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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 연구소 교원연수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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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 연구소 교원연수 실시

admin | 금, 2021/08/27- 02:56

[초점]

상반기 연구소 교원연수 <‘일제잔재’의 사례와 수업 활용> 실시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초·중·고 현직 교원을 대상으로 하는 직무연수가 8.10~12일 사이에 민족문제연구소 강의장에서 비대면 온라인 강의로 진행되었다. 연구소는 2019년부터 경기도의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용역을 수행하며 방대한 보고서를 발간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기초로 하여 지역사회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의 교사용 학습 부교재 <우리 지역 일제잔재를 찾아라>를 출간하였다.
이번 연수는 교육현장에서 이런 결과물을 활용하고 역사의식의 제고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선생님들의 바람이 반영된 프로그램이었다. 역사 등 사회과 과목을 주로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참여하여 일제잔재와 친일문제를 이론과 실제 양 측면에서 접근 분석하고 효과적인 교수법 수립에 도움을 주고자 기획된 것이다. 내용은 1강 일제잔재란 무엇인가?(조재곤서강대 교수), 2강 경기지역 일제잔재의 현황과 수업 활용(신대광 모락중학교 교사), 3강 서울 지역의 일제잔재-기념물(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4강 오욕의 역사, 금단의 땅 용산(현지 답사, 이순우), 5강 친일 관련 사료 검색과 디지털 아카이브 활용법(장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6강 박물관 유물과 자료로 본 친일의 역사(김승은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이었다.
실습, 답사, 관람, 토론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현장 연수를 운영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 방역단계가 4단계로 격상되어 모두 온라인 비대면 원격 강의로 진행하였다. 특히 용산지역 답사는 현장을 동영상으로 담아와 보여주고, 박물관 관람은 자료이미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했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방학중이라 3일간 15시간으로 이뤄진 강행군 강의였지만, 참가 선생님들은 3일 내내 엄청난 열의를 쏟아내며 호응해주었다. 선생님들의 반응은 “더 많은 동료 교사들이 함께하면 좋겠다”며, 연구소의 연수 프로그램이 “전국 모든 학교에 알려져”, “많은 이들이 참여하여 현장에서 적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냈다. “일재잔재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하게 되었고 새로운 접근방법을 알게 되어 좋았다”며 “늘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시간이 아깝지 않은 연수”라는 반응을 접하며 굴절된 역사를 바로세우는데 함께할 수 있는 더욱 알찬 프로그램으로 교사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가까이 다가서길 기대해본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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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미얀마 민주화투쟁과 연대하다

―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로부터 듣는 미얀마 민주화투쟁

인터뷰 : 노기환 MC
정리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이번 호의 인터뷰는 최근 팟빵과 유튜브에 업로드된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내역사)’의 <미얀마투쟁과 연대하다>를 발췌 정리하였다. 내역사 시즌6의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시민의 투쟁’ 2부작 중 첫 번째 이야기로 민족문제연구소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가 공동 제작하였다. 인터뷰는 4월 23일 연구소 5층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출연자는 내역사 전문 MC 노기환과 연구소 연구위원이자 경희대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민철,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공동대표 흘라민툰(HlaMIn Tun), 헤이만(Hay Man)이다. 2월 1일 시작된 미얀마 군부 쿠데타에 맞서 미얀마 시민들의 목숨을 건 민주화투쟁이 3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공동대표 두 분으로부터 미얀마의 상황,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들어보았다. 군부의 무자비한 학살과 탄압에 맞서는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에 적극적인 연대와 지지를 보낸다. <미얀마투쟁과 연대하다> 동영상은 팟빵과 유튜브에서 ‘내역사 미얀마청년연대’로 검색하면 시청할 수 있다.

 

MC노 │김민철 교수께서 오늘의 방송 주제를 제안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민철 │두 가지 이유인데요. 하나는 1980년 광주에서 참사가 일어났을 때, 군부에 의한 학살이 일어났을 때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부산에 살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광주에서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런 소식들만 들었거든요. 언론이 통제된 시기였으니까요.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광주 참사의 실체를 알고, 특히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이 거꾸로 국민을 향해 총을 쏘고 학살했다는 것에 몹시 분노했습니다. 제 20대는 광주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 기억이 되살아났고요. 직접적으로는 19세 젊은이 마째신이, 티셔츠에 ‘everything will be OK’라는 문구를 쓴 청년이 아침에 아빠한테 시위에 참가하겠다고 인사하고 나가서 저녁에 시신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제 사고가 멈췄습니다. 며칠 동안 마째신의 얼굴이 제 머릿속에서 계속 떠올랐고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하자고 제안했습니다.

MC노 │이 자리에는 김교수와 함께 두 분을 모셨는데,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대표 흘라민툰씨와 헤이만씨입니다. 민툰씨는 대한민국에 언제 오셨습니까?

민툰 │ 저는 2006년도에 대학교에 와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부산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
고 취업했습니다.

왼쪽부터 노기환 MC, 김민철 교수, 흘라민툰 대표, 헤이만 대표

MC노 │ 전공은요?

민툰 │ 경영학 박사인데요. 미얀마에 투자하는 한국기업의 성공요인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나중에 미얀
마 가서 관련된 일이나 사업을 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쿠데타가 터져서 앞날이 너무나 막막합니다.

MC노 │ 헤이만씨는 학생이신가요?

헤이만 │ 저는 현재 경희대학교에서 아동학 석사과정에 있는 수료생입니다.

MC노 │ 헤이만씨는 언제 오셨습니까?

헤이만 │ 저는 2018년 하반기에 왔습니다. 3년 되어갑니다.

MC노 │ 김민철 교수님, 두 분과는 어떤 인연인가요?

김민철 │ 특별한 인연은 없습니다. 경희대에서 교직자들부터 성명을 내야겠다 생각하다, 학교에 미얀마 유학생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알아보니 헤이만 학생이 수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수업시간에 학생에게 특강을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MC노 │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는 어떤 조직입니까?

헤이만 │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는 2월 3일 결성되었고 2월 7일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의 시민단체인
KOCO(해외주민운동연대)와 연대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로서 기자회견, 기도회, 시위, 학교특강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MC노 │ 최근엔 어떤 활동을 하고 있죠?

헤이만 │ 기자회견, 한국의 종교단체들과 협력해서 기도회 참여, 지난 3월에는 오체투지도 함께 했고,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하는 조계종 스님들의 미얀마 특별입국 신청, 3월 27일 미얀마 국군의 날에도 미얀마민주주의 네트워크에서 주최하는 ‘미얀마 봄의 행진’을 함께 했습니다.

MC노 │ 지금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는 몇 분이 함께 하고 있습니까?

헤이만 │ 아직 규모가 작아요. 인원이 20명 정도입니다.

MC노 │ 미얀마 현지 상황은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민툰 │ 지난 주까지만 해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뉴스를 많이 들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많은 지역이 와이파이나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인터넷이 될 때 와이파이가 잡히는 장소에서 사진이나 동영상 뉴스를 올리면 저희가 한국 쪽에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에 전하고 싶거나 미얀마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싱겔, 텔레그램 같은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해서 뉴스나 정보를 듣고 있습니다.

MC노 │ 두 분은 고향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들으면 많이 괴로우시죠?

헤이만 │ 저도 집에 연락할 때는 주로 국제통화를 사용하고 있어요. 제 고향은 큰 도시가 아니어서 인터넷이 거의 안 되는 지역이어요. 그제는 동생이 이모가 계시는 지역으로 잠깐 왔었다고 해요. 동생이 시민불복종운동에 참여하고 있어요. 여기는 CDM이라 많이 부르고 있어요.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체포한다는 소식을 듣고 잠깐 피하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다른 지역보다는 좀 안전한 편이어요.

MC노 │ 오늘이 4월 23일인데, 지금 미얀마는 어떤 상황입니까?

민툰 │ 가면 갈수록 사상자도 많이 생기고, 전에는 인터넷이 잘 돼서 어느 지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로바로 확인이 가능했습니다. 정보를 알 수 있으면 피해가거나 미리 대비할 수 있는데 지금은 정보가 잘 파악되지 않으니 활동이 많이 끊긴 상태입니다. 그래도 시민불복종운동도 열심히 하고, 각지역마다 시위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처럼 많이 하지 못하지만요. 양곤에서는 밤에 냄비를 두드리는데 8시에 두드리기로 약속되어 있으면 7시 30분에 군인이 와서 지켜보고 있어 냄비를 두드리지 못하다가 군인이 가면 두드립니다. 군인이 없는 지역에서만 시위를 계속 하니까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지금은 시위대를 체포하는 것이 아니라 총을 바로 쏘기 때문에 나중에 인터넷에 사진이나 동영상이 나올 때만 확인할 수 있어 더 불안한 상태입니다. 전처럼 바로바로 정보를 알 수 없어서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MC노 │ 미얀마 현대사에서 최초의 쿠데타가 일어난 게 언제였습니까?

민툰 │ 최초의 쿠데타는 1962년 3월 1일 네윈 장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MC노 │ 쿠데타 이전의 정부는 어떤 정부였습니까?

민툰 │ 미얀마는 1948년 1월 4일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습니다. 영국은 미얀마에 소수민족이 많으니까 부족 간의 이간질을 통해 지배했습니다. 2차 대전 때인 1942년에 미얀마는 일본을 끌어들여 영국하고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처음에 도와준다고 들어왔다가 오히려 3년간 미얀마를 지배했습니다. 1945년 8월 전쟁에서 지자 일본이 미얀마 땅에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영국이 다시 미얀마에 들어와서 식민지를 다시 만든 거죠. 그러나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 독립을 주장했습니다. 영국이 버마인 따로 소수민족 따로 독립시켜주겠다 하자 아웅산 장군은 같이 독립해야 한다고 맞섰고 이에 1947년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함께 독립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독립 6개월 전인 1947년 7월 아웅산 장군이 암살당했습니다. 미얀마 독립 당시의 정치상황이 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미얀마에선 ‘우누시대’라 부르는 시기입니다. 우누는 아웅산 장군과 절친한 사이로 함께 독립운동을 했었습니다. 우누가 10년 정도 총리를 하면서 정치를 잘 했습니다. 그러나 서로 간의 분열이 생겨서 네윈 장군이 1962년 3월에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네윈의 주장은 미얀마의 군인은 독립군이다. 혼란스런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군인이 나라의 정권을 잡았다고 했습니다. 1962년 3월에 첫 번째 쿠데타 이후 1988년에도 한 번, 올해 한 번 더 똑같은 방식의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MC노 │ 두 분은 한국에 있을 때 고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헤이만 │ 제 카톡으로 많은 메시지가 왔어요. 확인해보니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며 한국의 지인이 미얀마 현지직원과 저의 안부를 묻는 걸 통해 알았어요. 오전 쿠데타 발생 때 모든 통신이 마비되었는데, 해외 거주인들은 가족과 연락이 안됐다가 오후 1시가 되어서야 국영방송에서 쿠데타 발생소식을 보도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걱정했고 한국의 지인은 난민신청을 해야 하지 않냐고 묻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 쿠데타를 겪어보고 외국에 있는 상태에서 난민신청 이야기까지 나오니까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 되고 멍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민툰 │ 사실 1월 말부터 쿠데타 이야기가 나오긴 했었는데, 이 시대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죠. 그런데 2월에 쿠데타가 일어나니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저는 군사정권시대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시대에 많은 아픈 기억이 있어요. 미얀마에 민주주의 시대가 다시 열린 것은 2010년부터 2020년까지 딱 10년밖에 안 되었습니다. 2010년 이전에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의 신세대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지만, 저희는 정치 이야기만 해도 잡혀가는 시대였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시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화도 많이 나고 분노가 일었습니다.

MC노 │ 미얀마 투쟁 보도에서 보이는 Z세대는 어떤 세대를 의미합니까?

헤이만 │ 1995년 이후 출생자들입니다. 이십대 젊은이들입니다. 그 이후는 알파세대, 그 이전은 Y세대, 1988년 이후는 X세대 이렇게 부릅니다.

MC노 │ 투쟁과정에서 Z세대가 많은 역할을 하는데, 그 세대는 미얀마 사회에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헤이만 │ 2010년부터 2020년까지 10년간 민주주의를 맛본 세대라 할 수 있죠. IT기술이 개발된 시대에서 자라왔고, X, Y세대보다 더 기술적으로 인터넷을 활발하게 사용하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세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민툰 │ 2010년 전까지는 군사정권 시대여서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시대의 Z세대는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보기엔 Z세대가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는 목표도 없고 늘 게임만 하는 친구들로 보였어요. 우리처럼 군사정권시대를 안 겪어본 신세대가 너무 가볍게 보였기 때문이죠. 그러나 Z세대는 민주주의를 다 누릴 수 있습니다. 한국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국제사회에 있는 젊은이들하고 같이 어울릴 수 있어요. 교육도 많이 받고, 인터넷에도 익
숙하기 때문에 정보에 접근하는 데에도 두려움이 없는 세대죠. 이번에도 쿠데타가 일어나니까 우리 X, Y세대는 겁이 나서 밖에 나와 데모도 못하는데 Z세대는 데모했어요. 부모님이 반대하면 나가서 몰래 데모하다 잡히거나 죽은 사람들이 많이 발생한 거죠. Z세대는 자유롭게 표현하고 용감하게 싸울수 있는 미얀마의 새로운 젊은 세대입니다.

