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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디뉴스]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⓶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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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디뉴스]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⓶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사건’

admin | 목, 2021/07/29- 11:18

진주 민간인 학살 유족 증언록

사진 진주시 명석면 명석고개 진주지역 유해 임시 안치소.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1주년이다. 전쟁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학살과 함께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자행되었다. 진주에서는 명석면과 용산면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중심으로 많은 민간인학살이 있었다.

단디뉴스는 민간인학살 유해 공동발굴단에서 제1차~11차까지 자원봉사자로 활동한 김영희님의 글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15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연재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연재 계획.

▲ 진주국민보도연맹 사건 배경

한국전쟁 기간 동안 진주지역은 왜 다른 지역보다 유달리 ‘보도연맹(保導聯盟)’ 가입자와 민간인 희생자가 많았을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진주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사회-문화사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진주는 물산이 풍부한 지역으로 고려시대부터 중요한 거점 행정단위인 ‘목(牧)’이 설치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 3품에 해당하는 목사(牧使)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00년 이후부터 세도정치의 발호로 인해 국가 기강이 무너지면서 각종 수탈과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진주는 이 지역만의 사회-문화사적인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진주지역이 갖는 독특한 특징을 규정 지울 수 있는 역사적 사건 세 가지가 최초로 발발하였다.

이러한 세 가지 큰 사건들은 진주지역을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을 나타내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결국 한국전쟁 기간에 민간이 대학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후기 임술년(1862년)에 진주민 유계춘의 주동으로 수만 명이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세금 착취에 저항한 임술농민항쟁(壬戌農民抗爭)이 최초로 진주에서 발발한다. 이 저항은 진주민의 사회의식의 성장에 기폭제가 되었다.

둘째,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운동(衡平運動)이다. 진주에서 이학찬, 장지필 등 백정 출신과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양반 출신이 합심하여 조직을 결성한다. 당시 백정이라는 신분은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차별이 지속되어 결국 차별 해소를 요구했는데, 이에 개화 양반들도 참여하는 등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 사건은 진주라는 지역이 상당한 진보적인 성향을 갖게 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셋째, 조선에서 맨 처음으로 소년운동의 깃을 든 곳이 바로 진주이다. 강영호(姜英鎬,1896~1950) 선생은 진주 출신 소년 운동가로 동경대학에서 문학 공부를 하였다. 당시 일본 유학 시절에 한국 학생들과 함께 처음으로 어린이 운동단체를 만들고자 했다. 1923년 방정환 선생을 비롯해 강영호, 고경인, 박춘성 등 뜻이 맞는 사람들과 어린이 문화 운동단체 ‘색동회’를 조직한다. 당시 일제강점기 시대 속 민족계몽 정신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고자 하였고, 처음으로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1920년 진주소년운동으로 시작되는 아동문학운동이 진주 문학의 싹이 되기도 했다. (주1)

사진 2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풀만 무성한 강상호 선생 묘지

또한 진주사범학교 등 중등학교가 4개나 있어 교육받은 인력이 많이 배출되어 진보적인 환경이 조성되었고, 이러한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사회운동의 기반이 되어 진주지역 보도연맹은 가입자도 많았고 희생자도 많았다. 진주지역에서 해방 후 정치적 갈등은 1946년 ‘대구10월사건’이(주2) 발생하면서 본격화되었다. 10월 7일에 경남으로 파급되면서, 진주와 마산에서 가장 격렬했다. 진주지역에서는 봉기가 일어나 진양군 정촌지서, 대평지서, 명석지서 등이 시위자들에게 점거되었다.

이후 시위자들이 경찰이 발포하여 16명이 사살되었고, 시위자 100여 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주모자로 체포된 인민위원장 강대창 등 6명이 미군정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때부터 진주형무소에는 좌익사범들이 넘쳐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진주는 빨치산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인근에 위치하여 지리산에 은거하던 빨치산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진주형무소를 자주 습격하였다. 1949년 10월 말경에 빨치산이 진주형무소, 진주시청, 진양군청을 습격하기도 한다.

이후 진주보도연맹은 1949년 12월 8일 진주극장에서 자수자와 전향자 등 천여명이 참여하고 진주경찰서장(이정용)이 이사장을 맡고 진주인민당 위원장(박진환)이 간사장을 맡아 결성된다.(주3)

좌(사진 3 형평운동 기념탑 칠암동 경남문화예술회관 건너편), 우(사진 4 신현수 선생 頌公碑(송공비) 망진산 봉수대 아래).

▲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희생 경위

1945년 9월 초순 남한의 형무소 재소자는 모두 2,600명이었다.(주4) 그러나 1926년 7월에는 17,000여 명으로, 1948년 봄에는 22,000여 명으로 늘었다.(주5) 그 후에도 전국 19개 형무소 재소자 수는 계속 늘어나 1950년 1월에는 48,000여 명에 이르렀다. 진주형무소는 한국전쟁 당시 직원이 120명이며 재소자는 1,0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주6) 재소자 중 가장 많이 수감되어 있었던 재소자들은 정치범들이었다. 진주 형무소에는 진주지청 산하 진주, 사천, 하동, 의령, 합천, 산청 등지에서 온 좌익사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그 후 정부는 1950년 2월 11일 국회본회의에서 좌익인사들의 보도연맹 강제 가입을 종용하여 협박하면서 한 개 군에 일만 명 가입시킬 것을 지시한다. 1950년 6월 25일 내무부 치안국은 「전국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城署査 제 1799호) 제목의 비상 통첩으로 전달하고 1950년 6월 29일 ‘불순분자 구속의 건’, 6월 30일 ‘불순분자 구속처리건’과 석방금지령을 지시한다. 7월 11일 ‘불순분자 검거의 건’을 하달하고 전국 보도연맹원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 가두어 놓는 일)을 단행하라 지시한다.

당시 진주경찰서는 1950년 7월 15일 진주시와 진양군 관내 지서 별로 보도연맹원을 예비검속하여 지서에 소집하고 진주경찰서로 구금한다. 구금 기간이 7일~10일 정도인데 그 기간 중 심사를 거쳐 갑, 을, 병으로 분류되었다. 일부는 진주형무소로 이송되었고, 진주형무소에는 산청, 진주, 삼천포, 하동, 의령, 진양군, 사천 등지에서 끌려온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1950년 7월 하순부터 진주는 하동에서 진격해오는 인민군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과 함양으로 진격해오는 인민군 제4사단(사단장 이권무)에 의해 점령 위기에 처하면서(주7) CIC(특무부대), 헌병, 경찰이 7월27일부터 후퇴하기 시작했다.(주8)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진주지역 보도연맹원들은 그 직전에 집중적으로 학살되었다. 진주경찰서 구금자 중 ‘갑’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7월 21일경 학살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7월 26일까지 몇 차례에 걸쳐 학살되었다. 그리고 진주형무소에 구금된 보도연맹원과 재소자들도 7월 22일부터 7월 26일 사이에 명석면 관지리, 우수리, 용산리, 문산 상문리, 마산 여양리 등에서 모두 학살되었다.

사진 5 진주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과 진주국민보도연맹 사건 발생장소

▲ 제노사이드(집단학살범죄)는 무엇일까?

세계적으로 제노사이드는 고의로 혹은 제도적으로 어떤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이념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파괴하는 집단학살을 말한다. 권력을 가진 지배자 혹은 특정 집단이 어느 한 집단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소위 씨를 말리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주9) 이와 유사한 용어가 ‘홀로코스트’가 있다. 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한다. 전쟁에서 군인은 적국의 군대와 싸운다.

그러나 제노사이드는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지배자 혹은 특정 집단이 어느 한 집단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소위 씨를 말리는 전쟁을 벌인다. 가해자들은 희생자들의 문화와 역사를 포함한 모든 흔적을 지우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집단학살범죄가 자행되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국민보도연맹원들의 학살은 대다수가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넘긴 1950년 7월 14일 이후부터 9월 하순 집단학살 금지령이 내려질 때까지 계속됐다. 당시 국민보도연맹원이 몇 명 학살당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보도연맹원 가입자 수가 30만 명 내지 35만 명이었다는 통계가 있고, 서울의 보도연맹원 수가 1만 9,800여 명이었다는 기록(동아일보 50년 5월 5일 자)이 있고 학살된 보도연맹원들이 최소한 15만 내지 20만 여명으로 추산된다.(주10) 세계적으로 자행되었던 제노사이드의 대표적 사례(민족, 종족, 인종, 종교, 이념)는 다음과 같다.

민족 청소’의 사례로 ‘옛 유고슬라비아의 민족 청소’가 있다. 1991년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를 침공함으로써 4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은 피란민 주거지인 스레브레니차에서 일주일 만에 8,000여 명의 보스니아 성인 남자와 소년의 목숨을 빼앗았다.

종족 청소’의 사례로는 아프리카 르완다의 제노사이드를 들 수 있다. 르완드를 식민지 지배한 벨기에는 소수 투치족을 활용하여 다수의 후투족을 지배했다. 종족간의 갈등이 누적된 결과 독립 후 후투족은 투치족을 100일 만에 대략 80만 명을 학살했다.

홀로코스트’, 악명높은 유대인 대학살은 ‘인종 청소’다. 1933년에 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독일을 단일 인종인 ‘아리안’의 땅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반유대인법을 만들고 유럽 전역에 강제 수용소를 15,000여 개나 설치했다. 2차 대전 중 유럽의 950만 유대인 중 600만여 명이 나치의 손에 살해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이교도(異敎徒) 청소’의 경우다. 이슬람교를 믿는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를 믿는 아르메니아인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대량 학살했다. 1894년부터 1896년까지 10~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제1차세계대전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100만 명이 살해당했고, 최소 50만 명이 추방되거나 탈출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이념 갈등에 따른 집단학살’ 사례다. 냉전 체제하에서 1975년에 집권한 크메르루주는 도시민, 지식인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반대 세력에 대해 숙청, 고문, 학살을 자행했다. 크메르루주 정권 아래 기아, 고문, 처형, 강제노동 등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당시 인구의 4명 가운데 한 명 꼴인 170만∼2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세계적으로 발생한 제노사이드의 다섯 가지 사례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우리나라는 이념적 갈등 속에서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집단학살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적 근거도 없는 국민보도연맹이란 기구를 결성한 것이다. 국민보도연명이란 도대체 어떤 기구인지 살펴보자.

