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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생존자의 절규 “한국, 베트남전 피해자 고통은 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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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생존자의 절규 “한국, 베트남전 피해자 고통은 외면”

admin | 월, 2021/08/09- 01:02

김남주 민변 베트남전TF 팀장 인터뷰① “문재인 정부, 사안 해결의지가 없어 보인다”

“저는 8살 한국군에 의해 (가족이) 학살당했고, 그 학살로 많은 가족을 잃고 혼자 오랜시간 고통속에 살아왔다. 오늘 이자리에 있기까지는 광장히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내며 오게 됐다. 한국에 이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위해 한국 방문을 세차례나 했지만, 한국 정부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 사실에 대해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한국 국회가 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 듣고 너무 반가웠다.”

▲ 한국사회에 진실규명을 다시 한번 호소하는 응우옌 티 탄씨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인 응우옌 티 탄씨는 간담회에 참가해 “한국정부는 우리가 겪은 고통에 대해 그동안 철저히 외면해왔다”고 비판하며 “특별법이 속히 제정되어 한국정부가 피해사실만이라도 제대로 조사하길 간절히 부탁드린다”라고 한국사회에 진실규명을 호소했다. ⓒ 이재정 TV 유튜브 갈무리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인 응우옌 티 탄(Nguyễn Thị Thanh, 61세)씨는 한국 국회의 특별법 제정 노력에 대해 반가운 자신의 심경을 전했다. 그는 지난 두달간에 걸쳐(6.30~7.22) 세차례 열렸던 ‘베트남 전쟁 시기 대한민국 군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사건 조사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연속간담회’에서 베트남 현지에서 화상으로 참가해 아픈 과거와 현재 심정을 토로했다.

이어 응우옌 티 탄씨는 한국정부가 민간인학살에 대해 진상을 규명하고 사과하기를 바라냐는 질문에는 “(1968년) 퐁니퐁넛 학살, 우리 마을에서 죽은 사람들은 대다수가 저와 같은 어린 아이였거나 여성들이었다. 수많은 목숨들이 굉장히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것이 이 퐁니퐁넛 학살이다. 저 뿐만이 아니라 이 학살의 생존자들, 가족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이 학살을 기억하고 있고, 이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한번도 우리를 찾아온 적 없고, 이 사건에 대해 단 한번도 관심을 갖거나 이 사건의 실제에 대해 저희에게 물어보거나 조사한 적이 여지껏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정부는 우리가 겪은 고통에 대해 그동안 철저히 외면해왔다”면서 “저를 포함해 103명의 베트남 피해자들이 한국정부에 청원서를 전달했다. 그러면서 저희는 이제 한국정부가 이 사실을 알게되고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굉장히 기뻐했다. 저는 이 청원서가 오히려 저희를 더 슬프게 할 것이라거나, 이 청원서를 받아든 한국정부의 지금 태도를 상상해 본 적이 없다. 특별법이 속히 제정돼 피해사실만이라도 제대로 조사하길 바란다. 역사적 진실이 밝혀져야 이런 역사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므로 제발 간절한 마음을 다해서 부탁드린다”고 말하며 한국사회에 진실규명을 호소했다.

한-베 수교 30주년 앞뒀지만… 해결 못한 숙제

내년 한국과 베트남은 수교 30주년을 맞는다. 1955년부터 20년간 이어졌던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은 약 35만명의 군인을 파병했다. 1964년에서 1973년까지 8년 6개월간 한국군 피해는 사망 5099명, 부상 1만 962명으로 추정된다. 반면 구수정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민간인 학살 피해자는 약 9000명으로 추정된다(관련 기사: “살아남은 내가 진실 말해야”… 그분이 돌아가셨다).

▲ 베트남전 관련 빈안학살(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최대 민간인학살로 알려짐) 생존자 응우옌떤런씨는 지난해 11월 숨졌다. 그는 생전 빈안학살 당시의 비극적 상황을 20년간 증언해왔다. 지난 2015년에는 베트남 피해자 최초로 한국을 방문하여 국회에서 한국 정부에 진실 규명과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사진 이재갑 작가) ⓒ 한베평화재단, 이재갑

1999년 구수정 당시 베트남 특파원이 한겨레21을 통해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보도한 이래 학살피해 마을의 의료지원을 비롯해, 작가단체및 다양한 민간부문의 교류가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의 일환으로 이어졌다. 한겨레사는 46주간 캠페인을 통해 앞지면을 할애하며 이 사건들을 대중에게 널리 알렸고, 긴 펀딩캠페인을 통해 10만달러를 모금해 2003년 베트남 푸옌성에 한베평화공원을 설립하는 결실을 맺기도 했지만, 참전군인들의 한겨레신문사 난입으로 한때 윤전기가 멈추는 등 이 문제로 사회적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도 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활동과 지원은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을 계승하고 베트남전쟁에 대한 성찰을 통해 평화로 나아가고자 2016년 설립된 한베평화재단을 주축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내에는 몇 종의 교과서에서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한 언급이 있고, 제주 강정마을에는 피해자를 추모하는 ‘베트남 피에타’ 조각 (김서경 김운성 작가 제작)도 세워졌다.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의 1기에 해당하는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대책위원회가 결성되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운동이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고, 2018년에는 시민평화법정이 열려 대한민국에 진상조사, 손해배상, 공식인정, 민간인 학살 관련 사실 전시의 책임 모두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지만 현재까지 정확한 역사적 피해사실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조사된 바가 없다.

▲ 베트남 평화의료연대 (평연)의 베트남 현지 진료 모습 치과 한의과 의료인및 일반 후원회원 320여명으로 구성된 베트남 평화의료연대(평연)은 1999년 이래 지속적으로 현지에서 구강보건교육사업및 수술등 의료지원 활동을 해왔다. ⓒ 베트남평화의료연대 페북

이에 민변을 비롯한 한국 시민사회가 사실관계를 밝히기 위한 ‘베트남 전쟁 시기 대한민국 군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사건 조사에 관한 특별법’ (이하 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력중이다. 이외에도 2019년 4월 민간인학살 피해자 103명은 청와대 청원을 통해 진상조사및 사실인정, 공식 사과 및 공식 선언, 피해회복을 위한 조치를 요구했고, 응우엔 티 탄씨는 현재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청구도 진행중이다.

필자는 연속간담회에서 사회를 맡았고 민변에서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TF 팀장인 김남주 변호사와 특별법 제정및 그간의 진상규명 노력에 대한 여러 쟁점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 이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게된 취지와 배경은 무엇인가.

“민간인 학살 피해자 응우엔 티 탄씨를 대리해 개별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 소송을 진행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책임을 인정하라고 가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을 해야되는 제도다. 사실 가해자가 반성한다면 먼저 스스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다가서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베트남전쟁 당시에 민간인에 대해 여러가지 법적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했을 것이라고는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 사실에 대한 공적확인이 필요하다. 그것을 법률을 만들어서 제도로서 추진하고 한 개의 사건이 아닌 여러가지 사건들을 총체적으로 규명하자는 게 이번 법 제정의 취지다. 8월 25일 입법법안공청회를 하고 8월말 또는 9월초에 법안 발의를 할 예정이다.”

– 특별법의 주요 내용은 대한민국에 진상조사, 공식인정, 손해배상, 민간인 학살 관련 사실 전시의 책임을 인정한 시민평화법정의 판결 내용과 유사한가?

“진상규명에 초점을 맞춰놨다. 진상규명을 신청하고,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진상규명위원회가 대한민국에 있는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다양한 곳에 정보를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관련자를 출석시켜서 진술을 들을 수 있도록 하고, 조사절차 규정및 조사결과에 따라 진상규명 결정과 불능 결정등 공적인 결정들을 위원회가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조사가 마무리된 후 백서형태로 보고서를 만들어서 국회와 대통령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그 보고서에는 시민평화법정에서 주문으로 담았던 피해보상, 사과, 재발방지를 위한 장치, 민간인 학살 관련 사실 전시등 이런 내용들을 담아서 권고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법의 목적은 사실규명에 있고, 그 이후에 피해보상등은 법적 구속력을 갖지않고 권고만 할 수 있어 이후의 과제로 남겨두며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반대가 심한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진상규명부터 단계적으로 가려고 한다.”

▲ 베트남전 민간인학살TF 팀장 김남주 변호사 민변에서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TF 팀장을 맡고 있는 김남주 변호사(가운데)는 연속간담회중에 “베트남 피해 생존자들에게 더 이상 희망고문을 그만 했으면 한다”며 제대로된 진상규명과 고령의 피해자들에 대한 의료지원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 이재정 TV 유튜브 갈무리

– 베트남은 진상규명과 사과를 원하지 않는데 왜 한국인들이 나서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오해가 많은 것 같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관계를 잘 모르는 잘못된 인식이다. 베트남의 피해자들은 이전에도 진상규명을 명확히 원하고 있는데 초기에 우리가 그분들과 소통하는 네트워크가 없었기 때문에 명확히 전달이 안되었을 뿐이다. 응우옌 티 탄씨 등 생존자들은 2015년부터 한국에 와서 국회에서 명확히 요구했다. 심지어 작년 103명의 피해자들이 청와대 청원을 통해 진상규명하고 사과하라는 명시적 요구를 했다. 베트남 정부가 명시적으로 요구를 하지 않을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초기에 베트남 방문을 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사과를 하려고 했었는데, 사과를 하지 않고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아픈 역사가 있다’라는 유감표명으로 발언했다. 언론에는 대통령이 사과를 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지만, 베트남정부에서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시적 사과를 하지 않고 넘어갔다는 보도는 있었다. 위안부 문제처럼 국가가 피해자를 대신할 순 없다. 국가보다는 피해자를 더 중심적으로 봐야하고, 피해자는 명시적으로 원하고 있다. 더 이상 논란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예전에 일제시대 일본은 소록도에 있는 한센인들에 대해서 강제낙태 등 인권침해 행위를 했었다. 그때 이 문제가 우리사회에는 잘 전해지지 않았지만, 일본시민사회에서 먼저 소록도를 찾아가 이분들을 면담하고 이분들 피해를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했었다. 피해자가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도 가해국가의 시민단체가 나서는 게 유례가 없고 이상한 일이 아니다. 민간차원에서 일본도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듯 이것을 배워서 우리도 베트남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 민주주의와 인권 등의 주제를 다루는 싱크탱크 ‘프리덤 하우스’에 의하면, 베트남은 수십년간의 베트남공산당 (CPV) 일당체제로 표현과 종교의 자유및 인권활동이 완전히 보장된 성숙한 민주주의사회가 아닌 것으로 알고있다. 피해마을 유족이 문제해결에 목소리 내는 것에 대해 베트남 국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궁금하다.

“베트남 정부의 입장이 명시적으로 외부에 드러난 적이 없기에 입장표명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베트남 정부는 사실상 이 문제를 막지 않고 있다. 베트남은 모두 관영언론인데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다던가 응우옌 티 탄씨가 한국을 방문해서 어떤 일을 했다던가 이런 보도를 막지 않고 있다. 이 분이 소송하는 것도 막으려면 막을 수 있지만 그러지 않고 있다. 그것은 사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좋겠다, 또는 해결되는 것을 굳이 나서서 막진 않겠다는 그런 입장이 아닌가 추정해본다.”

