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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애국자 안창호와 친일파 윤치호, 애국가 작사가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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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애국자 안창호와 친일파 윤치호, 애국가 작사가는 누구?

admin | 월, 2021/08/16- 16:37

[김종성의 히,스토리] 오염된 애국가

▲ <애국가> 악보. ⓒ 위키백과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지난 4일 대선 출마 기자회견 때 애국가를 불러 화제가 됐다. 뒤이어 그의 집안사람들이 가족 모임 때 애국가 4절까지 합창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있었다. ‘전체주의적이다’라는 소감들이 나오자, 그 집안 며느리들이 가족 성명을 발표하는 진풍경도 나왔다.

가족 모임에서 애국가가 합창되는 것 자체가 비난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태극기 집회에서도 나타났듯이 극우세력이 국민통합의 상징물을 앞세우며 대중에게 어필하는 일이 잦아지다 보니, 애국가 같은 상징물에 대해서도 부정적 인상이 조장될 여지가 생기게 된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상징물을 둘러싼 문제점이 그 뿐만은 아니다. 애국가와 관련해서는 ‘오염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태극기보다 애국가의 문제점이 더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된 논쟁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의 친일 행적은 잘 알려져 있다. 일왕(천황)을 찬미하는 ‘환상곡 에텐라쿠’, 사쿠라·후지산·사무라이와 더불어 일왕과 ‘일본해’를 찬미하는 ‘일본 축전곡’,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10주년을 경축하는 ‘만주 환상곡’ 등을 짓거나 지휘했다.

그는 한국에 관한 음악도 만들었다. 그런데 일왕을 찬미하는 ‘환상곡 에텐라쿠’를 발표한 1938년 그 해에 한국에 대한 사랑을 표시하는 ‘코리아 환상곡’도 초연했다. 이는 그의 의식 속에서 일본에 대한 감정과 한국에 대한 감정이 비슷한 시기에 혼재돼 있었을 가능성을 드러낸다. 그런 감정으로 일왕 찬미곡도 짓고 한국 찬양곡도 지었던 것이다.

게다가 ‘코리아 환상곡’과 ‘만주 환상곡’의 피날레 부분이 비슷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2007년 <내일을 여는 역사> 제27호에 실린 ‘다시 보는 안익태 – 애국가의 작곡가는 애국자였나’에서 음악학자 송병욱은 “(두 곡이) 주요 합창 선율 두 개를 공유하고 있다”며 “전자에서는 그 선율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대동아공영과 신질서를 찬미하는 가사를 위해, 후자에서는 해방된 한국과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가사를 위해 사용”됐다고 분석했다.

애국가의 오염 상태는 지난 11일 <안민석 TV>를 통해 생중계된 국회 공청회에서도 다시 한 번 강조됐다.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광복절에 즈음해 개최된 이 공청회에서는 작사가 쪽의 문제점이 집중적으로 조명됐다.

애국가 작사가는 공식적으로 ‘미상’이다. 누가 작곡했는지 확정돼 있지 않다. 애국가 작사가 논쟁의 대체적인 상황과 관련해 올해 3월 <기독교 사상> 제747호에 실린 김도훈 한국교원대 연구교수의 논문 ‘애국가 가사의 변천과 작사자 논쟁’은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가 하는 논쟁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은 지금으로부터 66년 전의 일”이라고 한 뒤 1955년 이후의 논쟁 실태를 이렇게 정리했다.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이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이 재생산되는 이유는 작사자를 입증할 만한 결정적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작사자 논쟁은 자료보다는 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증언과 진술, 전언(傳言)이나 전문(傳聞)을 중심으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2015년 <근대 서지> 제11호에 실린 박대헌 완주책박물관장의 논문 “SBS TV 그것이 알고 싶다 ‘애국가 작사 미스터리’의 논쟁에 대한 고찰”은 2014년 7월 12일 방송된 작사가 논쟁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동안 애국가 작사자 리스트에는 윤치호, 안창호, 김인식, 최병헌, 민영환 등이 이름을 올렸다”고 정리한다.

