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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디뉴스]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⓶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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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디뉴스]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⓶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사건’

admin | 목, 2021/07/29- 11:18

진주 민간인 학살 유족 증언록

사진 진주시 명석면 명석고개 진주지역 유해 임시 안치소.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1주년이다. 전쟁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학살과 함께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자행되었다. 진주에서는 명석면과 용산면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중심으로 많은 민간인학살이 있었다.

단디뉴스는 민간인학살 유해 공동발굴단에서 제1차~11차까지 자원봉사자로 활동한 김영희님의 글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15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연재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연재 계획.

▲ 진주국민보도연맹 사건 배경

한국전쟁 기간 동안 진주지역은 왜 다른 지역보다 유달리 ‘보도연맹(保導聯盟)’ 가입자와 민간인 희생자가 많았을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진주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사회-문화사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진주는 물산이 풍부한 지역으로 고려시대부터 중요한 거점 행정단위인 ‘목(牧)’이 설치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 3품에 해당하는 목사(牧使)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00년 이후부터 세도정치의 발호로 인해 국가 기강이 무너지면서 각종 수탈과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진주는 이 지역만의 사회-문화사적인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진주지역이 갖는 독특한 특징을 규정 지울 수 있는 역사적 사건 세 가지가 최초로 발발하였다.

이러한 세 가지 큰 사건들은 진주지역을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을 나타내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결국 한국전쟁 기간에 민간이 대학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후기 임술년(1862년)에 진주민 유계춘의 주동으로 수만 명이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세금 착취에 저항한 임술농민항쟁(壬戌農民抗爭)이 최초로 진주에서 발발한다. 이 저항은 진주민의 사회의식의 성장에 기폭제가 되었다.

둘째,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운동(衡平運動)이다. 진주에서 이학찬, 장지필 등 백정 출신과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양반 출신이 합심하여 조직을 결성한다. 당시 백정이라는 신분은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차별이 지속되어 결국 차별 해소를 요구했는데, 이에 개화 양반들도 참여하는 등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 사건은 진주라는 지역이 상당한 진보적인 성향을 갖게 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셋째, 조선에서 맨 처음으로 소년운동의 깃을 든 곳이 바로 진주이다. 강영호(姜英鎬,1896~1950) 선생은 진주 출신 소년 운동가로 동경대학에서 문학 공부를 하였다. 당시 일본 유학 시절에 한국 학생들과 함께 처음으로 어린이 운동단체를 만들고자 했다. 1923년 방정환 선생을 비롯해 강영호, 고경인, 박춘성 등 뜻이 맞는 사람들과 어린이 문화 운동단체 ‘색동회’를 조직한다. 당시 일제강점기 시대 속 민족계몽 정신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고자 하였고, 처음으로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1920년 진주소년운동으로 시작되는 아동문학운동이 진주 문학의 싹이 되기도 했다. (주1)

사진 2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풀만 무성한 강상호 선생 묘지

또한 진주사범학교 등 중등학교가 4개나 있어 교육받은 인력이 많이 배출되어 진보적인 환경이 조성되었고, 이러한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사회운동의 기반이 되어 진주지역 보도연맹은 가입자도 많았고 희생자도 많았다. 진주지역에서 해방 후 정치적 갈등은 1946년 ‘대구10월사건’이(주2) 발생하면서 본격화되었다. 10월 7일에 경남으로 파급되면서, 진주와 마산에서 가장 격렬했다. 진주지역에서는 봉기가 일어나 진양군 정촌지서, 대평지서, 명석지서 등이 시위자들에게 점거되었다.

이후 시위자들이 경찰이 발포하여 16명이 사살되었고, 시위자 100여 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주모자로 체포된 인민위원장 강대창 등 6명이 미군정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때부터 진주형무소에는 좌익사범들이 넘쳐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진주는 빨치산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인근에 위치하여 지리산에 은거하던 빨치산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진주형무소를 자주 습격하였다. 1949년 10월 말경에 빨치산이 진주형무소, 진주시청, 진양군청을 습격하기도 한다.

이후 진주보도연맹은 1949년 12월 8일 진주극장에서 자수자와 전향자 등 천여명이 참여하고 진주경찰서장(이정용)이 이사장을 맡고 진주인민당 위원장(박진환)이 간사장을 맡아 결성된다.(주3)

좌(사진 3 형평운동 기념탑 칠암동 경남문화예술회관 건너편), 우(사진 4 신현수 선생 頌公碑(송공비) 망진산 봉수대 아래).

▲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희생 경위

1945년 9월 초순 남한의 형무소 재소자는 모두 2,600명이었다.(주4) 그러나 1926년 7월에는 17,000여 명으로, 1948년 봄에는 22,000여 명으로 늘었다.(주5) 그 후에도 전국 19개 형무소 재소자 수는 계속 늘어나 1950년 1월에는 48,000여 명에 이르렀다. 진주형무소는 한국전쟁 당시 직원이 120명이며 재소자는 1,0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주6) 재소자 중 가장 많이 수감되어 있었던 재소자들은 정치범들이었다. 진주 형무소에는 진주지청 산하 진주, 사천, 하동, 의령, 합천, 산청 등지에서 온 좌익사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그 후 정부는 1950년 2월 11일 국회본회의에서 좌익인사들의 보도연맹 강제 가입을 종용하여 협박하면서 한 개 군에 일만 명 가입시킬 것을 지시한다. 1950년 6월 25일 내무부 치안국은 「전국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城署査 제 1799호) 제목의 비상 통첩으로 전달하고 1950년 6월 29일 ‘불순분자 구속의 건’, 6월 30일 ‘불순분자 구속처리건’과 석방금지령을 지시한다. 7월 11일 ‘불순분자 검거의 건’을 하달하고 전국 보도연맹원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 가두어 놓는 일)을 단행하라 지시한다.

당시 진주경찰서는 1950년 7월 15일 진주시와 진양군 관내 지서 별로 보도연맹원을 예비검속하여 지서에 소집하고 진주경찰서로 구금한다. 구금 기간이 7일~10일 정도인데 그 기간 중 심사를 거쳐 갑, 을, 병으로 분류되었다. 일부는 진주형무소로 이송되었고, 진주형무소에는 산청, 진주, 삼천포, 하동, 의령, 진양군, 사천 등지에서 끌려온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1950년 7월 하순부터 진주는 하동에서 진격해오는 인민군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과 함양으로 진격해오는 인민군 제4사단(사단장 이권무)에 의해 점령 위기에 처하면서(주7) CIC(특무부대), 헌병, 경찰이 7월27일부터 후퇴하기 시작했다.(주8)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진주지역 보도연맹원들은 그 직전에 집중적으로 학살되었다. 진주경찰서 구금자 중 ‘갑’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7월 21일경 학살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7월 26일까지 몇 차례에 걸쳐 학살되었다. 그리고 진주형무소에 구금된 보도연맹원과 재소자들도 7월 22일부터 7월 26일 사이에 명석면 관지리, 우수리, 용산리, 문산 상문리, 마산 여양리 등에서 모두 학살되었다.

사진 5 진주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과 진주국민보도연맹 사건 발생장소

▲ 제노사이드(집단학살범죄)는 무엇일까?

