, 성전필승을 내건 대화동맹 심의원으로 활동했고 그해 6월 전쟁협력과 황도주의 확산을 목적으로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 위원을 맡았다.
이와 함께 막대한 자금을 직접 국방헌금으로 헌납했을 뿐 아니라 국방헌금을 독려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37년 7월 노구교사건이 일어나자 종로경찰서에 5,000원을 냈고, 9월에는 애국경기호헌납기성회의 집행위원을 맡았다. 1939년 종로경찰서 신축 기성회비로 5만 원을 기부했다. 1941년 8월 임전대책협력회가 주관한 채권가두유격대에 참여하여 일반인에게 국방채권을 강매하였다. 그해 12월 화신주식회사와 화신상사의 종업원에게 국방헌금 3만 원을 갹출하여 종로경찰서에 헌납하였다. 1943년 7월 민규식 김연수와 함께 청소년들의 군사훈련을 위해 쓸 연성비 5만 원씩을 국민총력조선연맹에 헌납했다.
또한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전시통제시책에 순응하며, 징병 징용을 독려하는 강연과 연설, 기고를 하였다. 「대동아전과 우리의 결의-광명의 천지를 향하여」(<조광> 1942.2), 미나미 총독의 이임에 즈음한 「영원히 못 잊을 자부(慈父)」(<매일신보> 1942.5.30), 1942년 12월 일본산업경제간담회에 조선인 대표로 참석하여 천황을 만나고 그 감격을 피력한 「배알의 광명의 감읍」(<매일신보> 1942.12.16)과 「배알 1주년-지성으로 봉공」(<매일신보> 1943.12.17) 등 다수의 친일 논설과 담화를 발표하였다.

해방 후 세 번의 구속, 그리고 사후의 역사적 심판

해방이 되자 박흥식은 1946년 12월 화신백화점, 흥한피복주식회사, 화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취체역에 취임하였다. 1950년 화신산업주식회사 사장, 재판법인 흥한재단 이사장, 1953년 흥한방직주식회사 회장, 1959년 신선무역주식회사 회장을 지냈다. 1962년 경제개발계획 1차년도 때 외자 도입을 통해 흥한화학섬유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전력난과 불경기로 큰 적자를 보고 2년 만에 손을 뗐다. 1980년 10월 화신과 그 계열사들이 300억 원의 연쇄부도로 파산하면서 박흥식은 재계를 떠났다. 1994년 5월 10일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해방 후 박흥식은 미군정, 이승만정권, 박정희정권 등 각 시기에 걸쳐 한 차례씩 모두 세 차례나 구속되었지만 그때마다 용케 빠져나왔다. 첫 번째는 앞서 말했듯이 1946년 2월 횡령과 폭리로 미군정하 서울지방법원에서 기소되어 징역 3년과 벌금 200만 원이 구형되었으나 무죄선고를 받았다. 두 번째는 1949년 1월 반민법 제4조 7항(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 경영한 자)·제7조(범죄자 옹호·도피 협조자) 위반 혐의로 반민특위 제1호로 체포되었으나 9월 26일 그는 ‘공민권 정지 2년’이라는 가벼운 구형에 이어 당일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세 번째는 1961년 5·16군사쿠데타 직후 국가재건회의에 의해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그해 7월 석방되었다.
여러 차례 구속과 무죄판결을 반복하며 정경유착과 친일의 죄를 무난히 넘겨온 그였지만 2009년은 절대 피할수 없는 역사적인 심판의 해였다. 정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선총독부의 내선일체 황민화정책과 전쟁수행에 적극 협력한” 죄목(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 2조 11호 13호 14호 17호 18호 각호 위반)으로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하였고, 그해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친일행적이 소상히 실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제강점기 최고의 성공신화로 포장되어온 화신기업의 성장은 제국주의 권력과의 유착과 굴종의 대가였고 일제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종속된 매판자본이었음이 역사자료에 의해 남김없이 드러났다. 역사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경구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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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었던 박흥식동상. 이 동상은 박흥식 사후인 1996년 광신재단 이사장으로 있던 그의 아들이 세운 것이다. 2001년 10월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서울관악동작지부 회원들이 광신고등학교 정문에서 박흥식 동상 철거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그해 연말에 자진 철거되었다.

