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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 추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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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 추도문

admin | 수, 2021/07/28- 01:29

[자료소개]

노신 추도문

이육사

 

이 글은 1936년 10월 23일부터 29일까지 5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발표된 이육사의 노신 추도문이다. ― 편집자주

 

노신(魯迅)의 본명은 주수인(周樹人)이며 자는 예재(豫才)다. 1881년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탄생.
남경에서 광산학교에 입학하여 양학에 흥미를 가지고 자연과학에 몰두하였으며, 그 후 동경에 건너가
서 홍문학원을 마치고 선대 의학전문학교와 동경 독일협회학교에서 배운 일이 있다. 1917년에 귀국하
여 절강성 내의 사범학교와 소흥중학교 등에서 이화학 교사로 있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오사문학운동 후 중국문학사조가 최고조에 달하였을 시대에 북경에서 주작인(周作人) 경제
지(耿濟之) 심안영(沈雁永)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고 곽채약(郭採若) 등의 로맨티시즘 문학
에 대하여 자연주의 문학운동에 종사하고 잡지 <어사(語絲)>를 주재하는 한편, 북경정부 교육부 문서
과장 및 국립북경대학 국립북경사범대학 북경여자사범대학 등의 강사로 있었으나 학생운동에 관계되
어 북경을 탈출하였다.
1926년 하문대학 교수로서 재직하다가 남하, 그 후 광주중산대학 문과 주임교수에 있다가 1928년 사직하고 상해에서 저작에 종사하는 한편 1930년 <맹아월간(萌芽月刊)>이란 잡지를 주재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문학태도는 점점 좌익으로 전향하여 1930년 ‘중국좌익작가연맹’이 결성되자 여기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국민정부의 탄압을 받아서 1931년 상해에서 체포되었다. 그 뒤 끊임없는 국민정부의 간섭과 남의사(藍衣社)의 박해에서 꾸준히 문학적 활동을 하고 국민정부의 어용단체인 ‘중국작가협회’를 반
대하던 중 지난 10월 19일 오전 5시 25분 상해시 고탑 자택에서 서거하였다. 향년 56세.
주요 작품은 <아큐정전(阿Q正傳)> <납함(吶喊)> <방황(彷徨)> <화개집(華蓋集)> <중국소설사략(
中國小說史略)> <약(藥)> <공을기(孔乙己)>등이다. ― 조선일보 편집자주

 

1932년 6월초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식당에서 나온 나와 M은 네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조간신문을 사서 들고 근육신경이 떨리도록 굵은 활자를 한숨에 내려 읽은 것은 당시 중국과학원 부주석이요 민국혁명의 원로이던 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을 당하였다는 기사이었다.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하게 늘어선 프랑스공무국 순경들의 예리한 눈초리를 등으로 하나 가득 느끼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까지 올 동안은 침점이 계속되었다. 문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 R씨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노신 임종

 

중국 좌익작가연맹의 발안에 의하여 전세계에 진보적인 학자와 작가들이 상해에 모여서 중국 문화를 옹호할 대회를 그해 8월에 갖게 된다는 것과 이에 불안을 느끼는 국민당 통치자들이 먼저 진보적 작가진영의 중요분자인 반재년(潘梓年. 현재 남경유폐)과 이제는 고인이 된 여류작가 정령(丁玲)을 체포하여 행방불명케 한 것이며 여기 동정을 가지는 송경령(宋慶齡) 여사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자유주의자들과 작가연맹이 맹렬한 구명운동을 한 사실이며 그것이 국민당 통치자들의 눈에 거슬려서 양행불이 희생된 것과 그 외에도 송경령 채원배(蔡元培) 노신 등등 상해 안에서만 30명에 가까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의사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 3일이 지난 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자는 만국빈의사 앞에 닿았다. 간단한 소향(燒香)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 때 젊은 두 여자 수행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마기에 검은 마고자를 입은 중년 늙은이, 생화에 쌓인 관을 붙들고 통곡하던 그가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라고 말하고 난 10분쯤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 앞이며 처소가 처소인 만치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아줄 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었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시 고탑 9호에서 영서(永逝)하였다는 부보(訃報)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니 어찌 조선의 한 사람 후배로써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

 

중국 문학사상에 남긴 그의 위치

“「아큐정전(阿Q正傳)」을 다 읽고 났을 때 나는 아직까지 아큐의 운명이 걱정되어 못 견디겠다”고 한 로망 롤랑의 말과 같이 현대중국문학의 아버지인 노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아큐정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의 아큐들은 벌써 로망 롤랑으로 하여금 그 운명을 걱정할 필요는 없이 되었다. 실로 수많은 아큐들은 벌써 자신들의 운명을 열어 갈 길을 노신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노동층들은 남경로의 아스팔트가 자신들의 발밑에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시고탑 노신촌의 9호로 그들이 가졌던 위대한 문호의 최후를 애도하는 마음들은 황포탄(黃浦灘)의 붉은 파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큐시대를 고찰하여 보는데 따라서 노신 정신의 3단적 변천과 아울러 현대중국문학의 발전과정을 알아보는 것도 그를 추억하는 의미에서 그다지 허무한 일은 아닐 것이다.

 

노신 서거 기사, 매일신보 1936.10.20

 

