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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만화로 나온 ‘친일인명사전’..”변절 행적 상세히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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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만화로 나온 ‘친일인명사전’..”변절 행적 상세히 담아”

admin | 화, 2021/08/17- 05:59

[뉴스데스크]

◀ 앵커 ▶

광복이 된지 76년이 됐지만, 친일파 청산 작업은 여전히 계속 진행되고 있죠.

지난 2009년, 친일파 4,389명의 이름, 그리고 그들의 행적을 하나하나 공개했던 ‘친일 인명 사전’에 이어서, 이번엔 친일 행각을 벌인 153명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담은 만화가 나왔습니다.

전동혁 기자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리포트 ▶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파 4,389명의 이름과 그들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한 ‘친일인명사전’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내용이 모두 날조라며 반발하는 세력도 많았습니다.

“인민재판 중단하라! (중단하라! 중단하라!)”

그러나 친일인명사전은 그동안 묻혀있던 역사적 사실을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아왔고, 올해에는 한 권의 만화책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기획하고 박시백 화백이 그린 ‘친일파 열전’입니다.

[박시백/’친일파 열전’ 저자] “(한일 갈등이 발생하면) 일본 극우 측의 주장에 동조하고 우리 측의 입장에 반대하는 이런 주장들이 메이저(주요) 언론이라든가 이런데에서도 공공연하게 나오는 걸 보면서 친일 청산의 과제는 여전하구나.”

박 화백은 친일파는 대부분 사망했지만 친일 사상이 살아있는 것이 특히 큰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만화의 3분의 1을 할애해, 이광수, 최남선 같은 문화, 교육계 인사들의 변절과 행적을 상세히 담았습니다.

일제강점기 역사를 가해자 일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친일 사상의 구축에 이들 친일 지식인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설명입니다.

[박시백/’친일파 열전’ 저자] “(반성하지) 않은 채로 과거의 (친일) 행적들을 덮고 또는 윤색하고 그러면서 자신들의 역사를 정통성있는 역사로 (만들었습니다.)”

이와함께 민족문제연구소는, 수백 명의 친일 인사를 추가로 찾았다고 밝혔습니다.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해외에서 활발하게 무장 운동을 했고 지원했던 사람들 중에서, 알고 보니 일제의 밀정이었던 사람 같은 경우도 있고. 우리가 독립운동가로 이해한 분들 중에 친일로 변절한 경우도 (있습니다.)”

친일청산은 ‘숨은 친일파를 한 명이라도 더 찾고, 이들의 행각을 한 명이라도 더 알게 하는 것’이라고 친일인명사전과 친일파 열전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MBC뉴스 전동혁입니다.

<2021-08-16> MBC

☞기사원문: 만화로 나온 ‘친일인명사전’…”변절 행적 상세히 담아”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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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자문으로 YTN 라디오와 경기도가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올해 10편을 시작으로 내년까지 꾸준히 제작, 방송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우원식 국회의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심산 김창숙 손녀 김 주)

☞ 10편 : 광복군아리랑(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장병화)

☞ 9편 : 앞으로행진곡(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우당 이회영 손자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정남기)

☞ 5편 : 격검가(동암 차리석 아들 차영조)

☞ 4편 : 압록강행진곡(광복군 김영관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석주 이상룡 증손자 이항증)

☞ 2편 : 안중근옥중가(함세웅신부)

☞ 1편 : 국치추념가(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목, 2021/03/11-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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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28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내 여옥사 거울방에서 일제에 저항하다 수감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초상이 서로를 비추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일제에 맞서는 독립운동에는 남녀가 없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직접 군인이 되거나, 남편과 자녀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한 여성들이 있었다. 국가는 이들의 헌신을 평가해 남편 뿐만 아니라 아내도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몇몇 부부가 함께 안장돼 있다. 그러나 서울현충원의 홈페이지와 묘비에는 오직 남편의 공훈만 적혀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과 재조명이 주목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들의 공훈을 기리고 되새기는 작업은 턱없이 부족하다.

지난달과 이달 두 차례에 걸쳐 서울현충원을 방문해 독립유공자 묘역을 살펴보고, 서울현충원 홈페이지의 공훈록 등재 현황과 비교했다. 그 결과, 부부가 함께 안장된 경우 아내의 공훈 기록은 서울현충원 홈페이지와 묘비에서 누락돼 있었다.

서울현충원은 묘역을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홈페이지에서 추모할 수 있는 사이버참배를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독립유공자의 이름을 검색해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공훈록 보기’ 코너가 있다. 그런데 서울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김학규-오광심’, ‘오광선-정정산(정현숙)’, ‘신건식-오건해’, ‘신송식-오희영’, ‘이회영-이은숙’ 부부의 경우 남편은 공훈록에 공훈이 등재돼있지만, 아내는 등재돼 있지 않았다. 같은 시기 독립운동을 함께 했는데도 아내는 어떤 활동을 했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묘비도 마찬가지다. 통상 묘비의 뒷면과 측면에 안장된 사람의 이력을 기재한다. 현충원을 방문하는 시민들은 묘비를 보고 독립운동가의 이력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남편의 묘비 중에는 이력 기재가 빠진 경우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아내의 묘비는 상당수가 빠져있었다. 묘역 앞쪽엔 공훈의 내용을 발췌해 시민들에게 알려주는 팻말이 세워져있는데, 공훈이 등재돼있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는 이곳에도 소개될 수 없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엔 김학규-오광심 부부의 묘소가 있다(오른쪽). 하지만 남편인 김학규 지사와 달리 아내인 오광심 지사의 공훈은 서울현충원 홈페이지 공훈록에 등재돼 있지 않다. 이혜리 기자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의 독립유공자 묘역 앞엔 공훈의 내용을 발췌해 시민들에게 알려주는 팻말이 있지만, 공훈이 등재돼있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는 이곳에도 소개될 수 없다. 묘역 앞에 비치된 안내서에도 일부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이혜리 기자

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엄연히 공훈과 관련해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은 인물들이다.

오광심 지사는 1934년 조선혁명군 대표인 남편과 함께 만주에서 난징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했다. 1940년 여군복을 입고 한국광복군 창립식에 참가했다. 광복군 간부로서 오 지사는 선전활동과 함께 사병이 될 여성 청년을 모집했다.

“광복군은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우리 여성의 광복군도 되는 것이니 우리 여성들이 참가하지 아니하면, 마치 사람으로 말하자면 절름발이가 되고, 수레로 말하면 외바퀴 수레가 되어 필경은 전진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됨으로 우리의 혁명을 위하여, 광복군의 전도를 위하여, 우리 여성 자신의 권리와 임무를 위하여 광복군 대열에 용감히 참가하라.” 오 지사가 쓴 ‘한국 여성 동지들에게 일언을 드림’이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정정산 지사는 ‘독립군의 어머니’, ‘만주의 어머니’로 불린다. 1918년쯤 무장독립단체인 서로군정서 별동대장 및 경비대장으로 활동한 남편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 뒤 독립군의 뒷바라지와 비밀 연락임무 등을 수행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35년 이후 난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지원했고 한국혁명여성동맹과 한국독립당 일원으로 투쟁했다.

정 지사의 딸인 오희영 지사도 1940년 한국광복군에 여군으로 입대해 제3지대 간부로 활동했다. 오건해 지사는 한국혁명여성동맹과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자녀들을 보살피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은숙 지사는 1910년 일제강점기 초기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남편 이회영을 직간접적으로 도우며 투신한 공적으로 훈장을 받았다.

이상은 국가보훈처의 공훈전자사료관에서 볼 수 있는 정보들이지만, 서울현충원 홈페이지의 공훈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서울현충원은 국방부 산하 기관이다.

현충일을 하루 앞둔 2019년 6월5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은 유치원생들이 직접 그린 태극기를 들고 애국지사 묘역을 걸어가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밖에 임시정부 요인 묘역 중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이었던 이상룡 선생의 아내 김우락 지사와,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이자 광복군 총사령관이었던 지청천 장군의 부인인 윤용자 지사의 공훈이 공훈록과 묘역 안내서에서 빠져 있었다. 두 사람을 포함해 일부 여성 독립운동가는 정부가 최근에서야 발굴해 훈장을 줬지만, 일부는 유공자로 인정된 지 수십년 된 사례도 있다.

독립유공자는 아니지만 국가유공자인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박사도 공훈록에서 검색이 되지 않았다. 반면 남편인 정일형 박사는 공훈록에서 검색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여러차례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발굴과 재조명을 강조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2018년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여성들은 가부장제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이중 삼중의 차별을 당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며 “(그럼에도) 여성의 독립운동은 깊숙이 묻혀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여성과 남성, 역할을 떠나 어떤 차별도 없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발굴해낼 것”이라고 했다.

