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2021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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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양대노총, 노동자상 앞에서 일본정부 규탄

“참으로 천인공노할 작태가 아닐 수 없다.”
4일 오전 서울 용산역 광장 강제징용 노동자상 앞에 모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강제동원공동행동 등 단체들이 일본 정부를 향해 한목소리로 외친 말이다.
지난 4월 27일 일본 정부는 “일제강점기에 모집, 관 알선, 징용 등은 강제 노동에 해당되지 않는 걸로 생각한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한 마디로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강제로 동원돼 노동착취를 당한 조선인들의 역사를 정면으로 부정한 거다.
이날 노동자상 옆에 모인 양대노총은 “일본 정부의 행태를 준열히 규탄한다”면서 “일본은 위험천만한 전쟁놀음을 즉각 중단하고 피해자 인권회복을 위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과 공식적인 사죄·배상을 즉각 이행하라”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이러한 일본 정부의 만행은 미국의 비호 아래 이뤄지고 있다”면서 “(우리 정부가) 한미정상회담을 비롯한 모든 외교에서 위태로운 상황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오는 21일로 예정된 한미정상회담에서 미국은 대 중국전략에 우리의 참여를 강권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될 경우, 우리는 미중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일본의 군사대국화 및 역사 왜곡을 눈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래한다. 대한민국 정부답게 임하라.”
“강제징용, 일본 스스로 인정했다”

이날 강제노동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 규탄 회견에는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도 함께했다. 김 실장은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이곳 용산역에서 조선인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기차에 실려 떠났겠냐”면서 “이미 유네스코를 비롯해 수많은 현장에서 일본 스스로 강제징용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이러한 사실까지 부정할 것이냐”라고 지적했다.
김 실장 말대로 2015년 세계유산위원회(WHC) 총회에서 사토 구니 유네스코 일본대사는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많은 한국인 등이 본인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환경에서 강제노역을 했음을 인식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메이지 산업유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정보센터를 설치해 강제징용 피해자를 기억하는 조치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우리 정부는 이 약속을 전제로 유네스코 등재를 지지한 바 있다. 그러나 2020년 6월 도쿄에 만들어진 홍보시설에는 오히려 “하시마(일명 군함도)에선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 근로환경이 양호했다”라는 왜곡된 내용의 영상물이 설치됐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정부 관방장관이었던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우리나라(일본)는 지금까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의와 권고 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우리나라 정부가 약속한 조치를 포함해 이런 것들을 성실히 이행해오고 있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날 노동자상 앞에 모인 양대노총은 “현재까지 밝혀진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들은 무엇이며 아직 생존해 당시 범죄적 만행을 직접 고발하고 있는 수많은 피해자들은 대체 누구인가”라며 “아무리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라지만 속속들이 드러나는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세상을 기만하려는 일본 정부의 작태에 실로 기가 찰 따름”이라고 비판했다.
앞서 2018년 11월 우리 대법원은 일제강점기 강제노역 피해자와 유족 등 5명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상고심에서 1인당 1억에서 1억 500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한 바 있다.
그러나 미쓰비시중공업은 우리 대법원의 이 같은 취지의 배상 명령에 대해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개인배상 문제가 해결됐다’라고 주장해온 일본 정부의 입장에 따라 판결 이행을 거부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 당시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엔 양국 정부 및 국민, 기업 간의 재산 및 권리 등 청구권 문제가 이 협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완전히 해결됨을 확인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2021-05-04> 오마이뉴스
일부 의원, 친일 인사 기준·청산 용어 등에 문제 제기
오는 12일 임시회서 심의 재개

(창원=연합뉴스) 김선경 기자 = 경남에서 일제잔재 청산 관련 조례안이 상임위원회조차 통과하지 못한 채 표류해 그 배경에 의문이 쏠린다.
6일 도의회 등에 따르면 지난 1월 말 더불어민주당 김영진 의원을 포함한 28명은 ‘경상남도교육청 일제잔재 청산에 관한 조례안’을 공동 발의했다.
조례안은 일제 식민통치로 도내 학교에 남아 있는 유·무형 흔적을 청산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규정한다.
유사한 조례는 경남도, 제주도에서도 이미 시행 중이지만, 해당 조례안은 도의회에서 지난달까지 두 차례 임시회를 거치면서도 교육위원회 문턱도 넘지 못했다.
조례안이 처음 상정된 지난 3월 16일 제383회 임시회 제1차 교육위원회에서는 청산 대상과 용어 등을 두고 일부 의원의 반대가 이어졌다.
국민의힘 윤성미 의원은 당시 회의에서 “일제잔재에 대한 의미, 기준과 범위가 불분명하다”며 도교육청이 앞서 학교 내 일제잔재 정비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친일인명사전’을 근거로 한 점을 문제 삼았다.
윤 의원은 “정부가 공식 인정한 친일 반민족 인사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선정된 1천6명임에도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을 기준으로 삼은 이유가 뭔가”라며 “친일인명사전은 4천389명을 친일 인사로 규정하는데, 판단 기준에서부터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구체적 법령이나 근거 없이 조례가 시행되면 도교육청 추진 사업과 같이 일방적 기준, 자의적 판단에 의해 추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황재은 의원도 윤 의원 질의 내용을 포함해 조례안에 대해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국민의힘 조영제 의원은 “(도교육청이 앞서 청산 대상으로 꼽은) 교가들은 동문들이 몇십 년간 부른 익숙한 것이어서 없애라는 데 반발이 많다”며 “일제잔재인지도 몰랐는데 지금 와서 일본을 따르는 사람이 지었다고 교가를 없애야 한다면 언어도단 아닌가”라고도 말했다.
조 의원은 또 조례안에 명시된 일제잔재청산위원회와 관련, “‘위촉직 위원은 (…) 일제잔재에 대한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 중에서 교육감이 위촉한다’고 돼 있는데, 주관적 요건에 머물러 편파성을 보일 수 있고, 객관성과 공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일제잔재, 청산이라는 용어도 ‘일본은 다 나쁘니까 일본을 다 배척하자’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라고 했다.
같은 당 이병희 의원은 “조례를 만드는 데는 기준, 원칙이 필요하다”며 조례안의 심의 보류를 제안했다.
일제잔재 청산 취지에는 모두 동의하는 만큼 세부적 이견은 조례안 통과 뒤 위원회 등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며 조례안 찬성 의견도 이어졌다.
민주당 김영진 의원은 “우리는 (학창시절) 일부 사람들이 친일행위를 했거나 강제징병을 독려하는 시를 썼다는 걸 모르는 상태에서 배운 것들이 있는데, 대한민국 미래를 열어갈 다음 세대는 왜곡되고 편협된 교육을 벗어나 일제잔재 청산과 더불어 올바른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같은 당 김성갑 의원도 “일제잔재에 대한 구체적 대상과 범위가 다소 불명확하다고 하는데, 사람들 견해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그걸 명확히 하고 조례를 정하려고 하면 오랜 시간을 두고도 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은 과거사를 전혀 반성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데, 일제잔재를 더 빨리 청산해야 함에도 늦은 감이 있다”며 “조례가 통과돼도 학교운영위원회를 거쳐야 하고 구성원들끼리도 서로 조율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정리해나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같은 당 송순호 위원장은 “윤 의원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특별법을 만들 때 그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서 제외된 사람도, 선택된 사람도 있다. 정치적 협의로 만들어낸 특별법이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 기준에 대한 문제가 여전히 논란이 되는 것”이라고 발언했다.
조례안은 결국 해당 회의에서 접점을 찾지 못하고 심의 보류 결정됐다.
바로 다음 달 열린 지난 4월 제384회 임시회 때는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조례안 심의는 오는 12일 열릴 제385회 임시회 제1차 교육위원회에서 다시 이뤄진다.
기존 조례안에 반대 의견을 낸 의원들은 일제잔재 청산 대상을 특별법에 따른 친일 인사로 규정한 내용 등을 반영한 수정안을 낼 예정이다.
조례안 상정 직후부터 찬반 의견 차가 컸던 만큼 이번 임시회 때 조례안이 통과될지는 미지수로 남아 있다.
<2021-05-06> 연합뉴스
| 역사상 국가는 아무도 못 건드리는 우상으로 군림하며 가장 가공할 폭력과 살상을 저질러왔다. 국가에게서 우상의 가면을 벗겨내고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박탈할 수 있는 것은 이성과 윤리로 무장한 깨어 있는 시민들뿐이다. 국가가 국민을 섬기는 수레가 되어야지 국민이 국가를 우상으로 섬기는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


