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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디뉴스]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⓶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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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디뉴스]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⓶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사건’

admin | 목, 2021/07/29- 11:18

진주 민간인 학살 유족 증언록

사진 진주시 명석면 명석고개 진주지역 유해 임시 안치소.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1주년이다. 전쟁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학살과 함께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자행되었다. 진주에서는 명석면과 용산면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중심으로 많은 민간인학살이 있었다.

단디뉴스는 민간인학살 유해 공동발굴단에서 제1차~11차까지 자원봉사자로 활동한 김영희님의 글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15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연재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연재 계획.

▲ 진주국민보도연맹 사건 배경

한국전쟁 기간 동안 진주지역은 왜 다른 지역보다 유달리 ‘보도연맹(保導聯盟)’ 가입자와 민간인 희생자가 많았을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진주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사회-문화사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진주는 물산이 풍부한 지역으로 고려시대부터 중요한 거점 행정단위인 ‘목(牧)’이 설치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 3품에 해당하는 목사(牧使)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00년 이후부터 세도정치의 발호로 인해 국가 기강이 무너지면서 각종 수탈과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진주는 이 지역만의 사회-문화사적인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진주지역이 갖는 독특한 특징을 규정 지울 수 있는 역사적 사건 세 가지가 최초로 발발하였다.

이러한 세 가지 큰 사건들은 진주지역을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을 나타내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결국 한국전쟁 기간에 민간이 대학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후기 임술년(1862년)에 진주민 유계춘의 주동으로 수만 명이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세금 착취에 저항한 임술농민항쟁(壬戌農民抗爭)이 최초로 진주에서 발발한다. 이 저항은 진주민의 사회의식의 성장에 기폭제가 되었다.

둘째,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운동(衡平運動)이다. 진주에서 이학찬, 장지필 등 백정 출신과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양반 출신이 합심하여 조직을 결성한다. 당시 백정이라는 신분은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차별이 지속되어 결국 차별 해소를 요구했는데, 이에 개화 양반들도 참여하는 등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 사건은 진주라는 지역이 상당한 진보적인 성향을 갖게 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셋째, 조선에서 맨 처음으로 소년운동의 깃을 든 곳이 바로 진주이다. 강영호(姜英鎬,1896~1950) 선생은 진주 출신 소년 운동가로 동경대학에서 문학 공부를 하였다. 당시 일본 유학 시절에 한국 학생들과 함께 처음으로 어린이 운동단체를 만들고자 했다. 1923년 방정환 선생을 비롯해 강영호, 고경인, 박춘성 등 뜻이 맞는 사람들과 어린이 문화 운동단체 ‘색동회’를 조직한다. 당시 일제강점기 시대 속 민족계몽 정신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고자 하였고, 처음으로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1920년 진주소년운동으로 시작되는 아동문학운동이 진주 문학의 싹이 되기도 했다. (주1)

사진 2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풀만 무성한 강상호 선생 묘지

또한 진주사범학교 등 중등학교가 4개나 있어 교육받은 인력이 많이 배출되어 진보적인 환경이 조성되었고, 이러한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사회운동의 기반이 되어 진주지역 보도연맹은 가입자도 많았고 희생자도 많았다. 진주지역에서 해방 후 정치적 갈등은 1946년 ‘대구10월사건’이(주2) 발생하면서 본격화되었다. 10월 7일에 경남으로 파급되면서, 진주와 마산에서 가장 격렬했다. 진주지역에서는 봉기가 일어나 진양군 정촌지서, 대평지서, 명석지서 등이 시위자들에게 점거되었다.

이후 시위자들이 경찰이 발포하여 16명이 사살되었고, 시위자 100여 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주모자로 체포된 인민위원장 강대창 등 6명이 미군정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때부터 진주형무소에는 좌익사범들이 넘쳐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진주는 빨치산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인근에 위치하여 지리산에 은거하던 빨치산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진주형무소를 자주 습격하였다. 1949년 10월 말경에 빨치산이 진주형무소, 진주시청, 진양군청을 습격하기도 한다.

이후 진주보도연맹은 1949년 12월 8일 진주극장에서 자수자와 전향자 등 천여명이 참여하고 진주경찰서장(이정용)이 이사장을 맡고 진주인민당 위원장(박진환)이 간사장을 맡아 결성된다.(주3)

좌(사진 3 형평운동 기념탑 칠암동 경남문화예술회관 건너편), 우(사진 4 신현수 선생 頌公碑(송공비) 망진산 봉수대 아래).

▲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희생 경위

1945년 9월 초순 남한의 형무소 재소자는 모두 2,600명이었다.(주4) 그러나 1926년 7월에는 17,000여 명으로, 1948년 봄에는 22,000여 명으로 늘었다.(주5) 그 후에도 전국 19개 형무소 재소자 수는 계속 늘어나 1950년 1월에는 48,000여 명에 이르렀다. 진주형무소는 한국전쟁 당시 직원이 120명이며 재소자는 1,0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주6) 재소자 중 가장 많이 수감되어 있었던 재소자들은 정치범들이었다. 진주 형무소에는 진주지청 산하 진주, 사천, 하동, 의령, 합천, 산청 등지에서 온 좌익사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그 후 정부는 1950년 2월 11일 국회본회의에서 좌익인사들의 보도연맹 강제 가입을 종용하여 협박하면서 한 개 군에 일만 명 가입시킬 것을 지시한다. 1950년 6월 25일 내무부 치안국은 「전국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城署査 제 1799호) 제목의 비상 통첩으로 전달하고 1950년 6월 29일 ‘불순분자 구속의 건’, 6월 30일 ‘불순분자 구속처리건’과 석방금지령을 지시한다. 7월 11일 ‘불순분자 검거의 건’을 하달하고 전국 보도연맹원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 가두어 놓는 일)을 단행하라 지시한다.

당시 진주경찰서는 1950년 7월 15일 진주시와 진양군 관내 지서 별로 보도연맹원을 예비검속하여 지서에 소집하고 진주경찰서로 구금한다. 구금 기간이 7일~10일 정도인데 그 기간 중 심사를 거쳐 갑, 을, 병으로 분류되었다. 일부는 진주형무소로 이송되었고, 진주형무소에는 산청, 진주, 삼천포, 하동, 의령, 진양군, 사천 등지에서 끌려온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1950년 7월 하순부터 진주는 하동에서 진격해오는 인민군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과 함양으로 진격해오는 인민군 제4사단(사단장 이권무)에 의해 점령 위기에 처하면서(주7) CIC(특무부대), 헌병, 경찰이 7월27일부터 후퇴하기 시작했다.(주8)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진주지역 보도연맹원들은 그 직전에 집중적으로 학살되었다. 진주경찰서 구금자 중 ‘갑’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7월 21일경 학살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7월 26일까지 몇 차례에 걸쳐 학살되었다. 그리고 진주형무소에 구금된 보도연맹원과 재소자들도 7월 22일부터 7월 26일 사이에 명석면 관지리, 우수리, 용산리, 문산 상문리, 마산 여양리 등에서 모두 학살되었다.

사진 5 진주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과 진주국민보도연맹 사건 발생장소

▲ 제노사이드(집단학살범죄)는 무엇일까?

세계적으로 제노사이드는 고의로 혹은 제도적으로 어떤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이념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파괴하는 집단학살을 말한다. 권력을 가진 지배자 혹은 특정 집단이 어느 한 집단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소위 씨를 말리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주9) 이와 유사한 용어가 ‘홀로코스트’가 있다. 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한다. 전쟁에서 군인은 적국의 군대와 싸운다.

그러나 제노사이드는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지배자 혹은 특정 집단이 어느 한 집단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소위 씨를 말리는 전쟁을 벌인다. 가해자들은 희생자들의 문화와 역사를 포함한 모든 흔적을 지우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집단학살범죄가 자행되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국민보도연맹원들의 학살은 대다수가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넘긴 1950년 7월 14일 이후부터 9월 하순 집단학살 금지령이 내려질 때까지 계속됐다. 당시 국민보도연맹원이 몇 명 학살당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보도연맹원 가입자 수가 30만 명 내지 35만 명이었다는 통계가 있고, 서울의 보도연맹원 수가 1만 9,800여 명이었다는 기록(동아일보 50년 5월 5일 자)이 있고 학살된 보도연맹원들이 최소한 15만 내지 20만 여명으로 추산된다.(주10) 세계적으로 자행되었던 제노사이드의 대표적 사례(민족, 종족, 인종, 종교, 이념)는 다음과 같다.

민족 청소’의 사례로 ‘옛 유고슬라비아의 민족 청소’가 있다. 1991년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를 침공함으로써 4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은 피란민 주거지인 스레브레니차에서 일주일 만에 8,000여 명의 보스니아 성인 남자와 소년의 목숨을 빼앗았다.

종족 청소’의 사례로는 아프리카 르완다의 제노사이드를 들 수 있다. 르완드를 식민지 지배한 벨기에는 소수 투치족을 활용하여 다수의 후투족을 지배했다. 종족간의 갈등이 누적된 결과 독립 후 후투족은 투치족을 100일 만에 대략 80만 명을 학살했다.

홀로코스트’, 악명높은 유대인 대학살은 ‘인종 청소’다. 1933년에 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독일을 단일 인종인 ‘아리안’의 땅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반유대인법을 만들고 유럽 전역에 강제 수용소를 15,000여 개나 설치했다. 2차 대전 중 유럽의 950만 유대인 중 600만여 명이 나치의 손에 살해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이교도(異敎徒) 청소’의 경우다. 이슬람교를 믿는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를 믿는 아르메니아인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대량 학살했다. 1894년부터 1896년까지 10~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제1차세계대전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100만 명이 살해당했고, 최소 50만 명이 추방되거나 탈출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이념 갈등에 따른 집단학살’ 사례다. 냉전 체제하에서 1975년에 집권한 크메르루주는 도시민, 지식인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반대 세력에 대해 숙청, 고문, 학살을 자행했다. 크메르루주 정권 아래 기아, 고문, 처형, 강제노동 등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당시 인구의 4명 가운데 한 명 꼴인 170만∼2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세계적으로 발생한 제노사이드의 다섯 가지 사례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우리나라는 이념적 갈등 속에서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집단학살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적 근거도 없는 국민보도연맹이란 기구를 결성한 것이다. 국민보도연명이란 도대체 어떤 기구인지 살펴보자.