중국에는 고래로 소설이라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완전한 예술적 형태는 존재하지 못했다. 삼국연의나 수호지가 아니면 홍루몽쯤이 있었고 다소의 전기가 있었을 뿐으로서 일반 교양있는 집 자제들은 과거제도에 화(禍)를 받아 문어체의 고문만 숭상하고 백화소설 같은 것은 속인의 할일이라 하여 쓰지 않는 한편 소위 문단은 당송 팔가와 팔고의 혼합체인 상성파와 사기당과 원수원의 유파를 따라가는 사륙병체문과 황산곡을 본존으로 하는 강서파 등등이 당시 정통파의 문학으로서 과장과 허위와 아유(阿諛)로서 고전문학을 모방한데 지나지 못하였으며 새로운 사회를 창생할 하등의 힘도 가지지 못한 것은 미루어 알기도 어렵지 않은 분위기 속에 중국문학사상에 찬연한 봉화가 일어난 것은 1915년 잡지 <신청년>의 창간이 그것이다.
이것이 처음 발간되자 당시 아메리카에 있던 호적(胡適) 박사는 「문학개량 추의(芻議)」를 1917년 신년호에 게재하였고 진독수(陳獨秀)가 이에 찬의를 표하고 「문학혁명론」을 발표하였으며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교수들이 합류하게 되자 종래의 고문가들은 이 운동을 방해코자 가진 야비한 정치적 수단을 써보았으나 1918년 4월호에 노신의 「광인일기(狂人日記)」란 백화소설이 발표되었을 때는 문학혁명운동은 실천의 거대 보무를 옮기게 되고 벌써 고문가들은 추악한 꼬리를 감추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후 얼마 뒤에 노신이 광동에 갔을 때 어떤 흥분한 청년은 그를 맞이하는 문장 속에 「광인일기」를 처
음 읽었을 때 문학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차차 읽어내려 가면서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
그래서 동무를 만나기만 하면 곧 붙들고 말하기를 ― 중국 문학은 이제 바야흐로 한 시대를 짓고있다. 그대는 「광인일기」를 읽어 보았는가, 또 거리를 걸어가면 길 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내 의견을 발표하리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魯迅在廣東) 이 문제의 소설 「광인일기」의 내용은 한 망상광(妄想狂)의 일기체 소설로서 이 주인공은 실로 대담하게 또 명확하게 봉건적인 중국 구사회의 악폐를 통매한다. 자기의 이웃사람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자기 가정을 격렬히 공격하는 것이다. 가정―가족제도라는 것이 중국봉건사회의 사회적 단위로서 일반에 얼마나 해독을 끼쳐왔는가. 봉건적 가족제도는 고형화한 유교류의 종법(宗法) 사회관념 하에 당연히 붕괴되어야 할 것이면서 붕괴되지 못하고 근대사회의 성장
에 가장 근본적인 장애로 되어있는 낡은 도덕과 인습을 여지없이 통매했다. 이에 「광인일기」 중에 한 절을 초하면

 

나는 역사를 뒤적거려 보았다. 역사란 건 어느 시대에나 인의도덕이란 몇 줄로 치덕치덕 씌어져 있었
다. 나는 밤잠도 안 자고 뒹굴뒹굴 굴러가며 생각하여 보았으나 겨우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사람을
먹는다”는 몇 자가 씌어 있었을 뿐이었다.

 

이같이 추악한 사회면을 폭로한 다음, 오는 시대의 건설은 젊은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이 소설의 일편은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로서 끝맺는다. 실로 이 한 말은 당시의 어린이인 중국청년들에게는 사상적으로는 폭탄선언 이상으로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작품이 백화로 쓰여지는 데 따라 문학혁명이 완전히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된 공적도 태반은 노신에 돌려야 하는 것이다.
「광인일기」의 다음 연속해 나온 작품으로 「공을기(孔乙己)」 「약(藥)」 「내일」 「하나의 작은사건(一個小事件)」 「머리카락 이야기(頭髮的故事)」 「풍파」 「고향」 등은 모두 <신청년>을 통해서 세상에 물의를 일으켰으나 그 후 1921년 <북경신보> 문학부간에 그 유명한 「아큐정전」이 연재 되면서부터는 노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문단 제1인적 작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작은 모두 신해혁명 전후의 봉건사회의 생활을 그린 것으로 어떻게 필연적으로 붕괴하지 않으면 안 될 특징을 가졌는가를 묘사하고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살아갈까를 암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혁명과 혁명적인 사조가 민중 심리에 생활 디테일에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가장 리얼하게 묘사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농민작가라고 할만큼 농민생활을 그리는데 교묘하다는 것도 한 가지 조건이 되겠지만 그의 소설에는 주장이 개념에 흐른다거나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은 그의 작가적 수완이 탁월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늘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과 때로는 인텔리일지라도 예를 들면 「공을기」의 공을기나 「아큐정전」의 아큐가 모두 일맥상통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이니 공을기는 구시대의 지식인으로 시대에 떨어져서 무슨 일에도 쓰이지 못하고 기품만은 높았으나 생활력은 없고 걸인이 되어 선술집 술상대에 일금 19조의 주채가 어느 때까지 쓰여져 있는대로 언제인지 행방불명된 채로 나중에 죽어졌던 것이라던지 룸펜 농민인 아큐가 또한 쑥스러운 녀석으로 혁명 혁명을 떠들어놓고는 그것이 몹시 유쾌해서 반취(半醉)한 기분이 폭동대의 일군에 참가는 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허풍만 치고 아무것도 못하다가 때마침 일어난 폭도의 약탈사건에 도당으로 오해되어(그의 평소 삼가지 못한 언동에 의하여) 피살되는 아큐의 성격은 그때 중국의 누구라도 전부 혹은 일부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큐나 공을기가 모두 사고와 행동이 루즈하고 확호한 한 개의 정신도 없으며 유약하면서도 몹시 건방지고 남에게 한대 쥐어박히면 아무런 반항도 못하면서 남이 자신을 연민하면 제 도량이 커서 남이 못 덤비는 것이라고 제대로 도취하여 남을 되는대로 해치는 무지하고 우수면서도 가엷고 괴팍스러운 것을 노신은 그 리얼리스틱한 문장으로 폭로한 것이 특징이었으니 당시 「아큐정전」이 발표될 때 평소 노신과 교분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모델로 고의로 쓴 것이라고들 떠드는 자가 있은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중국은 시대적으로 아큐시대이었으며 노신의 「아큐정전」이 발표될 때는 비평계를 비롯하여 일반 지식군들은 아큐상(相)이라거나 아큐시대라는 말을 평상 대화에 사용하기를 항상 다반으로 하게 된 것은 중국문학사상에 남겨놓은 노신의 위치를 짐작하기에 좋은 한 개의 재료이거니와 그의 작가로서의 태도를 통하여 일관하여 있는 노신정신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는데 적지 않은 흥미를 갖게 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조선문단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예술과 정치의 혼동이니 분립이니 하여 문제가 어찌 보면 결말이 난 듯도 하고 어찌 보면 미해결 그대로 있는 듯도 한 현상인데 노신같이 자기 신념이 굳은 사람은 이 예술과 정치란 것을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이 문제는 그의 작가로서의 출발점부터 구명해야 한다.
노신은 본래 의사가 되려고 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할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의 자기의 ‘할일’이란 것은 민족개량이라는 신념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훗날 <납함(呐喊: 외침)> 서문에 다음 같이 썼다.