세계적으로 제노사이드는 고의로 혹은 제도적으로 어떤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이념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파괴하는 집단학살을 말한다. 권력을 가진 지배자 혹은 특정 집단이 어느 한 집단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소위 씨를 말리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주9) 이와 유사한 용어가 ‘홀로코스트’가 있다. 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한다. 전쟁에서 군인은 적국의 군대와 싸운다.

그러나 제노사이드는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지배자 혹은 특정 집단이 어느 한 집단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소위 씨를 말리는 전쟁을 벌인다. 가해자들은 희생자들의 문화와 역사를 포함한 모든 흔적을 지우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집단학살범죄가 자행되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국민보도연맹원들의 학살은 대다수가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넘긴 1950년 7월 14일 이후부터 9월 하순 집단학살 금지령이 내려질 때까지 계속됐다. 당시 국민보도연맹원이 몇 명 학살당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보도연맹원 가입자 수가 30만 명 내지 35만 명이었다는 통계가 있고, 서울의 보도연맹원 수가 1만 9,800여 명이었다는 기록(동아일보 50년 5월 5일 자)이 있고 학살된 보도연맹원들이 최소한 15만 내지 20만 여명으로 추산된다.(주10) 세계적으로 자행되었던 제노사이드의 대표적 사례(민족, 종족, 인종, 종교, 이념)는 다음과 같다.

민족 청소’의 사례로 ‘옛 유고슬라비아의 민족 청소’가 있다. 1991년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를 침공함으로써 4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은 피란민 주거지인 스레브레니차에서 일주일 만에 8,000여 명의 보스니아 성인 남자와 소년의 목숨을 빼앗았다.

종족 청소’의 사례로는 아프리카 르완다의 제노사이드를 들 수 있다. 르완드를 식민지 지배한 벨기에는 소수 투치족을 활용하여 다수의 후투족을 지배했다. 종족간의 갈등이 누적된 결과 독립 후 후투족은 투치족을 100일 만에 대략 80만 명을 학살했다.

홀로코스트’, 악명높은 유대인 대학살은 ‘인종 청소’다. 1933년에 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독일을 단일 인종인 ‘아리안’의 땅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반유대인법을 만들고 유럽 전역에 강제 수용소를 15,000여 개나 설치했다. 2차 대전 중 유럽의 950만 유대인 중 600만여 명이 나치의 손에 살해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이교도(異敎徒) 청소’의 경우다. 이슬람교를 믿는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를 믿는 아르메니아인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대량 학살했다. 1894년부터 1896년까지 10~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제1차세계대전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100만 명이 살해당했고, 최소 50만 명이 추방되거나 탈출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이념 갈등에 따른 집단학살’ 사례다. 냉전 체제하에서 1975년에 집권한 크메르루주는 도시민, 지식인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반대 세력에 대해 숙청, 고문, 학살을 자행했다. 크메르루주 정권 아래 기아, 고문, 처형, 강제노동 등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당시 인구의 4명 가운데 한 명 꼴인 170만∼2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세계적으로 발생한 제노사이드의 다섯 가지 사례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우리나라는 이념적 갈등 속에서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집단학살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적 근거도 없는 국민보도연맹이란 기구를 결성한 것이다. 국민보도연명이란 도대체 어떤 기구인지 살펴보자.

▲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란 무엇인가?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국민의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조직한 반공단체다.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른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한다는 취지로 1949년 4월 20일 관변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된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9월20일부터 지방지부 조직에 착수하는데,(주12) 도내 각 경찰서 단위로 하부조직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주11) 한국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국민보도연맹 경상남도연맹(약칭 경남도연맹)은 1949년 11월 11일 경남 경찰국 무도회관에서 ‘임시발기인대회’를, 13일에는 부산지법 회의실에서 ‘정식발기인대회’를, 15일에는 ‘결성대회 정식 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고, 20일 ‘결성선포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출범하였다. 이후 경상도 산하 각 시•군 연맹과 읍•면 지부가 결성된다. 검•경 당국은 1949년 10월25일부터 1949년 11월30일까지 남로당원 자수 주간을 설정하고 대대적인 자수•전향 작업을 진행한다. 경남도연맹에서 발표한 경남의 자수전향자는 5,548명이었다. (주13)

조직결성 명분은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 기회를 준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재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가족의 생명•재산 등을 보호하여 준다’며 남로당원 자수 주간을 선포하였다. (주14) 그러나 1950년 2월 11일 제11차 국회 본회의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신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협박까지 하면서 1개 군에서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입을 종용하였다. 이로 인해 좌•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가입되어 좌익이라는 낙인이 찍혔다’(주15)

1949년 12월 2일 경상남도 경찰국 발표에 의하면, 집단학살사건은 경남도 내 어느 한 곳도 빼놓지 않고 자행되었는데, 시•군마다 200여 명에 달하는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 진주, 마산, 부산 형무소 수감재소자 및 예비검속자 3,300여 명을 비롯 약 7,000여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주16)


진주지역의 자수전향자는 259명이었다. (주17) 진주경찰서는 좌익활동 전력자뿐만 아니라, 농민조합 등에 가입했던 사람, 각종 시위나 행사의 단순 가담자, 그들의 친인척, 빨치산에게 식량 등을 제공했던 사람, 또는 국민보도연맹이 어떠한 단체인지도 모르던 농민들까지 여기에 가입하게 했다. 가입한 보도연맹원에게는 통제 목적으로 보도연맹원증을 발급했으며 지서 별로 이들을 훈련, 교육하는 등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국민보도연맹원 가입 당시에는 사상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일반 국민들이 다수 가입되었으며, 배급을 준다거나, 비료를 준다, 아니면 글을 가르쳐 준다는 등으로 회유하였으며, 협박과 강압에 의한 강제 가입까지도 불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이를 입증하는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 권유를 받은 사람의 증언이다.

“나는 보도연맹에는 가입하지 못했제. 순사가 몇 번 찾아와서능 가입하면 글을 배와준다카데, 배급도 주고 가입 하고자프믄 지서로 오먼 된다카더마. 그래 지서에 갈라꼬 뱃가(나루터)에까징 갔제. 그란데 배가 없능기라 그래서 도라왔제.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히는구마. 만일에 내가 그때 배를 타고 갔시모 내도 그때 죽었을기구마”

사진6 국민보도연맹원증

▲ 증언록의 증언자(유족분) 정○○(희생자의 아들) 인터뷰 내용

질문 : ‘아버지가 희생될 당시 살던 곳 주소를 아시나요?’

대답 : 진양군 대평면 대평리 000번지. 그 주소를 계속 가지고 있다가 1997년 남강댐 공사 중에 이주단지로 오면서 바뀌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할머니가 너희 아버지 살아올 수 있으니까 절대 이사 가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내가 세 살때 어머니는 할머니가 저년이 들어서 망했다고 나쁜년이라고 그러고 그러면서 꼭 매일 아침 강에 가서 정화수 떠다놓고(빌었어요). 그 당시에는 강물을 먹었거든요. 할머니가 매일 부엌에다가 싸 한 줌 놓고 기도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할머니 뭐하는 건데?’하니까 ‘혹시 너거 아버지 살아 돌아올지 모르니까 이사 가지마라’하셨어요. 초가집에 물이 들어왔어 지붕개량을 하고 그대로 이사는 끝까지 안가고 거기 살았어요.(본문245쪽)

사진 7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 발굴장 입구

질문: ‘혹시 아버지가 학살당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이 시신을 찾으러 가셨나요?’

