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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인천 학교들, 일제 잔재 남아 있어도 개선은 ‘거북이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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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인천 학교들, 일제 잔재 남아 있어도 개선은 ‘거북이걸음’

admin | 화, 2021/08/17- 00:19

친일인사 작곡 교가·일본신사 잔재 등…교육청 “후속 조치는 자율”

친일 인사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 [학교 홈페이지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인천=연합뉴스) 최은지 기자 = 인천 지역 학교에 대한 일제 잔재 조사가 지난해 본격적으로 시행됐지만 별다른 후속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15일 인천시교육청에 따르면 지난해 4∼12월 지역 초·중·고교와 특수학교 523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모두 81건의 일제 잔재 사례가 파악됐다.

이 중 22건은 친일 작사가나 작곡가가 만든 교가를 쓰고 있는 학교 사례였다.

특히 ‘섬집 아기’와 ‘봄이 오면’의 작곡가로 유명한 이흥렬이 만든 교가도 7개 학교에서 사용되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흥렬은 일제강점기 일본음악의 수립을 목적으로 창설된 대화악단 지휘자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또 다른 친일 인사인 김동진이 만든 교가를 쓰고 있는 학교도 6곳에 달했다. 김씨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음악 활동을 했다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친일 인사의 동상이나 일본 신사 잔재 등 일제 관련 기념물이 교정에 남아 있는 학교는 3곳으로 파악됐다.

나머지는 서운, 송월, 백마, 작약도 등 일제강점기에 일본식으로 변형된 지명이 교명과 교가 가사에 남은 사례였다.

시교육청은 이 같은 조사 결과를 각 학교에 알렸으나 개선은 권고 사항에 그쳐 눈에 띄는 후속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학교 동문회와 학교운영위원회 등 내부 협의가 필수적인 만큼 교내 일제 잔재를 없애기까지는 시일이 좀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천황을 섬기던 신사의 돌기둥과 석등이 교정에 남아 있는 인천 중구 모 고교의 경우 별도의 시설물 철거 계획을 논의하지는 않은 상태다.

인천 연수구 모 중학교에는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전향한 윤치호의 동상이 세워져 있지만 ‘나쁜 역사도 역사로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철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 학교 관계자는 “동창회 차원에서 재원을 마련해 학교 설립자 동상을 세운 것이라 학교 마음대로 없앨 수 없다”며 “내부 검토를 여러 차례 했지만 역사를 기억하자는 차원에서 동상을 남겨두기로 했다”고 말했다.

친일 인사가 작사·작곡한 교가를 쓰고 있는 학교들도 대부분 즉각적인 개선 조치에는 나서지 못했다.

친일파가 교가를 작곡한 인천 연수구 모 고교는 추후 학생, 학부모, 동문회와의 협의를 거쳐 교가 일부를 개사하는 방안을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인천 동구 모 고교도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에 대해 별다른 개선 계획을 세우지 못한 상태다.

인천시교육청 관계자는 “일선 학교에 일제 잔재 조사 결과를 보고서 형태로 알리기는 했지만 후속 조치는 자율적으로 하도록 했다”며 “이후 각 학교의 개선 여부에 대해서도 추가 조사를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은지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5> 연합뉴스

☞기사원문: 인천 학교들, 일제 잔재 남아 있어도 개선은 ‘거북이걸음’

※관련기사

☞서울신문: 친일파가 만든 교가…인천 각급 학교 일제 잔재 파악하고도 ‘개선‘ 소극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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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으로 보는 강제동원 이야기 포스터 ©근현대기념관

서울 강북구(구청장 박겸수)와 근현대사기념관은 22~23일 오후 2시 ‘영상으로 보는 강제동원 이야기’ 강좌를 개최한다.

이번 강좌는 민족문제연구소가 기획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한다. 올해 극장가에서 주목 받은 영화를 보며 일제 강제동원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22일은 ‘근현대사에 매료된 한국영화, 화제작 ‘군함도’를 말하다’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23일에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통해 국제사회로 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들여다본다.

강의는 무료이며 근현대사기념관 2층 강의실에서 진행된다. 참여 대상은 역사에 관심 있는 시민으로 매 강좌 25명 내외를 선착순으로 모집한다.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mhmh.or.kr) 또는 전화(02-903-7580)로 신청하면 된다.

15~16일에는 다큐멘터리 ‘기록작가 하야시 에이다이의 저항’과 ‘아버지와 나: 시베리아, 1945년’를 보고 이야기를 나눴다.

2016년 5월 개관한 근현대사기념관은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찾을 수 있도록 매주 월요일과 설․추석 연휴를 제외한 화~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로 개방된다.

선열들의 묘역을 따라 그 뜻을 새기며 걸을 수 있는 북한산둘레길 2구간 ‘순례길’ 아래에 위치한 근현대사기념관은 개관 1년간 약 2만 명이 방문했다. 인근 국립4·19민주묘지와 함께 근현대사 탐방 코스로 자리매김했다.

<2017-12-20> 뉴스1

☞기사원문: 영화 ‘군함도’ ‘아이캔스피크’ 보며 역사 배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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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7/12/20-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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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정부 위탁으로 고려대 연구팀이 작업중…2019년 완성본 공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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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종로구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이 주최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참석한 시민이 소녀상의 손을 잡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현재까지 발견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국내외 공문서와 언론 기사, 피해자들이 남긴 기록을 망라해 통합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하는 정부의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24일 학계에 따르면 여성가족부는 2012년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팀(책임자 정태헌 교수)에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 사료 DB화 사업’을 위탁했으며 현재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연구팀은 각종 문서와 유물, 연구 성과, 보도된 기사 등 총 8만여 건을 조사·수집하고서 이들 자료에 유형·생산자·생산 시기·소재지·소장자 등 항목을 부여해 목록을 작성해왔다.

연구팀은 현재 자료 목록 중 중복된 것들을 추려 내고 오류를 수정하는 검수 작업을 진행 중이며, 2019년에는 완성된 DB가 공개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물들을 통합해 DB화하고 대중에게 공개하는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가부는 DB가 완성되면 이를 웹사이트에 공개해 정부 관계자뿐 아니라 학술·교육 등 목적으로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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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자료 DB를 위한 과정 (서울=연합뉴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팀(책임자 정태헌 교수)이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 사료 데이터베이스(DB)화 사업’을 위해 분류한 자료들의 모습. 연구팀은 8만여 건의 자료를 조사·수집하고 목록을 작성해왔다고 밝혔다. 2017.12.24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제공=연합뉴스]

DB화가 완료되면 학술 역량 확대는 물론 교육이나 시민단체 활동 등에도 광범위하게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키워드로 검색이 가능한 DB의 특성상 필요한 자료를 찾기 쉬워지고, 정보의 종류나 출처도 빨리 파악할 수 있다.

통합 DB 구축 외에도 연구팀은 중요 공문서를 체계적으로 분류해 키워드를 추출했으며 일부 중요 문서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해석·번역 작업도 진행 중이다. 이 과정에서 자료의 순서나 오기, 누락 등 기존 공개된 자료의 한계를 보완하는 작업도 진행했다고 연구팀은 전했다.

이번 사업에 참여한 박한용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는 관련 자료를 보유한 국내외 단체와 연구자들을 꾸준히 만나 설득한 끝에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DB화라는 성과를 내는 과정에서 여러 관련 단체들과 연구자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며 “이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2017-12-24> 연합뉴스

☞기사원문: 일본군 위안부 자료 한눈에…통합 데이터베이스 구축한다

※관련기사

☞매일경제: 여가부, 일본군 위안부 자료 통합 데이터베이스 구축한다

화, 2017/12/26-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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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봉준 장군 동상건립위원회 이이화 이사장. /우철훈 선임기자

2018년 봄 서울 종로 네거리에는 작지만 의미 있는 동상이 하나 선다. 흔히 ‘장군’의 동상은 칼을 들고 하늘을 향해 손을 치켜드는 모습이 많지만 이 동상은 친근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는 ‘반란’의 수괴로 사형에 처해진 인물이다. 우리 근대 사법제도가 도입된 이후 법에 의해 사형이 집행된 인물의 동상이 시내 한복판(대학 구내에 민주화 열사 동상은 있다), 그것도 종로 한복판에 세워지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는 전봉준이다. 동학농민전쟁의 주인공으로 녹두장군으로 불린 그 전봉준 장군이다. 123년 만에 명실상부한 복권이다.(법적으로 2010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으로 복권됐다) 이 사업을 추진한 ‘전봉준 장군 동상건립위원회’ 이이화 이사장은 동상이 세워질 자리인 종로 영풍문고 앞 옛 전옥서 터를 둘러보며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사장은 “1895년 3월 29일 사형 판결을 받고 30일 새벽 2시 이곳에서 전봉준 장군을 비롯한 다섯 인사의 교수형이 집행됐다”며 “전 장군의 동상 제작은 완료됐지만 서울시 심사를 앞두고 있어 공개하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지난 2017년 3월 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7월부터 기금 모금을 시작해 목표액 3억원의 반절을 모았다. 2018년 3월까지 모금한다. 정부의 예산도 기업체의 협찬도 아닌 순수 시민 개인모금이다.(후원계좌는 농협 301-0211-6928-21 사단법인 전봉준 장군 동상건립위원회)

“이곳 종로1가 일대가 우포도청, 의금부, 전옥서 자리였다. 그 전까지 목을 베는 참수를 했는데 근대 사법제도가 도입되면서 교수형으로 바뀌었다. 전봉준은 교수형으로 바뀐 제도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 전봉준을 포함해 손화중, 성두한, 최경선, 김덕명 다섯 동학 지도자(그는 5명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했다)는 판결이 끝나자마자 사형이 집행됐다. 마치 박정희가 인혁당 사건 처형하듯이. 왜 그렇게 서둘러 처형했느냐 하면 당시는 단심제였는데 2심제로 법이 바뀌어 4월 1일부터 시행하게 돼 있었기 때문이다. 한양 주민들이 옥중의 전봉준을 구출한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전봉준이 들것에 실려 압송되는 유일한 사진은 일본 신문기자가 찍은 것인데, 일제 영사경찰서에 취조 받으러 가는 모습이다. 일제 영사경찰서는 지금 을지로 중부경찰서가 자리다. 이 이사장은 “전봉준 장군은 최후진술로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남 몰래 죽이느냐’는 최후진술과 <운명>이라는 유시를 남겼다”고 말했다. 그 유시의 내용은 ‘때를 만나서는 천지도 모두 힘을 합하더니/ 운이 가니 영웅도 스스로 어찌하지 못하는구나/ 백성 사랑하는 정의나 실수 없다/ 나라를 위하는 붉은 마음 누가 알아주리’다.

