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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 추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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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 추도문

admin | 수, 2021/07/28- 01:29

[자료소개]

노신 추도문

이육사

 

이 글은 1936년 10월 23일부터 29일까지 5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발표된 이육사의 노신 추도문이다. ― 편집자주

 

노신(魯迅)의 본명은 주수인(周樹人)이며 자는 예재(豫才)다. 1881년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탄생.
남경에서 광산학교에 입학하여 양학에 흥미를 가지고 자연과학에 몰두하였으며, 그 후 동경에 건너가
서 홍문학원을 마치고 선대 의학전문학교와 동경 독일협회학교에서 배운 일이 있다. 1917년에 귀국하
여 절강성 내의 사범학교와 소흥중학교 등에서 이화학 교사로 있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오사문학운동 후 중국문학사조가 최고조에 달하였을 시대에 북경에서 주작인(周作人) 경제
지(耿濟之) 심안영(沈雁永)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고 곽채약(郭採若) 등의 로맨티시즘 문학
에 대하여 자연주의 문학운동에 종사하고 잡지 <어사(語絲)>를 주재하는 한편, 북경정부 교육부 문서
과장 및 국립북경대학 국립북경사범대학 북경여자사범대학 등의 강사로 있었으나 학생운동에 관계되
어 북경을 탈출하였다.
1926년 하문대학 교수로서 재직하다가 남하, 그 후 광주중산대학 문과 주임교수에 있다가 1928년 사직하고 상해에서 저작에 종사하는 한편 1930년 <맹아월간(萌芽月刊)>이란 잡지를 주재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문학태도는 점점 좌익으로 전향하여 1930년 ‘중국좌익작가연맹’이 결성되자 여기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국민정부의 탄압을 받아서 1931년 상해에서 체포되었다. 그 뒤 끊임없는 국민정부의 간섭과 남의사(藍衣社)의 박해에서 꾸준히 문학적 활동을 하고 국민정부의 어용단체인 ‘중국작가협회’를 반
대하던 중 지난 10월 19일 오전 5시 25분 상해시 고탑 자택에서 서거하였다. 향년 56세.
주요 작품은 <아큐정전(阿Q正傳)> <납함(吶喊)> <방황(彷徨)> <화개집(華蓋集)> <중국소설사략(
中國小說史略)> <약(藥)> <공을기(孔乙己)>등이다. ― 조선일보 편집자주

 

1932년 6월초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식당에서 나온 나와 M은 네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조간신문을 사서 들고 근육신경이 떨리도록 굵은 활자를 한숨에 내려 읽은 것은 당시 중국과학원 부주석이요 민국혁명의 원로이던 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을 당하였다는 기사이었다.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하게 늘어선 프랑스공무국 순경들의 예리한 눈초리를 등으로 하나 가득 느끼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까지 올 동안은 침점이 계속되었다. 문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 R씨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노신 임종

 

중국 좌익작가연맹의 발안에 의하여 전세계에 진보적인 학자와 작가들이 상해에 모여서 중국 문화를 옹호할 대회를 그해 8월에 갖게 된다는 것과 이에 불안을 느끼는 국민당 통치자들이 먼저 진보적 작가진영의 중요분자인 반재년(潘梓年. 현재 남경유폐)과 이제는 고인이 된 여류작가 정령(丁玲)을 체포하여 행방불명케 한 것이며 여기 동정을 가지는 송경령(宋慶齡) 여사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자유주의자들과 작가연맹이 맹렬한 구명운동을 한 사실이며 그것이 국민당 통치자들의 눈에 거슬려서 양행불이 희생된 것과 그 외에도 송경령 채원배(蔡元培) 노신 등등 상해 안에서만 30명에 가까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의사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 3일이 지난 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자는 만국빈의사 앞에 닿았다. 간단한 소향(燒香)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 때 젊은 두 여자 수행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마기에 검은 마고자를 입은 중년 늙은이, 생화에 쌓인 관을 붙들고 통곡하던 그가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라고 말하고 난 10분쯤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 앞이며 처소가 처소인 만치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아줄 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었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시 고탑 9호에서 영서(永逝)하였다는 부보(訃報)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니 어찌 조선의 한 사람 후배로써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

 

중국 문학사상에 남긴 그의 위치

“「아큐정전(阿Q正傳)」을 다 읽고 났을 때 나는 아직까지 아큐의 운명이 걱정되어 못 견디겠다”고 한 로망 롤랑의 말과 같이 현대중국문학의 아버지인 노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아큐정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의 아큐들은 벌써 로망 롤랑으로 하여금 그 운명을 걱정할 필요는 없이 되었다. 실로 수많은 아큐들은 벌써 자신들의 운명을 열어 갈 길을 노신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노동층들은 남경로의 아스팔트가 자신들의 발밑에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시고탑 노신촌의 9호로 그들이 가졌던 위대한 문호의 최후를 애도하는 마음들은 황포탄(黃浦灘)의 붉은 파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큐시대를 고찰하여 보는데 따라서 노신 정신의 3단적 변천과 아울러 현대중국문학의 발전과정을 알아보는 것도 그를 추억하는 의미에서 그다지 허무한 일은 아닐 것이다.