강우일ㅣ베드로 주교
지난 3월28일 일본에서 96세의 재일교포 한 분이 뇌출혈로 타계하였다. 성함은 ‘이학래’, 1925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난 그는 1942년 봄 어느 날 돌연히 마을 면장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총독부에서 남방포로감시원 모집이 나왔는데, 네가 가라’는 통보였다. 2년 근무에 월급도 나온다고 했다. 17세 소년은 군인으로 징집되는 것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했다. 군속 신분으로 타이와 버마를 잇는 국경지대의 철도 건설 현장에 파견되어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게 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동남아 전선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연합군 포로가 수십만에 이르렀다. 포로들 감시를 위해 3천여명의 조선인 청년들이 동원되었다. 이씨가 배속된 곳은 타이였고 영화 <콰이강의 다리> 이야기로 유명해진 지역이다. 일본군은 포로들에게 식량과 의약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가혹한 노동을 강요하였다. 깎아지른 절벽을 끼고 철로를 건설하는 난공사는 많은 포로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씨는 일본군 공병대가 요구하는 노역 인원을 매일 차출하기 위해 포로 측 대표와 자주 충돌하였다. 포로들의 보호를 규정한 ‘제네바 조약’ 등은 들은 적도 없고, 복종하지 않는 자는 가차 없이 구타하는 것이 그가 받은 일본군 교육의 전부였다. 일본군의 도구로 동원된 조선인 포로감시원 중 148명은 연합군 전범재판에서 포로 학대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23명에게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씨도 싱가포르에서 열린 오스트레일리아군의 군사재판에서 단 두차례의 공판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수 감방에 같이 있던 동료들이 차례로 형장으로 불려 나가는 공포의 수감생활이 8개월 계속되다가 어느 날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 수감생활 중 작업 시간이 끝나면 그는 책을 읽으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덮어씌워진 억울한 운명의 연유를 찾으며 식민지 백성이었던 자신이 ‘가해자’로 둔갑하게 된 경위를 돌아보았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자행한 불의와 부조리에 말할 수 없는 울분을 느꼈다. “내가 그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역경에 빠지지 않았을 텐데…. 전쟁이야말로 모든 해악의 근원이다”라고 그는 수기에 썼다. 이씨는 자신을 전쟁에 가담시킨 천황제 파시즘을 증오하고 만년은 오직 평화를 위한 일을 찾아 나섰다.
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인들의 일본 국적을 박탈하고 복지와 원호 대상에서도 제외했다. 고립무원이 된 어떤 이들은 생활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55년 조선인 B, C급 전범 70여명은 ‘동진회’라는 자치회를 결성하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원호와 보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본 정부는 ‘한일 간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며 이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이들은 일본인도 아니면서 ‘전범’이라는 엄청난 불명예를 뒤집어썼고, 조국은 이들을 ‘대일협력자’로 간주하여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들은 모두 ‘우리의 희생과 죽음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절규하다 하나씩 세상을 떠났다.
1990년대 초부터 이씨와 동료들은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법정 투쟁을 시작하였다. 양심적인 일본인들(우쓰미 아이코씨 등)도 이들을 지원하며 함께 연대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최고재판소는 1999년 12월 ‘보상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국가의 입법정책에 속한 문제’라고 규정짓고 원고 측 패소로 판결하였다. 2008년 5월 일본 국회의 민주당 의원들이 피해자 1인당 300만엔의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법안을 작성하였으나 국회의원 대다수의 무관심으로 폐기되고 말았다. 일본제국은 조선을 식민지화한 다음, 조선의 어린 10대 소년들에게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황국신민의 도리라고 세뇌하고 전쟁터로 징발하였다. 이 소년들은 동남아 밀림 속에서 일본군의 수하가 되어 최악의 철로 공사에 동원된 연합군 포로들을 다그치다가 ‘전범’이라는 끔찍한 혐의로 법정최고형을 선고받았다. 일본이라는 국가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타국 소년들을 데려다가 전쟁 원흉의 죄를 덮어씌웠다. 사형을 당했거나, 장기형을 치르고 평생을 죄인으로 숨어 살았던 이들은 일본이라는 국가가 저지른 범죄와 부조리의 희생자요 피해자들이다.
이학래씨와 동료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접하며 즉시 떠오른 것은 미국이 시작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 군인들이다. 2년 전에 나는 베트남 꽝남성 퐁니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다. 베트남전쟁 때 민간인들이 한국군에 집단으로 살해당한 곳이다. 벼가 파랗게 자란 들판에 74위의 희생자 위령비가 서 있었다. 이 마을은 본디 남베트남 군인 가족들도 여럿 살고 있었고, 한국군과는 같은 편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군이 마을 옆 도로를 따라 행군하던 도중에 마을을 향해 진입해 주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당시 8살 소녀였던 응우옌티탄은 몇몇 생존자 중 하나다. 그녀도 배에 총을 맞았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어머니와 가족 5명을 모두 잃은 응우옌티탄이 2020년 4월에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4월13일 국방부와 국가정보원에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관련 자료를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베트남에 파병된 군인들도 처음엔 살아 있는 사람을 향해 좀처럼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순박한 젊은이들이었다. 그러나 참전 군인들은 고백한다. 전투가 벌어지고 옆에 있던 동료가 적의 총탄에 피 흘리며 쓰러지는 순간, 그곳은 지옥으로 변하고 윤리나 이성과 결별한다고. 눈앞에 등장하는 상대가 군인인지 민간인인지 구분할 여유가 없다고.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병사들은 몹시 앓았다. 스스로 자진한 이들도 있다. 아직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으며 가족에게 말 못 하고 밤중에 혼자 악몽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다. 국가가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들이다.
개인이 범죄를 저지르면 심판이 가능하다.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개인들도 심판받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는 최고의 권위와 권좌를 보유하기에 이를 심판할 사람이 없다. 역사상 국가는 아무도 못 건드리는 우상으로 군림하며 가장 가공할 폭력과 살상을 저질러왔다. 국가에게서 우상의 가면을 벗겨내고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박탈할 수 있는 것은 이성과 윤리로 무장한 깨어 있는 시민들뿐이다. 국가가 국민을 섬기는 수레가 되어야지 국민이 국가를 우상으로 섬기는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2021-05-06> 한겨레
☞기사원문: [강우일 칼럼] 국가의 죄

[쿠키뉴스] 이소연 기자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이 지정된 지 3년째를 맞았다. 그러나 혁명을 이끌었던 ‘녹두장군’ 전봉준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은 지지부진하다.
11일 오후 3시 서울 경복궁 흥례문 광장에서 제127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이 열린다. 동학군은 지난 1894년 5월11일 전북 정읍 황토현 일대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첫 승리를 거뒀다. 2019년 정부는 5월11일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매년 정부 주최 기념식도 열린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동학 세력이 주축이 돼 일으킨 대규모의 민란이다. 동학농민운동 또는 동학농민전쟁이라고도 불린다. 동학농민혁명은 크게 1차와 2차로 나뉜다. 1차에서 동학군은 탐관오리의 폭정에 저항, 궐기했다.
2차는 달랐다. 당시 일본군은 1차 혁명 진압을 돕겠다며 조선에 주둔해 내정간섭을 벌였다. 동학군은 일본군을 몰아내자는 취지에서 2차 혁명을 일으켰다. 최시형과 전봉준 등이 주축이 돼 관군·일본군에 저항했다. 치열하게 싸웠으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관군·일본군을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차 혁명이 항일운동이었다는 점은 ‘전봉준 판결 선고서’에도 명시돼 있다. 선고서에는 “전봉준은 일본 군대가 대궐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필시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병탄(倂呑·남의 재물이나 영토를 제 것으로 만듦)하고자 하는 뜻인 줄 알고 일본군을 쳐서 물리치고자” 군대를 일으켰다는 내용이 담겼다.
정부는 전봉준·최시형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지난해 3월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는 전봉준·최시형에 대한 독립유공 공적심사 요구에 “활동 내용이 독립운동 성격 불분명하다”고 반려했다. 학계 의견을 청취한 후 서훈 여부를 재논의하겠다는 것이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이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자료에 의거,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차 혁명에 참여했다가 일본군에 의해 총살·사살·화형 등을 당한 순국자는 총 111명이다. 싸우다 전사하거나 자결한 이들까지 합치면 119명으로 전해졌다. 이 중 단 한 명도 서훈을 받지 못했다.

1910년 한일강제합병 이전의 활동은 독립운동으로 포함되지 않는 걸까.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기준을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 항거한 인물로 규정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도 이 기준에 포함된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1962년부터 지난해까지 을미의병 참여자 120명을 서훈했다. 을미의병은 1895년 우리 땅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조직됐다. 동학농민혁명 직후다. 을사의병(1905)·병오의병(1906)·정미의병(1907) 등의 참여자들까지 합치면 현재까지 2682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2차 동학농민혁명은 항일구국투쟁이다. 교과서에서도 명시돼있는 내용”이라며 “양반이 주축이 된 의병운동은 국가보훈처에서 서훈했다. 같은 시기, 농민이 주축이 된 동학농민혁명을 외면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국가보훈처는 토론회와 학술회의 등을 통해 역사학계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방침이다. 지난 6일 ‘전봉준·최시형 등 제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에 대한 독립운동 서훈의 당위’ 학술토론회가 국회에서 진행됐다. 오는 20일에도 한국역사연구회 주최,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2차 동학농민혁명과 서훈 관련 학술대회가 열린다. 국가보훈처 측은 “독립운동 공적이 있는 분들에 대해 일제 강점기 원전 자료를 바탕으로 공적심사위원회의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 포상이 결정된다”고 덧붙였다.
<2021-05-11> 쿠키뉴스
☞기사원문: 일제에 맞서 싸웠지만 서훈 못 받는 ‘녹두장군’
“힘든 삶 지켜준 사람들에 좋은 그림으로 보답”
‘걸개그림’ 국보법 위반 구속…30년 아픔 트라우마센터 통해 안정 찾아
불교미술 접목 작품 확장…5월 유족과 인연, 삶·예술 연극으로 만들어져