한국 근현대사가 응축돼있는 서울현충원은 추모의 공간이면서도 교육의 공간이다. 여성 독립운동가들 묘소를 중심으로 ‘여성길’을 만들어 시민교육에 활용하고 있는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애국이라는 것이 남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닌데 현충원이 거의 남성들로 채워져있고, 여성들은 별로 없는 것을 보면 한국사회가 그동안 얼마나 남성 중심으로 운영돼왔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며 “애초에 아내의 경우엔 독립운동의 한 주체로 국가가 인정을 잘 하지 않았고 남편이 인정되면 딸려서 함께 안장되는 형태였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문재인 정부 들어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뒤늦게 발굴되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되는 사례가 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훈록이나 묘비에 이력이 정확히 안내되지 않고 있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

3월 현재 기준 독립유공자 총 1만6685명 중 여성은 526명(3.15%)이다. 서울현충원 측은 “지적한 부분을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이혜리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10> 경향신문 

☞기사원문: 독립운동가 부부 함께 안장됐는데, 공훈록·묘비에서 사라진 ‘여성의 공로’ 

목, 2021/03/11-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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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발악에 총알받이로 죽거나 굶어 죽거나

▲ 일제에 강제동원돼 고향을 떠나는 조선인 청년과 그를 배웅하기 위해 동원된 마을 주민들. /사진제공=민족문제연구소
▲ 1945년 4월19일 2대의 일본 가미카제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부분 파손된 항공모함 프랭클린 호 모습./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 1945년 3월경 오키나와 전투 중, 미해병이 숨어 있던 굴에서 일본군이 나오자 동료에게 사격을 중지하라는 손짓을 보내고 있다./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장윤만(1917-1963)씨는 일제강점기 1944년 6월10일 경북 상주에서 강제동원 되어 7월12일 일본군 경성사단사령부 군부(인부)로 소속됐다. 그리고 경북에서 같이 징발된 6000여명의 조선인 군부들과 함께 태평양전쟁, 그 지옥의 ‘오키나와전투'(1945년 4월1일∼6월23일) 최전선에 끌려갔다. 그는 오키나와 게라마제도의 아카도(阿嘉島)에 주재했던 일본군 특설수상근무부대 제103중대에 배속되었고, 1945년 봄엔 자마미도(座間味島)로 이동했다.

그는 방어진지와 방공호구축, 굴파기, 탄약·식량·어뢰정·폭뢰 등의 운반과 설치 작업에 동원됐다. 연합군의 함포사격과 공습으로 포탄과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작업을 강요당해, 많은 조선인 동료들이 옆에서 죽어 나갔다.

장씨는 ‘가미카제’ 자살특공보트인 ‘신요’를 아카도와 자마미도의 해안가 굴에 숨기거나, 굴에서 꺼내 출동을 지원하는 작업도 하게 됐다. 야간에 굴에서 보트를 꺼내는 특공보트 지원 작업 중에 많은 조선인들이 총탄을 맞고 죽었다.

또한 일본군은 조선인 인부들을 20~25명씩 길이 5m의 작은 땅굴 속에 가두어 놓고 도망가지 못하게 지켰다. 숨도 쉬기 어려운 지하 땅굴 속에서 물도 먹지 못하고 굶어 죽기도 했다. 풀이라도 뜯어 먹으려고 굴을 기어 나왔던 조선인들은 일본군들에게 발각돼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 장윤만씨가 1948년에 쓴 ‘태평양실기집’을 70여년간 보관해 온 장윤만씨의 딸 장현자씨가 부친의 생전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사진제공=류재형 작가
▲ 태평양전쟁 실기집 본문 가운데 ‘하루는 출석을 부르는데 조선인 동포 한 사람이 답이 없어 툭 쳐보니 배고파 굶어 죽어 있다’는 부분. /사진제공=국립민속박물관·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장윤만씨가 있던 오키나와는 일본 측이 ‘옥쇄(玉碎)’라 미화하는 ‘자살과 전멸’이 유도된 대표적인 지역으로, 일제의 잔혹성과 인권 유린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일본은 “살아있으면서 미군에게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고 차라리 자결하라”는 식의 철저한 군국주의 교육을 시키며, 원주민과 조선인들에게도 집단자살을 강요했다. “미군이 점령하면 모두 죽일 것”이라는 말을 믿은 많은 오키나와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을 적에게 건네줄 수 없다. 그래서 죽이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다”라고 생각하고 집단자살을 선택했다고 한다. 어머니들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칼과 낫으로 죽이는 비극이 일어났다. 오키나와에서는 9만5000명의 원주민들이 이렇게 집단자살했다. 일본군은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연합군에 항복할 때까지 이 같은 ‘미친 짓’을 이어갔다. 이미 광란의 일본군들은 이보다 7~8년 전인 1937년 중국 난징에서 30만여명을 학살하고 8만여명을 강간한 경험이 있었다. 난징의 시민과 포로들은 생체실험실로도 보내졌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함께 ‘태평양전쟁실기집’을 감수한 반병률 교수(한국외국어대 사학과)는 “태평양전쟁실기집은 장윤만씨가 상주군 공성면사무소에 집결한 이후 상주-대구-부산-일본항(불명)을 거쳐 군속으로 복무했던 아카도, 자마미도에서 미군에 체포되기까지 전 과정을 두루마리에 몰래 적어와 다시 정리한 희귀한 자료”라며 “특히 일본군이 집단자살을 강요하거나, 한국인 군속들의 투항을 방지하기 위한 감시와 감금, 만행, 학대, 살육 등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음은 ‘태평양 전쟁 실기집’의 주요 부분이다.

/글·정리 김신호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10> 인천일보

☞기사원문: “[일제 강제동원 피맺힌 증언] 오키나와, 그 지옥의 조선인 2

※관련기사 

인천일보: [일제 강제동원 피맺힌 증언] 오키나와, 그 지옥의 조선인 1

목, 2021/03/11-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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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등과 간담… 사업진행 방안 논의

김영권 충남도의원이 지난 9일 민족문화연구소와 간담회를 갖고 도내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방안등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충남도의회 제공)

[충청신문=내포] 홍석원 기자 = 충남도의회 김영권 의원(아산1·더불어민주당)이 도내 친일잔재 청산을 위해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조례 제정 이후 추진계획을 논의했다.

김 의원은 지난 9일 도의회에서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 등과 간담회를 갖고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근거가 마련된 만큼 실무적 사업 추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앞서 김 의원은 11대 도의회 입문 이래 친일 작가가 그린 지역 위인의 표준영정 지정 철회 요구를 시작으로 ‘친일 잔재 청산 특별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활동해 왔다.

그 결과 전국 최초로 지자체 주관 사업이나 행사 등에서 친일 상징물을 설치하거나 게시하는 행위를 제한한 ‘충청남도 친일 관련 상징물의 공공사용 제한 조례’가 제정됐다.

특히 김 의원이 1년여 간 연구모임과 의정토론회 등 의정활동을 통해 발의한 ‘충청남도 친일 잔재 조사 및 연구 활동 지원 조례’가 지난해 말 제정됨에 따라 전국에서 처음으로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조사·연구 활동 추진 근거를 갖춘 상황이다.

김 의원은 “도내 친일잔재 청산은 지금이 가장 적기”라며 “도내 친일잔재 전수조사를 시작으로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도록 집행부에서 적극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대해 충남도 이길주 과장은 “관련 규정이 마련된 만큼 관련계획을 조속히 마련해 실질적인 사업이 추진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홍석원 기자 / [email protected]

<2021-03-10> 충청신문

☞기사원문: “김영권 충남도의원 “도내 친일잔재 전수조사 해야”

※관련기사 

뉴스충청인: 충남도의회 김영권 의원, “충남도 친일잔재 청산 속도내야”

중도일보: 김영권 의원, 민족문제연구소와 충남 친일 공공사용 제한 조례 계획논의

목, 2021/03/11-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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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종교, 교육, 학계, 협동조합 등 각계 참여 갈수록 늘어

간토학살 진상조사와 피해자 명예회복을 바라는 시민연대 성명

최근 램지어 논문 사태로 야기된 간토학살역사를 수정하려는 시도에 전 세계 양심들의 지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1923년 간토학살사건에 군관민이 총체적으로 조선(한)인을 학살한 범죄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유언비어를 사실화하려 했던 일본 정부의 행위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논문 자체를 폐기하지 않고 단지 몇 줄을 수정한다한들 연구자가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판단력을 상실한 점과 민족차별의식에 바탕한 세계 보편적인 인권의식의 결여까지 감출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 정부는 간토학살사건의 공식조사 결과를 공개하라.

간토학살 역사의 진실은 일본 정부가 당시 조사한 결과를 그대로 공개하는 데에서 밝혀질 것이다. 일본 정부는 간토 학살사건 발생 후 열린 1923년 12월 제국의회에서 두 명의 의원(다부치 토요키치, 나가이 류타로)이 ‘조선(한국)인학살사건’에 대한 정부의 책임 문제를 제기하였을 때, “지금 조사 중”에 있다고 답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 일본정부는 그 조사 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만일 일본 정부가 계속 사건의 전말을 공개하지 않는다면 램지어와 같은 역사수정주의자들은 독성 강한 쓰레기 논문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해 낼 것이고, 큰 재난이 있을 때마다 간토 학살 당시의 유언비어들이 또다시 제노사이드를 유발하는 바이러스가 되어 혐한 시위와 증오범죄를 일으킬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반인권적이고 몰역사적인 상황을 만들어간 모든 책임은 일본 정부에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192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에 관한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를 낱낱이 공개할 것을 촉구한다.