종로에 자신의 피를 뿌려달라는 전봉준 장군의 유언은 123년 만에 그 자리에 동상이 서는 것으로 이뤄진다. 동상은 앉은 그가 최종 목표로 삼았던 한양 경복궁 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전봉준의 유언 때문일까, 공교롭게 바로 동상 왼쪽 280여m 떨어진 종로구청 사거리는 2015년 11월 14일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진 곳이다. 동상의 오른쪽 종각 앞에는 그 백남기 농민 기념 부조가 이미 설치돼 있다. 그러니까 종로 네거리는 우리 농민운동 역사의 현장이자 상징이 되는 셈이다.

이 이사장은 30대부터 전봉준 장군의 동학농민전쟁에 천착했으니 벌써 50년 가까이 됐다. 그는 “모든 역사교과서에 전봉준을 역적으로, 동학을 난(亂)이라고 표기했는데 나는 그런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전봉준과 동학을 공부했다”고 말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민중운동사반’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답사도 다니며 연구했다.

이 이사장이 동학에 매료된 이유 중 하나는 부친의 영향 때문이라고 했다. 이 이사장은 한학자로 <주역> 연구가인 야산(也山) 이달 선생의 넷째아들이다. 주역은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새로운 사상이 열린다는 후천사상과 맥이 닿아 있다. 그는 “부친의 변혁적인 주역사상은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과 외세에 맞선 자주정신인 동학정신과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또 서자로 태어났다. 이 선생은 조선시대처럼 차별은 없었지만 동학의 서얼철폐 사상에도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동학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은 근대 민주주의 정신의 기초다. 그 맥락에서 이 이사장은 인간 전봉준을 이렇게 정의한다.

“전봉준은 농촌지식인으로 서당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친 교육자다. 그러나 단순히 공자·맹자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실학정신에 입각해 개혁에 투철했다. 그가 행한 집강소는 조선말 모순을 철폐하는 농민자치기구로, 민주·평등운동에 바탕을 뒀고, 양반과 노비, 지주와 소작인의 차별을 모두 깼다. 또 끊임없이 지역(고창·정읍 일대)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운 정치가일 수도 있다. 그렇게 준비를 하고 있었던 차에 조병갑이 나타나 봉기를 한 것이다. 역사을 만드는 인물은 꼭 ‘계기’를 놓치지 않는다. 이한열·박종철·백남기 등은 그런 ‘계기’ 속에서 일어난 인물이다.”

1937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이 이사장은 부친이 한문만 가르쳐 정규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 정규교육을 받기 위해 일부러 가출해 고아원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미인가 학교만 맴돌았을 뿐 정규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혼자 공부하던 그는 학원에 뒷돈을 주고 가짜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만들어 명문 광주고에 합격했다. 이 이사장은 “그때 정규 중학교를 나온 학생 9명은 모두 떨어지고 가짜였던 나만 합격했다”면서 웃는다. 서울에 올라와 서라벌예대(현 중앙대)를 다녔지만 1년 만에 그만두고, 성균관대도 6개월 정도 청강생으로 다니다 그만뒀다. 먹고 사는 문제가 급했기 때문이다. 그가 받은 정규교육은 단 4년(고등학교 3년, 대학교 1년)이 전부다.

이 이사장은 평소 주소가 일정치 않다 보니 입대영장을 받지 못해 군대 기피자가 됐다. 정상 취업을 할 수 없던 그는 아이스크림 장사, 빈대약 장사, 외판원, 웨이터 등을 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글을 잘 쓴 그는 <불교시보> 기자로 취직해 글을 쓰기 시작해 1967년 <동아일보> 출판부에 임시직원으로 입사했다. 그리고 혼자 공부하면서 꾸준히 <창작과 비평> <뿌리깊은 나무> 등의 잡지에 글을 쓰면서 이름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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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화 이사장이 종로1가 영풍문고 앞 옛 전옥서 터에 세워질 전봉준 장군 동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어떻게 역사학계에 입문했는가. 
“한국사연구회라는 학벌 안 따지는 진보적인 역사 연구단체가 있다. 내가 <창작과 비평> 등에 ‘허균’과 ‘북벌론의 허구’ 등 역사에 대한 글을 몇 번 쓴 것을 본 모양이다.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최창규 교수가 주자학이 조선의 정통성이라는 얘기를 했다. 강만길 회장이 나보고 반론을 써보라고 해서 내가 그 허구를 깨는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것이 화제가 됐고, ‘이이화는 단순한 재야사학자가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요즘 박사학위 없으면 정통이 아니라며 재야 사학자, 심지어 사이비 사학이라 비난한다. 그때도 그랬을 텐데. 
“그런 생각은 특히 서울대 연·고대 출신들이 가지고 있다. 요즘은 많이 깨졌는데 우리 때는 더 심했다. 정말 지들끼리 놀고 말도 못했다. 그래도 비교적 나는 인정을 받았다. 왜? 지들도 모르는 한문을 내가 대학원생들에게 가르쳤으니. 서울대 교수들이 ‘어떤 놈이 규장각 와서 한문 가르치냐’고 질투 많이 했다.”

-요즘은 학위를 가지고 교수직을 해야 역사학자 대접을 해주는 풍토다.
“그때도 강단에 서지 않으면 모두 재야사학자라고 했다. 단군 연구한 안호상도 재야사학자라고 했다. 틀린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이사장의 최고 역작은 1994년부터 10년간 쓴 22권의 <한국사 이야기>다. 역사에서 ‘민중사’라는 개념을 처음 소개했다. 이 이사장은 “동학 100주년 기념행사를 1994년 모두 끝내고 근질근질하던 차에 한길사 김언호 사장에게 ‘한국통사를 제대로 한 번 쓰고 싶다’고 해 한 달 250만원 선인세로 받고 10년 동안 쓴 것”이라고 말했다. 원래 한길사는 정통 역사학자를 동원해 고급 장정으로 20권짜리 <한국사>를 냈다. 그런데 안 팔렸다. 상심이 컸던 김언호 사장이 이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그와 ‘승부’한 것이다.

이 이사장의 <한국사 이야기>는 민족사·민중사·생활사 위주로 쓴 것이다. 그는 “역사학계의 오류를 다 바로잡았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을 ‘조일전쟁’으로, 병자호란을 ‘조청전쟁’으로 바꿔 표기했다”고 말했다. 이 책은 무려 50만권이나 팔렸다. 기성 역사학계에서는 그의 <한국사 이야기> 오류를 지적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단재학술상(2001년), 임창순 학술상(2006년)을 받으며 학술적 업적을 인정받았다. 이후 그에게 씌워진 ‘재야사학자’라는 일종의 조롱은 사라졌다.

이어 이 책을 원작으로 삼성출판사에서 <만화 한국사>를 냈다. 보통 만화책은 화가의 이름을 따는데, 이 만화책은 최초로 원작자 이름을 땄다. 이 만화가 몇백만 권 팔렸다. 덕분에 그는 많은 인세 수입을 올렸다. 이 인세는 역사문제연구소는 물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편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적잖이 쓰였다. 이 이사장은 최근 시민역사관 건립위원회 위원장으로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이 이사장은 지난 촛불혁명에도 앞장섰다. 사실 촛불혁명은 역사전쟁이라 할 만큼 역사문제가 내재돼 있다. 최근 공개되는 청와대 수석비서관 문건 등을 보면 박근혜 전 대통령은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해 교학사 교과서에 이어 국정교과서 도입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에 재야역사학자와 일선 역사선생님들이 맞섰다.

“촛불은 역사학계에서 싸우기 시작했다. 강만길·이만열·나와 역사문제연구소 사람들이 매일 거리에서 기자회견과 역사강의를 했다. 뉴라이트와 친한 이인호(전 서울대 교수), 홍일식(전 고려대 교수)이라는 사람이 원로랍시고 청와대에 가서 박정희 시대처럼 국정으로 가야 한다고 부추긴 거다. 코미디지 코미디. 오히려 잘된 거다. 박정희의 마지막 신화가 딸 때문에 깨졌으니. 그게 역사의 큰 교훈이다.”

이 이사장은 거의 매번 촛불집회에 나갔다. 에스컬레이터에 어깨가 끼어 한 달간 치료받으면서도 촛불집회에 나갔다고 한다. 그는 전농의 전봉준 투쟁단이 강원도에서 서울로 오는 모습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에서 간접적 계기와 직접적 계기가 있는데 촛불은 동학 이후 민주주의가 꾸준히 성장한 간접적 이유가 바탕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역사에 대한 정의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과거를 들추지 말고 미래로 나가자고 하는데 모두 헛소리다, 인류는 과거를 기억하고 잘못을 고치면서 미래로 발전했다”며 “6·25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경제가 파탄났나, 역사는 그것을 기억하고 앞으로 전쟁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라고 일갈했다.

