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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 연구소 교원연수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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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 연구소 교원연수 실시

admin | 금, 2021/08/27- 02:56

[초점]

상반기 연구소 교원연수 <‘일제잔재’의 사례와 수업 활용> 실시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초·중·고 현직 교원을 대상으로 하는 직무연수가 8.10~12일 사이에 민족문제연구소 강의장에서 비대면 온라인 강의로 진행되었다. 연구소는 2019년부터 경기도의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용역을 수행하며 방대한 보고서를 발간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기초로 하여 지역사회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의 교사용 학습 부교재 <우리 지역 일제잔재를 찾아라>를 출간하였다.
이번 연수는 교육현장에서 이런 결과물을 활용하고 역사의식의 제고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선생님들의 바람이 반영된 프로그램이었다. 역사 등 사회과 과목을 주로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참여하여 일제잔재와 친일문제를 이론과 실제 양 측면에서 접근 분석하고 효과적인 교수법 수립에 도움을 주고자 기획된 것이다. 내용은 1강 일제잔재란 무엇인가?(조재곤서강대 교수), 2강 경기지역 일제잔재의 현황과 수업 활용(신대광 모락중학교 교사), 3강 서울 지역의 일제잔재-기념물(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4강 오욕의 역사, 금단의 땅 용산(현지 답사, 이순우), 5강 친일 관련 사료 검색과 디지털 아카이브 활용법(장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6강 박물관 유물과 자료로 본 친일의 역사(김승은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이었다.
실습, 답사, 관람, 토론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현장 연수를 운영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 방역단계가 4단계로 격상되어 모두 온라인 비대면 원격 강의로 진행하였다. 특히 용산지역 답사는 현장을 동영상으로 담아와 보여주고, 박물관 관람은 자료이미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했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방학중이라 3일간 15시간으로 이뤄진 강행군 강의였지만, 참가 선생님들은 3일 내내 엄청난 열의를 쏟아내며 호응해주었다. 선생님들의 반응은 “더 많은 동료 교사들이 함께하면 좋겠다”며, 연구소의 연수 프로그램이 “전국 모든 학교에 알려져”, “많은 이들이 참여하여 현장에서 적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냈다. “일재잔재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하게 되었고 새로운 접근방법을 알게 되어 좋았다”며 “늘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시간이 아깝지 않은 연수”라는 반응을 접하며 굴절된 역사를 바로세우는데 함께할 수 있는 더욱 알찬 프로그램으로 교사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가까이 다가서길 기대해본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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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상 수상소감]

공영방송의 책무를 잊지 않을 것

KBS 밀정 제작팀 언론상 수상자

면구스러운 이야기부터 하자면, <밀정> 2부작이 여기저기서 좋은 평가를 잇달아 받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5분짜리 영상조차도 ‘길어서’ 시청하기 힘들다는 초고속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많은 열정을 쏟아 만든 진지한 다큐멘
터리는 그 분량에 상관없이 여전히 시청자들에게 소구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도 재확인했다고 할까요.
그러나 <임종국상>은 여타 평가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과연 우리가 이 묵직한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인가. 계속 되뇌게 됩니다.
‘과공비례’가 되지 않기 위해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상을 받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이번 상은 젊은 저널리스트들이 보여준 성취에 대한 축하임과 동시에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응원도 함께 포함된 게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힘이 나고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책장에 꽂힌 <친일문학론>을 다시 꺼내보다가 임종국 선생님이 (지난해 작고한) 김윤식 선생님과 각별한 교우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거장은, 다른 거장을 알아보는 안목을 청년시절부터 갖추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치열하게 살다 가신 두 분의 업적을 어떻게 한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겠냐마는, 어쩌면 이들은 ‘우리의 일그러진 근대’를 탐구하는 것을 한평생 업으로 삼은 게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스치듯 들었습니다.
저희들의 밀정 추적도 100주년이라는 축제기간에 걸맞지 않은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의 일단을 가감 없이 들춰내는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둡고 불편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엄정함이란 ‘빛과 그늘’을 모두 직시하는 데에서 출발하고, 누군가를 모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어둠을 자꾸 이야기해야만 밝은 부분이 더욱 빛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조언 말씀이 저희들 마음속 출발점 같은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댓글을 읽어보면 시청자들도 이미 그렇게 총체적으로 방송의 의미를 확장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부당한 정치권력에서 벗어나 이제 다시 새롭게 출발하고 있는 KBS는, 그러나 전혀 다른 차원의 파고를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급변해버린 언론환경이 그것입니다. 그날의 뉴스가 그날 다 소비되지 못한 채 휘발되고, 장기간 공들여 기획 취재한 보도물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사라지며, 유명인이나 연예인의 ‘몰락의 서사’만이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그런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모든 언론사들이 갈팡질팡하고 있으며 탐사보도 역시 새로운 방향 설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제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이번 <밀정> 2부작은, 그런 환경에 놓인 저희들에게 어떤 기본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저널리즘의 기본이란 무엇인가. 비판적 문제의식과 끈질긴 탐구를 배제한 채로는 그 어떤 탐사보도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것, 기본 요소 하나하나를 벽돌 쌓듯 충실히 이행할 때 시청자들은 많든 적든 분명한 호응을 보여준다는 것 말입니다. 특히 <밀정>
2부작은 장기간의 취재와 투입된 예산·인력의 스케일 측면에서 볼 때, 공영방송 KBS만이 수행할 수 있는 탐사보도였다고 감히 단언합니다.
KBS는 이런 걸 잘해야 하고, 이런 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드러낼 줄 알아야 합니다. 언론사의 난립 속에 KBS가 살아남을 수 있는 한 갈래의 길이 여기에 있다는 게 저희들 생각입니다.
내년 2020년이 되면, 아마도 100주년인 올해만큼 역사 돌아보기의 분위기가 조성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니까요. 그러나 단지 역사적 소재를 많이 다루고 안 다루고의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공동체가 응당 공유해야 할 건강한 역사의식을 현재적 맥락에서 끊임없이 환기하는 것이 공영방송의 책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임종국상>이 저희들에게 주문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에 강조점이 찍혀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책무와 주문을 늘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금, 2019/11/29-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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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상 수상소감]

‘동포가 읽을 만한 역사’를 위하여

정영환 학술상 수상자

 

내가 처음으로 투옥된 것은 1930년이다. 그런데 당시 내가 알았던 조선에 대한 지식이란 실로 미미하였다. […] 그러기에 예심법정에서 조선총독정치에 대해 말해보라고 판사가 권하여도 그걸 구체적으로 말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나는 이건 아니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무식함이 부끄러워졌다. […] 그래서 나는 1934년 출옥과 동시에 바로 조선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였다.(김두용,<조선근대사회사화>, 향토서방, 1947년, 1쪽)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노동운동과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에 투신한 김두용은 해방 직후에 출간한 책 첫머리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이 글을 처음 접한 것은 2002년, 제가 졸업논문을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때는 스쳐 지나간 구절이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일본에 살아야 했던 조선인들이 ‘역
사’를 갈망하게 될 동기는 이 김두용의 경우와 여전히 대동소이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체포와 투옥이란 극단적인 경험은 누구나가 겪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본인 친구나 동료들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식민지배를 변명하려는 언행에 당황하면서도 제대로 된 반론 하나 못한 경험은 이 글이 씌어져서 70년 이상이 지난 현재도 재일조선인들에게 여전히 평범한 일상입니다.
역사를 배우는 즐거움이 북돋는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는 질문에 맞서기 위한 지식으로서의 ‘역사’. 재일조선인들이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보면 한국 분들 눈에는 지나치게 비장하게 비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장할 수밖에 없는 역사에 대한 절심함이 재일조선인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동포가 읽을 만한 책을 쓰고 싶다.
’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 한국어판 서문 첫마디를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던 것은 이런 절실함을 갖는 재일동포들이 ‘읽을 만한 책’을 쓸 것이 제 바
람이었기 때문입니다. 2003년에 대학원으로 입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하였을 때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염원입니다. 제가 그려낸 역사를 ‘동포’들이 자신의 경험으로 실감할 수 있을 만한 그런 글, 즉 일본사의 ‘공백’을 메우는 역사나 ‘재일조선인문제’의 역사가 아니라 재일조선인들의 생존을 위한 고뇌의 역사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남한에 입국한 적도 없었고 제가 염두에 둔 ‘동포’는 재일동포들이었습니다. 특히 재일조선인운동에 투신하여 각지에서 ‘일꾼’으로 사업하던 ‘동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바람이었습니다. 즉 당시 제가 상상하는 ‘동포’ 개념은 일본 열도 속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16년이 지난 오늘, 제 책은 임경화 선생님의 노고 덕분에 번역이 되어 한국의 ‘동포’를 독자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일파 연구와 우리 민족사의 정립에 평생을 바친 임종국 선생님을 기리는 상을 수여받을 영예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조선적(朝鮮籍)’이라서 ‘국가안보상 위협이 될 우려가 있다’ 혹은 ‘간첩활동을 할 개연성이 높다’ 등
의 이유로 입국이 불허되는 처치에 있었던 제가 이런 영광스러운 날을 맞이한다고는 상상도 못했었습니다.
‘민족사의 정립’을 위해 항상 싸우시는 분들 덕분으로 이런 만남의 공간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가 ‘동포가 읽을 만한 책’이 되었는지 자신이 없습니다만 겨우 소장 연구자의 입구에 선 저의 저작에 주목해주시고 더 많은 ‘동포’와 만날 기회를 주신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선생님들께 먼저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자 후기’에도 썼듯이 이 책의 기초가 되는 조사를 시작한 것은 2002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두 명의 재일조선인이 쓴 책에 큰 감격과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중 한 권은 서경식 선생님의 <분단을 산다>(1997년)입니다.
‘<쟈이니치>를 넘어서’란 부제가 달린 이 책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쟈이니치’론, 즉 재일조선인을 일본 국내의 민족적 소수자로만 보는 탈민족적인 담
론을 비판하면서도 구태의연하고 본질주의적인 민족관을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민족관’을 위한 검토를 담은 책이었습니다.
비타협적이고 논쟁적인 글쓰기 스타일과 무엇보다도 재일조선인이란 존재를 협애한 일본 틀이 아니라 식민주의가 낳은 제3세계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시각에 매혹되었습니다. 서경식 선생님의 책과의 만남 없이는 이번 책의 ‘조선근현대사로서의 재일조선인사’란 기본시각도 식민주의와 분단이 낳은 폭력과 이산(離散)이란 주제에 대한 관심도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한 권은 박경식 선생님의 <해방후 재일조선인운동사>(1989년)입니다. 법학부에서 헌법을 배우고 있었던 제가 재일조선인사를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 이 책이 묘사한 재일조선인들의 운동사에 흥미가 끌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1980년에 일본 지바현에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조선학교를 다녔습니다. 민족교육은 저에게 우리말과 역사 그리고 조국에 대한 인식을 키워주
었고 동포사회의 ‘일군’으로 사업하는 많은 분들과의 교류는 일본의 치안당국이 묘사하는 ‘운동’상과 전혀 다른 재일조선인운동의 역동성을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단 민족교육을 통해 배운 재일조선인사는 한편에서는 교과서적인 ‘올바른 노선’의 해설이기도 하였습니다. 