▲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란 무엇인가?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국민의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조직한 반공단체다.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른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한다는 취지로 1949년 4월 20일 관변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된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9월20일부터 지방지부 조직에 착수하는데,(주12) 도내 각 경찰서 단위로 하부조직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주11) 한국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국민보도연맹 경상남도연맹(약칭 경남도연맹)은 1949년 11월 11일 경남 경찰국 무도회관에서 ‘임시발기인대회’를, 13일에는 부산지법 회의실에서 ‘정식발기인대회’를, 15일에는 ‘결성대회 정식 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고, 20일 ‘결성선포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출범하였다. 이후 경상도 산하 각 시•군 연맹과 읍•면 지부가 결성된다. 검•경 당국은 1949년 10월25일부터 1949년 11월30일까지 남로당원 자수 주간을 설정하고 대대적인 자수•전향 작업을 진행한다. 경남도연맹에서 발표한 경남의 자수전향자는 5,548명이었다. (주13)

조직결성 명분은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 기회를 준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재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가족의 생명•재산 등을 보호하여 준다’며 남로당원 자수 주간을 선포하였다. (주14) 그러나 1950년 2월 11일 제11차 국회 본회의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신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협박까지 하면서 1개 군에서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입을 종용하였다. 이로 인해 좌•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가입되어 좌익이라는 낙인이 찍혔다’(주15)

1949년 12월 2일 경상남도 경찰국 발표에 의하면, 집단학살사건은 경남도 내 어느 한 곳도 빼놓지 않고 자행되었는데, 시•군마다 200여 명에 달하는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 진주, 마산, 부산 형무소 수감재소자 및 예비검속자 3,300여 명을 비롯 약 7,000여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주16)


진주지역의 자수전향자는 259명이었다. (주17) 진주경찰서는 좌익활동 전력자뿐만 아니라, 농민조합 등에 가입했던 사람, 각종 시위나 행사의 단순 가담자, 그들의 친인척, 빨치산에게 식량 등을 제공했던 사람, 또는 국민보도연맹이 어떠한 단체인지도 모르던 농민들까지 여기에 가입하게 했다. 가입한 보도연맹원에게는 통제 목적으로 보도연맹원증을 발급했으며 지서 별로 이들을 훈련, 교육하는 등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국민보도연맹원 가입 당시에는 사상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일반 국민들이 다수 가입되었으며, 배급을 준다거나, 비료를 준다, 아니면 글을 가르쳐 준다는 등으로 회유하였으며, 협박과 강압에 의한 강제 가입까지도 불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이를 입증하는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 권유를 받은 사람의 증언이다.

“나는 보도연맹에는 가입하지 못했제. 순사가 몇 번 찾아와서능 가입하면 글을 배와준다카데, 배급도 주고 가입 하고자프믄 지서로 오먼 된다카더마. 그래 지서에 갈라꼬 뱃가(나루터)에까징 갔제. 그란데 배가 없능기라 그래서 도라왔제.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히는구마. 만일에 내가 그때 배를 타고 갔시모 내도 그때 죽었을기구마”

사진6 국민보도연맹원증

▲ 증언록의 증언자(유족분) 정○○(희생자의 아들) 인터뷰 내용

질문 : ‘아버지가 희생될 당시 살던 곳 주소를 아시나요?’

대답 : 진양군 대평면 대평리 000번지. 그 주소를 계속 가지고 있다가 1997년 남강댐 공사 중에 이주단지로 오면서 바뀌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할머니가 너희 아버지 살아올 수 있으니까 절대 이사 가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내가 세 살때 어머니는 할머니가 저년이 들어서 망했다고 나쁜년이라고 그러고 그러면서 꼭 매일 아침 강에 가서 정화수 떠다놓고(빌었어요). 그 당시에는 강물을 먹었거든요. 할머니가 매일 부엌에다가 싸 한 줌 놓고 기도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할머니 뭐하는 건데?’하니까 ‘혹시 너거 아버지 살아 돌아올지 모르니까 이사 가지마라’하셨어요. 초가집에 물이 들어왔어 지붕개량을 하고 그대로 이사는 끝까지 안가고 거기 살았어요.(본문245쪽)

사진 7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 발굴장 입구

질문: ‘혹시 아버지가 학살당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이 시신을 찾으러 가셨나요?’

대답: “삼촌이랑 어머니가 용산리 고개를 갔었대요. 6월 초열흘쯤 됐을 거랍니다. 시신을 찾아가도 된다는 소문을 듣고 가니까, 조그만 둔덕에 시체가 쫙 드러누웠는데 못 찾겠더라 하대요. 총을 맞아가지고 6월이다 보니까 부패가 돼가지고 얼굴 형태도 모르겠고, 그냥 뭐 허리끈이나 옷이나 보고 아는 거지 모르겠더랍니다. 우리 형은 할머니한테 나는 엄마 뱃속에 있었고, 그래 냄새가 나니까 쑥을 뜯어가지고 코를 막고 찾았대요. 그렇게 찾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찾겠어서 이래 가지고 안 되는 거다. 삼촌이 ‘형수님 갑시다. 이래 안 되는 기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갑시다.’했대요. 딱 한번 찾으로 갔대요”(본문 251쪽)

본인이 죽어 묻힐 구덩이를 손수 파게 한 후 학살을 하고 밀어 넣어버렸다고 한다. 고인 핏물이 구덩이를 넘쳐 계곡에 피가 흘러내렸다고 한다. 제가 발굴차 용산고개 현장에 몇 차례 가봤지만 깊은 계곡은 풀로 뒤덮여 아무 말이 없다.

질문: ‘세 살 때 집을 나간 어머니는 다시 만났을 때 아버지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해주셨나요?’

대답: “그래 인자 늦게나마 어머니를 만나니까 어머니가 여기(팔뚝)에 문신을 두 개 탁탁 새겼더라고, 팔에 문신을 새겼어, 어머니가 ‘나는 너거 아버지 찾을 수 있다. 살아오면 찾는다’ 하더라고, 아버지와 문신을 같이 했대요. ‘너거 아버지도 여기 하고 나도 여기 하고 문신이 똑같다. 혹시 내가 죽고 없더라도 너거 아버지 살아오거든 이놈(문신)보고 찾아라’ 하셨어요.(눈물)(본문260쪽)

두 분은 저승에서 만나시어 문신으로 확인하시고 해원(解冤)하시기 바란다.

질문: ‘구수회라는 분은 용산리 학살 장소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었던 건가요?’

대답: “그 매장지에서 500미터도 안 되는 동네에 살았으니까, 나무하고 소 먹이러 가면서 맨날 ‘요는 머이 묻혔고 머이 묻혔고’하는 말을 어른들한테 들었대요. ‘거기 소나무 밑에 갈비(소나무 낙엽 채취)하지 마라 거기 송장 썩은 거 묻어 놨은께, 거기(시체를 묻어서 그랬는지)는 풀이 잘 자라더래요. 학살 후 그 이듬해 산사태가 나니까 해골이 도랑에 굴러 내려오더랍니다. 그래 이걸 주워가지고 서부시장에 갖다 팔더라 하데요. 왜 파느냐, 그 당시에 영양실조가 많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천질이라는 하늘이 준 병리라고, 애가 가만 가다가 탁 쓰러져서 거룸 물고 기절했다가 또 살아났다가 또 가고, 아, 간질, 간질병이죠. 간질환자 아니면 나환자가 이 머리뼈를 갈아서 먹으면 낫는다는 소문이 진주시에 엄청 났대요. 그래서 용산고개에서 파 내려오는 사람도 가끔 봤대요. 어린애들이 소 먹이다 오면 나이 많은 영감들이 보자기에 둥그런 걸 싸 내려오더랍니다. 그래 ‘뭐이고?’하니까 ‘너들은 이런거 보년 안 된다.’이러면서 가져 내려오고 하더랍니다. 개울에는 머리가 막 시퍼렇게 곰팡이 피어 갖고 구석에 묻혀있고 그랬대요.(본문264쪽)

증언록을 읽으면서 이러한 제노사이드(집단학살범죄)는 왜 반복될까? 제노사이드는 다른 가치나 이념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파시즘적 범죄이다. 국가나 집단의 경우 자신의 범죄행위를 솔직히 드러내고 반성하기보다는 미화하고 사실 자체를 왜곡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제노사이드는 우리와는 관계없는 먼 옛날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제노사이드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과거의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식민지 시대와 민족 분단의 한국 현대사의 굴절 속에서 집단학살의 아픈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2008년 1월 24일에 참여정부 노무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과거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양민학살 행위’로 인정하여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유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위로와 사과의 뜻을 밝혔다. 아울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약칭 진화위)를 발족하여 전체 유족들의 15% 정도의 배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은 조사가 전면 중단되었다가 문재인 정부에서 진화위 2기(2020년 12월 10일)가 출범되어 보•배상 미신청자 유족들의 재신청 및 전 지역을 조사 중이다. 국가에 의해 집단 학살된 보도연맹 사건을 은폐하고 금기시할 것이 아니라, 감시와 차별을 받아온 유족들의 아픈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배•보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주⟧

(주1) 진주관광 sns 기자단, “진주에서 시작된 소년운동의 역사”, 2020년 12월 29일.
(주2) 대구 10•1 사건은 1946년 10월 1일에 미군정하의 대구에서 발발한 영남 지역의 사건으로 이후 남한 전역으로 확산된다. 식량부족, 친일경찰에 대한 반감, 독립국가 수립이 지연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결합해서 폭발한 사건이다.
(주3) 남조선민보, 1949년 12월 10일자. 《제4차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 자료집》, 2017, 19쪽(주4) 법무부, 『한국 교정사』, 1987, 448쪽.
(주5) 최정기,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의 형무소 실태연구-행형제도와 수형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제노사이드 연구』 제2호, 2007, 20~21쪽.
(주6) 법무부, 『한국 교정사』, 1987, 535쪽.
(주7) 명석면사편찬위원회, 『명석면사』, 늘함께, 2000, 225쪽.
(주8) 신경득, 『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 학살』, 살림터, 2002, 189쪽.
(주9) 마크 프리드먼/한진여 옮김/홍순권 감수, 『제노사이드 집단학살은 왜 반복될까?』, 내인생의책, 2015, 17쪽.(주10) 한국전쟁전후 진주민간인 희생자유족회, 《백골의 귀향》, 2014년 2월 19일
(주11) 자유민보, 1949년 11월 20일자.
(주12) 동아일보 1949년 4월 23일자.
(주13) 민주중보, 1949년 12월 3일자.
(주14) 동아일보, 1949년 10월 30일자.
(주15) 제6회 국회속기록 제28호, 598~602쪽, 1950년 2월 11일.
(주16) 한국전쟁후 진주민간인희생자유족회, 《백골의 귀향》, 2014년 2월19일, 32쪽
(주17) 민주중보, 1949년 12월 3일자.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자원봉사자

