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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지구적 재앙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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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지구적 재앙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admin | 목, 2021/08/19- 19:20

기후변화로 인한 기상이변, 농업생산성 저하 및 미래의 전염병과 같은 잠재적인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시스템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황이 느리게 악화된다고 잘못 인식하면서 위협에 함께 대처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CAMBRIDGE – 자신의 애상적(경고적) 회고록인 ‘어제의 세계’에서 나치로부터 망명한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에 심각한 변화의 가능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관찰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오랫동안 서서히 악화되면서 이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에 쉽게 반응하지 않습니다만, 곧바로 재앙이 닥치면 행동하기에는 너무 늦습니다.

우리시대에도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을 해결하기에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랍니다. 불행히도, 천천히 끓는 개구리처럼 우리 대부분이 변화를 점진적으로 인식하면서, 시급하게 조정되고 결정적인 조치를 충분하게 취하기 어렵게 합니다. 따라서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다는 전제에서, 우리가 직면할 수 있는 재앙들을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기상이변은 한 가지 분명한 유형의 재앙입니다. 이것들은 지구라는 행성에 인간이 거주할 수 없는 면적을 확대하고, 결국 거주가 가능한 지역의 인구밀도를 높여갈 것이며 이를 피하기 위한 대규모 인구이동을 방지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사람들 대부분은 기후피해자들이 일단 자신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문명권과 멀리 떨어져 있는 태평양의 작은 투발루 섬이 종종 최초의 희생지역 중 하나로 묘사되고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최근 기상이변으로 플로리다 , 중국 황하계곡 의 도시, 시애틀 및 뉴델리와 같이 전세계적으로 문화의 중심지에 가까운 지역에서 홍수를 일으키거나 인간이 살기에 너무 뜨거워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각국정부와 국제기구는 수백만 명의 미래기후난민의 전망에 대비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유엔에 따르면 2019년 말 전세계적으로 7,950만 명의 실향이주민이 발생하였으며 이는 기후조건으로 인한 역사상 가장 많은 이주민의 수치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대규모 강제이주가 일어난 이후 어느 때보다도 많은 수치입니다. 계속되는 지구온난화는 상기의 수치가 증가할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더욱 위험한 것은, 생물다양성의 손실 및 토양황폐화 와 결합된 기후이변이 농업생산성의 하락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구가 79억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한 녹색혁명 의 많은 이점을 감퇴시킬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농지개혁, 식단변경,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과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를 포괄하는 작물의 유전자변형을 넘어 새로운 녹색혁명이 필요합니다. 현재의 집약적이고 산업화된 농업관행을 신속하고 대규모로 바꾸지 못하면 농작물의 실패와 굶주림이 증가할 것입니다. 영국과 같은 순수 식품 수입국의 경우, 전후에 우리가 익숙해져 왔던 풍요로움이 과거의 일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슈퍼마켓 진열대가 여전히 가득 차 있을 때, 사람들은 시스템 변화의 필요성에 대하여 심각하게 받아들일까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거대한 침입과 관련된 또다른 유형의 재난은 동물숙주에서 인간으로 전이되는 인수공통 전염병의 빈도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최근 COVID-19 대유행은 이러한 메시지를 전세계에 심각하게 알렸습니다. 에볼라, SARS 및 MERS는 사전적인 경고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러한 보건건강의 위기가 자주 반복될 것입니다. 전염병이 제대로 통제되었던 것처럼 보였던 인류역사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유사하게, 항균제 내성의 확산은 일부 오래된 감염전쟁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몇 년 안에 훨씬 더 치명적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등장한다면 과연 인류는 지난 18개월 동안 우리 모두가 경험한 것과 같은 또다른 격변에 대비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종류의 사건은 민주주의든 권위주의적 정권이든 기존 정치시스템에 엄청난 압력을 가할 것입니다. 오늘날, 팡글로스주의적(지극히 낙관적인) 관찰자만이 20세기후반을 특징짓는 자유민주주의 경향으로의 손쉬운 복귀를 예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더욱 많은 비상사태에 대처해야 하는 필요성으로 인하여 서구사회를 더욱 권위주의적(국가중심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협력적 다자주의에서 지정학적 충돌로 후퇴가 가속화되면서 글로벌 문제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악순환을 촉발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는 이러한 우울한 생각은 단순히 여름휴가가 필요하다는 신호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언급한 작가 츠바이크의 경고를 염두에 두고 ‘만약에’ 를 고려하는 것은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 입니다. 지금 당장 사소한 행동이 아닌 거대한 변화의 행동이 필요한 때라면?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9월의 유엔 식품시스템 정상회담과 11월 글래스고의 유엔기후회의(COP26)는 점진적 개혁에서 상당한 진전으로 나아갈 수 있는 분명한 기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잠재적인 재앙을 모두 피하려면 시스템의 변경이 시급히 필요합니다. 잠재적 재앙들은 명백한 이유로 ” 사악한(심각한) 문제 “로 알려진 것 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황이 느리게 악화된다고 잘못 인식하면서 위협에 함께 대처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도전과제의 대응은 실제로 리더십의 주요사항입니다. 글로벌 정치지도자들은 모두의 공통 이익을 위해 이러한 사악한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데 동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대학과 연구기관은 협소함과 지신들만의 점진적 발견을 보상하는 학문적 사일로와 경력구조를 해체해야 합니다. 기후과학자는 자신의 작업을 정치학자의 작업과 통합해야 하며, 전염병학자는 경제학자와 동일한 작업을 수행해야 합니다. 재앙의 위험을 제대로 분석하면 지금 바로 행동해야 할 소명을 느낄 것입니다.

 

출처 : Project Syndicate on 2021-08-05 .

DIANE COYLE

캠브리지 대학교의 공공정책 분야 교수이며 최근에 출간된 ‘Markets, State, and People: Economics for Public Policy’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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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20세기의 유럽은 사민당의 역사이었다. 그러나 최근 프랑스의 사회당은 존재가 사라졌고, 스웨덴의 사민당은 1당의 위치를 유지는 하였으나 무기력한 정당으로 전락하고, 유럽진보 정치의 중심이었던 독일 사민당(SPD)조차 소수정당으로 전락하는 위기에 처해진 가운데, 아래의 기사는 10월-11월간에 벌어지는 사민당 당대표 선출의 과정을 묘사한 내용이다.