▲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란 무엇인가?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국민의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조직한 반공단체다.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른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한다는 취지로 1949년 4월 20일 관변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된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9월20일부터 지방지부 조직에 착수하는데,(주12) 도내 각 경찰서 단위로 하부조직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주11) 한국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국민보도연맹 경상남도연맹(약칭 경남도연맹)은 1949년 11월 11일 경남 경찰국 무도회관에서 ‘임시발기인대회’를, 13일에는 부산지법 회의실에서 ‘정식발기인대회’를, 15일에는 ‘결성대회 정식 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고, 20일 ‘결성선포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출범하였다. 이후 경상도 산하 각 시•군 연맹과 읍•면 지부가 결성된다. 검•경 당국은 1949년 10월25일부터 1949년 11월30일까지 남로당원 자수 주간을 설정하고 대대적인 자수•전향 작업을 진행한다. 경남도연맹에서 발표한 경남의 자수전향자는 5,548명이었다. (주13)

조직결성 명분은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 기회를 준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재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가족의 생명•재산 등을 보호하여 준다’며 남로당원 자수 주간을 선포하였다. (주14) 그러나 1950년 2월 11일 제11차 국회 본회의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신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협박까지 하면서 1개 군에서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입을 종용하였다. 이로 인해 좌•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가입되어 좌익이라는 낙인이 찍혔다’(주15)

1949년 12월 2일 경상남도 경찰국 발표에 의하면, 집단학살사건은 경남도 내 어느 한 곳도 빼놓지 않고 자행되었는데, 시•군마다 200여 명에 달하는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 진주, 마산, 부산 형무소 수감재소자 및 예비검속자 3,300여 명을 비롯 약 7,000여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주16)


진주지역의 자수전향자는 259명이었다. (주17) 진주경찰서는 좌익활동 전력자뿐만 아니라, 농민조합 등에 가입했던 사람, 각종 시위나 행사의 단순 가담자, 그들의 친인척, 빨치산에게 식량 등을 제공했던 사람, 또는 국민보도연맹이 어떠한 단체인지도 모르던 농민들까지 여기에 가입하게 했다. 가입한 보도연맹원에게는 통제 목적으로 보도연맹원증을 발급했으며 지서 별로 이들을 훈련, 교육하는 등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국민보도연맹원 가입 당시에는 사상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일반 국민들이 다수 가입되었으며, 배급을 준다거나, 비료를 준다, 아니면 글을 가르쳐 준다는 등으로 회유하였으며, 협박과 강압에 의한 강제 가입까지도 불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이를 입증하는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 권유를 받은 사람의 증언이다.

“나는 보도연맹에는 가입하지 못했제. 순사가 몇 번 찾아와서능 가입하면 글을 배와준다카데, 배급도 주고 가입 하고자프믄 지서로 오먼 된다카더마. 그래 지서에 갈라꼬 뱃가(나루터)에까징 갔제. 그란데 배가 없능기라 그래서 도라왔제.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히는구마. 만일에 내가 그때 배를 타고 갔시모 내도 그때 죽었을기구마”

사진6 국민보도연맹원증

▲ 증언록의 증언자(유족분) 정○○(희생자의 아들) 인터뷰 내용

질문 : ‘아버지가 희생될 당시 살던 곳 주소를 아시나요?’

대답 : 진양군 대평면 대평리 000번지. 그 주소를 계속 가지고 있다가 1997년 남강댐 공사 중에 이주단지로 오면서 바뀌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할머니가 너희 아버지 살아올 수 있으니까 절대 이사 가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내가 세 살때 어머니는 할머니가 저년이 들어서 망했다고 나쁜년이라고 그러고 그러면서 꼭 매일 아침 강에 가서 정화수 떠다놓고(빌었어요). 그 당시에는 강물을 먹었거든요. 할머니가 매일 부엌에다가 싸 한 줌 놓고 기도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할머니 뭐하는 건데?’하니까 ‘혹시 너거 아버지 살아 돌아올지 모르니까 이사 가지마라’하셨어요. 초가집에 물이 들어왔어 지붕개량을 하고 그대로 이사는 끝까지 안가고 거기 살았어요.(본문245쪽)

사진 7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 발굴장 입구

질문: ‘혹시 아버지가 학살당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이 시신을 찾으러 가셨나요?’

대답: “삼촌이랑 어머니가 용산리 고개를 갔었대요. 6월 초열흘쯤 됐을 거랍니다. 시신을 찾아가도 된다는 소문을 듣고 가니까, 조그만 둔덕에 시체가 쫙 드러누웠는데 못 찾겠더라 하대요. 총을 맞아가지고 6월이다 보니까 부패가 돼가지고 얼굴 형태도 모르겠고, 그냥 뭐 허리끈이나 옷이나 보고 아는 거지 모르겠더랍니다. 우리 형은 할머니한테 나는 엄마 뱃속에 있었고, 그래 냄새가 나니까 쑥을 뜯어가지고 코를 막고 찾았대요. 그렇게 찾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찾겠어서 이래 가지고 안 되는 거다. 삼촌이 ‘형수님 갑시다. 이래 안 되는 기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갑시다.’했대요. 딱 한번 찾으로 갔대요”(본문 251쪽)

본인이 죽어 묻힐 구덩이를 손수 파게 한 후 학살을 하고 밀어 넣어버렸다고 한다. 고인 핏물이 구덩이를 넘쳐 계곡에 피가 흘러내렸다고 한다. 제가 발굴차 용산고개 현장에 몇 차례 가봤지만 깊은 계곡은 풀로 뒤덮여 아무 말이 없다.

질문: ‘세 살 때 집을 나간 어머니는 다시 만났을 때 아버지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해주셨나요?’

대답: “그래 인자 늦게나마 어머니를 만나니까 어머니가 여기(팔뚝)에 문신을 두 개 탁탁 새겼더라고, 팔에 문신을 새겼어, 어머니가 ‘나는 너거 아버지 찾을 수 있다. 살아오면 찾는다’ 하더라고, 아버지와 문신을 같이 했대요. ‘너거 아버지도 여기 하고 나도 여기 하고 문신이 똑같다. 혹시 내가 죽고 없더라도 너거 아버지 살아오거든 이놈(문신)보고 찾아라’ 하셨어요.(눈물)(본문260쪽)

두 분은 저승에서 만나시어 문신으로 확인하시고 해원(解冤)하시기 바란다.

질문: ‘구수회라는 분은 용산리 학살 장소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었던 건가요?’

대답: “그 매장지에서 500미터도 안 되는 동네에 살았으니까, 나무하고 소 먹이러 가면서 맨날 ‘요는 머이 묻혔고 머이 묻혔고’하는 말을 어른들한테 들었대요. ‘거기 소나무 밑에 갈비(소나무 낙엽 채취)하지 마라 거기 송장 썩은 거 묻어 놨은께, 거기(시체를 묻어서 그랬는지)는 풀이 잘 자라더래요. 학살 후 그 이듬해 산사태가 나니까 해골이 도랑에 굴러 내려오더랍니다. 그래 이걸 주워가지고 서부시장에 갖다 팔더라 하데요. 왜 파느냐, 그 당시에 영양실조가 많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천질이라는 하늘이 준 병리라고, 애가 가만 가다가 탁 쓰러져서 거룸 물고 기절했다가 또 살아났다가 또 가고, 아, 간질, 간질병이죠. 간질환자 아니면 나환자가 이 머리뼈를 갈아서 먹으면 낫는다는 소문이 진주시에 엄청 났대요. 그래서 용산고개에서 파 내려오는 사람도 가끔 봤대요. 어린애들이 소 먹이다 오면 나이 많은 영감들이 보자기에 둥그런 걸 싸 내려오더랍니다. 그래 ‘뭐이고?’하니까 ‘너들은 이런거 보년 안 된다.’이러면서 가져 내려오고 하더랍니다. 개울에는 머리가 막 시퍼렇게 곰팡이 피어 갖고 구석에 묻혀있고 그랬대요.(본문264쪽)

증언록을 읽으면서 이러한 제노사이드(집단학살범죄)는 왜 반복될까? 제노사이드는 다른 가치나 이념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파시즘적 범죄이다. 국가나 집단의 경우 자신의 범죄행위를 솔직히 드러내고 반성하기보다는 미화하고 사실 자체를 왜곡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제노사이드는 우리와는 관계없는 먼 옛날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제노사이드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과거의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식민지 시대와 민족 분단의 한국 현대사의 굴절 속에서 집단학살의 아픈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2008년 1월 24일에 참여정부 노무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과거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양민학살 행위’로 인정하여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유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위로와 사과의 뜻을 밝혔다. 아울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약칭 진화위)를 발족하여 전체 유족들의 15% 정도의 배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은 조사가 전면 중단되었다가 문재인 정부에서 진화위 2기(2020년 12월 10일)가 출범되어 보•배상 미신청자 유족들의 재신청 및 전 지역을 조사 중이다. 국가에 의해 집단 학살된 보도연맹 사건을 은폐하고 금기시할 것이 아니라, 감시와 차별을 받아온 유족들의 아픈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배•보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주⟧

(주1) 진주관광 sns 기자단, “진주에서 시작된 소년운동의 역사”, 2020년 12월 29일.
(주2) 대구 10•1 사건은 1946년 10월 1일에 미군정하의 대구에서 발발한 영남 지역의 사건으로 이후 남한 전역으로 확산된다. 식량부족, 친일경찰에 대한 반감, 독립국가 수립이 지연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결합해서 폭발한 사건이다.
(주3) 남조선민보, 1949년 12월 10일자. 《제4차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 자료집》, 2017, 19쪽(주4) 법무부, 『한국 교정사』, 1987, 448쪽.
(주5) 최정기,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의 형무소 실태연구-행형제도와 수형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제노사이드 연구』 제2호, 2007, 20~21쪽.
(주6) 법무부, 『한국 교정사』, 1987, 535쪽.
(주7) 명석면사편찬위원회, 『명석면사』, 늘함께, 2000, 225쪽.
(주8) 신경득, 『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 학살』, 살림터, 2002, 189쪽.
(주9) 마크 프리드먼/한진여 옮김/홍순권 감수, 『제노사이드 집단학살은 왜 반복될까?』, 내인생의책, 2015, 17쪽.(주10) 한국전쟁전후 진주민간인 희생자유족회, 《백골의 귀향》, 2014년 2월 19일
(주11) 자유민보, 1949년 11월 20일자.
(주12) 동아일보 1949년 4월 23일자.
(주13) 민주중보, 1949년 12월 3일자.
(주14) 동아일보, 1949년 10월 30일자.
(주15) 제6회 국회속기록 제28호, 598~602쪽, 1950년 2월 11일.
(주16) 한국전쟁후 진주민간인희생자유족회, 《백골의 귀향》, 2014년 2월19일, 32쪽
(주17) 민주중보, 1949년 12월 3일자.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자원봉사자