고등학교 역사교사를 지냈고,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회원이다. 발굴 1차부터 10-1차까지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2021-07-27> 단디뉴스

☞기사원문: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⓶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사건’

※관련기사

☞단디뉴스: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➀ “아직도 풀리지 않는 70년의 한을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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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 격전지에서 미군기지 건설용 매립재 채취 추진
일본 정부 “채취 장소 미정…유골 안 들어가도록 눈으로 확인”

일본 오키나와(沖繩)현 소재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 일본 정부는 이 비행장을 대체할 군사 시설을 건설하겠다며 오키나와 헤노코(邊野古) 연안을 매립하는 공사를 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제 강점기 희생된 조선인 유골이 섞인 토사가 일본 오키나와(沖繩)현 미군 기지 공사에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유해 수습 운동을 벌여 온 일본 시민단체는 한국·미국 유족과 힘을 모아 공사 중단을 촉구할 계획이다.

오키나와 본섬 남부에 있는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을 같은 섬 중부 헤노코(邊野古) 연안으로 옮기는 사업이 진행 중인데 일본 정부가 공사 계획을 일부 변경하겠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오키나와의 미군 해병대 기지인 ‘캠프 슈와브’ 인근 바다에서 매립 공사 등이 진행 중이다. 일본 정부는 후텐마 비행장을 대신할 새로운 기지를 이곳에 건설 중이다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전쟁 희생자 유해가 다량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채취한 토사 등을 매립재로 사용할 가능성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일본 방위성은 오키나와의 미군 해병대 기지인 ‘캠프 슈와브’ 앞바다를 매립해 후텐마 기지를 대체할 새 비행장을 만들고 있는데 연약한 지반을 개량하기 위해 매립재 종류 등을 바꾸겠다며 작년 4월 21일 오키나와현에 공사 계획 변경 승인을 신청했다.

7일 연합뉴스가 계획서의 세부 내용을 확인해보니 2차 대전 말기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 현장인 오키나와 본섬 남부 이토만(絲滿)시와 야에세초(八重瀨町)가 매립용 토사 등을 채취할 장소로 기재돼 있었다.

[그래픽]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 공사 매립재 채취 장소 (서울=연합뉴스) 장예진 기자 = [email protected]

오키나와에서는 1945년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격렬한 지상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주민, 일본군, 미군 등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오키나와현 집계)된다. 희생자 중에는 한반도에서 동원된 조선인도 포함된다.

희생자 유해 수습이 미흡해 이토만을 비롯한 격전지에서 발굴이 계속 진행 중인 상황이다. 변경된 공사 계획이 승인되면 유골이 섞인 토사가 매립용으로 투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유해를 수습해 유족에게 돌려주는 운동을 하는 현지 시민단체 ‘가마후야'(ガマフヤ-) 등은 일본 정부의 공사 계획 변경에 반대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토사 등을 어디서 조달할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계획서가 “적정한 조사를 거쳐 채취 장소 등을 결정한다”며 여지를 남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존 계획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이토만과 야에세가 변경된 계획서에 파쇄된 암석을 채취할 후보지로 명시된 것을 보면 결국 이 지역에서 채취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19년 2월 15일 일본 오키나와(沖繩) 기노자손(宜野座村)의 미군의 옛 민간인 포로수용소 주변 유골 발굴 현장에서 오키나와의 시민단체 ‘가마후야’의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 대표가 유골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계획서는 이토만과 야에세에서 파쇄된 암석 3천160만㎥를 채취하는 방안이 기재돼 있다. 이는 오키나와현 내부에서 조달할 파쇄석(4천476만㎥)의 약 70% 해당한다.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67) 가마후야 대표가 올해 3월 단식 투쟁까지 하며 반대에 나서자 기시 노부오(岸信夫) 방위상은 “개발 전에 유골이 없는지 육안으로 사전 조사를 하고 유골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호(壕·구덩이)가 있는 장소는 개발하지 않는 등 유골을 배려하며 사업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맨눈으로 유골 유무를 파악하는 것이 현실성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오랜 기간 방치된 뼈는 전문가가 아니면 식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채취할 토사 등의 양에 비춰보면 유해가 포함됐는지 철저히 확인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가마후야는 한국 단체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02-2139-0462)와 민족문제연구소(☎ 02-969-0226)를 통해 오키나와 유골 발굴 및 DNA 감정에 참여할 한국인 유족을 모집하고 이들과 힘을 합해 일본 정부에 매립 계획 취소를 요구할 계획이다.

한국인 희생자 이름 (오키나와=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오키나와(沖繩)현 이토만(絲滿)시 소재 ‘평화기념(祈念:이뤄지기를 비는 것)공원’에 한국인 전쟁 희생자 이름을 새긴 비석인 각명비(刻銘碑)가 설치돼 있다.(위) 각명비에는 히코산마루 피격 사건으로 희생된 명장모(왼쪽 하단) 씨와 김만두(오른쪽 하단) 씨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이들은 미국 유족 참가자도 모집한다.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오키나와대 지역연구소 특별연구원이 현대사 연구자 다케우치 야스토(竹內康人) 씨가 발간한 명부 자료와 자체 조사를 토대로 분석한 바에 의하면 오키나와 전투에 조선인 3천461명이 군인이나 군속(군무원에 해당)으로 동원됐고 이 가운데 701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노무 동원된 이들이나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이들을 제외한 숫자다.

기록으로 파악되지 않은 이들을 포함하면 실제로 동원되거나 사망한 조선인은 이보다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email protected]

<2021-06-07> 연합뉴스

☞기사원문: 조선인 유골 공사장에 묻히나…日NGO “한미 유족과 반대운동”

※관련기사 

☞ 연합뉴스: “피가 스며든 흙으로 軍기지 만드는 건 인도적으로 용납 불가”

화, 2021/06/15-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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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깊숙이 뿌리박힌 ‘일제 그림자’ 이젠 걷어내자
상명하복·서열주의 등 일본제국주의 관행 영향
일제강점기 역사관 ‘식민사관’ 대표적 무형잔재
항일지사들 국학연구 병행해 식민사관과 싸워

올림픽을 앞둔 일본이 독도문제로 우리를 또 도발하였다. 일본은 우리의 반발을 알면서도 계획적으로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지도상에 표시해 놓은 것이다. 일본의 의도는 명백히 자국내의 혐한 분위기 조성과 극우파들을 준동시켜 이미 실패한 올림픽을 면피하려는 속셈이다. 이를 알면서도 우리는 분노를 삭일 수 없다. 시도 때도 없이 도발하는 일본에 대한 응징의 소리는 온 국민을 일치단결시키는데 왜 그럴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던 의사 출신의 지식인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백인보다 더 백인인 척하고자 노력했던 흑인의 허위의식을 비판하였다. 그는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식민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식민지배를 경험한 자들의 폭력 사용과 함께 문화적 지배를 폭로하여 자아를 회복하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이 일본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하는 것은 자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아직도 우리에게는 청산해야 할 친일잔재가 너무도 많이 남아있다.

■무형의 친일잔재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에 의하면 친일잔재는 ‘친일 논리의 영향을 받은 유ㆍ무형의 유산’으로 정의하고 있다. 건축물이나 조형물, 친일파 등과 같은 ‘유형의 친일잔재’와 달리 정신과 의식에 남아있는 ‘무형의 친일잔재’는 그 범위가 엄청나고 일상생활, 문화 속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어 그 폐해는 더욱 심각하고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무형의 친일잔재는 군국주의로, 때로는 사대주의와 기회주의로 그리고 패배주의 문화로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며 해독을 끼치고 있다.

구체적으로 무형의 친일잔재는 생활문화 속에서 용어로 가장 흔하게 남아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대화나 언어 그리고 전문용어들에도 친일잔재는 여전히 강하게 잔존하고 있다. 특히 어린시절부터 익숙한 ‘묵찌빠’, ‘무궁화 꽂이 피었습니다’와 같은 놀이문화 속에 남아있는 왜색은 성인이 된 뒤의 화투 놀이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대표적인 친일잔재다. 의식과 관행적인 문화 속에도 친일문화는 강하게 남아있다. 흔히 군사문화로 알려진 상명하복의 전통, 기합과 구타 그리고 서열주의 등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대표적인 일본제국주의의 관행으로 학습된 친일잔재다. 또한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국민교육헌장’은 일본의 군국주의 내용을 담고 있는 교육칙어에서 따온 것으로 오랜 기간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이 암송해야 했다. 아직도 그 흔적은 국가주의를 강조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로 남아있다.

법과 제도 속의 친일잔재는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 민족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치안유지법의 이름만 바꾼 국가보안법으로, 그리고 어려운 한자 말투성이인 재판의 판결문도 역시 친일잔재이다. 행정 서식과 지명들 그리고 교육계의 만연한 친일잔재들. 각종 문화예술 분야의 문투나 음계, 화풍 등도 역시 대표적인 무형의 친일잔재들이다. 아직도 친일작가들의 문학상과 친일음악가를 기리는 상장이 버젓이 수여되는 우리 현실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역사관에 관한 논쟁과 교육계의 친일잔재

무형의 친일잔재로 대표적인 것은 일제강점기의 역사관인 식민사관 문제이다. 강단사학자와 재야사학자의 다툼은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있다.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는 학술적 논쟁의 대상이지만 식민통치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그 입장이 식민지 시절을 합리화하기 위한 역사연구(식민사관)의 의도를 담고 있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더욱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이 상존하는 동아시아의 역사전쟁 속에서 역사를 그대로 순수한 학문의 영역으로 국한한다는 것은 순진함을 넘어 아둔한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시절의 항일지사들은 대부분 국학연구를 병행해 식민사관과 싸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단재 신채호를 필두로 백암 박은식, 문일평, 정인보, 안재홍 그리고 조소앙까지 모두 한 손에는 일제와 싸우는 총을 들었지만 다른 한 손에는 식민사관과 싸운 펜을 들었다. 정신사마저 빼앗길 수 없다는 그들의 충심을 헤아려야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해방 이후 신채호의 역사학을 계승한 학교나 학자가 없었음을 역사학계는 자문해 봐야 한다. 어쩌면 신채호의 민족주의 역사학보다 이병도의 실증주의 역사학이 강하게 지배한다면 이 역시 정신적으로 강하게 남아있는 친일잔재이다.

