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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과 함께하는 시민역사강좌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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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과 함께하는 시민역사강좌 열려

admin | 화, 2021/07/27- 23:51

[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과 함께하는 시민역사강좌 열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에서 주관하는 민간연계 시민대학에 3년 연속으로 선정되어 시민역사강좌를 개최하였다. 6월 29일부터 9월 14일까지 3개월 간 진행되는 시민역사강좌는 ‘프로그램Ⅰ: 내일을 여는 선언-우리시대 표상이 된 가치들과 그 역사’ 5꼭지와 ‘프로그램Ⅱ: 한일역사부정론의 궤변’ 5꼭지로 구성되며,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식민지역사박물관 5층 강의장에서 온라인 ZOOM
화상강좌로 진행하고 있다. 수강생은 일반 시민과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 등이 참여하고 있는데, 20대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 분포를 보인다. 비대면으로 진행하는
강의지만 꾸준하게 매주 30여 명이 참여하여 시민강좌에 대한 열의를 보여주고 있다.
프로그램Ⅰ은 노동, 여성, 난민, 동물생명권, 지역을 주제로 한국현대사에서 변혁을 위해 외쳐진 각 분야의 선언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고 우리시대가 현재 지향하고 있는 다음 사회의 모습을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8월 17일부터 진행할 프로그램Ⅱ의 기획 의도는 현재의 일본과 한국에서 나타나는 역사부정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자행된 강제동원의 문제를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을 이열치열로 이겨내려는 참여자들의 열기는 우리 사회현상의 변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시민사회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실천적 움직임으로 승화하고 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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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대의 고정관념 허물기(2)

– 이호철의 한국문단 종횡기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연줄로 미군 JACK부대 경비원이 되었는데, 마침 종군작가로 해군중령이었던 염상섭의 조카와 그 딸이 같이 근무하는 걸 알고 그 소개로 자기 소설을 염상섭에게 전하게 되어 싹수가 있다는 촌평을 들었다. 1953년(22살), 미군 기관 경비원으로 상경한 그는 황순원과 연이 닿아 문예살롱으로 찾아가 소설 습작을 본격화했다.
1954년, 한국은 예술원을 설립했는데, 초대 회원으로 염상섭 박종화(이상 서울 출신), 김동리 조연현 유치진(이상 경상도 출신), 서정주(호남) 윤백남(공주 출신)으로 월남 문학인은 전무했다. 제2대에야 황순원(평남) 이헌구(함북 명천) 모윤숙(함남)이 김말봉(부산) 곽종원(경북 고령)과 함께 추가되었고, 1960년에는 신석초(충남 서천) 박영준(평남 강서)이 추가됐다. 그러나 주요한 오상순 유치환 김광균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광섭 김동명 신석정 이은상 노천명 김현승 김용호 등 시인, 주요섭 안수길 계용묵 박계주 정비석 오영수 등 작가, 김팔봉 백철 등 평론가들은 초기에 소외되어 있었다. 이 명단을 참고하면 예술원의 편파성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이게 한국문단을 파벌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황순원과 인연을 맺은 이호철이 보기에 한국문단은 조연현과 <현대문학>의 독무대였다. 예술원이 발족하자 이에 대한 반감으로 한국자유문학자협회가 창립(1955.4)되었는데, 위원장 김광섭, 부위원장 이무영, 백철 모윤숙 김팔봉 서항석 이헌구 등이 주도했다. 문단 비주류 파인 한국자유문학자협회는 기관지로 <자유문학>(1956.6)을 창간했으나 1963년 8월호 통권 71호로 종간됐다. 비록 단명으로 끝났지만 <자유문학>은 <현대문학>과는 달리 현실비판 의식이 강한 작가 남정현 최인훈 박용숙 유현종 등과 시인 권용태 황명걸 이세방 등을 등단시켰다.
역시 비주류파가 주동이 되어 나온 <문학예술>은 1954년 4월에 창간했는데, 주간 오영진 편집 박남수 부주간 원응서 등이었다. 사무실은 <사상계>가 있던 한청빌딩 3층으로 장준하의 호의로 10평 정도의 공간을 사용했는데, 2호까지는 <문학과 예술>, 3호부터 ‘과’가 빠졌다. 조연현의 <현대문학>과는 달리 외국문학에 지면을 대폭 할애한 게 특징이었다.
<문학예술> 등단자로는 평론가 유종호 이어령 이환 이교창, 소설가 이호철 최상규 조백우 선우휘 송병수 김성원 송원희, 시인 박희진 박성룡 인태성 성찬경 신경림 민재식 이희철 조영서 신기선 이일 임종국 허만하 등을 배출했다. 1957년 12월 33호로 종료됐는데, 이 계열의 문인들은 나중 <사상계>로 합류했다.
<사상계>에서는 조연현을 사갈시했다고 이호철은 증언하는데, 그러나 조연현은 “다부진 배짱이며 날카로운 평론으로서는 당대 1급”이며 명강의로 유명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사상계>가 문학인뿐만 아니라 함석헌 신상초 지명관 안병욱(다 북한출신) 등 문사철 지식인들에다 김팔봉 백철 안수길 손우성 여석기 나영균 김진만 김붕구 등 외국문학자들, 그리고 <문학예술> 출신 문인들의 대거 활약으로 한국 지성사의 풍토가 변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이승만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초기 동인문학상 수상자는 거의 북한 출신으로 채워졌다. 1회(1956) 김성한 「바비도」, 2회(1957) 선우휘 「불꽃」, 3회(1958) 오상원 「모반」, 4회(1959) 손창섭 「잉여인간」, 5회(1960) 이범선 「오발탄」과 서기원 「이 성숙한 밤의 포옹」 공동수상, 6회(1961) 남정현 「너는 뭐냐」, 7회(1962) 전광용 「꺼삐딴리」, 7회 이호철 「닳아지는 날들」로 이 중 남한 출신은 서기원과 남정현 둘뿐이었다.

문단 비주류에 뿌리 내리기
1955년(24살), <문학예술> 7월호에 「탈향」으로 문단의 첫 관문을 통과한 이호철의 앞길은 창창했다. 그러나 고향 선배 S에게 미군부대를 그만 두고 교사로 취직시켜준다는 사기에 걸려들기 직전까지 갔던 이호철은 황순원의 소개로 출판사 광문사에 취직. 이후 홍릉, 삼선동, 청운동 등지로 옮겨가며 하숙생활을 했다.
1958년(27살), 이호철은 단편 「여분의 인간들」을 <사상계>에 게재하면서 장준하와 교분을 텄고 함석헌과도 알게 되었다. <사상계>에는 작가 한남철이 근무하며, <현대문학>에서 소외된 문인들의 거점이 되었다.
자유당 치하의 살벌했던 시절에 이호철은 조봉암의 진보당 비밀 청년회원이었고, 이로 인해 조봉암 사건(1958년 1월 구속, 1959년 7.31. 처형) 이후 그 천하태평의 이호철도 약간은 전전긍긍했다고 <우리네 문단골 이야기>(자유문고, 2018)에서 털어놓았다. 아마 가입 후 별 활동은 없었던 듯하나, 그 계열의 인사들과의 교류는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의 문단 질서가 4·19와 5·16 이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되었는데, 이호철은 5·16 직후 서정주가 국문학자 조윤제와 연루되어 잠시 검거됐던 사실을 놓치지 않고 증언해 주기도 할만큼 오지랖이 넓었다.
1960년(29살), 판문점을 방문한 이호철은 북한 기자에게 이종사촌 형(소련 유학 간 형) 이름을 대니 경제학 강의를 들었다고 해서 놀랐다. 이듬해에 다시 판문점에 가니 이대 출신 여기자가 팔꿈치로 그를 건드리며 “뭘 그런걸(소설 「판문점」, <사상계>, 1961.3 게재) 써설라므니 그 동무를 이젠 이쪽에는 못 나오게 해요”라는 말을 들었다. 바로 소설 「판문점」의 후일담인데, 이호철이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소설처럼 남남북녀가 애정 표현을 짙게 하진 않았고 다만 몇 마디 대화만 오가면서 눈길에 호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소설에 나타난 바로는 마치 북녀(북측 여기자)가 남남(남측 남자 기자)에게 말려들어버린 것처럼 묘사되어 그 여기자가 판문점 출입을 봉쇄당했다는 후일담이다. 예기치 못한 남북 간의 첫 필화가 발생한 셈이다.
이 무렵 이호철은 청운동 꼭대기에서 하숙하며 한남철과 의기투합, 그를 통해 나중 기업인이자 문화운동가이며 교육자인 채현국과 평론가 백낙청 등 많은 인사들을 만나게 되었다. 1961년(31살), 첫 창작집 <나상>(사상계사)으로 제7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5·16 쿠데타 직후인 6·17포고령 제6호로 모든 분야의 사회단체가 해산당하고 단일화조치로 한국문인협회가 결성되었다. 한국문인협회는 조연현이 주도해 전영택(1963년까지), 박종화 (1969년까지) 이사장 체제로 온존되었다. 1964년(33살), 박정희 정권이 일방적으로 추진했던 불평등한 한일협정 체결 반대를 위한 6·3항쟁사태 무렵 작가는 명보극장 앞 초동 골목에서 하숙하며 <소시민>을 연재(<세대>)했다.
이듬해 1월 9일 밤, 명동에서 전혜린, 전채린 자매, 작가 김승옥 등등과 술을 마시다가 김승옥을 데리고 초동 하숙방으로 갔는데, 이때 김승옥은 스케치 <1965년 1월의 이호철>을 그렸고, 그 이튿날 아침 전혜린은 작고하여 충격을 주었다.
한국 문단사와 지성사에 일대 전환기를 이룩한 시기를 이호철은 1966년으로 잡는데, 이때 그는 원효로로 하숙(1966년 봄)을 옮겼고, <서울은 만원이다>(<동아일보>)를 연재했는데, 이 해에 <창작과 비평>(1966.1.겨울호)이 창간됐다. 문우출판사(文友出版社, 7호까지), 일조각(一潮閣, 14호까지)을 거쳐 1969년 가을·겨울 합병호인 제15호부터 창작과비평사 발행으로 정착됐다. 1967년(36살) 1월, 조민자와 결혼한 이호철은 문단의 호남 총각으로 한때는 최정희가 사윗감으로 탐내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해 10월, 세계문화자유회의(1950년 베를린에서 창립, 한국지부는 1961년 시이덴스티커 등이 내한하면서 개설) 주관으로 워커힐에서 ‘작가와 사회’ 세미나가 열렸다. 세계문화자유회의는 미 CIA가 배후라고 <뉴욕타임즈>가 이미 1966.4에 시리즈로 폭로했기에 온갖 유언비어가 떠돌던 행사였다. 이후 한국문단과 지식인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이데올로기적인 틈새를 보여주는 순수-참여논쟁이 끈질기게 전개되었다. 물론 이 세미나는 참여문학을 봉쇄하기 위한 기획이었으나 논쟁은 참여문학의 불가피성으로 여론이 변해갔다.
사이덴스티커(Edward George Seidensticker 1921~2007)는 콜로라도 출신으로 일문학을 전공,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를 번역하여 노벨상(1968년 수상)을 받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설국(雪國, Snow Country)>의 첫 구절 “國境の長ぃトンネルを拔けると雪國でぁった”)을 “The train came out of the long boder tunnel into the snow country”(열차는 국경의 긴 터널을 나와 설국으로 들어섰다)로 의역하여 원문보다 더 빛나는 문장을 창작했다는 평을 받을 정도였다. 여기서 말하는 터널은 시미즈(淸水)이며, 국경(國境)은 ‘콧쿄’가 아닌 ‘쿠니 자카이’(지방 행정 경계)이다.
이 무렵 한국에서는 미‧일의 숭배열이 극에 달했던 터라 사이덴스티커의 명성은 대단해서 한국 펜클럽엘 자주 들락거리며 거드름을 피워 나같은 신진 평론가는 그를 존경의 염으로 바라봤는데, 지금 생각하니 오롯이 억울하다. 그러나 그 당시 그가 참석하여 창립한 세계문화자유회의는 위풍당당했다. 워커힐에서의 이 세미나에서 불문학자 김봉구가 ‘작가와 사회’란 주제로 발제를 하면서 참여문학과 사르트르를 맹공했다. 이 발제는 치열한 공방전을 야기, 남정현 임중빈 등이 정면으로 반박한 데 이어 전 문단이 참여문학 논쟁으로 토론장화했다. 이호철은 「작가의 현장과 세속의 현장」(<동아일보>, 1967.10.21.)에서 “그 시대 사회의 도덕적 위기나 사회적인 문제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제때제때에 경고를 발하는 것은 작가다”라고 주장했다. 이호철이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든 신호탄이었고, 이 논쟁은 1968년까지 지속됐다. 바로 참여문학을 압살하기 위한 일환이었음이 드러난 것은 그뒤의 일이다. 이 논쟁의 끝자락에서 김수영(1968년 작고), 신동엽(1969년 작고) 두 시인이 타계한 것은 무척 애석한 일이다.
이호철에게 한국의 기성 비평문학은 임화와 백철, 조연현의 삼각구도로 비춰졌다. 최일수를 비롯한 몇몇을 임화 계열로 본 그는 중도론자인 백철에 대해 그리 신뢰감을 주지 않은 대신 문단적으로는 맹비난하면서도 조연현과 작가 김동리를 높이 평가했는데, 이건 필시 중년기를 지난 만년의 작가의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내가 들은 바로는 1980년대까지의 이호철은 조연현(1981 작고)의 문단 주도에 대해서는 강력한 반감과 비판이 지속됐다. 중년기의 이호철은 <현대문학>과 조연현 지배체제의 문단 위계론에 매우 날카롭고 싸늘하게 대했는데, 만년에 너그러워진 관점이 반영된 것이 <우리네 문단골 이야기>이다. 필시 이런 관점은 1987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를 떠난 이후 그의 문단 친밀도와 문학관에 변화가 생긴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의 한가운데서 김질락을 비롯한 통일혁명당(1968년 구속 사태 일어남)의 일부 활동가들과 그 월간지 <청맥> 인사들과의 교우도 특기할 만하다. 이 정도로도 이호철의 활약상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이었음을 알 만하다. 당시 <청맥> 편집실에서는 한국문단 작가로는 김승옥, 시인으로는 주성윤, 평론가로는 조동일을 높이 평가했다.
불광동으로 이사(1968)한 이호철 작가는 무남독녀 이윤정을 얻었고, 장편 <공복사회>(홍익출판사), 작품집 <자유만복>(서음출판사) 등을 내며 한국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 무렵 모윤숙은 화양동 자택에서 ‘라운드 클럽’이라는 비공개 친목단체를 만들어 그 클럽회원들의 사교와 자유로운 토론을 월 1회씩 개최했다. 김광섭 박종화 이헌구 전숙희 이호철 남정현 최인훈 박용숙 이철범 김후란 등 20여 명의 문단 비정통파들이 참여했으며, 그 밀착도는 아주 높았다.
이호철은 회고록에서 펜클럽 주최 대구 마산 부산 등지의 강연 때 곽복록(펜클럽 전무이사, 당시 서강대 독문과 교수)의 요청으로 모윤숙에게 보고 사항이 있는데 상대가 할머니지만 여성이라 혼자 가기엔 찜찜하대서 함께 들어갔는데 그냥 누운 채였던 그녀는 스스럼없이 양해하라고 했다. 넉살 좋은 이호철은 안마나 해드릴까요 하니 모윤숙은 “고향 젊은이에게 안마 한번 받아 보자꾸나”라고 선뜻 응낙하여 “파자마 입으신 엉덩이를 타고 앉아 그렇게 등을 두드리고 주무르면서 능청 섞어” 한 말이 “모 여사님 등허리를 이렇게 타고 앉기는, 하나, 둘, 셋, 그러니까 내가 네 번째 정도나 될까요?”했다. 춘원, 안호상, 인도의 메논을 빗댄 이 멘트에 통큰 모윤숙도 참지 못하고 “비켜라, 이눔 자식”하며 와락 등을 흔들어 이호철을 떼어냈다. 물론 그런 일로 꽁할 모윤숙은 아니다.

문학인 민주화 운동 1세대
1970년(39살)은 한국문인협회에 일대 파란이 일어난 해였다. 문단에 감투 바람이 일어난 것은 이 해에 김동리가 박종화에 도전하면서였다. 형식적인 선거로 월탄을 묻지 마 추대해오던 문단에서 김동리가 이사장 출마로 도전하자 월탄을 지지하던 조연현이 대립각을 세웠다.
우정도 감투 앞에서는 쪼개지고 마는가. 김동리 지지파에는 강용준 하근찬 박경수 이문희 송병수 정인영 이문구 등 작가에다 정창범 김상일 구인환 등 평론가가 뛰어들어 김동리의 승리(1973년까지 이사장)를 견인했다. 김동리 체제의 한국문인협회에 이문구가 근무하면서 참여문학 쪽 문인들과 문학과지성 쪽 문인들의 출입이 잦아졌는데, 이호철도 그중의 한 분이었다.
이후 문인협회는 조연현(1973~1976), 서정주(~1978), 조연현(~1982), 김동리(~1988), 조병화(~1991)로 이어졌다.
1971년(40살), 명동 대성빌딩에서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발족(4‧19)했다.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 3인 대표에 함석헌 지학순 장일순 법정 이호철 등 운영위원, 사무국장 전덕용이었다. 이호철은 이 단체에 가입하게 된 계기가 한남철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1971년은 4‧27대통령선거(박정희와 김대중의 대결)에 이어 5‧25총선이 겹쳤던 해로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선거감시를 주요 투쟁목표로 삼아 범국민적인 참관인단을 모집, 전국적으로 파견했다. 문학인으로는 이호철 남정현 박용숙 권일송 구중서 박태순 한남철 신상웅 임헌영 등이 참여, “총칼에 의하여 짓밟힌 민주주의가 나약한 종이와 인주에 의해서 도로 찾아지기를 실로 열망”하였으나, “사탄이 성서를 인용하듯이 이번 선거야말로 다시 한번 정상배가 선
거라는 요식행위를 거쳐 자기 합리화의 구실”로 삼은 “총성 없는 또 하나의 조용한 쿠데타”라고 논평하였다.
문인협회의 감투싸움 태풍이 1971년 펜클럽에도 닥쳤다. 1954년에 설립된 국제펜클럽 한국본부는 변영로(1~2대 대표) 정인섭(3대) 주요섭(4~5대) 모윤숙(6대) 주요섭(7~9대)에 이어 백철이 10~19대(1963~1978)에 걸쳐 장기집권할 정도로 무풍지대였다. 1966년부터 계속 부회장을 맡았던 모윤숙이 1971년에 회장에 도전했는데, 문제는 문단의 중견들이 거의 그녀를 지지한 것이었다. 위로는 안수길부터 전광용, 조병화 등에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이호철, 남정현, 박용숙 등이 모윤숙 시인 추대(라운드 클럽 회원들)에 적극성을 띄어 가히 전투적이라 할 정도였다. 펜 선거에 낙방한 모윤숙은 몇 달 뒤 총선 때 공화당 전국구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1972) 유신독재로 금배지를 떼야 했다. 신출내기 평론가로 펜클럽 최연소 이사였던 나로서는 백철, 조병화(둘 다 東京高師 출신) 두 거물 스승 사이에 끼인 새우 꼴이었지만 굳이 촌수를 따진다면 은사였던 백철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아마 이때가 내 문단생활 중 가장 난처한 시기였을 것이다. 더구나 백철의 당선으로 막을 내리자 모윤숙 지지자들은 그 앙금을 꽤나 오랫동안 간직한 채 씹어댔다. 심지어 조병화는 한동안 나에게 만날 때마다 이 문제를 거론하곤 했다. 모윤숙이 다시 펜 대표가 된 것은 1979~1982년이었다.
1972년(41살), 7‧4남북공동성명이 있는 등 서광이 비칠 듯했던 한반도는 불과 석 달 뒤에 암흑의 유신시대로 접어들었다. 이호철은 펜클럽 일본문학 심포지엄에 참여, 15일간 여행 중 원산중학 동기로 작가가 된 고토 메이세이도 만나 옛 정을 나눴다. 작품집 <큰산>(정음사), 이회성의 <다듬이질 하는 여인>(정음사) 번역으로 이호철은 인기 절정이었다. 조총련에서 전향한 이회성은 이호철과 아주 가까이 지냈다. 당시 이회성의 소설은 한국의 진보적인 독자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유신독재 치하의 한국을 본격적으로 다룬 <금단의 땅>(미래사, 1988)은 이호철, 김석희 공역으로 논쟁의 폭풍을 자아냈다. 5‧16쿠데타 세력에 의한 유신독재를 이 소설은 신랄하게 비판했다.
1973년(42살) 1월, 육군본부 주선으로 베트남 파병 국군방문 작가단에 김광림 고은 최인훈 등과 함께 참여, 사이공 퀴논 나트랑 등을 두루 다녀왔다. 이 해 10월에는 육영수의 나주 나환자촌 방문에 동행 요청을 받고 한하운과 함께 갔다. 이호철은 초청 전화를 받고 자신이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서 활동하는 걸 모르고 있나 망설이다가 참여하면서도 끝내 육영수와 함께하는 사진은 교묘히 피했다는 걸 자랑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선거(1973)에서 기존 김동리에 조연현이 도전했다. 이문구가 김동리를 결사적으로 옹위했기 때문에 이호철도 반 조연현 편이었다. 총 회원 971명 중 조연현 334표, 김동리 284표였다. 이에 이문구는 삭발로 그 분노를 삭였다. 패배 원인이 문학지의 부재로 본 김동리는 <한국문학>을 창간, 이문구가 편집을 맡았다. 1976년 경영난으로 이근배에게 넘어간 이 잡지는 이내 조정래가 인수했다가 이후에는 홍상화가 맡았다.
1974년(43살), 1월 7일 문학인들이 유신헌법을 반대하여 시국성명을 내자마자 박정희 독재정권은 긴급조치를 선포(1.8)했다. 시국성명에 서명한 문인들을 중앙정보부가 일일이 탐방하여 반성문을 작성하던 중 문인간첩단사건(1.14, 보안사 연행)이 터졌다. 바로 이 글 맨 앞 장면에서 묘사한 것이 이때의 이호철의 보안사 연행이다. 작가 이호철과 정을병, 평론가 김우종과 장백일, 그리고 임헌영으로 엮어진 문학인 간첩단 사건은 간첩 조작 사건의 사례로 국제적인 비판여론을 일으켜서 엠네스티에서는 <남한의 5명의 솔제니친>이란 팜플렛을 제작하여 뿌렸다. 이 옥중 체험기를 이호철은 연작으로 묶어 장편소설 <문>이란 제목으로 냈는데, 실록이라
할 만큼 사실에 충실했다, 다만 등장인물은 물론이고 지명이나 학교명 등을 바꿔버려 독자들에게 혼란을 자아내기에 여기서 그 인물들의 실명을 밝혀둔다.
1970년 한국에서 개최되었던 국제펜대회 때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함께 기념 촬영한 화보에 등장하는 문인들은 박철(백철, 괄호 안은 실명), 고인숙(모윤숙), 한모모(이호철) 등이다.(문학세계 판 <문>, 32쪽, 이하 쪽수만 표시함)
서대문구치소에 갇힌 이호철에게 사과 서른 개를 영치물로 넣어준 것은 천상수(천승세, 39쪽)이며, 구치소 부소장실로 취조차 나온 건 이 검사(이창우, 47쪽), 북쪽 고향의 출신학교는 원강고급중학교(원산고급중학, 59쪽)이며, 장정후(장준하, 74쪽), 재일 동포 잡지는 <한성>(<한양>, 95쪽)이다. 5명의 문인간첩단 사건 연루자는 조알봉(정을병), 안한웅(임헌영), 장북일(장백일), 곽어중(김우종)이다.(145쪽) 공변호사(강신옥, 151쪽), 현 변호사(한승헌, 154쪽), 김종려(김정례, 164쪽) 등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김정례는 여성유권자연맹을 이끌던 투사로 김철 통일사회당 당수(김한길의 아버지)와 항상 함께 검사실을 방문, 다섯 문학인들에게 온갖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을 추가해둔다.
한웅(함석헌, 166쪽), 차검사(최상엽, 168쪽), 정광우(전병용, 213쪽)도 자주 등장한다. 전병용은 교도관으로 서대문교도소에서 많은 정치범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해준 이후 1987년 박종철 사건 폭로에 일조해서 더욱 유명해졌는데, 이 체험을 <감방별곡>(공동체, 1990)이란 저서로 묶어냈고, 영화(<1987>)에도 등장했다.
“곽이중(김우종)을 맡은 늙은 변호사”(219쪽)는 권순영 변호사다. 그는 1955년 희대의 플레이보이 박인수 사건 제1심을 맡았던 판사로서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취지로 혼인빙자 간음죄에 무죄를 내린 것으로 유명했다. 백고안(227쪽)은 백기완이다.
문학인간첩단 사건을 주관했던 기관은 육군보안사령부 대공처였고, 당시 처장은 김교련, 사건담당관은 우리들 앞에서 ‘강 전무’로 호칭했는데, 전두환 독재 때 언론 통폐합을 맡았고 민정당 조직국장과 사무차장을 지낸 공주 출신 이상재 의원이었다.
1975년(44살),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선거에 이호철이 출마, 조연현과 맞대결했다. 출마 첫 제의는 한남철이 했고, 고은이 선거총책을 맡고 이문구 박태순 이시영 송기원 손춘익 등이 적극 뛰었으나 총회원 1,180명 중 조연현 528표, 이호철 266표였다. 이미 결과를 예측했으면서도 기존 문단에 경종을 울리려는 것이 이호철의 속내였다.
1978년(47살), 김지하 석방 기도회 참석 후 ‘노래’ 사건으로 원주에서 구류를 살았고, 이듬해에는 박정희 피살 직후 계엄 치하에서 YWCA강당에서 항의집회를 위한 위장 결혼식 사건으로 구류를 살았다.
1979년 10월에 나는 모종의 사건으로 다시 투옥(1983년 출옥)되어 이호철 작가의 활동 주변에서 멀어져 버렸기에 기록에 따라 그 뒤 경력을 정리한다.

