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오마이뉴스] 생존자의 절규 “한국, 베트남전 피해자 고통은 외면”

지역

[오마이뉴스] 생존자의 절규 “한국, 베트남전 피해자 고통은 외면”

admin | 월, 2021/08/09- 01:02

김남주 민변 베트남전TF 팀장 인터뷰① “문재인 정부, 사안 해결의지가 없어 보인다”

“저는 8살 한국군에 의해 (가족이) 학살당했고, 그 학살로 많은 가족을 잃고 혼자 오랜시간 고통속에 살아왔다. 오늘 이자리에 있기까지는 광장히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내며 오게 됐다. 한국에 이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위해 한국 방문을 세차례나 했지만, 한국 정부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 사실에 대해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한국 국회가 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 듣고 너무 반가웠다.”

▲ 한국사회에 진실규명을 다시 한번 호소하는 응우옌 티 탄씨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인 응우옌 티 탄씨는 간담회에 참가해 “한국정부는 우리가 겪은 고통에 대해 그동안 철저히 외면해왔다”고 비판하며 “특별법이 속히 제정되어 한국정부가 피해사실만이라도 제대로 조사하길 간절히 부탁드린다”라고 한국사회에 진실규명을 호소했다. ⓒ 이재정 TV 유튜브 갈무리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인 응우옌 티 탄(Nguyễn Thị Thanh, 61세)씨는 한국 국회의 특별법 제정 노력에 대해 반가운 자신의 심경을 전했다. 그는 지난 두달간에 걸쳐(6.30~7.22) 세차례 열렸던 ‘베트남 전쟁 시기 대한민국 군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사건 조사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연속간담회’에서 베트남 현지에서 화상으로 참가해 아픈 과거와 현재 심정을 토로했다.

이어 응우옌 티 탄씨는 한국정부가 민간인학살에 대해 진상을 규명하고 사과하기를 바라냐는 질문에는 “(1968년) 퐁니퐁넛 학살, 우리 마을에서 죽은 사람들은 대다수가 저와 같은 어린 아이였거나 여성들이었다. 수많은 목숨들이 굉장히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것이 이 퐁니퐁넛 학살이다. 저 뿐만이 아니라 이 학살의 생존자들, 가족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이 학살을 기억하고 있고, 이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한번도 우리를 찾아온 적 없고, 이 사건에 대해 단 한번도 관심을 갖거나 이 사건의 실제에 대해 저희에게 물어보거나 조사한 적이 여지껏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정부는 우리가 겪은 고통에 대해 그동안 철저히 외면해왔다”면서 “저를 포함해 103명의 베트남 피해자들이 한국정부에 청원서를 전달했다. 그러면서 저희는 이제 한국정부가 이 사실을 알게되고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굉장히 기뻐했다. 저는 이 청원서가 오히려 저희를 더 슬프게 할 것이라거나, 이 청원서를 받아든 한국정부의 지금 태도를 상상해 본 적이 없다. 특별법이 속히 제정돼 피해사실만이라도 제대로 조사하길 바란다. 역사적 진실이 밝혀져야 이런 역사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므로 제발 간절한 마음을 다해서 부탁드린다”고 말하며 한국사회에 진실규명을 호소했다.

한-베 수교 30주년 앞뒀지만… 해결 못한 숙제

내년 한국과 베트남은 수교 30주년을 맞는다. 1955년부터 20년간 이어졌던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은 약 35만명의 군인을 파병했다. 1964년에서 1973년까지 8년 6개월간 한국군 피해는 사망 5099명, 부상 1만 962명으로 추정된다. 반면 구수정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민간인 학살 피해자는 약 9000명으로 추정된다(관련 기사: “살아남은 내가 진실 말해야”… 그분이 돌아가셨다).

▲ 베트남전 관련 빈안학살(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최대 민간인학살로 알려짐) 생존자 응우옌떤런씨는 지난해 11월 숨졌다. 그는 생전 빈안학살 당시의 비극적 상황을 20년간 증언해왔다. 지난 2015년에는 베트남 피해자 최초로 한국을 방문하여 국회에서 한국 정부에 진실 규명과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사진 이재갑 작가) ⓒ 한베평화재단, 이재갑

1999년 구수정 당시 베트남 특파원이 한겨레21을 통해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보도한 이래 학살피해 마을의 의료지원을 비롯해, 작가단체및 다양한 민간부문의 교류가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의 일환으로 이어졌다. 한겨레사는 46주간 캠페인을 통해 앞지면을 할애하며 이 사건들을 대중에게 널리 알렸고, 긴 펀딩캠페인을 통해 10만달러를 모금해 2003년 베트남 푸옌성에 한베평화공원을 설립하는 결실을 맺기도 했지만, 참전군인들의 한겨레신문사 난입으로 한때 윤전기가 멈추는 등 이 문제로 사회적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도 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활동과 지원은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을 계승하고 베트남전쟁에 대한 성찰을 통해 평화로 나아가고자 2016년 설립된 한베평화재단을 주축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내에는 몇 종의 교과서에서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한 언급이 있고, 제주 강정마을에는 피해자를 추모하는 ‘베트남 피에타’ 조각 (김서경 김운성 작가 제작)도 세워졌다.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의 1기에 해당하는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대책위원회가 결성되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운동이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고, 2018년에는 시민평화법정이 열려 대한민국에 진상조사, 손해배상, 공식인정, 민간인 학살 관련 사실 전시의 책임 모두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지만 현재까지 정확한 역사적 피해사실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조사된 바가 없다.

▲ 베트남 평화의료연대 (평연)의 베트남 현지 진료 모습 치과 한의과 의료인및 일반 후원회원 320여명으로 구성된 베트남 평화의료연대(평연)은 1999년 이래 지속적으로 현지에서 구강보건교육사업및 수술등 의료지원 활동을 해왔다. ⓒ 베트남평화의료연대 페북

이에 민변을 비롯한 한국 시민사회가 사실관계를 밝히기 위한 ‘베트남 전쟁 시기 대한민국 군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사건 조사에 관한 특별법’ (이하 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력중이다. 이외에도 2019년 4월 민간인학살 피해자 103명은 청와대 청원을 통해 진상조사및 사실인정, 공식 사과 및 공식 선언, 피해회복을 위한 조치를 요구했고, 응우엔 티 탄씨는 현재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청구도 진행중이다.

필자는 연속간담회에서 사회를 맡았고 민변에서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TF 팀장인 김남주 변호사와 특별법 제정및 그간의 진상규명 노력에 대한 여러 쟁점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 이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게된 취지와 배경은 무엇인가.

“민간인 학살 피해자 응우엔 티 탄씨를 대리해 개별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 소송을 진행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책임을 인정하라고 가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을 해야되는 제도다. 사실 가해자가 반성한다면 먼저 스스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다가서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베트남전쟁 당시에 민간인에 대해 여러가지 법적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했을 것이라고는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 사실에 대한 공적확인이 필요하다. 그것을 법률을 만들어서 제도로서 추진하고 한 개의 사건이 아닌 여러가지 사건들을 총체적으로 규명하자는 게 이번 법 제정의 취지다. 8월 25일 입법법안공청회를 하고 8월말 또는 9월초에 법안 발의를 할 예정이다.”

– 특별법의 주요 내용은 대한민국에 진상조사, 공식인정, 손해배상, 민간인 학살 관련 사실 전시의 책임을 인정한 시민평화법정의 판결 내용과 유사한가?

“진상규명에 초점을 맞춰놨다. 진상규명을 신청하고,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진상규명위원회가 대한민국에 있는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다양한 곳에 정보를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관련자를 출석시켜서 진술을 들을 수 있도록 하고, 조사절차 규정및 조사결과에 따라 진상규명 결정과 불능 결정등 공적인 결정들을 위원회가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조사가 마무리된 후 백서형태로 보고서를 만들어서 국회와 대통령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그 보고서에는 시민평화법정에서 주문으로 담았던 피해보상, 사과, 재발방지를 위한 장치, 민간인 학살 관련 사실 전시등 이런 내용들을 담아서 권고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법의 목적은 사실규명에 있고, 그 이후에 피해보상등은 법적 구속력을 갖지않고 권고만 할 수 있어 이후의 과제로 남겨두며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반대가 심한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진상규명부터 단계적으로 가려고 한다.”

▲ 베트남전 민간인학살TF 팀장 김남주 변호사 민변에서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TF 팀장을 맡고 있는 김남주 변호사(가운데)는 연속간담회중에 “베트남 피해 생존자들에게 더 이상 희망고문을 그만 했으면 한다”며 제대로된 진상규명과 고령의 피해자들에 대한 의료지원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 이재정 TV 유튜브 갈무리

– 베트남은 진상규명과 사과를 원하지 않는데 왜 한국인들이 나서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오해가 많은 것 같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관계를 잘 모르는 잘못된 인식이다. 베트남의 피해자들은 이전에도 진상규명을 명확히 원하고 있는데 초기에 우리가 그분들과 소통하는 네트워크가 없었기 때문에 명확히 전달이 안되었을 뿐이다. 응우옌 티 탄씨 등 생존자들은 2015년부터 한국에 와서 국회에서 명확히 요구했다. 심지어 작년 103명의 피해자들이 청와대 청원을 통해 진상규명하고 사과하라는 명시적 요구를 했다. 베트남 정부가 명시적으로 요구를 하지 않을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초기에 베트남 방문을 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사과를 하려고 했었는데, 사과를 하지 않고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아픈 역사가 있다’라는 유감표명으로 발언했다. 언론에는 대통령이 사과를 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지만, 베트남정부에서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시적 사과를 하지 않고 넘어갔다는 보도는 있었다. 위안부 문제처럼 국가가 피해자를 대신할 순 없다. 국가보다는 피해자를 더 중심적으로 봐야하고, 피해자는 명시적으로 원하고 있다. 더 이상 논란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예전에 일제시대 일본은 소록도에 있는 한센인들에 대해서 강제낙태 등 인권침해 행위를 했었다. 그때 이 문제가 우리사회에는 잘 전해지지 않았지만, 일본시민사회에서 먼저 소록도를 찾아가 이분들을 면담하고 이분들 피해를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했었다. 피해자가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도 가해국가의 시민단체가 나서는 게 유례가 없고 이상한 일이 아니다. 민간차원에서 일본도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듯 이것을 배워서 우리도 베트남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 민주주의와 인권 등의 주제를 다루는 싱크탱크 ‘프리덤 하우스’에 의하면, 베트남은 수십년간의 베트남공산당 (CPV) 일당체제로 표현과 종교의 자유및 인권활동이 완전히 보장된 성숙한 민주주의사회가 아닌 것으로 알고있다. 피해마을 유족이 문제해결에 목소리 내는 것에 대해 베트남 국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궁금하다.