한국 정부는 학살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족을 위로하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에 대하여 역대 어느 정부도 일본 정부에게 관련 자료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한 일도 없다. 그리고 정부 주도의 추도식 역시 개최된 바 없으며, 한국과 일본 시민, 그리고 재일동포들이 개최하는 추도 행사에 대통령과 총리의 추도 메시지를 보낸 일조차 없다. 재일동포들을 재외 국민으로 존중한다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학살당한 동포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와 학살자들에 대한 책임추궁과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위로의 메시지조차 없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문재인 정부는 올해부터라도 간토 학살피해자 추도식을 개최하여,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학살당한 수천의 피해자들을 위령하고, 일본 정부에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관한 책임을 추궁하고 관련된 모든 정보의 공개를 요구하라.

사건 발생 100년이 되기 전에 [간토학살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라.

2014년 4월 7일에 제19대 국회에서 유기홍 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여야 103명이 찬성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이 본 회의에 상정되지 못한 채, 폐안이 되었다. 21대 국회는 이 법안을 다시 상정하여 회기 내 특별법이 제정되어 사건 발생 100년이 되는 2023년 이전까지 간토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추진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의 주장

– 일본정부는 간토 학살사건 조사 결과를 즉각 공개하라
– 문재인 정부는 간토 학살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족을 위로하라
– 21대 국회는 [간토학살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라

2021. 2. 25

호소단체 :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기억과 평화를위한 1923역사관, 사회적협동조합 기억과평화

연대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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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인 : 1923 제노사이드 연구소 ,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 한일민족문제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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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겨레하나, 광주외국인노동자센터, 구지옛생활연구소, 기독교대한감리회 갈릴리교회, 기독여성살림문화원, 기본소득충남도, 기억과평화를위한1923역사관,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 남북상생통일충남연대,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당진돌봄사회서비스센터, 당진문화연구소, 당진참여연대,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동아시아근현대역사문제연구소,모둥잇돌교회, 미래를위한역사패널전시,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지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과거사청산위원회, 민주노총천안시위원회, 법인권사회연구소, 보령시민참여연대, 보령평통사, 부안금암교회, 부울경5.18민주유공자회, 사회적협동조합기억과평화, 생명평화교회, 서울KYC, 소비자교육중앙회당진시지회, 식민지역사박물관, 아리아리협동조합, 아산시민연대, 아힘나운동본부, 원폭2세환우 쉼터합천평화의집, 신시민운동연합,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우키시마호폭침사건진상규명회, 인천외국인노동자센터, 일하는예수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선학교와함께하는사람들 몽당연필,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봄, 지구촌동포연대KIN, 천도교청년회, 천안젠더모임, 천안녹색소비자연대, 천안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청년시대여행, 청양시민연대, 촛불혁명완성책불연대, 충남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충남청소년인권문화네트워크, 평택원폭피해자2세회, 평화디딤돌, 포럼 진실과 정의, 태안참여자치시민연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한국YMCA전국연맹, 합천 평화의집, 흥사단,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한국기독교장로회1923진실규명위원회, 생명선교연대, 기청동지회, 나눔교회, 늘푸른교회, 하늘평화교회, 한울교회, 한일역사문제학회, 협동조합아우내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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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2. 27 오후 5시까지)

https://www.youtube.com/watch?v=qu5BN1spfgk…

조정현 기자

<2021-02-24> 미디어기평 

☞기사원문: 간토학살 진상조사와 피해자 명예회복을 바라는 시민연대 성명 줄이어

목, 2021/03/11-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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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검찰보다 훨씬 센 무소불위 한국 검찰
조선총독부 검사의 권한은 일본 본토 검사보다 훨씬 컸다
1940~1941년 조선인 판검사의 수가 0인 까닭
조선인 판검사 모두 창씨개명, 일본인으로 귀화

강효백 경희대학교 법학대학원 교수

◆일본 검찰보다 훨씬 센 무소불위 한국 검찰

지난 한 달여간 필자는 열람 가능한 유엔 회원국 193개국의 검찰 제도와 조선총독부 사법제도를 살펴봤다. 그 결과 우리 검찰과 같은 수사권과 수사종결권, 기소 여부를 마음대로 결정하는 기소재량권, 자기들 치부는 은폐하거나 대충 넘어갈 수 있게끔 검사만이 공소 제기할 수 있는 기소독점권까지 싹쓸이하듯 장악하고 있는 나라를 찾지 못했다.

일본도 70여년 전에 철거한 제왕적 검찰 구조(1)*를 가진 국가는 지구상에 대한민국밖에 없다.

일본은 형사소송법상 경찰은 1차적 수사 기관이고, 검찰은 2차적 보충적 수사기관이며, 검사의 수사지휘권이 규정되어 있음에도 양자는 상하 수직관계가 아닌 협력 수평 관계다.

경찰은 대부분의 형사 사건을 도맡아 수사하고, 검사는 일반 형사사건에서는 경찰이 사건을 송치하기 전까지 수사에 개입하지 않는다. 일본은 패전 후 수사는 경찰이 하고, 검사는 법률전문가로서 경찰의 수사권 남용을 통제하며 기소와 공소유지에 집중하도록 함으로써 검·경 간 권한 분산을 했다.

◆조선총독부 사법체계의 꽃은 검사국

식민지 조선의 사법체계는 판검사를 비롯한 사법관리 모두 조선총독부 관리로서 총독의 지휘하에 있었다. 1912년 3월 18일 제령 제4호인 <조선총독부 재판소령>에 따르면 총독부재판소는 총독부 직속으로 총독의 감독을 받았으며 법원의 행정사무에 대한 감독권도 총독에게 있었다.

그리고 법원은 고등법원 → 복심법원 → 지방법원의 구조를 가지게 되었고, 여기에 검사국을 병치하도록 했다. 고등법원 검사국에는 검사장을 두었고, 고등법원 검사장은 총독의 지휘감독을 받으며 검사국 사무를 맡고 하급 검사국을 지휘감독하게 됐다.

조선총독부는 1913년 사법관시보제도를 신설했다. 사법관시보는 고등관인 주임관 대우를 받으며 1년 6개월의 실무수습을 마치고 실무시험을 거친 후 조선총독부 판검사, 즉 사법관으로 임용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3년부터 1944년까지 651명의 사법관시보(일본인 359명, 조선인 102명)를 채용해 사법관의 공급원으로 삼았다. 조선인 사법관 시보 출신 대다수는 판검사로 오래 재직하지 못하고 변호사로 활동했다.

일제는 1934년부터는 고등문관시험 합격자에서 판검사를 임용했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은 일단 고급관료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판검사가 되기 위해서는 사법관시보 원서를 제출한다. 그럼 조선총독부가 후보자의 이력서, 사법관시험합격증사본, 호적등본, 신원증명서, 가정현상서, 건강진단서 등을 심사했다.

특히 판사와 달리 검사의 선발기준은 사상경력(시위 전력 등)으로, 일제가 인정한 완벽한 친일 사상자, 일본인보다 일본인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한국 검찰청의 원류인 조선총독부 검사국은 총독 직속의 최핵심 친위조직으로 경찰사법감독기관겸 정보사찰감찰 특무총괄국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즉, 조선총독부 사법체계의 꽃은 검사국이었다.

◆조선총독부 검사의 권한은 일본 본토 검사보다 훨씬 컸다.

조선총독부의 형사 절차는 대부분 일본의 형사소송법과 형법등을 그대로 따랐지만, 검사가 누리는 권한은 같은 시기 일본 본토의 검사가 가진 권한보다 몇 배나 컸다.

조선의 검사는 일본의 검사가 갖지 못한 강제처분권을 갖고 있었다. 즉, 검사는 형사소송법에 규정한 경우 외에 사건이 금고 이상의 형에 해당하며 빠른 처분을 요한다고 생각할 때는 공소 제기 전에 압수, 수색, 검증, 구인, 피의자 또는 증인심문, 감정, 통역 또는 번역표를 처분할 수 있었다. 또 검사는 위의 규정에 따라 10일간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체포구속장소 감찰권, 사법경찰 징계요구권, 긴급체포사후 승인제도, 체포구속 피의자 석방지휘권, 압수물 처분시지휘권, 사법경찰의 관할외 수사시 보고 징구권, 고소 고발사건 송치전 지휘권, 고소고발사건 수사연장지휘권등 조선총독부 검사는 일본 본토의 검사의 가지지 못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일본의 법령에서 인정되는 수사기관의 권한보다 훨씬 강력한 것으로 식민지를 더욱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비롯된 제도였다.(2)*

요컨대 현재 한국 검사의 권한은 조선총독부 검사의 권한과 거의 같고 한국 검사와 조선총독부 검사 이 둘의 권력은 예나 지금이나 일본 검사의 권한보다 훨씬 강하다.

◆1940~1941년 조선인 판검사의 수가 0인 까닭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대일본제국’의 조선·대만·만주 등 식민지와 괴뢰국의 사법관리 인력배분 대원칙은 경찰 간부는 일본인, 경찰 보조 인력은 현지인을 상당수 고용하고, 판사의 7~8할은 일본인, 2~3할은 현지인을, 검사의 9할은 일본인, 1할은 현지인을 임용한다.

