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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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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admin | 토, 2021/08/28- 00:30

[후원회원 마당]

 

식민지역사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김선태

효창공원에서 백범묘소, 삼의사 묘소와 임정요원 묘소까지 둘러보면서 참배도 하고나자, 이제 우리 일행을 식민지역사박물관으로 안내하였다. 우리 역사의 아픈 매듭이자 가장 슬픈 역사가 되어야 할 일제침탈의 역사를 살피고 그 아픔을 새겨 민족의 앞날을 밝히자는 뜻의 박물관이지만, 참으로 슬픈 ‘식민지’라는 이름이 미리 그 아픔을 전달하고 있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아가는 길은 대로변도 아닌 이곳 청파동 골목길 중에서 중앙이라 할 숙대앞길에서 다시 골목길로 들어서서도 한참이나 더 들어가야 하였다. 슬픈 이름의 박물관이 위치까지도 ‘이건 아닌데…’하는 마음이 절로 들게 만들었다. 멀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한 ‘식민지역사박물관’이란 간판을 보고 반가운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입구에 들어서는데 눈길을 사로잡은 동판에는 이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데 도움을 주신분들의 이름을 새긴 것으로 모두 10개 안팎이나 걸려서 여기 이름을 올리지 못한 나에게 ‘부끄러워하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아서 위압감을 주었다. 박물관으로 들어서기 전에 입구 한 켠에 ‘반민특위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전시되어 있었다. 너무 뜻밖이어서 의아하였는데, 본래 있던 자리에 새로 호텔건물을 짓고 있는데, 그래도 다행스럽게 공사장에서 연락해주어서 여기에라도 보관하고 있는 것이라며, 호텔이 완성되면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싶지만 과연 받아줄 것인지 의문이란다. 호텔이라면 외국 손님들이 드나들게 되고 거기엔 일본사람들도 있을 텐데 호텔 측에서 리스크를 안고 이 표지석을 세워주려 할는지 걱정이란다. 국가에서 지정하여 세우면 모르지만 학술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그럴만한 힘이 없어서 걱정이란다. “보훈처나 문광부 같은 정부기관에서 추진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학진 님의 간단한 박물관 소개와 민족문제연구소 직원들의 소개를 한 다음에 “박물관이 협소하여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함께 관람이 어려우므로 반으로 나누어서 일부는 먼저 관람을 하시고 절반은 여기에서 잠시 대기하고 계시다가 관람을 하시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관람을 하실 분은 손들어 주세요.” 하
여 먼저 출발하였다. 나는 손자를 독촉하여 얼른 우리도 따라 가자고 하여 첫 해설사를 따라 나섰다. 얼른 마치고 국립중앙박물관의 석조물 정원에 있는 <홍제동 5층 석탑>을 찾아가서 사진도 찍고 자료를 수집하여 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관람 순서에 따라 중점적으로 해설해주셨지만 40분 정도면 자세한 해설의 1/3 수준이므로 무척 바쁘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순서에 따라 1부 일제는 왜 한반도를 침략했을까라는 전시장에서는 제국들의 전쟁터가 된 한반도라는 패널을 중심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상황 들을 해설해주는데, 러일전쟁시에 독도가 중요 거점이 되어서 러시아 극동함대를 일본이 격파하였다는 전황을 이야기 해주었다. 재작년 11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모집하는 독도체험관 해설사 교육을 받고 울릉도와 독도를 답사할때에 일본이 러일전쟁 시에 울릉도에 설치하였던, 4개의 일본해군 관측소 <석포전망대 외3>가 있어서 러시아 함대의 움직임을 몰래 관측하였다는 곳들을 돌아보았는데, 독도에도 이런 관측소를 마련하여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들었다. 이어서 조선총독부에 관한 자료들이 있었고, 특히 우리 국민을 괴롭힌 새로운 지배자, 조선총독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음 코너에서는 <총칼로 누르고 동화와 차별로 어르다>라는 주제로 어린이들의 놀이판으로 만든 조선 침략의 길, 그리고 일본화하기 위한 놀이판 등까지 수집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 코너 <빼앗긴 들, 황폐한 삶>에서는 일본의 수탈을 알리는 여러 가지 자료들이 있어서 한참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1평으로 체험하는 식민지 : 학교 · 감옥’은 독립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지하에 있는 고문과 형틀 등을 전시한 곳에서 보았던 작은 형틀(1인감옥 ; 서 있게 만든 것과 쭈그려 앉게 만든 것)을 생각케 만들었다.
2부 일제의 침략전쟁,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전시장에서는 맨 먼저 우리 민족을 배반한 대표적인 친일언론의 민낯을 보여주는 코너로 <‘천황’을 위해 기쁘게 목숨을 바쳐라>라는 주제로 그들의 친일행적을 전시하여 두었다. 다음으로 <숟가락 하나도 남김없이 총동원하라>는 코너에서는 일본이 전쟁 물자를 대기 위해 밥그릇까지 모두 빼앗아 갔던 이야기이다. 이때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놋그릇들과 먹을 식량을 지붕 위에 멍석을 깔고 용머리를 들추고 지붕의 이엉을 파내고서 그곳에 쌀과 그릇들을 감추시었다는 지혜로운 분이셨다. 그리하여 그릇들을 지키셨고, 10여 명이나 되는 가족들이 굶주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단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또 하나 독립기념관을 개관할 때에 내가 <공출보국(供出報國)>이라는 글씨가 써진 사기 밥그릇을 기증하였었는데, 갑자기 그 그릇 생각이 났다. 놋쇠 밥그릇을 빼앗아 가고 대신에 밥을 담아 먹으라고 준 그릇이었다니 말이다. 다음 <청춘만장 앞세우고 끌려간 사람들>과 <돌아오지 못한 영혼, 남겨진 사람들>에서는 일본군으로 징병되어 끌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시되어 있는데, 이때 “살아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아 입혀 주었던 옷에 새겨진 글씨 무운장구(武運長久)와 천인침(천사람이 한 뜸씩 바느질을 한 허리띠)을 만들어서 꼭 살아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아 보냈지만, 수없이 사라져 버린 우리 젊은이들의 모습과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3부 한 시대의 다른 삶 – 친일과 항일라는 전시장에서는 이 코너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웹툰 책의 제목과 같은 것이어서 일단은 대충 둘러보며, 같은 시대에 부끄러운 친일을 하고 살아생전 호사를 누리던 친일파들과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구국의 투사들의 삶을 비교하고 있다. <망국의 한 독립의 꿈>에서는 독립운동을 한 의사, 열사, 지사들의 삶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누린 그들>에서는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사람들의 친일행각을 그리고 그들의 벼슬, 자손들의 대한민국에서의 출세와 권세를 부리며 살았던 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천황’의 신민으로 거듭난 그들>은 친일 행각으로 벼슬을 한 사람들과 작위를 받은 사람들을 보여주며 마지막으로 <고백과 성찰을 위한 기록, 친일인명사전> 편에서는 인명사전의 기초 작업을 하셨던 임종국 선생 사진과 그 육필원고가 전시되어 있어서 그 연구자의 엄청난 노력에 머리가 숙여졌다.
4부 과거를 이겨내는 힘,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전시장에서는 <반민특위의 좌절, 친일파의 귀환>에서 친일파들의 재등장의 역사를 보여주며, 입구에 있던 반민특위의 터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분단과 독재, 지연된 역사정의>에서는 친일정권의 40년 집권의 흔적과 그런 사이 우리 민족정신의 망가짐을 일깨우고 있었고, <공감과 연대의 힘> <나는 싸우고 있다> 등에서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일깨우고 있다. 중간에 영상으로 보여주는 <내가 역사의 증인이다>는 수많은 영상을 교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가장 관심이 가는 것들은 <살아있는데 야스쿠니에 합사된 강제동원피해자, 故 김희종 할아버지>와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이희자 “김학순 할머니 이야기”> 그리고 일제와 끝까지 싸우고 계시는 <일본제철 재판 원고 故 김규수 할아버지>, <야하타 제철소 노무동원 주석봉> 등이 눈길을 끌었다, 물론 영상을 골라서 볼 수는 없었고, 시간에 쫓겨 다 보고 있을 시간도 없어서 차분하게 하루쯤 잡아서 보아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장손 윤재가 유난히 관심을 가지고 해설을 열심히 들어 주어서 고맙고 감사하였다.

※ 6월 후원회원 초대의 날 참석 후기로 김선태 회원의 네이버 블로그 ‘70대 수퍼맨의 아름다운 노년’에 실린글이다. https://blog.naver.com/ksuntae/222408001759 김선태 회원은 78세로 이날 손주와 참석했다. 디지털문학 전자출판사를 운영했고 노년유니온 위원장, 국가인권위원회 노인인권지킴이 등을 역임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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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제13회 강만길연구지원금 수여식 개최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이 주관하는 제13회 강만길연구지원금 수여식이 10월 16일 금요일 오후 7시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열렸다. 강만길연구지원금은 신진 학자들의 도전적 탐구정신을 격려하
고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2007년 제정되었다.
수여식은 함세웅 이사장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지수걸 공주대 교수의 수령자 발표, 지원금 수여, 조광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의 축사, 박윤재 경희대 교수의 격려사, 수령자 조수룡 박사의 소감연설 순으로 진행됐다. 이번 심사대상은 2018년 8월과 2019년 2월에 수여된 21편의 한국근현대사 관련 박사학위
논문으로 3월 14일 예비심사를 거쳐 4월 23일 심사위원회에서 조수룡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의 「전후 북한의 사회주의 이행과 ‘자력갱생’ 경제의 형성」이 최종 선정되었다. 심사위원장인 지수걸 공주대 교수를 비롯하여 이태훈 연세대 교수, 정용욱 서울대 교수가 심사위원으로, 김윤희 전주대 교수, 이상록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정용서 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학예실장, 조형열 동아대 교수가 예비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심사위원회는, 조수룡 박사의 「전후 북한의 사회주의 이행과 ‘자력갱생’ 경제의 형성」이 정치사, 경제사, 국제관계사를 넘나들며 1950년대 북한의 전후복구 및 사회주의 이행 전략이
‘자력갱생’ 경제로 귀결되는 과정을 밝혀내어 북한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그 선정이유를 밝혔다. 특히 러시아의 방대한 북소관계 자료를 전면적으로 분석하여 북한사회의 내적 발전과정을 객관화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정치체제의 변화과정을 설명한 대목은 이 논문의 장점을 가장 잘 보여준 지점이라고 평가했다.

• 김혜영 선임연구원

수, 2020/11/1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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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가슴 뜨거워지는 한순간이 중요하다’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 개발자들

인터뷰 김수빈 회원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의 개발자인 고용진(왼쪽)과 안겨레(오른쪽)

 

100년 전, 독립운동에 뛰어든 청년들은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들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목표도 가족을 지켜 내겠다는 책임감도 제국주의와 반민족행위자를 몰아내고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사명감도 봉건적 속박에서 억압받는 성을 해방하겠다는 처절함도 있었겠지만, 이런 생각들은 모두 저마다 ‘가슴 뜨거워지는 한 순간’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로부터 100년 후,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의 가슴엔 과연 어떤 ‘한순간’이자리 잡고 있을까? 그 뜨거움의 원천은 각기 다르겠지만, 그 한순간을 만났고, 이에 두려움도 무릅쓰고 한 발짝 내디딘 청년들이 있다.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을 개발한 고용성 개발자와 안겨레 개발자가 바로 그들이다. 10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 회의실에서 ‘난세의 영웅’ 개발자 두 분과의 인터뷰가 진행됐다.

문: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겨레 : 안녕하세요, 한림대 법학과 재학 중인 안겨레입니다. 한림대학교 내 창업교육센터에서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 게임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고용성 : 안녕하세요, 한림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고용성입니다. ‘난세의 영웅’ 개발과 저희 회사 경영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문 :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은 어떤 게임인가요?
안겨레 : ‘난세의 영웅’은 선사시대부터 건국 이후까지의 역사를 다룬 한국사 RPG입니다. 주인공은 3명이고, 시대가 진행될수록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저희 게임의 주요 콘텐츠 중에 하나가 캐릭터가 돌아다니며 NPC에게 말을 거는 방식인데요, NPC와의 대화를 통해 한국사에 관한 정보와 게임 진행에 관한 정보를 고루 얻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게임 안에 담긴 한국사 정보는 고등학교 이상의 수준입니다. 수능은 물론, 한국사능력검정 1급, 국가직 공무원, 지방직 공무원 등의 시험 출제율 최상위에 뽑힌 것만을 골라서 게임에 넣었습니다. 또한 역사를 다루다 보니 철학적 요소가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 선과 악, 정의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경제란 무엇인가?, 명분이 왜 필요한가? 등등의 요소가 단순히 이 게임을 즐기는 것을 넘어서서 역사를 통해 더 발전된 생각을 할 수 있게끔 유도합니다. 철학적 접근이 어렵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접근성이 높은 게임매체를 통해 조금 더 생생하게 흐름을 잡아주는 것은 어린 학생들에게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문 : 원래부터 게임 개발에 흥미가 많았나요?
고용성 : 저희는 중학교 동창인데요, 그때 같이 재밌게 만들던 게임 제작 프로그램이 군대제대 후 최신화로 업데이트된 걸 알고 다시 흥미가 생겼습니다. 그때 당시엔 역사에 초점을 맞췄다기보단 게임에 조금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안겨레 : 저도 처음에 게임 개발보다 게임 자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래서 게임 개발을 업으로 삼으면 정말 행복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수학을 포기하고 문과에 진학한 상태라 그 생각을 접고 공부에만 매진했죠.