이 이사장은 여든이 넘었지만 아직 담배도 피우고, 대낮에 매운 낙지볶음에 소주 몇 잔도 거뜬하다. 10년 전 위암수술을 받았을 때 끊었지만 다시 한다고 한다. 그는 “평생 글쟁이로 살아 글을 안 쓰면 근질근질하다”면서 “평생 역사책만 썼지만 이번에 처음 에세이를 썼다”고 말했다. 쓴 글은 올 봄 <이이화 에세이집>으로 나올 것이라 한다. 이 이사장은 책에 대해 “이번 촛불시위에 참여했던 얘기도 있고, 문재인 대통령·박원순 서울시장 얘기도, 그리고 다음 대통령 누가 됐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있다”고 말했다.

원희복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17-12-24> 경향신문

☞기사원문: [원희복의 인물탐구]역사학자 이이화 “123년만에 전봉준 유언 이뤄진다”

화, 2017/12/26-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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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듣기]

[팟캐스트 ‘역적’ 시즌 2. 1화 1부 “백년의 역사여행을 시작하며”]

[팟캐스트 ‘역적’ 시즌 2. 프롤로그]


0523-1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2] 팟캐스트 ‘역적'(역사적폐 청산)

☞팟빵: ‘역적’ 시즌2 – 1회 1부 “백년의 역사여행을 시작하며”

제작 등: PD 김세호, MC노, 김광진(前)국회의원,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 방학진 기획실장, 방은희 교육팀장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역적’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수, 2017/12/27-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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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문용식 <아시아엔> 독자] 답답한 심경에 이 글을 올린다.

나는 실향민인 아버지(문순남)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김포공항 인근 농촌마을에서 자랐다. 부친이 돌아가시고 형편은 더 어려워져 중학자격 검정고시를 거쳐 공고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할아버지에 대해 종종 묻곤 했지만 실향민인 부친과 함께 한 시간이 짧아 제대로 알려줄 수 없어 늘 미안한 마음이 많았다.

그같은 미안한 마음은 언젠가는 부친의 생전 삶을 복원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중 2005년 한 시민단체가 한일양국간 체결한 청구권 문서 공개 요청 소송에서 법원이 “협정문서를 공개하라”는 판결을 한 사실을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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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뉴시스>

그 결과 국회에서 ‘일제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나 역시 본격적으로 부친의 삶을 복원하는 일에 나서게 됐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 일본, 러시아 정부기관에 3년간 민원을 넣어 부친의 스무살 젊은 시절 삶을 확인하는 공식문서를 러시아정부로부터 받았다.

부친 문순남은 1924년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출신으로 1945년 6월 2차대전 막바지에 강제동원되어 일본 관동군 130여단 776대대 소속으로 8월16일 중국 선양에서 소련군에 체포됐다. 부친은 이어 러시아 연방 카자흐스탄공화국 내 카라간다 탄광지역 99수용소에 수용돼 강제노동을 하다 49년 2월 남한으로 귀환하였다.

74년 부친이 사고사가 아닌 지병으로 별세했는데, 당시 상가에 파출소 순경이 와서 이것저것 묻고 갔다. 시간이 지나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부친은 과거 적성국가에 체류한 일로 ‘요주의 인물’로 늘 기관의 감시를 받고 사셨다는 것을···.

오는 2월이면 ‘시베리아 억류 한국인 귀환 69주년’이 된다.

일본은 2차대전 막바지 패전 위기에 몰리자 만주에서 중국과 전쟁 중이던 정예병력을 본토방어를 위해 차출했다. 이에 따라 부족 병력은 그들이 식민지로 삼았던 지역에서 동원령을 선포해 무차별 징집하고 만주 등 최전선으로 내몰았다.

한국인 귀환자들은 전쟁 막바지에 일본 군인으로 동원되어 일본의 항복선언과 동시에 만주와 사할린 등에서 소련군에 포로가 됐다. 이들은 시베리아 등에서 강제노동에 내몰리다 천신만고 끝에 북측 지역인 흥남을 거쳐 1949년 2월 남한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2009년 2월 27일, 귀환 60주년 행사가 민족문제연구소 주관으로 국회도서관에서 진행되고 곧 이어 3월 2~15일 관련 자료전시회가 열렸다. 벌써 9년 전 일이다. 당시 행사에는 일본에서 곤노 아즈마 참의원과 몇몇 의원이 참석했으나 정작 한국에선 이정희 의원과 노회찬 전 의원(당시)만 참석할 뿐이었다. 국회 내에서 진행된 행사임에도 주요정당의 ‘잘난 의원님’들은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피해자와 유족들은 서운한 마음이 많았다.

해방 이후에 전쟁포로가 되어 지옥같은 체험을 하고 조국에 귀환한 지 70년이 되도록 ‘시베리아 억류문제’는 국가가 해결도 못하고 있어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동안 국가의 무관심 속에 피해자들은 한을 품고 하나둘 쓰러져 이제 생존자는 채 10명도 안 된다.

촛불혁명으로 달성한 문재인 정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정부와 정치권이 과연 이 문제에 대해 해결할 의지는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청와대와 외교부에 그간 수차례 호소문을 제출하며 문제해결을 요청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한일의원연맹 총회가 매년 봄·가을 양국을 오가면서 2번씩 열려도 지금까지 의제로 의논 한번 되지 않았다. 피해를 당한 국민이 명백히 존재하며, 정부에 기록도 있고 수년 전 진상조사도 완료한 사안이다.

나같은 유족은 그 억울함을 어디에 호소해야 한단 말인가? 일제하 징병 갔다가 구소련에 의해 억류돼 강제노동을 해야 했으며, 이같은 행위는 명백히 국제법 위반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피해국민의 주권국가가 가해자인 상대국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이상한 일이 대한민국에서 70년이 지나도록 일어나고 있다.

새정부 들어 촛불민심을 반영하는 국민참여 제안에 18만건이 접수되고 정부는 그 제안을 바탕으로 5개년 국정 계획으로 5대 국가비전 전략목표와 20대 국정 전략과제를 수립하고 총 100개의 현안 목표를 수립했다. 과거사 문제는 전략목표 1번 3번째에 위치할 정도로 중시하고 있다. 특히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과거사 문제해결을 내걸고 있다.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 처리해달라는 여망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새정부가 과거사 문제를 국정 우선과제로 삼아 관리해 나갈 계획을 갖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어 온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닌가 하고. 내 가슴이 이럴진대 당사자이자 먼저 가신 아버지, 그리고 아직도 생존하신 피해자들 마음은 어떨까 생각하면 피눈물이 솟는다.

<2018-01-05> 아시아기자협회

☞기사원문: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 유족의 피맺힌 절규

금, 2018/01/05-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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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에 “우리에게는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SNS 해시태그 운동을 펼쳐 큰 호응을 얻은 ‘초등성평등연구회’가 제7회 이돈명인권상을 받았다. (이미지 출처 = 초등성평등연구회 페이스북)

초등학교 페미니즘 교육을 실천해 온 교사 모임이 이돈명인권상을 받는다.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초등학교 교사 13명이 모인 ‘초등성평등연구회’를 제7회 이돈명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1월 4일 밝혔다.

이에 대해 초등성평등연구회 서한솔 회원은 “2017년은 이룬 것이 없는 굉장히 고생스러웠던 해였는데, 이돈명인권상 수상은 유일하게 들려온 좋은 소식”이라면서 “여성 인권, 모든 인간의 삶에 관한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교육의 역할로 조금 더 나아지게 노력하겠다”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말했다.

천주교인권위는 초등성평등연구회가 창립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SNS에서 “우리에게는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해시태그 운동으로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을 알렸다고 소개했다.

또한 천주교인권위는 초등성평등연구회의 활발한 활동, 자체 연구 제작한 교안의 완성도와 수업 활용도, 향후 활동에 대한 기대 등을 종합해 볼 때,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실질적 성평등 과제를 초등학교까지 넓혀 사회적 확산효과가 크다”고 시상 이유를 설명했다.

초등성평등연구회는 교과서의 성불평등을 분석하고 재구성하기, 학생들이 접하는 미디어를 젠더(성, Gender)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보기 등을 수업에 적용해 왔고, 창의적 체험활동으로 성편견 인식과 생리에 관한 수업, 독서교육을 통한 양성평등 수업 등 다양한 페미니즘 교육을 하고 있다.

이돈명 변호사(1922-2011)는 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을 역임했고,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피해자 권인숙 사건 변호를 맡는 등 민주화와 천주교 사회운동에 기여했다.

천주교인권위는 이 변호사를 추모하고 인권의 가치에 대한 고인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2011년 인권상을 만들었다. 2017년 이돈명인권상은 평화운동 단체 ‘전쟁없는세상’이 받았다.

시상식은 1월 10일 오전 11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gt;

<2018-01-05> 가톨릭뉴스 

☞기사원문: ‘초등성평등연구회’에 이돈명인권상 

금, 2018/01/05-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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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내일을여는역사재단·민족문제연구소ㅣ출판사:민연ㅣ15,000원ㅣ294pageㅣ발행일: 2017.12.01.ㅣISSN 1228-8802ㅣ9771228880200-74

☞ [구매하기] 『내일을 여는 역사』 2017년 겨울 통권 69


<내일을 여는 역사>는 2000년 창간해 현재까지 17년 동안 역사대중화를 위해 힘써온 잡지입니다. 2016년부터 ‘내일을여는역사재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함께 힘을 합치고 있습니다. 친일·독재 비호세력들이 어줍지 않게 국민들의 일상과 정신세계마저 지배하려는 이때, 우리들은 힘을 합쳐 관제 역사의 전파를 막는 데 앞장서고자 합니다.