올해 예순 둘이 된 민중미술 작가 이상호는 최근 3년 동안의 삶이 참 행복했다고 말했다. 힘든 삶이었지만 자신의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고도 했다.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며 그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상호 작가는 오랜 시간 정신질환과 싸워왔다. 조선대 미술학과 3학년 때 화염병을 던지다 경찰에 끌려가 수없이 구타당한 후 닥친 불행이었다. 6월 항쟁 때는 걸개그림이 발단이 돼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구속됐다. 30여년간 나주정신병원을 수차례 오고 가는 삶이 계속됐다. 모두 합치면 6년여, 2000여일의 시간이다. 어둠의 시간을 지나, 그는 3년 전 광주트라우마센터에 다니며 상담을 통해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한 동안 놓았던 그림 작업에도 매진했다.
이 작가는 최근 막을 내린 제13회 광주비엔날레 참여작가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선보였고 뉴욕타임즈에 작품이 실리기도 했다. 또 그의 삶과 예술이 모티브가 된 오월 연극 ‘어머니와 그’도 공연된다.
5·18이 발생하고 아직은 엄혹한 세월이었던 1980년 초반, 오월어머니회 유가족들은 가톨릭센터 앞에서 시위를 하곤 했다. 1984년, 이 작가는 우연히 시위에 합류했다 어머니들과 나주 경찰서로 끌려갔다.
“당시 경찰서에서도 내 아들 살려 내라며 외치시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보면서 깊은 한과 슬픔을 알 수 있었죠. 유가족 사이에 혼자 있는 저를 경찰들이 어디론가 데려가려 하니, 어머니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셨어요. 아마도 제가 따로 끌려가 봉변을 당할까 걱정이 되셨나 봐요. 그 때 한 분이 나서서 ‘내 둘째 아들인데 왜 데려가려고 하느냐. 절대 못 데려간다’며 적극적으로 막아주셔서 위기를 모면했죠.”
그 때의 기억은 늘 마음 속에 있었지만, 힘든 생활이 이어지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던 중 광주트라우마센터가 유가족들을 인터뷰한 책에 한 어머니의 회고가 실렸다. “조선대 다니던 그림 그리는 학생을 내 아들이라고 해서 구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 학생이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마침 이 작가는 광주트라우마센터 명지원 센터장과 상담을 하며 큰 위로를 받던 참이었고, 명 센터장의 소개로 36년만에 ‘그 어머니’가 고(故) 김경철 열사의 모친 임근단 여사라는 사실을 알게됐다.
“어머니를 다시 만나던 날 감사하는 마음으로 엎드려 큰 절을 드렸지요. 어머니는 이후 아들같이 대해주시죠. 이번 비엔날레 전시에도 다녀가시구요. 반찬도 만들어 챙겨주시고, 늘 마음으로 아껴주십니다.”

두 사람의 사연과 이후의 이야기들은 극단 ‘깍지’가 지난해 연극으로 만들어 초연했다. 양태훈 극단 얼·아리 대표가 희곡을 쓰고, 김준호·김은숙·김정훈 배우가 출연한 작품은 오는 17일 민들레소극장에서 공연된다.
이상호 작가의 작품 ‘일제를 빛낸 사람들’은 올해 열린 제13회 광주비엔날레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92명의 친일인사를 단죄하는 내용을 담은 작품은 박정희 대통령기념재단이 작품 철거를 요구하면서 오히려 화제가 됐다.
“비엔날레 외국인 감독들이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40여년간 민중미술을 꾸준히 해온 제 작업이 인상적이었던듯해요. 제 포트폴리오를 보고 전시작을 고른 후 신작을 요청하더군요. 여러 사람과 소통이 가능하고, 시각적 효과가 큰 그림을 통해 친일 청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민족문제연구소광주지부와 협업을 통해 1년 동안 진행한 작품입니다. 인물 선정 등 모두 함께 고민하며 만들어갔죠. 음식을 가져다 주고, 작업실 냉난방기를 사주신 분도 계셨어요. 붓을 제가 들었을 뿐이지, 광주 시민이 함께 그리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년간 힘들기도 했지만 참 행복했어요. 비엔날레 전시장에서 제 그림 앞에 오래 머물다가는 관람객들을 보며 기분도 좋았구요.”
이 작품은 서울 민족문제연구소 산하 시민역사박물관에 기증된다.
이 작가의 삶은 수 십년간 어둠 속이었다. 병은 좀처럼 낫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은 외면하고, 좋아하는 그림도 많이 그리지 못하는 외로운 삶이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끈끈한 사랑으로 그를 잡아둔 소중한 이들도 있었다. 한달에 한번 작업실을 방문, 대화를 이어가는 명지원 씨, 우연히 만날 때면 술한 잔을 권하며 개인전을 독려하고, 전시회 때 큰 돈을 선뜻 내어준 강연균 화백, 민족문제연구소 김순흥 광주지부장, 이지훈 사무국장, 전시를 독려해준 노주일 작가 등 선후배들 모두 귀한 인연이다.
“사실, 아직도 이런 그림을 그리느냐는 말을 참 많이 들었죠. 제가 민중미술을 하는 이유는 어쩌면 단순해요. 이 시대가 현상이 변했을 뿐, 본질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통일문제나 반외세 문제에 대해서는 말이죠. 요즘에는 일관성 있는 꾸준한 작업이라며 응원하고 좋아보인다고 하는 사람도 생기네요.(웃음).”
독실한 불자인 그는 2000년부터 독학으로 탱화를 공부했다. 3년 전에는 무각사에서 ‘연필로 그린 부처님전’을 열기도 했다. 앞으로 민중미술과 불교미술을 결합한 작품을 진행할 예정이다.
“은혜를 갚아야 할텐데 하고 말하면 ‘끊임없이 좋은 그림을 그리면 그게 보답하는 것’이라는 말들을 해주십니다. 숱한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저처럼 많은 사람들한테 사랑을 받은 이도 드물듯 합니다. 비워내고 욕심을 갖지 않는 것, 제 자신에게 늘 하는 말입니다.”
인터뷰 중 그가 자주 한 말은 이것이었다. “고마운 분을 한 분 더 이야기해도 될까요?”
/김미은 기자 [email protected]
<2021-05-11> 광주일보
[손호철의 발자국]31. 충북 박달재 : ‘친일 문인의 두 얼굴’ – 반야월과 ‘종천(從天) 친일파’ 서정주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굽이마다
울었오 소리쳤오 이 가슴이 터지도록.
유명한 옛 유행가 ‘울고 넘는 박달재’ 가사다. 박달재는 충북의 충주에서 제천을 잇는 38번 국도를 따라 제천에 거의 다 이르면 있는 고개다. 특히 이 고개는 과거시험을 보러가던 경상도 청년 박달과 이 고개 아랫마을의 금봉이가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에 대한 전설을 가진 곳으로, 인기 작사가 반야월이 이 전설을 노래가사로 만들었다.
이 노래 덕에 이 고개가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고개 이름 박달재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이 고개는 한 때는 많은 트럭들의 정체가 일어났던 곳이지만, 이제 박달재터널이 생긴 뒤 통행량이 한적해졌다.
이제는 거의 버려진 이곳이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현장인 이유는 반야월 때문이다. 그는 작곡가 박시춘, 가수 이난영과 함께 ‘한국 가요계의 3대 보물’이라고 불린 탁월한 작사가로, ‘단장의 미아리고개’, ‘소양강 처녀’, ‘산장의 여인’ 등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히트곡을 작사했고 그런 만큼 가장 많은 노래비를 가진 작사가로 알려졌다. 이 곳 박달재에도 박달과 금봉이의 사랑을 형상화한 커다란 조각 동상이외에 ‘박달재 노래비’라는 그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주목할 것은 이 노래비 옆에 세워져 있는 작은 팻말이다. 2016년 제천의병유족회와 민족문제연구소 제천단양지회가 설치한 하얀 이 팻말은 ‘반야월의 일제 하 협력 행위’라는 제목 아래 그의 친일 행각을 고발하고 있다. 나는 이 고개를 넘어가다 우연히 이를 발견했을 때 받았던 충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 땅에 이 같은 친일 고발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친일군인 김백일의 ‘친일행위처단비’는 거제 포로수용소에 있는 김백일 동상 옆에 세워져 있다).
나아가자 결전이다. 일어나거라 / (…) / 민족의 진군이다 총력전이 / 피 뛰는 일억일심 함성을 쳐라 / 싸움터 먼저 나간 황군 장병아 / 총후는 튼튼하다 걱정 마시오 / 올려라 히노마루 빛나는 국기 (…) / 승리다 대일본은 만세 만만세.
그는 이 같은 가사로 ‘일억일심’을 작사하고 직접 노래 부르는 등 친일 행각을 벌였고,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으며, 사망 2년 전인 2010년 국회 간담회에서 일제 지배 하의 친일 행각에 대해 사과했다는 사실을 자세히 기술해 놓았다.