고등학교 역사교사를 지냈고,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회원이다. 발굴 1차부터 10-1차까지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2021-07-27> 단디뉴스

☞기사원문: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⓶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사건’

※관련기사

☞단디뉴스: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➀ “아직도 풀리지 않는 70년의 한을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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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국권침탈 이후부터
학교 고유 교육이념 없애고
제국주의 주입하며 지배화

민족성 담긴 ‘교표’ 사라지고
친일파 만든 ‘교가’ 아직 불려

배화학원 태극문양→ 난초로
중동학원 무궁화 도상 사라져
대부분 사립학교 교표 바뀌어

민족정체성 없애기 교묘히 시도
친일잔재 은연 중 한국사회 잠식

937년 배화학당 졸업생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출처=배화고등학교 홈페이지

일제 강점기 동안 일제가 자행한 민족말살 정책은 전통 문화를 훼손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런 민족말살 정책은 유·무형의 잔재로 해방이후에도 존속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학교 상징물이다. 초창기 민족성을 담은 학교 교표는 일제 상징물을 형상화하는 문양으로 교체됐다. 이런 일제 잔재를 그대로 담고 있는 교표는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친일 작사·작곡가들이 제작한 교가는 지금도 어김 없이 학교내에서 불리어지고 있다. 8·15 광복 76주년을 맞아 경기도내 학교에 남은 일제 잔재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또한 친일잔재를 청산하고 있는 학교도 소개한다.

지난 9일 평택시 한 고등학교 교문은 돌로 된 기둥 둘 사이에 있었다. 기둥에는 날개 형상 위에 둥근 원이 그려진 모양이 있었다. 색깔을 더한 모양을 보자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문양은 청색 바탕에 황금색의 날개가 새빨간 반원을 떠받치고 있었다. 한국식이라기 보다는 일본식에 가깝다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 문양은 학교를 상징하는 교표다. 교표에 대한 설명을 봐도 한국식과는 달라 보였다. 붉은색 반원은 아침을 여는 태양의 의미, 날개는 비상하는 독수리의 날개라고 했다.

이미지를 검색하다 보니 비슷한 모양이 검색됐다. 바로 독수리 날개를 단 일본 항공자위대의 상징이었다. 일본 항공자위대의 상징 뒤에 일장기를 그리면 학교의 교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최근 경기도교육청이 실시한 ‘경기도 학교 일제 잔재 전수 조사 보고서’에서도 해당 교표를 일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 학교 교화 역시 일본 철쭉인 영산홍이다.

l 일제에 의해 사라진 전통 교표

일제강점기 시절 경신학교의 모습. /출처=위키백과

학교가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을 부착하기 시작한 것은 100여년보다 그 이전으로 흘러간다. 1885년 반포된 교육입국조서와 소학교령은 조선 고종이 공교육의 기능을 국가의 부강과 독립, 생활상 필요한 보통 지식과 기능을 익히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1910년 국권침탈 이후 일제는 학교에 제국주의 이념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사립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제한하는 학교령을 통해 조선의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교표는 학교의 교육철학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일제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기존 태극문양과 무궁화 등 한국 전통의 문양을 교표로 택하고 있던 학교들은 일제시절 교표개정의 아픔을 겪었다.

1885년 원두우 학당으로 개교한 경신학교는 1905년 십자가 중앙에 태극을 넣고 ‘경신학원’ 네 글자의 한자를 태극기의 4괘와 같이 배치했다. 이 태극교표는 1910년 한일병탄 이후 교표 중앙의 태극 도상(圖像)이 삭제당했다.

l ‘민족말살통치’의 수단으로 활용된 학교 교표

배화여학원의 교표 변화. 왼쪽은 1908년 배화학당이 사용한 것으로 태극 도상이 가운데 들어있다. 중앙은 1923년부터 1937년까지 사용한 배화여학원의 교표로 교화인 난초가 그려져 있다. 반면, 교표 개정령 시행 후 1938년 사용된 교표(사진 오른쪽)는 태극도상이 삭제됐다. /‘한국교표 디자인의 역사와 문화적 변용 연구(정선아, 2021)’

<송도학원 100년사>, 한국 교표 디자인의 역사와 문화적 변용 연구(정선아) 등에 따르면 교표 개정은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1937년 극에 달했다. 당시는 만주를 침공한 일제가 대공황 등으로 경제적 위기를 겪으며 소위 ‘문화통치’에서 ‘민족말살통치’로 노선을 전환하던 시기였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사립학교에 교표개정령을 전달해 민족정신의 말살을 시도했다. 이는 경기도 내무부가 경찰에서 보낸 ‘사립학교 교표개정령’에서 확인됐다.

당시 일제의 통치에도 한민족의 얼을 기리는 내용의 교표를 가진 다수의 사립학교들의 교표가 바꿨다.

배화학원의 경우 배화학당 시절 도장과 고등과의 졸업장 등에 태극문양을 사용했다. 1923년 교표를 만들 당시에도 태극 도안을 주 도상으로 썼다. 그러나 1937년 교표개정령과 함께 난초를 모티브로 한 일본 가문과 유사한 교표를 사용하게 됐다.

송도학원은 당초 무궁화 잎에 펜을 그린 교표(사진 왼쪽)를 사용해왔다. 그러나 1937년 조선총독부에 교표를 빼앗긴 후 일본 한 가문의 문장과 유사한 솔방울 도안이 들어간 교표(사진 오른쪽)를 해방 전까지 사용했다. /송도중학교 홈페이지
중동학원 교표 변화. 왼쪽은 1919년부터 1937년까지 사용해온 교표이며, 오른쪽은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사용한 교표. /경기도 학교 일제 잔재 전수 조사 보고서(2021)

송도학원도 1937년 교표를 일제 경찰에게 압수당했다. 송도학원은 무궁화 사이에 펜을 그려넣은 교표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이를 압수당한 후 독수리 날개에 ‘중’자를 세긴 교표를 사용했다.

중동학원은 무궁화 사이에 떠오르는 태양의 도안으로 이뤄진 교표를 1929년부터 제정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1937년 교표를 압수당하고 교표 개정을 받자 문제가 된 무궁화 도상을 삭제하고 중동이란 교명만 표시하게 됐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 정체성을 담고 있던 교표의 수난사였다. 교표는 제작 주체의 의도와 그 전달 방식이 함축된 상징물이란 점을 고려해 일제는 민족성 말살 정책에 교표 개정을 철저히 이용했던 것이다.

l 친일행적자 작곡·작사 교가의 탄생

교가 편찬은 1945년에서 1950년대에 집중돼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교가보다 일본 국왕을 찬양하는 노랫말을 주로 불렀다. 그러다 보니 개별 학교를 상징하는 교가가 없었고, 해방 후 학교들은 교가를 제정하게 됐다.

문제는 당시 교가를 제정할 수 있는 음악가들 다수가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던 점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경기도내 39곳의 학교 교가를 작곡한 이흥렬(李興烈, 1909~1980)은 1938년 7월 라디오를 통해 방송된 <애국행진곡> 등을 반주하고 ‘음악으로 내선일체를 실현하자’는 목적으로 결성된 경성음악협회 제1회 연주회에 출연했다. 1943년 7월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촉탁으로 조선에서 악단의 식민통치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데 역할을 한 히라마 분주의 고별연주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음악계 명사로 역할을 바꿔 가장 많은 교가를 작곡했다. 이 때문에 이흥렬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됐다.

도내 22곳의 교가를 작곡한 김동진(金東振, 1913~2009)은 평안남도 안주 출신으로 1942년 ‘대동아전쟁의 의의를 철저하게 관철시킬 가요 등을 보급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만주작곡연구회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활동했다. 일제를 찬양하는 ‘조국찬가’를 김대현, 윤용하 등과 함께 창작하고 1943년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국, 양산가와 합창곡 건국 10주년 찬가 등을 작곡했다. 해방 후에는 민족 음악가로 변신해 1961년 조국광복, 조국수난, 조건재건 3부를 작곡하고 지휘하는 등의 행적을 보였다. 김동진도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이외에도 친일 행적이 뚜렷한 김성태(金聖泰, 1910~2012), 현제명(玄濟明, 1903~1960)이 작곡한 교가가 각각 18개교, 7개교 사용되고 있다.

작사가로는 친일 행적을 남긴 백낙준(白樂濬, 1896~1985), 이광수(李光洙, 1892~1950) 등이 있다.

해방 후 음악계 명사로 탈바꿈한 친일 행적 작곡·작사가는 한국 사회 음악계를 이끄는 주역으로 부상한다. 교가에 직접적인 친일용어를 담지 않았지만 근면과 애국, 조국 등 일제가 강조하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며 은연중에 한국 사회를 잠식해 왔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일제의 잔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한국 사회를 잠식해 왔다”며 “친일파 작곡·작사가가 만든 교가를 부르고, 일제를 상징하는 문양이 담긴 교표를 쓰는 등 배움의 장인 학교에 침투한 일제 잔재는 반드시 청산해야 할 적폐”라고 말했다.

/김중래 기자·김보연 수습기자 [email protected]


[인터뷰/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l “학교 안 일제 잔재 수두룩 국민이 나서 뿌리 뽑아야”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일제 잔재가 학교에 남아있는 것은 친일파가 아닌 대한민국 역사 교육이 만든 상황입니다”

방학진(사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10일 인터뷰에서 “해방 후 청산하지 못한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가 아직도 이렇게 남아있는 것”이라며 이같이 지적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후 80년이 넘게 흘렀지만, 아직도 학교 현장에서는 일제 잔재가 남은 교표와 친일 행적 작사·작곡가가 만든 교가를 부르고 있다. 방 실장은 교육적인 목표에서도 이러한 잔재를 해소해 가야 한다고 했다.