<내일을 여는 역사>가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 사회의 정의를 지키는 데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면서,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여러분의 뜨거운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촛불혁명 완성을 위한 공부길

2017년은 조금 진부한 표현이지만 다사다난한 한 해였습니다. 12월 20일 날짜에 대통령선거일이라고 빨간색으로 표시된 달력을 볼 때마다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듭니다. 한겨울 추위를 견디며 들었던 촛불은 박근혜 탄핵을 이끌었고, 30년 동안 유지되었던 겨울 대선을 앞당겼습니다. 그리고 5월 9일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켰습니다.

2016년 12월 9일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로부터 1년이 지난 2017년 겨울, 촛불에 대한 평가가 언론 지상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대부분 불의에 항거한 촛불의 의의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촛불이 없었다면 문화계 블랙리스트, 국정원의 정치 개입 등은 드러날 수 없었을 겁니다. 한국 수구・보수의 민낯을 여실히 대면하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불법・탈법이 자행되었겠죠.

평화적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킴으로써 세계로부터 인정받는 나라가 되었다는 자부심이 드러납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대중봉기의 흐름 가운데 촛불을 배치하는 시도도 나타납니다.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은 자랑스러운 시민 행동이라는 규정이 지배적입니다. 분명 촛불은 과거의 ‘적폐’를 청산하고 미래로 나아갈 기초를 닦았습니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촛불은 아직 공식 평가를 받을 단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1960년 4・19혁명을 예로 들어보면,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이승만 정부 비판과 부정선거 반대 운동은 이승만 하야와 민주당 정부의 출범을 이끌었지만 결국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4월 26일 이승만 하야까지를 4・19혁명으로 한정한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지만, 민주당 정부 시기를 시야에 넣는다면 사회 구조를 재편하는 데 수많은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50여 년 전의 역사는 촛불이 현대사에서 합당한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바로 지금부터가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즉 촛불이 촛불혁명이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의 ‘혁명과정’이 충실히 전개되어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가 정치개혁의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촛불시민의 역사의식이 높아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분단체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 모두 공부가 필요합니다.

지난 시기 촛불시위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함성이 크게 퍼져나갔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평화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문제 제기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촛불이 국정농단으로부터 기인했기 때문에 민주주의 문제가 핵심이 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미 박근혜 정부는 전쟁위기를 고조시키며 안보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운 통치를 전개했습니다. 이는 정부수립 이후 위정자들이 시행한 분단국가주의에 기초한 국정 운영과 동일 선상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독재정권은 냉전의 최전선에서 남북 분단을 바탕으로 국가에 순응하는 국민이 될 것을 요구했습니다. 분단은 독재자를 낳았고, 독재자는 분단을 이용했습니다. 민주화운동 세력이 이룩한 가장 큰 성과 중 하나가 분단 극복과 민주주의 발전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의식, 현실인식은 오히려 대한민국이라는 분단국가 안에 갇혀있는 것이 아닌가 반성하게 됩니다.

분단체제에 대한 인식은 한국근현대사, 나아가 우리 역사 전반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사회 구조의 원형이 어디로부터 형성되었는지, 이 가운데 다양한 역사적 주체는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생생히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구체적 과제로 정리하면 바로 우리의 근대는 어떠한 과정을 거쳤고, 그 가운데 저항적 지식인으로부터 일상을 살아간 일반 민중까지 삶의 양상을 복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2017년 겨울호(통권 69호)에도 다채로운 내용의 글을 독자들께 내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먼저 <쟁점으로 보는 역사>는 한국사학계에서 뜨거운 주제 두 가지를 다뤘습니다.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에서 내재적 발전과 자본주의 맹아의 근거로 제기되었던 경영형 부농론과 광무개혁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논의입니다. 염정섭은 김용섭이 제시한 경영형 부농론의 실증적 한계와 근대주의적 인식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사학사에 내려놓을 것’을 제안합니다. 김윤희는 대한제국에 대한 연구 경과를 비판적으로 정리하는 것과 함께 2017년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맞아 고종과 대한제국을 주축으로 하는 지배자 중심의 역사서술이 민족주의적 감성을 자극하며 문화콘텐츠로 확산되는 데 대해서도 경계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두 편의 글은 우리 역사, 우리의 근대를 이해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공부길에 길잡이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활발한 논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는?>은 민주주의 정치의 한 모델로서 시민의회에 대한 의의와 탈원전 에너지 전환의 필요성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한 두 편의 글을 묶었습니다. 이는 2017년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활동과 연관된 것들입니다. 전자는 숙의민주주의 형식에 대한 고민과 연결되고, 후자는 원자력 발전의 문제점을 정리하면서 에너지 정책 전환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21세기 지속 가능한 삶의 형식과 내용을 탐색하는 독자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인물로 보는 역사>는 세 명의 유교 지식인을 함께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53세의 나이에 망명의 길을 떠나고 말년에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며 사상적 전환을 이룬 석주 이상룡, 독립투쟁으로부터 반독재민주화운동까지 초지일관 비타협의 삶을 살았던 심산 김창숙, 식민지하 법원 관리로부터 시작해 기업가로 변신하는가 하면 친일단체 조선유도연합회를 이끌었던 이명세가 주인공입니다. 역사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어떤 역사의 편에 설 것인가?’라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세 사람의 삶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다.

<사실 체크>는 조선시대, 일제식민지시기 여성이 처했던 삶의 조건에 대한 상식에 도전했습니다. 이순구는 며느리의 지위를 성리학적 규범과 가부장제 아래 억압받는 삶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시댁’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주체적 활동의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소현숙은 이혼청구권이 식민지시기에 허용된 것은 일제의 선물이 아니라, 관습주의를 표방했던 일제의 통치정책에 대립하면서 자신의 삶을 지켜온 무수한 여성의 행위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여성의 삶은 우리 역사학이 소외시켜왔던 주제입니다. 여성 주체에 대한 관심이 더욱 확대되고, 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주체들이 역사 서술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세계사의 현장>은 오키나와 현대사를 담았습니다. 정영신은 오키나와의 군사기지화 과정과 그에 맞선 1956년, 1968년, 1995년 세 차례의 ‘섬전체투쟁’을 정리했습니다. 전오키나와민투쟁도 아니고, ‘섬전체투쟁’이라는 개념은 왠지 모르게 계속해서 여운을 남깁니다. 미일동맹과 섬이라는 지정학적 조건, 동화를 추구했지만, 일본 본토 수호를 위해 철저히 배반당했던 오키나와 민의 심성 등이 복합적으로 반영되었다는 인상입니다. 우리의 분단체제를 사색하는 데도 유용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의 이해>는 이번 호를 통해 처음으로 선보이는 연재 코너입니다. 홍석률은 1968년 1・21사태, 푸에블로사건, 울진・삼척 무장간첩 침투사건 등의 발생 원인과 이후 위기 국면이 대화 분위기로 전환되어가는 상황을 검토했습니다. 베트남전의 발발이라는 국제정세와 김일성 유일체제 형성 이후 군부의 모험주의적 노선의 제기 등 북한 내부 동향 등을 분석했습니다. 결국 1960년대 후반 북한의 행동 양식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북한의 이해>는 반공주의적 시선에서 보면 기이하게만 보이는 북한의 역사적 활동을 국제적・국내적으로 조명함으로써,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이밖에도 독자 여러분과 함께 호흡하고자 하는 여러 코너를 준비했습니다. <내일을 여는 책>에서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다뤘습니다. 피치자의 관점에서 『군주론』 읽기를 제안하는 필자의 시선이 흥미롭습니다. <사료의 재발견>을 통해 『제왕운기』와 ‘한일회담 관계 사료’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했습니다. 전자는 『삼국유사』보다 단군 계승 인식을 뚜렷하게 드러낸 저술로 몽골과 대립했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었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후자는 현재까지 공개된 문서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는가 하면, 식민지 과거청산을 위해 계속해서 자료 공개가 이루어져야 함을 촉구합니다.

<예인 열전>은 지난 호에 이어서 문사 화가 이인상의 삶과 작품세계를, <역사와 공간>에는 현대적 공간 변용 가운데 과거를 그려내는 필자의 공력이 돋보이는 두 편이 글이 수록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려고 하는 <독자 마당>에는 대학원생의 현실에 대한 감상을 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서평>은 한국의 파병문제를 다룬 서보혁의 『배반당한 평화』에 대한 정상호의 비평을 수록했습니다. ‘평화주의적 파병’이 짧지만, 논점으로 제기되었습니다. 이상론과 현실론이 충돌하는 가운데 과연 어디쯤 서야 할까, 고민을 끌어냅니다.