문 : 그렇다면 어떠한 계기로 한국사 게임을 만들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안겨레 : 저는 중국의 ‘삼국지’를 정말 좋아합니다. 삼국지 게임을 하다 흥미가 생겨 <삼국지>를 읽었고, 나중엔 책을 줄줄 외울 정도로 빠져들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오히려 한국사를 삼국지보다 늦게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2013년 제대 후에 노량진에서 검찰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한국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다 보니 흥미가 생기고, 제일 자신 있는 전략과목이 되었습니다. 공부가 정말 힘들었던 어느 날, 예전에 즐겁게 했던 삼국지 게임이 떠올라 ‘한국사 게임도 있겠지’라는 생각에 검색해 보았는데, 단 하나도 없는 상황에 매우 의아했어요. ‘삼국지 게임도 있는데, 우리나라 역사를 다룬 게임은 왜 없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삼국지 게임에 빠져 삼국지를 섭렵하게 됐듯이, 한국사 게임을 통해 사람들이 한국사에 빠지는 세상이 자꾸만 떠올랐어요. 그래서 ‘차라리 내가 만들어보자’라고 생각했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검찰직 시험을 포기하고, 게임 제작에 뛰어들게 되었죠. 

문 : 대전환이 일어났네요. 진로를 변경했을 때, 고민이 많이 되지 않았나요?
안겨레 : 저는 법학과, 용성이는 경영학과다 보니 프로그램에 대한 지식은 뛰어나지 못했어요. 옛날 중학교 때 장난스레 가지고 놀던 게임 툴만으로는 전문적인 게임을 만들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진로를 변경해도 괜찮을까’란 고민과 두려움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문과생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 순간, 마치 시대가 저를 부르는 것 같았고, 제 마음은 마른 낙엽에 옮겨 붙은 불씨처럼 계속 커져만 갔어요. 제가 좋아했던 게임 속 영웅들, 역사 속 위인들은 도전적이고 가치 있는 일을 해냈기 때문에 제가 이 일을 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그 순간에도 제 마음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습니다. 결국 ‘부족한 건 배우면 되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늦었다는 건 없다’는 생각으로 짐을 챙겨 노량진에서 나왔습니다.

문 : 고용성 님은 어떤 계기로 안겨레 님과 함께 게임을 개발하게 되었나요?
고용성 : 겨레가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 저는 창원에서 음식점을 하고 있었어요. 군대에서 만난 선임이 그 음식점 대표여서 제대 후에 음식을 배우고, 그쪽 계열로 창업하려 했는데 겨레가 함께 게임을 개발하자는 연락이 와서 그걸 접고 이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음식점을 하면서 2년간 번 돈을 ‘난세의 영웅’ 초기 창업 자금에 보탰습니다.

문 : 창업 자금이 꽤 들었을 것 같은데요, 자금과 관련된 계획은 어떻게 세웠나요?
고용성 : 원래 개발 자금으로 1년 반 정도는 지출하리라 예상했지만, 하다 보니 너무 어려운 점도 많고, 처음이라 익숙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시간이 더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림대 학교 창업지원센터에서 심사를 거쳐 창업 지원금을 받아 충당해 나갔습니다.

문 : 게임은 두 분이서 만드신 건가요?
안겨레 : 처음 출시했을 때는 저희 둘이서만 만들었고, 후에 리메이크할 때는 전문 프로그래머한테 외주를 맡기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프로그래머도 저희 게임팬이었는데, 리메이크 소식을 듣고 돕겠다는 연락을 주셨어요. 그래서 외주를 맡기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저희만의 엔진이 다 만들어진 상황이라서 자체적인 개발이 가능한 정도까지 끌어올리게 되었습니다.

문 : 한국사가 워낙 방대해서 게임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이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을텐데요.
안겨레 : 네, 사실 시나리오라는 걸 처음 써봤는데 다행히 옛날에 책을 읽은 경험이 많아서 초반에는 잘 풀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요즘 창작의 고통이 심하게 와서 글이 안 써지면 개발업무를 하고, 그러다가 스토리가 떠오르면 그때 다시 글을 쓰는 패턴으로 조절하고 있습니다.


문 : 한국사 자료를 모으는 작업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자료적인 면에서 도움을 주는 조력자가 있었나요?
안겨레 : 한국사 내용은 주로 시험 출제 빈도가 높은 것들로만 구성했습니다. 게임 안에서도 캐릭터들이 대화할 때 나오는 붉은 자막은 한국사 시험 관련, 푸른 자막은 게임 진행 관련정보로 구분해 놓았어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이 게임을 하기 싫어도 공부하기 위해서 찾아오고, 반대로 한국사가 좋아서 왔는데 시험에도 도움이 되니까 한국사 자격증을 따게 되는 등 좋은 영향을 끼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 : 게임 스토리는 어느 시대까지 진행되나요?
안겨레 : 현재 선사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이미 나온 상태고, 올해 12월에 조선 후기편이 나옵니다. 앞으로 개화기,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편까지 더 나올 예정입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2021년까지 완성될 것 같습니다. 한국사 시험 범위 내에서 다루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를 끝으로 마무리를 지으려 합니다.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면서, 한국사 시험에 높은 출제 빈도수 위주로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저희 게임 팬카페의 팬들이 빨리 다음 장을 달라고 하셔서 (웃음) ‘7장’인 조선 후기까지를 후딱 내고, 선사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를 ‘1기’, 개화기부터는 ‘2기’로 나누어 약간의 기간을 두고 출시하려 합니다. 일단 전체를 다 만들고, 구글 스토어 말고도 다른 플랫폼에 출시해야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익이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문 : 난세의 영웅 팬카페의 연령 분포는 어떤가요?
안겨레 : 10대부터 60대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그중 20대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30대, 10대 순입니다.

문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과 ‘난세의 영웅’ 팬들이 함께 답사를 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30대가 가장 많다는 것이 참 다행이네요. 게임 홍보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안겨레 : 사실 저희가 조선 후기편 개발로 인해 지금은 홍보를 거의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번 편이 완성된 후에 홍보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 같은데요, 현재 성남시에서 진행하는 ‘인디크래프트’에 저희가 선정되어서 그쪽에서 저희 홍보를 전담해 주신다는 소식을 들었고, ‘구글피처드’에서도 홍보가 이루어지게 될 것 같습니다. 한림대에서도 홍보 지원을 해주기로 하였고요.

문 : 게임 타이틀을 왜 ‘난세의 영웅’으로 정하게 됐나요?
안겨레 : 제 개인적인 역사인식인데요, 평범한 사람도 난세를 만나면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민족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숨지 않고 뛰쳐나온 경험이 많죠. 그런 위기 순간에 영웅들이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영웅’이란 말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 속에서도 언제든지 영웅이 등장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난세’란 개념은 더 포괄적이죠. 그래서 더 다양한 방면에서영웅이 등장할 수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게임 타이틀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문 : 게임이 다 완성되고 나면, 본인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계획들이 있나요?
안겨레 : 다 완성되고 나면, 일단 게임을 깔끔하게 한 번 더 다듬고 홍보 쪽으로 매진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 후엔 계속 게임업계에 종사하게 될지, 아니면 공부를 좀 더 해서 애플리케이션 등의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나갈지 고민 중입니다.
고용성 : 저는 ‘난세의 영웅’이 완성되고 나면 외전 버전까지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프로그램 쪽으로 진로를 잡고 싶습니다.

문 : 처음에 두 분께서 한국사 게임 개발에 뛰어들었을 때는, 우리 역사콘텐츠의 부재를 절감해서 두 팔 걷어붙였지만, 일이 진행되어갈수록 부담감과 무게감이 가중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난관들을 어떻게 버티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안겨레 : 사실 한국사 게임이 없습니다. 국내 내수시장이 작아 돈이 안됩니다. 중견기업 정도 되면 이런 게임은 안 한다고 해요. 수지 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인데요, 또 두 명만으로 만들기엔 엄청 버거운 내용이라서 저희가 생각하기로는 앞으로도 이런 게임이 나오기는 힘들 거라 예상합니다. 오히려 저희가 독점한 상태가 되어버린 거죠. 게임 플레이어들이 이 게임은 ‘미래형 교과서다’라고 할 만큼 저희 게임이 좋은 반응들을 얻고 있어서 학원가에서도 원장님들이 저희 게임을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도 정말 많이 힘들던 때가 있었는데, 이건 유일하게 저희가 누릴 수 있는 ‘빈집’이고, 그 생각으로 계속해 오다 보니 지금은 조금 숨통이 트인 상황입니다. 큰 난관들을 겪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보란 듯이 멋진 한국사 게임을 출시해 주신 고용성 님, 안겨레 님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인터뷰를 마치고 가장 존경하는 위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회영 선생’이라 말씀하신 안겨레 님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회영 형제를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다는 안겨레 님은 역사에 관심을 갖는데 ‘그 가슴 뜨거워지는 한순간이 중요하다’고 했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 될 공부를 아니 하는가”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사는 나에게 이 두 분이 바로 ‘난세의 영웅’이다. 더불어 한국사 게임 콘텐츠의 부재에 의문을 품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없으면 내가 만들어야지’ 하며 정면 돌파한 두 분의 열정적이고 진심 어린 모습을 보니 나 역시 마음 한켠이 뜨거워졌다. ‘난세 속에 온 국민이 잠재적 위인’이라는 노래 가사도 있듯이, 게임 ‘난세의 영웅’을 통해 우리역사를 기억하고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수, 2020/11/11-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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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중계]

4월혁명 60주년 기념 특별전 –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올해는 4월혁명이 일어난 지 60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근현대사기념관과 민족문제연구소는 4월혁명이 일어난 원인과 전개, 5·16쿠데타로 인한 좌절, 4월혁명이 한국문학과 예술에 미친 영향 등 4월혁명을 다각적으로 재조명하는 전시회를 마련했다. 원래 4월 19일에 개막하려 했으나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9월 25일에야 겨우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전시회 구성은 제1부 우상의 시대 : ‘국부’가 된 독재자, 제2부 구호로 보는 사월혁명, 제3부 사월 그날 이후, 제4부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로 이루어져 있으며 8개의 패널과 이승만 관련 〈대한뉴스〉 영상, 신동엽 시인, 여중생이 죽기 전 남긴 편지 등 4개 영상, 그리고 4월혁명 관련 서적과 당시 격문, 음반, 영화포스터 등 다양한 실물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 자료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소장한 자료가 다수이나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아이엠피터
tv, 연세대학교박물관,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 한상언영화연구소로부터 귀중한 자료의 전시 협찬을 받았다.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전시회 지상중계에서는 각 주제별 전시회 현장 사진과 주요 실물
자료를 중점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대통령에 리승만 박사 부통령에 이기붕 선생을 추대하며> 자유당, 1956.4. 근현대사기념관 소장
대통령후보 이승만박사 선거사무장 이재학, 부통령후보 이기붕선생 선거사무장 박영출, 자유당중앙위원 일동 명의의 자유당 제3대 정부통령선거 후보 추대 홍보물이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길을 연 자유당은 1956년 3월 5일 전당대회를 열고 이승만과 이기붕을 5·15 정부통령 선거 후보로 지명했다.

① <4·19> 학생운동기 – 아혼록 1960.2.28.~4.28.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이하 동일) 1960년 2월 28일부터 4월 28일까지 4월혁명에 참가한 학생들의 활동을 기록하였다.

② <피어린 4월의 증언> 1960. 부산 거주 대학생의 일기로 1960년 1월부터 12월까지 대학생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부산지역의 4월혁명 양상을 전해준다.

③ <영한대역-4월의 영웅들>, 일신사, 1960. ‘세계의 눈에 비친-한국 자유혁명의 산 기록’이란 부제가 말해주듯,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등 영미권 유수 언론이 이승만의 독재와 4월혁명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다룬 사설 칼럼 보도 등을 영한대역으로 실었다.

④ <혁명재판 공판기> 1960.8. 혁명재판 법정 녹음을 녹취한 공판기록. 부정선거관리·모의·지령사건, 정치깡패사건, 발포명령자사건, 장면부통령저격사건, 전성천선거법위반사건 순으로 편제되어 있다.

<격! 참의원 의원의 망동을 규탄한다> 사단법인 사월혁명단, 1961.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격! 삼천만은 사월 혁명 영령의 명복을 빌자> 월요회, 1961.4.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① 〈오발탄〉 1961년 4월 13일 개봉 이범선이 쓴 동명의 단편소설을 유현목이 연출한 영화이다. 전후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어두운 화면과 우울한 정조를 통해 보여준 리얼리즘 영화의 수작이다. 사월혁명이 가져온 대표적 영화로 5·16쿠데타 이후 한때 상영 중지되었다.

② 〈삼등과장〉 1961년 5월 4일 개봉 삼등과장의 아들인 영구는 사월혁명을 주도한 대학생 계층으로 자부심이 있으나 놀고먹기를 좋아하며 여자친구에게 푸념만 하는 젊은이로 그려진다. 이러한 설정은 사월혁명이 ‘실패’로 자인되고 있던 1961년 초의 사회 분위기를 드러내준다.

③ 〈잘돼갑니다〉 1968년 작, 1989년 9월 9일 개봉 경무대 이발사의 눈을 통해 자유당 정권의 말로를 묘사한 영화이다. 한운사 작 동명의 인기 라디오 드라마를 1968년 영화로 만들었다. 개봉을 앞둔 상황에서 삼선개헌을 추진하던 박정희 정권에 의해 상영금지 되었다. 민주화 이후인 1989년에 가서야 해금되었다.

