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만화책] “친일파 열전” / 박시백, 민족문제연구소 기획

지역

[만화책] “친일파 열전” / 박시백, 민족문제연구소 기획

admin | 월, 2021/08/02- 19:40

박시백 지음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 | 비아북 펴냄 | 2021. 08. 9. | 값 16,000원 | 300쪽 | 170*235 | ISBN 979-11-91019-44-5 (03910) | 담당자 : 손지원 | T) 02-334-6123 | E) [email protected]

■ 책 소개

박시백,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말하다

올해 초, 한 인사가 친일파 후손과 독립운동가 후손의 주거 격차를 드러낸 사진을 가져와 “친일파 후손들이 저렇게 열심히 살 동안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도대체 뭘 한 걸까? 100년 전에도 친일파들은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이고 독립운동가들은 대충 살았던 사람들 아니었을까”라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되었다. 또한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 등 한일간의 역사에서 비롯된 갈등을 바라보는 주류의 시각 중에는 일본의 입장에 동조하여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박시백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광복 76주년, 친일파는 여전히 건재하다.”

일본에 강제 병합된 1910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35년에 이르는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만화로 풀어낸 작품 《35년》의 저자 박시백이 《친일파 열전》으로 다시 돌아왔다. 일제강점기 35년이라는 방대한 역사에서 친일파의 역사로 초점을 좁혀 촘촘하게 훑어내어 고리타분하게 들리는 ‘친일 청산’이라는 단어에 다시 한번 현재성을 불어넣는다.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왜 친일 청산이 여전히 현재의 문제인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해방이 된 후에도 친일파는 청산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우리 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이런 역사를 빼놓고서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다. 친일파는 여전히 건재하다. 일제강점기 시절 침략자에 붙어 민족을 배반했고 해방 후에도 주류가 되어 떵떵거렸던 당사자들은 이제 생물학적 수명을 다해 사라지고 없지만 그들의 혈연적, 사상적 후예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35년》이 던진 질문에
《친일파 열전》으로 답하다

일제강점기 역사를 다룬 전작 《35년》에서 저자는 3‧1운동을 ‘혁명’이라고 명명했다. 독립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으나 3‧1혁명 이후로 독립운동의 양상이 크게 바뀌었으며, 조선의 민중은 근대인으로 거듭났다. 일제 또한 크게 당황하여 식민 정책을 바꾸었고 감시의 눈은 더욱 은근하고 집요해졌다. 그런 와중 3‧1혁명을 ‘절호의 기회’로 본 이들이 있었다.

“능력이 없으면 나라가 부강해질 수 없다”, “조선 청년이여, 경거망동을 그만두어라”, “반성만이 살길이다” 등 ‘불령하고 어리석은 조선인’을 향한 수많은 경고와 꾸짖음이 신문과 강연 등을 통해 쏟아져 나왔으며, 더러는 직접 진압봉을 움켜쥐고 거리로 나섰다. 이들에게 있어 3‧1혁명은 하나의 ‘건수’였으며 총독부의 눈에 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번졌던 학생항일운동, 비밀리에 움직인 크고 작은 독립단체 등 숱한 ‘기회’마다 ‘건수’를 놓치지 않은 이들의 손에 무고한 목숨들이 스러져갔다.

친일파는 갑작스럽게 발생한 것이 아니다. 《친일파 열전》은 외교권을 빼앗겼던 강화도조약부터 해방 이후까지, 친일파의 탄생부터 이들이 어떻게 세를 불리고 어떻게 부를 쌓아왔는지 또 해방 이후 어떻게 그 죗값을 피해갔는지를 상세하게 추적한다.

《35년》에서 저자는 역사를 배우는 이유에 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역사를 왜 배우는가.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고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흔히 답한다. 혹자는 역사에서 살아갈 지혜를 얻는다고도 한다. 그런데 항일투쟁의 길은 고난과 죽음의 길이었던 반면 친일 부역의 길은 안락과 영화의 길이었다. 후자처럼 사는 게 역사에서 얻는 지혜가 되어버리고 만다면 역사를 배우는 건 너무 참담한 일이 된다.”

《친일파 열전》은 이 문제에 대해 저자가 내놓은 한 가지 해결책이다. 친일파들의 후손이 현재진행형으로 걷고 있는 안락과 영화의 길 아래에는 이제는 잊힌 수많은 목숨이 깔려 있다. 해방 이후, 무수한 친일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얄팍한 변명을 통해 처벌을 피해갔다. 이 책은 흔히 ‘친일을 했다’라고 뭉뚱그려지는 행위가 실은 얼마나 적극적으로 무고한 이들을 사지로 내몬 것인지, 또 얼마나 많은 비극이 거기서 기인했는지 치밀하게 추적하여 그려냄으로써 건조한 사실에 진실의 음영을 더한다. 그럼으로써 비틀린 순서를 바로 잡고자 했다. 그간 은폐해왔던 우리 사회의 상처를 직시하고, 그에 맞는 처벌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지혜를 얻을 만한 역사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강화도조약부터 해방 이후까지,
친일의 탄생과 역사를 파헤치다

이 책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389명의 인물 중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150여 명의 친일파를 가려내어 그 행적을 낱낱이 공개한다.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인물들을 살펴볼 수 있도록 3장으로 구성했다.

먼저 제1장 ‘친일의 역사’에서는 강화도조약부터 해방 직후까지 친일의 형성과 역사를 넓게 짚는다. 뒤이어 소개할 각계각층의 친일파들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자 시간의 흐름에 초점을 맞추어 굵직한 인물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제2장 ‘우리는 황국신민이다’에서는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등의 국적들, 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파들, 경찰과 밀정들, 만주에서 활동한 친일파들 등을 각각 분류하여 소개한다. 제3장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을 주름잡았던 명망가들의 친일 행위, 관리들과 군인들, 문학계, 연극계, 영화계, 음악계 등 각계각층에서 활약한 친일파들을 상세하게 소개한다.

부록으로 수록된 ‘박시백의 친일인명사전’에는 이 책에 등장하는 150여 명의 친일파의 행적을 찾아보기 편리하도록 정리했다.

제2의 반민특위, 《친일인명사전》의 정신을 이어받다!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30주년 특별 기획

평생 친일문제 연구에 헌신한 임종국 선생이 1989년 타계한 후, 그 유지를 이은 후학들이 1991년 반민족문제연구소(1995년 민족문제연구소로 개칭)를 열었다. 1999년 ‘제2의 반민특위,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자’는 운동을 시작, 2009년 11월 8일, 드디어 4,389명의 친일파 명단이 들어간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었다. 박시백 작가는 《35년》으로 임종국 선생을 기리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로부터 제14회 임종국상을 수상했다. 기념사업회는 ‘역사의 사각지대를 조명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며, 국내외에서 역사 왜곡이 자행되고 있는 시점에 창작을 통해 역사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박시백 화백의 노고와 도전정신에 경의를 표하면서’ 작가를 수상자로 결정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창립 30주년 특별 기획으로 박 작가에게 친일파의 탄생과 역사를 새로 구성한 역사 만화책 출간을 제안한 것도 바로 이런 인연 때문이다. 박시백 작가 역시 임종국 선생의 유지대로 ‘각 분야의 친일파들을 널리 알려 그들이 우리 현대사에 자리하고 있는 터무니없는 위상을 바로잡는 것이 시대적 과제인 친일 청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고, 광복 76주년을 맞아 《친일파 열전》을 출간하게 되었다.

■ 저자 소개

박시백
제주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후, 〈한겨레〉의 만평으로 데뷔했다. 스토리가 있는 시사만화 ‘박시백의 그림세상’으로 독자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2001년 돌연 신문사를 떠난 작가는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그리는 작업에 매진했고, 12년 만인 2013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권을 완간했다. 이 작품은 독자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으며 대한민국 만화대상, 부천만화대상 등을 수상했다. 이후 일제 강점 ‘35년’의 역사를 만화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독립운동의 현장을 답사하고, 각종 자료 수집과 공부 끝에 2018년 《35년》 1권을 출간했고, 2020년 전 7권으로 완간했다. 《35년》은 독자와 평단으로부터 사관과 관점이 균형 잡혔다는 평을 얻으며 제14회 임종국상을 수상했고, 2020 청소년 교양도서에 선정됐다.