– 한국 정부가 2019년 103명의 피해자 청원을 받고서도 ‘국방부 공식기록에 확인되지 않는다’, ‘베트남의 협조가 없어서 조사할 수 없다’는 무성의한 답변을 했다고 들었다. 주월미군 감찰보고서, 한국 베트남 퇴역군인 증언, 피해자 증언 등 증거가 많은데도 베트남 청원인들에게 한번도 연락해보지 않고 자료가 없다는 결론을 내려서 피해자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겼다. 정권교체 후 피해자들은 많은 개선과 변화를 예상했을텐데 현 정부는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저는 현 정부가 해결의지가 없다고 본다. 어느 나라가 학살기록을 하겠나. 당연히 국방부의 공식 교전기록인 ‘파월한국군전사’ ‘전투상보’엔 기록이 없다. 사실 해결하려고 하면 우선 자료만 볼 게 아니고 참전한 분들의 말씀도 들어봐야한다. 한겨레 21에서 해당 중대 소대장들이 ‘우리 중대가 퐁니퐁넛마을에 들어갔고, 우리 소대는 아니지만, 우리 뒤에 따라오던 소대에서 총소리가 났고, 학살했다고 하더라’라며 다 증언하셨다. 아직 생존한 분들이 계시는데 이분들에 대한 조사도 하나도 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 당시에 중앙정보부에서 그 사건이 외교문제로 비화되니까 조사를 했다. 국가정보원에 있는 기록도 보지 않았다고 한다. 베트남측 협조를 구하기 어렵다고 베트남 탓만 하는데 한국이나 미국 자료도 있고, 아직 생존자도 있다. 의지만 있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충실한 조사를 하지 않고서 확인되지 않는다고 하는 건 의지가 너무 없는 거다.

대통령이 의지가 있다고 저희는 전해들었는데 그게 관철이 안되는 건지, 즉 대통령의 뜻을 아래 기관들이 거스르는 건지, 대통령의 뜻이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소극적인 태도인건지 잘 모르겠다. 많이 아쉬운 점이다. 이미 50년이 넘은 일이다. 사실관계는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그 바탕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입장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진실은 가둘 수 없는 것 아닌가.”

▲ 한국시민사회의 국방부앞 기자회견 모습 2019년 4월 4일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 103명은 진상조사,사실인정, 공식 사과등을 요구하며 청와대에 직접 청원하였으나 2019년 9월 국방부는 보유하고 있는 한국군 전투 사료에 민간인 학살 기록이 없고 베트남당국의 협조가 없어서 조사할 수 없다는 답변을 했다. ⓒ 한베평화재단

(2편 “베트남전 생존자들에게 희망고문 그만했으면”로 이어집니다)
김남주 민변 베트남전TF 팀장 인터뷰② “피해자도 참전군인도 고령, 어떻게 정리할지 고민해야”

▲ 이길보라 감독의 다큐 <기억의 전쟁>중 2018년 베트남 시민평화법정 모습 민변에서 이 시민법정의 틀을 만들었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베트남전쟁의 의미를 따져보고 법률적 다툼을 진행했다. 피해 생존자가 원고로 참여했고 참전군인의 증언도 있었다. 재판부로 위촉된 김영란 전 대법관, 이석태 변호사 (현 헌법재판관), 양현아 서울대법학전문대 교수 3인은 대한민국의 책임 내용 (공식인정, 진상조사, 손해배상)등을 인정했다. ⓒ 배급사 시네마달

– 퐁니퐁넛마을 민간인학살 피해자인 응우엔 티 탄씨가 현재 국가배상소송을 하고 있다. 소장이 제기된 지 1년 2개월 경과되었고 쌍방에서 쟁점 정리중이라고 들었다. 내년쯤 재판이 끝나고 1심선고가 예상되는데 승소할 가능성은 어떤가.

“내년에 선고될 것이라는 것은 추정이고, 재판 진행경과에 따라 다르다. 국내 군사재판에서는 민간인 살해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례들이 꽤 있다. 전시 강간죄로 판결받은 판결문도 남아있다. ‘민간인을 살해한 적이 없다’는 건 맞지 않고, 이미 법원에서 공적확인을 받은 사례가 있다. 그 이외에도 많은 일이 묻혀있다. 소송관련해서 증거는 꽤 많다. 당시 미군과 마을출신이 포함된 남베트남민병대가 약 400미터 거리에서 같이 망루에서 지켜봤다. 이 사건 직후에 이들이 마을에 들어가 생존자를 구조, 시신을 수습하고 사진도 찍었다. 미군 제3해군상륙군 사령부에서 조사를 시작해서 미군, 남베트남민병대, 생존자들의 생생한 진술을 받았다.

그게 미국 문서보관서에 있었고 저희가 확보해서 법원에 제출했다. 이외에도 그 마을에서 작전했던 해병2여단 1중대 병사와 소대장들 증언을 모두 봤을때 한국군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다. 이밖에 다양한 법적 쟁점도 있다. 국가배상청구를 할때 외국인이 청구할 경우에는 한국인도 베트남정부를 상대로 소송할 수 있는 ‘상호보증’ 제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존재하냐 여부, 소멸시효가 지나지 않았느냐는 쟁점도 있다. 사안의 입증 뿐만이 아니라 이런 법리적 쟁점을 넘어서야 하는 사건이라서 결과는 예상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법원이 시효를 내세워 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기에는 인도주의에 반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국정원에게 퐁니퐁넛 사건의 조사기록을 요청하자 정보공개 소송절차통해 답을 받아가라해서 4년 소송으로 15글자만 받았다. 국정원의 사실관계 조사협조를 위해 관할인 국회정보위에 노력해달라고 간담회에서 발언하셨다. 국정원 개혁도 베트남전쟁 진상규명에 필수요건일까.

“저희가 퐁니퐁넛 사건에서 ‘국정원의 사실조회를 통해 자료를 제공하라고 명령해주십시오’라고 법원에 신청하자 법원이 저희 신청을 받아들여서 국정원에게 사실조회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국정원은 사실조회에 응하지 않고 정보공개절차를 통해 받아가라고 답을 했다. 15자를 소송을 통해 받아낸 것처럼, 이는 기나긴 소송을 통해 뺏어가라고 하는 비겁한 결정이고, 가해자가 피해자를 조롱하는 꼴밖에 안 된다. 인권 국가를 지향한다는 대한민국이 할 행동은 아닌 것이다. 특별법이 제정되면 과거사진상규명법처럼 국정원에 자료를 요청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특별법이 제정되면 그를 통해서 국정원으로부터 자료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 한겨레가 46주간에 걸쳐 펀딩 캠페인도 하고, 앞지면을 할애해 대중적으로 사안을 널리 알려 마치 NGO 역할을 했다. 반면 참전군인들의 한겨레 신문사 습격사건은 한국사회내에서 베트남전을 ‘반공과 발전’의 가치로 신봉하는 냉전의 시각과 인권및 생명권의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이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다. 쌍방간 기억방식에 간극이 큰데 이런 시각차이를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이제는 서로 대화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전에는 한겨레 신문사에서의 충돌처럼 서로 힘겨루기, ‘듣든 말든 나는 내 의견을 큰소리로 외치겠다’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서로 상대방의 입장도 들어보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참전군인들도 어떤 점에서 불편한지 자세하게 알아보는 계기가 필요할 것 같다. ‘나는 민간인을 살해하거나 학대한 사실이 없는데 왜 참전군인 전체를 매도하느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 같고, 베트남전이 게릴라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내가 민간인을 살해하긴 했지만 민간인과 게릴라가 구분되지 않는 특수한 상황이어서 내 행위를 비난할 수 없다’라고 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

또 ‘민간인을 살해한 것은 잘못됐지만 상관 명령에 따라서 한 행위라서 나도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하시는 분 등 여러 층위가 있을 것 같다. 또 ‘차제에 진상을 규명해서 문제되는 부대와 시기만 확인을 해달라’며 반대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고, 대화를 통해 특정행위가 국제인도법규범을 위반한 것인지, 자료부족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인건지 등 고민을 해봐야 되는 문제같다. 이에 더해 참전군인들이 연세가 무척 많으신데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사회가 같이 고민해보는게 좋지 않을까 싶다.”

– 2001년 5월 하미 위령비 비문 사건에 대해서는 이번에 간담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 1968년 청룡부대에 의해 주민 135명이 희생된 꽝남성의 하미학살 희생자를 추모하기위해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2만5천 달러를 지원해 2001년 위령비를 준공했다. 이는 양국간의 과거청산을 위한 민간단체 최초의 지원사업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한국 대사관 이용준 참사관 (<잊혀진 상흔을 찾아서>의 저자)및 참전군인단체의 개입으로 준공식전 비문을 덮은것은 독일에서 일본정부의 외압으로 있었던 베를린 소녀상 철거압박및 레겐스부르크 소녀상 비문 철거문제와 너무 닮았다. 이 비문을 다시 새기는 것도 진상규명과 아울러 필수 과제라고 본다.

▲ 한국정부의 외압으로인해 대리석으로 가려진 하미위령비 비문 권현우 (한베평화재단 팀장)은 하미학살 피해자 유족들은 한베평화재단에게 한국정부의 압박으로인해 대리석으로 가려진 하미위령비 비문 내용의 액자를 지속적으로 전달받고 있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해결을 촉구했다. ⓒ 이재정 TV 유튜브 갈무리

“저는 위령비 건립에 대해 전우회에서 재정지원을 했기 때문에 의견을 낼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사실관계나 이분들이 느꼈던 공포나 분노를 표현한 부분에 대해서 의견을 내거나 수정요청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더더욱 한국 대사관측에서 알고서 이 문제를 전우회측에 알리고 그 비문을 덮게끔 현장에서 관여했던 점은 매우 문제가 있다고 본다.

다시 비문을 열어야하는데 한국정부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하미마을 유족회나 지역인민위원회는 한국정부의 승인이 필요하다고해서 비문을 덮고 있는 상태이기때문에 한국정부가 막고 있는 것인지, 다시 열어도 문제가 없는 것인지 한국정부의 의사확인이 필요하다. 현재 전우회가 없어져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기때문에 대사관측과 소통해보는 게 적절하지 않나 싶다.”

– 간담회중에 “베트남 피해 생존자들에게 더 이상 희망고문을 그만 했으면 한다. 생존자가 ‘더 이상 오지말라, 아니면 약이라도 달라’고 아주 간절한 말씀 하시는데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셨다. 지원측면에서 어떤 실질적인 조치가 필요할까.

“대통령이 진정성있는 사과를 하겠다고 알려졌는데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아서, 베트남정부가 원하지 않아서 안 했다고 한다면 그 절절한 마음을 실질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 인도적 지원이다. 고령에다가 총 칼 등 많은 상처가 있으니까 치료가 제일 급하다. 고통 완화등 치료를 꾸준히 해야하는데 노무현정부 당시 종합병원이 지어진 이후에 지원이 없었다. 이동식병원 시스템으로 학살마을을 방문해 치료지원을 하면 좋겠다. 고령 피해자들에 대한 의료지원이 제일 시급한 문제다.”