 

노신 서거 기사, 매일신보 1936.10.20

 

중국에는 고래로 소설이라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완전한 예술적 형태는 존재하지 못했다. 삼국연의나 수호지가 아니면 홍루몽쯤이 있었고 다소의 전기가 있었을 뿐으로서 일반 교양있는 집 자제들은 과거제도에 화(禍)를 받아 문어체의 고문만 숭상하고 백화소설 같은 것은 속인의 할일이라 하여 쓰지 않는 한편 소위 문단은 당송 팔가와 팔고의 혼합체인 상성파와 사기당과 원수원의 유파를 따라가는 사륙병체문과 황산곡을 본존으로 하는 강서파 등등이 당시 정통파의 문학으로서 과장과 허위와 아유(阿諛)로서 고전문학을 모방한데 지나지 못하였으며 새로운 사회를 창생할 하등의 힘도 가지지 못한 것은 미루어 알기도 어렵지 않은 분위기 속에 중국문학사상에 찬연한 봉화가 일어난 것은 1915년 잡지 <신청년>의 창간이 그것이다.
이것이 처음 발간되자 당시 아메리카에 있던 호적(胡適) 박사는 「문학개량 추의(芻議)」를 1917년 신년호에 게재하였고 진독수(陳獨秀)가 이에 찬의를 표하고 「문학혁명론」을 발표하였으며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교수들이 합류하게 되자 종래의 고문가들은 이 운동을 방해코자 가진 야비한 정치적 수단을 써보았으나 1918년 4월호에 노신의 「광인일기(狂人日記)」란 백화소설이 발표되었을 때는 문학혁명운동은 실천의 거대 보무를 옮기게 되고 벌써 고문가들은 추악한 꼬리를 감추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후 얼마 뒤에 노신이 광동에 갔을 때 어떤 흥분한 청년은 그를 맞이하는 문장 속에 「광인일기」를 처
음 읽었을 때 문학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차차 읽어내려 가면서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
그래서 동무를 만나기만 하면 곧 붙들고 말하기를 ― 중국 문학은 이제 바야흐로 한 시대를 짓고있다. 그대는 「광인일기」를 읽어 보았는가, 또 거리를 걸어가면 길 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내 의견을 발표하리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魯迅在廣東) 이 문제의 소설 「광인일기」의 내용은 한 망상광(妄想狂)의 일기체 소설로서 이 주인공은 실로 대담하게 또 명확하게 봉건적인 중국 구사회의 악폐를 통매한다. 자기의 이웃사람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자기 가정을 격렬히 공격하는 것이다. 가정―가족제도라는 것이 중국봉건사회의 사회적 단위로서 일반에 얼마나 해독을 끼쳐왔는가. 봉건적 가족제도는 고형화한 유교류의 종법(宗法) 사회관념 하에 당연히 붕괴되어야 할 것이면서 붕괴되지 못하고 근대사회의 성장
에 가장 근본적인 장애로 되어있는 낡은 도덕과 인습을 여지없이 통매했다. 이에 「광인일기」 중에 한 절을 초하면

 

나는 역사를 뒤적거려 보았다. 역사란 건 어느 시대에나 인의도덕이란 몇 줄로 치덕치덕 씌어져 있었
다. 나는 밤잠도 안 자고 뒹굴뒹굴 굴러가며 생각하여 보았으나 겨우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사람을
먹는다”는 몇 자가 씌어 있었을 뿐이었다.

 