① 〈남원 땅에 잠들었네〉 유성기음반, 도미도레코드, 1960.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 소장(이하 동일)
② 〈사월의 깃발〉 유성기음반, 미도파레코드, 1960.
③ 〈아 4·19〉 유성기음반, 미도파레코드, 1960.

④ 〈너를 찾아 서울 왔다〉 수록 <송운선 작곡집>, 세광출판사, 1961. 송운선은 송성운이라는 이름을 함께 사용하며 1950년대 말부터 작품을 발표했으며, 혁명 관련 대중가요로 〈어머니는 울지 않으리〉, 〈못 잊을 4·19〉, 〈광명의 4·19〉 등을 만들었다. 〈너를 찾아 서울 왔다〉는 혁명 1주년을 앞두고 기획된 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⑤ 〈광명의 4·19〉 수록 노래책, 세광출판사, 1961.
⑥ 〈어머니는 울지 않으리〉 유성기음반, 아세아레코드, 1960.

 

① <항쟁의 불길>,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60. 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이하 동일) 4월혁명을 소재로 한 정론, 시, 소설, 희곡을 실은 북한의 작품집
② <조선> 1960년 제5호, 조선화보사. 4월혁명 소식을 사진과 함께 비중 있게 보도한 북한의 대외선전용 화보

③ <남조선 학생운동>, 조선로동당출판사, 1964. 4월혁명을 비롯해 해방 후 남한에서 일어났던 각종 학생운동을 소개한 북한 도서

④ 〈항쟁의 서곡〉 영화 스틸사진, 조선예술영화제작소 출품, 창춘(長春)영화제작소 더빙, 중국영화배급사 배급, 1960. 4월혁명 직후 북한에서 제작한 영화 〈항쟁의 서곡〉 스틸 사진. 강홍식이 연출을 맡았으며 심영, 김연실 등 유명 월북영화인들이 출연했다.

수, 2020/11/11-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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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기념관, 독립전쟁 선포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 개최

 

10월 23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며, 강북구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후원하는 독립전쟁 선
포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이 개최되었다. 이번 학술회의는 대한민국임시
정부의 독립전쟁선포 100주년이자 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이 되는 올해 독립전쟁사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에 부응하고자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3·1운동 이후 본격화한 만주 일대의 항일무장투쟁을 재조명하였다.
학술회의는 개회식을 시작으로 Ⅰ부에서 기조발제와 주제 발표 및 토론, Ⅱ부는 종합토론으로 진행되었다. 임헌영 소장의 개회사와 박겸수 강북구청장의 환영사로 학술회의가 시작되었다.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 학술회의 Ⅰ부는 심철기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실장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기조발제를 맡은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는 ‘독립전쟁과 신흥무관학교의 역할’이란 제목으로 독립전쟁에서 신흥무관학교가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에 대해서 발표하였다. 제1주제 ‘1910년대 유교계의 독립운동과 신흥무관학교’는 서동일 국가보훈처 학예연구사가 발표하였다. 일제 강점 초기 만주에 정착한 유림들과 신흥무관학교의 관계를 중심으로 유교계의 독립운동기지 건설 참여에 대해 다루었다. 토론자로 나선 박성순 단국대학교 교수는 신흥무관학교와 유교계가 어느 정도로 관계가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였다. 이어서 제2주제 ‘신흥무관학교 출신(자) 현황 분석과 독립운동’은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발표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구축한 신흥무관학교 인명 DB를 토대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자들의 활동과 분화과정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토론자로 나선 숭실대학교 황민호교수는 신흥
무관학교와 관련이 있는 436명의 인물들을 직접관련 단체 9개와 간접관련 단체 5개로 구분하고 중요 인물들의 특징을 파악한 것은 엄청난 공력이 들어가고 동시에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졸업 후 독립운동과 관련해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이나 단체에 대해 질문하고 토론하였다. 
다음으로 한성민 대전대학교 교수가 제3주제인 ‘일본의 간도출병 배경 검토’를 발표하였다. 일제가 1920년 ‘훈춘사건’을 빌미로 간도지역에서 대규모 군사행동을 감행한 ‘간도 출병’의 배경을 당시 사료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토론자 강릉원주대학교 이명종교수는 일제의 ‘간도출병’을 전체적인 배경을 통해서 종합적으로 이해하려 했다는 데 연구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였다. 마지막으로 제4주제는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청산리 전역과 절반의 작전’으로 발표하였다. 청산리 전투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 만주 일대에서 벌어진 독립전쟁과 일본군의 활동을 추적하는데 지도를 활용하여 보여줌으로써 청중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었다. 토론자 동덕여자대학교 이승희 교수는 <吉長日報>라고 하는 중국신문을 검토대상으로 삼고 청산리 전투에만 국한하지 않고 중국 동북지역 독립군활동의 양상과 일본군의 움직임을 규명한 점과 중국 동북지역 한인 무장투쟁과 일제 침략정책의 상관관계를 도출해내고자 시도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였다.
Ⅱ부 종합토론에서는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의 주재로 발표자 및 토론자 전원이 참여하여 열띤 논의를 벌였다. 이번 학술회의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상황에 맞춰 관계자와 예약 참석자 50명만 제한적으로 참석하여 진행되었지만 학술회의의 모든 진행 과정을 촬영하여 편집영상을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에 게시함으로써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 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수, 2020/12/02-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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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코로나 시대, 한일 시민들이 함께 외친
“야스쿠니 NO!”―야스쿠니문제 국제회의 온라인 화상회의로 열려

10월 23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야스쿠니문제 국제회의가 온라인 화상회의로 진행되었다. 이 국제회의는 침략신사 야스쿠니의 본질을 폭로하고, 야스쿠니무단합사철폐소송의 현황을 점검하며, 국제사회에 야스쿠니문제의 해결을 호소하기 위해 2016년부터 매년 서울에서 열려왔는데 코로나 시대를 맞아 올해는 온라인 화상회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행사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사무국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했으며, 동북아역사재단과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후원으로 마련되었다.

 


올해는 2006년부터 시작된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15년을 맞이하여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15년, 성찰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에 함께 해온 야스쿠니합사철폐소송 원고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변호인단, 연구자, 활동가, 지원단, 시민 등이 참가하여 야스쿠니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가졌다. 특히 올해 국제회의를 준비하며 온라인 화상회의의 특징을 살려 인터넷 홍보를 통해 일반 참가자를 모집하였는데, 한국과 일본에서 30여 명의 시민들이 온라인으로 참가하여 야스쿠니문제의 대중화라는 면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 김영환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1부에서 이희자공동대표는 개회사를 통해 코로나 사태를 맞아 비록 직접 만
날 수는 없지만,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함께 싸워나갈 것을 강조하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모든 이들의 건강을 기원했다.
야노 히데키(矢野秀喜)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모임’ 사무국장은 스가 정권의 출범을 맞아 대일과거청산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전망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한일시민들의 과제에 대해 발표했다. 야스쿠니 합사철폐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아사노 후미오(浅野史生), 오구치 아키히코(大口昭彦) 변호사
는 발표와 토론을 통해 코로나로 지연되고 있는 야스쿠니합사철폐소송의 진행상황과 앞으로의 소송전략에 대해 원고 유족들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2부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15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전망을 제시하는 시간이었다.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의 제안자이기도 한 서승 공동대표(우석대 석좌교수)는 15년의 운동을 반성적으로 돌아보고, 이 문제의 해결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한 캠페인, 야스쿠니문제에 대한 연구주체의 양성, 유럽에서의 국제회의 개최 등 이 운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언했다. 한편, 평생 동안 모아온 야스쿠니 관련 자료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모두 기증하기도 한 즈시 미노루(辻子実) 야스쿠니반대도쿄촛불행동 공동대표는 야스쿠니반대를 위한 한국 시민들과의 연대를 통해 얻은 성과를 소개하고 국제적인 시민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3부 패널토론은 야스쿠니반대운동에 참여한 청년세대를 대표하여 권다정(청년시대여행) 활동가와 도쿄촛불행동의 사무국으로 활약해 온 나카무라 모모코(中村桃子) 씨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에 참여한 감상과 자신의 변화에 대해 발표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일본과 한국 사무국의 실무를 맡고 있는 이영채, 김영환 사무국장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15년의 성과와 한계, 과제와 전망에 대해 토론했다. 이날 국제회의에는 코로나19 사태로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의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이희자, 최낙훈, 이명구, 박진부, 박남순, 동정남, 박매자, 이병순, 신명옥 어르신들께서 함께 하여 일본의 변호단, 지원단 여러분들과 화상으로나마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코로나를 함께 잘 이겨나가자는 의미에서 응원의 인사를 나누었다. 한편, 회의장 벽면에는 야스쿠니합사철폐소송의 원고로 참여했으나, 먼저 세상을 떠나신 원고들(김희종, 임복순, 고인형, 임서운, 윤옥중, 남영주, 최두용, 유충현, 백귀례, 남영주)의 사진으로 채워진 현수막이 걸려 참가자들을 숙연케 했다. 마지막으로 한국과 일본의 참가자들은 야스쿠니문제의 해결을 위해 먼저 가신 분들의 몫까지 힘껏 싸워나가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의미에서 “야스쿠니 NO!”를 힘차게 외쳤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수, 2020/12/02-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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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주최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기념

강화 드라이브스루 답사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연구소와 서울시의 후원으로 9월 26일(토), 10월 24일(토), 25일(일) 총 세 차례의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기념답사’를 강화도에서 진행했다. 이번 답사는 올해 코로나19로 인해 답사 장소와 일정이 몇 차례 변경된 끝에 드라이브스루 답사라는 방식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당초 올해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의 답사는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정미의병(강화), 신흥무관학교(안동), 조선의용대(밀양)를 차례로 살펴보며 한국광복군의 원류를 되돌아보고자 했는데 코로나19로 강화도에서만 답사를 진행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 컸다.
드라이브스루 답사는 참석자 각자가 자기 차를 타고 답사지로 이동하며 진행했다. 방역 수칙에 따라 참가자 전원이 항상 마스크를 썼고 각 차량에는 3명 이상 타지 않도록 제한을 뒀으며, 식사도 흩어져 도시락을 먹었다. 3차례의 답사에는 총 67명(1차 17명, 2차 18명, 3차 32명)의 참가자와 스태프 3명(방학진 기획실장, 신다희 총무 부팀장, 김무성 회원사업 부팀장)이 참여했다. 답사 안내는 1차 답사에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이, 2차 답사에 한정우 산마을고등학교 선생님이, 3차에 방학진 기획실장이 맡아주었다.

 


답사는 강화 만남의 광장에 집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통제영학당 옛터에서 성공회 강화성당, 합일초, 강화중앙교회를 차례대로 보고, 마지막으로 연미정으로 이동하며 진행되었다.
첫 답사지인 통제영학당은 대한제국에서 세운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이다. 이동 중 보수 공사 중인 진해루 외벽에 그려진 강화의 역사를 표현한 그림 앞에서 강화의 지리와 역사에 대해 듣고, 강화도에서 벌어진 수차례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2009년 해군참모총장이 세운 표지석 외엔 아무것도 없는 공터인 통제영학당 옛 터에서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어디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성공회 강화성당으로 이동하여 성당 앞 공원에서 답사단은 흩어져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 구한말에 상대적으로 늦게 들어온 성공회와 감리교회가 강화도 민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한옥 성당인 성공회 강화성당은 이런 답사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볼 만한 건축물이다. 합일초등학교에서 백범 김구의 친필을 보며 백범 김구가 청년 시절 강화도에서 잠시 머물렀던 사연을 듣고 근처 강화중앙교회로 이동했다.
강화중앙교회(잠두교회)는 강화 최초 교회로 잠두의숙(훗날 합일초등학교)을 설립했다. 성공회와 감리교 등 기독교로 인해 근대교육을 받은 강화의 민중들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민중교육에 힘썼던 초기 기독교를 보며, 변질된 현재의 한국 기독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3차 답사에서는 김구 선생이 1900년 강화도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서당을 열어 강화 아이들을 가르쳤던 고택 대명헌에 방문해 이 집의 운영자인 최성숙 님의 배려로 관람했다. 연미정으로 이동하기 전에 한국광복군 설립 80주년의 의미, 내년 신흥무관한교 설립 110주년에 대해 설명하며, 국군의 날과 의병의 날 등 기념일을 변경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 답사지인 연미정에 오른 답사단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북한 땅을 보며 저렇게 가까운 곳에 가지 못하는 분단 현실과, 남북 간의 교류가 정체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마치 나들이하듯 참여한 답사단은 강화도 지역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적은 인원수로 최대한 대면 접촉을 줄이려고 노력한 답사였는데, 참가자들이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주었고, 반응도 뜨거웠다. 참가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며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드라이브스루 방식의 소규모 답사를 앞으로 계속준비하고자 한다.