역사를 배우는 즐거움이 북돋는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는 질문에 맞서기 위한
지식으로서의 ‘역사’
. 재일조선인들이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보면 한국
분들 눈에는 지나치게 비장하게 비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장할 수밖에 없는 역사에 대한
절심함이 재일조선인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경식 선생님의 책에는 새조선 건설노선이나 참정권을 포함한 일본에서의 권리 획득을 둘러싼 여러 논쟁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어 이런 올바른 노선의 해설이 아닌 고민과 논쟁, 갈등의 역사는 신선했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동포가 읽을 만한 책’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책들을 통해 우리 역사의 밑바닥에는 재일조선인들이 자신의 기록을 남기려고 애써온 분투가 깔려있음을 알게 되고 역사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박경식 선생님을 비롯한 초창기 재일조선인사 연구자들은 대다수가 재야의 연구자들이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야말로 온몸을 바쳐서 자료를 찾아내시어 조선인강제연행이나 간토대학살 그리고 재일조선인의 민족해방운동의 수많은 사실들을 발굴하였습니다. 박경식 선생님의 ????조선인강제연행의 기록????이 한일협정체결을 앞둔 1965년에 간행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런 연구는 그저 연구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사회의 일그러진 조선관을 시정한다는 실천적인 문제의식을 동반하고 있었고 또한 조국의 분단을 극복하여 통일을 이룩할 길을 역사 속에서 찾기 위한 분투의 기록이었습니다.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에 수록한 제 연구 또한 박경식 선생님을 비롯한 초창기 연구자들의 연구 없이는 도저히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 자리를 빌려 가혹한 분단과 민족차별이 횡행하는 전후 일본사회 속에서 그야말로 ‘민족사 정립’을 위해 외롭게 발언과 연구를 이어오신 연구자들에게 감사의 의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의 원저는 2013년에 일본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일본어판 출판과 한국어판의 간행은 서문과 후기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수많은 분들의 도움 없이는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영예로운 상을 받게 되었던 것도 그간 도움을 주신 분들 덕분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감사드립니다.
특히 이번 책을 우리말로 옮겨주시고 많은 ‘동포’들과 만날 기회를 주신 임경화 선생님과 제 책 출판을 위해 힘써주신 푸른역사 박혜숙 대표님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현재 ‘해방5년사’를 이어 조선전쟁(한국전쟁)기의 재일조선인사 연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연구성과로 이번 시상을 통해 저에게 주신 기대에 보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갑작스럽게 법학에서 사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진학의 길을 선택한 무모한 아들을 항상 응원해주신 어머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면서 제 수상소감을 맺겠습니다.

금, 2019/11/29-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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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민족문제연구소 군산·김제 답사기

김영희 서울 광진 회원

<반일 종족주의>라는, 직함은 허위이고 폭력이 일상화된 대표저자와 그들의 시대착오적인 배설물로 인해 지난여름부터 심기가 불편했다. 무슨 짓을 했길래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가. 그것도 아베의 경제 도발로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탄력을 받는 이 시기에. 무시가 상책이지 하고 모른척했지만 불편함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조모씨가 ‘구역질나는 책’이라 하든, 홍모씨가 ‘보수 우파의 상식과 어긋나는 책’이라 하든, 그런 표현은 이 책에는 과분하게 고상했다.
자기정체성을 깨닫지 못한 채 정확하지 않은 통계수치에 수상한 목적성을 가지고 접근하는 저 곡학아세파에 대해 나는 그저 한 가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지금의 이 독립된 나라에서조차 자발적으로 습득한 식민사관이 저다지도 투철한 저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었다면 과연 어떤 지경까지 친일을 했을까?’
가을 초입 그들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는데 힘써 오신 허수열 교수님이 인솔하는 군산·김제 답사가 있다는 소식을 문자로 받았을 때, 기회를 놓칠세라 당장 신청했다. 살아가면서 교통사고처럼 일상공간에서 돌발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가진 태극기부대스러운 사고들. 이에 대처할 무기가 절실했는데 그들의 논리적 오류를 학문적으로 따져볼 기회를 꼭 잡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답사대상자로 선택받아 안내 문자가 왔을 때는 감격과 함께 뒤늦게 걱정이 시작되었다. 왜 혼자 신청했을까. 좋은 것은 혼자 보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 여행만큼은 절대 혼자는 안 가던 나는 버스에 올라타기까지 용기를 내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여행은 시쳇말로 ‘취저’(취향저격)였다. 죄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진지하게 학습하는 분위기여서 혼자인 것이 오히려 조용히 설명에 집중할 수 있었고 버스이동시간에 어색함을 깨기 위한 그 흔한 자기소개도 안 시켜서 숫기 없는 나로서는 매우 감사했다. 연구소에서 정성껏 준비한 간식 봉투, 물과 커피음료, 수첩과 필기구, 맛깔난 전라도 상차림의 점심과 저녁식사, 전북 민문연 회원들께서 준비해주신 김제농협 신동진쌀까지 선물로 그득히 받았다. 참가비도 없었으므로 어느 것 하나도 받기가 송구스러웠지만 20여 년 민문연 회비를 내었으니 오늘은 되받는다는 생각으로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고 합리화해봐도 참으로 많이 챙겨주셨다. 받은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역시 허수열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지식의 세례였다. 이날 들은 지식들은 식민지근대화든 조국근대화든 경제대통령이든 근대화시켜준다 잘 살게 해준다는 경제적 논리를 내세워 자기욕망을 채우려는 세력과 그에 부화뇌동하는 이들을
맞닥뜨릴 때마다 매우 유용하게 조용하면서 강한 위력을 발휘할 것들이었다.

10월 5일 토요일. 날씨는 맑았다. 사실 군산 답사라길래 군산 시내 곳곳의 적산가옥이나 항만시설을 둘러보는 것인가 하고 떠났는데, 자료집을 여는 순간 온통 논과 강줄기와 방조제만이 표시된 지도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도심으로 들어갈 일이 없을 답사라는 것을. 이동하는 중에 펼쳐지는 호남의 너른 들 자체가 오늘 답사지의 처음이고 끝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사람 구경 할 일도 전혀 없었다. 마지막 답사지인 김제 죽산리 일본인 하시모토의 농장 사무실과 원평천 해창갑문을 제외하고는 구경온 사람들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황량하여 별스럽고 그래서 더 전문적인 연구자들 같아 보이기도 하는 우리는 참으로 특이한 답사단원들이었다.
이 답사를 원경으로 묘사하면 밀레의 자연주의 화풍의 평화로운 그림, 근경으로 묘사하면 수확기가 되어도 내 배 채울 곡식 없는 그림의 떡과 같은 황금들판 액자틀 같았다고 할 수 있었다. 내 고향이 경상도여서 서울에서 내려갈 때마다 좌우로 산으로 턱턱 막힌 도로만 보다가 난생처음 호남고속도로를 달릴 때 너무나 경이로웠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탁 트인 지역이 있구나 산이 없는 땅이 있구나… 이렇게 광대한 들에서 허리 휘어지게 일하고 수확했는데 모조리 수탈당한다면 동학 농민 봉기뿐 아니라 더한 것도 일어날 만 했겠구나 라고 한방에 이해되던 순간이었다. 그 평야 중에서도 가장 너른 들인 김제·만경 평야는 한반도에서 지평선이 보이는 유일한 땅이라고 교수님께서 해설해주셨다. 차를 타고 늘 스쳐지나갔던 평야 중에서도 가장 너른 들 속으로 들어가 한 점이 된 하루였다. 자료집 구글 어스 사진으로 보아도 실제 내 눈으로 보아도, 넓은 만큼 물도 많이 필요했겠는데 물은 드물어 보였고 그래서 수리시설 보급이 그 어느 곳보다 절실했던 지역이었나 보다. 교수님 설명이 이 지역은 하천의 길이가 짧아서 남쪽 섬진강 수계에게 유역변경방식으로 물을 끌어오기도 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답사 경로는 동진강의 상류인 낙양취수장 낙양취입수문부터 하구쪽으로 내려가면서 동진강 하구언, 정읍천 합류지점인 만석보를 들렀다가, 벽골제 둑길을 따라 수문까지 걷고, 방조제인 하구 갑문까지 가는 코스였고 중간중간 일본인 지주들의 곡식창고와 관리소를 들렀다. 만경현이라는 이곳 지명이 붙여진 것은 신라 경덕왕 때였고 ‘경’이 중국 주나라 때부터의 면적 단위이므로 그 오래전부터도 경지면적이 아주 넓다는 뜻을 담은 지명을 붙인 것이라고 하였다.
삼국시대 아마도 벼농사를 시작했을 시기부터 있었던 벽골제와 고려, 조선 시대의 수리시설 보강 위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점차 근대적 토목공사로 현대화되어왔을 수리시설은 현재 수문이나 농업용수 공급이 과연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아스럽게 가는 곳곳 물이 하천 바닥에만 겨우 수맥을 이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그래서인지, 풍요로워야 할 이 가장 넓은 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더 빈곤해보였고, 산업화시기를 거치며 농촌은 더 망가졌고, 일제 수탈의 시기나 그 전 전근대 왕조시대 수탈을 생각해보아도 이 광활한 평야의 경작자들이 그 어느 시절 언제 한번 풍요로운 적이 있었을까 싶어서 종일 들판을 걸으면서 이 좋은 가을날씨와 평화로움을 마냥 만끽하기에는 계속해서 처연한 기분이 함께 찾아왔다. 
역사시간에 강조점을 찍으며 배운 만석보는 기대하고 갔으나 터에 기념비 하나 남겨놓은 것 빼고는 흔적도 영역도 안내문도 보이지 않아서 아쉬움이 컸다. 관광자원개발까지는 아니라도 안내문이라도 상세히, 혹은 고부봉기를 자세히 학습할 수 있는 박물관이 세워지면 이곳이 더 의미있게 기억되고 일제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어 사라져간 동학과 민중의 역사에 대해서 길이 기억될텐데. 친일파의 흔적들은 역겹게도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 뒤 등 곳곳의 비석에 남았는데 정작 이름 없이 사라진 중요한 민중들의 역사야말로 우리 손으로 더 영광스럽게 남겨주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이 답사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식민지근대화론 반박이었고 교수님은 그들의 허술한 근저를 보여주셨다. 1990년대 초 일본군 ‘위안부’의 대두로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등 일본 내의 반성의 목소리에 당황한 일본 극우는 후쇼사의 교과서를 채택시켰고 세력을 강화하여 지금의 아베 정부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런 일본 우파의 목소리를 국내에서 메아리로 화답하던 뉴라이트도 이들과 함께 1990년대와 2000년대 들어서 목소리를 높이고 일본보다 10년 늦게 교학사교과서 선정과 국정교과서 제정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의 우파 교학사교과서는 전국 채택률 제로 신화를 이룩해냈으며 국정교과서 제작 지시를 내린 자를 축출하는 신화를 만들어낸 주체는 바로 자랑스러운 이 나라 국민들이다.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남은 저들의 마지막 보루가 낙성대경제연구소이며 그 마지막 토사물이 ????반일 종족주의????인 것으로 보인다. 자기 민족인데 자기 민족을 종족이라고 부족 수준으로 폄하하는 이 국적 불명의 연구자 집단이 왜 한국을 터전으로 하여 사는지가 가장 이해 안 되는 지점이다. 터전을 아예 일본으로 옮겨서 활약하면 더 각광받을 텐데.
답사 자료집을 설명해주시면서 교수님은 1910년대 큰 수치로 성장하던 경제성장률을 저들이 우량품종의 보급 덕분이라고 주장하며 1917년 지도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교수님이 밝힌 바에 의하면 그것은 1910년대도 아닌 1921년의 지도였고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던 시기의 성장률은 오히려 둔화되었던 것으로 설명해주셨다. 이 지역은 그들이 얘기하듯 일본 덕에 옥토로 바뀐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수리시설 보강으로 이 시기에 이미 옥토였고, 오히려 수탈에 의해 황폐해진 그 아픈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설명을 들었다. 특히 발굴해서 복원해놓은 내륙 깊숙한 벽골제의 수문 위치를 보니 이영훈이 말하는 대로라면 벽골제가 방조제였고 그래서 이곳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으므로 일제에 의해 개발되기 전 황량한 갯논이었다는 주장이 말할 필요도 없는 엉터리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저들이 이 들에 단 한번이라도 와봤다면 도저히 꺼낼 수 없는 주장이었다. 이날 답사는 식민지근대화론의 거짓을 눈으로 명확하게 보게 해주었다.
김제군이나 옥구군, 익산군처럼 일본인 소유지 중 면적이 넓은 곳만 하천을 개발하고 있었던 것도 교수님의 자료들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개발은 애초부터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강탈해간 토지로 부와 명예를 누린 것은 일본 상인과 재벌들이었다. 구마모토 리헤이의 여름 별장은 백두산에서 운반해온 낙엽송으로 외벽을 두르고 마루는 일본에서 수입한 삼나무를 깔고 지붕은 자연석 청판석을 덮은 호사스런 건축물로 공사비가 조선총독부 관저와 비슷했다고 하였다. 그의 농장에서 수확한 쌀을 보관하는 창고는 지금도 그 자리에 그 규모로 신축되어-지역에서 무슨 용도로 최근에 왜 신축하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2층 높이로 우람하게 서있는데 그 높은 건물을 가득 채웠을 쌀이 모두 일본으로 반출되어 나갔다. 이들 일본인 지주들은 그 부를 가지고 또다시 조선의 문화재들까지 수집하고 반출하는데 썼다고 하니 이중으로 울화통이 터질 일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통계는 위험하다. 통계는 특히 과거의 통계는 정확하지도 않을 뿐더러 작성자의 의도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위험한 통계는 해석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한 번 더 왜곡된다. 교수님은 1910~1918년 토지조사사업 완료 전까지는 조선의 토지와 생산량에 대해 정확한 파악이 어려웠고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후에도 과거의 통계를 일제 스스로 두 번이나 전면 수정하는 등 총독부 스스로도 못 믿을 통계이었음을 확인시켜주었다고 했다. 저 친일학자들은 그 엉터리 통계에 기반하여 모래탑을 쌓아올린다. 식민지근대화 논리는 이 위험한 숫자가 아니라 상식으로 풀어야 한다. 일본이 우리 국민 잘 살게 해주려고 개발을 시작했는가? 수치 몇 개로 제국주의 통치를 합리화할 수 없다. 키플링이 백인의 짐이라고 하며 지배했던 아프리카에 영국인들이 과연 흑인을 잘 살게 해주려고 들어갔던가, 그리고 그들은 이후로 실제로 잘 살게 되었는가에 Yes라고 대답할 수 있을 때 친일학자의 식민지근대화론도 같은 맥락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총독부는 진정 조선인들을 위해 개발을 시작했는가? 그 개발로 조선인들은 모두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는가?
우리의 보물인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과 허수열 교수의 저서 <개발 없는 개발>을 찾아 읽는 것으로 이날의 끝도 없이 넓은 광야 답사를 마무리 짓는다.