■ 차례
제1장 친일의 역사
제2장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제3장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 특별부록 | 친일인물약력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재판거래’ 의혹 [연합뉴스TV 제공]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소송이 박근혜 정권 당시 ‘재판거래’로 지연돼 피해를 봤다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씨와 피해자 고(故) 김규수씨의 배우자가 최근 국가를 상대로 1인당 1억원씩 총 2억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제기했다고 27일 밝혔다.

앞서 이씨와 김씨를 비롯한 4명의 강제동원 피해자는 2005년 2월 신일본제철(현 일본제철)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당시 1·2심에서는 패소했지만, 2012년 5월 대법원이 원심을 파기하고 피해자들의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파기환송심에서도 2013년 대법원 판단대로 일본제철이 1인당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사실상 결론이 달라질 가능성이 없는 재상고심에는 5년이란 시간이 소요됐고, 원고 4명 중 이씨를 제외한 3명은 세상을 떠났다. 대법원은 2018년 10월 원고 승소 판결을 확정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검찰 수사에서 재판 지연이 박근혜 정권과 사법부의 재판거래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대법원 법원행정처 간부들이 정부 인사들과 강제동원 소송 재상고심 결과를 ‘피해자 패소’로 바꾸거나 진행을 미루는 방안을 논의한 정황이 발견된 것이다.

이에 이씨 등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받았다”며 소송을 냈다.

이들은 소장에서 “재판거래 피해자들은 아직도 사건의 진상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며 “손해를 배상받지도 책임 있는 주체로부터 어떤 공식적 사과나 의사 표시를 받지도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공권력 행사 중 가장 높은 독립성을 가져야 할 재판이 부정됐고 불법이었다는 것이 확인됐지만, 피해자들의 고통은 어떤 절차로도 회복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보도자료를 내 “재판거래 혐의로 기소된 것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소수이며, 1심 판결도 선고되지 않았다”며 “불법행위자 각각을 피고로 삼기보다 재판 과정에서 이들의 불법행위를 입증하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email protected]

<2021-05-26> 연합뉴스 

☞기사원문: “재판거래로 피해”…日강제동원 피해자들 국가 상대 소송

※관련기사 

KBS: 강제징용 피해자, ‘불법 재판거래’ 국가배상 소송 제기

목, 2021/05/27- 21:49
0
0

▲ ‘인천도시산업선교회 편’ 주인공 중 한 명인 이민우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이 젊은 시절 선교회 활동을 회고하면서 선교회 건물 철거를 막는데 힘을 모아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인천지역 민주화운동가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 시리즈 ‘인천도시산업선교회 편’ 출판기념회가 지난 29일 오후 동구 만석동 ‘동일방직’ 건너편 쉼터에서 개최됐다.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와 인천민주화운동센터가 주최하고 스페이스빔, 인천여성노동자회가 주관한 이날 행사에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 편의 주인공인 김정택, 정명자, 조옥화, 이민우, 나지현 씨 등이 참석했다.

또한 전교조 출신인 도성훈 인천시 교육감을 비롯, 이우재 계승사업회 이사장과 원학운 고문, 오경종 민주화운동 센터장,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출신인 이총각 청솔의집 대표, 박종렬 남북평화재단 경인본부 공동대표가 자리를 함께 했다.

이세영 남북평화재단 공동대표, 정세일 생명평화포럼 상임대표, 인천여성노동자회장을 지낸 조성혜 시의원, 박인규 인천도시재생지원센터장 등 인천지역 노동계와 시민사회 활동가들도 현장에 나와 이날 출판기념회를 축하했다.

이 행사는 이우재 계승사업회 이사장의 인사말에 이어 박종렬, 이총각 대표의 축사, 김도진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기념관 대표의 헌사, 오경종 민주화운동센터장의 경과보고, 책 주인공들과의 인터뷰이 및 이야기 나눔, 노래공연 순으로 진행됐다.

이우재 이사장은 “인천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눈물어린 희생을 바탕으로 6.25의 폐허를 딛고 유수의 공업도시로 발전했다”면서 “그 중심에 섰던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인천을 대한민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굳건한 한축으로 자리잡게 했다”고 치하했다.

▲ 이우재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이 인사말을 통해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역사와 노동과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성과를 치하하고 있다.

도성훈 교육감은 “도시산업선교회의 헌신적인 활동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진전에 커다란 밑거름이 됐고 전교조가 합법화되고 민주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길도 열어줬다”면서 “자라나는 학생들이 선교회의 빛나는 헌신의 역사를 현장에서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형진 일반노조위원장이 사회를 맡은 주인공들과의 이야기 나눔 순서에서 이민우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은 “가장 빛나는 젊은 시기에 선교회 간사를 맡아 활동했다”면서 “어떤 때는 괴한들이 칼을 들고 들어와 목숨을 위협하기도 했다”며 회고했다.

이어 “여기에 있는 5명 이외에도 자리를 함께 해야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다”면서 “이 자리에 빠지면 안 될 조화순 목사께서 몸이 불편해 자리를 비우신 것에 대해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며 아쉬워했다.

이 위원장은 특히 “최근 도시산업선교회 건물인 ‘미문의일꾼교회’가 화수·화평동 일대의 재개발 계획으로 인해 철거 위기에 놓였다”면서 “다행히 뜻있는 시민들의 노력 덕분에 1-2달 뒤로 최종 결정을 미뤘으나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없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인천은 물론 대한민국 노동·인권운동의 산실인 도시산업선교회 건물이 도시개발에 밀려 철거되는 일이 없도록 막아내야 한다”면서 “이 건물을 민주화 운동 자료관으로 만들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장소로 활용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달라”고 당부했다.

▲ 출판기념회 마지막 순서에서 가수 ‘졸리’가 ‘그날이 오면’ 등 노동자의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출판기념회가 끝난 뒤 참가자 일행은 오후 3시부터 행사장을 출발해 옛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자리인 ‘미문의일꾼교회’까지 도보로 이동하는 ‘함께 걷기’를 진행했다.

일꾼교회에 도착한 일행은 오후 4시부터 동영상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을 관람하는 순서로 마지막으로 이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 내가 살아온 이야기 ‘인천도시산업선교회 편’

인천민주화운동센터가 기획하고 펴낸 ‘내가 살아온 이야기’ ‘인천도시산업선교회’ 편은 문종인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연구위원이 엮고 이형진 민주노총 일반노조위원장이 감수했다. 윤희태 파리8대학 영화과 석사와 성공회대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연정, 송서경, 문건 씨 등이 힘을 보탰다.

이 책에는 정권의 탄압으로 교직에서 쫓겨나 도시산업선교회에서 간사로 활동했던 이민우 위원장 이외에도 △인천지역 의료 운동의 영역을 개척한 조옥화 선생, △산업선교회 총무로 활동하면서 80년대 민중교회 운동을 이끈 김정택 목사, △동일방직 투쟁으로 출발해 노동운동과 지역운동에 헌신한 정명자 선생, △70년대 삼원섬유 노조활동과 80년대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을 전개한 김지선 선생, △산업선교회에서 노동상담으로 간사역할을 했던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남편은 산업선교회 간사를 역임한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일꾼교회 자료실을 운영하면서 노동자 교육에 힘쓴 산업선교회의 마지막 간사 나지현 위원장 등 7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1961년 미국 감리교회 조지 오글 목사가 화수동 초가집을 매입해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노동자들의 권리의식과 인권을 함양하는 안식처이자 교육기관으로 가꿔나갔다.

“약한 것을 강하게”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오글 목사는 많은 노동자 동아리를 만들어 노동자로서 삶과 권리의식을 깨우치는데 힘을 쏟았다. 암울했던 70년대 유신독재 시절, 동일방직과 삼원섬유, 한국기계, 대성목재, 반도상사 등의 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설립해 민주적인 의식을 깨우치는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군사독재의 탄압을 받던 전 국민의 해방으로까지 그 폭을 넓혀 인천이 1970-80년대 대한민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데 크게 기여했다.

