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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친일이냐 항일이냐…최재형 조상의 100년 전까지 검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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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친일이냐 항일이냐…최재형 조상의 100년 전까지 검증한 이유

admin | 화, 2021/08/17- 04:54

정치BAR_오연서의 러브레터

국민의힘 대권 주자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15일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내 독립관을 방문, 참배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등록한 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 등이 과거 친일행적을 했다는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논란의 발단은 최 전 원장의 아버지 최영섭 대령이 자신의 회고록에 아버지 최병규씨의 독립운동 활동을 묘사한 것을 놓고 <오마이뉴스>가 이를 검증하는 보도를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최 전 원장의 가족들은 모임 때마다 애국가를 4절까지 함께 부를 정도로 애국심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그래선지 일제시기 조상의 활동을 둘러싼 논란을 최 전 원장은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최재형 캠프는 해당 보도를 한 언론사에 정정보도도 청구한다고 하는데요. 왜 100년 전 증조할아버지의 삶까지 검증대에 오르게 됐을까요? 진실은 무엇일까요?

일제 치하에서 ‘유력 가문’ 의혹의 실체는?

6일 보도된 <오마이뉴스>의 검증 기사는 최 전 원장의 아버지인 최영섭 전 해군대령(1928∼2021)이 지난 5월 펴낸 책 <바다를 품은 백두산>의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우선 최 전 대령이 자신의 아버지이자 최 전 원장의 할아버지인 최병규(1909∼2008년)씨를 회고하며 “2002년 10월 13일 항일독립운동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지만 감옥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훈장은 받지 못했다”고 쓴 부분이 첫번째 검증 대상이 됐습니다. 지난 2008년 최병규씨 사망 기사를 쓴 <강원도민일보>는 기사 제목을 ‘춘천고 항일운동 주도 최병규옹 별세’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마이뉴스>의 보도를 보면, 최 전 대령의 주장과 달리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최병규씨가 없었습니다. 국가보훈처에 정보공개청구를 한 결과, 최씨는 2002년 10월13일에 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서훈이나 표창을 한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같은 해 광복절을 앞두고 표창한 208명의 독립유공자 중에도 최씨는 없었다고 <오마이뉴스>는 보도했습니다. 보도 직후 최 전 원장 캠프는 최씨가 당시 표창을 받은 것이 맞다고 반박하면서도 다만 “대통령 표창 사유에 대해 최 전 대령의 착오가 있었다”며 독립유공자 표창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두번째는, 최 전 대령의 책과 정반대로, 최 전 원장의 할아버지가 ‘항일’ 아니라 ‘친일’을 했다는 의혹입니다. <오마이뉴스>는 같은 보도에서 최병규씨가 평강군 유진면에서 유진면 면협의원에 이름을 올렸고, 그의 형 최병렬씨도 고삽면 민협의원에 당선됐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아버지이자 최 전 원장의 증조할아버지인 최승현(1887~1953) 씨는 당시 유진면장으로 있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최병규씨는 1937년에는 평강군에서 1명을 뽑는 강원도회 의원 선거에 도전하기도 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최병규씨가 비록 낙선했지만, 3·1운동을 경험한 일제가 조선인의 독립요구를 무마하고자 ‘자치’를 앞세워 1920년부터 만들었던 강원도회 의원에 도전한 것 자체가 친일 행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삼부자가 평강군의 유력 인사로 자리매김한 것이 친일행적의 근거라는 겁니다.

<오마이뉴스>는 또한 최 전 원장의 조상들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최 전 대령의 주장을 오히려 친일행적의 근거라며 뒤집어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최 전 대령은 책에서 “1938년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목단강성 해림가로 건너갔고, 1940년에 어머니를 비롯한 우리 가족들을 해림으로 불러들였다. 아버지는 7년간 해림에서 살면서 해림가 부가장과 조선거류민단장을 맡아 독립자금 확보와 전달 역할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썼습니다. 최병규씨의 독립운동 사례로 소개한 이 대목에 대해 <오마이뉴스>는 “해림가 가장이나 부가장이라는 자리는 만주국 행정체계의 말단 조직을 의미한다. 조선거류민단장 역시 일제가 조선인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든 관제 민간조직답게 특별한 조선인만이 맡을 수 있는 자리였다”며 오히려 최병규씨가 일제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인물이라는 의혹을 거듭 제기했습니다. <오마이뉴스> 보도를 보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1938년 6월30일 기사에서 “(최병규씨가) 아버지 회갑 축연비를 절약해 일금 20원을 국방헌금에 헌납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만주로 떠나기 전 이미 친일에 가담한 행적들을 일제로부터 인정받았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최재형 대선 캠프가 마련된 대하빌딩 앞에서 ‘가짜 독립유공자 친일행적 최재형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단