이같이 추악한 사회면을 폭로한 다음, 오는 시대의 건설은 젊은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이 소설의 일편은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로서 끝맺는다. 실로 이 한 말은 당시의 어린이인 중국청년들에게는 사상적으로는 폭탄선언 이상으로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작품이 백화로 쓰여지는 데 따라 문학혁명이 완전히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된 공적도 태반은 노신에 돌려야 하는 것이다.
「광인일기」의 다음 연속해 나온 작품으로 「공을기(孔乙己)」 「약(藥)」 「내일」 「하나의 작은사건(一個小事件)」 「머리카락 이야기(頭髮的故事)」 「풍파」 「고향」 등은 모두 <신청년>을 통해서 세상에 물의를 일으켰으나 그 후 1921년 <북경신보> 문학부간에 그 유명한 「아큐정전」이 연재 되면서부터는 노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문단 제1인적 작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작은 모두 신해혁명 전후의 봉건사회의 생활을 그린 것으로 어떻게 필연적으로 붕괴하지 않으면 안 될 특징을 가졌는가를 묘사하고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살아갈까를 암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혁명과 혁명적인 사조가 민중 심리에 생활 디테일에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가장 리얼하게 묘사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농민작가라고 할만큼 농민생활을 그리는데 교묘하다는 것도 한 가지 조건이 되겠지만 그의 소설에는 주장이 개념에 흐른다거나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은 그의 작가적 수완이 탁월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늘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과 때로는 인텔리일지라도 예를 들면 「공을기」의 공을기나 「아큐정전」의 아큐가 모두 일맥상통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이니 공을기는 구시대의 지식인으로 시대에 떨어져서 무슨 일에도 쓰이지 못하고 기품만은 높았으나 생활력은 없고 걸인이 되어 선술집 술상대에 일금 19조의 주채가 어느 때까지 쓰여져 있는대로 언제인지 행방불명된 채로 나중에 죽어졌던 것이라던지 룸펜 농민인 아큐가 또한 쑥스러운 녀석으로 혁명 혁명을 떠들어놓고는 그것이 몹시 유쾌해서 반취(半醉)한 기분이 폭동대의 일군에 참가는 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허풍만 치고 아무것도 못하다가 때마침 일어난 폭도의 약탈사건에 도당으로 오해되어(그의 평소 삼가지 못한 언동에 의하여) 피살되는 아큐의 성격은 그때 중국의 누구라도 전부 혹은 일부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큐나 공을기가 모두 사고와 행동이 루즈하고 확호한 한 개의 정신도 없으며 유약하면서도 몹시 건방지고 남에게 한대 쥐어박히면 아무런 반항도 못하면서 남이 자신을 연민하면 제 도량이 커서 남이 못 덤비는 것이라고 제대로 도취하여 남을 되는대로 해치는 무지하고 우수면서도 가엷고 괴팍스러운 것을 노신은 그 리얼리스틱한 문장으로 폭로한 것이 특징이었으니 당시 「아큐정전」이 발표될 때 평소 노신과 교분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모델로 고의로 쓴 것이라고들 떠드는 자가 있은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중국은 시대적으로 아큐시대이었으며 노신의 「아큐정전」이 발표될 때는 비평계를 비롯하여 일반 지식군들은 아큐상(相)이라거나 아큐시대라는 말을 평상 대화에 사용하기를 항상 다반으로 하게 된 것은 중국문학사상에 남겨놓은 노신의 위치를 짐작하기에 좋은 한 개의 재료이거니와 그의 작가로서의 태도를 통하여 일관하여 있는 노신정신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는데 적지 않은 흥미를 갖게 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조선문단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예술과 정치의 혼동이니 분립이니 하여 문제가 어찌 보면 결말이 난 듯도 하고 어찌 보면 미해결 그대로 있는 듯도 한 현상인데 노신같이 자기 신념이 굳은 사람은 이 예술과 정치란 것을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이 문제는 그의 작가로서의 출발점부터 구명해야 한다.
노신은 본래 의사가 되려고 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할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의 자기의 ‘할일’이란 것은 민족개량이라는 신념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훗날 <납함(呐喊: 외침)> 서문에 다음 같이 썼다.

 

나의 학적은 일본 어느 지방의 의학전문학교에 두었다. 나의 꿈은 이것으로 매우 아름답고 만족했다.
졸업만 하고 고국에 돌아오면 아버지와 같이 치료 못하는 병자를 살리고 전쟁이 나면 출정도 하려니
와 국인의 유신에 대한 신앙에까지 나아갈 것

이것은 물론 소년다운 노신의 로맨틱한 인도주의적 흥분이었겠지만 이 꿈도 결국은 깨어지고 말았다.

의학은 결코 긴요하지 않다. 우약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또 아무리 강장해도 무의미
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꾼이 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중략) 그럼으로 긴요한 것은 그들을
정신적으로 잘 개조할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때 당연 문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예운동을 제창
하기로 했다 (<呐喊>서문)

 

