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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 추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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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 추도문

admin | 수, 2021/07/28- 01:29

[자료소개]

노신 추도문

이육사

 

이 글은 1936년 10월 23일부터 29일까지 5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발표된 이육사의 노신 추도문이다. ― 편집자주

 

노신(魯迅)의 본명은 주수인(周樹人)이며 자는 예재(豫才)다. 1881년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탄생.
남경에서 광산학교에 입학하여 양학에 흥미를 가지고 자연과학에 몰두하였으며, 그 후 동경에 건너가
서 홍문학원을 마치고 선대 의학전문학교와 동경 독일협회학교에서 배운 일이 있다. 1917년에 귀국하
여 절강성 내의 사범학교와 소흥중학교 등에서 이화학 교사로 있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오사문학운동 후 중국문학사조가 최고조에 달하였을 시대에 북경에서 주작인(周作人) 경제
지(耿濟之) 심안영(沈雁永)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고 곽채약(郭採若) 등의 로맨티시즘 문학
에 대하여 자연주의 문학운동에 종사하고 잡지 <어사(語絲)>를 주재하는 한편, 북경정부 교육부 문서
과장 및 국립북경대학 국립북경사범대학 북경여자사범대학 등의 강사로 있었으나 학생운동에 관계되
어 북경을 탈출하였다.
1926년 하문대학 교수로서 재직하다가 남하, 그 후 광주중산대학 문과 주임교수에 있다가 1928년 사직하고 상해에서 저작에 종사하는 한편 1930년 <맹아월간(萌芽月刊)>이란 잡지를 주재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문학태도는 점점 좌익으로 전향하여 1930년 ‘중국좌익작가연맹’이 결성되자 여기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국민정부의 탄압을 받아서 1931년 상해에서 체포되었다. 그 뒤 끊임없는 국민정부의 간섭과 남의사(藍衣社)의 박해에서 꾸준히 문학적 활동을 하고 국민정부의 어용단체인 ‘중국작가협회’를 반
대하던 중 지난 10월 19일 오전 5시 25분 상해시 고탑 자택에서 서거하였다. 향년 56세.
주요 작품은 <아큐정전(阿Q正傳)> <납함(吶喊)> <방황(彷徨)> <화개집(華蓋集)> <중국소설사략(
中國小說史略)> <약(藥)> <공을기(孔乙己)>등이다. ― 조선일보 편집자주

 

1932년 6월초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식당에서 나온 나와 M은 네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조간신문을 사서 들고 근육신경이 떨리도록 굵은 활자를 한숨에 내려 읽은 것은 당시 중국과학원 부주석이요 민국혁명의 원로이던 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을 당하였다는 기사이었다.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하게 늘어선 프랑스공무국 순경들의 예리한 눈초리를 등으로 하나 가득 느끼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까지 올 동안은 침점이 계속되었다. 문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 R씨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노신 임종

 

중국 좌익작가연맹의 발안에 의하여 전세계에 진보적인 학자와 작가들이 상해에 모여서 중국 문화를 옹호할 대회를 그해 8월에 갖게 된다는 것과 이에 불안을 느끼는 국민당 통치자들이 먼저 진보적 작가진영의 중요분자인 반재년(潘梓年. 현재 남경유폐)과 이제는 고인이 된 여류작가 정령(丁玲)을 체포하여 행방불명케 한 것이며 여기 동정을 가지는 송경령(宋慶齡) 여사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자유주의자들과 작가연맹이 맹렬한 구명운동을 한 사실이며 그것이 국민당 통치자들의 눈에 거슬려서 양행불이 희생된 것과 그 외에도 송경령 채원배(蔡元培) 노신 등등 상해 안에서만 30명에 가까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의사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 3일이 지난 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자는 만국빈의사 앞에 닿았다. 간단한 소향(燒香)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 때 젊은 두 여자 수행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마기에 검은 마고자를 입은 중년 늙은이, 생화에 쌓인 관을 붙들고 통곡하던 그가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라고 말하고 난 10분쯤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 앞이며 처소가 처소인 만치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아줄 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었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시 고탑 9호에서 영서(永逝)하였다는 부보(訃報)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니 어찌 조선의 한 사람 후배로써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

 

중국 문학사상에 남긴 그의 위치

“「아큐정전(阿Q正傳)」을 다 읽고 났을 때 나는 아직까지 아큐의 운명이 걱정되어 못 견디겠다”고 한 로망 롤랑의 말과 같이 현대중국문학의 아버지인 노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아큐정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의 아큐들은 벌써 로망 롤랑으로 하여금 그 운명을 걱정할 필요는 없이 되었다. 실로 수많은 아큐들은 벌써 자신들의 운명을 열어 갈 길을 노신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노동층들은 남경로의 아스팔트가 자신들의 발밑에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시고탑 노신촌의 9호로 그들이 가졌던 위대한 문호의 최후를 애도하는 마음들은 황포탄(黃浦灘)의 붉은 파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큐시대를 고찰하여 보는데 따라서 노신 정신의 3단적 변천과 아울러 현대중국문학의 발전과정을 알아보는 것도 그를 추억하는 의미에서 그다지 허무한 일은 아닐 것이다.

 

노신 서거 기사, 매일신보 1936.10.20

 

중국에는 고래로 소설이라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완전한 예술적 형태는 존재하지 못했다. 삼국연의나 수호지가 아니면 홍루몽쯤이 있었고 다소의 전기가 있었을 뿐으로서 일반 교양있는 집 자제들은 과거제도에 화(禍)를 받아 문어체의 고문만 숭상하고 백화소설 같은 것은 속인의 할일이라 하여 쓰지 않는 한편 소위 문단은 당송 팔가와 팔고의 혼합체인 상성파와 사기당과 원수원의 유파를 따라가는 사륙병체문과 황산곡을 본존으로 하는 강서파 등등이 당시 정통파의 문학으로서 과장과 허위와 아유(阿諛)로서 고전문학을 모방한데 지나지 못하였으며 새로운 사회를 창생할 하등의 힘도 가지지 못한 것은 미루어 알기도 어렵지 않은 분위기 속에 중국문학사상에 찬연한 봉화가 일어난 것은 1915년 잡지 <신청년>의 창간이 그것이다.
이것이 처음 발간되자 당시 아메리카에 있던 호적(胡適) 박사는 「문학개량 추의(芻議)」를 1917년 신년호에 게재하였고 진독수(陳獨秀)가 이에 찬의를 표하고 「문학혁명론」을 발표하였으며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교수들이 합류하게 되자 종래의 고문가들은 이 운동을 방해코자 가진 야비한 정치적 수단을 써보았으나 1918년 4월호에 노신의 「광인일기(狂人日記)」란 백화소설이 발표되었을 때는 문학혁명운동은 실천의 거대 보무를 옮기게 되고 벌써 고문가들은 추악한 꼬리를 감추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후 얼마 뒤에 노신이 광동에 갔을 때 어떤 흥분한 청년은 그를 맞이하는 문장 속에 「광인일기」를 처
음 읽었을 때 문학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차차 읽어내려 가면서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
그래서 동무를 만나기만 하면 곧 붙들고 말하기를 ― 중국 문학은 이제 바야흐로 한 시대를 짓고있다. 그대는 「광인일기」를 읽어 보았는가, 또 거리를 걸어가면 길 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내 의견을 발표하리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魯迅在廣東) 이 문제의 소설 「광인일기」의 내용은 한 망상광(妄想狂)의 일기체 소설로서 이 주인공은 실로 대담하게 또 명확하게 봉건적인 중국 구사회의 악폐를 통매한다. 자기의 이웃사람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자기 가정을 격렬히 공격하는 것이다. 가정―가족제도라는 것이 중국봉건사회의 사회적 단위로서 일반에 얼마나 해독을 끼쳐왔는가. 봉건적 가족제도는 고형화한 유교류의 종법(宗法) 사회관념 하에 당연히 붕괴되어야 할 것이면서 붕괴되지 못하고 근대사회의 성장
에 가장 근본적인 장애로 되어있는 낡은 도덕과 인습을 여지없이 통매했다. 이에 「광인일기」 중에 한 절을 초하면

 

나는 역사를 뒤적거려 보았다. 역사란 건 어느 시대에나 인의도덕이란 몇 줄로 치덕치덕 씌어져 있었
다. 나는 밤잠도 안 자고 뒹굴뒹굴 굴러가며 생각하여 보았으나 겨우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사람을
먹는다”는 몇 자가 씌어 있었을 뿐이었다.

 

이같이 추악한 사회면을 폭로한 다음, 오는 시대의 건설은 젊은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이 소설의 일편은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로서 끝맺는다. 실로 이 한 말은 당시의 어린이인 중국청년들에게는 사상적으로는 폭탄선언 이상으로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작품이 백화로 쓰여지는 데 따라 문학혁명이 완전히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된 공적도 태반은 노신에 돌려야 하는 것이다.
「광인일기」의 다음 연속해 나온 작품으로 「공을기(孔乙己)」 「약(藥)」 「내일」 「하나의 작은사건(一個小事件)」 「머리카락 이야기(頭髮的故事)」 「풍파」 「고향」 등은 모두 <신청년>을 통해서 세상에 물의를 일으켰으나 그 후 1921년 <북경신보> 문학부간에 그 유명한 「아큐정전」이 연재 되면서부터는 노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문단 제1인적 작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작은 모두 신해혁명 전후의 봉건사회의 생활을 그린 것으로 어떻게 필연적으로 붕괴하지 않으면 안 될 특징을 가졌는가를 묘사하고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살아갈까를 암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혁명과 혁명적인 사조가 민중 심리에 생활 디테일에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가장 리얼하게 묘사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농민작가라고 할만큼 농민생활을 그리는데 교묘하다는 것도 한 가지 조건이 되겠지만 그의 소설에는 주장이 개념에 흐른다거나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은 그의 작가적 수완이 탁월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늘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과 때로는 인텔리일지라도 예를 들면 「공을기」의 공을기나 「아큐정전」의 아큐가 모두 일맥상통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이니 공을기는 구시대의 지식인으로 시대에 떨어져서 무슨 일에도 쓰이지 못하고 기품만은 높았으나 생활력은 없고 걸인이 되어 선술집 술상대에 일금 19조의 주채가 어느 때까지 쓰여져 있는대로 언제인지 행방불명된 채로 나중에 죽어졌던 것이라던지 룸펜 농민인 아큐가 또한 쑥스러운 녀석으로 혁명 혁명을 떠들어놓고는 그것이 몹시 유쾌해서 반취(半醉)한 기분이 폭동대의 일군에 참가는 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허풍만 치고 아무것도 못하다가 때마침 일어난 폭도의 약탈사건에 도당으로 오해되어(그의 평소 삼가지 못한 언동에 의하여) 피살되는 아큐의 성격은 그때 중국의 누구라도 전부 혹은 일부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큐나 공을기가 모두 사고와 행동이 루즈하고 확호한 한 개의 정신도 없으며 유약하면서도 몹시 건방지고 남에게 한대 쥐어박히면 아무런 반항도 못하면서 남이 자신을 연민하면 제 도량이 커서 남이 못 덤비는 것이라고 제대로 도취하여 남을 되는대로 해치는 무지하고 우수면서도 가엷고 괴팍스러운 것을 노신은 그 리얼리스틱한 문장으로 폭로한 것이 특징이었으니 당시 「아큐정전」이 발표될 때 평소 노신과 교분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모델로 고의로 쓴 것이라고들 떠드는 자가 있은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중국은 시대적으로 아큐시대이었으며 노신의 「아큐정전」이 발표될 때는 비평계를 비롯하여 일반 지식군들은 아큐상(相)이라거나 아큐시대라는 말을 평상 대화에 사용하기를 항상 다반으로 하게 된 것은 중국문학사상에 남겨놓은 노신의 위치를 짐작하기에 좋은 한 개의 재료이거니와 그의 작가로서의 태도를 통하여 일관하여 있는 노신정신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는데 적지 않은 흥미를 갖게 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조선문단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예술과 정치의 혼동이니 분립이니 하여 문제가 어찌 보면 결말이 난 듯도 하고 어찌 보면 미해결 그대로 있는 듯도 한 현상인데 노신같이 자기 신념이 굳은 사람은 이 예술과 정치란 것을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이 문제는 그의 작가로서의 출발점부터 구명해야 한다.
노신은 본래 의사가 되려고 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할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의 자기의 ‘할일’이란 것은 민족개량이라는 신념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훗날 <납함(呐喊: 외침)> 서문에 다음 같이 썼다.