한국 내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은 유럽의 교훈, “사회적 정체성으로서 산업 노동계급의 감소, 노조 가입자 정체 및 더 많은 맞춤형 정책과 정체성을 제공하는 녹색당, 포플리즘 정당 등 다양한 요구들이 좌파 정치조직의 과거 빅텐트(big-tent) 모델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지난 달 바이에른에서 열린 회의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을 이끌기 위해 경쟁하고 있는 모습

9월 중순 화요일 밤, 독일 사회민주당원 수 백 명이 1960~70년대 독일을 이끌었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의 동상을 지나 베를린 당사로 몰려들었다. 1964년부터 1987년까지 당을 이끌었던 브란트의 동상은 마치 그의 동료 당원들을 보호하듯 한쪽 팔을 벌리고 있는 모양새다.

참가한 당원들은 대강당에 자리했고, 곧 이어 남녀 7쌍이 무대 위에 올랐다. “검투사가 나타났다” 필자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속삭였다. 각 쌍은 당의 차기 당대표에 출마하여 한 때 브란트가 홀로 맡았던 역할을 둘로 나눠 가지게 됐다

“우리 당을 다시 노동자의 당으로 만들고자 한다”고 한 후보가 말했다. “사회민주당은 희망의 당이 돼야 한다”고 다른 후보가 말했다. 또 다른 후보자는 사회민주당과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 성향의 기독민주당으로 구성된 연합인 “대연정을 파기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날 밤 대강당을 가득 채운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독일어 약자로 SPD)의 일원이 되기에 좋은 시기라고 할 순 없었다. 당의 전임 지도자 안드레아 날레스(Andrea Nahles)는 취임한 지 불과 1년여 만인 지난 6월 대표직을 내려놨다. 사민당은 유럽의회 선거에서 또 다른 큰 패배를 맛본 바 있었다. 지난 2017년 총선에서 사민당의 득표율은 20%로, 2000년대 중반 34%, 1998년 40%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것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수치를 보였다. 현재는 여론조사 지지율이 약 15%대로 떨어졌다. 한 때 독일 좌파의 지배적 목소리였던 사민당은 현재, 특히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녹색당에 자주 밀리는 형국이다.

잔존 지도부는 날레스 대표가 사임할 당시, 그녀의 후임은 대개 비밀리에 결정되던 것과는 달리 모든 당원들에게 공개되는 예비선거에 의해 선출될 것이며, 9월 베를린에서 있을 프레젠테이션을 포함해 전국적인 공개방송을 통해 발표함으로써 이번 금요일 최종 투표로 마무리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사민당은 토요일 투표결과를 공개할 예정이다. 독일 법에 따라 선출 대의원 회의에서 최종 결정을 내리겠지만, 정치적으로 당원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당대표 투표는 당원과 당 기득세력 간의 싸움이 됐으며, 동시에 연정을 유지할지 여부에 대한 싸움이 되기도 했다. 많은 평당원들은 당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맺은 타협을 쇠퇴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만약 연정 “탈퇴”를 주장하는 후보 팀이 예비선거에서 승리하는 경우엔 연정이 붕괴되고, 내년 독일은 조기선거를 치르거나 소수당 정부로 전락하게 될 수도 있다.

특히 이 같은 후보자 명부의 경우, 사민당 투표는 당 역사상 유례없는 경우다. 노스트라인베스트팔렌주 의회 의원이자 연정을 탈퇴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인인 크리스티나 캄프만(Christina Kampmann, 39)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사민당 역사에서 결정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다. 새 출발, 새 시대에 대한 열망이 엄청나다. 이번 예비선거는 누가 그런 변화를 실현해 낼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새 시대는 독일 사회민주당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서유럽 국가들에서 사회민주당의 득표율이 90년대 중반 평균 3분의 1을 훌쩍 넘어섰던 수준에서 최근 몇 년간 약 5분의 1로 줄었다. 프랑스 사회당과 같은 일부 정당들은 특히 큰 타격을 입었다. 2017년 총선에서 프랑스 사회당의 득표율은 7.4%에 그쳤으며,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과 같은 기타 정당들은 그보단 나은 사정이지만, 여전히 종종 선거에서 패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쇠퇴에 국가별 요인이 작용하긴 했겠지만, 대부분의 사회과학자들은 근본 원인이 정치구조에 있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중도좌파 유권자의 비율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지만, 사회 민주당은 점점 더 그들을 동원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취리히 대학의 정치학자 실야 하우저만(Silja Häusermann)은 유럽사회의 분열이 전후 시대를 지배했던 경제 및 계급적 요소에서 이주 및 기후변화와 같은 문제로 옮겨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문화적으로 보다 진보적인 세계주의자와 문화적으로 보다 보수적인 “사회주의자”를 갈라놓는데, 이 둘은 모두 한 때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유권자들이 가졌던 이념을 공유하고 있다.

게다가 사회적 정체성으로서의 산업 노동계급의 감소, 노조 가입자 축소 및 더 많은 맞춤형 정책과 정체성을 제공하는 녹색당, 포퓰리즘 정당, 극좌 정당의 부상 등 이 모든 것들이 좌파 정치조직의 과거 빅텐트(big-tent) 모델에 도전하고 있다.

쇠퇴의 압력 속에서 유럽의 많은 사회민주당은 대표직을 두고 벌이는 싸움과 당 진로에 대한 격렬한 싸움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재정정책과 경제부양 비법을 가지고 있는 포르투갈인이나 반이민 정책을 주장하는 덴마크 사회민주당원이 제시하는 쇠약한 희망에 지나치게 현혹되는 경향이 있다.

뒤셀도르프 대학(University of Düsseldorf)의 정치학자 토마스 포군트케(Thomas Poguntke)는 유럽의 다른 정당들이 고려하고 있는 공개 예비선거의 경우 당 기반세력이 기득세력보다 더 온건하다면 완화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마테오 렌치(Matteo Renzi)가 2013년 비당원들에게 개방된 경선에 의지하며 좌파 지도부에 맞서, 사민당 내에서 중도 노선을 힘겹게 방어했다고 지적했다.

동시에, 공개예비선거는 결과를 왜곡해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와 같은 비정통 후보자가 선출되어 기득세력의 반대를 극복할 수 있게 될 수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극좌파 후보 브누아 아몽(Benoît Hamon)이 주류 선두주자인 마뉘엘 발스(Manuel Valls)를 제치고 사회당을 장악했다. 영국에서는 평화주의 사회주의자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이 2015년 3파운드에 표를 산 “기명 지지자들”에 의해 노동당 지도자로 선출됐다.