조선 총독부의 사법관리 민족별 배분 구성도 이와 비슷하다. 판사의 경우, 일본인 대 조선인 비율은 100명대 25명, 검사는 100명대 11명 수준이었다. 1937년만 해도 조선총독부 판검사중 조선인 판사는 45명, 검사는 11명이 있었다.

그런데 1940년~1944년 조선총독부 판검사는 모두 일본인이고 조선인 판검사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이 갑자기 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조선인 판검사 전원이 자진해서 창씨개명(創氏改名)하여 일본인으로 귀화했기 때문이다.

◆조선인 판검사 모두 창씨개명, 일본인으로 귀화

백범 김구의 친일매국노 263명 살생부 명단 앞 자리에는 애국가 작사자겸 무궁화 도입자 ‘윤치호’가 있다. 백범은 이토지코(伊東治昊)(3)*로 앞장서 창씨개명한 그를 2대째 일본 귀족으로 입적한 귀화한 일본인으로 규정했다. 창씨개명은 곧 일본인으로 귀화함을 의미했다.

흔히들 창씨개명(1940년 2월 11일~1945년 8월 15일 시행)은 일제가 식민지 조선인 모두에게 강제한 제도로 알고 있는데 이는 부정확한 인식이다.

미나미 조선총독이 1939년 창씨개명방침을 발표하자 일본인들이 창씨개명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구별, 분리가 어렵다는 이유다. 총독부 내부에서도 창씨개명에 반발했는데, 특히 조선총독부 검사국과 경찰은 조선인이 똑같이 일본 씨와 성을 쓰게 되면, 그가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이 쉽지 않다는 반론을 제기했으며, 내지측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우려가 높았다.

1940년 2월 11일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을 실시하는 공고문에 창씨개명이 조선인들의 희망에 의해 실시하는 것으로 일본식 성씨의 설정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식 성씨를 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자 윤치호와 이광수 등 골수 매국노들은 앞을 다퉈 창씨개명을 선도하자 많은 조선인들이 그들을 따랐다. 하지만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일부 친일파 인사도 있었다. 비록 자신은 친일매국노이지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성씨만은 절대로 바꾸지 못하겠다는 마지막 양심과 민족 자존감은 지켰다.

◆검찰 개혁은 일제 잔재 척결 차원에서 실천돼야

독일과 달리 과거 침략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태도의 원천은 일본 국교 신토(神道)의 양대핵심정신 ‘반성불요론’과 ‘무궁확장론'(天壤無窮 천황영토의 무궁한 확장)에서 나온다.

법원과 경찰은 물론 국가정보원까지 여러 차례 과거를 반성하고 사과했으나 검찰만은 오불관언, 적반하장, 본말전도, 안하무인을 자랑하고 있다. 한국 검찰 행태 중 가장 일본특색적인 대목이다. 어쩌면 이런 것까지 일본 극우세력과 닮았는지, 몸이 떨린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오빤 강남스타일”은 괜찮지만 “검찰은 일본 제국주의 스타일”만은 안된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일제 군국주의 시대의 형사법 체계를 온전히 고수하고 있는 상황은 국치일의 연속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보다 더 경악스러운 대목은 일제강점기 조선 검사가 일본 검사의 권한보다 훨씬 컸다는 사실과 또 이러한 일제 군국주의 시대 제왕적 검찰 권한이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는 현 상황이다.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는 법이다. 과거의 중앙정보부나 국가안전기획부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만큼 센 공포의 권력기관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검찰은 ‘나는 비행기도 멈추게 한다’라고 해도 과장이라는 생각이 들을 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따라서 검찰 개혁은 일제 잔재 척결 차원에서 강력하게 추진되어야 한다. 그리고 검찰 내부가 아닌, 국민에 의한 개혁과 그 실천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검찰의 기소권과 수사권을 분리, 견제하는 기관의 설치가 절실하다.

◆◇◆◇◆◇각주

(1)*법무부 장관 휘하의 1개 외청장의 직명을 생뚱맞게 검찰‘총장’이라고 하는 까닭은 일본 검찰의 수장을 검사‘총장’이라고 하기에 덩달아 부르는 건 아닐까? 일본 검찰청법 제3조 検察官は、検事総長、次長検事、検事長、検事及び副検事とする

(2)*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1)』, 2009, 31~33쪽

(3)*<윤치호 영문일기> 1940년(경진년) 6월 17일 월요일. 흐렸다 개었다 오락가락.
창씨개명을 하다. 서울 집. 오늘 오후 경성부청 인구조사과에 가서 우리 식구들의 성을 ‘이토’(伊東)로 바꾼 변경서를 제출했다. 오늘부터 내 이름은 일본식으로 이동치호(伊東致昊), 곧 이토 지코다.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2021-03-11> 아주경제 

☞기사원문:[강효백의 신경세유표-48] 한국 검사∙일본 검사∙조선총독부 검사

토, 2021/03/13-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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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1910·이석영 광장’ 26일 개관…친일파 법정·감옥 설치

(남양주=연합뉴스) 김도윤 기자 =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한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전시·체험시설이 경기 남양주시에 건립됐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보탠 이석영 선생을 기리를 광장도 조성됐다.

남양주시는 26일 역사체험관 ‘리멤버(REMEMBER) 1910’과 ‘이석영 광장’ 개관식을 연다고 14일 밝혔다.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11주기 되는 날이다. 1910년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국권을 상실하고 이석영 선생이 형제들과 중국으로 망명한 해이다.

‘리멤버 1910’과 이석영 광장은 금곡동 홍릉 앞에 들어섰다. 홍릉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조선왕릉이다.

당초 이곳에는 옛 예식장 건물이 흉물스럽게 방치돼 홍릉을 가렸다.

조광한 남양주시장은 2019년 3월 이 건물을 철거하고 그 일대 1만4천㎡에 역사문화공원과 역사체험관을 착공했다.

역사체험관 ‘리멤버 1910’ 배치도 [남양주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역사체험관은 지하 2층, 지상 1층, 전체면적 3천900㎡ 규모로 신축됐다.

내부에는 역사를 바로 세우고 친일파를 단죄하는 법정과 감옥, 이석영 선생 형제와 신흥무관학교 관련 자료 전시 공간 등이 설치됐다.

다목적홀과 카페 등도 조성돼 매월 1회 인문학 강좌와 영화감상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주말마다 문화 공연도 열린다.

이석영 광장은 올해 말 공사가 마무리된다.

이곳에는 표지석과 6개의 돌이 설치됐는데, 이석영 선생과 5명의 형제가 나라를 되찾기 위해 결의를 다지는 모습을 상징한다.

이석영 선생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1910년 12월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면서 남양주 화도읍 가곡리 일대 땅을 모두 팔아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등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당시 땅을 판 돈은 현재 가치로 2조원에 달한다고 남양주시는 설명했다.

역사체험관 ‘리멤버 1910’ 내 친일파 단죄 법정 [남양주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개관식에서는 뮤지컬 ‘안중근 누가 죄인인가’가 공연되고 일제 만행 관련 영상이 상영된다. 1910년 고난의 망명길을 의미하는 수묵화 퍼포먼스도 진행된다.

역사 법정에서는 피고인 이완용에 대한 가상 재판이 열리고 친일파 감옥에 수감되는 장면도 연출된다.

남양주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로 개관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시민들을 위해 유튜브로 생중계할 예정이다.

개관을 기념한 주말 행사도 열린다.

조 시장은 27일 ‘역사·문화도시 남양주’를 주제로 인문학 콘서트를 연다.

또 28일까지 이틀간 독립운동 관련 영화 ‘암살’과 ‘밀정’이 상영된다.

김도윤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14> 연합뉴스 

☞기사원문: “일제 국권 강탈 아픈 역사 잊지 않아요”…남양주시 체험관 건립

화, 2021/03/16-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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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1주기를 맞아

고 이이화 선생. <한겨레> 자료사진

오는 18일 이이화 선생 1주기를 맞아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가 추모글을 보내왔다.

경황 중에 선생을 떠나보낸 지 어느덧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코로나 19 감염증이 번지고 있던 어수선한 형편에 제대로 추모의 뜻을 모을 겨를도 없이 놓아드려야만 했다. 고인을 따르던 역사학계와 시민사회의 많은 후진이 안타깝게 여겼지만, 격식을 싫어했던 생전의 선생을 떠올리면 간소하면서도 진정이 담긴 장례가 오히려 어울리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선생은 시대의 반항아이자 학계의 이단아였다. 한국사 전 분야에 두루 해박했으나 그가 집중했던 관심사는 동학농민혁명, 일제의 전쟁범죄와 친일문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등 민중의 역사, 약자의 역사였다. 남들이 쉬이 발 담그지 않는 분야를 기꺼이 전문으로 삼았다. 그의 풍모는 그냥 학자라기보다는 세상을 바꾸고자 한 투사에 가까웠다. ‘역사학계의 녹두장군’이란 헌사에 결코 모자람이 없는 삶이었다.

다방면에 걸쳐 방대한 성과를 남긴 만큼 선생의 업적을 일일이 열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1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는 그의 깊고도 넓은 학문세계를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특히 전 22권에 달하는 한국통사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는 학술서적으로서는 전무후무한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를 기록함으로써, ‘강단의 역사’에서 ‘대중의 역사’로 역사학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전환하는 신기원을 열었다.