“민족문제연구소 “최 전원장 조부의 독립운동은 ‘설’에 불과”

<오마이뉴스>의 보도 뒤 최 전 원장 쪽은 “최 전 원장의 조부와 증조부가 독립유공자는 아니었지만 독립운동은 했다”는 취지로 반박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친일파 청산 문제를 연구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나섰습니다. 최 전 원장 할아버지의 이런 친일 의혹 근거들에 견줘, 독립운동 이력이 빈약하다는 겁니다. 연구소는 지난 13일 성명에서 “(면협의회원 재선과 도의원 출마, 국방헌금 납부 등과 만주 목단강성 해림촌 부촌장, 조선인거류민단장 재임 등) 이런 행적은 국가보훈처의 독립운동가 서훈에서 재고의 여지없는 결격 사유에 해당한다”고 밝혔습니다. 최병규씨가 만주에서 살면서 독립자금을 조달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1940년대 만주는 일제에 완전히 장악됐으며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인 이주가 장려되고 있었다. 괴뢰 만주국의 관공리로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주장이야말로 궤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최 전 대령은 책에 최병규씨가 1926년 4월 춘천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서거하자 ‘순종 서거에도 상장(喪章) 달기’ 운동을 주도했다가 불온학생으로 찍히고, 이어 10월에는 학생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일삼은 일본인 교사 배척을 위해 전교생 동맹휴학을 주도했다가 퇴학 처분을 받았다고 썼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도 이 사실은 확인했습니다. 다만 이 한 가지 사건을 근거로 최병규씨를 ‘독립운동가’라고 볼 순 없다는 것이 연구소의 의견입니다.

연구소는 오히려 최병규씨가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친일신문이었던 <만선일보> 해림지국 개소에 축하광고를 띄우는 등의 일로 여러 차례 이름이 거론됐다는 새로운 사실을 꺼내 들어 최병규씨가 만주에서 독립자금을 모았다는 최 전 대령의 주장에 대해서 “전혀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최재형 쪽 “친일 아니다…독립운동 했다” 주장

최 전 원장 쪽은 이런 의혹 제기에 대해 “과장과 허위에 가득 찬 것”이라며 최 전 원장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맞다는 주장을 거듭 이어갔습니다. 최 전 원장 캠프의 김종혁 언론미디어 본부장은 지난 13일 기자회견을 열어 우선 가족들이 면장 등을 지낸 것은 그 자체만으로 친일 이력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면장이 친일이라면 흥남에서 농업계장을 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부친은 뭐라고 불러야 하냐”는 겁니다. 국방헌금을 낸 것도 “당시 일제는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조선인들에게 무자비하게 헌금을 강요했고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한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습니다. <만선일보>에 이름이 등장한 것도 당시 부촌장직을 맡았기 때문에 가끔 이름이 나온 것일 뿐, 부촌장직을 맡은 것도 “친일파여서가 아니라 당시 평균적인 교육수준을 볼 때 최 후보의 조부가 고등교육을 받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고 했습니다. 대부분 일제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던 것일 뿐, 자발적으로 일제에 동조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김 본부장은 “최 후보의 조부와 증조부는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시 지주계급이었지만 항일행적을 평가받아 토지를 전면 몰수당하지 않았다”며 거듭 항일운동을 했던 점을 밝혔습니다. 이밖에도 최병규씨의 아버지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장독대에 독립신문을 숨겨 읽는 등 일제 치하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지난 1989년 출간된 최병규씨의 자서전에 자세히 나와 있다는 게 최 전 원장 쪽의 주장입니다.