방 실장은 “친일 작곡·작사가가 만든 교가를 학생들이 만들고 듣는다고 해서 친일파는 아니다”면서도 “그러나 학생 개개인의 집에서 부르는 것도 아니고 교육의 장인 학교에서 이를 부르는 건 대단히 모순된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 현장에 남은 일제 잔재의 이유로 친일 잔재 청산의 부재를 꼽았다. 특히 친일 행적 작사·작곡가의 교가 탄생 배경에 해방 후 음악계의 구조를 지적했다.

방 실장은 “해방 이후 한국 음악계는 친일 행적자에 의해 정리됐다”며 “이흥렬, 현제명 등은 서울대와 숙대, 경희대 등 유명한 음악대학의 초대 학장이 됐고, 교가를 음악계 권위자에게 맡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일 행적자들이 많은 교가를 만들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 사회가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던 것처럼 학교에서도 교육부분의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차별’도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지목했다. 여자와 소수자, 장애인 등을 차별했던 제국주의 파시즘의 영향은 지역 차별, 인종차별, 성별차별 등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이라도 일제 잔재를 청산해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방 실장은 “과거 ‘시대에 맞게 친일파는 열심히 살았고 독립운동가는 게을렀다’는 헛된 소리가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여준다”며 “이러다가는 이완용이 열심히 산 멋있는 사람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어 “대한민국은 1919년 임시정부의 정통에 따라 친일파 청산을 내걸었지만 해방 이후 일제 부역자 청산, 토지개혁 등을 실시하지 못했다”며 “국가는 친일파 청산을 안 했으니, 이제는 국민이 나서 일제 잔재를 청산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중래 기자·김보연 수습기자 [email protected]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전세계 여성 인권문제로 봐야”

오는 14일 제9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앞두고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한일 양국간의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전세계 여성의 인권문제로 봐야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관련기사 10면>

이은희 독일 풍경세계문화협의회 대표는 10일 수원시 매원감리교회에서 열린 ‘용담 안점순 기억의 방’의 활용 방안 모색을 위한 비대면 의정토론회에서 국제사회와 연대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 대표는 “일본군 성노예제로 인해 35개국에서 피해자가 발생했다”면서 “사안 그 자체로 초국가적인 주제”라면서 국제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동안 한국은 대규모 반 인륜범죄 7가지를 해결할 것을 일본에 요구했다. ‘전쟁범죄 인정’, ‘정부 차원의 공식사죄’, ‘법적 배상’,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역사교육 실시 등 피해자 명예 회복에 초점을 맞춘 해결’ 등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외면해 왔다.

김현정 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 행동 대표는 “위안부는 전시상황에서 국가가 여성에게 얼마나 조직적으로 장기간 인권 탄압을 했는가에 대한 문제”라면서 “한일간의 역사 갈등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최대 성노예제도로 보고 해결해야한다”고 했다.

이어 “한국정부는 2015 구두선언은 위안부 문제의 궁극적이고 원칙적인 해결책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고 7가지 원칙에 기반한 해결을 위해 일본과 포괄적인 재협상을 요구해야한다”면서 “그동안 한국정부는 어떤 노력을 했는지 묻고 싶다면서 일본을 국제사법재판소로 회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김보연 수습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0> 인천일보

☞기사원문: [8·15 기획-배움터에 남은 일제 잔재] (상) 친일의 이름으로 말살된 ‘교육철학’

수, 2021/08/11-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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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교육청 전수조사…21개교 교표엔 친일 잔재 확인

(수원=연합뉴스) 이영주 기자 = 경기도교육청은 학교 내 유·무형으로 남아있는 일제 잔재 현황을 파악하고, 이를 청산하는 방법을 제안한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고 10일 밝혔다.

도교육청은 일제 잔재 기초자료 확보를 위해 도내 2천500여개 학교를 대상으로 동상, 비석, 교표, 교화 및 교목 등 유형요소와 교훈 및 교가 등 무형 요소를 조사했다.

도교육청 차원의 일제 잔재 전수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경기도 학교 일제 잔재 전수조사 보고서 내용 중 발췌. [경기도교육청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이번 조사 결과 도내 12개 공립학교에 친일 인사의 비석이 설치돼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앞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진행한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용역 결과보고서’에서 확인된 6개 비석 외에 남양주 한 초등학교의 이상옥(친일인명사전 등재) 기념비 등 6개가 추가로 확인됐다.

이들 비석은 대부분 학교 운영과 발전에 관한 공덕비 형태로, 해당 인물의 친일 행적은 안내되지 않았다.

도내 21개 학교 교표에서도 욱일문, 일장기, 일본 군경이나 기업의 심벌마크와 유사한 표식 등 일제 잔재가 확인됐다.

특히 한 초등학교의 교표는 전범 기업으로 분류된 ‘미쓰이 그룹’의 로고와 색깔만 빼고 거의 유사하다.

경기도 학교 일제 잔재 전수조사 보고서 내용 중 발췌. [경기도교육청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보고서는 일제 잔재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몇 가지 사례도 제시했다.

교표에 자주 쓰이는 월계수 도안이 대표적이다.

보고서는 “월계수는 흔히 서양에서 승리, 평화, 정화 등을 상징하며 전투와 경기의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영예의 관으로 동양 전통에선 발견되지 않던 도상”이라며 “월계수를 일제 잔재로 보는 것이 무리가 있다는 지적도 있을 수 있지만, 이 도상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과정을 보면 러일전쟁의 승전을 축하하는 개선문 장식에 월계수를 사용한 일제를 통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월계수 도상은 도내 112개 학교 교표에서 활용된 것으로 파악됐다.

48개 학교에 비치된 ‘책 읽는 소녀상’에 대해서도 “일제강점기에 소학교 도덕(수신)교육의 하나로 ‘모범적인 국민상’을 주입하는 의도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경기도 학교 일제 잔재 전수조사 보고서 표지. [경기도교육청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연구보고서는 일제 잔재 청산은 상급 기관의 획일화된 명령이나 무조건적인 청산이 아닌 각 학교 구성원의 문제의식 공유, 토론, 대안 도출 등 민주적 과정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일제 잔재는 일본 군국주의의 산물이고 당시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들의 소산이므로 이에 대한 정리와 역사적 책임을 묻는 활동은 최소한의 사회적 규범을 세우는 일”이라며 “역사교육은 식민지 사회가 과연 어떤 모순을 가지고 있었는지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 비민주성을 철저히 인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번 연구보고서는 경기도교육청이 기획하고 총신대 허은철 교수가 책임연구자로 나섰으며, 각급 학교에서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교육 현장에 안내됐다.

이영주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0> 연합뉴스

☞기사원문: “경기 12개 공립학교에 친일인사 공덕비 남아 있어”

수, 2021/08/11-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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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대전MBC ‘항일음악 6천곡 대발굴’ 다큐 방송

항일음악 ‘거국행’ 악보. ‘거국행’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20년 4월 미국에 독립군 진영을 만들기 위해 조국을 떠나면서 지은 노래다. 악보는 1910년 5월12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려 있다. 대전엠비시 제공

대전문화방송(MBC)은 오는 14일 묻혔던 항일음악을 집중 조명한 다큐멘터리 ‘노래하라! 저항하라! 항일음악 6000곡 대발굴’을 방송한다고 9일 밝혔다.

항일음악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며 독립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노래로, 군가·혁명가·투쟁가·애국가·계몽가·망향가·추도가 등 여러 형태로 불렸다. 항일음악 발굴은 민족문제연구소가 기획하고 고 노동은 중앙대 명예교수가 집필한 자료집 <항일 음악 330곡집>에서 시작됐다. 2017년 발간된 유일한 항일음악 자료집으로, 1910년 항일투쟁 현장에서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들이 시대별로 정리돼 있다.

현재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은 <항일 음악 330곡집>를 뒤잇는 항일음악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연구팀은 항일운동 발자취를 따라 베이징과 톈진, 옌볜, 선양, 다롄 등 중국 동북 지역의 조선족들과 알마티, 크즐오르다, 타슈켄트 등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을 만났다. 4년에 걸쳐 항일음악과 관련된 악보 , 서지 , 기사 , 잡지 등을 조사·연구한 끝에 6000곡을 발굴해 정리했다.

지난달 13일 대전엠비시(MBC) 공개홀에서 대전시민천문대어린이합창단이 항일음악 ‘그리운 강남’을 부르고 있다. ‘그리운 강남’은 일제강점기 조선 민요 운동을 한 충남 청양 출신의 안기영 선생이 1929년 만든 곡이다. 대전엠비시 제공

대전엠비시는 이번 다큐멘터리에 단국대 연구팀의 ‘항일음악의 보급과 연구를 위한 국내·외 자료 수집·해제 및 디비(DB) 구축’ 프로젝트의 발자취와 의미를 담았다. 발굴된 항일음악을 대전시립교향악단과 대전시민천문대어린이합창단, 뮤지컬배우 고은성, 아카펠라 그룹 ‘나린’, 밴드 ‘오빠딸’ 등이 연주하고 노래하는 모습도 다큐멘터리를 통해 방송된다.

이 다큐멘터리를 기획한 김지훈 대전엠비시 기자는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이 발굴한 항일음악 중 1000곡은 악보로 표준화했고, 그 중 의미 있는 곡을 골라 음원으로 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에 앞서 대전엠비시는 7 ∼8곡을 골라 지역의 예술가들을 참여시켜 편곡하고 연주 ·녹음했다 ” 며 “ 항일 음악 음원화는 우리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 교육청 등과 협의해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항일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방법도 찾고 있다 ” 말했다.

다큐멘터리는 오는 14일 밤 8시50분 방송된다.

최예린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09> 한겨레

☞기사원문: 항일음악을 아시나요?

화, 2021/08/10-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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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1/08/11-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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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 특강
1강 – 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 의열투쟁의 선구자,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삶과 사상
강사 : 박중훈 (박상진 의사 증손)
* 2강은 15일, 광복절에 업로드 됩니다!