이리하여 그가 당시 동경에 망명해 있는 중국사람들의 기관지인 <절강조(浙江潮)> <하남(河南)> 등에 쓰던 과학사나 진화론의 해설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을 번역한 것은 그리스의 독립운동을 원조한 바이런과 폴란드의 복수시인 아담 미케비치, 헝가리의 애국시인 베트피 산더, 필리핀의 문인으로 스페인 정부에 사형받은 리샬 등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노신의 문학행정에 있어서 가장 초기에 속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번역까지라도 그의 일정한 목적 즉 정치적 목적 밑에 수행된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위에 말한 「광인일기」의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도 순수한 청년들에 의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그의 이상을 단적으로 고백한 것으로써 이 말은 당시 일반 청년들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깨닫게 한 것은 물론 지난 수천 년 동안의 봉건사회로부터 청년을 해방하라는 슬로건으로 널리 쓰였고 사실 그 뒤의 중국청년학생들은 모든 대중적 사회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발 과감한 지도와 조직을 하였으며 그 유명한 오사운동이나 오주운동이나 국민혁명까지도 늘 최전선에 서서 대중을 지도한 것은 이들 청년학생이었다.
그러므로 노신에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 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도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인 작품을 산출하는 데만 문호 노신의 지위는 높아갔고 아큐도 여기서 비로소 탄생하였으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좋은 예가 있다. 1928년경 무한으로부터 쫓겨 와서 상해에서 태양사를 조직한 청년비평가 전행촌(錢杏邨)이 때마침 프로문학론이 드셀 때인 만큼 노신을 대담하게 공격을 시작해 보았다. 그 소론에 의하면 노신의 작품은 비계급적이다, 아큐에게 어디 계급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당한 말이다. 노신의 작품에서 우리는 눈 닦고 보아도 프롤레타리아적 특성은 조금도 볼 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사람의 작품을 비평할 때는 그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니 노신이 작가로 활동하고 있을 때는 중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정의를 내릴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는 없을 뿐 아니라 그때쯤은 부르조아 민주주의적인 정치사조조차도 아직 경계선이 분명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부르조아 혁명이라는 소위 국민혁명도 정직하게 말하자면 사오운동을 전초전으로 한 것만큼 여기서 역시 중국의 비평가인 병신(丙申)은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그가 현재 중국좌익작가연맹을 지지하고 있다 해서 그의 사오(四五) 전후의 작품을 프로문학이라고
지목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를 우수한 농민작가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고

 

그렇다. 이 말은 어느 정도까지 정당에 가까운 말로서 그를 프로작가가 아니고 농민작가라고
해서 작가 노신의 명예를 더럽힐 조건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가 얼마나 창작에 있
어서 진실하게 명확하게 묘사하는 태도를 가지는가 그의 한 말을 써보기로 하자

 

현재 좌익작가는 훌륭한 자신들의 문학을 쓸 수 있을까? 생각건대 이것은 매우 곤란하다. 현재의 이
런 부류의 작가들은 모두 인텔리다. 그들은 현실의 진실한 정형은 쓸려고 해도 용이치 않다. 어떤 사
람이 일찍이 이런 문제를 제출한 것이 있었다. “작가가 묘사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가 경험한 것이라
야만 될 것인가? 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하기를 반드시 안 그래도 좋다. 왜 그러냐면 그들은 잘 추찰
(推察)할 수가 있으므로 절도하는 장면을 묘사하려면 작가는 반드시 자신이 절도질할 필요도 없고
간통하는 장면을 묘사할 필요를 느낄 때 작가 자신이 간통할 필요도 없다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가 구사회 속에서 생장해서 그 사회의 모든 일을 잘 알고 그 사회의 인간들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추찰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래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새 사회의 정형과 인물에 대해서
는 작가가 무능하다면 아마 그릇된 묘사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문학가는 반드시 참된 현실과
생명을 같이하고 혹은 보다 깊이 현실의 맥박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또 다시 말을 계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사회를 조그만치 공격하는 작품일지라도 만약 그 결점을 분명히 모르고 그 병근을 투철히 파악치 못하면 그것은 유해할 뿐이다. 애석한 일이나마 현재의 프로작가들은 비평가까지도 왕왕 그것을 못한다. 혹 사회를 정시해서 그 진상을 알려고도 않고 그 중에는 상대자라고 생각하는 편의 실정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비근한 예로는 얼마 전 모 지상에 중국문학계를 비평한 문장을 한 편 보았는데 중국문학계를 3파에 나눠서 먼저 창조파를 들어 프로파라 하여 매우 상세하게 논급하고 다음 어사사(語絲社)를 소부르조아파라고 조그만치 말한 후 신월사(新月社)를 부르조아문학파라 해서 겨우 붓을 대다가만 젊은 비평가가 있었다. 이것은 젊은 기질의 상대자라고 생각하는 파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세밀하게 고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표명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서적을 볼 때 상대자의 것을 보는 것은 동 파(派)의 것을 보는 안심과 유쾌와 유익한데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일개 전투자라면 나는 생각건대 현실과 상대자를 이해하는 편의상보다 당면의 상대자에 대한 해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옛것을 분명히 알고 새로운 것에 간도하고 과거를 요해하여 장래를 추단하는 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 발전은 희망이 있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와 같은 환경에 있는 작가들은 부단히 노력할 것이고 그래야만 참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라고.
이 간단한 몇 마디 말이 문호 노신의 창작에 대한 모럴인 것이다. 이 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 만한 시사인고! 이래서 현대중국문단의 아버지이며 비평가의 비평으로서 자타가 그 지위를 함께 긍정하던 그의 작가로서의 생애는 너무나 짧은 것이었으니 1926년 3월 「이혼」이란 작품을 최후로 남긴 그는 교수로서 작가로서의 화려한 생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왔다.
그는 지금부터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아나기가 더 바빴다.” 1926년 북양군벌을 배경으로한 안복파(安福派)의 수령 단기서(段祺瑞) 정부는 급진적인 좌파 교수와 우수한 지식분자 50여명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우리 노신은 이 50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1924년 국민당의 연아용공책(聯俄容共策)이 결정되어 그 다음해 가을 보로딘 등이 고문으로 광동에 오고 ‘전국민적 공동전선’이었던 국민혁명의 제1단계인 광동시기에는 프롤레타리아의 동맹자는 농민 도시빈민 소프로지식계급 국민적 부르조아였다.
그래서 급진 교수들은 교육부총장과 군벌정부를 육박하였으며 이러한 신흥세력에게 낭패와 공포를 느낀 군벌정부는 이러한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체포령을 내리고 학생들의 행렬은 정부 위병들의 발포로 인하여 남녀 수백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그때 노신은 북경 동교민항의 공사관구역의 외국인 병원이나 공장 안으로 돌아다니며 찬물로 기아를 참아가면서도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여 군벌정부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중에도 ‘국민 이래 최암흑일에 지(至)’하였다는 명문은 단기서로 하여금 의자에서 내려앉게 되었다.