“친일 적극 가담은 아니나 일제 협력 의심은 있다”

언론과 민족문제연구소, 최 전 원장 쪽의 공방을 종합해보면, 최 전 원장의 할아버지는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적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언론이 제기한 친일 의심 행적의 경우에는 친일인명사전에 오를 정도로 친일에 적극 가담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일제에 협력한 행위로 의심될 만한 부분이 있어 최 전 대령이 주장하는 독립운동 사례만으로는 향후에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반병률 한국외대 교수(사학과)는 이날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일반적으로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삶 전체가 전반적으로 흠이 없고 존경할 만해야 한다”며 “그런데 이분의 1930년대 행적은 상당 부분 식민통치 말단에서 식민 체제에 동의했다고 볼 수 있는 행적이 있다. 독립운동가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건 난센스다”라고 말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박수현 사무처장도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최 전 원장의 조부와 증조부가) 1급 친일파처럼 적극 협력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일제에 협력했다고 볼 수 있는 이른바 부일 협력행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습니다. 박 사무처장은 또 “이런 상황에서 자꾸 최 전 원장 쪽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이라고 내세우고, 그걸 홍보 자료로 쓰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덧붙였습니다.

100년 전 조상의 행적까지 대선주자의 검증대에 올라온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최 전 원장 캠프에 합류한 정경희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달 “최 전 원장의 할아버지 최병규 선생은 강원도 평강 출신 독립운동가”라며 최 전 원장이 독립운동가 집안임을 강조했습니다. 최 전 원장의 공식 유튜브 채널에는 최병규씨가 독립운동가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한 지지자의 영상이 링크되기도 했습니다. 최 전 원장 스스로 “어떤 분들은 저더러 미담제조기라 하십니다”(3일 출마 기자회견)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미담의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아버지 최영섭 전 대령은 해군 최초의 한국전쟁 당시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PC-701)의 갑판사관으로 북한 인민군의 무장수송함을 격침시킨 대한해협해전에 참전한 ‘전쟁 영웅’이기도 합니다. 애국심이 강한 환경에서 자라나 자신의 집안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자부심이 강했고, 그러다보니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란 믿음을 확고히 하면서 이를 강조하게 된 듯합니다.

최 전 원장 캠프 관계자는 이날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최 전 원장의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독립운동 행적이 과도하게 부각됐다가 생긴 문제라는 주장에 대해 “그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지지자가, 또 정경희 의원이 그렇게 얘기하셨다. 그런데 그 시대 우리 조상이 살아남기 위해 애쓰며, 한편으론 장독대에 독립신문 숨겨서 자식들에게 읽혔던 것들을 어떻게 단죄할 수 있겠나. 다만 저희 스스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점을) 내세워 선거운동을 해보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조상들이) 독립운동가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독립운동을 나름대로는 했었고, 조선에 사는 식민지배의 백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하며 살았다는 입장”이라고 말했습니다.

오연서 김윤주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5> 한겨레

☞기사원문: 친일이냐 항일이냐…최재형 조상의 100년 전까지 검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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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1/06/24-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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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우 작가는 인도 델리를 여행하다 그곳에서 한국광복군이 영국군과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도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있었다. 그곳의 사람과 터를 찍었다.

멕시코에서 고국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던 김익주 선생의 후손 다빗 킴 씨. ⓒ김동우 제공

대부분 사람들은 ‘국외 독립운동’이란 말에서 만주 벌판을 연상한다.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이나 김원봉의 의열단이 떠오를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한반도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예컨대 인도나 멕시코 같은 곳에 우리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남아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김동우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기자 출신인 그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2017년 사진 작업을 위해 장기 여행을 계획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을 주제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인도 델리를 여행하던 중 우연히 레드포트(Red Fort)에 방문하게 된 그는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파견한 한국광복군이 이곳에서 영국군과 함께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구한말 한반도와 아무 연관도 없다고 여겼던 장소에서 들은, 뜻밖의 이야기였다.