2018년은 몇 주년, 몇 주년 기념하기 좋아하는 역사학자들에게 풍성한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고려 건국 1100주년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들려옵니다. 현재적 의미를 되짚어봐야 하는 여러 사건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도 2018년이 1948년으로부터 70년이 되는 해라는 점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엔 한국위원단의 활동, 남한 단독선거 결정, 4・3사건, 남북협상, 5・10선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여순사건’ 등을 통해 남북 분단이 공식화된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역사의식을 높이기 위해 공부하기에 좋은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촛불 혁명을 완성하기 위한 공부길을 여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편집위원 조형열

목 차

1. 여는 글/조형열

2. 쟁점으로 보는 역사
-조선후기 경영형 부농론을 사학사에 내려놓기/염정섭
-대한제국, 한국 근대사 역사서술의 문제를 드러내다/김윤희

3. 지금 우리는?
-시민의회, 민주주의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하승수
-탈 원전, 에너지 전환으로 가는 길/박진희

4. 인물으로 보는 역사
[독립운동가 열전] 석주 이상용의 독립운동과 사상/김희곤
[식민지 지식인의 엇갈린 선택] 마지막 선비와 황도유학의 신봉자 -김창숙,이명세/이준식

5. 사실 체크
-딸에서 며느리로-조선 여성의 삶과 결혼/이순구
-이혼권은 일제가 가져다 준 선물인가? – 이혼법의 변화를 통해 본 식민지시기 여성들의 삶과 결혼/소현숙

6. 내일을 여는 책
-『군주론』 : 나비스를 보라, 아니 나비스 당시의 시민을 보라!/이남석

7. 사료의 재발견
-『제왕운기』, 새로운 역사인식의 등장/김보광 -한일회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았을까?/박진희

8. 예인열전
-이인상, 기이한 별품의 사기화가(士氣畵家) 2/최열

9. 세계사의 현장
-차별과 전쟁, 군사기지에 맞선 오키나와의 현대사/정영신

10. 역사와 공간
– 조선시대 충청도 해안 방어의 요충지, 보령(保寧)의 시대적 변천/정요근
– 나는 죄가 없는데, 어찌 하늘이 나를 벌하겠소?
– 조선 초기 청주목을 찾아서/김창회·신동훈

13. 북한의 이해
– 1960년대 후반 북한의 대외공세/홍석률

14. 독자마당
-대학원 오지 말라고 그랬잖아요/백가을

15. 서평
-『배반당한 평화』/서원대 정상호

목, 2018/01/1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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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 민청학련 등 굵직한 시국사건 변호…남양주 묘소에 동료·가족모여 추모
민주화운동 동료들 “겸손한 고인 뜻에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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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운동 대부’ 이돈명 변호사를 기억하며
(서울=연합뉴스) 이돈명 변호사의 7주기를 기리기 위해 인권운동을 함께한 동료와 가족이 지난 11일 경기 남양주 별내면 천주교 성당묘지를 찾았다. 왼쪽부터 문국주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 상임이사,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이 변호사의 장남 이영일씨, 박중기 추모연대 명예의장. 2018.1.14.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영화 ‘1987’ 흥행으로 과거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이들이 재조명을 받는 가운데 우리나라 ‘인권운동의 대부’로 불린 고(故) 이돈명 변호사의 7주기가 최근 특별한 행사 없이 조용히 치러졌다.

14일 이 변호사의 민주화운동 동료들에 따르면 고인의 7주기인 지난 11일 경기도 남양주 별내면 천주교 성당묘지의 묘소에는 가족과 동료들이 찾아 차분하게 추모의 시간을 보냈다.

영화 1987에서 배우 설경구가 연기한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과 문국주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박중기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연대회의(추모연대) 명예의장 등은 묘소에 모여 고인의 생전 뜻을 기렸다.

이들은 모두 이 변호사와 함께 민주화운동에 헌신했으며, 지금은 모두 진보진영 시민사회 원로로 꼽힌다.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이 변호사와 함께 활동한 문 전 상임이사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이 변호사께서 생전 워낙 겸손한 분이었기 때문에 조용하게 (고인을) 기리는 편이 고인의 뜻에 맞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평생 대중교통을 이용할 정도로 검소하고 소박했던 것으로도 잘 알려졌다.

이 변호사 별세 이후 그가 위원장을 맡았던 천주교인권위원회는 매년 추모 미사를 집전했으나 2016년 5주기 미사가 마지막이었다. 올해 추모 미사에는 가족만 참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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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운동 대부’ 이돈명 변호사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 변호사는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인권 변호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인혁당 사건과 김지하 반공법 위반 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크리스천아카데미 사건, 광주 민주화운동 등 굵직한 시국사건에 빠지지 않고 활약했다. 황인철·조준희·홍성우 변호사와 ‘4인방 인권변호사’라는 별칭도 얻었다.

이 변호사는 1986년 5·3 인천사태와 관련해 수배 중이던 이부영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사무처장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8개월 동안 구속되기도 했다.

그는 같은 해 한승헌·홍성우·조영래 변호사 등 인권변호의 취지에 공감하는 이들과 ‘정의실현 법조인회(정법회)’를 결성했다. 정법회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전신이기도 하다.

이 변호사는 이후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인권위원장, 민변 고문, 조선대 총장, 한겨레신문 상임이사,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상지학원 이사장, 천주교 인권위원회 이사장 등 왕성한 활동을 하다 2011년 노환으로 별세했다.

<2018-01-14> 연합뉴스
☞기사원문: 조용하고 검소하게…’인권운동 대부’ 이돈명 변호사 7주기

일, 2018/01/1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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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칼럼] 명예도 이름도 없는 민주 교도관들

지난해 12월27일 개봉한 영화 ‘1987’이 1월12일이면 관객 50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권 시기에 기획되어 은밀하게 제작되고 있던 이 작품은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빛을 보지도 못한 채 창고에 갇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987’은 촛불혁명 덕분에 밝은 세상에서 많은 이들, 특히 20~30대의 사랑까지 받는 ‘국민영화’로 솟아오를 수가 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격동적인 민주·민족·민중운동이 펼쳐진 1980년대는 촛불혁명의 뿌리라고 볼 수 있다. 그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사건은 19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과 1987년의 6월항쟁이었다. 영화 ‘1987’은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된 그해 정초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월의 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두 사건은 지난 30여년 동안 나라 안팎에 그 진상이 널리 알려졌는데, 정작 이 영화는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지는 않는다. 가공(加工) 또는 허구(虛構)가 도처에 널려 있다. 그 대표적인 보기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조작의 진상을 재야민주화운동권에 전달한 영등포교도소 교도관 한병용의 이름과 더불어 그가 겪은 고초의 내막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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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1987’ 포스터

내가 명확히 알고 있는 사실은 1987년 봄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이부영(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 민통련 사무처장)이 작성한 비밀편지(박종철 사건 은폐·조작의 실상)를 그의 친구인 김정남(나중에 김영삼 정부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한 교도관은 한재동이었다. 한재동은 1970년대에 서대문구치소에서 함께 근무한 바 있는 전직 교도관 전병용에게 ‘비둘기’를 전했고, 전병용이 김정남에게 그 문건을 건넨 것이었다. 박종철 사건 은폐·조작의 전모를 폭로하는 이부영의 두 번째 비밀편지를 한재동이 극비리에 받았던 때, 전병용은 도피 중인 재야인사를 숨겨준 혐의로 체포되어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어서 한재동이 김정남에게 그것을 직접 전달했다. 김정남은 그 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한 뒤 문서로 만들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함세웅(신부)에게 맡겼고, 5월18일 밤 8시30분 서울 명동성당에서 ‘5·18광주항쟁 희생자 추모 미사’가 끝난 뒤 홍제동성당 주임신부 김승훈이 그 문서를 낭독함으로써 전두환 정권을 뿌리째 뒤흔드는 6월항쟁에 불길을 댕긴 것이었다.

영화 ‘1987’의 한병용은 한재동의 한과 전병용의 병용을 차용한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두 사람의 역할이 하나로 뒤섞여 있다. 한병용이 치안본부 대공처장 박처원에게 무자비하게 고문을 당하는 장면도 시나리오작가와 연출자가 만들어낸 허구임이 분명하다. 내가 1975년 봄 이래 서너 번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어 친밀한 사이가 된 전병용과 한재동은 그렇게 무참한 고난을 겪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전두환 정권의 폭압정치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그런 장면을 연출한 사실을 나무랄 생각은 전혀 없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와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시기에 전국 여러 곳의 구치소와 교도소에는, 민주화운동과 독재타도투쟁을 하다 잡혀온 양심수들이나 정치범들을 은밀하게 도와줌으로써 실질적으로 그들의 ‘동지’가 된 민주교도관들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전병용과 한재동이다. 1975년 3월17일 동아일보사에서 폭력에 밀려 쫓겨난 기자, PD, 아나운서 등 113명이 결성한 동아투위 위원들 가운데 15명 이상이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 옥살이를 했다. 1970년대에 서울구치소에서 그들을 은밀하게 도와주면서 바깥 정보를 전달해준 교도관은 전병용과 한재동을 비롯한 여러 명이었다.

이제는 밝혀도 될 그 이름은 최양호, 나장균, 김재술, 김형옥, 최영옥, 김성렬, 김영배, 나종남이다. 전병용과 한재동은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9년 3월 초, ‘민주교도관’이라는 낙인이 찍혀 각기 순천과 김천의 교도소로 전출되었다가 결국 강제 사직 당했다. 한재동은 한 달 동안 수감생활까지 한 뒤 1981년 1월 행정소송에서 승소해 복직할 수 있었다. 그는 1984년 6월 영등포교도소로 전출해 오랜 지기인 이부영을 만날 수 있었는데, 날마다 퇴근 이전인 저녁 5시쯤 그가 갇힌 감방 앞에 가서 한 시간쯤 대화를 나누던 끝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관한 진상을 온 세상에 알리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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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1987’ 포스터

나는 개인적으로 전병용·한재동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1980년 5월17일 전두환의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 지명수배를 당해 도피생활을 하던 나를 그들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숨겨주거나 다음 은신처를 물색해 주었던 것이다. 그 쿠데타가 터지기 한 달쯤 전에 나는 한재동으로부터 ‘난감한’ 부탁을 받았다. 여동생이 결혼할 계획인데 주례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 실직 상태였고, 여동생은 영등포 어느 공장의 노동자였다. 신랑감은 작은 구두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나는 만 36세였으므로 주례를 서기에는 터무니없이 젊은 나이였다. 내가 한사코 고사하자 그는 어느 날 주례로 내 이름을 박은 청첩장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서울의 봄’을 맞아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뜨겁던 5월5일 오전 11시, 나는 아내와 함께 세 살 박이 아들의 손을 잡고 용산구 남영동 큰길가에 있는 허름한 건물의 예식장으로 갔다. 식단 앞으로 어색하게 다가가자 안내를 맡은 여성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당황해서 “제가 주례인데요”라고 우물거리자 그는 “새파랗게 젊은 분이 주례를 보세요?” 하면서 내 손에 흰 장갑을 끼워주었다.