▲ 베트남평화의료연대 한의사들의 베트남 현지 학교 방문 모습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소속 한의사들이 직접 베트남 현지의 학교를 방문해 성장교육을 진행했고 500여명의 베트남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 ⓒ 베트남평화의료연대 페북

– 19차례 의료지원사업을 해온 베트남평화의료연대를 비롯해 작가및 예술단체들이 민간에서 그간 꾸준히 교류가 있었다는 그 자체로 상당히 고무적인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본다. 무려 20년을 이어온 운동이 이렇듯 꺼지지 않는 불씨로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일까.

“이 운동을 해온 세대가 민주화운동과 그 이후의 세대들이라서 인권의 가치에 감수성이 높은 세대라는 생각이 든다. 80년 광주학살의 기억도 있어서 그분들에게 손을 내밀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고통을 우리도 겪었기에 동류의식이 있어서 동화가 잘 되는 것 같다.

아울러 멀리까지가서 많은 비용을 들이고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활동했다는 것은 그만큼 탄탄한 조직력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특히 베트남평화의료연대는 건치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조직이 주도하신 것 같은데 사회참여를 하고 싶어하는 치과의사들의 열망과 의료전문성을 잘 접목하고 조직화해 풀어낸 것 같다. 오랫동안 지속된 것은 정말 대단하다.”

– 관련 특별법제정을 위해 시민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은.

“특별법이 특별한 법은 아니고, 과거 사실을 확인하자는 것이다. 그간 수많은 의혹과 사회적 고발이 있었고 너무 많은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것을 다 덮고 가기에는 우리 공동체의 가치지향, 또는 품격과 맞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가 아시아에서 인권을 선도하는 국가로서 이 문제를 해결할 때가 됐다. 해결의 방법으로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진실을 밝히자는 것이다. 그 진실속에서 평가가 나올 것이고 한걸음씩 내딛으면 된다. ‘당장 사과하고 당장 배상하자’라기보다는 차근차근 사실확인하고 그 단계에서의 재발방지, 여러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류는 과거의 잘못을 성찰하면서 한걸음씩 전진해왔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도 그렇게 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평화의 소중함을 재인식하게 되고, 전쟁에도 인권의 가치와 인권규범이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킬 수 있으리라 본다. 험악해지는 미중패권 갈등 속에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쟁은 가까운 미래의 문제가 될 수 있다.

베트남학살 진상규명은 과거의 문제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문제에 닿아 있다. 한국 시민들도 진실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같이 동참해주셨으면 좋겠다.”

▲ 한국시민사회로부터 자전거를 전달받는 푸옌성 베한우호친선협회 베트남나비평화기행 푸옌성 자전거 전달식 (2020년 11월 10일) 한베평화재단, 정의기억연대, 세브란스노사공익기금은 공동으로 푸옌성 베한우호친선협회를 통해 3개 학교 150명의 학생들에게 150대의 자전거를 전달했다. ⓒ 정의연 공식 블로그

관련 연속간담회 링크는 다음과 같다.

-1차 연속 간담회: <퐁니퐁넛 마을 민간인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 초청 간담회>
-2차 연속 간담회: <진실을 밝히는 사람들>
-3차 연속 간담회: <베트남전쟁 한국군 피해마을 지원 현황과 과제>

한편 간담회는 국회의원 우원식, 우상호, 기동민, 이재정, 이규민, 이소영, 강민정, 최강욱, 윤미향을 비롯해, 한베평화재단과 더불어 경계를넘어, 다산인권센터, 대안문화연대, 마감마녀, 마을과아이들, 민족문제연구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사람과공감, 성미산학교, 소박한자유인, 수요평화모임, 식민지역사박물관, 아시아평화인권연대, 연세대학교동아시아수용소연구모임,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인권과평화를위한국제민주연대, 인권교육센터들, 전쟁없는세상, 제주43범국민위원회, 천주교인권위원회, 피스모모, 피스모모평화페미니즘연구소, 화성외국인보소호면회활동마중, 향린교회가 공동주최로 참여하고 있으며, 재단법인 동천이 후원했다.

<2021-08-0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생존자의 절규 “한국, 베트남전 피해자 고통은 외면”

☞기사원문: “한국정부, 베트남전 생존자들 희망고문 그만했으면”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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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22편 : 한반도가 _ 나중화(나창헌 선생 아들)

☞ 21편 : 독립군행진곡 _ 김완태(전 육군사관학교장)

☞ 20편 : 영웅추도가 _ 김성태(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 19편 : 선봉대가 _ 권현(권기옥 선생 후손)

☞ 18편 : 대한혼가 _ 김재홍 함경북도지사(규암 김약연 선생 증손자)

☞ 17편 : 희망가 _ 김수옥(우사 김규식 선생 손녀)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우원식 국회의원(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 _ 김주(심산 김창숙 손녀)

☞ 10편 : 광복군아리랑 _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 9편 : 앞으로행진곡 _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 _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우당 이회영 손자)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 _ 정남기(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 5편 : 격검가 _ 차영조(동암 차리석 아들)

☞ 4편 : 압록강행진곡 _ 광복군 김영관 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 _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자)

☞ 2편 : 안중근옥중가 _ 함세웅 신부

☞ 1편 : 국치추념가 _ 이준식 독립기념관장(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목, 2021/06/24-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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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1/06/24-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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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윤숙, 대표적 친일파 문학인
김해시의회서 청산 근거 마련
관련 위원회 구성 등 나서기로

지역 현충시설인 김해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 뒤편에 설치된 친일파 문학인 모윤숙 시인의 시비(詩碑)를 철거할 근거가 되는 관련 조례안이 김해시의회를 통과했다.

김해시의회는 정례회 마지막날인 지난 24일 제237회 정례회 제2차 본회의에서 ‘김해시 일제잔재 청산 등에 관한 조례 제정조례안’을 통과시켰다.

이 조례안은 현재 김해시 내 남아있는 일제 잔재를 조사·연구해 역사를 바로 세우고 일제와 관련된 제국주의 상징물 등의 공공사용을 제한·조정하는 게 골자다. 이광희 시의원이 대표발의한 이 조례안에는 송유인 시의장, 하성자 시의원을 포함해 11명의 시의원이 발의자로 이름을 함께 올렸다.

조례안에는 일제 잔재 청산 사업에 관한 사항,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선양·추모·기념하는 행사나 사업 등에 참여하거나 예산을 지원하는 행위 제한, 일제상징물을 노출하는 행위 제한에 관한 사항, 일제잔재청산위원회 설치·구성·운영에 관한 사항 등이 포함됐다.

조례안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29가지 항목으로 규정했다. 을사늑약(을사조약), 경술국치(한일합병조약) 등 일제의 국권침탈행위에 협력한 자, 일제로부터 귀족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자,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동원과 관리에 협력한 자, 침략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다액의 금품을 헌납한 자, 그 밖에 뚜렷한 반민족행위의 증거가 확인되는 자 등이다.

또 ‘일제 잔재’는 일제 식민통치로 인해 김해시 내에 남아있는 유·무형의 흔적 등으로 규정했다.

조례안에 따라 김해시장은 일제잔재 청산에 관한 사업을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5년 마다 일제잔재 청산 추진계획을 수립·시행해야 하며 이를 위해 김해시 일제잔재청산위원회를 설치·운영할 수 있다.

이번에 논란이 된 시비에는 모윤숙의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새겨져 있다. 모윤숙은 대표적 친일파 문학인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2002년 8월 ‘친일문학인 42인’ 명단에 포함됐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를 ‘친일인명사전’에 공식 등재했다. 국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역시 모 시인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이런 배경 탓에 다른 장소도 아닌 애국심을 함양·고취해야 하는 현충시설에 친일행적 시인의 작품이 새겨진 시비를 존치시키는 게 맞냐는 논란이 제기됐다.

모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시는 육군본부 1층 명예의 전당에도 새겨져 있었다가 2005년 당시 열린우리당 임종인 국회의원의 지적에 2006년 결국 철거됐다.

이광희 시의원은 “이번에 일제 잔재 청산 조례안이 통과된 만큼 모윤숙 시인의 시비 뿐만 아니라 김해지역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를 발굴하는 연구·조사 등을 종합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해뉴스 이현동 기자 [email protected]

<2021-06-29> 김해뉴스

☞기사원문: 현충시설 모윤숙 시비 철거될까 일제잔재청산 조례 시의회 통과

수, 2021/06/30-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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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이상룡 선생 증손 이항증 이사

왼쪽부터 석주의 고손이자 종손인 이창수씨, 석주 증손 이항증 국무령이상룡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이용득 민주당 상임고문이다. 강성만 선임기자

‘남아가 제 일신 아끼는 게 어디 있으랴/ 고향이 좋다고 머물러 슬퍼하지 말라/ 태평한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물리라’

석주 이상룡 선생.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이 꼭 110년 전인 1911년 독립투쟁을 위해 서간도 망명길에 오르면서 지은 시 ‘거국음’의 마지막 부분이다. 석주는 망명 첫해에 우당 이회영 형제 등과 함께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전신)를 열어 항일 무장 투쟁을 이끌 재목을 길러냈고 1919년에는 서간도 무장 항일운동단체가 결성한 군정부인 서로군정서 독판도 지냈다. 임시정부 국무령(1925~26)을 지내고 6년 뒤 생을 마칠 때 그는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에 싣고 가지 말라”고 유언했다.

석주 생가이자 경북 안동 고성이씨 종택인 임청각은 지난해 말 마당을 가로지르던 열차 운행이 멈추면서 복원 사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 문화재청과 경북도, 안동시는 280억 원을 들여 2025년까지 일제가 기찻길을 놓아 훼손된 99칸 임청각의 원형을 살리고 임청각 사람들의 독립운동 행적을 기리는 기념관도 세울 예정이다.

지난 25일 오전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서 석주 증손 이항증 국무령이상룡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석주 고손이자 종손인 이창수씨, 임청각 후손 이용득 민주당 상임고문을 만났다.

임청각은 ‘독립유공자 11명을 배출한 구국의 성지’다. 석주의 부인(김우락)과 아들(준형), 손자(병화)를 비롯해 임청각 사람 11명이 독립운동 서훈을 받았고 석주의 처가와 사돈집까지 하면 40여 명이다. 이 이사의 조부 이준형 선생은 부친의 유고 정리를 끝낸 1942년 생일날에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고 부친 이병화 선생은 일본 경찰에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1952년에 세상을 떴다. 이 이사의 큰 형은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 소행으로 추정되는 테러로 숨졌고, 둘째 형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셋째와 넷째 형은 철도와 의료 사고로 숨졌다. 다섯째 아들인 그가 증조부 기념사업을 이끄는 이유다. 종손 창수씨는 넷째 형의 큰아들이다.