금, 2019/11/29-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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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52]

통칭호(通稱號), 침략군대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암호명
조선주둔 일본군은 어떠한 통칭호를 사용했을까?

이순우 책임연구원

보병 군조 후지모토 쇼조가 중일전쟁 당시에 소지했던 ‘지나사변출동경력’ 표기 일장기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소속부대가 ‘지휘관의 성’을 따서 명명하는 방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식민지역사박물관의 2층 진열공간에는 구겨지고 빛바랜 한 장의 일장기(日章旗)가 전시유물로 걸려 있다. 가운데 히노마루(日の丸, 붉은 원) 안에는 기(祈)라고 하였고, 호신용 부적과 같은 의미로 네 귀퉁이에 한 글자씩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쓴 이 일장기에는 ‘지나사변출동경력(支那事變出動經歷)’이라고하여 참전일지와 같은 내역이 순서대로 빼곡히 정리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는 이 깃발의 주인인 보병군조(步兵軍曹 : 지금의 중사에 해당하는 계급) 후지모토 쇼조(藤元正三)가 중일전쟁(中日戰爭)이 터지자 1937년 8월초에 일본 미야자키현 미야코노죠시(宮崎縣 都城市 : 제23연대 부대주둔지)를 출발하여 부산과 안동현, 산해관, 북평 등지를 거치고 마침내 그해 12월초 남경(南京)을 공략하고 입성하기까지의 과정이 죽 나열되어 있다. 그 이후 시기에는 1938년 말에 이르기까지 그가 경비 또는 전투에 참여했던 각종 작전지역에 관한 내역들이 길게 이어진다.
그런데 이 깃발의 가장자리에는 그의 소속이 특이하게도 ‘稻葉部隊(舊谷部隊) 佐野部隊(岡本「鎭」部隊) 松崎隊(河喜多隊) 肥後隊’라 고 표시되어 있다. 알기 쉽게 몇 사단, 몇 연대, 몇 대대 …… 이런 식으로 소속편제의 고유명칭을 직접 표시하지 않고 지휘관의 명자(名字, 성)만 따서 무슨무슨 부대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까닭일까?
이는 전쟁상황에서 적(敵)에게 자신들의 부대에 관한 세부사항이 노출되지 않도록 방첩(防諜) 차원에서 고안된 방편이라고 알려진다. 대개는 성만 따오는 것이 원칙이지만, 동일한 성을 가진 지휘관이 복수로 존재한다면 그 다음의 이름을 더 넣어 이를 구분하기도 한다. 가령 위에서 ‘岡本「鎭」’이라고 한 것은 오카모토 연대장이 두 사람이었던 탓에, 원래의 이름 오카모토 시즈오미(岡本鎭臣)에서 한 글자를 더 취하여 이를 표시한 경우에 해당한다.
아무튼 위의 소속부대를 지휘관의 이름을 통해 판별해보면, ‘이나바 사단장(중장; 전임 타니 사단장) ― 사노 연대장(대좌; 전임 오카모토 연대장) ― 마츠자키 대대장(소좌; 전임 카와키타 대대장) ― 히고 중대장(중위)’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를 다시 일반편제의 순서로 전환하면 후지모토 군조의 소속부대는 ‘보병 제6사단 제23연대 제3대대 제9중대’로 정리된다.
일반적으로 전쟁상황에 돌입하면 부대 이동, 병력규모, 병과(兵科) 및 병종(兵種), 작전내용, 전투결과 등에 대한 세밀한 사항이 드러나지 않도록 이를 ‘모부대(某部隊)’라고 표현하거나, 특히 숫자와 관련된 정보는 〇〇〇과 같이 공란으로 처리하여 공표하는 것은 흔히 있어 왔던 일이다. 예를 들어 만주사변(滿洲事變) 시절의 자료를 찾아보면, ‘나남(羅南) 보병 〇〇연대’라든가 ‘〇〇부대’, 그리고 ‘무로(室) 〇단장(團長) 이하 용산부대’, ‘카무라(嘉村) 〇단장(團長) 이하 용산부대주력(龍山部隊主力)’, ‘제〇〇〇단사령부’, ‘야포(野砲) 〇〇연대’라든가 하는 식의 표기방법이 공공연하게 사용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무로 〇단장’은 무로 켄지(室兼次, 육군중장) 보병 제20사단장(용산 주둔)을, ‘카무라 〇단장’은 카무라 타츠지로(嘉村達次郞, 육군소장) 보병 제39여단장(평양 주둔) 을 가리킨다.

 

<매일신보> 1932년 4월 19일자에 수록된 만주 출동 관련 기사에는 ‘나남 보병’이라는 표시는 드러나 있지만 나머지 몇 연대라거나 파견병력수에 관한 부분만큼은 〇〇 표시로 공란 처리되어 있다.

 

<매일신보> 1939년 11월 16일자에 수록된 전사자 명단은 소속부대의 고유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부대로만 소개되어 있다. 확인해본즉, 무로야부대(谷部隊)는 보병 제78연대[연대장 무로야 츄이치(室谷忠一)]이고, 키고시부대(木越部隊)는 보병 제79연대[연대장 키고시 지로(木越二郞)]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〇단장’은 이것이 여단장인지 아니면 사단장인지 하는 정도만 알 수 없도록 가리는 수단이었던 셈이다. 또한 부대의 소재지에 나남이라든가 용산이라든가 하는것이 그대로 노출된 것을 보면 구태여 감추고자 하는 군사정보의 대상이 제한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기방식이란 것도 신문지상과 같은 언론매체에 수록되는 보도내용에 대한 통제의 결과였을 뿐이지 부대의 고유명칭 자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부대의 명칭을 인위적으로 감춰 부르는 방식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중일전쟁의 전개과정과 맞물려 있는 1937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이때 일본 육군성(陸軍省)에서는 육밀(陸密) 제1014호 「동원부대 등(動員部隊 等)의 칭호명(稱號名)에 관(關)한 건(件)」을 제정하였는데, “병력 등을 비닉(秘匿)하는 것”을 목적으로 “외지부대(外地部隊)는 부대장의 성(姓)을 붙여 칭호하도록” 정하였던 것이다. 다만, 이 당시에 ‘내지부대(內地部隊; 일본 본토에 주둔하는 부대)’의 경우에는 이 방식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앞서 보았던 후지모토 쇼조의 일장기에 표시된 소속부대는 바로 이러한 조치에 따랐던 것이고, 1937년이라는 시점도 고스란히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지휘관의 이름으로 부대명칭을 정하는 방식은 그 나름의 문제가 있었다. 예를 들어 지휘관이 전보(轉補)되거나 전사(戰死)하게 되면 그때마다 부대명의 변경을 동반하게 된다는 부분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는 동시에 부대명칭의 비닉성(秘匿性)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새롭게 고안한 것이 ‘통칭호(通稱號)’ 방식이다.
이에 관한 규정은 1940년 9월 10일에 제정된 육밀(陸密) 제1533호 「통칭호 사용에 관한건」을 통해 공식화하였다. 여기에는 “「소화 16년도 육군동원계획령 세칙」으로써 동원관리관(動員管理官)인 군사령관, 사단장(내지, 조선, 대만 및 만주부대) 등에게 병단문자부(兵團文字符)와 통칭번호(通稱番號)를 배당하고, 이를 동원계획된 부대에 통칭번호로 부여하도록 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병단’이라고 하는 것은 통상 사단과 여단에 해당하는 편제단위를 일컫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 조선주둔 제19사단은 ‘虎(토라)’, 제20사단은 ‘朝(아사)’라는 문자부호를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가령 제19사단 예하부대인 보병 제75연대(회령)는 ‘虎8505’, 보병 제76연대(나남)는 ‘虎8506’, 그리고 제20사단 예하부대인 보병 제78연대(용산)는 ‘朝2053’, 보병 제79연대(용산)는 ‘朝2054’와 같은 방식으로 통칭호를 표시하였다. 그 후 치열한 전쟁상황이 지속됨에 따라 ‘통칭호’의 사용에 관해 이를 강화하는 기밀명령이 거듭 하달되면서 여러 차례 관련 내용이 개정된 것으로 나타난다. 일제의 패망 직전인 1945
년 4월 20일에는 「육군부대 전시통칭호규정」에 따라 기존의 통칭호 관련 규정이 전면 개편 되었고, 이 당시 조선군사령부를 대체하여 1945년 2월 6일에 창설된 ‘제17방면군사령부’의 경우 ‘築(키즈쿠)’라는 통칭호가 채택되었다.

