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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생존자의 절규 “한국, 베트남전 피해자 고통은 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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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생존자의 절규 “한국, 베트남전 피해자 고통은 외면”

admin | 월, 2021/08/09- 01:02

김남주 민변 베트남전TF 팀장 인터뷰① “문재인 정부, 사안 해결의지가 없어 보인다”

“저는 8살 한국군에 의해 (가족이) 학살당했고, 그 학살로 많은 가족을 잃고 혼자 오랜시간 고통속에 살아왔다. 오늘 이자리에 있기까지는 광장히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내며 오게 됐다. 한국에 이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위해 한국 방문을 세차례나 했지만, 한국 정부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 사실에 대해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한국 국회가 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 듣고 너무 반가웠다.”

▲ 한국사회에 진실규명을 다시 한번 호소하는 응우옌 티 탄씨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인 응우옌 티 탄씨는 간담회에 참가해 “한국정부는 우리가 겪은 고통에 대해 그동안 철저히 외면해왔다”고 비판하며 “특별법이 속히 제정되어 한국정부가 피해사실만이라도 제대로 조사하길 간절히 부탁드린다”라고 한국사회에 진실규명을 호소했다. ⓒ 이재정 TV 유튜브 갈무리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인 응우옌 티 탄(Nguyễn Thị Thanh, 61세)씨는 한국 국회의 특별법 제정 노력에 대해 반가운 자신의 심경을 전했다. 그는 지난 두달간에 걸쳐(6.30~7.22) 세차례 열렸던 ‘베트남 전쟁 시기 대한민국 군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사건 조사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연속간담회’에서 베트남 현지에서 화상으로 참가해 아픈 과거와 현재 심정을 토로했다.

이어 응우옌 티 탄씨는 한국정부가 민간인학살에 대해 진상을 규명하고 사과하기를 바라냐는 질문에는 “(1968년) 퐁니퐁넛 학살, 우리 마을에서 죽은 사람들은 대다수가 저와 같은 어린 아이였거나 여성들이었다. 수많은 목숨들이 굉장히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것이 이 퐁니퐁넛 학살이다. 저 뿐만이 아니라 이 학살의 생존자들, 가족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이 학살을 기억하고 있고, 이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한번도 우리를 찾아온 적 없고, 이 사건에 대해 단 한번도 관심을 갖거나 이 사건의 실제에 대해 저희에게 물어보거나 조사한 적이 여지껏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정부는 우리가 겪은 고통에 대해 그동안 철저히 외면해왔다”면서 “저를 포함해 103명의 베트남 피해자들이 한국정부에 청원서를 전달했다. 그러면서 저희는 이제 한국정부가 이 사실을 알게되고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굉장히 기뻐했다. 저는 이 청원서가 오히려 저희를 더 슬프게 할 것이라거나, 이 청원서를 받아든 한국정부의 지금 태도를 상상해 본 적이 없다. 특별법이 속히 제정돼 피해사실만이라도 제대로 조사하길 바란다. 역사적 진실이 밝혀져야 이런 역사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므로 제발 간절한 마음을 다해서 부탁드린다”고 말하며 한국사회에 진실규명을 호소했다.

한-베 수교 30주년 앞뒀지만… 해결 못한 숙제

내년 한국과 베트남은 수교 30주년을 맞는다. 1955년부터 20년간 이어졌던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은 약 35만명의 군인을 파병했다. 1964년에서 1973년까지 8년 6개월간 한국군 피해는 사망 5099명, 부상 1만 962명으로 추정된다. 반면 구수정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민간인 학살 피해자는 약 9000명으로 추정된다(관련 기사: “살아남은 내가 진실 말해야”… 그분이 돌아가셨다).

▲ 베트남전 관련 빈안학살(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최대 민간인학살로 알려짐) 생존자 응우옌떤런씨는 지난해 11월 숨졌다. 그는 생전 빈안학살 당시의 비극적 상황을 20년간 증언해왔다. 지난 2015년에는 베트남 피해자 최초로 한국을 방문하여 국회에서 한국 정부에 진실 규명과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사진 이재갑 작가) ⓒ 한베평화재단, 이재갑

1999년 구수정 당시 베트남 특파원이 한겨레21을 통해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보도한 이래 학살피해 마을의 의료지원을 비롯해, 작가단체및 다양한 민간부문의 교류가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의 일환으로 이어졌다. 한겨레사는 46주간 캠페인을 통해 앞지면을 할애하며 이 사건들을 대중에게 널리 알렸고, 긴 펀딩캠페인을 통해 10만달러를 모금해 2003년 베트남 푸옌성에 한베평화공원을 설립하는 결실을 맺기도 했지만, 참전군인들의 한겨레신문사 난입으로 한때 윤전기가 멈추는 등 이 문제로 사회적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도 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활동과 지원은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을 계승하고 베트남전쟁에 대한 성찰을 통해 평화로 나아가고자 2016년 설립된 한베평화재단을 주축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내에는 몇 종의 교과서에서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한 언급이 있고, 제주 강정마을에는 피해자를 추모하는 ‘베트남 피에타’ 조각 (김서경 김운성 작가 제작)도 세워졌다.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의 1기에 해당하는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대책위원회가 결성되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운동이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고, 2018년에는 시민평화법정이 열려 대한민국에 진상조사, 손해배상, 공식인정, 민간인 학살 관련 사실 전시의 책임 모두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지만 현재까지 정확한 역사적 피해사실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조사된 바가 없다.

▲ 베트남 평화의료연대 (평연)의 베트남 현지 진료 모습 치과 한의과 의료인및 일반 후원회원 320여명으로 구성된 베트남 평화의료연대(평연)은 1999년 이래 지속적으로 현지에서 구강보건교육사업및 수술등 의료지원 활동을 해왔다. ⓒ 베트남평화의료연대 페북

이에 민변을 비롯한 한국 시민사회가 사실관계를 밝히기 위한 ‘베트남 전쟁 시기 대한민국 군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사건 조사에 관한 특별법’ (이하 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력중이다. 이외에도 2019년 4월 민간인학살 피해자 103명은 청와대 청원을 통해 진상조사및 사실인정, 공식 사과 및 공식 선언, 피해회복을 위한 조치를 요구했고, 응우엔 티 탄씨는 현재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청구도 진행중이다.

필자는 연속간담회에서 사회를 맡았고 민변에서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TF 팀장인 김남주 변호사와 특별법 제정및 그간의 진상규명 노력에 대한 여러 쟁점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 이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게된 취지와 배경은 무엇인가.

“민간인 학살 피해자 응우엔 티 탄씨를 대리해 개별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 소송을 진행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책임을 인정하라고 가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을 해야되는 제도다. 사실 가해자가 반성한다면 먼저 스스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다가서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베트남전쟁 당시에 민간인에 대해 여러가지 법적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했을 것이라고는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 사실에 대한 공적확인이 필요하다. 그것을 법률을 만들어서 제도로서 추진하고 한 개의 사건이 아닌 여러가지 사건들을 총체적으로 규명하자는 게 이번 법 제정의 취지다. 8월 25일 입법법안공청회를 하고 8월말 또는 9월초에 법안 발의를 할 예정이다.”

– 특별법의 주요 내용은 대한민국에 진상조사, 공식인정, 손해배상, 민간인 학살 관련 사실 전시의 책임을 인정한 시민평화법정의 판결 내용과 유사한가?

“진상규명에 초점을 맞춰놨다. 진상규명을 신청하고,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진상규명위원회가 대한민국에 있는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다양한 곳에 정보를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관련자를 출석시켜서 진술을 들을 수 있도록 하고, 조사절차 규정및 조사결과에 따라 진상규명 결정과 불능 결정등 공적인 결정들을 위원회가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조사가 마무리된 후 백서형태로 보고서를 만들어서 국회와 대통령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그 보고서에는 시민평화법정에서 주문으로 담았던 피해보상, 사과, 재발방지를 위한 장치, 민간인 학살 관련 사실 전시등 이런 내용들을 담아서 권고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법의 목적은 사실규명에 있고, 그 이후에 피해보상등은 법적 구속력을 갖지않고 권고만 할 수 있어 이후의 과제로 남겨두며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반대가 심한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진상규명부터 단계적으로 가려고 한다.”

▲ 베트남전 민간인학살TF 팀장 김남주 변호사 민변에서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TF 팀장을 맡고 있는 김남주 변호사(가운데)는 연속간담회중에 “베트남 피해 생존자들에게 더 이상 희망고문을 그만 했으면 한다”며 제대로된 진상규명과 고령의 피해자들에 대한 의료지원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 이재정 TV 유튜브 갈무리

– 베트남은 진상규명과 사과를 원하지 않는데 왜 한국인들이 나서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오해가 많은 것 같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관계를 잘 모르는 잘못된 인식이다. 베트남의 피해자들은 이전에도 진상규명을 명확히 원하고 있는데 초기에 우리가 그분들과 소통하는 네트워크가 없었기 때문에 명확히 전달이 안되었을 뿐이다. 응우옌 티 탄씨 등 생존자들은 2015년부터 한국에 와서 국회에서 명확히 요구했다. 심지어 작년 103명의 피해자들이 청와대 청원을 통해 진상규명하고 사과하라는 명시적 요구를 했다. 베트남 정부가 명시적으로 요구를 하지 않을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초기에 베트남 방문을 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사과를 하려고 했었는데, 사과를 하지 않고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아픈 역사가 있다’라는 유감표명으로 발언했다. 언론에는 대통령이 사과를 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지만, 베트남정부에서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시적 사과를 하지 않고 넘어갔다는 보도는 있었다. 위안부 문제처럼 국가가 피해자를 대신할 순 없다. 국가보다는 피해자를 더 중심적으로 봐야하고, 피해자는 명시적으로 원하고 있다. 더 이상 논란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예전에 일제시대 일본은 소록도에 있는 한센인들에 대해서 강제낙태 등 인권침해 행위를 했었다. 그때 이 문제가 우리사회에는 잘 전해지지 않았지만, 일본시민사회에서 먼저 소록도를 찾아가 이분들을 면담하고 이분들 피해를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했었다. 피해자가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도 가해국가의 시민단체가 나서는 게 유례가 없고 이상한 일이 아니다. 민간차원에서 일본도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듯 이것을 배워서 우리도 베트남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 민주주의와 인권 등의 주제를 다루는 싱크탱크 ‘프리덤 하우스’에 의하면, 베트남은 수십년간의 베트남공산당 (CPV) 일당체제로 표현과 종교의 자유및 인권활동이 완전히 보장된 성숙한 민주주의사회가 아닌 것으로 알고있다. 피해마을 유족이 문제해결에 목소리 내는 것에 대해 베트남 국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궁금하다.