이 이사는 4년 뒤 임청각에 기념관(역사문화공유관)이 생긴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100년 뒤에도 사람들이 임청각을 찾게 하려면 독립운동 정신과 유물을 보여주는 공간이 중요한 데 이번에 안동시와 문화재청이 절반씩 예산을 대 기념관을 짓기로 해 다행입니다.” 기념관에 전시할 대표 유물을 묻자 그는 “증조부가 김규식 선생한테 선물 받아 들고 다니던 용지팡이와 독립운동 문건을 쓸 때 늘 사용했던 벼루 등이 포함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규식 선생이 석주에게 선물한 용지팡이. 이창수씨 제공
석주 이상룡 선생이 독립운동할 때 문서 등 기록 작성에 사용한 벼루. 이창수씨 제공

5년 전 당시 문재인 민주당 대표의 임청각 방문을 주선한 이 고문은 이번에도 기념관 예산 확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단다. “문 대통령이 당 대표 때 제가 임청각 이야기를 하자 상당한 관심을 보이더군요. 문 대통령이 취임 뒤 광복절 경축사에서 임청각과 석주 선생을 언급한 게 복원에 큰 힘이 됐죠.”(이용득)

현 정부 들어 대통령까지 나서 임청각 정신을 기렸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다. 바로 서훈 조정이다. 석주는 1962년에 3등급 서훈인 독립장을 받았다. “4년 전에 증조부 독립운동 자료를 챙겨 서울보훈청에 보냈지만 지금껏 공식 답변을 받지 못했어요. 서훈 때 심사를 맡은 교수 두 명이 나중에 친일인명사전에 올랐어요. 친일역사학자가 독립운동 서훈 심사를 하다니 창피한 일이죠. 그때 심사위원회도 꾸리지 않고 정부에서 몇 사람이 신문 기사를 보고 결정했어요.” 현 상훈법은 일단 정해진 서훈은 바꿀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중국인 장제스도 1등급인데요. 헌법 첫머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고 해놓고 임정 수반을 지낸 분이 3등급이라니, 말이 됩니까. 보훈 당국에서 여운형 선생과 유관순 열사는 2등급과 3등급에서 사후 공적에 대해 추가 서훈하는 방식으로 1등급을 결정했다고 하더군요. 임청각에 하루에도 몇백명씩 찾아오는 국민에게 올바른 역사관과 애국정신을 길러주는 석주 선생께 1등급을 추가 서훈해 나라 위한 희생은 나라에서 끝까지 책임진다는 산 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 (이용득)

1990년 이상룡 선생 유해 봉환 때 허은 선생과 맞손녀(이춘신)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창수씨 제공

석주의 손자며느리이자 이 이사의 모친 허은(1909~97) 선생은 3년 전에 서훈(애족장)을 받았다. “어머니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가 서훈에 영향을 미쳤죠. 어머니가 책에 독립군 밥 해먹이고 군복 만들고 해진 옷을 기워주는 등 의식주 이야기를 자세히 밝혔거든요. 사실 여자의 이런 노동이 없었다면 한 달도 독립운동을 못 했을 겁니다. 어머니는 생전에 ‘내가 뼈 빠지게 노력했지만 아무도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도 하셨죠. 증조부와 함께 독립운동을 한 김동삼 선생의 며느리 이해동 선생도 80년대 후반에 영구 귀국한 뒤 ‘독립운동의 반은 시어머니 몫인데 시아버지만 훌륭하다고 말한다’고 나무라셨죠. 중국은 남녀차별이 없는데 한국은 차별한다고요.”

작년말 임청각 훼손 철로 철거로
2025년 완공 예정 복원사업 탄력
석주 정신 보여주는 기념관도 건립
“임정 수반 지냈는데 3등급 서훈
여운형·유관순처럼 등급 조정을
독립운동의 반 여성 몫 인정해야”

허은 선생 회고록에는 이 이사가 어릴 때 ‘밥 한번 실컷 먹어봤으면 좋겠다’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월사금을 내지 못해 중학교를 겨우 졸업했어요. 중학교를 나온 뒤에는 고등학교에 다니려고 여동생과 같이 보육원에 갔어요. 낮에는 보육원 심부름을 하고 밤에는 대구 영신고 야간부를 다녔죠.” 그는 안동중을 다닐 때 내지 못한 한 학기 등록금을 졸업(57년) 50년 뒤 뒤늦게 납부한 일도 했다. 증조부가 99칸 임청각 주인이었는데, 남은 재산이나 도와주는 이가 없었냐고 하자 그의 답은 이렇다.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가장이 없으면 (주변에서) 그 재산을 가만히 놔두지 않아요.”

이 이사 등 석주 후손이 힘겹게 끌어온 임청각 소유권 소송은 아직도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단다. “증조부가 망명 2년 뒤 만주 생활과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조부를 귀국시켜 임청각을 팔려고 했지만 매매가 잘 안 됐어요. 그때 당시 3천원 정도로 추정되는 임청각을 매매 형태(첫 계약서는 2천원, 두 번째 계약서는 1천원)를 취해 문중 돈 500원을 받았고 그 후 문중대표 4명 이름으로 명의신탁했어요. 이 문제 때문에 소송을 해 임청각 건물 소유권은 해결했지만 아직도 택지와 주변 임야는 문중 소유로 돼 있어요.” 그는 해방 후 임청각 후손이 겪은 경제적 곤궁을 친일 청산의 실패와 연결지었다. “집에 도둑이 들면 신고해야 하는데 해방 후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않아 어디 신고할 곳이 없었어요.” 이런 말도 했다. “친일 대가로 받은 돈으로 산 땅만큼은 해방 직후 국가가 회수해야 했는데 하지 못했어요. 지금은 하고 싶어도 쉽지 않아요.”

“증조부는 솔선수범의 지도자
가족과 제자에게 더 엄격했죠”

기득권을 내려놓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증조부의 뜻을 언제쯤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냐고 하자 그는 “90년대 초 <석주유고>를 읽고서”라고 답했다. 석주의 시가와 산문을 엮은 <석주유고>는 1973년에 처음 출간됐다. “유고를 보면서 ‘이 어른 참 무서운 사람이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족과 제자 등 측근에게 더 엄격하셨더군요. ‘이래서 (증조부가) 지도자를 했구나’ 생각했죠.” 그는 1994년에 20대 후반부터 다니던 은행에서 명퇴하고 퇴직금으로 증조부와 조부, 부친의 유고 문집을 새로 출간하기도 했다. 종손 이창수씨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아버지께서 제가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고조부의 독립운동 행적에 대해 늘 말씀하셨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할머니(허은)가 독립운동 이야기 뿐 아니라 친일파 이야기도 하면서 이겨내라고 하셨죠. 올바른 정신으로 열심히 살면서 그들을 넘어서야 한다고요.”

증조부의 행적 중 가장 본받을 점이 뭔지 묻자 이 이사는 “솔선수범”이라고 답했다. “100년 전 안동을 떠날 때 선발대가 일제 경찰에 붙들리는 바람에 일행 중 일부가 주저하자 증조부는 ‘나라를 찾겠다면서 그것도 겁내면 되겠냐’고 꾸짖었다고 해요. 1928년 손주(병화)가 독립운동단체인 재중한인청년동맹 간부로 뽑히자 ‘독자라 조부와 부친을 돌봐야 한다’고 고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증조부가 ‘나라 찾겠다는 사람이 집 걱정해서 되겠냐’고 나무랐다고 해요. 공사가 엄격한 분이었죠.”

강성만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21-06-29> 한겨레

☞기사원문: “석주 증조부 독립정신 알리는 공간으로 임청각 거듭나야죠”

수, 2021/06/30- 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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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링크] [보도자료]

[취재요청] 2020총선, 친일청산운동으로 선거법 재판 피고인들의 입장발표 기자회견
수신 : 각 언론사 담당 기자
발신 : 아베규탄시민행동 친일청산 총선대응팀
일시 : 2021년 6월 29일(화) 오후 1시 30분
장소 : 서울중앙지방법원 정문 앞 (교대역 법원 삼거리)
담당 : 이하나 010-6584-2121 (겨레하나 정책국장) 


“친일청산은 무죄다”
2020총선, 친일청산 캠페인한 시민들 선거법 재판받아
친일청산운동, 무죄 주장하는 기자회견 진행
– 양홍석 변호사,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 박석운 아베규탄시민행동 공동대표 등 참석해 발언

2020 총선 당시 ‘친일정치인 불매운동’ ‘친일청산 4대입법’ 캠페인을 진행하던 시민들 중 5명이 서울시 동작구에서 선거법으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리고 6월 29일 재판이 시작됩니다.

당시 캠페인은 친일정치인을 특정하거나 거명하지 않았으며, 전국에서 ‘친일청산 4대 입법’ 캠페인을 진행하고, 이를 후보자들에게 공개질의하여, 정책을 검증하기 위한 정책 캠페인, 시민캠페인이었습니다.

친일청산 4대 입법은 ▲친일극우망언 피해자 모욕 처벌법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 ▲친일반민족행위자 훈장 서훈 취소 ▲친일반민족행위자 국립묘지 이장 입니다. 총선을 앞두고 친일청산 4대 입법에 대해 각 후보자들의 의견을 묻고, 이를 기준으로 후보자들을 검증하기 위함이었습니다.특히 피고인들이 고발, 기소된 서울시 동작구는 국립묘지 현충원이 있는 곳입니다. 이에 시민들은, 총선을 앞두고 동작구에 출마한 정치인이라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국립묘지에 묻혀서는 안된다는 국민들의 요구에, 명백히 의견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시민들은 사전에 선관위에 질의를 하였고 그 내용에 따라 친일청산 4대 입법 캠페인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진행한 캠페인 중 유독 동작구에서만 5명의 시민이 기소되었고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국민들은 친일정치인을 뽑지 않을 권리가 있고, 그에 대한 정보를 알 권리, 후보자에게 입장을 물을 권리가 있습니다. 선거라는 이유로 ‘친일청산 운동’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친일정치인들을 걸러낼 기회 조차 가로막는 것입니다. 공정함을 보장하기 위한 선거법이 오히려 특정 정치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국회에 친일정치인을 들여보낼수는 없다”는 간절함으로 진행했던 친일청산운동이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이에 ▲피고인들의 무죄를 주장하는 변호사의 입장 ▲친일청산운동의 정당성 ▲현행 공직선거법의 문제점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진행합니다. 기자회견 개요는 아래 첨부하였습니다. 기자여러분들의 많은 취재와 보도를 요청드립니다. (끝)


기자회견

“친일청산은 무죄다”
2020총선 공직선거법 재판 피고인들의 입장발표 기자회견

일시 : 6월 29일(화) 오후 1시 30분
장소 : 서울중앙지법 정문 앞(삼거리)

사회 : 이하나(겨레하나 정책국장, 아베규탄시민행동 친일청산총선대응팀장)
내용 :
1. 친일청산운동이 죄가 될 수 없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2. 현행 공직선거법에 대하여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 소장)
3. 무죄를 주장하는 피고인들의 입장 (양홍석 변호사, 법무법인 이공)
4. 시민들의 의견개진 정당성, 공직선거법의 문제점 (박석운 아베규탄시민행동 공동대표)

※관련기사

☞뉴시스: ‘국회에 친일정치인을 들여보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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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21/06/29-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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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법 위반’ 법정 선 ‘아베규탄시민행동’ 활동가들
나경원 사무실 인근서 ‘친일 정치인 청산’ 활동 벌여
검찰 “나경원 낙선 운동” vs 변호인 “선거운동도 아냐”

지난해 4월 국회의원 선거 당시 ‘친일 정치인 불매 운동’과 ‘친일청사 4대 입법’ 캠페인을 진행하다 서울 동작구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돼 재판에 출석하는 피고인들이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연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총선을 앞두고 나경원 전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의원이 후보자로 출마한 지역구에서 “친일 국회의원을 청산하자”는 피켓 시위와 서명 운동을 벌인 것은 낙선 운동에 해당할까?