교육계에 만연한 친일잔재는 그 영향성과 파급성 때문에 무엇보다도 앞장서서 해소해야 할 부분이다.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에 의하면 경기도 내 2천400여 학교 중 친일인물이 작사, 작곡한 교가를 사용하는 학교는 89개교로 파악되고 있다. 이흥렬, 김성태, 김동진, 현제명, 백남준, 이광수 등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에 의해 작사 작곡된 교가를 오늘도 미래를 책임질 세대가 무비판적으로 부르고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친일파들이 만든 교가를 부르는 학생들에게 일제강점기의 참상과 독립운동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이 밖에도 반장, 부반장이라는 호칭이나 상사가 부하에게 훈시한다는 군사용어인 훈화(訓話) 등도 여전히 아무런 생각없이 사용되는 무형의 친일잔재이다.

또한 아침 조회는 일제강점기 당시 궁성요배(宮城遙拜)라고 매일 아침 등교해서 교장부터 전 교생이 모두 일왕이 있는 동경 쪽을 향해 90도 각도로 인사를 한 행위에서 출발했다. 학교행사마다 으레 행하는 차렷이나 경례 등의 용어 역시 일왕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전형적인 군국주의 일제의 잔재이다.

■용어로 남아있는 친일잔재

일상용어에 남아있는 친일잔재 역시 무형의 일제유산이다. 그동안 꾸준히 순화의 과정을 거쳐 많은 일본식 용어가 폐기되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용어가 1천171개(국립어학원, 2005년 조사)나 된다고 한다. 특히 음식과 행정분야가 가장 심하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우동(가락국수), 다데기(양념장), 덴뿌라(튀김), 오뎅(어묵), 고로케(크로켓), 소보로빵(곰보빵), 돈가스(돼지고기 너비), 모찌(찹쌀떡) 등 음식에는 여전히 순화의 대상이 되는 용어들이 넘친다.

그러나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가장 심각한 영역은 행정용어이다. 지금도 일선 행정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공람(돌려봄)과 결재(재가), 견학(보고 배우기), 감봉(봉급 깎기), 과세(세금), 가건물(임시건물), 나대지(빈 집터), 나염(무늬들임), 납득(이해), 납입(납부), 내역(명세), 가계약(임시계약), 견적서(추산서), 마대(포대 자루), 명찰(이름표) 등 부지기수로 많다. 산업 현장에서의 친일잔재는 용어로 더욱 구체화되어 있다. 특히 건설분야와 인쇄분야가 심한데 모두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공구리(콘크리트), 노가다(공사판 노동자), 가쿠목(각목), 단도리(채비), 찌라시(전단지) 등 한 둘이 아니다.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일본어는 거짓말의 비속어인 ‘구라(くら)’였다는 조사가 있다. ‘거짓말하다’ 보다 ‘구라친다’라는 말이 익숙하다면 그만큼 우리는 무형의 친일잔재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순화시켜야 할 언어이지만 어쩌면 우리는 그저 익숙하다는 이유로 무비판적으로 왜색 용어를 남발하는 것인지를 반성해야 한다.

무형의 친일잔재 중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지역명도 시급히 시정되어야 한다. 1914년부터 일제는 전국의 행정구역을 강제로 통ㆍ폐합시켜 오랫동안 생활해 오면서 붙여진 정겨운 지명들을 마음대로 변경해 지역 정체성에 혼동을 주었다. 2020년 경기도 조사에 의하면 도내 398개 읍·면·동에서 약 40%인 160곳이 일제에 의하여 지명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모두 행정편의주의로 지명의 유래나 정체성은 무시되고 일방적으로 ’창지개명(創地改名)’을 하여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형편이다. 공교롭게도 1990년대 신도시 개발할 때의 분당(盆唐), 일산(一山), 평촌(坪村), 산본(山本) 등이 대표적이고 수원의 영동시장의 경우는 원래 성외시장이었던 것이 일제에 의해 영정(榮町)으로 변경되었다가 해방 이후에는 영동(榮洞)이라고 정이 동으로만 바뀐 채 지금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모두 옛 정취를 버린 지명들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치 치하에서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했던 까뮈(Albert Camus)는 “과거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래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라며 식민잔재 청산을 주장했다. 오늘 우리가 친일잔재를 성토하고 청산을 외치는 이유도 명확하다. 더 맑고 밝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두운 과거를 그대로 덮어두고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형의 친일잔재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청산하기가 쉽지만, 무형의 친일잔재는 독버섯처럼 숨어서 지금도 우리의 의식과 정신을 갉아먹으며 과거 그시절이 좋았다고 세뇌시키고 있다.

한번 훼손된 정신문화의 영역은 치유하고 복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서둘러야 한다. 법과 제도로 고칠 수 있는 분야는 시급히 시행하고, 자각한 지식인과 언론인들은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서 언행을 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일선 교육계의 선생님들이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모두의 노력은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임형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21-06-10> 경기일보

☞기사원문: [광복 76주년, 우리가 몰랐던 친일 잔재 알리기]무형 친일잔재와 청산, 현황과 과제

※관련기사 

☞대한민국 정책브리핑(2005.6.2): “무형으로 의식 지배, 해독주는 것이 일제문화잔재”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기획연재 일제문화잔재 바로알고 바로잡기

수, 2021/06/16-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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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양성중학교]

도교육청 주관 탐구활동 목적 진행
‘친일파’ 김성태 곡 “개정해야” 92%
학내공모 실시 3학년생 작품 당선
작곡과정 거쳐 1학기내 완성 예정

▲ 학생들이 학생과 학부모, 교사 등 학교구성원의 ‘교가 개정’의견을 확인하고 있다. /사진제공=양성중학교

안성 양성중학교 학생들이 일제 잔재 청산으로 교가 개정을 추진한다.

학생 등의 교가 개정은 경기도교육청이 주관하는 ‘일제 잔재발굴 탐구활동’ 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양성중학교의 교가는 김성태(1910-2012) 작곡가의 곡으로, 그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김성태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 음악단체인 경성후생 실내악단 등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학교측은 학생, 학부모, 교사 등 교육공동체의 의견을 수렴하고 교가 개정의 필요성을 공감했다. 또 학교 총동문회장의 의견도 들었다. 교가 개정의 필요성에 대해 교육공동체(학생·학부모·교사)와 양성중학교 총동문회장의 의견을 1차로 수렴했다.

나아가 학급자치회와 교육공동체 대토론회에서 ‘교가를 개정해야 한다’는 찬성의견 92%를 바탕으로 개정 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교가 개정 TF팀’을 중심으로 교가 개정을 위한 프로젝트 계획을 수립했고, 이를 바탕으로 교가 가사를 공모해 학생들의 정서를 담은 긍정적인 내용, 학교에 대한 자긍심을 빛낼 수 있는 내용 등을 학생들이 직접 작사해보는 기회를 갖도록 했다.

그 결과 공모전에 참여한 17명의 학생 작품 중 심사를 거쳐 3학년생의 작품을 선정했고, 이를 토대로 작곡 과정을 거쳐 1학기 내로 교가를 완성할 예정이다.

안준기 교장은 “이번 교가 개정 프로젝트는 양성중학교 교육공동체가 다 함께 교가 개정에 참여해 학교의 구성원으로서 소속감과 애교심을 고취하는 기회가 됐다”면서 “무엇보다도 독립을 향한 애국심이 3.1만세 운동으로 표출되었던 양성지역에서 올바른 역사의식을 확립함으로써 민주시민으로서의 성장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안성=이명종 기자 [email protected]

<2021-06-16> 인천일보

☞기사원문: 일제 잔재 청산…학생들이 교가 바꾼다

목, 2021/06/1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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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다운로드]

부천시민단체 연대 

< 성 명 서 >

제목 : 국회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반역사적, 반헌법적 판결을 한 김양호 판사를 탄핵하라!

지난 6월 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4민사부(재판장 김양호)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각하하였다. 이번 판결은 강제동원 피해자의 인권회복을 철저히 외면하고, 역사적 사실과 헌법을 무시한 판결이기에 재판부를 강력히 규탄하며 국회가 김양호 판사를 탄핵할 것을 촉구한다.

일본 제국주의는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시키고 35년간 우리 강산과 민족을 억압·수탈·살상하였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강제로 전쟁에 동원하였으며, 부족한 군수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1944년에는 ‘국민징용령’을 발표하여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이러한 강제동원에 의해 우리의 수많은 국민들은 목숨을 잃거나 다쳤으며, 생존자들은 급여와 식사도 제대로 보상 받지 못한 반인권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강제동원피해자분들의 이러한 참혹한 상황은 해방 이후에도 해결되지 못하고 1965년 한국과 일본이 맺은 청구권협정에 의해 묻히게 되었다. 청구권협정 당시 일본은 식민지배의 불법행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 민사적 채권과 채무관계만을 해결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결과 일본정부와 일본군이 관여한 강제동원 불법행위는 청구권협정에 포함되지 않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받기 위해 수십 년간 노력해왔고 2018년 대법원의 판결을 통해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김양호재판부는 일제침략과 점령은 정당했다는 일본의 극우세력의 논리를 바탕으로 오랜 세월 소송의 투쟁 끝에 대법원 판결을 쟁취한 피해자들의 투쟁의 역사를 한순간에 짓밟아 버렸다.