“베트남 정부의 입장이 명시적으로 외부에 드러난 적이 없기에 입장표명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베트남 정부는 사실상 이 문제를 막지 않고 있다. 베트남은 모두 관영언론인데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다던가 응우옌 티 탄씨가 한국을 방문해서 어떤 일을 했다던가 이런 보도를 막지 않고 있다. 이 분이 소송하는 것도 막으려면 막을 수 있지만 그러지 않고 있다. 그것은 사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좋겠다, 또는 해결되는 것을 굳이 나서서 막진 않겠다는 그런 입장이 아닌가 추정해본다.”

– 한국 정부가 2019년 103명의 피해자 청원을 받고서도 ‘국방부 공식기록에 확인되지 않는다’, ‘베트남의 협조가 없어서 조사할 수 없다’는 무성의한 답변을 했다고 들었다. 주월미군 감찰보고서, 한국 베트남 퇴역군인 증언, 피해자 증언 등 증거가 많은데도 베트남 청원인들에게 한번도 연락해보지 않고 자료가 없다는 결론을 내려서 피해자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겼다. 정권교체 후 피해자들은 많은 개선과 변화를 예상했을텐데 현 정부는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저는 현 정부가 해결의지가 없다고 본다. 어느 나라가 학살기록을 하겠나. 당연히 국방부의 공식 교전기록인 ‘파월한국군전사’ ‘전투상보’엔 기록이 없다. 사실 해결하려고 하면 우선 자료만 볼 게 아니고 참전한 분들의 말씀도 들어봐야한다. 한겨레 21에서 해당 중대 소대장들이 ‘우리 중대가 퐁니퐁넛마을에 들어갔고, 우리 소대는 아니지만, 우리 뒤에 따라오던 소대에서 총소리가 났고, 학살했다고 하더라’라며 다 증언하셨다. 아직 생존한 분들이 계시는데 이분들에 대한 조사도 하나도 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 당시에 중앙정보부에서 그 사건이 외교문제로 비화되니까 조사를 했다. 국가정보원에 있는 기록도 보지 않았다고 한다. 베트남측 협조를 구하기 어렵다고 베트남 탓만 하는데 한국이나 미국 자료도 있고, 아직 생존자도 있다. 의지만 있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충실한 조사를 하지 않고서 확인되지 않는다고 하는 건 의지가 너무 없는 거다.

대통령이 의지가 있다고 저희는 전해들었는데 그게 관철이 안되는 건지, 즉 대통령의 뜻을 아래 기관들이 거스르는 건지, 대통령의 뜻이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소극적인 태도인건지 잘 모르겠다. 많이 아쉬운 점이다. 이미 50년이 넘은 일이다. 사실관계는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그 바탕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입장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진실은 가둘 수 없는 것 아닌가.”

▲ 한국시민사회의 국방부앞 기자회견 모습 2019년 4월 4일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 103명은 진상조사,사실인정, 공식 사과등을 요구하며 청와대에 직접 청원하였으나 2019년 9월 국방부는 보유하고 있는 한국군 전투 사료에 민간인 학살 기록이 없고 베트남당국의 협조가 없어서 조사할 수 없다는 답변을 했다. ⓒ 한베평화재단

(2편 “베트남전 생존자들에게 희망고문 그만했으면”로 이어집니다)
김남주 민변 베트남전TF 팀장 인터뷰② “피해자도 참전군인도 고령, 어떻게 정리할지 고민해야”

▲ 이길보라 감독의 다큐 <기억의 전쟁>중 2018년 베트남 시민평화법정 모습 민변에서 이 시민법정의 틀을 만들었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베트남전쟁의 의미를 따져보고 법률적 다툼을 진행했다. 피해 생존자가 원고로 참여했고 참전군인의 증언도 있었다. 재판부로 위촉된 김영란 전 대법관, 이석태 변호사 (현 헌법재판관), 양현아 서울대법학전문대 교수 3인은 대한민국의 책임 내용 (공식인정, 진상조사, 손해배상)등을 인정했다. ⓒ 배급사 시네마달

– 퐁니퐁넛마을 민간인학살 피해자인 응우엔 티 탄씨가 현재 국가배상소송을 하고 있다. 소장이 제기된 지 1년 2개월 경과되었고 쌍방에서 쟁점 정리중이라고 들었다. 내년쯤 재판이 끝나고 1심선고가 예상되는데 승소할 가능성은 어떤가.

“내년에 선고될 것이라는 것은 추정이고, 재판 진행경과에 따라 다르다. 국내 군사재판에서는 민간인 살해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례들이 꽤 있다. 전시 강간죄로 판결받은 판결문도 남아있다. ‘민간인을 살해한 적이 없다’는 건 맞지 않고, 이미 법원에서 공적확인을 받은 사례가 있다. 그 이외에도 많은 일이 묻혀있다. 소송관련해서 증거는 꽤 많다. 당시 미군과 마을출신이 포함된 남베트남민병대가 약 400미터 거리에서 같이 망루에서 지켜봤다. 이 사건 직후에 이들이 마을에 들어가 생존자를 구조, 시신을 수습하고 사진도 찍었다. 미군 제3해군상륙군 사령부에서 조사를 시작해서 미군, 남베트남민병대, 생존자들의 생생한 진술을 받았다.

그게 미국 문서보관서에 있었고 저희가 확보해서 법원에 제출했다. 이외에도 그 마을에서 작전했던 해병2여단 1중대 병사와 소대장들 증언을 모두 봤을때 한국군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다. 이밖에 다양한 법적 쟁점도 있다. 국가배상청구를 할때 외국인이 청구할 경우에는 한국인도 베트남정부를 상대로 소송할 수 있는 ‘상호보증’ 제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존재하냐 여부, 소멸시효가 지나지 않았느냐는 쟁점도 있다. 사안의 입증 뿐만이 아니라 이런 법리적 쟁점을 넘어서야 하는 사건이라서 결과는 예상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법원이 시효를 내세워 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기에는 인도주의에 반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국정원에게 퐁니퐁넛 사건의 조사기록을 요청하자 정보공개 소송절차통해 답을 받아가라해서 4년 소송으로 15글자만 받았다. 국정원의 사실관계 조사협조를 위해 관할인 국회정보위에 노력해달라고 간담회에서 발언하셨다. 국정원 개혁도 베트남전쟁 진상규명에 필수요건일까.

“저희가 퐁니퐁넛 사건에서 ‘국정원의 사실조회를 통해 자료를 제공하라고 명령해주십시오’라고 법원에 신청하자 법원이 저희 신청을 받아들여서 국정원에게 사실조회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국정원은 사실조회에 응하지 않고 정보공개절차를 통해 받아가라고 답을 했다. 15자를 소송을 통해 받아낸 것처럼, 이는 기나긴 소송을 통해 뺏어가라고 하는 비겁한 결정이고, 가해자가 피해자를 조롱하는 꼴밖에 안 된다. 인권 국가를 지향한다는 대한민국이 할 행동은 아닌 것이다. 특별법이 제정되면 과거사진상규명법처럼 국정원에 자료를 요청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특별법이 제정되면 그를 통해서 국정원으로부터 자료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 한겨레가 46주간에 걸쳐 펀딩 캠페인도 하고, 앞지면을 할애해 대중적으로 사안을 널리 알려 마치 NGO 역할을 했다. 반면 참전군인들의 한겨레 신문사 습격사건은 한국사회내에서 베트남전을 ‘반공과 발전’의 가치로 신봉하는 냉전의 시각과 인권및 생명권의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이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다. 쌍방간 기억방식에 간극이 큰데 이런 시각차이를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이제는 서로 대화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전에는 한겨레 신문사에서의 충돌처럼 서로 힘겨루기, ‘듣든 말든 나는 내 의견을 큰소리로 외치겠다’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서로 상대방의 입장도 들어보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참전군인들도 어떤 점에서 불편한지 자세하게 알아보는 계기가 필요할 것 같다. ‘나는 민간인을 살해하거나 학대한 사실이 없는데 왜 참전군인 전체를 매도하느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 같고, 베트남전이 게릴라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내가 민간인을 살해하긴 했지만 민간인과 게릴라가 구분되지 않는 특수한 상황이어서 내 행위를 비난할 수 없다’라고 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

또 ‘민간인을 살해한 것은 잘못됐지만 상관 명령에 따라서 한 행위라서 나도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하시는 분 등 여러 층위가 있을 것 같다. 또 ‘차제에 진상을 규명해서 문제되는 부대와 시기만 확인을 해달라’며 반대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고, 대화를 통해 특정행위가 국제인도법규범을 위반한 것인지, 자료부족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인건지 등 고민을 해봐야 되는 문제같다. 이에 더해 참전군인들이 연세가 무척 많으신데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사회가 같이 고민해보는게 좋지 않을까 싶다.”