29일 오후 3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4부(허선아 부장판사) 심리로 진행된 ‘아베규탄시민행동 활동가들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첫 공판에서 이 질문에 대해 검찰과 피고인의 변호인은 서로 다른 대답을 내놓으며 법정 공방을 펼쳤다.

이 사건 피고인은 모두 5명으로 아베규탄시민행동을 구성하는 시민단체 중 하나인 겨레하나 소속이다. 이들은 지난해 4월 15일 21대 총선을 앞둔 3월 17일~27일 나경원 전 의원 선거사무실 앞 노상을 비롯해 서울 동작구 이수역 출구, 흑석시장 앞 노상 등에서 여러 차례 친일 청산 캠페인을 벌였다.

당시 활동가들은 해당 장소 주변을 지나는 시민들에게 친일 정치인을 국회에서 청산하자는 취지의 서명 운동을 벌였다. 임시로 설치한 책상에는 ‘친일망언 처벌’ ‘친일파 재산환수’ ‘친일파 훈장 박탈’ ‘친일파 국립묘지 안장’ ‘친일파 없는 국회’ 등이 적힌 현수막이 붙었고 ‘사사건건 아베편’ 등이 적힌 피켓을 이따금 들기도 했다.

검찰은 이 행위가 당시 동작을 예비후보자로 출마한 나경원 전 의원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확산하기 위한 낙선운동에 해당한다는 입장이다. 공직선거법은 선거일 180일 전부터 특정 후보 혹은 정당의 당선 혹은 낙선을 목적으로 하는 선거운동을 금지하고 있다.

검찰은 구체적으로 공소장에 “나경원 예비후보자가 2004년 일본 자위대 행사에 참가한 경력 등으로 친일 논란을 빚은 것을 빌미로 이용하여”, “나 후보에 대해 부정적 여론을 형성 및 확대하고 낙선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문구로 적시했다.

지난해 4월 국회의원 선거 당시 ‘친일 정치인 불매 운동’과 ‘친일청사 4대 입법’ 캠페인을 진행하다 서울 동작구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돼 재판에 출석하는 피고인들이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연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반면 피고인 측은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친일청산을 위해 총선 기간 전에도 진행한 캠페인이었고 특정 정당 혹은 후보자의 이름도 적거나 부른 적이 없어 특정 후보자의 당선에 영향을 주기 위한 ‘선거운동’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건 피고인들을 대리하는 양홍석 변호사는 이와 함께 “선거관리위원회나 경찰의 현장 계도에 따라 가능한 범위에서 캠페인 활동해왔고 이 사건 이전에도 캠페인 활동했기 때문에 고의성이 없고 위법하지 않다”고 검찰 주장을 맞받아쳤다.

같은 행위에 대한 검사와 변호인의 첨예하게 다른 시각은 이후 진행된 증인신문 과정에서도 그대로 반영됐다. 이날 재판 증인으로는 당시 수사기관에 제출한 고발장을 쓴 동작구 선거관리위원회 소속 공무원과 이 사건을 수사한 동작경찰서 경찰관이 나왔다. 모두 검찰 측이 신청한 증인들이다.

검사는 이들이 당시 피고인들의 활동이 위법 소지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에 따라 수사한 점을 확인하는 질문을 던졌고 변호인은 유독 피고인들에 대한 수사가 집중적으로 이뤄진 이유를 부각했다. 증인신문 도중 경찰의 일부 수사 서류가 증거능력이 있는지를 두고 양측은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재판부는 다음 공판에서는 변호인 측의 신청에 따라 이 사건에 관련된 선관위 소속 직원 3명에 대한 증인신문을 진행하기로 했다. 2차 공판기일은 법원 여름 휴정기 이후인 오는 9월 7일로 예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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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9> 노컷뉴스

☞기사원문: 동작구서 벌인 ‘친일청산’ 캠페인…나경원 낙선 운동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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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1/06/3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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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시민체육공원 친일파 모윤숙·박시춘 작품 비석 발견
창원 산호공원 수십년째 친일파 이원수 노래비 놓여있어
전문가 “조례 통과로 법적 근거 있어 전수 조사 시급”

이형탁 기자

경남지역 친일 잔재가 최근 잇따라 발견되면서 기존 친일 기념사업을 포함한 청산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달 두번째 친일 잔재 청산 조례안이 도회의를 통과한 만큼 지자체가 시급히 전수조사에 착수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해시민체육공원에서 친일파 모윤숙 시인과 박시춘 작곡가의 작품 비석이 최근 발견됐다. 이들은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낸 4천여 명의 친일파가 담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돼있는 인물들이다.

◇친일파 모윤숙 시인(1909~1990)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함경남도 원산 출신 모윤숙 시인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일제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는 시를 써냈다. 모 시인은 1941년 <삼천리>에 시 ‘지원병에게’를 발표했다.

“눈은 하늘을 쏘고 그 가슴은 탄환을 물리쳐 / 대동양의 큰 이상 두 팔 안에 꽉 품고 / 달리어 큰 숨 뿜는 정의의 용사 / 그대들은 이 땅의 광명입니다 // 대화혼(大和魂) 억센 앞날 영겁으로 빛내일 / 그대들 이 나라의 앞잡이 길손 / 피와 살 아낌없이 내어바칠 / 반도의 남아 희망의 화관(花冠)입니다”

그녀는 또 가미카제로 출격해 희생한 조선인 소년비행병 출신 하사관인 히로오카 겡야를 찬양하기도 했다. 모 시인은 1943년 12월 <신시대>에 발표한 시 ‘어린 날개-히로오카(廣岡) 소년항공병에게’를 발표했다.

이형탁 기자

“고운 피 고운 뼈에 / 한번 새겨진 나라의 언약 / 아름다운 이김에 빛나리니 / 적의 숨을 끊을 때까지 / 사막이나 열대나 / 솟아솟아 날아가라. // 사나운 국경에도 / 험준한 산협에도 / 네가 날아 가는 곳엔 / 꽃은 웃으리 잎은 춤추리라.”

모 시인은 그밖에도 ‘신년송-금녀의 노래(1945)’ ‘호산나·소남도(1942)’ ‘해군의 얼굴(1943)’ 등 다수의 친일시와 산문을 남겼다. 대부분 일제의 침략 전쟁에 조선인들의 참여를 독려하거나 침략전쟁을 아시아 민족 해방전쟁으로 미화하는 내용이다.

그녀는 이같은 친일 뒤 1945년 8월 해방을 맞이하고 친일파들의 일반적 행보대로 반공주의자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반공 시를 여러 편 써냈고 그녀의 흔적이 김해 이곳에 있다. 시비에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그녀가 쓴 것으로 알려진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새겨져 있다.

◇친일파 박시춘 작곡가(1913~1996)

모윤숙 시비 옆에는 대표적 친일파 작곡가 박시춘의 노래비가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경상남도 밀양 출신 박시춘이 작곡한 군국가요는 13곡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태평양 전쟁 시기 중 1942~1943년 ‘결사대의 아내’ ‘아세아의 합창’ ‘지원병의 집’, ‘조선해협’ ‘혈서지원’ 등이다. 특히 조선해협은 1943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지원병을 선전하기 위해 제작한 영화 ‘조선해협’의 주제가다. 또 ‘혈서지원’은 조선징병제 실시 축하 기념으로 만들어져 기념음반에 수록됐다.

모윤숙 시인처럼 해방 뒤에는 국군 관련 작품 활동을 벌였다. 김해에 있는 박시춘 노래비에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작곡한 ‘전우야 잘 자라’가 새겨져 있다.

그는 ‘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 등으로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다 1996년 숨졌다. 그의 고향 밀양에서는 지난 2019년 그를 기리기 위한 박물관 건립을 두고 지자체와 시민단체 등이 찬반 갈등을 벌이다 결국 건립이 취소됐다.

이형탁 기자

◇친일파 이원수 아동문학가·수필가(1911~1981)

도내에는 수많은 친일파 흔적이 남아있다. 대표적으로는 이원수 아동문학가다. 창원시 산호공원에는 그가 1920년대 동시로 쓴 ‘고향의 봄’ 노래비가 1960년대 세워져 이곳 공원 중심에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이원수 문학가는 양산 출신으로 유년기를 창원에서 보낸 친일인명사전에 공식 등재된 대표적 친일파다. 그는 일제시대 1935년 2월 ‘함안독서회사건’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찰에 체포돼 10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1937년을 기점으로 체제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는 1942년 <반도의 빛>에 ‘낙하산-방공비행대회에서’라는 제목의 동시를 발표했다.

“푸른 하늘 나는 비행기에서 / 뛰어나와 떨어지는 사람을 보고 / ‘앗차’ 하고 놀라면 꽃송이처럼 /활짝 피어 훨-훨, 하얀 낙하산, / 오오, 하늘공중으로 사람이 가네 / 새들아 보아라 / 해도 보아라 / 우리나라 용감한 낙하산 병정, / 푸른 하늘 날아서 살풋 내리는 / 낙하산 병정은 용감도 하다, / 낙하산 병정은 참말 좋구나”

일제가 항공일 행사나 비행기 헌납운동과 같은 행사를 기획하면서 항공열을 확산시키려 했던 배경이 있다. 조선 아동을 포함한 조선인 전체를 황국신민으로 인식시켜 전쟁을 독려할 의도가 있었는데 이원수 아동문학가가 여기에 적극 동참했다는 평가다.

친일인명사전. 왼쪽부터 모윤숙 시인, 박시춘 작곡가, 이원수 아동문학가. 이형탁 기자

◇ 전문가 “기념사업 문제 조례 통과로 근거 마련…전수조사 시급해”

전문가들은 이같은 시비나 노래비 등 친일인물 기념사업은 지자체나 지역 단체가 역사적 검증없이 대중성 있는 인물 위주로 선정하면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김도훈 박사(전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는 ‘친일기념사업과 지역권력’이라는 발표문에서 “지역사회의 친일행위자 기념사업은 친일 행위를 둘러싼 미래지향적 논의보다는 친일 인물 기념을 통해 기득을 유지하려는 세력, 인물 선정에 정당한 기준없이 지역 내 유명인물을 통해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지역관료의 비민주적 행정결정과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했다.

이처럼 친일기념 사업이 지자체의 일방적 행정 등으로 진행되다보니 잔재 청산은 물론 법적 근거가 없어 전수 조사 자체도 어려웠다. 그러다 지난해 12월 수개월 끌던 경남도의 친일 잔재 청산 조례안에 이어 지난달 경남도교육청의 친일 잔재 청산 조례안이 통과됐다.