대답: “삼촌이랑 어머니가 용산리 고개를 갔었대요. 6월 초열흘쯤 됐을 거랍니다. 시신을 찾아가도 된다는 소문을 듣고 가니까, 조그만 둔덕에 시체가 쫙 드러누웠는데 못 찾겠더라 하대요. 총을 맞아가지고 6월이다 보니까 부패가 돼가지고 얼굴 형태도 모르겠고, 그냥 뭐 허리끈이나 옷이나 보고 아는 거지 모르겠더랍니다. 우리 형은 할머니한테 나는 엄마 뱃속에 있었고, 그래 냄새가 나니까 쑥을 뜯어가지고 코를 막고 찾았대요. 그렇게 찾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찾겠어서 이래 가지고 안 되는 거다. 삼촌이 ‘형수님 갑시다. 이래 안 되는 기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갑시다.’했대요. 딱 한번 찾으로 갔대요”(본문 251쪽)

본인이 죽어 묻힐 구덩이를 손수 파게 한 후 학살을 하고 밀어 넣어버렸다고 한다. 고인 핏물이 구덩이를 넘쳐 계곡에 피가 흘러내렸다고 한다. 제가 발굴차 용산고개 현장에 몇 차례 가봤지만 깊은 계곡은 풀로 뒤덮여 아무 말이 없다.

질문: ‘세 살 때 집을 나간 어머니는 다시 만났을 때 아버지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해주셨나요?’

대답: “그래 인자 늦게나마 어머니를 만나니까 어머니가 여기(팔뚝)에 문신을 두 개 탁탁 새겼더라고, 팔에 문신을 새겼어, 어머니가 ‘나는 너거 아버지 찾을 수 있다. 살아오면 찾는다’ 하더라고, 아버지와 문신을 같이 했대요. ‘너거 아버지도 여기 하고 나도 여기 하고 문신이 똑같다. 혹시 내가 죽고 없더라도 너거 아버지 살아오거든 이놈(문신)보고 찾아라’ 하셨어요.(눈물)(본문260쪽)

두 분은 저승에서 만나시어 문신으로 확인하시고 해원(解冤)하시기 바란다.

질문: ‘구수회라는 분은 용산리 학살 장소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었던 건가요?’

대답: “그 매장지에서 500미터도 안 되는 동네에 살았으니까, 나무하고 소 먹이러 가면서 맨날 ‘요는 머이 묻혔고 머이 묻혔고’하는 말을 어른들한테 들었대요. ‘거기 소나무 밑에 갈비(소나무 낙엽 채취)하지 마라 거기 송장 썩은 거 묻어 놨은께, 거기(시체를 묻어서 그랬는지)는 풀이 잘 자라더래요. 학살 후 그 이듬해 산사태가 나니까 해골이 도랑에 굴러 내려오더랍니다. 그래 이걸 주워가지고 서부시장에 갖다 팔더라 하데요. 왜 파느냐, 그 당시에 영양실조가 많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천질이라는 하늘이 준 병리라고, 애가 가만 가다가 탁 쓰러져서 거룸 물고 기절했다가 또 살아났다가 또 가고, 아, 간질, 간질병이죠. 간질환자 아니면 나환자가 이 머리뼈를 갈아서 먹으면 낫는다는 소문이 진주시에 엄청 났대요. 그래서 용산고개에서 파 내려오는 사람도 가끔 봤대요. 어린애들이 소 먹이다 오면 나이 많은 영감들이 보자기에 둥그런 걸 싸 내려오더랍니다. 그래 ‘뭐이고?’하니까 ‘너들은 이런거 보년 안 된다.’이러면서 가져 내려오고 하더랍니다. 개울에는 머리가 막 시퍼렇게 곰팡이 피어 갖고 구석에 묻혀있고 그랬대요.(본문264쪽)

증언록을 읽으면서 이러한 제노사이드(집단학살범죄)는 왜 반복될까? 제노사이드는 다른 가치나 이념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파시즘적 범죄이다. 국가나 집단의 경우 자신의 범죄행위를 솔직히 드러내고 반성하기보다는 미화하고 사실 자체를 왜곡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제노사이드는 우리와는 관계없는 먼 옛날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제노사이드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과거의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식민지 시대와 민족 분단의 한국 현대사의 굴절 속에서 집단학살의 아픈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2008년 1월 24일에 참여정부 노무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과거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양민학살 행위’로 인정하여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유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위로와 사과의 뜻을 밝혔다. 아울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약칭 진화위)를 발족하여 전체 유족들의 15% 정도의 배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은 조사가 전면 중단되었다가 문재인 정부에서 진화위 2기(2020년 12월 10일)가 출범되어 보•배상 미신청자 유족들의 재신청 및 전 지역을 조사 중이다. 국가에 의해 집단 학살된 보도연맹 사건을 은폐하고 금기시할 것이 아니라, 감시와 차별을 받아온 유족들의 아픈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배•보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주⟧

(주1) 진주관광 sns 기자단, “진주에서 시작된 소년운동의 역사”, 2020년 12월 29일.
(주2) 대구 10•1 사건은 1946년 10월 1일에 미군정하의 대구에서 발발한 영남 지역의 사건으로 이후 남한 전역으로 확산된다. 식량부족, 친일경찰에 대한 반감, 독립국가 수립이 지연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결합해서 폭발한 사건이다.
(주3) 남조선민보, 1949년 12월 10일자. 《제4차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 자료집》, 2017, 19쪽(주4) 법무부, 『한국 교정사』, 1987, 448쪽.
(주5) 최정기,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의 형무소 실태연구-행형제도와 수형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제노사이드 연구』 제2호, 2007, 20~21쪽.
(주6) 법무부, 『한국 교정사』, 1987, 535쪽.
(주7) 명석면사편찬위원회, 『명석면사』, 늘함께, 2000, 225쪽.
(주8) 신경득, 『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 학살』, 살림터, 2002, 189쪽.
(주9) 마크 프리드먼/한진여 옮김/홍순권 감수, 『제노사이드 집단학살은 왜 반복될까?』, 내인생의책, 2015, 17쪽.(주10) 한국전쟁전후 진주민간인 희생자유족회, 《백골의 귀향》, 2014년 2월 19일
(주11) 자유민보, 1949년 11월 20일자.
(주12) 동아일보 1949년 4월 23일자.
(주13) 민주중보, 1949년 12월 3일자.
(주14) 동아일보, 1949년 10월 30일자.
(주15) 제6회 국회속기록 제28호, 598~602쪽, 1950년 2월 11일.
(주16) 한국전쟁후 진주민간인희생자유족회, 《백골의 귀향》, 2014년 2월19일, 32쪽
(주17) 민주중보, 1949년 12월 3일자.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자원봉사자

고등학교 역사교사를 지냈고,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회원이다. 발굴 1차부터 10-1차까지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2021-07-27> 단디뉴스

☞기사원문: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⓶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사건’

※관련기사

☞단디뉴스: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➀ “아직도 풀리지 않는 70년의 한을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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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징용됐다 소련 붙잡힌 한인 청년들, 1948년 12월 귀국
1991년 결성된 생존 피해자 모임 회원들 대부분 고령으로 숨져

(블라디보스토크=연합뉴스) 김형우 특파원 = 일제강점기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만주와 사할린 등지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됐던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의 모임 시베리아 삭풍회(朔風會)는 1991년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올해로 구성된 지 30년이 되는 셈이다. 피해자들은 모임의 이름을 시베리아의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라는 뜻의 ‘삭풍’에 빗대어 만들었다.