김 작가는 인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흩어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사실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는” 독립운동사가 미국·멕시코·쿠바 등지에 있었다. 아프리카와 남미 외에는 전 세계에 퍼져 있다고 할 정도였다.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현지에 정착하게 된 이주자들은 후손을 남겼다. 김동우 작가는 2017년부터 2년간 세계를 돌며 사람과 터를 찍었다. 5월18일부터 8월18일까지 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열리는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에 전시된 사진들이 그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의 직접적 계기는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이다. 1921년 3월 한인 300여 명이 쿠바로 향했다. 이들이 출발한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멕시코다. 김동우 작가는 그래서 “쿠바 이민을 이야기하려면 멕시코 이민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1905년 4월 제물포에서 영국 상선을 타고 멕시코로 간 1033명이 북중미 이민의 시초 격이다. 이역만리로 향한 이들 전부가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온 기근을 피하고 돈을 벌려는 목적이 강했다. 1905년 〈황성신문〉에는 이런 이민 광고가 실렸다. “묵서가(墨西哥·멕시코)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수토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이민자 대부분은 에네켄(Henequen·용설란의 일종, 일명 애니깽) 농장으로 분산배치돼 노예와 같은 노동조건으로 혹사당했다. 멕시코 이민자 일부가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기 위해 향한 곳이 쿠바이다.

‘경제적 이유로 건너간 이민자’와 ‘국외 독립운동가’가 늘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둘 다에 해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혹독한 농장 생활을 견딘 이들이 차츰 돈을 모아 독립운동에 쓴 것이다. 독립군 훈련을 위해 군사학교를 설립하기도 했고, 번 돈 대부분을 독립자금으로 부치는 이도 있었다.

2017년부터 2년간 세계를 돌며 해외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 촬영한 김동우 작가. ⓒ시사IN 조남진

아흔 넘은 안창호 선생의 아들 랄프 안

이민자들의 후손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김동우 작가는 과거에 나온 언론 인터뷰나 학술자료를 바탕으로 현지 한인회 선교사 등과 접촉했다. 오래된 자료가 대부분이라 허탕 치기 일쑤였다. 국가보훈처에도 문의했으나 ‘개인정보’를 건네는 데에 난색을 표했다. 소재지를 찾아도 문제였다. 한국을 기억하는 이들은 고령이거나 세상을 떠났고, 살아 있는 후손들은 한국과 유대감이 옅었다. “이민 3세대 이후로는 외양이 변한다. 한식을 먹고 한인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보니 점점 현지인과 동화된다. ‘우리 조상이 코리아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먼 곳에서 왔다고 하니 취재에 반갑게 응하기는 하는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약하다.” 후손들을 촬영한 뒤 김 작가는 인물만 반투명 처리를 했다. 시간이 갈수록 이들의 존재가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의미를 담았다.

김 작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 랄프 안(안필영) 씨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안창호의 ‘아들’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부터 놀라웠다. 아흔을 넘긴 랄프 안 씨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김 작가를 만난 랄프 안 씨는 코리아타운에서 갈비탕을 사주었다고 한다. ‘아버지(안창호)가 독립운동에 앞장서 가족들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는 게 김동우 작가가 전한 랄프 안 씨의 말이다. 의병장 민긍호의 직계자손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만났다. 이들의 존재가 알려진 건 한국과 옛 소련이 수교를 맺은 이후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먼 친척들이 자손으로 인정받아 훈장을 받고, 연금을 수령했다. 직계자손들은 훈장만이라도 받기 위해 한국 정부에 훈장 재교부를 신청했지만, 어렵게 재교부된 훈장은 전달식도 없이 비닐봉지에 담긴 채 전달됐다. 김동우 작가는 “해외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집집마다 울먹이며 이런 사정을 호소했다.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람 사진은 눈길을 끄는 반면, 이번 전시의 풍경 사진은 상대적으로 맥이 빠진다. 거리나 건물을 찍은 사진은 주의 깊게 들여다보더라도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앙상하게 골격만 남은 구조물, 나무와 풀뿐인 벌판도 마찬가지다. 관람객이 느끼는 헛헛함은 김동우 작가 스스로 느낀 것이며, 작업 과정에서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조상들이 토론하고 서성였던 자리, 건물이 있었던 곳에 막상 가보면 멸실된 게 많았다. 나무로 된 집이 다 헐려서 옥수수밭만 남았다면 옥수수밭을 찍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군사학교가 있던 곳에는 시장이 생겼고, 독립운동가들이 사형당한 곳은 소문에 의지해 추정만 할 따름이다. 그래서 김 작가는 “수많은 현장을 찾아다니며 가장 많이 마주한 풍경은 공(空)이었다”라고 했다. 시간의 흐름 때문이지만 적극적으로 보존하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새벽. 100년 전 한인 이민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보았을 광경이다. ⓒ김동우 제공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100년 전과 다르지 않은 것도 있었다. 썩고 헐리는 인공물과 달리 자연 풍광은 그대로였다. 김 작가는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새벽 5시에 맞춰 셔터를 눌렀다. 한인 이민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보았을 광경이다. 쿠바 이민자들이 도착한 마나티 항구의 저녁노을, 연해주 한인들이 강제로 이주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의 초원도 찍었다. 조상들이 본 광경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