오글 목사는 1974년 박정희 정권의 ‘인민혁명당 조작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 받은 양심수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가 강제 추방당했다.

이 교회 총무를 맡았던 조화순 목사는 동일방직 사건에 대한 강연을 했다는 이유로 유신정권에 의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인천산업선교회에서 배출한 여성노동자들이 유신말기인 1978년 2월 사측의 사주를 받은 구사대에 의해 ‘똥물’을 뒤집어 쓴 사건은 유신체제의 몰락을 가져온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의 주요 기록으로 남아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조 목사에게 ‘대한민국인권상 국민훈장’을 수여했으며, 문재인 대통령은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오글 목사에게 ‘민주주의 발전 유공 포상’을 수여했다.

▲ 사진제공=인천도시산업선교회보존협의회

– 철거위기에 놓인 도시산업선교회

▲ 인천지역 11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인천시에 보낸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건물을 존치 요구 입장문

인천산업선교회가 자리한 인천 동구 화도진공원과 송현초등학교 사이 ‘화수·화평구역’이 2009년 정비구역으로 지정된 뒤, 2019년 시공사가 선정되면서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대해 인천지역 11개 시민사회·노동단체는 지난 24일 인천시 도시계획위원회에 ‘선교회 건물’의 존치를 요구하는 입장문을 보냈다.

이들은 입장문을 통해 “선교회는 대한민국 민주화 유산이자 인천의 산업유산”이라며 “현 재개발조합도 존치하기로 설계한 ‘쌍우물’과 선교회는 불과 1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면서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선교회를 쌍우물과 함께 존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촉구했다.

시 도시계획위원들은 소위원회를 구성해 도시산업선교회와 재개발 부지를 방문, 현장 확인을 벌인 뒤, ‘화수·화평구역’ 재개발 정비계획 승인 여부를 결정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글·사진 정찬흥 기자 [email protected]

<2021-05-30> 인천일보 

☞기사원문: 인천민주화운동센터, 내가 살아온 이야기 ‘인천도시산업선교회 편’ 출판기념회 개최

월, 2021/05/31- 20:25
4
0

남원지역의 ‘최초 춘향영정 복위추진 시민연대’가 31일 남원시청 앞에서 최초 영정을 광한루원 춘향사당에 봉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복위추진 시민연대 제공

전북 남원 광한루원의 춘향영정이 지난해 철거된 가운데, 새로 채울 영정을 놓고 남원지역 일부 단체가 반발하고 있다.

남원지역의 ‘최초 춘향영정 복위추진 시민연대’는 31일 남원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1931년 제1회 춘향제 때 봉안됐던 최초의 영정이 박물관에 있는데도, 남원시는 그 영정을 봉안하지 않고 있다. 시민들의 설문조사도 새로 제작하기 위해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지금 추진하는 영정 관련 연구용역은 역사성·상징성을 뺀 채 미술사·복식사로 한정해 반쪽짜리 고증에 그치고 있다. 연구용역을 당장 중단하고, 박물관에 보관된 최초의 영정을 봉안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이날부터 천막농성에 들어갔다.

남원시는 이에 대해 “일부에서 주장하는 춘향영정과 관련해 역사성이 부분적일 뿐이다. 철거과정의 절차와 새로 채울 영정에 대한 시민의견과 1920~30년대 복식에 대한 고증 등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판단을 위해 용역을 진행 중이다. 상당수 시민은 최초 영정 봉안에 찬성하지 않는 만큼, 용역 결과가 나오면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해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1931년 제1회 춘향제에 사용했다는 최초 춘향영정(왼쪽)과 지난해 철거된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작품.

앞서 남원시는 광한루원 안의 춘향사당에 걸려 있는 친일화가 김은호의 춘향영정을 지난해 9월 제90회 춘향제를 앞두고 철거했다. 김 화가의 친일 이력으로 그동안 시민사회단체 등이 지속적인 교체를 요구해왔다. 철거한 춘향영정은 크기가 가로 80㎝, 세로 160㎝로 전신을 그린 미인도 형태의 초상화다.

최초의 춘향영정은 춘향사당이 세워졌던 1931년, 경남 진주 출신 강주수 화백이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중에 일부가 훼손됐지만 남원향토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어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은호(1892~1979년)는 일본식 채색화 기법을 익혔고, 조선미술가협회의 일본화부에 참가해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미술작품을 심사하는 등 태평양전쟁 기간 중 적극적인 친일파로 활동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다.

박임근 기자 [email protected]

<2021-05-31> 한겨레

☞기사원문: 전북 남원 광한루원 새로 채울 춘향영정 두고 일부 단체 반발

화, 2021/06/01- 22:11
0
0

국가보안법 폐지 촉구하는 국가보안법폐지국민행동 [연합뉴스 자료사진.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

(서울=연합뉴스) 김치연 기자 = 국가보안법폐지국민행동은 1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는 원로들의 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는 함세웅 신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등 시민사회와 종교계 원로 196명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21대 국회는 더는 미루지 말고 국가보안법 폐지라는 역사적 소명을 다해야 한다”며 “국가보안법 폐지 없이 민주주의와 인권 발전은 있을 수 없고 남북의 화해와 통일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가보안법은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인 북측을 적으로 규정하고 남북 화해와 통일을 위한 모든 행위를 ‘이적행위’로 볼 것을 강제하는 반통일 악법이자 지금까지도 사상·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사상을 검열하는 반인권 악법”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사상검열과 마녀사냥의 근거가 되는 반민주·반인권 악법을 폐기해 사상·표현·언론·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막기 위한 공안 당국의 시대착오적 행위를 규탄하며 각 당 대표·국정원장 등과의 면담을 요구한다”고 했다.

[email protected]

<2021-06-01> 연합뉴스 

☞기사원문: 시민사회·종교계 원로 196명 “국보법 폐지는 역사적 소명”

※관련기사 

뉴스핌: 시민단체·종교계 원로 196명 “국가보안법 즉각 폐지해야”

수, 2021/06/02- 02:13
0
0

[김종성의 히,스토리: 라이벌 열전] 백선엽과 정일권

1945년 이후의 육군 지휘부를 출신별로 구분하면 크게 세 부류가 된다. 주로 만주국군과 일본군에 복무하다가 1946년 1월 이후 남조선국방경비대(국군)에 들어가 지휘부를 형성한 1세대, 그해 5월부터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육사) 단기 과정을 이수한 뒤 지휘부에 들어간 2세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10월부터 4년제 육사에 입학한 3세대로 나눌 수 있다.

육군의 주도권이 1세대에서 2세대로 넘어간 때는 1961년 5·16 쿠데타였다. 박정희는 만주국군에 복무했다는 점에서는 1세대이지만, 해방 뒤 육사 2기로 입학했다는 점에서는 2세대였다. 쿠데타의 정점인 그는 1세대인지 2세대인지 모호하지만, 쿠데타의 주력은 육사 5기와 8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2세대가 주도권을 차지한 시점은 1961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2세대가 갖고 있던 주도권이 3세대로 넘어간 것은 1979년 12·12 쿠데타다.

1세대 군부 이끈 양대 파벌

5·16 쿠데타 이전에 1세대가 주도하던 군부를 이끈 양대 파벌이 있다. 여러 파벌 중에서도 함경도파와 평안도파가 가장 인상적인 족적을 남겼다. 그 두 파벌을 주도한 대표자가 함경도파 정일권과 평안도파 백선엽이다.

일제에 협력한 한국인 장교들은 주로 함경도·평안도 출신이었다. 이들은 해방 뒤 고향에 정착하기 힘들었다. 한편, 남한을 지배하게 된 미군정은 장교 출신 한국인들의 협력이 절실했다. 이런 요인들은 이북 출신들이 남한 군부를 주도하는 배경이 됐다.