나는 그날 진지하게 ‘주례사’를 했는데, 나중에 한재동에게 들어보니 큰 실수를 한 대목이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신부의 오빠와 맺은 인연 때문에 주례를 맡게 되었다고 말한 뒤에 서대문구치소에서 민주화운동 투사들을 돕다가 파면 당했지만 꿋꿋하게 살고 있다고 소개한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례객 대다수는 한재동의 고향인 전남 순천에서 올라온 순박한 친척과 농민들로, 그 지방의 명문인 순천고등학교를 나온 그가 서울에서 공무원으로 잘 살고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서울의 봄’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5월18일부터 도피자 신세가 되어버린 나는 당장 숨어 지내야 하는 데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때 한재동은 서대문구 현저동 산동네의 단칸방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한 평을 겨우 넘는 방이라서 둘이 누우면 칼잠을 자야 했다. 그래도 그는 여러 날이 지나도록 전혀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앞에 이름을 소개한 민주교도관들 역시 동아투위는 물론이고 청년·학생운동권의 수배자들을 적극적으로 숨기고 보살펴주었다.

전병용은 지금 성남시 분당에서 농사를 짓고 있고, 한재동은 수원시의 한 대학에서 비정규직으로 조경(造景) 일을 하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 웬만한 민주화운동가들 대다수는 적절한 보상을 받았는데 민주교도관들은 ‘명예도 이름도 없이’ 지내 왔다. 그래도 70대 안팎의 그들은 충실하게 생업에 종사하면서 겸손하게 살고 있다. 요즘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회포를 푼다고 한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그렇다 치고, 촛불혁명으로 태어난 문재인 정부는 이제라도 민주교도관들에게 ‘숨은 노고’를 치하하는 상패라도 주어야 하지 않을까?

※ 이 글은 ‘뉴스타파’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email protected]

<2018-01-12>미디어오늘
☞기사원문: 영화 ‘1987’에 숨어 있는 이야기

일, 2018/01/1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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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김미화 씨 등 각계인사들 ‘우토로 지킴이’로 나서…“우토로의 인간 존엄과 평화, 오랫동안 기억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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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일 ‘우토로 역사관을 위한 시민모임이 결성식을 가졌다.ⓒ민중의소리

‘마지막 일제징용 마을’로 기억되는 일본 우토로에 역사관을 만들자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 방영된 이후, 국민적 관심을 받게된 우토로 마을은 일제 식민지 정책과 전쟁 수행의 피해자였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집단 합숙소이자 60여년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다.

토지 소유권자들의 분쟁 탓에 강제철거 위기까지 겪었던 이 곳은 가까스로 한국 정부의 지원과 민간 모금 등으로 안정을 찾긴 했지만, 우토로 동포들의 흔적 또는 추억이 점차 지워져가고 있다. 특히 최근 일본 정부의 마을 정비 사업이 진행되면서 우토로를 기억할 수 있는 역사관 설립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우토로 역사관을 위한 시민모임’이 12일 서울시NPO지원센터에서 결성식을 갖고, 그 시작을 알렸다. 시민모임의 주축이 된 57명의 ‘우토로 지킴이’에는 방송인 김미화 씨를 비롯 이장희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진관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함께했다. 공동대표는 류종열 흥사단 이사장, 박연철 전 우토로국제대책회의 상임대표, 정진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부이사장이 맡았다.

이들은 이날 결성선언문을 통해 “지금 우토로는 조선사람이 사는 낯익은 마을 풍경이 사라지고, 장구소리와 김치냄새가 사라져가고 있다. 마을을 일구고 지킨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면서 “그러나 우리는 우토로가 외쳐온 인간 존엄과 평화를 향한 간절한 소망을 기억하고 있고,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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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토로 마을의 재일동포 모습이 담긴 전시물ⓒ민중의소리

또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소중한 가치들이 우리 후세에, 한국과 일본, 재일동포 모두에게 오랫동안 전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저항과 분노를 넘어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발할 수 있는 곳이 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우토로 역사관을 위한 시민모임’은 우토로 동포들의 버팀목이 되어 이상의 노력을 다해나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향후 이들은 민간 모금 등으로 매입한 우토로 토지 위에 세워진 공적주택에 동포들이 첫 입주하는 기념행사를 시작으로 우토로 동포들의 구술기록집과 사진집(正史) 발간 등 다양한 사업을 벌인다는 계획이다.

시민모임의 배지원 사무국장(전 우토로국제대책회의 사무국장)은 “역사관은 우토로 동포들과 한국 시민들의 약속이자 꿈이었다”면서 “작고 소박하지만 자자손손 평화의 홀씨를 퍼뜨리는, 우토로의 파수꾼이 되어줄 역사관이 우토로 땅에 세워질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참여해달라”고 당부했다.

<2018-01-12>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조선인들의 우토로, 영원히 기억하자” 우토로 역사관 위한 시민모임 발족

일, 2018/01/14-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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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8/01/2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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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0주년 맞아 6회 제작
4ㆍ3 사건 의의ㆍ역사 등 담아


올해 70주년을 맞은 제주 4ㆍ3을 전국적으로 알리기 위한 ‘4370신문’이 발간됐다.


㈔제주4ㆍ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올해로 70주년을 맞은 제주4ㆍ3 의 의의와 역사, 다양한 문화컨텐츠 등을 폭넓게 담은 타블로이드 판형 월간지인 ‘4370신문’ 창간호를 지난 15일 발간했다고 23일 밝혔다.

이 신문은 1월 창간호를 시작으로 4ㆍ3 70주년 추념식과 서울 4ㆍ3 문화제 현장이 담길 오는 5월까지 월간으로 제작된다.

이어 오는 11월 제주4ㆍ3 70주년의 한 해 활동을 결산하는 결산호을 발행할 예정이다.

‘4370신문’ 창간호에는 천주교 제주교구 교구장 강우일 주교의 권두언을 포함해 노순택 사진가의 사진과 ‘4ㆍ3 기행’ 사진, 박재동 화백의 ‘박재동의 펜으로 본 제주4ㆍ3’, 제주 민예총 강정효 이사장의 ‘제주4ㆍ3과 예술’ 등 사회 각계 인사와 문화예술인들이 참여해 제주4ㆍ3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담았다.

신문 제호인 ‘제주4ㆍ3 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는 제주4ㆍ3 70주년의 핵심 구호로, ‘강병인글씨연구소 술통’을 운영 중인 캘리그래퍼 강병인씨가 제작했다.

매월 15일 발행되는 ‘4370신문’은 서울시와 제주도를 비롯해 제주4ㆍ3 희생자유족회, 민족문제연구소, 민예총, 전교조, 민주노총 등 시민사회단체와 연계해 제주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배포될 예정이다.

4ㆍ3범국민위 박찬식 운영위원장은 “4370신문은 5만에서 10만 부를 발행해 배포할 계획”이라며 “또한 온라인, 소셜미디어 등과도 연계해 제주4ㆍ3과 70주년 사업을 전국적이고 대중적으로 알리는 소통과 홍보 창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헌 기자 [email protected]

<2018-01-23> 한국일보

☞기사원문: 제주 4ㆍ3 전국화 위한 ‘4370신문’ 발간

※관련기사


☞일간제주: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4370신문’ 창간호 발행

☞헤드라인제주: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4370신문’ 창간호 발행 

목, 2018/01/25-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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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은 시민의 것…시민들에게 계속 다가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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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신임 독립기념관장ⓒ민중의소리

내년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다. 그 사이 해방을 맞이하고도 반세기가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건국 시점과 친일 등 근대사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말 중국 방문 중 상해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고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라고 말한 것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보수 진영에서 “1948년 정부수립이 건국”이라고 문 대통령의 발언에 반발하면서 박근혜 정부 시절 있었던 ‘건국절’ 논란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이다.

이처럼 역사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지난 12월 제11대 독립기념관장에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 이준식 신임 관장이 취임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과 친일인명사전 편찬,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 운동에 참여했던 이 관장은 “독립운동의 역사는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고 미래와 직결돼 있다”고 말한다.

이 관장은 16일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진행된 ‘민중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해방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 중 하나는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며 “또 다른 하나는 해방된 다음 새로운 나라를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구상이 해방에 담겼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관장은 이어 “임시정부가 만든 임시헌장 서문에 보면 ‘자유, 평등 및 진보를 기본정신으로 하는 대한민국’으로 규정했지만, 오랫동안 독립운동가들의 이런 구상이 실현되지 못했다”면서 “그래서 한국이 지향해야 할 바가 독립운동 역사에 담겨있다는 점에서 독립된 지 70년도 더 지난 시점이지만 아직도 독립운동 역사는 살아있다”고 강조했다.