독일 후보자에는 제레미 코빈이 없다. 심지어 대연정 탈퇴를 옹호하는 사람들조차도 비교적 온건하다. 그럼에도 위험성이 높은 것처럼 대연정 탈퇴에 대한 지지율도 여전히 높다. 사민당 예비선거는 새 지도자 또는 정부를 떠나는 것 같은 단기적인 움직임이 당을 비틀거리게 만드는 요인을 고칠 것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어느 쪽도 중도파 타협에서 멀어지면서 철저히 양극화로 다가가는 유럽 정치의 구조적 변동에 대해 고심하고 있지 않다.

이제 유럽 내 사회민주당의 미래는 누가 그들을 이끌 것인가 보다는 새롭고 지속적인 기반을 구축하도록 이끌 수 있은 인물이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누구의 얼굴이 포스터에 그려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제공해야 하는 가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회민주당은 그 부분을 파악하지 못해왔다. (2019-10-26, 1차 개표결과 독일 사민당 당대표 선거에서 숄츠 재무장관이 1등을 차지했으나 과반수 미달로, 현재 숄츠와 대연정 파기를 주장하는 발터-보어얀스 간에 결선투표를 준비하고 있는 중이며 11월 30일 경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다른백년).

 

안나 사우어브레이(Anna Sauerbrey)

독일 타게스슈피겔(Der Tagesspiegel) 편집자 겸 논설위원

토, 2019/11/16-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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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환경 프로그램이 지난 목요일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화석연료산업에서 발생하는 것을 포함하여 전세계의 메탄배출량을 줄이는 일이 이전에 이해했던 것보다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향후 10년 동안 최대한 메탄 배출량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국제 협력이 필요합니다-Inger Andersen, UNEP”

새로이 발표된 ‘글로벌 메탄평가’ 보고서는 오는 20년 동안 이산화탄소보다 84 ~ 87배 더 강력한 오염 물질인 메탄을 제거하는 것이 기후비상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매우 중요한 조치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메탄배출량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일은 상대적으로 저렴하며, 누출이 되는 화석연료 파이프라인을 수리하고, 시추 중에 발생하는 천연가스의 배출을 방지하고, 매립지에서 배출되는 가스를 포집하고, 축산업의 규모를 줄임으로써 달성 할 수 있습니다.

보고서의 요약본은 “인간활동으로 인한 메탄배출량을 줄이는 일은 온난화 속도를 빠르게 줄이고 파리기후협정의 야심찬 목표인 기온 상승을 1.5 ° C로 제한하려는 전세계적 노력에 크게 기여하는 가장 효율적인 전략 중 하나입니다.”

“발생하는 메탄의 목표설정과 더불어 우선개발목표를 설정 적용하는 추가측정의 작업을 통하여 2030년까지 인간이 유발하는 메탄 배출량을 최대 45 % 또는 연간 1억 8천만 톤 (Mt / yr)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2040 년대까지 0.3 ° C 정도로 지구온난화를 낮추고 장기적인 기후변화완화의 노력을 보완할 것입니다.”

또한 매년 255,000명의 조기사망, 775,000명의 천식관련 환자발생, 730억 시간의 고열로 인한 노동손실 그리고 지구적으로 2,600만 톤의 작물손실을 예방할 것입니다.

새로운 보고서를 발표하며 내놓은 성명서를 통하여 UNEP의 잉거 안데르센 사무총장은 “메탄을 줄이는 것은 향후 20년 동안 기후변화를 늦추고 더불어 이산화탄소를 줄이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보완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말했습니다.

Common Dreams 가 지난 달에 보도한 바와 같이, 미국 해양대기국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2020년의 탄소 및 메탄의 배출누적량은, 비록 펜데믹으로 인해 발생속도가 늦추어졌지만, 지난 3백만 년의 기간 동안 지구상에서 볼 수 없는 수준으로 증가했습니다.

안데르센은 “메탄배출량을 줄이는 일은 투입 비용에 비하여 사회와 경제 및 환경에 대한 혜택은 광범위하고 매우 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향후 10년 동안 가능한 메탄배출량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국제적 협력이 필요합니다.” 그녀는 “메탄을 중점적으로 그리고 매우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생물다양성 및 지속가능성 센터의 책임자로 있는Stephanie Feldstein은 환경단체들과 함께 축산업이 메탄배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주목하면서 상기의 보고서를 심각하게 검토했습니다.

Feldstein은 성명에서 “육류 및 유제품 생산에서 나오는 메탄은 기후오염의 주요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오랫동안 소홀히 다루어 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인들은 세계인 육류소비 평균의 3 배를 먹습니다. 우리는 현재 같은 목축업에 대한 헐거운(부적절한) 조치로는 메탄 배출량을 낮출 수 없습니다. 농업에서 배출되는 메탄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려면 육류소비와 생산을 줄여가야 합니다.”

 

출처 : CommonDreams.org on 2021-05-06.

Brett Wilkins

미국 진보시민 종합 포탈지인 commondreams.org의 환경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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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21/05/21-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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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코리아 남쪽의 대한민국(ROK)의 눈에는 코리아 북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이라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눈에는 남쪽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없다. ‘코리안 블라인드(Korean blind)’다. 한쪽 눈만 뜬 채 상대를 맹점 지대에 넣어놓고 서로가 상대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헌법에는 ‘한반도’에 오직 대한민국만이 존재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헌법에는 ‘조선반도’에 오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만이 존재한다. 헌법만이 아니라 두 나라의 어느 공식적인 법과 제도에도 상대는 국가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한번쯤은 마리오트 맹점 실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혹시 안 해본 분이라면 이번 기회에 직접 한번 해보시기 바란다.(아래 그림) 먼저 왼쪽 눈을 가리고 오른쪽 눈으로 그림의 십자 표시를 응시한다. 그리고 눈을 멀리 가까이 하여 거리를 조정하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검은 원이 사라져버린다. 다음에는 반대로 오른쪽 눈을 가리고 왼쪽 눈으로 그림의 검은 원을 응시하면서 거리를 조정하다 보면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 십자가가 사라져버린다.

지금 코리아 남북의 두 나라가 꼭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나 두 눈을 다 뜨고 바라보면, 멀리 보든 가깝게 보든, 뒤집어 보든 바로 보든, ‘코리아’에는 엄연히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2019년 현재 세계 157개국이 한국(ROK)과 조선(DPRK) 두 나라를 모두 인정하여 동시 수교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코리아 남북의 두 나라는 서로 상대를 부정하고 있으니 세계인의 시각에서 볼 때는 매우 이상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코리아 양국체제란 이제는 두 코리아 모두 정상적인 세계인의 시각을 갖자는 것이다.