해방에도 불구하고 친일파가 계속 권력을 잡으면서 친일 문제는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금기로 남아왔다. 임종국 교수가 1966년 발표한 역사적인 <친일문학론>을 발표해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지만, 그 이후에도 이 문제는 최근까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문학평론가 임헌영 등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1991년 임종국의 뜻을 살려 민족문제연구소를 만들어 친일파에 대한 조사연구 작업을 벌여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발표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 정부 차원에서도 2005년 뒤늦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이에 대한 조사를 벌여 제1차 106명, 제2차 195명, 제3차 705명의 친일파 명단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일왕에게 혈서로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장교를 지원했던 박정희는 제외됐다. 이들 중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사람으로 유명한 친일 고문 경찰 노덕술 등 225명은 정부로부터 훈장 등 서훈을 받았는데, 2019년 현재 25명에 대한 서훈이 취소됐고 노덕술 등 200명에 대한 서훈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겨울 설경으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한 곳이 전북 고창의 선운사다. 선운사에서 바다 쪽으로 올라가 기막힌 전망의 언덕 위에 폐교를 잘 정비한 건물 옥상에 서서 바다가 내려다보면, 누구나 다 아는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떠오른다. 이곳이 서정주 문학관이기 때문이다.
그는 ‘국민 시인’, ‘우리말 시인 중 가장 큰 시인’, ‘시의 정부(政府)’라는 칭송을 받지만, 친일인명사전은 말할 것도 없고 정부가 발표한 친일파 명단에도 오른 대표적인 친일 문인이다. 그는 그 이후에도 광주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을 칭송했으며, 그래도 솔직하게 사과를 한 반야월과 달리 기이한 변명을 늘어놓는 등 ‘우리말 시인 중 가장 큰 곡학아세의 큰 어른’이었다. 아니, ‘학문을 왜곡해 아부를 한 것’이 아니라 ‘글을 왜곡해 아부를 한 것’이니 곡문아세(曲文阿世)의 큰 어른’이다.
우리의 몸뚱이를 어디에다가 던져야 할 것인가?
(…)
인제 겨우 스무 살인 벗아, 나도 너처럼 하고 싶구나.
나도 총을 메고 머언 남방과 북방을
포연과 탄우를 뚫고 가보고 싶구나.
그는 ‘우리말의 달인’답게 뛰어난 문장력으로 젊은이들에게 징병을 권유했다. 가미가제까지 찬양한 서정주는 민주화 이후인 1990년대에도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 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고 “이것이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라고 생각해, 이 같은 하늘의 뜻을 따른 ‘종천(從天) 친일파’라는 기이한 변명을 펼쳤다. 그에 비하면 자신의 친일 행각을 솔직히 사과한 반야월은 최소한의 양심은 가진 것이다.
서정주의 ‘곡문아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광주 학살의 주범 전두환에게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라는 생일 축시를 바치기도 했다. 이렇게 찬양한 것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을 할 것인가?
이에 대해 서정주는 “하도 깡패같이 굴어서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을 안 죽일 것 같아서 그랬다”고 변명했다고 한다. 그의 ‘후학’들도 마찬가지다. 그의 전집을 발간하면서 “생전에 시집으로 발표한 작품만 수록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웃기는 변명 아래 그의 친일시들을 뺀 것이다.


나는 친일과 죽고 죽이는 이념 대립을 강요당했던 일제와 해방정국에 청년으로 살지 않았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일개 필부가 아니라 지도자나 지식인은 달라야 한다.
뤼시엥 골드만이란 프랑스의 철학자는, 한 인간은 연구할 때 그 시대가 불가피하게 한계지우는 ‘한계 의식’이 있고 그 시대에도 가능했던 ‘가능 의식’이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에 이광수가 친일 한 것을 평가할 때, 순수 가정으로 모두가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면 친일은 ‘한계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이나 장준하 등 반일 운동을 한 사람들이 많다면, 그것은 그 시대에도 가능한 ‘가능 의식’이지 한계 의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인훈의 소설 중 <서유기>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가 한국사 주요 인물을 만나는데, 이광수를 만나 친일 행각을 다그치자 이광수는 흐느끼며 “나에게 단파 라듸오만 있었다면” 하며 흐느낀다. ‘단파 라듸오’가 있어 미국이 내보내는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면 미국이 이기고 있는 것을 알고 친일하지 않고 버티다가 민족적 영웅이 됐을 텐데, ‘단파 라듸오’가 없어 일본의 선전처럼 일본이 이기는 줄 알고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단파 라디오를 생각하며 고창을 떠났다.
<2021-05-17> 프레시안
☞ 기사원문: ‘친일’ 반야월‧서정주, 같지만 달랐다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경북대 초대 도서관장, 원암 이규동 ①
| 우리 사회에 근대 도서관 제도가 도입된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이식된 도서관은 이제 시민이 가장 자주 이용하는 일상 공간이자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 역사와 도서관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잊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서관 선구자임에도 잊힌 사람의 발자취를 찾아 그들을 다시 조명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잊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합니다.[기자말] |
조선인 중 근대도서관에서 일한 최초의 ‘사서’는 누구일까? 기록으로 확인 가능한 최초의 조선인 사서는 송재(松齋) 서재필(徐載弼)이다. 서재필은 1888년 가을부터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육군 의학도서관(the Library of the Surgeon General’s Office)에서 ‘사서’로 일했다. 육군 의학도서관에서 서재필은 동양에서 입수한 의학서적을 담당했다.
이 땅에서 일한 최초의 조선인 사서는 누구일까?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의하면 경성도서관 종로 분관(지금의 종로도서관)에서 일한 이긍종(李肯鍾)이다. 일제강점기 ‘사서 자격증’을 처음 발급받은 사람은 누구일까?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일한 최장수(崔長秀)다. 최장수는 1937년 조선인 중 최초로 사서 자격증을 발급받았다. 최장수에 이어 두 번째로 사서 자격증을 발급받은 사람은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 박봉석(朴奉石)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사서 자격증’을 발급받은 사람은 10만 명을 헤아린다. 그중에 ‘사서 자격증’을 처음 발급받은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원암(圓庵) 이규동(李揆東)이다.
1905년 을사년에 태어난 원암

이규동은 1905년 4월 28일 충청북도 영동읍 화신리 291번지에서 태어났다. 원암의 아버지가 서른일곱, 어머니 서른넷에 낳은 외동아들이었다.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빼앗긴 을사년, 한국 도서관계에 별이 되는 인물이 여럿 태어났다. 이재욱, 박봉석, 강진국과 함께, 이규동도 1905년 을사년 생이다.
1916년 4월 5일 이규동은 영동보통학교에 입학해서 1919년 2월 21일 졸업했다. 1920년 1월 29일 그는 이갑희(李甲姬)와 결혼했다. 결혼하고 한 해 뒤인 1921년 5월 2일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관립 중등학교에 진학하려는 학생이 늘자, 1921년 5년제로 개교한 학교가 경성제이고보다. 이규동은 경성제이고보 1기생이다.
경성제이고보는 훗날 ‘경복중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경복궁 근처에 있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경성에서 두 번째 개교한 관립학교라는 의미로 학교 모자(교모)에 백선 2개를 둘렀다. 백선이 2개인 평양고등보통학교와 구분하기 위해 굵은 백선 위에 가는 백선을 둘렀다. 경성제이고보 시절 원암은 어머니를 잃고(1922년), 첫 아이를 낳았다(1925년).
경성제이고보 시절 원암은 영어 공부에 열중했다. 언어학자이자 영어교육자로서 삶을 이때부터 예비한 모양이다. 최재서(崔載瑞)와 이숭녕(李崇寧)이 이규동과 동기다. 경성제이고보 1기인 이숭녕, 최재서, 이규동은 국어학자, 영문학자, 영어교육자로 나란히 이름을 날렸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이규동과 달리, 최재서와 이숭녕은 경성제국대학에 진학했다. 경성제이고보를 졸업한 최재서는 경성제대 예과와 법문학부 영문과를 거쳐 영국 런던대학에서 공부했다. 해방 후 연세대, 동국대, 한양대 교수를 차례로 지낸 그는 영문학자로 이름을 날렸다. 최재서는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이숭녕은 경성제대 예과와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했다. 진단학회 활동을 거쳐 해방 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다. 이숭녕은 국립도서관 이재욱 관장의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 후배이기도 하다.
히로시마고등사범 유학 시절

1926년 3월 21일 경성제이고보를 졸업한 이규동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広島高等師範學校)로 유학을 떠났다. 경성제이고보 1기 졸업생 66명 중 단 4명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중 한 명이 원암이다. 그해 4월 이규동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지금의 국립 히로시마대학교) 문과 제2부에 입학했다. 문과 제2부는 영어가 전공이었다.
이규동의 히로시마고등사범 11년 선배가 외솔 최현배(崔鉉培)다. 한글학자의 길을 걷은 외솔은 히로시마고등사범 졸업 후 교토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외솔과 울산 동향에 히로시마고등사범을 함께 졸업한 박관수(朴寬洙)는 조선으로 돌아와 대구사범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그 제자 중 한 명이 박정희다. 박관수는 일제강점기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히로시마고등사범 시절 이규동은 오사다 아라타(長田新) 교수를 통해 페스탈로치(Johann Heinrich Pestalozzi)를 알게 되고, 평생 사표로 삼았다.
“모든 것을 남을 위해 바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Alles für Andere, für sich Nichts)
묘비명처럼 살다 간 페스탈로치의 삶은 이규동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일본 유학 시절 이규동은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1926년 7월 4일 그는 다카노바시(鷹野橋)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개신교도가 되었다.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출신으로 우리 도서관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이가 있다. 바로 길영희(吉瑛羲)와 김원규(金元圭)다. 한국 중등교육사에 빛나는 업적을 지닌 이들은 ‘독서실’이 아닌 제대로 된 ‘학교도서관’을 운영한 도서관 선구자였다. 길영희와 김원규는 이규동의 히로시마고등사범 한 해 선배다. 히로시마고등사범 출신으로 명성을 날린 길영희, 김원규, 이규동이 한국 도서관 역사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것도 이채롭다.
1930년 3월 7일 히로시마고등사범을 졸업한 이규동은 조선으로 돌아와 4월부터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교유(敎諭 교사)로 부임했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북고등학교)는 세 번째 문을 연 관립학교로, 한강 이남의 명문으로 손꼽혔다.
고국에서 교편을 잡다