광주시민항쟁 이후
1980년 5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된 이호철은 남산 지하실에서 2개월간 조사를 받은 뒤 육군본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서대문구치소 9사 상 37방에 갇혔던 그는 징역 3년6개월 선고를 받았으나 11월 4일 석방됐다. 워낙 산을 좋아했던 이호철은 1950년대 중반부터 등산을 즐겼는데, 언젠가부터 이돈명 백낙청 변형윤 박현채 송건호 리영희 박중기 조태일 등과 매주 일요일 북한산으로 오르게 되면서 거시기산악회가 형성됐다.
작품집 <월남한 사람들>(심설당, 1981)을 낼 무렵부터 중앙일보 문화센터에 출강, 창작강의를 하면서 후진 양성에 진력했는데, 중견작가 박충훈을 비롯한 30여 명의 작가들이 문향회를조직, 동인지 <서울 소나무>를 10집까지 출간했다.
1985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를 맡은 이호철은 역사상황소설 <까레이 우라>(한겨레, 1986), 작품집<탈사육자회의>(정음문화, 1986), 등단 30주년 기념 작품집 <천상천하>(산하, 1986), 수필집 <명사십리 해당화>(한길사, 1986) 등을 냈다. 1987년, 전두환의 호언선언인 4‧13조치 반대 투쟁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 6‧29선언을 맞은 그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를 사임했지만 변혁을 위한 투쟁의 정신은 그대로여서, 번역본 <푸시킨과 12월혁명>(실천문학), 정경모의 <일본의 본질을 묻는다>(창비)를 냈다. 청계연구소(대표 손세일)에서 <이호철 전집> 기획(1991년까지 7권 출간했다), <퇴역선임하사>(고려원, 1989), <네겹 두른 족속들>(미래사, 1989), 산문집 <凹凸과 지그재그론>(푸른숲, 1990) 등을 출간했다.
1991년(61살) 10월, 약 50일간 소련 폴란드 헝가리 독일 이태리 프랑스 등 취재여행을 다녔는데, 이 기행 때 소련에서 김레호를 만났다. 함흥사범 출신으로 소련에 유학한 그는 이호철 작가의 육촌 형도 함께 유학해서 잘 아는 사이였다. 귀국 않고 소련에 체재한 김레호는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 교수였는데, 그를 보며 작가는 자신이 북에서 소련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면 저랬을까 만감이 교차했다고 말했다. 이듬해 이 기행을 <세기말의 사상기행>(세계일보, 1992)으로 연재, 민음사에서 단행본으로 1993년 출간했다.
이 무렵, 연변작가들이 자주 모국을 방문했는데, 연변작가의 집 건립을 위한 캠페인에 이호철은 앞장서서 적극 도와주었고, 이를 계기로 이호철은 김학철, 이근전 등과 교유를 맺었다. 예술원 회원(1992)이 된 작가는 장편 <개화와 척사>(민족과 문학사, 1992), <한살림 통일론>(정우사, 1999)을 냈다.
<한살림 통일론>은 통일론 중 특이한 견해를 담아내고 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이호철의 문단활동은 변곡점을 그린다. 그 이후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서울 은평구청 주관 이호철 통일로문학상이 2017년 제정되어, ① 기념 세미나에서 발제한 글, ② 앞의 글을 수정 보완하여 <동리목월문학>, 2017, 겨울 게재, ③ 「해설」 이호철, <우리네 문단골 이야기> 전2권, 자유문고, 2018, 위 3가지를 보완)

수, 2020/12/30-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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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65 ]

일제패망기에 매달 8일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 까닭

이른바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은 전시체제를 다잡는 날

 

이순운 책임연구원

보라, 성전(聖戰) 이에 3년, 다시 겨울은
복수의 날, 해방의 아침, 잊을 수 없는 8일을 맞이하네.
그대 아는가, 아시아의 수호신은 무쇠가 아니라
아시아의 수호신은 일억(一億)의 피, 젊은이의 치솟는 혈기.
피는 쇠보다 강하며 아시아는 하나의 피
무엇인가 능히 깨뜨릴 수 있는 불괴(不壞)의 결속임을.
그렇다면 이날 우리들은 붓을 던져 검을 들고
내일은 또 그대와 저 넓은 하늘에 서로 마주하리라.
마음은 오로지 달려가네, 마유하(マユ河, 버마 인도 접경지)의 선혈에

혈관은 힘차게 뛰는 산호도(珊瑚島)의 총탄빗발.
용서하라 벗이여, 눈물을, 우리들의 두 뺨에
쏟아지게 잠시 흐르도록 내버려 두어라.
보아라 그대, 아시아의 수호신이야말로 참으로
무쇠가 아니라, 탄약더미가 아니라
실로, 그것은 오직 십억(十億)의 분노에 찬 눈물
젊은이의 치솟는 혈기와 뒤섞인 뜨거운 눈물인 것을.

 

뭐가 이런 정신 나간 글이 있나 싶지만, 이것은 <경성일보> 1943년 12월 8일자에 수록된 「12월 8일의 맹서」라는 시(詩)의 전문이다. 여기에 그려진 삽화는 에구치 케이시로(江口敬四郞)의 것이고, 글은 마츠무라 코이치(松村紘一)가 썼다. 이 이름은 다름 아닌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창씨명이다.
일제패망기의 12월 8일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 날이다. 이른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태평양전쟁)’의 시작이 바로 이날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미국령 하와이 진주만 해군기지와 필리핀 클라크공군기지에 대한 기습공격과 영국령 말레이반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신호탄으로 하여 대미대영 선전포고(對美對英 宣戰布告)의 조서(詔書)가 내려진 것이 이날이고, 그 내용은 이렇게 이어진다.

 

<매일신보> 1941년 12월 9일자에 수록된 ‘대미대영 선전포고 조서’의 내용과 관련보도이다.

 

천우(天佑)를 보유(保有)하야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조(天祚)를 천(踐)하는 대일본제국천황(大日本帝國天皇)은 소(昭)히 충성용무(忠誠勇武)한 여유중(汝有衆)에 시(示)하노라. 짐(朕) 자(玆)에 미국 급 영국(米國 及 英國)에 대(對)하야 전(戰)을 선(宣)하노니 짐(朕)의 육해장병(陸海將兵)은 전력(全力)을 분(奮)하야 교전(交戰)에 종사(從事)하고 짐(朕)의 백료유사(百僚有司)는 여정직무(勵精職務)를 봉행(奉行)하고 짐(朕)의 중서(衆庶)는 각각(各各) 기본분(其本分)을 진(盡)하야 억조일심(億兆一心) 국가(國家)의 총력(總力)을 거(擧)하야 정전(征戰)의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기에 유감(遺算) 없기를 기(期)하라. (하략)

 

이로써 ‘만주사변’과 ‘지나사변(중일전쟁)’을 거쳐 그 끝을 모르게 이어지던 일제의 침략전쟁은 마침내 세계대전으로 확대된 상황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와중에 전쟁물자와 병력을 끌어내기 위한 총력동원(總力動員)의 속도는 점차 빨라졌고, 그만큼 전시체제의 일상화는 그 강도가 훨씬 더해졌다. 여기에 덧붙여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이란 것이 설정되어 매달 8일 마다 국운(國運)을 건 전쟁에 대한 마음가짐을 새로 다잡도록 강요되었다.

 

<매일신보> 1942년 1월 3일자에 수록된 ‘대조봉대일’ 설정 관련 내각고유의 내용과 관련보도이다. 이로써 일제 패망에 이르기까지 매달 8일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날로 자리매김되었다.

 

<경성일보> 1942년 12월 8일자에는 ‘대미대영 선전포고 조서’의 1주년을 맞이하는 상황에서 제작된 ‘대동아전쟁황군전과약도(大東亞戰爭皇軍戰果略圖)’가 수록되어 있다.

 

<매일신보> 1942년 1월 3일자에는 각의결정(閣議決定)에 따라 ‘대조봉대일’이 새로 제정된 내용에 관한 ‘내각고유(內閣告諭)’가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소화(昭和) 16년(1941년) 12월 8일 황공(惶恐)하옵게도 대조(大詔)를 환발(渙發)하옵시어 미국(米國)과 영국(英國)에 대(對)하사 전(戰)을 선(宣)하야 황국(皇國)의 태도(態度)와 국민(國民)의 향(嚮)할 바를 소시(昭示)하옵시니 오직 공구감격(恐懼感激)에 불감(不堪)한다.
황국(皇國)의 융체(隆替)와 동아(東亞)의 흥폐(興廢)는 정(正)히 이 전쟁(戰爭)에 달려 있는바 전국(全國)의 민초(民草)는 감격(感激) 오직 감격(感激)하야 받들고 추(醜)의 어순(御楯)으로서 분기(奮起)하여 극진극감(克盡克堪)하야 웅혼심원(雄渾深遠)한 황모(皇謨)의 익찬(翼贊)에 유감(遺憾)이 없기를 맹서(盟誓)치 않음이 없다.
실(實)로 8일(八日)이야말로 황국(皇國)에 생(生)을 향(享)할 자(者)는 다 같이 영원(永遠)히 망각(忘却)할 수 없는 날이다. 신질서건설(新秩序建設)의 대사명(大使命)을 부하(負荷)한 기념(記念)할 날이다. 따라서 이에 소화(昭和) 17년(1942년) 1월(月) 이강(以降)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의 완수(完遂)에 이르기까지 매월 8일을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로 정(定)한다. 즉(卽) 전국민(全國民)은 이날을 상시실천(常時實踐)의 원천(源泉)으로 앙(仰)하고 순일무잡(純一無雜) 오로지 대어심(大御心)을 봉대(奉戴)하야 각각(各々) 그 본분(本分)에 정려봉행(精勵奉行)하고 더욱 국가총력(國家總力)을 확충발휘(擴充發揮)하야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종국(終局)의 목적완수(目的完遂)에 정신(挺身)하야써 성지(
聖旨)에 봉응(奉應)하기를 기(期)하라.
그런데 이에 반(伴)하야 흥아봉공일(興亞奉公日)은 이를 폐지(廢止)하고 그 취지(趣旨)로 한 바는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로 발전귀일(發展歸一)케 하기로 되었다.
소화(昭和) 17년(1942년) 1월 2일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도죠 히데키(東條英機)

 

이에 따라 1942년 1월 8일이 제1회 대조봉대일이 되었고, 그 이후 매달 8일이 되면 각 신문의 제호(題號) 위에는 원색으로 인쇄된 일장기(日章旗)를 덧붙이는 한편 1면 상단에는 ‘선전포고조서’의 전문이 그대로 재수록되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또한 각 학교, 마을, 직장, 관청 등 에서는 집회를 열고 결의(決意)를 새로 다지는 관련 행사를 진행하였으며, 이러한 상황은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8일의 제44회 대조봉대일에 이르기까지 거듭 반복되었다.
이른바 ‘대조봉대일’에 이뤄지는 행사에 대해서는 국민총력 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에서 제정한 「대조봉대일 운영에 관한 건」 제하의 문건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상회(常會)’의 진행 방식을 소개하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매월 8일 조(朝) 반드시 정동리부락연맹(町洞里部落聯盟)에서 ‘대조봉대일 상회’를 개최할 것. 개최시각은 상회에 대한 방송시각에 합치되도록 할 것. (4월~10월 오전 6시 30분, 11월~3월 오전 7시 30분) 각종연맹(各種聯盟)은 전항과 다른 시각에 같은 상회를 가질 것. [당일 휴일일 때는 익일(翌日)에 조하(繰下)할 수 있음]
(나) 상회 개최 시간은 대개 30분을 한도로 할 것.
(다) 정동리부락연맹의 상회에는 반드시 일가(一家)의 주인(主人)이 출석하고 주인이 사고(事故)가 있을 시는 주부(主婦)가 이를 대신할 것.
(라) 참회자(參會者)의 정렬, 정돈, 동작 등은 정연(整然) 규율(規律) 있게 하고 또한 지각 및 조퇴자가 없도록 할 것.
(마) 참회의 각 애국반(愛國班)은 반드시 반기(班旗)를 휴대할 것.
(바) 상회 회장(會場)에는 가급적 라디오 수신기(受信機)를 설비하고 라디오의 방송에 의하야 행사를 진행하고 또 방송강화(放送講話)를 청취하게 할 것.
(사) 상회행사의 순서는 좌(左)에 의할 것.
1. 국민총력(國民總力)의 노래 또는 애국반(愛國班)의 노래 (방송)
2. 개회, 국기게양[호령방송(號令放送)]
3. 국가합창(國歌合唱) [반주방송(伴奏放送)]
4. 궁성요배(宮城遙拜, 호령방송)
5. 묵도(默禱, 호령방송)
6. 강화(講和, 방송)
7. 신합사항(申合事項)
8. 전월(前月)의 보고
9.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사(誓詞) 제송(齊頌)
10. 만세봉창(萬歲奉唱)
11. 국기강하(國旗降下)
12. 해산
(아) 관공아(官公衙), 학교, 회사, 은행, 공장 및 이에 준할 단체의 각종 연맹 상회에 있어서는 조서(詔書)를 봉독(奉讀)할 것.
(자) 관공서, 학교, 회사, 공장 등에 근무하는 자도 정동리부락연맹 상회에 출석할 것.

 

그런데 대조봉대일의 제정에 관한 ‘내각고유’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말미에 기존의 ‘흥아봉공일(興亞奉公日)’은 폐지하고 그 취지는 대조봉대일에 합쳐지도록 한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대조봉대일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이미 특정일을 정하여 결전(決戰)의 의지를 고취하는 방식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러한 행사일의 연원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보았더니, 1937년 7월 7월에 발생한 이른바 ‘북지사변(北支事變, 노구교사건)’ 직후에 총독부 학무국에서 제정한 ‘학교애국일(學校愛國日)’에서 이러한 흔적의 초기 형태가 포착된다.

<매일신보> 1937년 8월 19일자에 수록된 ‘학교애국일’ 제정 관련 보도이다. 이것은 이른바 ‘지나사변’의 확대를 앞두고 학생아동을 통하여 총동원의 효과를 각 가정에 미치게 하려는 의도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7년 8월 19일자에 수록된 「9월 6일을 애국일(愛國日)로, 전 조선 대소학생층(大小學生層)에 시국인식의 강화기도, 이들을 통하여 각 가정에도 철저시킬터」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국가 초비상시에 직면하여 국민은 애국의 적성을 발로하고 있는데 총독부에서는 이 기회에 시국을 인식시키어 참말 내선일체를 강화 철저시키려고 전조선 각종단체를 총동원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에 학생 아동으로부터 가정에 및게 하고자 종래 관보부록으로 발행하고 있던 것을 전조선 120만의 학생아동을 통하여 각 가정에 배포시키게 되었다. 다시 오는 9월 6일에는 전조선 각 학교로 하여금 시국을 강조시키기 위하여 이날을 애국일(愛國日)로 정하고 국기의 게양(揭揚), 국가(國歌) 고창, 황거요배(皇居遙拜)를 하여 국민정신의 작흥조서(詔書)를 봉독하며 교장 혹은 군인관계자 등이 강연을 하여 시국에 대한 인식을 충분히 철저시키며 신사에 참배시키어 국위선양(國威宣揚)을 기원케 하여 당일은 전조선을 애국의 적성을 가지고 휩쓸게 할 터로 방금 학무국에서 구체안을 작성하여 근일중에 각 도지사와 관계방면에 통첩을 발하게 되었다.

 

원래는 이러한 학교애국일이란 것이 1회성으로 계획된 것이었던 모양이었으나, 이내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매달 6일에 정례적으로 실시하는 것으로 방침을 변경하였다. 이는 그해 9월 2일에 각의의 결정으로 ‘북지사변’의 명칭이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으로 변경될 만큼 중국 지역에서 전선이 계속 확대되는 상황이 급격히 전개되었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11월 16일에는 정무총감의 통첩(通牒)으로 각 지방의 사정에 따라 매월 1일 또는 15일에 ‘애국일(愛國日)’을 정하여 실시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학교애국일’도 역시 통상 매월 1일에 실시하는 ‘(일반) 애국일’과 통합하여 시행되도록 하였으나 이 둘은 실시주체가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여 12월 11일에는 정무총감의 통첩으로 다시 ‘학교애국일’을 분리하여 매달 6일에 실시하는 것으로 환원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매일신보> 1941년 11월 17일자에 소개된 카네무라 류사이(金村龍濟, 김용제의 창씨명)의 「애국일(愛國日)」이란 친일시(親日詩)를 보면, 이 당시에 매달 초하루에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행사의 풍경을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지상(地上)의 오늘을 싸울 신호(信號) ─ / 생명(生命)의 아침 부르는 이른 싸이렌 / 우렁찬 소리에 맑은 바람이 나서 / 별들이 꿈 자취 같이 남기고 간 / 흰 안개 선뜻 높이 개었다 / 상쾌(爽快)한 가슴 속까지 하늘 푸르다.
티끌 잦은 넓은 교정(校庭)에 / 그득 모인 수천(數千)의 애국반원(愛國班員)들 / 젊은 대밭 같이 들어선 반기(班旗)의 깃발 / 가을 짙은 단풍(丹楓)가지와 함구 / 황금색(黃金色) 가마귀 날개 살아 춤춘다.
동쪽 산(山) 위에 솟는 새로운 햇발에 / 게양탑(揭揚塔) 오르는 붉은 일장(日章)을 주목(注目)하면 / 희망(希望)의 상징(象徵) / 손속에 땀으로 되어 / 애국(愛國)하는 피 마음 전신(全身)에 타오른다.
지난 한 달의 발굽을 돌아보고 / 양심(良心)에 가시 없는 반원(班員)은 용사(勇士) / 이달 한 달을 다 같이 바라보고 / 새 계획(計畫)을 굳게 맹서(盟誓)하는 대열(隊列) 위에 / 초(初) 하루날 반기(班旗)가 일제(一齊)히 나부낀다.