– 2001년 5월 하미 위령비 비문 사건에 대해서는 이번에 간담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 1968년 청룡부대에 의해 주민 135명이 희생된 꽝남성의 하미학살 희생자를 추모하기위해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2만5천 달러를 지원해 2001년 위령비를 준공했다. 이는 양국간의 과거청산을 위한 민간단체 최초의 지원사업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한국 대사관 이용준 참사관 (<잊혀진 상흔을 찾아서>의 저자)및 참전군인단체의 개입으로 준공식전 비문을 덮은것은 독일에서 일본정부의 외압으로 있었던 베를린 소녀상 철거압박및 레겐스부르크 소녀상 비문 철거문제와 너무 닮았다. 이 비문을 다시 새기는 것도 진상규명과 아울러 필수 과제라고 본다.

▲ 한국정부의 외압으로인해 대리석으로 가려진 하미위령비 비문 권현우 (한베평화재단 팀장)은 하미학살 피해자 유족들은 한베평화재단에게 한국정부의 압박으로인해 대리석으로 가려진 하미위령비 비문 내용의 액자를 지속적으로 전달받고 있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해결을 촉구했다. ⓒ 이재정 TV 유튜브 갈무리

“저는 위령비 건립에 대해 전우회에서 재정지원을 했기 때문에 의견을 낼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사실관계나 이분들이 느꼈던 공포나 분노를 표현한 부분에 대해서 의견을 내거나 수정요청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더더욱 한국 대사관측에서 알고서 이 문제를 전우회측에 알리고 그 비문을 덮게끔 현장에서 관여했던 점은 매우 문제가 있다고 본다.

다시 비문을 열어야하는데 한국정부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하미마을 유족회나 지역인민위원회는 한국정부의 승인이 필요하다고해서 비문을 덮고 있는 상태이기때문에 한국정부가 막고 있는 것인지, 다시 열어도 문제가 없는 것인지 한국정부의 의사확인이 필요하다. 현재 전우회가 없어져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기때문에 대사관측과 소통해보는 게 적절하지 않나 싶다.”

– 간담회중에 “베트남 피해 생존자들에게 더 이상 희망고문을 그만 했으면 한다. 생존자가 ‘더 이상 오지말라, 아니면 약이라도 달라’고 아주 간절한 말씀 하시는데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셨다. 지원측면에서 어떤 실질적인 조치가 필요할까.

“대통령이 진정성있는 사과를 하겠다고 알려졌는데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아서, 베트남정부가 원하지 않아서 안 했다고 한다면 그 절절한 마음을 실질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 인도적 지원이다. 고령에다가 총 칼 등 많은 상처가 있으니까 치료가 제일 급하다. 고통 완화등 치료를 꾸준히 해야하는데 노무현정부 당시 종합병원이 지어진 이후에 지원이 없었다. 이동식병원 시스템으로 학살마을을 방문해 치료지원을 하면 좋겠다. 고령 피해자들에 대한 의료지원이 제일 시급한 문제다.”

▲ 베트남평화의료연대 한의사들의 베트남 현지 학교 방문 모습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소속 한의사들이 직접 베트남 현지의 학교를 방문해 성장교육을 진행했고 500여명의 베트남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 ⓒ 베트남평화의료연대 페북

– 19차례 의료지원사업을 해온 베트남평화의료연대를 비롯해 작가및 예술단체들이 민간에서 그간 꾸준히 교류가 있었다는 그 자체로 상당히 고무적인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본다. 무려 20년을 이어온 운동이 이렇듯 꺼지지 않는 불씨로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일까.

“이 운동을 해온 세대가 민주화운동과 그 이후의 세대들이라서 인권의 가치에 감수성이 높은 세대라는 생각이 든다. 80년 광주학살의 기억도 있어서 그분들에게 손을 내밀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고통을 우리도 겪었기에 동류의식이 있어서 동화가 잘 되는 것 같다.

아울러 멀리까지가서 많은 비용을 들이고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활동했다는 것은 그만큼 탄탄한 조직력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특히 베트남평화의료연대는 건치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조직이 주도하신 것 같은데 사회참여를 하고 싶어하는 치과의사들의 열망과 의료전문성을 잘 접목하고 조직화해 풀어낸 것 같다. 오랫동안 지속된 것은 정말 대단하다.”

– 관련 특별법제정을 위해 시민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은.

“특별법이 특별한 법은 아니고, 과거 사실을 확인하자는 것이다. 그간 수많은 의혹과 사회적 고발이 있었고 너무 많은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것을 다 덮고 가기에는 우리 공동체의 가치지향, 또는 품격과 맞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가 아시아에서 인권을 선도하는 국가로서 이 문제를 해결할 때가 됐다. 해결의 방법으로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진실을 밝히자는 것이다. 그 진실속에서 평가가 나올 것이고 한걸음씩 내딛으면 된다. ‘당장 사과하고 당장 배상하자’라기보다는 차근차근 사실확인하고 그 단계에서의 재발방지, 여러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류는 과거의 잘못을 성찰하면서 한걸음씩 전진해왔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도 그렇게 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평화의 소중함을 재인식하게 되고, 전쟁에도 인권의 가치와 인권규범이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킬 수 있으리라 본다. 험악해지는 미중패권 갈등 속에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쟁은 가까운 미래의 문제가 될 수 있다.

베트남학살 진상규명은 과거의 문제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문제에 닿아 있다. 한국 시민들도 진실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같이 동참해주셨으면 좋겠다.”

▲ 한국시민사회로부터 자전거를 전달받는 푸옌성 베한우호친선협회 베트남나비평화기행 푸옌성 자전거 전달식 (2020년 11월 10일) 한베평화재단, 정의기억연대, 세브란스노사공익기금은 공동으로 푸옌성 베한우호친선협회를 통해 3개 학교 150명의 학생들에게 150대의 자전거를 전달했다. ⓒ 정의연 공식 블로그

관련 연속간담회 링크는 다음과 같다.

-1차 연속 간담회: <퐁니퐁넛 마을 민간인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 초청 간담회>
-2차 연속 간담회: <진실을 밝히는 사람들>
-3차 연속 간담회: <베트남전쟁 한국군 피해마을 지원 현황과 과제>

한편 간담회는 국회의원 우원식, 우상호, 기동민, 이재정, 이규민, 이소영, 강민정, 최강욱, 윤미향을 비롯해, 한베평화재단과 더불어 경계를넘어, 다산인권센터, 대안문화연대, 마감마녀, 마을과아이들, 민족문제연구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사람과공감, 성미산학교, 소박한자유인, 수요평화모임, 식민지역사박물관, 아시아평화인권연대, 연세대학교동아시아수용소연구모임,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인권과평화를위한국제민주연대, 인권교육센터들, 전쟁없는세상, 제주43범국민위원회, 천주교인권위원회, 피스모모, 피스모모평화페미니즘연구소, 화성외국인보소호면회활동마중, 향린교회가 공동주최로 참여하고 있으며, 재단법인 동천이 후원했다.

<2021-08-0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생존자의 절규 “한국, 베트남전 피해자 고통은 외면”

☞기사원문: “한국정부, 베트남전 생존자들 희망고문 그만했으면”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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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유성호(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2020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강(9.5~20)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화, 2020/09/15-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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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여전히 찬밥 ②] 친일의 그림자 어른거리는 국군의 날, 이대로 괜찮은가

오늘(2020년 9월 17일)은 한국광복군 창군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국방부는 2018년 업무보고에 국군의 기원이 광복군임을 명시했다. 그러나 2020년 지금도 대한민국 국군의 날은 6.25전쟁 중 38선을 넘은 10월 1일에 기념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광복군 창군 80주년을 맞아 <오마이뉴스>는 이 문제를 살펴봤다. [편집자말]

 

▲ 1942년 한국광복군 환송기념사진. 첫번째 줄 김구를 중심으로 이시영, 차리석, 박찬익, 조완구 지사가 자리해 있다. 맨 뒷줄에 조성환, 조소앙, 지청천, 이범석, 양우조 지사가 서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

“국군의 날인 10월 1일은 육군 3사단이 1950년 한국전쟁 중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진격한 첫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그날이 대한민국 국군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한국광복군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 이준식 독립기념관 관장이 11일 서울시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창설80주년 초청강연’ 후 <오마이뉴스>에 한 말이다.

10월 1일이 한국전쟁 중 38선을 돌파한 날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국가기록원은 “1956년 9월 ‘국군의 날에 관한 규정’에 의해 육·해·공군 기념일을 통합하여, 국군이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지정하였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 날이 국군의 날로 기념되기까지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심지어 친일의 그림자도 스친다.

이승만이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기까지

이승만 대통령은 1956년 9월 21일 “육해공군 기념일에 관한 건은 폐지한다”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대통령이 이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육해공군은 각각의 기념일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육군은 1946년 1월 15일 미군정 아래서 남조선국방경비대 1연대가 창설된 날을 기념했고, 해군은 1945년 11월 11일 조선해안경비대의 근간이 된 해방병단의 창설일을 탄생일로 잡았다. 반면 공군은 1949년 10월 1일 육군에서 분리된 날을 기념일로 정했다.

그런데 육군이 1955년 기존 날짜 1월 15일에서 10월 2일로 육군의 날을 바꿨다. 그 이유가 10월 2일이 유엔군이 ‘작전명령 제2호’로 38선 돌파를 공식 승인한 날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0월 2일 육군의 날은 이듬해 바로 사라진다.