전문가는 조례 등 법적 근거가 마련됐으므로 지자체가 공식적으로 친일 잔재에 대한 전수조사에 나서고 그 결과를 토대로 기념사업을 철회하거나 단죄비 등을 설치하는 방식 등으로 친일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은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친일 인사 기념 사업은 경남뿐 아니라 전국에서 이뤄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해방 뒤 청산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경남은 민간 차원에서 친일 흔적 조사가 이뤄지기는 했지만 지자체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이뤄진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방 실장은 그러면서 “경남도와 경남교육청이 제안한 친일 잔재 청산에 대한 조례가 둘 다 통과됐는데 경기도나 전남, 광주처럼 하루빨리 지자체에서 공식적인 전수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며 “그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단죄비를 설치하거나 철거하는 방식 등으로 친일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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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30> 노컷뉴스

☞기사원문: 경남 친일 잔재 잇따라 발견…전수 조사는 언제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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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민일보: 김해 친일청산 진정성은?

☞김해뉴스: 김해 현충시설 모윤숙 시비 철거될까…일제잔재청산 조례 시의회 통과

목, 2021/07/01-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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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이념의 대립과 전쟁의 광기 속에서 수 천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해 묻힌 곳, 대전 산내 골령골.
71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가 외면해왔던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마주하려 한다.
학살 사건의 전말을 유족의 증언을 중심으로 추적하고 이념과 대립에서 나아가 평화와 연대의 길을 모색한다.

주요 내용 -2부 [감춰진 이름들]
1) 산내 사건의 개요
– 진화위 보고서에 드러난 1950~1953년 산내 사건개요
2) 제주 4.3에서 여순항쟁까지
–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이 끌려간 이야기, 71년이 지나고 최근 무죄 판결이 난 망자들
3) 산내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 인터뷰
– 부모님, 형제자매를 영문도 모르고 여읜 피해자 가족들
– 하지만 진실이 밝혀지지 않아 고통스러웠던 나날들
4) 사건은 왜? 벌어졌는가?
– 6.25 전쟁 당시 상황
– 전쟁 속에서 비극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이야기
– 진화위 미공개 보고서 속에 드러난 가해주체와 가해세력들
5) 제2차 진실화해위원회 출범과 한국사회의 과제
– 진실과 화해를 위하여.

<2021-06-22> KBS 대전

☞기사원문: 2회 KBS대전 UHD 6.25 특별기획 골령골, 묻혀버린 진실

목, 2021/07/01-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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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문인협회가 단죄비 사유지로 이전…민족문제연구소 반발
“돌려주지 않으면 더 크게 세울 것” vs “시비와 함께 철거한 것”

‘친일 시인’ 김해강 단죄비 [연합뉴스 자료사진]

(전주=연합뉴스) 정경재 기자 = 광복회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오른 시인 김해강의 ‘단죄비’가 하루아침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1일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에 따르면 이날 오전 전주 덕진공원에 세워진 단죄비가 어딘가로 옮겨졌다.

단죄비가 있던 자리에는 비석 대신 무언가로 파헤친 흔적만 남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단죄비는 김해강의 친일 행적을 낱낱이 알리기 위해 지난해 8월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 바로 옆에 세워졌다.

건립 비용은 민족문제연구소 회비에 전주시 지원을 보태 충당했다.

김해강은 ‘전북 도민의 노래’, ‘전주 시민의 노래’를 작사하는 등 오랫동안 지역에서 존경받는 문인으로 평가돼 왔으나, 일본 자살특공대를 칭송한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 등의 시를 비롯한 친일 작품을 쓴 것으로 드러났다.

단죄비에는 ‘천황을 위해 죽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죽음이 어디 있느냐고 부르짖던 김해강이여!’, ‘그대의 글은 생명의 외경(畏敬)을 노래한 시가 아니라 죽음을 부추긴 사악한 선동문이었다!’ 등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친일 시인’ 김해강 단죄비 제막식 [연합뉴스 자료사진]

민족문제연구소 자체 조사 결과, 단죄비를 옮긴 이는 전주시 문인협회인 것으로 밝혀졌다.

시 문인협회는 덕진공원에서 김해강의 시비를 철거하면서 옆에 있던 단죄비까지 도내 한 사유지로 이전했다고 민족문제연구소는 전했다.

김재호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은 “단죄비를 세운 것은 우리인데, 문인협회에서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비석을 가져갔다”면서 “이런 황당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문인협회에 전화했더니 처음부터 단죄비를 이전하기 위해 시비를 철거했다고 한다”며 “(단죄비를) 돌려주지 않으면 그 자리에 두 배로 더 크게 세우겠다”고 덧붙였다.

시 문인협회는 단죄비를 가져간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별다른 문제가 없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유대준 시 문인협회장은 이날 취재진과 통화에서 “이전부터 시비를 철거해 달라고 했는데 그 작업이 미뤄지니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단죄비를 세웠다”며 “시비를 철거했으니 단죄비도 옮기는 게 이치에 맞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이어 “단죄비는 파손하지 않고 사유지에 잘 놔뒀다”며 “시비나 단죄비 모두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에 두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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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1> 연합뉴스

☞기사원문: 하루 아침에 사라진 김해강 ‘친일 단죄비’…’누가 이런 짓을?’

금, 2021/07/02-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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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지역의 죽산 조봉암 생거지 및 활동지역 현장답사’ 해설을 맡은 조봉암 평전의 저자 이원규 작가가 강화뉴스 회의실에서 죽산의 일대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는 3일 죽산 조봉암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강화군을 찾아 죽산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조봉암 생가터 및 활동지역 현장 답사’를 개최했다.

인천시의 지원을 받아 ‘2021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 2차 행사’로 마련된 이 날 답사는 조봉암 평전의 저자인 소설가 이원규 작가의 해설과 안내로 진행됐다.

답사단은 강화뉴스 회의실에 모여 이 작가로부터 죽산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죽산의 모교인 강화초등학교와 근무지였던 강화읍사무소, 젊은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는 강화 중앙교회, 죽산 추모비가 서 있는 갑곶돈대, 선원면 생가터 등을 차례로 돌아봤다.

죽산은 1899년 강화도 선원면 금월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장소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엇갈리지만, 선원사지 정면의 금월리 대문촌 오른편 작은 촌락인 ‘가지마을’이 가장 유력하게 꼽힌다.

이원규 작가는 “죽산의 가문 족보인 ‘창녕조씨 찬성공파보’가 직계 조상들의 묘소 대부분을 금월리로 기록하고 있는 점과 관련자들의 증언들을 종합하면 금월리 대문촌과 가지마을 주변이 확실하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난 2001년 6월 죽산 추모사업회가 강화읍사무소 앞을 생가터로 오인하고 건립한 ‘생가터 기념비’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잘못된 위치에 덩그러니 남아있다.

▲ 죽산의 생가터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선원면 금월리 가지마을 전경.

1911년 강화초등학교를 졸업한 죽산은 농업보습학교를 마친 뒤 1913년 생계를 위해 강화군청 사환 임시고원으로 잠시 근무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대열에 참여했다가 투옥돼 그해 9월 말까지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출옥 이후 다음 해인 1920년 1월 경성 YMCA 중학부에 입학했으나 5월 말 일어난 대동단 사건으로 또다시 평양경찰서에 연행됐다가 석방된 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주오대학(中央大学) 전문부 정경학과 1학년에 다니던 중 박열 등이 조직한 공산주의 계열 단체인 ‘흑도회’에 참가해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이어 1922년 모스크바로 넘어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수업하던 중 폐결핵으로 중퇴하고 다시 귀국해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뒤 이번에는 상하이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벌이다 일경에게 체포돼 신의주형무소에 7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가석방으로 출소한 뒤 인천에 정착한 그는 미곡상업계 인사들이 마련해준 비강업 조합에 몸담았으나 일제 말기인 1945년 1월 예비구금령으로 일본 헌병에게 체포돼 재차 구금됐다.

▲ 조봉암 활동지역 현장답사에 참여한 답사단 일행이 강화읍사무소 앞에 건립된 죽산 생가터 기념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기념비는 죽산의 생가가 선원면 금월리 일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여전히 잘못된 위치에 서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여운형 선생이 손수 필동 헌병대 감방문을 열어줘 세상에 다시 나온 죽산은 건준 인천지부, 인천 민전 등을 조직했으나, 민전 회장을 사임한 뒤 공산주의와 결별하는 전향 성명을 발표했다.

1948년 인천을구에서 제헌으로 당선돼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 무소속 구락부 대표로 활동하다 이승만 대통령의 권유로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아 ‘혁명 없이 세계 최고의 토지균등성을 확보했다’고 평가받은 ‘농지개혁법’을 주도했다.

1952년에는 제2대 국회 후반기 부의장으로 활약하다 8월 5일 실시된 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70만 표를 획득하면서 이승만의 라이벌로 부상했으며 56년 5월 15일 치러진 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216만 표를 얻어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56년 11월 진보당을 창당한 뒤 58년 1월 서울시경의 함정에 걸려들어 간첩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5년 형, 2심에서 사형을 각각 선고받은 뒤 59년 7월 31일 재심이 기각된 지 17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말았다.

▲ 인천감리서를 탈출한 김구 선생이 3개월간 머물던 강화읍 대명헌에서 최성숙 해설가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김구 선생은 해방 이후 이곳을 다시 찾아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의 가족과 뜻있는 인사들의 노력으로 서거 53년만인 2011년 2월 11일 대법원의 무죄 선고를 끌어냈으나, 2012년 국가보훈처가 독립 유공 서훈을 유보하는 결정을 내린 뒤 지금까지도 죽산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원규 선생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걸출한 정치인인 죽산의 가장 큰 업적은 농지개혁을 통해 남한의 공산화를 막아내고 국가부흥의 발판을 마련 한 점”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착취당하는 일 없이 모든 국민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평등과 정의’의 진보 정신은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그는 “진보정당과 보수정당이 양 날개를 이뤄 선의의 경쟁을 하고 남과 북이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뤄내는 것이 죽산이 남긴 숙제”라며 “무엇보다 먼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죽산의 국가 유공 수훈부터 관철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글·사진=정찬흥 논설위원 [email protected]

<2021-07-03> 인천일보

☞기사원문: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 ‘조봉암 생가터 및 활동지역 현장 답사’ 진행

일, 2021/07/0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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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미 점령군 합작해 지배체제 유지” 발언에
윤 “대한민국 정통성 부정…대통령 입장 표명도 없어”
역사학계 “윤 전 총장 ‘극우·독재정권 역사관’ 드러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3일 오후 국민의힘 대외협력위원장인 권영세 의원과의 회동을 위해 중구의 한 식당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친일세력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지배체제를 유지했다”는 이재명 경기지사의 발언을 두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대한민국을 잘못된 이념을 추종하는 국가로 탈바꿈시키려 한다”고 공개 비판했다. 이 지사의 실제 발언을 교묘하게 비틀어 이념논쟁·색깔론에 불을 붙인 것으로 “윤 전 총장이 극우·독재정권의 역사관을 드러냈다”는 비판이 나온다.