“베트남 정부의 입장이 명시적으로 외부에 드러난 적이 없기에 입장표명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베트남 정부는 사실상 이 문제를 막지 않고 있다. 베트남은 모두 관영언론인데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다던가 응우옌 티 탄씨가 한국을 방문해서 어떤 일을 했다던가 이런 보도를 막지 않고 있다. 이 분이 소송하는 것도 막으려면 막을 수 있지만 그러지 않고 있다. 그것은 사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좋겠다, 또는 해결되는 것을 굳이 나서서 막진 않겠다는 그런 입장이 아닌가 추정해본다.”

– 한국 정부가 2019년 103명의 피해자 청원을 받고서도 ‘국방부 공식기록에 확인되지 않는다’, ‘베트남의 협조가 없어서 조사할 수 없다’는 무성의한 답변을 했다고 들었다. 주월미군 감찰보고서, 한국 베트남 퇴역군인 증언, 피해자 증언 등 증거가 많은데도 베트남 청원인들에게 한번도 연락해보지 않고 자료가 없다는 결론을 내려서 피해자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겼다. 정권교체 후 피해자들은 많은 개선과 변화를 예상했을텐데 현 정부는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저는 현 정부가 해결의지가 없다고 본다. 어느 나라가 학살기록을 하겠나. 당연히 국방부의 공식 교전기록인 ‘파월한국군전사’ ‘전투상보’엔 기록이 없다. 사실 해결하려고 하면 우선 자료만 볼 게 아니고 참전한 분들의 말씀도 들어봐야한다. 한겨레 21에서 해당 중대 소대장들이 ‘우리 중대가 퐁니퐁넛마을에 들어갔고, 우리 소대는 아니지만, 우리 뒤에 따라오던 소대에서 총소리가 났고, 학살했다고 하더라’라며 다 증언하셨다. 아직 생존한 분들이 계시는데 이분들에 대한 조사도 하나도 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 당시에 중앙정보부에서 그 사건이 외교문제로 비화되니까 조사를 했다. 국가정보원에 있는 기록도 보지 않았다고 한다. 베트남측 협조를 구하기 어렵다고 베트남 탓만 하는데 한국이나 미국 자료도 있고, 아직 생존자도 있다. 의지만 있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충실한 조사를 하지 않고서 확인되지 않는다고 하는 건 의지가 너무 없는 거다.

대통령이 의지가 있다고 저희는 전해들었는데 그게 관철이 안되는 건지, 즉 대통령의 뜻을 아래 기관들이 거스르는 건지, 대통령의 뜻이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소극적인 태도인건지 잘 모르겠다. 많이 아쉬운 점이다. 이미 50년이 넘은 일이다. 사실관계는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그 바탕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입장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진실은 가둘 수 없는 것 아닌가.”

▲ 한국시민사회의 국방부앞 기자회견 모습 2019년 4월 4일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 103명은 진상조사,사실인정, 공식 사과등을 요구하며 청와대에 직접 청원하였으나 2019년 9월 국방부는 보유하고 있는 한국군 전투 사료에 민간인 학살 기록이 없고 베트남당국의 협조가 없어서 조사할 수 없다는 답변을 했다. ⓒ 한베평화재단

(2편 “베트남전 생존자들에게 희망고문 그만했으면”로 이어집니다)
김남주 민변 베트남전TF 팀장 인터뷰② “피해자도 참전군인도 고령, 어떻게 정리할지 고민해야”

▲ 이길보라 감독의 다큐 <기억의 전쟁>중 2018년 베트남 시민평화법정 모습 민변에서 이 시민법정의 틀을 만들었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베트남전쟁의 의미를 따져보고 법률적 다툼을 진행했다. 피해 생존자가 원고로 참여했고 참전군인의 증언도 있었다. 재판부로 위촉된 김영란 전 대법관, 이석태 변호사 (현 헌법재판관), 양현아 서울대법학전문대 교수 3인은 대한민국의 책임 내용 (공식인정, 진상조사, 손해배상)등을 인정했다. ⓒ 배급사 시네마달

– 퐁니퐁넛마을 민간인학살 피해자인 응우엔 티 탄씨가 현재 국가배상소송을 하고 있다. 소장이 제기된 지 1년 2개월 경과되었고 쌍방에서 쟁점 정리중이라고 들었다. 내년쯤 재판이 끝나고 1심선고가 예상되는데 승소할 가능성은 어떤가.

“내년에 선고될 것이라는 것은 추정이고, 재판 진행경과에 따라 다르다. 국내 군사재판에서는 민간인 살해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례들이 꽤 있다. 전시 강간죄로 판결받은 판결문도 남아있다. ‘민간인을 살해한 적이 없다’는 건 맞지 않고, 이미 법원에서 공적확인을 받은 사례가 있다. 그 이외에도 많은 일이 묻혀있다. 소송관련해서 증거는 꽤 많다. 당시 미군과 마을출신이 포함된 남베트남민병대가 약 400미터 거리에서 같이 망루에서 지켜봤다. 이 사건 직후에 이들이 마을에 들어가 생존자를 구조, 시신을 수습하고 사진도 찍었다. 미군 제3해군상륙군 사령부에서 조사를 시작해서 미군, 남베트남민병대, 생존자들의 생생한 진술을 받았다.

그게 미국 문서보관서에 있었고 저희가 확보해서 법원에 제출했다. 이외에도 그 마을에서 작전했던 해병2여단 1중대 병사와 소대장들 증언을 모두 봤을때 한국군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다. 이밖에 다양한 법적 쟁점도 있다. 국가배상청구를 할때 외국인이 청구할 경우에는 한국인도 베트남정부를 상대로 소송할 수 있는 ‘상호보증’ 제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존재하냐 여부, 소멸시효가 지나지 않았느냐는 쟁점도 있다. 사안의 입증 뿐만이 아니라 이런 법리적 쟁점을 넘어서야 하는 사건이라서 결과는 예상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법원이 시효를 내세워 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기에는 인도주의에 반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국정원에게 퐁니퐁넛 사건의 조사기록을 요청하자 정보공개 소송절차통해 답을 받아가라해서 4년 소송으로 15글자만 받았다. 국정원의 사실관계 조사협조를 위해 관할인 국회정보위에 노력해달라고 간담회에서 발언하셨다. 국정원 개혁도 베트남전쟁 진상규명에 필수요건일까.

“저희가 퐁니퐁넛 사건에서 ‘국정원의 사실조회를 통해 자료를 제공하라고 명령해주십시오’라고 법원에 신청하자 법원이 저희 신청을 받아들여서 국정원에게 사실조회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국정원은 사실조회에 응하지 않고 정보공개절차를 통해 받아가라고 답을 했다. 15자를 소송을 통해 받아낸 것처럼, 이는 기나긴 소송을 통해 뺏어가라고 하는 비겁한 결정이고, 가해자가 피해자를 조롱하는 꼴밖에 안 된다. 인권 국가를 지향한다는 대한민국이 할 행동은 아닌 것이다. 특별법이 제정되면 과거사진상규명법처럼 국정원에 자료를 요청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특별법이 제정되면 그를 통해서 국정원으로부터 자료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 한겨레가 46주간에 걸쳐 펀딩 캠페인도 하고, 앞지면을 할애해 대중적으로 사안을 널리 알려 마치 NGO 역할을 했다. 반면 참전군인들의 한겨레 신문사 습격사건은 한국사회내에서 베트남전을 ‘반공과 발전’의 가치로 신봉하는 냉전의 시각과 인권및 생명권의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이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다. 쌍방간 기억방식에 간극이 큰데 이런 시각차이를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이제는 서로 대화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전에는 한겨레 신문사에서의 충돌처럼 서로 힘겨루기, ‘듣든 말든 나는 내 의견을 큰소리로 외치겠다’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서로 상대방의 입장도 들어보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참전군인들도 어떤 점에서 불편한지 자세하게 알아보는 계기가 필요할 것 같다. ‘나는 민간인을 살해하거나 학대한 사실이 없는데 왜 참전군인 전체를 매도하느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 같고, 베트남전이 게릴라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내가 민간인을 살해하긴 했지만 민간인과 게릴라가 구분되지 않는 특수한 상황이어서 내 행위를 비난할 수 없다’라고 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

또 ‘민간인을 살해한 것은 잘못됐지만 상관 명령에 따라서 한 행위라서 나도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하시는 분 등 여러 층위가 있을 것 같다. 또 ‘차제에 진상을 규명해서 문제되는 부대와 시기만 확인을 해달라’며 반대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고, 대화를 통해 특정행위가 국제인도법규범을 위반한 것인지, 자료부족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인건지 등 고민을 해봐야 되는 문제같다. 이에 더해 참전군인들이 연세가 무척 많으신데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사회가 같이 고민해보는게 좋지 않을까 싶다.”

– 2001년 5월 하미 위령비 비문 사건에 대해서는 이번에 간담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 1968년 청룡부대에 의해 주민 135명이 희생된 꽝남성의 하미학살 희생자를 추모하기위해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2만5천 달러를 지원해 2001년 위령비를 준공했다. 이는 양국간의 과거청산을 위한 민간단체 최초의 지원사업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한국 대사관 이용준 참사관 (<잊혀진 상흔을 찾아서>의 저자)및 참전군인단체의 개입으로 준공식전 비문을 덮은것은 독일에서 일본정부의 외압으로 있었던 베를린 소녀상 철거압박및 레겐스부르크 소녀상 비문 철거문제와 너무 닮았다. 이 비문을 다시 새기는 것도 진상규명과 아울러 필수 과제라고 본다.

▲ 한국정부의 외압으로인해 대리석으로 가려진 하미위령비 비문 권현우 (한베평화재단 팀장)은 하미학살 피해자 유족들은 한베평화재단에게 한국정부의 압박으로인해 대리석으로 가려진 하미위령비 비문 내용의 액자를 지속적으로 전달받고 있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해결을 촉구했다. ⓒ 이재정 TV 유튜브 갈무리

“저는 위령비 건립에 대해 전우회에서 재정지원을 했기 때문에 의견을 낼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사실관계나 이분들이 느꼈던 공포나 분노를 표현한 부분에 대해서 의견을 내거나 수정요청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더더욱 한국 대사관측에서 알고서 이 문제를 전우회측에 알리고 그 비문을 덮게끔 현장에서 관여했던 점은 매우 문제가 있다고 본다.