안창호냐 윤치호냐, 참 고약한 문제

이 후보들 중에 가장 유력한 인물은 둘이다. 11일 국회 공청회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임진택 애국가바로잡기국민운동 상임대표는 “지금 우리 애국가에 얽혀 있는 작사자 문제는 만고의 애국자 안창호 선생이냐 친일민족반역자 윤치호냐 하는 난처한, 고약한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

▲ 윤치호 ⓒ 퍼블릭도메인

안창호(1878~1938년)와 함께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윤치호는 1866년 출생해 조선국과 대한제국의 고위직을 역임한 뒤 1911년 일본 남작이 됐다. 그 뒤 총독부 어용기관들과 합세해 한국인 청년들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고 전쟁 수행을 위해 금전을 납부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에 따르면, 1941년 9월 ‘임전대책 대(大)연설회’ 때 일왕이 한국인과 일본인을 하나로 바라봐주고 똑같이 어질게 대해주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을 실천하고 있다면서 이렇게 연설했다.

천황폐하의 ‘일시동인’이라 하신 성의를 봉대하여 내선일체를 주장하시는 미나미 총독은 우리 반도의 아버지라고, 우리 민족의 경애를 받고 계십니다. 미나미 총독이 총을 메고 나서라거든 총을 메고 나섭시다. 곡괭이를 메고 나서라거든 곡괭이를 메고 나섭시다. 일언이폐지하고 우리 반도 민중도 내지동포와 같이 나라를 위하여 살고 나라를 위하여 죽자고 각오합시다.

조선총독을 반도의 아버지로 부르고, 내지동포인 일본인들과 함께 나라를 위해 살고 죽자고 외쳤던 윤치호다. 그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의 유력 후보다. 서글픈 것은 물적 자료로만 본다면, 안창호 쪽보다 윤치호 쪽이 더 유력하다는 점이다. 임진택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윤치호 작사설 측은 물적 증거가 있음을 앞세웠고, 안창호 작사설 측은 주로 전문증거를 앞세워 주장을 해왔습니다. 윤치호 작사설이 득세하게 된 것도 바로 물적 증거가 존재한다는 이유였죠.

▲ 도산 안창호 선생 ⓒ 퍼블릭도메인

안창호 작사설을 뒷받침하는 것은 주로 ‘누구한테서 들었다’는 내용이다. 발제에 앞서 환영사를 한 안민석 의원도 그런 전문증거 중 하나를 소개했다. 그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따님 안수산나씨를 LA에 가서 6년 전에 만났습니다”라며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따님인 안수산나씨는, 물론 재작년에 작고하셨습니다만, ‘어릴 때 애국가를 아버지가 직접 지었다고 나한테 말씀하셨다. 집안 어른들한테도 우리 아버지가 지은 거라고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고 말했습니다”라고 소개했다.

이 외에도 ‘할아버지 비서관인 구익균으로부터 할아버지가 애국가를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안창호 외손자 필립 안커디의 전문 증언,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가 학교 조회시간마다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는 1907년 3월 20일자 <대한매일신보> 기사 등이 안창호 작사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확실한 증거는 아니다. 애국가를 불렀다고 했지, 작사했다고는 하지 않았다.

반면, 윤치호설은 문서 자료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그가 친필로 썼다는 애국가 가사지가 있다는 점, 그가 ‘역술’했다는 <찬미가> 노래집에 애국가가 포함돼 있다는 점이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자료들에 대해서도 합리적 비판이 제기된다.

1955년에 윤치호 유족은 1907년에 쓰였다는 애국가 가사지를 제시했다가 최남선·주요한 등이 그 당시 애국가에는 ‘충성을 다하여’란 문구가 없었다고 이의를 제기하자 ‘1907년이 아니라 1945년에 쓴 것’이라고 입장을 번복했다.

애국가 가사 속의 ‘님군(임금)을 섬기며’가 ‘충성을 다하여’로 바뀌는 과정은 조선왕정이 무너진 뒤 한국인들이 민주공화국을 추구하며 3·1운동을 일으키는 과정을 반영한다. 1907년에 윤치호가 친필로 썼다는 가사지에 ‘충성을 다하여’가 있었다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어색하다. 유족들이 입장을 번복한 것도 문제이지만, 정말로 윤치호의 친필이 맞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고 박대헌 논문은 소개한다.