 

나의 학적은 일본 어느 지방의 의학전문학교에 두었다. 나의 꿈은 이것으로 매우 아름답고 만족했다.
졸업만 하고 고국에 돌아오면 아버지와 같이 치료 못하는 병자를 살리고 전쟁이 나면 출정도 하려니
와 국인의 유신에 대한 신앙에까지 나아갈 것

이것은 물론 소년다운 노신의 로맨틱한 인도주의적 흥분이었겠지만 이 꿈도 결국은 깨어지고 말았다.

의학은 결코 긴요하지 않다. 우약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또 아무리 강장해도 무의미
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꾼이 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중략) 그럼으로 긴요한 것은 그들을
정신적으로 잘 개조할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때 당연 문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예운동을 제창
하기로 했다 (<呐喊>서문)

 

이리하여 그가 당시 동경에 망명해 있는 중국사람들의 기관지인 <절강조(浙江潮)> <하남(河南)> 등에 쓰던 과학사나 진화론의 해설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을 번역한 것은 그리스의 독립운동을 원조한 바이런과 폴란드의 복수시인 아담 미케비치, 헝가리의 애국시인 베트피 산더, 필리핀의 문인으로 스페인 정부에 사형받은 리샬 등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노신의 문학행정에 있어서 가장 초기에 속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번역까지라도 그의 일정한 목적 즉 정치적 목적 밑에 수행된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위에 말한 「광인일기」의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도 순수한 청년들에 의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그의 이상을 단적으로 고백한 것으로써 이 말은 당시 일반 청년들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깨닫게 한 것은 물론 지난 수천 년 동안의 봉건사회로부터 청년을 해방하라는 슬로건으로 널리 쓰였고 사실 그 뒤의 중국청년학생들은 모든 대중적 사회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발 과감한 지도와 조직을 하였으며 그 유명한 오사운동이나 오주운동이나 국민혁명까지도 늘 최전선에 서서 대중을 지도한 것은 이들 청년학생이었다.
그러므로 노신에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 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도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인 작품을 산출하는 데만 문호 노신의 지위는 높아갔고 아큐도 여기서 비로소 탄생하였으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좋은 예가 있다. 1928년경 무한으로부터 쫓겨 와서 상해에서 태양사를 조직한 청년비평가 전행촌(錢杏邨)이 때마침 프로문학론이 드셀 때인 만큼 노신을 대담하게 공격을 시작해 보았다. 그 소론에 의하면 노신의 작품은 비계급적이다, 아큐에게 어디 계급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당한 말이다. 노신의 작품에서 우리는 눈 닦고 보아도 프롤레타리아적 특성은 조금도 볼 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사람의 작품을 비평할 때는 그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니 노신이 작가로 활동하고 있을 때는 중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정의를 내릴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는 없을 뿐 아니라 그때쯤은 부르조아 민주주의적인 정치사조조차도 아직 경계선이 분명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부르조아 혁명이라는 소위 국민혁명도 정직하게 말하자면 사오운동을 전초전으로 한 것만큼 여기서 역시 중국의 비평가인 병신(丙申)은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그가 현재 중국좌익작가연맹을 지지하고 있다 해서 그의 사오(四五) 전후의 작품을 프로문학이라고
지목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를 우수한 농민작가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고

 

그렇다. 이 말은 어느 정도까지 정당에 가까운 말로서 그를 프로작가가 아니고 농민작가라고
해서 작가 노신의 명예를 더럽힐 조건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가 얼마나 창작에 있
어서 진실하게 명확하게 묘사하는 태도를 가지는가 그의 한 말을 써보기로 하자

 

현재 좌익작가는 훌륭한 자신들의 문학을 쓸 수 있을까? 생각건대 이것은 매우 곤란하다. 현재의 이
런 부류의 작가들은 모두 인텔리다. 그들은 현실의 진실한 정형은 쓸려고 해도 용이치 않다. 어떤 사
람이 일찍이 이런 문제를 제출한 것이 있었다. “작가가 묘사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가 경험한 것이라
야만 될 것인가? 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하기를 반드시 안 그래도 좋다. 왜 그러냐면 그들은 잘 추찰
(推察)할 수가 있으므로 절도하는 장면을 묘사하려면 작가는 반드시 자신이 절도질할 필요도 없고
간통하는 장면을 묘사할 필요를 느낄 때 작가 자신이 간통할 필요도 없다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가 구사회 속에서 생장해서 그 사회의 모든 일을 잘 알고 그 사회의 인간들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추찰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래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새 사회의 정형과 인물에 대해서
는 작가가 무능하다면 아마 그릇된 묘사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문학가는 반드시 참된 현실과
생명을 같이하고 혹은 보다 깊이 현실의 맥박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또 다시 말을 계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사회를 조그만치 공격하는 작품일지라도 만약 그 결점을 분명히 모르고 그 병근을 투철히 파악치 못하면 그것은 유해할 뿐이다. 애석한 일이나마 현재의 프로작가들은 비평가까지도 왕왕 그것을 못한다. 혹 사회를 정시해서 그 진상을 알려고도 않고 그 중에는 상대자라고 생각하는 편의 실정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비근한 예로는 얼마 전 모 지상에 중국문학계를 비평한 문장을 한 편 보았는데 중국문학계를 3파에 나눠서 먼저 창조파를 들어 프로파라 하여 매우 상세하게 논급하고 다음 어사사(語絲社)를 소부르조아파라고 조그만치 말한 후 신월사(新月社)를 부르조아문학파라 해서 겨우 붓을 대다가만 젊은 비평가가 있었다. 이것은 젊은 기질의 상대자라고 생각하는 파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세밀하게 고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표명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서적을 볼 때 상대자의 것을 보는 것은 동 파(派)의 것을 보는 안심과 유쾌와 유익한데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일개 전투자라면 나는 생각건대 현실과 상대자를 이해하는 편의상보다 당면의 상대자에 대한 해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옛것을 분명히 알고 새로운 것에 간도하고 과거를 요해하여 장래를 추단하는 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 발전은 희망이 있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와 같은 환경에 있는 작가들은 부단히 노력할 것이고 그래야만 참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라고.
이 간단한 몇 마디 말이 문호 노신의 창작에 대한 모럴인 것이다. 이 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 만한 시사인고! 이래서 현대중국문단의 아버지이며 비평가의 비평으로서 자타가 그 지위를 함께 긍정하던 그의 작가로서의 생애는 너무나 짧은 것이었으니 1926년 3월 「이혼」이란 작품을 최후로 남긴 그는 교수로서 작가로서의 화려한 생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왔다.
그는 지금부터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아나기가 더 바빴다.” 1926년 북양군벌을 배경으로한 안복파(安福派)의 수령 단기서(段祺瑞) 정부는 급진적인 좌파 교수와 우수한 지식분자 50여명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우리 노신은 이 50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1924년 국민당의 연아용공책(聯俄容共策)이 결정되어 그 다음해 가을 보로딘 등이 고문으로 광동에 오고 ‘전국민적 공동전선’이었던 국민혁명의 제1단계인 광동시기에는 프롤레타리아의 동맹자는 농민 도시빈민 소프로지식계급 국민적 부르조아였다.
그래서 급진 교수들은 교육부총장과 군벌정부를 육박하였으며 이러한 신흥세력에게 낭패와 공포를 느낀 군벌정부는 이러한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체포령을 내리고 학생들의 행렬은 정부 위병들의 발포로 인하여 남녀 수백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그때 노신은 북경 동교민항의 공사관구역의 외국인 병원이나 공장 안으로 돌아다니며 찬물로 기아를 참아가면서도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여 군벌정부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중에도 ‘국민 이래 최암흑일에 지(至)’하였다는 명문은 단기서로 하여금 의자에서 내려앉게 되었다.