다시 비문을 열어야하는데 한국정부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하미마을 유족회나 지역인민위원회는 한국정부의 승인이 필요하다고해서 비문을 덮고 있는 상태이기때문에 한국정부가 막고 있는 것인지, 다시 열어도 문제가 없는 것인지 한국정부의 의사확인이 필요하다. 현재 전우회가 없어져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기때문에 대사관측과 소통해보는 게 적절하지 않나 싶다.”

– 간담회중에 “베트남 피해 생존자들에게 더 이상 희망고문을 그만 했으면 한다. 생존자가 ‘더 이상 오지말라, 아니면 약이라도 달라’고 아주 간절한 말씀 하시는데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셨다. 지원측면에서 어떤 실질적인 조치가 필요할까.

“대통령이 진정성있는 사과를 하겠다고 알려졌는데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아서, 베트남정부가 원하지 않아서 안 했다고 한다면 그 절절한 마음을 실질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 인도적 지원이다. 고령에다가 총 칼 등 많은 상처가 있으니까 치료가 제일 급하다. 고통 완화등 치료를 꾸준히 해야하는데 노무현정부 당시 종합병원이 지어진 이후에 지원이 없었다. 이동식병원 시스템으로 학살마을을 방문해 치료지원을 하면 좋겠다. 고령 피해자들에 대한 의료지원이 제일 시급한 문제다.”

▲ 베트남평화의료연대 한의사들의 베트남 현지 학교 방문 모습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소속 한의사들이 직접 베트남 현지의 학교를 방문해 성장교육을 진행했고 500여명의 베트남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 ⓒ 베트남평화의료연대 페북

– 19차례 의료지원사업을 해온 베트남평화의료연대를 비롯해 작가및 예술단체들이 민간에서 그간 꾸준히 교류가 있었다는 그 자체로 상당히 고무적인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본다. 무려 20년을 이어온 운동이 이렇듯 꺼지지 않는 불씨로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일까.

“이 운동을 해온 세대가 민주화운동과 그 이후의 세대들이라서 인권의 가치에 감수성이 높은 세대라는 생각이 든다. 80년 광주학살의 기억도 있어서 그분들에게 손을 내밀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고통을 우리도 겪었기에 동류의식이 있어서 동화가 잘 되는 것 같다.

아울러 멀리까지가서 많은 비용을 들이고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활동했다는 것은 그만큼 탄탄한 조직력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특히 베트남평화의료연대는 건치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조직이 주도하신 것 같은데 사회참여를 하고 싶어하는 치과의사들의 열망과 의료전문성을 잘 접목하고 조직화해 풀어낸 것 같다. 오랫동안 지속된 것은 정말 대단하다.”

– 관련 특별법제정을 위해 시민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은.

“특별법이 특별한 법은 아니고, 과거 사실을 확인하자는 것이다. 그간 수많은 의혹과 사회적 고발이 있었고 너무 많은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것을 다 덮고 가기에는 우리 공동체의 가치지향, 또는 품격과 맞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가 아시아에서 인권을 선도하는 국가로서 이 문제를 해결할 때가 됐다. 해결의 방법으로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진실을 밝히자는 것이다. 그 진실속에서 평가가 나올 것이고 한걸음씩 내딛으면 된다. ‘당장 사과하고 당장 배상하자’라기보다는 차근차근 사실확인하고 그 단계에서의 재발방지, 여러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류는 과거의 잘못을 성찰하면서 한걸음씩 전진해왔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도 그렇게 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평화의 소중함을 재인식하게 되고, 전쟁에도 인권의 가치와 인권규범이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킬 수 있으리라 본다. 험악해지는 미중패권 갈등 속에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쟁은 가까운 미래의 문제가 될 수 있다.

베트남학살 진상규명은 과거의 문제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문제에 닿아 있다. 한국 시민들도 진실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같이 동참해주셨으면 좋겠다.”

▲ 한국시민사회로부터 자전거를 전달받는 푸옌성 베한우호친선협회 베트남나비평화기행 푸옌성 자전거 전달식 (2020년 11월 10일) 한베평화재단, 정의기억연대, 세브란스노사공익기금은 공동으로 푸옌성 베한우호친선협회를 통해 3개 학교 150명의 학생들에게 150대의 자전거를 전달했다. ⓒ 정의연 공식 블로그

관련 연속간담회 링크는 다음과 같다.

-1차 연속 간담회: <퐁니퐁넛 마을 민간인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 초청 간담회>
-2차 연속 간담회: <진실을 밝히는 사람들>
-3차 연속 간담회: <베트남전쟁 한국군 피해마을 지원 현황과 과제>

한편 간담회는 국회의원 우원식, 우상호, 기동민, 이재정, 이규민, 이소영, 강민정, 최강욱, 윤미향을 비롯해, 한베평화재단과 더불어 경계를넘어, 다산인권센터, 대안문화연대, 마감마녀, 마을과아이들, 민족문제연구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사람과공감, 성미산학교, 소박한자유인, 수요평화모임, 식민지역사박물관, 아시아평화인권연대, 연세대학교동아시아수용소연구모임,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인권과평화를위한국제민주연대, 인권교육센터들, 전쟁없는세상, 제주43범국민위원회, 천주교인권위원회, 피스모모, 피스모모평화페미니즘연구소, 화성외국인보소호면회활동마중, 향린교회가 공동주최로 참여하고 있으며, 재단법인 동천이 후원했다.

<2021-08-0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생존자의 절규 “한국, 베트남전 피해자 고통은 외면”

☞기사원문: “한국정부, 베트남전 생존자들 희망고문 그만했으면”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조선인들… 그 비통한 역사에 대하여​

2006년 8월, KBS는 광복절을 맞이하여 ‘야스쿠니 신사’와 관련된 쟁점을 다루는 다큐 를 제작, 방영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특별한 장면이 연출된 탓에 13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야스쿠니 관련 이슈로 회자되곤 한다.

바로 태평양전쟁 A급 전범 ‘도조 히데키’의 손녀 ‘도조 유코(2013년 사망)’가 출연했기 때문인데, 그녀는 방송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으로 희생된 피해자 유족들(한국, 대만)과 야스쿠니 신사와 관련된 대담을 나눴다.

이희자(한국 측 피해자 유족): “…왜 내 아버지가… 일본의 전쟁에 끌려가서 죽어야 했던 그 당시 2만 1000명의 조선인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야 하는가 (중략) 지금도 그 당시 대만이나 한국, 남의 나라를 지배했던 그 정신을 그대로 가지고 하려고 하니까 문제 삼는 것입니다.”

도조 유코: “그럼 나라의 룰로 그 사람들을 차별해서 당신들의 아버지들을 그 당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하지 않았다면 ‘일본인으로 싸웠건만 왜 합사시켜주지 않는가?’라고 화내지 않았을까요? 어찌 됐든 일본인으로 싸워주셨으니까… 일본인으로 싸우다 돌아가신 분은 모두 야스쿠니에 모신다는 것이 전쟁에 나가셨던 당신 아버지 같은 병사와 국가 간의 약속이었어요.”

(중간 생략)

이희자: “그것이 (한국인을 야스쿠니에 합사하는 것) 자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조 유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 사람을 차별 없이 신으로 모시는 일본의 시스템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도조 유코: (이희자 씨) 당신의 슬픔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당신 아버님의 영혼이 평온하게 쉬고 계시는데 이런 식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흔들어대면 아버님이 좋아하시리라 생각하시나요? 분명히 아버님은 슬퍼하고 계실 겁니다.

*(2006.8.13. 방영)

▲ 다큐 “야스쿠니와 세여자”에 출연한 도조 히데키의 손녀 “도조 유코”(KBS) ⓒ 최우현

기막힌 대화가 이어졌다. A급 전범 도조 히데키의 손녀, 도조 유코는 “야스쿠니 신사에 왜 강제 징용된 조선인이 합사되어야 하느냐”는 물음에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인 신분으로 싸웠으므로, 또 죽어서는 야스쿠니에 간다는 약속을 하고 싸웠으므로 합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요지로 답했다.

나아가 ‘이런 야스쿠니의 시스템이 자랑스럽다. (죽은 이들의) 영혼이 평화롭게 쉴 수 있으리라 믿는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도조 유코, 그녀에게 야스쿠니 신사는 할아버지 도조 히데키를 제신으로 평안히 모시고 만나며 자부심을 보상받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처럼 비쳤다.

반면 그녀의 망언에 마주한 이희자(76)씨는 1944년 일본군의 강제징용에 의해 아버지를 잃었다. “피할 수 없으니 빨리 다녀오겠다”던 아버지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남겨진 가족들은 그대로 태평양전쟁 피해자 유족이 됐다.

세월이 흘러 이희자씨가 강제 징용된 아버지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1997년에 들어서였다. 그러나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었다. 일제는 살아 있는 아버지를 빼앗았고, 야스쿠니는 죽은 아버지까지 빼앗아 갔다. 이러한 이희자씨에게 야스쿠니 신사는 현존하는 지옥이 아닐 수 없다.

무관심 속에 방치된 야스쿠니의 한국인

일반적으로 한국인이 인지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라 함은, 일제의 침략전쟁과 전쟁범죄를 미화, 선전하는 데 앞장선 군국주의 시설이다. 이는 주지의 사실로, 야스쿠니 신사를 거론할 때 언론과 매스컴이 가장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이슈이기도 하다. 하여, 정부와 민간 차원의 대응도 상당히 활발한 편이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에 2만 1000여 명에 이르는 한국인이 무단으로 합사되어 있다는 사실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학계의 연구가 본격화된 것도 비교적 최근 일이며, 이희자씨와 같은 활동가들의 노력을 통해 조금씩 이슈화되기 시작했다. 국회 차원의 관심은 2005년 당시 강창일 의원 등 79명이 낸 ‘야스쿠니 신사의 한국인 합사 취하 및 일본 각료 등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중단을 촉구하는 대한민국 국회 결의안’이 거의 유일하다.