주최 : 근현대사기념관
주관 : 민족문제연구소
후원 : 강북구

목, 2021/08/12-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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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25편 :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 24편 : 광복군 제3지대가 _ 김일진(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 광복군 오광심 지사 아들)

☞ 23편 : 추도가 _ 원형재(원심창 선생 아들)

☞ 22편 : 한반도가 _ 나중화(나창헌 선생 아들)

☞ 21편 : 독립군행진곡 _ 김완태(전 육군사관학교장)

☞ 20편 : 영웅추도가 _ 김성태(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 19편 : 선봉대가 _ 권현(권기옥 선생 후손)

☞ 18편 : 대한혼가 _ 김재홍 함경북도지사(규암 김약연 선생 증손자)

☞ 17편 : 희망가 _ 김수옥(우사 김규식 선생 손녀)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우원식 국회의원(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 _ 김주(심산 김창숙 손녀)

☞ 10편 : 광복군아리랑 _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 9편 : 앞으로행진곡 _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 _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우당 이회영 손자)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 _ 정남기(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 5편 : 격검가 _ 차영조(동암 차리석 아들)

☞ 4편 : 압록강행진곡 _ 광복군 김영관 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 _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자)

☞ 2편 : 안중근옥중가 _ 함세웅 신부

☞ 1편 : 국치추념가 _ 이준식 독립기념관장(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토, 2021/08/14-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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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독립운동가로 홍보되고 있는, 최재형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 조부와 증조부와 친일 행적 의혹이 제기돼 논란입니다.

최 후보 측은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은 명백하다고 주장하는데요.

과연 그런지, 뉴있저가 자세히 취재했습니다.

이 문제 취재한 양시창 기자 나와 있습니다.

자, 먼저 최재형 후보 부친이 독립운동가로 알려졌는데 이건 캠프 쪽에서 나온 얘기인 거죠?

[기자]
확인해 보니까, 최재형 후보 본인 입에서 조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등의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습니다.

다만 후보 캠프에서는 미담 사례의 하나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최재형 후보의 공식 유튜브 채널에 링크된 영상을 먼저 보시겠습니다.

[최재형 TV : 독립운동가 최병규의 손자입니다. 최병규 선생은 독립운동자금을 확보하고 전달하는 일을 맡으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정부에서 표창장을 수여하려 했지만, 국민으로서 당연한 일이라며 거부했다고 합니다.]

캠프에서 직접 제작한 영상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후보의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볼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고요.

국민의힘 정경희 의원도 지난달, 최 전 원장의 입당을 환영하는 논평에서 최 씨의 조부가 독립운동가였다고 말했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다.

[정경희 / 국민의힘 의원 : 최 전 원장의 할아버지 최병규 선생은 강원도 평강 출신 독립운동가입니다. 춘천고보 3학년 재학 중 순종 황제가 승하하자 상장 달기에 앞장섰다가 퇴학당했습니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조선인 거류민단 대표를 맡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앵커]
이 정도면 캠프와 당에서도 최 후보 선친의 독립운동에 대해 충분히 홍보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군요.

대선 예비후보와 관련된 문제이니 검증해 봐야 할 텐데, 양 기자가 취재해 보니 어떻던가요?

[기자]
네, 최 후보 증조부와 조부가 일제 치하에서 면장과 면협의회 회원을 한 전력이 자료에 남아 있는데요.

먼저 증조부부터 보겠습니다.

최 후보 증조부 최승현 씨는 1917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죠. 매일신보의 평강분국 분국장을 지낸 전력이 있습니다.

분국장을 지내다가 1918년에 평강군 유진면 면장에 오르는데요.

3.1운동 당시에도 면장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후 인근 고삽면장까지 포함해 이 지역에서 면장직을 1936년까지 지냈습니다.

18년 넘게 면장을 지낸 것이죠.

전부 친일 기관지, 매일신보에 소개된 내용이고요.

‘조선총독부 직원록’에도 증조부의 이름은 여러 차례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조부인데요.

증조부의 면장 임기 마지막에 조부도 매일신보에 이름을 올립니다.

바로 1935년, 아버지가 면장으로 있는 유진면의 면협 의회원으로 당선됩니다.

요즘으로 치면 지자체 의원 정도로 볼 수 있는데요.

참고로, 최 후보의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조부의 형, 그러니까 최 후보의 큰할아버지도 함께 면협 의회원을 지냈습니다.

최 후보 조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2년 뒤에는 강원도 도회의원에 입후보합니다.

하지만 낙선했고요.

이후 다시 면협 회원에 당선됩니다.

정리하면 증조부는 평강군에서 면장을 20년 가까이 지냈고, 아들인 조부는 면협 의회원을 2차례 역임했고, 도회 의원까지 도전했다, 이 점이 사료에 남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면, 면장과 면협 회원을 지낸 전력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가 중요한 부분인데요.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의 설명을 들어보시겠습니다.

[박수현 /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책임연구원 : 최승현이라고 하는 인물이 평강 지역에 오랫동안 면장을 했어요. 대단한 거죠. 지역의 유력자라고 볼 수가 있는데 그런 걸 바탕으로 해서 그 아들인 최병규 최병열. 이 두 사람은 면협회 회원까지 됐단 말이에요. 이 면협회 회원이라는 건 뭐냐 하면 면장의 자문 기구인데 일제 협력 기구라고도 볼 수가 있는 거죠.]

[앵커]
면장과 면협 회원은 일제에 협력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해석인데요.

단순히 직책뿐 아니라 친일에 가까운 행적도 기록에 남았다고요?

[기자]
네, 앞서 정 의원의 언급에서도 나왔지만, 만주에서 조선 거류민 단장을 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는 게 최 후보 캠프의 주장입니다.

최 후보 부친 회고록에도 나오는 내용인데요.

하지만 당시 기록을 보면, 최 후보 조부는 오히려 독립운동이 아닌 일제에 협력한 것으로 해석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크게 두 가지인데요.

먼저, 1938년 매일신보를 보면, 최 후보 조부의 미담 기사가 하나 소개됩니다.

부친의 회갑축하 연회비를 절약해 20원을 일제 국방비로 헌납했다는 내용입니다.

당시 군수 월급이 130원 정도라고 하거든요.

20원이니까, 고위직 공무원 월급의 6분의 1 정도.

중요한 부분은 일본이 이를 미담으로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소개했다는 점입니다.

당시 전쟁비용이 필요했던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국방헌금을 강요했는데요.

아버지 회갑 비용을 아껴, 앞장서서 국방비를 낸, 훌륭한 헌금 사례로 소개한 것이죠.

또 하나는, 최 후보 조부는 만주국 해림촌으로 넘어가서 조리원이라는 직책을 맡습니다.

이 역시 일제 치하에서 촌장을 돕는, 부촌장 개념으로 볼 수 있는데요.

이 부촌장을 지내는 동안 최 씨의 이름이 만선일보에 여러 차례 거론됩니다.

만선일보는 매일신보처럼, 만주지역 대표적인 친일 신문인데요.

최 씨가 만선일보 해림지국 개소에 축하 광고를 띄웠고요.

또 조리원, 즉 부촌장에 취임한 뒤 인사차 만선일보를 방문했다는 것도 기사에 소개돼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측 설명 이어서 들어보시죠.

[박수현 /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책임연구원 : 만선일보라고 하는 것은 만주지역 최대의 친일 신문입니다. 한글 신문이기도 하고. 거기에 만선일보 해림천 지국 해림 지국 발전을 축하하는 광고를 내요. 최대 친일 신문인 만선일보의 기사 내용을 보면 부친이 부친의 회고록에 주장하는 그런 만주 지역에서 독립자금을 모집했다,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그런 얘기다.]

[앵커]
이에 대한 최 후보 캠프의 해명이 나왔나요?

[기자]
네, 최 후보 측은 조부와 증조부의 이 같은 행적에 대해 대부분 몰랐던 사실이라고 답했는데요.

해명을 정리해봤습니다.

조부의 면협 의회원 역임 사실과 도의회 의원 출마 사실, 또 국방헌금 20원 납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조부의 독립운동을 증명할 수 있는 보관 자료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조부의 독립운동은 부친에게 들은 내용이고, 할아버지께서 동맹휴학을 주도해 제적당했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다만 당시 면협 의회원 역임이나 도의회 출마, 또 국방헌금 납부자를 모두 친일파로 여기는 건 무리가 있다는 의견을 내놨습니다.

최 후보 캠프 쪽에서 유일하게 독립운동의 근거로 주장하는 게 조부의 동맹휴학 부분인데요.

확인해보니, 당시 춘천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조부가 ‘맹휴’를 주도해 제적당한 건 사실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맹휴가 일제에 대한 저항인지, 단순히 구타를 일삼은 교사에 대한 저항인지는 학자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대목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점은, 고교 시절 맹휴 이후의 행적이라는 게 전문가의 의견입니다.

들어보시겠습니다.

[박수현 /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책임연구원 : 그 이후의 행적을 보면 독립운동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런 행적이고 그리고 평범하게 산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면협 의회원 그다음에 도의원 출마했고, 국방헌금 냈고 이거는 일제의 협력행위거든요. 이런 걸 가지고 독립운동했다, 이렇게 부르지는 않죠. 그런 주장대로라면 한때 독립운동을 했던 이광수, 최린, 김활란 이런 사람들도 독립운동가가 되는 거죠. 우리는 그들을 독립운동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친일파라고 부르죠.]

네, 오늘은 국민의힘 최재형 후보 가문의 친일 논란을 다뤘는데요. 앞으로도 뉴스가 있는 저녁 ‘가보니’에서는 여·야 대선 주자들에 대한 검증 보도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앵커]
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양 기자, 고생했습니다.

YTN 양시창 ([email protected])

<2021-08-12> YTN

☞기사원문: [뉴있저] 최재형 조부 독립운동?…”친일 행적” 논란

※관련기사

☞JTBC뉴스: [단독]민족문제연구소 “최재형 증조부 조선총독부 표창 받았다”

금, 2021/08/13-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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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광주] [앵커]

이틀 뒤면 제76주년 광복절인데요,

여전히 우리 주변 곳곳에는 일제 잔재가 남아있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친일의 흔적을 미래세대가 기억할 수 있도록 일제 잔재에 단죄문과 안내문을 설치하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김정대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광주천 건너에 자리잡은 낡은 방직공장.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여공들의 애환이 서린 이곳은 일제 강점기 어린 여공 수 천명이 저임금을 받으며 노동을 착취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김순흥/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 : “(근로정신대처럼) 국내에서도 이렇게 강제동원했던 역사가 많이 있어요. 이 안에서 여공들이 기숙사라는 것도 거의 감옥 형태로 자유 행동을 할 수가 없었고…”]

나라의 안전과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올리는 사직단이 있었던 광주공원.