 

붓으로 쓴 헛소리는 피로 쓴 사실을 간과하지 못한다 … 붓으로 쓴 것이 무슨 힘이 있으랴! 실탄을 쏘
는 것은 오직 청년의 피다.(<華蓋集續編>)

 

오늘날까지 중국문단의 막심 고리키이던 그는 지금부터는 문화의 전사로서 앙리 바르뷔스보다 비장한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의 말과 같이 최암흑한 50일이 지나고 그는 북경을 탈출했다. 하문대학(厦門大學)에 초청을 받아갔으나 대학기업가의 음흉수인 것을 안 그는 광동중산대학으로 갔다. 그러나 1926년 6월 15일 장개석의 쿠데타는 광동성만 노동자 농민 급진지식분자 3천여 명을 살해하였으며 한때는 “혁명 전사”라고 간판을 지은 노신도 상해로 달아나야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그에게 흥미보다는 최대의 경의를 갖게 되는 것은 다음의 일문이다.

 

나의 일종 망상은 깨어졌다. 나는 지금까지 때때로 낙관을 가졌었다. 청년을 압박하고 ―하는 것은
대개 노인이다. 이들 노물들이 다 죽어지면 중국은 보다 더 생기 있는 것이 되리라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러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청년을 ―하는 것은 대개는 청년인 듯하다. 또 달리 재조할 수 없는
생명과 청춘에 대해서 한층 더 아낌이 없이― (<而己集>)

 

이 글은 그가 침묵하고 있는 것을 ‘공포’ 때문이라고 조소한 사람에게 답한 통신문의 일절로서 이때까지 진화론자이던 그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양기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단계로 보인 것이라고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상해에 왔을 때는 국민당의 쿠데타로 혁명군에서 쫓겨온 젊은 프로문학자가 만났다. <혁명문학론>이 불려지고 실제 정치행동의 전선을 떠난 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 잡았다. 원기왕성하게 실제공작의 경험에서 매우 견실한 것도 있었으나 때로는 자부적인 영웅주의가 화를 끼치고—에 실패한 분만(憤懣)과 극좌적인 기회주의자들은 노신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프로문학이란 어떤 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해 아버지 같은 애무로서 플레하노프와 루나차르스키의 문학론과 소비에트의 문예정책을 번역 소개하여 중국 프로문학을 건설하고 있는 동안에 “노신을 타도치 않으면 중국에 프로문학은 생기지 못한다”는 문학소아병자들은 그 자신들이 먼저 넘어지고 이제 그마저 가고 말았다.
이 위대한 중국문학가의 영령 앞에 고요히 머리를 숙이면서 나의 개인적으로 곤란한 정형에 의하여 문호 노신의 윤곽을 뚜렷이 그리지 못함을 참괴(慙愧)히 여기며 붓을 놓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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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8일 첫 방송을 시작한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내역사) 시즌2가 2018년 8월 20일 마지막 방송으로 9개월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시민들의 많은 관심으로 좋은 성과를 냈던 시즌1 〈역적〉을 발판삼아 시즌2는 연구소가 보유한 콘텐츠를 활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외부단체와 제휴를 통해 청취자를 늘려 장기적으로 연구소 미디어로 발전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내역사 시즌2에서는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의 대중역사강의 ‘근현대사 100년의 역사여행’(아쉽게도 개인사정으로 중단됨)을 필두로 조한성 연구원, 방은희 교육팀장, MC노가 사건과 인물 중심으로 역사를 알기 쉽게 풀어간 ‘역전다방(역사를 전하는 수다방)’과 이순우 연구원의 식민지시대 자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돋보인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가다)’ 그리고 역사이슈에 대한 뒷담화를 나누는 ‘방학진 기획실장의 바하인드히스토리’까지 4개의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총 55개의 에피소드를 방송하였다.
국민TV와 협력하여 3개월간 영상방송을 제작하여 영상방송의 가능성도 타진하였다. 특히 역사적인 4.27남북정상회담에 맞춰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와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을 모시고 특별대담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청취자들의 많은 관심을 이끌어냈다. 그 결과 내역사 시즌2는 5천여 명의 고정 청취자를 확보해 월 8만 이상의 다운로드를 기록했고, 역사 팟캐스트 분야에서 10위권에 진입하여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는 시즌1, 2를 거치면서 안정적인 제작노하우를 습득해 향후 장기적인 방송을 할 수 가능성을 열었다. 연구소는 두 달 간 충전기를 갖고 나서 10월말쯤 시즌3에 들어갈 예정이다. 회원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내역사 시즌2의 모든 에피소드는 오디오 팟빵, 아이튠즈 팟캐스트, 유튜브와 팟티를 통해서 다시 들을 수 있다.