코리안 블라인드는 있는 것을 없다고 우기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거꾸로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놀라운 신박을 부린다. 아직도 여전히 1980년 5월의 광주 시민항쟁 대열에 북에서 보낸 수백 명의 특수부대(소위 ‘광수’)가 있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망상 허언에 증거가 있을 리 없다. 5·18 당시 계엄사령부와 미국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맹목의 외눈박이들에게는 증거가 중요하지 않다. 필요하지도 않다. 오직 ‘그래야만 한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외눈박이 맹목의 당위가 있을 뿐이다. 존재를 부정하는 북과 연결시켜야 5·18 광주를 부정할 수 있고, 그래야 광주 시민들에 대한 피의 살육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외눈박이 맹점 놀음은 이렇게 내통하고 있다. 이러한 지록위마(指鹿爲馬) 뺨치는 외눈박이 맹점 놀음으로 오랜 세월 독재체제를 정당화해왔다. 심지어 세월호 참사 항의도 촛불집회도, 북과 연결시켜 압살하려 했던 공작들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코리아 양국체제란 외눈박이 넌센스, 블라인드 기만술로 지탱해온 독재체제, 독재심리를 영구히 종식시켜 정상체제, 정상심리가 확고히 자리 잡도록 하자는 것이다.

지난 70년 코리아 남북에 독재체제, 독재심리가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양측이 ‘내전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전 상태’란 하나의 주권, 하나의 영토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벌이는 필사의 전쟁 상태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절박하고 극단적인 심리 상태다. 그래서 상대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불법단체’나 ‘반란집단’으로 간주한다. 내전체제는 전쟁체제고 비상체제다. 6·25 전쟁 이후 남과 북 사이가 그랬고, 남과 북 내부가 그랬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남이든 북이든 독재의 위협을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전쟁 상태, 내전 상태이므로 독재가 정당화된다. 내전 상태로 맞선 남북이 ‘상응(相應)하여’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해온 체제를 1970년대 이래 한국의 민주화운동권에서는 ‘분단체제’라 불러왔다. 이러한 ‘내전 상태=분단체제’가 지속되는 한, 순수한 통일 의지와 통일 열망은 오히려 내전 격화와 독재 강화의 불쏘시개로 역용(逆用)되었을 뿐이다.

오늘날 코리아가 이러한 ‘내전 상태=분단체제’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다. 하나의 주권, 동일한 영토를 놓고 벌이는 필사의 전쟁 상태를 끝내야 한다. 그러자면 한국과 조선 두 국가가 서로의 주권과 영토를 인정하고 공존해야 한다. 코리아 남북은 이미 70여 년 동안 두 개의 주권국가다. 국가주권의 구조적 작동논리는 혈연적 정서논리와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이해하고 대처해야 마땅하다. ‘한 민족 한 형제인데 두 나라가 웬 말이냐’는 식의 민족정서·혈연논리만으로는 내전 상태의 두 나라, 두 주권 간의 적대와 대립을 결코 해소할 수 없다. 1950년 코리아전쟁부터가 한 민족에 두 나라가 있을 수 없다는 논리의 귀결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남북이 서로의 주권과 존재를 인정해야만 통일로 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은 사실은 너무나도 상식적이고 당연한 말이다. 상대를 인정하기를 기필코 거부하면서 우리는 둘이 아니니까 반드시 합쳐야 한다고 우겨봐야 하나가 될 리 없다. 갈등만 더 증폭될 뿐이다. 누가 보더라도 서로 합칠 생각이 없는 둘의 모습이다. 반대로 상대를 진정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서로 충분히 확인한 연후에 이제부터 어떻게 합칠 것인가를 이야기해보자고 한다면, 이제야 비로소 누가 보더라도 정말 합칠 생각이 있는 둘의 모습이다.

분단체제에서는 남북이 서로를 결코 인정하지 못한다. 분단체제에서 가능한 입장이란, 남과 북 어느 한쪽만을 인정하든지(남과 북 당국의 공식입장), 아니면 양자 모두를 부정하는 입장(둘 모두에 비판적인 입장)일 수밖에 없다. 반면 양국체제에서는 남북이 서로를 마땅히 인정하게 된다. 시늉이나 속임수로서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상대가 더는 자신의 영토와 주권을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서로에게 확고해져야 한다. 그것이 코리아 양국체제다. 그때서야 통일의 길은 비로소 열린다. 하나가 되자고 하면 오히려 하나가 되자는 둘이 우선 분명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 않고 애당초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나가 되자고만 해왔던 것이 오히려 분란과 갈등을 키워왔다. 코리안 블라인드를 걷어내고 둘임을 인정해야, 하나가 되자는 양편의 진실성이 입증된다.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통일은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코리아 양국체제는 한 민족 두 나라 공존을 통해 평화적 통일에 이르는 길이다.

이 책의 제목을 ‘한반도 양국체제’가 아니라 굳이 ‘코리아 양국체제’라 한 이유를 눈 밝은 독자라면 이미 눈치 채셨을 것이다. 반도 남쪽의 대한민국(ROK)에서는 ‘코리아 반도(Korean peninsula)’를 ‘한반도’라 부르지만,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RPK)에서는 ‘조선반도’라고 부른다. 양국체제는 한국과 조선 두 나라 모두를 인정하고 위하자는 것인데, 그 이름을 한국에서만 쓰고 있는 용어로 ‘한반도 양국체제’라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름부터 남북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공통의 것을 쓰자는 취지이다. 또 ‘코리아’라고 하면 지리적인 의미의 ‘코리아 반도’만이 아니라 코리아 반도와 전 세계 도처의 코리아 사람들(Korean people), 코리아 민족(Korean nation)을 포괄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앞으로 양국체제가 정착되어 양국이 합의하여 양국을 통칭하는 합의된 언어를 찾기까지는 아쉬운 대로 ‘코리아 양국체제’라는 용어를 쓰기로 한다.

 

기회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첫 가능성은 이미 지난 1989~1991년 사이에 한번 열렸던 바 있다. 미소(美蘇) 냉전 종식 국면에서 한국(ROK)과 조선(DPRK)은 유엔에 동시 가입했고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조선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 합의할 수 있었다. 노태우 정부는 양국체제 전망에 적극적이었고, 북 역시 북미 수교를 타진하면서 남북 공존을 통한 체제 보장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코리아에서의 냉전대결 국면을 연장시키려는 국내외 세력은 ‘북한 조기붕괴론’을 유포하면서 양국체제의 전망을 가로막았고, 소련·동구권 붕괴에 이은 ‘북한 붕괴’의 위협으로 궁지에 몰린 북은 핵 개발에 올인하게 되었다. 1987년의 민주화 동력이 하나로 뭉쳐 1987년의 대선에서 정통성이 강한 민주연합정부를 수립했다면, 이러한 내외의 방해를 물리치고 이미 1990년대에는 코리아 양국체제가 출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민주화 동력은 분열되었고 양국체제의 전망은 ‘북한붕괴론’과 ‘북핵위기론’의 공세에 밀려 너무나 빨리 닫히고 말았다.