또 윤치호가 역술했다는 노래집에 애국가가 포함된 것에 대해서도 반론이 제기된다. 임진택은 “윤치호 작사설 측에서는 역술이란 게 번역과 저술을 포괄하는 단어라고 강변을 합니다”라며 “하지만 역술은 ‘번역하여 기술한다’는 의미의 단일어이지 ‘번역도 하고 저술도 한다’는 복합어가 아닙니다”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저작물을 번역물과 함께 섞어 ‘역술’로 묶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으므로 ‘윤치호 역술 애국가’를 윤치호 작사설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 파워포인트 화면과 임진택 대표의 발표 장면. ⓒ 안민석 의원실

오염된 애국가

그래서 이 문제는 오리무중 상태다. 이 때문에, 1955년에 이 문제의 심사를 맡은 정부 당국도 모호한 입장으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해 7월 30일자 <경향신문> 기사 ‘확증 없이 무(無)결론’은 이렇게 보도했다.

애국가 작사자 규명으로 104일간을 소비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사하여온 바 있는데, 28일 제3차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의 최종 회합에서 격론 끝에 ‘윤씨가 작사자로 가장 유력하다’는 결정으로써 애국가 작사자를 밝히지 못한 채 애매한 결론을 내리고 동 조사위원회는 해체되고 말았다.

‘윤치호가 가장 유력하지만 확정할 수 없다’가 결론이었다. 그래서 애국가 악보에 작사자 이름이 나오지 않게 된 것이다. 작사자 논쟁이 66년째 계속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논쟁이 장기화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 사안이 친일파로 인한 애국가 오염을 반영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심각하다. 윤치호설이 맞다면 작곡가뿐 아니라 작사가마저 친일파라는 말이 되어, 이제껏 열심히 애국가를 불러온 우리 국민들의 모양새가 이상해진다.

안창호설이 맞다 해도, 문제가 남는다. 친일파 유족들이 독립운동가 안창호를 밀어내고 자신들의 조상을 ‘가장 유력한 작사가 후보’로 만들었다면, 이는 독립운동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다. 그리고 안창호가 진짜 작사가라고 해도, 안익태의 영혼이 애국가에 들어감으로써 생긴 문제점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는다.

이런 현실은, 애국가의 위상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공청회에 함께한 김원웅 광복회장은 “표절과 친일이 드러난 안익태의 애국가는 이미 생명력을 상실했습니다”라고 탄식했다.

<2021-08-15>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애국자 안창호와 친일파 윤치호, 애국가 작사가는 누구?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김종성의 히,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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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1/06/24-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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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우 작가는 인도 델리를 여행하다 그곳에서 한국광복군이 영국군과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도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있었다. 그곳의 사람과 터를 찍었다.

멕시코에서 고국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던 김익주 선생의 후손 다빗 킴 씨. ⓒ김동우 제공

대부분 사람들은 ‘국외 독립운동’이란 말에서 만주 벌판을 연상한다.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이나 김원봉의 의열단이 떠오를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한반도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예컨대 인도나 멕시코 같은 곳에 우리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남아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김동우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기자 출신인 그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2017년 사진 작업을 위해 장기 여행을 계획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을 주제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인도 델리를 여행하던 중 우연히 레드포트(Red Fort)에 방문하게 된 그는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파견한 한국광복군이 이곳에서 영국군과 함께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구한말 한반도와 아무 연관도 없다고 여겼던 장소에서 들은, 뜻밖의 이야기였다.

김 작가는 인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흩어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사실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는” 독립운동사가 미국·멕시코·쿠바 등지에 있었다. 아프리카와 남미 외에는 전 세계에 퍼져 있다고 할 정도였다.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현지에 정착하게 된 이주자들은 후손을 남겼다. 김동우 작가는 2017년부터 2년간 세계를 돌며 사람과 터를 찍었다. 5월18일부터 8월18일까지 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열리는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에 전시된 사진들이 그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의 직접적 계기는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이다. 1921년 3월 한인 300여 명이 쿠바로 향했다. 이들이 출발한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멕시코다. 김동우 작가는 그래서 “쿠바 이민을 이야기하려면 멕시코 이민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1905년 4월 제물포에서 영국 상선을 타고 멕시코로 간 1033명이 북중미 이민의 시초 격이다. 이역만리로 향한 이들 전부가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온 기근을 피하고 돈을 벌려는 목적이 강했다. 1905년 〈황성신문〉에는 이런 이민 광고가 실렸다. “묵서가(墨西哥·멕시코)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수토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이민자 대부분은 에네켄(Henequen·용설란의 일종, 일명 애니깽) 농장으로 분산배치돼 노예와 같은 노동조건으로 혹사당했다. 멕시코 이민자 일부가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기 위해 향한 곳이 쿠바이다.