 

나의 학적은 일본 어느 지방의 의학전문학교에 두었다. 나의 꿈은 이것으로 매우 아름답고 만족했다.
졸업만 하고 고국에 돌아오면 아버지와 같이 치료 못하는 병자를 살리고 전쟁이 나면 출정도 하려니
와 국인의 유신에 대한 신앙에까지 나아갈 것

이것은 물론 소년다운 노신의 로맨틱한 인도주의적 흥분이었겠지만 이 꿈도 결국은 깨어지고 말았다.

의학은 결코 긴요하지 않다. 우약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또 아무리 강장해도 무의미
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꾼이 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중략) 그럼으로 긴요한 것은 그들을
정신적으로 잘 개조할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때 당연 문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예운동을 제창
하기로 했다 (<呐喊>서문)

 

이리하여 그가 당시 동경에 망명해 있는 중국사람들의 기관지인 <절강조(浙江潮)> <하남(河南)> 등에 쓰던 과학사나 진화론의 해설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을 번역한 것은 그리스의 독립운동을 원조한 바이런과 폴란드의 복수시인 아담 미케비치, 헝가리의 애국시인 베트피 산더, 필리핀의 문인으로 스페인 정부에 사형받은 리샬 등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노신의 문학행정에 있어서 가장 초기에 속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번역까지라도 그의 일정한 목적 즉 정치적 목적 밑에 수행된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위에 말한 「광인일기」의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도 순수한 청년들에 의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그의 이상을 단적으로 고백한 것으로써 이 말은 당시 일반 청년들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깨닫게 한 것은 물론 지난 수천 년 동안의 봉건사회로부터 청년을 해방하라는 슬로건으로 널리 쓰였고 사실 그 뒤의 중국청년학생들은 모든 대중적 사회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발 과감한 지도와 조직을 하였으며 그 유명한 오사운동이나 오주운동이나 국민혁명까지도 늘 최전선에 서서 대중을 지도한 것은 이들 청년학생이었다.
그러므로 노신에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 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도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인 작품을 산출하는 데만 문호 노신의 지위는 높아갔고 아큐도 여기서 비로소 탄생하였으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좋은 예가 있다. 1928년경 무한으로부터 쫓겨 와서 상해에서 태양사를 조직한 청년비평가 전행촌(錢杏邨)이 때마침 프로문학론이 드셀 때인 만큼 노신을 대담하게 공격을 시작해 보았다. 그 소론에 의하면 노신의 작품은 비계급적이다, 아큐에게 어디 계급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당한 말이다. 노신의 작품에서 우리는 눈 닦고 보아도 프롤레타리아적 특성은 조금도 볼 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사람의 작품을 비평할 때는 그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니 노신이 작가로 활동하고 있을 때는 중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정의를 내릴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는 없을 뿐 아니라 그때쯤은 부르조아 민주주의적인 정치사조조차도 아직 경계선이 분명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부르조아 혁명이라는 소위 국민혁명도 정직하게 말하자면 사오운동을 전초전으로 한 것만큼 여기서 역시 중국의 비평가인 병신(丙申)은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그가 현재 중국좌익작가연맹을 지지하고 있다 해서 그의 사오(四五) 전후의 작품을 프로문학이라고
지목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를 우수한 농민작가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고

 

그렇다. 이 말은 어느 정도까지 정당에 가까운 말로서 그를 프로작가가 아니고 농민작가라고
해서 작가 노신의 명예를 더럽힐 조건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가 얼마나 창작에 있
어서 진실하게 명확하게 묘사하는 태도를 가지는가 그의 한 말을 써보기로 하자

 

현재 좌익작가는 훌륭한 자신들의 문학을 쓸 수 있을까? 생각건대 이것은 매우 곤란하다. 현재의 이
런 부류의 작가들은 모두 인텔리다. 그들은 현실의 진실한 정형은 쓸려고 해도 용이치 않다. 어떤 사
람이 일찍이 이런 문제를 제출한 것이 있었다. “작가가 묘사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가 경험한 것이라
야만 될 것인가? 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하기를 반드시 안 그래도 좋다. 왜 그러냐면 그들은 잘 추찰
(推察)할 수가 있으므로 절도하는 장면을 묘사하려면 작가는 반드시 자신이 절도질할 필요도 없고
간통하는 장면을 묘사할 필요를 느낄 때 작가 자신이 간통할 필요도 없다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가 구사회 속에서 생장해서 그 사회의 모든 일을 잘 알고 그 사회의 인간들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추찰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래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새 사회의 정형과 인물에 대해서
는 작가가 무능하다면 아마 그릇된 묘사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문학가는 반드시 참된 현실과
생명을 같이하고 혹은 보다 깊이 현실의 맥박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또 다시 말을 계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사회를 조그만치 공격하는 작품일지라도 만약 그 결점을 분명히 모르고 그 병근을 투철히 파악치 못하면 그것은 유해할 뿐이다. 애석한 일이나마 현재의 프로작가들은 비평가까지도 왕왕 그것을 못한다. 혹 사회를 정시해서 그 진상을 알려고도 않고 그 중에는 상대자라고 생각하는 편의 실정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비근한 예로는 얼마 전 모 지상에 중국문학계를 비평한 문장을 한 편 보았는데 중국문학계를 3파에 나눠서 먼저 창조파를 들어 프로파라 하여 매우 상세하게 논급하고 다음 어사사(語絲社)를 소부르조아파라고 조그만치 말한 후 신월사(新月社)를 부르조아문학파라 해서 겨우 붓을 대다가만 젊은 비평가가 있었다. 이것은 젊은 기질의 상대자라고 생각하는 파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세밀하게 고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표명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서적을 볼 때 상대자의 것을 보는 것은 동 파(派)의 것을 보는 안심과 유쾌와 유익한데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일개 전투자라면 나는 생각건대 현실과 상대자를 이해하는 편의상보다 당면의 상대자에 대한 해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옛것을 분명히 알고 새로운 것에 간도하고 과거를 요해하여 장래를 추단하는 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 발전은 희망이 있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와 같은 환경에 있는 작가들은 부단히 노력할 것이고 그래야만 참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라고.
이 간단한 몇 마디 말이 문호 노신의 창작에 대한 모럴인 것이다. 이 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 만한 시사인고! 이래서 현대중국문단의 아버지이며 비평가의 비평으로서 자타가 그 지위를 함께 긍정하던 그의 작가로서의 생애는 너무나 짧은 것이었으니 1926년 3월 「이혼」이란 작품을 최후로 남긴 그는 교수로서 작가로서의 화려한 생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왔다.
그는 지금부터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아나기가 더 바빴다.” 1926년 북양군벌을 배경으로한 안복파(安福派)의 수령 단기서(段祺瑞) 정부는 급진적인 좌파 교수와 우수한 지식분자 50여명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우리 노신은 이 50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1924년 국민당의 연아용공책(聯俄容共策)이 결정되어 그 다음해 가을 보로딘 등이 고문으로 광동에 오고 ‘전국민적 공동전선’이었던 국민혁명의 제1단계인 광동시기에는 프롤레타리아의 동맹자는 농민 도시빈민 소프로지식계급 국민적 부르조아였다.
그래서 급진 교수들은 교육부총장과 군벌정부를 육박하였으며 이러한 신흥세력에게 낭패와 공포를 느낀 군벌정부는 이러한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체포령을 내리고 학생들의 행렬은 정부 위병들의 발포로 인하여 남녀 수백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그때 노신은 북경 동교민항의 공사관구역의 외국인 병원이나 공장 안으로 돌아다니며 찬물로 기아를 참아가면서도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여 군벌정부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중에도 ‘국민 이래 최암흑일에 지(至)’하였다는 명문은 단기서로 하여금 의자에서 내려앉게 되었다.

 

붓으로 쓴 헛소리는 피로 쓴 사실을 간과하지 못한다 … 붓으로 쓴 것이 무슨 힘이 있으랴! 실탄을 쏘
는 것은 오직 청년의 피다.(<華蓋集續編>)

 

오늘날까지 중국문단의 막심 고리키이던 그는 지금부터는 문화의 전사로서 앙리 바르뷔스보다 비장한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의 말과 같이 최암흑한 50일이 지나고 그는 북경을 탈출했다. 하문대학(厦門大學)에 초청을 받아갔으나 대학기업가의 음흉수인 것을 안 그는 광동중산대학으로 갔다. 그러나 1926년 6월 15일 장개석의 쿠데타는 광동성만 노동자 농민 급진지식분자 3천여 명을 살해하였으며 한때는 “혁명 전사”라고 간판을 지은 노신도 상해로 달아나야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그에게 흥미보다는 최대의 경의를 갖게 되는 것은 다음의 일문이다.