그러나 거의 30년 만에 코리아 양국체제의 새로운 가능성이 다시 열리고 있다. 2016년 말 한국의 촛불혁명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당선, 그리고 2017년 조선의 핵 완성이라는, 각각이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세 요소가 한 시점에 합류하면서 그 조건이 형성되었다. 한국의 촛불혁명은 1960년 4·19와 1987년 민주항쟁이 미처 이루지 못했던 나라의 민주적 정통성의 필요충분조건을 비로소 충족시켰다. 촛불혁명은 남북 대결과 적대의 경사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해소시켰고 그 힘이 온전히 민주정부로 이어졌다. 반쪽국가가 아닌 온전한 한 국가로서 안정된 정당성과 자신감을 갖춘 것이다. 그렇기에 2017년 북미 간 전쟁 위기의 고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남북 화해, 북미 화해의 길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 결실이 2018년부터 남북미 간 정상회담으로 맺히기 시작했다.

1989~1991년 소련·동구권 붕괴 이후 미소 냉전이 종식되었지만 당시 미국은 곤경에 빠진 조선(DPRK)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붕괴를 위한 압박과 제재를 강화했다. 그 결과 ‘북핵문제’가 본격화했다. 북핵 개발과 제재·압박의 벼랑 끝 줄다리기는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되어 2017년까지 계속됐다. 이 30년의 위기와 긴장 속에 북미 간만이 아니라 남북 간의 적대와 대결의식도 고조되어왔다. 이 적대와 대결의 고조를 한국의 촛불혁명이 먼저 끊었다. 그리고 조선의 ‘핵 완성’ 선언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북핵문제의 해결은 북핵 완성을 통해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그 역설은 미국 주류 정치의 국외자인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이 북미 대화의 파트너가 되면서 현실화의 실마리를 찾았다. 2018년 벽두부터 남북이 극적으로 화해의 물꼬를 텄다. 촛불혁명을 통한 한국의 자신감과 핵 완성을 통한 조선의 자신감이 당당하게 만날 수 있었다. 양국체제의 기반이 형성된 것이다. 이어 한국이 북미 간 협상을 성공적으로 중재함으로써 영영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남북미 간 화해의 협주가 가능해졌다. 이제 남북미는 종전과 평화협정, 그리고 한조·북미 수교와 한반도 비핵화를 일정에 올려두고 있다. 코리아 양국체제가 바로 우리 코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두 번째 기회

이렇게 다시 열린 코리아 양국체제의 두 번째 기회는 매우 소중하다. 그러나 이 기회를 어떻게 해서든 다시 한번 닫아버리고 싶어 하는 냉전대결 세력도 여전히 남아 있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제야말로 북한체제를 끝장낼 때’라고 소리를 높이고 있는 세력들이 그렇다. 정확히 1990년대 초반의 북한 붕괴 – 북핵 위기 – 전쟁위기론의 복사판이다. 1991년 12월의 역사적인 <남북기본합의서>에 남북 양측 총리가 서명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한국 보수 언론에서 ‘북핵위기론 – 북한붕괴론’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채 2년 반이 지나지 않은 1994년 5~6월, 코리아는 전쟁 일보 직전의 초비상 위기 상태에 빠졌다. 그 후 양국체제의 전망은 굳게 닫히고 말았다. 냉전대결 세력은 이 순간 코리아의 상황을 다시금 그때와 꼭 같이 몰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과 30년이 지난 촛불 이후 현재의 상황은 너무나도 다르다. 1992~1994년의 반전의 핵심은 당시 냉전대결 세력이 한국의 여론의 방향을 남북 화해에서 남북 적대 기조로 뒤집어놓는 데 성공한 데 있었다. 당시는 남북대결체제를 남북공존체제로 밀고 나갈 지형과 중심이 아직 충분히 형성되어 있지 못했다. 노태우 정부는 군부연장 세력인 데다가 허약했고, 87년 시민항쟁을 이끌었던 민주화 세력도 분열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 반쪽은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냉전대결 세력과 합쳐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냉전 세력과 합친 민주화운동 세력의 한 축이 ‘북한붕괴론 – 북핵위기론’에 동조했다. 그래서 쉽게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말았고, 그러면서 ‘기울어진 운동장’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촛불 이후 오늘날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우선 촛불혁명이 30년 전 만들어진 ‘기울어진 운동장’을 소멸시켰다. 그리고 촛불혁명 이후 들어선 정부의 민주적 정통성이 과거 노태우 정부에 비해 훨씬 강하다. 촛불혁명의 주도 세력의 일부가 냉전대결 세력과 야합할 가능성도 없다. 오히려 냉전대결 세력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 자체를 거부하고 폭력적이고 억지스런 대중동원을 고집하면서 합리적 보수층의 마음으로부터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

국제적 상황 역시 차이가 크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가능성이 처음으로 열렸던 1990년대 초반은 냉전 승리 이후 미국 일극(一極)주의의 전성기였다. 1990~1991년 사이의 ‘걸프전쟁’을 돌이켜 보면 이 당시 전 지구상에 미국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또 ‘북한붕괴론’이 먹히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 엄청난 소련도 무너졌는데 ‘북한’이 따라서 무너지지 않겠느냐는 여론이 국내외에 상당히 강했다. 그러나 지금은 완연히 다르다. 미국 일극주의란 냉전 종식 이후 단지 10년의 에피소드였을 뿐이었다. 세계가 미소 양극으로 나뉘어 필사적인 세계내전을 벌이던 시대는 영영 끝났다. 세계사는 이제 일극주의가 아니라 주요 지역 문명권들의 공존체제 형성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이 대표하는 미영 문명권은 이제 그러한 주요 문명권 중 하나일 뿐이다. 현금의 미중 갈등은 세계가 어느 한편에 서야 했고 어느 한쪽이 망해야 끝났던 미소 냉전과 본질적으로, 근본적으로 다르다. 앞으로도 밀고 당김이 없지는 않겠지만 이제 미래는 여러 문명이 협력하여 공존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데 세계의 이해가 모아지고 있다. 1990년대 초의 ‘북한붕괴론’이 실제와 동떨어진 엉뚱한 이야기였다는 것도 이제는 분명해졌다. 동아시아의 조선, 중국, 베트남은 소련·동구권과는 다른 역사적·문명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동구권 붕괴 이후에도 독자적 근거 위에서 존속할 수 있었다. 유럽 기원의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세계내전적 폐쇄회로와는 다른 문맥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새롭게 볼 때가 되었다. 이렇듯 30년 전과 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크게 달라진 세계 상황에서 30년 전과 꼭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사람들에게 귀 기울일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제 코리아 양국체제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 세계사적 상황이 무르익은 것이다.