 

붓으로 쓴 헛소리는 피로 쓴 사실을 간과하지 못한다 … 붓으로 쓴 것이 무슨 힘이 있으랴! 실탄을 쏘
는 것은 오직 청년의 피다.(<華蓋集續編>)

 

오늘날까지 중국문단의 막심 고리키이던 그는 지금부터는 문화의 전사로서 앙리 바르뷔스보다 비장한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의 말과 같이 최암흑한 50일이 지나고 그는 북경을 탈출했다. 하문대학(厦門大學)에 초청을 받아갔으나 대학기업가의 음흉수인 것을 안 그는 광동중산대학으로 갔다. 그러나 1926년 6월 15일 장개석의 쿠데타는 광동성만 노동자 농민 급진지식분자 3천여 명을 살해하였으며 한때는 “혁명 전사”라고 간판을 지은 노신도 상해로 달아나야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그에게 흥미보다는 최대의 경의를 갖게 되는 것은 다음의 일문이다.

 

나의 일종 망상은 깨어졌다. 나는 지금까지 때때로 낙관을 가졌었다. 청년을 압박하고 ―하는 것은
대개 노인이다. 이들 노물들이 다 죽어지면 중국은 보다 더 생기 있는 것이 되리라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러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청년을 ―하는 것은 대개는 청년인 듯하다. 또 달리 재조할 수 없는
생명과 청춘에 대해서 한층 더 아낌이 없이― (<而己集>)

 

이 글은 그가 침묵하고 있는 것을 ‘공포’ 때문이라고 조소한 사람에게 답한 통신문의 일절로서 이때까지 진화론자이던 그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양기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단계로 보인 것이라고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상해에 왔을 때는 국민당의 쿠데타로 혁명군에서 쫓겨온 젊은 프로문학자가 만났다. <혁명문학론>이 불려지고 실제 정치행동의 전선을 떠난 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 잡았다. 원기왕성하게 실제공작의 경험에서 매우 견실한 것도 있었으나 때로는 자부적인 영웅주의가 화를 끼치고—에 실패한 분만(憤懣)과 극좌적인 기회주의자들은 노신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프로문학이란 어떤 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해 아버지 같은 애무로서 플레하노프와 루나차르스키의 문학론과 소비에트의 문예정책을 번역 소개하여 중국 프로문학을 건설하고 있는 동안에 “노신을 타도치 않으면 중국에 프로문학은 생기지 못한다”는 문학소아병자들은 그 자신들이 먼저 넘어지고 이제 그마저 가고 말았다.
이 위대한 중국문학가의 영령 앞에 고요히 머리를 숙이면서 나의 개인적으로 곤란한 정형에 의하여 문호 노신의 윤곽을 뚜렷이 그리지 못함을 참괴(慙愧)히 여기며 붓을 놓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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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열투쟁 ‘부민관 폭파의거’ 72주년을 맞아 연구소는 광복회 화성시지회(지회장 안소헌)와 서울특별시의회(의장 양준욱)의 후원으로 7월 22일 서울시의회 본회의장에서 기념식을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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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식에 앞서 이준 열사 집터 등 북촌 일대에서 ‘친일의 길, 항일의 길’이라는 주제로 회원, 시민 등 약 3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답사를 진행했다. 이번 답사는 권시용 연구원이 안내를 맡아 이상재 집터, 여운형 집터, 김성수 옛집, 한용운 옛집, 진단학회 사무소 터, 손병희 집터, 이병도 집터, 한상룡 옛집, 윤보선 가옥, 정독도서관, 윤덕영, 윤택영 집터 등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서울시의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의거 7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함세웅 이사장과 안소헌 지회장, 임헌영 소장 등이 부민관 폭파의거의 의의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의거 70주년을 맞아 재현한 연극 ‘정의의 폭탄’을 녹화한 16분 분량의 요약 영상을 상영하여 참가자들은 부민관 폭파 의거와 의거의 주역인 유만수, 강윤국, 조문기 세 분 독립투사의 삶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역사의 현장인 경성 부민관은 1935년 건립되어 여러 차례 명칭과 용도가 바뀌었으며 1991년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현재까지 서울시의회로 사용되고 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서울시의회 양준욱 의장과 사무처의 지원으로 본 회의장을 기념식장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기념식 마지막 순서에서 영화 〈군함도〉 개봉을 맞아 배우 송중기 팬연합이 모금한 식민지역사박물관 기금(500만원) 전달식이 진행되어 그 의미를 더했다.

∷ 편집부

월, 2017/08/0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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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27]

주5일근무제가 정착된 요즘에는 거의 사용할 일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기성세대의 머릿속에 제법 남아 있는 언어습성의 하나로 ‘반공일(半空日)’이란 것이 있다. 이를테면 반만 쉬는 휴일, 즉 토요일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표현의 초기 용례가 궁금하여 관련 자료를 뒤져봤더니, <독립신문> 1898년 11월 29일에 공일과 반공일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눈에 띈다.