 

‘조선 제23부대’라는 표기가 또렷이 새겨져 있는 <지나사변기념사진첩>(1940년 11월 발행)의 표지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중국으로 출정하는 ‘조선 제23부대’ 병력이 군기(욱일기)를 앞세우고 용산병영을 떠나는 모습이  <지나사변기념사진첩>에 수록되어 있다. 정문 기둥에 걸린 부대 간판은 ‘검열관계’로 글자가 뭉개져 있으나, 사진엽서 또는 다른 사진첩에 포착된 장면을 통해 이곳이 ‘보병 제79연대’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조선 제23부대라는 주소지 표기가 들어 있는 나카노요시타케(中野義雄)의 개인엽서이다. ‘18(1943).6.5’ 일부인 아래 ‘점검제(點檢濟)’라는 검열확인도장이 함께찍혀 있다.

 

일본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타의 소장자료인 <(소화 20년 7월 10일 현재) 제17방면군 조선군관구 제부대 통칭호 소재지 일람표>의 표지이다.

 

조선군관구(朝鮮軍管區) 주요 부대의 소재지 및 통칭호 일람 (1945년 7월 10일 현재)

그런데 1940년 9월 10일자에 하달된 「통칭호 사용에 관한 건」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매일신보> 1940년 8월 13일자를 보면 “전몰용사 유족에게 금치훈장 수여식을 ‘용산 제23부대’에서 거행한다”는 소식이 수록된 것이 눈에 띈다. 이러한 점에 비춰보면 조선지역에 주둔하던 일본군대에 대해 ‘숫자부대명칭’을 사용하는 별도의 ‘통칭호’ 관련 규정이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지만, 구체적인 근거규정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확인되질 않는다.
그리고 1940년 11월 14일에 하달된 육만기밀(陸滿機密) 제13호 「재만 제부대(在滿 諸部隊) 통칭호 규정」에 따라 만주 주둔 부대의 경우 ‘병단문자부’를 일괄 ‘만주(滿洲)’로 표기하도록 변경한 바 있다. 잔혹한 생체실험으로 악명이 높은 ‘관동군방역급수부본부(關東軍防疫給水部本部)’를 일컬어 흔히 ‘만주 제731부대’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표현인 셈이다.
해를 넘겨 1941년 7월 25일 육군대신 도죠 히데키(陸軍大臣 東條英機)의 명의로 제정된 육지밀(陸支密) 제2249호 「만주, 조선에 있어서 동원(임시편성)된 부대의 통칭호에 관한 건달(件達)」에 따라 “조선에서 동원(임시편성)된 부대의 통칭호는 ‘병단문자부’를 ‘조선(朝鮮)’으로 한다”고 정하였다. 하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에 이미 ‘조선 제몇부대’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자료들이 있으므로 이 부분 역시 세밀한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라 하겠다.
아무튼 이러한 조치의 결과로 1940년을 넘어가는 시점에서는 경성사단(京城師團), 나남사단(羅南師團), 평양사단(平壤師團, 추을사단) 등의 표기는 계속 허용되었으나, 가령 ‘보병 제78연대’와 같은 고유명칭방식은 말할 것도 없고 ‘용산보병연대’라는 정도의 표현조차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매일신보> 1940년 9월 25일자에 수록된 「과거 무훈을 찬양, 74부대 개대 기념식(開隊記念式) 성대」 제하의 기사에는 부대명칭을 ‘통칭호’로 감추고 소재지도 공란으로 처리한 실제 사례가 남아 있다.

 

[〇〇] 74부대의 빛나는 개대(開隊)기념일을 당하여 부대에서는 〇〇〇〇〇 원두에서 23일 오전 9시부터 개대기념식을 엄숙하고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날 만추(晩秋)의 청공은 74부대를 축복하는 듯 맑게 개었다.
식장에는 가토(加藤) 부대장을 비롯하여 나카노(中野) 부대 본부장, 사이토(齋藤) 44부대장, 이구로(伊黑) 병사부장, 기쿠치(菊池) 헌병대장, 오가타(緖方) 해군중좌, 기타 〇〇있는 각부대장 이하 관민 다수가 참석하여 금번 지나사변을 물론 ‘노몬한’ 사건, 장고봉(張鼓峰) 사건 등에 있어 빛나는 무훈을 날린 74부대의 위훈을 찬양, 식은 가토(加藤) 부대장의 식사와 옥관봉전(玉串奉奠)이 있은 후 최후로 사토(佐藤) 부윤으로부터 부민을 대표하는 옥관봉전이 있은 후 식을 마치고 계속하여 운동경기회로 들어갔는데 경기 번외로 서문고녀(西門高女)의 기원 2600년 창가가 일반의 인기를 끌고 부민대망의 황취(荒鷲, 아라와시. 전투기를 뜻함) 격추의 대모의전이 전개되어 10여 문의 거포가 일제히 불꽃을 올리어
당일 〇〇〇 일대는 마치 실전장(實戰場)과 같은 장관을 이루고 오후 5시경에 산회하였다.

 

이 기사에는 74부대의 소재지에 대해 모두 공란으로 처리하고 있으나, ‘서문고녀(西門高女)’라든가 ‘사토 부윤(佐藤 府尹)’이라든가 하는 구절로써 이곳이 평양이라는 것을 파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리고 “비행기 격추를 위한 10여 문의 거포 운운”하는 부분은 이곳이 고사포부대(高射砲部隊)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단서를 취합하면 여기에서 언급된 제 74부대는 바로 평양 평천리(平川里)에 자리한 고사포 제6연대(1935년 창설)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당시 고사포 제6연대는 가토 타카미네(加藤隆峰) 연대장의 휘하에 있었으므로 이를 ‘가토부대’라고 지칭한 것이며, 축하내빈으로 참석한 ‘사이토 44부대장’의 정체는 확인 결과 사이토 마사히코(齋藤正彦) 보병 제77연대장(평양 주둔)인 것으로 드러난다.

 

<매일신보> 1941년 4월 14일자에 소개된 조선 제26부대(야포병 제26연대)의 제22회 창립기념식 광경이다. 이날 함께 제막된 ‘충혼비’에 새겨진 ‘忠魂’이라는 글씨는 1938년 6월에서 1939년 9월 사이에 제20사단장(용산)을 지낸 우시지마 미츠네(牛島實常) 육군중장이 쓴 것으로 확인된다.

 

<매일신보> 1941년 4월 27일자에 수록된 조선 제27부대(공병 제20연대)의 창립기념식 모습이다. 이 부대는 원래 공병 제20대대로 출범하였으나 1936년 5월에 치중병대대와 함께 일괄 연대 편제로 승격된 바 있다.

 

이러한 통칭호 부대명칭에 대해서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자료가 거의 눈에 띄질 않는데, 아쉬운 대로 <매일신보>와 같은 보도내용 등에 드러난 단서들을 하나씩 취합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일람표 형식의 재구성이 가능하다.

 

조선주둔 일본군의 주요 부대 통칭호 일람표

해방 후에 간행된 강제동원 관련 여러 증언 자료집들을 살펴보면, 여기에도 이러한 부대명칭이 무시로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른바 ‘육군지원병’이건 ‘학도지원병(학병)’ 이건 ‘징집병’이건 간에 강제동원을 통해 전쟁터에 끌려간 이들에게는 입영부대 또는 배속부대였던 22부대니, 24부대니, 30부대니, 42부대니, 44부대니 하는 이런 명칭들이 그 시절의 고통을 기억하는 연결고리로서 어김없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을 거쳐 태평양전쟁으로 확산되는 침략전쟁의 와중에 일본군 전투부대가 자신들의 정체를 모호하게 만드는 한편 조금이라도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교묘한 전략기법의 하나로 짜낸 것이 바로 ‘통칭호’의 개념이다. 지금도 여느 군부대 앞의 정문 기둥 마다 걸려 있는 ‘육군 제XXXX부대’라는 식으로 표기한 간판이란 것도 본연의 군사보안 목적이 있어서 사용하는 것이긴 할 테지만, 구태여 그 뿌리를 따지고 든다면 일본군대가 저지른 침략전쟁의 산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워버리기는 어려울 듯하다.

금, 2019/11/2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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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반역을 중단하라
서정주 문학제 철폐 촉구

 

동학농민 민중해방혁명 125년
기미3·1독립혁명 100년
8·15민족해방 광복 74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못난 짓 하고 잘난 체하던 배신자를
찬양하고 기리는 나라
이것은 시대의 반역이다
부끄럽다!
강도에게 강탈당한 나라
나라잃은 백성 자유를 빼앗기고
미래를 뺏겼으니 희망도 빼앗기고
강제로 끌려가 목숨까지 빼앗겼다
힘없어 못 끌려간 노약자들
뼛골 빠지게 지은 농사
소출은 빼앗기고 주리를 틀렸다
2천만 민중은 죄다 노예되고

3천리 강토는 통째로 감옥통
아-아! 어찌 잊으랴 압박과 설움
피울음 우는 동포 냉정하게 외면하고
개처럼 기어가며 일신은 영달했다
인도를 배신했던 이기의 달인 서정주
광복은 됐지만 일제부역 사죄않고
양심도 없었는지 반성도 없었다
침략자 앞잡이 반민족 대역죄인
처벌은 못할망정 찬양이 웬말이냐
아직도 끝나지 않은 반역 중단하라
서정주 문학제 지금 당장 철폐하라

2019.11.2.
여럿이 함께 손잡고 ‘평화의 길’ 김판수

토, 2019/12/21-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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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 시민강좌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한국영화 100년을 기념하여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이란 주제로 하반기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진행하였다. 강좌는 2019년 11월 16일부터 12월 8일까지 매주 토, 일 오전 10시에 진행되었고, 강북구와 민족문제연구소의 적극적인 홍보로 강의마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일제 강점기에 나운규와 카프는 어떻게 영화로 저항했는가?’를 시작으로 친일영화, 해방의 혼란기 영화인들, 현대 한국영화의 모습까지 다양한 주제로 한상언(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 강성률(광운대학교 교수), 정영권(동국대학교 강사), 변재란(순천향대학교 교수) 등 전문성을 갖춘 강사들이 시민들에게 친숙한 영화를 주제로 강의하였다. 이번 강좌(총 8회)에서도 출석률이 높은 11명의 수강생들에게 수료증과 기념품(도서)을 전달하였다.
강좌 종료 후 강사와 수강생들이 함께 식사를 하며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 강의 전반과 현재 영화에 대한 의견들을 교환하는 시간도 가졌다.