MC노 │ 2월 1일 쿠데타 이후에 시민들의 투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나요?

헤이만 │ 가두시위가 처음 발생한 것은 2월 4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72시간 동안의 침묵이 있었습니다. 왜냐면 신고 없이 불법적으로 길거리 시위에 나가면 군부에 진압명분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냄비를 두들기는 행위는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밤 8시가 되면요. 첫 번째 가두시위는 2월 4일에 만달레이라는 제2의 도시에서 만달레이 의대생들과 외국어대학생들이 나와서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의 거리 시위를 주도한 사람은 떼자산이라고 만달레이 의대 출신 의사입니다. 그분의 주도로 계속해서 길거리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번 시위에서는 Z세대의 활약이 매우 큽니다. Z세대는 IT 기술을 능숙하게 활용할 줄 알기에 쿠데타에 대해서 전 세계에 소식을 알리는 데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미얀마의 인터넷은 페이스북으로 대표됩니다. Z세대가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를 해외에 알리려 했을 때 인터넷을 잘 활용했던 거죠.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활용해서 영어라든지 여러 가지 외국어를 잘 구사할 줄 아니까 다국어로 다 알리는 거죠. 트위터에서 실시간으로 소식을 전하고 또 바이컷앱을 개발하여 친군부 기업에 불매운동, 사회적 처벌을 할 수 있게 리스트를 만들어주고, 여러 가지 정보를 한군데에서 볼 수 있게 데이터를 만들어 주었어요.

MC노 │ 말씀 중에 사회적 처벌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민툰 │ 사회적 처벌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군사독재 정권을 만들어 국민을 통치하잖아요. 군부에 불복종하고 반대하는 방법의 하나로 군부와 관련되는 장군이나 그 가족을 페이스북에 알리고, 군부가 운영하는 사업체의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 군부가 관련된 기업에서 파는 식품이나 제품을 사지 말자는 것이 사회적 처벌입니다. 리스트를 보면 먹고 마시는 것의 거의 절반이 군부와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제품을 사지 말자 하면 국민들이 다 안 삽니다. 얼마 전에 A라는 음료수를 사지 말자 해서 사회적 처벌 바이컷 대상이 되는 음료수가 안 팔리니까 B라는 제품으로 포장해서 50% 할인해서 팔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B제품을 사서 포장을 풀어보니 A제품을 B제품으로 속여서 판 것이 탄로 난 것입니다.
미얀마에는 사회적 처벌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쿠데타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죠.
저희들은 되도록이면 불매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또 저희는 중국제품을 불매운동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얀마쿠데타를 중국이 많이 도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되도록 중국제품을 안 사고, 미얀마에서 생산하는 물건을 쓰자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같이 시위도 하고, 불매운동도 하면서 다방면으로 군부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MC노 │ 유엔 등 국제사회가 제대로 나서지 못하는 것이 중국을 비롯한 나라들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민툰 │ 예, 중국과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에서 미얀마 군부 제재를 통과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의 내부 문제이기 때문에 간섭하지 말자는 거죠. 중국은 미얀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미얀마의 자원을 수입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를 도와주고 있다고 봅니다.

김민철 │ 국제관계적으로는 미중 대립으로 볼 수 있죠. 중국은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습니다. 동지나해 쪽으로는 타이완과 베트남인데 사이가 좋지 않죠. 미국은 중국을 봉쇄하기 위한 전략으로 진주목걸이 전략을 수립하고 있는데, 중국이 인도양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미얀마를 통해서죠. 미얀마 군부하고 관계도 좋고, 경제적으로는 송유관이 바로 연결되어 중국의 대외전략으로는 미얀마를 자기편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MC노 │ 시위대에 처음으로 발포한 것이 언제죠?

헤이만 │ 2월 9일입니다. 네피도에서 뮇떼떼 칸시라는 19세 여성이 머리에 총을 맞았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강경진압이 심해졌어요. 처음에는 인터넷을 사용해서 국제사회에 관심을 일으키기 위한 퍼포먼스 위주로 시위했는데, 유혈사태가 발생한 후부터는 가두시위가 더 강화되고 군부의 강경진압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면서 시위 유형도 바뀌었습니다. 무인시위로 사람이 나서지 않고 피켓을 세운다든지 갤러리 식으로 진행하고 있어요. 만달레이에서는 연좌농성이 있었고, 4월 4일은 부활절이어서 이스터 스트라이크라고 계란에 그림을 그려 활용한 시위, 플라워 스트라이크라고 ‘봄의 혁명에서 집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영혼들을 위해서’라는 제목으로 신발 안에 꽃을 꽂아 길가에 놔두는 시위 등을 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는 점점 상황이 악화되자 국민들이 반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새총, 화살, 화염병, 공기총, 뚜미(옛 화승총) 등 사카이주와 친주에서 이런 도구들을 많이 사용하자 군부는 이 지역을 집중적으로 탄압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싸움이 더욱 심각해지고 사망자와 피난민이 많이 생겼습니다.

한국에 있는 미얀마 유학생과 근로자 등으로 구성된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MC노 │ 미얀마 내의 무장단체들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민툰 │ 무장단체들은 1962년 쿠데타 이후 생겼어요. 미얀마 안에는 8개의 소수민족이 있는데, 각 소수
민족마다 각각 1~10개 정도의 무장단체가 있습니다. 지금은 20~100개 정도가 있습니다. 20개 정도의 무장단체들은 전부터 군부에 대항하여 싸웠는데, 군사정부 시대인 2000년 이후에는 평화협정을 맺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지금은 다시 폭력사태가 발생하고 지역주민이 사망하게 되자 까친주와 까 인주의 무장단체들이 투쟁에 참여해서 정부군과의 내전이 발생했습니다.

헤이만 │ 군부는 전투기까지 투입하고 수류탄까지 사용해가면서 시민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MC노 │ 오늘까지 희생자가 어느 정도 되죠?

헤이만 │ 4월 22일 기준으로 사망자 수가 779명, 그 중 총상 사망 건이 741건이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겁니다. 실제로는 800명이 넘을 것 같습니다.

MC노 │ 남녀차별과 관련한 미얀마의 독특한 풍습을 이번 싸움에 활용한다고 들었어요.

헤이만 │ 미얀마는 남녀차별이 좀 심한 편입니다. 파고다(절)에 가면 신발을 벗어야 하는데, 여자가 갈 수 있는 곳과 남자가 갈 수 있는 곳이 구분됩니다. 여자가 갈 수 있는 곳이 제한되어 있어요. 예를들어 절에 가서 불상에 금박을 입히거나 할 때는 여자가 못합니다. 그러면 남자한테 부탁해서 금박을 입혀야 해요. 이런 것을 이번 시위에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남녀의 하의를 같이 빨래하지 않아요. 그러면 남자의 품위, 자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여자 속옷을 빨래하면 널어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보이는 곳에 공개적으로 널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이번 시위에서는 군경들이 시위대를 잡으러 오니까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치마 거는 빨랫줄을 만들었어요. 높은 빨랫줄 위에 여성 치마를 널면 군인들이 그 아래를 지나가야 하는데 여자의 하의를 스치거나 만지고 지나가면 부정 탄다고 생각해서 그 아래로 지나가지 못하고 빨랫줄을 치운 다음에야 지나갔어요. 빨랫줄이 바리케이트 역할을 해준 겁니다.
그런데 Z세대와 시위참여 시민들은 이제부터는 성차별을 없애야 한다며, 3월 8일은 세계여성의 날인
데 미얀마의 남자들이 머리에 여성 치마를 두르거나 몸에 걸치고, 또 입은 사진들을 SNS에 많이 올렸습니다.

MC노 │ Z세대가 시위뿐만 아니라 미얀마에서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고 있군요. 군부가 저지르는 만행이 국제사회에 큰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를 말씀해 주세요.

헤이만 │ 군부가 1988년에 했던 짓을 똑같이 벌이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사람들을 분열시키려 하고, 미얀마는 다민족국가인데 인종적으로도 차별하며 버마족과 소수민족을 이간시키고 있어요. 시위대를 잡아다 고문하며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가하고 있어요. 오늘 아침에는 삐퇀시베다운이라는 지역에서 경찰서를 불질렀는데 범인을 잡아내기 위해 두 살짜리 아이가 보고 있는 가운데 부부에게 고문을 가했어요. 아이를 인질로 해서 자백하도록 강요한 거죠. 결국 실토하고 잡혀갔는데, 그 아이는 엄마, 아빠 이름을 계속 부르며 울고 있답니다. 시위 사상자 중 10~20대가 40%에 이를 정도로 젊은 사람들이 많아요. 지지난주 양곤에서 시각, 청각장애인이 사는 곳을 군부가 점령해서 반격을 못하게 인질로 삼고 인간 방패로 썼어요. 꺼떤에서는 대학생들이 시위를 많이 했고, 잡혀가서는 고문을 당하고, 여성들은 고문 트라우마가 심각해서 말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해요. 모래주머니로 바리케이트를 만들었는데, 총을 겨누며 동네 사람들에게 그걸 치우게 합니다. 발로 차고, 때리고, 여성을 폭행하고, 너무 심각한 고문을 가하고 있습니다.
국영방송에 나오는걸 보면 체포당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엉망이고, 밤에 잡혀갔는데 아침에 시신 가지러 와라 이런 통보를 받아요. 어떤 사람들은 잡혀갔는데 생사가 불분명해요. 민간의 재물을 가져가고, 식당에서 먹고는 음식값을 내지 않고 다 파손시키고, 아무 이유도 없이 길가에 주차된 차량이나 자전거를 부수고 하는 영상들이 많이 올라옵니다. 군인들이 긴 시간 동안 군대에서 고통을 받아와서, 세상에 나와 보니 민간인들이 자기들보다 더 잘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무 이유없이 분노를 폭발시킨다고 보고 있죠.

MC노 │ 지금 미얀마 국민들이 원하는 건 무엇인가요?

헤이만 │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구금된 지도자들이 석방되며, 민주주의를 달성하고 민주주의에 기반해 국민통합정부가 성립하는 것이 국민들의 목표입니다. 저희가 1988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기 때문에 쿠데타에 대한 저항이 성공할거라고 강하게 믿고 있습니다. 시민불복종 운동도 더 강화되고 있고, 시민방위군이 생기면 시민들도 합류해서 저항하겠다는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민툰 │ 민족연합이 우선입니다. 풀리지 않는 민족 간의 화합이 필요한데, 이번 쿠데타에 대한 저항에 소수민족이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민족통합국가를 만들자는 생각입니다. 소수민족의 입장을 서로가 이해하고 평화협정을 맺어 1947년에 아웅산 장군이 추구한 그런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헤이만 │ 미얀마는 불교국가여서, 이번 쿠데타에 대한 종교 지도자의 명확한 입장을 기대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유혈진압이 심해지고 사망자가 발생하고 나서야 애매모호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것에 대해 젊은이들의 신뢰가 깨지고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한국 불교계는 많이 지지하고 연대해주셨는데요.

MC노 │ 아웅산 장군은 어떤 분이십니까?

민툰 │ 아웅산 장군은 부잣집에서 태어나고, 배운 사람인데도 젊은 나이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나라를 위해 일하신 분입니다. 미얀마 사람들은 영웅 중에도 길이 이름을 남긴 분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MC노 │ 미얀마는 다민족 국가여서 민족별로 평가가 조금 다르지 않나요?

민툰 │ 아웅산 장군은 민족통합을 이뤘기에 모두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그
분의 딸인 수치 여사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또 하나, 미신 문제를 잠깐 말씀드릴게요. 1983년 아웅산 묘역 테러가 일어났을 때에 미신을 믿는 네윈이 제 시간에 국립묘지에 가지 않았어요. 미신을 많이 믿고 있어서 늘 일찍 가거나 늦게 가거나 하지, 제 시간에 가지 않았어요. 네윈 장군이 도착하기 전에 폭탄이 터져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지금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의 장군들도 미신을 많이 믿고 있습니다. 특히 목요일에 ‘ㅁ’으로 시작하는 도시에서 늘 유혈진압이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의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지금 장군 이름이 미엉라잉으로 ‘ㅁ’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점쟁이가 시위대의 머리에 총을 쏘면 시대를 바꿀 수 있다고 하니, 저격수를 배치해서 머리만 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망자가 많이 나왔어요.

헤이만 │ 더욱 충격적인 것은 스님이 점을 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거죠. 종교인의 이런 행동에 더욱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MC노 │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의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요?

헤이만 │ 저희는 유학생과 근로자로 구성되어 있어요. 한국에도 여러 단체가 있고, 민주화운동을 하는
단체도 많이 있습니다. 저희는 시민단체로서 작은 역할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기자회견, 추모회, 기도회 등 종교단체들과의 연대활동을 해왔습니다.

민툰 │ 미얀마에 대한 소식을 한국과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는 플랫폼이 될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클
럽하우스에서 미국, 영국, 한국 사람들과 미얀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미얀마에 대한 소식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쿠데타를 일으킨 군사정부가 빨리 유혈사태와 진압을 멈추고 협상할 수 있는 날까지 계속하겠습니다. 또한 쿠데타가 수습되고 나면 미얀마의 복원에도 힘쓸 생각입니다.

MC노 │ 한국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는 연대활동은 무엇이 있을까요?