 

(왼쪽) 일본제국의 각의(閣議) 결정에 따라 매월 1일이 ‘흥아봉공일’로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매일신보> 1939년 8월 9일자의 보도내용이다. 하지만 이미 조선에서는 매월 1일에 ‘애국일’이 시행되고 있었으므로 기존의 방식이 그대로 통용 되었다.
(오른쪽) 제3회 흥아봉공일(애국일)에 맞춰 처음으로 애국반 상회(愛國班 常會)가 함께 개최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매일신보> 1939년 11월 2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여기에는 애국일을 맞이하여 주먹밥으로 식사를 하는 미나미 조선총독의 모습도 곁들여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이어지다가 일본 내각의 결정에 따라 제국 전체가 매월 1일을 흥아봉공일(興亞奉公日)로 정하여 이를 실시하기 시작한 것은 1939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흥아봉공일은 이미 식민지 조선에서는 애국일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않았으므로 애국일로 통일하여 실시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다만, 애국일을 더욱 철저히 실시하는 방침이 강조되면서 총독부 애국반의 경우, 다음과 같은 실천항목을 설정하여 이를 준수하도록 했다. 이를테면, 1. 조기여행(早起勵行) 2. 신사참배(神社參拜) 3. 궁성요배(宮城遙拜) 4. 도보운동(徒步運動)과 통학(通學) 5. 간이주식(簡易晝食, 주먹밥과 한가지 반찬) 6. 금주절연(禁酒節煙) 7. 연회폐지(宴會廢止) 8. 오락자제(娛樂自制) 9. 근로배가(勤勞倍加) 10. 출정군인(出征軍人)과 유가족 위문위자(遺家族 慰問慰藉) 등이 그것이었다.
이와 아울러 정신총동원 경기도연맹과 같은 곳에서는 사회풍조를 경장(更張)하는 방안으로 각 극장과 영화관은 물론이고 백화점과 요리점, 카페, 음식점도 애국일에 일제히 휴업을 하고 또 전발(電髮, 파마넌트)을 폐지하도록 했다. 여기에 더하여 1939년 11월 1일에는 제3회 흥아봉공일(애국일)에 맞춰 경성부 전역에서 처음으로 애국반 상회(愛國班 常會)가 함께 거행 되었으며, 이때 미나미 총독(南總督)도 자신이 속한 경복정회(景福町會)의 행사장인 청운소 학교 교정에 몸소 참석하는 장면을 연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흥아봉공일은 다시 1942년 1월 8일 이후 대조봉대일로 변신을 거듭하여 전시체제의 결속과 결의를 다시 옥죄는 날로 자리매김되었으니 일제의 패망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조선의 구석구석에서 그야말로 고단했던 나날들은 그렇게 지속되었던 것이다.

수, 2020/12/30-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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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辛丑年) 새해 민족문제연구소를 위해 애쓰시는 회원 여러분과 임직원들에게 축복을 기원하며 코로나19로 고생하시는 우리 사회공동체 구성원 모든 분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소는 우직하고, 성실하며, 깊은 인내심을 상징합니다. 특히 하얀 소는 신성하여 상서로운 일
이 많이 생기는 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와 연구소에 즐거움과 행복이 가득한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며 거듭 축복의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는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은 우리 연구소가 창립 30주년을 맞습니다. 선생께서는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를 보면서 ‘세계만방이 한집이다. ’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황국사관(皇國史觀)을 우려하며 <친일문학론>을 펴내셨고 이후 친일파의 실체를 밝히고 친일잔재 청산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선생께서 유명을 달리하신 후 후학들이 선생의 뜻과 정신을 이어가기를 다짐하고 ‘반민족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고 1995년 ‘민족문제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어 30주년이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도둑처럼 찾아왔던 해방의 기쁨은 단 하루뿐이었다는 역설을 우리는 아픈 마음으로 되새기곤 합니다. 선생께서 일제침탈의 잔혹상을 다시 생각하셨던 1965년 당시 한국사회는 ‘친일파’가 득세 했던 시기였습니다. 5·16 군사 반란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군부 핵심이 친일세력이었으며 그 군부는 미군정 이후 국가의 행정, 사법 권력을 장악했던 친일파를 거침없이 호위 세력으로 이용한 때였습니다. 선생께서는 친일의 핵심적인 문제가 ‘정신’ 곧 ‘가치관’, ‘역사관’이라 생각하셨습니다. 친일파의 가장 큰 문제는 일제의 가치관, 역사관에 동화된 정신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일제의 요구에 따라 조선의 백성을 수탈과 억압의 대상으로 삼았고 교화와 개조의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군부 독재가 가능했던 이유이며 독재의 방식이었습니다.

새해는 해방 76주년, 연구소 창립 30주년입니다. 한국사회는 그 변화를 이루었는지, 그 변혁을 위해 우리 연구소 구성원 모두 선생의 뜻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민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신념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 연구소가 이 논의의 중심이 되어 일제 잔재 청산을 넘어 남북 8천만 겨레의 미래 기틀을 만드는 초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 해 격렬하게 우리 사회를 달구었던 검찰, 사법, 행정 개혁의 시작이 선생께서 이루려 했던 친일 잔재 청산, 친일파의 역사를 단절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검찰, 사법, 행정 체계와 제도가 일제의 통치방식을 수용했으며 친일파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독재의 수단으로 활용했던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검찰 권력의 약화라는 취지만으로 접근하는 개혁 방식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검찰 권력을 포함한 행정, 사법 체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되었으며 문제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설명하고 미래 우리 사회공동체를 위해 어떤 제도가 필요하고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우리 모두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그 핵심적 가치가 친일잔재 청산이라는 사실을 사회공동체가 함께 확인하고 공감해야 합니다. 새해를 맞으며 우리 연구소 구성원들이 더 큰 열정과 사명감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친일과 독재에 부역한 사람들은 그 시대의 지식인, 권력자, 재산을 가진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우리 시대 지식인, 권력자, 부자들의 회심을 위해 함께 노력합시다.
새해 남북 8천만 겨레 모두 행복한 삶을 위해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상상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사장 함세웅

월, 2021/01/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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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인권변호사 이돈명 선생 10주기 맞아 추모비 세워

범하(凡下) 이돈명 선생(1922~2011)은 황인철・조준희・홍성우 변호사와 더불어 인권변호사 4인방으로 불리며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 시기 민주화운동 관련 시국사건들을 도맡아 온 인권변호사들의 대부역할을 했다. 민청학련사건, 인혁당 재건위사건, 청계피복노조사건, 크리스천아카데미사건, 광주민주화운동 등 1970년대 이후 주요 시국사건에서 빠지지 않고 활약했으며 3·1민주구국선언, 동일방직·원풍모방 시위사건, 와이에이치(YH) 노조 신민당사 농성사건 등을 변호하면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전신인 정법회 고문, 조선대학교 총장, 상지대학교 이사장을 맡아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애썼으며, 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천주교인권위원회 창립이사
장을 역임하며 천주교 사회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이돈명 선생은 1995년 6월부터 1999년 9월까지 연구소가 사단법인으로서 새로 출범할 때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선생의 10주기를 맞아 함세웅 이사장의 제안으로 연구소를 비롯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4·9통일평화재단,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거시기 산우회, 천주교인권위원회가 함께 남양주시 별내읍 천주교영복산묘원에 추모비를 세웠다. 추모비 내용과 글씨는 각각 민주화운동의 원로인 김정남, 오병철 선생이 썼고, 비석은 김서경·김운성 작가가 제작했다. 추모비를 제작하기까지 박중기 추모연대 명예의장이 큰 도움을 주었으며 실무적으로는 정소진 후원회원의 노고가 컸다. 이돈명 선생의 기일인 1월 11일에는 선생의 자녀와 몇몇 지인들이 참석했다. 연구소는 코로나19가 다소 진정되면 별도의 추모비 제막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21/01/25-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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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독립전쟁 선포 100주년 기념 특별전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 개막

 

 

특별전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가 2020년 12월 22일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개막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과 독립기념관이 공동 개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는 이번 전시의 제1부 <나는 의병입니다>는 근현대사기념관이, 제2부 <나는 독립군입니다>는 독립기념관이 준비하였다.

제1부 <나는 의병입니다>는 ‘군대해산, 자결로 답하다’, ‘시위대, 서울에서 의병전쟁의 서막을 열다’, ‘진위대, 전국으로 의병전쟁을 확산하다’, ‘의병과 군인, 연합부대를 만들다’, ‘13도 창의군, 서울로 진군하다’, ‘유격전의 확산과 일본군의 잔인한 탄압’, ‘압록강 너머 두만강 건너, 만주로 연해주로’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1907년 군대해산 직후 박승환의 자결은 의병전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전시는 시위대가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부대와 합류하여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고, 전국적 의병전쟁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박승환의 「시위 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임명장」, 1900년대 초반 경성부 지도, 1907년 프랑스 잡지 L’ILLUSTRATION에 수록된 일본군과 전투 후 시위대 병사들의 모습, 1907년 8월 민긍호 의병부대와 일본군의 활동지역을 나타낸 지도, 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이 해외동포에게 보낸 격문 내용을 알 수 있는 신문기사, 1910년 초에 작성된 연해주 13도의군의 서명록으로 추정되는 「의원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제2부는 2020년 독립기념관 기획전 <나는 독립군입니다>의 순회전시로 ‘독립군, 독립전쟁을 쓰다’, ‘독립군을 양성하라’, ‘독립전쟁이 시작되다’, ‘우리의 군대, 한국광복군’, ‘독립전쟁 제1회전, 봉오동 전투’, ‘만주에 울려 퍼진 승전보, 청산리 전투’, ‘전진하는 독립군’, ‘독립군을 지키는사람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활동이 어려워진 의병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재편되어 독
립전쟁을 하는 여정과 광복 후 총칼을 내려놓은 독립군들이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여 독립군의 역사를
남긴 일기, 수기 등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에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신흥교우단의 기
관지인 <신흥교우보> 제2호, 북로군정서의 훈련교본,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포고 제1호・제3호, 봉오동전투상보와 더불어 의병 출신 독립군 김정규 일기, 한국광복군 김문택 수기, 지청천 친필 일기 <자유일기>, 홍범도 일지(이인섭 필사본), 청산리 전투 참가자 이우석 수기, 한국광복군 지복영 수기 등을 만나볼 수 있다.
근현대사기념관 특별전시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를 통해 일제에 맞선 수 많은 의병과 독립군들의 간절한 바람과 희생을 되돌아보고 의병전쟁, 독립전쟁을 이끌어온 한민족의 위대한 저력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 특별전은 VR전시로도 제작하였다. 현재 근현대사기념관은 사전예약제로 운영되어 현장 관람에는 제약이 있지만, 2020년 11월에 개막한 상설전시, 특별기획전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과 함께 홈페이지에서 전시 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홍정희

월, 2021/01/25-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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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를 찾아라> 역사부교재 발간

 

지난 12월 경기도, 지역사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이 함께 친일청산 교육부교재 개발을 위해 공동 작업을 진행하여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를 찾아라>(전5권)를 발간하였다. 2019년 경기도가 추진하고 우리 연구소가 조사연구를 맡아 진행한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사업의 성과를 토대로 학교현장에서 교사들에게 필요한 부교재를 만들어 보급하고자 하는 취지에서였다.
경기도의 일제잔재는 크게 인적 잔재라고 할 수 있는 ‘친일인물’과 물적 잔재인 ‘친일 관련기념물’을 대상으로 하였다. 경기도 출신 ‘친일인물’ 선정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를 근거로 하였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4,389명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1,006명의 반민족행위자 가운데 경기도 출생・출신자는 모두 267명이다. 이들의 주요 경력에 따라 매국・귀족, 일제 통치기구 협력자인 관료・중추원・법조인, 경찰・군인, 문화계, 예술계 친일인물 등 6개 영역으로 분류하였다. ‘친일 관련 기념물’은 일제강점기 건축물, 친일 인물의 기념비·송덕비, 그 외 기념조형물 등 71개를 조사하였다. 역사부교재는 경기도를 4개 권역으로 나누어 일제잔재를 소개하고, 일제잔재 청산의 방법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도움 자료를 함께 실었다.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먼저 1권은 일재잔재의 개념과 유형별 분류를 제시했고, 친일인물 가운데 경기도 내 지역을 특정할 수 없는 인물들과 친일 관련 기념물 중 경기도의 신사(神社) 해설, 학교생활 속 일제잔재와 그 청산 사례를 소개했다. 그리고 2권~4권은 동부, 남부, 서부・북부 4개 권역별로 친일인물, 친일 관련 기념물, 교수-학습과정안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5권 사료편에는 친일인물 근거 사료, 친일파 관련규정・법령과 분야별 사료 해제, 친일 문제 이해를 돕는 논문과 참고문헌이 실려 있다.
이 역사부교재는 경기도 소재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이 직접 집필하였다. 이 부교재가 학교 현장에서 지역의 일제잔재를 둘러싼 다양한 토론장을 만들어 내고, 친일 청산의 대안과 실천을 마련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역사부교재는 경기도 소재 1100여 곳의 중・고등학교에 배포되었고, 전권 PDF는 식민지역사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다.

• 김승은 학예실장

월, 2021/01/25-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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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이설 고유문(鐵道移設 告由文)

임청각을 가로지르는 중앙선 철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증손인 이항증 선생이 12월 17일 임청각 방음벽 철거행사에 앞서 사당에서 고유제를 지내며 고유문을 낭독하고 있다.

 

오늘은 근 80년 동안 임청각 앞을 가로지르던 철로가 옮겨지는 날입니다. 임청각은 한 가문의 종가인 동시에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곳입니다.
1896년 일제의 국권침탈이 본격화될 무렵, 당시 임청각의 주인 이상룡 선생은 가야산에 의병기지를 만들어 외세에 저항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 경학사와 부민단을 조직해 항일투쟁의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선생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3,500여 명의 졸업생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를 비롯해 수많은 항일투쟁 전선에서 활약했습니다.
선생은 서로군정서 독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반 등의 중임을 맡아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1932년 만주에서 생을 마치셨습니다.
광복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석주 이상룡, 동구 이준형, 소파 이병화로 이어지는 3대(代) 종손과 형제 숙질 등 11명이 서훈되었고, 임청각은 ‘현충시설’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철길과 방음벽에 가로막힌 임청각은 예전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과거사는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고, 국토는 분단되어 민족의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는 일에는 남북(南北)과 여야(與野)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독립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던 석주의 정신이 오늘날 갈등을 잠재우고 미래를 가리키는 등대가 되길 바랍니다.
아! 드디어 오늘 국가와 국민의 노력으로 철로가 옮겨지고 임청각은 일제 강점기 이전 모습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휘어지며 앞을 막았던 철도가 곧게 펴지며 제자리를 찾음은 철도 본연의 역할인 ‘소통과 이동의 자유 회복’과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철길이 이어져 금강산과 백두산을 연결하고, 대륙을 횡단해 유럽으로 뻗어 나가길 소망합니다. 그 길 위로 대한민국의 평화와 번영이 퍼져나가길 기원합니다.

2020. 12. 17.
석주 선생 주손 창수 삼가 고하나이다.

월, 2021/01/25-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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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노래로 만인보(萬人譜)를 엮어내다 – 가수 이지상을 만나다(2)

인터뷰 김종욱 기획위원

●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北>에 재미난 구절이 많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혹 한두 개 정도 소개해주세요.
●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어요. 시각의 차이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인데, 어느 분교에서 17년 동안 졸업생 7명을 배출했대요. 선생님이 있고, 교장 선생님도 있는 그런 학교죠. 어떤사람은 ‘대단하다. 진짜 사람을 위한 교육을 하고 있네’라고 평할 것이고. 다른 시각의 어떤 사람은 ‘아니 그런 학교를 없애지 않고 왜 그냥 놔두지?’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겠죠. 이런 상반된 시각에 대해서 내 의견을 담아 책에 실었어요,. 그런 건 가능한 거잖아요? 그것이 작가로서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고요.
또 하나는 종교에 대한 생각을 적은 구절이 있어요. 북에 종교의 자유가 있느냐? 부터 시작해서 왜 기독교는 북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가? 라고 적은 구절이 있는데요. 우리는 그것이 북의 종교탄압의 증거라고 말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었죠. 그런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북에서 종교탄압의 흔적은 찾아보기 쉽지 않아요.
그런데 미국이란 나라가 기독교를 신봉하는 나라잖아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북에 어마어마하게 폭탄을 투하해요.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구분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폭탄에 의해 희생을 당했어요. 그런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는 사회에서 미국을, 또 기독교를 이야기하고 종교를 믿어보라 권유한다면 그 사람들에게 씨알이 먹히겠어요?
그는 이렇게 두 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했다. 교육과 종교라는 두 가지 사례로만 살펴봐도 북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회다. 소위 합리성과 효율이란 이름으로 무장한 자본주의의 남과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북은 애시당초 비교대상이 아니라 연구대상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둘이 하나가 되기 위한 과정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일시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는 가운데 대화하고 교류하며 물 흐르듯 천천히 이루어 나가야 할 과제일 것이다.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北>은 북의 사회제도에 대한 측면과 우리 사회와 너무나도 이질적이 어서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우뚱할만한 북의 문화에 대해 적은 책이다. 말하자면 북을 좀 더 내밀하게, 쉽게 이해하기 위해 펴낸 교양서라 할 만하다. 아무튼 출간된 지 이제 1년하고 3개월 정도 지난 책이지만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 <민족사랑>을 탐독하시는 분들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솔직히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책에 대한 이야기보다 탈북민들에 대한 이야기, 또 종편에 대한 이야기를 더 길고 다양하게 나누었다. 대표적으로 TV조선에 출연하고 있는 자칭 북한 전문가라 칭하는 탈북민의 말을 액면 그대로 신뢰할 수 있느냐의 문제부터 학자입네 하며 온갖 교양을 떨어가며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을 설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또 중앙정보부 시절에나 만들어졌을 법한, 이제는 박물관에 보관하기에도 부끄러운 북의 종교의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논쟁까지 곁들여 이야기했지만 그 이야기 전체를 지면에 싣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이지상 씨가 출간한 책들이다. 소위 대박을 친 베스트셀러는 아니어도 잔잔하게 삶의 이야기,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책들이다. 찾아 읽어보시길 권한다.

 

그는 벌써 세 권의 책을 출간한 작가다. <사람을 노래하다>, <스파시바, 시베리아>, 그리고 지금껏 이야기 나누었던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北>까지 총 세 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동안 책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읽혔는지 궁금했다.

● 지금까지 책을 총 세 권을 출간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세 권의 책 중 가장 많이 판매되고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책은 어떤 책인가요?
● 첫 번째 책하고 두 번째 책은 오래 되어서 기억이 가물한데, 두 권 모두 3쇄씩 찍었어요. 그러니까 최소 4천 권 이상은 팔렸다고 봐야죠. 그리고 새로 나온 책은 2천 권 정도 판 매된 듯해요.
● 인문학 서적이 거의 판매가 안 되는 점을 감안하면 그래도 많이 나간 편이네요?
● 그런 셈이죠. 그런데 그게 참 희한해요. 오래 전 음반시장이 호황이라고 할 적에도 제 음반은 한 3천 장 정도밖에 안 나갔어요. 서태지가 200만장을 팔았네 하던 시절에도 제 음반은 안 나갔어요. (웃음) 전 무얼 해도 3~4천정도? 그 정도로 지금껏 먹고 살고 생활을 꾸려왔죠. 그냥 알음알음 그렇게 판매되었고, 그 3~4천이란 숫자가 나를 도와주고 지금의 내 생활을 책임져 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고마운 일이죠. 그런데 혹시 <스파시바, 시베리아>는 읽어 보셨나요?
● 예. 읽어 봤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읽으면서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로망 중 하나인 대륙철도 타고 시베리아 거쳐 유럽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특히 서울역에서 기차표 끊어서 기차 타고 프랑스 파리, 런던까지 가는 꿈도 꾸었고요.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 않나요?
● 내가 그 책에 적은 내용들을 생각해 보면 내 당위일 수 있어요. 내용이 독특한 상상이라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내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내용들을 열거한 거라서요. 죽은 사람 추모하고 우는 사람 위로하고 그런 사람들 이야기를 엮어서 책으로 만든 거니까 제 입장에선 당연한 거죠. 우리나라 같은 현실에서는 독립군 활동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에 실리는 게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요? 그런데 TV나 라디오 같은 데엔 그런 이야기가 안 나오잖아요. 그게 이상한 거지, 내가 이상한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 나라도 기록을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책에 실은 거죠.
● 그럼 시베리아엔 몇 차례나 다녀오셨나요?
● 한 열두 차례 정도 되는 것 같은데요.
● 직접 가서 보시니까 기분이 어떠셨어요?
● 시베리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뭐랄까… 우리가 이렇게 쪼잔하게 살아도 되는 건가? 싶죠. 거긴 말 그대로 광야예요. 끝이 보이지 않는 그런… 우리나라에서 그런 데를 보려면 그나마 호남평야 정도나 되야 가능하려나? 그런데 찬찬히 생각해 보면 (호남평야의 땅은) 다 누군가의 소유잖아요? 소유관계에 따라서 개발되고 경작되고 하는 거잖아요. 그게 누군가에게는 이익 구조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착취 구조인 거죠. 시베리아에는 그런 게 없어요. 그 넓은 대지와 강에 콘크리트가 없어요. 콘크리트를 쓴다는 건 경계를 쌓는다는 거예요. 콘크리트로 경계를 나눈다는 건데, 거긴 그냥 강과 산으로 경계를 확인할 수 있지 인위적인 것들이 없어요.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곳은 자연에 묻혀서 어우러져 사는 곳이지 자연을 개발한다는 개념이 없는 거죠. 그곳에 가면 소위 반성이란 것들이 자연스러워지죠. 생명이니 평화… 이런 개념들이 시베리아에 가면 말 그대로 자연스러워지니까요.