근현대사기념관은 2020년에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계획하여 강북구민들과 역사와 문화에 관심 있는 일반시민에게 양질의 교육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 근현대사기념관 홍정희 학예연구원

금, 2019/12/2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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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원지인 광주일고는 11월 19일 오전 교내 강당에서 친일작곡가 이흥렬이 만든 교가(1953년 제작)를 대신할 새 교가 발표회를 열었다. 경과보고에 이어 교내 합창단과 동문 관현악단의 연주로 열리는 발표회에는 동창회 임원과 학생, 학부모, 교직원 등이 참석했다.
새 교가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한 김종률 씨와 교내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재학생 4명이 공동으로 작사 작곡에 참여했다. 김종률 씨는 이 학교 졸업생이다. 이승오 교장은 인사말에서 “우리 학생들이 주옥같고 의미심장한 가사를 빚어냈고, 김종률 작곡가가 힘찬 기백과 진취성을 담아 새 교가를 창작하였다. 새 교가를 부르며 새로운 100년 광주일고의 비상을 기약하자.
”고 말했다. 광주서중일고총동창회 김상곤 회장은 축사에서 “우리 후배들은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현대사의 불행을 단호히 배격하고, 새 교가를 만드는 모든 과정에 혼연일체가 되어, 마침내 흠결 없고 자랑스러운 교가를 부르게 되었다. 일고 공동체 99년 역사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고 치하했다.
인천에서 최초로 3·1운동이 일어난 곳으로도 알려진 창영초등학교는 11월 25일 학교 체육관에서 ‘친일 잔재 청산 새로운 교가 선포식’을 진행했다. 창영초등학교가 주최하고 창영초등학교 전교어린이회가 주관한 이번 행사에는 교직원·학생·학부모·동문회 등 240여 명이 참석했다.
창영초교는 지난 3월 교가를 개정하기 위해 교사·학부모·동문회·육군사관학교·학생대표 등 9명으로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했다. 이후 4월부터 설문조사 등으로 학교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했으며, 10월 31일 학교운영위원회에서 교가의 작곡만 개정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창영초교는 ‘그리운 금강산’을 만든 33회 졸업생 최영섭 작곡가를 섭외해 새로운 교가 작곡을 의뢰했으며, 25일 ‘친일 잔재 청산, 새로운 교가 선포식’을 진행했다. 새로운 교가는 창영초교 합창부 학생들이 직접 음원을 녹음했다. 임용렬 창영초교 교장은 선포식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나라를 되찾기 위해 열심히 활동한 창영초교 선배님들이 있지만, 그동안 우리가 부른 교가는 부끄럽게도 친일파(임동혁)가 작곡한 교가였다”며 “현재 일본에 경제적인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이제라도 새로운 교가를 만든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 방학진 기획실장

금, 2019/12/20-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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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시민방송에 내린 방송통신위원회의 제재는 위법, 대법원 판결

2019년 11월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역사다큐 <백년전쟁>을 방영한 시민방송(RTV)에 대해 방송통신위원회가 내린 제재가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시민방송(RTV)은 2013년 1~3월 <백년전쟁>을 방송하여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관계자 징계 및 경고, 이 사실에 대한 고지방송’의 제재를 받았다. 이유는 객관성과 공정성, 그리고 사자 명예존중에 관한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백년전쟁>이 공개된 후 벌어진 박근혜 정권에 의한 일련의 정치 공세의 유탄을 맞은 것이다. 시민방송은 방통위의 제재에 불복, 행정소송을 시작했다.
2014년 1심, 2015년 2심에서 시민방송은 패소했다. 행정소송을 다루는 판사가 다큐 내용의 명예훼손 여부까지 판단했고, 게다가 공식 문서인 판결문에 5.16 군사쿠데타를 ‘5.16 혁명’이라고 적기까지 했다. 판사의 정치적 입장, 역사의식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점이 재판에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했다. 시민방송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의 판단은 오래 걸렸다. 몇 해를 그냥 넘기다가 2019년 1월에야 전원합의체에서 판단하겠다고 나서더니 이번에 결론을 내렸다. 대법원은 원심 판결이 잘못이라고 결정했다.
대법원은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 매체, 채널, 프로그램별 특성을 고려하여 심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시민방송을 KBS나 MBC와 같은 대형 미디어와 같은 기준으로 심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시민방송은 퍼블릭액세스(Public Access) 채널이다. 시민이 만든 프로그램을 방송하여, 시민이 수동적인 미디어 소비자가 아닌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주체로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추구한다. 대법원은 시청자가 제작한 방송프로그램의 객관성, 공정성, 균형성을 심사할 때는 대형 미디어가 제작한 프로그램에 비해 심사기준을 완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점차 독점화하고 상업화해 가는 매스미디어 환경에서 퍼블릭액세스 채널이 가진 지향점,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내린 판단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대법원은 <백년전쟁>이 명확한 자료에 근거해 제작했으며, 전체 다큐영화의 내용이 객관적 사실과 어긋나지 않다고 보았다. 따라서 시민방송의 <백년전쟁> 방송이 객관성, 공정성, 균형성 유지 의무와 사자명예존중 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앞서 이승만 사자명예훼손 소송에서 나온 ‘무죄’ 결정과 같은 결과였다.
대법원이 ‘파기환송’ 했으므로 다시 고등법원의 판결을 기다려야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을 존중하여 상식에 부합한 결정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 권시용 선임연구원

금, 2019/12/20-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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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 별세

 

오종렬 한국진보 연대 총회의장이 12월 7일 별세했다. 고인은 교사 생활을 하던 지난 1987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 출범 참여를 시작으로 민중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전국교사협의회 대의원 대회 의장을 맡았고, 전교조 초대 광주지부장으로 활동하다 구속되고 해직되기도 했다. 고인은 지난 1999년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 상임의장을 맡으면서 민중운동 지도자 반열에 올랐고, 이후 통일연대 상임대표, 전국민중연대 공동대표,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 등을 맡으며 국가보안법 폐지투쟁,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 한미FTA 저지 투쟁, 광우병 소고기 투쟁 등의 중심에 서서 수배와 구속, 수감 생활을 반복했다. 지난 2014년 2월 간경화와 급성신부전증으로 건강이 악화됐고 6년여 투병하다 향년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2월 1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고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 민족통일장 영결식이 거행되었으며 11일 광주 망월동 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함세웅 이사장과 임헌영 소장은 고인의 장례위원회에 고문으로 참여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방학진 기획실장

금, 2019/12/20-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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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연구소, ‘친일 문제’에 관한 시민 인식 조사 실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그간 친일청산운동의 성과를 점검하고 좀 더 미래지향적・공익적 차원의 과거사 청산 방향을 모색한다는 취지로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친일문제 전반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친일문제에 관해서는 과거 몇몇 언론들이 부분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지만, 구체적이고 광범하게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조사는 친일문제뿐 아니라 과거사 문제 전반에 걸쳐 폭넓게 진행됐다. 조사는 11월 1일부터 4일까지 실시됐으며, 지역별・성별・연령별・학력별・직업별・이념성향별 비례할당으로 추출한 전국의 만19세 이상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했다. 조사는 웹조사(휴대전화 문자와 이메일을 통해 url 발송) 방식이며,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
조사 내용과 결과는 <민족사랑> 신년호 특집으로 실릴 예정 이번 조사에서 대다수 시민들은 아직도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특히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 10명 중 8명 이상이 해방 이후 지금까지 친일파 처벌은 물론이고 친일행위에 대한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답했으며, 사회지도층의 친일 행위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기보다는(18.1%) 개인의 안위를 위한 적극적인 친일(72.2%)로 보았다. 이에 따라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는 더 엄격히 따져야 하며(82.7%), 이들
에 대한 기념사업 중단(81.3%), 국립묘지에 안장된 인물 이장(74.4%), 서훈을 취소(65.6%) 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또한 박정희・김성수・방응모 등 저명인사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데 대해서도 적절하다고 응답한 사람이 지나치다고 답한 사람에 비해 2배 이상 많았다.
이번 설문조사 항목은 친일문제뿐 아니라 일반시민들의 뉴라이트 인식, 과거사 청산 방향, 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등 총 40여 문항에 달한다. 자세한 조사 내용과 결과는 <민족사랑> 2020년 신년호 특집으로 실릴 예정이다.

 

금, 2019/12/20-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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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일맥상통 백두대간’ 사진전 개최

 

근현대사기념관은 11월 19일 한반도 평화기원 백두대간 사진전 ‘일맥상통一脈相通 백두대간白頭大幹’ 기획전을 개막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는 이번 기획전은 한반도의 평화와 대화의 진전을 갈망하는 민족의 염원을 담아 남녁과 북녘의 산하를 한 자리에 펼쳐놓은 사진전이다.
뉴질랜드 산악인 로저 셰퍼드는 2007년부터 남쪽의 백두대간을 먼저 탐사한 데 이어 ‘조선-뉴질랜드 친선협회’의 협조로 북측 구간을 종주하면서 남북 백두대간 풍광을 사진에 담았다. 이번 기획전에서는 수많은 사진 중 50여 점을 엄선해 전시한다.
개막식은 11월 19일 오후 2시 근현대사기념관 건너편 통일교육원 제1교육관에서 백준기 통일부 통일교육원장, 김정륙 광복회 사무총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등 관계자들과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개막식 직후 로저 셰퍼드가 관람객을 대상으로 ‘백두대간 종주기–북한의 산하 그리고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기념관 앞뜰에서 진행된 개막 테이프 커팅식에 강북구 박겸수 구청장, 천준호 민주당 지역위원장 등도 함께 하였다.
이번 전시는 2020년 2월 28일까지 2층 기획 전시실에서 열린다. 백두산 천지와 삼지연에서 개마고원, 태백준령을 지나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백두대간의 비경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로 시민과 학생들의 큰 호응을 기대한다.

• 근현대사기념관 홍정희 학예연구원

금, 2019/12/20-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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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역사만화 <반민특위>를 펴낸 조남준 작가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문 : 이번에 발표하신 <반민특위전-청산의 실패, 친일파 생존기>(한겨레출판) 서문을 보면 작가님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광주 5.18과 87년 6월항쟁인데, 반민특위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 1980년대 대학교 1학년 때 당시 필독서라고 하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보면서 반민특위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당시 친일세력이 우리나라에 어느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지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어요. 친일세력의 1세대들은 이제 사라졌고 친일파는 없다라고 생각했었죠. 박정희도 일본육사 출신인 게 알려지지 않았죠. 계속적으로 사회운동을 하고 시사만화를 그리면서 우리나라의 권력구조는 친일파가 장악하고 그 뿌리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김대중 정부에서 조중동에 대한 세무조사를 시작으로 언론개혁을 진행했는데 엄청난 저항으로 인해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을 봤었고요. 2005년에는 사학법 개혁을 하면서 사학재단의 비리를 밝혀보
려고 했을 때 당시 야당의 박근혜가 한달 동안 청계천에 나와 촛불을 들고 반대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개혁이 제대로 안 되는 것들도 보았죠. 이승만 정권 때 친일세력들이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사학을 만들었고 그 학교들에서 비리가 횡행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또 올해 가장 큰 이슈였던 검찰개혁이 있었잖아요. 친일세력에서 벗어난 정부마다 항상 언론개혁, 검찰개혁, 사학개혁을 위해 노력하지만 저항이 만만치 않고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는걸 보면 맨 위 상위 권력인 정부만 바뀌고 우리 사회 권력 중심에 뿌리 깊게 친일잔재들이 남아있는한 제대로 된 권력이동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옛날 반민특위가 친일파의 저항에 무너지는 모습이 오늘날 그대로 투영되었어요. 얼마 전부터 뉴라이트가 등장하고 숨어있던 친일옹호론이 나타났죠. 그래도 처벌되지 않아요.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한 움직임도 우리 역사에 있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반민특위라는 단어는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지만 자세히는 모르거든요. 그래서 좀더 알기 쉽게 만화책으로 내게 된거죠.

 

문 : 직접 겪은 6월항쟁은 어땠나요?