• 기획실 회원사업 부팀장 김무성

수, 2020/12/02-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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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교사 직무연수 운영,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 읽기>

식민지역사박물관은 현직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직무연수,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읽기〉를 주관했다. 이번 연수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근현대사 자료들 중에서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실린 사료들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이 편성됐다. 참여한 교사들은 모두 5차에 걸쳐 ‘니시키
에’, ‘일출신문조선쌍육’, ‘애국반회보’ 등 일제의 선전 자료와 친일, 강제동원으로 대표되는 과거사 청산 과제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
10월 27일(화) 진행된 이번 연수의 첫 프로그램, 「니시키에로 본 청일전쟁과 지워진 역사」에서는 강효숙 원광대 교수가 강사로 나섰다. 니시키에(錦絵)는 근세 일본의 풍속화 우키요에를 모태로 탄생한 회화 장르로, 18세기 후반부터 메이지 시기까지 유행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반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침략주의를 고취시키고 선전 미술로 활용되는 등 어두운 양면을 가진 예술이기도 하다. 강효숙 교수는 니시키에의 화려함 속에 감춰진 일본의 왜곡된 역사 인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에는 조선과 청나라를 ‘야만’으로 격하하고 제국주의적 침략을 본격화한 ‘청일전쟁’이 니시키에를 통해 다시금 조망됐다.
강의를 마친 후 수강생들은 박물관 상설전시실을 방문, 「조선안성도격전지도朝鮮安城渡激戰之圖」 등 청일전쟁 관련 니시키에를 관람했다. 아울러 박물관은 강연장 내에도 10여점의 니시키에를 별도 전시하여 수강생들의 학습과 체험을 도왔다. 이러한 실물 사료 체험에 대해 수강생들은 필요한 부분을 기록하고 때로는 설명을 청하기도 하며 높은 열의를 보였다. 박물관은 앞으로 이어질 연수에서도 사료를 실제로 감상하고 체험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다채롭게 편성할 예정이다.
올해 직무연수는 11월 24일까지 이어진다. 2주차 「일출신문 조선쌍육으로 본 일제의 강제병합과 왜곡된 역사 인식」에서는 놀이, 삽화 속에 담긴 일제의 침략 의도를 분석해본다. 3주차 「친일 관련 사료와 디지털아카이브 활용방법」에서는 방대한 일제강점기 사료군에 어떻게 접근하고 활용해야 하는지를 방법론적 측면에서 다룰 예정이다. 제4강과 5강에서는 애국반 회보와 강제동원의 실상을 사료와 사진을 통해 분석해보며 일제 지배 정책의 기만성과 식민지 폭압의 실체를 파헤친다. 다양한 시각, 이미지 자료와 피해자들의 증언 영상을 활용하여 수강생들의 학습 성취를 돕는다. 한편, 이번 직무연수와 관련된 내용은 연수 종료 이후 유튜브 및 뉴스레터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목, 2020/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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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과학도의 꿈을 접고 평화통일과 인권운동에
매진하고 있는 임재근 후원회원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이번 달에 인터뷰하는 대전지부의 임재근 후원회원은 통일뉴스와 오마이뉴스 기자로서 대전지역의 여러 현안에 대해 적극 발언해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에서 교육연구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2006년 김창룡 묘 이장 추진 시민연대를 구성할 때 민족문제연구소를 알게 되었고 2016년 연구소 후원회원으로 가입하고 지부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으며 2019년 ‘대전현충원 친일반민족행위자 백서’ 작업을 함께 진행했다.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교육연구팀장으로 활동하면서 대전형무소 터, 산내 골령골 등 우리 주변에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곳들을 다니면서 평화기행을 안내하고 있다. 2019년 여름 산내 골령골에서 해설을 하는 장면.

 

임재근 회원은 2016~17년 촛불항쟁 시 61차례 131일간의 대전촛불시위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참여하며 기록사진을 찍어 <대전대전(大田大戰) 봄으로 간 촛불>(대장간, 2017)을 펴냈다. 2019년 8월에는 한국전쟁이 대전지역에 남긴 상처들을 증거하는 사진 27점을 전시한 임재근 사진특별전 〈콘크리트 기억〉을 개최했고, 같은해 대전충남민주언론시민연합이 주는 제18회 민주언론상을 수상했다. 올해에는 <한국전쟁기 대전전투에 대한 전쟁기억 재현 연구>(북한대학원대학교, 2020)라는 논문으로 북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난 8월에 한국전쟁·대전전투 70년 기록전 〈전쟁기억, 그리고 사라진 사람들〉을 열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문제를 사회 이슈로 부각시켰다. 서면으로 진행된 임재근 후원회원과의 인터뷰를 정리해 보았다.

 

문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 안녕하세요. 저는 대전에 있는 비영리민간단체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에서 교육연구팀장으로 활동하면서, 대전지역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양한 방식의 평화통일교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소중함과 통일의 필요성을 실내 강연으로 진행하기도 하구요. 대전형무소 터, 산내 골령골 등 우리 주변에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곳들을 다니면서 평화기행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영상과 사진을 통해서도 평화통일과 인권, 역사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학창시절의 꿈은 과학도였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카이스트에 진학했는데, 지금은 그 꿈을 잠시 뒤로 미루고 통일교육을 통해 통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활동하고 있습니다. 조금은 거창해 보일 수 있지만, 이 시대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대학 시절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일제강점기라면 항일운동에 나서는 것이 시대적 요구였다면, 분단시대에는 통일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며 과학도의 꿈은 통일된 나라에서 이루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웃음)

문 : 민간인 학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나 이유는 어떤 것일까요?

답 : 민간인 학살 사건이 사회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활동과 연구를 시작한 것은 2015년부터예요. 2015년 2월 말에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민간 차원의 유해발굴이 일주일 동안 진행된 적이 있었습니다. 2014년 민족문제연구소, 4.9통일평화재단, 한국전쟁유족회 등이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공동조사단’을 결성해 진주에서 유해발굴을 진행한 후 두 번째로 선정된 지역이 제가 활동하고 있던 대전의 산내 골령골이었습니다.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를 비롯한 대전의 여러 단체들도 ‘한국전쟁기 대전 산내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유해발굴에 참여하게 되었는데요. 그때 유해발굴 지원팀에 결합해 유해발굴에 동참했습니다. 때마침 그때가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을 써야 할 시점이었습니다. 유해발굴에 동참하면서 논문의 주제를 ‘한국전쟁 시기 대전지역 민간인 학살 연구’로 잡고, 논문을 쓰게 되면서 더 본격적으로 민간인 학살 사건과 관련한 활동과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평화기행 해설을 다니면서 틈틈이 찍은 사진을 모아 <콘크리트 기억>이란 제목으로 노근리평화기념관과 옛 충남도지사관사촌 ‘테미오래’에서 사진전을 진행했다. 2019년 테미오래 6호 관사에서 진행한 사진전 전시장의 한 장면.

 

문 : 옛 대전형무소 사진전을 개최하셨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답 :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주요 사업 중 하나가 ‘평화기행’이에요. DMZ 평화기행이나 제주 평화기행도 다니지만, 저희가 활동하고 있는 지역이나 인근 지역으로 더 자주 평화기행을 다녔습니다. 대전에서는 주로 대전형무소 터와 산내 골령골을 찾았구요. 대전 인근의 충북 영동 노근리로도 평화기행을 자주 다녀왔습니다. 평화기행을 다녀오고, 준비하면서 그 현장에서 많은 사진들을 찍곤 했었는데요. 2019년에 노근리국제평화재단에서 사진전을 열자고 제의해 사진전을 진행했습니다. ‘콘크리트 기억’이란 제목을 단 사진전의 주요 키워드는 ‘전쟁’, ‘학살’, ‘감옥’이었구요. 구체적인 장소는 ‘노근리 쌍굴다리’,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현장’ 그리고 ‘옛 대전형무소 터’였습니다. 27점의 사진을 모아 7월 2일부터 2달 간 노근리평화기념관 전시실에서 전시를 진행했고, 9월부터는 한 달여 간 대전으로 가져와 옛 충남도지사관사촌 ‘테미오래’에서 전시를 이어갔습니다. 충북 영동 노근리에서 시작한 사진전을 대전을 찍고, 올해 한국전쟁 70년을 맞아 서울의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도 하고 싶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아쉽게도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문 : 산내 학살에 대해 독자 분들에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답 :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군인과 경찰에 의해 대전형무소 재소자를 비롯해 보도연맹원 등 1,800명에서 최대 7,000명가량이 무참히 학살당해 암매장된 사건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서 전 국토가 무덤이라 할 만하지만, 그 중에서 대전 산내 골령골 사건은 피해 규모와 성격에 있어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사건입니다.
희생자들은 대전 지역에만 국한된 것에 아니라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등 관련자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분들이 많았습니다. 암매장된 구덩이는 길이가 작게는 20~30m에서, 50m, 100m, 최장 200여 m에 이르기까지 무척 깁니다. 이 구덩이들을 모두 이으면 1km에 달할 것으로 보여 대전 산내 골령골을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최근 산내 골령골에서는 사건 발생 70년 만에 대규모 유해발굴이 진행되었습니다. 9월 21일부터 대략 40여 일간 진행된 유해발굴 작업을 통해 약 80평 공간에서 유해 200여구가 발굴되었습니다. 대전 산내 골령골은 향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단위 위령시설인 평화역사공원(진실과 화해의 숲)이 조성될 예정입니다.

 

지난 2019년 봄에 찍은 산내 골령골의 모습. “흩날리는 벚꽃 잎이 산내 골령골 마당 위로 떨어진다. 떨어지는 분홍 꽃잎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수천여 명의 넋이라도 되는 듯 참으로 슬픈 봄날이다.

 

문 : 민족문제연구소와의 인연과 향후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답 : 제 기억으로 민족문제연구소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6년 대전지역에서 대전지부가 주축이 되어 ‘국립묘지법 개정 및 반민족행위자 김창룡 묘 이장 추진 시민연대’를 구성할 때였습니다. 이때부터 김창룡 등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친일민족반역자들에 대해 알게 되었고, 매년 현충일에 김창룡 묘 이장 촉구대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9년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와 함께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찾아내 정리하는 ‘대전현충원 친일반민족행위자 백서’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해방 이후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후과(後果)들이 7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제대로 된 친일청산이 시급합니다. 또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해방된 조국은 분단된 조국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통일을 이루었을 때에야만 온전한 해방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대전지부에서 항상 건배사로 ‘친일청산, 민족통일’의 구호를 외치고 있는데요, 이 구호를 완수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올해 한국전쟁·대전전투 70년을 맞아 옛 충남도지사관사촌 ‘테미오래’에서 기록전 ‘전쟁기억, 그리고 사라진 사람들’을 전시했다. 지난 10월 8일에 전시회 오프닝 강연을 옛 충남도지사공관 야외정원에서 진행했다.

 

문 : 그 밖에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세요.

답 :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올해를 뜻깊게 보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미루고 있던 박사학위 논문을 ‘한국전쟁기 대전전투에 대한 전쟁기억 재현 연구’라는 제목으로 마무리지었습니다. 논문을 통해 대전전투를 중심으로 살펴본 한국전쟁 기억재현의 시선들이 군인들에게 맞추어 있었고, 호전적이고, 적대적으로 구축되어 있다는 것을 고찰해 보았습니다. 전쟁은 우리의 삶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전쟁은 승패를 떠나 양측 모두에게 심대한 인명피해를 주었습니다. 전투에 나선 군인들보다 자신을 보호할 방어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던 민간인들은 피아(彼我)의 학살 속에, 폭
격 속에, 그리고 피란과 굶주림 속에 죽어가면서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전쟁의 승리를 다짐하는 호전적 전쟁기억을 통해서는 전쟁을 미리 방지할 수 없고, 오랫동안 호전적, 적대적 입장에서 전쟁기억에 노출된 사회에서는 전쟁에 친화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전쟁기억 재현은 오랫동안 배제됐던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기반으로 재조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대전지역은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국가를 위한 죽음’과 ‘국가에 의한 죽음’이 양극단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대전의 서북쪽 유성구 갑동에는 국립대전현충원이 위치해 있고, 그 반대 남동쪽인 동구 낭월동엔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 불리는 골령골이 있습니다. 현충원은 ‘국가를 위한 죽음’의 상징이고, 골령골은 ‘국가에 의한 죽음’의 상징입니다. 지난 70년 동안 전쟁기억은 ‘국가를 위한 죽음’에 너무 치우쳐 있고, ‘국가에 의한 죽음’은 외면당하고, 배제되어 왔습니다. ‘국가에 의한 죽음’에 대해 철저히 성찰하고, 교훈을 찾을 때에만 비극을 재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국가에 의한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전쟁기억을 평화를 위한 기억으로 만들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목, 2020/12/03-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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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64 ]

용산 보병 제78연대, 조선의 수부 경성을 수비하는 주력부대
이 부대를 거쳐간 조선 출신 일본군 장교들은 누구누구였을까?

