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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춘향 영정 공모하겠단 남원시… 납득할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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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춘향 영정 공모하겠단 남원시… 납득할 수 없는 이유

admin | 화, 2021/07/27- 07:05

[주장] 최초 지역축제 춘향제 위상, 최초 영정 돌려놔야 제대로 정립

▲ 최봉선과 춘향사당 1931년 춘향제를 시작한 남원권번 으뜸 기생 최봉선과 전국의 권번과 남원 시민들의 성금으로 지은 춘향사당 ⓒ 화면캡처

날도 뜨거운데 남원은 ‘춘향영정 문제’로 나날이 더 뜨겁다. 1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는 춘향영정 봉안 문제는 잘 모르는 시민들에게는 한심하고 짜증나는 일이다. 최근 <연합뉴스>(7.22) 기사(친일 작가가 그린 남원 광한루원 ‘춘향 영정’ 교체 왜 늦어지나)에 달린 댓글만 봐도 ‘소설 속의 인물인데 무슨 영정이냐? 춘향이한테 제사도 지내냐?’ 하는 볼멘 소리가 끝도 없다.

춘향제는 1931년에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 축제다. 일제강점기 남원 예기권번의 수기생이었던 최봉선의 제안으로 춘향 사당을 만들고 영정을 봉안한 뒤 제향을 올린 게 춘향제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최봉선과 전국의 예기권번 기생들, 그리고 남원의 뜻있는 인사들은 왜 춘향제를 시작했을까? 당시 권번의 기생들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창기가 아니라 사라져가는 전통예술의 맥을 잇는 예술인들이었다. 그런 기생들이 춘향의 제사를 지낸 이유를 알면 영정 문제를 결코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할 수 없다.

춘향제는 남원 사람들만의 행사가 아니었다. 전국의 예기권번에서 성금을 냈고 100여명의 대표 기생들이 참여해 제향을 올리고 광한루에서 판소리 명창 대회를 했으니 가히 전국구 행사였다. 구경꾼들도 전국에서 수만 명 씩 몰렸다.

춘향사당을 짓는 운동은 1929년부터 시작되었다. 1929년은 만세운동 10주년이 되는 해였고 전국의 신간회와 청년동맹, 형평사 같은 항일운동 단체에서 제2의 만세운동같은 대규모 시국대회를 준비했다가 발각이 되어 조직이 와해되기 시작한 해다. 11월에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검거되자 신간회가 다시 일어서고자 했으나 탄압을 받아 결국 국내 독립운동은 거의 힘을 잃게 되었다.

‘남원항일운동사’에 의하면 당시 남원에도 항일운동 단체로 신간회와 청년회, 형평사가 있었다. 1929년 2월 신간회 부지회장 겸 총무로 뽑힌 이현순, 그리고 청년회 회장이었던 정광옥, 이 두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최봉선과 함께 춘향사당 건립운동의 핵심 인사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 전북 권번을 연구한 논문에 의하면 전북에서 유일하게 남원권번에서는 돈줄이었던 일본사람들을 상대하기 위한 필수 요건이었던 일본말을 안 가르쳤다고 한다. 최봉선은 인물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명창으로도 유명했으며 구례 수재민 돕기 공연을 펼치기도 한 매우 비범한 기생이었다.

최봉선은 29세에 기생을 그만두고 부산관이라는 유명한 요릿집을 운영하면서도 사당 할매로 불릴만큼 영정과 사당을 지키는데 헌신했고 6.25전쟁 때는 영정을 머리에 이고 피난을 가서 영정을 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 재산을 제수답으로 기증해 춘향제가 지속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역사가 있기에 춘향선양회에서 발행한 ‘춘향제 60년사’에서는 춘향제의 시작을 ‘일제 하에 잠든 민족혼을 깨우쳐 주면서 춘향정절의 숭고한 정신을 우리 민족 모두의 가슴 속에 뿌리내려 춘향전의 문예적 가치를 만방에 빛낼 목적으로 발상하였다’고 정리했다. 그리고 남원시민들은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91년 동안 춘향제를 지내왔다.

그런데 춘향영정에는 우역곡절이 많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조선식산은행장 하야시 시게조가 내선일체의 방편으로 당시 가장 인기 아이템이었던 춘향을 악용한 것이다. 당시 조선 고위층 부인들이 조선 총독에게 전쟁 승리를 위해 쓰라며 패물과 돈을 바치는 ‘봉차금납도’라는 그림을 그린 당시 최고의 화가 김은호에게 춘향 영정을 새로 그리게 했다. 그 때 그림값을 낸 사람은 호남은행장 현준호였다. 김은호와 현준호는 반민족친일인명사전에 나오는 우리나라 대표 친일파다.