윤 전 총장은 4일 페이스북에 “셀프 역사 왜곡,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라는 글을 올려 “광복회장의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이라는 황당무계한 망언을 집권세력의 차기 유력후보 이재명 지사도 이어받았다”며 “이에 대해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어떤 입장 표명도 없다는 것이 더 큰 충격”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이어 “그들은 대한민국이 수치스럽고 더러운 탄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역사의 단편만을 부각해 맥락을 무시하는 세력은 국민들의 성취에 기생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잘못된 이념을 추종하는 국가로 탈바꿈시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 지사의 발언을 김원웅 광복회장 말과 연결하고, 이들을 비판하지 않는 문재인 대통령까지 끌어들여 ‘좌파세력 재집권 음모’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윤 전 총장의 이런 주장은 사실 왜곡일 뿐 아니라, 철 지난 색깔론을 덧칠하는 극우세력의 전형적 행태와 유사하다. 앞서 이 지사는 대선 출마를 선언한 지난 1일 경북 안동의 이육사문학관을 방문해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 정부 수립 단계와는 좀 달라 친일 청산을 못하고 친일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그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았나.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지사는 이어 “이육사 시인 같은 경우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사하지 않았느냐”며 “그 점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충분한 역사적 평가나 예우나 보상을 했는지 의문이고, 그런 면에서 보면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생각으로 새로 출발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라고 덧붙였다. 이 지사 발언은 이육사 시인 등 ‘독립운동가 공적 인정’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지난 3일 <조선일보>는 이 발언을 소개한 뒤 “이 지사 발언은 대한민국이 친일세력이 주도해 건국됐고 미군이 점령군이라는 인식을 보여준 것”이라며 “이 ‘친일·미점령군이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친일세력과 미 점령군이 합작해 지배체제를 유지했다’는 이 지사 발언을 대한민국은 “친일세력과 미 점령군의 합작품”이라는 식으로 규정한 것이다.

윤 전 총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이 지사 발언을 “‘대한민국은 친일세력들과 미 점령군의 합작품으로 탄생했다.’ 온 국민의 귀를 의심하게 하는 주장”이라고 비판하며 <조선일보> 주장을 반복했다. 왜곡된 표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윤 전 총장은 “국정을 장악하고 역사를 왜곡하며 다음 정권까지 노리고 있는 당신들은 지금 무엇을 지향하고 누구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까? 6·25 전쟁 당시 죽고 다친 수많은 국군장병과 국민들은 친일파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싸웠습니까?”라고 되물으며 극단적 주장을 이어갔다. 그는 이 지사와 문재인 정부를 “권위주의 정권을 청산하고 민주화를 달성한 국민들과 뒤섞여 ‘더 열심히 싸운 민주투사’로 둔갑했다”고 비난하며 “이념에 취해 국민의식을 갈라치고 고통을 주는 것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윤 전 총장의 공격에 이 지사는 이날 “해방 뒤 미군이 38선 이남을 점령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이승만 대통령도 썼던 표현”이라며 적극 반박했다. 이 지사는 이날 페이스북에 ‘윤석열 전 총장님의 구태색깔공세 안타깝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38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과 이남에 진주한 미군 모두 점령군이 맞다. 미군의 포고령에도 점령군임이 명시돼 있다”며 ”점령군으로 진주했던 미군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철수했다가 6·25전쟁 당시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지금까지 주둔하고 있다”고 적었다. “같은 미군이라도 시기에 따라 점령군과 주둔군으로서 법적 지위가 다르고 동일할 수 없다는 것은 법학개론만 배워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지사는 이어 “일제에 부역하던 세력이 청산은커녕 새로 출발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주요 요직을 차지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반민특위도 이들에 의해 강제해산되지 않았냐”고 적었다. 친일파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한 이 지사는 “그 일부가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독버섯처럼 남아 사회통합을 방해하고 자주독립국가의 면모를 훼손하는 것이 현실이고, 총장께서 입당하실 국민의힘 역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 지사는 “해방직후 미군과 한국전 후 미군을 동일시한 것은 명백한 오류”라며 “총장님의 저에 대한 첫 정치발언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제 발언을 왜곡조작한 구태색깔공세라는 점이 참으로 안타깝다”며 글을 맺었다.

역사학계도 윤 전 총장의 주장을 ‘역사적 사실까지 부정하는 정쟁’으로 평가했다.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전 한국학중앙연구원장)는 “1945년 9월 미국이 들어와서 진주할 때 공식 용어가 점령군이다. 이 지사 발언이 논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잘못된 발언은 없다”며 “(윤 전 총장 등이) 점령군이라는 용어를 어딜 침략해서 강제 점령한다는 뉘앙스를 붙여 공격하는데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지적”이라고 짚었다. 근현대사를 전공한 한 역사학자도 “맥아더 장군의 포고문 1호에도 점령이란 표현이 네번이나 나온다”며 “(정부 수립 이후에도) 경찰과 군에 일제시대부터 직책 맡았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지사가) 친일이 청산되지 못했다는 얘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분단과 독재체제,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는 사관을 정통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지사의 발언이)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며 “윤 전 총장의 페북 글은 얼마나 현대사를 단정적이고 편파적으로 보는지 알 수 있고 극우 이승만과 전두환의 독재 역사관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배지현 서영지 기자 [email protected]

<2021-07-04> 한겨레

☞기사원문: 윤석열, 이재명 ‘미 점령군·친일파’ 발언에 철 지난 색깔론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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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소리: [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윤석열 씨, 위안부 문제를 ‘그랜드 바겐’ 한다고요?

월, 2021/07/05-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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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윤숙 시인·박시춘 작곡가 김해시민체육공원서 최근 발견
이번 해법에 따라 친일 해결 진정성 여부 판가름 전망
허성곤 김해시장 “신중히 검토해 해결하겠다”

▲ 이형탁 기자

경남 김해시에서 일제 잔재가 최근 잇따라 발견되면서 지자체의 청산 의지가 시험대에 올랐다.

김해시가 일제 잔재 청산과 관련한 여러 사업을 발표한 만큼 이번에 내놓을 해법에 따라 친일 문제 해결에 대한 진정성 여부가 판가름날 전망이다.

5일 김해시 등에 따르면 김해시민체육공원에서 친일파 모윤숙 시인과 박시춘 작곡가의 작품 비석이 최근 발견됐다.

모윤숙 시인과 박시춘 작곡가는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낸 4천여 명의 친일파가 담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이들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돼있다.

이들 작품 비석은 지난 2003년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김해시지회에서 김해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를 건립하면서 함께 세워졌다.

경남 밀양 출신 박시춘 노래비에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작곡한 ‘전우야 잘 자라’가 새겨져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박시춘 작곡가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는 군국가요를 13곡 정도 작곡한 것으로 확인된 명실상부한 친일파다.

▲ 허성곤 김해시장. 허성곤 페이스북 캡처

옆에 세워진 함경남도 원산 출신 모윤석 시비에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쓴 것으로 알려진 반공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새겨져 있다. 그녀는 1940년대 일제 침략 전쟁을 찬양하는 시 ‘지원병에게’, ‘어린 날개-히로오카(廣岡) 소년항공병에게’ 등의 작품을 써내며 친일을 하다 해방 이후 이같은 반공시를 써내며 반공주의자로 변신했다.

문제는 김해시에서 이런 친일 잔재 문제에 대해 적극적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번 작품 비석도 2003년부터 현재까지 18년간 이어져왔는데도 이제껏 별다른 조치는 없었다. 시 자체적으로 일제 잔재에 대한 전수조사도 이뤄진 바 없다.

시는 다만 지난 3월 일본식 지명을 정비하고 공적 장부에 남은 일본식 이름을 없애는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을 벌이고 있다며 공표한 것에 비춰보면 일정 정도 청산 의지는 있어 보인다. 김해시의회에서도 지난달 24일 전수 조사 등을 위해 일제 잔재 청산 조례안을 통과시켰다는 점도 시와 의회가 함께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분석된다.

친일 잔재 문제는 지자체의 의지에 따라 성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거제에서는 지난 2019년 김백일 장군 동상 옆에 시민단체가 단죄비를 세웠는데, 거제시는 단죄비와 동상 모두 철거하지 않으면서 일제 청산 문제에 대한 철학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김백일은 항일독립군 토벌에 참여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있는 친일파인데 교육용으로 활용하기 위해 거제시가 동상과 단죄비를 모두 그대로 두고 있다는 평가다. 꼭 청산으로 친일 잔재를 제거하는 것만이 아니라 옆에 단죄비를 세워 대비함으로써 교육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의미다.

김영진 경남도의원은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거제에서 김백일 단죄비를 동상 옆에 나란히 설치하면서 좋은 교육 효과를 냈다”며 “김해시도 그 비석 옆에 설치하면 비슷한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시는 일단 이 문제와 관련해 신중하게 접근한다는 입장이다. 허성곤 김해시장은 최근 김해시청 기자간담회에서 “청산에 대한 찬반 의견이 있으니 양쪽의 견해를 다 들어보고 신중히 검토해 결정할 것”라고 말했다.

<2021-07-05> 노컷뉴스

☞기사원문: 친일 잔재 잇따라 발견된 김해시…청산 의지 시험대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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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 경남 친일 잔재 잇따라 발견…전수 조사는 언제쯤

☞경남도민일보: 김해 친일청산 진정성은?

☞김해뉴스: 김해 현충시설 모윤숙 시비 철거될까…일제잔재청산 조례 시의회 통과

화, 2021/07/06-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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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입구 [사진=김혜진 기자]
관람객들이 작성한 방명록 [사진=김혜진 기자]

[일요서울ㅣ김혜진 기자] 서울에는 다양하고 독특한 명소, 그리고 장인(匠人)들이 있다. 일요서울은 드넓은 도심 이면에 숨겨진 곳곳의 공간들과 오랜 세월 역사를 간직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에 다녀온 곳은 국내 최초 일제강점기 전문 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역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민주주의를 빼앗으려는 자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기르겠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역사, 인권을 유린당한 역사, 친일의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음을 새깁니다.”