이러한 무관심 속에 결국 문제 해결의 공은 유족, 즉 야스쿠니 신사의 무단 합사로 피해를 입고 있는 후손들에게 돌아갔다. 유족들은 2001년, 2007년, 2013년 3회에 걸쳐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에 한국인 합사 철회 소송을 제기했으나 앞선 2건은 기각, 마지막 2013년 소송은 1심 패소한 상태다(2019년 5월 28일 도쿄 지방법원 판결).

▲ 지난 5월 28일, 야스쿠니 신사 한국인 합사 철폐 소송 패소판결에 눈물을 흘리는 유족들(민족문제연구소 영상 갈무리) ⓒ 최우현

야스쿠니가 자행한 무형의 폭력과 강압

야스쿠니 신사 합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행위가 유족들의 동의를 전혀 받지 않은 ‘무단’ 합사라는 점이다. 실제 야스쿠니 신사가 식민지 출신(조선, 대만)의 군인, 군속 출신의 전사자 합사에 착수한 것은 1959년경. 그러나 이 행위는 매우 위법적인 행위였다.

왜냐하면 1959년 한국은 더 이상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으며 ‘국적(國籍)’도 일본에 소속돼 있던 과거와는 달랐다. 1952년, 일본 법무부 통지에 의거 일본 내 거주하는 한국인은 일본 국적을 박탈 당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국적 조항을 근거로 조선 출신 강제징용 희생자들을 전후 보상 대상에서 배제했다. 쉽게 말해, 이제 국적도 바뀌고 국가의 지위 등도 바뀌었으므로 보상 등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일본 정부가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는 이러한 국제적 지위의 변동과 인식의 변화를 아예 무시하고 조선 출신 강제징용 희생자들을 무단 합사한다. 실상 이는 매우 폭력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일본의 역사학자 아카자와 시로 교수는 자신의 저서 <야스쿠니 신사>에서 당시 야스쿠니 신사의 행위를 비판했다. 그는 야스쿠니 신사가 “식민지 출신의 합사를 천황과 국가로부터 받는 은혜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등 패전 후 발생한 커다란 변동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 1940년경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참배객들(야스쿠니 신사 홈페이지) ⓒ 최우현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나서 잘못된 상태를 시정해야 하지 않을까?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유족들의 요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유족들에게 일체의 통지도 하지 않았던 폭력적 무단 합사를 철폐하고 조상들의 넋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스쿠니 신사의 입장은 무엇일까?

납득할 수 없는 야스쿠니의 논리

앞서 소개한 다큐에서 야스쿠니 신사의 입장을 대변한 도조 유코씨가 발언을 통해 야스쿠니 신사의 입장을 소개한다, 실제로 도조 유코 씨의 주장은 야스쿠니 신사의 입장과 대부분 일치한다.

도조 유코: “당신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마음대로 합사했다고 주장하시지만… 이것은 일본의 룰이었어요. 전사한 사람은 어떻든지 야스쿠니에 모신다는 것은 일본의 룰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타이완도 한국도 말할 필요도 없이 ‘일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차별하지 않고 합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도조 유코: “(이희자 씨에게) 아버님의 심정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당신의 척도로 아버님의 심정을 전부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당시 한국, 타이완의 아버님들은 정말로 용감하게 싸우셨습니다. 그것을 60년도 지난 지금 아버님을 야스쿠니에서 빼내려고 하는 것은 아버님의 의사를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그래도 아버님을 빼내고 싶으신가요?

그리고 또 하나, 일단 합사를 하면 영혼들은 하나의 방석처럼 되어버립니다. 이 사람을 빼내고 저 사람을 빼내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합사(合祀)라는 말은 사전에 있어도 분사(分祀)라는 말은 없습니다.”

* (2006.8.13. 방영)

정리하자면 ▲그 당시(전사한 시점)에서는 조선 출신자도 모두 일본인이었으므로 죽은 후에도 일본인이라는 점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모셔진다는 생각으로 싸우다 죽었다는 점 ▲교리상 하나의 영혼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한국인 합사’를 철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인이 수천 년간 이어 내려오고 지켜온 전통적인 사생관과 죽은 자를 위로하던 풍습 따윈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야스쿠니 신사의 사생관, 종교 교리를 강요하는 논리다. 이에 대해 “야스쿠니 신사 합사 문제는 민간 풍습에 대한 일본 국가 권력의 폭력적 개입으로 인해 치유되지 않는 평생의 한”이라는 지영임 교수의 비판이 있기도 했다(지영임(2013), 야스쿠니 재판을 통해 본 한일 종교관의 쟁점과 해결방안).

위자료 ‘1엔 소송’

이러한 마음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유족들은 오랜 기간 주위로부터의 오해와 편견에 시달려 왔다. 무엇보다 뼈아픈 것은 전후 사정은 알아보지 않은 채 이들을 친일파라고 매도하는 시선들이다.

“어떤 사람은 속 모르고 야스쿠니에 있다고 하면 뭐라고 말하는 줄 알아요? 친일이라는 소리를 합니다. 얼마나 일본에 충성을 다했으면 야스쿠니에 모셔놓고 그렇게 잘 대접하는데 무슨 그게 한이 되냐고 합니다. 아주 죽을 것 같아요. 그 소리를 들으면…”

*출처: 박남순 / 야스쿠니 무단합사 피해자 후손 인터뷰( ‘19.3.5.)

민족문제연구소 등에 따르면 위 박남순(76)씨의 아버지 박만수씨는 1942년 11월에 군속으로 징용되어 남양군도 브라운 섬에서 희생됐다. 그와 함께 야스쿠니 합사 철폐 소송에 참여하고 있는 이명구(81)씨의 아버지 이낙호씨도 마찬가지로 1944년 군속으로 징용, 남양군도 팔라우 섬에서 사망했다. 모두 일제의 강제징용에 의해 가족을 빼앗겼다. 이들의 이야기는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라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증언집을 통해서도 자세히 알 수 있다.

물론 아주 드물게, 자발적으로 전쟁터에 나가 전사하고 야스쿠니의 제신으로 모셔진 한국인 영령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특수한 경우를 일반적인 일로 전제하고 2001년 이래 20년 가까이 일본 정부, 야스쿠니와 싸워온 유족들을 친일이라 매도할 순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악질적인 오해는 이들 유족들이 ‘돈’을 위해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전혀 맞지 않은 사실이다. 실제 소송에 참여한 한국인 유족들은 매번 위자료(손해배상)를 요구하긴 했지만 그 액수는 불과 ‘1엔'(약 10원). 그야말로 상징적인 액수다. 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유가족들은 다시 소송(2차 항소심​)을 준비 중이다. 1심 도쿄 지방법원 패소의 아픔을 넘어 주저 없이 상급 재판소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른다. 1심 판결까지만 해도 5년 7개월이란 긴 시간이 소요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항소심에는 유족들이 납득할 만한 답변이 나올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도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지난 5월에도 일본 도쿄 지방법원은 판결 당일 5초가량의 판결문 낭독만 하고 판결 이유조차 설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참으로 무책임하다. 그 한마디를 하려고 5년 7개월을 기다리게 했단 말인가.

이처럼 현 일본 정부와 사법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야스쿠니 신사를 향해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일본이 한국인 합사의 잘못됨을 인정하려면 강제징용의 잘못된 역사를 다시 한번 들추어내고, 무단 합사와 같은 무형적 폭력 행위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극우 정치를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지금의 일본 정부가 스스로 나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운 실상이다. 광복 후 7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지만 국제사회가 인정한 전쟁 범죄의 가해자는 여전히 당당하고 피해자는 그 몰염치에 상처받고 있다.

10월 17일(목)부터 3일간 야스쿠니 신사의 제사, ‘추계예대제’가 거행된다. ‘야스쿠니 뉴스’가 또 한 번 포털의 메인을 차지할지도 모른다. 올해는 한일 양국의 역사 전쟁 한가운데 방치된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는 건 어떨까.

<2019-10-1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내 아버지는 야스쿠니라는 ‘생지옥’에 갇혀있습니다

목, 2019/10/17- 09:24
0
0

[바로보기] * 각 목차를 클릭하시면 해당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수, 2019/10/23- 03:14
0
0

한일 역사 배우려 방한…식민지역사박물관 등 방문

▲ ‘진지하게’
(서울=연합뉴스) 이지은 기자 = 한일 역사를 배우기 위해 방한 중인 일본 주오대학부속 고등학생들이 22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아 전시실을 둘러보며 연구원의 한일 식민지배 역사 관련 설명을 듣고 있다. 2019.10.22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장우리 기자 = “야스쿠니(靖國) 신사는 어릴 때 도시락 싸서 소풍 가던 아름다운 곳이라고만 생각했는데….”

22일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만난 일본인 여고생 카와세 아스카(17)양은 숙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박물관에서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인 이희자 할머니의 역사 강연을 들은 카와세 양은 “몇 년 전에도 한국을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 방문은 사뭇 다르다”며 “일본에서는 배우지 못했던 식민지배 역사를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일본 도쿄의 주오(中央)대학부속고등학교 학생 40명은 이날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방문해 일제강점기의 상흔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들뜬 표정으로 전시실 관람을 시작한 이들은 식민지배의 실상에 대한 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을 들으며 이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은 자료집에 틈틈이 필기를 하기도 했다.

이번 역사 답사를 기획한 재일교포 교사 고화정(40)씨는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한일 간 과거사를 배우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며 “학생들이 스스로 역사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는 걸 보고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사회 과목을 가르치는 카미무라 아키코(33)씨는 “그동안 학생들이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K팝과 드라마를 활용해 한국 문화를 가르쳐 왔다”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의 역사적 배경을 직접 현장에서 배워보자는 취지로 이번 일정을 기획했다”고 밝혔다.

학생들 역시 이번 답사가 한국을 더 깊게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했다.

자신을 ‘아미'(방탄소년단의 팬클럽)라고 밝힌 카토우 유나(17)양은 “전시실에서 벽관(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기 위해 벽에 홈을 파서 만든 투옥실) 문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며 “직접 눈으로 보니 더 와닿는 게 많았다”고 말했다.

다카츠 유스케(17)군은 “일본에 돌아가서 관련 역사를 더 전문적으로 공부해보고 싶다”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했다.

▲ 한일 역사 투어 나선 일본 고등학생들
(서울=연합뉴스) 이지은 기자 = 한일 역사를 배우기 위해 방한 중인 일본 주오대학부속 고등학생들이 22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아 전시실을 둘러보며 연구원의 한일 식민지배 역사 관련 설명을 듣고 있다. 2019.10.22 [email protected]

일본 학생들을 만난 이희자 할머니는 “일본 때문에 겪었던 불행한 이야기를 먼저 하게 돼 미안하다”면서도 “일본에 끌려갔다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가 아직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돼 있다”고 불행한 가족사를 설명했다.