‘시베리아 한의 노래’의 표지.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 캡처. 재배포 및 DB화 금지]

일제는 전쟁 막바지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수많은 식민지 청년들을 끌어모아 전쟁터로 내보냈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했고 이후 속수무책으로 패배를 거듭하던 일본군은 결국 연합군에 항복했다.

이 상황에서 무려 1만여 명의 한인 청년들이 소련군의 포로가 된 것으로 전해진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작년 1월 홈페이지를 통해 고(故) 이규철 씨가 작성한 육필원고 가운데 일부를 소개했다.

연구소에 따르면 1941년 울산 공립학교를 졸업한 그는 만주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45년 8월 징집돼 일본 관동군에게 편입됐다가 결국 소련군에 붙잡혔다.

그는 원고에서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내 몸을, 내 목숨을 바치고 이런 싸움을 해야 하는가. 적함 굴뚝에 돌진한 ‘신풍(가미카제) 특공대’와 같은 무모한 짓은 하고 싶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러시아 극동 연해주(州) 나홋카 항의 하늘. [연합뉴스 김형우 촬영]

소련군에 붙잡힌 한인 포로들을 괴롭혔던 것은 시베리아의 혹독한 자연환경과 배고픔이었다.

시베리아의 포로 수송 화물열차에서 물이나 빵과 같은 음식물을 먹지 못하고 혹한에 시달려야만 했던 한인 청년들은 굶주림과 각종 배고픔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씨는 수용소에서 지냈던 첫해 겨울의 추위로 인한 고통에 대해 혹한 속에 체온을 유지하면서 살려는 눈물겨운 사투가 계속됐다고 강조하면서 “지칠 대로 지친 몸에 매달리고 있는 목숨이 정말 질기고 모질더라”고 밝혔다.

심지어 몇몇 한인 포로들은 현지에서 숨지기도 했다.

시베리아 곳곳의 수용소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한인 청년들은 미국과 소련이 전쟁 포로와 관련한 협의를 이뤄내며 1948년 12월 대거 귀향길에 올랐다. 당시 2천명이 넘는 한인 청년들은 연해주(州)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차로 3∼4시간 거리에 있는 나홋카 항에서 1948년 12월 함경남도 흥남으로 귀환했다.

1948년 12월 한인 포로 2천여 명이 귀환한 나홋카 항. [구글지도 캡처. 재배포 및 DB화 금지]

소련에서 건너왔다는 이유로 침묵을 강요받았던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은 한국과 소련이 국교를 맺은 1990년 이후가 돼서야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활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삭풍회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피해보상을 청구했었지만 결국 외면받았다.

일본의 전후 보상 대상에서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은 철저히 배제됐다.

한국 정부 차원의 위로금과 의료지원이 전부였다. 현재 삭풍회 회원들 대부분은 고령으로 숨진 상태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삭풍회 분들이 다들 연로하셔서 대외 활동을 하셨던 분들이 돌아가신 상황”이라고 말했다.

[email protected]

<2020-01-02> 연합뉴스 

☞기사원문: [특파원 시선]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삭풍회’를 아시나요

월, 2021/01/04-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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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도, 1억원 들여 친일 잔재 전수조사
도내 친일파 명단, 유족 개인정보 등 이유로 보고서 비공개
전문가 “세금 투입한 용역 취지 벗어나”

전라북도청사 전경. 전라북도 제공

전라북도가 약 1억원의 예산을 들여 도내 친일 인사와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연구용역을 수행했지만 용역 최종보고서는 비공개에 부쳐 논란이 되고 있다.

전라북도는 지난 4일 도청 홈페이지를 통해 ‘전라북도 친일 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 방안 연구용역’ 최종보고서를 비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전라북도는 ‘친일 인물에 대한 조사 내용이 포함돼 유족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정보는 유족 개인정보에 해당될 수 있다’, ‘사생활 침해 또는 명예훼손 등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정보는 정보통신망 유통이 금지된다’를 비공개 사유로 적었다.

전북대학교 산학협력단이 지난해 3월부터 12월까지 수행한 이번 용역은 전북 출신 친일파 명단을 추리고, 지역에 산재한 친일 잔재를 조사했다.

친일 인사 명단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을 기초로 작성됐다.

용역에서 전북 출신 친일파는 118명, 친일 잔재는 131건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전라북도는 유족 개인정보 등을 이유로 1년 가까이 약 1억원을 들여 진행한 용역 결과를 비공개했다.

이 때문에 용역보고서에 담긴 도내 친일 잔재도 도민들은 알 수 없게 됐다.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 박우성 투명사회국장은 “세금을 들인 연구용역을 비공개한다는 것은 부실 용역이란 의혹을 살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개인정보나 명예훼손이 우려된다면 일부라도 공개해야 한다. 전면 비공개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고 알리겠다는 이번 용역의 취지에서 벗어난다”고 덧붙였다.

전라북도 관계자는 “정보공개위원회 자문을 구한 결과, 친일 인사가 담긴 명단을 공개할 경우 유족 개인정보 침해와 명예훼손이 될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며 “친일 인사 명단을 제외한 용역보고서 일부 공개를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2021-01-05> 노컷뉴스 

☞기사원문: 전북도, 친일 청산 용역 ‘공개 속앓이’

목, 2021/01/07-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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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당 1억씩 지급”… 5년 만에 결론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 한국일보 자료사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에서 승소했다. 정식 재판이 시작된 지 5년 만의 결론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부장 김정곤)는 8일 고(故) 배춘희 할머니 등 1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1심 선고기일을 열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일본의) 불법행위는 인정되고, 원고들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며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인용한다”고 밝혔다.

배 할머니 등은 2013년 8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사람당 1억원의 배상을 요구하는 민사조정을 한국 법원에 신청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폭력을 사용하거나 속이는 방식으로 위안부로 차출한 불법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을 하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조정 절차에 응하지 않으면서, 사건은 2015년 12월 정식재판으로 넘어갔다. 정식 재판이 시작된 후에도 일본의 거듭된 소장 송달 거부로 인해, 공시송달 절차를 거쳐 소가 제기된 지 약 4년 만인 지난해 4월에야 첫 재판이 열렸다.

이번 재판의 최대 쟁점은 ‘주권면제’ 원칙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었다. 일본 정부는 그간 ‘한 국가의 행위 대해 다른 나라가 자국 법원에서 국내법을 적용해 재판할 수 없다’는 국제법상 원칙인 주권면제론을 들어 재판이 응하지 않았다.