헤이만 │ 후원금 모금인데, 해외주민연대 KOCO를 통해서 참여해주시면 됩니다. 다음에는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릴레이 영상을 만들어서 KOCO에 보내주면 됩니다. 그러면 저희가 영상에 미얀마어 자막을 넣어서 현지 커뮤니티와 공유합니다. 그 외에도 일요일마다 인사동에서 오전 11시 반부터 오후 1시 반까지 침묵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한국의 지지자들이 함께 와서 연대해주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엽서와 마스크를 제작해 판매하고 있는데,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민툰 │ 한국인들이 많은 후원을 해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고등학교에 가서 미얀마 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면 많은 학생들이 지지하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줘요. 이걸 미얀마에 전하면 큰 힘이 됩니다. 시위에 앞장서고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한국 사람들의 지지가 많은 힘이 됩니다. 후원금을 보내는 것도 좋고, 세손가락 경례 사진을 찍어 올려주고, 응원 메시지를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김민철 │ 미얀마는 공무원에게 주택이 보장되어 있는데, 정년 후에도 계속 살 수 있어요. 군부에 반대하면 집에서 쫓겨나게 되니, 주택지원도 필요해서 후원금이 여기에도 쓰인다고 합니다. 저항이 길어지면 난민이 많이 발생할 수 있는데, 태국 근처에 난민 수용소가 세워지게 되면 그 비용도 필요하고요. 후원금이 여러 가지로 활용되리라 보입니다.

헤이만 │ 처음에는 시민불복종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활동을 해왔지만, 지금은 피난민 지원금, 시위대 보호장비 구입, 의료비 등에 지원할 것입니다. 현재 미얀마의 의료수준이 한국에 비해서는 덜 발달해 있어서 쿠데타가 수습된 이후에는 쿠데타 때 입은 트라우마 치료에 한국의료계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MC노 │ 미얀마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예상할 수 없지만,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민철 │ 제가 헤이만씨를 초청해서 특강을 개최했는데, 특강 제목을 ‘미얀마에 귀 기울이다’로 잡았습니다. 그 이유는 1980년 광주로 돌아가서 봉쇄된 도시에 고립된 사람들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누군가 밖에서 그런 소식들을 계속 알려주고 연대의 마음을 전했더라면 조금은 힘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죠. 지금 미얀마는 길어질 싸움을 하고 있고 너무나 힘들고 지치기에 낙관적 전망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국 시민들이 미얀마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억하며 이들의 민주화투쟁을 적극 지지해주었으면 합니다.

MC노 │ 세손가락 경례를 개인 SNS에 올려주어도 큰 힘이 된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많은 분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지를 바랍니다. 미얀마 국민들의 투쟁이 승리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목, 2021/06/0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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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흙비

김해규

세월호 7주기였다
7년 전 오늘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에
비가 내렸다
그날
병풍도 북쪽 20km 맹골수도에도 파도가 일었고
가끔씩 비도 뿌렸다
철썩이는 파도소리에 실려
기울어가는 여객선 속에서 비명이 들렸다
“엄마, 엄마 숨막혀 …. 보고 싶어”
아, 가슴에서 천불이 났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졌다
생때같은 아이들 목숨이 아래로 깊이 가라앉을 때
성형한 얼굴로 깔깔대며 드라마에 몰두했던 사람이 있었다
서초동 룸싸롱에 앉아 갖은 음모와 술수로 희락하던 놈들도 있었다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쳐 나와 소주 한잔 들이키며 안도하는 놈들
팽목항 어귀에서 꺼이꺼이 울어대던 부모와 가족들을 조롱하고 모독했던 놈들
그들을 비호하고 동조했던 보수언론과 검찰놈들
제 자식 아니라고 아이들 목숨을 값싸게 버린 놈들도 있었다
그놈들은 아직도 팔팔하게 살아서
세상이 자기 것인냥 거리를 활보하며
자식새끼 입에 맛난 것 넣어주고 좋은 옷 입히고
땅값 오르고 아파트값 올랐다며 희희락락 거리는데…
철수야

순이야 미안하다
팽목항 방파제에서 들리는 엄마의 통곡소리
맹골수도 바다 속에 뚝뚝 떨어졌던 아빠의 눈물
누가 소매를 걷어 그들의 눈물 닦아줄 것인가
하늘은 뭘 하는지
하늘 … 이놈의 하늘은
아이들의 죽음 잊지 않겠다,
생장(生葬)시킨 놈들 반드시 벌 받게 하겠다 약속했던 하늘은 지금 뭘 하는지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그래서 오늘 흙비가 내렸나 (2021.04.16.)

목, 2021/06/03-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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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정관장’, 조선총독부가 버리고 간 이름

문성규

 

‘친일부역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홍삼에게도 해당되는 모양이다. 부역이름 ‘정관장’을 보면. 홍삼에 붙어 우리 민족을 수탈하는 수단으로 부역한 1급 친일반민족행위 이름(‘정관장’)이 해방 독립된 나라에서는 홍삼의 대표 노릇을 하고 있다. 우리는 배알도 없나?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다. 먹고 살길이 없어 해외에 홍삼 몇 뿌리 가지고 나가 행상하고 있던 한인 홍삼장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그날 그날 홍삼 판 돈에서 조금씩 모아 애국금 독립의연금을 내고 독립공채를 사서 상해임시정부에 보내고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도왔다.
그같은 동포들의 도움으로 임시정부와 독립군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은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었다. 1939년까지 활발하게 진행되던 홍삼 팔아 독립자금 마련하는 일이, 1940년 일제의 홍삼 감시딱지 ‘정관장’이 홍삼에 붙어 홍삼을 감시하기 시작한 뒤로는 홍삼 팔아 독립자금 마련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실제로 1940년 이후로는 눈에 띄는 독립운동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결과의 원흉인 ‘정관장’은 1급 친일반민족 부역이름으로 해방 후 즉시 처단되어 이 땅에서 척결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한국인삼공사는 일제 조선총독부가 버리고 간 부역이름 ‘정관장’을 주워다가 지금까지 애지중지 쓰고 있다.

이름에는 목적이 있다. ‘정관장’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세금 수탈, 홍삼상권 강탈, 그리고 독립자금 차단을 통한 한민족의 말살이었다. 이 사실을 한국인삼공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우리 민족을 말살시키기 위해 만든 그 ‘저주스런’ 이름을 쓰면 안된다는 사실을 한국인삼공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인삼공사는 굳이 이 ‘저주스런’ 이름을 쓰고 있다. 혹 ‘저주’의 기운이 우리 민족에게 스며들지도 모르는데 그것도 자사의 대표 상표이름으로… 그렇다면 한국인삼공사에게는 우리 민족에 대한 ‘저주’를 감수하면서까지이 ‘저주’스런 부역이름 ‘정관장’을 써야 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돈 즉 부(富)일 것이다. 그렇다면 유관순 열사의 귀를 자른 가위가 잘 든다는 이유로 주워다 쓰는 행위와 다를 게 무엇인가? 한국인삼공사는 현대판 을사오적에 다름없지 않는가? 민족을 일본에 팔아 호의호식 부귀영화를 누린 그 매국노들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기미독립선언 102주년을 맞는 금년 3월 3일에 한국인삼공사에 “식민잔재 정관장 간판을 내려라!”는 제목의 탄원서(내용증명)를 보냈다.
한국인삼공사는 어느 기업보다도 국민들로부터 사랑받아온 대기업이다. 더더구나 여느 대기업과는 다르게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특산품이며 영혼의 먹거리인 홍삼을 거의 독점적으로 제조 판매하고 있는 독보적인 회사이다. 그만큼 국가와 민족과 국민을 생각해야 되는 기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피를 빨고 우리 민족을 말살시키는 일을 앞장섰던 ‘저주스런’ 일제잔재 부역이름 ‘정관장’을 굳이 주워다가 그것도 주된 상표이름으로 쓰는 한국인삼공사의 뱃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 대기업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기업을 운영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의 홍삼장수 한 사람으로서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늦었지만 제2의 반민특위가 꼭 필요한 시점이다. 이 고개를 넘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한국인삼공사는 치욕스런 이름 ‘정관장’이란 간판을 당장 떼어내어 우리 민족의 자존심인 홍삼의 위상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을 엄중히 촉구한다. 2021. 4. 8 대한민국 홍삼장수 문성규

목, 2021/06/03-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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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70]

평식원(平式院) 혹은 상공과 용산분실 자리의 공간 내력
일본의 기준과 합치되도록 만든 것이 근대 도량형법(度量衡法)

이순우 책임연구원

지난 2006년 12월 4일에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의 관리유물인 「국가표준 근대도량형기」(154건, 331점)가 문화재청 고시 제2006-103호를 통해 등록문화재 제320호로 등록고시되었다. 이와관련하여 문화재청에서는 2006년 11월 8일자로 「근대기(1902~1945) ‘국가표준 도량형기’ 문화재로 등록예고, 대한제국 법률 제1호로 탄생된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는데, 그 가운데 이러한 구절이 보인다.

대한제국 시기에 공포된 「도량형법」의 제정 및 개정 내용을 담고 있는 <대한제국관보> 1905년 3월 29일자(오른쪽)와 1909년 9월 21일자(왼쪽)의 1면 모습이다. 1909년의 개정 내용을 보면 종전의 ‘척량법(尺兩法)’은 일본식 ‘척관법(尺貫法)’을 기본으로 하는 형태로 바뀌었고, 더구나 척(尺), 승(升), 관(貫)은 ‘일본 도량형법이 정한 바와 같다’는 구절을 노골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 그러나 과거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도량형이 지역마다 달랐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도량형을 정리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개항 이후 근대적인 도량형을 도입하기 위하여 1902년(광무 6년)에 평식원(平式院)이라는 담당 관청을 설립하여 서양식 도량형제(미터법)를 일부 채택하고 1905년(광무 9년) 3월 21일에 이것을 바탕으로 대한제국 최초의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정하였다. 이처럼 당시 고종은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제정할 정도로 이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으나 새로운 도량형이 정착되기까지는 그 후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미돌법(米突法)을 아시나요?」라는 별도의 첨부자료를 통해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다.

 

…… 이러한 당시 사회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에서는 1905년(광무 9년) 3월에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정하고 농상공부에서 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 법은 1902년에 발표되었던 도량형법과 내용은 같으나 법률 제1호로 공표할 정도로 도량형 개정에 대하여 당시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면 근대적 도량형 제도의 도입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어서, 도량형법이 당시 법률 제1호였다는 사실에 기대어 그 의의를 더욱 확대해석하고 있는 부분이 확연히 눈에 띈다. 그런데 도량형법(度量衡法)을 일컬어 대한제국 최초의 법률이었다는 맥락과 결부시키는 것은 명백한 착오이다. 그 시절에는 지금의 법률이나 대통령령처럼 일련번호가 축차적으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연도별로 제1호부터 번호를 새로 붙여나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량형법이 법률 제1호인 것은 맞으나, 이건 광무 9년 즉, 1905년 바로 그해에 만들어진 첫 번째 법률이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아닌 게 아니라,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출범한 것이 1897년인데 무려 8년이나 지나서야 겨우 법률 제1호가 제정되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이를 테면, 법률 제1호가 해마다 하나씩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므로 이들 법률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통상 당해연도의 연호(年號)를 앞쪽에 덧붙여 표기하는 것이 적절한 용법이라고 하겠다.

도량형 관련 법률 제정 연혁

통감부 통감관방에서 펴낸 <한국시정연보(韓國施政年報)>(1908), 264~265쪽을 보면, 근대시기 도량형 제도의 도입 연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 대목이 남아 있다.

<조선지실업(朝鮮之實業)> 제19호(1907년 1월 1일)에 수록된 도량형제조소 기사인 일본인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의 인물사진과 그 시절에 사용되던 도량형 원기(度量衡 原器)의 모습이다.

 

본디 한국의 도량형제도는 매우 불규율(不規律), 불완전(不完全)하여 거의 계량(計量)의 표준(標準)으로 삼기에 충분한 것이 없어서 명치 35년(1902년) 궁내부(宮內府)에 평식원(平式院)을 설치하고 도량형 개정의 사무를 관장하는 동시에 도량형기 전매(度量衡器 專賣)의 목적으로 동원중(同院中)에 도량형기제조소(度量衡器製造所)를 세워 일본인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로 하여금 제조검정(製造檢定)의 일을 전담시켰으며 또한 도량형규칙(度量衡規則)을 제정 공포하였으나 신제(新制)의 실시(實施)가 전국(全國)에 미칠 수 없었고 가까스로 경성(京城)과 인천(仁川) 등의 일부에 다소간 신도량형기(新度量衡器)의 판출(販出)이 있었을 뿐 곧이어 평식원을 폐지하고 농상공부(農商工部)에 도량형과(度量衡課)를 설치하였다가 명치 40년(1907년)에 다시 관제(官制)를 개정하여 도량형사무국(度量衡事務局)으로 하고 이노우에 요시후미의 관리(管理)를 해제하였으며, 동년말(同年末)의 관제개정에 따라 재차 이를 농상공부의 일과(一課)로 복귀시켰다. 법규(法規)에 관해서도 그 후 다소 개정(改訂)한 바가 있었지만 불비(不備)의 점(點)이 여전히 적지 않으므로 목하(目下) 법률을 개정(改正)하여 제도를 확정(確定)할 필요를 인식하고 있으나 그 실시의 곤란을 염려하여 아직 수행(遂行)에 이르지 못하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 1868~?)라는 일본인은 일본 교토 출신의 철도차량 기술자이며, 일찍이 1899년 4월에 한국으로 들어와 전차 차량의 납품에 관여했고 1900년 3월에는 경부철도 철도위원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그 이후에 평식원 도량형제조소의 기사 및 도량형제조검정소(度量衡製造檢定所)의 관리책임자로 일한 경력을 거쳐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는 합자회사 이노우에 기스도(合資會社井上宜壽堂, 1911년 12월 10일 설립)를 만들어 이곳에서 소독약이나 제약, 약품판매, 약종무역(藥種貿易), 비누제조 등의 사업을 전개한 바 있다.
그러한 그에게 도량형기 제조와 관련한 제반 설법(設法), 설비(設費), 용빙(傭聘)에 관한 사항을 위임(委任)하기 위해 평식원의 도량형기 제조기술자로 채용한다는 계약서가 성립한 것은 1902년 8월 26일의 일이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6권에 수록되어 있는 관련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담긴 것으로 확인된다.