김동우 작가는 당분간 국외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진 작업에 집중할 예정이다. ‘쿠바 이주 100주년’이라는 전시 주제에 맞지 않아 내놓지 못한 사진도 많다고 했다. 특히 중국 지역 독립운동이 그렇다. 김 작가는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동우 작가는 이 일이 “우연처럼 시작된 운명” 같다고 했다. 그는 씁쓸한 독립운동의 후일담을, 거의 냉정할 정도로 정직하게 기록하는 작업을 당분간 이어갈 예정이다.

이상원 기자

<2021-06-18> 시사인 호수 717

☞기사원문: 미국·멕시코·쿠바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을 찍다

수, 2021/07/07-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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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민단체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과 미군이 격전을 벌인 오키나와(沖繩)현 본섬 남부 지역에서 새 미군 기지 매립지에 쓸 토사를 채취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평화를 기원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전몰자 유족 모임’은 오늘(7일) 일본 방위성과 후생노동성을 찾아 “헤노코(邊野古) 연안 매립 공사에 쓸 토사를 희생자 유해가 묻힌 곳에서 채취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의 서명 용지를 전달했습니다.

서명에는 일본 전역에서 1만 1천여 명이 동참했습니다.

이들은 “희생자의 피가 스며든 토사를 미군 기지를 만드는 매립에 사용하는 것은 유골이라도 돌아와 달라는 유족의 염원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전쟁 막바지이던 1945년 일본군이 본토를 지키기 위해 오키나와 본섬 남부 등에서 미군을 상대로 벌인 싸움입니다.

당시 일본군이 방패막이로 내세운 오키나와 주민과 미군 병사 등을 포함해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오키나와대 지역연구소 특별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에는 조선인도 3천461명이 군인이나 군속으로 동원돼 701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는 노무 동원된 이들이나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이들을 제외한 숫자입니다.

기록으로 파악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실제 동원되거나 사망한 조선인은 더 많을 수 있고, 이들 대부분은 희생된 주변 지역에 묻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그동안 희생자 유해 수습이 미흡해 이토만(絲滿)을 비롯한 격전지에서 발굴이 계속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본섬 남부의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을 이전할 곳인 중부 헤노코 연안의 매립에 쓸 토사 일부를 당시 격전지였던 이토만 등에서 채취하려 하고 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유골이 섞인 토사가 매립용으로 투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입니다.

지난 3월부터 오키나와 현청 앞에 단식 투쟁 등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 시민단체 ‘가마후야’(ガマフヤ-)의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67) 대표는 최근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그간 수습된 희생자 7백여 명의 유골을 가족에게 돌려주기 위한 후생노동성 주도의 DNA 감정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한국의 유족들도 DNA 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달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가마후야’는 한국 단체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02-2139-0462)와 민족문제연구소(☎ 02-969-0226)를 통해 오키나와 유골 발굴 및 DNA 감정에 참여할 한국인 유족의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황현택 기자 [email protected]

<2021-07-07> KBS NEWS

☞기사원문: “조선인 등 묻힌 토사 채취 반대”…日시민단체, 1만여 명 서명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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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1/07/08-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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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세계유산위, ‘일본에 유감 표명’ 결정문 채택해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서울=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 1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는 주제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해당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하시마 탄광(군함도), 다카시마 탄광, 나가사키 조선소, 야하타 제철소, 미이케 탄광·제련소 등으로 동원된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공개했다. 하시마 탄광으로 강제동원된 고(故) 서정우씨 등의 영상은 최초로 공개됐다. 2021.7.16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송은경 기자 = “‘왜 여기에 와서 이런 일을 당하는가’ 혼잣말을 하면서 매일 죽을 생각만 했습니다. 바다를 내려다보면 너무 무서워서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군함도(하시마·端島) 강제동원 피해자 서정우 씨)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 산업시설에서 벌어진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 최근 국제사회에서 제기된 가운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육성 증언을 다루는 자리가 마련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공동 주최로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전시회를 11월 7일까지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연다고 16일 밝혔다.