답 : 너무 많은 열사들의 희생이 있었어요. 이한열, 박종철만 많이 알려졌는데 김세진, 이재호, 황정하 등 많은 열사가 있었습니다. 황정하는 이 책 <반민특위전>에도 나오는 독립운동가 황옥 선생의 손자라고 합니다. 당시 신문에선 항상 일부 극소수 극렬좌경용공학생들이라고 했습니다. 학생들과 국민들을 떼어놓기 위한 용어였죠. 당시 사회민주화운동의 주축은 학생운동이었어요. 대학교 교문 앞에는 지독한 최루탄 냄새가 끊이질 않았어요. 그래도 시민들은 학생들 탓을 하질 않았습니다.
공권력은 극대화되어 있고 철의 요새처럼 전두환 정권은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6월 10일 명동에서 지나가는 차들이 약속대로 모두 경적을 울렸어요.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어요. 그런 일은 매일 벌어졌고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어요. 계란에 바위치기 같았던 고립감 속에 외롭게 싸우던 학생들에겐 가슴부터 울컥 감동이 밀려오는 거대한 국민들의 힘을 느꼈죠. 전두환은 항복했고 일시 승리감을 느꼈었지요.
제가 85학번이고 1987년에 3학년이었어요. 6.10 때 경찰은 해산작전이 아니라 연행작전을 펼쳤어요. 명동에서만 세 번 끌려갔어요. 그 전에는 경찰서에 가면 몇박 몇일 밤샘 조사하고 그랬거든요. 근데 6・10 때는 워낙 많은 사람이 끌려오니까 너무 편하더라고요. 그때는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잖아요. 식당 같은데 앉혀놓고 그냥 성명, 나이, 소속 이런 것만 빨리빨리 해서 조사받는데 5분, 10분 걸렸나 그랬어요. 그리도 밤새 대기시키다가 아침에 풀어줬어요. 만일 컴퓨터가 있어서 데이터화되어 있었다면 상습범이라고 풀려나질 못 했을 겁니다. 이 경찰서 갔다가 저 경찰서 갔다가 하면서 타자로 친 제 조서는 어마어마한 서류뭉치 중 하나로 캐비넷에 처박혀 있었던 게 참으로 다행이었죠.

문 : 6월항쟁 이후에 통일운동도 열심히 하셨겠네요. 군대에서 보복조치는 없었나요?

답 : 통일투쟁, 통일선봉대 활동을 했죠. 그리고 졸업하고 군대에 갔는데 중간에 보안사, 지금의 기무사가 저를 추적해서 신원을 알아내 중대장을 굉장히 압박하고 괴롭혔어요. 보안사에서 중대장한테, 네 부대 사병 중에 빨갱이 같은 놈이 있다고 하면서 누군지 가르쳐주지는 않고 오랜 시간 괴롭혔나 봐요.
알아서 나를 조지라는 거였는데, 중대장이 어떤 경로인지 모르겠으나 결국은 나란 걸 알게 됐죠. 그 다음부터 나를 괴롭히는데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었어요. 그래도 학생시절과 사회시절이 더 힘들었기 때문에 군대는 휴가 온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문 : 졸업과 제대 이후에 사회진로를 고민하셨을 것 같은데 어떻게 만화를 하시게 되었나요?

답 : 제가 원래 미대 출신이에요. 동아리 활동도 했었는데 동아리에 흰 벽이 있었어요. 거기에 전두환에 대해서 만평식으로 처음 낙서를 했어요. 그게 소문나면서 낙서일 뿐인데 많은 학생들이 보러오고 그랬어요. 그림은 자신이 있었지만 만화는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었는데 나한테 만화가의 재능이 있나 하고 처음 생각했습니다. 회화에 대한 회의감도 있었죠. 만화는 회화보다 사람들과 소통에 강력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회화에서 만화로 전환하게 된 거죠. 그런데 만화가 그리면 그릴수록 어려웠어요. 중간에 나한테는 만화에 재능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들땐 그만두려고도 했어요.

문 : 저는 <한겨레21>을 통해 조작가님을 알게 되었어요. 그간 어떤 작품 활동을 하셨나요?

답 : 시사SF는 1997년도부터 8년 동안 연재했고 그전에는 공동체에서 작업했어요. 만화는 1993년도에 공모전에서 상을 탄 다음에 <내일신문>에서 연재를 시작했어요. 4페이지 정도 분량을 매주 그렸죠. KBS에서 ‘조남준의 세상 뒤집어보기’, ‘조남준의 시사포커스’라는 애니메이션을 방영했는데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요. 2년 동안 100편 정도 만들어서 나름 애니메이션 감독이라고 술자리에서 소개하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시사만화가로 알려졌지만 남녀 사랑 인생에 대한 장편만화도 그리고 단편만화도 여러 편 냈기 때문에 시사만화가보다 그냥 만화가로 불렸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잘 모르는 분들도 아마 온라인으로 돌아다니는 ‘균형’은 많이 보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문 : 제목을 ‘반민특위전(傳)’이라고 지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 이것은 다큐 만화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반민특위를 다룬 많은 책들이 있는데 그 중에 ‘반민특위’가 주 제목으로 들어간 것은 거의 없어요. 반민특위가 많이 알려지고 이슈화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제목에 꼭 반민특위가 들어가면 좋겠다고 출판사에 얘길 했죠. 그래서 ‘반민특위전’으로 정해진 거죠. 역사만화를 계속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타이틀도 조남준의 역사만화라고 했고 나중에는 역사만화 1, 2, 3을 붙여 시리즈물로 구상중입니다

문 : 이 책을 만들기 위해서 참조한 자료는 무엇입니까?

답 : 세 가지를 주요하게 봤어요. <친일인명사전>, <해방전후사의 인식>, 세 번째가 경향신문의 ‘창간 30돌을 맞이하여 발굴하는 숨은 이야기들’입니다. 이게 1977년도 기사예요. 1년간 연재된 기사인데 그 중에 반민특위 부분이 70회 정도 있어요.

문 : 책에 여러 인물들이 나오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답 : 다 기억에 남죠. 인물선정을 할 때는 경찰, 관리 도지사, 교육 언론 예술가 등 각계각층을 골고루 분야별로 맞췄어요. 박흥식이 1호 검거자로 경제 쪽이죠. 박중양은 도지사까지 하면서 일본에 대한 아부와 충성심은 최고였고 고위직 권력을 이용해 악행을 많이 저질렀어요. 그의 언행을 보면 일제시대를 민족의 영광으로 여기는 듯 했습니다. 경찰 중에는 노덕술보다 김덕기, 하판락이 기억에 남습니다. 하판락은 악랄한 고문을 가하면서 ‘조센징들’이란 말을 많이했는데 자신을 일본인으로 여긴 것 같습니다.

문 : 이 책 마지막에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선정기준’을 배치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 친일파들이 잡히고 검거되는 과정에서 ‘중추원’이란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이게 조선시대 중추원도 아니고 도대체 이 직책이 어떤 것인지. 또 경찰의 ‘경시’라던가 ‘경부’란 명칭이 나오는데 지금과는 많이 다르잖아요. 이게 지금의 파출소 소장인지 궁금했었어요. 친일파를 선정하는데 가장 중요했던 것이 친일행위를 했던 사람들을 어느 선까지 인정하느냐에 대한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뉴라이트가 흔히 일제 강점기에는 누구든지 친일할 수 있었지 않느냐고 말하잖아요. 이승만은 김상돈 반민특위 부위원장에게 일제시대 통장을 한 것도 친일이라면서 해임안을 내는 등 공격하고 그랬잖아요.
우리는 보통 친일파로 을사오적의 이름 말고는 알지못하고 그러잖아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낸 <친일인명사전>의 맨 앞에 나오는 친일인물 선정기준을 보면서 이건 꼭 알려야 할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
각했어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일제시대 각계각층 여러 분야를 세부적으로 분석해서 기준을 세웠던 것은 과거만이 아닌 현대사회에서 지위와 권력을 비교 분석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봤죠. 사람들한테 반드시 알려야겠다, 상식적으로도 누구나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선정기준을 실은 거죠.

문 : 이 책의 판매상황은 어떤가요?

답 : 아직은 거의 안팔렸어요. 중간에 2주 동안 묶여 있다가 이제 풀렸어요. 이번 주 월요일인가 아마 출고되었을 거예요.

문 : 이 책은 누가 읽으면 좋을까요?

답 : 초등학생한테는 어려울 것 같고 중고등학생부터는 쉽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40대, 50대 이상도 우리 근현대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께 권하고 싶습니다. 요즘 책이 자꾸 커지고 무거워지는데 쉽게 가지고 다닐 수 있게 가벼운 책을 만들고자 했어요. 이 정도면 버스나 전철을 타고가면서도 볼 수 있으니까요. 책은 그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가장 큰 이슈였던 검찰개혁이 있었잖아요. 친일세력에서 벗어난 정부마다 항상 언론개혁, 검찰개혁, 사학개혁을 위해 노력하지만 저항이 만만치 않고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는 걸 보면 맨 위 상위 권력인 정부만 바뀌고 우리 사회 권력 중심에 뿌리 깊게 친일잔재들이 남아있는한 제대로 된 권력이동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옛날 반민특위가 친일파의 저항에 무너지는 모습이 오늘날 그대로 투영되었어요.

 


 

 

문 : 이 책을 만드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나요?

답 : 총 합쳐서 1년에서 몇 개월 더 걸렸어요. 책을 내야겠다고 생각한 결정적인 계기는 나경원 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반민특위는 민족분열’이라는 발언이었어요. 그때부터 그전에 그려놨던 것들을 다시 수정하면서 준비했어요. 나경원의 발언이 이슈화되고 친일 발언들이 계속 튀어나오는 과정에서 반민특위를 만화로 내자고 여러 출판사에 제안했어요. 그랬더니 모든 출판사에서 반민특위 만화책을 출판하고 싶다고 회신이 왔죠. 이런 경우는 제 경험상 거의 없었거든요.

 

문 :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요?

답 : 제주 43인데요. 이게 좀 어렵기도 하고 연재만화나 단행본으로 출판하고 싶어하는 곳이 없어요. 보통 상업성을 많이 따지니까요. 팔릴 건지 안 팔릴 건지를 판단하는 거죠. 근래에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픽션화해서 영화처럼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것도 중요하지만 사실관계에 근거한 다큐적인 작품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픽션화해서 사람의 감정에 접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큐로 풀어서 실제 역사적 사실과 의미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5.18을 직접적으로 다룬 다큐만화도 없어요.

 

문 : 이강수 선생이 감수해주셨네요. 도움을 많이 받으셨나요?

답 : <반민특위 연구>를 저술한 이강수 선생이 초고를 보시고 많이 보충하고 수정해주셨는데 대부분 이 책에 반영했어요. 그런데 제가 제일 아쉬운 부분이, 지면 관계상 중간에 보충해주신 것을 다 넣지는 못했어요. 그게 가장 아쉬워요.

 

문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에게 해줄 말씀이 있나요?

답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이 반민특위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아실테지만 만화로 쉽게 볼수 있도록 엮어 놨으니까 이 책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습니다.

금, 2019/12/20-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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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53]

이른바 ‘철도파괴범’ 처형장면의 현장, 도화동 공동묘지
그들의 죽음은 어떻게 일제의 선전도구로 활용되었나?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로 처음 우리나라에 건너와 오랜 세월 출판과 언론을 포함하여 다양한 활동을 했던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남긴 저작물인 <한국의 쇠망(The Passing of Korea)>(1906)에는 이른바 ‘철도파괴범’의 처형 장면을 담은 사진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이런저런 매체를 통하여 널리 알려진 탓에 여느 사람들에게도 제법 익숙한 이 사진에는 “군율(martial law); 일본이 무상으로 토지를 징발한 데에 항거하여 철로를 중지시킨 일로 총살된 세 명의 한국인”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일찍이 <황성신문> 1904년 9월 22일자에 수록된 「해철처형(害鐵處刑)」 제하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군용철도는 경의선(京義線)을 일컫는 표현이다.

 

작일(昨日) 상오(上午) 10시에 일본 위관(日本 尉官) 1인(人)과 헌병(憲兵) 8명(名)과 병정(兵丁) 40명(名)이 군용철도(軍用鐵道)에 방해(妨害)한 자(者) 아현거 김성삼(阿峴居 金聖三), 양주거 이춘근(楊州居 李春勤), 신수철리거 안순서(新水鐵里居 安順瑞) 등(等) 3인을 공덕리 부근(孔德里 附近)에서 포살(礮殺; 총살)하였더라.