 

일(一), 평식원(平式院)은 이노우에 요시후미의 입안(立案)에 계(係)한 도량형법(度量衡法)을 채용시행(用施行)하고 기(其) 제조사업(製造事業)을 일체위임(一切委任)하되 제반사무(諸般事務)를 총무과장(總務課長; 한상룡)과 협의(協議)하여 타판(辦)할 사(事).
이(二), 도량형기제조장(度量衡器製造場) 설비(設備)는 별지(別紙) 설계품목서(設計品目書)에 유(由)하여 기(其) 경비수소용지발(經費隨用支撥)할 사(事). 단(但), 해설비(該設備)의 부족(不足) 급() 부득이(不得已) 증가(增加)하는 경비(經費)는 이노우에 요시후미에게 차용(借用)하여 지급(支給)할 사(事).
삼(三), 제작기계(製作機械) 재료(材料) 급(及) 공급품(供給品) 등(等)의 가격임기(價格臨機)하여 정(定)할 사(事).
사(四), 평식원(式院)은 이노우에 요시후미의 입안(立案)에 계(係)한 도량형법(度量衡法)을 의용(依用)하되 장래(將來) 무단(無端)히 내외인(內外人)에게 해제조권(該製造權)을 이허(移許)치 아니할 사(事).

 

이러한 사정에 비춰보면 1902년에 제정된 「도량형규칙(1903.7.1. 시행)」도 이노우에의 의중이 전적으로 반영된 결과인 듯하다. 그는 이곳에서 도량형 관련 법제를 정비하는 일은 물론이고 도량형기의 제작 및 수입과 검증 등 일련의 과정을 독식하다시피 하였고, 그의 이러한 지위는 농상공부 도량형사무국이 신설되는 1907년 2월의 시점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1905년 3월에 이르러 ‘척량법(尺兩法)’을 기본으로 한 「광무 9년 법률 제1호 도량형법(1905.11.1. 시행)」이 새로 제정된 것도 알고 보니, 기존의 「도량형규칙」에서 도형기(度衡器)는 일본의 것과 동일하게 되어 있었으나 양기(量器, 되의 크기)는 서로 달랐기 때문에 이것마저도 일본의 단위에 통일시키려는 의도에 따른 조치였던 것이다.
그 이후에 다시 1909년 9월에 이르러 ‘척관법(尺貫法)’을 기본으로 삼아 새로 개정된 「융희 3년 법률 제26호 도량형법」에서는 아예 드러내고 도량형의 단위를 일본의 그것과 그대로 일치시키고 있었다. 가령, 정(町, 60칸)이니 평(坪, 6척 평방)이니 돈(匁, 1천분의 1관)이니 하는 일본식 계량단위가 법률조문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실제로 이 법률의 조문에는 이러한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조선불교(朝鮮佛敎)> 제23호(1926년 3월호)에 포함되어 배포된 ‘미터법 환산 조견표’이다. 「대정 15년 제령 제6호 조선도량형령」의 제정에 따라 외견상으로는 미터법이 전면 시행되긴 했으나, 실제로는 여전히 돈(匁)이라든가 관(貫)이라든가 하는 일본식 계량단위를 그대로 미터단위로 대입하여 사용하는 방식이 유지되었다.

 

<경성일보> 1928년 4월 1일자에 수록된 야마나시 조선총독(山梨 朝鮮總督)의 미터법 전면시행 2주년 기념휘호이다. 여기에는 “적적분명 호리차(的的分明 毫釐差)”라고 적고 있는데, ‘호리’는 아주 작은 길이 단위를 말하는 것이므로, 이는 결국 “미세한 차이까지 뚜렷하게 분간한다”는 정도의 뜻이 된다.

 

제1조(第一條) 매매수수(賣買授受) 우(又)는 증명(證明)에 사용하는 도량형(度量衡)의 명칭(名稱), 명위(命位) 급(及) 도량형기(度量衡器)에 관하여는 본법 소정(本法所定)에 의(依)함.
제2조(第二條) 도량형(度量衡)의 명칭(名稱) 급(及) 명위(命位)는 좌(左)와 여(如)함.…… (중간생략) …… 척(尺), 승(升) 급(及) 관(貫)은 일본 도량형법(日本度量衡法)의 소정(所定)과 동(同)함. 제1항(第一項) 외(外)에 일본 도량형법(日本度量衡法)의 인(認)한 도량형(度量衡)의 명칭(名稱), 명위(命位) 급(及) 비교(比較)는 차(此)를 적법(適法)한 자(者)로 함.

 

애당초 도량형제와 관련한 일제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주한일본공사관기록> 22권에 수록된 「전원국(典圜局) 건물 및 평식원(平式院) 부지수용에 관한 건(1904년 11월 25일 발신)」 제하의 문건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당시 경의철도의 부설로 인하여 하마터면 평식원 자리가 고스란히 그 안쪽으로 편입되어 사라질 뻔한 일이 전개되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 일을 막아준 사람은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주한일본공사였던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연유는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 앞으로 또 경의선로(京義線路)는 지금까지 평식원(平式院)의 한쪽 옆을 통과하고 있습니다만, 혹은 그 선로를 변경하여 평식원의 중앙부를 재단(裁斷)하는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해원 주관인(該院 主管人)으로부터 신고한 바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평식원이라는 것의 설립은 본래 제국정부(帝國政府)의 권고(勸告)에 따라 불규율(不規律)한 한국 전체의 도량형기를 거의 우리(즉, 일본)제도와 동일한 단위(單位) 아래에 두려는 저의(底意)에서 나왔으며, 그 설립에 관해 우리 제일은행(第一銀行)으로부터 차관(借款)을 일으켜 겨우 현재의 건물을 건설하여 경영에 착수한 내력(來歷)에 비춰, 만일 우리 군용철도(軍用鐵)의 필요상(必要上) 선로를 해원 부지내(該院地內)로 변경함에 있어서는 자연히 해건물(該建物)을 다른 곳으로 이전할 필요가 생길 것이므로 이에 상당한 이전료(移轉料), 기타 건축비(建築費) 등을 지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일껏 우리의 권유에 기초한 도량형사업(度量衡事業)을 중도에 좌절(挫折)시킬 염려가 있사오니, 이 점을 이해하시도록 이상의 개략 내용은 와타나베 소좌(渡邊少佐)에게 내화(內話, 비공식 대화)해두었습니다. 공염(共念)하기 위해 고량(考量)을 얻고자 합니다. 명치 37년(1904년) 11월 25일. 임시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府) 야마네 소장 각하(山根少將閣下) 친전(親展).

 

결국에 잇따른 도량형 관련 법률의 제정 및 개정은 그 자체가 일본세력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그들에게 익숙한 방식의 도량형 단위 및 제도를 바로 이 땅에 그대로 옮겨놓고자 하는 저의를 바탕에 깔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중에 일제강점기로 접어들어 1926년 2월에 제정된 「대정 15년 제령 제6호 조선도량형령」에 따라 ‘미터법(米突法)’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식 척관법(尺貫法)에다 단지 미터법의 수치를 대입하여 사용하는 관행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그런데 근대시기 도량형제의 도입 및 시행과 관련하여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의 하나는 평식원에 속한 ‘도량형제조소(용산 소재)’였다. 원래 「궁내부 관제(宮內府 官制)」의 개정을 통해 평식원이 처음 설치된 때는 1902년 7월 21일이었는데, 이 당시에는 아직 따로 정해진 공간이 없었으므로 북일영(北一營)이라거나 원동(院洞)의 전군수 이종석 씨가(前郡守 李奭鍾氏家)로 그 위치를 정한다는 신문기사가 몇 차례 등장한 적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도량형제조소의 청사가 마련된 곳이 바로 용산 당현(堂峴, 당고개) 지역이었다.
정확한 시기까지는 가늠하기 어려우나 <황성신문> 1903년 9월 9일자에 수록된 「평식실시(平式實施)」 제하의 기사를 보면, 여기에 처음으로 ‘용산방’이라는 지명이 구체적으로 언급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평식원(平式院)에서 도량형척제조사무소(度量衡尺製造事務所)를 용산방(龍山坊)에 설치(設寘)하고 견습생(見生)을 시취(試取)하는데 경성학당(京城學堂) 학원중(學員中)으로 10인(人)을 선택(擇)하였다더라.

 

<경성일보> 1929년 4월 1일자에 수록된 미터법 시행 3주년 특집기사에는 상공과 용산분실의 모습도 함께 소개되어 있다. 대문의 기둥에는 ‘조선총독부 식산국 상공과분실’과 ‘조선미터협회’의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고, 사진 아래의 설명문에는 이곳이 “미터법의 참모본부”라는 수식어가 포함되어 있다.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1929)에 나타난 총독부 식산국 상공과 용산분실(원정1정목 25번지 구역)의 표시 위치이다. 이곳의 전면 도로변에는 용산경찰서(龍山警察署)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지금의 원효로와 백범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해당하며, 흔히 1978년 이후 30년 가량 용산구청이 있었던 곳으로도 기억되는 공간이다.

상공과 용산분실의 구내 배치 상황이 담겨 있는 「용산 상공과분실 창고 기타 부지평면도」이다. 각종 창고와 검정실 및 사무소의 위치가 잘 묘사되어 있으며, 왼쪽 아래에는 도로면에 접한 곳에 자리한 용산경찰서(龍山警察署)의 구역도 함께 표시되어 있다. (ⓒ국가기록원)

<대경성사진첩>(1937)에 수록된 용산경찰서의 전경이다. 용산경찰서가 상공과 용산분실 바로 앞쪽에 처음 터를 잡은 것은 1911년 4월의 일이며, 중간에 용산헌병분견소로 전환된 시절이 있긴 했으나 그 이후 1977년 7월 2일에 도로확장 때문에 철거되어 시립남부병원 자리(원효로 1가 12번지)로 청사를 옮길 때까지 줄곧 이곳에 머물렀다.