필자가 양국체제론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촛불혁명 전이었다. 필자는 21세기 들어 세계사의 큰 흐름이 코리아에 아주 유리한 기회를 주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냉전의 족쇄를 풀고 아메리카 – 태평양권과 유라시아권을 이어주는 절묘한 위치에서 새 도약의 호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한국의 정치상황은 자꾸만 과거로 역주행하고 있었다. 왜 그럴까? 너무나도 오래 지속된 코리아 내전체제, 분단체제 때문이었다. 특히 1990년대 초반 양국체제의 첫 기회가 깨진 이후 줄곧 심화되어온 북핵문제와 남북·북미 간 대결 기조가 문제였다.

이 역주행의 순환고리를 깨뜨리고 벗어나야만 했다. 당시의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비관적으로 보이더라도, 현실이 이렇게까지 나빠진 원인을 정확히 알면 반드시 빠져나갈 길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문제만 해결하면 코리아엔 큰 기회가 온다고 믿었다. 오랜 고심과 궁리 끝에 그 족쇄를 푸는 핵심 방법이 코리아 양국체제 정립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촛불혁명 이전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어둠이 너무나도 짙었던 오밤중이었지 않은가? 방향은 분명해 보인다 하더라도 과연 그 족쇄 풀기가 실제로 언제나 가능할까? 까마득하지 않은가? 그냥 상상으로 끝나는 것 아닌가? 그럴 때마다 나는 그때보다 더 어둡고 더 힘들었던 87년 이전의 시간들을 생각했다. 설혹 나 혼자의 외침이라 하더라도 누군가는 시작해야 할 일이 아니겠냐고 자신을 북돋았다. 그런 막막한 기분으로 양국체제를 이야기해가던 중, 촛불혁명이 일어났다. 변화가 이렇게 빨리 그리고 그렇듯 거대한 규모로 시작되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 엄청난 에너지 속에서 양국체제론은 현실의 발판을 얻고 한층 구체화될 수 있었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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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20/01/07-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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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회의 대표적인 이미지 중의 하나가 바로 국정감사다. 그야말로 국회의 큰 ‘행사’다. 그런데 이 국정감사 제도가 세계적으로 우리 국회에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출처: 파이낸셜신문>

국정조사(국정감사가 아니라) 제도는 영국 의회에서 1689년 아일랜드 전쟁의 실패 원인을 조사하고 그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조사활동을 전개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하지만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정조사권은 인정되고 있지만 국정감사제도는 다른 나라 의회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1948년에 제정된 우리 제헌헌법의 제43조는 “국회는 국정을 감사하기 위하여 필요한 서류를 제출케 하여 증인의 출석과 증언 또는 의견의 진술을 요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제정된 국회법에서도 국정감사와 관련된 내용을 규정하였다.

“국회는 의안 기타 국정에 관한 사항을 심사 또는 조사하기 위하여 의원을 파견할 수 있다(제72조).”

“국회로부터 심사 또는 조사하기 위하여 정부 기타의 기관에 대하여 필요한 보고 또는 기록의 제출을 요구할 때에는 이에 응하여야 한다(제73조).”

“국회는 의안 기타 국정에 관한 사항을 심사 또는 조사하기 위하여 증인의 출석을 요구할 때에는 따로 정하는 규정에 의하여 여비와 일당을 지급한다(제74조).”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국회법에서는 헌법과 달리 ‘감사’ 대신 ‘심사’ 혹은 ‘조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정례적으로 실시한다는 내용이나 감사의 대상과 주체에 대한 별도의 규정을 두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국정감사와 국정조사의 구분을 하지 않았다.【1】

국정감사는 유신헌법에 의해 폐지되었다가 1987년 이후 부활하였고 헌법 제61조에도 다시 명문화되었다. 국회의 힘을 강화하고 그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엄격히 말해, ‘감사’와 ‘감시’ 그리고 ‘조사’는 상이한 의미를 지닌 용어로서 정확하게 구별되어 사용해야 한다. 국회는 국민의 대표로서 행정부에 대한 감시와 통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지 직접 감사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행정부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권력분립 원칙에 위배된다. 더구나 현행 헌법상으로도 행정부 감사는 원칙적으로 감사원이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국정감사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나온다.【2】 그에 따르면, 국회의 정부 감시 기능은 상임위원회 활동을 활성화시켜 상시적으로 이뤄지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미국 의회처럼 의회 내에 회계감사원을 설치하는 방안이 바람직하다. 미국 회계감사원은 연방정부의 예산 지출과 운영에 대한 감사를 임무로 하며, 연방 정부의 예산을 사용하는 모든 사업과 활동을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회계감사원의 감사결과는 수시로 모든 상하원 의원과 행정부에 제출된다. 그러므로 미국 의원들은 우리처럼 매년 국정감사를 하지 않아도 이 감사보고를 통해 각 부처의 운영상황을 손금 보듯 파악할 수 있다.

 

국회의원은 연예인이 아니다

국정감사가 진행될 때면 장관이 수시로 불려 다니고 국회 복도까지 공무원들로 북새통, 아수라장이 되어 국정 마비 현상을 초래할 정도다. 미국에서는 엄격한 권력분립에 의해 원칙적으로 의회의 장관출석 요구권이 없다.

그 동안 사람들은 국정감사장에서 국회의원들이 피감기관에 호통을 치고 엄청난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 목격해왔다. 감사보다는 정쟁의 연속이고 건수 위주며 ‘특권 과시의 현장’이다. 몇 해 전 국감에서도 태권도복을 입고 나오거나 한복 경연을 시연하고 고양이를 특별증인으로 신청하는 등 어떻게든 튀어보려는 연기정치의 희화화된 공연장이었다. 그러니 졸속감사에 수박겉핥기식 감사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으며, 이는 결국 국회의원들의 이미지를 더욱 추락시키고 정치 불신을 더욱 가중시킨다. 국회의원은 연예인이 아니다.

또한 국감이라는 이 과정을 통하여 전문위원을 비롯해 행정부에 대한 ‘갑’으로서의 국회 관료들의 권한 역시 필연적으로 더욱 강화된다.

‘개념의 오해, 혹은 착각’으로 탄생된, 세계 어느 의회에도 없는 국정감사 제도, 이제 폐지하는 것이 정도(正道)다.