이에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김강원 변호사는 “(식민지 시절) 일본 행위는 반인권적 불법행위이자 국제범죄에 해당해 주권면제(국가면제)가 적용될 수 없다”며 예외를 주장했다.

이날 재판부도 “반인도적 행위로서 국제강행 규범을 위반한 부분까지 국가면제를 인정할 수는 없다”면서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일본 상대 손해배상 일지

<2021-01-08> 한국일보 

☞기사원문:위안부 할머니들, 日정부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 이겼다 

관련기사 

☞뉴시스: ‘日위안부 소송’ 할머니들이 이겼다…법원 “1억씩 지급”

☞여성신문: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들, 일본 정부 상대 승소 “역사적인 판결”

☞프레시안: 법원 “일본,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

☞한겨레: 법원 “반인도적 행위…‘위안부’ 피해자에게 1억원씩 배상”

토, 2021/01/09-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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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을 위한
사법부의 역사적인 판결을 환영한다.

오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국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의 첫 판결이 있었다. 사법부는 일본의 범죄행위를 모두 인정하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을 위한 사법부의 역사적인 판결을 환영한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1991년 故 김학순 님의 증언 이후 오늘날까지 그 피해를 온몸으로 증언하며 일본에게 사죄와 배상을 요구해왔다. 이번 판결은 30년 동안 인권과 존엄의 회복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투쟁해 온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준 판결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소송에서 일본은 ‘한국 법원이 일본국을 상대로 재판할 권리가 없다’며 재판을 거부해왔다. 일본의 주장은 전범국가로서의 책임을 면해보자는 한낱 궤변에 불과하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일본국이 저지른 계획적이고, 조직적이며 반인도적인 범죄행위이다.

사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이나 2015년 이른바 ‘위안부’합의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했다. 일본은 전범국가로서 마땅히 법적 책임을 다하고 피해자들의 요구대로 사죄, 배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사죄는커녕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은폐하고 왜곡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일본 정부는 오늘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하여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을 위해 즉시 법적 책임을 이행해야 할 것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18년 10월 30일에 내려진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의 이행을 가로막고 한국 정부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우리는 일본 정부가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하여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과 오늘 ‘위안부’ 소송의 판결을 즉시 이행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비롯한 모든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끝까지 연대할 것임을 밝힌다.

2021년 1월 8일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겨레하나·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민족문제연구소·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과거사청산위원회·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조선학교와함께하는사람들 몽당연필·청년시대여행·평택원폭피해자2세회·평화디딤돌·포럼 진실과 정의·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한국YMCA전국연맹·합천 평화의집·흥사단·1923한일재일시민연대·KIN

토, 2021/01/09-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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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서울뉴스통신】 최인영 기자 = 구리시는 구리 출신 독립운동가 ‘노은 김규식 선생’이 새겨진 구리사랑카드를 10,000매 제작하여 오는 2월부터 배부한다.

구리시는 해마다 선생께서 나라와 겨레를 사랑했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고 후손들에게는 그의 업적과 정신을 알리기 위한 추모제를 개최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된 사노동 생가터(동구릉로389번길 55-11)를 작은 기념공간으로 조성하고 ‘노은 김규식길’ 이라는 명예 도로명도 부여하는 등 시민들에게 잊혀져 가는 역사를 알리는 사업을 추진했다.

이번에 제작 배부될 예정인 ‘노은 김규식 선생’과 태극기가 그려진 구리사랑카드도 이러한 역사 계승 발전 사업의 하나로 독립운동 유공자 및 후손에게는 명예와 자긍심을, 시민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환기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안승남 구리시장은 “노은 김규식 선생은 20세 젊은 나이에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한제국무관학교에 입학한 이후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를 이끌었던 구리시를 대표하는 역사 인물이자 독립투사이다. 2021년에도 그 분의 숭고한 정신을 널리 알리는 다양한 선양운동을 펼쳐 나갈 예정으로 이번에 제작되는 ‘노은 김규식 선생’이 새겨진 구리사랑카드는 역사를 알리는 것 뿐만 아니라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관내 소상공인들을 위해 시민들이 함께 위기를 극복하자는 의지도 담겨 있다며 위기에 처한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앞으로도 더 많이 구리사랑카드를 사용해주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지난 2019년부터 발행하고 있는 구리사랑카드는 2020년 12월 말 현재 약 361억원이 발행 및 유통됨으로써 코로나19라는 재난상황에서 소상공인 매출증대 등 침체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마중물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월 최대 1백만원 충전 시 10%에 해당하는 인센티브를 지급하고 있다.

경기동부 취재본부 최인영 기자 [email protected]

<2021-01-13> 서울뉴스통신

☞기사원문: 구리시, ‘노은 김규식 선생’ 새겨진 ‘구리사랑카드’ 발행

수, 2021/01/13-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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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연, 선고 직후 기자회견 열고 “재판부, 일본 적반하장에 힘 실어주는 것”

▲ 참가자들이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 하인철

14일 오후 2시 30분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이 ‘전범기업’ 미쓰비시 사죄 및 배상 면담요청에 대한 재판 결과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대진연은 2019년 미쓰비시의 전범행위에 대한 사죄와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면담요청을 진행했다. 이에 대해 지난달 검찰은 5100만 원에 달하는 과도한 벌금을 구형했고 14일 선고가 진행됐다.

선고가 진행되기 전 대진연은 무죄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재판부에 양형 사유를 제출한 상태라고 밝혔다. 하지만 오후 2시 재판부는 검찰이 구형한 5100만 원을 그대로 선고했다. 이에 대해 재판에 출석한 회원들이 규탄 기자회견을 곧바로 진행했다.

양희원 강원대진연 회원은 “오늘 사법부의 유죄 판결에 대해 정말이지 절망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사법부의 국적이 대체 어디인가, 사법부의 정의는 살아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라며 “배상판결이 나온 지 어느덧 3년이란 시간이 지났는데, 미쓰비시는 그 동안 어떤 사죄와 배상, 반성도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장미란 대구경북대진연 회원은 “전범기업이 아직도 이 나라에서 아무일 없었다는 듯 장사를 하고 있다. 전 국민적인 반일, 불매 열풍에도 눈 깜짝하지 않았다. 피해자분들과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학생들에게 5100만 원이라는 벌금이 떨어지는 동안 미쓰비시는 무얼 하고 있었느냐”라며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배상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몇억 원을 내지 못하겠다며 반발하고 들고 일어났다”라고 미쓰비시를 규탄했다.

박찬우 광주전남대진연 대표는 “얼마 전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에게 일본정부가 배상하라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판결이 있었다. 하지만 스가 총리는 이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뻔뻔스럽게 대하고 있다”라며 “아직 전범국이 제대로 반성도 안 한 이 상황에서 국민을 대변해야 할 검찰과 사법부가 정의로운 목소리를 낸 대학생들을 어떻게 탄압할 것인지 혈안이 돼 있다”라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규탄 성명 전문을 낭독하고 기자회견을 마무리했다.

한편, 대진연(소속 회원 포함)에게 현재까지 선고 및 구형된 벌금의 총액은 1억2350만 원이다. 대진연은 후원금을 모으고 있다.