 

이지상 씨의 6집 앨범 <나의 늙은 애인아>. 오랜만에 나온 신보이고, 요즘 음원 사이트에 넘쳐나는 이해 못할 가사로 가득한 노래가 아닌 노랫말을 음미하며 들을 수 있는 곰탕 같은 앨범이다.

 

이후에도 자연을 재산 삼아 살아가는 시베리아 사람들의 이야기, 땅 한 평 가지기 위해 매일을 사람과 투쟁하는 우리와 매일이 대자연과의 투쟁인 그들의 이야기, 1년의 2/3가 겨울인 그곳에서의 생존방법 등등 대한민국에서 사는 보통의 존재들인 우리와는 사뭇 다른 시베리아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자세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지상 씨는 시베리아에서 보고 배운 것도 많았지만 우리가 그동안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 <스파시바, 시베리아>를 쓰게 된 계기이자 그것이 책의 내용이라고 말해 주었다. 끝으로 최근에 발매한 그의 6집 앨범에 대해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 최근에 앨범을 새롭게 발매하셨는데, 제목이 특이한 것들이 몇 곡이 있네요. “윤치호에게 쫓겨난 소녀”도 그렇고, “기차는 그 새벽을 떠났다”도 그렇고요.
● 채광석이란 시인이 작년에 시집을 새로 출간했고, 출판기념회에 저를 초대했어요. 그 시인과 일면식도 없는데 말이죠. 초대를 받아 가는 자리인데, 그냥 가기는 모양새가 좀 그래서 시집을 먼저 읽어보니 채광석 시인이 연해주에 다녀와서 쓴 이야기들을 시로 써 놓은 것들이 있더군요. 읽어보니 역사적 관점이 저랑 비슷해서 그의 시 두 개를 곡으로 썼죠. 그게 바로 질문했던 곡들이에요. 오래 전부터 한번 곡으로 만들어야지 했던 것들을 게으름 피우느라 못 쓰고 있었던 걸 이때다 싶어 일사천리로 곡을 만들었죠.
● 그럼 혹시 6집 앨범 만들면서 특별히 곡을 만들 때 고심하며 만드신 곡, 공을 들여서 만든 곡이 있으실까요?
● 노래를 만들 때 고심하고 공을 들이지 않은 곡이 따로 있을까요? (웃음) 다만 6집 앨범중에 가장 고심하며 곡을 만든 것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타이틀곡인 “나의 늙은 애인아”가 아닐까 하네요. 그 노래의 가사는 최광림 시인의 시인데, 시가 아주 길어요. 그 긴 것을 가지치기 하고 정리해서 엑기스만 모아서 가사를 만들었죠.

● 원래 있던 시를 토대로 곡을 만드셨다고 하는데, 혹시 누구를 염두에 두고 쓰신 건가요?
● 특정인을 염두에 두고 쓴 건 아니고요. 우리 같은 사람들, 그러니까 동시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권고와 같은 노래죠. 우리 나이쯤 되면 누군가는 성공했다고 우쭐대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찌질하게 움츠러든 사람도 있고 그렇거든요.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젊은 시절에 가지고 있었던 지향들은 여전히 유효하고 비슷하거든요. 하지만 물리적으로 나이 먹고 늙어가는 것을 인정한다면 도드라지진 않더라도 느긋하게, 하지만 뜨끈함을 잃지 말고 살아가자는 그런 노래죠. 그러니까 애인이라는 대상이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왔던 우리 모두를 지칭한다고 봐야겠죠. 힘겹게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의 방도를 찾고 있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노래한 곡들은 많지만 이제 노년으로 향하는 중년 아저씨, 아줌마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아니 그냥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라니 다시 한번 이야기를 새기며 들어봐야겠다 생각했다. 이후 민족문제연구소와의 인연이 언제부터였는지, 또 내년이 연구소 창립 30주년임을 주지시켜 드리고 기나긴 대화를 마쳤다. 인터뷰 원고에는 제대로 반영이 안 되었지만 대화는 즐겁고 유쾌했다. 역시 오랜 세월 한 우물 파며 사람과 시대를 노래한 가객의 풍모가 느껴지는 시간이었고, 이런 공식적인 기회가 아니더라도 따로 자리를 마련해 더 많은 이야기를 청해 듣고 싶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귀한 시간을 내주신 이지상 씨에게 글로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월, 2021/01/25-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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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부천지부, <한 시대 다른 삶> 만화와 웹툰으로 제작

 

 

부천지부(지부장 박종선)는 2020년 경기도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엇갈린 삶-웹툰 ‘한 시대, 다른 삶’>을 웹툰과 만화로 제작하여 보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친일과 항일의 각각 다른 길을 걸었던 역사 인물들을 비교하여 독립운동가의 애국정신을 우리 공동체의 가치로 재인식함과 동시에 사회 일각에 여전히 존재하는 식민지배 미화 등 반역사적 행태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다는 취지이다. 이 사업에는 전국시사만화협회(회장 최민) 소속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만화에 등장하는 역사 인물과 작가는 다음과 같다. 신석구・정춘수(최승춘), 한용운・강대련(하재욱), 차미리사・김활란(성덕환), 신채호・최남선(정태권), 여운형・김성수(국태이), 지청천・이응준(최인수), 안재홍・방응모(최승춘), 조명희・김동인(전진이), 이육사・서정주(오금택), 한형석・현제명(서상균). 각 작품마다 전문가의 감수를 받아 작품의 수준을 높였는데 강태구(한국음악연구소 연구원)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박광종(연구소 선임연구원) 이순우(연구소 책임연구원) 이준식(독립
기념관장) 장신(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장원석(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 학예실장) 한상권(덕성여대 명예교수) 등이 참여했다. 470쪽 분량의 2권으로 제작된 이 만화는 경기지역 모든 초·중·고등학교 2,400곳에 무상으로 보급되었으며 조만간 부천지부사이트(minjok21.kr)를 통해서도 웹툰 형식으로 공개된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21/01/2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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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인물]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과 실천적 지식인 김태준

박광종 선임연구원

반갑도다! 훈민정음 원본의 나타남이여

1940년 여름, 명륜학원(성균관대학교의 전신) 강사인 김태준은 경북 안동 출신의 제자 이용준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고향집에 조상 대대로 가보로 전해져 내려오는 훈민정음 원본(훈민정음 해례본)이 있다는 것이다. 김태준은 훈민정음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이용준과 함께 안동군 와룡면 주촌에 세거(世居)하던 후촌 이한걸 댁을 방문했다. 훈민정음 원본을 자세히 살펴보니, 세종대왕이 집필한 예의편(例義篇)과 왕명에 의해 정인지·신숙주 등 집현전 8학사가 쓴 해례편(解例篇), 정인지 서문 등 세 부분 31장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예의편의 첫째와 둘째 장이 없었다.
이한걸 선생이 훈민정음 소장 내력과 두 장의 결락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신은 본관이 진성 이씨로 퇴계 이황의 종파이며, 일찍이 선조 이정(李禎)께서 여진 정벌의 공이 있어 세종대왕으로부터 훈민정음을 상으로 받아 늘 궤짝에 감추어 세전가보로 간직해 오다가, 연산군 때 언문책 소지자를 엄벌할 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득이 첫 머리 두 장을 뜯어 버리고 돌돌 말아서 비장(秘藏)해왔다는 것이다.1김태준은 <조선왕조실록> 세종 28년(1446) 9월 29일 기사에 훈민정음 예의편이 있음을 알고 이용준과 함께 결락된 두 장을 보수하기로 했다. 이용준은 이한걸 선생의 셋째아들로 12세때부터 서예에 뜻을 두고 안진경체를 익혀 16세 되던 1931년에는 동아일보에 ‘서예계의 신동’으로 대서특필되었다.


1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 소장처에 대해서 이용준의 본가설과 처가설 두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본가설을 따랐다. 이 견해는 안동고 국어교사였던 정철이 1954년 국어국문학회가 펴낸<국어국문학> 제9권(1954.4)에 발표한 「원본 훈민정음의 보존 경위에 대하여」에 근거한다.
이에 반해 이용준의 처가설은 곧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에 세거하던 광산김씨 종가, 긍구당 종손인 김응수 씨의 소장본이라는 설이다. 이 설은 박영진 동래여중 교사가 한글학회 회보인 <한글새소식> 제395호(2005.7)에 기고한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경위에 대한 재고」에 의해 제기되었다. 1991년 10월 18일 긍구당 종손 김대중 선생의 답장 “이한걸 댁은 우리 셋째 고모의 시댁일세. 이한걸 씨의 삼남 이용준 씨가 나의 고모부일세.… 조부(김응수)께서 [사위를] 사랑하여, 오시면 책방에서 마음대로 책을 보게 하였다네. 그분이 이런 점을 기회로 <훈민정음> 원본과 <김매월당집>을 가져갔네. 정음원본의 앞에 두 장 없는 것은 우리 집의 책에는 앞 첫 장에 꼭 장서인을 찍어놓네. 말짱한 책에 앞장이 없는 것은 증인을 소멸하고자 함이 분명하고(하략).


 

 이용준은 <조선왕조실록>의 훈민정음 예의편 앞부분을 안평대군 필체로 모사하여 결락된 두 장을 복원하였다. 복원과정에서 세종대왕 서문 말미에 “편어일용이”(便於日用耳)를 “편어일용의”(便於日用矣)로 잘못 필사하였다.

원본 훈민정음의 발견(1) <조선일보> 1940.7.30.

 

김태준은 이한걸 선생에게 훈민정음이 국어학 연구자료로 매우 귀중한 것임을 알리고 이 책을 서울로 가져가기를 청해 허락을 받았다. 서울로 돌아온 김태준은 훈민정음 원본을 당대의 국어학자인 방종현과 홍기문(홍명희의 아들)에게 번역을 맡겼다. 그 결과물이 <조선일보> 1940년 7월 30일부터 8월 4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원본 훈민정음의 발견」이란 제목으로실렸다. 여기서는 훈민정음을 입수한 경위를 서술하고 해례편 전문을 초역해 놓았으며 “그 원문의 번역을 싣고 뒤를 이어 거기에 대한 주석 내지 우리 두 사람의 연구를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조선총독부와의 협의 하에 그해 8월 11일자 석간을 끝으로 폐간되었고2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 1943년 조선어 사용 금지 등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훈민정음 해례본을 활용한 연구가 불가능해져 해방 후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한글 창제 원리를 명확히 기술한 훈민정음 ‘해례편’이 역사상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훈민정음 원본 발견에 대해서 대부분의 식자들이 크게 환영하였는데 특히 외솔 최현배는 “경북 안동에서 이런 진본이 발견됐다니 하늘이 한글의 운을 돌보시고 복주신 것…아! 반갑도다! 훈민정음 원본의 나타남이여!”라며 감격하였다.(<한글갈>, 1942)

왼쪽부터 조선왕조실록 113권 훈민정음 기사,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 훈민정음 언해본 ‘세종어제 훈민정음’

 

훈민정음에는 언해본(한글본)과 해례본(한문본)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것은 언해본이다. 세종대왕이 지은 서문과 한글자모 28글자를 간략히 설명한 예의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월인석보>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이 너무나 소략하여 학자들 간에 한글 창제 원리와 구체적인 사용법에 관한 견해가 분분했다. 이에 비해1940년에 발견된 해례본에서 처음 등장한 해례편은 제자해(制字解) 초성해(初聲解) 중성해(中聲解) 종성해(終聲解) 합자해(合字解) 용자례(用字例)의 순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천지인(天地人)을 응용한 모음 제자 원리와 발음기관을 본 딴 자음 제자 원리를 밝혀놓아 한글 연구의 신기원을 열었던 것이다.
김태준은 이한걸 선생의 요청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의 구매자를 수소문하여 장안의 대부호이자 문화재 수집가인 간송 전형필 선생을 연결시켜 주었다. 간송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소중히 보관해오다가 훈민정음 반포 500주년(1946년)을 맞이하여 그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어학회에 위탁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을 영인하여 널리 보급함으로써 한글 연구에 크게 공헌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 사후인 1962년 12월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현재 간송미술관이 이를 소장하고 있다.


2 조선일보의 폐간 경위는 <민족사랑> 2020년 7월호에 실린 「부역언론의 산파, 두 사주의 민낯」(최우현 연구원)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한국 고전문학 연구의 지평을 넓히다

 

명륜학원 강사 시절의 김태준

 

천태산인(天台山人)이라는 필명으로 많은 글을 썼던 김태준은 1905년 평북 운산에서 한문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듣고 자랐다. 15세 때 운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년 동안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운 후 연변공립농업학교에 입학, 3학년 때 공립이리농림학교로 전학했다. 1926년 뛰어난 한문 실력으로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해 1931년 3월 동 대학 법문학부 중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재학 시절 신라 향가와 이두를 연구한 오쿠라 신페이(小倉進平) 경성제대 교수 밑에서 국문학의 유산을 발굴·정리하는 데 힘썼으며 ‘경제연구회’에 들어가 사회주의 이론을 공부하였다. 또한 재학 중이던 1930년에 ‘조선소설사’를 「동아일보」에 68회에 걸쳐 연재하여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31년 경성제대를 졸업한 후, 총독부가 운영하는 유교 교육 기관인 경학원 직원(直員) 겸명륜학원 강사에 임명되어 한문학(漢文學)를 가르쳤다. 그해 조윤제·이희승·김재철 등과 함께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하고 <조선어문학보>와 ‘총서’를 펴내는데 참가했으며 우리나라 한문학과 소설의 역사를 다룬 <조선한문학사>(1931)와 <조선소설사>(1933)를 잇따라 펴냈다. 1934년5월 한국의 역사·언어·문학을 연구하는 진단학회를 창립하고 상무위원이 되었으며 기관지 <진단학보>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같은해 역대 고전가요를 취사하여 편집한 <조선가요집성>을 출간했다. 이 책은 신라향가편, 백제고가편, 고려가사편, 이조가사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에도 우리나라 시가(詩歌) 연구의 기초자료로 중시되고 있다. 1938년에는 한국 고전문학에 대한 뛰어난 연구성과로 손진태, 김두헌과 더불어 학술연구보조생으로 선발되어 학사원(學士院)으로부터 거액의 연구보조금을 받았다. 1939년 명륜학원 강사 겸 경성제대 조선문학 강사에 취임했다. 그해 정년퇴직하는 다카하시도루(高橋亭)의 후임으로 조선문학을 강의하게 되었는데 경성제대에서 교편을 잡은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이해에 그간의 연구성과를 모아 학예사의 ‘조선문고’ 시리즈로 <증보 조선소설사>를 펴냈고 <원본 춘향전> <고려가사> <청구영언> 등을 교열하여 출판했다. 김태준은 1930년부터 1939년까지 한국 고전문학사의 기념비적 저작인 <조선한문학사>, <조선소설사>, <조선가요집성>을 집필했을 뿐 아니라 각종 신문 잡지 학술지에 「별곡(別曲)의 연구」 「조선가요개설」 「시조기원에 대한 재고」 「조선민요의 개념」 「춘향전의 현대적 해석」 「조선소설발달사」 「홍길동전 연구」 「구운몽의 연구」 등 다양한 분야의 논문과 평론을 무수히 발표했다. 이러한 그의 연구성과는 현재까지도 국문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특히 <조선한문학사>와 <조선소설사>는 비록 제한된 자료와 실증적 방법상의 한계가 있으나, 각 분야에서는 최초의 통사적 기술로서 국문학 연구사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왼쪽부터 조선소설사, 조선한문학사, 조선가요집성

 

경성콤그룹 활동과 연안행

1939년 4월 일제 당국의 검거를 피한 이재유 일파의 이관술과 김삼룡 등이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경성콤그룹(조선공산당재건경성준비그룹) 지도부를 형성하고 이후 박헌영을 지도자로 영입하여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태준은 경성제대 강사로 재직하던 중 비밀리에 경성콤그룹에 가입했다. 이현상·정태식과 함께 인민전선부에 소속돼 과거 활동가들을 결집하고 새로운 조직원을 포섭하는 역할을 하였다. 1940년 8월에는 박헌영이 지도하고 있는 기관지 <콤뮤니스트>를 편집하였다. 1940년말 경성콤그룹의 지하조직이 일제 경찰에 탐지되어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어닥쳤다. 김태준은 1941년 1월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등과 함께 검거되었고 온갖 취조와 고문을 당한 후 수감생활을 하다가 1943년 여름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김태준이 옥중에 있는 동안 생활고로 인해 그의 노모와 아내, 젖먹이 아들까지 모두 잃는 아픔을 겪는다. 김태준은 비극적인 가족사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마주하며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과 사회주의적 세계관을 더욱 단단히 벼린다. 그의 마지막 저술 <연안행(延安行)>3에서 학자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실천가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


3 <연안행>은 서울에서 중국 연안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해방 후인 1946년부터 1947년까지 조선문학가동맹에서 발행한 기관지 <문학> 1호, 2호, 3호에 나누어 연재한 글이다.


 

문학연구니 역사연구니 언어연구니 하는 것은 우리 정부가 수립된 후의 일이니 당분간 이 방면의 서적은 상자에 넣어서 봉해두자. 보는 책은 경제학ABC, 인터내셔널, 전기, 레닌 선집 등이었다. 나는 좀더 튼튼한 세계관을 수립하려고 모색하였다. 외계에는 공출, 배급, 징용, 징병에 떨며 울고 있는 수천만 형제자매의 아우성소리 조음(燥音: 애태우는 소리)이 이타(耳朶: 귓불)를 치는데, 어느 겨를에 조선문학이니 조선역사니 찾고 있을 수가 있을 것인가.

 

출옥 후 경성콤그룹 잔존 조직원들과 소규모 비밀활동을 계속하던 중 1944년 1월, 경성콤그룹 핵심투사로서 옥중생활을 마치고 나온 박진홍과 비밀혼인을 하였다. 1944년 서중석을 중심으로 꾸려진 서울 지역 공산주의자협의회는 군사문제토론회의 결의를 통해 김태준에게 중국 연안에 가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김두봉, 무정 등과 함께 국내 진공에 대한 군사대책을 세워보라고 지시했다. 연안은 당시 중국공산당의 거점으로 팔로군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조선의용군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하여 김태준·박진홍 부부가 1944년 11월 서울을 떠나 일본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며 신의주, 안동, 봉천, 산해관, 천진, 북경을 거쳐 1945년 4월 홍군 해방구 연안에 다다랐다. 연안의 조선독립동맹 총부는 김태준·박진홍 부부를 크게 환영하고 후대하였다. 김태준은 조선 내 정세와 반일투쟁 양상을 설명하고 조선의용군의 국내 진공책을 논의했다. 이후 조선혁명가를 양성하는 조선혁명군정 학교에서 ‘조선국내반일투쟁정세’ 등에 대해 특별강의를 했다. 일제의 항복 후 9월초에서 10월말까지 화북에서 심양에 이르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행군 도중 이들 부부는 관동군 패잔병들과의 잦은 전투를 겪으며 온갖 역경을 헤쳐나갔다. 이들 부부는 심양에서 조선독립동맹과 헤어져 1945년 11월 하순 서울에 도착하였다.