용산꿈나무종합타운(2017.12.1일 개관)으로 변신한 옛 용산구청 청사의 모습이다. 현재 이 구역 안에는 원효지구대, 용산경찰서 방법순찰대, 용산경찰서 교통센터 등의 시설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데, 이것은 옛날 용산경찰서 시절의 흔적인 동시에 여전히 토지의 지분 일부가 경찰서의 몫으로 남아 있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이 주로 ‘상공과 용산분실(商工課 龍山分室)’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었고, 한때 ‘도량형소(度量衡所)’라고 불렀던 시절도 있었다. 해방 이후의 시기에도 이곳은 역시 ‘도량형소’라거나 ‘중앙계량국(中央計量局)’이라는 이름을 달고 예나 다를 바 없는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으로 남았다. 이 구역은 일제강점기의 지번상으로 “원정 1정목(元町 一丁目, 지금의 원효로 1가) 25번지(면적 2,702평)”에 해당하며, 그 전면의 도로변에는 일찍이 1911년 4월 이후 용산경찰서(龍山警察署, 용산헌병분견소 시절 포함)가 줄곧 자리했던 곳으로도 기억되는 공간이다.
이 자리는 특히 용산구청(龍山區廳, 1978.4.18~2010.4.8)이 30년 가까이 터를 잡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듯하다. 용산구청이 들어서기 직전에는 이곳이 ‘통일연수소(統一硏修所)’로 사용되었던 흔적도 확인되는데, 정작 1970년대 초반까지는 확실하게 남아 있던 중앙계량국이 정확하게 언제 이곳에서 사라진 것인지는 아쉽게도 관련자료가 확인되지 않는다.
2010년 4월에 용산구청이 이태원 쪽에 신청사를 건립하여 그곳으로 옮겨간 이후 원효로에 남은 옛 청사는 용산꿈나무종합타운(2017.12.1일 개관)으로 바뀌었고, 지금 이 구역 안에는 용산구 보건분소, 원효지구대, 용산경찰서 방범순찰대와 교통센터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 옛날 평리원 도량형제조소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곳에 도량형 또는 계량관련 시설이 자리했던 기간을 통틀어 합쳐보면, 세월이 무려 70년도 더 된 것으로 나타난다.
비록 근대시기 도량형제도의 도입과 시행과정이란 것이 다분히 일제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물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 오랜 세월에 걸쳐 이곳이 도량형 제도의 본거지였다는 점에서 그러한 내력을 나타내는 작은 표석 하나쯤은 남겨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목, 2021/06/03-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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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기념관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특별사진전 개최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은 5월 18일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 기념 특별사진전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를 개막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는 이번 전시는 오랜 기간 쿠바, 멕시코, 만주, 연해주 등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현장을 찾고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을 만나 한인 디아스포라의 흔적을 기록한 김동우 작가의 사진 52점이 전시되었다.
쿠바 한인 이주의 시작점인 마나티 항구, 멕시코 한인 독립운동의 성지 메리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국방경위대, 헤이그특사가 참석하지 못한 네덜란드 빈넨호프,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의 인도 레드포트 훈련지, 카자흐스탄 바슈토베의 고려인 무덤, 경학사가 설립된 중국 길림성 삼원보 대고산 일대,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의 전로한족대표자회의 개최지 등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사진으로 만나 볼 수 있다. 또한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모습을 통해 한인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개막식은 사회적 분위기에 맞춰 5월 18일 오전 11시 2층 기획전시실 앞에서 윤경로 전 한성대총장, 박겸수 강북구청장,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 김동우 작가 등 관계자 20여 명이 참석하여 개막사와 격려사, 작가의 인사말, 테이프커팅식 순서로 간소하게 진행하였다. 테이프커팅식 이후에는 김동우 작가의 설명과 함께 전시를 관람하였다.
이번 특별사진전은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2021년 8월 18일까지 사전예약을 통해서 관람할 수 있으며 VR전시로도 제작되어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에서 만나볼 수있다.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 기념 특별사진전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는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의 길, 생존을 위한 이민을 길을 택하여 만주와 연해주, 미주로 떠난 사람들의 잊혀져가는 역사의 흔적을 기억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금, 2021/06/25-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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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신흥무관학교 110주년 기념 특강
〈항일무장투쟁의 뿌리-신흥무관학교〉 진행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은 2021년 신흥무관학교 설립 110주년을 맞아 신흥무관학교 출범의 시대적 배경과 중심세력, 독립전쟁사에서의 위상,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을 조명하는 독립민주시민학교 특별강좌 <항일무장투쟁의 뿌리-신흥무관학교>를 진행하였다. 강좌는 5월 22일에서 5월 30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 근현대사기념관 2층 강의실에서 현장수강과 함께 온라인 수강을 위한 촬영도 병행하였다.
첫 번째 강의는 원광대학교 김주용 교수의 <간도 한인사회와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을 주제로 진행되었다. 서북간도 지역 이주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과 신흥무관학교로 상징되는 국외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대해 현장답사를 통해 축적된 다양한 자료들과 함께 설명하여 항일무장투쟁의 공간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었다.
2강은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운영의 중심역량>이란 주제로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가 강의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핵심적 인물들과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독립을 향한 의지, 3·1운동 이후 독립전쟁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중요성에 이르기까지 신흥무관학교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강의였다.
3강 <신흥무관학교와 초기 독립전쟁>은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 관장이 강의하였다.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독립전쟁에 미친 영향에 대해 알아보고 독립전쟁의 분수령인 3·1운동 이후 늘어난 신흥무관학교 출신자들, 그들의 독립운동 방향에 대해서 알아봄으로써 항일무장투쟁의 뿌리로서 신흥무관학교를 이해할 수있었다.

마지막 4강은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항일투쟁 -‘아리랑’ 김산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강의하였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과 작가 님웨일즈의 옌안에서의 만남을 시작으로 김산이 기억하고 있는 신흥무관학교, 김산의 항일투쟁에 영향을 준 많은 인물들, 그리고 역경의 항일투쟁의 과정을 알 수 있는 강의였다. 신흥무관학교 110주년 기념 특강은 근현대사기념관, 민족문제연구소, 강북구 홈페이지를 통해서 6월 30일까지 누구나 수강할 수 있다. 온라인 강의를 통해 항일무장투쟁에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고귀한 희생을 다시한 번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란다.

금, 2021/06/25-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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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박근혜 정권과 양승태 사법부의 추악한 재판거래, 그 책임을 묻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지난 5월 25일 일제강점기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와 고 김규수 할아버지의 유족은 박근혜 정부 시기 사법농단, 재판거래의 불법행위에 대해 국가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했다.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아 지원해 온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은 지난 2018년 역사적인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냈음에도 일본 정부의 방해로 가해 기업이 아직까지 판결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이번 소송은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 비서실장을 비롯하여 정무수석, 윤병세 외교부 장관, 피고기업의 대리인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들과 양승태 대법원장, 임종헌 법원행정처장 등 법관다수가 조직적으로 공모하여 실행한 재판거래에 대해 국가배상법에 따라 공무원의 불법행위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을 묻는 소송이다. 이 사건 원고들은 2005년 2월 한국에서 소송을 제기하여 1, 2심에서 패소하였으나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에서 역전 승소했다. 2013년 7월 10일 서울고등법원의 파기환송심에서 승소한 원고들은 대법원 재상고심의 최종 승소 판결이 곧 내려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최종 확정판결이 내려지기까지 5년의 시간 동안 박근혜 청와대와 양승태 사법부는 판결을 뒤엎기 위해 피고기업의 대리인까지 동원하여 조직적인 재판거래를 자행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숨을 대가로 추악한 재판거래가 이루어지는 동안 연구소와 원고들은 조속한 판결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고 기자회견을 여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사법농단으로 판결이 지연되는 동안 네 분의 원고 가운데 세 분이 돌아가시고 말았다(여운택 2013년 12월, 신천수 2014년 10월, 김규수 2018년 6월 사망). 1965년 박정희의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인권회복이 가로막혀 온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21년의 재판투쟁 끝에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65년 체제’를 극복한 역사적인 대법원 판결을 쟁취했지만 끝내 법정에서 승소 판결을 듣지 못한 것이다. 국가는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재판거래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명확히 사죄하고 배상해야 할 것이다. 또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숨을 대가로 한 사법농단에 관여하여 불법행위를 저지른 모든 자들의 잘못을 명확히
하고, 그 책임을 묻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이번 소송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회복과 역사정의의 실현, 그리고 사법개혁과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소중한 디딤돌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금, 2021/06/25-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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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신흥무관학교 설립 110주년 온라인 기념식

• 방학진 기획실장

올해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10주년이 되는 해이다. 2011년부터 연구소가 사무국을 맞고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상임대표 윤경로, www.sh100th.org)는 설립 기념일인 6월 10일 온라인 기념식을 진행했다. 이날 기념식은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하여 모든 순서를 사전녹화를 통해 제작한 영상을 6월 10일 유튜브 등에 공개했다. 온라인 기념식의 첫 순서는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를 ‘드로잉 쇼’로 제작하여 선보였다. 드로잉 쇼는 안중걸 만화가의 작품에 이은혜(경희대 동문) 님이 내레이션을 맡아 주었다. 드로잉 쇼에 이어서 윤경로 상임대표의 기념사, 김정수 육사 교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끝으로 신흥무관학교가 육사의 뿌리임을 상징하기 위해 6월 4일 육사 모든 생도들이 펼친 ‘화랑의식’(분열)으로 온라인 기념식을 마무리했다. 한편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는 110주년을 맞아 음악회, 전시회, 학술회의, 국내 유적지 답사, 콘텐츠 공모전 등을 계획하고 있다.

금, 2021/06/25-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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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화 <광대 : 소리꾼 감독판> 조정래 감독

 

인터뷰 :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민족의 흥과 한이 다시 울려 퍼진다. ’ 작년 7월, 코로나19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독창성과 풍부한 볼거리로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던 영화 <소리꾼>이 <광대>라는 이름의 ‘감독판’ 영화로 다시 돌아온다.
감독판이니 만큼 이전 개봉작에서 다루어지지 못한 서사들이 과연 어떤식으로 가미되었을지, 연출자의 시선을 따라 가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포인트다. 연구소에서는 오는 9월 전격 재개봉을 앞두고 전국을 돌며 시사회를 진행하고 있는 <광대 : 소리꾼 감독판>의 조정래 감독을 만나 보았다.

● 개봉 1년여 만에 ‘감독판’으로 다시 돌아왔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나?

● 일단 나부터가 판소리 고수(鼓手), 즉 국악인 출신이다. 인간문화재이신 정철호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이수자 자격까지 얻었다. 대학교 시절 영화 <서편제>를 보고 국악에 빠져들기 시작했는데 거의 미쳐있다시피 했던것 같다. 졸업 후 ‘바닥소리’라는 단체를 만들고 전국으로 공연을 다닐 정도였
으니까.(웃음) 어쨌든 대학교 때 판소리를 주제로 한 단편시나리오를 하나 구상했는데 그게 바로 이 영화의 모태가 된 ‘회심곡’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다. 영화 <귀향> 역시 판소리와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나눔의 집’과 수요집회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판소리 공연을 나가게 되면서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판소리는 영화감독인 나 스스로의 서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콘텐츠다. 이런 판소리를 주제로 한 영화 <소리꾼>, 게다가 그걸 감독판으로까지 선보일 수 있게 됐으니 감회가 남다르다. 보면 알게 되겠지만 기존 개봉작에 비해 소리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장면이나 음성, 관련 이야기들이 다수 살아났다.

● 영화 기획단계에서는 ‘남북합작영화’로 추진되었다고 들었다. 특별한 준비과정이 있었을 것 같은데?
● ‘남북합작’이라는 키워드는 이 영화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데 중요한 포스트를 차지한다. 제작 초기 단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서울과 평양 동시개봉을 준비했을 정도다. 지금이야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있지만 영화를 기획할 2018년 당시만 해도 평창올림픽과 4.27 판문점선언을 계기로 남북 간의 평화
무드가 펼쳐지던 시기였다. 나 역시 그 바람을 타고 그해 11월 당시 김덕룡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방북단에 함께했었는데 바로 그때 영화의 북한 로케이션 기회를 얻게 됐다. 방북 기간 내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준비해간 <광대> 제작계획과 시나리오 등을 소개하고 다녔는데 다행히 북측 주관 단체에서 관심을 가져줬다. 어느 날 새벽 호텔로비로 나오라고 하더니 시나리오를 소개해보라고 하더라.(웃음) 그후로 남북합작영화 계획이 급물살을 타게 됐고 귀국 후에는 협의를 진행해보자는 연락이 북측으로부터 왔다. 그때가 2018년 12월경이었다. 협의는 중국 북경에서 남북 측 관계자가 만나 이뤄졌는데 우리가 쓴 제작 계획서를 북한 측에서 따져보고 실행 가능한 부분을 검토하는 형식이었다. 협
의 과정 내내 북측은 대단히 진중한 태도로 임했다. 단 한 줄도 그냥 넘어가는 일 없이 꼼꼼하게 묻고 가능 여부를 검증하더라. 시나리오의 취지는 물론이고 촬영 장소는 어디로 하는지, 어떻게 이동하는지, 엑스트라는 어떻게 지원하는지 등등 … 합의서만 해도 10번은 수정한 것 같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오히려 이런 꼼꼼하고 진지한 북측의 태도 덕분에 이 영화의 남북합작이 성사될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그래서 영화 촬영기간 중 보름에서 한 달 정도를 북측에서 촬영하고 엑스트라까지 지원받기로 합의됐었다. 다만 영화 메인 캐릭터 중 한 명을 북측 배우로 하자는 제안은 거절당했다. “북한에서 영화는 사상이란 말이오!” 라며 단호히 거절하더라. (웃음) 아참, 이 만남은 물론 통일부의 정식허가를 받고 이뤄진 것이다. 귀국보고도 꼼꼼히 했다.

영화 <광대 : 소리꾼 감독판> 포스터

● 그러나 2019년 하노이 북미회담 이후부터는 남북관계가 급속히 얼어붙었다. 영향을 받았을 것 같은데?

● 맞다. 개인적으로도 제일 아쉬운 부분이다. 하노이 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야심차게 기획했던 북측 촬영이 무산됐다. 최대한 남북합작영화로 완성을 시키고 싶었기에 긴장이 완화되는 시점을 기다려보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속절없이 시간이 가고 2019년 여름이 지나면서부터는 더 늦어져서는 이도저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결국 남한만을 무대로 영화를 찍게 됐다. 정말 아쉬웠다. 등장인물들이 한반도 강산을 방랑하는 로드무비적인 느낌이 중요했는데 남쪽의 풍경만으로 묘사해야 했으니. 최후의 수단으로 북측에 사전 답사를 가서 촬영한 영상(주로 자연을 소재로 한)이라도 써보려 했는데 그 시도조차 무산됐다. 아무리 자연풍경이라지만 남북관계가 워낙 안 좋은 상황인지라 북한과 관련된 어떤 것도 담을 수 없었다. 색안경 낀 여론몰이에 당할 수도 있고 영화 흥행에도 타격을 받을 거라는 우려들이 많았다. 괴로웠다. 주위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의 의견이기에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었던 거다. 그래서 2020년에 개봉한 <소리꾼>은 감독 입장에서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 물론 영화의 작품성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코로나 때문에 흥행은 잘 안됐지만. (웃음) 동경국제영화제, 스
페인 한국영화제, 중동한국영화제 등에 개막작으로 초청됐고 배우들의 연기력도 주목받았다.