육군 3사단이 38선 위로 진격한 날짜가 10월 1일이라는 게 새롭게 확인되자 이승만 정부는 “국군의 날은 단기 4289년(1956년) 10월 1일부터 시행한다”면서 “(1955년에 제정한) 육해공군 기념일에 관한 건은 폐지한다”라고 밝혔다. 이 때부터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지정해 기념해 오고 있다.

1950년 10월 당시 38선을 가장 먼저 돌파했다고 알려진 육군 3사단은 2009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이종찬이 당시 사단장을 역임한 부대다. 당시 3사단을 이끌고 38선 동부해안을 돌파한 것으로 알려진 1군단 단장은 역시 국가공인 친일파로 지정된 김백일이 맡고 있었다.

분단과 전쟁 상태의 영속화… “정전에서 종전으로 나아가는 국군의 날 필요”

▲ 2019년 10월 1일 국군의 날을 맞아 대구 공군기지(제11전투비행단)에서 열린 “제71주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각군 장병들이 의장행사를 선보이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다른 나라들은 어떤 날을 국군의 날로 지정하고 있을까? 미국은 1949년에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국민들이 국가를 위해 헌신한 군인들에게 감사하는 통합된 기념일이 필요하다’라는 취지 아래 5월 셋째 주 토요일을 국군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1949년 중화인민국화국 건국 후 만들어진 중국인민해방군 창설일인 8월 1일을 국군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10월 1일 군국의 날을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강성현(역사 사회학자)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는 16일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령으로 국군의 날을 선정한 것은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기 위함”이라면서 “국군의 정통성을 따지기 보다 분단과 전쟁상태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38선을 돌파한 날을 국군의 날로 정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 교수는 이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새롭게 부각하고, 정전에서 종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인식이 공유되는 이 시점에 새로운 국군의 날을 기념일로 고민해 볼 수 있다”면서 “헌법정신에 입각하고 국군 창설의 맥을 따져 광복군 창설일로 국군의 날을 변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국방부는 15일 ‘국군의 날을 변경 논의가 진행 중이냐’라는 <오마이뉴스>의 질문에 “국군의 날을 변경하는 문제는 현역 장병과 예비역, 사회 각계각층의 폭넓은 의견수렴 과정을 통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면서 “(2018년 업무보고에 광복군이 기원이라고 명시했지만) 이와 관련 국방부 차원의 진전된 논의는 없다”라고 답했다.

<2020-09-1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50년 10월 1일 38선 돌파한 1군단장·3사단장은 국가공인 친일파

금, 2020/09/18-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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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기념 특강]
독립전쟁과 ‘이름없는 별들’
– 강사: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주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후원: 서울특별시 / 민족문제연구소

금, 2020/09/18- 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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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이준희(성공회대학교 외래교수)

2020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강(9.5~20)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관련영상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2강. 4·19혁명과 한국문학, 강사: 유성호(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1강. 문학에서 본 4·19혁명, 강사: 임헌영(문학평론가)

월, 2020/09/21-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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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한상언(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

2020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강(9.5~20)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관련영상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3강. 3강. ‘혁명의 기록, 4월의 노래’, 강사: 이준희(성공회대학교 외래교수)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2강. 4·19혁명과 한국문학, 강사: 유성호(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1강. 문학에서 본 4·19혁명, 강사: 임헌영(문학평론가)

월, 2020/09/21-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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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년 대회열고 호소문 발표…”다시 화해 평화 통일의 길 열자”
이종걸 민화협 의장 “국보법 철폐, 한미워킹그룹 해체”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가 9·19 공동선언 2주년 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은 이종걸 민화협 의장. (유튜브 갈무리)© 뉴스1

9·19 평양공동선언 2주년을 맞아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가 “남북 합의를 이행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6·15 남측위와 민화협은 서울시 마포구 청년문화공간에서 공동으로 ‘9월 평양공동선언 2주년 민족통일대회’를 개최하고 “현 남북관계의 위기는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남북공동선언의 합의들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데로부터 시작됐다”면서 이렇게 밝혔다.

이들은 ‘민족자주 민족자결의 정신으로 다시 화해와 평화 통일의 길을 열자’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통해 “남북관계를 가로막고 있는 한미워킹그룹을 해체하고 민족자주 민족자결의 입장에 확고히 서서 남북합의를 이행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러면서 “평양공동선언과 군사합의에 따라 군사적 적대행동을 모두 중단하고 공고한 평화체제 실현으로 나아가야 한다”면서 남북 경의선·동해선 철도 연결의 현대화 추진, 대북전단 살포 문제 해결 등을 촉구했다.

이날 이종걸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은 대회사에서 “남북간의 대화를 가로막는 국가보안법의 철폐와 함께 한미워킹그룹 해체와 한미군사훈련의 축소나 중단을 촉구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남북대화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대화의 파트너인 북측의 입장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파악해야 한다”면서 “북측이 반대하고 부정적인 것을 진행하면서 어떻게 대화를 진행할 수 있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미국과 우리 정부가 이에 대한 과감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면서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남북)대화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이창복 6·15 남측위 상임대표의장은 대회사를 통해 “동맹에 조금이라도 균열은 있을 수 없다는 냉전세력의 몽니를 넘어 보다 자주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정책은 찾기 힘든 상황”이라면서 “어떠한 동맹의 이익보다 민족의 이익이 우선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말했다.

그는”왜곡되고 종속된 ‘동맹’을 넘어 평등한 관계를 만드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정부는 ‘동맹대화’ 신설 시도를 중단하고 한미워킹그룹을 지체 없이 해체하라”고 주장했다.

한편 ‘한반도종전평화캠페인’은 9·19 평양공동선언 2주년을 맞아 이날 오후부터 서울·경기·인천·강원·충북·충남·전북·광주·부산·울산·경남·제주 등 전국 12개 시·도 19곳에서 전국 동시다발 1인 시위를 진행했다. 이들은 ‘전쟁 없는 한반도, 항구적인 평화지대’를 구호로 “남북·북미 합의 이행하라”라고 주장했다.

한반도종전평화캠페인은 615남측위·민화협·한국YMCA전국연맹·시민평화포럼·자유언론실천재단·여성평화외교포럼·민족문제연구소·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등 전국 시민사회·종교단체 353개가 참여하고 있는 단체다.

[email protected]

<2020-09-19> 뉴스1

☞기사원문: 6·15남측위·민화협, 9·19 2주년 “민족적 입장서 남북합의 이행”

월, 2020/09/21-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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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20/09/22-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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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 일정으로 1학살지 유해 발굴 집중

▲ 대전 동구청과 한국전쟁기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동조사단(아래 공동조사단, 단장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은 22일 오전 10시 30분 대전 골령골(동구 낭월동 13번지)에서 한국전쟁기 제 9차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을 알리는 개토제를 개최하고 있다. ⓒ 심규상

“아버지, 어머니… 70년의 어둠 거두어 내고 이제 밝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군경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 유해발굴이 시작됐다.

대전 동구청과 한국전쟁기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동조사단(아래 공동조사단, 단장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은 22일 오전 10시 30분 대전 골령골(동구 낭월동 13번지)에서 한국전쟁기 제9차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을 알리는 개토제를 열었다.

이곳 골령골은 전국 민간인희생자를 추모하는 국가단위 위령시설이자 평화역사공원(진실과 화해의 숲) 조성 예정지다. 정부는 평화역사공원에 전국 민간인 희생자 추모공간, 전시공간, 교육공간, 편의공간, 공원야외시설 등을 갖출 예정이다. 평화역사공원 조성을 위해 예정지 내에서 본격적인 유해발굴에 나선 것이다. [관련기사: 대전 골령골 민간인집단희생지 역사공원 설계 국제공모 http://omn.kr/1oyvb]

전미경 유족회장 “늦었지만 정부 차원 유해발굴 재개 다행”

▲ 22일 오전 10시 30분 대전 골령골(동구 낭월동 13번지)에서 한국전쟁기 제 9차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을 알리는 개토제에서 전미경 대전유족회장, 황인호대전동구청장, 서영균 제주 4.3희생자유족회대전위원장 등이 시삽을 하고 있다. ⓒ 심규상

전미경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장은 이날 추도사에서 “늦었지만 정부차원의 유해발굴과 국가단위 위령시설이 추진돼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며 “방치된 희생자들의 유해가 하루속히 발굴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황인호 대전동구청장은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국가가 수 천명의 목숨을 오히려 빼앗았다”며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의 유해발굴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코로나19 극복 앞에 좌우이념이 필요하지 않듯 평화와 인권을 지키는 일에 이념이 다를 수 없다”며 “유해발굴과 평화역사공원조성, 동구청 주최의 평화학술대회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황인호 동구청장 ” 평화와 인권 지키는 일에 이념 다를 수 없다”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대전산내사건대책회의 소속 임재근 대전통일교육협의회 사무국장은 “이번 유해발굴은 정부가 나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정부는 묻혀 있는 진실을 규명될 때까지 완주해 달라”고 주문했다. 대전산내사건대책회의는 전 대전산내학살유해발굴공대위를 확대 개편한 조직으로 오는 28일 대표자회의를 겸한 결성식을 개최할 예정이다.

박선주 공동조사단 단장은 “땅속에 묻힌 진실을 파헤쳐 유해를 편안하게 모시고 진실이 밝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유해발굴은 약 40일 간의 일정으로 제1학살지에서 집중적으로 실시할 예정이다.

대전 골령골은 한국전쟁 전후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최소 3000명에서 최대 7000명이 학살당한 후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매장추정지 7군데 중 2개의 매장지에서 34명의 유해를 발굴했으나 가장 많은 희생자가 매장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제1학살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이뤄지지 못했다. 2015년 공동조사단이 제1학살지에 대한 공동조사를 벌여 20명의 유해를 발굴했고, 이후 2017년 11월 시굴조사를 통해 유해 매장을 확인한 바 있다.