[규탄성명] 전범기업 미쓰비시 규탄한 대학생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사법부를 규탄한다

▲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하인철

정의로운 목소리를 낸 대학생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사법부를 규탄한다. 사법부의 판결은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정당한 목소리를 틀어막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미쓰비시와 일본의 적반하장격인 태도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2018년 11월, 미쓰비시는 강제노동 피해자 분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있었다. 법원의 판결은 단순히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의미를 넘어, 법적배상이라는 측면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미쓰비시의 분명한 잘못을 꼬집고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미쓰비시는 아직까지도 피해자 분들께 사죄 한 번 한 적 없고, 심지어 법적배상 역시 법원 판결이 나온 이후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는 중이다.

강제징용 문제는 단순히 과거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 피해자 분들의 현재진행형인 문제이다. 그렇기에 25명의 대학생들은 미쓰비시에게 사죄할 것을 요구하며 면담요청을 진행했다. 이는 전쟁범죄의 주범인 미쓰비시에 대한 대학생들의 분노였고, 또 국민들의 염원이었다.

그렇기에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그리고 피해자 분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목소리를 낸 대학생들은 무죄이다. 한국대학생진보연합 미쓰비시 면담요청 대학생들은 유죄를 선고한 사법부를 강력하게 규탄하며 앞으로도 적폐 사법부, 검찰과 맞서 올바른 역사를 만드는 길에 당당히 나설 것이다.

2021. 01. 14
민생경제연구소 진보대학생넷 안진걸(민생경제연구소 소장)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 소장)

<2021-01-1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미쓰비시 면담요청한 대진연 회원들에 벌금 5100만원 선고

금, 2021/01/1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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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주의 전문학술지 『기억과 전망』 제43호 발간
4·19혁명 60주년, 전태일 50주기,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이었던 2020년을 돌아본 논문들 수록
문인간첩단사건 피해자 임헌영 선생의 회고, 한국전쟁기 전염병 관련 저작 분석한 신동원 전북대 교수의 주제서평 등 수

기억과전망 43호 표지

(서울=국제뉴스) 김서중 기자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민주주의 전문학술지 『기억과 전망』 43호를 발간했다.

매년 두 차례 발간되는 『기억과 전망』은 한국연구재단 등재학술지로, 국내외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논문들을 싣는다.

이번에는 2020년 겨울호답게 4·19혁명 60주년, 전태일 분신 5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고루 돌아볼 수 있는 논문들이 수록되었다.

첫 번째 논문은 4·19혁명을 주제로 다룬다. 김일환은 「사립대학으로 간 민주화운동: 4·19~5·16 시기 ‘학원분규’와 사립대학 법인 문제의 전개」를 통해, 4·19를 겪으며 개혁의 주체로 떠오른 대학생들이 자신들의 공간인 대학 내부에서 ‘학원의 독재자’ 사학재단에 대항하는 과정을 분석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군사정권과 사립대학 간 ‘갈등적 담합’ 체제가 구축되었고, 이 골격이 사학법 개정을 시도했던 노무현 정부를 거쳐 대학의 위기라 불리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동원은 전태일의 노동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인공지능과 연계한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게재했다. 「“나의 전체인 일부”인 인공지능: 1960년대 말 비인간 노동과 전태일의 후기인간주의」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저자는 전태일이 내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세 가지 테제를 중심으로 후기인간주의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이를 각각 ‘(비)인간 선언’, ‘노동(자) 거부’, ‘지(의)식’으로 해석했다.

이어 수록된 논문 「5·18, 광주 일원에서의 연행·구금 양상과 효과: 계엄군의 연행·구금이 지역민 및 일선 행정기관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에서 김형주는 당시 계엄군의 폭력과 그 효과를 지역적 맥락에서 분석했다. 그는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계엄군의 연행과 구금으로 당시 방관자이자 협조자였던 지역 경찰과 공무원이 어떤 시선을 갖게 되었는지 서술하고, 이것이 일선 행정기관에 미친 영향은 신군부의 권력 장악이라는 거시적 시각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세 편의 민주화운동 관련 논문 외에 정진영의 「존재로서의 사회운동: 발달장애인의 탈시설-자립생활 과정을 사례로」도 주목할 만하다. 이 논문은 시설을 벗어나는 자립과정에서 발달장애인들이 사회운동의 주체로 어떻게 자리하는가를 탐구했다.

이번 호의 회고록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는 이번 글에서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투옥된 경험을 풀어냈다. 문학평론가인 임 소장은 박정희 정권하에서 여러 고초를 겪었는데, 1979년에는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글에는 문인간첩단 사건 당시 ‘빙고호텔’(국군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의 끔찍한 고문의 과정, 서대문 귀소에서의 생활, 재판 진행과정, 석방 후 요시찰 인물로 살아야 했던 이야기 등이 담겼다.

이밖에도 신동원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소장은 한국전쟁기의 전염병 관련 저작들을 분석한 주제서평을 선보였는데, 이임하의 <전염병 전쟁: 한국전쟁과 전염병 그리고 동아시아 냉전 위생 지도>를 중심으로 2020년 코로나와 한국전쟁기의 전염병을 대조시키고 있다. 이 글은 감염병에 대해 국내에서 출간된 거의 모든 서적의 일람을 제시하고, 한국전쟁기에 전염병을 다룬 저작을 개괄하고 비교한다.

<2021-01-15> 국제뉴스

☞기사원문: 학술지 ‘기억과 전망’ 43호, ‘민주화운동사의 역사적 장면들’

금, 2021/01/15-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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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12억원 확보…”동학농민군 시대정신 담을 것”

황토현전적지 전봉준 장군 동상 [정읍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정읍=연합뉴스) 김동철 기자 = 친일 작가 작품이라는 지적을 받아온 전북 정읍시 황토현전적지의 전봉준 장군 동상이 철거되고 재건립된다.

정읍시는 19일 ‘녹두장군’ 전봉준 장군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과 위엄을 담은 작품으로 교체하기 위해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추진위원회’를 개최했다.

추진위는 동학농민혁명 연구자, 시의원, 건축·조경·미술·조각 분야 전문가, 동학 단체 회원 등 20여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동상·부조물 철거 후 처리 방안, 새 동상 건립 위치, 주변 경관 조성, 국민 성금 모금 방법 등을 논의했다.

위원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와 자주 국가 보전이 중심인 동학농민군의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교체키로 의견을 모았다.

시는 예산 12억원을 확보했다.

1987년 10월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전적지에 건립된 전봉준 장군 동상은 친일 조각가 김경승(1915∼1992)이 제작했다.

동상과 배경 부조 시설물은 화강암 받침대 위에 높이 6.4m, 좌대 3.7m, 형상 3.7m 규모로 건립됐다.

김경승이 친일 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인 까닭에 동학 단체와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줄곧 철거를 요구해왔다.