전 22권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대중의 역사로 역사학 지평 넓혀
동학혁명 농민군 위상 자리매김도
‘만화 한국사’ 내고 아이들 스타로
선생의 길 따라가야 할 책무 남아

동학농민혁명과 농민군의 위상을 제대로 자리매김한 일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30권을 간행하여 관련 자료를 집대성하는 한편, ‘전국 순회강연’으로 그 역사적 의의를 재정립하는 데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또한 특별법 제정에 진력하여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를 통한 진실규명과 유족의 명예회복에 커다란 진전을 이뤄냈으며 이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종로의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과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은 수십 년간에 걸친 선생의 노고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응답이기도 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설립, <친일인명사전> 편찬,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한일 과거사 청산,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와 촛불혁명 등 당대 역사문화운동의 맨 앞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엄동설한의 거리에서 사자후를 터뜨리며 역사를 변조하려는 무리를 꾸짖던 선생의 기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학술연구와 현실참여를 온몸으로 일치시킨 시대의 참스승이었다.

살아생전 선생께서 가장 좋아했던 별호는 ‘역사 할아버지’였다. <만화 한국사 이야기>가 나온 뒤 선생은 어린이들 사이에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어디에서든 만나면 “역사 할아버지다!”라고 환호했다. 청소년들이 우리 역사에 이렇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의 쉬운 글쓰기와 신선한 시각이 크게 작용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이이화의 최대 업적은 역사학의 대중화와 사회화”라고 입을 모은다.

선생은 역사학계의 거목이었다. 그러나 많은 후학에게는 인자한 어른이자 다정한 벗이었다. 그는 문벌 학벌 직위 연배 등 이른바 족벌과 서열문화를 배격했다. ‘꼰대’스러움을 철저히 혐오했다. 그래서 항상 젊은이들과 소통하면서 술잔을 나누며 격의 없는 토론을 즐겼다. 그 분과 함께 했던 나날들, 유쾌했던 그 자리가 무척이나 그립다.

선생의 후광이 빛나는 만큼 남긴 자취 또한 선연하다. 그의 부재가 던져주는 상실감도 실감 있게 다가온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뚜렷한 ‘역사의 이정표’를 남겨 놓았다. 우리에게는 그 길을 벗어나지 않고 따라가야 할 책무만 남아있을 뿐이다.

<2021-03-16> 한겨레

☞기사원문: “아이들에겐 ‘역사 할아버지’ 후학에겐 ‘인자한 벗’이셨죠”

수, 2021/03/17-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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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다수 의회, 예산 2200만원 삭감… 우용준 광복회 금천구 지회장 노력 물거품

▲ 우억만 지사 증손주 우용준 광복회 금천구 지회장 ⓒ 김종훈

“이런 모습 보려고 내 할아버지가 독립운동했나 싶더라고요.”

경상북도 영덕 지역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우억만 지사의 증손주 우용준 광복회 금천구 지회장이 ‘친일잔재 및 항일유적 전수조사 예산 2200만 원이 서울시 금천구 의회에서 전액 삭감 결정됐다’는 통보를 받은 뒤 <오마이뉴스>를 만나 울분을 토하며 한 말이다.

2020년 12월 금천구의회는 광복회 금천구지회가 올린 ‘친일잔재청산 기초실태 조사를 위한 지방보조금’을 예산심사위 투표를 통해 전액 삭감 조치했다.

그는 “금천구의회는 10명 의원 중 6명이 민주당 소속”이라면서 “지역 내 친일잔재와 항일유적을 전수조사하자는 광복회 제안에 대해 관망하더니 나중에는 반대해 부결시켰다. 개중에는 ‘금천지역이 시골처럼 작고, 구민들이 오래 살아서 서로 고개 돌리면 다 안다. 잘못하면 분란이 생긴다’라는 핑계를 댄 사람도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금천구의회 소속 민주당 의원 A씨는 16일 오후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전수조사 예산이 0원이 된 이유’를 묻자 “여기(금천구)는 오래된 동네”라면서 “소위 시골 동네라고 할 정도로, 이웃 간 얽힌 것이 많다. 그래서 (광복회 제안에 대해) 거부한 의원들도 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고국에서 “너희 나라로 꺼져라”라는 말 들은 독립운동가 후손

▲ 우억만 지사 증손주 우용준 광복회 금천구 지회장 ⓒ 김종훈

1962년생인 우용준 지회장은 중국 연변에서 태어났다. 초중고를 모두 조선족 학교에서 나온 뒤 연변대학을 거쳐 공무원이 됐다. 중국에서 공무원으로 생활했지만 우 지회장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 독립운동을 한 할아버지 우억만 지사 때문이다.

“할아버지 우억만 지사는 경북 영덕에서 유명한 지주였습니다. 하루 종일 걸어도 자기 땅을 다 밟지 못할 정도로 큰 부자였어요. 그런데 나이 사십에 3.1운동이 일어나자 형제들과 함께 군중을 동원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만세운동을 했습니다. 이 일로 옥고를 치렀죠. 이후 일제의 감시가 너무 심해져 만주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곤 이름을 바꿔가며 독립운동을 하다 1942년 눈을 감았습니다. 남은 자식들은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고요. 계속 돌아오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죠. 할아버지가 고향을 떠난 지 70여 년이 된 지난 2003년에야 제가 유해를 모시고 돌아왔습니다.”

우 지회장은 우억만 지사를 대전현충원에 모신 뒤 2005년 자신 역시 특별귀화 형태로 가족과 함께 고국에 돌아왔다. 그리곤 서울시 금천구에 둥지를 틀었다. 당시 ‘금천구가 서울에서 집값이 가장 쌌던 것’이 주된 이유가 됐다. 그러나 힘겹게 시작한 한국생활은 기대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할 수 있는 게 막노동뿐이었습니다. 중국 경력은 하나도 인정받지 못했고요. 말투에서 연변사투리가 있다 보니 어딜가도 낮춰보더라고요. 대놓고 차별하고. 한번은 택시를 탔는데 ‘너희 나라로 꺼져라’라고 하더라고요. ‘내 조국이 한국인데, 할아버지가 모든 가산 털어 독립운동한 나라인데, 꺼지라니…’ 억울했죠. 생활에 치여 살다 2015년 광복회 회원이 되고 나서야 할아버지와 조국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019년 우 지회장은 서울시 금천구 내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결합해 광복회 금천구지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1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지역 내 친일잔재 및 항일유적에 대한 전수조사를 진행할 계획을 세웠다. 동네 공원에 국가공인 친일파 서정주의 시비가 자리한 것이 결정적 이유가 됐다.

“금천구에 ‘은행나무로’라는 유명한 길이 있어요. 수백 년 된 은행나무 세 그루가 있어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길 가운데 친일파 서정주의 ‘금천예찬’이라는 시비가 있더라고요.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습니다. ‘당장 없애야 한다’라는 생각과 함께 ‘금천에 친일잔재가 이것뿐일까’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제대로 찾아서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우 지회장은 한걸음 더 나아가 지역 내 항일유적을 찾기 위한 준비도 병행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시흥군에 위치했던 시흥공립보통학교(현 시흥초등학교) 학생 120여 명은 동맹휴학과 만세시위를 전개한 역사가 있어요. 학생 시위가 바탕이 돼 시흥군 내 3.1운동은 4월 초까지 이어졌죠. 하지만 현재 관련 내용은 시흥초등학교를 비롯해 금천구 어디에서도 남아있지를 않아요. 흔한 안내판조차 없습니다.”

2020년 말 우 지회장이 금천구의회에 “일제잔재 시설 및 지명, 문화유산 등에 대한 전수조사를 거쳐 목록화를 이루고 이와 관련된 기록관리 및 책자발간을 진행한다”라고 적힌 사업계획서를 제출한 이유다.

이에 대해 민주당 소속 B의원은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을 비롯해 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반대해 예산안이 통과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면서 “솔직히 말하면 부끄럽다.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한 의원들의 인식이 부족했고, 평소 이 사안에 대해 관심이 적어서 이런 결정이 나온 것 같다. 다시 한번 뜻을 모아 사업이 진행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경기, 전북, 광주, 제주 등 친일 전수조사 자체 시행”

▲ 전주 덕진공원에 있는 김해강 단죄비. ⓒ 박주현

금천구 지역 내 친일과 항일에 관한 전수조사가 의회에서부터 막힌 것과 달리 경기와 전북, 광주, 제주 등에서는 지역 의회를 통과해 관련 조사가 수차례 진행된 바 있다.

전북의 경우 2020년 광복 75주년을 맞아 ‘전라북도 친일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방안 연구용역’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전북지역 친일파 118명과 친일잔재 131건을 확인했다. 현재는 후속조치를 진행 중에 있다.

광주광역시 역시 2019년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실시한 전수조사에서 친일인사의 비석과 현판 등 일제 잔재물 65개를 확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지역 내 광주공원 사적비군과 광주공원 계단 등 25곳에 친일잔재 단죄문을 설치하기도 했다.