 

나의 일종 망상은 깨어졌다. 나는 지금까지 때때로 낙관을 가졌었다. 청년을 압박하고 ―하는 것은
대개 노인이다. 이들 노물들이 다 죽어지면 중국은 보다 더 생기 있는 것이 되리라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러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청년을 ―하는 것은 대개는 청년인 듯하다. 또 달리 재조할 수 없는
생명과 청춘에 대해서 한층 더 아낌이 없이― (<而己集>)

 

이 글은 그가 침묵하고 있는 것을 ‘공포’ 때문이라고 조소한 사람에게 답한 통신문의 일절로서 이때까지 진화론자이던 그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양기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단계로 보인 것이라고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상해에 왔을 때는 국민당의 쿠데타로 혁명군에서 쫓겨온 젊은 프로문학자가 만났다. <혁명문학론>이 불려지고 실제 정치행동의 전선을 떠난 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 잡았다. 원기왕성하게 실제공작의 경험에서 매우 견실한 것도 있었으나 때로는 자부적인 영웅주의가 화를 끼치고—에 실패한 분만(憤懣)과 극좌적인 기회주의자들은 노신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프로문학이란 어떤 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해 아버지 같은 애무로서 플레하노프와 루나차르스키의 문학론과 소비에트의 문예정책을 번역 소개하여 중국 프로문학을 건설하고 있는 동안에 “노신을 타도치 않으면 중국에 프로문학은 생기지 못한다”는 문학소아병자들은 그 자신들이 먼저 넘어지고 이제 그마저 가고 말았다.
이 위대한 중국문학가의 영령 앞에 고요히 머리를 숙이면서 나의 개인적으로 곤란한 정형에 의하여 문호 노신의 윤곽을 뚜렷이 그리지 못함을 참괴(慙愧)히 여기며 붓을 놓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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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신용옥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상임이사

지난 2018년 12월 15일 내일을여는역사재단과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대학원 언어사회연구과 한
국학연구센터가 공동으로 주최한 좌담 <역사연구의 과거 현재 미래>가 히토쓰바시대학에서 열렸습니다.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와 강덕상 전 히토쓰바시대학 교수가 참여했고, 송연옥 아오야마 가쿠인대학(
靑山學院大學) 명예교수가 사회를 맡았습니다. 좌담회 전날인 14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나의 인생과 역사학>을 주제로 강만길 교수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강만길 교수는 자본주의맹아론 연구를 통해 일제시기 반식민사학의 변혁적 전통을 복원하고, 통일이라는 민족사적 전망을 담아내지 못한 채 사용되던 ‘해방 후 시대’를 분단시대라 역사적으로 이름 지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시기 사회주의운동을 민족해방운동으로 복원하고,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을 분단시대 극복사학의 출발점으로 삼아 분단시대를 극복하고 통일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매진해 왔습니다. 또한 전두환 신군부세력에 의해 해직교수가 되기도 했고, 통일문제 강연이 빌미가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형무소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히토쓰바시대학 교정에는 이 대학 전신인 도쿄상과대학에서 교수를 지낸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의 동판이 있습니다. 후쿠다 도쿠조는 조선사회 정체후진성론을 입론한 일본 제국주의시대 경제사학자였는데, 조선사회는 19세기 후반 일본의 강요로 문호가 개방될 때까지 고대사회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중세사회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백남운은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저술해 우리 역사에도 중세사회가 있었다고 논증했는데, 자신의 도쿄상과대학 선생인 후쿠다 도쿠조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했던 것입니다.
14일의 강연에서 강만길 교수는 후쿠다 도쿠조와 백남운의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를 연구하게 된 계기, 사회경제사에서 변혁운동사로 연구 지평을 넓혀가게 되는 과정 등 그간의 연구 역정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시아 평화구축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전망했습니다.
재일조선인 역사학자 강덕상 교수는 4살 때인 1934년에 부모님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다닐 때에는 한국전쟁에 반대하고 원자폭탄 사용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사 연구를 본격화하면서 당시 일본 역사학자들이 사용하지도 않았던 ????통상휘찬???? ????통상휘편???? 같은 자료를 이용하여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와 함께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해 조선경제사를 연구했습니다. 또한 관동대지진 대학살에 관한 자료집을 펴내고,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中公新書, 1975)라는 책을 발간해 당시에 5만부 가량 팔리면서 일본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두 강 교수가 역사연구의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를 평가하고 미래를 전망해 본 이번 좌담은 여러모로 뜻 깊은 자리였습니다. 두 강 교수는 연배도 1살 차이로 비슷한데, 식민지와 해방, 분단, 6.25전쟁, 냉전, 반공독재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겪으며 극복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분단과 전쟁은 남한에서 반공독재를 낳고 고착화했으며, 일본에서는 분단된 재일조선인사회에 민족 차별이 더해졌습니다. 두 강 교수는 자기 존재의 모순을 사회 모순으로 전화시키며 실천적연구를 통해 인간해방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역사학자이기 이전에 앎과 삶을 일치시키려 한 지식인입니다.
두 강 교수는 오래 전부터 교유를 이어 왔는데, 여러모로 닮은 점도 많습니다. 자본주의맹아론과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해 경제사를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 그렇고, 경제사를 연구하다가 사회운동사로 연구를 확대해 간 것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역사학자로서 추구해온 역사인식에 공감하고 지식인으로서 추구해 온 삶의 가치와 지향에 공감하기 때문에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5일의 좌담에서도 강덕상 교수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강만길 교수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을 들고 나와 자신의 역사연구에 큰 영향을 준 책 중 하나라고 소개했습니다. 최근에는 소농사회론, 유교적인 동아시아 근대이행론 등 자본주의맹아론이나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번 좌담회에서는 자본주의맹아론이나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구체적인 검증보다는 그 역사인식 문제를 주로 다루었는데, 향후 한국 및 동아시아의 근대 이행 연구에 참조되었으면 합니다.
강덕상 교수는 ????여운형 평전???? 완성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1권과 2권은 국내에서도 번역되어 소개되었는데, 4권이 2019년 2월에 발간될 것이라 했습니다. 강덕상 교수는 1986년에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강만길 교수와 함께 여운형 묘소를 둘러보았는데, 현대사에 자리하는 여운형이라는 인물에 비하면 묘소가 너무 초라해 씁쓸했다고 합니다.
????여운형 평전????이 4권까지 완간되면 한국어로 번역되어 국내 독자들에게도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번 강연회와 좌담회에는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생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도 있었지만 재일조선인도 많았습니다. 재일조선인으로서 우리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 향후진로 문제 등과 관련해 서로 주고받은 정담이 지금도 애틋합니다. 강덕상 선생님이 사석에서 필자에게 건넨 한마디가 마음 한구석에 애잔하게 남아 있습니다.
“동족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겪는 처지가 온전한 하나의 반쪽이라면 재일조선인은 그 반의 반쪽이라고.

병중에 계신 강덕상 선생님이 오랜 친구 강만길 선생님을 만나러 나오셔서 저녁 식사 자리도 마련해 주시고 좌담도 참석해 주셨습니다. 두 분의 애틋한 정담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강덕상 선생님의 완쾌를 바랍니다.

목, 2019/01/24-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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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자료

• 12월 8일, 김일동 작가가 전시품 ‘보상하라展’을 기증했다. 독립운동가 5인(김구, 김좌진, 안중
근, 이봉창, 유관순)의 희생을 현대미술로 재해석한 팝아트로 작가의 작품해설은 다음과 같다.
(작품 해설 : 독립운동가의 초상이 등장하고 그들이 헤드셋이나 이어폰을 착용하고 현대 문화
기본매체인 영상과 사운드를 취하고 있는 상황이 연출된다.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을 위해 힘
들게 활약을 하고 돌아가셨다.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들의 노고 끝에 이렇게 발전하게
되었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현대 대중문화·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노고를 기리는 의미를 작품으로 표현해 보았다.)

• 12월 7일, 야스쿠니재판지원회, 재일조선학교 차별과 배제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이화련 씨가 소장하고 있던 생활자료를 기증했다. 1934년(소화 9년)에 제작된 보자기로 ‘수복
강녕壽福康寧’이라고 쓰여 있다.

• 12월 10일,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인 김재용 교수(원광대)가 故 임종국 선생의 서신을 기증했
다. 서신은 임종국 선생과 <친일문학론>을 일본어로 번역했던 오무라 교수가(2018년 7월 민
족사랑 참고) 주고받았던 것으로 <친일문학론>이 번역된 1976년 이전이 14점, 출판 이후가
30점, 총 44점이다.

• 12월 14일, 수원지부 소속으로 25년째 연구소를 후원하고 있는 서용희 회원이 소장자료 4점
을 기증했다. 기증자료는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법령관계 자료집으로 <모범조선호적기재례
전집>(1935), <조선호적예규>(1933) 등이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목, 2019/01/2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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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지선)는 12월 26일 오후 2시, 옛 남영동 대공분실 마당에서 남영동 대공분실 운영과 관리를 경찰청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넘기는 이관식을 열었다.
1970~1980년대 대표적인 고문기관으로 악명을 떨쳤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인권의 요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과거군사독재 시절 박종철 열사 등 수많은 민주화 인사를 고문했던 장소인 옛 남영동 대공분실은 최근까지 경찰청 인권센터로 사용됐으나,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10민주항쟁 31주년 국가기념식에서 이 자리에 민주인권기념관을 조성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따라 남영동 대공분실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이관되어 민주인권기념관이 조성될 예정이다. 이날 이관식에는 고문피해자, 고문피해자 가족 및 유가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그리고 이낙연 국무총리를 비롯해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민갑룡 경찰청장 등 수백 명이 참석했다.
• 편집부