유진섭 시장은 “시는 철저한 역사적 고증으로 동학농민혁명 정신 선양에 어긋나는 기념사업을 바로잡을 것”이라며 “동상 재건립으로 동학농민혁명과 더불어 전봉준 장군이 정읍을 대표하는 인물로 기억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mail protected]

<2020-01-19> 연합뉴스 

☞기사원문: ‘친일작가 제작’ 전봉준 장군 동상, 철거 뒤 재건립한다

수, 2021/01/20-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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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BAR_길윤형의 알고 싶어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가장 처음 공개 고백한 김학순 할머니.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 8일 한국 법원이 국제 관습법상의 주권면제(국가면제) 원칙을 깨고,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놓은 뒤 한-일 양국에서 이 판결의 후폭풍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찬찬히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묻습니다. 이 판결이 정말 한-일 관계를 지난 2019년 가을과 같은 격한 충돌로 몰고 갈까요?

먼저, 일본의 움직임을 살펴 보겠습니다. 아키바 다케오 외무성 사무차관은 판결 당일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를 초치해 “매우 유감이다. 일본 정부는 결코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한 항의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어 오후엔 스가 요히시데 총리가 기자들과 만나 “우리나라로선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합니다. 이튿날인 9일 일본 언론들은 정부 당국자를 인용해 “일본 정부가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를 쏟아냈고, 자민당 외교부회는 15일 회의에서 정부에 대항 조처를 취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습니다.

이 판결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 역시 판결 당일인 8일 ‘외교부 대변인 담화’를 통해 공식화됩니다. 첫 문장에서 정부는 “법원의 판단을 존중하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 나갈 것”이라는 원론적 입장을 전한 뒤, 두 번째 문장에선 “2015년 12월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이하 12·28 합의)가 양국 정부의 공식 합의라는 점을 상기함”이라는 표현을 집어넣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12월28일 12·28 합의를 재검토하는 조사 보고서가 공개된 뒤,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됐다고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합의가 정부 간 공식 합의임을 부정할 순 없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이후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하는 등 합의를 무력화하는 작업을 이어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부 담화에 12·28 합의에 대한 언급이 재등장했다는 것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부 입장이 강경한 ‘원칙론’에서 ‘현실론’으로 선회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정부는 셋째 문장에서 “이 판결이 외교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검토하여 한일 양국 간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협력이 계속될 수 있도록 제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결론 내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9월 스가 정권이 출범한 뒤 올 7월로 예정된 도쿄 올림픽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재가동하는 ‘평화 올림픽’으로 활용하기 위해 한-일 관계 개선을 시도해 왔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강창일 신임 주일 한국대사에게 전한 “때때로 문제가 생겨나더라도 그 문제로 인해 미래지향적으로 발전해야 할 양국관계 전체가 발목 잡혀선 안 된다”는 말이나 18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밝힌 이 판결이 “솔직히 조금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란 언급은 이 같은 기조를 재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위안부 판결은 2018년 10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처럼 한-일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넣게 될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러진 않을 것이라 예측할 수 있습니다. 국내 여러 전문가들이 한-일 간 마찰을 피할 수 있도록 국제사법재판소의 분쟁 해결 절차를 따르자거나, “만만한 일본을 상대로 갈 데까지 간 한국 법원의 모험주의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진입하고 있다”(선우정 <조선일보> 부국장)는 우려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판결을 지지하는 ‘정의의 관점’이 아닌 ‘현실 외교적 관점’에 선다 해도 이 판결에 대해 우리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지나치게 오버하며 자세를 낮출 필요는 없다고 판단합니다.

강제징용 손해배상소송 원고 쪽 대리인들과 한·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2018년 11월12일 피해자들 사진을 들고 도쿄 신일철주금 본사로 향하고 있다. 왼쪽부터 야노 히데키 ‘강제연행·기업책임추궁재판 전국네트워크’ 사무국장, 김민철 ‘강제동원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운영위원장, 김진영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임재성·김세은 변호사. 원고 4명 중 이춘식(94)씨를 제외한 3명은 대법원 확정판결을 보지 못하고 고인이 됐다. <한겨레> 자료 사진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요?

한-일 관계를 격랑으로 몰고 간 대법원 판결 이후 상황을 돌이켜 봅시다. 한국 대법원은 2018년 10월 일본제철 등 일본 기업이 과거 식민지 시기 강제노동을 시켰던 한국인 피해자들에게 각 1억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놓습니다. 그때도 일본 정부는 판결을 강하게 비난하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담화를 내놓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이에 대해 구체적인 보복 조처를 내놓은 것은 그로부터 무려 8개월이 지난 2019년 7월이었습니다. 지금도 모두의 기억 속에 생생한, 반도체 생산에 꼭 필요한 불화수소 등 3개 물질에 대한 수출 규제 등의 조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왜 바로 보복에 나서지 않고 8개월을 기다린 걸까요? 이 판결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자신들이 젊은 시절 감당해야 했던 혹독한 노동에 대해 구체적인 배상과 보상을 요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때 중요했던 것은 피해자인 원고들이 ‘실제 배보상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원고인단은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을 압류하고, 이렇게 압류된 자산을 매각하려는 이른바 ‘강제집행 절차’에 나섭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한 재판 결과로 인해 일본 기업에 ‘실제적 피해’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이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 한-일 청구권 협정 3조 1항에 근거해 2019년 1월9일 ‘외교 협의’를 요청하고, 이어 5월20일 이번엔 3조 2항에 근거해 ‘중재’ 요청을 합니다. 그렇지만 당시 북-미 핵 협상에 온갖 외교력을 집중하고 있던 문재인 정부는 일본 정부의 요청을 무시합니다. 그 결과 발생한 것이 2019년 7월의 보복 사태입니다. 즉, 일본 정부가 보복 조처를 취한 것은 판결 그 자체 때문이 아닌, 원고들이 진행한 강제집행과 한국 정부의 ‘의도적 무시’ 때문이었습니다.

정말이냐고요? 일본 정부가 중재 요청을 한 다음날인 2019년 5월21일 고노 다로 외상의 기자회견 내용을 살펴봅니다.

“한국에 대해 1월9일 청구권 협정에 관한 협의를 요청했다. 한국에선 이낙연 총리가 이 문제에 대응하는 역할을 맡는다 해서 일본도 이낙연 총리의 대응을 어떤 의미에선 지지한다는 의미로 조금 억제적으로 대응했다.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는 각오하고 있었지만, 이제 곧 4개월 이상을 기다리게 된다. 그런데 얼마 전 이낙연 총리가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발언이 있었다. 이 얘기를 듣고는 우리 쪽에서도 이 이상 기다리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중재 절차를 통보하기에 이른 것이다. (중략) 만에 하나 일본 기업에게 실질적 피해가 이르게 된다면 일본 정부로서는 필요한 조처를 취할 것이라 생각한다.”