광복회는 지난 2월 ‘친일찬양금지법’과 ‘친일인사의 국립현충원 묘지정리에 관한 국립묘지법·상훈법’ 등을 포함하는 ‘친일청산 3법’에 대해 여야 5당에 “당론으로 채택하라”라고 요구한 바 있다. 민주당은 지난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친일 청산’을 화두로 관련법안 5개를 발의했을 뿐 당론으로 채택하거나 특별한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다. 관련 법은 모두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채 계류된 상태다.


김종훈(moviekjh)

<2021-03-18> 오마이뉴스

☞ 기사원문: 친일조사예산 0원 만든 금천구의회… 독립운동 후손의 울분

금, 2021/03/19-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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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 가득한 전장의 참상 낱낱이 기록하다

<태평양실기집>을 남긴 고 장윤만씨.
만화사우곡’ 마지막 부분.

◇ 오키나와 전투, 전범 일본군의 ‘자살과 전멸’

오키나와 전투(1945년 4월1일~6월23일)는 태평양 전쟁 말기 전범인 일본군의 ‘자살과 전멸’이 유도된 대표적인 전투다. 미군은 전투보고서에서 “오키나와에서 인간신경이 무너지는 원인은 광적인 적과의 끝없는 근접전 때문”이라고 보고했다. 광적인 근접전이란 “덴노 헤이카 반자이” 라며 달려드는 자살돌격을 의미했다.

당시 일본 군부는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도록 온 국민을 세뇌시켰다. 일본인들은 ‘천황=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면, 사후엔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진다고 믿게 됐다. 이렇게 평범한 일본인들은 살인마로 둔갑됐다. 이미 수년전, 일본군은 1937년 난징 대학살에서 ‘100인 참수경쟁’을 벌였고, 이 사실을 신문에까지 냈다. 일본군은 1945년 패망 직전에도 ‘사무라이 정신’을 강조하며, 할복자살·자살돌격의 광란을 이어갔다.

1945년 미군은 전투보고서에서 “일본군 사상자는 6월 상반기 동안 하루 평균 1,000명 이었다. 하반기엔 6월19일 2,000명, 20일 3,000명, 6월21일 4,000명 이상이었다”며 6월19일 이후엔 대부분 자살한 일본군 사상자수를 보고했다.

일본군은 오키나와의 원주민들에게도 ‘미군이 강간하고 잔인하게 죽일 것’이란 거짓말로 겁을 줘, 적어도 9만5000여명의 집단자살을 유도했다. 미군측 추산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은 77,166명이었다. 미군 14,009명이 전사했고 영국군도 82명이 전사했다.

1945년 4월 게라마 제도에서 미 제77사단에 나포된 자살공격보트. 섬 전체에 잘 흩어져 위장된 은신처에서 350척 이상이 발견됐다. /사진제공=USA-P-Okinawa
1945년 4월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해병대와 동굴 등에서 나온 오키나와의 주민과 어린이. /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 오키나와 게라마 제도에서 미군포로가 된 장윤만씨

미군은 오키나와 본섬의 전투를 앞두고 3월 26일 오키나와 24㎞ 서쪽 섬인 게라마 제도의 자마미도, 아카도에 우선 상륙했다. 미군은 이 섬들에 있던 350척의 자살특공보트(신요)를 제거했다. 게라마의 주요진지는 5일 만에 미군이 점령했다. 게라마 도카시키도의 산 속에 숨은 일본군 사령관과 패잔병 등 300명은 미군의 식량지원을 받으며 종전(9월) 까지 3개월간 무혈대치만 했다.

게라마 제도에는 ‘아리랑 비’가 세 군데나 있다. 도카시키도에는 故배봉기 할머니 등 조선인 위안부 7명이 끌려와 있었고, 오키나와 전체에는 60여개 위안소에 600여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끌려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조사·발표한 ‘오키나와 강제동원 조선인 희생자 피해실태'(책임연구원 김민영 군산대 교수) 자료에 따르면 일본군은 아카도에서 도망가다 잡힌 조선인 12명을 총살했다. 총살 장면을 목격한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인들은 총살되기 직전에 쌀밥 한 공기씩을 받아들자 정신없이 밥을 퍼먹고는 자신의 키 길이만큼의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구덩이 앞에 서면 일본군이 총을 쏘아 구덩이로 떨어졌다. 아직 죽지 않아 구덩이에 덮은 흙이 움직이면 일본도로 몇 차례나 찔러서 죽였다고 한다.

장윤만씨는 1945년 6월8일 자마미도의 산에서 미군에 체포 됐다. 오키나와 제1포로수용소를 거쳐 1946년 11월20일 그리운 경북 상주의 집으로 귀환 했다.

오키나와 포로수용소에 도착한 조선인 노동자(군속)들. /사진제공=민족문제연구소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고발하며 2005년 5월 오키나와현 요미탄촌에 건립한 ‘부조’와 ‘한의 비석’. /사진제공=민족문제연구소

◇ 태평양실기집 징용거귀고생기 완성

귀환 후 장씨는 1948년 2월 ‘대동아전쟁 실기집’을 완성했다. 본문의 첫제목을 ‘왜정시대징용거귀고생기(倭政時代徵用去歸苦生記)’로 했다. ‘대동아전쟁실기집’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의해 세상에 빛을 보면서 ‘태평양전쟁실기집’으로 변경됐다.

이 실기집을 감수한 반병률 교수(한국외국어대 사학과)는 ▲세남매의 아버지인 장윤만님이 거주지인 공성면 사무소에 징발·집결한 이후 오키나와에서 포로가 되기 까지의 전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한 희귀 자료다 ▲오키나와 현지로 수송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에서 한인·일본인 관리들과 군인들의 말과 행위, 노예선을 방불케 하는 수송선의 이송과정 등을 자세히 기록했다▲자살특공보트의 준비와 계획, 조선인에 대한 감금·만행· 학대·살육 등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만화사우곡>은 죽은 동료에게 쓴 글의 형식을 빌어, 고국산천과 동료를 그리워하는 자신의 심정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점에서 특별한 문학적 가치가 있다. 드라마·영화·그림 등 문화 예술의 소재로서 활용가치가 높다고 분석했다.

/글·정리 김신호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17> 인천일보

☞기사원문: “[일제 강제동원 피맺힌 증언] 오키나와, 그 지옥의 조선인 3

※관련기사 

인천일보: [일제 강제동원 피맺힌 증언] 오키나와, 그 지옥의 조선인 1

인천일보: [일제 강제동원 피맺힌 증언] 오키나와, 그 지옥의 조선인 2

금, 2021/03/19-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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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홍콩대학교에서 인턴이 찾아왔습니다.
이 영상은 인턴들이 직접 촬영하고 편집한 브이로그 영상입니다.

토, 2021/03/20-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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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회부는 지난 3월 1일 3.1운동 102주년을 맞아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명단과, 그들의 적나라한 반민족 행위를 담은 일본 외무성 문서를 최초 발굴해 보도했다.

간도참변은 1920~21년 일제가 봉오동·청산리 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지역 한국인과 독립운동가를 다수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의 ‘공적’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학계를 포함해서도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 입장에서 이들 48명은 충실한 하수인이지만, 우리에게는 동족 학살에 가담한 반역자다.

48명의 한국인 경찰관들의 역할은 다양했다. 첩보 수집, 길 안내, 통역, 독립운동가 회유 등만이 아니라 직접 민간인 학살에도 가담했다.


[연관기사]

[단독] “동족 학살·독립군 체포”…간도참변 ‘한국인 경찰 48명 공적서’ 발굴

■ 100년 전 민족학살 가담한 한국인 경찰, 어떻게 발굴했나?

KBS는 외부 전문가들과 함께 사료 발굴을 기초로 한 탐사보도를 꾸준히 해왔고, 삼일절이나 광복절 등 시의성이 있을 때마다 단독 보도를 계속해 왔다. 이번 자료 역시 이런 꾸준한 추적 과정에서 발굴된 것이다.

KBS는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전 일본 외무성(우리나라 외교부에 해당) 산하 자료실 ‘외교사료관’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과 관련된 고문서 다수를 복사해왔다.

이후 전문가들과 함께 해당 문서들에 대한 번역과 검토 작업이 꾸준히 이뤄졌고, 지난해 가을,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들에 대한 자료를 추려낼 수 있었다. 정확히 백 년 전인 1921년 3월 1일 일제가 이들의 공적을 결재한 문서였다.

KBS는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외부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추가 취재에 돌입했고, 본격적인 분석 작업을 통해 3.1절에 맞춰 보도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수록된 조선인 경찰관 9명. 순사 우경태, 구봉서, 김종섭, 백창돈, 김배인, 장국환, 김영후, 성빈, 서상순은 종군기장(일제가 전쟁에 참여한 군인, 경찰 등에 수여하는 상훈 중 하나)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 KBS 발굴 자료에 보훈처 “독립유공자 발굴에 활용”

보도 이후 남은 과제는 크게 2가지다. ▲문서에 등장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유공을 인정할 것인가의 여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고위 경찰관들의 친일 이력을 병기할 것인가다.

먼저 한국인 경찰관들로부터 체포를 당한 독립운동가들의 유공을 심사하는 문제다. 이번에 발굴한 문서에는 간도참변 과정에서 체포된 한국인이 17명 등장하는데 이 가운데 유공을 인정받고 건국훈장을 받은 사람은 4명에 불과하다.