이순우 책임연구원

조선 사람으로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이 되어 군대생활을 하는 사람은 도합 40명이나 되지 못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인 장기형(張璣衡, 26) 씨는 지금 보병소위로 금택(金澤, 카나자와) 제9사단 제35연대 제1중대부(附)로 현금 용산주차군 안에 있더라. 씨는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처음에 경성무관학교를 다니었으며 그 후에 일본 동경에 들어가 중앙유년학교(中央幼年學校)를 졸업하고 인하여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에 금택 제9사단에 입대하였으며 동시에 주차군의 장교로 작년 6월에 조선으로 건너왔는데 35연대에 장 소위 한 사람밖에 조선 사람이라고는 없으나 제27기에 같이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17명과 전기에 졸업한 17명의 졸업생은 다 각 연대에 배치되어 입대케 하였더라. (하략)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7기 졸업생으로 제9사단 보병 제35연대(카나자와 주둔)에 근무했던 장기형(張璣衡) 보병 중위의 인물사진이다. 그가 소속된 보병 제35연대가 조선주차군 교대병력으로 파견되는 바람에, 그 역시 뜻하지 않게 초급장교 시절을 용산 보병영에서 보내게 된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이것은 <매일신보> 1916년 1월 14일자에 수록된 「용산연대(龍山聯隊)의 장소위(張少尉), 그의 당당한 풍채, 그의 유쾌한 생활」 제하의 기사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나오는 장기형 보병소위는 원래 일본 카나자와에 근거를 둔 제9사단 제35연대에 배속되었는데, 이 부대가 때마침 ‘조선수비(朝鮮守備, 1914.4~1916.4)’를 위해 조선주차군의 교대병력으로 파견된 상태였으므로 그 역시 덩달아 1915년 6월 이후 1년가량 용산에서 근무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용산 지역 일본군 병영지의 보병연대(步兵聯隊) 주둔 연혁

장기형 소위가 근무처로 삼았던 보병 제35연대가 있던 자리는 1916년 4월에 조선주둔 2개 상주사단의 하나로 제19사단이 먼저 창설되면서 이때 예하부대로 함께 만들어진 보병 제78연대의 주둔지로 전환된다. 이곳은 1906년 이후 본격적으로 건설된 용산지역의 일본군 병영지 안에서 나중에 보병 제79연대가 추가 배치되기 직전까지는 단 하나의 보병영(步兵營)으로 존재했던 구역이기도 하다.
한국주차군경리부(韓國駐箚軍經理部)에서 펴낸 <조선주차군영구병영, 관아급숙사건축경과개요(朝鮮駐箚軍永久兵營, 官衙及宿舍建築經過槪要)>(1914)에 정리된 내역에 따르면, 이곳에는 1908년 준공 당시 보병연대(대대)본부 청사 1개동과 병사(兵舍) 및 부속가(附屬家) 6개동의 병영시설이 자리하였다. 이와 함께 별동(別棟) 부속건물(위병소, 영창, 하사집회소, 장교집회소 등) 22개동이 있었으며, 이 주변에 보병연대 장교합동숙사(將校合同宿舍) 4개동과 준사관하사합동숙사(準士官下士合同宿舍) 1개동이 추가로 배치되어 있었다.

1908년 보병영 완공 당시의 병사 및 부속건물 구성 내역

1908년에 완공된 용산보병영(龍山步兵營) 일대의 전경을 남쪽 방향으로 담아낸 사진엽서이다. 왼쪽 아래에 보이는 것이 부대 정문(正門)이고, 오른쪽 아래에 길게 보이는 건물이 ‘보병연대본부 및 대대본부’ 청사이다. 그 뒤쪽에 연병장 일대와 6개동에 달하는 병사(兵舍)가 2열로 배치된 모습이 포착되어 있다. (개인소장자료)

이른바 ‘코바야카와(小早川)’에 걸쳐 다리를 놓은 지점에 북면(北面)하여 설치한 용산보병영의 정문(正門)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이다. 대문 기둥에 ‘보병 제31연대’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걸로 보아 제8사
단이 조선주차군으로 파견되어 있을 당시(1912.4~1914.2)에 촬영된 모습인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소장자료)

 

부대의 정문(正門)은 용산병영지의 중간을 가로질러 동서로 흐르는 이른바 ‘코바야카와(小早川, 임진왜란 때의 왜군장수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이름을 따서 붙인 하천 이름)’를 남쪽으로 건너는 지점 앞에 북향(北向)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을 들어서면 먼저 연병장(練兵場)이 나타나고 그 뒤에 남쪽으로 병사(兵舍)가 2열 배치의 형태로 자리하였다.

 

3·1만세 시위 당시인 1919년 5월에 작성된 <군대분산배치요도(軍隊分散配置要圖)>에 표시된 보병 제78연대의 위수지역(경성 및 인천포함 경기북부지역)이다. 특히 이 지도의 여백에는 “경성 및 용산은 3대대로써 수비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이 대목에서 상주사단 편제에 있어서 보병 제78연대의 존재가치는 무엇보다도 식민지 조선의 수부(首府)인 경성(京城)을 수비하는 주력부대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예를 들어,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에서 제작한 <군대분산배치요도(軍隊分散配置要圖, 1919년 5월 20일 현재)>(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라는 군사지도를 보면, 보병 제39여단(평양 소재)의 예하부대인 보병 제78연대의 위수지역(衛戍地域)이 경성과 인천을 포함하여 한강 이북의 경기도 북부 일대에 걸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보병 제78연대는 조선을 수비하는 역할에만 그치지 않고 일제가 벌이는 잇따른 침략전쟁마다 이른바 ‘출정부대(出征部隊)’로 거듭 동원된 내력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모리 모토 토미조(森本富藏)가 편찬한 <황군연대기사진첩(皇軍聯隊旗寫眞帖)>(1932)이란 자료를
보면, ‘보병 제78연대’의 항목에 군기약력(軍旗略歷)을 이렇게 적고 있다.

 

위수지(衛戍地) : 조선 용산(朝鮮 竜山)
소속(所屬) : 용산 제20사단(竜山 第二十師團)
一. 군기친수(軍旗親授) : 대정(大正) 5년(1916년) 4월 18일
一. 압록강안지방(鴨綠江岸地方)에 출동(出動) : 자(自) 소화(昭和) 3년(1928년) 5월 27일 지(至) 동년(同年) 7월 18일
一. 만주사변(滿洲事變)에 참가(參加) : 자(自) 소화(昭和) 6년(1931년) 9월 19일 지(至)목하(目下) 〇〇중(中)
보병 제78연대 잔류대(殘留隊) 부관(副官) 오쿠와 시게오(大桑茂男) 씨 보고

이 시기 만주사변에 참가한 흔적으로 남은 것이 바로 용산 보병 제78연대 구내에 잔존했던 ‘충혼비(忠魂碑, 1935.11.18 제막)’였다. 이 비석은 논공행상(論功行賞)의 혜택을 입은 이들이 돈을 걷어 출정중에 죽은 자신들의 전우를 위해 장교집회소(將校集會所) 앞에 세운 것이며, 당초 만주사변 4주년(1935년 9월 18일)을 앞두고 이 날짜에 맞춰 제막하려던 계획이었으나 실제로는 두 달이 지연되어 완공된 것으로 드러난다.

 

<조선신문> 1935년 11월 19일자에 수록된 용산 보병 제78연대의 ‘만주사변 충혼비’ 제막식 장면이다. 엉뚱하게 이 기념물은 해방 이후 ‘미8군 전몰자 기념비’로 재활용되다가 2017년 5월에 평택미군기지로 이전된 상태에 있다.

 

이러한 기념물이 제막된 날의 풍경에 대해서는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11월 19일자에 수록된 「호국(護國)의 영령(英靈)을 달래려는 전우(戰友)의 미거(美擧) 결실을 맺으며, 제78연대에 충혼비 제막식(除幕式)」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만주사변(滿洲事變) 때에 재용산(在龍山) 보병 제78연대의 장병으로서 출정했던 관계자가 그 전우 중에 이 사변에서 순직(殉職)했던 키누가사 소좌(衣笠 少佐) 외 45용사(勇士)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며 위령(慰靈)하고자 건립했던 보병 제78연대 관계 장사(將士)의 위령비 제막식은 동(同) 사건의 돌발일(突發日)에 맞춰 18일 오전 11시 반부터 동 연대 영정(同聯隊 營庭)에서 거행되었다. 식장(式場)은 영문(營門) 안쪽에 남면(南面)하여 설치되어 수불(修祓), 강신(降神), 헌찬(獻饌) 등 관례대로 엄숙리에 진행되었으며, 제주(祭主)의 축사(祝詞) 후에 햐쿠타케 연대장(百武 聯隊長)의 제문낭독(祭文朗讀), 이마무라 제40여단장(今村 第四十旅團長)의 조문낭독(弔文朗讀)이 있었고, 유족(遺族)인 고(故) 키시하
라 상등병(岸原 上等兵)의 엄부(嚴父)와 고(故) 코마츠 군조(小松 軍曹) 모당(母堂)의 손에 의해 제막되는 동시에 방구(放鳩), 마지막으로 재주(齋主), 제주(祭主) 옥관(玉串)을 바치고 폐식(閉式)했다. 이날 유족은 고(故) 히라타 중위(平田 中尉) 유족과 기타 20여 명이며, 별도로 조선군(朝鮮軍) 대표, 사단(師團) 대표, 기타 관민(官民)과 아울러 군부관계자(軍部關係者) 100여 명이 참렬(參列)하였고, 동 연대(同聯隊) 전병몰자(戰病歿者)는 다음과 같다. (이하 개별 명단 부분은 인용 생략)

 

그런데 그 이후 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 때에도 출동부대의 명단에서 보병 제78연대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용산 주둔 보병 제78연대의 거듭된 출정에 관한 얘기를 하자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친일군인’으로 맹활약(?)한 김석원(金錫源, 1893~1978)이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42년 2월 3일자에 수록된 「반도인(半島人)에 최초(最初) 수훈갑(殊勳甲), 가네야마(金山) 부대장의 영예, 청사(靑史)에 찬연(燦然)한 북지전야(北支戰野)의 무훈(武勳)」 제하의 기사에 잘 요약되어 있다.

 

대동아전쟁하 전첩에 빛나는 신춘을 맞이하여 2일 제24회 지나사변 생존자 논공행상이 발표되었다. 그 중에는 지나사변 직후 대륙전선에서 용맹을 떨친 우리의 부대장 금산석원 중좌(金山錫源 中佐, 구명 김석원)가 반도인으로서는 처음인 수훈갑 공삼급 중수장(殊勳甲 功三級 中綬章)의 은명을 배수하여 향토의 명예를 떨치었다. 김석원 중좌는 소화 12년(1937년) 7월 지나사변이 일어나자 천안병단 남운부대(川岸兵團南雲部隊) 대장으로 용약 북지(北支)에 출정하여 유명한 남원낭방(南苑廊坊)의 전투를 비롯하여 태원(太原), 운성(運城)의 공략전에 이르는 전후 1년 반 동안 포연탄우를 무릅쓰며 북지의 각 전선에서 과감히 싸워 혁혁한 무훈을 세웠고 남원의 격전에서는 명예의 부상까지 입었으나 여기에 굴치 않고 다시 제일선에 나아가 적군을 철저히 섬멸하였다. 더욱이 산서성 영석(山西省 靈石) 부근의 격전에서는 과병으로 잘 적군의 대부대를 격멸한 위훈을 세워 감장(感狀)까지 받고 김석원 부대의 용맹을 떨치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 중좌는 부내 재동(齋洞) 출생으로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와 육군사관학
교(陸軍士官學校, 제27기)를 거쳐 육군보병학교(陸軍步兵學校)를 졸업한 후에는 중위(中尉) 시대부터 중좌가 되기까지 15년 동안 조선 제22부대에서 근무하였다. 그 동안 만주사변 당시에는 만주에 출정하여 공사(功四)의 영예를 받자왔다. 그리고 소화 14년(1939년) 1월 북지에서 개선하였다가 소화 16년(1941년) 3월 다시 북지〇〇방면에 출동하여 방금 대동아건설을 위하여 정신분투하고 있는 중이다. 더욱이 김 중좌는 근엄한 무인이고 가정은 순내지식인 가정으로서 유명한데 조선에 있을 때에는 반도민중의 황국신민화와 풍속의 개선, 문화향상 등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한편 성남(城南) 중학을 설립하고 반도청년의 연성에 노력하였다.

우선 여기에 나오는 ‘조선 제22부대’라는 것은 용산 주둔 보병 제78연대를 가리키는 통칭호(通稱號)이다. 그리고 이 기사에 ‘15년’ 동안 보병 제78연대에서 근무하였다고 적어놓은 대목은 사실관계가 약간 다른 듯하다.

 

<매일신보> 1942년 2월 3일자에 수록된 김석원 부대장에 대한 ‘수훈갑’ 논공행상 관련기사이다. 오른쪽에 있는 사진은 ‘김석원 중좌’의 모습이고, 왼쪽 아래가 ‘처 서달순, 장남 김영철, 3남 김영국’의 모습이다. 아들들의 이름에 ‘영(泳)’이 들어간 것은 박영효(朴泳孝)에게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용산 보병 제78연대에서 발행한 <만주사변출동기념사진첩> (1932)에 수록된 김석원 대위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그의 직책이 ‘제1보병 포대장’으로 표시되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매일신보> 1939년 4월 5일자에 수록된 매일신보사 주최 ‘김석원 소좌 강연회(경성부민관)’ 안내광고이다. 중일전쟁 당시 북지전선(北支戰線)에 무공을 세우고 귀환한 그는 이 행사를 계기로 전국의 군청 소재지를 거의 빠짐없이 돌면서 침략전쟁을 선전하고 신생활운동을 강조하는 강연회를 한동안 지속하였다.