그들이 남한 군대를 주도했다는 점은 5·16 직전까지도 이남 출신의 장군이 드물었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훗날 국무부 차관이 되고 레이건 행정부의 중동특사가 될 필립 하비브 주한미국대사관 참사관이 1962년 8월 17일 딘 러스크 국무장관에게 발신한 기밀 전문은 그런 실상을 잘 보여준다. 한국 군부 내의 파벌을 분석한 이 기밀 전문은 <신동아> 2010년 3월호 기사 ‘1962년 미 대사관 기밀 문건’을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일본의 통치하에 있는 만주국에 (한반도) 북부 출신 인물이 많이 참여함에 따라, 한국군에서 북부 출신의 지도력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로 인해 (1962년으로부터) 1년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상황은 남부 출신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육군 장성 자리에 오른 젊은 박정희에게 독특한 지위를 부여했다.

이북 출신들이 군부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이남 출신으로는 드물게 박정희가 장군 자리에 올라 있었다. 이 점은 군부 지도부에 대항하는 쿠데타 세력이 박정희를 중심으로 뭉치게 되는 한 가지 원인이 됐다.

박정희는 경북 출신이고 김종필은 충남 출신이었다. 당시 군부의 비주류인 이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동기는 일차적으로는 권력욕과 정치 혼란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이북 출신들이 군을 주도하는 것에 대한 불만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 출신들이 그 정도로 우세했기 때문에, 이북 출신인 정일권과 백선엽이 이남에서 군부 파벌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하비브의 분석에 따르면, 1950년까지는 평안도파가 우세했고, 그 뒤로는 함경도파가 우세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이 같은 변화는 함경도파의 단결력에 기인했다. “정일권은 가장 응집력 있는 집단을 주도”했다고 그는 말한다.

정일권 앞지른 백선엽

▲ 박정희와 백선엽 1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백선엽 대장(왼쪽)이 5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 준장(왼쪽 세번째) 등 예하 사단장의 보직신고를 받는 장면 ⓒ 자료사진

1950년을 기점으로 무게 중심이 평안도파를 떠났지만, 두 리더에게 개인적으로 일어난 양상은 정반대였다. 평안도파가 약해지는 이 시점에 그 리더 백선엽은 오히려 강해졌다. 백선엽이 정일권을 앞지르는 일도 이때 나타났다.

백선엽(1920년 생)은 정일권보다 나이(1917년 생)로는 3년 늦고 중앙육군훈련처(만주군관학교) 입학 연도로는 5년 느렸다. 1945년 해방 당일에 백선엽은 만주국군 중위였고, 정일권은 한 단계 위인 상위였다. 해방 이전의 군인 경력자를 친미 군인으로 탈바꿈시키는 기구였던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시점인 1946년 2월에도 백선엽은 한국군 중위, 정일권은 대위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까지도 이 구도는 유지됐다. 1950년 7월 1일에 정일권은 육군총참모장(육군참모총장)이 됐다. 이 달에 정일권은 육군 소장이 됐고 백선엽은 준장이 됐다.

이랬던 구도가 백선엽의 대장 승진으로 역전됐다. 정일권이 중장 계급장을 달고 있는 동안에 백선엽은 소장에서 중장으로, 다시 대장으로 승진했다. 1953년 2월 2일 자 <동아일보> 1면 기사는 “육군총참모장 백선엽 중장은 31일부로 한국 최초의 육군대장에 승진·임명되었다”고 보도했다. 중장 진급 때까지만 해도 항상 앞섰던 함경도파 리더가 최초의 대장 진급이라는 영예를 평안도파 리더에게 내줬던 것이다.

정일권에게 뒤지던 백선엽이 한국전쟁 막판에 앞서나가게 된 것은 오늘날 지적되고 있듯이 그의 전공이 과장되게 알려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전쟁 도중에 정일권이 주춤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정일권 편은 “육군참모총장 재직 시절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등이 문제가 되자 사임했다”고 서술한다. 국민방위군 보급품 횡령으로 수만 명이 굶어죽거나 얼어 죽고 국군이 거창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이 논란이 되면서 정일권이 물러나게 됐고, 이는 전반적으로 함경도파가 우세해지는 상황 속에서도 평안도파 리더가 함경도파 리더를 앞지르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들이 주도하던 함경도파와 평안도파의 각축 시대는 1961년 5·16 쿠데타와 그 후의 숙군 작업을 거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5·16 쿠데타를 뒤엎기 위한 역쿠데타가 자주 발생했지만 하나 같이 실패했고, 두 이북 파벌은 되살아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끈질긴 생명력

▲ 귀국 인사차 국회의장실을 방문한 김종필 국무총리를 맞이하는 정일권 국회의장. 1973.6.18 ⓒ 연합뉴스

그런데 두 리더만큼은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했다. 이들은 자기 파벌을 도태시킨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도 명성을 이어갔다. 정일권은 박 정권에서 외무부 장관·국무총리에 이어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을 역임했고, 백선엽은 주프랑스대사·주캐나다대사에 이어 교통부 장관을 역임했다.

백선엽의 경우에는, 행정부 공직에서는 정일권을 따라가지 못했지만 자신의 신화를 지켜가는 인상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자기 파벌을 무너트린 박 정권 하에서도 그의 과대 포장된 한국전쟁 전공은 까발려지지 않았다.

두 리더가 영예를 유지한 결정적 이유는 박정희와의 인연에서 찾을 수 있다. 1956년에 전역한 뒤 터키·프랑스·미국에서 대사로 근무하다가 5·16 당시 하버드대학에 있었던 정일권은 박정희가 미국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위의 <친일인명사전>은 “하버드대학 유학 중이던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박정희의 지시를 받아 미국 조야를 다니며 군사정부의 지지를 이끌어냈다”고 말한다.

백선엽은 남로당원 신분이 들통 나서 영창에 갇힌 박정희를 구명해준 인연이 있었다. 박정희는 함경도파는 아니었지만 만주국군을 고리로 백선엽과 연결돼 있었다. 이것이 백선엽이 구명 운동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미군정의 지원에 힘입어 남한에 정착하기는 했지만 기반이 튼튼하지 않았던 이북 출신들은 경제력 축적을 위해 부정부패를 불사했다. 제1공화국 때 군부의 부패가 심각했던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이는 박정희·김종필 같은 이남 출신들이 군 수뇌부를 경멸하는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또 이북 출신들은 숫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자파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보호하려 했다. 하비브의 비밀 문건은 “정일권과 백선엽은 모두 자신들이 군사적·국가적 임무에 덧붙여서 자기 파벌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서 “그들은 자기 파벌의 성원들이 파벌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면 위법행위를 하더라도 이들을 보호하고 계속 활동하게 할 뿐 아니라 처벌을 받을 경우 복권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백선엽 입장에서 볼 때, 같은 만주국군 출신인 박정희의 남로당 활동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배반은 될 수 있어도 평안도파에 대한 배반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자파에 대한 반역만 아니라면 눈감아주고 비호해주던 평안도파의 행태가 백선엽의 박정희 구명을 낳은 측면도 있었다.

한 사람은 박정희를 공산당 연루 혐의로부터 건져주고, 한 사람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미국의 지지를 얻도록 도와줬다. 이 같은 박정희와의 인연은 백선엽과 정일권이 자파의 몰락 속에서도 개인적으로 승승장구하는 비결이 됐다.

국립현충원에 누워 있는 친일 반민족 장군들 중에서 이 둘이 특히 많이 알려진 것은 이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육군 파벌의 리더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박정희와의 인연이 돈독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2021-06-0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두 친일파 장군의 습성, 미 대사관이 남긴 기밀문건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시리즈: 김종성의 히, 스토리

화, 2021/06/08- 02:54
1
0

해방직후 친일파 처벌 특별법 제정 착수, 경기도 등 일제 잔재 청산 작업 이어져
군사·산업시설 관련도 상당 부분 존재해…‘철거 방법’ 가장 언급되지만 역사 잊혀져, 문화콘텐츠 등
활용 주민참여형 개발 필요

걷어내지 못한 친일파·기업… 기념·조형물도 곳곳 산재

1944년께 동원된 어린 소녀들이 미쓰비시 중공업기숙사 사감으로부터 지시사항을듣고 있다. 경기일보DB

걷어내지 못한 친일파·기업… 기념·조형물도 곳곳 산재

■친일 인물 청산을 위한 노력

친일 잔재는 ‘일제강점기 남겨진 유산 중 부정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지만, 개념적으로 볼 때 상당한 의미와 기준 등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유형들이 부정적으로 남아있다. 가장 많이 언급하고 청산하고자 하는 것이 이른바 친일 인물이다. 우리에게는 ‘친일파’로 많이 알려졌다. 그동안 친일 인물에 대해서는 상당한 노력을 하였다.