목, 2019/01/24-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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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 활동 백서> 출판기념회가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상임대표 한상권 덕성여대 교수) 주최로 12월 19일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에서 열렸다. 역사학자 이이화 이사는 축사에서 “아무리 의미 있는 역사라도 기록해야 기억되며, 나쁜 놈은 나쁜 놈으로, 옳은 사람은 옳은 사람으로 기록해 후배들에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 역사의 정의”라고 말했다. 1권 751쪽, 2권 894쪽, 3권 667쪽 등 모두 2312쪽에 달하는 백서는 1권에서는 활동가 소회 등 활동 평가와 일지·좌담회·언론 보도·논평, 2권에서는 교과서 분석·집필 거부·교육부 공문서, 3권에서는 법적 대응 자료와 국제기구 활동 등이 고스란히 담겼다. 송두환 민변 전 회장(전 헌법재판관)은 축사에서 “2018년 3월 헌법재판소에서 민변이 제기한 ‘역사 교과서 국정화 고시 위헌 헌법소원심판청구’를 각하했다”며 “국정화 고시와 같은 불순하고 위헌적인 시도의 재현 위험성을 보다 확실하게 제거하기 위해서는 헌재의 명시적 위헌 선언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고 본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조한경 부천 중원고 교사(전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는 같은 자리에서 “박근혜 한마디에 국정교과서가 추진된 것처럼, 다음 문재인 대통령 한마디에 국정교과서가 폐기됐다”며 “앞으로 누구도 국정교과서를 꿈꾸지 못하는 장치가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 방학진 기획실장

목, 2019/01/24-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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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명예이사장)는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学) 초청으로 12월 12일~16일 일본 도쿄를 방문했다.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 한국학 연구센터 설립 2주년을 기념하여 이루어진 초청 방문으로 신용옥, 조세열 상임이사가 수행하였다. 일정은 12일 출국, 13일 강덕상 전 히토쓰바시 대학 교수 자택 방문, 14일 강연회, 15일 강덕상 교수와의 좌담회, 16일 귀국 순으로 이루어졌다. 강덕상 교수는 재일사학자로서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과 일제의 조선인 학병동원 등을 연구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와는 초창기부터 지도위원을 맡은 인연이 있다.
강 교수는 12월 14일 히토쓰바시대학 국제연구관에 열린 ‘나의 인생과 역사학-분단시대에서 미래를 여는 역사로’ 강연회에서 조선사회 정체후진성론을 주장한 후쿠다 도쿠조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백남운의 사제 관계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를 연구하게 된 계기, 사회경제사에서 변혁운동사로 연구 지평을 넓혀가게 되는 과정 등 그간의 연구 역정을 소개했고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시아 평화 구축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전망했다. 이튿날 같은 장소에서 강만길 교수와 강덕상 교수의 ‘한반도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다-역사연구의 과거·현재·미래’ 좌담회가 송연옥 아오야마 가쿠인대학(靑山學院大學) 명예교수의 사회로 열렸다. 강덕상 교수는 강만길 교수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1978)을 들고 나와 자신의 역사연구에 큰 영향을 준 책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두 강 교수는 자본주의맹아론이나 내재적 발전론과 관련한 역사인식 문제와 한국 및 동아시아의 근대 이행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 강연회와 좌담회에는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생들이 참석했는데, 한국 유학생뿐만 아니라 재일조선인이 많았다. 재일조선인으로서 우리역사를 공부하는 입장, 향후 진로 문제 등과 관련해 조언을 구하는 질의가 있었는데 그 가슴 뭉클한 사연이 청중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 편집부

목, 2019/01/24-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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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사회참여 운동 1세대 원로이며 연구소 3대 이사장인 김병상(86·필립보) 신부의 삶과 신앙을 기록한 회고록 〈따뜻한 동행〉 헌정 미사와 출판기념회가 12월 15일 인천시 심곡동 국제성모병원 3층 마리아홀에서 열렸다. 이 책에는 선후배 동료 사제들이 김 신부를 소개한 글과 더불어 김 신부의 구술·인터뷰·일기를 비롯해 지인들의 증언까지 충실히 정리해 놓았다. 1974년 유신독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된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창립되자 초대 회장을 시작으로 김 신부는 천주교와 인천지역 민주화운동계의 상징이 됐다. 1977년에는 유신헌법 철폐 기도회 사건으로 옥고도 치렀고, 1976년~1980년 인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03년 8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몬시뇰에 임명되었으며, 은퇴 이후에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연구소 이사장을 맡아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 방학진 기획실장

목, 2019/01/24-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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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합니다

함세웅 이사장

 

2019년 새해를 맞으면서 지난 한 해 우리 연구소 설립 목적을 이루기 위해 봉사하고 격려해주신 은인 회원들과 구성원 모든 분들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인사드립니다.
올해는 3·1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남북 정상은 지난 100년을 기억하고 평화와 통일의 문을 여는 새로운 100년을 남북 8천만 겨레가 함께하자는 취지로 남북공동행사를 약속했습니다.
남북공동행사의 성공을 위해 지난 역사에 대한 해석과 그 안에 남아있는 차이를 우리는 함께 극복해야 합니다. 100주년 남북공동행사는 평화공존과 일치를 위한 약속과 다짐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100여 년간 우리 민족공동체는 일제의 침략과 그 후유증인 이념과 정파 때문에 갈등과 분열 속에서 서로 헐뜯고 살았습니다.
100주년 남북공동행사가 이 모든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정국 3년 동안 서로 비판하고 심지어 경멸하며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부끄럽고 매우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남북 분단과 증오였습니다. 이에 친일 매국노와 반공 분단 권력이 손잡고 독버섯이 되어 인권과 민주주의를 짓밟았습니다.
올해는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선조들이 품었던 그 ‘새로운 민족국가’에 대한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합니다. 3·1혁명 100주년 남북공동행사가 바로 구체적 표징입니다.
해방 정국 3년, 곧 미군정 시기가 미국이 지배했던 식민지였다는 분명한 역사 인식을 지녀야 합니다. 이 인식이 미국을 넘어 남북이 함께 손잡고 확인해야 할 평화공존의 민족적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2014년 방한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남북이 같은 말을 쓴다는 것은 한 어머니의 자손이기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어머니가 같은 한 형제자매들입니다.
가족이 함께 만나고 살아가는 것은 인륜이며 하늘이 주신 천륜입니다.
이에 새해 우리 모두가 새로운 마음으로 남북 8천만 겨레가 서로 사랑하고 하나되는 일에 앞장서도록 노력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 잔재 청산은 물론 모든 비인간적 요소를 척결해 온 인류가 하나되는 평화공존의 보편적, 우주적 ‘민족문제연구소’로 승화하기 바라며 기도합니다.
새해 회원 여러분과 연구소 임직원 각자의 소망과 꿈이 실현되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목, 2019/01/24-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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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1일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가 주최하고 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가 주관한 국제학술회의가 ‘학살, 원폭, 강제동원 피해를 말한다-조사현황과 과제’라는 주제로 덕성여대에서 열렸다. 이번 국제학술회의는 ‘학살, 원폭, 강제동원 피해’ 등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일어난 인적 피해 문제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국가와 시민사회 차원에서 달성한 진상규명 현황과 성과를 정리하고, 향후 심화되고 발전된 진상규명을 위해서 어떠한 노력과 방법, 자료 발굴 등이 필요한지를 함께 모색하고자 마련되었다.
김영환 대외협력실장의 사회로 진행된 1부에서는 학살, 원폭, 강제동원 피해에 관한 발표가 있었다. 김승은 책임연구원이 ‘한반도 내 인명피해 조사 현황과 과제’를 주제로, 성균관대 박사과정의 김강산 씨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해 발표하였으며, 재한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모임의 이치바 준코 대표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조선인 피폭자’를 주제로 발표하였다. 강제동원을 주제로 한 발표는 김민철 책임연구원, 히구치 유이치 전 고려박물관 관장, 고바야시 도모코 유골봉환종교인시민연락회의 공동대표가 맡아 한국과 일본에서의 강제동원 피해조사의 현황에 관해 각각 발표하였다. 이어서 조시현 연구위원의 사회로 종합토론이 진행되었는데, 류준범(국사편찬위원회), 이상의(인천대), 히다 유이치(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고바야시 히사토모(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량대륭(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씨 등이 한국, 일본, 자이니치의 입장에서 연구 성과와 활동 등에 대한 소개를 비롯하여 깊이 있는 토론을 주고받았다.
이번 회의는 한국과 일본에서 이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랫동안 현장에서 연구와 실천을 거듭해 온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열띤 논의를 통해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을 함께 모색한 뜻 깊은 자리였다. 또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을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의 외교 갈등이 부각되고 있는 지금, 국가를 뛰어넘은 양국 시민들의 연대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목, 2019/01/2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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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43

행려병인 수용소였던 경성불교자제원의 공간 내력

– 러일전쟁 때 일본군 숙영지로 징발된 초자제조소가 있던 자리

 

이순우 책임연구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듬해에 나온 <관보> 1949년 3월 14일자의 광고란에는 다음과 같은 행려사망(行旅死亡)에 관한 내용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1. 본적: 미상 2. 주소: 미상 3. 성별: 여, 성명 나혜석, 연령 53세 4. 인상(人相): 신장 4척 5촌, 두발 장(長), 수족 정상, 입 코 눈 귀 정상, 체격 보통, 기타특징 무(無) 5. 착의(着衣): 고의(古衣) 6. 소지품: 무 7. 사인(死因): 병사 8. 사망장소: 시립자제원(市立慈濟院) 9. 사망년월일: 단기 4281년 12월 10일 하오 8시 30분 취급자 서울시 용산구청장 명완식(明玩植) 단기 4282년 1월 3일

나혜석의 행려사망 사실이 기록된 『관보』 1949년 3월 14일자의 해당 지면

 

관보의 말미에 겨우 수록된 행려 사망자의 내역까지 꼼꼼히 살펴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지는 참으로 의문이지만, 여기에 언급된 나혜석은 시대를 앞서 살아간 천재예술가라는 평가를 얻고 있는 서양화가이자 문필가이자 여성운동가였던 바로 그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이다. 그러니까 결국 그
는 철저하게 여느 사람들의 망각 속에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나마 여기에 기재된 이름 석 자가 아니었더라면 그의 죽음에 관한 이토록 희미한 기록마저 영영 잊힐 뻔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숨진 곳은 ‘시립자제원’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일제시기 의료구호기관이던 경성불교자제원(京城佛敎慈濟院, 원효로 1가 12번지)이었고, 해방 이후에 ‘서울시립 자혜병원’ 시절을 거쳐 1960년 1월 1일에는 시립남부병원(市立南部病院)으로 전환된 공간이기도 하다. 이 병원이 서울중부병원과 합쳐 1977년 7월 2일에 시립강남병원으로 통합 이전된 뒤에는 도로확장공사 탓에 부지 일부를 상실한 용산경찰서(龍山警察署, 원효로 1가 25번지)가 이곳으로 옮겨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자리의 내력이 궁금하여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그 흔적이 저 멀리 1904년 러일전쟁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드러난다.