일제 천황을 참배하던 신사가 세워진 민족의 아픔이 서린 공간입니다.

광복 이후 일본 신사는 시민들에 의해 헐렸지만, 일제가 만든 이 계단과 중앙광장은 아직 남아있는데요.

이 같은 역사를 잊지 않도록 계단 옆에 ‘단죄문’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처럼 지역 곳곳에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광주시가 3년째 ‘단죄문’ 설치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일제 잔재 시설에 대한 역사적 사실, 친일 인사의 행적 등을 소상히 적었습니다.

그동안 세운 단죄문은 17개에 달합니다.

[정전국/광주시 민주정신선양팀장 : “현재 광주 시내 현존하는 잔재물이 뭐고, 또 친일 인사의 행적이 어디에 있는지. 이런 부분을 모두 조사해서… 올해 6곳을 대상으로 설치하면서 당초 계획했던 목표로 3년치 사업이 마무리가 됐습니다.”]

광주시는 더 많은 시민들이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할 수 있도록 그동안 세운 단죄문을 소개하는 온라인 공간을 만들 계획입니다.

KBS 뉴스 김정대입니다.

촬영기자:조민웅

김정대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3> KBS

☞기사원문: “일제 잔재 청산”..단죄문 세워 역사 알린다

토, 2021/08/14- 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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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앞두고 전북 일제잔재 현황보고회 개최
“청산도 중요하지만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것 필요”

13일 오후 전북교육청 2층 강당에서 ‘전북교육정책 포럼’이 개최됐다. 이날 포럼은 ‘학교 안 일제잔재,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라는 주제로 열렸다.(전북교육청 제공)© 뉴스1

76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학교에 존재하고 있는 일제잔재 실태를 공유하고 향후 대책을 고민해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 마련됐다.

13일 오후 전북교육청 2층 강당에서 ‘전북교육정책 포럼’이 개최됐다. ‘학교 안 일제잔재,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포럼에는 도내 일선학교 교장과 교감, 교사, 각 교육지원청 관계자 등 40여명이 참석했다.포럼은 권익산(원광여중), 오경택(성심여고), 채창수(완산고), 권혜수(영생고), 문선빈(송북초), 라민아(익산가온초), 권민지(종정초), 손형태(부안고) 교사의 주제발표로 시작됐다. 이들 모두 일제 잔재 조사에 참여했던 교사들이다.

실제 전북교육정책연구소(소장 최은경)는 지난 1월 6명의 초·중고등교사와 정책연구소 파견교사 2명, 담당 연구사 등 9명으로 구성된 TF를 구성한 뒤 일선 학교 내 일제 잔재 현황파악에 나서왔다. 그리고 6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최근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일제잔재 조사에 나선 것은 도내에서 이번이 처음이었다.

8명의 교사들은 각자 자기가 담당했던 조사했던 내용을 발표했다.

발제 내용을 종합해보면 우선 일제잔재가 확인된 교가를 사용하는 학교는 총 15곳으로 집계됐다. 대부분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와 친일인명사전에 의해 친일 인물로 분류된 작곡가가 작곡하거나 군가풍·엔카풍 멜로디가 포함된 교가를 사용하고 있었다. 특히 ‘조국에 바쳐’, ‘00학도’, ‘이 목숨 다하도록’ 같은 일제 군국주의 동원 체제에서 비롯한 비교육적인 표현을 포함한 교가도 있었다.

교표(학교를 상징하는 휘장)의 경우, 조사를 실시한 761개교 가운데 21.8%에 해당하는 166개교에서 일본을 상징하는 전통문양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욱일문·일장기·국화문·벚꽃문양을 교표로 사용하는 학교도 무려 21개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전쟁에서의 승리를 상징하는 ‘월계수 모양’을 사용한 학교도 75개에 달했다.

일제 잔재로 규정된 가이즈카 향나무, 히말라야시다, 금송을 교목으로 지정한 학교도 91개교로 집계됐다.

일제 강점기 석물이나 건축물 역시 학교 부지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군산 발산초의 옛 일본인 농장 창고, 전주 풍남초와 전주초의 봉안전 기단 양식, 일부 학교의 충혼탑 등이 대표적이다.

학교 현장·행정분야 용어와 학교문화도 개선돼야할 부분으로 지적됐다. 개선대상 용어로는 시정표, 시건장치, 납기, 신입생, 절취선, 졸업사정회, 내교 등 학교 현장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들이 포함됐다.

또 역대 학교장이나 기관장 사진을 외부공간에 게시하거나 차렷·경례 같은 군대식 인사 표현도 바꿔나가야 할 일제 잔재로 꼽혔다.

순결을 강조하거나 부지런한 일꾼이 되자 등 순종하는 노동자가 되기를 강제하는 의미를 가진 교훈을 사용하는 학교도 11곳이나 됐다.

발제에 나선 교사들은 “조례 제정과 교육청 차원의 행·재정적 지원을 통해 일제 잔재 인식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 지원단 운영 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13일 오후 전북교육청 2층 강당에서 ‘전북교육정책 포럼’이 개최됐다. ‘학교 안 일제잔재,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포럼에는 도내 일선학교 교장과 교감, 교사, 각 교육지원청 관계자 40여명이 참석했다.사진은 윤상원 전북대교수를 좌장으로 한 자유토론 모습.(전북교육청 제공)© 뉴스1

주제 발제에 이어 윤상원 전북대교수를 좌장으로 한 자유토론이 진행됐다.

권민지 교사는 “일제잔재를 무조건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살아있는 교육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경택 교사는 “학교에 남아있는 일제잔재 문제에 대한 공론화를 위해선 이를 추진할 수 있는 학교장의 역할이 중요하다”면서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학생까지 공감할 수 있도록 많은 학교장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청중과의 질의 응답시간에서 김진 김제봉남초 교장은 “일재잔재 조사과정 자체가 아이들에게 교육적인 의미가 있다. 아이들이 생각하고 인식을 바꿔가는 큰 동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제에 부역했던 사학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북지역 사립학교에 대한 역사적 배경 등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김승환 교육감은 “교목과 교표, 교가는 물론이고 학교에서 무심코 쓰는 언어에도 그 나라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면서 “불행하게도 우리 학교 곳곳에서는 여전히 일제잔재가 남아있다. 교육감이 되고 나서 당황스러웠던 적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에 일제잔재 실태파악에 자발적으로 나서 준 교사들에게 정말 감사드린다”면서 “앞으로 교사들의 이러한 노력에 도교육청이 전폭적인 지원으로 호응할 것이다. 일제잔재 청산에 적극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임충식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3> 뉴스1

☞기사원문: ‘학교에 존재하는 일제잔재,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

토, 2021/08/14-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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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지원 단체 중심 구술 채록·녹화 작업
“생존자들 떠나도 문제의식 유지하기 위해”
대부분 민간사업… “정부가 지원 역할 해줘야”

“옛날에 당꼬바지 있잖아요? 형사들은 벌써 표가 났어요, 그때는. ‘뭐하러 왔느냐’ 그래서 ‘배에 쓸 물건 좀 사러 왔다’고. 가만히 생각하더니 ‘잠깐 좀 오라’더라고요. 가니까 웬 여관으로 들어가래요. 들어가니까 여섯, 일곱 명인가 와 있더라고요. 그걸로 문을 잠그고 내놓지를 않는 거예요. 자고 나니까 이튿날 아침에 속초역으로 나가자더니 그냥 기차를 타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 가는 사람들 전부 다 납치예요, 납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일제 강제동원 생존 피해자 구술 채록’ 중

1944년 일본 다카시마 탄광에 배치돼 노역했던 강제동원 피해자 손용암(93)씨의 육성 증언이다.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 한순간에 탄광으로 끌려간 기막힌 사연이 강제동원 역사의 실상을 선명히 드러낸다.

일제강점기 생존 피해자의 증언을 채록하는 작업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피해 당사자의 기억에 아로새겨진 체험을 기록으로 남겨 현재화하려는 노력이다. 벌써 광복 76주년, 생존자들의 기억과 육체가 빠르게 소멸해가는 사정을 감안하면 한시가 급한 일이기도 하다. 채록 작업을 진행 중인 피해자 지원 단체들은 정부가 속히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영원히 남는 증언’ 채록 작업 활발

11일 서울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제9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맞이 세계연대집회 1,504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열리고 있다. 뉴시스

13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올해부터 생존 피해자 구술 채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재단으로부터 사업 수행을 의뢰받은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6월 말까지 손용암씨를 포함해 24명의 생존 피해자를 인터뷰했다. 감탄사 하나까지도 빼놓지 않고 피해자 증언을 생생하게 채록하는 것이 원칙이다.

영상 채록 작업도 활발하다. 증언 내용뿐 아니라 구술 당시 감정과 표정까지 재연할 수 있다는 게 영상 채록의 장점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군함도 유네스코 일본 산업유산 시설 강제동원 피해자 19명의 증언 영상을 소개하는 특별전을 열고 있다. 김승은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은 “관람객들이 ‘생존 피해자 목소리를 들으니 역사 교과서 속 얘기가 아니라 지금의 역사처럼 느껴진다’는 소감을 밝히고 있다”고 전했다. 정의기억연대(정의연)는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피해 최초 증언 30주년(8월 14일)을 기념해 김 할머니의 첫 증언 집회 영상과 활동 초기 사진 자료를 공개하는 전시회를 17일 연다.


피해자 떠나도 ‘당사자성’ 유지하려면

지난달 16일 오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개최되고 있는 전시회에서 피해자의 영상이 나오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강제 동원된 피해자 19명의 증언이 공개됐다. 뉴스1

이런 구술 채록 작업은 일차적으로 일제강점기 미시사(微視史) 사료를 확보한다는 의미가 있다. 식민지 정책, 전쟁 등 거시적 관점에서 포착하기 힘든 역사적 실상을, 개인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체험을 통해 입체적으로 되살릴 수 있는 것이다.