이어 “몰랐던 사실을 알아간다면 (한국과 일본이)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여러분의 마음 한구석에 내 이야기가 남는다면 정말 보람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학생들은 남영동 대공분실, 서대문형무소 등을 더 돌아본 후 오는 24일 일본으로 돌아간다. 앞서 21일에는 명성황후 시해 현장과 평화의 소녀상도 방문했다.

[email protected]

수, 2019/10/23- 04:52
0
0

역사정의실천연대 긴급성명, “반헌법 역사관 지닌 인사 진급, 국방부가 사과해야”

▲ 국정교과서 공짜로 퍼주기 지적을 받을 고교<한국사>교과서. ⓒ 교육부

중고교 <역사> 국정교과서 진필진으로 유일하게 참여했던 장교를 국방부가 진급시키려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역사단체들이 ‘취소’를 요구하고 나섰다.

22일, 역사정의실천연대는 성명을 내고 “국정교과서 현대사 집필진이었던 나종남 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 군사사학과 교수가 무려 1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대령 진급 심사를 통과했다고 한다”면서 “국방부는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반 헌법적인 역사관을 지닌 인사를 대령으로 진급시킨 데 대해 국민 앞에 사죄하고, 진급 결정을 즉각 취소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역사정의실천연대는 “국방부가 적폐청산은커녕 박근혜 정권의 교육적폐 중의 적폐인 국정 역사교과서의 집필자에게 대령 진급이라는 ‘훈장’을 달아 줌으로써,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의지를 무색케 했다”고도 지적했다.

역사정의실천연대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전국역사교사모임, 흥사단 등 450여 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이 단체 관계자는 이날 “국방부가 나 교수에 대한 승진을 취소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육사를 항의 방문할 예정이며, 1인 시위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오마이뉴스>는 지난 21일자 기사 “국정교과서 집필 장교, 15 대 1 경쟁 뚫고 대령 진급?” (http://omn.kr/1le84)에서 “국방부가 2016년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교과서 집필에 참여했던 현역 장교를 대령으로 진급시킬 예정인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역사교육단체 대표자들은 물론 군 안팎에서도 ‘적폐 교과서 ‘복면’ 집필자에 대해 책임을 묻기는커녕 진급을 시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처음 보도한 바 있다.

<2019-10-2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국정교과서 집필 장교 진급 취소를…” 육사 항의방문 예정

수, 2019/10/23- 22:40
0
0

부산 초·중고교·대학 등 16곳 달해.. 부산학부모연대 전수조사 결과 발표”

▲ 부산지역 교육단체인 부산학부모연대가 23일 부산시교육청 본관 앞에서 친일파 교가 사용 부산지역 학교 전수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민중의소리 김보성 기자

“과거사 청산하자면서 학교 행사 때마다 친일파 교가를 부르고 있다는 게 말이 되나요”

23일 부산시 교육청 본관에 모인 부산지역 학부모들은 “친일파가 만든 교가를 반드시 교체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부산 학부모들은 역사를 배우고, 정의를 세워야 할 학교에 친일잔재가 버젓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다.

일본의 강제징용 배상 거부에 이은 수출제재, 경제전쟁 본격화로 곳곳에서 일본 규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아이들의 배움터인 학교에서 일제잔재 청산은 여전히 더디다. 특히 학교를 상징하는 교가가 친일파 작곡·작사가의 손을 거쳐 현재까지 불리고 있다는 것은 돌아봐야 할 지점이다.

부산지역 교육단체인 부산학부모연대는 친일파 작곡·작사자들이 만든 교가임에도 이를 바꾸지 않고 있는 학교 명단을 전수 조사해 이날 부산시교육청 본관 앞에서 공개했다. 명단을 보면 친일파들의 교가를 지금껏 사용 중인 부산지역의 학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등 16곳에 달한다.

이들 교가는 군국가요의 나팔수였던 이흥렬,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참전을 선동했던 김성태와 김동진, 일제 전쟁물자 공출의 공신인 이항녕이 각각 작사·작곡을 맡았다. 이흥렬은 일제 강점기 시기 내내 전국을 돌며 군국가요를 보급한 친일파다. 김성태 역시 ‘용사가 되는 날’, ‘우리들은 제국군인’ 등 노래로 전쟁참전을 선동했다.

김동진은 만주악단협회, 신징음악단 공동주최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악국 발표회’에서 일본을 찬양하는 내용의 작품을 내놓는 등 친일 행적을 일삼았다. 관료였던 이항녕은 경성제국대 졸업과 동시에 조선총독부에 들어가 친일 활동을 펼쳤고, 1941년 하동군수로 부임해 식량공출에 앞장선 바 있다. 이들은 모두 일제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을 수록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이다.

더 큰 문제는 친일파 작곡 교가에도 이를 칭송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A 고교의 경우 교가 소개란에 “한국의 중견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로 활동했던 이흥열 교수에 의해 (교가가) 고쳐졌다”며 “전자의 곡은 고음 위주나 후자의 것은 정중하고 장중한 느낌을 줘 힘에 넘친다”고 설명했다. 곡에는 학업정진으로 민족의식 고취 등을 노래한 내용을 담았다고 밝혔다.

이밖에 성차별과 군사풍 분위기의 교가 내용 역시 문제가 됐다. ‘부덕의 선봉, 고운 요조들, 행실을 닦아, 순결한 목련처럼’, ‘대한의 일꾼, 충성의 우리의 넋, 애국충성 가슴에 새겨, 함포연기 자욱한데, 태평양에 전선을 띄우고’ 등 시대에 동떨어진 표현이 많았다. 일제 문화 통치 시기 교가 제정 확산으로 일제 군가와 비슷한 군가, 행진곡 형태의 노래도 여러 학교에서 발견됐다.

이에 대해 부산학부모연대는 “친일파가 만든 교가를 아직도 학교 행사 때마다 부르고 있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며 “시 교육청은 우선 교가부터라도 청산되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구포초등학교의 학부모인 이인수 씨는 “친일파 재산조차 제대로 환수 못 하고, 국어책에는 친일 시인의 시가 있고, 친일파가 장학사업을 하고, 일제를 찬양하는 곡을 쓴 친일파의 노래를 배운다”며 “아직도 우리는 일제의 그림자 속에 있다”고 비판했다.

D고교의 졸업생인 박강우 씨도 “최근에야 우리 교가가 친일파의 손에서 탄생한 것을 알게 됐다”며 분개했다. 그는 “항일 운동을 강조하고 이를 자긍심으로 삼는 학교에서 침략전쟁을 찬양한 자의 곡이 교가라는 사실을 누구도 알려준 적이 없다”면서 “즉각 교가를 교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정은 부산학부모연대 대표는 “사회적으로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지 못하면서 친일파 교가 외에도 다수의 교가에 잔재가 남아있다”면서 “과거사를 바로잡고, 정의를 세워야 할 미래세대의 공간에 청산되지 못한 역사의 그늘이 드리워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친일 작사·작곡자의 교가 사용 학교는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 있다. 최근 바른미래당 이찬열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친일파 교가를 사용 중인 학교는 충남 31곳, 경북 30곳, 전북 25곳, 충북 23곳, 전남 18곳, 부산 16곳, 광주 13곳, 강원 10곳, 대구 6곳, 경기 6곳, 경남 5곳, 대전 2곳, 울산 3곳, 서울 1곳 등 전국적으로는 모두 189곳에 이른다.

▲ 광복절인 8월 1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아베규탄 촛불문화제에서 시민들이 경제 도발을 일으킨 일본의 아베 정권을 규탄하는 손피켓과 친일인명사전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9.08.15ⓒ정의철 기자

<2019-10-23>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친일파 교가를 우리 학교에서 아직도 부른다고요? 

※관련기사 

☞연합뉴스: 부산 16개 학교가 아직도 이흥렬 등 친일파 작곡 교가 불러 

☞헤럴드경제: 부산 16개校, 친일파가 만든 교가 아직도 부른다 

☞오마이뉴스: “교가, 교화, 교목에 아직도 친일 잔재 많아 … 이젠 바꿔야”. 

☞뉴시스: 교육희망경남학부모회 “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하자”

목, 2019/10/24- 00:28
1
0

문화예술분야에서 공로 인정받아 수상
생전 평택 음악문화 사업에 큰 기여

▲ 10월 22일 장남 노관우씨가 고 노동은 교수 대신 문화체육관광부 박양우 장관으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고 있다.

[평택시민신문] 평택시가 22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린 ‘2019 문화예술발전 유공자 시상식’에서 고 노동은 교수가 문화예술분야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장관으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고 밝혔다.

평택의 위인 지영희의 숨겨진 업적을 최초로 발굴해 평택시와 인연이 깊은 고 노동은 교수는 우리 민족의 근현대음악사를 방대하고 깊게 연구한 대학자다. 그는 민족음악학·친일음악·항일음악·동아시아음악·근현대음악가·음악교육 등 수많은 자료를 수집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 생전에 평택시의 열정적인 음악문화 사업에 감동받아 한 평생 수집한 근현대음악사료 7만점을 평택시에 기증한 바 있다.

현재 평택시는 기증자료를 전 국민에게 알릴 수 있도록 한국민족음악도서관(가칭)을 조성 하고 있으며 내년 상반기에 개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장선 시장은 “한민족의 문화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헌신한 고 노동은 교수의 유지를 받들어 미군기지가 있는 평택시가 한국을 대표해 한류음악을 알리는 국제문화도시로 거듭나겠다”고 밝혔다.

한편, 문화훈장은 문화예술발전에 공을 세워 국민문화 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는 훈장(5개 등급: 금관·은관·보관·옥관·화관)이다.