▲ 22일 개토제에서 전미경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장, 황인호 대전동구청장, 임재근 대전통일교육협의회 사무국장박선주 공동조사단 단장(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 심규상

박선주 단장 “유해 모시고 진실 밝히겠다”

안경호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은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된 지 10년만인 지난 5월 과거사기본법이 통과돼 올 12월이면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출범을 앞두고 있다”며 “전국 산천에 묻혀 있는 희생자들의 유해발굴이 하루속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9차 유해발굴에는 4.9통일평화재단,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역사문제연구소, 역사정의실천연대, 이내창기념사업회, 인권의학연구소·김근태기념치유센터, 인권재단사람, 인류진화연구소, 장준하기념사업회,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평화디딤돌, 포럼진실과정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전국유족회, 대전산내사건대책회의 등이 참여하고 있다.

▲ 황인호 대전동구청장이 개토제 직후 드러난 유해를 가르키며 발굴단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 심규상

유해발굴공동조사단 활동 경과

– 2014년 2월 공동조사단 출범, 제1차 공동조사,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 제1학살지 (진주국민보도연맹사건, 유해 최소 39명, 유품 90여 점)

– 2015년 2월 제2차 공동조사, 대전시 동구 낭월동 (골령골, 대전형무소사건, 유해 최소 20명, 유품 30여 점)

– 2016년 2월 제3차 공동조사, 충남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 (홍성국민보도연맹사건, 유해 최소 21명, 유품 30여 점)

– 2017년 2월 제4차 공동조사,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 제2학살지 (진주국민보도연맹사건, 유해 최소 38명, 유품 30여 점)

– 2018년 2월 제5차 공동조사,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 일대 (아산부역혐의사건, 유해 최소 208명, 유품 550여 점)

-2019년 3월 제6차 공동조사, 충북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청원국민보도연맹사건, 유해 최소 40명, 유품 130여 점)

-2019년 5월 제7차 공동조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일대 (아산부역혐의사건, 유해 최소 6명, 유품 10여 점)

-2020년 5월 제8차 공동조사, 충북 청주시 남일면 고은리, 충북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청원국민보도연맹사건, 유해 최소 2명, 유품 4점)

-2020년 9월 제9차 공동조사, 대전시 동구 낭월동 13번지

<2020-09-2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대전 산내 골령골 희생자 유해 본격 발굴한다

수, 2020/09/23-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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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보러가기] 

강사: 방민호(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

2020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강(9.5~20)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관련영상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4강.잘 돼 갑니다 – 우상의 시대, 강사: 한상언(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3강. ‘혁명의 기록, 4월의 노래’, 강사: 이준희(성공회대학교 외래교수)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2강. 4·19혁명과 한국문학, 강사: 유성호(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1강. 문학에서 본 4·19혁명, 강사: 임헌영(문학평론가)

토, 2020/10/03-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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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권성우(숙명여자대학교 국문과 교수)

2020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강(9.5~20)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관련영상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5강.피의 행진 – 대열 속에서(소설), 강사: 방민호(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4강.잘 돼 갑니다 – 우상의 시대, 강사: 한상언(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3강. ‘혁명의 기록, 4월의 노래’, 강사: 이준희(성공회대학교 외래교수)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2강. 4·19혁명과 한국문학, 강사: 유성호(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1강. 문학에서 본 4·19혁명, 강사: 임헌영(문학평론가)

토, 2020/10/03-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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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110년,…아직도 끝나지 않은…친일의 역사
日, 한일병합 토대 육군무관학교 폐교 계획…마지막 생도들 일본육군 중앙유년학교 편입
A급 전범 홍사익 등 대부분 친일의 길 걸어, 잊지 말아야 할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일
나라잃은 가슴 아픈 날, 국민들 무관심 여전… 아직도 법원에서는 친일 관련된 줄소송 대기
중국은 매년 국치일 9월18일 경적 울려 상기, 역사박물관 등 통해 아픈과거 기억하려 노력

1910년 9월2일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

​​​​​​​■기억과 기념투쟁

2017년 친일파 인명사전을 주도적으로 펴냈던 국내의 한 연구소에서 일제강점기 식민통치기구 사전을 출간하였다. 발간사에서 “기념해서는 안될 인물들을 기념하는 사회는 분명 정의롭지 못한 사회다. 기억투쟁은 곧 정의를 세우는 일이며”라고 하면서 이 사전이 나오게 된 배경을 차분하면서도 강한 어조로 정리했다. 이 사전에는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식민통치기관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수록됐다. 그 가운데 중추원 항목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바로 이완용을 비롯한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등 을사오적과 박영효, 송병준 등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들이다. 일제가 한국인을 보다 용이하게 통치하기 위해 키워 낸 친일파는 곳곳에 포진돼 있었다.

한일병합조약문

■대한제국의 몰락과 친일파 육성책, 군인들

1894년 동학농민군을 상대로 잔학한 학살을 자행했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기 한반도의 물자와 인적자원을 강탈하고 훼손했다. 1910년 8월22일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의 위법체결로 대한제국은 마침내 그해 8월29일 일제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른바 ‘경술국치’로 불린 치욕스러운 날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에게 경술국치는 생소한 역사적인 사건이자 용어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비롯한 내정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1907년 8월1일에는 대한제국의 군대가 ‘공식적’으로 해산됐다. 여기저기서 대한제국 군인들과 일본군의 시가전이 전개됐다. 참령 박승환의 자결도 이 때 일어났다. 일제는 1909년 9월 대한제국 군부의 숨통을 끊고 한일병합의 토대를 만들기 위한 작업으로 육군무관학교를 폐교하려 했다. 그 선행작업으로 마지막 육군무관학교 생도들을 일본으로 데려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1909년 8월 2일 학교장 이희두가 “황제폐하가 군부를 폐지하고 무관학교를 폐교한다는 칙령을 내렸다”고 하면서 칙령을 봉독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의 종말이었다.

생도들은 통곡했다. 하지만 엄혹한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총 45명의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들에게 일본으로 갈 것을 명했으며, 이들 가운데 김영섭만이 일본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고 모든 검사에 불참했다. 총 44명의 육군무관학교 생도들은 일본으로 가기 위해 지식과 신체검사를 비롯해 적성검사를 차례로 받고 두 명을 제외한 42명이 일본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게 됐다. 1909년 9월3일 생도들은 일본 육군유년학교 생도들과 같은 정복을 입고 대한제국 소속임을 표시하는 오얏꽃 모표와 분홍색 금장을 달고 현해탄을 오가는 배에 조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올랐다.

일본으로 가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들의 성적순 제 1등은 유명한 소설가로 알려진 염상섭의 큰 형이었던 염창섭이었다. 물론 이들 가운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생도는 따로 있었다. 홍사익이었다. 그는 일본인들도 입학이 어렵다던 일본 육군사학관학교와 육군대학을 거쳐 일제 패망 시 일본군 중장에 오른 인물이었다. 조국을 외면했던 댓가로 그는 1946년에 A급 전범으로 처형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됐지만 일본 육사시절 그가 보여줬던 실력은 일본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1909년 9월7일부터 대한제국 생도들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예비학교인 육군중앙유년학교에서 ‘극일(克日)’한다는 자세로 한국학생반으로 편성돼 훈련받았다. 1910년 9월1일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 생도들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충격을 받았다. 대한제국과 일본이 합병한 것이었다. 이른바 경술국치이다. 한일병합 제1조 ‘대한제국황제는 일본국천황에게 모든 권한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양도한다’라고 돼 있듯이 이제 무관학교 생도들은 더 이상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 모표를 달수 없었으며, 한인학생반도 없어졌다. 훗날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 됐던 지청천과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강렬하게 전개했던 김경천, 전범으로 처형된 일본군 중장 홍사익,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됐던 이응준은 요코하마에서 “독립투쟁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두 명만이 독립운동에 자신을 바친다. 아니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들 가운데 대부분은 친일의 길을 걸었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중국 9·18역사박물관 모습

■중국이 기억하는 그들의 국치일

오늘날 중국 대륙의 국치일은 9월18일이다. 1931년 일본제국주의가 만주를 본격적으로 침략한 날이다. 중국은 이때부터 1945년까지를 항일전쟁기로 부른다. 선양시(沈陽市)에 세워진 918역사박물관에는 중국의 전 국가주석 장쩌민(江澤民)이 쓴 ‘물망국치(勿忘國恥)’가 선명하게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항일전쟁시기 3천500만명의 중국인이 다치거나 죽었다. 비단 사람만 희생됐을까. 그들의 문화, 영토, 풍속 등도 상당 부분 훼손됐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날을 국치일로 정한 것이다. 해마다 심양을 비롯한 중국 동북지방 대도시에서는 9월18일 오전 9시18분에 경적을 울려 이날이 국치일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처럼 한국과 중국에는 국치일이 모두 일본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중국은 용서는 하지만 절대 잊지는 말자고 강조한다. 왕징웨이(汪精衛)를 비롯한 한간(漢奸)에 대한 역사적 단죄, 만주국 황제였던 부의를 중생(重生)했던 무순전범관리소를 운영했던 중국인의 눈으로 보면 대한민국은 아직도 ‘친일’과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애써 우리의 현실은 중국과 다르다고 자위해 보지만 과연 우리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경술국치’, 나이 든 세대에게는 익숙한 용어이다. 하지만 용어일 뿐이지 실생활에서 전혀 느낌을 주지 못하고 있다. 하물며 청소년들에게는 잊혀진 세월이자 먼 옛이야기다. 기성세대는 한일관계를 의식해서 또는 과거이기 때문에 라고 얼버무리며 국치일에 대한 아픈 기억을 애써 봉합한다. 가슴 쓰린 현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에게 우리의 메시지는 정확하게 전달될 리가 없다.