당사자 증언을 통해 일제강점기 역사의 본질을 분명히 밝히자는 의도도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 고 박대하씨의 아들 박영만(78)씨는 “주권 상실로 입은 피해의 역사를 국민 전체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더구나 가해자 일본이 극우세력 장기 집권으로 과거사 부정 움직임을 노골화하고 있어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한 상황이다. 김승은 실장은 “강제동원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에 대한 기억이 왜곡되면 개인적 경험으로 파편화될 수 있다”며 “이미 피해 사실을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여론이 존재하는 게 현실”이라고 우려했다.

생존 피해자가 세상을 뜨더라도 그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할 수 있는 기반도 필요하다. 이나영 정의연 이사장은 “지금 세대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남은 생존자 수가 아니라 생존자가 모두 돌아가신 이후”라면서 “당사자성을 갖는 것, 다시 말해 피해 당사자들이 떠난 뒤에도 문제의식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단체들은 ‘선대의 피해가 나와 무관치 않다’는 의식이 필요하며, 생존 피해자 구술 채록이 여기에 기여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이 이사장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식민 시대의 불운한 여성들이 겪은 일 정도로 여기면 위험하다”며 “이 문제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시 성폭력은 물론이고 오늘날 여성 혐오와도 연결돼 있다는 걸 실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시민단체가 떠안은 부담… “국가 나서야”

광복절을 닷새 앞둔 10일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은 시민들이 생존 애국지사들의 초상화를 소개하는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뉴스1

하지만 생존 피해자 구술 채록 작업은 이들을 지원하는 민간단체 위주로 진행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단체들은 사안의 의미와 시급성을 감안할 때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이사장은 “피해자 단체가 서로 다른 자료를 갖고 있을 때 정부가 현황을 파악하고 단체 간 연계를 도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박물관・전시관이 없는 단체는 생존 피해자 흔적을 보존하기가 더 어려운 만큼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정부 쪽에서 ‘다 지나간 일이고 우리도 할 만큼 했다’는 말도 들려서 씁쓸하다”면서 “정부가 생존 피해자의 구체적 기억과 경험을 계속 역사화하려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익법인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관계자는 “생존 피해자 수가 급감하고 있는 만큼 정부가 구술채록 사업을 정규화해 예산과 인력을 안정적으로 지원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최은서 기자 [email protected]
오지혜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4> 한국일보

☞기사원문: “더 늦기 전에…” 진정한 광복 위한 ‘기억 투쟁’은 계속된다

토, 2021/08/14-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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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뉴스해설] 시간에 김환주 해설위원은 다시 확인된 군함도 ‘역사 왜곡’과 일본 정부가 국제기구의 시정 요구 조치에도 외면한다는 내용을 방영했다. 또 다른 매체는 일본 입장에서 반박하는 내용을 보도했다. 군함도 관련 유네스코 지적은 트집이라며 오히려 일본의 이미지를 떨어뜨리려는 한국의 정치공작이라는 것이다. 광복 76주년이다. 아직 식민통치의 고통을 고스란히 겪고 있는 피해자와 유족들이 많다. 일본군 위안부 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강제동원의 역사가 바로 ‘군함도’이다.

▲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 서울시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는 주제의 전시관련 브리핑을 하고있다.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영상 공개전시에 몰린 취재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일본 근대 산업시설 등재 결정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은 철강·조선·석탄산업

세계유산은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으며 10가지 등재기준에 따라 인류가 공유할 만한 현저한 보편적 가치를 평가한다. 1~6까지는 문화유산, 7~10까지는 자연유산에 관한 기준인데 그 가운데 1가지 이상 부합하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다만, 모든 문화유산은 재질이나 기법 등에서 유산이 원래의 가치를 보유해야 하는 ‘진정성’, 유산의 가지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충분한 제반요소를 보유한 ‘완전성’, 법적·행정적 보호제도와 완충지역 설정 등의 ‘보호 및 관리체계’를 갖추어야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이런 기준 가운데 인간 가치의 중요한 전환점 기준 2, 문화적 전통 및 문명의 독보적 유산 기준 3, 역사의 중요한 단계 예증 기준 4를 들어 등재 신청을 했다. 그러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이코모스(ICOMOS)는 기준 3을 기각하고 기준 2와 기준 4만 유산 가치를 평가했다.

일본의 근대 산업시설들이 명백히 군사적 필요 때문에 만들어졌음에도 일본 정부의 신청서에는 이런 사실들을 강조하지 않았다. 세계유산위원회는 결정문에 각 시설의 역사 전체를 알 수 있도록 하라는 이코모스의 권고 사항을 각주에 부기하는 형식으로 명시했다. 일본은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노역을 했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정부도 징용 정책을 시행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 또한 일본은 정보센터 설립 등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이코모스가 권고한 해석전략에 포함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일본정부가 후속 조치와 관련해 2017년 12월 1일까지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경과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일본은 문화유산 등재 이후 2년마다 제출하는 이행 경과 보고서에서도 약속을 저버려 경고를 받았다 유네스코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공동조사단이 지난달 7~9일 도쿄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시찰한 결과를 발표했다. 보고서에는 1940년대 해당 시설에서 한국인 등이 강제노역을 했다는 등의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조치 또한 미흡했다고 밝혔다.

군함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군함도’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을 했던 슬픈 역사가 간직된 섬, 군함도의 공식 이름은 ‘하시마’다. 1974년 1월 탄광이 문을 닫아 아무도 살지 않는 섬이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TV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 소개되고 영화 <군함도>를 통해 이 섬에 관한 관심도 커졌다. 위치는 나가사키 항에서 약 18킬로미터 떨어졌으며 동서 160미터, 남북 480미터, 둘레 1.2킬로미터, 면적 0,063제곱킬로미터로 야구장 두 개 정도 크기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그런데 1960년에는 이 작은 섬에 5,267명이 살았다고 한다. 인구밀도가 도쿄보다 9배 높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구밀도를 기록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유는 석탄 때문이었다. 1810년 근처에 살던 어부가 우연히 석탄을 발견한 뒤 1890년대부터 일본 기업 미쓰비시가 본격적으로 바다 밑에 묻혀 있던 석탄을 캐내기 시작했다. 석탄 생산량이 가장 많았던 1941년에는 41만 1,100톤에 이르렀다고 한다. 미쓰비시는 1916년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인 7층 아파트를 세웠다. 그 후 10층 아파트를 비롯하여 고층 건물들을 계속 지었고 좁은 섬에 근대식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모습이 마치 군함처럼 보여 그때부터 ‘군함도’라고 불렀다. “도쿄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은 모두 하시마로 모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쓰비시는 해저탄광을 개발하기 위해 최신 기술을 개발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하시마는 일본 근대화를 상징하는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 하시마 탄광으로 강제동원된 고 서정우씨의 영상이 최초로 공개되고있다.

강제동원된 조선인들

군함도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1943년부터 1945년 사이에 500~800명의 조선인들이 하시마 탄광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설 『군함도』 의 한수산 작가가 실제로 만난 고 서정우 할아버지는 1944년에 16세였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해저탄광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탄광 바닥에 찬 물 때문에 습하고 후끈후끈한 공기를 마시며, 낮은 막장에서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하루 10시간 이상씩 석탄을 캐냈다. 강제로 끌려와 강제노동을 하다가 병이 들어서야 그는 육지로 나갈 수 있었다. 탈출을 시도하다 잡혀서 죽기 직전까지 구타를 당하기도 하고, 바다에 몸을 던진 사람들이 시체로 발견되기도 했다. 희생된 조선인들이 40~50명에 이르렀다는 증언도 있다.

인류의 보편적 차원에서 군함도는 세계유산일 수 없다

오늘날 군함도는 연간 1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유산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세계유산의 공식 명칭은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철강·조선·석탄산업’이다. 군함도를 홍보하는 메시지 속에는 침략전쟁을 바탕으로 한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정당화하고 식민지의 희생을 감추고자 하는 일본정부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아파트 등 그들이 환호하는 군함도 건축물의 대부분은 메이지시대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더구나 일본정부는 세계유산의 범위를 1910년으로 한정하였으므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섬을 둘러싼 호안의 일부와 조금밖에 보이지 않는 갱도 입구뿐이다. 일본정부는 강제노동의 어두운 역사를 가리기 위해 1910년으로 그 시기를 한정하는 꼼수를 부리고는 군함도 전체가 세계유산인 양 선전하고 있다. 이것이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의 모습이다. 또한 역사를 왜곡하는 현장이 세계문화유산으로 기억될 수는 없다.

유네스코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UNESCO(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는 1945년 설립되었으며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다. 유엔의 전문기구로서 전 세계의 교육과 과학, 문화의 보급을 통해 빈곤국에서 문맹 퇴치 및 인류의 보편적인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고 국제 교류 증진을 통한 국제간의 이해와 세계 평화를 추구한다. 무엇보다 인류가 창조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다양한 유형의 문화적 아이템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알리고 있다. 프랑스의 에펠탑과 같은 건축물, 앙코르와트 같은 신전, 이집트 피라미드와 같은 고대 유적, 오만의 관개수로와 같은 구조물까지 실로 방대한 영역의 인류유산이 포함되어 있다.

유네스코는 문화유산을 지정하는 일뿐만 아니라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의 관리, 보호와 보존 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위험에 처한 곳이나 위협을 받고 있는 곳도 알리고 있다. 그래서 일부 세계유산 중에는 관리나 보존이 제대로 되지 않아 리스트에서 제외되는 곳도 여럿 있다.

박혜숙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4> 대한뉴스

☞기사원문: 군함도가 왜 세계문화유산인가! 잘못된 것은 시정돼야 마땅

※관련영상

일, 2021/08/15-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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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전] [앵커]

교육당국도 일제 잔재 청산을 추진하고 있지만, 친일 인사가 작곡한 교가는 좀처럼 교체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문들의 반대가 크다는 게 이유인데 교육청에서도 강제할 방법이 없어 난감해하고 있습니다.

황정환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이 초등학교는 최근 학교를 상징하는 나무를 고유 수종인 소나무로 교체했습니다.

가이즈카 향나무가 일제 강점기 때 보급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학교 곳곳에 심겨진 가이즈카 향나무는 예산을 마련해 모두 제거할 예정입니다.

[박재관/대전 옥계초 교사 : “학생·학부모 의견 수렴을 거쳤는데 다행히도 모두 동의해 주셔서 한국 고유 수종인 소나무로 변경하게 됐습니다.”]