 

이 기사에 따르면 러일전쟁이 터지고 세상이 온통 일본인들이 득세하는 상황으로 바뀌고 있을 때 이에 항거하다가 ‘철도파괴범’으로 처형된 것이 바로 이들 김성삼(아현 거주), 이춘근(양주 거주), 안순서(신수철리 거주) 세 사람의 운명이었다. 이 시기에 일본인들의 횡포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는 ????대한매일신보???? 1904년 9월 21일자에 게재된 「가련한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법부에서 외부로 조회하되, 고양군보를 거한즉 음력 7월 17일에 철도역부 일인 3명이 본군 외성동 상리 이덕근 가에 승야 돌입하여 닭을 탈취하려다가 쫓겨 가더니 즉시 또 그 집 내정에돌입하여 부녀를 겁간하려는데 덕근은 출타하고 그 부친 제하와 그 아우 인화가 집에 있다가 일인을 꾸짖었더니 해 일인 등이 몽둥이로 난타하여 제하는 당장 치사하고 인화도 중상하였슨 즉 극히 참혹하다 하였으니 곧 일관에 조회하여 해 죄범을 착득하여 처형케 하라 하였더라.

 

경의철도의 건설에 종사하는 일본인 역부 세 사람이 야밤을 틈타 인근 동네에 들어가 닭을 훔쳐가려다가 들키게 되자, 되려 부녀자를 겁간하려는 것은 물론 사람까지 때려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글자 그대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의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호머 헐버트의  <한국의 쇠망>(1906)에 수록된 이른바 ‘철도파괴범’의 총살형 집행후 군의관에 의한 검시 장면이다. 이때 일본군은 사진사들을 동원하여 9매에 달하는 연속 사진을 촬영하였고, 누구나 살 수 있도록 이를 판매용으로 제작하여 대량으로 배포하였다.

<황성신문> 1904년 9월 22일자에 수록된 내용을 통해 이때 처형된 이들의 정체가 김성삼, 이춘근, 안순서 등 3인이며, 총살형을 당한 장소가 공덕리 부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한국사진첩(일로전쟁 사진 화보 25권)> (1905년 6월 20일 발행)에 수록된 ‘철도선로 방해자의 사형집행’ 광경이다. 뒤쪽으로 보이는 공동묘지는 장소 확인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공연히 남의 나라 백성을 셋이나 처형한 사건에 대한 일본 측의 대응도 이것과 하등 다르지 않았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24권에는 일본공사관에서 대한제국 외부로 보내는 공문서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 「김성삼 등 군율시행통보(金聖三 等 軍律施行通報) 및 대민훈계요청(對民訓戒要請)」이라는 문건이 포함되어 있다.
말하자면 이들이 처형을 당한 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일 뿐만 아니라 다른 한국인들도 이러한 지경에 처하지 않도록 한국정부에서 잘 훈계 조치를 하라는 내용으로 일방통고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일본의 횡포는 당시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는 서양인들의 경악을 자아내기도 하였는데, 대한제국 시절에 궁내부 소속의 시의(侍醫)를 지낸 독일인 리하르트 분쉬(Richard Wunsch, 富彦士; 1869~1911)가 남겨놓은 일기와 서한을 묶어서 엮어낸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서울, 1904년 10월 6일
…… 일본 사람들은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그럭저럭 잘하고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을 게으르고 믿을 수 없는 한국인에게 권리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그들은 유럽 사람들이 크게 놀랄 일을 저질렀답니다. 제 집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총을 쏴 한국인 세 사람을 죽인 것이죠. 들리는 바에 따르면 그 한국인들을 술에 취해 서울―의주간 철도공사에 피해를 입혔다고 합니다. 여기는 이미 전시법이 공포되어 총살은 특별한 일도 아니었지만, 사형 집행과정을 사진사 두 명에게 찍게 하는 등 일처리를 공개적으로 한 것은 불쾌했습니다. 이 지독한 총살장면이 담긴 사진을 살 수도 있답니다.
[인용출처 : 김종대 옮김, <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 학고재, 1999, 136쪽]

 

여기에서는 무엇보다도 사진사 두 명을 동원하여 이러한 잔혹한 장면을 사진으로 담아내게 했다는 대목이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이 무렵 프랑스의 시사화보인 <르 쁘띠 빠리지엥(Le Petit Parisien)> 1904년 12월 18일자에 수록된 「사형수를 대상으로 한 사격연습」 제하의 기사는 이른바 ‘철도파괴범’의 처형에 관한 내막을 소상하게 전달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어김없이 사진에 관한 얘기가 등장하고 있다.

(전략) 본지 특파원은 즉석 사진 몇 장과 함께 참혹한 현장의 소식을 전하였다. 사진은 서울의 일본인 사진사들로부터 돈을 주고 쉽게 구한 것으로, 그들은 이 사진이 가져올 여파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 인근에 농부 세 명이 살았는데 주변 사람들 말에 따르면 그중 한 명은 과부의 아들로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았고, 모두 문맹인데다 아는 것은 없고 술만 마셔댔다고 한다. 생각 없이 행동하던 세 농부는 어느 날 저녁 서울에서 의주로 향하는 철도의 철로를 건넜다고 한다.
그런데 철로에서 선로변경장치를 발견하고는 신문물을 신기하게 여겨 장치를 조작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문에 장치가 상하였을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악의를 가지고 하였던 행동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순찰중이던 일본 헌병이 다가와 다짜고짜 불쌍한 사고뭉치들을 검거해 서울로 호송하였다. 세 농부는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고 결백을 호소하였지만 러시아를 위한 행동이었다는 의심을 받아 결국 ‘범죄’현장에서의 처형이 결정되었다.
그 다음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서울의 공인 사진사들을 인력거로 처형장까지 데려와 흥미로운 장면을 찍을 수 있도록 하였다. (하략) [재인용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양인이 본 한국>, 2017, 222쪽]

 

여기에서 보듯이 한국주차 일본군대가 저지른 총살형 장면은 이를 은폐하거나 비공개로 처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인 사진사들을 동원하여 그 광경을 찍게 하고 그것을 판매용으로 제작하여 “아무라도 쉽게 구할 수 있을 만큼” 널리 배포하는 방식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여기에는 일본의 군사시설에 해코지를 하거나 자신들의 위력에 감히 맞선다면 누구라도 이러한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노골적인 무력과시의 의도가 깔려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이로부터 한 달 보름여가 지난 1904년 11월 8일에 간행된 <일로전쟁 사진화보(日露戰爭 寫眞畫報)> 제10권(박문관 발행)을 보면, ‘한국철도방해자의 처형’이라는 제목 아래 총살형 장면과 관련하여 넉 장의 사진자료가 함께 수록된 것이 확인된다. 여기에는 “8월 27일 한국 용산 부근에서 우리 군용철도에 방해를 가하여 체포된 비적(匪賊) 김성삼, 이춘근, 안순서 3인은 9월 20일 군법회의(軍法會議)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21일 오전 10시 마포가도(麻浦街道) 철도답절(鐵道踏切, 철길 건널목)의 좌측 산기슭에서 총살되었다”는 설명 구절이 붙어 있다.

그런데 여러 자료에 흩어져 수록된 이들의 처형 장면을 다시 취합하면, 당초에 최소 9매 이상의 사진이 촬영된 것으로 파악된다. 여기에 포함된 일련의 사진들은 흰 천으로 눈을 가린 채 세 사람을 인력거에 태워 처형장까지 이동하는 장면이 석 장이고, 십자가 나무기둥에 묶어 처형을 하기 직전 상황을 담은 것이 두 장, ‘무릎쏴’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일본 군인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두 장, 총살형 집행 후에 군의관이 검시(檢視)하는 광경이 두 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들은 대개 일본인 사진관을 통해 묶음으로 팔려나가 어떤 것은 낱장으로, 어떤 경우에는 서너 장 단위로 지면에 등장하곤 했던 것이다. 비단 헐버트의 책만이 아니라 근대시기 이 땅을 찾은 여러 서양인 탐방객들이 남겨놓은 여행기나 회고록, 그리고 화보잡지와 같은 종류의 매체에도 이들의 처형장면이 곧잘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김성삼, 이춘근, 안순서 3인이 총살형을 당한 장소는 어디였던 것일까? 이에 관해서는 우선 공덕리 부근이라든가 마포가도 철도건널목 좌측 산기슭이라든가 하는 구절을 통해 개략적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단서는 사진 속 배경에 보이는 공동묘지의 존재이다.

경의선 철도와 마포행 전차선로가 교차하는 지점 바로 아래에 보이는 작은 산봉우리가 ‘도화동 공동묘지’가 있던 장소이다. (<용산시가도>, 1929)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에서 펴낸 「일만분일 경성(1915년 측도)」(1917년 발행) 지도자료를 보면, 경의선철로와 마포전찻길이 교차하는 지점(지금의 공항철도 공덕역 자리) 아래에 작은봉우리 지형이 있고 바로 이곳에 인근 지역을 통틀어 유일하게 ‘공동묘지’의 표시가 또렷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도의 제작연대가 러일전쟁 시기와는 10년가량의 격차가 있으나, 공동묘지라는 것이 금세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동일한 공간이라고 판단하기에 충분하다.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1929)를 통해 확인한 ‘도화동 1번지’와 ‘도화동 5번지’의 위치이다. 남서쪽으로 인접한 ‘도화동 7번지’구역은 ‘마포연와공장’(지금의 마포삼성아파트 자리)으로 잘 알려진 공간이다.

 

이러한 표시를 염두에 두고 1912년에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에서 작성한 <토지조사부>를 뒤져보니, 경성부 용산면 도화동(京城府 龍山面 桃花洞) 1번지(국유지, 745평)와 5번지(국유지, 5,098평)의 지목(地目)이 분묘지(墳墓地)로 표시된 것이 눈에 띈다. 그러니까 이자리가 이른바 ‘철도파괴범’으로 죽은 세 사람의 처형 현장인 것이다. 이곳과 바로 남쪽으로 이웃하는 도화동 7번지(국유지, 13,969평)는 1907년 10월에 준공된 탁지부 연와제조소(度支部煉瓦製造所; 나중에 ‘경성감옥 연와공장’으로 전환)가 들어서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난 1986년에 한불수교(韓佛修交) 100주년과 관련하여 당시 ????조선일보????의 지면을
통해 근대 시기 프랑스에서 발행된 화보잡지에 수록된 한국 관련 삽화들을 소개하는 와중에
이들 세 사람의 처형 장면도 함께 널리 알려진 일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이들의 행적에 관한 기록 확인은 물론 처형지에 대한 고증작업도 추진된 바 있었으며, 자연스레 역사학계에서는 3
인의 항거를 일컬어 새로 발굴된 ‘의병(義兵)’ 활동의 하나라는 평가가 내리기에 이른다.

 

1912년에 작성된 ????토지조사부????에는 도화동 1번지와 5번지의 지목이 ‘분묘지(墳墓地)’로 표시된 내역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기록원)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제6권(2002)에 수록된 ‘마포아파트’ 일대의 항공사진(1965년 3월 8일 촬영)이다. 오른쪽에 길게
둔덕처럼 보이는 것이 경의선 철길이고, 마포아파트 옆쪽에 주택지로 둘러싸여 민둥산처럼 봉우리만 간신히 남은 곳이 ‘도화
동 공동묘지’가 있던 자리이다. (ⓒ국정홍보처)

 

이와 아울러 이들의 항거를 기리기 위한 기념조형물에 관한 공론화의 결과로 서울시에서 이
를 건립하겠다고 공표했는데,
????조선일보???? 1986년 3월 30일자에 수록된 「일제에 학살된 세 의
병 기념물 세우기로, 염(廉) 서울시장 “역사교육장 활용”
」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나
온다.