[통상회 일자 개정] 돌아간 일요일에 독립협회 회원들이 통상회를 하는데 공의하여 가로되 일요일은 7일 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공일인데 공일은 세계 각국에서 사람마다 쓰지 않고 의례히 쉬는 날이어늘 독립협회 통상회를 항상 공일에 하는 것이 대단히 불가하니 이 다음부터는 공일 전날 토요 반공일에 통상회를 하기로 영위 작정이 되었다더라.

이것 말고도 일요일을 가리켜 예배일(禮拜日)이라고 한 표현들도 곧잘 보인다. 1880년대 서양 각국과 맺은 수호통상조약 말미에 붙은 ‘통상장정(通商章程)’에 조선의 항구에 입항한 선박이 24시간 이내에 해관에 신고하는 규정과 관련하여 이때 “예배일과 정공일(停公日; 공무를 정지하는 휴일)은 계산에 넣지 않는다.”는 구절이 으레 포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일요일이 공휴일로 정착된 것은 언제부터의 일이었을까? 이에 관한 자료를 세밀하게 살펴보지는 못했으나, <관보> 1895년 윤5월 12일자에 수록된 각령(閣令) 제7호 ‘각 관청 집무시한’ 제4조에 “일요일은 전일(全日) 휴가를 작(作)하고 토요일은 정오(正午) 12시로부터 휴가를 작함”이라고 한 구절이 나온다. 아직은 태양력(太陽曆)이 정식 채택되기 이전의 시절이었지만 이 당시에도 이미 쉬는 날로서 일요일의 존재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던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각령 제7호 각 관청 집무시한에 포함된 내용으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관리들의 출퇴근시간이다. 조선시대에는 흔히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에 따라 ‘묘사유파법(卯仕酉罷法: 묘시[오전 5시~7시]에 출사하고 유시[오후 5시~7시]에 퇴청하는 방식)’이 통용되었다고 하는데, 이 원칙이 더 이상 지켜지지 않는 상황이 도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국 504년(1895년) 윤5월 10일 각령 제7호의 각 관청 집무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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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관보> 1895년 윤5월 12일자에 수록된 「각령 제7호 각 관청 집무시한」이다. 여기에는 일요일에 종일 휴가, 토요일에 반나절 휴가를 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

이것을 보면 계절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개 아침 9시 또는 10시에 출근하여 오후 3시 또는 4시에 퇴근하는 방식으로 점심시간을 빼면 하루 5시간 근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여름철 근무시간으로, 정오가 되면 퇴근하여 반나절만 일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직무에 지장이 없는 한 대개 여름휴가를 즐겼던 것으로 나타난다.
대한제국 시절의 관리들은 개국 504년 각령 제7호의 적용을 받았으나 1908년 7월의 각령 제6호로 개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때에도 몇 가지 세부사항이 바뀌었을 뿐 7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의 하절기에 오후 1시에 퇴근하는 근무방식은 변함없이 지켜졌다.
이왕 말이 난 김에, 일제 통감부에 속한 관리들의 근무형태도 함께 살펴보았더니 1906년 7월 14일에 제정된 통감부령 제22호 ‘통감부 및 소속관서의 집무시간’이란 자료가 눈에 띈다. 이것을 보면 6월초에서 9월말까지 집무시간은 오전 8시부터 정오 12시까지이고, 나머지 기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단, 토요일은 오후 1시까지) 근무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규정은 1907년 10월 27일의 통감부령 제40호로 개정되었는데, 계절별로 근무시간의 재조정과 더불어 여름철 반나절 근무기간이 7월 1일에서 9월 20일까지로 축소되었을 뿐 대체적인 윤곽은 종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조선총독부와 소속관서의 집무시간에 관한 규정은 새로 제정되었는데 1910년 12월 12일의 총독부령 제59호에 그 내용이 담겨 있다. 이때 하절기를 제외한 나머지 시기에는 평일 퇴근시간이 오후 4시로 일괄 단축 조정되었고, 그 이후 1911년 12월과 1912년 3월에 걸쳐 관련 규정이 잇달아 부분 개정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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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관보> 1910년 12월 12일에 수록된 ‘총독부령 제59호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집무시간’. 평일은 대개 오후 4시에 퇴근하고, 하절기에는 정오까지만 근무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요컨대 일제강점기의 총독부 관리들은 통상 오후 4시에 퇴근하며 여름철에는 반나절만 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근무형태였다. 예를 들어 1915년 12월에 경복궁 안에 개설된 총독부박물관(總督府博物館)의 경우 열람마감시간은 오후 4시로 정해졌는데, 이는 총독부령에서 정한 총독부 및 소속관서의 집무시간에 그대로 맞춘 탓이라고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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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11월 19일에 수록된 「총독부고시 제296호 조선총독부박물관 설치」 관련 규정. 이것을 보면 관람마감시간이 총독부와 소속관서 집무시간에 맞춰 오후 4시로 정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 와중에 1922년 7월에는 총독부와 소속관서의 집무시간에 관한 총독부령이 전면 개정됨에 따라 여름철 및 토요일 반나절 근무제가 폐지되고 그 대신에 1년 통산 20일 이내 휴가를 부여하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하지만 곧이어 1924년 6월 28일에 총독부령 제37호가 고시되어 토요일과 하절기(7.21~8.31. 사이)에 정오 12시까지 근무하는 형태가 부활되었으며, 이 시기에 20일 이내의 여름휴가도 함께 주어졌다.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의 집무시간 개정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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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정비된 집무시간에 관한 내용은 적어도 규정상으로는 일제 패망에 이르는 시기까지 유효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규정이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였는데, 문제는 역시 전쟁이었다. 만주사변에 이어 중일전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이 확산되자 전시동원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발맞춰 근무시간 변경의 조짐은 <매일신보>1938년7월10일자에수록된 「하기 반휴제 폐지(夏期 半休制 廢止)」 제하의 기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사변 발발 이후로 작년 여름에는 조선 안의 각 관청에서 반나절씩 휴식하던 것을 시국관계 사무방면에 종무하는 인원만은 폐지되고 평상시와 같이 사무를 보았는데 사변 1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장기전을 각오하고 있는 총독부에서는 사변 관계 사무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사무가 분망하므로 금년 여름에는 반휴(半休)를 총독부 부령으로써 전폐할 방침을 결정하고 오는 21일부터 실시할 터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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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으로 인해 총독부 소관 관청이 일제히 여름철 반휴(半休)를 폐지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리는 <매일신보> 1937년 7월 18일자 보도내용