대구고보 시절 이규동은 영어 외에 비공식적으로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쳤다. 학생에게 민족의식과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전 국무총리 신현확(申鉉碻), 전 부총리 김준성(金埈成), 쌍용그룹 창업주 김성곤(金成坤), 전 공화당 의장 백남억(白南檍), 전 법무부 차관 오탁근(吳鐸根)이 대구고보 시절 원암이 가르친 제자다. 이중 김성곤은 1959년 국민대학교를 인수했다. 국민대 ‘성곡’도서관은 김성곤의 호를 따서 도서관 이름을 지었다.
대구고보에서 7년 동안 교사로 일한 이규동은 건강 문제로 1937년 학교를 그만뒀다. 원암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집에서 요양하기 시작했다. 수년 동안 요양하던 그는 1942년 1월 30일 대륜학교(지금의 대륜중고등학교)에 강사로 부임해서 교유가 되었다.
대륜학교는 1905년 대구에서 문을 연 도서관 ‘우현서루'(友弦書樓)의 명맥을 이은 학교다. 소남(小南) 이일우(李一雨)가 문을 연 ‘우현서루’는 1911년 일제의 압박으로 문을 닫았다. 우현서루 건물에서 문을 연 학교가 ‘교남학교'(嶠南學校)다. 교남학교는 1941년 친일파 서병조에게 인수되면서 ‘대륜학교'(大倫學校)로 이름을 바꿨다.
대륜학교에 몸담은 이규동은 1942년 <성서조선>의 독자라는 이유로 경상북도 경찰부 고등계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성서조선>은 무교회주의를 지향한 김교신(金敎臣)과 함석헌(咸錫憲)이 주도한 잡지다. 이규동이 경찰에 연행된 이 해에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해방 후인 1945년 11월 13일 이규동은 대륜중학교 5대 교장으로 취임해서 1947년까지 일했다. 그가 대륜을 떠날 즈음인 1947년 8월 체육교사 한 명이 부임했다. 이규동이 경북여자중학교 교장으로 옮긴 것이 1947년 9월 10일이니까, 체육교사와 함께 근무한 기간은 한 달 남짓이다. 훗날, 이 체육교사는 한국을 뒤흔든 10.26의 주역이 된다. 그의 이름은 김재규(金載圭)다. 32년 후 ‘남산의 부장’ 김재규는 박정희를 쏘고 유신 체제를 무너뜨린다.
대륜 시절 이규동의 제자 중에 조용수(趙鏞壽)와 이만섭(李萬燮)이 있다. <민족일보> 사장이었던 조용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이만섭은 국회의장이 되었다. 김재규와 10.26 거사를 함께 한 박선호 역시 대륜 출신이다.
대구사범에서 경북대학교 교수로

이규동이 대륜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교장으로 일했던 사람이 이효상(李孝祥)이다. 대륜학교 교장과 경상북도 학무국장, 경북대학교 초대 문리대학장을 역임한 이효상은 정계에 진출해서 국회의장 자리까지 올랐다. 1969년 3선 개헌안 통과 때 국회의장을 했던 이가 바로 이효상이다.
1971년 대선 때 이효상은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 도토리 신세가 된다”라고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발언을 남겼다. 원암은 이효상처럼 교육행정가와 정치인으로 출세가도(?)를 달리진 않았으나 교육자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1950년 1월 25일 이규동은 국립 대구사범대학의 영문과 교수가 되었다. 교수 임명과 함께 도서관장도 겸직했다. 대구사범학교 졸업생 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은 바로 박정희다. 이규동은 대구사범에 적을 뒀다는 것 말고도 박정희와 약간의 인연이 있다. 그의 아들 이기영은 대구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박정희 부대에서 군의관으로 일했다. 군의관 시절 이기영은 박정희 가족의 진료를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5월 28일, 대구사범대학과 대구의과대학, 대구농과대학을 합쳐 ‘국립 경북대학교’가 출범했다. 이규동은 고병간(高秉幹) 초대 총장이 경북대 캠퍼스 부지를 물색할 때 지금의 산격동 부지를 강력히 추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대구 변두리 중의 변두리로 꼽힌 산격동에 경북대가 널찍하게 자리 잡는데 ‘산파’ 역할을 한 셈이다. 경북대학교 교수가 된 이규동은 1952년 중학교 영어 교과서인 를 출간했다. 1957년에는 대학 영어 음성학 교재인 를 집필해서 발간했다.
한국전쟁 시절 이규동은 대구로 피난 온 고려대학교에도 강의를 나갔다. 그가 가르친 고려대 학생 중 한 명이 이규동이 쓴 교과서의 자습서를 만들어 보겠다고 나섰다. 이규동은 흔쾌히 허락하며 계몽사에 전화를 넣어주기도 했다. 훗날 이 학생은 영어 교재 출판사를 크게 키웠다. 그 학생의 이름은 민영빈(閔泳斌)이며,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출판사 이름이 YBM이다.
– 2편 대한민국 ‘사서 1호’는 바로 이 사람입니다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2021-05-1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나라 망한 을사년에 태어난 도서관계의 별들
5.18민주광장에 ‘예술법정’ 개막 ….친일독재자.5.18가해자.망언자들 전시
‘법이 하지 못한 심판. 붓으로 심판하다’…민미협. 민문연 광주지부 주최
비엔날레 출품작 ‘일제를 빛낸사람들’ 좌우에 전두환 등 5.18학살자 추가







지난 9일 폐막한 제13회 광주비엔날레 본전시에 출품돼 국내외 문화예술계와 언론 등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던 이상호 화백의 ‘일제를 빛낸 사람들’이 5.18민주광장에서 시민들을 만나고 있다.
제41주년 5.18민중항쟁행사위원회와 광주민미협(회장 박태규),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지부장 김순흥)는 지난 16일 오후 5.18민주광장 민주의종 앞에 ‘문화예술법정’이라는 이름으로 이상호 화백의 ‘일제를 빛낸 사람들’ 작품 좌우에 전두환 노태우 등 5.18학살주범 등 친일독재자와 5.18가해자 망언자들의 얼굴을 풍자한 기존 작품을 덧붙인 작품을 전시 중이다.
‘법이 하지 못한 심판, 붓으로 심판하다’라는 주제로 개막한 이번 제41주년 5.18민중항쟁 문화예술법정 작품은 악질 친일파 92명을 수갑과 포승줄로 묶은 ‘일제를 빛낸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방 이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하고 군사독재로 이어진 굴곡진 역사를 그림으로 단죄한 작품이다.
전시 중인 작품은 ‘일제를 빛낸 사람들’ 좌우에는 친일파를 계승하여 1980년 5월 당시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 노태우 등 친일독재자이자 5.18학살주범들, 그리고 5.18정신을 노골적으로 왜곡하고 폄훼한 대표적인 정치인 등을 배치했다.
이번 전시작품은 이상호 화백의 그림원본을 천에 인쇄한 복사본이다. 특히 ‘일제를 빛낸 사람들’은 이번 5.18 전시를 마치고 민족문제연구소 부설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영구 기증되어 전시될 예정이다.
이상현 기자
<2021-05-17> 광주인