중국 9·18역사박물관 모습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친일의 역사

만주는 한국독립운동의 안전판이자 한편으로는 일제와 결탁한 세력들의 각축장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들은 어쩌면 일제의 감시와 탄압보다 밀정이나 친일파들의 눈초리를 벗어나야 했다. 그 고난의 삶을 어떻게 편안한 우리가 복원할 수 있을까. 독립운동은 나를 버리는 길이다. 그것도 온전히. 안중근, 윤봉길 의사가 그러하듯, 나를 버리고 온전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이 바로 독립운동의 소중한 자산이자 우리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편안한 길은 어떠한가. 나를 버리기는 커녕, 세상의 악과 결탁해 나와 같은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친일의 길을 그래서 정의나 공의와는 동떨어진 삶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변명이든간에.

2007년 민간단체에서 친일인명사전이 나왔다. 그 뒤 정부차원에서 친일단체 및 인명을 정리하는 작업이 마무리됐다. 아직도 법원에서는 친일과 관련된 줄소송이 판사들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정리되지 않는 역사의 갈무리 작업은 그만큼 지난하다. 2020년 7월 11일 ‘대한민국 국군 영웅’ 백선엽 장군이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20대 만주국 조선인 특설부대 간도특설대에 근무했던 그가 해방과 한국전쟁 속에서 한국군의 영웅으로 자리잡았다. 어쩌면 한국군의 민낯 같다. 독립군과는 대척점에 있었던 인물이 해방 이후 미군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영달을 꾀했다. 뿐만 아니라 ‘청빈한 삶’을 살았고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군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사실은 한 개인의 삶이 어떠하게 조명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역사의 역린을 한번은 헤집어서 그 상처의 환부를 도려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도 역사의 책무이다.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2020-09-27> 경기일보

☞기사원문: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청산되지 못한 아픈 과거 친일파 (1)

※관련기사 

경기일보: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2.무의식 속 자주 사용하는 일본어

경기일보: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1.애매하다·망년회·땡땡이무늬… 당신도 쓰고 있나요? 

토, 2020/10/03-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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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000여 명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다룬 <35년> 완간한 박시백 화백

▲ 독립운동가들의 투쟁과 친일파들의 부역의 역사를 만화로 그린 <35년> 저자 박시백 작가가 28일 오전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앞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책을 집필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유성호

일제강점기를 다룬 작품 <35년>을 지난 광복절에 완간한 쉰여섯의 화백은 ‘만약 그때로 돌아가면 독립운동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아마도 나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그런데 금방 죽었을 것이다. 나는 달리기도 잘 못하고 (독립군처럼) 총 쏘라고 하면 총도 제대로 못 쐈을 거다. 금세 갔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는 ‘독립운동을 했을 것’이라고 밝힌 이유에 대해서 만큼은 “살벌했던 전두환 시대에 처음 이 길에 들어섰을 때도 이미 투옥과 고문,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시작했던 것”이라면서 “늘 광주항쟁에 대해 생각했고, 학살자가 대통령으로 있는 것을 청년으로서 가만히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 움직이는 이유가 됐다”라고 밝혔다.

1984년 고려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해 대학시절 전두환 독재에 맞서 학생운동을 했고, 그 과정에서 “우연적인 일”로 만화를 그리게 됐다. 그것이 지금은 본인의 업이 돼 살고 있다. 박시백 화백의 이야기다.

그는 서른일곱이라는 나이에 시사만화를 그리던 한겨레신문을 그만뒀다. “호흡이 긴 걸 하고 싶었다”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회사를 그만둔 그는 실록 국역CD를 구입해 공부했다. 2003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권 ‘개국’을 세상에 선보였다. 이후로 10년 스무 번째 이야기 ‘망국’이 탄생하기까지 조선왕조에 천착해 살았다. 그사이 그의 책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350만 부라는 실로 압도적인 판매량을 기록했다.

자연스레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도 주목됐다. 그는 조선왕조실록 마지막 컷에서 “역사 앞에 이름 없이 사라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선조들이 있어 오늘의 우리가 있다”라고 밝힌 대로 단호하게 일제강점기 35년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2018년 1월 <35년>이라 명명된 책이 세상에 나왔다. 지난 광복절에는 ‘밤이 길더니… 먼동이 튼다’라는 부제로 <35년>의 마지막 편인 7권이 완간됐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28일 <35년> 속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명멸했던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박시백 화백을 만나 인터뷰했다. 이날은 서대문형무소에서 18살 나이로 사망한 유관순 지사의 순국 100주년이기도 했다.

책 판매가 저조한 이유? “어려운 이야기를 했다”

▲ 독립운동가들의 투쟁과 친일파들의 부역의 역사를 만화로 그린 <35년> 저자 박시백 작가. ⓒ 유성호

사실 <35년>은 350만 권 이상 판매량을 보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비하면 다소 뜨뜻미지근한 상태다. 분명 베스트셀러에 위치해 있지만 ‘선풍적인 인기몰이’와는 차이가 난다. 이 부분에 대해 다수의 독자들은 “조선왕조실록에 비해 <35년>이 어렵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박 화백 스스로도 에필로그에 “너무 많은 사람과 사건, 이야기를 담으려 한 게 아닌가 한다”면서 “그런 만큼 독자들로서는 책장을 넘기기가 어려웠을 테고 넘기고 나서도 기억나지 않는 내용이 많았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그럴 것이 총 7권 2140쪽에 이르는 이야기 속에 등장인물만 1000여 명에 이른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 반드시 다뤄줘야 하지만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과 사건들이 <35년> 곳곳에 배치됐다.

박 화백은 “사회주의를 다룬다는 것이 대중서로서의 거리감을 만들어 냈지만 결코 무시하고 갈 수 없었다”면서 “사회주의는 당시 상황에서 볼 때 일제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이자 무기였다. 김규식 선생을 비롯해 임정 주요 인물들도 사회주의에 큰 관심을 가졌다. 무엇보다 당시 현실적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으니 청년들 사이에 (사회주의 국가) 러시아에 대한 기대도 컸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책에는 볼셰비키와 화요파, 조선공산당을 비롯해 그 안에서 활약한 김알렉산드라, 이동휘, 박헌영, 김단야 등 우리가 놓쳤던 수많은 사회주의계열 단체와 독립운동가들이 나온다. 그중에는 동북항일연군 김일성도 있다.

박 화백은 “김일성의 독립운동에 대해 가짜설도 있었고 여러 주장이 있다”면서 “하지만 실제 전투참여와 활약상 등을 고려해 다뤘다. 전체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끼친 영향을 고려하면 더 크게 묘사해도 됐지만 백범과 약산에 비해서는 훨씬 적게 표현했다”라고 언급했다.

이를 위해 박 화백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친일인명사전>을 기본 텍스트로 삼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사편찬위원회 등의 연구 자료와 100여 권 가량 되는 단행본을 참고해 공부하며 스토리를 짰다. 다양한 의견을 확인하기 위해 위키피디아도 꼼꼼히 확인했다. 동시에 9명의 현직 역사 교사가 편집에 참여하여 역사적 사실관계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바로잡았다.

▲ 박시백 작가는 “35년의 일제강점기 속에 존재했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에 대해 이 책을 통해 더 많이 알게 됐다는 평을 들었으면 좋겠다”면서 “그게 가장 보람있는 일이다”고 말했다. ⓒ 유성호

3.1운동 대신 ‘3.1혁명’으로 기록하다

박 화백은 <35년>의 두 번째 이야기를 ‘3.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명명했다. 박 화백이 3.1혁명이라 지칭한 것은 1919년 고종의 장례에 맞춰 3월 1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일컫는다. 우리 정부는 3.1운동이라 부르고 있다.

박 화백은 “3.1운동은 비폭력 만세운동이라고 인식하지만 국가적으로는 비폭력부터 폭력까지 그야말로 민족적 에너지가 다양하게 방출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면서 “내용적인 측면만 따져도 혁명이라 충분히 불릴만하지만 민중들이 근대인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이후 왕정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졌다”라고 평가했다.

박 화백의 말대로 1919년 3.1혁명의 흐름이 이어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제국에서 민국으로 바뀐 것이데, 같은 날 공포된 임시정부의 헌장에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라는 내용과 함께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문구가 명시됐다.

한편 <35년>을 이어가며 박 화백을 가장 어렵게 만들었던 부분은 친일파에 대한 서술이다.

박 화백은 “친일파들의 이야기를 세세하게 전하고자 했다”면서 “하지만 친일파들은 비슷한 조직에서 비슷하게 행동하고 비슷한 연설을 했다. 독자들 입장에서 그 차이를 느껴야 책을 넘길 때 힘이 나는데 이를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라고 언급했다.

그러면서도 박 화백은 일제 만주군 출신이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대한민국 5대, 6대, 7대, 8대, 9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에 대해서는 “책에서 좀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다”면서 “일제강점기를 비롯해 이후 시대에 박 대통령이 끼친 족적이 워낙 크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7권 말미에는 만주군 중위였던 박 대통령이 일제가 망한 뒤 광복군 3지대를 거쳐 이듬해 5월 군복을 염색해 부산항에 도착했다고 그려졌다.

또 박 화백은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하는 작태에 대해서도 “이승만 정권 당시 반민특위가 무너지면서 그때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아니겠냐”면서 “내가 만화를 그리는 이유 중 하나”라고 밝혔다.