‘경제적 이유로 건너간 이민자’와 ‘국외 독립운동가’가 늘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둘 다에 해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혹독한 농장 생활을 견딘 이들이 차츰 돈을 모아 독립운동에 쓴 것이다. 독립군 훈련을 위해 군사학교를 설립하기도 했고, 번 돈 대부분을 독립자금으로 부치는 이도 있었다.

2017년부터 2년간 세계를 돌며 해외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 촬영한 김동우 작가. ⓒ시사IN 조남진

아흔 넘은 안창호 선생의 아들 랄프 안

이민자들의 후손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김동우 작가는 과거에 나온 언론 인터뷰나 학술자료를 바탕으로 현지 한인회 선교사 등과 접촉했다. 오래된 자료가 대부분이라 허탕 치기 일쑤였다. 국가보훈처에도 문의했으나 ‘개인정보’를 건네는 데에 난색을 표했다. 소재지를 찾아도 문제였다. 한국을 기억하는 이들은 고령이거나 세상을 떠났고, 살아 있는 후손들은 한국과 유대감이 옅었다. “이민 3세대 이후로는 외양이 변한다. 한식을 먹고 한인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보니 점점 현지인과 동화된다. ‘우리 조상이 코리아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먼 곳에서 왔다고 하니 취재에 반갑게 응하기는 하는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약하다.” 후손들을 촬영한 뒤 김 작가는 인물만 반투명 처리를 했다. 시간이 갈수록 이들의 존재가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의미를 담았다.

김 작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 랄프 안(안필영) 씨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안창호의 ‘아들’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부터 놀라웠다. 아흔을 넘긴 랄프 안 씨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김 작가를 만난 랄프 안 씨는 코리아타운에서 갈비탕을 사주었다고 한다. ‘아버지(안창호)가 독립운동에 앞장서 가족들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는 게 김동우 작가가 전한 랄프 안 씨의 말이다. 의병장 민긍호의 직계자손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만났다. 이들의 존재가 알려진 건 한국과 옛 소련이 수교를 맺은 이후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먼 친척들이 자손으로 인정받아 훈장을 받고, 연금을 수령했다. 직계자손들은 훈장만이라도 받기 위해 한국 정부에 훈장 재교부를 신청했지만, 어렵게 재교부된 훈장은 전달식도 없이 비닐봉지에 담긴 채 전달됐다. 김동우 작가는 “해외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집집마다 울먹이며 이런 사정을 호소했다.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람 사진은 눈길을 끄는 반면, 이번 전시의 풍경 사진은 상대적으로 맥이 빠진다. 거리나 건물을 찍은 사진은 주의 깊게 들여다보더라도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앙상하게 골격만 남은 구조물, 나무와 풀뿐인 벌판도 마찬가지다. 관람객이 느끼는 헛헛함은 김동우 작가 스스로 느낀 것이며, 작업 과정에서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조상들이 토론하고 서성였던 자리, 건물이 있었던 곳에 막상 가보면 멸실된 게 많았다. 나무로 된 집이 다 헐려서 옥수수밭만 남았다면 옥수수밭을 찍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군사학교가 있던 곳에는 시장이 생겼고, 독립운동가들이 사형당한 곳은 소문에 의지해 추정만 할 따름이다. 그래서 김 작가는 “수많은 현장을 찾아다니며 가장 많이 마주한 풍경은 공(空)이었다”라고 했다. 시간의 흐름 때문이지만 적극적으로 보존하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새벽. 100년 전 한인 이민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보았을 광경이다. ⓒ김동우 제공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100년 전과 다르지 않은 것도 있었다. 썩고 헐리는 인공물과 달리 자연 풍광은 그대로였다. 김 작가는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새벽 5시에 맞춰 셔터를 눌렀다. 한인 이민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보았을 광경이다. 쿠바 이민자들이 도착한 마나티 항구의 저녁노을, 연해주 한인들이 강제로 이주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의 초원도 찍었다. 조상들이 본 광경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