KBS 보도 이후 국가보훈처는 해당 자료를 제공해달라고 KBS에 요청했고 취재진은 이에 협조했다. 보훈처는 “자료를 분석해 그 결과를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해 독립유공자 발굴과 공적 검증에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독립유공자 강우범 선생(이명: 강구우)의 추가 독립운동 행적을 추정할 만한 내용이 자료에 등장한 것과 관련해서도, 보훈처는 “인적사항 및 활동내용 등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진행해 동일인이 확인될 경우 공훈록 내용을 보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 경찰, 역대 기관장 친일 이력 전수조사…”왜 이리 소극적인지”

또 다른 과제는 친일 이력이 있는 고위 경찰관들의 이력 처리 문제다.

KBS는 전국 지방경찰청과 경찰서 등 274곳의 홈페이지를 전수 조사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실린 역대 청장과 서장 70여 명(중복 포함)을 확인해 보도한 바 있다. 이들은 모두 친일 이력에 대한 병기 또는 언급 없이 재직 사실만 기재돼 있었다.

KBS의 보도 이후 경찰은 ‘친일인명사전’ 및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과 역대 경찰 기관장 명단 간 대조 작업에 착수했다.

친일 이력을 병기하는 문제와 관련해 경찰은 “정부 부처 전체가 동일 기준에 따라 공통 적용할 사안”이라는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와 대조적으로 경기도는 역대 도지사 가운데 친일 이력이 있는 사람의 경우 그 사실을 병기하고 있다.

경찰은 또 1949년 6월 6일 경찰이 친일파 조사를 위한 헌법기구였던 반민특위를 습격한 사건과 관련해서도 “지난해 말 출범한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라 경찰 입장을 정리하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경찰의 입장에 대해 역사단체들은 대체로 아쉽다는 반응이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일제강점기 경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기구였고, 그 당시 조선인 친인 경찰은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다”며 “해방 후 대한민국 경찰이 친일 경찰을 청산하자는 데 왜 이렇게 소극적인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경찰은 2019년 임시정부 초대 경찰청장인 김구 선생의 동상을 경찰청 청사 안에 세우며 과거사 청산 의지를 다졌다.

이후 독립운동가 출신의 경찰을 발굴하는 등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유독 친일의 역사, 다시 말해 자신들의 ‘그늘’에 대해선 뚜렷한 입장 표명을 미루고 있고 청산 작업의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송락규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20> KBS 

☞기사원문: [취재후] 동족학살 가담한 한국인 경찰, 어떻게 발굴했나?

일, 2021/03/21-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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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우원식 국회의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심산 김창숙 손녀 김 주)

☞ 10편 : 광복군아리랑(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장병화)

☞ 9편 : 앞으로행진곡(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우당 이회영 손자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정남기)

☞ 5편 : 격검가(동암 차리석 아들 차영조)

☞ 4편 : 압록강행진곡(광복군 김영관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석주 이상룡 증손자 이항증)

☞ 2편 : 안중근옥중가(함세웅신부)

☞ 1편 : 국치추념가(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화, 2021/03/23-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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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100년 전 일본군이 한국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 이른바 ‘간도참변’ 당시, 일제에 협력해 동족을 학살한 한국인 경찰관 48명, 그리고 이때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을 KBS가 최초 발굴해 보도해 드렸는데요.

보훈처가 이 자료를 제공받아 독립유공자 발굴에 활용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경찰도 역대 기관장들의 친일 이력을 전수 조사하기로 했는데, 친일 이력을 병기하는 문제에 대해선 유보적인 입장을 밝혔습니다.

송락규 기잡니다.

[리포트]

100년 전 일본이 간도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와 민간인들을 학살한 간도 참변.

일제는 전국 각지에서 차출돼 학살 현장에 가담했던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이름과 공적을 기록했습니다.

간도에 파견된 한국인 경찰들은 무봉촌과 의봉촌 등 간도지역 각 부락의 초토에 종사하는가 하면, 장암촌 부근을 소탕하는 동안 한국인을 조사하고 가택 수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간도참변 당시 한국인 경찰관에 의해 체포된 독립운동가는 17명.

이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사람은 4명뿐인 것으로 확인됩니다.

KBS 보도 이후 자료를 제공받은 국가보훈처는 자료 분석 결과를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해 독립유공자 발굴과 공적 검증에 활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김민철/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자료들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조사를 해서 발굴하는 사업들을 반드시 해야 될 것으로 보입니다.”]

경찰도 조치에 들어갔습니다.

70여 명의 역대 청장, 서장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라는 KBS의 보도와 관련해 역대 기관장들의 친일 이력을 전수 조사하고 있습니다.

다만 친일 이력을 병기하는 것에 대해선 정부 부처 전체가 동일한 기준으로 적용해야 할 사안이라며 부정적 입장을 밝혔습니다.

해방 뒤 친일파 처벌을 위해 구성된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에 대해서도 나중에 공식 입장을 정리하겠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 “일제강점기의 경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기구였거든요. 해방 후에 대한민국 경찰이 조선인 친일 경찰을 청산하자는데 무슨 이유에서 이렇게 소극적인지…”]

경찰은 2019년 임시정부 초대 경찰청장인 김구 선생의 동상을 청사에 세웠지만, 친일 역사에 대한 성찰 노력은 여전히 더디기만 합니다.

KBS 뉴스 송락규입니다.

촬영기자:유성주/영상편집:이재연/그래픽:최창준

송락규 기자 ([email protected])

<2021-02-23> KBS 

☞기사원문: 보훈처 “간도참변 유공자 발굴”…경찰 과거사 반성 또 미루나?

※관련기사

☞KBS: [취재후] 동족학살 가담한 한국인 경찰, 어떻게 발굴했나?

☞KBS: [단독] “동족 학살·독립군 체포”…간도참변 ‘한국인 경찰 48명 공적서’ 발굴

화, 2021/03/23-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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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제1묘역의 문용채와 최석용이 독립운동가였다고?

최근 제주 4.3 사건 73주년을 앞두고 제주 4.3 사건 당시 체포돼 육지에서 수형생활을 하던 중 6.25 한국전쟁 발발 직후 실종된 335명에 대한 재심에서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왜곡된 역사 하나를 바로잡는 순간이었다.

제주 4.3 사건의 역사는 서울 동작동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에도 서려 있다. 기자는 이미 동작민주올레 시즌1에서 ‘4.3길’을 걸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제주 4.3 사건의 아픔을 되돌아본 바 있다. 이때 미처 다루지 못한 이야기가 있어 국립서울현충원 ‘4.3길’을 보충하는 뜻도 담아 두 명의 장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국립서울현충원의 장군 제1묘역에는 제주 4·3 사건과 관련된 인사로 이미 동작민주올레 시즌1에서 소개한 ‘제주의 의인’ 김익열 장군(관련 기사: 제주와 대화한 군인, 민간인을 짓밟은 군인)말고도 사건 당시 경찰과 군인 간부로 가해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 넷의 묘가 더 있다.

무덤의 주인공은 제주 4.3 사건 당시 제주경찰서 서장이었던 문용채(1916~1976, 제1장군-72)와 제주 4.3 사건 당시 미군정 경무부 공안국장이었던 김정호(1909~1970, 제1장군-39), 이승만 정부의 육군총참모장이었던 채병덕(1910~1950)과 2연대(연대장 함병선) 소속 대대장이었던 최석용(1903~1974, 제1장군-60)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친일행위를 한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들 중 경찰 간부로 제주 4.3 사건에 개입한 문용채와 군 간부로 제주 4.3 사건에 개입한 최석용의 묘비명엔 그동안 알려져 있지 않았던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는 만주국군 출신의 문용채

▲ 문용채의 묘 문용채는 만주국군 헌병 상위에 오른 인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그는 제주 4.3 사건 당시 제주도 경찰간부였다. ⓒ 김학규

문용채는 1937년 봉천군관학교를 제5기로 졸업했다. 김백일(김찬규), 김석범, 김홍준, 송석하, 신현준(신봉균) 등 5명의 정부 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그의 동기다. 문용채는 만주국군 헌병 소위로 임관한 후 일제 말 헌병 상위로 진급해 평천헌병대 대대장까지 지냈다.

문용채가 정부 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명단에서 제외된 이유는 위 5명의 동료와 달리 간도특설대에 입대하지 않고 헌병으로 진로가 잡힌 덕분이었다.

경찰 간부로서 제주 4.3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던 문용채

문용채는 해방 이후 경찰이 돼 제주감찰청 수사과장을 거쳐 1947년 9월부터는 제1구경찰서장이 됐다. 문용채는 경찰 간부로 제주에 부임하면서 자연스럽게 제주 4.3 사건의 한복판에 서게 됐다.

문용채가 경찰이 된 사연은 해방 직후 우리의 실상을 반영한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만주에서 서둘러 귀국한 문용채는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남조선경비대 소위로 임관하지만, 경비대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자 사표를 내고 경찰로 전직했다.

문용채와 마찬가지로 만주국군 헌병 상위였다가 대한민국 국군의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정일권에 따르면 문용채는 청주 7연대의 A중대장과 춘천 8연대의 A중대장에 연이어 임명됐으나, 두 차례 연속으로 먼저 온 장교들이 중대편성을 마무리하고 자리를 고수하고 있어 부임하지 못했다고 한다.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문용채는 사표를 내고 경찰로 전직했다고 한다. 정일권은 이를 “초창기 인사관리의 허점”으로 설명했다.