여기에서 보듯이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총독부 소속관원들은 더 이상 여름철 반나절 근무제라는 호사를 누리지 못하였다. 이때 하절기 반휴제의 철폐는 총독부령의 개정으로 명문화하지는 않았고, 다만 정무총감이 해마다 관통첩(官通牒)을 내리는 형태를 취하였다. 이러한 시국 변화에 맞물려 1937년 12월에는 겨울철 출근시간을 종전의 오전 10시에서 9시로 한 시간 당기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으로 다시 한 번 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게 되자 1942년 11월 1일 총독부령제275호 ‘전시중(戰時中)의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의 집무시간에 관한 건’이 제정되어 평일 퇴근 시간이 오후 4시에서 5시로 늦춰졌고, 토요일의 경우에도 정오 12시에서 오후 1시로 조정되었다. 이듬해인 1943년 7월에는 하절기 반휴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두 달 후인 9월에는 토요일 반나절 근무제도가 사라졌다. 일제의 패망이 완연해진 1944년으로 접어들어 총독부 관리들은 전시중 하절기 20일 휴가제의 철폐를 맞이한 데 이어 일요일에도 출근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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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관보> 1942년 7월 18일자에 수록된 정무총감 발신 관통첩(官通牒) 내용. 여기에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여름철 집무시간은 단축 없이 평상시처럼 실시한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해방 이후 시기에는 1949년 6월 4일에 제정된 ‘대통령령 제125호 공무원 집무시간 규칙’에 따라 ‘오전 9시 출근, 오후 5시 퇴근’의 대원칙이 확립되었고, 그 이후 여러 차례 규정 개정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이러한 근무형태가 정착된 것으로 나타난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일제의 침략전쟁이 없었더라면, 나아가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 자체가 애당초 없었더라면 이 땅의 관공서 관리들은 적어도 출퇴근시간에 관한 한 “오후 4시 퇴근에, 여름철 반나절 근무”와 같은 태평성대를 여전히 누리고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월, 2017/08/07-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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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29

이순우 책임연구원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906년 이후 한국통감으로 재임하면서 유달리 ‘동양평화’니 ‘우호선린’이니 하는 말들을 입버릇처럼 앞세웠던 인물이었다. 그러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관한 사진자료에는 갓을 쓴 한복 차림새로 영락없는 한국 사람의 행색을 한 모습도 남아 있다.
그가 과연 무슨 까닭에 이런 사진을 남겼는지가 궁금하여 무슨 단서가 될 만한 자료가 있나 뒤져보았더니, ????매일신보???? 1915년 1월 1일자에 「일본복의 조선부인과 조선복의 일본부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사진 화보 한 장이 눈에 띈다. 여기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인들은 한복 차림의 이토 사진에 나오는 그들과 완전히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이들의 면면과 옷차림에 비추어 보아 두 장의 사진은 모두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서 촬영한 것이라는 사실이 저절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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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12월에 촬영한 한복 차림의 이토 히로부미와 특파대사 이지용 일행의 모습. <일본역사사진첩> 1912년 10월 발행.(왼쪽) / <매일신보> 1915년 1월 1일자에 소개된 한복 입은 이토 통감 부인의 사진자료. 왼쪽부터 차례대로 박의병의 처 유주경, 이토의 딸 노리코, 이토의 부인 우메코, 이지용의 처 홍옥경이다.(오른쪽)

 

조선옷을 입고 뒤로 오른편에 선 부인은 공작 이토 히로부미 씨의 미망인 우메코(梅子)요, 왼편은 이토 공작의 딸 스에마츠(末松) 자작의 부인 노리코(德子)요, 앞으로 일본옷을 입고 오른편에 앉은 부인은 이지용 씨 부인 이옥경(李鈺卿: 홍옥경-필자)이요, 왼편은 박의병 씨 부인 박주경(朴洲卿)이라. 이 사진은 지난 명치 39년(1906년) 11월 이지용 씨가 특파대사로 동경 갔을 때에 이토, 스에마츠 두 부인에게 조선의복을 선사한 답례로 두 부인이 이, 박 두 부인에게 일본의복을 선사한 기념사진.

 

그러니까 이 사진들은 1906년 12월에 대한제국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1870~1928)이 특파대사로 일본 동경에 갔을 때에 이토 히로부미 내외에게 한복을 지어 선물로 건네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촬영한 것이었다. 아울러 등장인물의 면면은 왼쪽부터 특파대사의 수행원이던 한성판윤(漢城判尹) 박의병(朴義秉, 1853~1929) 내외이고, 가운데가 이토 통감 내외, 오른쪽이 특파대사 이지용 내외, 그리고 앞쪽 맨 오른쪽이 이토의 딸이다.
<서우(西友)> 제2호(1907년 1월)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당시 이지용 특파대사의 수행원에는 내부 회계국장 김관현(金寬鉉), 시종원 부경 송태관(宋台觀), 경무고문부 통역관 와타나베 타카지로(渡邊鷹次郞)의 부인, 특파대사 부인의 어학교사 요코야마(橫山)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연유에 대해서는 ????대한매일신보???? 1906년 11월 30일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특사목적(特使目的)] 특파대사 이지용 씨가 금번에 수개(數箇) 목적을 달하기 위하여 특사를 도득(圖得)하였는데 기(其) 내용을 득문(得聞)한즉 이토통감 원류(伊藤統監願留)할 사(事)와 망명객 특사(亡命客 特赦)치 아니할 사(事)이라 하나 노고(勞苦)만 도비(徒費)하고 목적은 달(達)키 난(難)하리라고 항설(巷說)이 분분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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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 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 <경성부사> 제2권, 1936

 