김동우 작가는 당분간 국외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진 작업에 집중할 예정이다. ‘쿠바 이주 100주년’이라는 전시 주제에 맞지 않아 내놓지 못한 사진도 많다고 했다. 특히 중국 지역 독립운동이 그렇다. 김 작가는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동우 작가는 이 일이 “우연처럼 시작된 운명” 같다고 했다. 그는 씁쓸한 독립운동의 후일담을, 거의 냉정할 정도로 정직하게 기록하는 작업을 당분간 이어갈 예정이다.

이상원 기자

<2021-06-18> 시사인 호수 717

☞기사원문: 미국·멕시코·쿠바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을 찍다

수, 2021/07/07-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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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민단체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과 미군이 격전을 벌인 오키나와(沖繩)현 본섬 남부 지역에서 새 미군 기지 매립지에 쓸 토사를 채취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평화를 기원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전몰자 유족 모임’은 오늘(7일) 일본 방위성과 후생노동성을 찾아 “헤노코(邊野古) 연안 매립 공사에 쓸 토사를 희생자 유해가 묻힌 곳에서 채취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의 서명 용지를 전달했습니다.

서명에는 일본 전역에서 1만 1천여 명이 동참했습니다.

이들은 “희생자의 피가 스며든 토사를 미군 기지를 만드는 매립에 사용하는 것은 유골이라도 돌아와 달라는 유족의 염원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전쟁 막바지이던 1945년 일본군이 본토를 지키기 위해 오키나와 본섬 남부 등에서 미군을 상대로 벌인 싸움입니다.

당시 일본군이 방패막이로 내세운 오키나와 주민과 미군 병사 등을 포함해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오키나와대 지역연구소 특별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에는 조선인도 3천461명이 군인이나 군속으로 동원돼 701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는 노무 동원된 이들이나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이들을 제외한 숫자입니다.

기록으로 파악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실제 동원되거나 사망한 조선인은 더 많을 수 있고, 이들 대부분은 희생된 주변 지역에 묻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그동안 희생자 유해 수습이 미흡해 이토만(絲滿)을 비롯한 격전지에서 발굴이 계속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본섬 남부의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을 이전할 곳인 중부 헤노코 연안의 매립에 쓸 토사 일부를 당시 격전지였던 이토만 등에서 채취하려 하고 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유골이 섞인 토사가 매립용으로 투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입니다.

지난 3월부터 오키나와 현청 앞에 단식 투쟁 등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 시민단체 ‘가마후야’(ガマフヤ-)의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67) 대표는 최근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그간 수습된 희생자 7백여 명의 유골을 가족에게 돌려주기 위한 후생노동성 주도의 DNA 감정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한국의 유족들도 DNA 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달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가마후야’는 한국 단체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02-2139-0462)와 민족문제연구소(☎ 02-969-0226)를 통해 오키나와 유골 발굴 및 DNA 감정에 참여할 한국인 유족의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황현택 기자 [email protected]

<2021-07-07> KBS NEWS

☞기사원문: “조선인 등 묻힌 토사 채취 반대”…日시민단체, 1만여 명 서명 제출

※관련기사

☞연합뉴스: “피가 스며든 흙으로 軍기지 만드는 건 인도적으로 용납 불가”

☞한겨레: “희생자 유골 섞인 흙으로 오키나와 미군기지 건설, 반인도적 행위”

☞연합뉴스: “피가 스며든 흙으로 軍기지 만드는 건 인도적으로 용납 불가”

☞연합뉴스: 조선인 유골 공사장에 묻히나…日NGO “한미 유족과 반대운동”

목, 2021/07/08-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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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세계유산위, ‘일본에 유감 표명’ 결정문 채택해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서울=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 1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는 주제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해당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하시마 탄광(군함도), 다카시마 탄광, 나가사키 조선소, 야하타 제철소, 미이케 탄광·제련소 등으로 동원된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공개했다. 하시마 탄광으로 강제동원된 고(故) 서정우씨 등의 영상은 최초로 공개됐다. 2021.7.16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송은경 기자 = “‘왜 여기에 와서 이런 일을 당하는가’ 혼잣말을 하면서 매일 죽을 생각만 했습니다. 바다를 내려다보면 너무 무서워서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군함도(하시마·端島) 강제동원 피해자 서정우 씨)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 산업시설에서 벌어진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 최근 국제사회에서 제기된 가운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육성 증언을 다루는 자리가 마련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공동 주최로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전시회를 11월 7일까지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연다고 16일 밝혔다.