가이즈카 향나무를 학교 상징으로 삼았던 대전지역 20개 학교, 충남지역 120개 학교가 수종을 교체했거나 교체를 추진 중입니다.

문제는 교가입니다.

충남의 이 고등학교 교가의 작곡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흥렬입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에 가입해 일제의 징병과 징용을 찬양하는 노래를 다수 만들며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했습니다.

학교에서 교가 교체를 추진했지만 동문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성원기/충남교육청 민주시민교육과 장학사 : “어린 시절의 추억 공유와 또 현재 재학생과의 연결 고리가 아무래도 교가이다 보니까 졸업생들의 반대가 좀 큰 편입니다.”]

친일 인사가 작곡한 교가는 대전에 9개, 충남에 24개 학교에서 불리고 있지만 대부분 학교가 비슷한 핑계를 대며 교체를 미뤄 지금까지 교체된 건 7곳에 불과합니다.

[홍경표/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사무국장 : “하루 빨리 미래 지향적인 내용으로 교가를 다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지역사회와 학교 동문들도 이에 적극 협조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광복 76주년을 맞았지만 교육계의 일제 흔적 지우기는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KBS 뉴스 황정환입니다.

촬영기자:신유상

황정환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5> KBS

☞기사원문: 동문회가 반대해서?..일제 잔재 청산 지지부진

월, 2021/08/1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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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멘트 】

오늘은 76번 째 맞는 광복절입니다.

광주시는 지난 2019년부터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친일 잔재물을 찾아 단죄문을 설치하고 있는데요.

친일파 선정비부터 친일 시인의 시비, 착취 유적 등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37건에 달할 정도로 우리 주변에 친일 잔재가 여전히 많습니다.

박성호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 기자 】

선열들의 공적을 기리는 광주공원 비석군에 비석 3개가 눕혀져 있습니다.

윤웅렬, 이근호, 홍난유.

전남 관찰사와 광주 군수 등을 지내며 한일강제합병에 도움을 주거나 의병을 탄압해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와 상 등을 받은 친일파 3명의 선정비입니다.

이들의 친일행적은 쓰러진 비석 옆에 단죄문으로 남았습니다.

친일 시인 서정주가 쓴 허백련 화백의 동상 비문과 너릿재 ‘무등을 보며’ 시비 옆에도 단죄문이 세워졌습니다.

지난 2019년부터 광주에서 발견된 일제 잔재물은 모두 37개.

친일파의 단죄문 뿐만 아니라 어린 여공들을 착취했던 전남도시제사 옛터 등 아픈 역사를 간직한 역사 건물에도 안내문이 세워졌습니다.

▶ 인터뷰 : 김순흥 /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
– “조선의 많은 여공들이 장시간, 저임금, 강제노동을 당하다시피 해왔거든요. 노동착취를 통해 부를 착취해갔던 것이죠.”

광주시는 그동안 확인된 일제 잔재물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인터넷 웹페이지를 올해 하반기 내에 구축하기로 했습니다.

▶ 인터뷰 : 정전국 / 광주시 민주인권과
– “지금까지 (단죄문을) 설치했던 현황에 대해서 웹자보를 구축해서 시민들께 홍보할 예정입니다. 또한 이 자료를 가지고 각급 학교, 교육청에도 배포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광주 전남 출신 인물은 모두 156명.

광주시는 시민들의 제보 등을 통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일제 잔재물을 찾아나갈 계획입니다.

kbc 박성호입니다.

<2021-08-15> kbc광주방송

☞기사원문: 친일파 부터 착취 유적까지..3년간 37곳에 단죄문

월, 2021/08/1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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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배상 촉구 기자회견…고령 피해자들 온라인 참석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 [유튜브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정성조 기자 = “궁금해요. 일본 기업은, 말하자면 대한민국에서 이런 분(강제동원 피해자)이 있다고 하면 자기들이 사과해야지. 죄송하다고 빌어야지. 사과를 해야지. 그놈들 그렇게 무관심하게 있으면 일본이 나쁘지.”

1943년 1월 고등학교에 다니다 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 가마이시제철소에 징용된 이춘식(97) 할아버지는 광복절 76주년을 맞은 15일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대일 과거 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주최로 열린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앞서 이 할아버지 등 피해자 4명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2018년 대법원에서 원고 승소로 최종 확정됐다. 그러나 국내 법원에서만 13년이 걸린 노력이 무색하게 일본 측은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올해 6월에는 피해자 85명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다른 소송이 한국 1심에서 각하되는 등 피해자들의 숙원은 실현되지 않고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유튜브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가는데도 일본 정부와 기업의 반성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944년 ‘일본에 가서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학교도 보내준다’는 말에 속아 미쓰비시 나고야항공기제작소로 간 양금덕(92) 할머니는 “오래됐고, 나이도 많이 먹었다. 달래줄 마음이 조금 있을까 생각했는데 서운하다”며 한숨지었다.

“나 혼자 눈물 흘리고 ‘내 죄다, 내가 복이 없응게 이렇게 했지’ 하면서도, 참 그냥 내가 이제 죽으려나벼.”

교사의 말을 믿고 12살에 일본 도야마(富山)현 후지코시 공장에 근로정신대원으로 동원된 김정주(90) 할머니는 “우리 정부나 국회의원이 힘을 써서 우리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에 간 모든 사람이 보상을 받을 수 있게끔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며 “젊은 사람들도 우리가 어떻게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에 가서 고생했는지 알아주면 좋겠다”고 했다.

강제동원 피해자 김정주 할머니 [유튜브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는 “강제 동원된 분들은 ‘일본의 사죄를 받고 후세에는 (이런 상황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일관되게 말씀하신다”며 “사죄를 못 받고 돌아가실까 봐 걱정하는 말씀이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일본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과거 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인 야노 히데키 씨는 “피해자들에게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다”며 “일본 스가 정권은 정권 말기의 위기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강제동원 기업들이 그런 정권에 자신들의 판단을 맡기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강제동원 판결대로 배상하라”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광복절인 15일 오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광복 76주년 맞이 강제동원 사죄 배상 촉구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이 온라인 참석자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1.8.15 [email protected]

정성조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5> 연합뉴스

☞기사원문: “광복 76년 지나도 사죄 없는 日…피해자에겐 시간 없다”

※관련기사

☞한겨레: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재판도 효력 없나 싶어 마음이 안 좋아”

15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8.15 광복 76주년 맞이 강제동원 사죄 배상 촉구 온라인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이번 행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시민들의 연대를 보여주고, 한 목소리로 일본에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진실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고자 마련됐다. 2021.8.15/뉴스1
광복절인 15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열린 ‘8.15 광복 76주년 맞이 강제동원 사죄 배상 촉구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정주, 이춘식, 양금덕 어르신이 온라인으로 참석한 이번 행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시민들의 연대를 보여주고, 한 목소리로 일본에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진실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고자 마련됐다./김현민 기자 kimhyun81@
(서울=뉴스1) 이성철 기자 =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가 15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열린 ‘8.15 광복 76주년 맞이 강제동원 사죄 배상 촉구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이번 행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시민들의 연대를 보여주고, 한 목소리로 일본에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진실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고자 마련됐다. 2021.8.15/뉴스1

월, 2021/08/16-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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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사 작곡 교가·일본신사 잔재 등…교육청 “후속 조치는 자율”

친일 인사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 [학교 홈페이지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인천=연합뉴스) 최은지 기자 = 인천 지역 학교에 대한 일제 잔재 조사가 지난해 본격적으로 시행됐지만 별다른 후속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15일 인천시교육청에 따르면 지난해 4∼12월 지역 초·중·고교와 특수학교 523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모두 81건의 일제 잔재 사례가 파악됐다.

이 중 22건은 친일 작사가나 작곡가가 만든 교가를 쓰고 있는 학교 사례였다.

특히 ‘섬집 아기’와 ‘봄이 오면’의 작곡가로 유명한 이흥렬이 만든 교가도 7개 학교에서 사용되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흥렬은 일제강점기 일본음악의 수립을 목적으로 창설된 대화악단 지휘자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또 다른 친일 인사인 김동진이 만든 교가를 쓰고 있는 학교도 6곳에 달했다. 김씨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음악 활동을 했다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친일 인사의 동상이나 일본 신사 잔재 등 일제 관련 기념물이 교정에 남아 있는 학교는 3곳으로 파악됐다.

나머지는 서운, 송월, 백마, 작약도 등 일제강점기에 일본식으로 변형된 지명이 교명과 교가 가사에 남은 사례였다.

시교육청은 이 같은 조사 결과를 각 학교에 알렸으나 개선은 권고 사항에 그쳐 눈에 띄는 후속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학교 동문회와 학교운영위원회 등 내부 협의가 필수적인 만큼 교내 일제 잔재를 없애기까지는 시일이 좀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천황을 섬기던 신사의 돌기둥과 석등이 교정에 남아 있는 인천 중구 모 고교의 경우 별도의 시설물 철거 계획을 논의하지는 않은 상태다.

인천 연수구 모 중학교에는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전향한 윤치호의 동상이 세워져 있지만 ‘나쁜 역사도 역사로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철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 학교 관계자는 “동창회 차원에서 재원을 마련해 학교 설립자 동상을 세운 것이라 학교 마음대로 없앨 수 없다”며 “내부 검토를 여러 차례 했지만 역사를 기억하자는 차원에서 동상을 남겨두기로 했다”고 말했다.

친일 인사가 작사·작곡한 교가를 쓰고 있는 학교들도 대부분 즉각적인 개선 조치에는 나서지 못했다.

친일파가 교가를 작곡한 인천 연수구 모 고교는 추후 학생, 학부모, 동문회와의 협의를 거쳐 교가 일부를 개사하는 방안을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인천 동구 모 고교도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에 대해 별다른 개선 계획을 세우지 못한 상태다.

인천시교육청 관계자는 “일선 학교에 일제 잔재 조사 결과를 보고서 형태로 알리기는 했지만 후속 조치는 자율적으로 하도록 했다”며 “이후 각 학교의 개선 여부에 대해서도 추가 조사를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은지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5> 연합뉴스

☞기사원문: 인천 학교들, 일제 잔재 남아 있어도 개선은 ‘거북이걸음’

※관련기사

☞서울신문: 친일파가 만든 교가…인천 각급 학교 일제 잔재 파악하고도 ‘개선‘ 소극적

화, 2021/08/17-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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