• 김세호 PD

목, 2018/09/06-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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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회 회원인 박노정 시인이 7월 4일 6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박 시인의 부고기사가 여러 언론에 났지만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가 쓴 기사 제목에 가장 공감이 간다.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 별세〉.
박 시인을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박 시인이 ????진주신문????대표이사 시절 그의 소개로 진주의 어른인 남성(南星) 김장하 선생을 만났으니 아마도 1990년대 후반으로 짐작한다.

▲ 박노정 시인./경남도민일보DB

????진주신문????은1990년진주시민들이모여창간한신문으로지역의수구적인여론에맞서 정론직필 그리고 ‘진주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정신을 ‘신분해방운동인 형평, 임진왜란 때 2차례에 걸친 진주성 전투에서 민관군이 일체가 돼 보여준 주체, 남명 조식 선생의 호의’ 등 3가지를 꼽았다.
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이사뿐아니라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진주민예총회장,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 진주문인협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를 빼놓고 진주의 시민운동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로 있던 2005년 5월, 박 시인은 지역의 후배들과 함께 진주성 촉석루 옆 의기사에 있던 친일화가 김은호의 ‘미인도 논개’(일명 논개영정)을 뜯어내 박 시인을 포함해 4명이 각각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선고가 부당하다며 모두 노역장 유치를 자원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벌금 대납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다. 당시 4명의 벌금은 2,000만원이었지만 나중에 보니 성금이 이보다 더 많은 2,370만원이나 모아졌다. 박 시인 등은 나중에 이 성금 중 일부를 연구소 진주지회 결성(2012년 3월) 자금으로 내놓았다. 실제로 박 시인은 연구소 진주지회의 숨은 설계자였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시절이던1990년대초부터논개영정폐출운동을시작해 2008년 충남대 윤여환 교수가 그린 새로운 논개 영정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기까지 거의 20년이 걸렸다. 박 시인은 2006년에 친일잔재청산을위한진주시민운동을 만들어 진주 출신 친일가수 남인수의 이름을 딴 ‘남인수 가요제’를 ‘진주 가요제’로 바꾸기도 했고 ‘을사늑약 100년 남북공동사진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친일잔재 지도’ 제작도 추진했다. 이처럼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의 일생은 올바른 ‘진주정신’의 발굴과 계승이었다. 그와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을 간직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방학진 기획실장

 

수, 2018/08/0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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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57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50점 보내와
7월 26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제57차 자료기증을 했다. 주요자료는
1942년생 황OO가 경기도 강화국민학교, 강화중학교, 강화여자상업고등학교, 경기도농촌진흥
원 등을 거치면서 받은 상장과 수료증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자료 기증 잇달아
8월 2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의 히구치 유이치 공동대표가 연구소를 직접
방문하여 ????해협????, ????재일조선인사연구???? 등 소장자료 10점을 기증하였는데, 일본으로 돌아간 후인
8월 8일, 자택에서 소장자료를 정리하다가 기증자료를 발견하여 <조선신궁연보>(1936), <조선문
학사>(1981) 등 26점을 추가로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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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의 유족들과 오랫동안 교류를 가지고 있는 사노 미찌오 호우센 대학 교수가 「야스쿠니의 집靖國の家」 문패 1점을 기증했다.
8월 12일 야노 히데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이 <구일본군조선반도출신군인·군속사망자명부>(2017) 1권을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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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 홍종화 작가가 <혈의 누> 등 도서 3권을 기증했다.