 

참담한 분단 현실에 항거하다 형장의 이슬로 스러지다

김태준이 서울에 도착해 마주한 조국의 현실은 그가 꿈꾸던 자주독립국가가 아니었다. 3·8선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가 분단되었으며 미군정청이 통치하는 남한은 친일파와 모리배들이 판치는 세상이 되어 있었다. 모교인 경성대학(경성제국대학의 후신)에서 몸담으며 지난날 못다한 한국 고전문학을 연구하고자 한 희망을 접고 다시금 민족해방투쟁의 전사로서 떨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8·15 이후 해방은 되었다고 하나 이 남조선은 친일 팟쇼분자 모리배의 낙원이라는 말을 들을 적에 비상한 불쾌를 느낄 뿐 아니라 친일파 팟쇼분자 모리배의 도량(跳梁: 함부로 날뜀)으로 인해서 혼란을 결과한 남조선의 대비극에 대하여 해방의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나는 해외에서 유랑하다가 들어온 전재민(戰災民)의 한 사람이다. 경성에는 많은 적산 사찰 유곽 요정 등 빈집이 있건만 나에게 집 한 칸도 없다. 오직 일제시대 인민의 이익을 위해서 싸웠다는 죄 때문에 테러단이 따라다니고 쌀은 하루 1홉의 배급도 타본 일 없고 밀가루와 강냉이도 없어서 곤궁과 낙망에 신음하며 물가는 천정을 모르고 올라가니 도대체 이와 같은 곤궁은 나뿐이 아니라 남조선 인민 전체의 동일한 처지에 있는 것이요 이 때문
에 인민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었다.(「정치적 혼란과 경제 파탄으로 민생은 도탄에 전락!」, <독립신보> 1947.1.8)

김태준의 <연안행>(왼쪽)과 1946년 2월 김태준이 보고 강연을 한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 회의 장면
(오른쪽) Ⓒ김용준

 

김태준은 1945년 12월 경성대학에 복직되었고 이 무렵 교수, 학생, 졸업생 등 60명으로 구성된 전학대의원회에서 세 명의 총장후보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미군정청의 반대로 서울대 총장에 오르지는 못했다. 미군정청은 경성대학의 좌경화를 우려하여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친미적인 대학을 만들기 위해 1947년 6월 ‘국립서울종합대학안’을 공표했다. 이에 대해 전국에 있는 대학의 진보적 교수와 학생들이 맹렬히 반대했으나 미군정청의 강력한 탄압으로 그해 9월 경성대학은 서울대학교로 개편되고 김태준을 비롯한 수백 명의 진보적 교수와 2천여 명의 학생이 해직, 퇴학당했다. 한편 김태준은 귀국하자마자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중앙위원과 문화부장이 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상임위원 겸 문화부차장을 지냈다. 아울러 그해 2월 조선문학가동맹이 주최한 전국문학자대회에서 조선고전문학에 관한 보고를 했으며 3월에 이조실록간행회가 조직되었을 때 홍기문과 함께 편집위원에 이 름을 올렸다. 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과 평론부장,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그해 12월에는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김태준 등 9명에 총살언도. <경향신문> 1949.10.2. 위에서 두번째가 김태준

 

1947년 ‘8·15폭동 음모사건’으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1년간 수감되었다가 대사령에 의해 1948년 9월 석방된 후 지하로 잠적했다. 이무렵 남로당의 핵심간부 대부분은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월북했다.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던 아내 박진홍도 김태준과 낳은 아들을
데리고 이때 월북하여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서울에 남아있던김태준은 문화공작대의 일원으로 지리산에 파견되어 오장환, 이용악, 유진오 등 예술인과 함께 유격대 지원사업을 벌였다.
남로당 문화부장 겸 특수정보부장으로 문화공작대 지원사업과 기밀탐지사업을 하던 김태준이 서울시경 사찰과에 의해 종로에서 체포된 것은 1949년 7월 26일이었다. 이적행위 및 간첩죄로 기소되어 9월 27일부터 육군준장 원용덕이 재판장을 맡은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군사재판이 진행되었다.
최종선고일인 9월 30일, 김태준은 최후 진술에서 “지금 조선에는 고전을 수집하고 정리하고 고증하는 것이 중대한 일이다. 앞으로 용인된다면 상아탑에서 대한민국을 위하여 이러한 일을 하고 싶다.
”고 피력했다고 한다.(<경향신문> 1949.10.1.) 최후 진술을 마친 후 원용덕 재판장으로부터 사형언도를 받았고, 11월 어느 날 서울 수색 육군사형장에서 총살당하였다.

[참고문헌]

알브레히트 후베, <날개를 편 한글>, 박이정출판사, 2019

김슬옹,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역사와 평가」,<한말연구> 제37호, 한말연구학회, 2015

이기환, 「반갑도다! 훈민정음의 나타남이여! 1940년 <간송본>의 출현에 외솔이 외쳤다」, <경향신문> 2019.11.5

김인현, 「국문학자 삶 떨치고 공산주의 활동 김태준」, <한겨레신문> 1991.9.13.

최영성, 「김태준의 학술연구와 국고(國故)정리작업」, <한민족어문학> 제46집(2005)

김성동, 「김태준 : 아름다운 문화조선을 꿈꾸던 ‘문화공작대장’」,<현대사 아리랑>, 녹색평론사, 2010

월, 2021/01/25-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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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66 ]

군대해산식이 거행된 옛 훈련원(訓鍊院) 일대의 공간해체과정
이 자리에 들어선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의 정체는?

이순우 책임연구원

지금은 사용빈도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지만 일제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옛 서울의 특정지역을 일컫는 독특하고 고유한 표현들이 그런대로 잘 남아 있었던 흔적이 곧잘 확인된다. 북촌(北村, 백악 밑)이니 남촌(南村, 남산 밑)이니 동촌(東村, 낙산 근처)이니 서촌(西村, 서소문 안팎)이니 하는 것은 그마나 제법 알려진 사례에 속하고, ‘동구내(洞口內, 동구안)’라든가 ‘통내(通內, 통안)’처럼 지금은 완전히 잊힌 용어도 없지 않다. 이 가운데 ‘동구내’는 창덕궁 돈화문 앞길을 가리키는 속칭(俗稱)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예를 들어 단성사(團成社, 수은동 56번지)와 같은 곳은 이곳의 위치를 알리는 문구에 ‘동구내
단성사’ 또는 ‘동구안 단성사’라는 식으로 짝을 이뤄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통내’는 배오개 쪽에서 함춘원(含春苑)에 이르는 지역의 통칭(通稱)인데, 이로 인해 지금의 종로 4가 사거리를 일컬어 ‘통안네거리’라고 불렀던 흔적이 완연하다.

 

<매일신보> 1915년 2월 18일자에 수록된 신구연극 대흥행 광고 문안에는 ‘동구내단성사’라는 표기가 또렷하다.

 

이것 말고도 상촌(上村, 웃대)과 하촌(下村, 아랫대)이라는 것도 그 시절 서울사람들의 일상대화 속에 자주 오르내린 말이었는데, 박태원(朴泰遠, 1909~1986)의 소설 <천변풍경(川邊風景)>(1938)에도 ‘웃대’와 ‘아랫대’의 표기가 등장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소춘(小春)이라는 필명을 사용한 김기전(金起田, 1894~?)이 <개벽> 제48호(1924년 6월)에 수록한 글을 보면, “광통교 이상(廣通橋 以上)을 우대, 효교이하(孝橋 以下)를 아래대”라고 부른다고 하여 이들 지역의 개략적인 위치를 일러주는 내용도 남아 있다. 그리고 경성부에서 편찬한 <경성부사(京城府史)> 제2권(1936), 556쪽에는 일본인 거주지와 그 주변의 옛 모습을 그려내는 항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고래(古來)로 상대(上臺, 웃대), 하대(下臺, 아래대)라는 말이 있는데, 전자(前者)는 서리(胥吏)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야마노테(山の手)’에 비견되며, 주로 현 청운동(淸雲洞)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을 가리키고, 후자(後者)는 하급무관(下級武官)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현 훈련원(訓練院)으로부터 동남 방면을 가리키며, ‘시타마치(下町)’에도 비견될 만하다. 또 남촌생원(南村生員, 남촌의 하급관리라는 뜻)이라는 말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북부에 권세자의 거주자가 많고, 남부에는 이에 반하는 선비가 거주했던 것을 가리킨다.

 

예로부터 아랫대 지역은 각종의 군속(軍屬, 장교와 집사 등)이 주로 몰려 살던 공간이었으며, 이러한 영향 탓인지 이곳과 가까운 도성밖 왕십리나 이태원 등지에도 하급 군졸과 병사들이 많이 거처하였다. 이 때문에 임오군란(壬午軍亂) 때는 난병(亂兵)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청국군(淸國軍)에 의해 이들 마을 전체가 도륙을 당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아랫대의 범주는 자료 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어 보이나 이 가운데 ‘훈련원’이라는 공간이 그 핵심에 놓여 있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훈련원은 원래 조선의 개국 초기에 ‘훈련관(訓鍊觀)’이라 하다가 이름을 바꾼 것이었는데, 이곳은 무과시험과
아울러 활쏘기와 습진(習陣) 등 무예를 연마하거나 대규모 군사조련과 열병(閱兵)을 실시하는 공간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무과(武科)의 초시(初試)와 원시(院試)는 훈련원에서 이름을 등록하여 시취(試取)한다”는 구절이 포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무과시험 때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자 버드나무 껍질을 덧대어 동여매고 다시 달렸다는 얘기의 현장이 곧 이곳 훈련원이었던 것이다. 순조 때 사람인 유본예(柳本藝, 1777~1842)가 지었다고 전하는 <한경지략(漢京識略)>(1830)에는 훈련원의 연혁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남부 명철방(明哲坊)에 있다. 개국 초에 창건되어 과시(科試)와 무재습독(武才習讀)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이곳 곁에는 연자루(燕子樓)가 있으며 석초(石礎)가 매우 높다. 무과(武科)를 볼 때마다 이곳이 일소(一所)가 되므로 원관(院官)이 이 누에 올라 화살을 배부하면 거자(擧子, 응시자)는 누 아래에 둘러서서 이를 받는다.
살피건대 태종(太宗) 17년에 훈련관(訓鍊觀)의 모든 밭을 이곳에 속하게 하고, 이로써 무사(武士)를 양성하였다. 나중에 훈련관을 훈련원으로 고쳤으며, 이 곁에는 옥전(沃田)이 있어서 숭채(菘菜, 배추)를 심는데 그 맛이 좋아서 이를 일컬어 ‘훈련원배추(訓鍊院菘)’라 한다. 이 옆에 우물이 있어 ‘통정(桶井, 통우물)’이라 하는데 물맛이 제일이라 칭한다. 훈련원 사청(射廳)에는 성간(成侃)의 기문(記文)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훈련원의 구체적인 위치는 어디였을까? 이에 관해서는 우선 갑오개혁 당시 한성부 오서(漢城府 五署)의 방계동명(坊契洞名) 정리자료에 ‘훈련원’이 ‘남서 명철방 남소동계(南署 明哲坊 南小洞契)’에 속해 있었다고 채록된 사실이 눈에 띈다. 이를 단서로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4월 27일자에 수록된 「경성부 정동(町洞)의 명칭 및 구역(제정)」을 살펴보니, 이 당시에 종래의 훈련원은 ‘황금정 6정목(黃金町 六丁目, 지금의 을지로 6가)’ 구역에 귀속된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정리 작성한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1912년 조사)>에는 “황금정 6정목 18번지, 잡종지(雜種地), 35,029평, 국유지”로 표기된 항목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옛 훈련원 자리이다. 이곳은 지금의 국립중앙의료원 일대와 그 후면으로 청계천변에 접하는 광활한 지역 전체를 두루 포괄하는 지번이다.
그런데 현재 이곳과 서쪽으로 이웃하는 지역에 훈련원공원(訓練院公園, 을지로 5가 40번지 일대)이 별도로 남아 있으므로 이로 인해 훈련원 구역의 공간적 범주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 약간의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이 지역은 옛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가 있었던 구역이며, 동쪽 일부가 ‘황금정 6정목’에 살짝 걸쳐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황금정 5정목’과 ‘방산정(芳山町)’에 들어 있으므로 딱히 훈련원 구역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경성사범학교에서 펴낸 <경성사범학교총람(京城師範學校總覽)>(1929)에 수록된 ‘학교연혁’ 항목을 보면 “[1921년 9월 30일] 경성중학교 가교사(假校舍)에서 황금정 5정목 훈련원 신축교사(기숙사 3동)로 이전”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으로 미뤄 보건대 아마도 이곳 역시 대개 훈련원 권역에 포함하여 인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 1913년 1월 26일자에는 훈련원 옛터에서 야구경기가 벌어지는 광경이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 보이는 훈련원 청사는 1917년 6월에 동대문 소학교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총독부의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간호부양성소 교실로 사용된다. 왼쪽 저 멀리 흥인지문(동대문)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근대 시기 이후 훈련원에 관한 흔적을 살펴보니, 1906년 8월에 군부(軍部)에서 친밀기관(親密機關)의 하나로 군인구락부(軍人俱樂部)를 이곳에 창설하였다는 내용이 눈에 띄긴 한데, 이런 정도를 제외하고는 서울 지역의 각종 단체와 학교들의 운동회가 벌어진다거나 서양에서 도입한 각종 스포츠 종목들의 경기가 이곳에서 개최된 사실을 알리는 신문기사들이 단연 수두룩하게 남아 있다. 잘 알려진 YMCA야구단의 야구시합이라든가 엄복동(嚴福童,1892~1952)이 참가한 자전거 경주대회 등도 이곳에서 자주 개최되었다.

프랑스 화보잡지 <일뤼스트라시옹(L’Illustration)> 1907년 9월 7일자에는 군대해산과정에서 숨진 시위대병사들의 시신을 늘어놓은 광희문(光熙門) 밖의 광경과 이를 수습하려는 가족들의 모습을 수록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그리고 이곳은 무엇보다도 일제의 강요로 군대해산(軍隊解散) 조치가 이뤄질 때 해산식이 거행된 장소로 기억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1907년 7월 31일 장차 징병제(徵兵制)를 공포할 요량으로 일시(一時) 해대(解隊)케 한다는 내용을 담은 ‘군대해산조칙’이 내려졌는데, 이에 앞서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韓國統監 伊藤博文)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군대해산순서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군대해산순서(軍隊解散順序)]
제일(第一). 군대해산이유(軍隊解散理由)의 조칙(詔勅)을 발(發)할 사(事).
제이(第二). 조칙(詔勅)과 동시(同時)에 정부(政府)는 해산후(解散後)의 군인처분(軍人處分)에 관계(關係)한 포고(布告)를 발(發)하며 차(此) 포고중(布告中)에는 좌개사항(左開事項)을 시명(示明)할 사(事).
일(一). 시위 보병 일대대(侍衛 步兵 一大隊)를 치(置)함.
이(二). 시종무관(侍從武官) 기명(幾名)을 치(置)함.
삼(三). 무관학교(武官學校) 급(及) 유년학교(幼年學校)를 치(置)함.
사(四). 해산(解散)할 시(時)에 장교 이하(將校 以下)에 일시은급금(一時恩給金)을 급여(給與)하고 기 금액(其 金額)은 장교(將校)는 봉급 대개 일개년반(俸給 大槪 一個年半)에 상당(相當)한 금액(金額), 하사 이하(下士 以下)는 대개 일개년에 상당(相當)한 금액이라. 단(但), 일개년 이상 병역(兵役)에 복종(服從)한 자(者)이라.
오(五). 장교(將校) 급(及) 하사중(下士中) 군사학(軍事學)의 소양(素養)이 유(有)하야 체격강건(體格强健)하고 장래유망(將來有望)한 자(者)는 일(一), 이(二), 삼호(三號, 전항)에 직원(職員) 우(又)는 일본군대(日本軍隊)에 부속(附屬)케 할 사(事). 단(但), 하사(下士)는 일본군대(日本軍隊)에 부(附)치 아니할 사(事).
육(六). 장교(將校) 급(及) 하사중(下士中) 군사학 소양(軍事學 素養)이 무(無)한 자(者)로 보통학식(普通學識)이 유(有)하야 문관기능(文官技能)이 유(有)한 자(者)는 문관(文官)에 채용(採用)할 사(事).
칠(七). 병기탄약(兵器彈藥), 군복(軍服)은 환납(還納)할 사(事).

 

이 당시 서소문 안쪽 시위대 병영에 자리한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와 시위 제2연대 제1대대 병력은 박승환 참령(朴昇煥 參領, 1869~1907)의 자결 소식에 호응하여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분연히 저항에 나섰으며,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부대는 훈련원에서 거행한 해산식에 일괄 소집되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서는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2일자에 수록된 다음의 기사들에 간략히 묘사되어 있다.

 

[최종경례(最終敬禮)] 작일(昨日) 상호 10시부터 각대 병정(兵丁)을 훈련원(訓鍊院)에 소집(召集)하고 해산식(解散式)을 거행할 새 일병(日兵)이 사면환위(四面環圍)하여 견여철통(堅如鐵筒)하고 한국위관(韓國尉官)을 곤재해심(困在該心)하여 대대장(大隊長)이 효유(曉諭) 후 장졸(將卒)이 호상작별경례(互相作別敬禮)를 시(施)하고 장교(將校)는 고위대명(姑爲待命)이고, 하사(下士)는 80원씩(圜式), 병졸(兵卒)은 1년 이상 근무자는 50원씩, 1년 이하 자는 25원씩 반사(頒賜)하였더라.
[한병휘루(韓兵揮淚)] 작일(昨日) 훈련원(訓鍊院)에서 해산한 한병(韓兵)들이 은사(恩賜)를 수(受)하고 출래(出來)하야 분기(憤氣)를 불승(不勝)하여 혹자(或者)는 지전열쇄(紙錢裂碎)하고 혹자(或者)는 의관제구(衣冠諸俱)를 매(買)하며 낙루자(落淚者) 다(多)하더라.

 

그런데 ????경성부사???? 제2권(1936), 29쪽에는 이 날의 상황에 대해 그야말로 일본인의 시각에서 정리한 구절이 남아 있다.

 

…… 11시에 이르러 약 2천의 병사가 몸에 촌철(寸鐵, 기병대의 패검)을 차지 않고 세우(細雨)가 소소(蕭蕭)한 훈련원원두(訓練院原頭)에 개연(慨然)히 정렬했다. 이 시각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제2연대 제1대대의 양대(兩隊)는 남대문 내에서 모반(謀叛)하여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식장참집부대(式場參集部隊)만 해산하는 것으로 하였으며, 해산의 취지(趣旨)를 선언하고 은사금(恩賜金)을 지급하여 현장에서 수의해산(隨意解散)하는 것을 허가했다. 병사들은 일이 의외인 것에 놀라 처음에는 호읍(號泣)하는 자도 있었으나 당시의 병사로서는 과분한 금원(金員)을 얻게 되자 읍성(泣聲)은 홀연히 소성(笑聲)과 환성(歡聲)으로 변하였고 오후 3시 식(式)의 종료를 기다려 은사금을 지니고 광희정(光熙町)과 부근의 전체 주막(酒幕), 입주가(立酒家, 선술집), 내외주가(內外酒家)에 설퇴(雪頹, 우르르 몰려가는 것)하여 우음(牛飮)했다. 술집은 이 때문에 입추(立錐)의 여지(餘地)가 없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훈련원 일대는 동대문공립심상소학교(東大門公立尋常小學校, 1917년 4월 개교)를 위시하여 경성약학전문학교(京城藥學專門學校, 1919년 5월 신축이전), 경성사 범학교(京城師範學校, 1921년 9월 신축이전), 경성여자공립실업학교(京城女子公立實業學校, 1928년 12월 신축) 등이 잇달아 들어서면서 그 영역이 서서히 잠식되어 갔다. 이밖에 돈의문 밖 경기감영 터에 있던 고양군청(高陽郡廳)이 1928년 4월 7일에 옮겨와서 이 구역을 다시 분할하여 차지하였다가 해방 이후 1961년 8월까지 머물렀던 일도 있었다. 또한 1934년에는 경전부영화(京電府營化) 요구에 직면한 경성전기주식회사(京城電氣株式會社)가 이러한 난국의 타개책으로 거액의 기부금을 내기로 결정했을 때 그 돈으로 지은 ‘경
성부민병원(京城府民病院)’이 들어선 자리가 곧 훈련원 구역이었다. 현재 서울시의회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경성부민관(京城府民館)이 신축되고, 경성전기회사의 본점이 서울로 옮겨진 것도 모두 이 당시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이때 경성전기의 1차년도 기부금 50만 원을 재원으로 경비진료소(輕費診療所)를 건립하기로 하고 1933년 6월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 3월에 낙성식을 보았는데, 완공 직전에 ‘경성부민병원’으로 이름이 고쳐졌다. 1941년 3월에는 이곳 후면에 상이군인 유가족을 위한 수산장(授産場)으로 2층 규모의 양관인 ‘생활의 집’이라는 명칭의 시설이 추가된 바 있다. 경성부민병원은 해방 이후에 한때 시민병원(市民病院)으로 개칭하였다가, 그 자리에는 1958년에 신설된 ‘국립의료원’이 들어서게 된다.
이보다 앞서 훈련원 자리는 1919년(고종황제 인산)과 1926년(순종황제 인산) 두 번에 걸친 국장(國葬)이 벌어질 때마다 봉결식장(奉訣式場)으로 사용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또한 1932년에는 동일한 자리에서 만주사변(滿洲事變)과 이에 따른 ‘만주국(滿洲國)’ 수립의 선포를 계기로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경성일보사, 매일신보사, 서울프레스사가 공동주최한 ‘신흥만몽박람회(新興滿蒙博覽會, 1932.7.21~9.18)’라는 대규모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옛 훈련원 지역의 공간해체내력을 훑어가다보면 그 말미에 존재감이 뚜렷하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 1940년 4월 11일에 다시 ‘경성부 훈련원 회장’으로 개칭)이다. 이것은 원래 1937년 2월에 일본인 광산업자인 코바야시 우네오(小林采男, 1894~1979)의 기부금으로 확보한 1만 4천 원의 금액으로 훈련원에 자리한 약학전문학교 후편 공터에다 새로운 장재장(葬齋場))을 건설하려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통해 홍제내리(弘濟內里)의 장재장 부족 현상을 타개하는 한편 그곳 화장터에 가마 두 기를 추가로 건설하려던 계획도 추진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朝鮮)> 1926년 7월호에 수록된 순종 국장 당시 장의식장으로 사용된 훈련원 터 일대의 전경이다. 이에 앞서 1919년3월 고종 국장 당시에도 이곳 훈련원 터가 장제장(葬祭場)으로 사용되었다.

1932년 가을에 옛 훈련원 터에서 벌어진 신흥만몽박람회의 모습을 담은 항공촬영사진이다. 전면에 보이는 것이 박람회장이고 그 뒤로 청계천 일대와 경성약학전문학교, 동대문소학교, 경성여자공립실업학교 등이 두루 포진한 광경이 함께 포착되어 있다. 이 사진의 오른쪽으로는 경성운동장이, 왼쪽으로는 경성사범학교가 각각 자리하고 있다. 