 

김석원은 앞에서 소개한 장기형 소위와 일본육군사관학교(제27기)를 함께 졸업하였으며, 이때 그의 첫 부임지는 일본 와카야마(和歌山)에 주둔한 보병 제61연대였다. 그러다가 중위의 신분으로 용산에 주둔한 보병 제78연대로 전속되어 온 것이 1919년 8월 21일의 일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김석원이 남긴 <노병(老兵)의 한(恨)>(육법사, 1977)이라는 자서전에는 용산으로 전출(轉出)을 오게 된 과정이 두어 쪽에 걸쳐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 서술된 내용에 따르면 와카야마 보병 제61연대에 근무할 당시 자신이 속한 부대의 최고지휘관인 제4사단장 우츠노미야 타로(宇都宮太郞) 육군중장과 안면이 생겼고, 때마침 그가 제9대 조선군사령관(재직 1918.7.24~1920.8.16)으로 옮겨가게 되자 휴가차 귀향(歸鄕)할 때를 틈타 그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조선으로 근무지를 옮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김석원 중위는 1940년 1월에 후쿠야마(福山)에 주둔한 보병 제42연대로 전속(轉屬)될 때까지 무려 20년이 넘은 긴 세월을 오롯이 용산 주둔 보병 제78연대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 출신 일본군 장교라고 해서 자신의 근무지가 반드시 조선으로 배치되는 것은 아닌 상황에서, 더구나 이토록 장기간 동일한 부대에서 남아 있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문사례에 속했다. 그러니까 김석원이라는 존재는 용산의 주력부대인 ‘보병 제78연대’에서 글자그대로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은 ‘터줏대감’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이곳에서 대위(1925년 8월)를 거쳐 소좌(1934년 3월)에서 중좌(1938년 9월)로 거듭 진급했을 뿐만 아니라 만주와 중국으로 출정하여 거듭 자신의 무공(武功)을 쌓았으니, 그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친일군인의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자서전을 훑어보는 와중에 그가 느지막이 이러한 책을 남기는 뜻을 밝히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포함된 것이 퍼뜩 눈에 띈다. ……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걸어온 생애가 타의 모범이 될 정도로 무슨 큰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또 국가나 민족을 위하여 남이 본받을 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 반대일는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그동안 내가 살아온 80여 년 간의 뒤를 돌아다보면 아무래도 잘한 일보다는 잘못한 일이 훨씬 많은 것 같고 남에게 환영받을 일보다는 오히려 남에게 환영받지 못할 일이 더 많이 한 것 같다. 어떤 경우는 무지했던 탓으로 또 어떤 경우는 올바른 인생관과 올바른 세계관을 못 가졌던 탓으로 그동안 내가 저지른 잘못은 많다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유야 어쨌든 일제 식민지시대에 오래도록 일본군인 노릇을 했다는 것은 나의 생애 중에서 큰 불명예라 생각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그가 일본군인의 노릇을 했다는 것을 스스로 큰 불명예로 여긴다고 생각했다는 점은 분명히 확인되지만, 이만한 정도의 언급이라도 남긴 이가 그리 많지는 않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를 일컬어 친일행적을 참회한 인물로 받아들여야 할는지는 여전히 판단이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목, 2020/12/03-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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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 Ⅱ <위대한 희생, 빛나는 투쟁>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을 맞아 <위대한 희생, 빛나는 투쟁>이라는 주제로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진행하였다. 이번 강좌는 독립운동가들의 인생 여정을 통해 의열투쟁의 의의를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강좌는 11월 28일에서 12월 13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에 현장과 온라인 수강을 병행할 계획이었지만 1강과 2강 진행 이후 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3강에서 6강은 온라인 수강만으로 변경되었다. 강의는 촬영 후 편집 영상을 홈페이지에 게시함으로써 많은 시민들이 온라인으로 쉽게 수강할 수 있도록 진행하였다.
첫 번째 강의는 대전대학교 한성민 교수의 <3개의 총탄이 만든 역사, 안중근>이란 주제로 ‘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나?’라는 물음과 함께 당시 이토의 ‘만주시찰 목적’을 알 수 있는 강의였다. 2강은 <끝나지 않은 3·1운동의 전율, 강우규> 주제로 춘천교육대학의 김정인 교수가 강의하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3·1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강우규의사의 의거와 함께 3·1운동의 흐름을 다시 되짚어줌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3·1운동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강의였다. 첫 주 강의는 방역지침을 준수하기 위해 강사와 현장참여자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를 한 상황에서 강의를 진행하였다.
3강에서 6강은 수강생 없이 온라인 수강을 위한 강의 촬영으로 진행되었다. 3강 <위대한희생 빛나는 투쟁, 의열단>은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강의하였다. 의열단은 어떤 단체인가 알아보고, 특히 1923년 ‘제2차 대암살파괴계획(황옥경부폭탄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의열단원 김시현과 밀정 황옥을 통해 의열단의 활동과 조선총독부의 밀정 운용에 대해 심도있게 다루었다. 또한 4강 <윤봉길, 한국과 중국을 잇는 폭탄을 던지다>는 남기현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이, 5강 <여성, 광복군에 들어가다>는 한국예술종합학교 한승훈 교수가 강의하였다.
6강 <재일조선인의 삶과 저항, 이봉창>은 광운대학교 국제학부 김광열 교수가 진행하였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일본 거주 조선인의 생활 실태, 민족차별과 임금차별에 맞선 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 정리하고 일본거주 조선인 노동자였던 이봉창이 민족차별에 반감을 갖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과정을 요약하여 이해도를 높여준 강의였다.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Ⅱ <위대한 희생, 빛나는 투쟁>은 1강에서 6강 모두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와 민족문제연구소, 서울시 강북구 홈페이지를 통해서 12월 말까지 누구나 수강할 수 있다. 근현대사기념관은 2021년에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현장과 온라인 수강으로 계획하여 많은 시민들에게 역사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홍정희

수, 2020/12/30-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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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노동은 편저) 발행을 시작으로 항일음악회 개최(2011년, 2017년, 2018년) 등 독립군가 복원과 보급에 힘쓰고 있는 가운데 YTN 라디오가 경기도 후원으로 진행 중인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자문하고 있다. 올해 10편을 시작으로 내년까지 꾸준히 제작·방송할 예정으로 특히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직접 노래를 부르고 선친을 회상하여 더욱 의미를 더하고 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는 연구소 후원회원이기도 한 이은지 YTN PD가 담당하고 있다. 노래는 연구소 누리집에서 들을 수 있으며 현재까지 제작된 노래는 아래와 같다.
1편 : 국치추념가(이준식 독립기념관장), 2편 : 안중근 옥중가(함세웅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 3편 : 신흥무관학교 교가(이항증 석주 이상룡 선생 증손자), 4편 : 압록강 행진곡(김영관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 5편 : 격검가(차영조 동암 차리석 선생 아들), 6편 : 새야새야 파랑새야(정남기 동학농민군 정백현 선생 손자), 7편 : 광복군 아리랑(장병화 광복군 장이호 선생 아들) • 방학진 기획실장

수, 2020/12/30-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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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국가보안법 폐지는 일제잔재 청산이다

 

원희복 <민족화해> 편집인(전 경향신문 부국장)

 

12월 1일 한국진보연대를 비롯, 137개 사회단체와 161명 인사가 “국가보안법 이제는 폐지해야 합니다”를 외쳤다. 이날 국회 앞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는 청년학생 기자회견이 열렸고, 여타 많은
장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행사를 가졌다. 이날 국가보안법 폐지 행사가 집중된 것은 국가보안법이 1948년 12월 1일 제정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물론 대법전을 펼치면 나오는 국가보안법 제정날짜만보면 그렇다. 현행 법조문만으로 보면 그럴 수 있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이는 ‘단견’이다. 문제는 이 ‘단견’이 국보법 운동의 의미와 실제 효과를 크게 반감시킨다는 것에 있다. 지금이라도 빨리 수정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 문제를 짚어본다. 일단 현재 사용하는 대법전을 접고,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자. 보안법에 대해 “1907년
7월 24일(27일의 오류-편집자주) 집회와 결사·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대한제국 정부에게 제정, 반포하게 한 법률”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당시 분위기를 설명해 보자.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통감부를 설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행정권을 행사했다. 일제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이에 <대한매일신문>과 <황성신문>이 일제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조선 팔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이완용 내각을 강제해 법률 제1호(1907.7.24.)로 제정한 것이 바로 신문지법(新聞紙法)이다. 그리고 3일 후 일제는 자국의 치안경찰법을 본따 보안법(保安法)을 강제했다.(법률 제3호는 출판법) 그 주요 내용은 △사회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결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 △경찰관은 사회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집회 또는 다중(多衆)의 운동 혹은 군집(群集)을 제한, 금지 또는 해산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불온한 행동을 할 우려가 있는 자에 대해 그 거주지에서의 퇴거를 명할 수 있고, 동시에 특정 장소에 일정 기간 출입을 금지시킬 수 있다.
더 악독한 것은 처벌조항이다.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말이나 행동을 하고, 타인을 선동 또는 교사하고 치안을 방해하는 자에 대해서는 태형 50대 이상, 또는 10개월 이하의 금고,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게 했다. 근대 사법제도를 도입한다는 명분으로 강제한 법에 태형이라는 전 근대적 처벌조항을 둔 것은 조선을 야만시한 행위다.
일제의 강압으로 만든 근대 법률 제1호가 조선인의 말을 틀어막는 신문지법이고, 법률 제2호가 사상의 자유를 옥죄는 보안법이다. 사실 언론의 자유(freedom of press)는 말할 자유(freedom of speech)에서 비롯된 것이며 말할 자유는 사상의 자유(freedom of thought)를 바탕으로 한다.
조선인의 말과 사상을 틀어막는 두 법이 필요했던 것은 조선병탄을 위해서였고, 일제는 이 법을 통해 매우 효율적으로 항일언론과 애국계몽운동, 의병활동을 탄압할 수 있었다. 이 보안법으로 대한자강회와 동우회 등 민족단체들이 해산되고, 많은 의병과 만세운동 가담자들이 억울하게 수감되거나 죽음을 당했다. 결국 일제는 1910년 조선병탄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이뤄냈다.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일본 제국주의의 바탕인 일왕제에 대한 도전, 즉 국체를 수호하기 위한 법이다. 1917년 황제 차르가 무너지는 소련을 봤기 때문이다. 이 법은 일본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은 물론 무고한 조선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는데 활용됐다. 흔히 현재 국가보안법 기원을 이 법으로 삼는 사람이 있는데 구태여 이념이 짙게 개입된 이 법을 기원으로 삼을 필요가 있는가. 그보다 훨씬 앞서고 부담없이 전 국민의 호응을 받을 수 있는 보안법이 있는데 말이다.
일제는 한편으로 기성 언론을 통제하고 순치시켰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8월 ‘조선 동아 100년’을 기해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과 동아일보 백관수 사장이 1937년 일제 경무국장 앞으로 쓴 서약서 ‘언문신문 지면쇄신요항’을 발굴 공개했다. 좀 길더라도 서약서 전문을 공개할 필요가 있다.

 

1. 황실기사는 정중히 지면 상단 중요한 장소에 오탈자 없이 할 것.
2. 황실 및 국가, 군기, 신사 등을 존중하고 국체명징, 국위선양, 연중행사 의식은 정중히 취급하고 크게 보도할 것. 가급적 그 사진을 실을 것.
3. 황실 및 국가적 경사에 대해 회사도 자발적 축하의 뜻을 보낼 것.
4. 외국 전보 등으로 제국의 불리를 보도하지 말 것.
5. 총독, 총감 기타 내외지의 현관귀빈의 동정은 성의를 가지고 보도할 것.
6. 총독의 유고, 관청의 발표사항 및 지사회의, 중추원회의 등 중요한 관청 회의는 빠짐없이 보도할 것.
7. 당국의 시정시설에 대해서는 민족적 편견을 제거하여 국가적 관점에서 보도하고 비판은 공명정대를 기할 것.
8.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범죄에 관한 기사 및 국외 불령운동 기사를 과대하게 취급하거나 호의적 명칭을 쓰거나 상휼적 문자를 쓰지 말 것.
9. 소련의 선전적 통신을 호의적으로 등재하지 말 것.

10. 주의적 색채가 있는 논문, 소설 등을 배격할 것.
11. 농촌진흥, 자력갱생 등의 운동 및 이민노동자 알선 등의 사업을 성원하고 격려 고무하도록 노력할 것.
12. 천재사변 때는 관청의 구제 사업을 성원하고 결코 민심을 혹란하여 민중의기를 키우는 일이 없도록 할 것.
13. 함부로 조선민족의 궁핍을 곡설하고 민중생활의 비참한 상황을 나열하지 말 것.
14. 노동 소작 기타 쟁의에 관한 기사는 사안을 연구하여 공평한 보도를 하고 격화시키지 말 것.
15. 조선의 역사적 인물, 산악, 고분 등에 관한 기사나 기타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배일사상을 고조할 우려가 있는 것은 게재하지 말 것.
16. 내선인 간 충돌 기사는 취급을 신중히 하고 민족적 대립으로 나가지 않도록 할 것.
17. 존황정신을 취지로 대일본제국의 신문으로 임무를 다하도록 노력할 것.
18. 반국가적 또는 공산주의, 민족주의적 언론보도를 하지 말 것.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능가할 정도로 꼼꼼하고, 조항 하나하나가 굴욕적 통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조선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의 활동은 물론, 독립정신을 고양할 그 어떤 작은 싹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겨있다. 일제는 조선인이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애당초 용납하지 않고, 독립운동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을 이간시키는 작업에 언론을 활용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흉행’이라 보도한 조선일보의 보도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소비에트 로서아의 명령에 따라 하르빈에서 적화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며 “적색테러 계획을 진행시켜 윤봉길로 하여금 이런 흉행을 하게 한 것”이라 보도했다. (조선일보 1932년 5월 8일자)
윤봉길 의거는 민족주의 임정세력(백범)에 의해 이뤄진 것은 당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그래서 임정이 상해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윤봉길 의거가 러시아, 즉 사회주의 세력의 지시를 받았다고 쓴 것은 민족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을 이간질시키는 보도라고 할수 있다.
이것은 이른바 ‘빨갱이’ 논란으로 상징된다. 흔히 빨갱이의 기원을 비정규 무장세력인 파르티잔(partisan)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아 해방, 즉 분단 이후로 판단하는 사람이 많다.(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2009) 하지만 필자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앞서 보안법의 기원과, 조선총독부의 언문신문 지면쇄신요항에서 보듯이 일제는 사상과 이념통제를 조선병탄 수단으로 활용했다. 특히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적색은 깃발과 노래 등으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상징색이 됐다. 일본에서 공산주의자를 붉은 색의 아카(赤)로 불렀다. 