“이미 땅 팔아서 건물 올리고, 회사 일으킨 후손들에게 어떻게 재산상의 책임을 물을 것이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지금의 친일청산은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친일파를, 이들이 민족반역자였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후손들에게도 계속 알려야 한다. 그렇게라도 해야 친일파 후손들이 자기 조상을 대놓고 자랑하는 일은 없지 않겠나.”

박 화백은 이날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35년의 일제강점기 속에 존재했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에 대해 이 책을 통해 더 많이 알게 됐다는 평을 들었으면 좋겠다”면서 “그게 가장 보람있는 일”이라고 언급했다.

다음 작품에 대해서 만큼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면서 “고려사와 현대사를 놓고 고민 중”이라고만 언급했다. 돌아보면 <35년>의 마지막 컷에는 해방 후 혼란을 겪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담겼다. 그 안에는 1946년 신탁통치 절대반대, 백범의 죽음, 제주4.3과 여순항쟁, 그리고 한국전쟁이 그려졌다. 박 화백의 작품이 언젠가는 이를 그려낼 것이라고 예측되는 부분이다.

<2020-10-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친일파가 제일 다루기 어려웠다… 이렇게라도 기억하는 게 청산”

토, 2020/10/03-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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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2007년에 한국의 백두대간 지역을 시작으로,
2011년, 2012년에 북한지역 백두대간을 종주한
최초의 외국인 로져 셰퍼드(Roger Shepherd)!!!

통일 염원이 담긴, 그의 “남북한 백두대간” 답사기
<강북구 온라인 인문학 강좌>에서 만나 보세요!

월, 2020/10/05-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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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부터 예술가ㆍ법조인ㆍ공무원까지… 낯 뜨거운 ‘친일 행적’
마지막 무관생도이자 日 육사 동기 홍사익과 안종인
나라 배반하고 호의호식한 고위공무원의 전형 김종한
작곡가 홍난파·예술가 윤효중·조선총독부 판사 이명섭
총후봉공 위한 정신운동 앞장 선 사학계 거두 이병도
독립군 맹장 지청천·이종혁과 달리 친일의 길 앞장
해방 후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 개념 규정에 어려움 낳아
후손들 밝은 미래 위해 역사의 뼈아픈 반성·성찰 있어야

■ 군인은 국가의 정체
대한민국 대통령을 비롯해 고위공직자들 가운데 본인 또는 아들의 ‘군복무’ 문제로 곤혹을 치룬 사례를 언론을 통해 자연스럽게 접하고 있다. 그만큼 분단된 대한민국에서 군과 관련된 문제는 가장 민감한 문제이자 중요한 사안이다. 군인은 그 국가의 정체(正體)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대한제국을 침략하면서 친일적 군인을 만들어 내는 데 심열을 기울였다. 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이면서 일본이 한국적(韓國籍) 군인으로 기억하고 있는 인물이 경기도 안성 출신의 홍사익이다. 그는 1969년 일본이 펴낸 일본 육군사관학교라는 책의 연표에도 영친왕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왕족과 함께 실려 있다. 그것은 오로지 그의 실력이었다.

몇 해전 소설가 이원규 작가가 저술한 [마지막 무관생도들]이라는 책을 보면서 한국근현대사를 공부하는 필자는 부끄러움을 크게 느꼈다. 무엇보다도 이원규 작가의 자료 접근과 소설가로서의 풍부한 상상력이 결합된 [마지막 무관생도들]은 소설이 아닌 지청천, 이응준, 홍사익에 대한 평전이었다. 그러면 왜 홍사익은 지청천처럼 일본군을 탈출해서 독립군에 투신하지 못했을까. 개인의 영달과 조국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결합된 천재 소년의 비극적 인생, 그것이 홍사익의 자화상이었다.

홍사익은 1889년 경기도 안성군 대덕면 소현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열 살때쯤 사서(四書)를 통째로 외워버려 인근 동리에서는 천재소년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16세 때 대한제국 유년학교에 입학했으며 1907년 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동기로는 한국독립군의 맹장이자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이 있었다. 홍사익은 지청천과 무척 친하게 학교생활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속에 처해졌으며 마침내 홍사익을 비롯한 42명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홍사익은 강제병합 소식도 듣고 선배 김경천과 동기 지청천, 이응준이 모여 피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1914년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당시 동기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던 지청천은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그 때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지청천은 선배 김광서(김경천)과 3·1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한 후 청산리 전투와 자유시 참변을 겪으면서 한국독립군의 상징으로 성장했다. 홍사익은 지청전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원체 탁월한 천재였던 홍사익은 일본군에서도 고속승진이 확실한 일본 육군대학을 나오게 된다. 일본 육군대학은 출세의 보증수표이자 별을 달 수 있는 고속도로이다. 동기들 가운데 육군대학을 나온 사람은 없다.

1941년 홍사익은 소장으로 승진했으며 중국 화북지방에서 사단을 지휘했다. 그 때 한국독립군 가운데 윤세주를 비롯한 조선의용대원들이 태항산 지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친구 지청천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홍사익은 다시 필리핀에 전속됐다. 거기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연합군에게 체포돼 1946년 9월26일 밤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홍사익과 함께 대한제국마지막 생도이자 일본 육사를 나온 안종인(안병범)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한국전쟁(6ㆍ25)에서 북한군과 대치하다가 자결했던 안병범이 바로 안종인이다. 그는 홍사익과 동기로서 1914년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그해 12월 큐슈의 구마모토 부대에서 근무했다. 1918년 시베리아 출병에 참가했다. 이때 함께 출정했던 충무공의 후예였던 일본 육사27기 이종혁은 독립군 탄압에 대한 죄책감으로 1920년대 탈출해 독립군이 됐지만 안종인은 해방 때까지 일본 대좌로서 훈장과 함께 특별하사금까지 받았다.

■ 예술가는 민족혼을 머금는다
위기의 시대, 국난의 시대의 예술가들이 존경받는 것은 민족혼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데 있다. 남북이 만나서 가끔 함께 부르는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는 그 곡이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친일음악가로 낙인찍혀 있다.

경기도 장단에서 태어난 윤효중은 도쿄 미술학교를 졸업한 수재였다. 그는 태평양전쟁이 극성이었던 1940년대 일제 침략전쟁을 찬양, 미화하는 조선미술전람회, 결전(決戰)미술전 등에 출품해 각종 상을 휩쓸었다. 1943년 열린 조선미술전람외에 천인침(千人針)을 응모해 조선총독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태평양전쟁에 나선 일본 군대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며 후방에서 끊임없이 바느질하는 한복 차림의 여인 전신상을 새긴 작품이다. 1944년에는 결전미술전에 [아버지 영령에 맹세한다]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이 작품은 전쟁에 나간 아버지의 뼛가루 상자를 앞으로 메고 있는 소년의 비애와 결연함을 아우르고 있으며 일본의 승리를 염원하는 내용이다. 1945년 1월에는 태평양전쟁에 출전한 가미카제를 기념하는 초상조각 작업을 시작했다. 조각가인 그는 일제의 전쟁에 동원된 민중들의 모습을 미화시키는 작품세계에 몰두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 법으로 친일을 변호하다
이명섭은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했다. 1912년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서기과 서기 겸 통역생으로 법조계에 입문했다. 1914년 1월 조선총독부 판사로 임용돼 평양지방법원 영변지청 판사에 입명됐다. 그는 1919년 3ㆍ1운동 관련 사건을 잘 처리하였다고 상여금을 받았다. 1920년대와 그가 변호사로 개업하는 1937년까지 한국독립운동과 관련된 크고 작은 재판을 맡아 조선총독부로부터 훈장 서보장, 대례기념장을 받을 정도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김한필 사건, 흥업단 군자금 사건 등이 그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해방 후 그는 미군정청 경성공소원 수석판사에 임명됐다.

■ 역사는 민족의 혼이다
오늘날 한국의 여러 텔레비전에서는 역사를 주제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역사는 미래를 밝혀줄 과거의 이야기이자 현재를 바라보는 거울이다. 해방 이후 한국사학계의 거두 이병도는 경기도 용인 출신이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를 졸업했으며 1915년 일본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 문과를 수료했고 사학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원을 지냈으며 1925년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에 임명됐다. 조선사편수회는 식민사학을 집대성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그는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활동하면서 이마니시(今西)와 함께 조선사 제1편 신라통일 이전 등의 편찬을 담당했다. 이후 청구학회 위원,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전국 유림단체를 연합해 총후봉공(銃後奉公)을 위한 정신운동에 나서도록 촉구했던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에 선임됐다. 그리고 해방을 맞이했다. 그는 해방 후 서울대 문리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역사학계의 권력으로 행세했다.

■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친일파의 흔적들
조선 헌종 때인 1844년 태어나서 1930년대까지 호의호식했던 수원 출신 김종한은 천수를 누리면서 조국을 배반한 고위공무원의 전형이었다. 그가 남긴 오염된 유산은 나 자신을 위해서는 공동체의 안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시그널이었다. 해방 이후 청산하지 못한 해방공간의 현재성이 오늘날 친일파 개념 규정에 어려움을 낳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조국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서 자신들을 희생할 때 친일파들은 비겁한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한국근현대사를 오염시켜 왔다. 역사의 뼈아픈 반성과 성찰이 보다 나은 미래를 밝혀 줄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후이다.

일본으로 간 대한제국 무관생도(성적순 2등 홍사익, 8등 안종인)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2020-09-27> 경기일보

☞기사원문:[생활 속, 일재 잔재를 청산하자] 경기도 출신 친일의 군상(群像)

※관련기사 

경기일보: 청산되지 못한 아픈 과거 친일파 (1)

경기일보: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2.무의식 속 자주 사용하는 일본어

경기일보: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1.애매하다·망년회·땡땡이무늬… 당신도 쓰고 있나요? 