 

<뻗어가는 경성전기>(1935)에 수록된 경성부민병원(京城府民病院, 1934년 3월 낙성)의 전경이다. 이른바 ‘경전부영화(京電府營化)’의 당면과제에 놓인 경성전기주식회사가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제시한 거액의 기부금으로 이를 지었으며, 현재 서울시의회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경성부민관(京城府民館, 1935년 12월 준공)’ 역시 이 건물과 건립유래는 동일하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그러나 도중에 장례식을 거행하는 ‘장재장’만 건설하기보다는 마치 일본 히비야공원(日比谷公園)과 같은 공간처럼 야외음악회와 영화회 등을 곁들여 운영할 수 있는 시설로 꾸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이를 ‘경성부민회장’으로 그 용도와 명칭을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 경성부민회장(부지면적 5,566평, 건물평수 26평 3합)의 개장 과정에 대해서는 <경성휘보(京城彙報)> 1938년 1․2․3월호(합본), 76~77쪽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부민 대망(待望)의 부민회장(府民會場)도 부내 모 독지자(某 篤志者)의 기부금(寄附金)으로 드디어 그 실현을 보기에 이르러, 객년(客年) 8월 황금정 6정목 18번지 구 훈련원(舊訓練院)의 광장에 기공(起工), 공비(工費) 1만 2천여 원을 들인 근세식 철근 콘크리트조(近世式 鐵筋 コンクリート造)의 건물도 최근에 준공(竣工)을 고하여 3월 5일부터 개장(開場), 일반(一般)에 대여하는 것으로 되었다. 사용시간(使用時間)은 오전 8시부터 오후 11시까지이며, 사용요금(使用料金) 20원을 전납(前納)하고 부윤(府尹)의 사용승인(使用承認)을 얻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부민회장사용조례(府民會場使用條例) 5조(條)에 해당하는 경우는 사용불승인이 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제5조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하략)

 

야스쿠니신사 임시대제와 관련하여 이들 전몰장병에 대한 위령제가 거행되고 있는 광경이 수록된 <동아일보> 1938년 10월 21일자의 보도내용이다. 비단 이 행사만이 아니라 이곳 훈련원 터 경성부민회장(京城府民會場)에는 이러한 종류의 위령제와 추도회가 쉴새없이 거행되었다.

 

<매일신보> 1940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윤덕영 자작의 부고광고이다. 그의 장지는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교문리이며, 영결식장은 ‘경성부민재장(京城府民齋場, 옛 훈련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일상적인 장례식을 거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곧잘 스모(相撲, 일본씨름) 대회나 중량거(重量擧, 역도) 경기대회가 벌어졌으며, 또한 무엇보다도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과정에서 죽은 전사자들을 위한 추도집회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곤 했다. 여기에는 장고봉사건(張鼓峰事件)의 전사자들에 대한 위령제(1938년 9월), 야스쿠니신사 합사 전몰장병 위령제(1938년 10월), 경성부 출신 장병 영령 추도회(1939년 7월), 지나사변 군마(軍馬) 위령제(1939년 10월), 지나사변 전몰자들에 대한 추도회(1940년 7월), 지나사변 5주년 전몰장병 추도제(1942년 7월) 등의 사례가 포함되어 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경학원 대제학, 귀족원 의원, 종2위 훈1등 자작 ……. 이것도 벼슬이랍시고 이러한 긴 수식어를 앞에 달고 있는 이는 대표적인 친일귀족이자 경술국적(庚戌國賊)의 한 사람인 윤덕영(尹德榮, 1873~1940)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윤덕영이 죽었을 때 그의 영결식이 벌어진 자리가 바로 이곳 경성부민회장이었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는 이미 조중응 자작(1919), 민원식 국민협회 회장(1921), 조동윤 남작(1923), 민영기 남작(1927), 유맹 중추원 참의(1930) 등 적지 않은 친일파 군상이 이곳을 이승과 작별하는 장소로 이용했던 흔적이 포착되고 있다. 이래저래 훈련원 옛터는 일제의 폐해와 친일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던 공간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월, 2021/01/25-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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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지부,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 추모식과 백선엽 안내문 철거

 

대전지부(지부장 박해룡)는 2월 5일 독립운동가 조문기(연구소 2대 이사장) 선생의 13주기 추모식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에서 진행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대전지부 후원회원을 비롯해 광복회 대전지부(지부장 윤석경) 회원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추모식은 헌화, 묵념, 약력보고, 추모사 순으로 진행됐다. 조문기 선생은 유만수, 강윤국과 더불어 1945년 7월 24일 ‘부민관 폭파의거’의 주역이다. 이 의거는 경성부 부민관에서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춘금이 주최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장에 사제 시한폭탄 두 개를 설치해 폭발시켜 대회를 무산시킨 사건이다. 조문기 선생은 2001년 이돈명 변호사에 이어 연구소 2대 이사장에 취임한 이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에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으나 사전 발간 1년 전인 2008년 별세하였다. 정부는 2008년 고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으며, 2014년에는 모교인 화성매송초등학교 교정에 회원과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동상(제작 : 김서경 김운성)을 세
우기도 했다. 동상과 묘비에는 평소 선생의 어록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요,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이날 추모식을 마친 참가자들은 당초 작년 7월 장군2묘역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 백선엽 묘와 바로 맞은편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된 광복군 출신 김준엽 선생(전 고려대 총장) 묘를 둘러보며 국립묘지법 개정의 필요성을 다시금 인식하고자 했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백선엽 묘를 찾기 쉽도록 안내하는 개별 안내문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는 데다 현충원 직원 수십 명이 백선엽 묘지를 호위하듯 지켜서 있는 모습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현충원 측은 하루 만에 백선엽 묘지 안내문을 철거했지만,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 수구 언론은 여러 차례 연구소를 비난하는 기사를 냈고 대한민국상이군경회·전몰군경유족회·전몰군 경미망인회 등은 2월 9일 ‘호국 영령들의 영원한 안식처 훼손 행위를 엄단하라’는 공동 입장문을 냈다.

 

토, 2021/02/27-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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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역사 1도 모르던 피디, 역사에 푸욱 빠지다

– 이은지 YTN라디오 뉴스제작팀장

인터뷰 : 방학진 기획실장
정리 : 김혜영 선임연구원

●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를 소개해달라
● YTN라디오가 연구소 자문, 경기도와 경기아트센터 제작 지원으로 지난해 11월부터 시작한 장기 프로젝트다. 독립운동가들이 남긴 독립운동가(歌)를, 생존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의 육성으로 직접 녹음하고 복원해 프로그램으로 제작한다. 음악 문화 콘텐츠로 재탄생한 한 곡의 독립운동가에는 노래와 함께 그들의 선조 이야기도 담겨있다. 이 프로그램은 공익적 목적의 방송물임과 동시에 역사 기록물로도 가치가 깊어, 청취자들이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레 독립 정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 YTN라디오, 이은지PD와 연구소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 2018년 YTN라디오 <이동형의 뉴스정면승부> 프로그램 광복절 특집 기획 자문을 얻기 위해 홍기희 작가와 함께 연구소에 직접 방문했었다. 당시 제작했던 광복절 특집 5부작 ‘그들이 꿈꾸는 나라’는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 사회문화발전부문 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이듬해 같은 프로그램에서 3·1운동 100주년 연속기획으로 반민특위 등 근현대사 관련 특집 방송을 했다. 그해 여름에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에 참가해, YTN라디오 특집 다큐멘터리 <서간도 독립운동가 어느 무명씨의 꿈>을 제작, 연출했 다. 겨울에는 러시아 독립운동 유적지를 방문하면서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만나 취 재하면서 언론인으로서 가져야할 역사 의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취재 기록들 은 <연해주 연가>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2020년 YTN라디오를 통해 방송되었다. 역사라는 것은 기억되고 회자될 때 비로소 진짜 역사가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가 기억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기록들이 YTN라디오 를 통해 대중 속에서 회자되고 있다.

●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많은 기록물 형태 중 음악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 광복절 특집 <그들이 꿈꾸던 나라> 5부작을 연출했을 때 제 5부 프로그램이 친일음악과 항일음 악에 대한 내용이었다. 충격이었다. 故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피날레 곡이었던 ‘희망의 나라로’ 는 대표적인 친일음악인인 현제명이 작곡한 곡이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가곡 중에서도 비슷 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모르면 용감하다던가……! 청취자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아마도 대담과 서술이라는 형태보다 노래라는 콘텐츠가 주는 충격파가 더욱 컸던 것 같다. 언젠가는 더 깊게, 노래로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연해주 연가> 다큐멘터리 2부는 당시 망명 독립운동가들이 불렀던 ‘노래’에 관한 내용이었다. 압록강을 건너며 불렀을, 매서운 연해주 칼바람 속에서 해방 조국을 꿈꾸며 불렀을 그 시대 그 분들의 그 수많은 노래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구술로는 전해져왔으나 기록되어 보관되지 못했던, 악보는 있으나 음원은 없는, 그래서 점차 소실되어 우리 삶에 살아나지 못한 독립운동 가들의 독립운동가(歌). 이 노래들을 기록으로 남겨보자, 이번 독립운동가 복원 프로젝트 <100 년의 소리> 기획의 시작이었다. 라디오 PD 시각으로 얘기해보자면, 음악은 라디오 매체가 기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콘텐츠 다. 청취자들에게 지식과 정보, 감성을 동시에 그리고 자연스럽게 전달할 수 있는 라디오에 최 적화된 오디오 콘텐츠. 소리에 집중할 수록 청취자들에게 깊이 각인될 수 있는 노래, 이 아이 템 딱이네 딱.

●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가 그렇게 시작된 거였나?

●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사실 활자로 된 노래를 입체적으로 복원해서 청취자들의 귀까지 전달되는 작업은 손이 많이 가는 일이기도 하지만, 필수적으로 제작비가 적지 않게 소 요된다. 이 일에 흔쾌히 동참하여 뜻을 모아준 곳이 있었다. 경기도와 경기아트센터다. 두 곳의 제작지원이 확정되면서 프로젝트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돈 안되고 흥행 안되는 역사 콘텐츠(그것도 근현대사, 게다가 독립운동가 이야기라니)에 YTN 라디오는 하루 다섯 번 방송이라는 횟수를 배정하고, 메인 프로그램 시간인 소위 ‘잘 나가는 방송’시간(방송 광고로 치자면 무려 ‘프라임 타임대’)에 배치했다.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편을 시작으로 프로그램이 방송되었고, 현재까지 13편이 제작됐다. FM 94.5MHz YTN라디오를 통해 들을 수 있다.

● 제작 과정이 궁금하다.
● 기획 단계에서부터 복원할 독립운동가(歌)를 선정한다. 제작진의 기준은 두 가지다. 후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할 가치와 의미가 있는가, 시의적절한가. 그 후에 노래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찾고,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맥락을 검증해나간다. 이 노래를 육성으로 복원할 독립운동가 후손을 물색하고 섭외한다. 제작진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스토리텔링’과 ‘연관성’이다. 이 노래는 왜 꼭 이 분의 후손이 불러야하는가. 노래에 담길 ‘이야기’는 왜 반드시 이 독립운동가여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고민이 끝나고 답이 나오면 살아계신 독립운동가 혹은 그 후손을 만나러 간다.
취재는 긴 시간 이뤄진다. 후손들이 가슴 깊이 안고 살아온 긴 역사를 회상하기까지의 시간도 필요하거니와 ‘반드시 남겨야할 메시지’가 충분히 담겨야하기 때문이다. 2분을 만들기 위해 인터뷰하는 시간은 평균 2-3시간. 취재의 하이라이트는 ‘노래’다. 제작진이 만난 거의 대부분의 후손들, 독립지사들은 노래를 꺼려했다. 그런 분들에게 취지를 무한 설명하고 설득하여 무반주 육성 라이브를 받아내기까지, 이
과정을 무사히 끝내면 후작업에 들어간다. 작가는 취재 속기를 바탕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긴긴 이야기들의 날실과 씨실을 엮어내어 2분이라는 액기스를 만들어낸다. 현재 YTN 음악실 전설의 마이더스의 손 장석문 감독이 현대판 독립운동하듯이 음악 작업 중이다.

● 해외에 계시는 후손 분들이 부르는 노래에 대한 계획은 없나?
● 해외까지 나갈 제작비가 없다(웃음). 망명 독립운동가들의 노래를 복원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은 해외를 나갈 수도 없다. 코로나19가 지나가면 해외에 계시는 분들의 노래도 복원하고 싶다. 음질 문제만 해소된다면 유선 인터뷰나 랜선 인터뷰 등도 시도해볼 생각이다.

● 그렇다면 알려지지 않은 노래들을 찾아서 발굴하는 건 어려운가? 독립운동가 부모님들이 부르시던 노래를 본인들만 알고 계시는 경우도 꽤 있을 것 같다.
● 취재 중에 만난 한 후손은, 독립운동을 하셨던 할아버지가 부르던 노래라며 알려주었다. 가사는 알고 있었으나 곡조는 모르는 듯 했고, 그마저도 미미한 조각의 파편같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독립운동과 관련된 노래는 아닌 것 같았다. 다만 할아버지는 “이런 노래를 부르면 잡혀 간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나는 방송인이지 역사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현장에서 즉석으로 ‘이 노래다’는 확신을 할 수가 없다. 역사적으로 검증된 노래를 기준으로 인터뷰를 진행한다. 제작진이 만난 한 분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선조들은 노래조차도 잘 안 불렀다고 하시더라. 생각해보시라.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본인의 이름조차, 사진 한 장조차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분들이 많았다. 그런 엄중한 상황 속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었을까(그러니 구전으로만 전해질 수 밖에). 해방 이후에도 당시 정치적 상황 때문에 독립운동했다는 기록을 다 지우고 살았던 분들이 많았으니 말 다했다. 제작진이 만난 후손 분들 중에는 아버지 어머니가 부른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노래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업적을 직접 들은 분도 거의 없었다. 심지어 해방된 나라에서조차 성(姓)씨를 바꿔서 사셨
던 분들도 있었으니까. 이 프로그램은, 그 분들이 못 다 부른 노래를 후손들이 다시 불러준다는 의미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 시간과 공을 꽤 많이 들이는 것 같은데, 방송 한 번으로 끝내기는 아쉬울 것 같다.
● 사실이다. 그래서 YTN라디오에서는 방송에 내보내지 못했던 취재 이야기들을 재가공해서 3·1절 등 특집 프로그램으로 만들고 있다. 다만 프로그램을 유튜브나 방송국 홈페이지에 업로드 하는 것은 저작권 문제가 있어서 기록물로 배포할 수 있는 방법 등 대중화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배포하려는 이유? 당연하지않나. 이 노래들은 우리 모두의 역사다. 많은 사람들이 듣고 더 나아가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가 됐으면 좋겠다. 여옥사 8호실의 노래 ‘대한이 살았다’를 박정현이 부르고 김연아가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이유도 대중성을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노래가 힘을 가지려면 여러 사람들에게 불려야 한다.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여러 대중들이 한 소절씩 기억하면서 부를 수 있다면, 선조들의 독립 정신이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자리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나 같은 경우도 국치추념일에 대해서 전혀 몰랐는데 ‘국치추념가’ 노래를 듣다보니 가사에 날짜가 나오더라. 아마 앞으로 경술년 추팔월 이십구일 날짜는 절대 잊지 못할 거다. 이런 식으로 노래를 부르다보면 자연스럽게 노래 속에 담긴 뜻과 의지를 알게 되지 않을까 한다. YTN라디오가 우리 역사 가운데 이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길 기대한다. 
이런 이유로, 복원을 할 때 고민하는 지점이 ‘대중화’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현대화해서 보다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을까. 뜻과 정신을 오롯이 이어가되, 형식은 세련되게. 개인적으로는 마지막에 이 복원된 노래들로 콘서트를 개최하고 실황 음반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

● 노래가 지금 우리가 부르는 노래와는 많이 다르다.
● 들어보면 타령 같고 시조 같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 노래가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97세가 되신 김영관 지사가 해준 이야기가 있다. 광복군으로 활동하면서 정작 목놓아 독립군가를 부른 기억은 없다고 하더라. 그때 노래를 부른 다는 건 신분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니까타령 같은 이유가 여기있지 않을까 한다. 혼자 흥얼거리며 부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누가 그때 당시에 지금 군가처럼 씩씩하고 우렁차게 부를 수 있었겠나.

● 악보가 있어도 타령처럼 불렀던 건가?
●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라고 하면 지금 군대의 군가를 생각할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의 노래들로만 구성된 건 아니다. 고향에 두고온 가족을 그리워하면서 불렀던 망향가도 당시 독립군들에게는 군가였다. 사기를 돋우는 웅장한 멜로디도 있지만, 토닥토닥 망명 독립운동가들의 시름을 달래주던 곡조도 있다. 또, 똑같은 노래인데 부르는 사람마다 다 다른 노래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음도 다르고 박자도 다르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당시 기록을 남길 수가 없기 때문에 구전으로만 전달하면서 부르는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생겼던 것이 아닐까 한다.

● 후손 분들을 인터뷰하고, 만들기 쉽지 않았을 콘텐츠가 제작되고 나면 느낌이 남다를 것 같다.
● 빚진 마음이 크다. 역사에 빚지고 독립운동가 분들에게 빚지고.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 아닐까? 이 고마움과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으로, YTN라디오가 현재 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가 이 시대의 독립운동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제작에 임한다. 내가 늘 하는 얘기가 있다. YTN라디오가 하나의 작은 역사적 허브가 되어, 고마운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그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언론이 될 수 있어 참으로 감사하다.

●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하고 싶은 콘텐츠가 있나?
● 지금은 너무 큰 꿈으로 보이지만 꼭 제작하고 싶은 콘텐츠가 있다. 올해 임시정부기념관이 개관한다. 11월 23일로 예정돼있다고 알고 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해방된 조국에 발 딛었던 날짜에 맞춘 것이라고. 그 앞에서, 그 분들이 불렀던, 만주와 중국에서 불려진 독립운동가 노래들로 임정 콘서트를 열고 싶다. 과학이 발달해서 AI가 하늘로 돌아간 사람들의 음성과 모습도 복원하는 시대다. 남의 땅에서 돌아가신 독립운동가들의 목소리와 모습을 복원해서 꿈에 그렸을, 해방된 조국의 임시정부 앞에 세워 드리고 싶다. 그리고 남의 땅에서 목놓아 통곡처럼 불렀을 애국가와 당시의 독립운동가(歌)들을 후손들과 함께 노래하는 모습을 꼭 보고싶다. 임시정부 비서장이셨던 차리석 선생님이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시지
못했다. AI로 되살아난 차리석 선생님과 후손이 함께 복원된 임시정부에서 독립군가를 부르는 모…… 아, 꿈만 꿔도 너무 좋고 행복하다. 빚진 마음이 조금은 해소될 것도 같고. YTN라디오가 꿈을 꾸기 시작했으니, 동참할 누군가도 생길 거라 믿는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 FM 94.5MHz YTN라디오를 통해 <독립운동가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많이 들어주시고, 노래는 따라 불러주시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알려달라. 역사는 회자되고 노래는 불리워져야 비로소 생명력을 갖게 된다. 박제화되어 있던, 잃어버렸던 노래들이 역사로 살아나는 풍경을 보고싶다.

토, 2021/02/27-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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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67]

일본 황태자의 결혼기념으로 세워진 경성운동장
하도감(下都監) 자리에 있던 정무사(靖武祠)의 건립 내력

 

이순우 책임연구원

 

스포츠중계를 할 때면 으레 “여기는 성동원두, 서울운동장입니다”라는 아나운서의 멘트로 시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성동원두(城東原頭)는 성동 벌판의 들머리라는 뜻이며, 서울운동장은 옛 경성운동장이자 한때 동대문운동장으로 통용되었던 곳을 가리킨다. 이것 말고도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을 일컬어 훈련원원두(訓練院原頭)라고 했던 사례들도 곧잘 눈에 띈다.
88서울올림픽으로 잠실경기장이 생겨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운동장은 그야말로 유일무이하다시피 했던 한국 스포츠 역사의 산실이었다. 전국체전과 소년체전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의 어지간한 경기대회는 빠짐없이 이곳에서 열렸으며, 막판 탈락을 아쉬워했던 올림픽 축구나 월드컵 아시아예선전이 벌어졌던 곳도 여기였다.

<동아일보> 1927년 10월 1일자에 수록된 동아일보 주최 제5회 전조선여자정구대회 관련 안내기사에는 경성운동장과 훈련원 일대의 전경을 일목요연하게 포착한 항공사진이 나란히 게재되어 있다. 

 

하지만 서울운동장이 스포츠의 공간만은 아니었다. 이곳은 때로 정치의 공간이자 근현대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가까이는 체제수호 명분의 무수한 궐기대회와 규탄대회가 자주 열렸고,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해방 직후에 찬탁이다, 반탁이다 하여 좌우익이 충돌하던 때의 정치집회공간이었는가 하면 여러 애국지사들의 영결식(永訣式)이 거행되는 곳으로도 사용된 적이 많았다. 더구나 일제강점기에는 전시동원체제에 편승한 각종 행사가 자주 개최되던 그러한 장소였다.
그렇다면 이곳에 운동장 시설이 처음 들어선 것은 언제이며 또한 어떠한 연유로 만들어진 것일까? 서울도성이 지나고 하도감(下都監)이 자리한 지역에 경성운동장(京城運動場, 경성그라운드)이라는 이름으로 개장이 이뤄진 것은 1925년 10월 15일이었고, 정식 준공일은 이듬해인 1926년 3월 31일이었다.
그런데 경성운동장 앞에 꼭 함께 따라 붙는 것이 “동궁전하어성혼기념(東宮殿下御成婚記念)”이라는 수식어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동궁 전하’는 장차 소화천황(昭和天皇)이 되는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裕仁)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 당시 섭정궁(攝政宮)의 노릇을 했던 히로히토 황태자의 결혼식은 1924년 1월 26일에 있었다. 당초 결혼식은 1923년 가을로 예정되었으나, 그해 9월 느닷없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관동대지진)의 발생으로 한 차례 연기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니까 경성운동장의 건립은 이때 황태자의 결혼을 기념하는 행사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었다. 이에 관한 결정과정에 대해서는 <경성일보> 1924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어성혼기념(御成婚記念)의 운동장(運動場), 만장일치(滿場一致)로 원안가결(原案可決), 2만 평(坪)의 관유지(官有地)를 팔아 재원(財源)으로, 완성(完成)은 14년도(年度)」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내막을 엿볼 수있다.