∷ 박광종 선임연구원

월, 2017/09/2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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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 ‘혈서 군관지원’

 

9월 6일 서울중앙지방법원 317호 법정, 10시로 예정된 재판이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선고 당일인데 정미홍씨는 10시가 넘어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무죄를 확신하는 것인지 마음이 매우 느긋한가 봅니다. 반면 연구소 법무책임자인 저는 매우 초조했습니다. 박정희 혈서기사와 관련된 형사재판은 이번이 처음이기에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싸운 만큼 패소에 대한 두려움도 컸습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정미홍씨가 법정에 들어왔고 뒤따라 수십 명의 어르신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분들은 태극기와 성조기가 교차되어있는 배지를 옷깃에 달고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법정에 자리 잡았습니다. 의자에 앉지 못한 분들은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순서가 후반부에 있는지 다른 여러 재판이 먼저 진행되었습니다. 한참 후에 시작된 재판, 정미홍씨가 선고를 받기 위해 피고인석에 섰습니다. 재판부는 판결을 내린 경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공소장의 내용, 재판의 쟁점사항, 원고와 피고 간 주장의 충돌에 대해 차분한 목소리로 정리했습니다. 마치 원고와 피고 그리고 방청객의 동의를 구하기 위한 설득 과정 같았습니다. 이 재판의 쟁점은 ‘민족문제연구소의 박정희 혈서기사 조작’ 여부였습니다. 만약 조작이 있었다면 정미홍 씨가 주장한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박정희 혈서기사조작’ 이란 트위터는 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조작이 없었다면 정미홍 씨는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이 되기 때문에 유죄가 인정될 것이었습니다.

정미홍 씨는 연구소가 박정희 혈서기사를 발굴했다며 언론에 만주신문을 공개한 2009년 이전 5년 동안 만주일보에 해당기사가 있다고 공식적으로 수차례 밝혔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만주일보가 1939년 당시 폐간상태였던 것으로 확인되자 만주신문으로 말을 바꾸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바꾼 사실이 조작의 증거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재판부도 이 부분을 쟁점으로 여겼습니다. 연구소가 2005년부터 2009년까지 공식적으로 만주일보에 박정희 혈서기사가 실려 있다고 말한 증거를 정미홍 씨가 제출한다면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증거는 없었습니다. 연구소는 만주신문에서 해당 기사를 발굴하기 전까지 어떤 신문에 박정희 혈서기사가 실렸다고 특정한 사실이 없었습니다. 증언만 있을 뿐 1차사료인 혈서기사를 본 적이 없으니 특정할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5년 동안 만주일보라고 주장했다는 말이 어디에서 나온것인지 출처가 궁금할 뿐입니다. 하지만 연구소는 만주일보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5년 동안’의 시작이 되는 2005년에 연구소가 공식적으로 발간한 출판도서에서 증거를 발견했고 이를 재판부에 제출했습니다.
재판부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5년간 만주일보를 근거로 박정희 혈서설을 주장해왔다는 증거는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정미홍 씨에게 “전직 아나운서로 대중적인 영향력이 큰 사람이기에 명예훼손 글을 무분별하게 실은 경우 통상에 비해 높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서 “다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용한 링크글의 논지가 분명하지 않고 전파가능성도 낮은 점을 감안해 벌금 30만원에 처한다.”고 판결했습니다.
벌금형이 내려지자 정미홍 씨는 판사를 향해 “판결을 인정할 수 없으며 역사왜곡을 바로 잡는 활동을 계속 하겠다. 이 법정에도 태극기가 걸려 있는데 잘못 걸려 있다. 제대로 다시 걸어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방청객도 술렁였습니다. 몇몇이 일어나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경위들이 나와 제지했고 그분들은 이내 복도에 나가 재판부에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 소리가 법정 안에까지 들렸습니다.
정미홍 씨는 기자 인터뷰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계속 지적하고 있기에 저에 대해 인신공격 하는 것”이라며 “판사가 링크글 내용이 불분명하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에 무식하기 때문으로, 역사공부를 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즉각 항소 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번 재판은 박정희 혈서기사와 관련된 형사재판이었습니다. 연구소는 이미 민사재판에서 최종 승소하였습니다. 지난 1월 대법원은 박정희 혈서가 날조라고 주장한 강용석 씨에게 500만원, 정미홍 씨에게 300만원, 일베회원 강모씨에게 300만원의 손해배상을 명령했습니다. 이 중 강용석 씨와 정미홍 씨는 해당 금액을 연구소에 보내왔고 일베회원 강모씨는 벌금을 연체하여 이자가 계속 불어나고 있는 상태입니다.