 


일제의 강압으로 만든 근대 법률 제1호가 조선인의 말을 틀어막는 신문지법이고, 법률 제2호가 사
상의 자유를 옥죄는 보안법이다. 사실 언론의 자유(freedom of press)는 말할 자유(freedom of
speech)에서 비롯된 것이며 말할 자유는 사상의 자유(freedom of thought)를 바탕으로 한다.


 

일본은 일왕제를 수호하기 위해 1925년 치안유지법을 만들었고, 조선독립 세력을 이간질하는 수단으로 빨갱이를 사용했다.
우리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도 붉은 색 종이에 소련의 <코뮤니스트>를 인쇄해 전국에 뿌렸다. 1932년 김단야를 비롯해 김형선, 김명시, 김찬 등은 5월 1일 ‘붉은 5·1절’(노동절)을 기해 붉은 색(혹은 푸른 색) 종이에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라’ ‘조선의 절대적 노동자 농민의 정부를 수립하라’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라’는 등의 삐라 수천 장을 만들어 뿌렸다. 그 붉은 색 삐라 그 말미에는 ‘조선공산당’이라는 문구를 새긴 것은 물론이다.(원희복, <한·중 항일혁명가 부부 김찬·도개손 평전> 2015) 따라서 일제는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해 ‘빨갱이’라는 비어를 만들었고, 이는 앞서 언문
신문 지면쇄신 요항에서 그대로 명시돼 있는 것이다. 1942년 이승만의 편지에는 “호놀룰루에서 얼마 전 이곳에 도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전경무에 따르면 그(한길수)의 조직은 50명이 못되는 한국 ‘빨갱이’ 이상은 아니라고 합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해방 이전에도 보수세력이 공산주의 세력을 빨갱이라 비하했던 것이다.
2020년 문재인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서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습니다. 여기서 ‘빨갱이’라는 말도 생겨났습니다. 사상범과 빨갱이는 공산주의자들에게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에 일부 보수언론은 ‘빨갱이라는 표현은 일제잔재가 아니다’라는 엉뚱한 주장을 했다. 이 역시 일제 잔재다운 보도태도라 할 수 있다. 
문제는 해방 후 당연히 폐기됐어야 할 이 보안법이 그대로 존속한 것이다. 미군정은 일제 강점기 법과 제도를 그대로 수용했다. 1945년 10월 9일 미군정은 법령 제11호를 발표했다. 이 법령 제11호는 일제의 정치범처벌법, 예비검속법 등 7개 법안만 폐지하는 것으로 보안법과 불온 문서 취체령 등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제 잔재는 그대로 존속시키는 조치였던 것이다.(내무부 치안국, <미군정법령집> 1956)이 보안법은 해방 후 진보, 혹은 좌파 언론과 단체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활용된 한 것은 물
론이다. 이런 가운데 제주 4·3, 대구 10·1 사건 등이 발생했으며 결국 남북 분단의 결정적 요인이 되고 말았다.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고 모든 법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보안법도 국가보안법이라고 이름만 바뀌고 다시 제정됐다. 흔히 국가보안법을 1948년 10월 여순사건을 기화로 제정됐다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는 이 법의 역사적 실제적 의미를 간과하고 ‘법전적’ 의미만 판 단한 것이다.
이 국가보안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을 복기해 보자.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11월 6일 제97차 국회본회의에 참석해 국가보안법 제정 필요성을 강조하며 “1945년 10월 이후로 친일파에 대해 제일 말 많이 한 것이 공산당 사람인줄 압니다. 군정에서 그들(친일파)을 몰아내고, 경찰에서 그들을 몰아내는 등 열렬히 요구하는 사람이 그 사람(공산당)입니다”라고 주장했다.(국회사무처, 1948 제97호, 802) 친일파 청산을 요구하는 세력은 공산당이라는 엉뚱한 프레임을 만든 것이다. 과거 많이 회자됐던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말의 기원이 여기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 그렇지 않으면 빨갱이로 몬다’는 무서운 발상이 바로 친일청산을 두고 벌어진 것이다.
이런 발상은 2013년 3월 13일 박근혜 청와대가 뉴라이트 인사와 오찬 모임에서 그대로 재연됐다. 이날 오찬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백년전쟁>이라는 동영상에 대한 논의가 나왔다.
이인호 아산정책연구원장(후에 KBS이사장에 임명됐음)은 “이런 역사왜곡도 국가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친일청산과 역사정의를 세우자는 것이 무슨 국가안보와 관련이 있는가. 이런 발상은 종북몰이를 통해 눈엣가시를 제거하겠다는 과거 이승만의 발상과 일치한다. 이모임 이후 종편 등을 동원한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비난은 현실화됐다. TV조선은 “<백년전쟁>은 김일성 대남 문화공작과 흡사하다”고 매도했다. 정확히 일제 잔재의 반복이고, 이승만적 발상이었다.
또 하나, 국가보안법을 제정한 제헌국회 국회법사위원장이 바로 백관수 전 동아일보 사장이다. 그는 1937년 앞서 언급한 일제 경무국장 앞으로 ‘언문신문 지면쇄신요항’이라는 굴욕적인 서약서를 쓴 당사자다. 이후 국가보안법은 정적(진보당 당수 조봉암)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군사 쿠데타의 정당성을 미국에 인정받으려(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법살), 장기 집권을 위한 정치 분위기 조성용(인혁당 사건 등), 조직과 개인의 승진용 등으로 활용됐다.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희생된 것은 이미 많은 과거사 사건 재심을 통해 확인됐다.
결론적으로 국가보안법의 기원은 분단이나 이념 문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제의 조선 침략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일제 잔재일 뿐이다. 이를 정통성이 약한 권위주의 정권이 정치적으로 변질해 활용한 것일 뿐이다.
일제가 조선의 독립정신을 말살하고, 독립운동 세력을 이간시키려 만든 보안법이 지금 분단상황에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같은 민족끼리 서로 알지도, 만나지도 못하게 하고 오히려 증오하게 만드는 반통일의 핵심 악법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청산은 이념이나 분단의 문제가 아닌, 친일청산 작업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 2020/12/3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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줏대있는 중립이 우리의 몫이다

조회환 한국외대 명예교수(4월혁명회 회원)

 

 

이 땅 한반도에서 오천년 역사를 일궈온 우리민족은 당연히 한반도의 토박이고 주인이다. 우리의 무사안일과 외세의 침탈로 인하여 식민지나 분단이라는 쓰디쓴 역사도 있지만, 오늘의 북한 땅이나 남한 땅 모두 한 덩어리의 삶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갖은 곡절 끝에 지금은 미국과 중국 두 초강대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내 땅에 살면서 남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태도는 타파해야 하며 그 책임은 우리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이제 당당하게 주권을 찾아야 한다.
첫째, 우리 국민, 우리 민족의 주체성 확립이 선결조건이다. ‘근본이 서야 길이 생긴다’(本立道生)는 옛 성인의 말씀을 빌릴 필요가 없이, 우리가 피동적으로 남에게 끌려가거나 의탁하지 않고, 줏대 있게 사는 것은 우리의 당당한 고유권한이다. 우리는 지금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세계 10위 이내 강국 내지 중견국의 지위에 있다. 자생 자립 자위에 필요할 정도의 물질적 실력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정신적으로 다시금 ‘3.1 독립혁명정신’이나 ‘사월혁명정신’을 발휘하면 확실히 ‘자기확립’이 되는 것이다. 주인다운 주인이 되려면 타자의 간섭이나 강요는 배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초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상대적으로 약소함을 비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대국들이 우리를 서로 ‘자기 편’ 또는 ‘자기와 유대관계 유지’를 바라고 있는 것은 우리의 위치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인식의 반영임으로, 우리의 지혜 있는 대처가 ‘중요도’의 수준을 결정할 것이다.
둘째, 한반도가 강대국들의 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강대국들이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싸우고 말고는 우리와 상관없다.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설에 의하면 기존 강대국과 새로 부상하는 강대국은 전쟁으로 승부를 겨루는 경우가 ‘많다’는 설인데, ‘꼭 싸운다’는 말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요즈음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이 예사롭지 않다. 우리는 긴장이 된다. 그 이유는 ① 우리가 미국의 ‘동맹국’이기 때문에, 미중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가 동맹관계를 파기하지 않는 한, 자동적으로 미국과 함께 총을 들어야 하고, ② 내 땅에 주둔한 미군과 미군기지는 유사시 중국 측의 일차적인 타격 표적이 되어 미군도 다수 희생되겠지만, 우리의 인명과 땅 그리고 재산의 손실은 가공할 수준일 것이므로 우리도 마땅히 반격하게 되어 중국과는 중첩적으로 적이 되는 것이다. 이웃사촌과의 불화는 없어야 하는 것이다. 두 강대국이 자기들의 생존을 위하여, 서로 상대방의 본토 공격은 두려워서 전면전은 피하겠지만 주변지역, 특히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국지전의 위험은 있다. 왜 남들이 자기 땅은 놓
아두고 내 땅에서 싸우는가? 우리는 당연히 ‘반대’ 또는 ‘동조거부’ 자세를 취해야 하며 그러면 외세는 다른 편법을 찾거나 평화의 길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 국제평화를 위해 우리가 중심을 잡자. 더러는 한미동맹만 굳건하면 미국의 위세 때문에 ‘무사태평’할 것으로 착각하고 말끝마다 ‘ 굳건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라는 말만 앞세운다. 외세의존이 생리화된 심상의 노출이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가 영원히 의탁하기엔 ‘남이라는 한계’가 있고, 또 미국도 이미 중국 러시아와 더불어 3대 군사강대국중 하나일 뿐이다. 미국과 중국의 무력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비교의 기준은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 대칭적으로 비교하면, 핵무기의 경우 미국이 6천개 중국이 4백 개 정도라니 15대 1이다. 그러나 차이에도 불구하고 파괴력의 무섭기는 똑같아서 비교가 무의미하다. 또 비대칭적으로 보면 여섯 배나 많은 미국의 항공모함 수는 중국의 뚱펑-21, 26 등 ‘항공모함 킬러’ 앞에서는 이미 한물 간 무기라고 중국은 주장한다. 어떻든 전쟁은 서로 무서울 수밖에 없다. 설령 미국이 다소 비교우위에 있다 하더라도 전세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중국 격언에 “아무리 강한 용이라도
현지 토박이 왕뱀을 제압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미국은 원거리 원정이라는 공간적 불리함 때문이다. 월남전 등에서 미국이 패한 것은 약해서가 아니지 않는가? 이제는 우리가 중심국이 되어 전쟁은 말리자는 것이다. 사실 과거 열강들은 식민지화를 당연시해왔고 현지 민간인 대량학살이나 노예화는 다반사가 아니었던가 ! 이제 우리나라는 중견국이 되었고 또 국민의 결기도 대단하지 않은가! 우리가 일어서는 한 어느 나라도 단독으로는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수 없는 위치이다. 우리의 자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강대국들의 ‘경계적 관심’도 그렇게 만든다. 그래서 중심만 잘 잡고 중지를 모으면 더욱 확실하게 ‘세계의 중심국’까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부턴 세계의 스포트라이트(the Spotlight)를 받아가며 강대국들의 헤게모니 쟁탈행위를 막고 평화공존의 길로 가도록 견인할 책무와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넷째, 이제 강대국들에게 ‘잘못된 과거사’의 해결을 촉구하자 한반도의 분단은 미국의 제안과 러시아(당시 소련)의 동의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다. 원래 분할한다면 패전국이자 전범국인 일본을 분할 점령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상하게도 우리 땅 남과 북을 분할 점령하였으니 미소 양국이 애당초 잘못했던 것이다. 북한의 남침을 개탄하지만, 분단되지 않았다면 남침은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군은 일찍 철군했지만 그 대신 인접한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했고, 미군은 한국의 ‘동맹국’이라는 새로운 지위로 인해 한국주둔을 계속하고 있다. ‘안보’라는 이유로 ‘어떤 조건’ 동안 ‘장기 주둔’을 이해할 수 있으나 ‘너무 장기주둔’을
‘허용’하거나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분단의 폐단은 ‘통째 점령’ 보다 결코 더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일제 때는 맨 북쪽의 함경도와 평안도민부터 맨 남쪽의 전라 경상 제주도민까지 알게 모르게 한마음 한뜻으로 단결하여 서로 사랑하면서 국내외에서의 의병전투나 독립투쟁 등 대일항전을 하던 국민일체감이 살아있었다. 지금은 남북 동포간의 적대관계라는 ‘민족 내부의 불행’과 ‘외세에 대한 부담’이라는 2중의 장애에 직면해있다. ‘분할통치’(divide and rule), 그것은 제법 식자연할 용어이지만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인 ‘간악한 이간질’이며, 이간시킨 자는 손쉽게 ‘이간당한 자들’을 조종하니 우리의 비극은, ‘외세의존’에 타성(惰性)화된 자기망실 상태에 있으며 이대로 가면 거의 ‘영구적’으로 지배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묶은 자라야 (묶인 자를) 풀 수 있다’(結者解之)는 말은 지당한 얘기이다. 묶은 자가 풀어 주지 않는다면, 풀어줄 만한 제3자라도 있어야 하는데, 있기도 쉽지 않고, 있다 해도 ‘묶인 자’의 요청과 ‘묶은 자들’의 협조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묶은 자들을 향해서 풀어달라는 요구를 끝까지 관철하는 것이 관건(關鍵)이다. 국제정치에서는 ‘힘이 곧 정의’라는 악담이 난무하지만 ‘정의’가 꼭 없는 것도 아니고, 만약 없다면 있게 해야 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미국주도의 평화체제(Pax Americana)가 오래이다 보니 결함도 많았다. 그러나 이 체제의 핵심도 원래는 ‘평화’가 먼저이고 ‘주도권’ (hegemony)은 그 다음이다. 그 점도 미국에게 일깨워주어야 한다. 상생하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중심국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책무이다. 동시에 “단계적인 평화통일”이건 “연방제 평화통일”이건
남북은 자주적으로 허심탄회 얘기하여 통일된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통일의욕을 상실하고 분단생활에 안주하여 나몰라하면 점점 더 잘게 분열하고 콩가루가 되어 결국은 남의 손쉬운 먹이가 되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는 통일을 이루어 더욱 확실하게 줏대있는 중심국이 됨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국제평화도 주도해야 될 것이다.