한일협정으로 들여온 돈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느니, 국내 최고재판소인 대법원의 판결을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하다느니, 대법원의 판결이 국재 중재 또는 국제재판소의 대상이 되는 것이 사법신뢰를 손상시킨다느니, 서방세력의 대표 국가로 칭찬하는 일본과의 관계를 훼손하고 한미관계에도 훼손이 된다느니 대한민국 판사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막말을 한 것이다. 판사의 본분을 망각한 채 극우 정치적으로 판결을 해버렸다.

판사는 법과 양심에 따라 헌법에 기반하여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야만 한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사법권에 항상 조심하고 겸손해야 하며 잘못된 판결로 인하여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 하지만 김양호재판부는 왜곡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사법 역사에 남을만한 굴욕적 판결을 하였으며, 오랜 세월 소송을 통해 이루어온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를 무력화시켜버리고 가슴에는 커다란 상처를 남기게 하였다.

우리 부천시민단체 연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와 가해기업의 사죄와 배상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하는 그날까지 연대하여 투쟁할 것이며 인권회복과 역사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잘못된 재판을 한 김양호재판부를 규탄하며 우리 부천시민단체 연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요구한다.

1.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잘못된 판결을 한 김양호 판사는 즉각 사죄하라!
2. 국회는 즉각 김양호 판사를 탄핵하라!
3. 반역사적, 반인권적, 반헌법적 판결이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사법부는 재발방지책을 마련하라!

2021. 6. 16. 부천시민단체 연대

더부천포럼, 부천시민연합, 평화미래플랫폼 파란, 국민TV 부천시협의회, (사)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부천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남북평화재단 부천본부, 지평교회, 부천민중연대, 민주노총 경기도본부 부천시흥김포지부, 부천평화와통일을여는 사람들, 부천새시대여성회, 진보당 부천시위원회, 노동당 부천시흥당원협의회, 부천노동문제연구소, 정의당 부천 병 지역위원회, 천주교 인천교구 노동사목 부천시흥김포, 한국노총 부천김포지부, 콩나물신문 협동조합, 부천민예총, 평화와 자치를 열어가는 부천연대

※관련기사

☞ 부천타임즈 : 부천시민연대, 서울중앙지법 김양호 판사 규탄 성명

목, 2021/06/17-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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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앞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연일 경신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지부장 박종선)가 펼치고 있는 ‘역곡 고택 단죄비’ 1인 릴레이 시위가 지난달 18일부터 오늘(17일 사진)까지 무려 22차례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1인 시위는 휴일을 제외했지만 단일사안에 대한 평화시위로, 무려 1달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역 내 1인 시위를 펼친 최장 기록을 연일 경신하고 있다.

지난달 17일 릴레이 1인 시위 첫 주자인 박 지부장은 “역곡동 고택은 친일파가 살았던 집으로 일제잔재다”며 “부천시는 단죄비를 세우고 일제잔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한 바 있다.

앞서 부천지부는 역곡고택에 대한 향토문화재 지정여부가 경기도 내 친일역사 청산작업에 중대한 도전으로 규정하고 2차례나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1인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은 박 지부장을 포함해 이동호 부지부장, 김병구(15회차), 박창길(13회차), 정한교(8회차 등), 최재숙(5회차)씨 등이다. 회차 별로 부천시 역사 기록 현장을 살펴본다. <사진은 박종선 지부장 제공>

21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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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영 기자 [email protected]

<2021-06-17> 부천일보

☞기사원문: 역곡고택 ‘단죄비’ 1인시위 대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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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천일보: 역곡 고택, 친일청산 릴레이 1인 시위로 비화

☞ 부천일보: 역곡 고택 관련 ‘왜곡 보도’ 규탄

목, 2021/06/17-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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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스페인 상원 도서관에 보관된 ‘조선왕국전도’를 보고 있다.ⓒ청와대 제공

스페인을 국빈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스페인 상원 도서관에 보관된 17세기 조선 지도를 보고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보여주는 아주 소중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간) 스페인 상·하원 합동연설 직후 상원 도서관을 찾아 ‘조선왕국전도’를 본 뒤 이같이 말했다고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일본이 도쿄올림픽 지도와 자위대 홍보 영상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해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문 대통령이 유럽 순방 과정에서 ‘독도는 한국 영토’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스페인 상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왕국전도’는 18세기 프랑스의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 장 밥티스트 부르기뇽 당빌이 발간한 ‘신중국지도첩’에 포함돼 있다. 신중국지도첩은 당시 중국의 실측지도인 ‘황여전람도’를 참고해 중국과 주변지역을 나타낸 지도다.

스페인 상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17세기 지도 ‘조선왕국전도’.ⓒ청와대 제공

이 지도에는 독도가 당시 조선 영토라는 점이 드러나 있다.

>지도에는 당시 독도를 지칭하던 우산도(于山島)를 천산도(千山島)로 혼동해 ‘챤찬타오’(Tchian Chan Tao)로 표기돼 있다. 이는 중국어식 발음 표기다.

안헬 곤잘레스 도서관장은 문 대통령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1730년대 대한민국 한반도의 지도인데, 한국인들에게 가장 와닿는 기록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설명을 들은 문 대통령은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보여주는 아주 소중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며 “아주 소중한 자료를 보여주셔서 감사하다”고 사의를 표했다.

<2021-06-17>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스페인서 ‘독도 조선 땅’ 17세기 지도 본 문 대통령 “아주 소중한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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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 스페인이 보여준 독도 표기 고지도…문대통령 “한국영토 재확인”

☞더팩트: 스페인에서 ‘독도와 울릉도’ 기록 만난 문재인 대통령 [TF사진관]

☞JTBC: 한·스페인 정상회담…’전략적 동반자 관계’ 격상

☞한국일보: 스페인서 조선 古지도 본 문 대통령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소중한 자료”

☞연합뉴스: [영상] 조선왕국전도에 ‘독도는 조선땅’…문대통령 “아주 소중한 자료”

☞광주일등뉴스: [영상] 스페인에 ‘독도’ 그려져 있는 ‘조선왕국전도’…문재인 대통령 스페인 국빈방문

금, 2021/06/18-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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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트루먼 동상건립추진 모임’ 칠곡에 건립 추진

이승만 동상(왼쪽)·트루먼 동상. 경북도 제공

민간단체에 의해 제작된 뒤 수 년째 설치 장소를 찾지 못하고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트루먼 미국 전 대통령의 동상을 경북 칠곡에 세우는 방안이 추진되면서 논란이 다시 불붙을 조짐이다.

17일 경북도 등에 따르면 ‘이승만·트루먼 동상건립추진 모임’(이하 동추모) 측은 최근 이철우 도지사를 만나 이승만·트루먼 동상 설치 협조를 요청했다.

이에 이 도지사는 공감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졌다.

설치 장소로는 6·25 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다부동전투를 기리는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전적기념관이 물망에 올랐다.

다부동전적기념관은 월 5만 명, 연 60만여 명이 찾는 지역의 대표적인 호국기념시설이다.

이에 따라 경북도는 칠곡군과 협의 등을 통해 후속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이런 가운데 그동안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제막에 반대 입장을 보여온 4·19민주혁명회와 4·19혁명희생자유족회 등 4·19단체와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사회단체들의 움직임에 귀추가 주목된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독재자 이승만의 동상 건립은 헌법정신 뿐만 아니라 4.19 정신에 위배되는 것으로 절대 반대한다”면서 “공공부지에 독재자의 동상을 함부로 세워서는 안된다” 고 강조했다.

동추모는 그동안 서울 등 유명 거리 중 한 곳에 두 동상을 설치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이들 단체의 반대 여론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동추모는 2017년 이승만·트루먼 두 전직 대통령의 정신을 바르게 평가하고 후손에게 계승하기 위해 동상을 제작했다.

조갑제닷컴의 조갑제 대표가 동추모의 대표 직책을 맡고 있으며,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등이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위원으로 참여 중인 조각가 김영원(전 홍익대 교수)씨가 높이 4m 20㎝, 중량 약 3t인 청동 조형물 2개를 제작했다.

김 전 교수는 광화문 세종대왕상을 조각한 인물로 유명하다.

경북도 관계자는 “6·25전쟁 ‘낙동강·다부동 지구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대표적 호국의 고장인 칠곡에 두 전직 대통령의 동상이 건립되면 대한민국 건국과 호국, 애국정신을 되새기는 상징성이 배가될 것”이라며 “훌륭한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한편 트루먼 제33대 미국 대통령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고 참전을 결정한 인물이다.

안동 김상화 기자 [email protected]

<2021-06-17> 서울신문

☞기사원문: 이승만·트루먼 동상 설치 논란 다시 불붙을 듯

금, 2021/06/18-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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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임재성ㅣ변호사·사회학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조선일보>의 입장은 익히 잘 알고 있다.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다 끝난 일인데 피해자들이 왜 소송으로 뒷북을 치냐는 입장. 억지 소송을 대법원이 덜컥 받아주어 한-일 관계가 지금 이 모양으로 파탄 났다는 입장. 동의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하나의 의견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선을 넘었다. 지난 10일치 <조선일보>에 실린 주필 칼럼 얘기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인정한 2012년 대법원 “판결 때문에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현 정권은 여기에 ‘사법농단’이라는 모자를 씌웠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 진보든 보수든, 강제동원 문제에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든 범죄를 옹호할 수는 없다. 삼권분립과 재판의 공정성이라는 법치주의의 핵심 가치를 똥물에 빠뜨린 범죄를 찬양해서는 안 된다. <조선일보>는 그걸 했다.

먼저, 사법농단이라 명명되는 사건이 외교부와 대법원 간의 정상적이고 적법한 소통이었나? 박근혜 정부는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뒤집고 싶어 했다.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 등 당시 양승태 대법원의 숙원사업을 위해 청와대 비위를 맞추고자 했지만, 이미 존재하는 대법원 판결을 뒤집기란 쉽지 않았다. 범죄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법원행정처는 사인 간 분쟁을 해결하는 민사소송임에도 정부 부처가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제도를 신설하고, 그 제도를 이용해 외교부가 강제동원 사건에 의견서를 내면, 이를 계기로 판결을 뒤집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해당 재판부가 아닌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이런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직권남용죄이다. 그리고 해당 소송 일방 당사자인 일본 기업 대리인 김앤장 소속 변호사들에게 위 계획, 즉 재판 기밀사항을 누설한다. 명백한 공무상 비밀누설죄이다.