문용채가 제1구경찰서장에 취임한 직후 “경민 협조로 민주경찰 건설에 노력”하겠다면서 밝힌 아래와 같은 포부는 그가 제주 4.3 사건을 어떤 시각으로 접근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도민 여러분은 경찰을 신뢰하고 순종하야 항거의 태도를 취하지 말고 이해 깊은 협조만이 민주경찰을 완성시키는 근본적 요소인 만큼 도민 각자는 안심하야 직장 봉공에 노력하야 주기를 바란다. 끝으로 본도 경찰관들이 애국심에 불타는 정열과 책임감 그리고 날로 증진되어 가는 태도율(態度率)에 대하야 깊은 감명을 느끼고 마지않는 바이다.”(<제주신보>, ‘경민 협조로 민주경찰 건설 노력-1구서장 문용채씨 신임 포부담’, 1947. 10. 10.)

문용채는 민주경찰의 완성을 위해 제주도민들에게 ‘무조건 경찰을 신뢰하고 순종할 것’을 요구한 반면, 1947년 3.1 발포 사건 이후 응원군까지 동원해 탄압을 강화해온 경찰에 대해선 감명을 느낀다며 되레 응원했다.

문용채는 4.3 봉기 초기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열과 4.3 봉기를 이끈 남로당의 김달삼 간에 이뤄진 4.28 평화협상안의 실현을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5월 1일의 오라리 방화사건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오라리 방화사건은 봉기군이 벌인 방화와 학살극으로 알려졌지만, 경찰과 우익 청년단이 평화협상을 좌절시키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었다.

문용채는 당시 ‘신고를 받고 출동하는’ 경찰 트럭에 동승해 취재를 허가받은 <동아일보>의 정선수 기자에게 “만약을 위하여…”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권총을 빌려주면서까지 사건이 경찰의 의도에 맞게 언론에 보도되기를 희망했다. <동아일보>는 오라리 방화사건에 대해 백여 명의 폭도가 “무고한 노동자 농민을 몰아세우고 노동자 농민 자신들의 집을 불살라 버리고 노동자를 학살하고 노동자 농민의 가정을 파괴한 것”이라고 하여 경찰의 희망을 충실히 따르는 보도로 응답했다(<동아일보>, ‘제주도폭동현지답사 – 정선수 본사특파원 발’, 1948. 5. 9.)

경찰의 방해공작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오라리 방화사건이 있은 지 이틀 후인 5월 3일 무장해제한 ‘귀순자’를 미군 병사와 9연대가 함께 수용소로 호송하던 중, 무장경찰 50여 명이 기습적으로 총을 난사하여 ‘귀순자’ 일부가 사망하고 나머지는 산으로 도주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과 경찰 간에 총격전까지 벌어졌다. 이에 격분한 맨스필드 군정장관은 제주경찰서장을 군정본부로 소환하여 문책했는데, 김익열은 이때 문용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문용채 서장은 도망하여온 부하들에게 들어서 사건의 진상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므로 당황하여 대답을 못하였다. 조사하여 내일 보고하겠다고 하고 부상자와 중기관총을 인수하여 돌아갔다.”(김익열, 실록유고 <4.3의 진실>, 1988)

물론 이 사건으로 문용채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문용채는 이후 육군사관학교에 재입교해 특별임관한 후 1952년 경남병사구사령관을 지낸 뒤 1959년 군대 안에서 정군 바람이 불 때 준장으로 예편당했다.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로 변신하는 것은 자유?

▲ 문용채의 묘비명 문묭채의 묘비명은 친일파 문용채가 마치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 김학규

장군 제1묘역에 있는 문용채의 묘비명을 보면 그가 경찰로 제주 4.3 사건에 개입했던 이력은 아예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문용채의 묘비명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장군은 평북 정주 출생으로 중국에 망명하여 봉천육군사관학교를 졸업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하셨고 해방 후에는 창군에 공헌 군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셨다.”

문용채는 국립서울현충원을 친일파가 독립군으로 변신하는 일을 돕는 ‘세탁소’쯤으로 여겼던 걸까? 문용채가 자신의 만주 ‘진출’을 중국에 ‘망명’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나 보다 하고 일단 넘어가자. 그렇더라도 문용채가 졸업한 봉천군관학교(중앙육군훈련처)를 존재하지도 않았던 봉천육군사관학교라고 과장한 것도 모자라, 만주국군 헌병 장교로 근무한 것을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했다고 새겨 넣은 것은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 짓이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는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로 변신하는 일이 이렇듯 쉽게 이뤄지고 있었던 것.

최석용이 한검추(최주봉)이었을 줄이야!
– 독립운동가에서 변절자로, 그리고 제주 4.3 사건에 개입한 학살자로!

▲ 최석용의 묘 최석용은 한 때 조선혁명군의 1사 사령을 맡기도 하는 등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한검추(최주봉)였다. 하지만 그는 1936년 말 일제에 투항하여 변절한 이래 항일무장투쟁 대오를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 김학규

‘신분 세탁’이 성공한 탓일까? 장군 제1묘역에 안장돼 있는 최석용(1903~1974, 제1장군-60)은 정부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긴커녕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돼 있지 않다.

최석용은 1928년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대 만주에서 맹위를 떨친 조선혁명군(총사령 양세봉)의 1군 사령까지 맡았던 유명한 한검추(최주봉)였다. 이는 최석용의 묘비 앞면 아래에 새겨진 묘비명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한검추는 1935년 중-한 항일동맹회를 결성해 대일 공동전선을 펼칠 때 총사령을 맡기도 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제의 압박이 강화되자 1936년 말 조선혁명군 대오 70여 명을 거느리고 투항했다. 이후 변절해 정빈, 윤하태와 더불어 동북항일연군 파괴에 앞장섰다. 중국의 전설적인 항일혁명가인 동북항일연군 1로군 군장 양정위와 그를 지키던 조선혁명군 출신 최윤구를 전사케 하면서 동북항일연군을 사실상 궤멸시키는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최석용이었던 것이다.

해방 후 귀국한 최석용은 1947년 1월 김창룡, 문상길, 김지회, 홍순석 등과 함께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3기)에 입학해 그해 4월 소위로 임관했다. 1949년부터는 2연대(연대장 함병선) 소속 대대장으로 서북청년회를 지휘하면서 초토화 작전의 선두에 서서 제주도민 학살에 앞장섰다.

최석용의 ‘신분 세탁’을 도운 국립서울현충원

그런데 최석용의 묘비명을 찬찬히 살펴보면 심각한 역사왜곡과 함께 최석용의 신분 세탁이 어떻게 성공적으로 이뤄졌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묘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03년 1월 28일 평북 벽동에서 태어나 19세의 어린나이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와 중국일대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몸바치기 시작하였나이다. 이국만리 타국땅에서 집도 한칸없이 한검추 최주봉 등 이름으로 20여성상을 항일타가 해방되여 귀국하였나이다.

1947년 육사 3기생으로 창군에 선봉이 되여 봉사하기를 도한 10여성상 주요 부대의 창설과 육성을 하시며 많은 공훈을 남기시고 도라가셨나이다. 평생을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애쓰던 고귀하신 유지 후세에 영원토록 빛날것이오니 안심하시고 잠드시옵소서.”

묘비명에서 “20여성상을 항일타가 해방되여 귀국”했다고 한 부분은 최석용이 1936년 말 일제에 투항해 변절한 이후 일제에 협조한 사실을 교묘하게 숨기는 역할을 한다. “평생을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애쓰던 고귀하신 유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 대목 역시 국립서울현충원이 친일인사들의 ‘신분 세탁’을 돕는 공간 역할을 해왔음을 고발하는 유력한 증거가 되고 있을 뿐이다.

▲ 최석용의 묘비명 최석용의 묘비명은 일제에 변절한 최석용의 역사를 철저히 숨기는 신분 세탁을 성공적으로 일구어내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하여 최석용의 이름은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 김학규

국립서울현충원, 문용채·최석용 묘비명이라도 교체해야

장군 제1묘역의 문용채와 최석용의 사례는 일제강점기 자신들이 한 친일행위를 철저히 숨기는 방식으로 역사왜곡을 한 다른 인물들과 다르다. 이들은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했다거나 “20여성상을 항일타가 해방되여 귀국”했다면서 국립묘지에서 독립운동가로의 신분 세탁을 과감하게 벌였다. 대단히 충격적이다.

이러한 묘비명이 어떻게 국가기관인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새겨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조사도 필요해 보인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비문 전면의 ‘독립광복을 위하여 투쟁’ 내용 등은 당시 유족이 신청한 내용을 근거로 설치했다”면서 “동 기록의 정정이 필요한 경우에는 유가족과의 협의 및 자문 등을 통해 수정 보완 조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바뀌어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다.

김학규(hkkim21)

<2021-03-21> 오마이뉴스

☞ 기사원문: 만주 장교가 ‘광복투쟁’? 현충원 속 기막힌 신분세탁

화, 2021/03/23-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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