8월 18일 김민철 책임연구원이 단행본 등 다수의 책을 기증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 피해를 입은 후 현재까지 피폭자들의 권익을 확보하고
인권을 옹호하는 운동에 앞장서 온 곽귀훈 회원(경기동부지부)이 8월 21일 <世界>(2016~2017)
총 14권을 기증했다.

8월 25일 김승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民族日報>(1990) 1권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월, 2017/09/25-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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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수화 통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회원이 교류하고 있는 청각장애우들의 소장자료를 전달받아 5월 29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이번에전달한 기증자료는 도서, 엽서, 박물류이고 기타무라 메구미씨도 <日鮮同祖論>(1943) 등 소장 도서 2권을 기증하였다. 뿐만 아니라 메구미 씨는 역사관 홍보용 사탕을 제작하여 일본인을 상대로 홍보활동을 펼치고 있다.

 

심정섭 지도위원 자료기증(54, 55차) 도서류, 문서류 총 100점 보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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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은 4월 26일과 5월 23일 각각 54번째와 55번째로 자료를 정리해 보내왔다. 조선총독부체신국에서 발행한 보험증서, 보험료영수장와 해방 후에 발행된 생활통
지표, 저축예금통장 등 문서류와 도서들이다.
특히 1938년에 비안(比安)공립 심상소학교에서 발행한 「학교가정통신부」에는 학업성적과 학교 출석상황 및 신체검진상황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학생들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금, 2017/07/28-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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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 교수가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 ‘군함도의 진실’이라는 영상을 홍보해 여론의 주목을 끌었다. 유네스코세계유산위원회가 유네스코산업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근대산업시설 중 한국인 등의 강제동원 관련 시설에 ‘역사의 전모’를 밝히라고 일본정부에게 권고한 사항을 이행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영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영상에는 몇 가지 부정확한 사실이 담겨 있다. 영상에서는 군함도에 강제동원되어 죽은 한국인이 120명이라 한다. 그러나 1984년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찾아낸 〈화장인허증하부신청서(火葬認許證下附申請書)〉 등 일명 ‘하시마자료’에 따르면 1925년부터 1945년까지 하시마에서 죽은 한국인은 123명이다. 여기에는 여자와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사망한 수가 64명이니 굳이 따지자면 강제동원 희생자는 50여 명이라 해야 맞다.
영상에 사용된 사진들도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누워서 탄을 캐는 장면은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정확한 연도와 지역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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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①


이 글은 2017년 7월 25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군함도의 진실 공방과 한국 정부가 할 일〉을 수정·보완한 글이다. 분량상 싣지 못한 내용을 추가하면서 기고 후에도 계속 유포되고 있는 잘못된 정보를 교정하기 위해서다.


 

(사진①) 한겨레신문에 글을 썼을 때는 연도 미상의 후쿠오카탄광에 는 연도 미상의 후쿠오카탄광에서 일하던 일본인 광부라 했으나 이 또한 정확하지 않다. 유사한 사진으로 훈도시를 입고 누워서 탄을 캐는 사진도 있다.