● 말이 나온 김에 감독판 <광대>와 기존 개봉작 <소리꾼>의 차별점을 이야기해 달라

● 아까 잠시 언급했지만, 기존 개봉작에서는 담지 못한 사전답사 영상, 북한의 자연풍경 영상들이 이번 감독판에는 전부 녹아들어 있다. 사전답사 당시 묘향산부터 황해도를 돌면서 북한의 풍광명미(風光明媚)를 찍어놨었는데 그걸 잘 편집하여 영화의 배경으로 대폭 활용했다. 이런 측면에서 <소리꾼>은 감독판인 <광대>에 와서야 ‘남북합작’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 이 영화를 봤을런지 잘 모르겠으나 만약 볼 수 있다면 <광대 : 소리꾼 감독판>을 봐줬으면 좋겠다. 또 하나의 차별점은 비주류의 이야기, 즉 기존 영화에서 생략됐던 조연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났다는 점이다.
한 예로 <소리꾼>의 광대패들에 대한 이야기를 완결성 있게 보강했다. 그리고 한국판 레미제라블 같
은 느낌을 조금이라도 살려보고자 민중의 저항적 측면, 혁명적이고 반봉건적 요소도 조금 강화시켰다. 물론 이런 부분들은 재촬영을 한 것이 아니라 기존 개봉작에서는 생략됐던 부분을 최대한 살린 것이다. 배우들, 이유리 씨나 김하연 양(아역배우)이 노래하는 장면도 좀 더 추가했다. 그러다보니 러닝 타임이 좀 길어졌는데 시청각적 감상이 풍부해지고 서사의 흐름을 빠르게 하는 것으로 보완해보려 했다.

● 감독판 개봉을 맞아 공개할 수 있는 촬영 에피소드가 있다면?

● 2020년 개봉 뒤에 인상 깊었던 장면으로 ‘학규(극중 주연)’가 피투성이의 몸으로 최후의 판소리를 하는 장면을 많이 말씀해주시더라. 실제로 그 장면은 현장에서도 굉장히 깊은 울림을 줬다. 괴산에 있는 세트장에서 촬영했는데 매서운 겨울 날씨로 입과 손이 얼어붙은 상황에서도 배우들이 완전히 몰입해줬다. 영화상 어떤 사운드 효과도 주지 않고 오로지 현장음만으로 소리를 전달한다는 원칙으로 촬영했기에 ‘학규’ 역을 맡은 이봉근 배우로서도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혼신을 다해 소리를 내줬다. 그 진심이 전해졌던지 당시 세트장에 있는 배우와 스텝들이 그 장면을 촬영하며 모두 울었다. 곤란했던 것은 악역들도 울고 있어서(웃음). 어쨌거나 바로 그런 혼신의 소리가 판소리의 ‘프로토타입’이 아닌가 생각한다.
극중 ‘청이(아역)’가 강물에 뛰어드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실제 시퍼런 강물에 뛰어들어야 했기 때
문에 배역을 맡은 김하연 양의 고생이 많았다. 처음에는 대역을 쓰려고 했는데 자신이 직접 하겠다고
나섰다. 전체적으로 배우, 스태프들의 팀워크가 좋았고 협력이 잘 이뤄졌다. 그리고 이건 영화 스토리
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에피소드인데 영화에 나오는 전통 공예품, 이를테면 괴불노리개나 복주머
니 같은 소품들은 전통공예작가인 이혜진 님, 내 아내가 직접 만든 것이다.(웃음) 아내가 미술팀 일
원으로 참여하며 많은 도움을 줬는데 한번쯤 소개하고 싶었다.

● 감독판인 만큼 영화를 통해 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 것 같다.

● 가족의 복원이다. <광대 : 소리꾼 감독판>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갈등으로 얽히고설키는 것이 아
닌, 길 위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이웃들이 점차 하나의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남북합작
의 영화를 만들어보고자 시도한 것 또한 바로 그런 지향에서다. 분단된 남북이 ‘가족의 복원’을 이루어가며 통일까지 꿈꾸는 것, 그런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북한에서 촬영한 풍경들을 이번 <광대 : 소리꾼 감독판>에 넣으면서 이런 감정은 더 절실해졌다. 북한의 자연은 아름다우면서도 이질감이 없다. 외국에 온 것 같은 낯선 느낌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어디 자연뿐이겠는가. 북한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직접 대면했을 때 느낀 감정은 그냥 ‘똑같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식, 술을 좋아하는 것, 흥 많고 신명 있는 것 … 다르고 이질적인 것은 우리들의 심리적 거리일 뿐이다. 이렇게 꼭 닮은 자연, 사람을 느끼면서 ‘가족의 복원’에 대한 꿈을 관객 분들과 공유하고 싶다.

 

 

● 조금 이른 감이 있는 질문이지만 혹시 지금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이 있는지? 있다면 간단히 소개를 부탁드리면서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싶다.

●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일본 홋카이도 조선인 강제노동자와 아이누족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디어는 몇 년 전, 일본 홋카이도에서 <귀향> 시사회를 통해 만나게 된 교수님으로부터 제공받았다. 그 교수님이 식민지 당시, 홋카이도로 끌려온 조선인 강제징용노동자들의 사연과 아이누족에 대한 일제의 탄압정책에 대해 설명해주시면서 꽤나 많은 사진과 자료들을 함께 주셨다. 그리고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유골이 묻혀있는 장소들과 아이누 인종연구의 현장 훗카이도대 ‘동물실험실’, 아이누 박물관 등을 안내 받았다. 일본이 조선인과 아이누 인들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조선인들이 끌려간 군수공장이나 탄광 등의 실상은 어땠는지, 그곳에서 탈출하려던 조선인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
는지 등등. 그 참상이라는 게 듣기만 해도 괴로운 것이어서 참 많이도 울었다. 그렇게 아픈 감정을 느끼면서 시나리오를 써내려가게 됐고 대략적인 뼈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걸 영화로 만들려면 만만치 않은 돈이 필요할 것 같다. (웃음) 아무튼 지금은 <광대 : 소리꾼 감독판> 관련 활동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차차 구체화시켜 나갈 예정이다.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면 아마 민족문제연구소에도 종종 도움을 요청드리게 될 것 같다. 부족함이 많겠지만 회원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기대를 부탁드린다.

토, 2021/06/26-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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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71]

대륙고무, 친일귀족세력과 일본자본의 결합체
용산 원정에 자리했던 조선 고무신의 대명사

 

이순우 책임연구원

 

조선총독부에서 매달 발행하던 기관잡지(機關雜誌) <조선(朝鮮)> 1924년 3월호에는 「호모화(護謨靴) 전성(全盛)의 조선(朝鮮)」이라는 제목의 토막글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호모’는 ‘고무(ゴム)’의 일본어식 음차(音借) 표기이므로, ‘호모화’는 곧 ‘고무신’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근시(近時) 호모화공업의 발달에 따라 가격이 저렴하고 내구력(耐久力)과 방수력(防水力)이 있어서 중류자 이하(中流者 以下)의 수요가 격증(激增)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선내생산(鮮內生産)의 상황을 보면, 대정 9년(1920년)에는 극히 미미했던 것이었으나 10년(1921년)에는 가격(價格) 17만 8천 원(圓)에 13만 7천 족(足)의 생산이 있었고, 11년(1922년)에는 일약(一躍) 94만 원에 달했으며, 12년(1923년)에는 아직 정확한 숫자를 판별하지는 못하나 적어도 280만 원(400만 족)의 거액에 달할 것이다. 이밖에 내지(內地, 일본)에서의 이입액(移入額)은 12년에는 약 480만 원(685만 족)이었으니까 내선(內鮮)을 합산하면 실로 1,165만 족이라는 놀랄만한 수요를 나타내고 있다.
호모화의 수용(需用) 탓에 양화(洋靴) 및 조선화(朝鮮靴)는 비상한 타격을 받았고, 대정 9년에는 양화의 생산이 32만 6천 족이었으나, 동 10년에는 18만 8천 족, 동 11년에는 다시 13만 3천 족으로 줄어들고 있다. 또 선화(鮮靴)의 쪽은 대정 9년에는 54만 4천 족이었다가, 10년에는 일시(一時) 70만 4천족으로 증가하였으나 11년에는 급전직하 32만 8천 족으로 감소했다.

이 글은 바야흐로 조선 고무신의 탄생과 더불어 가히 고무신의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일찍이 이 땅에 고무신의 등장은 1919년 무렵에 시작된 일이었는데, 이때까지는 일본 쪽에서 건너온 ‘단화형(短靴型)’ 고무화가 전부였다. 이것은 서양식 구두를 본떠 만든 형태이며, 구두 자체를 전부 고무로 만들었다고 하여 ‘총고무화(總ゴム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기존의 ‘경제화(經濟靴)’ 또는 ‘편리화(便利靴)’에 고무바닥만을 덧댄 ‘고무저화(底靴)’ 형태가 나타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값싸고 질기다”는 고무신 자체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조선신발’ 형태의 고무신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21년 봄의 일이었다. 그 선두에 선 업체는 국산 고무신의 대명사로 여겨질 만큼 유명했던 대륙고무공업소(大陸ゴム工業所)였다. 

 

(왼쪽) <매일신보> 1921년 2월 1일자에는 대륙고무공업소와 원창양행의 공동명의로 나온 ‘순고무 경제화 및 순고무 양화’ 광고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대륙고무신과 관련하여 최초로 등장한 광고문안이다. (오른쪽) <매일신보> 1919년 9월 28일자에 게재된 원창양행(종로 1정목 47번지)의 광고문안이다. 이곳은 원래 이하영 자작의 아들인 이규원이 수출입 무역업을 목적으로 개설한 가게였으나, 1921년에 대륙고무신이 본격 생산되면서 자연스레 대륙고무공업소의 총판매부(總販賣部)로 전환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21년 2월 1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순고무 경제화 및 순고무 양화 광고문안’이 처음으로 수록된 것이 눈에 띈다.

 

본소(本)에서 수년래(數年來) 고무품 제조(製造)에 대하여 기다(幾多) 연구(硏究)를 중(重)하여 금(今) 기 연찬(其 硏鑽)을 수성(成)하고 구주(歐洲)에 전왕견학(專往見學)한 기사(技師)를 고빙(
聘)하여 공장(工場)을 신축(新築)하고 제조(製造)를 개시(開始)함은 아 조선(我 朝鮮)에서 본소(本
所)가 비조(祖)가 되고 취중(就中) 순(純)고무 경제화(經濟靴) 제조(製造)는 세계중(世界中) 다만
본소(本所)뿐이압. …… (중략)
경성부 용산 원정 1정목(京城府 龍山 元町 一丁目) 대륙고무공업소(大陸ゴム工業所)
경성 종로 1정목(京城 鐘路 一丁目) 위탁판매부(委託販賣部) 원창양행(元昌洋行)

 

여기에 대륙고무의 위탁판매부로 등장하는 ‘원창양행’(1919년 8월 18일 상호등록)은 원래 면포(綿布), 주단(綢緞), 저포(苧布), 모직(毛織) 등을 수입 판매하는 가게였으나 이때부터 고무신 총판매점으로 변신하였다. 이곳의 주인은 이하영(李夏榮, 1858~1929)의 장남 이규원(李圭元, 1890~1945)이었으며, 이하영은 익히 알려진 바대로 영어통역으로 관직에 발을 들여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러 외부대신과 법부대신을 지냈고 국권피탈 후에는 일제로부터 자작(子爵)의 작위를 부여받은 인물이었다.
대륙고무의 연혁을 서술한 몇몇 자료에 이곳에서 고무신을 생산 개시한 때가 1919년이라고 적어놓은 것이 곧잘 눈에 띄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회사에서 첫 고무신이 탄생한 것은 1921년의 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선> 1923년 1월호에는 조선총독부 상공과(商工課)에서 정리한 「호모화(護謨靴)에 관한 조사」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이 자료에는 ‘내지품(內地品)과 조선품(朝鮮品)의 공급상황’을 정리한 통계표도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이 가운데 1919년도와 1920년도의 해당부분에는 ‘내지품 이입고’만 표시되어 있을 뿐 ‘조선내 고무신 생산고’에 관한 집계수치는 전무한 것으로 보더라도 고무신의 국내생산은 1921년부터 개시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大陸護謨工業株式會社) 관련 주요 연혁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시정이십오년사>(1935)에 수록된 종로거리의 방공연습(防空演習) 사진자료를 보면 뒷 배경에 우연히 대륙고무총판매부(종로 1정목 47번지)의 간판이 포착된 모습이 눈에 띈다. 참고로 왼쪽 전봇대와 인접하여 조선광무소(朝鮮鑛務所, 종로 1정목 44번지) 간판이 붙어 있는 건물의 1층이 바로 그 유명한 이상(李箱)의 ‘제비다방’이 있던 공간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매일신보> 1922년 4월 6일자에 수록된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주식모집광고이다. 여기에 수록된 발기인 명부를 보면 창립위원장인 남작 이윤용을 비롯하여 후작 박영효, 자작 이하영, 자작 이창훈, 남작 이근호 등 친일귀족세력의 다수와 여러 일본인 실업가들이 동시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조선 고무신이 크게 득세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대륙고무공업소에서는 사세를 더욱 확장하기 위해 주식회사로 전환하기로 하고, 이에 따라 1922년 4월 6일에는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전체 발행 주식수 1만 주 가운데 1천 주에 대하여 주식공모를 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각 신문지상에 발표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창립 발기인(創立 發起人)의 명단에 포함된 인사들의 면면이었다.

 

후작 박영효(侯爵 朴泳孝), 자작 이하영(子爵 李夏榮), 자작 이창훈(子爵 李昌薰), 남작 이윤용(男爵 李允用), 남작 이근호(男爵 李根澔), 주성근(朱性根), 박용삼(朴容三), 박종환(朴宗桓), 유혁로(柳赫魯), 야마기시 유타로(山岸佑太郞), 토미타 기사쿠(富田儀作), 나카니시 토라히코(中西虎彦), 타나카 요시지로(田中吉次郞),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오키 야스노스케(大木安之助), 후쿠다겐이치(福田源一), 텐니치 츠네지로(天日常次郞).