이를 위해 해방 직후 친일파를 처벌할 특별법 제정에 착수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 설치한 바 있으며, 2004년에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으로 국가가 직접 친일 인물을 선정하였다. 민간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여 친일 인물 청산을 주도하였다.

특히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계기로 일제 잔재 청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 이를 계기로 경기도 등 광역 지자체에서 구체적인 일제 잔재 청산이 진행됐을 뿐 아니라 크고 작은 지자체에서도 일제 잔재 청산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친일 잔재의 유형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동안 친일 잔재 청산은 ‘친일 인물’이 주요 대상이었다. 이는 친일 인물이 사회적으로 영향을 많이 미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친일 잔재의 유형은 친일 인물 외에 상당한 잔재들이 우리 사회에 남아 있다.

친일 잔재는 우선 인적 잔재와 물적 잔재로 구분할 수 있다. 인적 잔재는 구한말 일제의 침략과 강점기 식민 지배통치에 부역한 반민족 행위를 한 자라 할 수 있으며, 물적 잔재는 반민족 행위로 인해 얻은 재산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를 흔히 ‘친일 인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옹호하는 세력을 ‘친일파’라고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친일파는 가장 먼저 청산되어야 할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인적, 물적 친일 잔재 외에도 유형 잔재와 무형의 친일 잔재로도 구분할 수 있다. 유형 친일 잔재는 일제가 침략전쟁과 식민 지배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조성한 시설물 등 선전 조형물이다. 여기에는 식민 지배와 관련된 건물, 상업과 산업시설, 군사시설, 기념탑 및 기념비, 종교시설, 전쟁 기념물, 찬양조형물, 일본식 가옥 등이 포함된다.

무형 친일 잔재는 일제의 침략과 식민 지배 시기에 역사와 문화 등 주로 정신적으로 왜곡된 잔재들이다. 여기에는 언어 등 생활문화를 비롯하여 법과 행정제도, 관습과 의식, 교육, 문화예술, 역사 등이 포함된다. 그렇다면 친일 인물과 건축물을 제외한 유형의 친일 잔재가 어느 정도 남아 있고, 청산되었는가 살펴보자. 그리고 이를 위한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인가.

■군사 관련 친일 잔재의 현황

친일 잔재 시설물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조선총독부 건물이다. 조선 왕궁의 맥을 끊고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한편에서는 해방 후 이른바 ‘중앙청’이라 불리며 정부 건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보존하자는 여론도 있었지만 결국 해체돼 지금은 독립기념관에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이처럼 식민 지배와 관련된 건축물은 대부분 철거되거나 일부에서는 리모델링하여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에 비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한 군사시설은 아직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것이 상당 부분에 이르고 있다. 군사시설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체제기에 주로 형성됐다. 일제는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을 강제 동원하여 군사시설을 설치했다. 이를 전쟁유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비행장, 격납고, 연병장, 대피호, 동굴 진지, 방공호, 지하호 등이 있다. 국내에서 조사된 바로는 군사 관련 잔재는 전국적으로 1천300여곳이 산재한다. 경기도의 경우 비행장 건설이 적지 않았는데 수원, 오산, 시흥, 평택, 고양 등이 해당된다. 군사시설물 구축과 관련된 곳으로는 시흥, 양주, 평택, 포천 등이 있다. 이외에도 평택 함정리의 방공호, 평택 안정리의 해군시설대 보급기지, 의정부와 수원, 김포 등지에는 군부대가 있었다.

■산업 관련 친일 잔재 현황

일제강점기 산업시설과 관련한 친일 잔재도 상당 부분 존재한다. 산업 관련 친일 잔재는 공장을 비롯하여 탄광이나 광산, 철도, 도로, 토건, 하역 수송 등이 해당된다. 이 가운데 철도와 항만은 산업 관련 잔재이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에 식민통치 잔재이기도 하다. 산업 관련 잔재는 탄광과 광산이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한다.

일제는 전시체제기에 들어서면서 전쟁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석탄 외에 금, 은, 구리 등 일반 광물과 텅스텐, 석면, 몰디브덴 등 특수 광물까지 채광하였다. 광산과 탄광은 지하자원이 풍부한 북한지역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경기도는 320여개가 있었다. 철도와 도로는 교통의 편리함이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한반도에서 물적 자원을 수탈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산업 관련 잔재는 대부분 일제 지배를 지원하거나 적극 후원하는 일본 기업들이었다. 현재도 널리 알려진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 아소(麻生), 스미모토(住友), 일본제철(日本製鐵) 등 대기업 등이 있다. 이들 대기업 외에도 가네보(鐘紡), 다이니치보(大日紡), 도요보(東洋紡) 등 방적공장도 있었다.

경기도의 산업 관련 친일 잔재는 앞서 언급했듯이, 광산과 탄광이 가장 많았다. 해당 지역을 살펴보면 가평 12곳, 고양 3곳, 광주 6곳, 김포 1곳, 부천 26곳, 수원 9곳, 시흥 9곳, 평택 1곳, 안성 35곳 등 각지에 산재하고 있었다.

인천시 부평구 부평2동에 위치한 일제 강점기 한국인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미쓰비시 줄사택’. 경기일보DB

■친일 인물 관련 기념물과 조형물

유형의 친일 잔재 중 가장 우리 일상생활과 밀접한 것은 친일 인물 관련 기념물과 조형물이다. 기념물과 송덕비, 찬양비 등 비석류가 해당된다. 어느 지역에 답사를 간 적이 있는데, 일제 말기 지역에서 면장을 한 분의 기념비가 있었다. 면장은 친일 인명에는 빠져 있지만, 전시체제기 최말단에서 식민 지배에 협력한 직책으로 지역에서는 부일협력과 관련하여 가장 영향력을 미쳤다. 그런 점에서 지역과 관련된 부일협력을 한 면장을 비롯하여 반민족 행위를 한 인물과 관련된 기념시설은 친일 잔재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경기도에 산재한 친일 인물 관련기념 시설은 160여개다. 이중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120여개, 확인 불가능한 것이 26개, 망실되거나 매몰된 것이 2개 정도였다. 지역별로 보면 안성 57개, 화성 18개, 평택 13개, 용인 10개, 이천 9개, 광주와 양주 8개, 여주 7개, 포천 4개, 의정부 3개, 파주 3개, 연천 2개, 남양주 2개 등으로 대부분의 지역에 분포돼 있다. 이들 기념시설은 대부분 강점기 군수나 읍장, 면장 등 공직을 맡았던 인물과 부일협력을 한 인물의 송덕비 또는 기념비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안성의 경우 읍내면장, 공도면장, 금광면장, 소초면장, 미양면장, 보개면장, 원곡면장 등 면장으로 활동한 인물들의 송덕비이다. 평택은 서면장(진위), 현덕면장 등의 송덕비가 있다.

이외에 친일 인물과 관련된 기념시설로 기념탑과 동상 등이 아직도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수원 서둔동의 옛 농촌진흥청 구내에는 ‘혼다 코스케(本田幸介) 권업모범장장 흉상 좌대’, 안성농업학교 교정에 세워졌다가 금속물 회수에 헌납 제공된 ‘박필병(松井英治) 중추원 참의 동상’, 현재 현재 용인문화원에서 보관 중인 ‘팔굉일우비(八紘一宇碑)’ 등이 있다.