∷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월, 2017/09/25-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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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구성]

• 쉽고 명료한 전시콘텐츠 구성
전시 콘텐츠 가공과 스토리텔링, 공간구성, 미디어선택, 전시디자인을 통해 쉽고 명료한 전달이 가능하도록 구성, 차별화된 전시연출 전략 실현
• 입체적 전시연출
자료의 일방적 제시와 평면적 나열을 지양하고 관객과 능동적이고 쌍방향적 정보소통 추구
평면적, 건조한 전시유형을 벗어나 관객의 감성과 동시대적 문화수준에 호응하는 다양하고 입체적이며 밀도 높은 전시연출 지향
• 다양한 전시 매체 활용
회화, 드로잉, 판화, 조각, 부조, 사진 등 전통적 조형예술 장르 동원
동영상, 멀티미디어, 설치미술 등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의 풍부한 성과와 전시디자인 기법을 선택 활용

 

[박물관 프로그램]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유물의 수집 및 보존, 전시라는 전통적인 박물관의 기능에 한정되지 않는다.
강좌·체험활동, 찾아가는 박물관, 문화공연 등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 교육 강좌의 상설화
일반 시민 :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강좌를 개설하여 문화 공간으로의 역할을 수행
청소년, 어린이 : 인물과 사건 그리고 역사적인 ‘터’와 관련하여 쉽고 흥미롭게 구성하여 관심 유발
전문가 양성 : 박물관 안내해설사, 지역사해설사 등 양성 교육
• 역사답사의 정례화
식민지역사박물관 인근 역사 유적들과 연계한 역사문화관광 벨트 탐방 프로그램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한 답사코스 개발
해외 독립운동유적지 답사 확대
일본, 유럽 등 외국 방문객 유치 확대
• 박물관 연계 프로그램 활성화
역사 관련 박물관 탐방과 각 박물관의 특징을 비교
3·1절, 광복절 등 기념일에 개최하는 기획전시 투어
전국의 작은 박물관, 행동하는 박물관과 연대 사업 추진
세계 인권박물관과 연계 프로그램 운영
• 찾아가는 박물관 운영
국내외 순회전시 지속
문화소외 지역 이동 전시 등 움직이는 박물관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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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식민지]
• 세계 식민지 분포 /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
• 제국의 렌즈, 조작된 역사 • ‘조선병합’ 시나리오
• 망국전야 : 열도의 침략자와 조선의 레지스탕스

[조선총독부와 식민자들]
• 조선총독 • 경찰 : 헌병경찰 / 보통경찰 / 일상의 지배
• 일본군 : 조선주둔 일본군 / 만주출동 / 조선의 병참동원
• 경성-서울에 새겨진 식민지의 흔적 : 남산 일대, 용산 일대
• 출세의 길 : 관료의 꽃 군수
• 식민지를 지배한 사람들 : 재조일본인
• 친일파군상 : 매국형-관료형-전쟁협력형

[식민지 일상]
• 일상을 지배한 차별 • 일기로 본 식민지의 일상
• 유행으로 본 식민지 근대 • 거대한 감옥 –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 일상을 지배한 일제 잔재

[전쟁과 식민지]
• 전시체제기 식민지 : 전시 생활과 동원 체제
• 황국신민화-내선일체의 현실
• 전쟁과 아동, 전쟁과 여성

• 끌려간 사람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의 삶 조명
• 버려진 사람들, 떠다니는 삶 : 시베리아 억류자, 사할린 동포, 재일조선인 등
독립의 외침
•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과 무장 투쟁 • 3·1운동과 임시정부
• 민중운동의 분출 : 농민 / 노동자 / 청년 / 여성
• 의열투쟁 • 해외 민족해방운동

[한국 과거 청산 운동사 : 반민특위부터 친일인명사전 편찬까지]
• 해방과 귀환 • 1949년 반민특위 와해 : 친일청산의 좌절
•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무엇을 해결하고 무엇을 남겼나
•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 2000년대 국가 차원의 과거사 진상규명
•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편찬

[한일 과거사 청산을 위한 민중연대사]
• 20세기전반 : 반제국주의, 반전 평화 연대운동의 경험
• 20세기후반 : 아시아침략전쟁 책임 추궁을 위한 연대의 힘
• 21세기초반 : 식민지주의 극복을 위한 한일 시민연대 활동
• 분야별 연대운동 : 강제동원 / 위안부 / 교과서 / 야스쿠니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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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치의 길을 걷다, 남산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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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길에서 독립을 꿈꾸다, 용산권역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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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전쟁의 길에서 민족의 수난을 보다, 용산권역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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