이제부터는 정말 가관이다.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 임종헌은 김앤장 변호사에게 ‘빨리 프로세스를 시작해야 하니 조속히 의견서를 제출해달라’며 외교부 의견서 제출을 촉구하는 취지의 서면을 제출하라 지시한다. 김앤장 변호사는 그 지시에 따라 서면을 작성했고, 임종헌에게 사전검사도 받았다. 임종헌은 제목과 내용을 친절히 수정해서 돌려보내고, 그 서면은 피고 대리인 김앤장 변호사 명의로 재판에 제출되었다. 이후 외교부에서 제출한 의견서 역시 판사들에 의해 사전에 검토·수정된 것이었다. 판사들이 소송의 일방 당사자와 노골적으로 결탁한 희대의 범죄다.

사법농단 관련 판결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에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할까? 위 사실은 대부분 검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객관적 증거로 확인된 내용이고 널리 보도되었다. 특히 공무상 비밀누설죄 부분이 그러하다. <조선일보> 칼럼이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주요 사실관계들을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생략, 즉 사실 왜곡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칼럼의 진짜 문제는 이 범죄를 찬양하는 것이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부디 부탁드린다. 세상 어느 나라에서 고위 법관들이 소송 일방 당사자를 비밀리에 만나 ‘이런 서면 내라’, ‘이렇게 써라’ 코치하는지 알려달라. “흔히 있다”고 하셨으니 다수의 사례를 꼭 알려주시라. 그래서 조선일보의 입장은 무엇인가? 국익을 위해서라면 청와대, 외교부, 법원이 결탁한 범죄라도 가능하다는 것인가?

강제동원과 관련된 사법농단 행위는 ‘한-일 간 외교갈등을 피해야 한다’는 명분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 행위 주체들의 셈법은 꽤 천박했다. 법원행정처는 외교부 입장 반영의 대가로 외교부에 ‘법관 재외공관 파견 확대’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법관쯤이나 되어서,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으려는 큰일을 꾸미면서도, 본인들 외국 나갈 자리를 만드는 것에 집착했다. 사법농단의 맨얼굴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는 부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공정하고 중립적이어야 할 절차를 사유화한 것에 대한 책임이 고초라면, 왜 이렇게 판결이 늦게 나오냐며 ‘공정한 재판’만을 기다리다가 돌아가신 강제동원 소송 원고들이 당한 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2021-06-16> 한겨레

☞기사원문: 범죄를 옹호하는 조선일보

금, 2021/06/18-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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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그램명 : 다큐인사이트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 방송일시 : 2021년 6월 17일 (목) 22:00~22:50 KBS 1TV
■ 연출 : 임청조
■ 글,구성 : 신지현

죽음을 죽음으로 덮은 골짜기 1km,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전쟁이 낳은 비극과 드러나지 않은 진실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

대전광역시 동구 산내에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집단학살지로 알려진 곳이 있다. 뼈와 영혼이 산처럼 쌓여 골령골이라 이름 붙은 곳.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끌어안고 있는 골령골에는 총 8개 학살지가 있다. 길이 30m에서 180m에 이르는 구덩이 여러 곳에서 최대 7천명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된다. 각각의 구덩이를 연결한 길이가 무려 1km에 달해, 골령골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 되었다.

1950년 대전 골령골에서 벌어진 역사적 비극을 실제 자료와 증언에 기반한 재연과 관련자 인터뷰 등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한다.

▶죽음의 블랙박스, 기밀 해제 문건과 18장의 사진

골령골 민간인 학살사건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은 1999년 미국의 기밀 문건이 해제되면서다. 1950년 9월, 미군 중령 에드워드는 ‘한국의 정치범 처형’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와 18장의 사진을 본국으로 전송했다. 미군이 촬영한 사진에는 골령골에서 사람들이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총살, 구덩이에 파묻힌 모습이 낱낱이 기록돼 있었다. 또한 에드워드 중령의 보고서는 이 처형이 한국 최상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기록해 충격을 던졌다.

▶그해 여름의 비밀,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가

7월 1일 새벽, 대전형무소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오늘 새벽 미명을 기해서 대규모 적의 공습이 예상…
좌익 극렬분자를 처단하라”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전국에서 모인 정치범들이 대거 수감돼 있었다.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관련자들이 대표적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은 아군의 위협이자 처단 대상으로 분류됐다. 좌익으로 분류된 재소자들은 대한민국 헌병에 의해 골령골 숲속으로 끌려갔다. 형기를 거의 마친 이들까지도 헌병의 총구에 희생, 구덩이에 묻히고 말았다.

골령골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대전형무소 재소자들만은 아니었다. 사전 구금된 국민보도연맹원들도 골령골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좌익 전향자들로 구성된 반공단체다. 하지만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군에 가세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내세우며 체포를 명령하고, 정당한 재판과정 없이 골령골에서 처형했다.

골령골에서의 죽음의 행렬은 그해 여름 약 한 달 동안 계속됐다.

▶남겨진 자들, 치유되지 못한 아픔

골령골 사건이 발생한 지 71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오랫동안 골령골 사건은 터부시됐고, 유가족들조차 숨죽이며 상처를 쉬이 드러내지 못했다. 좌익의 집안이라는 세상의 오해와 차별이 원인이었다.

골령골에서 큰 오빠를 잃은 열네 살 소녀 신순란은 어느덧 여든다섯 살의 노인이 되었다. 그녀는 수십 년 동안 오빠의 일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가슴 속에 응어리진 한을 품고 살아야 했다. 71년 전 골령골에서 상부 명령으로 방아쇠를 당겨야 했던 젊은 교도관은 평생을 죄책감과 트라우마 속에서 보내야 했다.

이 잔혹한 비극의 책임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푸른 눈의 안내자, 데이비드 밀러

대전광역시 동구청에서 국제특보로 일하고 있는 영국인 ‘데이비드 밀러’는 골령골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푸른 눈의 이방인이 머나먼 한국 땅에서 벌어진 비극을 주목하고 연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밀러의 눈에 비친 골령골 사건은 이념이 아닌 인권과 인간성의 문제다. 밀러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골령골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만나게 된다.

“저에게는 이곳이 거대한 모자이크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아직 조각의 일부만을 알 뿐이죠.
모자이크 전체가 드러나는 그 날을 저는 고대하고 있습니다”

KBS 다큐 인사이트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은
2021년 6월 17일 (목) 밤 10시 KBS 1TV에서 방송됩니다.

<2021-06-11> KBS 다큐인사이트

☞기사원문: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 2021년 6월 17일 22:00 방송

금, 2021/06/18- 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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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의 한 현충시설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알려진 모윤숙 시인의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새겨져 있는 모습. 이현동 기자

김해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
모윤숙 시인 시 새겨져 있어
활동 작품 중 12편이 친일작
과거 육군본부서 철거되기도
“관련 조례 통과 시 존폐 논의”

조국을 구한 영웅들의 희생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치된 김해의 한 현충시설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알려진 시인이 쓴 시가 적힌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돼 파장이 예상된다.

논란이 된 시비는 모윤숙(1910~1990)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시를 새긴 것으로 김해 삼계동 김해시민체육공원에 마련된 ‘김해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 뒤편에 세워져 있다. 김해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는 2003년 6월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김해시지회에서 건립했으며, 이 때 시비(詩碑)도 함께 세워졌다. 이런 내용은 시가 운영하는 문화관광사업소 블로그에도 김해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를 소개하는 코너에 모 시인의 시비가 사진과 함께 소개돼 있기도 하다.

모윤숙은 대표적 친일파 문학인으로 분류되는 인물로 2002년 8월 ‘친일문학인 42인’ 명단에 포함됐으며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 그를 ‘친일인명사전’에 공식 등재했다. 국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역시 모 시인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함경남도 원산 태생인 모 시인은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고 교사·기자·시인으로 활동하는 등 당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자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화여전 재학 당시만 해도 애국시를 발표했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는 등 민족의식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1940년을 기점으로 각종 친일단체에 가담해 활동했다.

태평양 전쟁(1941~1945) 중 여러 친일단체에 가입해 일본에 협력하고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친일 논설을 기고하거나 ‘호산나 소남도'(1942)라는 전쟁찬양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어린날개-히로오카(廣岡) 소년 학도병에게'(1943), ‘아가야 너는-해군 기념일을 맞아'(1943), ‘내 어머니 한 말씀에'(1943) 등의 친일시를 연달아 같은 해에 발표하는 등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 시인의 작품 중 총 12편이 친일 작품으로 밝혀졌다.

모 시인의 작품이 다른 곳도 아닌 애국심을 함양·고취해야 하는 장소에 버젓이 설치돼 논란이 된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5년 9월 말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이던 임종인 국회의원은 친일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며 육군본부 1층 명예의 전당에 모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새겨져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임 의원은 이 시가 친일 작품인 ‘어린날개-히로오카(廣岡) 소년 학도병에게’와 매우 흡사하다며 “군내 친일잔재 청산을 위해 이를 철거할 의사가 없느냐”고 육군에 따지기도 했다.

당시 김장수 육군참모총장은 “친일 행적보다는 업적 중심으로 기록했다. 이 시 역시 친일사상보다는 문학사상을 고려했다”고 답했으며 당시 한나라당 황진하 의원 역시 “모 시인이 친일행적을 했다고 하더라도 시의 내용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이듬해 7월 말 해당 시비는 결국 철거됐다. 당시 육군본부는 “명예의 전당에는 안중근 의사·김좌진 장군 등 의병활동을 했던 분들도 헌액돼 있어 친일행적을 가진 시인의 시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김해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 전경. 이현동 기자

16년 전 논란을 불렀던 친일파의 시(詩)가 2003년부터 김해 현충시설에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친일잔재 청산을 위해 철거 등의 조처가 이뤄져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년 전 본지 특별기고(2019년 5월 29일자 11면)를 통해 모윤숙 시인이 6·25전쟁 당시 세웠던 업적을 재조명한 바 있는 김해시의회 하성자 시의원은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모 시인의 친일행적은 변명의 여지없이 잘못된 행동이다. 당대 저항시인들이 겪었던 숱한 고충에 빗대어보면 더욱 그렇다. 현충시설에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작품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다”며 “오는 24일 ‘김해시 일제잔재청산 등에 관한 조례 제정 조례안’이 통과될 것으로 예상된다. 해당 시비(詩碑)의 존폐 여부도 함께 논의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해시 현충시설 담당과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본지 취재가 시작되면서 파악해보겠다고 했다.