<용산시가도> (1929)에 나타난 ‘불교자제원’의 위치이다. 바로 인접한 곳에 선립상업학교와 일본인 사찰 서룡사 및 흥국사가 포진한 것이 눈에 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각사등록(各司謄錄)> ‘외부일기(外部日記)’ 1904년 2월 17일자에는 일본공사관의 조회(照會)를 통해 “우리 북진군(北進軍, 일본군)이 내일 18일에 약 2만 명 내외의 병력이 일시 경성에 도착하여 2, 3일 머문 후 발정할 예정이므로 이들이 머물 곳으로 경복궁 안의 사용 무방한 청사를 일시 빌려서 이들 병력의 숙소로 충당”하겠다는 내용이 전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아울러 “일본공사의 알현시 용산에 있는 별영창과 초자제조소(硝子製造所) 및 정미소(精米所) 3곳도 신속히 차용하기로 윤허를 받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 서울 인근에 일본군 병력이 대거 밀려들게 되자 당연히 이들이 묵을 공간 확보 문제가 긴급 현안으로 대두되었는데, 이에 따라 한국군 주둔지와 다수의 관공서 또는 학교 터가 징발되어 그들의 숙소로 제공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경성부사(京城府史)> 제1권(1934), 731쪽에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 18일 이후의 입성병(入城兵)에 대해서는 일본인측 가옥으로는 가장 먼저 수용의 여지가 없어졌으므로 한국 측으로부터 용산 별영창(龍山別營倉, 현 원정 3정목 조선서적인쇄회사 내의 옛 건물), 초자제조소(硝子製造所, 경성 원정 1정목 경성불교자제원의 부지 내), 서대문밖 평양병병영(平壤兵兵營, 현 죽첨정 1정목 서대문경찰서 적십자병원 부지 내 일대의 지점), 서소문안 시위제일대대(侍衛第一大隊, 현 서소문정 120번지 총독부 관사 부지의 일부), 통내(統內) 친위제일대대(親衛第一大隊, 현 연지동 전매지국의 부지 내), 동궐 앞 친위 제이대대(親衛第二大隊, 현 운니동 99번지 이왕직분실), 저동 공병대(苧洞 工兵隊, 영락정 1정목 전매국 부지 내)의 각 병영 및 명동 장악원(明洞 掌樂院, 현 황금정 2정목 동척회사 부지의 서남 모서리), 필동 잠업과(筆洞 蠶業課, 현 앵정정 2정목 186번지의 지점) 등의 여
러 장소를 빌려 받아 숙영(宿營)했다.

여기에서 용산 별영창의 위치를 ‘조선서적인쇄회사’라고 적어 놓은 부분은 잘못된 설명이다. 별영창은 원래 조선시대 훈련도감에 속한 군병들의 급료 지급을 맡았던 한강변 창고이며, 한강 조망이 빼어난 것으로 유명했던 읍청루(挹淸樓, 청암동 168번지)라는 누각도 이곳의 구역 내에 함께 있었다. 위의 글에서 ‘원정 3정목’에 있다고 잘못 적어 놓은 것의 정체는 군자감 강감(軍資監江監, 원효로 3가 1번지 일대) 터를 말하며, 이곳에는 용산 전원국(龍山 典圜局)과 총독부 인쇄국에 이어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朝鮮書籍印刷株式會社)를 거쳐 1936년 12월 이후에는 체신이원양성소(遞信吏員養成所)가 들어서게 된다.
앞의 내용에 등장하는 ‘초자제조소’는 대한제국황실에서 필요한 유리창을 조달하기 위해 만든 ‘ 유리제조공장’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조선신문> 1925년 5월 19일자에 게재된 경성불교자제회 실비진료부의 광고 문안이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포함된 「한정(韓廷) 고용 외국인 해용(解傭) 처분에 관한 건(1904.5.30)」에 따르면, 유리제조기사로 초빙된 러시아인 화학교사 메이로(Meiro)와 내장원경 이용익(內藏院卿 李容翊)사이에 고용계약이 성립한 것은 1902년 1월 31일의 일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 당시 “대한정부
의 한성(漢城) 및 부근지에 건립될 황실유리창 공역에 투입된 기계검사와 제조 등의 사무”가 그에게 맡겨진 임무였다. 하지만 이 자리는 오래지 않아 러일전쟁의 개시와 더불어 러시아인 기사가 퇴각함에 따라 버려진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고, 이에 일본인 거류민단의 이시이 신(石井信)과 소가 츠도무(曾我勉)가 주축이 되어 한국정부로부터 이곳을 무상 양수하여 전염병자를 위한 한성병원 부속 청파피병원(靑坡避病院)을 설립하였다고 알려진다. 그리고 나중에 이곳에 들어선 것이 바로 ‘경성불교자제원’이었다.

 

옛 초자제조소 자리에 들어선 ‘경성불교자제회 부설 실비진료소’의 입구 모습이다. (<조선사회사업요람>, 1924)

 

<매일신보> 1941년 11월 13자에 수록된 행려병인구호기관 ‘불교자제원’에 대한 탐방기사이다.

 

이 단체는 원래 1908, 9년 무렵 ‘대곡파 본원사 경성별원’, 즉 동본원사(東本願寺, 남산동 3가 33번지)의 경내에 행려병인의 구호를 위해 설립한 것이 시초였으며, 차츰 수용자가 증가하자 1917년 4월 20일에는 경성각파불교사원연합회(京城各派佛敎寺院聯合會)의 성격을 지닌 경성불교자제회(京城佛敎慈濟會)가 성립되어 이곳의 새로운 경영 주체가 되었다. 또한 1921년 7월 1일 이후에는 행려병인의 수용 이외에 일반구료(一般救療)를 목적으로 하는 실비진료소(實費診療所)를 두는 한편 양로구조(養老救助)의 업무도 개설하기에 이른다.
옛 청파피병원 터에 경성불교자제회가 옮겨온 시기에 관한 자료는 <매일신보> 1918년 2월 1일자에 실린 「수용소 준공기(收容所 竣工期)」 제하의 기사를 참고할 수 있다.

 

경성부(京城府)에서 행로병인수용소(行路病人收容所)에 관하여는 본지(本紙)에 누차 보도함과 여(如)하거니와 용산 청파(龍山 靑坡) 원 피병원적(元 避病院跡)을 개축하여 차(此)에 당(當)할 계획인데 기(旣)히 부(府)에서 경성불교자제회 기타(其他)에 인계하여 총독부(總督府)에서 보조금(補助金) 5천 원(圓)도 하부(下附)가 될 터인즉 지(遲)하여도 4월까지에는 차(此)의 준공을 견(見)함에 지(至)하겠더라.

 

이 조직은 1936년 12월에 재단법인으로 전환하면서 그 이름도 ‘경성불교자제원’으로 변경하는데, <조선총독부 관보> 1937년 4월 28일자에 게재된 ‘법인조합등기’ 항목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법인설립
▪ 명칭: 재단법인 경성불교자제원 ▪ 사무소: 경성부 원정 1정목 12번지 ▪ 목적: 불교의 정신에 기초한 자선구제의 사업을 행함 ▪ 설립허가 연월일: 소화 11년(1936년) 12월 18일 ▪ 자산총액: 금 59,792원(圓) 55전(錢) ▪ 출자의 방법: 일반 기부 및 기타의 수입 ▪ 이사의 씨명 주소: 경성부 서사헌정 166번지 이사 카메야마 코오(龜山弘應), 경성부 서사헌정 산4번지의 5 이사 우에노 쐌에이(上野舜頴), 경성부 대화정 3정목 26번지 이사 타케오 라이쇼(嶽尾來尙), 경성부 장사동 182번지 이사 카잔 타이기(華山大義), 경성부 약초정 107번지 이사 고토 쵸신(後藤澄心), 경성부 본정 3정목 50번지 이사 쿠가 지코(久家慈光), 경성부 남산정 3정목 33번지 이사 우에노 코진(上野興仁), 경성부 원정 1정목 18번지 이사 후지 토넨(富士洞然), 경성부 한강통 11번지 이사 카토 칸센(加藤觀穿) ▪ 대표이사: 이사장 카메야마 코오(龜山弘應) 여기에 수록된 이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광운사(光雲寺, 고야산 경성별원), 박문사(博文寺), 조계사(曹谿寺), 묘심사(妙心寺), 약초관음당(若草觀音堂, 진종본파 본원사별원), 정토종 개교원(淨土宗 開敎院), 동본원사(東本願寺), 서룡사(瑞龍寺), 용광사(龍光寺) 등 경성 지역에 두루 포진한 일본인 불교사찰들의 주지 또는 포교관리자가 망라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일신보> 1941년 11월 13일자에 수록된 「총후사회사업시설(銃後社會事業施設)의 이모저모 (5) 행려병인 구호, 불교자제원 편」 제하의 탐방기사에는 설립 이래 이곳에서 수용구제를 받은 연인원(延人員)이 21만 740여 명이고, 사망자도 3,540여 명에 달한다고 적고 있다. 또한 이들은 대개 농촌을 떠나 직업을 찾아서 도회지로 나왔으나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거리를 전전하다가 병마로 쓰러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잘 걸리는 병으로는 폐결핵이 40퍼센트, 위장병이 30퍼센트의 순서이고 사망률도 15퍼센트에 달하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나혜석의 경우에도 일제패망기 이후 경성양로원(京城養老院, 청운동 산4-3번지; 청운양로원)과 경성보육원(京城保育院, 옥천동 126번지)의 안양농장, 그리고 공주 마곡사 등지를 떠돌아다닌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다가 끝내 1948년 11월 무렵에 경성불교자제원의 후신(後身)인 ‘시립자제원’에 간신히 정착을 시도하였으나 불과 한 달여 만에 질병으로 인한 최후를 맞이 하였던 것이다.