■식민 잔재 청산 방안과 앞으로의 과제

친일 잔재의 청산 중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이 철거이다. 그렇다고 철거가 청산의 진정한 방법은 아니다. 철거를 하면 이후 잊힌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킨다. 역사를 언급할 때 흔히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한다. 자랑스럽고 기억할만한 것은 기록하지만, 역사에 부정적인 것은 대부분 없애거나 지우려고 한다. 그러면 잊힌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도 남겨야 하고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유형의 친일 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들 잔재의 아카이브 구축이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이후 망실된다 하여도 역사적 기록이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자료집을 편찬하여 연구와 교육 자료로 활용돼야 한다.

또한 기존의 친일 잔재를 알리기 위해서는 현재 남아 있는 친일 잔재가 어떠한 연유로 만들어졌으며, 관련된 인물의 친일 행적에 대해 최소한의 기록을 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친일 잔재 기념시설물은 송독이나 찬양으로 일관하고 있다. 기존의 기념시설물과 함께 부일협력을 기록함으로써 인물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록은 관련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안내판을 설치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문화콘텐츠는 ▲교육프로그램 운영 ▲웹 또는 모바일 콘텐츠 개발 및 활용 ▲교육형 테마파크 활용 ▲기억의 공간 활용 ▲다크 투어 등 다양한 방식이 있다. 이러한 방식은 관이 주도할 것이 아니라 주민참여형으로 개발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성주현 1923 제노사이드연구소 부소장

<2021-06-06> 경기일보

☞기사원문: [광복 76주년, 우리가 몰랐던 친일 잔재 알리기] 유형 친일 잔재와 청산… 현황·과제

화, 2021/06/08- 19:09
0
0

[판결문 내려받기][서울중앙지법 제 34민사부(부장판사 김양호) 강제징용 배상 소송 각하]

강제노역 손배소 각하, 대법 판결과 배치

“일 기업 패소해 강제집행 땐
국제적 역효과 초래” 주장까지

민변 등 “비본질적·비법률적 판단”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당한 피해자와 유족들이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1심에서 패소한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강제노역 피해자 고 임정규씨의 아들 임철호(왼쪽)씨와 일제강제노역피해자회 장덕환 사무총장, 강길 변호사가 판결이 내려진 뒤 법원을 나서면서 소감을 말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email protected]

7일 서울중앙지법 재판부가 강제노역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을 각하한 것은 일제의 불법 행위에 책임을 못 묻는다는 내용뿐 아니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거슬렀다는 점에서도 주목받는다. 특히 일본 기업들에 강제집행이 이뤄지면 일본은 물론 미국과의 관계도 훼손될 수 있다며 매우 이례적인 ‘사법 외적’ 판단까지 밝혀, 법조계 일각에서 비상식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다른 비슷한 소송들처럼 이번에도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전범기업들의 책임이 해소됐느냐가 쟁점이 됐다. 재판부는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협정 문구를 근거로 개인 청구권도 사라졌다는 쪽에 섰다.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재판관 7 대 6 의견으로 “개인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결한 것과 완전히 배치된다. 당시 대법원은 일본제철이 한국인 피해자 4명에게 1억원씩 지급하라는 판결을 확정했다.

그런데 재판부는 “(이 사건 판단은) 전원합의체 판결의 소수 의견과 결론적으로 동일하다”며, 당시 개인 청구권도 소멸했다고 판단한 권순일·조재연 대법관의 소수 의견을 따랐다. 나아가 전원합의체의 결론(다수 의견)에 대해 “국내 최고재판소 판결이지만,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이에 터잡은 징용의 불법성을 전제로 하고 있어, 이러한 판결은 단지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하다”, “일본을 포함한 어느 나라도 자신들의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했다는 자료가 없고, 국제법적으로도 그 불법성을 인정한 자료가 없다”고까지 했다. 대법원 판단을 폄하한 듯한 표현이다.

다른 강제동원 사건에서 피해자 쪽을 대리한 임재성 변호사는 “전원합의체 판결과 다른 하급심 판결이 있을 수는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등을 고려하면 매우 이례적”이라며 “(이번 판단은) 전원합의체 소수 의견과 동일한 것으로, 법리가 앙상하다”고 했다.

게다가 재판부는 원고들이 이겨 강제집행까지 가면 심지어 대미 관계가 악화돼 안보가 불안해진다는, 사건 쟁점과 무관한 주장까지 판결문에 담았다. 재판부는 “청구를 인용하는 본안판결이 선고돼 확정되고 강제집행까지 마쳐질 경우 국제적으로 초래될 수 있는 역효과”가 있다며 “강제집행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질서유지라는 헌법상의 대원칙을 침해한다”고 밝혔다. 판결문은 “분단국의 현실과, 세계 4강의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대한민국으로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를 공유하는 서방세력의 대표 국가들 중 하나인 일본과의 관계가 훼손되고, 이는 결국 한-미 동맹으로 우리 안보와 직결된 미합중국과의 관계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권리 침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지 따지는 사법 절차에서 쟁점과 상관없는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까지 끌어들여 판단 배경으로 제시한 것이다.

재판부는 또 ‘청구권협정으로 지급된 3억달러는 과소하므로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이 포함됐다고 볼 수 없다’는 원고들 주장에 “당시 낙후한 후진국 지위에 있던 대한민국과 이미 경제대국에 진입한 일본국 사이에 이뤄진 과거의 청구권협정을 현재의 잣대로 판단하는 오류”라고 반박했다. 이어 “당시 대한민국이 청구권협정으로 얻은 외화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고 평가되는 세계 경제사에 기록되는 눈부신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며, 일본의 ‘기여’를 강조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15개 단체는 성명을 내어 “(재판부가) 비본질적·비법률적 근거를 들어 판결을 선고했다”며 “법관으로서의 독립과 양심을 저버린 판단을 했다. 민사소송 원고의 권리를 인정하면 ‘대한민국의 국가 안전보장, 질서유지 및 공공복리’가 위태로워진다는 금시초문의 법리를 설시하면서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이라는 논리를 별다른 부끄러움 없이 판결문에 명시했다”고 비판했다.

원고들은 항소 의사를 밝혔다. 장덕환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 정의구현 전국연합회’ 회장은 “재판 결과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며 “정말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라고 말했다.

한편 재판부가 선고기일을 갑자기 바꾼 것도 원고들의 비난을 샀다. 선고는 원래 10일로 잡혔으나 7일 오전 재판부가 갑자기 이날 오후로 변경해 혼란이 발생했다. 그래서 지방에 사는 피해자 다수는 법정에 오지 못했다고 한다. 재판부는 “법정의 평온과 안정을 고려해 기일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서울중앙지법 관계자는 “코로나19 상황에서 고령의 원고가 다수 모이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다”고 해명했다.

신민정 기자 [email protected]

<2021-06-08> 한겨레

☞기사원문: “일본 돈으로 한강의 기적”…우리 법원 맞나


<김양호 부장판사의 판결 전력>

☞ 위안부 소송 각하 : 법원 “위안부 소송 패소한 일본에 소송비용 강제집행은 안돼”

☞ 원폭투하소송 각하 : 미국 정부 ‘원폭 투하’ 책임 묻는 재판, 소송비용 문제로 각하한 법원

☞ 보복 선고 : 울컥 판결…징역 1년 선고에 욕하자 바로 징역 3년 때린 판사


※관련기사 

한겨레: 강제징용 소송 각하 판결, 한-일 관계 변수 되나

오마이뉴스: 두 개의 ‘위안부’ 판결, 4개월 간 대체 무슨 일이?

☞ 뉴시스: ‘위안부·日징용’ 잇단 뒤집기 판결…김양호 판사 누구?

☞ 머니투데이: 강제징용 손배소 패소 ‘충격’…재판부, ‘한미동맹·국격’까지 거론

MBC 뉴스: 日 강제징용 소송 각하…외교부 “예의 주시”

SBS 뉴스: 강제징용 피해자들 각하 판결에…”말문 막혀, 즉각 항소”

☞ 뉴스핌: [종합] ‘강제징용’ 피해자에 패소 판결한 법원…”인용하면 국제법 위반”

화, 2021/06/08- 20:03
1
0

[안양시민노래] [다운로드]

안양시민의 노래/ⓒ안양시

[경기=뉴스프리존] 김현무 기자=경기 안양시가 신곡 ‘안양시민의 노래’ 음원을 시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고 10일 밝혔다.