 

경성부협의회 다화회(京城府協議會 茶話會)는 16일 오후 3시부터 학교조합회의실(學校組合會議室)에서 개회되었는데 출석의원 21명으로 부청측(府廳側)에서는 타니 부윤(谷府尹), 3 이사관(理事官), 토목과장(土木課長), 내무계(內務係), 회계계(會計係) 등이 출석했고 타니 부윤으로부터 어성혼기념사업(御成婚記念事業)으로서 그라운드 건설에 관한 계획의 보고를 하고 현재의 훈련원(訓鍊院) 동부그라운드(東部グラウンド)를 중심으로 한 부근 민유지(民有地) 약 2만 평을 양도 받아 최상단(最上段)에 테니스 코트(テニスコート), 중단(中段)에 다이야몬드(ダイヤモンド; 야구장), 하단(下段)에 트랙(トラツク)을 건설하며, 그리고 이에 필요한 재원(財源)은 특별염출법(特別捻出法)을 강구하여 부비(府費)에 관계없이 하도록 관유지(官有地)의 양여(讓與)를 받아 이를 매각하여 경비에 충당하려는 것인데 그 면적(面積) 2만 4, 5천 평이지만 유효매각지(有效賣却地)는 약 2만 평으로 예상한다는 부윤의 설명을 마치자 고죠 의원(古城議員)은 “실로 훌륭한 계획이지만 어성혼(御成婚)의 기념사업이라고 하면 가장 신중히 연구되지 않으면 안 되며, 운동(運動)도 훌륭하기는 하지만 운동 이외에 무언가 사회적(社會的)
생산적(生産的) 시설은 없는 것일까” 라고 언급한 바 타케우치 의원(竹內議員)도 이에 찬의(贊意)를 표시하고 “그라운드로서는 위치(位置)가 치우쳐진 경향이 있다”고 하며 의견을 표출하였는데 다른 의원에게 “아전인수론(我田引水論)이다” 하는 야유(揶揄)를 받았고, 이어서 이진호 의원(李軫鎬議員)이 일어나 “섭정궁 전하(攝政宮殿下)는 비상(非常)히 운동(運動)을 좋아하고 계시며 또한 목하(目下)의 부민(府民)에게는 운동을 장려하는 필요가 있어서 선반(先般) 어하사(御下賜)된 조칙(詔勅)의 어정신(御精神)으로 보더라도 국민(國民)의 원기(元氣)를 함양하는데다 경사스러운 기념사업으로서는 가장 좋은 착상이다”라고 찬성하여 결국 만장일치(滿場一致)로써 부청(府廳)의 발안(發案)에 찬성의 뜻을 표했다. 비공식(非公式)이었지만 개선후(改善後) 제1회(第一回) 회합으로 각의원(各議員) 모두 비상한 긴장미(緊張味)를 보였고, 이리하여 7시 폐회(閉會)했는데 머지않아 본회의(本會議)를 개최한 다음 어성혼(御成婚) 이전에 공표할 것이지만 확실히 기공(起工)하는 것은 13년도(즉, 1924년도)이며, 14년도(즉, 1925년도) 중에는 완성하리라 예상한다고.

 

여기에 나오는 이진호(李軫鎬, 1867~1946)는 일찍이 경상북도장관(1910.10~1916.3), 전라북도
장관(1916.3~1921.8)을 거쳤고 다시 총독부 학무국장(1924.12~1929.1), 중추원 참의1931.1~19
40.4), 중추원 부의장(1941.5), 중추원 고문(1943.6),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1943.10)을 지낸 친일관료의 거물이었다. 그가 경성부협의회원이 된 것은 1923년 11월의 일이며, 그는 한때 휴
직 신분으로 있던 도지사 직에서 막 퇴직(1923.8)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경성부에서 기념사업의 하나로 경성운동장의 건설을 추진하려는 뜻은 이진호의 말마따나 “특히 운동을 사랑하시는 동궁 전하(東宮殿下)의 기념사업으로 운동장 설치계획을 세움은 적당한 처치”라는 것이 그 이유로 내세워졌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경성운동장의 건립부지는 몇 차례 후보지 검토 끝에 훈련원공원(訓練院公園, 황금정 6정목 및 7정목; 1925.10.14일 폐지) 일대로 최종 선정되었다.

 

서울도성이 지나는 언덕지형의 흔적이 그럭저럭 남아 있는 경성운동장의 개설 초기의 광경이다. 오른쪽 차일(遮日) 위에 걸린 깃발이 ‘경찰기장(警察旗章)’과 ‘약일장(略日章)’인 것을 보면 경찰관련단체의 행사인 듯하다. 저 너머로 언덕 위에 보이는 육각정자는 ‘청운각(靑雲閣, 1925년 12월에 명명)’이다. (개인소장자료)

 

<동아일보> 1926년 12월 4일자에는 경성운동장 야구장 스탠드에 막 설치된 일산(日傘, 그물망 포함)의 모습이 소개되어 있다.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기부하여 설치된 이 시설물은 일제패망기에 이르러 전쟁물자조달을 위한 금속물 공출의 대상이 되어 1943년 2월에 철거되었다.

 

그러나 서울도성 안쪽만이 아니라 그 바깥 지역도 포괄하여 경성운동장을 배치하는 설계가 이뤄져 있었으므로 조선산업물산주식회사(朝鮮産業物産株式會社,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신당리 220번지 부근) 소유 토지 5천여 평을 마저 사들인 이후에야 이곳에서 건립공사가 진행되었다. 경성운동장 건립지에는 그 당시의 세계적 추세에 따라 500미터 트랙을 갖춘 육상경기장(축구장)과 아울러 야구장과 정구장 시설이 우선 갖춰졌고, 경비조달의 문제로 수영장과 기타 시설은 추후에 보완 건립되었다.

 

이 지역은 어차피 성벽이 지나는 자리였으므로 싼값으로 공간을 확보하자는 의도와 함께 이러한 자연지형을 그대로 활용하여 관중석으로 만들어내는 식으로 공사가 이뤄졌던 것이다. 그 바람에 이 일대를 가로지르는 성벽의 흔적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이간수문(二間水門)도 운동장의 바 닥에 묻히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언덕 지형을 깎아내려 무지막지하게 평탄화(平坦化) 작업을 진행하였으므로 이로써 성벽이 지나는 구간은 옛 모습을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경성운동장의 개장식이 열린 1925년 10월 15일은 이 행사만이 아니라 새로 지은 경성역사(京城驛舍)의 준공과 아울러 남산 중턱에 지은 조선신궁(朝鮮神宮)의 진좌제(鎭座祭)가 동시에 벌어지는 날이기도 했다. 이러한 연유로 경성운동장의 개장식은 3일간의 일정으로 벌어지는 제1회 조선신궁경기대회(朝鮮神宮競技大會)의 입장식(入場式)과 고스란히 겹쳐졌다.
이날 식장에 직접 참석한 사이토 총독은 그가 남긴 축사(祝辭)를 통해 이러한 조선신궁 경기대회의 남다른 의미를 이렇게 설파하였다.

 

조선신궁이 새롭게 완성되어 본일(本日) 진좌제(鎭座祭)를 거행하는 가절(佳節)에 즈음하여 선내 각
지(鮮內 各地)에서 운동선수를 불러 신전(神前)에서 이런 경기를 하려는 것은 더없이 회심(會心)의
마음을 견디지 못할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전(神前)에서 기(技)를 겨루는 것을 널리 행함으로써 사기(士氣)의 발양(發揚)이
도모되어 지는데 이번에 제자(諸子)는 이에 진좌제를 맞이하여 고래(古來)의 관례(慣例)에 따라 경
기하는 일에 종사하며 제자(諸子)는 적절히 평소 연마한 바를 십분 발휘(十分 發揮)하여 경기의 진정
신(眞精神)을 명심함으로써 그 장쾌한 의기(意氣)를 나타내기를 바란다. 이에 개회를 맞아 일언희망(一言希望)을 술회하며 축사(祝辭)로 삼는다.
대정 14년(1925년) 10월 15일 조선총독 자작 사이토 마코토(朝鮮總督 齋藤蘇實).

 

일본공사관원 하야시 부이치(林武一, 1858~1892)의 유고사진집인 <조선국진경(朝鮮國眞景)> 1892)에 드물게 남아 있는 하도감의 전경사진이다. 이 책에는 이곳을 화도감(華都監)이라고 적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표기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경성운동장의 내력에 관한 얘기를 하노라니, 또 한 가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하도감(下都監)의 존재이다. 훈련원 벌판의 동쪽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던 이곳은 훈련도감(訓鍊都監)에 속한 분영(分營)의 하나이며, 경성운동장을 건립할 당시 야구장 일대를 품고 있는 지역이었다.

 

경성운동장의 동남 모서리(옛 하도감 터)에 오래도록 터를 잡고 있다가 1979년 4월 30일에 연희동 소재 한성화교중학으로 옮겨진 오무장공사의 모습이다. 건립 당시에는 ‘정무사(靖武祠)’라 하였으나 1909년에 관리권이 주한 청국총영사관으로 이관되면서‘오무장공사’로 개칭되었다.

특히 이곳 하도감에는 일찍이 ‘교련병대(敎鍊兵隊, 통칭 별기군)’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당시 이곳에 있던 일본인 교관이던 육군공병소위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1848~1882)가 조선인 병사들에게 끌려나와 ‘하야시쵸(林町, 지금의 산림동)’ 부근에서 숨진 일도 있었다. 또한 이때 난병(亂兵) 진압을 핑계로 청나라 군대를 이끌고 왔던 광동수사제독오장경(廣東水師提督 吳長慶, 1833~1884)과 그 휘하의 마건충(馬建忠), 원세개(袁世凱) 등이 진을 쳤던 장소가 바로 이곳 하도감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때는 원세개의 진지로 변한 이곳에 조선 국왕이 3일간이나 보호라는 명분으로 피신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1884년 6월에 느닷없이 오장경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종(高宗)은 그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고 생각한 탓인지 그를 제사지낼 곳을 마련하도록 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하도감 자리에 들어선 ‘정무사(靖武祠)’였다. 정교(鄭喬)가 찬술한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는 이 사당의 건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1885년 여름 4월, 정무사를 세우다]
이때에 이르러 정무사(靖武祠)를 세워 청국 흠차제독 오장경(淸國 欽差提督 吳長慶)을 제사지낼 것
을 명하였다. 조(詔)하여 가로되,
“정무사가 지금 이미 준공되었으니 오흠차의 영령을 안치할 곳이 생
겼도다. 그가 동래(東來)한 위공(偉功)을 어느 날인들 잊겠는가? 지난 일을 추념(�念)하니 나의 감
회가 더욱 깊어지노라. 예조참판을 보내 치제(致祭)토록 하라” 하였다.

 

이곳에는 오장경의 위판 외에도 청나라 전몰병사(戰歿兵士)의 위판이 함께 설치되었고, 1893년에 이르러 통령 오조유(統領 吳兆有)도 이곳에 배향되었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정무사는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이 한참 가속화하던 통감부 시기에 접어들어 훼철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1908년 7월 23일의 칙령 제50호「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건(件)」에 따라 무열사(武烈祠), 선무사(宣武祠), 정무사(靖武祠) 등 일체의 사당 제사는 철폐되고 그 터는 국유로 이속시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황성신문> 1908년 9월 8일자에 수록된 「청순금지(淸巡禁止)」 제하의 기사는 정무사를 철거하려는 시도와 이것이 무산되는 과정에 대한 소식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정무사(靖武祠)를 훼철하고 오장경 씨 위패(位牌)를 매안(埋安)할 차로 재작일(裁昨日)에 장례원 전
사보 윤승구(掌禮院 典祀補 尹昇求) 씨가 고유제(告由祭)를 설행하였는데 청국 총순(淸國 總巡) 및
권임(權任) 각 1인씩과 순사(巡査) 3명이 내도(來到)하여 금지(禁止)하매 윤승구 씨가 언(言)하기를
“칙령(勅令)을 봉승(奉承)한 처지에 여시(如是) 금지하느냐” 한즉 해(該) 경리(警吏)가 답하여 왈(曰)
“탐지(探知)할 도(道)가 유(有)한즉 기시간(幾時間)을 고의(姑依)하라” 하고 통감부(統監府)와 각국
총영사관(各國總領事館)에 교섭 탐지한 후에 갱래(更來) 발언하기를 “차등(此等) 사건을 행하려면
통감부 각국총영사에게 교섭하는 것인데 금내졸행(今乃卒行)하니 차(此)는 위조(僞造)라” 하고 일장
힐난(一場詰難)하였다는데 필경(畢竟)은 매안(埋安)도 못하고 해(該) 제관(祭官)은 달야곤경(達夜
困境)을 경(經)하였다더라.

 

국정홍보처에서 간행한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제7권>에 수록된 옛 서울운동장 일대의 항공사진(1967.2.4일 촬영)이다. 야구장 지역의 오른쪽으로 테니스장과 거의 붙어 있는 곳에 ‘오무장공사(옛 정무사)’의 건물이 그대로 잔존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국정홍보처)

 

2003년 이후 청계천 복원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밀려난 노점상들을 위해 한때 풍물시장으로 변신한 시절에 담아낸 동대문운동장 축구장(주차장포함) 일대의 전경사진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곳에 대한 관리권은 청국 총영사관으로 이양되었고, 이때 주한총영사관으로 있던 마정량(馬廷亮)에 의해 중건되면서 그 명칭도 ‘오무장공사(吳武壯公祠)’로 바뀌었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 사당은 경성운동장의 동남쪽 모서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1979년 4월 30일에 한성화교중학(漢城華僑中學, 연희동 89-1번지) 구내로 옮겨진 상태에 있다.
해방 직후에 경성운동장은 ‘서울운동장’으로 바뀌고, 다시 1984년에 잠실경기장의 완공과 더불어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동대문운동장’으로 개칭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나마 이러한 시기도 잠시 이곳은 오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철거논의가 두드러지게 되었고, 그 와중에 지난 2003년에 청계천 복원공사가 시행되면서 인근 노점상을 위한 대체공간으로 용도폐기된 동대문구장을 활용하면서 느닷없이 이곳은 ‘풍물벼룩시장’과 ‘주차장’ 시설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 이후 옛 동대문운동장의 관련 시설 일체는 야간조명탑(나이터) 하나를 남기고 완전 철거되었으며, 이 자리에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동대문역사관, 동대문운동장기념관, 유구전시장, 이간수문 포함; 2009.10.27. 개장)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2014.3.21. 개장)가 들어선 상태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땅속에 묻혀 있던 이간수문(二間水門)이 다시 드러나 원형을 되찾게 되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그리고 서울성벽이 지나던 곳도 간신히 그 흔적을 표시하는 정도로만 복원이 시도된 바 있다.
하지만 일제가 그들의 황태자가 결혼하는 것을 기념하고 동시에 조선신궁의 완공을 영구히 기리는 체육시설로서 경성운동장을 건립할 때에 언덕 하나를 완전히 들어내 버렸기 때문에 옛 서울도 성의 웅장한 모습을 재건하는 것은 당분간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말았으니 두고두고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화, 2021/03/02-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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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1)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관지 ????기억과 전망???? 43호(2021)에 실린 글로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임헌영 소장은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1979년에는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 글에는 문인간첩단 사건 당시 ‘빙고호텔’(육군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의 끔찍한 고문의 과정, 서대문 귀소에서의 생활, 재판 진행과정, 석방 후 요시찰 인물로 살아야 했던 이야기 등이 담겼다.― 편집자주

 

1. 박정희와 같은 뱀띠의 다른 운명

분단 한국은 별들의 전쟁이래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진짜 별들과 5·16쿠데타를 비판하며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하다가 투옥당했던 국립 서대문대학(서대문구 현저동의 서울교도소)을 나온 전과자라는 별들의 전쟁 말이다. 교도소에서는 전과 1범을 별 하나, 둘은 투 스타로 불렀는데 원수급인 5성도 적잖으니 아마 별들의 숫자로 보면 국방부의 별보다는 법무부의별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두 별들의 차이는 엄청나게 많으나 가장 중요한 점은 국방부의 별들은 한 번 달면 평생을 보장받는 신분적인 우대로 성우회란 막강한 단체가 있으나, 법무부의 별들은 천차만별인 데다 분파가 많다는 점이다. 

1974년 3월 2일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법정에 선 이호철ㆍ임헌영ㆍ김우종ㆍ장백일ㆍ정을병 씨의 모습(오른쪽부터)

 

군부독재란 바로 이런 다양한 별들을 과잉 배출하는 별을 찍어내는 공장인지라, 그래서 총총 하늘에는 별들도 많고 국민들 가슴엔 근심만 많은 세월이었다. 박정희와 내가 닮은 건 같은 뱀띠라는 건데, 세속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의 사주는 정사년(丁巳年) 출생으로 신해월(辛亥月)에다 경신일(庚申日)에 무인시(戊寅時)에 태어난 것으로 소문나있다. 사주에서 흔히 말하듯이 인신사해(寅申巳亥)가 다 들어있는 사맹격(四孟格)으로 고난을 헤치고 야망을 이룰 수 있는 천운이라고들 하는데, 이것까지가 가짜라는 설도 파다하다. 그런데 내 사주에는 그 사맹 중 셋은 갖췄지만 ‘신’이 빠진 채라, 복권 숫자가 앞자리에서는 잘 맞아 돌아가다가 마지막이 틀어져 버린 격이라 천을귀인(天乙貴人)이 2개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형충파해(刑沖破害)를 당한다는 풀이다. 결국 내가 발산하는 빛은 매우 강하나 구름이 끼어 있어 짱짱하게 빛을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각종 운명철학이나 점을 나는 별로 믿지 않지만 그냥 심심풀이로 해본 소리니 웃어넘기시기 바란다.
그러기에 믿거나 말거나지만, 별들로 따진다면 박정희나 나나 둘 다 투 스타로 동급이었다는 게 내 소견이다. 그가 5·16 때까지 달았던 별은 투 스타였고 그 뒤에 단 건 말짱 헛것이란 뜻이다. 전두환 역시 12·12반란 때는 투 스타였으나 그 뒤 제 멋대로 별을 더 달았으니 박정희의 판박이다. 세계의 모든 쿠데타는 다 권력욕에 불타는 갱단들의 난장판이라 일단 성공하고 나면 자신의 어깨에다 별들의 숫자를 올렸다. 그렇지 않고 쿠데타를 혁명으로 승화시킨 유일한 사례가 가말 압델 나세르로, 그는 거사 때의 대령 그대로 대통령이 되어 제3세계 국제정치사에 회오리를 일으켰다. 20세기 정치인 중 내가 좋아하는 순번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쿠데타 후에 자기 손으로 갖다 붙이기 이전에는 같은 투 스타였기에 감히 투 스타였던 내가 당당히 그들과 맞장 뜰 수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농 삼아 지껄이지만 정작 그들의 별과 나의 별은 천문학적으로 그 좌표도가 완전히 달라 내 인생은 아무리 말로 수식을 해도 험난하기만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초라한 내 인생살이 전체를 다 털어놓을 수는 없기에 두 별들의 사연 중 첫 번째 별을 달게 된 경위만 간략하게 정리해 보려 한다.

 

2. 빙고동 호텔

나에게 첫 스타를 달아준 곳은 ‘빙고동 호텔’이었고 때는 1974년 1월 긴급조치가 갓 발동된 하수상하던 시절이었다. 이때 나와 함께 원 스타를 달았던 동기생으로는 작가 이호철, 정을병, 평론가 김우종과 장백일 5인조로, 세칭 ‘문인 간첩단 사건’ ‘공범’들이다. 이 호텔의 호적명은 육군보안사령부로 군부통치 시절에 스타를 많이 배출했던 남산(중앙정보부)과 남영동(치안본부 대공분실)과 함께 3대 유명 재야 사관학교 중 하나였다. 이 트로이카 명문 중 빙고동 호텔은 일단 입교하기만 하면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어딘가에 탈이 난다고 할 정도로 성한 몸으로는 나오지 못하기로 악명이 자자했다.