 

【1】 이러한 ‘감사’와 ‘감시’ 그리고 ‘조사’ 용어 혼동과 관련하여, 제헌헌법 기초자인 유진오 박사는 국정감사와 조사를 혼용하여 설명하며 국정감사를 영국에서 기원한 것이라 하여 국정조사의 의미로 파악하고 있었다. 즉, 제헌헌법 제43조 규정에 대하여 유진오 박사는 “국회가 국정을 감시하기 위하여 제반의 조사를 하는 것은 당연한 기능이라 할 것이며, 본조는 국회의 이 당연한 기능을 선명(宣明)하는 동시에 국회가 국정을 감사할 때의 증인을 소환하여 증언 또는 의견의 진술을 요구할 수 있음을 명백하게 한 것이다. 국회의 국정감사기능은 처음 영국에서 시작되어 점차 각국에 보급된 것인데, 종래 각국에 있어서의 국정감사의 실제를 보면……”라고 해석하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유 박사는 국정감사를 영국에서 기원하여 각국에서 인정하고 있는 국정조사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김효전, “입법부의 정책통제 기능; 국정감사권과 조사권을 중심으로”, 「대한변호사협회지」제150호, 1989.

【2】 이관희, “우리나라 국정감사ㆍ조사 제도의 개혁방안”, 「헌법학연구」제11권 제3호, 2005. 9.

 

소준섭

목, 2020/09/1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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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지를 찾아가는 세상의 의사들은 모두가 존경스럽다. 현재 한국에서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대구로 모여든 의사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훈훈한 소식이다. 그들을 응원하고, 고마운 마음은 지나침이 없는 일일 게다. 새삼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의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고민해 봄 직한 소식이었다. 그래서 쿠바 의사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보려 한다. 쿠바에는 누구나 가족 주치의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쿠바 의료시스템의 높은 의료적 성과는 비록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하여 이미 국제 사회에서는 널리 통용되는 사실이다.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높은 의료복지를 갖추고 있는 캐나다와 같은 선진국에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따라서, 어떻게 제3세계 쿠바의 의료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의료적 성과를 낼 수 있었는가를 궁금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에, 나의 질문은 첨단 의료시설은 고사하고 반세기가 넘는 미국의 금수 조치로 인해 만성적인 물자 부족이 일상이 되어버린 곳 쿠바에 정착된 의료시스템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 된 사회적 잠재력은 무엇인가로 자연스럽게 향하게 되었다. 어쩌면 쿠바 역사의 한 축이 되어버린 사회주의 체제라는 큰 틀을 벗어 나서는 설명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의 물음이 계속되는 것일지도.

쿠바에는 콘술또리오(consultorio)라는 의료시설이 있다. 보통 국내에서는 진료소라고 알려져 있고, 우리가 가정의라고 일컫는 의사와 한 명의 간호사가 기본 의료팀을 이룬다. 쿠바 보건의료시스템의 가장 기본단위이자, 보건의료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해당 지역주민의 전반적인 건강상태를 비롯하여 당뇨나 고혈압 같은 만성 질환자 관리는 물론 고위험군 질병을 앓는 주민이나 노인과 임산부, 신생아 등과 같은 특별한 관리가 필요한 사람들까지 진료소의 의료진들은 언제나 바쁠 수밖에 없다.

지역 골목의 곳곳에 포진된 진료소에서 공식적으로 담당하는 주민이 800여 명이 넘지 않도록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1,000여 명이 훌쩍 넘고 있으니, 가정의와 간호사가 어지간히 바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인 셈이다. 그렇지만 노동강도가 높기로 소문난 한국사회 출신이라서 그럴까. 내게 그들의 일상은 심지어 평화롭게 느껴지니 난감할 뿐이다.

진료소의 상급기관인 폴리클리닉(Policlinic)은 진료소 수준에서 불가능한 정밀검사를 받아야 할 때 가정의의 처방에 따라 방문하는 의료기관이다. 약 20~30여 개의 진료소를 총괄 지휘하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지역 단위의 공중보건이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가정의를 통해서만이 폴리클리닉을 방문해야 한다는 엄격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주민들은 언제든지 지역 근처에 있는 폴리클리닉에서 필요한 의료조치를 받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가정의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폴리클리닉을 찾는 이유는 수만 가지에 이를 테니 그 세세한 사정까지는 어찌 다 알 수 있으랴.

쿠바 진료소의 가정의는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표현이지만 “가족 주치의”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소위 “가족 차트”를 기록하여 가족 구성원의 기본정보를 포함 질병 유무, 건강상태, 생애주기 등을 기록하여 전반적으로 지역 구성원들의 건강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의사의 방문이 요구되는 특별한 경우, 예를 들어 신생아나 암 환자 등과 같은 중증 질병을 앓고 있다면 가정의나 간호사의 가정방문은 필수적이다. 이 외에도 가정의와 간호사는 정기적으로 해당 지역의 가정을 방문해야 하는 지침도 마련되어 있다.

한국사회에서 개인 주치의를 갖는다는 것은 재벌들이나 유력 정치인들이나 누릴 수 있는 호사일 뿐 나 같은 ‘인민’들에게는 언감생심 주치의가 가당키나 할까. 나의 건강을 수시로 물어보고 살펴봐 주는 주치의를 갖는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쿠바 사람들에게는 이미 일상이지만, 오며 가며 마주치게 되는 의사가 내 이름을 부르고, 가족의 안부를 묻는가 하면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관심을 받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호사이니 살짝 부러운 제도임에는 분명하다.

쿠바 보건의료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진료소와 폴리클리닉은 이른바 “일차의료”가 이루어지는 현장이다. 이미 발병한 질병을 다루는 임상의학 못지않게 예방의학을 더욱 강조하는 시스템이다. 결국, 질병의 가능성을 사전에 방지하고 예방하는 것이 일차의료 활동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떡하면 이 같은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는가이다.

의료인류학적 관점에서 보면, 건강추구와 의료행위는 단순히 근대적 의미의 의학적 측면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문화적인 맥락이 고려된 총체적인 문화적 실천으로 파악해야 한다. 한 문화에서 진행되는 질병과 의료에는 그 문화의 사회적 역사적 경험이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주장에 기대어 보면, 보건의료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은 쿠바의 사회문화적 맥락은 물론 역사적 경험까지도 총체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편에서는 낙후된 쿠바 의료시설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쿠바 의사들의 높은 사명감이나 헌신적인 인류애를 칭송하는 일에 머무는 것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어 보인다.