 

여기에는 조선귀족 5인을 포함한 조선인 9인과 일본인 실업가 8인의 이름이 죽 나열되어 있는데, 가히 친일귀족세력과 일본자본의 결합체라는 평가가 나올만한 구성이었다. 천도교에서 발간한 월간잡지 <개벽(開闢)> 제33호(1923년 3월호)에는 농구생(弄球生) 필명의 「천현지황(天玄地黃)」이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고, 이 가운데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실체를 꼬집는 내용도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조선인 전용(朝鮮人 專用)의 고무화(靴)]

일조결하(一朝決河)의 세(勢)로써 조선인의 이물계(履物界)를 여지없이 점탈(占奪)하여 매년 수천만 원의 이금(利金)을 흡수(吸收)하는 고무화(靴), 그야말로 식자(識者)의 혼담(魂膽)을 서늘케 한다. 참패를 당한 건유혜(乾油鞋), 목리(木履), 망혜(芒鞋) 등의 재래상(在來商)은 한번 개량책(改良策)도 강구해 볼 여지가 없이 그냥 무조건(無條件)으로 영원히 수(手)를 속(束)할 뿐인가.… (중략) … 요사이에 이것을 경영(經營) 보려고 소자본(小�本)으로써 공장배치(工場排置)를 한 데가 기개소(幾箇所)가 있는 듯하나 이런 것들은 아직 아희적 작업(兒戱的 作業)에 지나지 못할 뿐이오, 개중(箇中)에 가장 우승(優勝)한 지위(地位)에 서서 인기(人氣)를 끄으는 자(者)는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大陸護謨工業株式會社)이다. 그러나 이 회사(會社)의 조직(組織)이야말로 좀 자미(滋味)스럽지 못하다. 표면(表面)의 광고(廣告)로는 조선인(朝鮮人)의 명의(名義)를 내여 세우고 이면(裏面)의 실권(實權)은 전부 일본인(日本人)의 장중(掌中)에서 놀아난다. 아아 천하(天下)가 받지 않는 고무화, 오직 조선사람의 돈이 맛나는가? 살피여라! 백천(百川)이 동해(東海)로만 경주(傾注)되는 줄을!!

 

(왼쪽) <동아일보> 1922년 9월 16일자에 수록된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광고문안이다. 여기에는 흥미롭게도 “이왕 전하(李王 殿下, 즉 순종)께서 어용(御用)하심에 황송함을 비롯하여 각 궁가(宮家)와 여관(女官) 각위의 애용을 받았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는 문구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오른쪽) <매일신보> 1925년 4월 5일자에 수록된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광고문안에는 용산 원정(龍山 元町)에 자리했던 대륙고무공장의 전경 사진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1926년 1월 25일에 발생한 고무증기가마 폭발사건으로 인해 인명피해와 함께 큰 재산손실이 빚어지기도 했다.

 

<조선총독부관보> 1922년 9월 8일자에 수록된 「상업 및 법인등기」 항목을 보면, 1922년 8월 15일에 설립된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본점 소재지는 경성부 원정 1정목 124번지(京城府 元町一丁目 24番地)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사업목적은 “호모(護謨, 고무)를 원료로 한 선화(鮮靴), 양화(洋靴), 지나화(支那靴) 및 기타 고무를 원료로 한 물품 일체의 제조 판매”라고 기재되어 있다.

 

 

취체역(取締役)에는 자작 이하영, 이규원, 자작 이창훈(자작 이근택의 습작자), 이명구(李明九, 남작 이윤용의 아들)와 일본인 이와마 료(岩間亮, 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서기 출신)가 이름을 올렸고, 이들 가운데 이하영이 대표취체역에 선임되었다. 이와 함께 감사역(監査役)에는 창립위원장이던 남작 이윤용을 비롯하여 조준식(趙俊植, 익산 거주)과 일본인 텐니치 츠네지로(天日常次郞)가 공동 취임하였다. 일본인 이와마 료는 1926년 1월 23일에 취체역에서 퇴임하였고, 도장관 출신의 중추원 참의였던 유혁로(柳赫魯, 1855~1940)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선임되어 종신재직(終身在職)하였다.
대륙고무의 유명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이곳이 조선총독의 순시행로에 포함된 적도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확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륙고무의 유명세에 편승하여 무단으로 상표(商標)를 도용(盜用)하였다가 결국 신문지상을 통해 공개적인 사죄광고(謝罪廣告)를 게재해야 했던 사례들도 여러 건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와중에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의 대표취체역 사장이면서 실질적인 소유주였던 자작 이하영이 1929년 3월 1일에 숨지자 그해 7월 26일에는 그동안 감사역 자리에 있던 남작 이윤용이 대표취체역 사장에 올랐고, 이하영의 아들인 이규원 역시 대표취체역 전무에 선임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의 하나는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본점과 공장 소재지가 용산원정(龍山 元町, 지금의 원효로 1가)에서 벗어나 경성부 중림동(京城府 中林洞) 155번지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총독부관보>에 게재되는 「상업 및 법인등기」 항목을 통해 확인해본즉, 이 일이 벌어진 때는 1932년 10월 20일이었다.
다시 1938년 9월 8일에 이르러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대표취체역 사장이던 남작 이윤용이 숨지자, 자연스레 자작 이규원이 홀로 대표취체역의 역할을 수행하는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관보> 1941년 3월 28일자에 수록된 「상업 및 법인등기」 항목을 보면, 1941년 1월 31일자로 기존의 취체역이던 권영일(權寧一), 윤정석(尹晶錫), 권영순(權寧順)은 물론이고 대표취체역이던 이규원(李圭元)과 감사역(監査役)이던 최상집(崔相集), 후지노 아이센(藤野愛泉), 이재영(李宰榮) 등이 일괄 사임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경성일보> 1929년 3월 10일자에 수록된 이하영 자작의 장의관련 기사이다. 그의 영결식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는 독립문외 광장(獨立門外 廣場)이다. 그가 죽은 후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대표취체역 사장은 이윤용 남작이 물려 받았고, 다시 그가 사망한 1938년 이후에 그 자리는 이규원 자작에게로 돌아갔다.

<조선일보> 1927년 3월 3일자에 수록된 대륙고무 상표도용에 관한 사죄광고이다. 대륙고무신이 하도 유명세를 떨치다 보니 이것과 흡사하게 대승표(大陞標)라는 글자로 소비자들을 현혹한 사례에 해당한다. 이것 말고도 1929년 12월에는 대축표(大祝標)라는 글자로 상표도용을 하다가 적발되어 사죄광고를 낸 별개의 사례도 있었다.

 

이들을 대신하여 이날 츠지모토 케이조(辻本敬三)와 카네코 요지로(金子要次郞)가 새로운 대표취체역에 공동 취임하였고, 츠지모토 에이이치(辻本英一), 이모세 기이치로(妹背義一郞), 츠지모토 노보루(辻本昇) 등이 취체역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감사역에는 쿠와바라 칸이치(桑原貫一)와 시모무라 카메(下村龜)가 선임되었는데, 여기에 나열된 이들은 모두 일본 오사카(大阪) 지역에 주소지를 두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었다.
이것으로 보면 바로 이 시기에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경영권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주식 지분 역시 이들의 수중으로 넘겨지면서 이 회사는 실질적으로 일본인 기업체로 전환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둔 바로 그 시기에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창설 이후 줄곧 전무와 사장으로 있던 자작 이규원이 숨졌다. <매일신보> 1945년 4월 28일자의 관련기사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알리고 있다.

 

조선귀족회(朝鮮貴族會) 부회장 이규원(李圭元) 자작은 그동안 숙환으로 가료중이던 바 24일 오전 한 시 부내 서대문구 중림정(中林町) 155번지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향년은 56세이며, 영결식은 28일 오전 열 시 자택에서 집행하는데 상주는 이종찬(李鍾贊) 소좌로 현재 출정중이다. 고(故) 이 자작은 경성에서 출생하여 한문사숙(漢文私塾)을 나와 서화(書畫)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왕직 시종(李王職 侍從), 대륙고무공업 사장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조선귀족회 부회장의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해방 직후에 <동아일보> 1946년 3월 20일자에 수록된 「사복(私腹)에 걸린 국재(國財), 1억 4천만 원, 70회사 공장을 적발, 군정청 감찰부(軍政廳 監察部)에서 즉시 전부 몰수」 제하의 기사를 보면,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회사와 공장을 새조선의 산업부흥이란 미명 하에 접수니 관리니 하여 맡아가지고 사리사복을 채우고 있던 곳을 대대적으로 적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바로 이들의 목록에 ‘대륙고무’도 포함된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 이곳이 적산기업체(敵産企業體)로 분류된 탓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이보다 한참의 세월이 더 흐르고 <경향신문> 1974년 1월 26일자에는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서울 서대문구 중림동 155의 2, 대표 이종호) 2층에서 불이나 2층과 1층 일부를 불태웠다는 내용의 기사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것보다 2년 뒤에 나온 <경향신문> 1976년 9월 28일자에 수록된 「주택지 195 공해업소 내년까지 이전(移轉) 명령」 제하의 기사에 매연, 폐수, 악취, 소음 등 을 유발하는 주거지역 내 공해업소의 하나로 ‘대륙아스타일(중림동 155)’이라는 회사가 포함된 것이 눈에 띈다.
아마도 이것이 대륙고무공업에 관한 거의 막바지의 흔적인 셈인데, 한때 친일귀족들의 집합체이자 조선 고무신의 대명사로 불렸던 대륙고무의 화려했던 시절은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토, 2021/06/26-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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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지금도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지뢰 !!!

 

이철민 전 고파지부장(현 파주지역신문 <파주에서> 편집위원)

 

 

지뢰 사고,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난 6월 4일(금요일) 오전 9시 50분경, 고양시 장항습지에서 습지 정화작업을 하던 50대 남성이 발목지뢰(M14) 폭발 사고로 무릎 아래가 절단되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장항습지는 람사르 습지에 등록된 생태계의 중요 지역으로 인구 100만의 고양은 물론 서울과 수도권 지역의 생물 다양성 보전과 인간의 환경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번 지뢰 폭발은 장항습지의 생태 보전과 정화작업을 진행하던 중 일어난 사고이기에 더욱 안타깝다.
‘지뢰’ 하면은 흔히 DMZ나 민통선 인근 군사지역에서 발생하는 사고 정도로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지뢰사고는 지금 이 순간 고양, 파주, 김포 등 수도권 일대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도 발생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휴전선 인근 지역에 지뢰가 매설된 것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으로 대량 살포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된 1964년을 기점으로 북한은 휴전선을 넘나들며 게릴라식 도발을 감행하였고, 휴전선의 철책선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던 이 시절 미군은 이 지역에 플라스틱 재질의 대인지뢰 M14를 대량으로 살포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우리군도 민통선 지역에 M14를 대량 살포한다.
이번에 장항습지에서 발견된 대인지뢰 M14는 강원도 화천, 양구, 인제 등 민통선 이북 지역에 매설해 놓은 이들 M14 대인지뢰가 장마와 폭우 등으로 유실되어 나뭇가지 등에 휩싸여 떠내려오다 장항습지에 가라앉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M14는 그 재질이 플라스틱이어서 폭우에 유실되면 땅으로 가라앉지 않고 나뭇가지 등과 함께 떠내려 오면서 한강 하류의 강기슭에 머무를 확률이 높다. 장항습지 지역은 하루 2회 서해안 밀물이 올라오다가 신곡 수중보에 막혀 물살이 머무는 곳으로 김포지역보다 수심이 얕아 플라스틱과 스티로폼 등 생활 쓰레기들이 갈대 및 버드나무 사이로 밀려와 쌓이는 곳이기도 하다. 민통선 지역에는 한국군과 미군이 매설한 M14 이외에도 북한군의 목함지뢰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목함지뢰는 평화의 댐, 화천댐, 소양강댐, 팔당댐 등 강물의 낙차가 심한 댐을 거치면서 목함지뢰 내부의 폭발장치가 분해되어 한강 하류에 이르면 나무상자만 떠내려 올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이에 비해 플라스틱 재질로 가볍고 작은(지름 4.5센티, 두께4센티 정도) M14는 폭우에 유실되어도 분해되지 않고 떠내려와 갈대밭이나 버드나무 가지 등에 걸리거나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다음은 최근 2년 동안 발생한 M14 지뢰사고 내용이다.