<동아일보> 1956년 1월 31일자에 수록된 ‘김창룡 저격사건의 현장약도’. 여기에 묘사된 ‘자혜병원’ 바로 앞 사건현장은 도로구조가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지금도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경성불교자제원에 관한 흔적을 찾다보면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별스러운 기록 하나가 있다. 일본군 헌병오장 출신으로 자유당 시기 육군특무부대장으로 악명을 떨친 김창룡(金昌龍, 1916~1956)이 1956년 1월 30일 출근길에 저격되어 죽은 곳이 바로 자혜병원(慈惠病院, 시립자제원) 앞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날 아침 ‘원효로 1가 17-5번지’ 자택에서 짚차를 타고 ‘원효로 1가 51번지’ 지점을 지나는 도중에 다른 짚차로 길을 막아선 저격자(옛 부하였던 육군대령 허태영의 지시를 받은 특무부대 출신자들)가 쏜 여러 발의 권총탄에 맞아 피살된 바 있다.
겉으로만 보면 행려병자의 구호기관이 오랜 세월 터를 잡았던 곳으로만 인식되기 십상이지만, 그 내면을 파고들면 이곳 역시 근현대사의 굴곡이 제법 진하게 농축되어 있는 공간임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목, 2019/01/24-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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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일, 일제강제동원 관련 손해배상 청구소송(신일철주금, 미쓰비시중공업, 주식회사 후지코시)의 대리인 김세은, 임재성 변호사와 소송 사무국인 민족문제연구소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등이 일본 도쿄에 있는 신일철주금 등 피고기업의 본사를 방문했다.
원고 측은 2018년 11월 12일과 12월 4일에도 배상과 문제해결 방법을 협의하기 위해 신일철 주금 본사에 찾아갔지만 피고 측과 만나지 못했다. 이에 따라 2018년 12월 31일 원고 측은 신일철주금이 갖고 있는 ‘PNR’(POSCO-Nippon Steel RHF Joint Venture Co.,Ltd) 주식에 대해 압류신청을 했고, 지난 1월 4일, 포항지방법원은 해당 주식에 대한 압류결정을 했다.
이번 방문에서 “만약 본 협의요청이 합리적 답변이나 이유 없이 거절될 경우, 원고들의 연세가 고령인 점을 고려하여 한국 내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절차를 개시할 예정”이라는 요청서를 전달하여 이후 압류주식에 대한 매각절차를 시작할 것임을 통지하였다. 한편, 2012년 5월 대법원 판결 이후 제기된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소송 3건의 항소심 판결에서 2019년 1월 18일, 1월 23일, 1월 30일에 모두 원고 승소판결이 나왔다.
• 김진영 선임연구원

금, 2019/02/22-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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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0일 광주지부가 오랫동안 추진해왔던 광주지역 친일잔재 조사결과보고회가 열린후, 친일잔재 조사 내용이 각종 미디어에 보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명의 친일 음악인이 만든 교가가 일선 학교에서 불리고 있음이 밝혀져 학생과 학부모, 동문 등의 거센 반발을 샀다. <광주지역 친일잔재 조사결과보고서>에 따르면 그 실태는 다음과 같다.

▲ 현제명 : 전남대, 숭일중·고 ▲ 김성태 : 광덕중·고 ▲ 이흥렬 : 광주일고
▲ 김동진 : 호남대, 서영대, 동강대, 서강중·고, 금호중앙중·금호여고, 동신중·고, 동신여중·고

2월 13일 광주일고 측은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를 즉시 폐기하고 학교 동문인 김종률 씨에게 새 교가의 작곡을 맡기고, 학생을 대상으로 교가 가사도 공모해, 11월 3일까지 완성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광주일고의 전신인 광주고등보통학교가 1929년 광주학생의거의 주역이었음에 비추어 친일 작곡가의 교가를 사용하는 것은 그 역사성에 배치된다고 지적되었으며 재학생, 교직원,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90% 이상 교체를 원하는 것으로 나왔다.
연구소 충남지부와 전교조 충남지부는 14일 공동성명을 내고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이 만든 교가를 충남 도내 학교도 상당수 사용하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충남도교육청은 친일 잔재를 없애기 위한 노력을 하루빨리 실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충남교육청은 친일 반민족행위자가 작곡한 교가를 바꾸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시민, 교육 단체가 참여하는 가칭 역사교육위원회를 구성해 올바른 역사교육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편집부

금, 2019/02/2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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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군은 2006년에 홍천 출신 무용가 최승희(1911~1969)에 대한 기념사업을 추진했지만 광복회 등 도내 보훈단체들의 반발과 2011년 군민 설문조사에서 반대여론(67.6%)이 높게 나옴에 따라 관련 사업을 중단한 바 있다. 지난해 6월 당선된 허필홍 홍천군수는 최승희의 고향인 남면 제곡리에 기념관 건립과 함께 최승희의 춤 세계를 재조명하는 남북 합동추모사업을 공 약으로 내세우면서까지 적극 검토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지역의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최승희의 친일행적을 이유로 2011년과 마찬가지로 적극 반대에 나섰다. 이들은 군청 앞 집회를 비롯해 민주당 강원도당 방문, 언론 기고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지속적인 반대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홍천군은 지난해 12월 12일 ‘남북이 함께하는 최승희 춤 재조명 사업’을 추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의 공문을 반대운동에 앞장선 독립유공자유족회에 보냈다. 공문에는 “해당 사업을 검토한 결과 3·1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있는 상황 등을 고려해해당 사업을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최승희는 1942년 2월 11일과 13일자 <매일신보>에 연재한 ‘나의 무용기, 동양무용 수립을 위해’에서 “자신의 창작 방향이 (중략) 일본 예술문화에 영원히 전해 갈 꽃이 되기 위해 정진하는 것이 주어진 임무”라고 밝혔다. 최승희는 여러 차례 황군 위문 공연을 다니면서 7만 5천원의 공연수익금을 국방헌금, 황군위문금, 독일 상이군인 위문금, 조선문인협회 기부금, 군사후원연맹 후원금 등의 명목으로 헌납했다. 최승희는 광복 직전 중국에서 일본군 전선 위문공연을 하다 베이징에서 광복을 맞았지만 바로 귀국 못하고 1946년 5월에 인천으로 돌아왔다. 이후 일제강점기 행적 등이 문제되어 정착하지 못하고 7월 20일 남편 안막(본명 안필승), 큰오빠 최승일과 함께 월북했다.
• 방학진 기획실장

금, 2019/02/22-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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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3일 ‘3·1운동과 한국인의 삶’ 좌담회가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의 주최로 연구소 5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도면회 대전대 교수가 사회를 맡았고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장과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 이태훈 연세대 교수가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3·1운동의 성격과 전개 양상, 3·1운동 후의 식민지 조선의 변화 등을 다각적으로 검토하였다. 참석자들은 이 운동이 전 지역, 전민족적, 전계층적으로 일어났을 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학생 등 민중이 사회 전면에 나선 운동이었음을 강조했다.

 

 

김정인 교수는 “3·1운동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고, 스스로 조직한 운동”이라며 “학생 특히 여학생이 운동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장은 일제가 향촌의 유대와 공동체를 해체하여 수직구조로 재편한 것에 대항하여 3·1운동은 학교와 교회, 시장 등의 수평적 관계 속에서 자율적으로 일어난 것이며, 이는 한국문화의 자율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이날 50여 명의 회원과 일반 시민들이 장시간 경청하고 질의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열띤 호응을 보여주었다.

• 편집부

금, 2019/02/22-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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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화가가 그린 원태우 지사의 투석 장면이 묘사된 삽화 자료이다. 여기에는 그의 행위를 “우매한 농민이 술에 취해 무의미하게 돌을 던진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일로전쟁 사진화보』 제39권, 1905년 12월 8일자)

 

원태우 지사의 항거에 대한 삽화와 단신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 『일로전쟁 사진화보』 제39권(1905년 12월 8일자)의 표지이다.

 

의거터 표석 자리에서 보이는 경부선 철길의 모습

 

안양 관악역 인접지(승강장 북단에서 250미터 지점)에 설치되어 있는 ‘원태우 지사 의거지’ 표석의 모습이다.

 

‘을사조약’의 억지 체결을 강요한 후 5일째가 되는 1905년 11월 22일 아침,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特派大使 伊藤博文)는 짐짓 승자의 여유를 과시하려고 했던 것인지 그의 숙소였던 대관정(大觀亭, 소공동 하세가와 사령관 관저)을 나서 수원 방면으로 한가로이 사냥을 떠났다. 이날 많은 사냥감을 포획한 채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오후 6시 30분에 열차가 안양역(安養驛)을 출발하여 속도를 올리던 차에 오래지 않아 돌멩이 하나가 차창 밖에서 날아들면서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이토 특파대사는 유리파편에 의해 그의 뺨에 세 곳, 왼쪽 눈 위에 한 곳, 왼쪽 귀 아래에 한 곳을 합쳐 도합 다섯 군데에 상처가 나면서 약간의 피를 흘렸으나 경미한 부상을 입는 것에 그쳤다. 그럼에도 사건 발생 직후 열차가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이토를 호위하던 헌병조장 1인과 헌병 2인이 즉각 하차하여 범인 체포에 나섰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오후 9시 반에 이르러 4명의 범인이 포박되어 그 중에 2명이 자백했다는 급보가 날아들게 된다.
일본 박문사에서 펴낸 <일로전쟁 사진화보(日露戰爭 寫眞畫報)> 제39권 (1905년 12월 8일 발행)에는 이날의 상황을 묘사한 기무라 고타로(木村光太郞)의 삽화 하나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민소(憫笑, 가엽게 웃음)할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그림의 설명문에도 “폭한(暴漢)을 잡고 보니 이는 우매한 농민(農民)으로, 대사(大使)가 탄 기차라는 것도 모르고 술에 취하여 무의미하게 돌을 던진 것이라고 이른다”고 하여 항거의 의미를 축소하는 어투가 노골적으로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잡지의 본문에 게재된 「대사(大使)의 조난(遭難)」이라는 짧은 글에도 이와 동일한 맥락의 시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토 대사는 22일 하야시 공사 등과 더불어 수원부에 사냥을 나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경부철도의 열차를 타고 오후 6시 안양정거장을 발차하자마자 이내 기차를 향해 돌을 던진자가 있어, 돌이 유리창을 깨고 후작(侯爵, 이토)의 얼굴을 덮쳤으나 부상은 입지 않았다고 전한다. 협약(協約, 을사조약)에 불평하는 폭한(暴漢)의 소행일 거라는 말이 있으나 아직 분명하지는 않다.
한제(韓帝, 한국황제)는 이 사변에 대해 매우 심통(心痛)하여 23일 오전 2시 예식원경(禮式院卿) 이근택(李根澤, ‘이근상’의 오류)을 대사의 여관 대관정(大觀亭)에 보내 정중한 위문(慰問)을 겸해 사의(謝意)를 표하도록 했으나, 대사는 어제 저녁의 일은 본디 아희(兒戲, 어린아이 장난)와 같은 것이었고 또한 부상이라고 할 만한 정도의 일도 아니었기에 결코 깊이 존려(尊慮)를 기울여 주실 일은 아니라고 답주(答奏)하였다. 이 폭한은 그날 밤에 포박 되었는데, 과연 취한(醉漢)의 악희(惡戲, 고약한 장난)로 추호(秋毫)도 고의(故意)로 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이토 대사가 매우 대범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닌 인물인 듯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글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예식원경 이근상의 사죄 방문에 이어 그날 아침이 되자 궁내부대신 이재극(宮內府大臣 李載克)이 다시 이곳을 방문하여 사죄와 위문을 뜻을 전하는 등 야단법석을 떠는 상황이 이어졌는데, 한껏 쇠잔해진 국력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참으로 서글픈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의 처리 결과에 대해서는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24권에 수록된 「이토대사 탑승열차 위해범 원태근 조치 건」 제하의 문건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선고서(宣告書)
경기도 과천군 안양시장(安養市場) 22통 호 불상(不詳)
원태근(元泰根) 당 22년