보훈단체 관리를 담당하는 김해시 시민복지과 관계자는 “전공비가 설치됐던 2003년 당시에는 모 시인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기 이전이라 이 같은 지적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며 “현재로서는 충분한 협의나 검토가 이뤄지지 않아 철거하겠다거나 유지하겠다는 등 특정 입장을 표명하기 곤란하다. 무공수훈자회 김해시지회와의 협의를 통해 결정할 사안”이라고 했다.

김해뉴스 이현동 기자 [email protected]

<2021-06-22> 김해뉴스

☞기사원문: [단독] 김해 현충시설에 친일행적 시인의 시비(詩碑) 버젓이

수, 2021/06/2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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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비밀문서로 본 65년 한일협정 체결비사④
뉴욕 이길주 교수 “日은 美에게 만병통치약”
中 핵실험 성공하자, 日을 통해 中 팽창 저지
한일협정, 日 정치적·경제적 욕구 충족시켜

65년 5월 17일 정상회담 이후 린든 존슨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과 사교춤을 추고 있다. 존슨 대통령은 박 대통령으로부터 한일협정 조기 체결을 강하게 요구하며 당근과 채찍 전략을 구사했다. 출처:LBJ도서관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체결될 때 까지 미국은 노심초사했다.

미국이 국민여론 등 때문에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를 피하려했던 박정희 정권을 때로는 겁박하고 때로는 회유하며 협상을 부추겼던 사실이 백악관과 국무부 비밀문서들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미국 기밀문서 다운로드]

‘美비밀문서로 본 65년 한일협정 체결비사’ 글 싣는 순서
한일협정은 美작품…미군감축카드로 朴압박
美 한일협정 회유…韓여론용 차관 미끼 고안
한일협정은 2:1싸움…日총리 “생큐 미국”
美 뒷탈많은 한일협정 밀어붙인 이유

해당 비밀문서들은 미국 뉴욕의 이길주 교수(뉴저지 베르겐 커뮤니티 칼리지 역사학과)가 텍사스 오스틴의 린든 B 존슨 라이브러리(LBJ 도서관)에서 발굴한 것들이다. 이 교수는 존슨 대통령 시기 한미일 관계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는 존슨 대통령 시기 일본은 미국에게 ‘만병통치약’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만큼 일본은 미국에게 쓰임새가 많은 나라였다는 뜻이다. 이 교수는 뉴욕에서 진행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일본이 미국의 ‘만병통치약’이었던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당시 존슨 대통령은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를 표방하며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배가하는데 경주했다고 한다. 특히 핵실험에 성공한 중국의 아시아 팽창을 막는데 주력했다고 한다. 중국발 공산화의 도미노를 막기 위해 베트남전쟁에 화력을 본격적으로 투입한 것도 존슨 대통령이었다.

미국으로선 중국의 팽창을 막기 위해서는 아시아에서 ‘대리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일본이었다.

이 교수는 “일본은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깝기 때문에 여차하면 중국과 이해를 공유할 수 있는 나라였다.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일본은 미국보다는 중국에 경도될 수 있는 나라였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일본을 흔들림 없는 반공산주의 국가로 다져 중국 공산주의의 남하를 막을 보루로 삼기위한 의도였다”고 설명했다.

이길주 교수(뉴저지 베르겐 커뮤니티 칼리지). 권민철 특파원

일본이 아시아에서 중국을 방어하는 첨병 역할을 떠맡기 위해서는 먼저 아시아에서 존경받는 나라로 입지를 다녀야했다. 그러나 일본의 과거사가 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이 과거사를 청산하고 일본제국주의 피해 국가들과 관계도 정상화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바로 그 상징적인 대상 국가가 한국이었다. 한일간 국교 정상화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정치적 위상을 세우는 목표를 위해 반드시 탈환해야할 고지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 교수는 당시 일본이 “울타리 위에 앉아있는(sitting on the fence) 형국”이었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1965년 1월 7일 NSC의 내부 기밀보고서를 보면, 일본 사토 총리는 13일 예정된 존슨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자신의 의중을 미국측에 전달한 것으로 돼 있다.

‘일본은 미국에 영국과 같은 동맹국이 될 수 있다. 미국이 중국에 대한 생각과 계획을 허심탄회하게 공유하지 않으면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에서 발을 뺄 수 도 있다.'(체스터 쿠퍼, 제임스 토마스가 맥조지 번디 NSC특보에게 올린 보고서)

일본이 경제적으로 중국과 가까워지는 것도 미국은 경계했다.

이 교수는 “일본의 경제가 팽창함에 따라 더 큰 시장이 필요했다. 중공은 일본에 매력적인 시장이 될 수 있었다. 경제적인 목적에 따라 일본이 중국과 가까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은 어떻게 해서든 일본을 중국에서 떼어내야 할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은 따라서 일본이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도 경제적인 번영을 누릴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했다. 특히 경제력이 커진 일본이 미국시장까지도 침공해올 수 있는 불안감도 해소해야 했다.

1964년 6월 미국 국무부가 마련한 ‘일본의 미래에 대한 국무부의 정책 보고서’는 이 같은 일본의 경제적 갈증을 풀어주기 위한 방안을 담고 있다.

이길주 교수(뉴저지 베르겐 커뮤니티 칼리지). 권민철 특파원

그 방안의 핵심 논리는 원기왕성해지고 있는 일본의 공급력을 받아 줄 시장은 동아시아이며, 그 같은 시장을 마련하기위해서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발전이 필요하고, 다시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일본의 대외 원조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으로서 일본의 이 같은 경제적, 정치적 욕구를 동시에 해결해 줄 수 있는 첫 단추가 바로 한일간의 관계정상화였다.

이 교수는 “미국으로서는 일본을 확실히 자유진영 속에 머물게 하려면, 일본에게 역할 줘야했다. 남한과 일본이 손을 잡으면 일본이 한국의 경제 발전에 도움 주면서 동아시아 자유진영의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지역에서 한미일 삼각편대가 확실해지는 것이었다”며 “중국과 일본 사이에 확실한 선을 그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한일협정이었다”고 말했다.

※취재지원: 한국언론진흥재단

<2021-06-22> 노컷뉴스

☞기사원문: [인터뷰]美 뒷탈많은 한일협정 밀어붙인 이유

※관련기사

☞노컷뉴스: 美비밀문서로 본 65년 한일협정 체결비사

수, 2021/06/23-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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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과 미군이 격전을 벌인 오키나와(沖繩)현 본섬 남부 지역에서 새 미군 기지 매립지에 쓸 토사를 채취하는 것에 반대하는 현지 시민단체가 22일 이 운동에 한국이 연대해 줄 것을 호소했다.

오키나와 전투 희생자 유골 수습 활동을 하는 시민단체 ‘가마후야’의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 대표는 이날 온라인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 정부가 헤노코(邊野古) 연안 매립 공사에 쓸 토사를 희생자 유해가 묻힌 곳에서 채취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들 희생자의 피가 스며든 토사를 미군 기지를 만드는 매립에 사용하는 것은 전몰자에 대한 모독이라며 이를 멈추게 하는 일에 한국과 미국, 대만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 달라고 말했다.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전쟁 막바지이던 1945년 일본군이 본토를 지키기 위해 오키나와 본섬 남부 등에서 미군을 상대로 벌인 싸움이다.

당시 일본군이 방패막이로 내세운 오키나와 주민과 미군 병사 등을 포함해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쿄=연합뉴스) 오키나와전(戰) 희생자 유골 수습 활동을 하는 시민단체 ‘가마후야’의 구시켄 다카마쓰 대표가 22일 온라인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 정부가 새 미군 기지 부지인 헤노코(邊野古) 연안 매립 공사에 쓸 토사를 희생자 유해가 묻힌 지역에서 채취하려 한다며 이를 막는 운동에 한국이 동참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오키나와대 지역연구소 특별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에는 조선인도 3천461명이 군인이나 군속으로 동원돼 701명이 사망했다.

기록으로 파악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실제 동원되거나 사망한 조선인은 더 많을 수 있고, 이들 대부분은 희생된 주변 지역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본섬 남부의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을 이전할 곳인 중부 헤노코 연안의 매립에 쓸 토사 일부를 당시 격전지였던 이토만(絲滿) 등에서 채취하려 한다는 것이다.

구시켄 대표는 “지금 오키나와에서는 전몰자 유골을 유족에게 돌려주는 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이를 중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오키나와 미군 후텐마 비행장이 이전될 예정인 헤노코 연안 매립지 전경.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 3월부터 오키나와 현청 앞에서 오키나와 전투 지역에서의 토사 채취에 반대하는 단식 투쟁 등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 구시켄 대표는 그간 수습된 희생자 700여 명의 유골을 가족에게 돌려주기 위한 후생노동성 주도의 DNA 감정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며 한국의 유족들도 DNA 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달라고 말했다.

가마후야는 한국 단체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02-2139-0462)와 민족문제연구소(☎ 02-969-0226)를 통해 오키나와 유골 발굴 및 DNA 감정에 참여할 한국인 유족의 신청을 받고 있다.

2019년 2월 15일 일본 오키나와 기노자손(宜野座村)의 미군 옛 민간인 포로수용소 주변에서 구시켄 다카마쓰 ‘가마후야’ 대표가 유골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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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2> 연합뉴스

☞기사원문: “피가 스며든 흙으로 軍기지 만드는 건 인도적으로 용납 불가”

※관련기사

☞한겨레: “희생자 유골 섞인 흙으로 오키나와 미군기지 건설, 반인도적 행위”

☞연합뉴스: “피가 스며든 흙으로 軍기지 만드는 건 인도적으로 용납 불가”

☞연합뉴스: 조선인 유골 공사장에 묻히나…日NGO “한미 유족과 반대운동”

수, 2021/06/23-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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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선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회장은 “올해는 대한광복단 초대 단장 소몽 채기중 선생의 순국 100주년이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대한광복단의 역사성을 재조명하겠다”고 말했다.