개정된‘안양시민의 노래’는 안양출신 고 김대규 시인의 노랫말은 그대로 사용하고, 공모전을 통해 선정된 안예림 작곡가의 멜로디와 안양시립합창단의 합창이 곁들여지면서 새 음원으로 재탄생했다.

안양시청 홈페이지‘안양소개’메뉴에서 개정된 안양시민의 노래를 감상할 수 있다. 시민의 노래 – 안양시청 (anyang.go.kr)(클릭)

재탄생한‘안양시민의 노래’는 잔잔하면서도 우렁차고 희망에 찬 선율로 와 닿는 느낌이다. 다소 진군가적 분위기가 느껴졌던 기존 곡과 차이를 보인다.

예전‘안양시민의 노래’를 작곡한‘김동진’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음악 부문에 수록돼 친일작가임이 드러났다.

시는 이에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되는 해였던 2019년부터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사용을 중지하고, 지난해 작곡을 공모해 안예림 작곡가의 멜로디를 선정한 바 있다.

최대호 안양시장은 새롭게 만들어진 안양시민의 노래를 각종 행사 시 선보여 안양시민의 자긍심과 위상을 드높이겠다고 전했다.

<2021-06-10> 뉴스 프리존

☞기사원문: 안양시, 신곡 ‘안양시민의 노래’ 시 홈페이지 음원 공개

※관련기사 

☞여성종합뉴스: 안양시, 새롭게 작곡한 ‘안양시민의 노래’ 음원 공개

☞아투시티뉴스: 안양시, 새롭게 만들어진 ‘안양시민의 노래’홈페이지에 공개

금, 2021/06/11- 00:18
0
0

[기자회견][다운로드]

[강제동원 소송 각하 판결 규탄 기자회견]

강제동원 피해자 외면한
반역사적, 반헌법적 법원 판결 규탄한다!

– 일시 : 2021년 6월 10일(목) 10시
– 장소 : 서울중앙지법 앞(교대역 법원 삼거리)
– 주최 :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 취지

  1.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양호)가 지난 7일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등 85명이 일본 전범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하였습니다. 재판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 배상 문제가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히 해결되었기 때문에 일본 기업을 상대로 청구권을 행사 할 수 없으며,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을 인정하면 일본과의 관계가 훼손되고 한미동맹으로 안보와 직결된 미국과의 관계 훼손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근거를 들어 판결하였습니다.

  2. 이번 판결은 2018년 대법원전원합의체가 내린 강제동원 배상 판결과 전면 배치되며, 침략국의 불법성을 부정하는 가해자(일본) 중심 국제정치 논리와 외교 편향의 자의적 잣대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원통한 세월을 두 번 짓밟는 것으로 매우 충격적인 판결입니다.

  3. 한일협정에 따라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입장은 가해가 일본의 입장이며, 외교관계를 문제로 강제징용피해자들의 인권을 희생하는 사법부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법부인지 의심마저 들고 있습니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부정하고 피해자들의 인권과 원통함을 해결하지 않는 한일관계는 정의로울 수도 없으며, 미래지향적이지 않다는 것은 지난 100년 한일관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4. 이에 이번 강제동원 소송 판결의 문제점을 강력히 규탄하며, 판결의 원천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공동 기자회견을 개최하고자 합니다. 귀사의 적극적인 취재와 보도를 바랍니다.

◎ 개요
사회자 : 정은주 겨레하나 국제평화부장
– 소개 및 취지 (사회자)
– 발언1 (김영환 강제동원 공동행동 정책위원장)
– 발언2 (김은형 민주노총 통일위원장)
– 발언3 (허권 한국노총 통일위원장)
– 기자회견문 낭독(장애린 흥사단 정책기획국 차장)

◎ 기자회견문

지난 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4민사부(재판장 김양호)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각하했다. 우리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인권회복을 철저히 외면하고, 반역사적이며 반헌법적인 판결을 선고한 재판부를 강력히 규탄한다.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한 2018년 대법원의 판결을 의도적으로 폄훼한 재판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을 짓밟았으며 기나긴 소송투쟁 끝에 대법원 판결을 쟁취한 피해자들의 투쟁의 역사를 유린했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외면한 채 일본 극우세력의 논리만을 그대로 답습한 재판부는 인권최후의 보루라는 사법부의 사명을 내팽개쳤다.

재판부는 일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명확히 선언하고,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장벽을 뛰어 넘어 피해자 개인의 인권 보호에 대해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2018년 대법원 판결을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폄훼했다. 재판부는 ‘국제사회에서 식민지배의 불법성이 인정되지 않았다.’고 강변하지만, ‘더반선언’ 2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국제사회는 지난 세기에 강대국들이 저지른 식민지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역사청산을 요구하며 식민지주의의 극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2018년 대법원 판결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한일 시민사회가 수십 년 동안 끈질긴 투쟁으로 일궈낸 소중한 성과이다. 법관은 헌법정신을 지키며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재판부는 법의 정신이 아니라 법관 개인의 왜곡되고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판결하여 주권자인 피해자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모욕했다. 이 판결은 사법농단의 가해자들이 단죄되지 않고 있는 오늘의 참담한 현실과 지금 왜 사법개혁이 필요한가 그 이유를 스스로 입증했다.

우리는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와 극우의 논리를 따르는 역사부정론의 그림자가 법원에까지 드리운 것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다. 그러나 피해자의 인권회복과 역사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시민들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와 가해기업의 사죄와 배상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하는 그날까지 연대하여 투쟁할 것이다.

2021년 6월 10일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관련기사

☞ KBS NEWS : 시민단체 “강제동원 피해자 외면한 법원 판결 규탄”

☞ 뉴스1 : “대법원 판결 폄훼·피해자 인권 짓밟아”…’강제징용 패소’ 비판 이어져

목, 2021/06/10- 18:41
0
0

(대전=연합뉴스) 조성민 기자 = 대전시교육청은 학교 내 일제 잔재로 여겨지는 교목, 교가 등에 대한 청산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10일 밝혔다.

지난해부터 학교상징 등에 대한 전수 조사와 검토 과정을 거쳐 일제 잔재와 관련 있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 학교 구성원들의 의견 수렴과 공감대 형성을 거쳐 청산 절차를 밟아가고 있다.

현재 교목 교체 20개교, 교가 가사 교체 2개교, 인물 사진 하단에 친일 행적 표기 1개교가 절차를 수행 중이며, 4개교가 교가 작곡 교체 여부를 구성원과 협의 중에 있다.

교육청은 이번 활동을 통해 학교의 특정 인물이나 상징물 자체에 대한 부각보다는 학교 구성원 스스로 학교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에 대해 생각해보고, 청산 과정에서 학생들의 바른 역사 인식 함양과 학교 근·현대사 교육을 강화하는 부수적 효과도 거둘 것으로 기대한다.

앞으로 역사교과연구회, 참여·체험형 역사교육 학교 등과 연계해 ‘우리 학교 역사 탐구활동’을 계속 전개할 예정이다.

권기원 민주시민교육과장은 “교육공동체의 의견을 수렴해 학교별로 청산을 추진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며 “앞으로도 학교 현장의 자치에 기반한 역사교육 강화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email protected]

<2021-06-10> 연합뉴스

☞기사원문: 대전교육청 일선 학교 ‘일제 잔재’ 청산 추진

※관련기사

☞KBS: 대전교육청, 학교 내 일제 잔재 청산 추진

☞충청뉴스: 대전시교육청, 학교 내 일제잔재 교목·교가 등 청산한다

☞뉴스1: 대전교육청, 학교 내 일제잔재 교목·교가 등 청산 작업 추진

☞더팩트: 대전교육청, 일제 잔재 교목·교가 바꾼다

금, 2021/06/11- 10:30
1
0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사무국 : 민족문제연구소)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10주년 기념을 맞아 온라인 기념식을 하였습니다.