서울 용산구 숙명여자대학교 부근 길목에 세워진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의 역사가 한데 담긴 곳이다. 박물관 방문객들은 방명록에 이 같은 문구를 적어 놨다. 강제동원, 위안부, 독도 문제 등으로 오랫동안 한일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우리의 역사를 정확하게 배워 이성적으로 대응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는 모습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입구에 마련된 반민특위 터 묘석 [사진=김혜진 기자]

박물관 입구에 다다르자 ‘반민특위 터’ 묘석이 보였다. 반민특위는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파들의 민족 반역 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1948년 제헌 국회에 설치됐던 특별 기구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청산의 좌절이라는 민족사의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 1999년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표석을 설치했다. 서울시 중구 국민은행 본점 자리인 옛 반민특위 터에 세워졌지만 건물 신축 공사로 인해 2018년 10월 이곳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 중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친일인명사전 관련 섹션 [사진=김혜진 기자]
식민지역사박물관 내부 [사진=김혜진 기자]

지난 2018년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단체와 독립운동계, 학계가 중심이 돼 건립한 이 박물관에서는 ‘기억과 성찰’을 주제로 식민지의 상흔과 항일 투쟁의 역사 등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이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되새겨 볼 수 있다.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 역사박물관’이라는 호칭답게 상설전시관에는 1876년 조선 침략의 계기가 된 ‘운요호 사건’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70여 년에 걸친 식민지배, 강제동원의 실상과 그에 부역한 친일파들의 민낯, 항일 투쟁의 역사 등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또 분단과 식민잔재,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청산 운동의 과정까지 담겨 있다. 강제병합 당시 순종의 칙유와 데라우치 통감의 유고, 야스쿠니 신사 회신, 3·1독립선언서 초판본, 동학 의병 관련 문서 등 생생한 사료들도 꼼꼼하게 나열돼 있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내 체험 공간 [사진=김혜진 기자]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을 주제로 한 기획전 [사진=김혜진 기자]

기획전시실에는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을 주제로 한 기획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동아일보가 일제강점기 당시 독재정권 하에서 식민지배에 눈 감는 부역 언론의 역할을 해 왔다는 게 골자다. 당시 조선·동아일보에서 보도됐던 신문 지면이 전시돼 있다.

최우현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 주임연구원은 “박물관이 생긴 첫해에 일본에 홍보가 많이 돼 일제 역사에 뜻이 있는 일본인 방문객이 많았다”며 “코로나19로 인해 외국인 방문객이 줄었고 국내 방문객들에게는 박물관이 잘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고 했다.

관람객 장한님 씨는 “사학과 대학원을 다닐 때 박물관이 만들어진다는 걸 알고 꼭 와 보고 싶었다”며 “박물관이 크진 않지만 일제강점기 역사들이 잘 구성돼 있는 듯 하다. 현재 한국어 교육 관련 일을 하고 있는데 전시실에 1920년대 조선어 교육을 했던 책들이 소개돼 있어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김혜진 기자 [email protected]

<2021-07-02> 일요서울

☞기사원문: [서울 명(소)장(인)을 찾아서-31] 일제강점기 역사 서린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

수, 2021/07/07-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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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우 작가는 인도 델리를 여행하다 그곳에서 한국광복군이 영국군과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도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있었다. 그곳의 사람과 터를 찍었다.

멕시코에서 고국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던 김익주 선생의 후손 다빗 킴 씨. ⓒ김동우 제공

대부분 사람들은 ‘국외 독립운동’이란 말에서 만주 벌판을 연상한다.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이나 김원봉의 의열단이 떠오를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한반도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예컨대 인도나 멕시코 같은 곳에 우리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남아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김동우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기자 출신인 그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2017년 사진 작업을 위해 장기 여행을 계획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을 주제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인도 델리를 여행하던 중 우연히 레드포트(Red Fort)에 방문하게 된 그는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파견한 한국광복군이 이곳에서 영국군과 함께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구한말 한반도와 아무 연관도 없다고 여겼던 장소에서 들은, 뜻밖의 이야기였다.

김 작가는 인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흩어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사실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는” 독립운동사가 미국·멕시코·쿠바 등지에 있었다. 아프리카와 남미 외에는 전 세계에 퍼져 있다고 할 정도였다.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현지에 정착하게 된 이주자들은 후손을 남겼다. 김동우 작가는 2017년부터 2년간 세계를 돌며 사람과 터를 찍었다. 5월18일부터 8월18일까지 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열리는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에 전시된 사진들이 그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의 직접적 계기는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이다. 1921년 3월 한인 300여 명이 쿠바로 향했다. 이들이 출발한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멕시코다. 김동우 작가는 그래서 “쿠바 이민을 이야기하려면 멕시코 이민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1905년 4월 제물포에서 영국 상선을 타고 멕시코로 간 1033명이 북중미 이민의 시초 격이다. 이역만리로 향한 이들 전부가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온 기근을 피하고 돈을 벌려는 목적이 강했다. 1905년 〈황성신문〉에는 이런 이민 광고가 실렸다. “묵서가(墨西哥·멕시코)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수토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이민자 대부분은 에네켄(Henequen·용설란의 일종, 일명 애니깽) 농장으로 분산배치돼 노예와 같은 노동조건으로 혹사당했다. 멕시코 이민자 일부가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기 위해 향한 곳이 쿠바이다.

‘경제적 이유로 건너간 이민자’와 ‘국외 독립운동가’가 늘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둘 다에 해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혹독한 농장 생활을 견딘 이들이 차츰 돈을 모아 독립운동에 쓴 것이다. 독립군 훈련을 위해 군사학교를 설립하기도 했고, 번 돈 대부분을 독립자금으로 부치는 이도 있었다.

2017년부터 2년간 세계를 돌며 해외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 촬영한 김동우 작가. ⓒ시사IN 조남진

아흔 넘은 안창호 선생의 아들 랄프 안

이민자들의 후손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김동우 작가는 과거에 나온 언론 인터뷰나 학술자료를 바탕으로 현지 한인회 선교사 등과 접촉했다. 오래된 자료가 대부분이라 허탕 치기 일쑤였다. 국가보훈처에도 문의했으나 ‘개인정보’를 건네는 데에 난색을 표했다. 소재지를 찾아도 문제였다. 한국을 기억하는 이들은 고령이거나 세상을 떠났고, 살아 있는 후손들은 한국과 유대감이 옅었다. “이민 3세대 이후로는 외양이 변한다. 한식을 먹고 한인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보니 점점 현지인과 동화된다. ‘우리 조상이 코리아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먼 곳에서 왔다고 하니 취재에 반갑게 응하기는 하는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약하다.” 후손들을 촬영한 뒤 김 작가는 인물만 반투명 처리를 했다. 시간이 갈수록 이들의 존재가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의미를 담았다.

김 작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 랄프 안(안필영) 씨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안창호의 ‘아들’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부터 놀라웠다. 아흔을 넘긴 랄프 안 씨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김 작가를 만난 랄프 안 씨는 코리아타운에서 갈비탕을 사주었다고 한다. ‘아버지(안창호)가 독립운동에 앞장서 가족들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는 게 김동우 작가가 전한 랄프 안 씨의 말이다. 의병장 민긍호의 직계자손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만났다. 이들의 존재가 알려진 건 한국과 옛 소련이 수교를 맺은 이후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먼 친척들이 자손으로 인정받아 훈장을 받고, 연금을 수령했다. 직계자손들은 훈장만이라도 받기 위해 한국 정부에 훈장 재교부를 신청했지만, 어렵게 재교부된 훈장은 전달식도 없이 비닐봉지에 담긴 채 전달됐다. 김동우 작가는 “해외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집집마다 울먹이며 이런 사정을 호소했다.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람 사진은 눈길을 끄는 반면, 이번 전시의 풍경 사진은 상대적으로 맥이 빠진다. 거리나 건물을 찍은 사진은 주의 깊게 들여다보더라도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앙상하게 골격만 남은 구조물, 나무와 풀뿐인 벌판도 마찬가지다. 관람객이 느끼는 헛헛함은 김동우 작가 스스로 느낀 것이며, 작업 과정에서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조상들이 토론하고 서성였던 자리, 건물이 있었던 곳에 막상 가보면 멸실된 게 많았다. 나무로 된 집이 다 헐려서 옥수수밭만 남았다면 옥수수밭을 찍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군사학교가 있던 곳에는 시장이 생겼고, 독립운동가들이 사형당한 곳은 소문에 의지해 추정만 할 따름이다. 그래서 김 작가는 “수많은 현장을 찾아다니며 가장 많이 마주한 풍경은 공(空)이었다”라고 했다. 시간의 흐름 때문이지만 적극적으로 보존하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새벽. 100년 전 한인 이민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보았을 광경이다. ⓒ김동우 제공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100년 전과 다르지 않은 것도 있었다. 썩고 헐리는 인공물과 달리 자연 풍광은 그대로였다. 김 작가는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새벽 5시에 맞춰 셔터를 눌렀다. 한인 이민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보았을 광경이다. 쿠바 이민자들이 도착한 마나티 항구의 저녁노을, 연해주 한인들이 강제로 이주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의 초원도 찍었다. 조상들이 본 광경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

김동우 작가는 당분간 국외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진 작업에 집중할 예정이다. ‘쿠바 이주 100주년’이라는 전시 주제에 맞지 않아 내놓지 못한 사진도 많다고 했다. 특히 중국 지역 독립운동이 그렇다. 김 작가는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동우 작가는 이 일이 “우연처럼 시작된 운명” 같다고 했다. 그는 씁쓸한 독립운동의 후일담을, 거의 냉정할 정도로 정직하게 기록하는 작업을 당분간 이어갈 예정이다.

이상원 기자

<2021-06-18> 시사인 호수 717

☞기사원문: 미국·멕시코·쿠바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을 찍다

수, 2021/07/07-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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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민단체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과 미군이 격전을 벌인 오키나와(沖繩)현 본섬 남부 지역에서 새 미군 기지 매립지에 쓸 토사를 채취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평화를 기원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전몰자 유족 모임’은 오늘(7일) 일본 방위성과 후생노동성을 찾아 “헤노코(邊野古) 연안 매립 공사에 쓸 토사를 희생자 유해가 묻힌 곳에서 채취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의 서명 용지를 전달했습니다.

서명에는 일본 전역에서 1만 1천여 명이 동참했습니다.

이들은 “희생자의 피가 스며든 토사를 미군 기지를 만드는 매립에 사용하는 것은 유골이라도 돌아와 달라는 유족의 염원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전쟁 막바지이던 1945년 일본군이 본토를 지키기 위해 오키나와 본섬 남부 등에서 미군을 상대로 벌인 싸움입니다.

당시 일본군이 방패막이로 내세운 오키나와 주민과 미군 병사 등을 포함해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오키나와대 지역연구소 특별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에는 조선인도 3천461명이 군인이나 군속으로 동원돼 701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는 노무 동원된 이들이나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이들을 제외한 숫자입니다.

기록으로 파악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실제 동원되거나 사망한 조선인은 더 많을 수 있고, 이들 대부분은 희생된 주변 지역에 묻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그동안 희생자 유해 수습이 미흡해 이토만(絲滿)을 비롯한 격전지에서 발굴이 계속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본섬 남부의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을 이전할 곳인 중부 헤노코 연안의 매립에 쓸 토사 일부를 당시 격전지였던 이토만 등에서 채취하려 하고 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유골이 섞인 토사가 매립용으로 투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입니다.

지난 3월부터 오키나와 현청 앞에 단식 투쟁 등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 시민단체 ‘가마후야’(ガマフヤ-)의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67) 대표는 최근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그간 수습된 희생자 7백여 명의 유골을 가족에게 돌려주기 위한 후생노동성 주도의 DNA 감정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한국의 유족들도 DNA 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달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가마후야’는 한국 단체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02-2139-0462)와 민족문제연구소(☎ 02-969-0226)를 통해 오키나와 유골 발굴 및 DNA 감정에 참여할 한국인 유족의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황현택 기자 [email protected]

<2021-07-07> KBS NEWS

☞기사원문: “조선인 등 묻힌 토사 채취 반대”…日시민단체, 1만여 명 서명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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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1/07/08-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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