즉, 일본 정부가 움직이게 된 것은 판결 자체가 아닌 한국 정부의 무대응과 일본 기업에 실제 피해가 이를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번 위안부 판결은 어떨까요? 지난 강제동원 소송과 달리 이번 위안부 소송은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돈을 받아내기 위해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할머니들은 기나긴 수요집회 기간 자신들이 긴 투쟁에 나선 것은 “돈 때문이 아니다”라고 강조해 왔습니다. 일본 정부가 8일 판결의 취지를 받아들여 위안부 제도가 “일본이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운영한 국가범죄”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그 시점에서 모든 갈등이 해소될 수 있습니다. 즉, 할머니들과 그 유족들에겐 일본 정부의 재산을 실제로 찾아내 압류·매각 등의 강제집행 절차를 시작할 의지가 없습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닌 역사적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그런 것 아니냐고요? 현재 진행 중인 위안부 재판은 모두 2건입니다. 8일 판결이 나온 첫 재판의 원고(유족 포함)는 12명, 3월24일로 변론 기일이 연기된 두번째 재판의 원고는 20명입니다. 이 32명 가운데 상당수는 지난 12·28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화해치유재단으로부터 1억원을 수령했습니다. 평소 역사적 정의를 강조해 온 할머니들이 재단에서도 돈을 받고, 이 판결로도 돈을 받기 위해 ‘타국 정부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이란 무모한 일을 벌일 것이라 생각하긴 어렵습니다. 실제, 이용수 할머니는 16일치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일본 총리가 공개된 장소에 나와 세계가 다 듣도록 피해자에게 직접 사과해야죠. 그렇게만 한다면 저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돈 얘기한 적도 없어요. 지금이라도 사과한다면 재판(손해배상 소송)도 취하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재판의 원고 대리인인 이상희 변호사 역시 “일본 정부가 판결의 취지를 받아들이면 된다. 할머니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닌 역사의 정의”라고 말합니다.

수원평화나비 소속 회원 등 시민들이 2020년 6월24일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 수요시위’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렇다면, 일본 정부의 입장은 어떨까요. 원고들이 강제집행에 나서지 않는데도 무턱대고 한국에 보복 조처를 취할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지난 15일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의 기자회견 내용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재판에 대해서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국제법상으로도, 양국관계를 보더라도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이상 사태가 발생한 것으로 매우 유감이라 생각한다. 9일 내가 강경화 한국 외교부 장관에게 직접 전화해 강하게 항의했다. 그리고 항의뿐 아니라 정부로서 한국이 국가적으로 국제법 위반을 시정하기 위해 적절한 조처를 속히 강구할 것을 강하게 요구한다. ‘여러 선택지’를 시야에 넣고 의연히 대응해 가겠다.

(질문: 여러 선택지라 함은 이른바 보복 조처도 포함된 것으로 이해해도 되는가?)

아마도 보복 조처라 하면 일본이 무엇인가 당했을 경우 대항조처를 취한다는 것이지만, (지금 말하는 것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한국이 국제법 위반 상태를 일으키고 있다’, 이것에 대해 시정을 촉구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보복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모테기 외무상은 보복 조처는 일본이 ‘당했을 경우’ 즉 직접적 피해를 입을 경우 취하는 것으로, 그렇지 않은 이상 이런 조처를 취할 의사가 없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원고단이 강제집행 절차에 나서지 않는 한 일본이 먼저 움직이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원고들에겐 강제집행을 할 의사가 없습니다.

결국, 지난 8일 판결로 인한 한-일 갈등은 ‘소리 없는 대치’로 장기화할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 원고들은 이 판결을 통해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 이후 30년에 걸친 길고 긴 투쟁 끝에 한국 법원으로부터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받게 됐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판결을 오랜 위안부 투쟁의 대미를 장식하는 ‘상징적 판결’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 역시 본인들이 “최종적 불가역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해 온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는 무리수를 두진 않을 것입니다.

길윤형 기자 [email protected]

<2020-01-19> 한겨레 

☞기사원문: ‘위안부’ 판결로 한일관계 파국이라고? 오버하지 맙시다

수, 2021/01/20-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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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1/23-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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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만화가 10명 참여 ‘한 시대 다른 삶’…항일·친일인사 삶 비교

‘한 시대 다른 삶’소개하는 관계자들
(서울=연합뉴스) 황윤기 수습기자 =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하재욱 작가, 성모 작가, 박종선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장, 최민 전국시사만화협회장이 만화 ‘한 시대 다른 삶’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1.1.31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송은경 기자 = “최근 만화가 윤서인의 망언으로 많은 국민이 분노했는데, 이 만화는 그에 대한 민족문제연구소의 대답입니다.”

최근 민족문제연구소(민문연) 부천지부에서 출간한 ‘한 시대 다른 삶’은 독립운동가의 삶을 조명한 그간 교육만화와 다른 점이 많다. 제목 그대로, 같은 일제강점기를 살았지만 친일과 항일이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간 인물들의 삶을 나란히 놓고 대비시킨다.

31일 민문연에 따르면 ‘한 시대 다른 삶’은 지난해 경기도 문화예술 일제 잔재 청산 공모사업에 선정돼 권당 470쪽, 2권짜리 만화책으로 만들어졌다.

경기지역 초·중·고등학교 2천400곳에 보급됐으며 민문연 부천지부 누리집에서 웹툰으로 볼 수 있다. 신문과 잡지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시사만화가 10명이 항일·친일 인사 10쌍의 삶을 만화로 풀어냈다.

방학진 민문연 기획실장은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관련 만화와 웹툰이 많이 나왔지만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다”며 “한 측면만 다루면 역사가 제대로 보이지 않고,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같이 보여줘야 그 시대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민 전국시사만화협회장은 결과물을 보여주고 싶은 인물로 최근 망언 논란이 불거진 시사만화가 윤서인씨를 꼽았다. 윤씨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게시물이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을 조롱한다며 많은 비판을 받았고, 광복회 측과 고소전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최 협회장은 “시사만화는 일제를 풍자하며 시작했다”며 그 기원을 1909년 6월2일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 화백의 만평에서 찾았다.

그는 “작가의 펜촉이 어딜 향하느냐에 따라 독이 되기도 하고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며 “윤씨 같은 작가들의 비뚤어진 역사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게 이런 책”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같은 작가로서 부끄러움도 있고, 그래서 이 작업이 더욱 중요했다”고 말했다.

만화 ‘한 시대 다른 삶’ [촬영 황윤기 수습기자]

교육용 만화이자 시대극인 만큼 고증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건물 외관이나 복식 등은 구체적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그렸고, 내용은 역사 전문가들의 감수를 받았다. 실제 작업 기간은 한두 달 정도로 짧았지만 최 협회장은 “협회 소속 ‘베스트’ 작가들이 참여했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인 한용운과 ‘친일 불교인’ 평가를 받는 강대련 편에 참여한 하재욱 작가는 “지금 우리가 ‘그때 그들이 독립운동을 해야 했던 것 아니냐’고 말하긴 쉽지만 사실은 정말 힘든 일”이라면서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아득한 절망감을 느낀다”고 했다.

최 협회장은 “그래서 올바른 역사 인식이 필요한 것”이라며 “그 시대에 독립운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겠지만 올바른 생각이 있어야 그나마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방학진 실장도 “친일파의 오랜 변명 중 하나가 ‘그때는 다 그랬다’이지만 이 책을 통해 ‘다 그렇게 살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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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31> 연합뉴스 

☞기사원문: “친일, 어쩔 수 없었다? 다 그러진 않았다 보여주고 싶었죠” 

※관련기사 

☞민족사랑: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한 시대 다른 삶』 만화와 웹툰으로 제작 

☞부천타임즈: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엇갈린 삶 

☞IBS뉴스: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엇갈린 삶 웹툰 ‘한 시대, 다른 삶’ 제작

일, 2021/01/31-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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