피고는 명치 38년(1905년) 11월 22일 동 시장의 이만여(李萬汝) 외 2명과 함께 일가(日稼, 날품팔이)를 위해 영등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술을 마신 결과 약간 술에 취하여 동일 오후 6시 17분 경 경부철도 안양역 서북방 약 8백 미터 안양 부근에서 북행열차가 진행하여 오는 것을 보고 마침 가지고 있던 작은 돌멩이를 선로 위에 놓아두는 것을 동행자인 이만여가 이를 제지하여 스스로 이를 치워버리자 피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 주먹 만한 크기의 화강석(花崗石)을 주워 객차를 향해 던졌기 때문에 차창이 파괴되어 당시 차 안에 있던 승객 한 명에게 미상(微傷)을 입히게 하였다.(중략)
이상 피고의 행위는 한국주차군 군율(韓國駐箚軍 軍律) 제4조 제9항에 해당하는 범죄로서 정상작량(情狀酌量)하는 것으로 함에 따라 군율위범심판규정(軍律違犯審判規定) 제6조에 의거하여 감금(監禁) 2개월, 태(笞) 1백에 처한다.

명치 38년(1905년) 11월 25일
한국주차헌병대장 오야마 미츠키(韓國駐箚憲兵隊長 小山三己)

 

<각사등록 근대편 자료>에 수록된 「조회(照會) 제25호(외부대신 발신, 의정부 참정대신 수신, 1905년 7월 10일)」에는 ‘한국주차군 군율(韓國駐箚軍 軍律)’의 세부사항이 서술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확인해보면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한’ 제4조 제9항은 “아군(我軍)의 징발(徵發)에 응(應)함을 거(拒)하고 우(又) 방해(妨害)한 자(者)”로 표시되어 있다. 달리는 열차에 돌멩이를 던진 사안과는 전혀 맥락이 닿지 않으므로, 요컨대 선고서를 작성할 때 군율의 해당 항목을 잘못 인용 기재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돌을 던진 한국인의 이름이 ‘원태근’으로 적혀 있지만 호적자료에는 그의 정체가 원태우(元泰祐, 1882~1950)로 기재된 것으로 확인된다. 원태우 지사는 이때 혹독한 구타로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면서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한국전쟁 발발 시기에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오래도록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행적은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 1990년에 이르러 겨우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그 결과 뒤늦게 ‘원태근’이라는 이름 아래 건국훈장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금, 2019/02/22-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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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44

청일전쟁 때 일본군 개선식은 왜 용산 벌판에서 벌어졌을까?
– 과장된 전공(戰功)이 곳곳에 만들어낸 그들의 전승 기념물들

이순우 책임연구원

1894년(갑오년) 여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감당하지 못한 조선국 정부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이에 맞서 일본도 10년 전 갑신정변의 여파로 맺은 천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동시 개입을 적극 시도하면서 끝내 이러한 군사충돌은 바로 이 땅에서 청일전쟁이 촉발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해 6월 8일 청국군은 아산만(牙山灣, 마산포와 백석포)을 통해 상륙하여 아산과 성환 일대에 주둔했고, 일본군은 이보다 하루 늦게 인천항을 거쳐 서울에 들어온 뒤 선발부대인 오시마 혼성여단(大島混成旅團)이 만리창(萬里倉, 효창동 199번지 지점)에 본부를 마련하고 예하 주력부대는 효창원 계곡과 아현리 주변에 포진하였다.

<일청전쟁사진첩> (1895)에 수록된 효창원 만리창 지역의 일본군 숙영지 전경이다.

 

이때 오시마 병력이 한강을 건너 남하하여 청국군의 방어진을 향해 진군함에 따라 7월 29일 새벽 성환의 북쪽 안성도(安城渡, 안성나루;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중리)에서 두 외국 군대 사이에 첫 육상 전투가 벌어졌다. 불과 이틀 사이에 일본군은 청국군의 아산 본영까지 점령하고막대한 전리품을 수습하여 서울로 귀환하였고, 다수의 사상자를 낸 청국군은 홍주 방면으로 패주하였다가 강원도 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방식으로 행군하여 8월 하순에 평양(平壤)에 대기하고 있던 자신들의 군영으로 간신히 합류하였다.

1894년 7월 29일 청국군과 일본군의 첫 전투가 벌어진 안성나루의 모습이다. 이 자리에는 나중에 안성교(安城橋)라는 다리가 설치되었다.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조선지풍광>, 1922)

 

이른바 ‘성환역(成歡役)’으로 표기되는 이 전투에서 크게 이긴 일본군이 이 좋은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이때의 전투 장면은 당시에 크게 유행하던 다색인쇄 목판화 기법인 니시키에(錦繪)로 만들어져 대량 보급되었고, 이를 통해 전쟁분위기를 고취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여기에는 대개 승승장구하는 일본 군대의 모습이 화려하고 과장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이 당시에도 ‘보도사진’이나 ‘종군기자’와 같은 존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진을 인쇄물로 전환하는 기술이 원활하지 않았으므로, 무엇보다도 속보성(速報性)을 생명으로 하는 전쟁화보와 같은 매체조차 제작의 편의성을 고려하여 대개 인화사진을 보고 다시 목판화로 그려 찍어내는 기법이 선호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청일전쟁 시기에 관한 자료는 일정한 시차를 두고 묶음 제작된 전쟁사진첩보다는 그때그때마다 제작된 목판화 종류의 기록물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은 수량이 남아 있다.

 

<도쿄아사히신문> 1894년 8월 28일자 부록으로 배포된 ‘일본군 경성 개선식 장면’이다. (이치노헤 쇼코 기증,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그런데 이 와중에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은 드물게도 1894년 8월 28일자의 부록으로 ‘명치 27년(1894년) 8월 5일 아병경성개선지도(我兵京城凱旋之圖)’라는 제목을 붙여 3매 연속 사진을 파노라마 형태로 담아낸 인쇄물을 배포하였다. 이미 20여 일 전의 상황이긴 하지만 생생한 전투소식을 알리는 나름의 전쟁 속보였던 셈이다.

<일청전쟁사진첩> (1895)에 수록된 일본군 개선식 장면이다. 사진촬영자는 조선 인천항에 거주하는 히구치 사이조(樋口宰藏)로 표시되어 있다.

 

여길 보면 벌판의 한쪽에 ‘개선문’이라고 써 붙인 커다란 일본식 녹문(綠門)이 서 있고, 그 앞으로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일본군대가 도열한 상태이며, 그 뒤쪽으로 약간 비탈진 언덕 위에는 구경꾼들이 뒤섞인 모습이 포착된다. 사진의 설명문에 이미 그해 8월 5일의 개선상황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므로, 이를 단서로 몇 가지 자료를 뒤져보았더니 <경성부사> 제1권 (1934), 590~591쪽에 이 사진 장면과 딱 일치하는 설명이 수록되어 있었다.

 

일본군의 승전소식이 경성에 알려지자 …… 일본인 측에 있어서는 수비군, 공사관원, 거류민 등의 환희는 비할 바가 없었고, 곧장 환영을 협의하여 구용산 문평산(舊龍山 文平山)의 동측 평지에 높이 4장(丈) 가량의 녹문(綠門, 료쿠몬)을 만들어 중앙에 오토리 공사(大鳥公使)가 쓴 ‘개선문(凱旋門, 아산을 바라보는 방향)’과 ‘환영문(歡迎門, 경성을 바라보는 방향)’이란 편액을 걸었다. 8월 5일 공사관원은 소와 술독을 문 옆으로 옮겼고, 일본거류민은 얼음을 멀리 한강 남안까지 운반하여 향응 준비를 전부 마쳤다. 이날 이른 아침부터 경성수비의 일본병은 도로의 양측에 나란히 늘어서고, 공병(工兵)은 동작진(銅雀津)에서 강을 건너도록 배를 띄울 준비를 했다. 오토리 공사는 관원들을 거느리고, 칙사 이윤용(勅使 李允用)과 군국기무소(軍國機務所, 군국기무처) 대표 정경원(鄭敬源)은 박홍천록(薄紅淺綠)의 조선예장(
朝鮮禮裝)을 갖추고 개선문 옆에 도착했다.
일군(日軍)은 매일 황혼에 출발하여 진위(振威), 수원(水原), 과천(果川) 등으로 주간의 더위를 피하며, 선두에는 조선인 인부가 노획품인 징과 큰북을 난타하고 또 포획품인 황룡기(黃龍旗) 여러 유(旒) 및 엽자(葉字; 葉志超), 섭자(聶字; 聶士成), 위자(魏字), 상자(商字), 풍자(馮字) 등의 문자를 수(繡)로 새긴 군기(軍旗) 27류, 기타 당(幢)이라고 하는 간봉(竿棒), 새깃털을 부착한 장창(長槍) 등 20여 개를 들어올리며, 대포 8문(門)은 소가 이끌었는데 각각에 ‘성환(成歡)의 전리품(戰利品)’, ‘청병 대패(淸兵 大敗)의 증(證)’ 등을 묵서(墨書)한 작은 깃발이 더하였고, 초병(哨兵)이 이를 감시하며 전군이 그 뒤를 따랐다. 처음 출정할 당시 흰색이었던 융의(戎衣, 군복)는 전부 갈색으로 염색되어 있어서 한눈에 보더라도 격전(激戰)의 정도를 떠올리는 것이 가능했다.
오시마 여단장(大島旅團長), 나가오카 참모장(長岡參謀長) 등이 앞서 말에서 내리자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 공사관 통역관)는 이윤용에 의한 국왕전하로부터의 감사위로 칙지(勅旨)를 옮겨 전하고, 정경원의 축사를 통역하였다. 이어서 주객(主客)이 서로 교환(交歡)하는 바가 있었고, 공사는 ‘천황폐하만세’를, 여단장은 ‘조선국대군주만세’, 정경원은 ‘대일본황제폐하만세’를 소리 질러 일동 제창하며 개선의 식을 마쳤다. 때는 정각 오전 9시,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은 그 빛을 한강변 백사장 위에 정렬한 개선군에게 뿌렸다. 이로부터 분포품(分捕品)을 선두로 하여 전군 진행을 개시하여 선두가 막영지에 도달할 무렵에는 대행리(大行李, 군수품)는 여전히 개선문의 옆에 있었는데, 구불구불한 장사(長蛇)의 부대는 숙숙(肅肅)하게 만리창(萬里倉)을 향하고 군중은 도로의 양측에 운집하여 이 장관을 마주했다. (하략)

 

이 내용에 따르면 이들은 한강을 건너 자신들의 주둔지인 ‘만리창’으로 가는 도중에 ‘개선문’ 앞에서 거창한 의식을 벌이는 장면인 것으로 드러난다. 사진에 포착된 작은 개울은 만초천(蔓草川; 너추내, 너푸내)인 듯도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물줄기가 약해보이는 것이 지류(支流)의 한가닥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뒤쪽으로 효창원을 품고 있는 연화봉 자락이 드러난 것으로 보아 개선식장은 대략 지금의 ‘삼각지(三角地)’에 가까운 어느 지점인 것으로 짐작된다.