이 관장은 역사 논란이 다시 불거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그냥 독립운동이라고 하면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는데 그건 기본적인 거고 그 이상이 있다”면서 “독립운동가들의 피가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민주주의와 직결돼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이 관장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잘 녹여내서 보는 사람이 쉽고 재미있게 다가설 수 있도록 전시 공간을 구성하는 게 중요한 문제”라며 “독립운동이 지금 우리의 삶과도 직결된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형태로 전시를 더 강화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질문: 독립기념관은 건립 30년을 넘겼다. 독립된 지도 70년이 훌쩍 넘었는데 젊은이들이 이를 되새기는 것이 왜 중요할까?

답변: 1945년 8월 15일 우리가 해방됐다고 말한다. 지금은 해방보다 독립이라고 하지만 당시는 해방이라고 더 많이 표현했다. 해방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다음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 때 어떤 나라를 만들까에 대한 구상이 해방에 담겼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1944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마지막으로 헌법을 개정한다. 대한민국 임시 헌장이라고 하는데 서문에 보면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바를 ‘자유, 평등 및 진보를 기본정신으로 하는 대한민국’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실제 해방 뒤 이런 구상이 제대로 실현 안 됐다. 일단 일제 식민지배 이후로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루려고 했는데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38선이 그어져서 민족이 분단됐다. 완전한 자주 독립하고 거리가 멀다.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구상도 오랫동안 실현 못 됐다. 현재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바가 과거 역사,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 역사에 담겨있다는 점에서 독립된 지 70년도 더 지난 시점이지만 아직도 독립운동 역사는 살아있다. 독립운동역사는 과거에 흘러간 일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고 앞으로 미래와도 직결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질문: 독립기념관을 과학전시관과 비교한다면 좀 어렵고 오래된 이야기라는 느낌도 든다. 영상과 모바일에 익숙한 젊은 층과 어린이 세대를 위한 시설이나 행사는 어떤 것이 있나?

답변: 몇 해 전부터 독립 기념관에서 어린친구들을 위함 체험학습관을 꾸준히 운영해 왔고 교육프로그램 중에서도 어린이들이 흥미를 이끌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려고 노력해왔다.

겨레의 집을 리모델링 중인데 그 중 일부는 ‘펀(Fun)체험관’이라고 해서 특히 어린 관람객이 뛰어 놀면서 독립운동 체험할 수 있도록 꾸미려고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독립운동 역사를 공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놀이를 통해 체험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강화하려고 한다.

질문: 눈썰매장이나 캠핑장 등 가족들을 위한 시설이나 시기별 행사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데 소개를 한다면?

답변: 독립기념관이 가진 강점 중 하나는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지는 것이다. 독립기념관의 전시관은 역사지만 동시에 독립기념관을 둘러싸고 있는 좋은 자연이 있다. 점점 가족단위 관람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자연과 접하면서 레크레이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기념관 전시관을 방문하거나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독립운동사를 배우고 역사를 접하는 좋은 기회를 독립기념관이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한 시민들의 호응도 점점 좋아지는 것 같다.

천안 지역사회와도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올해 1월1일에 해맞이 행사를 했는데 7~8천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독립기념관을 생활 속의 일부로 생각하는 시민들이 많아서 고무적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시민에게 다가가겠다. 천안에 자리 잡고 있으니까 지역사회 주민과 계속 호흡을 해나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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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기념관 여름 야영장ⓒ독립기념관 제공

질문: 그간 많은 전시, 행사, 교육을 수행했지만 이를 이용할 시민들에게는 좀 딱딱하고 무거운 느낌이다. 직전에 강북구청 근현대사기념관장도 역임했는데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문제에 대해 구상하고 있다면?

답변: 근현대사기념관을 운영하면서 느낀 바가 있다. 기념관이든 박물관이든 근현대사를 다루는 시설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시민들과 결합하는 수밖에 없다. 시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기념관은 아마 죽은 공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현대사기념관에서 한 가지 도움이 된 것은 시민들과 직접 접촉하는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시민들이 기념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대 욕구가 뭔지 잘 파악하게 된 것이다.

독립기념관은 상대적으로 규모도 크고 대규모 전시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상당히 효과적인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현대사기념관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는 묘역 같은 현장감 있는 공간이 독립기념관에 없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질문: 최근 식민지근대화론 비판 대중서도 발간했는데 어떤 내용의 책자이고, 발간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식민지근대화론이 처음 등장한 거는 벌써 20년 정도 된다. 우리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주장이어서 오랫동안 학계에서 밀려있었는데 10여년 전부터 식민지근대화론이 힘을 얻어서 이를 바탕에 깔고 있는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면서 논란이 됐다. 지금도 일부 언론에서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한 논조를 펴기도 하고, 일부인사들이 주장하기도 하고 그래서 아직도 식민지근대화론은 살아있다.

독립기념관의 기본적인 입장은 독립운동 때문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인데 독립운동에 반대되는 식민지 지배 때문에 오늘날이 가능했다고 하는 설명은 독립기념관의 설립취지와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는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고 실제로 쉽게 풀어 쓴 책이 나왔다.

경제사학계에서 오랫동안 식민지근대화론 비판에 앞장섰던 충남대 허수열 명예교수가 집필했다. 허수열 교수가 경제사를 전공하셔서 경제사학회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의 맹점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질문: 국정 역사교과서 같은 역사 논란이 다시 불거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답변: 일제 강점기에 벌어졌던 독립운동 역사를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독립기념관의 역할이 있다.

독립 운동가들이 목숨까지 바치면서 이루려는 독립에는 나라의 독립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지금 자라나는 학생들, 젊은 시민들에게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독립 운동이 민주주의 문제와도 연결돼 있고 독립운동이 지금 민족의 숙원인 평화 통일하고도 이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특히 통일문제 관련해서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이후 분단이 됐을 때 분단이 곧 민족상잔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정신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독립운동가들이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희생한 측면도 있는데 그런 면을 강조함으로서 독립운동가들의 피가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민주주의와 직결돼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 중국을 국빈 방문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오전(현지시각) 중국 충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 관람을 마치고 독립유공자 후손 등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7.12.16ⓒ제공 : 뉴시스

질문: 내년에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을 맞는다. 일부 보수층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중경 임시정부 청사 방문이나 건국 100주년이라고 국립현충원 방명록에 적은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답변: 역사적으로 이야기하면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났고 3.1운동의 과정이자 결과로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당시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임시헌장이라는 임시헌법을 재정한다. 임시헌법 제 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규정이다. 그 규정이 현재 헌법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규정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출범과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1948년 7월 17일 제헌국회에서 공표한 제헌헌법 전문에 보면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고 돼 있다. 그리고 ‘이 헌법을 제정함으로서 민주공화국가를 제건한다’고 돼 있다. 재건의 핵심적인 과정은 임시정부 대신 정식 정부를 세우는 거다. 그래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데도 거기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다. 저는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기 때문에 역사 자료가 보여주는 바대로 해석하면 문제는 간단하다. 앞으로 이런 논란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질문: 독립기념관도 건국 100주년을 앞두고 올해 준비할 일도 많을 듯하다. 어떤 점을 중요하게 준비해나갈 것인가?

답변: 문재인 대통령이 한 명의 독립 운동가라도 찾아내서 포상을 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2019년을 앞두고 독립유공자 발굴이 중요한 사업이기 때문에 향후 몇 년 동안 새로운 독립 유공자를 발굴하는데 전력을 기울일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올해 범정부차원으로 100주년 기념 민간 사업회가 출범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독립기념관도 그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 같다.

또 독립기념관의 주요사업 중 하나가 독립운동가 인명사전을 내는 것인데 중간보고 겸 100주년인 2019년에는 독립운동가 인명사전 특별편을 내려고 한다. 특별판은 주로 이름이 많이 알려진 분들을 대상으로 해서 100명 남짓의 독립운동가를 대상으로 할 것 같다. 그것과 병행해서 독립운동가 1000명 정도로 웹 전시관도 내려고 한다.

독립운동사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는 문제, 미래와 직결되는 문제라는 것을 사업의 기본 방향으로 설정하려고 한다.

질문: 박근혜 정부 당시 맺은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정부가 잘못됐다는 점을 사과하고 후속조치를 마련 중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강하게 반발해 난항이 예상된다. 독립기념관장인 동시에 근현대사를 연구한 학자로서 어떻게 보는가?

답변: 전제는 ‘일본군 위안부’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 한 잘못된 행위에 대해 일본이 국가의 이름으로 사죄를 하는 게 마땅한데 그걸 오랫동안 안하고 미뤄오다 1965년 한일 협정 체결하면서 더 이상 과거 일을 묻지 않는다는 조항으로 다 끝냈다고 그동안 주장했고, 이게 한일 관계를 정상화 하는 데 장애가 되니까 납득하기 힘든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국민 정서상 잘못된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참고로 이야기하면 독립운동과도 무관하지 않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헌정 재정 당시 제9조를 보면 사형제 폐지, 공창제 폐지가 명시돼 있다. 독립운동가들은 여성의 몸을 상품화한다는 데 대해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독립운동단체 강령 가운데서도 남녀평등 조항이 빠진 게 하나도 없다. 그렇게 본다면 일본군 위안부도 식민지 공창제의 연장선상이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도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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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기념관 전시관ⓒ독립기념관 제공

질문: 단절됐던 남북 간 대화가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해빙 조짐을 보이고 있다. 독립운동은 남과 북이 공유하는 민족사이고, 그 완결점인 통일국가 건설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다. 교류협력이 진전되면 남북의 독립운동 유적이나 기념이 교류 등이 가능할까?