수, 2020/12/30-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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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효창독립커피 4탄 김창숙 커피, 5탄 지청천 커피 출시

 

연구소는 일상 속에서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자 효창독립커피를 기획하여 4월 차리석 커피를 시작으로 이상룡, 권기옥 커피에 이어 12월 24일부터 김창숙 커피와 지청천 커피를 선보인다. 김창숙 커피의 디자인은 국외 독립운동유적지를 찾아 알리고 있는 사진작가 김동우 회원이 성균관대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안에 있는 김창숙 선생 동상을 촬영했으며 한글 글씨는 이진경 작가가 써주었다. 지청천 커피의 디자인은 이윤엽 판화가가 제작했다. 효창독립커피 구입은 hyochangmall.com(효창몰)에서 가능하다.

수, 2020/12/30-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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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노래로 만인보(萬人譜)를 엮어내다
– 가수 이지상을 만나다(1)

인터뷰 김종욱 기획위원

 

찌뿌드드한 하늘, 새벽부터 미세먼지가 잔뜩 끼어 하루종일 해를 볼 수 없었던 날, 가수 이지상 씨를 만났다. 역촌동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 흔히 예술인의 작업공간이라면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살짝 지저분함을 상상했겠지만 뜻밖에 그의 사무실은 너무나도 깨끗했다. 이런 걸 상상하진 못했는데……. 암튼 깔끔한 그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를 처음 본 건 28년 전인 1992년 그가 마지막 학생이던 시절이었다. 경희대학교 노천극장에서 통기타 하나를 어깨에 메고 정오차의 ‘바윗돌’을 부르던 모습이었는데, 그게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는 걸 보면 당시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첫 질문은 그의 가수생활에 대한 것으로 시작했다.

미세먼지가 자욱했던 날, 은평구 역촌동의 이지상 씨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 언제부터 노래를 시작하셨나요?

● 군대를 다녀오고 1989년에 국문과 노래패를 만들었어요. ‘궁상각치우’라는 이름의 노래패를 만들어 활동하면서부터일 겁니다. 노래패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그 활동이 잘 되니까 옆 과들도 노래패들을 만들기 시작했죠. 또 당시 단과대 학생회의 제안으로 단과대 차원으로 과노래패협의회(과노협)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게 모태가 되어서 ‘장작불’이란 단과대 노래패도 만들게 되었어요.

말 그대로 계통을 제대로 밟아가며 노래패를 만들고 조직화했던 모양이다. 그 당시는 학생회 활동, 학생운동이 융성하던 시절이었으니 가늠이 되었다. 이야기를 이어갔다.

● 어떤 계기로 그런 활동을 했나요?
● 따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과 노래패 ‘궁상각치우’를 만들었는데, 기타 칠 사람이 없다고 해서 기타 반주를 해 줬어요. 그러다가 노래패 회장을 하게 되었고, 과노협 회장도 하고, 단과대 노래패 패장도 했죠. 그리고 1991년도에는 ‘전대협 노래단’을 만들었고, 1992년 전대협 노래단 준비위원회가 ‘조국과 청춘’이란 노래패로 발전을 하게 되면서 거기서도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1998년 발매된 이지상 씨의 1집 앨범. ‘사람이 사는 마을’. ‘사이판에 가면’, ‘철길’, ‘방황’ 등 서정적이면서도 가사를 음미하며 들을 수 있는 좋은 곡들로 가득한 앨범이다.

 

그는 얼떨결에 노래패를 만들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음악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멋쩍은 듯 이야기했지만, 그의 활동 이력을 보면 그 당시 학생운동 차원의 노래운동, 문예패 운동의 중심에 그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답이다. 이후 그는 ‘노래마을’ 활동도 잠시 했는데, 주로 작곡과 세션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주로 작곡에 전념하게 되는데, 그의 표현을 빌자면 가수들이 자신을 찾지 않았다고……. 그래서 직접 자신의 곡을 알릴 겸 불러줄 가수를 찾을 겸 하여 본인이 직접 노래를 부르게 되었단다. 그 작업의 결실로 그의 첫 앨범 <사람이 사는 마을>이 나오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그의 가수활동, 음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 현재까지 총 여섯 장의 앨범을 발매하셨는데요. 혹시 지금까지 곡을 만들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노래가 있거나, 만들 당시 너무 힘들게 만들어서 생각나는 곡이 있을까요?

● 그거야 다 힘들고, 다 기억에 남죠. 어디 쉬운 것이 있었을 라고요? 생각해 보세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있겠어요?

사실 서로 알고 지낸 지 20여 년이 훌쩍 넘은 상황에 그가 그동안 발매한 앨범이 언제 나왔는지 훤히 알고 있는 필자의 질문이나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겠느냐는 화자의 답변이나 너무나도 틀에 박힌 질문과 답이었다.
그러나 이 인터뷰는 그를 잘 모르는 연구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 식상하지만 서로 처음 만난 사이인양 꾸며서 대화를 이어 나가야만 했다. 글 읽으시는 분들의 너른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 지금까지 발매된 앨범들을 살펴보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혹은 사실에 기반을 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많던데요. 그에 대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 글쎄……. 노래라는 것에 담길 것이 사람 말고 또 다른 게 있나요?
● 풍경이라던가, 아니면 가장 흔한 것이 사랑 이야기 아닌가요?
● 그렇긴 하지요. 그래도 사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거잖아요. 나는 백인보(百人譜)라고 해야 하나? 이를테면 백 사람 쯤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곡으로 만들어 기록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곡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내 노래 중에 ‘반성의 좌표’는 김남식 선생(통일운동가 김남식 선생 아닙니다. 다음 편에 자세한 이야기가 실릴 예정입니다), ‘사이판에 가면’은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할머니들 이야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항일 독립군 이우석……. 다 그런 기조에서 만들어진 노래들이죠.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잖아요?(웃음) 그런 사람들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들을 기록하는 게 내 일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작업하고 있어요.
● 그러네요. ‘보산리 그 겨울’이란 곡은 윤금이 씨를 생각하며 만드신 곡이죠?
● 예. ‘지친 날개를 접고’는 배달호 열사를 생각하며 만든 곡이고, ‘김득구’는 제목 그대로 권투선수 김득구를 생각하면서 만든 곡이고……. 그래서 내가 만든 곡들 중에 추모곡이 많아요

 

노래 테이프가 판매되던 시절, 집회나 행사 등에서 판매되던 지금은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노래패들의 이름들을 되뇌었고, 소중히 보관하던 노래 테이프들이 사라지게 된 사연까지 시간여행 하듯 옛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으며 잡담을 나누던 중 이지상 씨에게 전화가 와서 약 5분간 인터뷰가 중단되기도 했다.

 

● 최근에 6집 앨범을 발매하셨어요. 아직 전체적으로 다 들어보진 못하고 대표적으로 들어본 것 중에 ‘기차는 그 새벽을 떠났다’를 들었는데요. 그 곡을 들으면 러시아 민요 같은 분위기라 느꼈고, 다수의 독립 운동가들이 등장하던데요
● 그냥 흉내만 낸 거죠. 분위기만…….
● 그렇다면 6집 앨범의 전체적인 콘셉트가 따로 있나요?
● 콘셉트니 이런 건 없고요. 애초에 콘셉트니 목적이니 그런 거 잡고 만든다고 그 목적을 다 이루고 그러나요? 나는 지금까지 무슨 목적이니 하는 걸 정하고 앨범을 만든 적이 없어요. 오늘 하루하루가 중요하지.

이지상 씨의 사무실 한편에 놓여있는 앨범과 책들. 그 중 가장 최근에 발매된 그의 6집 앨범 <나의 늙은 애인아>가 눈에 띄었다.

 

● 그래도 앨범에 곡을 배치하고 담을 때는 무언가 제작자의 의도나 목적, 담고 싶은 무언가가 있잖아요?
● 음. 그런 걸 콘셉트라고 하면 그런 건 있죠. 하지만 가끔은 신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의미도 있고 그런 거죠. 이번에는 제가 시베리아를 여러 번 다녀왔으니까 시베리아 이야기가 많이 담겼죠. 내 활동의 반영인 거죠.
● 그동안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고 다녀오셨던 것 말씀하시는 거죠?
● 그렇죠. ‘보드카’라는 곡도 있고요. 그런 게 콘셉트라면 콤셉트고, 그런 것들을 담은 음반이죠.
● 그동안 ‘희망래일’이라는 단체 활동을 하면서 대륙횡단열차 타고 시베리아를 다녀오신 활동의 결산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 그렇죠. 그런 활동의 정리라고 할 수 있죠. 우리가 대륙을 꿈꾸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자주적인 통일? 이런 것까지 꿈 꿔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곡으로 ‘새의 날개는 누가 대신 달아주지 않는다’ 이런 곡도 넣고 그런 거죠.
● 아! 말씀 듣고 보니까 작년에 책을 새로 한 권 출간하셨잖아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이었던가요? 이 앨범 내신 것과 일맥상통하는 게 있나요?
● 그것과는 좀 거리가 있어요. 2018년에 4.27 판문점 선언 이후에 북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북한바로알기 붐이 일었잖아요? 기획 글을 담아보자는 차원에서 출판사의 제안이 들어와서 내가 글을 쓰기로 했어요. 그런데 우리들이 북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찾아보니 현재 대부분 나와 있는 자료들이 대북사업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나 탈북자들의 증언들이 대부분인 거예요. 이런 분들 만나서 인터뷰하고 그걸 정리해서 글을 쓰는 게 맞나? 싶은 의구심이 들었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공부하고 찾아서 내가 글을 쓰겠다고 해서 궁금한 것들, 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싶은 것들을 찾아서 쓴 거죠.

2019년 9월에 출간된 이지상 씨의 책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그는 이 책에 대해 북과의 평화를 원한다면, 대화하고자 한다면 먼저 현재 서로가 겨누고 있는 총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30여 년 전, 한창 ‘북한 바로알기 운동’ 차원으로 <사람이 살고 있었네>, <더디 가도 사람 생각하지요> 등의 책들이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많이 읽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엔 북에 대한 정보가 거의 전무한 상태라 북에 직접 다녀 온 이들의 책들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는 당시 들불처럼 번졌던 대학생들의 통일운동의 한 방편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탈북한 이들이 주로 종편 채널에 출연해서 이야기하는 단편적이면서 왜곡된 이야기들과 심지어 북을 탈출해 온 북의 고위관료가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공공연하게 떠드는 이 역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통해 그것이 진실인양 북에 대한 정보를 접하는 시대가 되었다. 필자는 북에 대해 긍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는 시각과 또 한편으로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려는 시각, 이 둘 사이의 편향을 걷어내고 조금은 객관적 입장에서 북을 바라봐야 하고, 있는 그대로의 북을 조망할 수 있을 때 좀 더 합리적이고 많은 이가 동의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통일이 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그런 요지의 질문을 던졌는데, 그의 답은 조금 달랐다.

● 나는 객관적인 시각이니, 균형 잡힌 시각이니 하는 말을 믿지 않아요. 어떻게 사람이 객관적인 시각으로 상대방을, 피조물을 설명할 수 있죠? 그런 건 다 거짓이에요. 어떻게 인간이 균형을 잡으면서 객관적으로 살 수 있겠어요? 이 넓디넓은 지구에서 두 발로 서 있는 것도 버거울 지경인데, 무슨 재주로…….내가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게 대중들에게도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나? 난 그런 자신은 없어요. 우리가 평화를 지향한다고 하면, 또 북을 통일을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먼저 맞대고 있는 총을 치워야 할 것 아녜요? 그리고 이야기할 때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도 해야죠. 그러려면 서로 우호적인 관계여야 가능한 거죠.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른 쪽에서는 속칭해서 ‘북한을 칭찬한다.’ ‘시각이 편향적이다’고 지적해요. 하지만 내 생각엔 그렇게 이야기하는 건 평화하지 말자는 거라고 보이거든요. 전 세계 어디를 가 봐도 우리나라 분단선처럼 살벌한 데가 없다고 생각해요. 민통선 지역 양쪽으로 지뢰가 수없이 매장되어 있고……. 원래 편하고 친한 관계라면 그렇게 국경선이 살벌한 풍경이면 안 되는 거거든요. 평화를 하자면 친해져야 하는 거예요. 친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서로 욕은 하지 말아야지. 그 책은 그런 취지의 책이에요. 나름 재미있는 구절이 꽤 많은 책이에요.(웃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인간이란 동물이 어떻게 자기 주관을 거두고 완벽한 객관의 입장에서 사람과 사물을 판단하고 그에 대해 평론할 수 있을까? 소위 객관적이라는 말로, 균형 잡힌 시각이란 말로 자신의 입장과 소신을 밝히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가 신이 아닌 다음에야, 또 감정이 배제된 AI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사람이 그런 입장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 점점 그의 이야기에 빠져 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다음호에 계속)

수, 2020/12/30-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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