2019년 8월 29일 : 김포 해병 2사단 담당 장교(중위)가 철책선 바깥 갈대 제거작업 수행 중 지뢰폭발사고로 왼쪽 발목 절단

2020년 7월 4일 : 김포대교 상류 고양시 한강변에서 낚시하던 시민 지뢰폭발 사고로 다리 절단

2020년 9월 10일 : 강원도 인제군 12사단 이모 중사 수해복구 철책작업을 수행하던 중 지뢰폭발 사고로 발목 절단

2021년 6월 4일 : 고양시 장항습지 정화작업 중 민간인 지뢰폭발 사고로 오른쪽 발목 절단

가장 넓은 지역에 매설된 대인지뢰, M14

우리 국민들은 지뢰 폭발 사고가 발생하면 북한군의 짓으로 알고 있으나 지뢰 폭발사고의 90% 이상은 미군과 한국군이 매설한 대인지뢰에 의한 것이다. M14 대인지뢰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서 생산되어 DMZ 지역의 남방한계 철책선이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던 시기에 북한군의 DMZ 도발을 방어할 목적으로 약 1,300개소에 약 40만 발을 매설하여 놓았다. 한마디로 한반도 곳곳이 지뢰밭이 되어버린 것이다. 1960년대에는 미군이, 1970년대에는 한국군이 주도적으로 매설한 이 지뢰는 폭우가 내리면 빗물을 따라 강과 바다로 떠 내려와 무고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괴물이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군인과 민간인 지뢰사고자 약 6,000여 명 중 90%가 M14 대인지뢰 폭발사고 피해자이다. M14 대인지뢰는 누군가 제거하지 않는 이상 혼자서 없어지지 않는다. 

 

민통선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지뢰 매설 경고판(한국지뢰제거연구소 제공)

핵과 더불어 20세기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유해한 무기 중의 하나이다. 대인지뢰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던가 다리를 절단시키거나 동물의 목숨을 앗아가야만 자신도 소멸되는 아주 비열한 살상 무기이다.
현대식 첨단 무기의 발전으로 대인지뢰가 적의 침투를 저지하는 효과는 거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북한군이 휴전선을 넘나들며 도발하던 1960년에는 대인지뢰가 적의 침투를 저지하는 효과가 높았다. 그러나 이제 대인지뢰는 전방에 근무하는 우리 군장병, 그리고 후방 국민들의 목숨과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대인지뢰 전면 사용금지 협약에 가입해야 지뢰는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1983년 12월 특정 재래식 무기의 사용금지 및 제한에 관한 협약(CCW 제1의정서)에는 가입하였다. 그리고 1996년 9월 재래식 대인지뢰 전면 사용 금지 협약이 ICBL(국제대인지뢰금지운동)에 의해 발효되었다. 그러나 우리 정부와 미국은 북한과 군사적 대치 상황을 이유로 이 협약에는 가입을 유보하고 있다.
국내의 대인지뢰 금지운동은 시민단체와 종교단체가 주축이 된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가 국내 대인지뢰 피해자 실태 조사와 특별 보상법을 추진하고 있으나 국방부의 비협조로 법 제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뢰 문제는 이제는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특히 민통선 지역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파주는 지금도 지뢰의 위험이 상존하는 지역이다. 지뢰 폭발사고의 근본적 해결책은 개인적 차원에서 조심한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다. 지뢰 문제를 공론화하고 여론화하여 군과 자치단체는 물론 지역 주민과 전문가, 정치인 등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법제화를 이루어야 비로소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토, 2021/06/26-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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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6월 후원회원 초대의 날 행사

• 국세현 기획실 회원사업부팀장

6월 19일 후원회원 초대의 날, 후원회원들과 지인 30명이 참석한 가운데 효창원 답사와 박물관 관람으로 진행했다. 방학진 기획실장의 안내로 김구 선생 묘역을 비롯해 이동녕 주석, 차리석 비서장, 조성환 군무부장 등 임정요인의 묘역과 안중근 의사의 가묘,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삼의사 묘역을 둘러보며 한국 근현대사를 되짚어 갔다. 30도가 넘는 폭염이었지만 초등 4학년의 아이부터 고희를 훌쩍 넘긴 회원까지 한마음으로 독립운동가의 묘역을 돌며 그분들의 항일정신을 되새기는 뜻깊은 자리였다. 효창원 답사 후 충분한 사회적 거리와 시간차를 두고 학예실과 기획실 상근자의 안내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관람하였다. 1부 일제는 왜 한반도를 침략했을까, 2부 일제의 침략전쟁,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3부 한 시대의 다른 삶-친일과 항일, 4부 과거를 이겨내는 힘,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로 이어졌다. 관람 후 참석자들에게서 이번 행사와 관련해 귀중한 의견을 청취했다. 참석자들은 전시물 1~4부 모두가 유익했는데 특히 친일과 항일을 대비해서 보여준 3부가 가장 인상 깊었다고 답변했다.
그 외 특기할 만한 응답으로는 “백년전쟁과 프레이저 보고서의 영상은 참 좋았으며 최신 트랜드에 맞게 유튜브 라이브 등 좋은 컨텐츠를 기대한다.” “반일정신을 일깨우는 행사를 더 자주 했으면 한다.” “지방 답사도 재개되고, 지방 회원 배가와 결속력 강화를 위한 오프라인 활동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지금이라도 민족반역자를 색출하여 처벌하여야 하며 하루빨리 통일이 이뤄져야 한다.” 등이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을 맞는 2021년 상반기에, <민족문제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 특별한 초대> 후원회원 초대의 날이 세 차례 개최되었다. 하반기에도 더 많은 후원회원을 모시고 알찬 내용으로 초대의 날 행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화, 2021/07/27-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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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과 함께하는 시민역사강좌 열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에서 주관하는 민간연계 시민대학에 3년 연속으로 선정되어 시민역사강좌를 개최하였다. 6월 29일부터 9월 14일까지 3개월 간 진행되는 시민역사강좌는 ‘프로그램Ⅰ: 내일을 여는 선언-우리시대 표상이 된 가치들과 그 역사’ 5꼭지와 ‘프로그램Ⅱ: 한일역사부정론의 궤변’ 5꼭지로 구성되며,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식민지역사박물관 5층 강의장에서 온라인 ZOOM
화상강좌로 진행하고 있다. 수강생은 일반 시민과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 등이 참여하고 있는데, 20대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 분포를 보인다. 비대면으로 진행하는
강의지만 꾸준하게 매주 30여 명이 참여하여 시민강좌에 대한 열의를 보여주고 있다.
프로그램Ⅰ은 노동, 여성, 난민, 동물생명권, 지역을 주제로 한국현대사에서 변혁을 위해 외쳐진 각 분야의 선언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고 우리시대가 현재 지향하고 있는 다음 사회의 모습을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8월 17일부터 진행할 프로그램Ⅱ의 기획 의도는 현재의 일본과 한국에서 나타나는 역사부정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자행된 강제동원의 문제를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을 이열치열로 이겨내려는 참여자들의 열기는 우리 사회현상의 변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시민사회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실천적 움직임으로 승화하고 있다.

화, 2021/07/27-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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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강제동원증언전 개막

 

•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피해자들의 목소리로 일본의 산업유산 시설이 지워버린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역사를 ‘증언’하는 기획전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가 7월 16일(금)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개막했다. 이번 전시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공동으로 주최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시작하는 날에 맞춰 개막한 이 전시회는 강제동원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통해 일본에 ‘전체 역사를 알게 하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 이행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있다. 전시는 크게 2부로 나눠진다. 먼저 제1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에서는 ▲‘가라면 가는 거지’ – 식민지 조선 청년의 강제동원 실상 ▲‘갇혀서 일하는 신세야’ – 강제노동 현장의 일상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 반인권적인 처우와 사건·사고 ▲‘다 같은 노예 신세였어’ – 중국인 피해자와 연합군 포로의 강제노동 실태 등이 피해자들의 증언영상을 중심으로 전시된다. 이 같은 증언영상들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20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채록」 사업(민족문제연구소 수행)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2004년 출범) 조사활동 ▲강제동원피해자 소송운동 ▲일본 시민단체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과 ‘나가사키 중국인 강제연행의 진상을 조사하는 모임’을 통해 확보된 것들이다.

 

특히 하시마 강제동원 피해자인 서정우 씨, 이경운·이지창 씨의 증언영상과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강제노동실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자료들이다. 수십 년간 이 문제에 천착해온 일본 시민단체 POW연구회와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의 협력으로 공개가 가능했다. 제2부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에서는 유네스코 일본 산업유산의 등재 논란과 현재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역사를 부정하는 산업유산정보센터의 문제점을 다루었다. 특히, 제2부는 2015년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린 독일 본에서 일본 산업유산 전시(戰時) 강제노동의 어두운 역사를 세계유산위원들에게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민족문제연구소 주최·주관)의 확장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에 폴란드 아우슈비츠수용소, 독일 푈클링겐 제철소 등과 같은 ‘부정적 세계유산Negative Heritage)’이 어떤 방식으로 후대에 교훈을 전하고 있는지를 소개하면서 일본 산업유산의 역사부정 실태를 꼬집는다. 
아울러 연구소는 이날 전시 개막과 함께 강제동원의 전체 역사를 전시하도록 촉구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안을 지지하고 일본 정부의 충실한 이행을 촉구하는 한일 시민단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같은 활동들은 일본 산업유산 현장에서 한국인, 중국인, 연합군 포로 등에게 가해진 전시 강제노동의 역사를 알리는 온라인 한일시민연대공동행동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 앞으로도 다양한 캠페인 및 이벤트가 기획·추진될 예정으로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

수, 2021/07/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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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일제잔재 청산 조례를 앞장서 발의한 김영진 경남도의원

인터뷰 : 방학진 기획실장

 

전국적으로 친일 및 일제잔재 청산을 위한 지자체의 조례는 18개로 모두 3·1운동 100주년이었던 2019년 이후 제정되었다. 광역단체로는 서울, 부산, 광주, 울산, 경기, 경남, 전남, 충남, 충북, 제주이며 기초단체로는 경기 고양, 경남 김해이다. 이는 일제잔재 청산운동의 전국적 확산이라는 면에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례는 민간 차원을 넘어 지방 정부가 예산을 투입하여 실제 사업을 집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이다. 또한 지방 의회의 논의 과정을 거쳐 제정되어 주민들의 공감대가 일정하게 반영되기 때문에 친일청산운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경남의 경우 2020년 12월 31일 「경상남도 일제잔재 청산 등에 관한 조례」 제정에 이어 2021년 6월 3일 「경상남도교육청 일제잔재 청산에 관한 조례」가 제정되었다. 지자체와 교육청 모두 관련 조례를 제정한 지역은 경남 외에도 서울, 광주, 충남, 전남, 제주가 있다. 이번 달 민족사랑에서는 「경상남도 일제잔재 청산 등에 관한 조례」와
「경상남도교육청 일제잔재 청산에 관한 조례」를 모두 대표 발의하여 통과시킨 김영진 경남도의원(창원)을 소개한다. 김영진 의원은 2018년 창원 용지동·봉림동에 출마하여 창원 최고 득표율(58.1%)로 당선되었다.

 

 

● 도의원이 되시기 전에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해오셨는지요?
● 홍준표 경남도지사 시절, 경남의 학생 무상급식 중단과 진주의료원 강제폐쇄 등 지역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특히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처벌을 촉구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2013년과 2014년에는 10개월 동안 창원시청 사거리에서 이명박 구속을 촉구하는 1
인 시위를 했고, 2016년과 2017년에는 경남도청 정문, 명서사거리, 도계삼거리 등에서 박근혜 구속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5개월 간 진행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검찰개혁의 목소리를 내는 데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본업으로 해법다산학원을 경영하였습니다. 도의원 당선 후 2018년 7월부터 의정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학원 운영을 아내에게 넘겼습니다.

● 친일청산 관련 조례를 다수 발의, 제정하셨는데요.
● 대한민국 정신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단죄와 학생들에 대한 올바른 역사교육이 없이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의회 5분 자유발언을 통해 <친일인명사전> 보급을 촉구했습니다. 또한 이승만 정부 아래서 자행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인 국민보도연맹사건 피해자들에 대해 법원의 무죄 선고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경상남도 일제잔재 청산 등에 관한 조례」, 「경상남도교육청 일제잔재 청산에 관한 조례」 외에도 「경상남도교육청 역사교육 활성화 조례」와 「경상남도 독립유공자 묘지 지원에 관한 조례」를 발의하여 제정했습니다. 알다시피 국립묘지 밖에 있는 독립유공자의 묘지가 방치되거나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조례에는 벌초비 지원, 묘지 보수 비용 지원, 안내판 설치 등의 내용을 담았습니다. 묘지 지원 조례는 강원, 경기에 이어 3번째입니다.
조례 외에도 ‘친일재산귀속법 재·개정 등 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 촉구 건의안’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 무덤 이장과 서훈 취소를 위한 국립묘지법, 상훈법 개정 촉구 결의안’도 발의하였습니다. 2020년 7월 23일 결의안 통과 소식을 듣고 김원웅 광복회장님이 경남도의회까지 오셔서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태극기와 ‘역사정의실천 정치인’ 선정패를 주시며 축하해 주셨습니다.
김영진 의원의 관심사는 비단 친일문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경남도 내에 남아 있는 전두환의 흔적을 지우는 일, 독립운동가를 지역화폐의 도안으로 넣는 일, 강제징용 피해자 지원 등 다양하다. 특히 올해 3월에는 김영진 의원의 제안을 받아들여 창원시가 전국 최초로 지역 독립운동가(이교재, 명도석, 배중세, 김진훈, 주기철)를 새긴 새로운 창원사랑상품권(누비전)을 발행해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김영진 의원은 자기 동네에 도로를 내거나 지역구 유권자들에게 눈도장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하지 않
는다. 우리나라의 지방정치의 현실로 보자면 내년 재선이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김영진 의원이 정치에 입문하면서 다짐했던 말을 보면, 그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모범으로 삼고 있는 정치인이 누구인지 짐작된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람 사는 세상을 함께 만들겠습니다.”앞으로 지방의회든 국회든 이런 정치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수, 2021/07/28-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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