26(사진②) 이 사진도 자주 한국인 강제동원피해자 사진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메이지시기 치쿠호탄광에서 탄을 캐는 일본인 광부의 모습이라 한다. 누워서 탄을 캐는 광부의 구도와 이미지가 거의 같기 때문에 두 사진이 혼용되고 있다. 영상에는 폭행을 당해 등에 상처가 나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쓰였다. 1926년 <아사히카와신문>에 실린 것으로 알려진 이 사진은 홋카이도 나카가와군에 있던 노동자 합숙소에서 학대당한 토목노동자를 찍은 것이라 한다.(사진③)
서교수가 사용한 사진①과 사진③ 모두 폭력과 학대, 열악한 노동조건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었던 노동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 실태를 직접 증명하는 사진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이 받은 차별과 학대, 가혹한 노동조건 등의 실태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은 없다. 통제된, 그리고 전쟁 홍보만 허용되던 시기에 그런 사진 자체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1920~30년대 일본 언론의 고발로 확인된 이런 사진들을 통해 강제동원된 한국인 피해자들의 삶을 유추해 볼 수 있으며, 수많은 증언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내친 김에 몇 가지만 더 지적해두자. ‘어머니 보고 싶어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배가 고파요.’라는 글이 탄광벽에 적힌 사진이 있다.(사진④)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한국인 탄광노동자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진으로 한때 언론에서도 많이 쓴 장면이다. 그러나 이 사진은 훗날 강제동원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탄광을 방문한 조사단들이 연출하기 위해 쓴 걸 찍은 것이라 한다. 그러니 굳이 사용해서 시비를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다. 앙상한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난 네 명의 한국인 사진도 강제동원 피해의 증거로 이용되고 있다.(사진⑤) 이 사진의 주인공들은 신기수(辛基秀)의 사진집 <韓國倂合と獨立運動>(1995)에따르면,1945년10월 효고현 오쿠보형무소를 출옥한 조선인들로 강제동원 피해와 직접 관련이 없다.
통계상의 잘못도 있다. 군함도와 함께 등재된 다카시마탄광에 한국인 4만 명이 강제동원되었다는 통계가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건 실무자의 단순 실수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외교부가 강제동원지원위원회에 관련 정보를 요청할 때 위원회 직원이 4천 명을 4만 명으로 잘못 적어 보고했다. 나중에 수정되긴 했으나 언론과 인터넷상에는 잘못된 숫자가 이용되었고, 지금도 계속 인용되고 있다. 한 가지 더, 일제시기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가 700여 만 명이라고 한다. 이 수치를 사용할 때는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현재까지 과거 일본 정부가 발표한 공식문서를 기초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본, 중국, 사할린, 남양군도 등으로 강제동원된 노동자는 최소 72만 명, 군인․군속으로 끌려간 청장년이 최소 36만 명, 일본군‘위안부’ 등 여성 동원이 십수 만 명으로 해외로 강제동원 수가 최소 120만 명에 이른다.
여기에 1~3개월 단위로 한반도내에 동원된 이른바 ‘도내동원’의 연 인원이 600여 만 명도 있다. 따라서 국내외를 포함해서 총동원된 700여 만 명이라는 수치는 집집마다 한 명씩 동원되었다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다만 한국정부와 일본정부가 1965년 한일협정에서 대상이 됐던 피해자는 ‘해외동원자’들이었고, 노무현정부 때 지원(사실상의 보상)을 받은 피해자들도 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도내동원의 경우 그 실태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인 데다 식민지 시기를 살았던 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법을 통한 진상규명과 지원 대상에서 뺀 것이다. 때문에 현재 우리가 강제동원의 피해를 말할 때 대상자는 120여 만 명이라 해야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숫자 몇 개 사진 설명 하나 잘못되었다고 강제동원의 본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일본의 우익들은 오류나 실수를 공격하면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처럼 군함도의 강제동원 자체를 부정하려 한다. 아니면 피해자들의 주장에 흠집을 냄으로써 한국의 주장이 과잉된 민족 감정에 근거하고 있어 뭔가 사실을 과장하거나 날조하고 있다는 불신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국내는 모르겠으나 국제사회에서는 이게 나름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어 문제다.
군함도를 놓고 국제사회를 향해 일본 정부와 우익은 세 가지 여론전을 펼칠 전망이다. 첫째, 2015년 유네스코 총회 석상에서 일본대사가 인정한 한국인 강제노동(forced to work)은 국제법에서 규정한 강제노동에 해당하지 않는다. 1910년 일본에 의한 조선 ‘강제병합’이 합법이며, 따라서 1938년의 국가총동원법과 1944년의 징용령에 의한 동원 역시 합법이므로 강제노동의 예외규정(전시하의 동원)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둘째, 군함도에서 한국인들은 차별 받지 않고 일본인과 사이좋게 지냈다는 당시 거주자들의 회고나 미담을 적극 발굴하여 알릴 것이다. 여기에 낙성대연구소 소속 연구원이 발표한 ‘강제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과 일본인 노동자들 사이에는 민족별 임금차별이 없었다. 다만 노동의 숙련도에 따른 차이가 있었다’라고 요약할 수 있는 논문을 영문으로 번역해 홍보전에 나설 것이다. 한국의 연구자가 강제동원에 따른 민족차별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나서니 일본으로서야 얼마나 반가운 일이겠는가.
셋째, 한국은 사태를 과장하거나 심지어 엉터리 자료를 만들어 역사를 왜곡·날조함으로써 일본을 때리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 증거로서 서교수의 광고 영상이 좋은 먹이감이 된 것이다.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이 점에선 한국의 언론들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강제동원 피해 통계를 두고 벌어지는 진실 논쟁에서 놓쳐서는 안 될 게 있다. 그것은 가해자인 일본정부와 기업이 스스로 진실을 밝힌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진상규명 대부분은 모두 피해자와 한일의 시민단체가 수십 년간 싸워서 얻어낸 것들이다. 여기에는 한국정부의 책임도 크다. 특히 지난 9년간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최악이었다. 피해자 유족과 시민단체가 직접 일본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유골조사와 봉환 문제를 협의해 해결의 물꼬를 텄지만, 정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초은행에 1945년 이전 일본 내에서 일했던 한국인 우편저금 통장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부는 모른 체 했다. 국제법에 따르면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국가가 지배국가로부터 관련 문서를 인계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 한다. 식민주의 극복을 위해 지속적인 진상규명과 자료 공개, 기념․기억 사업과 교육 등 새 정부가 해야 할 긴 목록 가운데 하나다.
영화 군함도가 개봉되었다. 무더운 여름이 더 더워질 것 같다.

∷ 김민철 책임연구원

월, 2017/08/0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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