약 2년 전 20년 경력의 베테랑 간호사이자 현재는 연구자인 동료와 함께 쿠바 진료소에 근무하는 가정의와 간호사의 일상을 가까이서 지켜보기로 했다. 다음은 당시 작성한 현장 스케치의 일부이다.

진료소 앞 누군가 지나갈 때마다 저 사람인가? 이 사람인가? 초조하게 엉덩이를 들썩이길 20여 분. 드디어 진료소 건물 아파트에서 남성 한 명이 진료소로 들어갔다. 드디어 가정의를 만나는 구나! 설렐 틈도 없이 남성은 다시 문을 잠그고 헬멧을 쓰고 뒤따라온 딸인 듯 보이는 여자아이에게까지 헬멧을 씌워 오토바이에 태우고 떠나려 한다. 깔마춤이라도 한 듯 어여쁜 노란색 오토바이와 노란색 헬멧을 쓴 모습이 영락없는 푸후(예쁜 곰돌이)를 연상케 했다. 흔히 의사에게 느껴지는 위압감이나 경직된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있는 골목길 스쿠터 맨(?)이었다. 때마침 옆 건물에서 아이를 안고 나온 여성이 진료소로 들어간다. 달려가 들어보니 어딜 갔다가 올 테니 좀 기다리라는 눈치다. 우리는 애타는 마음에 혹시 의사 알레만이 아니냐고 다급하게 달려가서 외쳐본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처방전 용지가 없어서 근처 폴리클리닉에 간다며 곧 돌아온다는 말을 남긴 채 부르룽~ 스쿠터는 떠났다.

잠시 멍해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을 가다듬고 결연하게 진료소 앞 나무 밑에 주저앉기로 했다. 가정의가 진료소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므로. 앗! 그러나, 우리는 앉기도 전에 다시 일어서야 했다. 여기는 쿠바! 진료소 앞의 우리가 궁금한 주민들이 다가와 말을 걸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가 궁금한 주민들을 맞이한다. 가장 먼저 다가와 긴 이야기를 들려주신 분은 에밀리오(Emilio) 아저씨.

“처방전 용지를 가지러 갔다고?” “오토바이 타고 가던가?” “그럼 23번가에 있는 폴리클리닉에 갔을 거야. 가까우니까 금방 와.” “알레만? 잘 알지. 미션을 세 번이나 다녀왔어. 좋은 사람이야.”

에밀리오 아저씨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뒤에서 서성이던 남성과 곧이어 등장한 여성 네나(Nena)가 말을 이어갔다. 감기로 약을 처방받아 복용 중인데 약이 독해서 얼마나 오래 먹어야 하는지 물어보러 왔단다. 남편을 따라서 진료소에 함께 산책 나오듯 나오셨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 그러지 말고 아주머니 집으로 가서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하시지만, 가정의 알레만과의 면담을 미룰 수 없어 정중히 거절한다. 그러자 집의 주소를 알려주시며 언제든지 들르라는 당부를 하시고 자리를 떠나신다. 자신들이 사는 집을 스스럼 없이 알려주고, 문을 열어 집안으로 맞이하는 모습이 이제는 낯선 풍경이지만 우리에게도 이와 같았던 세월이 있었던 것 같다.

잠시 후 알레만이 돌아왔다. 진료소 문이 열렸지만 우리는 멀찍이 지켜볼 뿐 다가 가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어디에서들 보고 있었는지 알레만이 진료소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방문자들이 줄줄이 진료소에 따라 들어갔기 때문이다. 진료소에 들어가는 주민들을 부럽게 지켜보며, 우리는 지나가는 주민들에게 역으로 인터뷰를 당하고 있다. 진료소 앞을 서성이는 우리에게 궁금한 것이 많을 법도 한 일이다. 그러는 중에 갑자기 알레만이 진료소를 나선다. 안에는 여전히 몇 명의 주민들이 남아있다. 무조건 따라 뛰었다. 알레만은 사거리 건너편에 있는 가정집으로 들어갔다. 가정의도 간호사도 없는 진료소에서 주민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간간이 하하 호호 웃는 소리도 들린다. 잠시 후 알레만이 진료소로 복귀한다. 뒤따라가 사진 찍은 것에 대해 사과하자 괜찮다며. 방금 방문한 집에 암 환자가 있는데 상태가 안 좋다고 아들이 전화해서 와 달라고 했단다. 아하! 가정방문은 이렇게 수시로 이루어지기도 하는구나! (···· 중략 ····)

가정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진료소는 주민들의 사랑방이 된다. 서로 안부를 묻고 정보를 교환하고, 간호사는 대기실에 앉아 있는 노인들의 혈압을 재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가정의 알레만은 이 구역에서 단연 가장 인기 있는 인물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여느 쿠바 사람다운 다정함은 물론 잘 웃지도 않는데 말이다. 이를 함께 지켜본 연륜 있는 동료는 저런 모습이 바로 “츤데레”의 매력이란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약 4주가 지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쯤 알레만은 결국 우리를 만나면 먼저 인사를 반갑게 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알레만은 언제나 주민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진료소가 있는 건물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니, 오며 가며 만나는 사람들, 진료소를 찾는 이들은 모두 알레만의 이웃인 셈이다. 자신이 처음 가정의를 시작했을 때 돌보았던 신생아가 이제는 임산부가 되어 자신의 진료소를 찾는다며 으쓱한다. 알레만은 그 신생아와 함께 성장했고 삶을 공유했음이 분명하다. 쿠바 지역사회에서 가정의로 살아가는 사람이 얻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경험에 괜히 내가 흐뭇하다.

진료소에는 최첨단 의료시설은 물론 자랑할 만한 의료 기구도 별로 갖춰져 있지 않다. 간단한 소독기구, 주사, 약품 등과 같은 기본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알레만의 진료소에는 왁자지껄 여러 사람이 함께 이야기하는 소리, 박장대소하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의사실과 대기실의 분리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알레만의 진료는 정해진 틀 없이 어디서나 이루어진다. 약 한 달간의 진료소 추격전(?)을 통해 이제 인도 위에서, 아파트 앞에서, 때로는 오토바이 위에서 주민들과 얘기하거나 등에 손을 얹고 위로하는 듯 보이는 모습의 가정의 알레만과 간호사 글레이비스의 모습은 이미 우리에게도 익숙한 일상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면, 쿠바 보건의료의 성과를 분석하는 단초는 결국 자본주의 시스템과 구별되는 쿠바 지역사회의 사회문화적 특성과 맥락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일단 쉼표를 찍기로 했다. 고가의 최첨단 의료장비만이 좋은 의료의 시작이라는 우리의 믿음에도 쉼표가 찍혔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말이다.

목, 2020/03/05-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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