가정의 달 5월에 가장 흔하게 듣게 되는 노래가 있다.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누구나 귀에 익을 정겹고 뭉클한 선율의 이 노래의 제목은 “어머니의 마음”인데, 현제명 서울대 음대 초대학장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친일반역행위를 일삼았던 이흥렬 숙명여대 음대학장이 작곡한 노래다.
일제강점기에 음악인들이 어떻게 친일반민족행위를 했을까? 음악인들은 조선음악협회, 경성후생실내악단, 대화악단 등 친일활동을 위한 음악인단체를 조직하여 일본국민가요를 조선에 보급하여 일제의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 정책을 도왔고, 각종 음악회를 개최하여 모금한 수익금을 일제의 전쟁군자금으로 헌납하였으며, 전쟁물자 생산을 위한 공장, 광산 등을 돌며 위문음악공연을 함으로써 생산을 독려하였을 뿐 아니라, 널리 이름이 알려진 자들은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국민과 학생들에게 징용 및 학병 지원을 독려하였고, 구로야 샤이민(현제명), 나오키 오키이찌오(이흥렬), 모리카와 준(홍난파) 등 일제의 창씨개명에 앞장서는 등 일제의 식민통치정책에 협력하였다.
위와 같은 각종 친일반민족행각을 가장 적극적 주도적으로 자행했던 음악계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현재명과 이흥렬인데, 이들은 해방 후에는 자신들의 미국 유학경력 등을 최대한 이용해서 친미반공으로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변신해서 서울대 음대학장, 숙대 음대학장, 예술원 종신회원, 대통령 문화훈장 등 음악계의 행정가, 교육자, 원로, 실력자로서 죽을 때까지 권위와 명예를 누렸고, 현재 음악계는 이들이 배출한 제자나 후진들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어떠한 비판도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현제명과 이흥렬은 2001년부터 8년 동안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선정한 일제 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 4389명에 포함되어 2009년 11월 8일에 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고, 특히 현제명은 2009년 정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705명에 포함되었음에도 이들의 후진들이 국내 문화예술계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명성에 별다른 영향이 없다고 하는데, 그 예로 현재 서울대 음대건물에는 현제명의 흉상이 있다.
이들은 이처럼 해방 후 감쪽같이 변신하여 음악계 명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수많은 학교, 기관으로부터 교가 등을 작곡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모양인데, 그 결과 전국 138개 학교들의 교가가 이흥렬 작곡이고, 14개 학교 교가가 현제명 작곡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학인 서울대학교의 교가부터가 현제명 작곡인데 그가 2009년 정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705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발표된 지 1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서울대에서는 이를 바꾸자는 목소리조차 없다.
참고로, 위와 같이 친일 음악인이 작곡한 교가를 갖고 있는 대학들은 서울대 외에도 경북대, 성균관대, 국민대, 경희대, 홍익대, 동국대, 한국외대, 단국대, 인하대, 숭실대 등 전국 29개 학교에 이른다는 언론보도(YTN)가 있다.
심지어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이라면 수도 없이 불러봤을 군가 “진짜 사나이”도 위 대표적 친일파 이흥렬의 작곡이다. 이흥렬은 “진짜 사나이”를 작곡하면서 부끄럽지 않았을까?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라는 가사의 군가를 작곡하면서 말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파시즘 세력으로부터 식민지 또는 점령지에서 해방된 민족ㆍ국가들은 새나라를 재건하는 작업을“민족을 배반하고 국민을 학대한 자들”을 처단하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이들을 처벌하기 위하여 특별법을 제정하고 재판소 등 처벌기관을 설치한 나라는 22개국이고 이와 관련하여 제정한 법률은 총 63개에 이르는데, 아시아에서는 한국ㆍ중국ㆍ일본ㆍ북한ㆍ필리핀 등 5개국이고, 유럽은 독일ㆍ프랑스ㆍ오스트리아ㆍ네덜란드ㆍ벨기에ㆍ덴마크ㆍ루마니아ㆍ불가리아ㆍ노르웨이ㆍ그리스ㆍ이탈리아ㆍ폴란드ㆍ체코슬로바키아ㆍ헝가리ㆍ유고슬라비아ㆍ에스토니아ㆍ소련 등 17개 국가다.
위와 같은 반역자 처벌의 정신은 벨기에 정부가 1944년 5월 6일 공포한 <전시에 국가의 국외 안보에 반해 저지른 범죄로 인해 국적과 일정한 권리를 박탈하고 정지하는 사안에 관한 명령>에 잘 표현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조국을 배신한 자는 그가 절대로 다시 해를 끼치기 불가능하도록 완전히 그리고 신속히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나라도 1948년 제헌국회에서 친일반역자들을 단죄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고, 반민법을 집행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까지 구성하였으나, 1949년 6월 친일파 세력의 반격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친일반역자 단죄는 실패하였고 단 한 명의 반역자도 처벌하지 못한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올해는 반민특위가 와해되어 친일반역세력의 단죄에서 실패한 지 72년이 되는 해다. 이미 일제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조국을 배반하고 동족을 해친 친일반역자들 중 생존한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반역자들에 대한 단죄는 미완의 역사로 묻어두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이 어떤 반민족행위를 했는지는 분명하게 기억함으로써 그런 자들이 죽은 후까지 명예를 누리는 일만은 없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오늘날 가능한 최소한의 과거사 청산이 아닐까 싶다.
정철승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사법학과 ▷법무법인 THE FIRM 대표변호사 ▷광복회 고문변호사 ▷한국입법학회 회장
<2021-05-17> 아주경제
☞기사원문: [정철승 칼럼] 음악계의 친일반역자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20편 : 영웅추도가 _ 김성태(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 18편 : 대한혼가 _ 김재홍 함경북도지사(규암 김약연 선생 증손자)
☞ 17편 : 희망가 _ 김수옥(우사 김규식 선생 손녀)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우원식 국회의원(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 _ 김주(심산 김창숙 손녀)
☞ 10편 : 광복군아리랑 _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 9편 : 앞으로행진곡 _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 7편 : 신흥학우단가 _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우당 이회영 손자)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 _ 정남기(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 _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자)
☞ 1편 : 국치추념가 _ 이준식 독립기념관장(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
용산은 일제강점기 시작과 끝을 함께하며 식민지배 역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용산에는 통감부 청사가 자리 잡았고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대륙 침략 전초기지로 이용하기 위해 100만 평에 달하는 군사철도기지를 조성했다. 해방 이후 용산에는 독립운동 선열 묘역이 들어섰다. 1946년 7월 김구 선생은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삼의사 유해를 효창공원에 모셨다. 2년 뒤엔 임시정부 요인(이동녕 주석, 조성환 군무부장, 차리석 비서장)들이, 다음해 7월엔 김구 선생이 이곳에 묻혔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효창공원과 맞닿은 청파동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청파로47다길 27)이 있다. 서울에는 수많은 박물관이 있지만 이곳은 조금 더 특별하다. 일제강점기를 전문으로 다룬 최초의 역사박물관이기 때문이다.
박물관은 2018년 8월29일 문을 열었다. 경술국치(1910년 8월29일) 108주기에 맞춰 날을 정했다. 역사박물관 건립은 민간에서 추진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독립운동 학계, 시민단체 등이 중심이 됐다. 독립운동가 후손과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도 박물관 건립에 참여해 그 의미를 더했다. 미국, 중국, 일본 등 해외에서도 건립 기금 모금에 참여했다.
박물관에는 운요호 사건(1875년)부터 해방(1945년)에 이르기까지 70년에 걸친 일제 침탈과정, 그에 부역한 친일파의 죄상, 치열했던 항일 투쟁 과정을 상세히 전시했다. 현재 박물관에는 1만여 점에 이르는 물품이 전시돼 있다. 독립운동가 후손, 피해자 유족을 비롯한 시민들이 상당수의 전시자료를 기증했다.
박물관 1층에는 기획전시실·뮤지엄숍, 2층에는 일제강점기 전시 체험공간이 있다. 3층과 4층은 연구와 자료 보존공간이다. 현재 1층에서는 기념전 ‘일제 부역 언론의 민낯’이 열리고 있다. 일제가 발행을 허가한 1920년부터 1940년 폐간되기까지 20여년간에 걸친 두 신문(조선·동아일보)의 일제 협력 행위를 고발한다.
2층에는 상설전시장이 있다. △일제는 왜 한반도를 침략했을까 △일제의 침략전쟁,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한 시대의 다른 삶(친일과 항일) △과거를 이겨내는 힘,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등 4부로 나눠 전시공간을 꾸몄다. 일제 식민지배의 문제점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거사 청산 운동 과정을 실물자료 중심으로 보여준다.
강제병합 당시 순종의 칙유와 데라우치 통감의 유고, 삼일독립선언서 초판본, 을사오적 등 친일파의 훈장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차리석 선생, 문화부장을 지낸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유품까지 희귀한 자료를 모았다.
박물관 운영시간은 매주 화~일요일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6시까지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입장 인원을 제한(25명 이하)하고 있으며 박물관 누리집에서 사전 예약한 뒤 방문하면 된다. 별도 공지 때까지 입장료는 무료다.
에스파냐 출신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 나는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근현대사는 아픔이다. 하지만 잊지 않고 간직해 또다시 반복되는 일이 없도록 기억해야 할 역사이기도 하다.
현재 용산구에는 등록 박물관 9곳(서울 전체 128곳)이 있다. 또 옛 용산철도병원(한강대로14길 35-29) 건물을 보수해 일제강점기, 미군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용산의 모습을 다룬 ‘용산역사박물관’을 내년 상반기에 개관할 예정이다.
최영철 용산구 홍보담당관 주무관, 사진 용산구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2021-05-20> 서울앤
☞기사원문: 식민지배가 후세에 끼친 영향 보는 곳
김동우 작가 사진 52점 전시 해외 독립운동가 후손, 독립운동 사적지 담겨…온라인 또는 전화로 사전 예약 후 관람 가능
[아시아경제 박종일 기자] 강북구(구청장 박겸수)가 8월18일까지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특별사진전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를 개최한다.
근현대사기념관 주관으로 열리는 이번 사진전은 쿠바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마련됐으며 김동우 작가가 촬영한 52점의 사진이 준비됐다.
김 작가는 오랜 기간에 걸쳐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인터뷰해 왔다.
독립운동가들은 먼 타국의 땅에서 굶주림, 차별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한인교회, 한글학교 등을 세워 정체성을 유지하고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서도 자금 모집 등 활동을 해 왔다.