이 호텔의 이력서는 찬연하고 그 명칭 또한 화류계 여성처럼 휘황찬란하다. 미 군정청 국방사령부 산하에 설치됐던 정보과(1945.11)가 남조선국방경비대 정보과(1946.1), 육군본부 정보국 특별조사대(1948.11), 방첩대(1949.10)란 명칭을 거쳐 육군본부 직할 특무부대(特務部隊, CIC, 1950.10)로 신분을 바꿨다. 그동안 이 기구가 이승만 독재체제를 위하여 비판세력에게 어떤 만행을 저질렀던가는 구태여 여기서 읊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월혁명 후 육군 방첩부대로 개칭(1960.7)됐으나 5·16쿠데타 세력은 육군 보안사령부로 개칭(1968. 9), 이어 육군뿐이 아니라 해공군을 망라하여 국군보안사령부로 확대 개편(1977.9), 시종 박정희 군사정권의 버팀목으로 중앙정보부와 충성 경쟁을 전개한 쌍두마차였다. 그러니 내가 입교했던 1974년은 아직도 ‘육군보안사령부’ 시절이었다.
남산 3호 터널이나 반포대교가 없던 시절이라 서울역 – 삼각지에서 이태원으로 좌회전해서 언덕길을 오르면 그 이태원 입구(지금의 녹사평역. 당시에는 콜트장군 동상이 서있었다), 그 부근에서 우회전하여 내리막길(지금의 반포대교길, 초라한 도로)을 달리노라면 좌우가 다 미군부대 철조망만 있었다. 길은 좁고 왕래 차는 거의 없었다. 지금의 크라운 호텔을 지나면 이내 반포대교로 이어지는데, 그 직전에 동작대교로 빠지는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이내 왼쪽으로 약간 경사진 곳에 삼엄한 검문대가 나타난다. 지금은 민주기행 코스로 공개되어 있지만 그땐 그 장소 자체가 국가기밀이어서 그냥 ‘빙고동 호텔’이라고 불렀다.
1974년은 정초부터 어수선했다. 1월 7일 ‘문인 61인 개헌지지 성명’(유신헌법 철폐)이 발표되자 재빠르게 이튿날 1.8긴급조치가 선포되더니, 10일에는 관할 경찰서에서 우리 집을 다녀갔고 이틀 후 또 방문, 그 뒤 다시 전화로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미 이호철은 연행당했다는 소식이고, 함석헌 천관우 안병무 문동환 김동길 법정 계훈제 제씨를 연행, 심문 중이며, 장준하 백기완은 긴급조치 1호위반으로 구속했다는 흉흉한 때였다. 보안사에서 다녀갔다기에 일단 몇일간 피신했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곤 귀가, 17일 밤에 아주 신사적으로 연행됐다. 그들은 항상 한 30분이면 끝난다고 하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를 가운데 앉힌 채 양쪽에서 조이면서 검은 지프차는 퇴계로의 모 호텔(현 세종호텔 맞은 편쯤)에 들렸다. 으슥한 방으로 들어가자 마왕이라도 나올 듯한 어두컴컴하고 큰 방 입구에 책상과 걸상이 있는데 앉으라고 강박했다. 잠시 후 내가 태어난 뒤 처음 본 가장 덩치가 큰 중후한, <쿠오바디스>의 우루서스 같은 남성이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미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추남도 아닌 이 거대한 존재 앞에서 나는 왜 그리도 초라하게 느껴졌던 걸까. 아무리 뜯어봐도 우리와 같은 피를 가진 혈통 속에서도 저런 골조의 인간이 있었던가를 의심케 하는 모양새다. 나는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냥 얼어붙었다. 반나치 영화에서 레지스탕스들이 잡혀가면 첫 신에서 비슷한 위협적인 장면을 보여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선 덩치에서 아무리 대담한 레지스탕스도 야코가 팍 죽어버린다. 뭐라 한 미디 묻자 마음에 안 들면 마치 기중기가 작은 바위를 들어 팽개치듯이 던져버리는 장면.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않고 그냥 나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바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눈을 치켜뜨고는 꼬나보기에 나는 점점 더 얼어붙었다. 그렇게 아마 한 10분정도 지나자 “데려 가!”라고 딱 한 마디를 천둥처럼 울리게 내뱉었다. 그러자 나를 연행해 왔던 장년 신사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대학생처럼 보이는 청년 사병들이 “예” 하더니 나를 양쪽에서 옥죄며 방을 나섰다. 그 뒤를 몇이서 따르며 “본대로 간다, 본대로 간다” 하면서 신이 났다. 겁주기의 제1단계였고, 본대란 육군보안사령부 대공처 심문소, 속칭 ‘빙고동 호텔’이었다.

 

재일동포 잡지 한양 1962년 6월호

 

1층 어느 방, 카펫이 안 깔린 맨바닥에다 벽은 머리를 쳐다 박아도 상처 나지 않도록 특수장치를 했으며, 간이침대만한 쪽에 있고, 화장실은 복도 밖에 있었다. 허리띠부터 소지품 전부를 압수, 의학박사가 간단한 건강진단(얼마나 때려도 괜찮은지를 검토) 등등을 마치고는 인정심문이 끝나면 바로 고문이 시작된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는 식이다. 무조건 털어놓으라면서 매질이다. 뭘 털어 놓으라는지도 모른 채 비명 지르기에 혼비백산할 즈음에야 의자에 앉으라더니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다 쓰라는 명령이다. 바로 라이프 스토리다. A4 용지로 한 10매 정도로 얽어서 건네주면 그걸 대충 읽고는 엉터리라며 확 찢어버리고는 더 자세히 쓰라면서 그제서야 큰 인심이라도 쓰듯이 일본 여행 간 적 없느냐, 그걸 자세히 써 넣으라고 일러준다. 그 힌트를 받고나자 아, 바로 재일동포들이 내는 월간 종합 교양지 <한양(漢陽)>을 트집 잡으려는구나 하고 뜬구름을 잡고는 얼핏 통박을 굴려보니 그거라면 자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유신통치 독재체제라 한들 죄가 될 것 같지 않았다.
1962년에 창간한 이 잡지는 재일동포들이 주축으로 내는 것으로 그동안 한국 내 유명 문사들(박종화 백낙준 백철 이해랑 모윤숙 김동리 조연현 정비석 조경희 유주현 등)이 거의 망라된 필진이 참여했던 데다 한국 보급 총책으로 박정희와 개인적으로 아주 친숙한 구상 시인이 맡았던 터라 어떤 명분으로도 나 같은 피라미가 얽혀들 것 같지는 않았다. 국회도서관에도 비치될 정도로 전혀 불법이 아니었다. 내 라이프 스토리는 무려 20매로 늘어났으나 그들은 짜증을 내며 찢어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이 새끼 안 되겠구먼. 군복으로 갈아 입혀!” 하더니 진짜 그런다. 매질의 예고편이었다. 가끔은 “이 새끼 엘리베이터 태워야 하나”라고도 해서 뭔 뜻인지 몰랐는데, 친절하게 설명도 해준다. 나중 들은 바로는 엘리베이터에 태워서 땅 밑 몇 백 미터로 하강시켜 죽여 시신도 없애버린다는 위협이었다. 실제로 죽이진 않고 그냥 속임수로 땅 밑으로 깊이깊이 내려가는 것처럼 느끼게 해서 어느 지점에서는 문이 열리면서 갑자기 고문 담당자들이 몰려들어 매타작을 하고는 다시 집어넣어 내려가다 보면 또 문이 열려 다른 식의 고문을 행하는 것으로 빙고동 호텔에서 가장 끔찍한 고문으로 자랑하는 메뉴였다. 실은 몇 백 미터를 내려가는 게 아니라 엘리베이터의 조작으로 그런착각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사건 총책을 맡은 ‘강 전무’(한 사건 때마다 그 성과 직함이 바뀐다. 5공 때 민정당 국회의원 이상재)는 이 방 저 방 다니며 고문을 독려했다. 여러 고통 중 바닥에 꿇어앉힌 채 날카로운 구둣발을 옆 날로 세워 바로 무릎 위를 세차게 걷어차는 것인데, 이미 숙달된 그 발길질은 치명적이라 차라리 매를 맞는 게 훨씬 낫다고 할 정도로 며칠간 절뚝거렸다. 젊었을 땐 몰랐는데 늙어가면서 그 부분은 지금도 흐리거나 비가 내리면 시큰거린다. 뺨 때리기는 예사고 몸통 뻗기, 꿇어앉히기, 팬츠 차림 등등은 그들에게 오락이었다. 고약한 자는 아예 발가벗겨 세워두곤 나체를 감상하는데 내 풀죽은 남성 심볼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심문할 땐 어디선가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도록 ‘아아아아’ 하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당신도 저럴 수 있다’는 음향 효과를 배경에 깔고 심문을 진행하는 기법이었다. 오륙 명이 한 조가 되어 그 중 한 명은 내 맞은편 의자에 앉고, 나머지는 나를 병풍처럼 둘러싼 채 심문자의 말을 큰소리로 반복하거나 윽박지르고 나머지는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군!”이라든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는 추임새를 수시로 넣어서 단 한 순간도 내가 말할 틈새를 주지 않고 “….했지!?”라고 다그치면 “예”란 대답만 나오도록 유도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매타작을 하고는 지금까지 말했던 그대로 적으라며 백지와 볼펜을 주고는 사라진 자리에 대학생 징집자들로 이뤄진 사병들이 감시하는 가운데서 나는 손목이 시릴 정도로 ‘대하소설’(내 자서전) 집필을 몇 번이고 고쳐 썼다. 심문과 고문이 거듭될수록 점점 길어져 100매 전후를 넘나들었다.

 

육군보안사 서빙고분실

 

요지는 ‘북괴의 간첩’들이 내는 잡지인 <한양>지에 글을 써서 원고료를 받았고, 일본 여행 중 그 잡지의 발행인이나 편집인으로부터 대접과 선물을 받았으며, 그들에게 국가기밀(원고료가 너무 싸다, 잡지마다 고료 액수가 다르다, 한국 문인들의 근황 등등)을 누설했으니 우리도 ‘간첩’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들이 북한 공작원이라는 가정 아래서 엮어낸 데다 그들이 간첩임을 우리가 알고서도 그런 행위를 저질렀다는 논리였다. 세상에! ‘나 간첩이요’라고 하는 경우가 어디 있으며, 그런말을 않는데도 그들이 간첩임을 무슨 재주로 우리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나중에 보니 개헌서명을 한 이호철과 나는 간첩이고 나머지 셋은 그냥 반공법 위반으로 휘몰아갔다. 징집당해온 근무병들은 옆에서 거의 지켜봤기에 요원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망해라!”라고 소리 지르며 노골적으로 나를 동정하면서 필요한 것 있으면 연락해 줄 터니 부탁하라고 동정어린 표정을 지었다. 고마운 한편 이 젊은 것들도 앞잡이가 되었나 하는 의구심이 솟아 뜨악했는데, 며칠 간 지내면서 보니 그게 진심이었다. 어느 수사관은 지나다가 들러 천장의 텔레비전과 녹음장치를 가리키며 조심하란 몸짓과 함께 종이에다 “반공법, 문제가 많다”고 써서 보여주곤 잘게 종이를 찢어 휴지통에 버리곤 했다. 나중 그는 자기 아내에게 안동사범학교 출신 친구가 있어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고 살갑게 대해 줬다. 이쯤 되니 곧 풀려나겠구나 낙관했는데 며칠 사이에 슬그머니 분위기가 얼어붙더니 그간 정들었던 사법경찰관이 바뀌었다.

 

3. 분단 한국과 서독, 그리고 타이완

“젊은 사람이 매로 다스렸으면 이제 늙은이가 슬슬 엮어서 징역을 보내야지”라며 본격적인 서류작성에 들어갔다. 그런데 뭔가 뜻대로 안되자 사법경찰관이 또 바뀌어 무척 경직된 분위기로 표변하기에 아하, 기어이 징역을 보낼 작정이구나 싶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나중에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각료회의에서 문공부장관(윤주영, 당시의 명칭)이 자신에게 사전 통보도 없이 군 관련 기관에서 문인들을 연행해 간 사실을 문제시하여 풀릴 듯 했지만 보안사는 이를 기정사실화하려고 확실한 범죄로 몰아갔으며, 여기에다 예술단체 모 간부(시인)가 은근히 이를 지지해 줬고, 정치권 역시 민주화운동을 억압코자 삼엄한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었던 터라 3박자가 잘 맞아 떨어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대단히 유명한 모 여류문인이 육영수에게 은근히 이 사건의 부당성을 진언하자 도리어 확실한 증거가 있다는 반론만 강조하더라는 뒷이야기도 있다. 보안사는 이 심문 및 재판 기간 중 가족들의 대사회적인 구원활동을 막고자 계속 다방에 다섯 구속자의 아내를 불러모아 발을 묶어두곤 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이제 고문자들이나 심문자들과도 말문이 터져서 온갖 이야기도 나눌 처지가 되었다. 필시 그들 자신도 이 간첩 조작이 무리임을 알았기 때문에 나사를 느슨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문관 중 한 무표정한 분은 월남한 진짜 간첩 출신으로 눈빛이 매섭고 과묵하면서도 어딘가 공포가 느껴졌는데, 한쪽 손 무지가 뭉그러져 있었다. 나중 알게 된 바로는 체포당해 고문을 받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 했다. 그 사실을 알고부터는 왠지 연민의 정이 갔다. 어느 눈이 쌓인 날, 한 호의적인 심문관이 나에게 답답하니 잠시 시원한 바람이나 쏘이라며 사병에게 건물 옆 뜰로 산책을 시켜주게 했다. 마침 거기에 바로 그 월남 간첩이 우두망찰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연기를 하염없이 허공으로 날리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허망함!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그의 착잡한 심경과 뇌리의 흐름에는 어떤 회한이 서려 있을까. 북녘의 고향과 부모와 어렸을 적의 동무들, 남녘에 와서 얻게 된 처자식들, 자신이 믿었던 ‘인민공화국의 이상’과 남녘의 풍요로운 ‘미제의 식민지로서의 미끼인 달콤한 물질적인 유혹의 삶’의 괴리가 주는 번민, 민족, 역사, 진리, 정의, 그리고 국가, 대체 그런 게 뭐란 말인가. 그는 나에게 가끔씩 “이 사람이!”라는 협박성 말을 내뱉으며 눈을 부라렸지만 눈 덮인 땅에 쪼그
리고 앉아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그 순간을 보고서 나보다 더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나 나나 다 강대국에 빌붙어 자기 국민을 괴롭히는 독재세력들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한 게 아닌가 하는 동병상련 같은 것이었다. 이런 나의 속셈을 그도 읽었는지 그 뒤부터 나를 보는 그의 시선도 약간 달라진 듯 했다. 기계론적으로 적용하는 잣대인 전향자 운운이나, 왜 살아남아 그런 반동적인 행위를 저지르면서까지 치욕스럽게 지내느냐, 어서 자살이라도 해라, 라는 식의 당위론적인 테제만이 정당할까. 물론 이런 내 생각은 나중 두 번째 별을 달고 징역을 살았던 대구교도소의 비전향 장기수들의 고통 앞에서는 여지없이 허물어졌지만 적어도 빙고동 호텔의 눈 덮인 뜰에서만은 잠시 보살처럼 내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홀연히 엔도 슈사쿠의 가톨릭 순교를 다룬 20세기 최고의 걸작 <침묵>(1966)이 떠올랐다. 원제는 <양지의 향기(日向の匂い)>였으나 편집자의 제안으로 <침묵>이 되었다. 일본에서 기독교 탄압에 대한 잔혹성은 가히 세계 최악이었다. 우리나라가 기독교도에게 자행했던 고문의 야만성은 일본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야마 하이리 고문(山入拷問)은 화산인 운젠(雲仙) 온천에 데려가 뜨거운 물 퍼붓기, 뜨거운 바위 위에 세워두기, 입 막고 열탕에 처박기 등이었고, 아나츠리(穴吊り)는 볏짚으로 몸을 꽁꽁 묶어 거꾸로 매달아 머리를 땅구덩이에다 넣어 귀에다 바늘구멍만한 상처를 내어 출혈하도록 해서 며칠 동안 그 고통을 느끼도록 했다. 피가 똑똑 덜어지는 소릴 들으며 서서히 죽도록 하는 것이다. 파도가 들이치는 해변의 기둥에 매달아 그대로 숨이 멎을 때까지 두기도 했다. 그 고통을 못 이겨 배교하겠다면 말로만 되는 게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상을 새긴 동판을 더러운 발로 밟고 지나가도록 하는 후미에(踏絵)를 시켰다. 일본 농부들은 그런 고통의 고문 중에 죽어갔고 살아남자면 후미에를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감행해야만 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이런 고문은 이겨낼 수 있었으나 자신을 따랐던 신자 농부들을 바로 눈앞에서 살해하는 걸 차마 견딜 수 없었다. 버젓이 후미에를 했건만 하나씩 죽이기에 항의하자 관리들은 이 농부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선교사인 당신이 직접 후미에를 하는 것밖에 없다고 윽박질렀다. 차라리 자신을 얼른 죽여 달라고 했으나 그럴 수 없다, 반드시 후미에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이었다. 자신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신도들의 생명을 구하자면 결국 배교할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 그런 고뇌의 순간에 하나님은 침묵만 하고 있다. 바로 그 순간,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는 자문 앞에서 그는 예수의 음성을 듣는다.

 

밟아도 좋다. 너 앞의 그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그 아픔을 알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
에 태어나서,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踏むがよい。お前のその足の痛(いた)みを、私がいちばん
よく知っている。その痛みを分かつために私はこの世に生まれ、十字架を背(せお)ったの
だから, Trample! Trample! It is to be trampled on by you that I am here.)

 

이런 환청도 들렸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다. / 약한 것이 강한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누가 말했던가(私は沈黙していたのではない。お前たちと共に苦しんでいたのだ. ” “弱いものが強いものよりも苦しまなかったと、誰が言えるのか?)” 이래서 주인공 로드리고는 후미에를 해서 농부들을 살려냈고 자신도 생명을 부지했다. 그러나 섬나라 관료들의 잔혹성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로드리고로 하여금 순교로 죽은 한 농민의 아내에게 장가를 들게 하여, 일본을 위해 서양문물을 번역, 소개하도록 강박했다. 그의 사생활 일체는 감시 하에서 십자가를 상징하는 어떤 것도 가까이에 두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다가 후배 선교사들이 오면 그들을 배교시키도록 설득작전에 나섰다.

기독교 신자도 아닌 내가 이 소설을 중시한 것은 인간의 신념과 현실적인 괴리를 어떻게 하면 조화롭게 병립시킬 수 있을까 라는 인간존재의 근본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이런 잔혹성을 바탕 삼아 제국주의로 중무장하여 우리나라를 침탈했다. 식민지시기에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했던 잔혹성의 뿌리는 섬나라의 편협한 ‘부시도(武士道)’이며, 그 연장선이 기독교도에 대한 탄압이었고, 그 유산이 점령지에 내린 탄압이었음을 나는 느꼈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에게 가했던 그들의 악랄한 전향 강요는 이 기독교 배교시키기와 너무나 닮았다. 이걸 그대로 전수받은 게 8·15 이후 친일세력들이 지배했던 권력의 대행자였던 정보기관이었음을 연상하는 데는 통박을 그리 많이 굴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전향자의 운명은 아마 두꺼운 책으로도 모자랄 지경일 만큼 한국 근현대사의 비화로 흥미진진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70년대에 민주화운동권에 투신했던 왕년의 열렬한 투사 출신들 중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인사들의 행적만 추적해도 어디 소설 <침묵>에 그칠손가.
북에서 월남해 오면 반드시 북한 비난 대중강연에 동원하여 반공캠페인을 벌리기 일쑤다. 꼭 그 길밖에 없을까? 아니다. 동독의 작가 우베 욘존은 작품 출간이 불가능한 데다 직장도 보장 못 받자 서독으로 갔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끝내 ‘망명‘이란 단어를 피하고 “10년 동안만 사용했던 국적을 반환하고 서베를린 당해지 관리의 허가를 얻어 이사”했다고 주장했다.
<순애보>의 작가 박계주는 장편 <여수(旅愁)>(1961)에서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의 피난민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자상하게 소개해준다. 위생검사 후 심문 내용은 성명과 연령 및 가족, 탈출하게 된 동기, 동독에서의 직업과 생활상태, 희망하는 직업과 살고 싶은 지역 등으로 5~10분이면 끝난다는 것이었다. 바로 수용소로 보내져 비행기 등 교통사정과 직장 알선 때문에 7~8일간만 기다리면 이주절차가 완료된다. 스파이가 많을 텐데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서독은 이미 동독의 문제인물 리스트를 장악하고 있기에 문제없으며, 설사 놓치더라도 언제나 적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첩이나 국가변란죄의 최고형은 5년이라며 서독 검사는 주인공 춘우에게 반문했다.

 

“귀국에서는 얼맙니까.”
“사형입니다.”
이번에는 검찰간부가 깜짝 놀랐다.
“왜 사형합니까.”
“국가를 전복시키는 건데 그에서 더 큰 죄가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은 당신네 나라 백성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러한 죄수를 감옥에서 그냥 가두어 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6년간 사랑으로서 감화시키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박계주, <여수>)

 

중국도 마찬가지다. 타이완 출신 여류작가 천뤄시(陳若曦)는 미국 유학 중 캐나다로 이주했다가 베이징으로 가서(1966) 잘 살다가 다시 타이완(1973)으로 돌아왔다. 관계당국은 그녀의 ‘망명’을 환영했으나 이 작가는 끝내 그 단어를 피하며, 자신은 ‘반공 의거’가 아닌 ‘중국인의 증언자’라고 주장했다.
차이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1970년대 이전까지 일본은 여행을 다녀오기에 제일 위험한 지역이었고, 특히 유학생에게는 더욱 위태로웠다. 조총련이 워낙 센 지역이라 미처 알지도 못 한 채 걸려들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장학금제도가 조총련계에 많아서 함부로 받으면 바로 ‘간첩’으로 일생을 망치기도 했다. 그런데 타이완은 한국과 달랐다. 그들은 중국계 장학금을 받으면 관계기관이 소환하여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 더 이상 말려들지만 말고 열심히 학업에 전념하도록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빙고동 호텔에 대해서는 김병진의 <보안사>(소나무, 1988)가 실감나게 그 전모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재일동포 유학생으로 보안사에 연행, 고문 유경험자로 거기서 2년간 근무 후 사직하고 이 책을 통해 그 사실을 폭로했다. 이곳이 재일동포 모국 유학생 간첩 사건을 주로 다룬 곳임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서승-서준식 형제들이다. (다음 호에 계속)

화, 2021/03/0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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