<경성부사> 제1권(1934)에 수록된 종군화가 쿠보다 베이센의 개선식 삽화이다. 여기에는 이 행사가 벌어진 장소가 ‘문평산 동쪽’이라고 적고 있다.

 

실제로 <경성부사> 제1권 (1934), 591쪽에는 종군화가(從軍畫家)로 이름을 날린 쿠보다 베이센(久保田米僊, 1852~1906)이 그린 개선식 삽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에 대해 “장소는 구용산 문평산 동측(舊龍山 文平山 東側)”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문평산’은 일제 때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에 있던 당현(堂峴, 당고개) 일대의 작은 봉우리를 일컫는 용도로 곧잘 사용된 지명이었다. 따라서 문평산의 동쪽이라고 함은 지금의 ‘삼각지’ 언저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1925년 을축대홍수 당시 경정(京町, 지금의 문배동) 일대의 침수상황이다. 사진촬영지점은 ‘문평산’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전면으로 남산 자락과 삼각지 일대가 포착되어 있다. (조선총독부, <조선의 홍수>, 1926)

 

이보다 훨씬 나중의 일이지만, 일본군대가 효창원 일대에 포진한 내력은 그들만의 전쟁기념물을 곳곳에 설치하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1929년 6월에 건립된 ‘오시마 혼성여단막영지적(大島混成旅團幕營之跡) 기념비’와 1931년 6월에 건립된 ‘합리비행기발상지지(合理飛行機發祥之地) 기념비’가 바로 그것들이었다.
우선 앞의 것은 1926년 6월 24일에 오시마 혼성여단 전몰장졸을 위한 추도회를 열면서 그 기념으로 ‘오시마 여단주둔지(大島旅團駐屯地)’라고 쓴 표목(標木)을 우선 세웠다가 이를 대체하는 형태로 효창공원 서쪽고지에 세운 것이었다. 그리고 뒤의 것은 오시마 여단이 주둔하던 때에 제1야전병원부 육군일등조제수(陸軍一等調劑手)이던 니노미야 츄하치(二宮忠八, 1866~1936)가 이곳에서 비행기의 설계를 떠올려 발표했음을 기리기 위해 효창공립보통학교(청파동 3가 115번지 구역)의 경계면에 접한 동쪽고지에 설치한 비석이었다.

<매일신보> 1912년 11월 20일자에 수록된 ‘마츠자키 대위 기념비’의 낙성식 광경이다. 성환역 후면에 자리한 이 비석의 전면에는 테라우치 총독이 쓴 ‘유방백세(流芳百世)’라는 글씨가 부착되었다.

 

그런데 일제가 세운 청일전쟁 관련 기념물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었고, 일본 군인들의 행적이 남겨진 공간마다 이러한 시설이 잇달아 만들어졌다. 이러한 장소들은 대개 그 지역의 관광명소로 크게 홍보되거나 일본인들이 즐겨 찾는 그들의 전적지 또는 참배의 대상물로 활용되곤 했다.
이러한 종류의 하나로 일찍이 1912년 11월 3일에는 경부선 성환역(成歡驛) 뒤편 언덕에 ‘마츠자키 대위 기념비(松崎大尉記念碑)’가 건립된 바 있었다. 그는 제21연대 제12중대장으로 안성나루전투에서 앞장서 지휘하다가 총탄을 맞아 죽었는데, 이것이 일본군 측의 최초 전사자로 기록되었다. 그의 죽음은 즉시 ‘무부(武夫)의 귀감(龜鑑)’으로 치장되어 전사 장면은 니시키에(錦繪)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급되기도 했다.

마츠자키 대위 기념비 바로 옆에 자리한 ‘육군 나팔수 키구치 코헤이 기념비’의 모습이다. (경기도,
<경기지방의 명승사적>, 1937)

 

마츠자키 기념비가 건립된 장소는 청국군 섭사평(聶士成, 니에쉬청)의 중앙 진지였다가 점령되어 일본군 포병진지로 변한 구릉을 택하여 정했으며, 성환헌병파견소(成歡憲兵派遣所)와 성환보선구사무소(成歡保線區事務所)와 직산군청(稷山郡廳; 1914년에 천안군으로 흡수되어 합병)이 합동으로 건립부지를 조성하는 일을 담당했다고 알려진다. 기념비의 높이는 30여 척(尺)이며, 위쪽에는 데라우치 총독(寺內
總督)이 휘호(揮毫)한 “유방백세(流芳百世)”라는 글씨를 달았고 아래쪽에는 옛 상관이던 오시마 요시마사 자작(大島義昌 子爵)이 쓴 “육군보병대위 마츠자키 나오오미의 비(陸軍步兵大尉 松崎直臣之碑)”라는 석판을 부착하였다.
이와 함께 육군나팔수 기구치 코헤이(陸軍喇叭手 木口小平)의 비석도 마츠자키 기념비 옆에 설치되었다. 그는 안성나루를 건너는 전투과정에서 선두에 서서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나팔을 불면서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헛웃음을 자아내는 일은 당초에 공표된 나팔수의 정체는 시라카미 겐지로(白神源次郞)라는 군인이었고 그의 미담은 이내 소학교의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일본국민의 열광적 추앙을 받았으나, 알고 보니 그는 전투 중에 익사한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불과 1년 만에 실제 주인공이 기쿠치 코헤이로 번복되는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1900년 남산 왜성대공원에 건립된 ‘갑오역기념비’의 모습이다.(<한국병합기념첩>, 1910)

 

그리고 서울 남산 기슭에 있는 남산공원(南山公園, 왜성대공원)에는 난데없이 ‘갑오역기념비(甲午役紀念碑)’라는 일종의 추모시설을 겸한 충혼비가 들어섰다. 이 장소가 선택된 것은 청일전쟁 당시 오시마 여단이 포열(砲列)을 펼쳤던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곳에는 청일전쟁 때 죽은 일본군 전몰자만이 아니라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당시의 조난자에 더하여 1907년 군대해산 당시의 전사자도 모두 합사되었다.
특히, 이 기념비 아래에는 양화진 등지에 가매장되었던 전몰자의 유골을 몰래 옮겨 파묻었던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는데, <경성부사> 제2권(1936), 687~688쪽에는 갑오역기념비의 조성 경위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수원 팔달산 정상에 설치된 ‘코시 소좌 의사지비’의 전경이다. (경기도, <경기지방의 명승사적>, 1937)

 

5월에는 왜성대(倭城臺)에 갑오기념비를 세웠다. 처음에 거류민은 명치 18년(1885년) 이래 임오(壬午) 갑신(甲申)의 양란(兩亂)에 조난된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 해마다 제사를 행해 왔으나 명치 29년(1896년) 양화진(楊花鎭)에 가장(假葬, 가매장)한 청일전쟁 때 성환, 중화 등지에서 전몰자의 유골들도 봉납하여 전자와 합사(合祀)하는 기념비를 건립하자는 논의가 관민 사이에 번져, 기부금 3천 원을 갹출하여 주조(鑄造)를 오사카포병공창(大阪砲兵工廠)에 의뢰하고, 장소는 왜성대로 하여 8월 제막식(
除幕式)을 거행했다.
당시 성내에 매골(埋骨)하는 것은 이를 꺼리는 사정이 있었으므로 비밀리에 이 비석 아래에 매몰했다. 지금 경성신사(京城神社) 앞에 있는 ‘갑오역기념(甲午役記念)’의 비가 곧 이것이다.

이밖에 성환 전투와 관련하여 설치된 또 다른 전쟁 기념물로는 경기도 수원의 팔달산 정상 남단에 자리했던 육군소좌 코시 마사츠나(陸軍少佐 古志正綱)의 비석도 있었다. 그는 오시마 혼성여단에 소속된 제21연대 제3대대장으로 부천 오류동(富川 梧柳洞)을 거쳐 성환으로 진군하는 도중에 수원에 머물 때에 치중대(輜重隊, 수송보급부대)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조선인을 대상으로 보급품을 운반할 54마리의 군마(軍馬)를 징발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야간을 틈타 마부와 함께 군량미를 실은 말들이 모두 도망을 가는 상황이 벌어지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해 7월 27일 새벽 팔달산 기슭 수원군청의 뒤쪽 소나무 숲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예외없이 분전(奮戰)을 고취하는 전쟁 미담으로 치환되기에 이르렀고, 30년가량이 지난 1932년 10월 1일 수원재향군인분회(水原在鄕軍人分會)의 주도로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던 것이다. 높이 23척에 달하는 이 비석에는 오시마 혼성여단의 참모였던 나가오카 가이시(長岡外史)의 글씨를 받아 “갑오역 코시 소좌 의사지비(甲午役古志少佐義死之碑)”라는 편액이 부착되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결과적으로 그의 자결 또한 끝내 의로운 죽음으로 승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이미 30여 년 전에 있었던 청일전쟁 당시 과장된 전공이 만들어낸 전쟁영웅의 이미지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반복 소비되는 상황이 이어졌던 것이다. 이것이 일본제국이 벌인 또 다른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독려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 아닌가 한다.

금, 2019/02/22-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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