전시회에서는 쿠바 마나티 항구와 멕시코의 애니깽 농장 등 한인 이주 역사의 상징적인 장소와 3·1운동 2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던 미국의 타운홀,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의 인도 레드포트 훈련지, 네덜란드 헤이그의 이준 열사의 묘적지 등 여러 나라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살펴 볼 수 있다. 쿠바와 멕시코,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작품 속에서 만날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전시는 사전 예약제로 운영된다.
관람 희망자는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를 통해 온라인으로 예약하거나 전화신청 후 이용할 수 있다. 비용은 무료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이번 전시회가 세계 곳곳에서 광복을 위한 눈물겨운 노력을 했던 숨은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내고 기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관심 있는 시민 여러분의 많은 관람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2021-05-21> 아시아경제
이승만 정권 당시엔 부정적이었던 ‘친일파 처벌’
2004년 특별법 통과로 반민족행위 규명 재추진
1천5명 친일행위자 공개·토지 2천359필지 환수
경기도 친일 잔재 청산은 어디까지?
■ 친일 잔재란
우리 역사는 1910년 8월29일부터 1945년 8월15일까지 암울한 시기를 보냈다. 이른바 ‘일제강점기’라고 한다. 해방 직후에는 ‘왜정시대’라고 불렀으며 한때는 ‘일제 식민지’라고 했다. 일제강점기는 독립운동과 친일 행위라는 길항 관계로 한 시기를 겪었다. 해방 이후 우리 사회는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친일의 사전적 의미는 ‘일제강점기 일제와 야합해 그들의 침략과 약탈 정책을 지지하거나 옹호해 추종함’이라고 한다. 단순하게 정의하면 ‘일본에 관심을 가지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에게는 그렇게만 인식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 우리 사회는 역사와 문화, 제도 등 많은 분야에서 왜곡되고 뒤틀렸다. 이른바 ‘동화(同化)’라는 식민정책으로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내세우면서 일본식 이름을 쓰도록 강요했고, 학교에서는 우리 말과 글인 한글 사용을 금지하면서 한국인의 민족정신과 역사,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그러다 보니 비본질이 본질을 구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강점기 우리 사회는 부정적인 잔재들이 남아 있다. 이를 ‘친일 잔재’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정리하면 친일 잔재는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략과 강점기 식민지배 과정에서 남겨진 유무형의 부정적 유산이다.
그렇다면 친일 잔재의 범주는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간략하게 구분하면 인적 잔재와 물적 잔재, 그리고 유형 잔재와 무형 잔재로 나눌 수 있다. 인적 잔재는 이른바 반민족행위를 한 친일파를 일컬으며, 물적 잔재는 친일 행위를 통해 형성된 재산이다. 유형 잔재는 강점기 식민통치 기간 조성된 시설물이고 무형 잔재는 식민정책에 의해 왜곡된 역사와 문화이다.
■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노력
해방 이후 우리 사회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일차적으로 일제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물들을 찾아 사회적으로 축출하고 식민잔재의 상징인 신사 등을 철폐했다. 친일 잔재 청산이 제도적으로 본격화된 것은 제헌국회가 친일파를 처벌할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헌법에 둔 이후였다. 이를 근거로 1948년 9월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공포됐으며, 10월22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조직돼 친일파 처벌을 시작했다. 그러나 친일파 처벌에 부정적이었던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비난하고 무력화시켰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자 한 친일파 청산은 무위로 끝났다.
이후 한동안 좌절됐던 친일 잔재 청산은 2004년 3월22일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다시 추진됐다. 특별법은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반세기가 넘도록 당시 일본제국주의에 부역한 자들이 저지른 반민족행위에 관한 진상을 밝히려는 노력이나 실질적인 조사가 미비했던 관계로 그동안 우리 사회의 정의가 흐려지고 왜곡된 역사가 시정되지 아니하는 등 많은 폐해가 존재하고 있으므로 이제라도 친일반민족행위에 관한 진상을 정부 차원에서 규명하기 위해 특별법을 마련하고, 이에 따라 반민족행위의 진상을 조사한 후 그 결과를 사료로 남겨둠으로써 왜곡된 역사와 민족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고 이를 후세의 교훈으로 삼으려 한다”고 제안 이유를 밝혔다.
이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됐고, 그 결과 1천5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을 공개했다. 이어 2005년 12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제정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의 활동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토지 2천359필지를 환수했다.
민간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를 구성해 2009년 6월 4천776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수록한 ‘친일인명사’을 발행했다. 이외에도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시민 활동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 3·1운동 100년과 경기도 친일 잔재 청산 추진
1919년 3·1운동 100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으면서 친일 잔재 청산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경기도를 비롯한 충남과 광주 등 광역단체와 부천과 장흥 등 지자체, 경남 교육청 등 교육기관에서 친일 잔재 청산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지자체들은 이른바 ‘친일 잔재 청산 조례’를 제정해 일상에서 느끼는 잔재들을 청산해 나가고 있다.
경기도의회는 2019년 10월 친일잔재청산 특별위원회 구성 결의안을 발의했다.
결의안에 의하면 “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나고 그 결실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기념비적인 해를 맞이했지만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사라지지 않은 친일 잔재가 있다”고 전제하고 “일본에 대해 무조건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습관을 버리고, 이성적 사유에 입각한 미래지향적 대응을 해야 하며 그 첫 번째가 친일 잔재의 청산이다. 말과 글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삶 깊숙이 침탈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을 말살하려 했던 일제의 만행을 온전히 파헤쳐 완벽히 청산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의미를 밝히고 있다.
이를 계기로 경기도 내 일본식 지명 및 명칭의 변경, 친일파가 만든 교가나 일제를 상징하는 조형물의 철거 등 도내 숨어 있는 친일 잔재 청산이 본격화됐다.
■ 경기도 친일 잔재 청산은 어디까지 왔나
앞서 언급했듯이, 경기도는 3·1운동 100년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을 맞아 친일 잔재 청산을 적극 추진했다. 우선 경기도 내 친일 목적으로 제작된 유무형의 문화 잔재를 전수조사하기 위한 ‘경기도 친일 문화 잔재 조사 연구’라는 학술용역을 발주했다. 경기도 교육청도 새로운 학교문화를 조성하기 위하여 관내 학교를 대상으로 학교생활 속 일제 잔재를 발굴하기 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경기도가 친일 문화 잔재 조사 연구 용역을 추진하게 된 배경은 경기도 12개 시ㆍ군 행사 때마다 친일파가 작곡 또는 작사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지적에서였다. 이에 따라 경기도 문화예술 분야 친일 잔재 조사 및 청산 등 관리 필요성이 제기됐다. 일제 잔재 청산 학술 용역은 1905년부터 1945년 8월까지 경기도에서 향유 되는 친일 목적으로 제작된 유무형의 문화적 유산을 문헌조사와 현장답사,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시행됐다. 다만 그 결과를 비공개로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쉽다.
경기도교육청은 학교생활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 청산에 대한 인식을 분석ㆍ공유해 올바른 역사의식 및 정체성 확립, 민주적 학교문화 조성을 목적으로 ‘학교생활 속 일제 잔재 청산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학교생활 속 일제 잔재 청산에 대한 인식 분석 결과, 일제 잔재를 ‘일제강점기에 식민 지배와 수탈을 목적으로 우리 민족의 의사와 무관하게 유입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우리 민족의 삶과 문화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유형ㆍ무형의 모든 것’으로 다수가 인식하고 있었다.
학교생활 속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는 우리 민족 정체성을 말살하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확산하기 위한 방법으로 한글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를 국어로 사용하도록 강요하면서 다수 존재했음을 확인한 바 있다. 대표적인 잔재로는 반장, 부반장, 훈화, 간담회, 결석계, 사정회, 수학여행, 구령대 등 용어와 이흥렬, 현제명, 김동진 등 친일 작곡가가 만든 교가, 일본을 상징하는 교목과 교표 등이 확인되었다. 김포 대명초등학교와 화성 정남초등학교의 교표는 욱일기를 연상하게 하는데 공모전을 통해 교표를 새로 선정했다. 친일파가 작곡 또는 작사한 교가는 89개 학교가 확인됐다.
■ 지속되는 일제 잔재 청산과 과제
경기도는 3·1운동 100년을 계기로 시작된 일제 잔재 청산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추진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경기도의회 친일잔재청산 특별위원회는 지난달 29일 결과 보고서를 채택하고 1년6개월의 활동을 마무리했다.
경기도의회는 “특별위원회의 활동은 도민과 함께 실천 운동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하고, 앞으로도 일상생활 속에서 도민과의 소통을 강화하며 역사정의를 실천하는 다양한 활동이 추진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 후속 조치로 경기도의회는 일제 잔재 청산에 관한 조례를 지난달 29일 제351회 임시회 제4차 본회의에서 가결했다. 조례는 일본제국주의가 국권을 침탈한 후 경기도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를 조사해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청산함으로써 사회정의 구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주요 내용으로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추진 계획과 사업, 예산 지원과 추진 부서, 일제잔재청산위원회 설치 및 운영, 협력체계 구축 등을 담고 있다.
올해 3·1절 기념사에서 친일 잔재 청산은 너무나 오래 미뤄둔 숙제라고 지적한 바 있다. 더 이상 친일 잔재 청산을 미룰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친일 잔재 청산은 도민, 시민과 소통돼야 한다는 점이다. 그동안 친일 잔재 청산은 대부분 관(官) 주도로 이뤄졌다. 물론 민간단체, 시민단체에서 꾸준히 진행됐지만 시민들과는 괴리가 없지 않았다. 우리 일상에 남겨진 일제 잔재 문화를 스스로 찾고 청산하는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일제 잔재어부터 청산해 보자.