화, 2020/10/06-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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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중 신부 재조명 작업을 추진 중인 함세웅 신부는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윤 신부님의 신앙과 가치관을 되새기면서 스스로를 성찰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준헌 기자

한국 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인 함세웅 신부(78)가 해방 전후 한국 언론·출판계 선구자인 윤형중(마태오) 신부(1903~1979)의 삶과 사상·활동상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와 가톨릭교회사를 보다 온전히 복원하는 일로 가톨릭계 안팎에서 주목받는다.

윤 신부는 1930년 사제서품 이후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독재정권 아래에서의 민주화운동 등 격동의 근현대사를 천주교 사제로서, 한 지식인으로서 치열하게 살아낸 선각자다. ‘가톨릭계의 지성’이자 대표적 논객으로 불린 그는 가톨릭교회와 더불어 정치·사회·문화적으로도 큰 족적을 남겼다.

윤 신부는 일제강점기 당시 종교·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한글보급운동·한국문학 발전에 이바지한 ‘가톨릭 청년’ 창간(1933)을 주도했고, 한국 최고의 정기간행물로 지금도 발간 중인 ‘경향잡지’를 이끌었다. 또 1946년 경향신문 창간 주역으로 사장 등을 역임했다. 이승만 자유당 정부 시절 글을 통해 정부의 실정과 부조리를 비판한 그는 1970년대엔 유신독재에 항거하며 결성된 ‘민주회복국민회의’(1974) 상임대표위원을 맡는 등 민주화운동에도 나섰다. 신학적 연구를 기반으로 한 ‘가톨릭 대변자’이자 호교론자로 잡지 ‘사상계’를 통해 함석헌 등 당대 지성들과 치열한 논쟁도 펼쳤다. 새남터·절두산성지 기초작업, 순교자 유물확보 등 순교자 현양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윤 신부, 1930년 사제서품 후
일제 아래서도 한글 보급
독재엔 항거·민주화운동

신앙·삶·가치관에 담긴 뜻
이 시대 언론·종교 성찰 필요

유품·기리는 글 모아 추모집
10월 중순 ‘서예전’ 준비 중

함세웅 신부를 지난달 22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재조명 작업의 의미와 활동, 한국 언론·종교의 바람직한 역할 등을 듣기 위해서다.

– 윤형중 신부 재조명 작업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최근 그분의 유품과 각계 분들의 기리는 글, 저의 서예작품을 엮은 문집 <암흑속의 횃불-참스승 윤형중 신부 추모집>을 펴냈다. 코로나19로 유동적이긴 한데 10월28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예전도 연다. 추모집에는 윤공희 대주교,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총원장 양기희 수녀,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김영식 신부를 비롯해 서울대 양승규 명예교수 등의 글이 실렸다.”

윤공희 대주교는 추모집에서 윤 신부를 “한국천주교회의 대표적 사제로서 출판과 언론, 지성인 강좌와 신앙교육, 순교자 현양에 몸 바친 선구자”라며 “인권과 평등·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세상 한복판 현장에 뛰어든, 한국천주교회와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이라고 밝혔다.

– 윤 신부 재조명 작업이 갖는 의미는.

“윤 신부는 사제이자 지성인으로 가톨릭과 사회적 언론·출판 활동, 선구적인 순교자 현양, 불의에 맞선 민주화운동 등 교회사적·민족사적으로 큰 활동을 펼쳤다. 이런 활동을 가능케 한 그의 신앙과 철학, 가치관을 되새기고 우리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관계의 기초인 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지켜내는 신의를 순교자들에게서 찾았다. 사실 신앙선조들이 박해받은 것은 만민평등사상, 즉 하느님 아래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믿음, 신의, 가치관 때문이다. 순교자들이 지켰던 이 평등의 마음, 불변의 가치 수호를 위한 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이 가치는 사회적 불의에 맞서고, 독재정권 아래에서 교회가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던 힘이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원조 격이다.”

– 특별히 기억에 남은 윤 신부와의 인연은.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 당시 각계 분들을 모셨는데, 1956~1957년 ‘사상계’를 통한 뜨거운 지면논쟁으로 유명한 윤 신부와 함석헌 두 분도 처음 만났다. 두 노인의 만남은 옛 친구, 소년들의 상봉과 같았다. 힘을 모아 독재에 맞서 싸우겠다는 다짐을 하며 소년들같이 순수한 웃음을 나누던 모습이 생생하다. 두 어른의 일치와 연대에서 진실과 용기, 참인간성의 회복이라는 아름다움을 확인했다.”

– 이 시대 언론의 역할은.

“언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란 강론을 한 적이 있다. 성경이 하느님 말씀으로 창조의 힘이 있다면 언론은 인간의 언어로 창조의 힘을 드러내야 한다. 요즘 안타깝고 비애감마저 느낄 때가 많다. 공명정대나 진실이 아니라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속이는 일을 하는 경우까지 본다. ‘기레기’란 말까지 나온다. 언론이 출발점, 뿌리를 찾았으면 한다. 기자들 스스로 왜, 어떤 기자가 되려 했는지 순수한 초심을 되새겼으면 한다.”

– 세계적 탈종교화 속에 한국 종교도 신뢰도가 낮아지고 있다.

“카를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 했는데, 아편은 독이기도, 또 약이기도 하다. 종교의 근본도 언론의 소명과 다르지 않다. 종교는 사랑과 평화·용서를 통한 통합기능, 개혁과 고발·회개로 불의를 내리치는 채찍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자본주의의 부스러기를 받아먹는 데 급급하다. 돔 헬더 카마라 브라질 대주교는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면 성자라고 하는데, 가난을 낳는 구조를 바꾸고자하면 공산주의자로 손가락질한다’는 뜻의 말을 했다. 지도자들부터 가식을 벗고 낮은 데로 내려가야 한다.”

함세웅 신부가 윤형중 신부 추모 서예전에 내놓을 작품 ‘世(세)-골고타 사형터 세 개의 십자가’(71×34㎝). 발문은 함 신부의 서예 스승인 이동천 박사가 썼다. 함세웅 신부 제공

– 서예전 준비는 잘되고 있나.

“열심히 써오고 있다. 50여점을 내건다. 성경과 명구, 부모님 말씀, 제가 하고 싶은 말 등 내용은 다양하다. 윤 신부님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전교(선교)에 도움되느냐’고 했다. 전시회를 망설이다가 그분의 신앙과 삶·가치관을 더 널리 알리는 데 도움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기도 하다.”

함 신부는 원로 사제로서 기도하는 삶을 살면서 민족문제연구소·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정의구현사제단) 고문 등으로 ‘정중동’ 활동을 하고 있다.


1946년 경향신문 창간 주역·사장 역임…주필 정지용·편집국장 염상섭 당대 문인들 이끌어

최근 함세웅 신부 등을 중심으로 삶과 사상, 활동상의 재조명 작업이 추진되고 있는 윤형중 신부.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제공

한국 근현대사에서 선각자 면모를 드러낸 윤형중(마태오) 신부(1903~1979)는 1946년 10월6일 창간호를 낸 ‘경향신문’ 창간의 주역이기도 하다.

해방 직후 가톨릭계에서는 일제가 강제 폐간시킨 가톨릭 매체 ‘경향잡지’ 등의 복간을 검토하면서 종합일간지 창간을 논의했다. 정론지 창간이라는 대의에 당시 양기섭·이완성 신부와 윤 신부 등이 적극 나섰다. 결정권자인 경성교구장(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주교는 신중했다. 이에 양 신부는 “수단(사제복)을 벗어버리겠다”고 강경한 입장을 밝혔고, 윤 신부는 노 주교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마침내 경향신문은 노기남 주교가 초대 회장을, 양 신부가 사장을, 윤 신부가 부사장을 맡으며 출범했다. 초대 주필은 시인 정지용, 편집국장은 소설가 염상섭으로 당대 문인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이는 당시 언론·출판의 선구자인 윤 신부와의 인연이 작용했다.

해방 후 정치사회적 혼돈 속에 경향신문은 불편부당한 정론지를 표방했다. 창간 당시 3만부이던 발행부수는 1년 뒤엔 6만부를 넘어섰다. 윤 신부는 창간 이듬해 신문 운영을 둘러싼 노 주교와의 갈등으로 양 신부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사장대리를 맡았다. 윤 신부는 이승만 자유당 정부를 비판하는 논설을 둘러싸고 노 주교와 마찰을 빚었고 결국 이듬해에 물러났다.

이승만 정부는 결국 경향신문을 탄압했다. 인기 칼럼으로 지금도 게재되고 있는 ‘여적’ 내용을 문제 삼아 편집국장 등의 연행을 거쳐 1959년 4월30일 결국 폐간시켰다. 해방 이후 최대 언론 탄압 사건이다. 이듬해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사퇴 성명이 나오면서 법원의 복간 결정이 내려졌다.

윤 신부와 경향신문의 인연은 그가 3대 사장으로 취임(1961년 3월)하며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군사독재 정권의 탄압, 가톨릭계의 재정난 등으로 1962년 1월 윤 신부는 사임하고, 가톨릭과 경향신문은 이듬해 5월 완전 분리된다.

최근 발간된 윤 신부 추모문집 <암흑 속의 횃불>에서 김석종 경향신문 사장은 기고문을 통해 “윤 신부가 씨를 뿌린 경향신문은 국내 첫 사원주주회사이자 ‘독립언론’으로서 불편부당 정론지의 길을 가고 있다”고 밝혔다.

도재기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20-10-05> 경향신문

☞기사원문: [창간기획]함세웅 신부 “근현대사 속 선각자 윤형중…불의에 맞선 그의 신앙 되새겨야”

화, 2020/10/06-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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