답변: 여건이 허락한다면 당연히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에는 북한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역사학계 차원의 교류도 있었다. 특히 독립운동이나 일본에 강제동원과 관련된 자료가 있으면 서로 공유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실제로 일정부분 성과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남북관계가 경색이 되면서 오랫동안 진행된 이런 사업이 중단됐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해빙된다면 다시 한번 이런 사업을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굉장히 아쉬운 것은 내년에 3.1운동 100주년인데 3.1만세 시기는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북한 지역에서도 굉장히 많은 시위가 일어났는데 북한 지역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한 자료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북한이다. 그래서 100주년을 맞이하기 전에 북한 자료도 입수해서 남북 간 공동사업도 할 수 있을텐데 앞으로 남은 시간에 가능할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질문: 이번에 취임 소식과 함께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라는 점이 다시 한번 알려졌다. 성장과정에서 집안의 내력이 영향을 끼친 점이 있나?

답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중‧고등학교때 무조건 역사를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대학원에 들어가서 독립운동사를 주제로 선택한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들은 독립운동이야기가 많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사실 얼마 전까지 주위에 누구 외손자라는 이야기를 안했다. 어렸을 때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어서 독립운동은 살기위해서 삼시세끼 밥 먹는 일이나 숨 쉬는 것이나 같은 일이지 대단한 일이냐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렸을 적 어머니 손에 이끌려서 예전 수유리 애국지사 묘역에 있던 외할아버지 묘소를 가거나, 외삼촌이 계시는 현충원을 가면 어머니에게 ‘여기에 계신 분들은 이름 석자를 남겨서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고, 현충원이라는 좋은 데서 쉬고 계시지만 독립운동 과정에서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희생당한 분들이 훨씬 많다. 그런 분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그래서 이름을 남기신 분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사를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높은 뜻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기리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제가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있으면서 가진 개인적인 꿈은 아주 번듯한 무명 독립투사 기념시설물을 하주 좋은 곳에 만드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 동상 같이 길을 가면서도 들릴 수 있는 그런 곳에 무명의 독립투사들을 기리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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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신임 독립기념관장ⓒ민중의소리

질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활동하면서 친일인명사전 편찬,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신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독립기념관장이 되면서 시민단체 활동이 도움 되는 점과 또 달라지는 점이 있을 것 같다.

답변: 저에게 시민단체에서 활동한 것은 굉장히 득이 됐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성경처럼 읊조리는 말이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다’라는 이야기다.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게 역사라고 이야기 많이 하는데, 그야말로 책에서나 듣는 이야기지 실제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그 정도 치열한 문제 인식이 있는가 하고 물어보면 부족한 게 많다.

다행스럽게도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그게 누가 써놓은 멋있는 문구가 아니라 실제로 역사 연구가 지향해야 할 바라는 것을 체험할 기회를 가졌다. 친일파 청산도 관여했고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 등 현안에 대해서도 관여했다. 시민단체에서 얻은 경험, 시민들의 역사 인식을 독립기념관을 운영하는데 최대한 반영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아마 독립기념관 관장이라는 공직을 맡아서 과거와 같이 자유롭게 시민단체 활동을 할 수 없겠지만 시민단체에서 활동에서 가졌던 문제의식은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겠다.

질문: 젊은 학생들에게 강의도 꽤 많이 하셨는데, 독립기념관장으로서 젊은이들에게 꼭 남겨주고 싶은 교훈이나 정신은 무엇인가?

답변: 지금 젊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관심 갖는 게 일자리라고 한다. 청년 실업문제가 심각하니까 ‘살기 팍팍하다’, ‘기성세대에 비해 우리가 많이 힘든 것 아니냐’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돌이켜보면 내가 젊은 때도 그런 것 같다. 아버지 세대보다 우리세대가 더 힘들다고 생각했고 우리 자식 세대도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역사를 공부한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 역사에서 가장 힘든 시기는 나라를 잃었을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기록을 봤더니 일제 강점기에 이 땅에 살고 있던 사람 가운데 10~20% 사람들이 해외로 나갔다. 그렇다고 번듯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일본에 가서 노동자로, 만주에 가서 소작농하면서 힘들게 살줄 뻔히 알면서도 해외로 나갈 정도로 일제강점기 상황이 나빴다.

그런데 그렇게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해외로 나간 동포도 다 독립과 해방의 꿈을 잃지 않고 노력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지금 힘든 건 힘든 것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께서도 만주에서 힘들게 젊은 시절을 보냈다. 돌아가시기 전에 회고록을 남기셨는데 그중에 인상 깊은 것은 어린 시절 해마다 8월 29일 국치일이 돌아오면 만주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하루 세끼를 굶었다고 한다. 단순히 나라 잃은 설움 때문만은 아니라 설움을 승화시켜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려고 한 것이다. 그런 의지들이 모여서 결국은 독립을 이뤘다.

젊은 세대들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아버지 세대, 할아버지 세대가 겪었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희망을 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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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기념관 전경ⓒ독립기념관 제공

질문: 문재인 정부 들어 ‘적폐 청산’ 작업을 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친일이 가장 큰 적폐’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친일청산 작업을 했던 분으로서 친일청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변: 저는 개인적으로 적폐의 출발점은 친일청산을 못한 데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세계사적으로 봤을 때 다른 민족의 식민지배를 받은 나라에서 해방 뒤에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지 않은 사례는 한국밖에 없다. 그러니까 반민족 행위라는 어마어마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청산되지 않는데 웬만한 잘못은 그냥 청산하지 않아도 된다는 풍조가 만들어 진거다. 그래서 친일청산을 실패한 게 그 이후 쌓인 여러 적폐의 출발이라 생각한다.

질문: 젊은 층에게는 친일 청산 이야기가 그저 과거 이야기일 수 있다. 최근에는 유명 배우의 할아버지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어 젊은 층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답변: 친일청산도 민주주의의 원리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연좌제를 금지하는 것이다. 친일파 후손이라고 낙인을 찍고 멍에를 씌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할 때도 친일파 후손을 공개하는 것을 안 하려고 했다.

그런데 친일파 후손들이 자신들의 조상이 한 잘못된 행위에 대해 대신 반성하고 속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마치 정당했던 것처럼, 그래서 친일청산이 잘못된 것처럼 이야기할 때는 후손 이름을 공개하면서 잘못됐다고 이야기한다.

친일 이야기가 나오면 젊은 사람들은 ‘케케묵은 이야기가 아니냐’, ‘뭐하려고 다시 꺼내냐’라고 하는데 지금의 잘못된 역사는 친일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데서 비롯됐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서 친일은 잘못된 일이었고 독립운동은 우리가 제대로 기려야 할 일이었다는 것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교육시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질문: 끝으로 독립기념관 관장으로서 하시고 싶은 말씀은?

답변: 독립기념관은 시민의 것이다. 시민들이 찾아와서 편안하게 이용했으면 좋겠다. 시작도 시민들이 낸 성금으로 출발했고 지금도 시민들의 관심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그런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독립기념관이라는 이름 때문에 딱딱하게 느낄 수 있는데 독립기념관은 단순히 역사만 있는 게 아니라 자연도 있다는 것에 많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자연과 역사를 아울러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

김백겸 기자 [email protected]

<2018-01-21>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인터뷰] 이준식 신임 독립기념관장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금, 2018/01/2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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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2일 개토제… 200 여명 암매장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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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년 전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희생된 아산지역 민간인희생자의 유해가 수습된다. 사징은 공동조사단이 지난 해 11월 시굴조사를 통해 확인한 희생자 유해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 공동조사단

68년 전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희생된 아산지역 민간인희생자의 유해가 수습된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발굴단장 박선주 공동조사단 공동대표, 아래 공동조사단)은 아산시와 함께 오는 2월 20일부터 28일까지 9일 간 일정으로 아산 설화산(아산시 배방읍 중리 산86-1번지 일대)에 묻혀 있는 민간인희생자에 대한 유해를 수습한다고 31일 밝혔다. 특히 아산시는 이번 유해발굴에 필요한 예산을 지원하기로 했다.

본격 수습은 오는 2월 22일 개토제와 함께 시작할 예정이다.

이번에 수습 예정인 희생자 유해는 1951년 1월께 총살 당한 대략 200~3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학살은 충남경찰국장과 온양경찰서장의 지휘 및 지시로 자행됐다. 또 경찰의 지시를 받은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과 태극동맹 등 우익청년단체들이 동원됐다.

앞서 공동조사단은 지난 해 11월 시굴조사를 통해 이곳에 다량의 희생자 유해가 묻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관련 기사/”어린애들이 뭔 죄라고..” 300명 유해암매장지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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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해 11월 시굴조사에서 드러난 충남 아산시 배방리 산기슭 폐광터에서 발견된 희생자 유해. 공종조사단은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해를 오는 22일 부터 본격 수습한다. ⓒ 유해발굴공동조사단

아산지역에서는 1950년 9월에서 1951년 1월에 걸쳐 인민군 점령 시기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모두 민간인 800여 명 이상이 불법으로 학살됐다. 배방면이 희생자가 가장 많았고, 신창면, 탕정면, 염치면, 선장면 주민들도 다수가 희생됐다.

공동조사단은 수습한 유해는 감식과 보존처리를 거쳐 세종시 추모의 집에 마련된 임시 안치소 안치할 예정이다.

유해 수습과 발굴 과정에 참여나 참관을 원하는 사람은 공동조사단 측에 날짜를 미리 알려주면 된다.

공동조사단 관계자는 “유해발굴과 수습을 통해 사건의 진상에 한발 다가가고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과 입법화 요구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공동조사단에는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해 한국전쟁유족회, 4.9통일평화재단,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역사문제연구소, 역사정의실천연대, 이내창기념사업회, 인권의학연구소·김근태기념치유센터인권재단사람, 장준하기념사업회,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포럼진실과정의 등 16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2018-01-31>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아산 설화산 암매장된 민간인희생자 유해 발굴한다

수, 2018/01/31-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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