안노연 기자 [email protected]

<2019-10-23> 평택시민신문 

☞기사원문: 평택과 인연 깊은 고 노동은 교수, 은관문화훈장 수상 

※관련기사 

☞평택시사신문: 故 노동은 교수, 은관문화훈장 수훈 

☞케이에스티뉴스: 평택시, 한국민족음악 대학자 고 노동은 교수 ‘은관문화훈장’ 수상 

☞수원일보: 근현대음악사료 7만점 평택시 기증, 고 노동은 교수 은관문화훈장 수상 

☞중부일보: 고(故) 노동은 교수, 문화예술분야 공로 은관문화훈장 수상 

☞경기인터넷신문: 평택 지영희 명인의 숨겨진 업적을 최초 발굴한 한국민족음악 대학자 고 노동은 교수 ‘은관문화훈장’ 수상

금, 2019/10/25- 04:58
0
0

나카하라 미치코 와세다대 명예교수 방한 인터뷰

아사히신문 마쓰이 야요리와 함께
국제여성법정서 세기의 판결 받아내
12개국 여성 희생자 기림비 세우며
한일 넘어선 전시 성범죄 보편성 강조

“일본에 속아 끌려온 한반도 여성들
피해자 동의없는 국가정상 간 합의
해결도 그 무엇도 아니라고 생각”

▲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법정’을 주도했던 나카하라 미치코 와세다대 명예교수가 21일 오후 서울 중구 의주로의 한 호텔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email protected]

“식민지배를 받은 한국인들이 위안부 문제를 민족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과 전쟁의 문제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제의 잔혹했던 36년 식민통치의 아픔을 고발하는 대표적인 ‘역사적 상징’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오랜 시간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며 현실참여 활동을 해온 여성운동가인 나카하라 미치코 와세다대 명예교수(‘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리서치 액션센터’ 공동대표)가 강조하는 것은 ‘전시 여성에 대한 범죄’라는 위안부 문제의 보편성이다. 그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초청으로 22일 열린 ‘2000년 여성국제법정’ 19주년 기념 콘서트에 참여하기 위해 21일 방한해 와 만났다.
“저는 원래 말레이시아사를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1990년대에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 집회를 열었는데 말레이시아 기자에게 집회를 취재해보라고 권했죠. 그 기사가 마침 현지 신문 1면에 실려서 말레이시아에서도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중에 로자린 쏘우라는 피해자를 지원하면서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게 됐습니다. 할머니를 만나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면서 친해진 뒤 제 ‘대모’가 되어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저와 위안부 문제의 시작이네요.”

▲ 나카하라 미치코 와세다대 명예교수. 그와 동료들은 2000년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민간 법정을 준비하며 심각한 협박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김명진 기자 [email protected]

그 뒤 나카하라 교수는 일본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여성운동가였던 마쓰이 야요리(1934~2002) 기자와 함께 세기의 재판에 나서게 된다. 2000년 12월8일부터 사흘간 열린 ‘여성국제법정’이란 이름의 민간 법정이었다. 그는 “당시 우리는 위안부 문제에 엄청나게 큰 충격을 받아서 이를 다른 일본인들에게 알리고 전하는 일에만 집중했지만, 마쓰이는 달랐다”고 말했다. “갑자기 마쓰이가 ‘위안부 문제는 여성에 대한 국가와 일본군의 범죄’라며 이를 (확인하는) 재판을 하자고 했어요. 우리는 그런 재판이 가능할까 몹시 두려웠지만, 어쨌든 시작을 한 거죠. 마쓰이는 지금 생각해봐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나카하라 교수 등은 재판 실무 준비를 위해 1998년 6월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일본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하지만 걱정거리가 너무 많았다. 가장 큰 두려움은 전쟁의 최고 책임자이자 군 통수권자였던 히로히토 일왕을 법정에 올린다는 사실이었다. 재판을 주도한 마쓰이 등에게 우익의 협박장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한동안 안전한 곳에 몸을 숨겨야 했다.

더욱이 아시아 각국에 흩어진 피해자들을 도쿄로 불러 모으는 것은 엄청난 비용과 끈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총 64분의 피해자를 증인으로 법정에 불렀습니다. 할머니들 대부분이 고령이어서 가족이나 운동가들이 최소 2명 정도는 붙어야 했어요. 항공료와 체재비, 통역·번역비 등도 필요했어요. 중간에 ‘내 퇴직금을 부어야 하나’란 생각도 했지만, 일본의 한 고령 여성이 ‘천황의 죄를 물어야 한다’며 거액을 기부하셨어요.”

이 민간 법정에선 위안부 제도에 책임이 있는 일왕 등 9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위안부 제도가 나치 시절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에 맞먹는 ‘인도주의에 대한 범죄’임을 명명백백하게 선언한 세기의 판결이었다.

그 뒤 나카하라 교수에게 또 하나의 전기가 찾아온다. 와세다대 박사과정의 제자 홍윤신( 저자)씨가 오키나와 위안소 조사 연구를 위해 미야코지마를 방문했다가 중요한 증언을 채록했기 때문이다. 섬 주민 요나하 히로토시는 홍씨에게 12살 때 섬에서 피부가 하얀 조선인 여성들이 물을 긷거나 빨래를 하러 우물에 들렀다 잠시 쉬던 장소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갑자기 섬에 왔다가 전쟁 뒤 사라진 누나들이 누굴까 의아해하던 요나하는 이후 그들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조사 결과 미야코지마에만 총 17곳의 위안소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 나카하라 미치코 와세다대 명예교수가 21일 오후 서울 중구 의주로의 한 호텔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email protected]

이 장소에 위안부 여성들을 기억하는 비를 만들고 싶다는 요나하의 얘기를 들은 홍씨는 한국 여성운동의 ‘대모’ 윤정옥(94) 선생과 나카하라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나카하라의 주도로 시민 모금이 이뤄져 2008년 9월7일 비를 세울 수 있었다. 나카하라는 위안부 희생자가 된 12개국 여성들을 모두 기억하기 위해 12개국 언어로 비를 새겼다. 비의 이름은 ‘여성들에게’다.

나카하라는 위안부 문제가 일본 정부와 군이 저지른 ‘국가 범죄’임을 부인하려는 한·일 양국의 사회 분위기에도 일침을 놨다. “규슈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산부인과 의사였던 아소 데쓰오(1910~1989)라는 의사가 1937년 11월 군에 소집이 됩니다. ‘나는 부인과 의사인데 왜 소집을 할까’ 의아해하던 그가 상하이에 도착해 보니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아소는 군으로부터 그곳에 있던 여성 100여명의 신체검사를 하라는 명령을 받은 뒤, 일기에 ‘일본인 위안부들은 성매매를 해본 이들이었지만, 한반도 출신 여성들은 성경험조차 없어 보이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적었다. 나카하라는 “(한반도 출신 여성은) 좋은 일거리가 있다고 속여서 끌고 온 것이다. 이는 사기다. 성경험이 없는 여성이 어떻게 위안부가 되기 위해 오겠냐”고 말했다. 나카하라는 한·일 양국 정부의 2015년 12·28 합의에 대해서도 “피해자들의 동의 없이 국가 정상끼리 한 합의는 해결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본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길윤형 기자 [email protected]

<2019-10-22> 한겨레 

☞기사원문: 일왕을 민간 법정에 세운지 19년… “위안부는 취업사기이자 국가 성범죄”

금, 2019/10/25- 01:26
1
0

[현장] 아베규탄시민행동, 지소미아 종료 한 달 앞두고 한일 정부 간 타협 움직임에 반발

▲ 아베규탄시민행동이 23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소미아’(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를 예정대로 종료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지난 8월 22일 지소미아 종료를 선언했지만, 정부 안팎에선 지소미아 효력이 끝나는 11월 23일 이전 한일 정상회담을 열어 일본 수출규제 철회와 지소미아 연장을 맞바꾸는 안이 제기되고 있다. ⓒ 김시연

‘지소미아'(GSOMIA: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 한 달을 앞두고, 정부 안팎에서 일본 수출규제 철회와 지소미아 연장을 맞바꾸는 방안이 나오고 있다. 이에 시민사회단체들이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 없이 지소미아 연장은 있을 수 없다며 ‘대못 박기’에 나섰다.

750여 개 시민사회·노동·종교단체가 참여한 ‘아베규탄시민행동’은 23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에 지소미아를 예정대로 종료하라고 촉구했다.

“강제동원 사죄 배상 문제, 한일 정부 야합해선 안돼”

우리 정부는 지난 8월 22일 일본이 한국을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자 지소미아 종료를 선언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지소미아를 연장하라고 우리 정부를 지속해서 압박해왔고, 우리 정부도 최근 이낙연 총리가 일왕 즉위식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지소미아 효력이 끝나는 11월 23일 이전 한일 정상회담을 열어 일본 수출규제 철회와 지소미아 연장을 맞바꾸는 안이 논의될 수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시민사회단체는 단호했다.

박석운 아베규탄시민행동 공동대표는 이날 “지금 강제동원 사죄 배상을 미봉하거나 은폐하고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에서 아베와 문재인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해서 지소미아를 연장할 것이라는 보도가 흘러나오는데 명백한 가짜뉴스이길 바란다”면서 “아베 정부의 경제침략과 역사 부정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는데 이 문제를 미봉하려는 건 역사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일본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대신한 김진영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사무국장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나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도 사과를 받는 것도 거래처럼 이뤄져선 안 된다”면서 “정부 간 야합으로 문제를 덮으면 한국 사회도 일본 사회도 이 문제를 어떻게 기억하고 무엇을 책임질 것인가란 문제가 계속된다”고 밝혔다.

김 사무국장은 “1965년 한일협정이 그랬고 95년 아시아여성기금,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합의가 그랬듯 피해자와 국민 뜻을 무시하고 정부 간 야합으로 덮어 지금 일본 정부는 아직 식민 지배하는 것처럼 한국을 대하고 있고 피해자들은 아직 해방을 맞지 못한 고통 속에 살고 있다”면서 “정부는 강제동원 문제를 일본과의 정치적 협상 지렛대로 이용하려고 하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실제 오는 24일 아베 총리 면담을 앞둔 이낙연 총리는 지난 18일 일본 언론 인터뷰에서 일본이 수출규제를 철회하면 지소미아 종료를 재검토할 수도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다만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21일 국정감사에서 한일정상회담 가능성에 대해 “정상회담이 가능하려면 일본의 전향적 태도와 성과가 담보돼야 한다”면서 “그 성과를 만들기까진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밝혔다.

아베규탄시민행동은 이날 기자회견문에서 “아베 정권이 아무런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일왕 즉위식을 계기로 한일 관계를 복원하려 시도하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면서 “진작에 파기됐어야 했을 협정을 두 번이나 연장한 뒤, 수출규제와 결부해 연장을 종료하고 다시 이와 결부해 재연장한다면 문재인 정부가 촛불 민의에 반해 박근혜 정권의 적폐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며 스스로 적폐정권 행태를 닮아가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들은 “우리는 문재인 정부에 보다 단호한 태도로 미국의 압력, 아베 정권의 도발에 맞설 것을 촉구하며 박근혜 적폐인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예정대로 종료시킬 것을 요구한다”며 오는 26일 오후 6시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아베규탄 9차 촛불문화제’를 예고했다.