이를테면 이토 통감을 계속 통감의 자리에 남아 있도록 청원하는 일을 수행하는 동시에 이준용과 박영효 등 망명객의 특사에 관한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특파대사가 일본으로 건너간 목적이었다. 당시 특파대사로 선정된 이지용은 이미 1904년에도 이토의 방한에 따른 보빙대사(報聘大使)의 임무를 한 차례 수행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원래 유학(幼學) 이희하(李熙夏)의 아들로 용구(龍駒)라는 이름을 지닌 신분에 지나지 않았으나 1881년에 흥선대원군의 형 되는 흥인군 이최응(興仁君 李最應)의 손자로 출계하여 고종황제의 5촌지간인 근친황족으로 변신하는 인물이었다.
흥인군의 후사가 된 직후에는 이은용(李垠鎔)이라 했다가 1900년 9월 영친왕(英親王)이 이은(李垠)이라는이름을 갖게 되자 이 글자를 피해 이지용(李址鎔)으로 다시 개명하였다.
그는 황족이기에 앞서 그 누구보다도 친일매국의 행렬에 앞장섰던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서둘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에 서명한 당사자가 바로 외부대신 임시서리였던 그였다. 이 협약을 통해 일본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용지를 마음껏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으며, 이것은 그대로 대한제국에 대한 국권침탈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05년 35세의 나이로 내부대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에도 적극 찬동했던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친일과 매국에 앞장 선 공로와 황족이라는 신분에 힘입어, 그는 경술국치 이후 일제로부터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는 한편 조선귀족령에 따라 ‘백작(伯爵)’이라는 비교적 높은 작위를 부여받았다.
그런데 이지용의 친일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유명한 노름꾼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 21일자를 비롯한 여러 신문기사에는 그가 용산 강정(龍山江亭)에 박의병과 김승규 등을 불러 화투판을 크게 벌였다는 소식이 기재되어 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화투판 동료 ‘박의병’은 다름 아닌 1906년에 이지용이 특파대사로 일본에 갔을 때 그를 수행했던 박의병과 동일인이다.
그는 1905년 이후 한성부윤을 지내면서 용산 일대의 군용지 수용에 깊이 관여하였고, 1907년 9월에는 임시군용 및 철도용지조사국장을 맡아 일본해군이 진해만 일대를 장악하여 해군기지를 조성하는 일에 앞장 선 인물이기도 했다.
한편, 1910년 6월 무렵의 신문기사에는 이지용이 화투판을 급습한 일본헌병을 피해 도주하다가 얼굴을 다쳤다거나 그들에게 “다시는 잡기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사죄까지 하며 망신을 당한 일이 잇달아 수록되어 있다. 나라의 운명이 오늘 내일 하는 상황에서도 그가 얼마나 화투노름에 미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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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용 백작을 비롯한 다수의 친일인사들이 어울려 ‘지여땅이(짓고땡)’를 하다가 발각되어 도박범 및 도박장개장죄로 처벌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매일신보> 1912년 2월 1일자 보도내용.

 

하지만 그의 고질적인 도박병은 쉽사리 고쳐지질 않았고 이내 화투판을 다시 전전하다가 1912년 정초에는 다른 친일 권세가들과 어울려 ‘짓고땡’ 판을 벌이다 발각되어 큰 사단이 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이 일로 공판에 회부되어 태(笞, 매질) 100대의 판결을 받았고, 동시에 ‘백작(伯爵)’의 예우는 1912년 4월 9일부로 정지 상태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1915년 9월에 가서야 겨우 복작되는 처분을 받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물론 그 사이에 친일의 대가로 치부한 재산은 대부분 탕진하고 말았는데, <동아일보> 1920년 6월 18일자에 수록된 「오호(嗚呼)! 이백(李伯)의 말로(末路)! 당년영화금안재(當年榮華今安在)」 제하의 기사는 패가망신하다시피 한 그의 몰골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가산이 탕패되고 생계가 곤궁함으로써 능히 백작이라 하는 영위를 보존키 어려울 뿐 아니라 도저히 귀족의 체면을 유지키가 어렵겠다 하는 이유로 백작 이지용 씨가 작을 내어 놓겠다는 신청을 총독부에 제출하였다는 소문이 매우 낭자하여 뜻밖에 이지용 씨는 세상을 주목을 받게 되고 말았다. …… 나날이 쇠잔하여 가기만 하는 가세는 마침내 불과 육십 원씩의 사글세조차 내기에 눈살을 찌푸릴 곤경에 떨어진 형편이라, 그런 고로 비록 허설일망정 작을 사양하기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나는 것도 실상은 괴이치 않은 일이라 하겠더라.

 

친일귀족 이지용에 관한 얘기를 하노라니 그의 처 홍옥경(洪鈺卿, 1870~?)과 관련한 기록도 빼놓을 수 없다. 황현(黃玹)이 남긴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이지용의 처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이지용이 특파대사가 되어 일본으로 갔다. 이토 히로부미를 통감에 머물러 있기를 청원하는 일과 망명을 한 이준용과 박영효의 일을 다루기 위함이었다. 이지용의 처 홍씨(洪氏)도 자칭 이홍경(李洪卿)으로 이에 동행하였다. 우리나라의 부녀는 원래 이름을 쓰지 않고 단지 모씨(某氏)라고 지칭할 뿐이지만 이때에 이르러 왜속(倭俗)을 본떠 저마다 제 이름을 써서 사회에 머리를 내밀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홍경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홍경은 일본관리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와 정을 통하고, 또 코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와 통하고, 후에도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와도 통하였으니, 하기와라가 질투하였으나 아직 드러내지 않았다. 일본 풍속에 남녀가 서로 보면 반드시 악수하고 입을 맞추는 것으로 친밀함을 표시하였다.
하기와라가 돌아가려할 때 홍경이 이를 전송하며 입을 맞추고 혀를 내밀어 그의 입에 들이미니 하기와라가 그 혀를 깨물어 버렸다. 홍경은 아픔을 참고 돌아왔는데 장안의 사람들이 작설가(嚼舌歌)를 지어 이를 비웃었다. 홍경은 일본어와 영어에 통하고 양장을 하고서 이지용과 더불어 손을 잡고 다녔다. 간혹 인력거를 타거나 얼굴을 드러내고 담배를 피며 양양하게 달리니 행인들의 눈을 가렸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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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3월 이토특파대사의 방한 때 숙소인 손탁호텔 앞에서 이토의 수행원들과 주한일본공사관 관원들이 함께 기념촬영을 한 사진자료. 동그라미 표시를 한 인물이 바로 이지용의 처 홍옥경과 염문을 뿌렸다고 알려진 일본공사관 일등서기관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 <일로전쟁 사진화보> 제2권, 1904년 5월 8일 발행.