전시 영상들은 강제동원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담고 있다. 열네 살에 하시마 탄광에 동원됐다가 이후 나가사키에서 원폭 피해를 겪은 고(故) 서정우(1928∼2001) 씨의 영상이 국내에서 공개되는 건 이번 전시가 처음이다. 사복형사에게 연행돼 다카시마 탄광으로 끌려갔던 손용암(78)씨, 후쿠오카 미이케 탄광·제련소로 강제동원된 류기동(79)·손성춘(76)·이영주(77)씨 영상은 올봄 촬영돼 이번에 최초로 공개된다.

징용 경험을 감추고 살아야 했던 피해자들은 자신만의 언어로 과거를 이야기한다. 군수시설에서 탈출하려던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을 잇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모습에선 그들이 겪었을 고통의 깊이가 가늠될 정도다.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은 “보통 강제동원을 떠올리면 ‘배고프다’ ‘아프다’ ‘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처럼 단편적으로만 안다”며 “이번 전시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누구였는지, 어떤 과정으로 가게 됐는지, 현장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 느낌은 어땠는지, 언어 소통은 어떻게 했는지 등을 느낄 수 있게 증언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일본 시민단체가 제공한 영상도 이번 전시에 포함됐다. ‘나가사키 중국인 강제연행 진상을 조사하는 모임’이 제공한 중국인 포로, POW연구회가 제공한 연합군 포로의 증언 영상을 함께 전시해 강제노동이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서울=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오른쪽 두 번째)이 1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는 주제의 전시 관련 브리핑을 마친 뒤 연구소 관계자들과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해당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하시마 탄광(군함도), 다카시마 탄광, 나가사키 조선소, 야하타 제철소, 미이케 탄광·제련소 등으로 동원된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공개했다. 2021.7.16 [email protected]

한편 유네스코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공동조사단은 일본 도쿄에 있는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시찰한 결과 센터가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사실상 부정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지난 12일 공개했다. 지난해 6월 개관한 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군함도 등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조사단은 일본이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을 일본의 관점뿐 아니라 한국인 강제징용 노동자 등 피해자의 시각까지 균형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번 조사를 토대로 일본에 강력한 유감을 표명하는 내용의 결정문을 이르면 이달 21일 열리는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공식 채택할 예정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강제노동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 온 우리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세계유산위원회가 공개한 권고를 지지하며 환영의 뜻을 표한다”면서 “세계유산위원회가 이 권고를 채택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email protected]

<2021-07-16> 연합뉴스

☞ 기사원문: 피해자 육성 담은 ‘일제 강제동원’ 전시회 서울서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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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투데이: ‘군함도 강제노동의 역사’,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19인의 증언

금, 2021/07/16-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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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지진 희생 조선인 추도 비문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당시 일본인의 폭동으로 희생된 조선인 6천여 명을 추도하는 도쿄도 위령당 내의 비문.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정성조 기자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등 시민사회 원로들은 26일 성명을 내고 1923년 일본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의 진상규명과 추모사업 진행을 촉구했다.

이들은 “2023년은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가 되는 해로 이제라도 일본 정부는 진상을 공개하고 공식 사과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와 국회도 나서 자료 보존과 공개를 일본 정부에 요구하고, 9월 1일을 국가 추모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명에는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박만규 흥사단 이사장, 송인동 한국YMCA전국연맹 이사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이만열 시민모임 독립 이사장, 이종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장, 지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 원로 17명이 참여했다.

<2021-07-26> 연합뉴스

☞기사원문: 시민사회 원로들 “日간토학살 진상규명·추모사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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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21/07/27-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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