<2019-10-2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일본 수출규제 풀면 지소미아 연장? 역사에 죄짓는 일”

금, 2019/10/25- 01:33
0
0

0403-4

[바로듣기]

☞ (10.22) ‘내역사’ 시즌 4: 반일종족주의 반박 1편_식민지근대화론과 친일청산 부정론 비판


0523-1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4

시즌4는 기존처럼 친일파를 소환하여 그들이 식민지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이번시즌부터 인물을 확장하여 친일파 뿐 아니라 식민지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좀 더 입체적으로 식민지 시기를 다룰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지속적인 청취 부탁드립니다.

금, 2019/10/25- 01:56
0
0

지난 2004년 지원금 받아 건립된 ‘이종린 문학기념비’… “단죄비 세우자” 의견도

▲ 서산시 지곡면 안견기념관 입구에는 친일부역자로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올라있는 황산 이종린의 문학기념비(빨간 원안)가 세워져 있다. ⓒ 신영근
▲ 친일인명사전 자료에 따르면 이종린(李鍾麟 1883 ~ 1950)은 당시 서산군 출생으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언론인·종교인이며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이종린에 대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기록은 무려 4페이지에 이른다. 지난 2004년 세워진 문학기념비에는 일제강점기 후반 친일 행적이 빠진 그의 일생(사진 왼쪽)과 함께 그의 작품(사진 오른쪽)이 적혀 있다. ⓒ 신영근

3.1 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은 올해 서산시에서는 친일파 기념비가 세워진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서산시 지곡면 안견기념관 입구에는 친일부역자로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올라있는 황산 이종린의 문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친일인명사전 자료에 따르면 이종린(李鍾麟, 1883~1950)은 서산군 출생으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언론인·종교인이며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이종린에 대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기록은 무려 4페이지에 이른다.

독립운동 후 변절… 소년들에게 ‘지원병 지원’ 선동

이종린은 변절한 지식인이었다. 친일인명사전 등 현재 남은 기록을 통해 그의 행적을 따라가보면 일제강점기 3.1 운동과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의 주필로 참여하는 한편, 물산장려회와 신간회에서도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하며 독립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주력하다가 옥고를 당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종교인과 문인으로 활동했다.

여운형, 안창호와 함께 3대 웅변가로 일컫어진 그는 변절 후에 일제를 위해 강연회에 나섰다. 당시 천도교 기관지인 <신인간>을 통해 일본 식민으로서 지원병에 참여하는 것이 내선일체 완성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주장을 담은 글을 여러 편 발표하기도 했다. 나아가 각종 월간지에 “제군들은 머리와 눈이 있는 청년들이다. 일제히 지원병을 지원하라” “징병제가 실시되어 지금 서울 거리거리에는 반도 민중이 모인 자리마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소리로 가득찼다”라고 선동했다.

이종린은 일본 패망 직전인 1945년 7월 조직된 친일단체인 국민동지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친일행위와 관련해 소환장을 발부하자 자진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조직적인 방해로 제대로된 친일청산이 이뤄지지 못했고 그 역시 무죄로 풀려난다.

이후 이종린은 제1, 2대 제헌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제헌국회에서 헌법 기초위원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공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한국전쟁 때 납북돼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친일인명사전에는 이종린의 이 같은 독립운동과 함께 친일행적이 고스란히 기술되어 있다. 그는 당시 천도교 기관지인 <신인간>을 통해 일본 식민으로서 지원병에 참여하는 것이 내선일체의 완성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주장을 담은 여러편의 글을 발표했다고 기록되어있다. ⓒ 신영근
▲ 친일인명사전에는 1942년 조선에 징병제가 실시될 것이라는 소식에 조선신궁에서 징병제실시감사제를 거행하고 “징병제가 실시되어 지금 서울 거리거리에는 반도 민중의 모인 자리마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라고 외쳤다(홍은감읍(鴻恩感), <대동아> 1942년 7월호)“고 전했다. 특히, 이종린은 일본 패망 직전인 1945년 7월 조직된 친일단체인 국민동지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빨간 네모안) ⓒ 신영근

이종린 문학기념비는 당시 서산시와 지곡면 등을 중심으로 ‘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2004년 건립되었다. 이 비는 건립 당시 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와 서산시의 보조금으로 세워졌으며, 서산시 소유 부지에 건립되었다.

기념비에는 이종린의 독립운동 활동 내용은 비문에 상세히 담겨 있으나, 이후 변절해 일본에 부역한 사실은 쏙 빠져 있다.

당시 문학비 건립 추진위원이었던 A씨는 지난 18일 통화에서 “우리 지역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뛰어난 작품을 남긴 이종린 선생을 기리기 위해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건립했다”면서도 “당시에 이종린 선생이 친일을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A씨는 당시 문학비 건립에 약 2천만 원이 들었으며, 추진위가 모금을 하고 서산시가 일부를 지원해줬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功)과 과(過)를 볼 때 공이 많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건립했다”며 “당시 천도교 수장을 맡은 (이종린) 선생이 천도교를 말살하겠다는 일본의 위협에, 종교를 살리기 위해 부득이 한번 강연을 한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A씨는 “당시 한번 강연한 것을 가지고 친일부역이라고 하면 당시에 친일 안 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문학과 친일은 관계가 없다. (친일이라 하더라도) 주민들이 다 이해하기 때문에 투표를 해서 두 차례나 국회의원으로 시켜줬다. 당시 독립운동으로 정부에서도 훈장(이종린은 지난 1967년 12월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 받았다)을 준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는 파악조차 못하고 있어… “철거는 법규 확인해봐야”

▲ 친일파의 문학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것과 관련해 24일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 권희용 지부장은 “이종린은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독립운동과 3년 옥고를 치른 부분“이 있지만, ”후반에는 일본을 찬양하는 강연 등을 한 인물로 당시 신문과 문헌에 많은 자료로 나와있다”라고 말했다. ⓒ 신영근
▲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는 이종린 문학기념비는 서산시 지곡면 안견기념관 앞에 설치되어 있다. 기념관 뒤로 지곡면행정복지센터가 보인다. 하지만 지곡면 행정복지센터는 이종린이 친일파 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신영근

서산시는 해당 문학비가 시의 지원을 받아 시 소유 부지에 세워져 있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었다. 시 관계자는 “정확히 얼마가 지원됐는지 당시 문서를 확인해야 알 수 있다”면서 “법적인 5년의 문서보존기간이 끝나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라고 해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 권희용 지부장은 “이종린은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독립운동으로 3년 간 옥고를 치렀지만 후반에는 일본을 찬양하는 강연을 한 인물로 당시 신문과 문헌에 많은 자료로 나와있다”면서 “공(功)이 있다고 봐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오히려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변절하면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권 지부장은 이어 “변절한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을 위한 강연에 나서면, 국민들은 ‘독립운동가의 말이 옳은 게 아니냐”하면서 부화뇌동할 수 있다”면서 “(변절로) 더 나쁜 결과를 초래했던 사람을 공만 평가해서 기념비를 건립한 것은 너무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다.

문학비 철거에 대해선 의견이 팽팽하게 엇갈렸다. 당시 건립추진위원 A씨는 “주민들과 많은 분들의 성금으로 건립된 문학기념비 철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당시 서산시에서도 승인을 해줘 시소유 부지에 건립한 것”이라고 반발했다.

시 관계자는 “원칙적으로 시소유 부지에 개인 기념비가 세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당시에 묵시적 협조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철거를 위해서는) 관련 법규를 확인 후에 처리하는 게 맞다”고 신중한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 권 지부장은 “잘못된 것을 인정 안 하고 잘한 것만 말하면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철거보다는 서산시 또는 시의회에 동의를 얻어 친일행적을 자세히 기록한 단죄비를 기념비 옆에 세워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한편 최근 충남교육청을 비롯해 전국에서는 교육청에서는 친일파가 작사·작곡한 교가와 학교에 걸린 일본인 교장 사진 등을 교체하는 등 친일잔재 청산에 나서고 있다.

<2019-10-2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서산시 부지에 세워진 ‘친일파 문학비’… 시조차 몰랐다

일, 2019/10/27- 01:00
0
0

26일 노환으로 작고..향년 88세

▲ 근로정신대 피해자 이춘면 할머니가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후지코시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이후 입장을 밝히고 있다. 2019.01.23.ⓒ사진 = 뉴시스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 이춘면(88) 할머니가 별세했다. 이 할머니는 일본 기업 측에 자신의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지만, 어떤 사과나 배상도 받지 못한 채 작고하게 돼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할머니가 지난 26일 오전 0시 20분 서울 동대문구 소재 한 요양병원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28일 밝혔다.

이 할머니는 13세 때인 지난 1944년 “일본 후지코시 공장에 가면 돈도 벌고 중학교와 전문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국민학교 교장의 거짓말에 속아 근로정신대에 들어갔다.

이후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를 거쳐 도아먀시의 후지코시 공장에 갔고, 일요일을 제외하고 하루 10~12시간에 달하는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그곳에 있는 동안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하고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배고픔에도 시달렸다.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에서야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이 할머니와 같이 후지코시 공장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피해자는 1600여명, 이 가운데 여성이 1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지난 2015년 5월, 이 할머니는 자신이 입은 정신적·육체적·경제적 피해를 보상하라며 일본 후지코시 사에 1억원을 청구하는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2017년 3월, 한국 법원 1심 재판부는 후지코시 사측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며 이 할머니에게 1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당시 후지코시 사측은 ‘이 할머니의 손해배상청구권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소멸했다’는 취지로 항소했다.

지난 1월 항소심 재판부 역시 후지코시 사측에 “1억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또다시 후지코시 사는 항고했고, 지난 3월 22일 대법원은 이들에게 ‘상고 기록 접수통지’를 보냈다.

7개월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후지코시 사 측에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재판 절차도 진척이 없다.

다른 사건의 사례에 비추어 보면, 해당 서류를 일본 외무성이 송달하지 않고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외무성은 법원행정처가 지난 1월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에 송달해달라며 보낸 자산 압류 결정문을 전달하지 않고 있다가 지난 7월 19일 대구지법 포항지원에 돌려보낸 바 있다. 심지어 이 서류에는 아무런 반송 사유도 적혀있지 않았다.