성주현 1923 제노사이드연구소 부소장
<2021-05-23> 경기일보
☞기사원문: [광복 76주년, 우리가 몰랐던 친일 잔재 알리기] ‘일제 잔재 청산’ 조례 만들어… 76년 민족의 치부 털어낸다
진주 옥봉고분군 관심 고조… ‘가야고분 유네스코 등재 추진’ ‘경남도의회 결의안” 계기


“경상남도 기념물 제1호를 아시나요. 그곳에서 나온 유물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진주 옥봉고분군’이고, ‘일본 동경대학 박물관에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청과 경남·경북·전북도가 가야시대 고분군(7개)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하고, 경남도의회에서 ‘국외 소재 문화재 환수 촉구’를 결의한 가운데, ‘경남 기념물 제1호 진주옥봉고분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 대상은 김해 대성동, 함안 말이산, 창녕 교동·송현동, 고성 송학동, 합천 옥전, 전북 남원 유곡·두락리,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이다. 진주 옥봉은 들어 있지 않다.
가야 고분군 등재’를 위한 신청서는 올해 1월 유네스코에 최종 제출됐고, 3월 ‘완성도 검사’를 통과했으며, 202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최종 결정된다.
경남도의회는 지난 20일 열린 임시회에서 ‘국외 소재 경남 문화재 환수 촉구 결의안’을 채택했다. 일제강점기 등에 반출돼 국외에 소재하는 문화재는 22개국 20만 4693점에 이르고, 일본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경남지역에서 나온 문화재 가운데 국외 소재는 680여 점이다.
결의안은 “유네스코를 비롯한 관련 국제기구와의 논의 등을 통해 국외소재문화재 실태파악과 문화재 환수에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나가고, 국외소재문화재 환수를 위해 지원할 수 있는 특단의 방안을 강구할 것을 정부에 촉구한다”고 되어 있다.
결의안을 대표 발의했던 표병호 의원은 “불행했던 과거사를 치유하고 인류문화 복원을 위해서 우리 문화재를 제자리에 되돌려놓는 시대적 소명을 실천할 때이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경남 기념물 제1호’부터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석영철 진보당 경남도당 지방자치위원장은 “역사를 잊고 헛된 꿈을 쫓지 마라고 했다. 가야사 공부를 하면서 섬뜩섬뜩 놀랄 때가 있다”며 “가야 고분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좋지만, 일제가 약탈해 간 ‘경남 기념물 1호’에서 나온 유물부터 찾아오는 게 더 시급하다”고 했다.
강호광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장은 “몇 해 전 일본에 갔을 때 동경대 박물관을 찾아간 적이 있었고, 진주 옥봉고분군 유물은 전시되어 있지 않았으며, 수장고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고 전했다.


도굴에 가까운 발굴… 1974년 기념물 지정
진주 옥봉고분군은 가야국 지배세력의 무덤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진주 옥봉과 수정봉에 걸쳐 있다. 옥봉·수정봉 정상부와 능선을 따라 모두 7기의 큰 무덤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3기 무덤만 남아 있고 그 중에 옥봉에 있는 1기가 ‘경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돼 있다. 기념물 지정은 1974년 2월 16일.
도시화로 옥봉·수정봉 정상부까지 집들이 들어서 있다. 나머지 고분 가운데 일부는 주택 마당에 있기도 한다.
7기 가운데, 수정봉 2·3호와 옥봉 7호가 일제강점기 때 발굴 조사됐다. 일본인 학자(세키노타다시)가 1910년에 그야말로 도굴에 가까운 발굴조사를 했던 것이다.
당시 조사 내용은 <조선고적도보>에 실려 있고, 간단한 실측도와 함께 유적, 유물의 사진과 간략한 설명이 담겨 있다.
당시 이곳에서는 ‘철제 말갖춤’과 각종 토기류, 가락바퀴, 구슬, 철칼, 도끼, 재갈 등이 나왔다. 3기 가운데 2호분과 7호분의 출토 유물이 동경대에 있는 것이다.
이 무덤은 전형적인 가야의 돌방(석실) 무덤으로, 6세기 전반에 만들어졌다. 학계에서는 이곳이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야문화의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곳으로 평가하고 있다.
일본에 있는 옥봉고분군의 유물의 반환을 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오래 전 진주에서 나오기도 했다. 1994년 진주시의회에서는 의원들이 몇 차례 질의하면서 제안했던 것이다.
당시 진주시의원들은 옥봉·수정봉 고분군의 ‘석실 복원’ 등을 제기하기도 했고, 일본에 문화재 반환을 요구해야 한다고 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포함은?
현재 진주 옥봉고분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대상 포함과 일본에 있는 유물 반환 추진이 가능할까.
경남도 관계자는 “출토 문화재는 현재 동경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것으로 안다”며 “문화재 반환은 외교적 문제가 지자체 차원에서 나서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민간 영역에서 환수운동을 하면 지자체가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관련 조례가 있어, 민간 영역에서 구체적인 운동이 일어나면 내년에 지원 계획을 세워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대상 포함에 대해, 경남도 관계자는 “현재 진주 옥봉고분군은 포함돼 있지 않다. 등재 대상은 2012년~2013년부터 진행해서 여러 학술 연구조사가 이루어져 진행되고 있으며, 옥봉고분군을 끼워 넣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고 했다.
경남도 김수한 학예사는 “2019년 경남도에서 지원해 ‘비지정 가야 문화재 연구사업’ 했을 때 옥봉고분군은 정밀 지표 조사를 했고, 당시 7기 무덤의 위치를 확인했다”며 “고분 보존 정비를 위해서는 향후 더 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인근 민가로 인해 전체 고분군이 훼손됐다. 민가가 없는 구역은 문화재 지정을 할 필요가 있다”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분 성격 규명과 가치를 알리기 위한 연구조사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고분 명칭과 관련해 그는 “도 기념물 제1호는 ‘진주 옥봉고분군’으로만 되어 있다. 수정봉과 함께 명칭을 사용해 ‘진주 옥봉·수정봉고분군’으로 명칭을 변경해야 한다”고 말했다.


<2021-05-25> 오마이뉴스
[앵커]
부천 향토문화재 후보군인
역곡의 한 고택을 두고
지역 사회에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옛 소유주의
과거 친일 행적이 드러난데 이어
재개발 현안에 따른
보존 여부도 고민입니다.
이정하 기자가 보도합니다.
높은 돌담에 기와집 처마선.
부천 역곡동에 위치한
죽산 박씨 고택입니다.
1800년 대에 지어져
지금까지 잘 보존된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가옥입니다.
이 집은 다음 달
부천시 향토문화재 심의를 앞두고 있는데,
과거 이곳에 살았던
박제봉의 친일 행적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박 씨는
일제 강점기 교육기관,
경학원의 책임자인 사성을 지낸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또, 조선총독부에
당시 서울 시내 집 한채 상당의 금액을
헌납한 기록이 발견된
대표적 친일파입니다.
지역 민간단체는
크게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보존 가치에 따라
문화재로 지정되더라도
과거 친일 행적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인터뷰: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장]
“이것이 일제 잔재니까 일제 잔재에 대한 내용을 꼭 넣어달라는 건데요. 표지석 하나 세워서 친일파 박제봉에 대한 행적을 기록한 단죄비를 넣어달라는 겁니다. 암울하고 어두웠던 역사도 기억해야 한다는 거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고택을 포함해
역곡 지역 일대 71만 제곱미터 부지는
공공 주택 개발이 예정된 지역.
이 때문에 고택이 아예 철거될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이곳은 백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고택이지만
보존 방안을 비롯해
고택을 향한 시선들은
다양하게 엇갈리고 있습니다.
점점 사라져 가는 옛 것을
지켜야 한다는 뜻과
[현장음: 지역 주민(음성변조)]
“보존했으면 좋겠는데요. 역곡지구 계획이 잡혀있잖아요. 제가 알기로는 녹지가 제한돼 있고, 이쪽이나 대장동 쪽 유일하게 남아 있는데 다 사라진다는 것 자체가 아쉽죠.”
[현장음: 지역 주민(음성변조)]
“보존은 하는데 개방해서 주민들이 볼 수 있도록 해야죠. 지금은 개인 살림집이니까 어떻게 생겼는지 왜 보존해야 하는지 모르죠.”
지역 재개발에 탄력이 붙으려면
철거는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현장음: 역곡 재개발 보상 관계자(음성변조)]
“(유리한 보상을 위해서는) 자리를 확보해야 하는데 면적이 정해져 있어요. 그 부지만큼 떨어져 나가는 거죠. 그만큼 혜택을 못 받는다는 거죠. 탄원서, 서명서 이런 식으로 해서 주민들한테 다 받고 다녔어요. 써준 사람 없어요.”
친일 논란과 함께
근대 유산 보존, 지역민 개발 이익까지
다양한 여론이 잇따르고 있는 겁니다.
심의를 거쳐
이르면 다음달 이후에는
결과가 나올 예정입니다.
[인터뷰: 부천시 관계자]
“문화재의 가치가 있으면 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거죠. 6월 중에 위원회 구성해서 조사를 하고, 심의한 다음에 7월 초에 결과 공포할 예정입니다.”
역곡동 고택은
이미 지난해 11월 경기도 지정문화재
심의에 올랐지만 탈락한 가운데,
이번에는 부천 향토문화재
등재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헬로티비 뉴스 이정하입니다. (끝)
#촬영기자: 김지현
<2021-05-26> LG헬로비전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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