“국내 최초 무장 투쟁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광복단의 10년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나라를 위해 장렬히 산화하신 고귀한 대한광복단 단원 한 분 한 분을 재조명하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제66회 현충일인 지난 6일 오후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 있는 대한광복단기념공원 내의 사무실에서 만난 정윤선(여·68) <사>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회장은 이같이 말했다. 충북 영동에 거주하는 그녀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이학박사를 수료했다. 또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한국건설기술연구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해 왔다. 오랜 독일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당시 큰오빠를 통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존재를 알게 된 정 회장은 이 연구소의 제천단양 지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던 중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측으로 사업회의 요청으로 이사직을 맡았다. 그녀는 사업회가 후손이 없는 독립운동가의 묘소를 관리하며 제(祭)를 지내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10년 가까이 이사직을 맡았던 그녀는 2019년 6월10일에 회장에 취임했다.

광복단, 채기중 선생 중심 10년간 활동
일본군과 전투·광복군 창설 등 큰 영향
기념사업회, 독립운동가 묘소 관리 맡아

올해 초대 지도부 처형 당한 지 100년
광복절 300여 순국선열 추모제 계획
역사 반추 ‘약사비’ 제막식도 열 예정

▶올해 8월은 대한광복단 초대 단장 소몽(素夢) 채기중(蔡基中) 선생의 순국 100주년이다.

“취임 후 처음으로 한 일은 ‘대한광복단 약사비’를 새로 세운 일이다. 지난 3월 영주시의 지원을 받아 약사비 설치를 완료했고, 오는 광복절에 제막식을 열 예정이다. 약사비 제작이 대한광복단의 역사에 대해 반추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대한광복단의 역사가 어떻게 발굴됐던 가를 알게 된 것이다. 1910년대 국내 무장독립운동에 대한 연구 초기 대한광복단은 풍기광복단으로 불리며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된 광복회의 지역적 전신 정도로만 간주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하면서 자료발굴과 연구를 통해 대한광복단이 1913년 창립 당시부터 전국적이었고 국제적인 조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대한광복단의 역사성을 재조명하겠다. 초대 단장이신 채기중 선생 등 지도부가 서대문감옥·대구형무소 등에서 처형당한 지 100년이 되는 올해 광복절에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대한광복단 소속 300여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시고 추모제를 계획하고 있다.”

▶대한광복단이 광복회·의열단·한인애국단·광복군 등의 수많은 무장 항일 투쟁 단체 중 최초라고 하는데.

“대한광복단은 1913년 정월, 경북 풍기에서 결성된 자칭 ‘비밀결사 혁명기관’이다. 초대 단장인 소몽 채기중 선생을 중심으로 구한말 의병 장군들을 포함해서 8도의 동지들이 모여 만든 국내 최초의 무장 독립운동단체다. 대한광복단은 투쟁상황에 따라 1915년 광복회, 1916년 다시 대한광복단, 1918년 지도부가 체포된 뒤에는 남은 단원들에 의해 광복단결사대·암살단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약 10년간 국내에 존재했다. 이후 남은 단원들은 만주나 상하이 등지로 옮겨갔다. 이들은 의열단, 만주에서의 일본군과의 전투, 광복군 창설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한광복단의 창설과 역사적 의미는.

“1913년 대한광복단의 창설은 초대 단장인 채기중과 동지들의 1년여 집중적인 조직사업의 결과였다. 이로써 민국을 지향하며 무장투쟁을 통한 항일과 독립전쟁을 준비·이행하는 혁명기관이 처음으로 광복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국내에 탄생한 것이다. 대한광복단은 처음부터 전국적이고 국제적인 조직이었으며, 독립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국내의 강점세력에 대해 정면투쟁을 선포하며, 거의 10년간 그 세력을 유지했다는 의미에서도 대한광복단은 독립전쟁사에서 뚜렷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대한광복단 초기 결성 과정은.

“채기중은 수년간 치밀하게 준비해 갔다. 만주를 여러 번 드나들던 그가 1912년 봄에 서간도에서 조성호에게 거액 500원을 건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 이전부터 동지규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적극적인 조직사업은 1912년 봄 이후다. 의병장 출신 지사들, 젊은 용사들, 풍기 주변의 지인들이 참여했다. 채기중은 모험용사대의 양성에 특히 큰 노력을 기울여 80여 명의 인원이 확보됐다. 이는 양한위 선생의 ‘양벽도공제안실기’라는 책에 기록돼 있다.”

▶당시 재정기반과 동지규합은 어떻게.

“채기중·김원식·정성산 세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내놓았고, 팔도에서 모인 유창순·장두환·유장렬·김병렬·한훈·정운기·정진화·강순필·김상옥·정만교 등이 창립 단원으로 참여했다. 양제안·양한기·양한위 삼부자와 예산의 김한종 등은 이름을 알리지 않은 채로 협조했고, 충청·전라·평안도의 지사들이 지속해서 영입됐다. 1914년에는 밀양의 황상규·김대지 등이 합류했고 단원 수가 2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풍기학교훈도인 박제선, 춘양교원 류명식·박계양·정의극·이교덕·권영목 등을 통해 재산이 있는 이들을 망라해 영주 읍내에 ‘대동상점’을 차렸고 이를 통해 모은 자금 수만원으로 만주를 통해 무기를 사들였다.”

▶대한광복단이 1915년 광복회로, 1916년 다시 대한광복단으로 개칭됐다는데.

“대한광복단 단장이던 채기중과 박상진의 1915년 만남은 조직의 새로운 전기를 이뤘다. 양제안의 조언으로 박상진은 이복우와 함께 풍기의 채기중을 방문했고, 이들의 의기투합으로 대한광복단은 군대식으로 재편성되며 1915년 음력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로 거듭난다. 박상진을 총사령, 이석대를 부사령으로 하고 각 지역의 지부가 결성됐다. 지부장은 경기 김선호·황해 이관구·강원 김동호·평안 조현균·함경 최봉주·경상 채기중·충청 김한종·전라 이병찬 등이 맡았다. 12월에는 만주 본부 성격을 갖는 ‘길림광복회’가 설립됐다. 이석대가 전사한 뒤에는 김좌진이 부사령을 맡았다. 채기중과 박상진은 수시로 연락하며 모험용사대와 연결했다. 하지만 박상진 등 대구 조직원들이 6개월의 옥고를 치르며 조직의 정체기가 오자 채기중·한훈·노백린·김좌진 등이 조직을 재정비해 다시 대한광복단으로 개칭하게 된 것이다. 이는 해방 후 몇 안 되는 생존 창립단원 중 한 분인 한훈 선생이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 단원들에 의해서도, 일본 경찰의 기록에도 광복단과 광복회라는 명칭이 혼용돼 쓰였다.”

▶대표적 무장 항일 투쟁 활동은.

“이들의 목표는 무기 구입과 훈련으로 독립전사를 양성하여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섬멸전을 단행하는 것이었다. 자금 확보를 위해서는 주로 일본인이 불법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거나, 부호에게 의연금을 요청하고 거절 시 탈취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들의 활동을 보면 △제천 근북면사무소 습격(강순필) △충남 직산 금광잠입, 군자금모집 시도(김대지) △영주 대동상회 개설(박제선·권영목) △경주 광명리 세금마차 습격(우재룡·권영만) △보성과 벌교의 양재학, 서도현 처단 및 보성 헌병대 습격(한훈·김상옥·유장렬) △조선총독 데라우치 암살 시도(이관구·성낙규·조선환) △평북 영변에서 동양금광회사 수송마차 습격 (이석대·조맹선) △칠곡 친일부호 장승원 처단(채기중·유창순·강순필·임세규) △아산 도고 친일 면장 박용하 처단(김한종·김경태) △암살단 조직, 조선총독 사이토마코토 암살 등 시도(한훈·김상옥)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김상옥) 등 1913년에서 1923년까지 약 10년간 활발한 무장 투쟁활동을 진행했다.”

▶올해가 대한광복단 초대 단장인 채기중 선생의 순국 100주년이라는데.

“채기중 선생은 1873년 경북도 함창 소암1리에서 태어났다. 1906년 그가 34세가 되든 해, 봄에 그는 가족을 데리고 풍기면 서부리 한림동으로 이사를 했다. 선생은 1907년 8월의 풍기·순흥전투를 경험했고, 또 11월에는 민긍호 부대의 치열한 죽령전투도 경험했다.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의 선생이 1913년에 비밀결사 혁명기관인 대한광복단을 조직해 단장을 맡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양한위의 기록을 보면 ‘풍기에 혁명기관을 설치하고 의병잔당과 모험용사를 불러 대사를 도모하는 의기충천한 문사’라고 했다. 선생은 1918년 7월14일에 전라도 목포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 체포됐다. 이후 1919년 2월28일에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고, 1920년 3월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며 사형이 확정됐다. 1921년 음력 7월8일에 선생은 동지 강순필·임세규 등과 함께 서대문감옥에서 형장의 이슬이 됐다. 올해가 선생의 순국 100주년으로 특히 선생이 숨을 거둔 음력 7월8일이 오는 8월15일 광복절이다.”

▶대한광복단 10년사와 대한광복단 소속 단원들의 업적 기록 계획은.

“당시 비밀결사 조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단원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1917~1918년 많은 단원이 투옥되면서 일본 경찰과 검찰에 의해 남겨진 자료가 거의 유일할 정도다. 경찰에 쫓기던 단원들과 가족들은 보유하고 있던 자료를 아궁이에 넣고 태우기에 급급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자료는 지금도 꾸준히 조금씩 발견되고 있다. 발굴된 자료를 해석하는 것도 큰일이다.

현재까지 기념사업회는 세 차례의 학술회의를 통해 대한광복단의 역사에 대한 가치 진작에 힘써 왔다. 그러나 대한광복단 활동의 전모를 알 수 있는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올 하반기부터는 ‘대한광복단-광복회-광복단결사대-암살단-의열단’에 이르기까지 대일독립전쟁의 서막인 ‘대한광복단 10년사’를 찾아내고 정리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계획이다.”

글·시진=손병현기자 [email protected]

<2021-06-23> 영남일보

☞기사원문: [토크 人사이드]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정윤선 회장 “국내 첫 무장항일 단체 대한광복단 역사 재조명 목표”

목, 2021/06/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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