경술국치 이후 빼앗긴 국권 회복을 위해 서간도에 세워진 신흥강습소! 우리 국군의 뿌리일 뿐만 아니라 우리 독립군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어두운 밤에 샛별과 같았던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활동을 되새기며, 신흥무관학교가 갖는 역사적 의의와 정신 계승을 위해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작 :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식순-
– 사전 영상 : 그림 안중걸, 내레이션 이은혜
– 기념사 :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
– 축사 : 김정수 육사 교장
– 축하 행사 : 육사 생도 화랑의식
– 신흥무관학교 설립 110주년 기념 사업 안내

금, 2021/06/11- 08:25
2
0

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21편 : 독립군행진곡 _ 김완태(전 육군사관학교장)

☞ 20편 : 영웅추도가 _ 김성태(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 19편 : 선봉대가 _ 권현(권기옥 선생 후손)

☞ 18편 : 대한혼가 _ 김재홍 함경북도지사(규암 김약연 선생 증손자)

☞ 17편 : 희망가 _ 김수옥(우사 김규식 선생 손녀)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우원식 국회의원(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 _ 김주(심산 김창숙 손녀)

☞ 10편 : 광복군아리랑 _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 9편 : 앞으로행진곡 _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 _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우당 이회영 손자)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 _ 정남기(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 5편 : 격검가 _ 차영조(동암 차리석 아들)

☞ 4편 : 압록강행진곡 _ 광복군 김영관 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 _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자)

☞ 2편 : 안중근옥중가 _ 함세웅 신부

☞ 1편 : 국치추념가 _ 이준식 독립기념관장(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금, 2021/06/11- 19:18
0
0

[짬]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대종교를 중광해 독립운동가들의 스승으로 불렸던 홍암 나철의 일대기인 <나철평전>을 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조현 기자

청산리전투의 김좌진, 봉오동전투의 홍범도,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역사가 신채호,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과 국무령 이상룡, 작사가 이은상, 최초 비행사 안창남, 마라토너 손기정, 이동휘, 정인보, 안희제, 지청천, 이범석, 지석영, 이동녕, 김규식, 신익희…. 독립운동사의 주역인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대종교인으로, 대종교를 부활시킨 스승 홍암 나철(1863~1916)의 대의를 따랐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종교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나철의 삶을 조명한 <나철평전>(꽃자리 펴냄)을 낸 김삼웅(78) 전 독립기념관장을 지난 4일 만났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꼽은 친일부역자 5천명 가운데 종교인이 200여명인데, 대종교인은 한 명도 없었다”며 “그런데도 나철과 2대 교주 김교헌, 청산리전투를 이끈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종사 등 대종교 지도자 3인의 묘소가 아직도 간도 들판에 방치돼 있으니 한민족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통탄했다.

대종교 부활시킨 스승 ‘나철평전’ 펴내
김좌진·홍범도·이회영·신채호 등등
수많은 항일지사들 대부분 ‘대종교인’
“친일부역자 종교인 중엔 한명도 없어”

박정희때 고문 후유증으로 집필 힘들어
“알수록 ‘놀라운 인물’ 전율 느끼며 써”

대종교를 중광한 독립운동 지도자 홍암 나철. <한겨레> 자료사진

“2·8독립선언과 3·1혁명을 촉발한 대한(무오)독립선언은 대종교가 주도했다. 또 3·1혁명 이후 중국 상하이에 세운 임시정부의 의정원 35인 중 28인이 대종교인이다.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등 항일투쟁의 주력도 대종교인들이었고, 국학·역사·한글운동도 대종교가 주도했다. 그 뿌리가 나철 대종사다. 독립운동사에서 기억해야 할 첫번째 인물로 꼽힐 만한 나철의 이름만이라도 들어본 사람이 몇명이나 될지….”

김 전 관장은 말문을 잇지 못했다. 온몸을 민족의 재단에 바쳐 신자 10여만명이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고 종단 자체가 산산이 부서져 버린 대종교와 나철을 언급할 때마다 그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지금까지 최제우, 황현, 전봉준, 김개남, 손병희, 안창호, 김성숙, 한용운, 안중근, 김창숙, 여운형, 함석헌, 장준하, 장일순, 송건호, 김대중, 노무현, 신영복 등 줄잡아 40여명의 평전을 썼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타자를 칠 줄 모른다. 오직 손글씨로만 써왔다. 근래 들어서는 손이 많이 떨려 원고 작업이 더욱 어렵다. 박정희 독재 시절 <민주전선>을 발간하면서 끌려가 고문 당한 후유증 때문이다. 떨린 것은 손만이 아니었다. <나철평전>에는 ‘한 놀라운 인간’에 대한 필자의 전율이 스며있다.

나철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 석학 왕석보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29살에 과거 급제해 고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사관을 맡았다. 33살 때 징세국장에 임명됐으나 사양하고 낙향했다고 한다. 이후 10년간 민족의 뿌리인 단군사상을 기초로 입산수도한 나철은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비밀결사 ‘자신회’를 조직해 을사오적 처단을 주도했다가 1907년 10년 유배형을 받았다. 외딴섬인 전남 신안 지도로 유배를 갔다가 민심을 두려워한 고종의 특사로 석방됐다.

“나철은 일제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국조 단군을 구심점으로 삼아야 한다며 단군교를 ‘중광’했다. 중광이란 우리 민족이 믿었던 옛 종교를 되살린다는 것이다. 그러자 기라성 같은 지식인과 우국지사들이 몰려들었다. 일제는 국권침탈 뒤 제일 먼저 단군 관련 책 20여만권을 압수해 불태우거나 일본으로 밀반출하며 1918년까지 민족말살책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나철은 이런 일제의 탄압을 피해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고 1914년 망명해 백두산 인근 청파호로 본부를 옮겼다. 대종교 신자가 수십만명으로 늘자 일제총독부는 기독교, 불교, 유교만 공인 종교로 인정하고 대종교는 ‘유사종교단체’로 분리해 악명 높은 경무국에서 감시하게 했다. 더 이상 포교가 어렵게 되자 나철은 1916년 일왕과 총독, 신자들에게 글을 남기고 구월산 단군사당에서 순명을 택했다. 그의 죽음 뒤 대종교인들의 항일투쟁이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김 전 관장은 “일제 때 수많은 사이비 교주들과 달리 나철은 종교적 위세를 보이지 않았고 대단히 검소하고 서민적이었다. 주검도 상여가 아닌 지게로 옮겨 화장하고, 부고도 돌리지 말고, 제사에도 밥 한그릇 찬 하나만 놓으라고 유언했다”며 “박은식은 추도사에서 그를 ‘민족사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이란 뜻으로 ‘만세의 종사’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런데도 최근 여당 국회의원들이 교육이념에서 단군사상의 핵심인 ‘홍익인간’을 빼려는 시도를 했던 것에 대해 “역사 공부를 안한 것인지, 역사의식이 없는 것인지”라며 혀를 찼다. 그는 “목사인 규암 김약연의 용정 명동학교는 기독교학교임에도 교가에 ‘한배검 단군의 자손의 긍지’를 담았고, 교실 뒤엔 예수 사진과 함께 단군 영정을 걸었다. 기독교인 도산 안창호는 평생 단군상을 몸에 지니고,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대규모 단군 집회를 개최했다. 이승만도 1921년 <독립신문>에 ‘한배검은 인류의 스승이셨다’고 썼고, 기독교인 백범 김구도 조선인 치고 대종교인 아닌 사람이 없다고 했다”며 “해방 후 미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홍인인간을 ‘인간에 대한 최대한의 봉사’로 번역해 교육기본이념으로 삼게 한 것도 기독교인 백낙준 박사였다”고 설명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mail protected]

<2021-06-08> 한겨레

☞기사원문: “독립운동 정신적 지주 ‘대종교의 혼’ 아직도 간도 떠도니 통탄스럽죠”

화, 2021/06/15- 00:22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