 

여기에는 이지용의 처 이름을 ‘이홍경’으로 적고 있으나 이는 ‘홍옥경’ 또는 ‘이옥경’의 잘못으로 보인다. <황성신문> 1906년 11월 27일자에 “특파대사 이지용의 부인의 본래 이름이 ‘홍경현(洪敬賢)’이나 금번에 일본으로 건너가는 차에 ‘이홍경’으로 개명하였다”고 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탓에 벌어진 착오인 듯하다. 정확하게는 ‘홍옥경’이 맞으며, ‘이옥경’이라고 한 것 역시 일본인들의 풍속에 맞춰 남편의 성을 따른 표기방식이라고 보면 된다.
아무튼 홍옥경은 일찍이 대한부인회 회장 또는 여자교육회 총재의 직함을 갖고 일본세력이 주도하던 경성사교계를 종횡무진하였으며, 일본애국부인회 평의원과 동양부인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한국병합 직후에는 작위수여에 대한 사은(謝恩)을 위해 조직된 귀족관광단(貴族觀光團)에 합류하여 일본 동경에서 황후를 배알하고 돌아온 일도 있었다.
그 후로는 남편 이지용의 도박 취향으로 인해 가세가 빈약해진 탓인지 약속어음부도나 토지사기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얘기가 드문드문 전해졌을 뿐 이렇다 할 활동상이 알려진 바는 없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시기에 이르러 친일여성인사들로 조직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의 간사 및 헌금자 명단에 다시 홍옥경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걸로 보면, 그의 태생적인 친일본능이 얼마나 오래 세월 지속되었는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월, 2017/10/2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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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현 연구위원

지난 9월 21일 대법원은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장관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이로써 올해 5월 12일에 나온 서울고등법원의 판결(민족사랑 5월호 참조)이 확정되어 전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를 둘러싼 친일논쟁은 사법적인 차원에서 일단락되었다.
방응모의 친일행적은 해방후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1948.9.22. 공포, 법률 제3호)에 따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다루지지 못하다가 50여 년이 흐른 뒤인 2004년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하 반민규명법)이 제정되고 이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에 의해 2009년 6월 29일 방응모의 행위들이 친일반민족행위인 것으로 결정되었다. 구체적으로 반민규명위는 그동안 밝혀진 그의 행위들이 반민규명법 제2조의 13, 14, 17호에 해당된다고 했다.


13.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
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4.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돕기 위하여 군수품 제조업체를 운영하거나 대통령이 정하는 규모 이
상의 금품을 헌납한 행위
17.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
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방응모는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랐다. 이 사전의 발간에 대해 조선일보가 11월 9일 오피니언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갉아먹는” 것이라고 하는 가운데 2010년 1월 방응모의 양자인 방우영, 방우영이 죽자 그의 아들 방상훈이 원고로 또한 이들의 회사인 조선일보사가 원고 보조 참가인으로 위원회의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서울행정법원에 냈다. 서울행정법원의 1심판결에 비춰보면 조선일보사의 일제시기 행위가 어느 국가기관에 의해서도 문제되지 않았는데도 조선일보사가 원고측에 선 이유를 약간 짐작할 수 있다. 판결에 따르면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2005.12.29. 제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선정할 때 반민규명위
의 결정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고 이에 따라 “재산권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구사주의 행적과 재산상속, 언론사라는 상속된 회사의 성격과 활동, 뉴라이트, 건국절, 국정교과서 파동, 이른바 ‘역사전쟁’, ‘역사적폐’ 등 많은 것들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반민규명위는 2005년 5월 31일 발족하여 2009년 11월 30일 활동을 종료하였기 때문에 위원회의 결정과 관련된 헌법소원이나 행정소송의 수행 등은 행정자치부 산하의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이 맡게 되어 방응모결정 취소소송의 피고 역할을 하였다. 방응모의 상속자들과 조선일보사의 소송은 그 후 2010년 12년 22일 서울행정법원의 1심 판결,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의 항소심 판결, 2016년 11월 9일 대법원의 상고심 판결, 다시 2017년 5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의 항소심 판결과 이번의 대
법원 판결까지 6년여의 재판과정을 거쳐 5개의 판결문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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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관이 내무대신에게 전투기 제작 군수회사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주식인수에 관한 승인을 요청하면서 이 회사 유일의 조선인 감사인 방응모를 ‘경성유력자’로 표시하였다.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주식인수의 건을 승인함」(일본내무대신, 1944.10.6.) 출처: 아시아역사자료센터

 

반민규명법 제2조가 열거하는 친일행위결정과 관련하여 결국 13호에 관한 위원회의 결정만이 적법한 것으로 판결되었다. 17호 관련은 2012년의 단계에서 절차적인 이유로 위법하게 되었고, 14호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투어졌지만 역시 위법한 것으로 이번 판결로 확정되었다. 법원이 인정한 구체적인 방응모의 친일행위는 잡지 ????조광????의 발행, 여기에 논설 투고한 것, 임전대책협력회와 조선임전보국단의 간부로서의 활동에 국한되었다. 조선항공공업의 주주와 감사로 활동한 것(14호 해당)이나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직과 선전부 위원이었던 사실(17호 해당)은 반민규명법의 문구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형식적 논리로 친일이 아니라고 한 셈이다. 결국 위원회와 달리 법원이 볼 때는 방응모의 과거 행적은 일부만이 친일에 해당하는 것으로 범위가 대폭 축소되게 되었다. 어렵게 친일반민족행위규명에 관한 입법이 이루어지고 국가기구인 반민규명위가 활동했지만 사법부에 의하여 그 의미와 효과는 반감된 것이다. 이번 대법원의 기각 판결에서는 ‘심리불속행’이라고 하여 상고심 자체를 열어주지 않았다. 아쉬움을 떠
나서 친일반민족행위 규명이라는 역사적 책무를 일부 대법관들과 판사들이 배반하고 방응모에게 부분적으로 면죄부를 발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서 분노의 마음까지 든다.
이제 이해승의 친일재산에 대한 사건을 제외하고 방응모 재판이 종료됨에 따라 반민규명위와 관련된 소송들도 끝나고 친일반민족행위 문제에 대한 성찰과 실천은 다시 시민사회로 넘겨지게 되었다. 친일문제에 대한 입법, 위원회의 활동, 사법 판결에 이르는 국가의 관여가 한 바퀴 돈 지금, 시민사회측에서 식민지배와 부역협력자들이 남긴 역사적 과제들을 다시금 점검해볼 때이다.

목, 2017/10/19-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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