전시 영상들은 강제동원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담고 있다. 열네 살에 하시마 탄광에 동원됐다가 이후 나가사키에서 원폭 피해를 겪은 고(故) 서정우(1928∼2001) 씨의 영상이 국내에서 공개되는 건 이번 전시가 처음이다. 사복형사에게 연행돼 다카시마 탄광으로 끌려갔던 손용암(78)씨, 후쿠오카 미이케 탄광·제련소로 강제동원된 류기동(79)·손성춘(76)·이영주(77)씨 영상은 올봄 촬영돼 이번에 최초로 공개된다.

징용 경험을 감추고 살아야 했던 피해자들은 자신만의 언어로 과거를 이야기한다. 군수시설에서 탈출하려던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을 잇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모습에선 그들이 겪었을 고통의 깊이가 가늠될 정도다.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은 “보통 강제동원을 떠올리면 ‘배고프다’ ‘아프다’ ‘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처럼 단편적으로만 안다”며 “이번 전시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누구였는지, 어떤 과정으로 가게 됐는지, 현장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 느낌은 어땠는지, 언어 소통은 어떻게 했는지 등을 느낄 수 있게 증언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일본 시민단체가 제공한 영상도 이번 전시에 포함됐다. ‘나가사키 중국인 강제연행 진상을 조사하는 모임’이 제공한 중국인 포로, POW연구회가 제공한 연합군 포로의 증언 영상을 함께 전시해 강제노동이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서울=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오른쪽 두 번째)이 1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는 주제의 전시 관련 브리핑을 마친 뒤 연구소 관계자들과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해당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하시마 탄광(군함도), 다카시마 탄광, 나가사키 조선소, 야하타 제철소, 미이케 탄광·제련소 등으로 동원된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공개했다. 2021.7.16 [email protected]

한편 유네스코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공동조사단은 일본 도쿄에 있는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시찰한 결과 센터가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사실상 부정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지난 12일 공개했다. 지난해 6월 개관한 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군함도 등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조사단은 일본이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을 일본의 관점뿐 아니라 한국인 강제징용 노동자 등 피해자의 시각까지 균형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번 조사를 토대로 일본에 강력한 유감을 표명하는 내용의 결정문을 이르면 이달 21일 열리는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공식 채택할 예정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강제노동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 온 우리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세계유산위원회가 공개한 권고를 지지하며 환영의 뜻을 표한다”면서 “세계유산위원회가 이 권고를 채택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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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6> 연합뉴스

☞ 기사원문: 피해자 육성 담은 ‘일제 강제동원’ 전시회 서울서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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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민족문제연구소, 군함도 등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19인 증언 공개

☞이투데이: ‘군함도 강제노동의 역사’,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19인의 증언

금, 2021/07/16-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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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지진 희생 조선인 추도 비문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당시 일본인의 폭동으로 희생된 조선인 6천여 명을 추도하는 도쿄도 위령당 내의 비문.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정성조 기자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등 시민사회 원로들은 26일 성명을 내고 1923년 일본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의 진상규명과 추모사업 진행을 촉구했다.

이들은 “2023년은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가 되는 해로 이제라도 일본 정부는 진상을 공개하고 공식 사과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와 국회도 나서 자료 보존과 공개를 일본 정부에 요구하고, 9월 1일을 국가 추모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명에는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박만규 흥사단 이사장, 송인동 한국YMCA전국연맹 이사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이만열 시민모임 독립 이사장, 이종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장, 지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 원로 17명이 참여했다.

<2021-07-26> 연합뉴스

☞기사원문: 시민사회 원로들 “日간토학살 진상규명·추모사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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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21/07/27-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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