 

속보= 염보현(廉普鉉) 서울시장은 29일 “구한말 일제에 맞서 싸우다 학살당한 세 의병의
처형장소에 기념물을 세워, 후손들이 선조들의 의거를 기리고 살아 있는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염시장은 ‘학살된 3의병의 기념비를 세우자’는 각계의 움직임(조선일보 29일자 11면 보도)
에 서울시가 적극 동참, 수난의 역사를 현장으로 후세에 남겨주는 데 일익을 맡겠다고 말
했다. 이를 위해 서울시 문화유적고증위원회에 보다 더 정확한 사실(史實)과 위치의 규명
을 의뢰하고, 시정자문위원회의 의견을 들어 기념물의 형태를 결정하겠다고 염시장은 덧
붙였다.
또 기념물 설치부지에 대해서는 학살현장인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일대가 주택재개발구역인
만큼, 재개발사업 추진으로 확보되는 공공용지를 활용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염
시장은 그러나 “기념물 설치로 현지 주민들이 재산상 어떤 피해도 입지 않도록 일을 추진
하겠다”고 말했다.

 

이로부터 5년이 지난 1991년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공적 평가를 바탕으로 김성삼, 이춘근, 안
순서 등 3인에 대해 ‘건국훈장 애국장(建國勳章 愛國章)’이 일괄 추서되었다. 그러나 당초 서울
시장이 언급했던 기념물 건립에 관한 약속은 무려 30여 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아직껏 완료되
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토, 2019/12/21-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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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정의와 평화공존을 기원합니다

 

경자(更子)년 새해 민족문제연구소 모든 회원 가족 그리고 남북 8천만 겨레에게 은총 충만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지난해는 다른 해보다 더 힘들고 소란했습니다. 십인십색이니 서로 다르고 나아가 갈등도 생겨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시시비비(是是非非)는 순자(荀子) 수신편(修身篇)에 나오는 글귀로 “시시비비위지지(是是非非謂之知)라 하고 비시시비위지우(非是是非謂之愚)”라. 즉 옳은 것을 옳다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고 틀린 것을 옳다하고 옳은 것을 틀렸다 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도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너희는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시시비비를 가르는 법률적 판단은 법원과 검찰 등 사법 당국이, 일상의 삶에서는 정치가 잘 작동해 대안을 만들어 공동체 구성원을 설득하고 통합하여 합의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 한 해는 법과 정치 모두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저도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크게 반성합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일은 시시비비를 가르고 조정해야 할 법과 정치를 담당한 사람들이 많은 경우 오히려 갈등과 분열을 일으켰다는 점입니다.
이에 올해에는 정치인은 물론 우리 모두 시시비비의 기준을 새롭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설정해 진실과 지혜에 기초한 삶을 사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더불어 부유하고 오만한 재벌들, 전관으로 수억, 수십억을 받아드는 고위 공직자들, 반공과 거짓 자유를 기초로 역사와 진실을 인식하지 못한 분들의 회심을 위해서 함께 기도합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나라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함께 모여 고민하고 지혜를 모아야 할때 서로 편을 가르고 적대했고 우리 겨레는 결국 분단되었고 전쟁을 겪었습니다.
경자년 새해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지혜를 모아 고통받고, 소외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나라를 만들고 남북 8천만 겨레가 한 어머니의 자손임을 확인하는 날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연구소 가족들과 연구소를 사랑하는 모든 은인, 동지들의 꿈과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2020.1. 함세웅 이사장

화, 2020/01/21-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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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연구소 여론조사 결과,

시민들의 친일청산 문제 인식

박수현 사무처장 정리

 

일반 시민들은 친일청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연구소는 지난해 11월 1일부터 4일까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친일청산 문제 전반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주요 결과를 <민족사랑> 경자년 새해 1월호 특집기사로 싣는다.
이 조사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그간 한국사회의 친일청산운동 성과를 점검하고 향후 시대정신에 맞는 공익적・미래지향적인 친일청산운동의 방향을 모색한다는 취지에서 이루어졌다. 친일청산 문제가 핵심이지만, 이슈가 되는 다른 과거사문제도 설문조사에 포함했다.
설문조사는 전국의 만 19세 이상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했으며,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조사방법은 웹조사 방식이다. 응답자는 성별・연령별・지역별・직업별・이념성향별 비례할당으로 추출했다.

설문 문항은 40여 항목이며, 이를 주제별로 나누면 크게 4가지다. (1)친일청산 체감도 및 친일파 인식, (2)사회지도층의 친일문제, (3)<친일인명사전>과 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4)기타 과거사문제 해결 방향 및 뉴라이트에 대한 생각 등이다. 다음은 주제별 주요 설문결과와 분석 내용이다.

 

친일청산 체감도 및 친일파 인식

시민 10명 중 8명, 한국사회의 친일청산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 가장 미흡한 분야는 정치, 경제, 교육 순

시민 대다수는 해방 후 지금까지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10명 중 8명 이상이 친일파 처벌은 물론 일제잔재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친일행위에 대한 진상규명도 미흡하다고 답했다. 민주화 이후 친일청산운동이 꾸준하게 전개되었음에도 그조차도 대다수 시민들은 체감하지 못했거나 미흡하다고 평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친일청산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친일청산이 가장 미흡하다고 생각한 분야(중복 허용)는 정치 75.8%, 경제 53.9%, 교육 47.4%, 언론 44.7%, 사법 43.7%, 군경찰 43.4% 순이었다.
또 많은 시민들은 친일파를 과거의 역사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상황, 현실 정치와 연계해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친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주관식)에 ‘자유한국당・’ ‘아베’ ‘나경원’ 등의 답변이 높은 빈도수를 차지했고, ‘친일파’ 하면 떠오르는 인물을 묻는 질문(주관식)에 대해서도 ‘나경원’ ‘이명박’ ‘박근혜’ 등 최근의 정치인이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사회지도층의 친일문제

시민 10명 중 7~8명,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는 개인의 영달을 위한 적극적인 친일 … 더욱 엄격히 책임을 물어야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시민 10명 중 7명(72.2%)이 개인의 안위와 성공을 위한 적극적인 친일로 평가했으며, 지금까지 친일파를 옹호하는데 가장 많이 등장했던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18.1%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시민 10명 중 8명(82.7%)이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적을 더 엄격히 따져야 한다고 답했다. 이들에 대한 기념사업에 대해서도 10명 중 8명(81.3%)이 중단해야 한다고 답했으며, 현재 국립묘지에 안장된 지도층 친일인물에 대해서도 10명 중 7명(74.4%)이 이장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또한 아무리 국가적으로 기여한 공로가 있더라도 친일행위를 했다면 서훈을 취소해야 한다는 의견이 10명 중 6명(65.6%)으로, 서훈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24.4%)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사회지도층의 친일문제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문화예술계 친일인물에 대해서는 그들의 작품을 교과서에 수록하는 것에 과반이 약간 넘는 사람만이 삭제해야 한다는 의견(58.2%)을 보여, 다른 분야의 친일 지도층에 비해 비판의 강도가 낮았다. 이는 문화예술계 인물과 작품에 대한 오랜 기간의 학습효과와 고정관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친일인명사전>과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친일인명사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데 일조 … 박정희・김성수・방응모 등 지도층 인사의 수록은 적절.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젊은 층일수록 낮아

<친일인명사전>에 대해서는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나, 사전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상당수에 달했다. 전체 응답자 중 사전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고 답한 사람은 29.7%였지만, 여기에 <친일인명사전>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다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인지도는 78.8%였다. 내용과 상관없이 <친일인명사전>의 인지도는 꽤 높게 나타난 것이다.
사전 평가에 대해서는 시민 10명 중 6명 이상이 긍정적으로 답했다. 사전이 친일문제를 공론화하는 여건을 마련했다는 의견에 62.3%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데 일조했다는 의견에 62.1%가, 민족과 국가에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면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는 교훈을 남겼다는 의견에 62.7%가 동의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전의 내용과는 별개로 인지도만으로 사전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사전에 대한 사회적 평판, 친일청산에 대한 기대와 희망 등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박정희・김성수・방응모・김활란・이광수・최남선・장면・유치진・홍난파・현제명 등 유명인사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것에 대해서도 적절하다는 의견이 적절치 않다는 의견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히 그동안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한 보수층은 이들이 사전에 수록된데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번 조사에서는 보수층도 사전 수록에 찬성하는 의견이 많거나 찬반이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박정희의 경우는 사전 수록에 대한 보수층의 의견이 찬성 32.4%, 반대 50.1%, 모름 17.5%로, 다른 인물들에 비해 반대가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까지 보수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우상화 현상까지 나타났던 것에 비하면, 이 조사 결과는 박정희 평판에 대한 보수층의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해서는 시민 27.6%가 알고 있다고 답했으며, 이름만 들어봤다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인지도는 65.5%였다. 주목되는 것은 연구소를 알고 있다는 응답자의 이념성향별 분포다. 진보층 40.4%, 보수층 25.5%, 중도층 22.1% 순으로 진보층이 가장 많았지만 예상과 달리 과반을 넘지 못했다. 반면 보수층은 중도층보다 연구소를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그 의도가 무엇이던 간에 연구소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젊은 층일수록 연구소에 대한 인지도가 낮다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연구소를 알고 있다는 응답자 가운데 60세 이상이 34.4%로 가장 많았고, 50대가 33.1%, 40대가 26.6%, 30대가 25.8%, 그리고 19~29세가 13.8%로 가장 적었다. 특히 19~29세의 인지도는 다른 연령대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연구소의 장기적인 활동 방향이나 전망과 관련해 반드시 참고 해야 할 내용이다.
연구소를 알게 된 계기 및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가장 많았고, 이어 친일인물 훈장 취소, 교과서 왜곡 및 국정화 반대운동, 친일인물 기념사업 반대 등의 순이었다.

 

 

과거사문제 해결 방향 및 뉴라이트에 대한 생각

과거사문제 해결이 사회통합과 발전에 도움. 뉴라이트의 주장에는 동조하지 않아, 과거사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행위는 법으로 처벌해야

과거사문제 해결 방향 및 뉴라이트의 역사왜곡에 관해서도 설문조사를 했다. 우선 과거사문제 해결이 한국사회의 통합과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65.8%가 도움이 된다고 응답해, 상당수 시민들이 과거사 문제 해결이 한국사회의 통합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사 청산을 위한 정부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는 1,2순위를 합해 일본의 역사왜곡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52.7%), 독립적인 조사기구를 설치해 정부차원에서 과거사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51%)이 그 다음이었다. 또한 시민 사회의 역할에 대해서는 1,2순위를 합해 일본의 역사 왜곡(위안부, 역사교과서 문제 등)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응답(64.1%)이 가장 많았으며, 친일 진상 규명(35.1%), 시민 홍보(29.3%), 역사교육 강화(26.3%) 등의 응답이 뒤를 이었다.
최근 논란이 된 뉴라이트의 ‘식민지근대화론’이나 ‘반일 종족주의’에 대해서는 38.2%가 알고 있다고 응답했으나, 11.1%만이 공감하는 것으로 나타나 뉴라이트의 영향력은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시민 10명 중 7명(70%)은 과거사를 노골적으로 부정하고 폄하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유럽의 경우처럼 법을 만들어 처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응답해, 과거사 왜곡과 폄하에 대해서는 대다수 시민들이 강력한 처벌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 2020/01/21-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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