한편, 이 할머니는 작고했지만, 이 할머니의 소송은 유족들이 계속 이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2019-10-28>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항소심 이겼는데 사과도 못받고..강제동원 피해자 이춘면 할머니 별세 

※관련기사 

한국일보: 끝내 일본 사과 못 받고 눈 감은 ‘근로정신대’ 이춘면 할머니 

tbs교통방송: 일본 사과 못 받은 채 ‘근로정신대’ 이춘면 할머니 별세 

SBS뉴스: 일본 측 사과·배상 못 받고…’근로정신대’ 이춘면 할머니 별세 

뉴스1: 근로정신대 승소에도 사과·배상 못받고..이춘면 할머니 하늘로 

부산일보: ‘근로정신대’ 이춘면 할머니 별세… 日 전범기업 후지코시 사과·배상 못 받아

아시아경제: 끝내 일본 측 사과·배상 못 받았다…’근로정신대’ 이춘면 할머니 별세 

월, 2019/10/28- 23:26
0
0

▲ 30일 서울 서초동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열린 일제강제동원 문제해결을 위한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춘식 할아버지와 양금덕 할머니가 손팻말을 들고 있다. / 김창길 기자 [email protected]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일본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를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유엔에 진정을 넣었다. 30일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일본 철강기업 일본제철이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씨(95) 등 4명에게 각 1억원씩 배상하라는 원심 판결을 확정한 지 1년이 흘렀다.

민변과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은 이날 오후 서울 서초구 민변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유엔 인권이사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강제징용 문제가 불거진 후 유엔에 직접 진정을 제기한 건 처음이다. 진정서에는 ‘일본 정부와 기업에 강제징용 사실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죄하며 즉각적으로 배상할 것을 요구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김기남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위원장은 “진정서를 제출하면 고문 방지, 인권 등 주제별 특별 보호관들이 일본 정부에 서한을 보내는 특별 절차에 들어가게 된다”며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계기”라고 했다.

민주노총은 일본 정부와 기업에 책임을 묻기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내년 6월 국제노동기구(ILO) 총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엄미경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1999년과 2015년에 ILO전문가위원회에서 일본 정부의 강제징용을 ‘강제노동’이라 규정했다”며 “위원회에서 ‘일본 정부가 강제노동의 책임성을 받아들이고 희생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고 믿는다’는 의견서를 제출했지만 일본은 한 번도 이행하지 않았다”고 했다.

▲ 이춘식 할아버지가 인천 도림초등학교 학생들이 보낸 편지 내용을 들으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email protected]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씨와 양금덕씨(88)도 참석했다. 이씨는 “국민들이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양씨는 “1944년 5월31일 여수에서 배를 타고 6월1일에 나고야 미쓰비시 중공업에 도착했다. 목포, 나주, 여수, 순천 등 5개 도시에서 138명이 동원됐다”며 “이 숫자를 아직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아베 총리와 미쓰비시는 하루빨리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외쳤다. 이씨는 인천 도림초등학교 학생들이 쓴 편지 내용을 듣고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학생들은 이씨에게 “할아버지 잘못이 아니다. 강제징용을 한 일본이 잘못이다”라고 적었다.

민변은 일본 정부가 고의적으로 한국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는 절차를 방해하고 있다고 했다. 김세은 민변 강제동원대리인단 변호사는 “지난 1월 한국 대법원이 이춘식 할아버지를 채권자로 해 일본제철에 국내 주식 압류 명령서를 보냈다. 6개월 뒤인 7월에 반송받았다”며 “일본 외무성이 강제동원 손해배상 서류들을 송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팀장은 “헤이그 송달협약에 따라 반송할 경우 반드시 사유를 밝혀야 한다. 일본은 사유를 밝히지 않았다”며 “외무성이 고의적으로 지연시키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 법원은 지난 8월 압류 명령서를 다시 보냈다. 일본 외무성이 6개월 뒤인 내년 2월 압류 명령서를 재차 반송하면 한국 법원은 공시송달(송달할 서류를 법원에 보관하고 그 취지를 공고하는 방식)로 주식 압류와 매각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일본제철에 압류 명령서가 도달했다고 간주하고 주식 감정을 거쳐 매각 절차를 본격적으로 밟는다. 매각이 진행되고 주식이 현금으로 바뀌면 이씨 등 4명의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지급된다. 김 변호사는 “외무성에서 6개월 후에 반송한다고 예상했을 때 내년 상반기는 돼야 현금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변 강제동원대리인단은 지난해 10월 대법원 판결 이후 추가로 강제동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30일 기준 서울중앙지법에 제기된 추가 소송 건수는 21건이다. 광주지법에는 9건이 추가로 제기됐다. 주식회사 쿠마가이 구미, 니시마츠건설 주식회사 등 소송에 걸린 일본 기업도 11곳으로 늘었다. 최용근 민변 강제동원대리인단 변호사는 “현재도 기록 검토가 진행되고 있다”며 “소송 규모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 이춘식 할아버지와 양금덕 할머니가 시민들의 응원이 담긴 사진과 글을 전달받고 있다. / 김창길 기자 [email protected]

탁지영 기자 [email protected]

<2019-10-30> 경향신문 

☞기사원문: 대법 강제징용 배상 판결 1년, 민변 “유엔 인권이사회 진정 제기”

목, 2019/10/31- 02:14
0
0

▲ 화상통화 기자회견 하는 정영환 교수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는 제13회 임종국상 수상자로 학술 부문에 정영환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 언론 부문에 KBS 탐사보도부 ‘밀정’ 제작팀을 선정했다고 29일 밝혔다.

정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와 재일조선인 차별 문제 등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동원 책임을 추적한 연구자다.

수상 저서인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의 생존 과정을 다뤘다.

정 교수는 2016년에는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한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을 쓰기도 했다.

정 교수는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한 한일공동심포지엄에 토론자로 초청받았다가 ‘조선적’ 재일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입국이 무산됐다. 2016년에도 출판기념회 강연회 참석하기 위해 여행증명서 발급을 신청했으나 불허됐다가 지난해야 입국이 허용됐다.

KBS 탐사보도부 ‘밀정’ 제작팀은 독립운동과 반민족행위 관련 기획 보도를 통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고 시민의 역사의식을 드높이는 데 크게 기여해 수상하게 됐다.

‘밀정’ 제작팀은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3·1운동 계보도와 임정 초기의 사진을 공개하는 등 희귀자료를 발굴하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교수를 지낸 고(故) 노동은 교수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음악 분야 집필하는 등 항일 음악과 친일 음악 연구에서 업적을 인정받아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임종국(1929∼1989) 선생은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된 이후 ‘친일문학론’을 집필하는 등 친일문제 연구와 과거사 청산에 앞장선 인물이다.

기념사업회는 2005년부터 친일청산, 역사 정의 실현, 민족사 정립이라는 임종국 선생의 뜻과 실천적 삶을 올바르게 계승하는 개인과 단체를 학술·문화와 사회·언론 두 부문에서 선정해 임종국상을 수여하고 있다.

13회 시상식은 31일 오후 7시 한국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다.

[email protected]

<2019-10-29> 연합뉴스 

☞기사원문: 제13회 임종국상 수상자에 정영환 교수·KBS 밀정 제작팀 

※관련기사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제13회 ‘임종국상’ 시상식

☞프레시안: 13회 ‘임종국상’에 정영환 교수, KBS <밀정> 제작팀 

☞경향신문: 제13회 ‘임종국상’ 수상자에 정영환·KBS ‘밀정’ 제작팀 

☞KBS: 제13회 임종국상에 정영환 교수·KBS 밀정 제작팀 

☞한겨레: ‘임종국상’ 재일 조선적 3세 정영환 교수 

☞경향신문: [원희복의 인물탐구]재일조선인역사 교수 정영환

목, 2019/10/31- 02:27
0
0

1일 푸르미르호텔에서 독립운동 연구자 등 100여명 참석
판결문과 GIS(지리정보시스템),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등 다양한 자료로 화성3.1운동 돌아봐

화성시청 전경. /사진 = 화성시 제공

[뉴스프리존,화성=임새벽 기자] 화성 3.1운동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 하는 학술세미나가 1일 푸르미르호텔에서 개최됐다.

학술세미나에는 독립운동 연구자와 화성시 3.1운동 100주년 추진위원회, 관내 광복회 회원, 문화관광해설사 등 100여 명이 참석해 화성 3.1운동의 위상 재정립에 나섰다.

이동언 선인역사문화연구소장의 사회로 ▲화성 3.1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장) ▲판결문을 통해본 화성 3.1운동(전병무 강릉원주대 교수) ▲GIS를 통해서 본 화성 3.1운동(이홍구 국사편찬위원회) ▲일본 소재 화성 3.1운동 자료현황과 분석(김도형 독립기념관 연구원) 등 주제발표가 진행됐다.

특히 이들 발표는 화성 장안·우정면 3.1운동 참여자에 ‘내란죄’를 적용한 판결문과 일본 방위성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사진자료, 지리정보시스템(GIS) 등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면서 그 어느 지역보다 강렬하게 전개됐던 화성 3.1운동을 재조명해 눈길을 끌었다.

종합토론에서는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이 좌장을 맡고 김주용 원광대교수,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최자영 한신대 연구원, 서민교 동국대 교수가 화성 3.1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논했다.

시는 이번 학술세미나를 통해 발표된 논문들은 올 연말 ‘화성독립운동연구’연구총서로 발간할 계획이다.

<2019-11-03> 뉴스프리존 

☞기사원문: 화성 3.1운동 역사적 의미 재조명하는 학술세미나 개최

월, 2019/11/04- 03:52
1
0

0403-4

[바로듣기]

☞ (11.05) ‘내역사’ 시즌 4: 반일종족주의 반박 2편 2부_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 (10.29) ‘내역사’ 시즌 4: 반일종족주의 반박 2편 1부_뉴라이트의 역사수정주의의 논리와 희망

☞ (10.22) ‘내역사’ 시즌 4: 반일종족주의 반박 1편_식민지근대화론과 친일청산 부정론 비판


0523-1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4

시즌4는 기존처럼 친일파를 소환하여 그들이 식민지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이번시즌부터 인물을 확장하여 친일파 뿐 아니라 식민지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좀 더 입체적으로 식민지 시기를 다룰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지속적인 청취 부탁드립니다.

수, 2019/11/06- 01:27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