▲ 춘향제를 탄생시킨 춘향영정 60여년간 남원향토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던 최초 춘향영정.이 영정을 사당에 봉안하고 제향을 지내면서 춘향제는 시작되었다. ⓒ 남원향토박물관

그 때 김은호가 그린 춘향이는 일본과 식민지 치하 조선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던 일본 전통극 가부키 형식의 춘향전에 등장하는 얼굴 하얀 춘향이었다. 그리고 그 춘향이를 16세 아가씨로 그렸다. 본래 영정은 어사부인이 된 30대 쪽진 머리를 한 춘향이였는데 말이다.

일제는 봉안식이 아니라 일본의 신사에서 하는 ‘입혼식’을 한 뒤 본래 있던 영정 위에 일본 춘향이를 덧세우게 했다. 내선일체를 상징하는 이중 봉안이었다. 그런 치욕을 견디며 해방을 맞았건만 친일파 청산이 안 됐듯이 김은호가 그린 영정도 치워지지 않았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누군가 김은호가 그린 영정을 칼로 찢어 버렸다. 일제의 국민정신총동원 전남 이사장이었던 현준호도 광주에서 피살되었다. 그렇게 끝났어야 했다. 그렇게 끝났다면 오늘의 영정 싸움도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1961년, 6.25때 훼손되어 없어진 영정과 똑같은 영정이 다시 춘향사당에 쳐들어 오는 일이 벌어졌다. 박정희 정권의 내각수반이었던 송요찬이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이쁜 춘향이로 대치하라(1965.5.11 조선일보)’는 명령과 함께 원래 영정을 내쫓고 김은호가 새로 그린 춘향이를 다시 올린 것이다. 그 춘향이는 예전에 없어진 것과 거의 똑같은 왜색 춘향이 그림이었다.

2021년 올해는 최초 영정이 쫓겨난 지 60년이 되는 해다. 1965년 조선일보에서 최봉선은 ‘관에 밀려난 고전 춘향의 초상화를 반드시 돌려 놓겠다고 관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1966년 신문 기사를 마지막으로 최봉선이라는 이름조차도 남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그렇게 잊혀진 이름 최봉선과 최초 영정의 존재는 작년 친일화가 김은호의 그림을 내린 뒤 다시 떠올랐다. 영정이 남원 향토박물관 수장고에 걸려있었던 것이다. 남원시는 당연히 그 영정을 본래 자리로 돌려놓으려 했다. 그러나 일부 시의원들이 좀 더 많은 시민들의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며 봉안을 막았고 거의 1년 가까이 시민들의 뜨거운 원성을 무시한 채 봉안을 미루고 있다.

미루는 것뿐만 아니라 작년 12월부터 ‘춘향영정 제작(선정) 기본계획 용역’ 설문조사(최초 영정 봉안이 우세하게 나왔으나 발표하지 않음)와 연구용역을 실시했다.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 그리기로 작정한 것이었기에 연구용역 결과는 그런 결과가 나왔다. 미술사 관련 전공자들로만 구성된 연구자들이 연구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보고서만 내놓고 지금까지 발표의 의무를 수행하지도 않고 있다.

그러면서 남원시는 최근 연말 안에 제3의 작품을 공모할 계획이라고 언론(7월22일 연합뉴스)을 통해 밝혔다. 그 이유는 최초 영정의 작가가 정확하지 않고(강수주 화백 낙관이 없고) 소설 속 춘향이는 16세인데 반해 영정 속 인물은 30대 어사부인이고 복식이 조선시대가 아닌 1920년대라는 이유다. 시가 이렇게까지 영정을 새로 그리려는 진짜 이유가 뭔지 시민들은 몹시 궁금하다. 최초 영정은 안 된다면서 시에서 말한 세 가지 이유에 대한 답은 내가 알려주겠다.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에 민족혼을 되살리기 위해 그린 영정에 누가 낙관을 찍을 수 있겠는가? 본래 영정에는 낙관을 안 찍는 경우가 많으며 조선 후기에 그려진 김수로왕의 영정도 작가를 알지 못한다. 그래도 잘 봉안되어 있다.

복식과 나이가 안 맞는다고 했다. 최초 영정은 소설 속 예쁜 춘향이를 그린 게 아니다. 모진 고난을 이기고 신분을 뛰어넘어 사랑을 쟁취한 열녀를 그린 것이다. 그 항거정신과 한 남자를 향한 정절을 우리 민족을 향한 것으로 바꿔서 영정을 그렸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복식과 열녀로서 완성된 30대 어사부인을 그린 것이다. 열여섯살 예쁘기만한 어린 춘향이에게 뭐하러 제사를 지내겠는가? 이런 역사성을 이해한다면 저런 이유를 댈 수가 없다.

대한민국 최초의 지역축제인 춘향제의 위상은 최초 영정을 제자리에 돌려 놓을 때 비로소 제대로 정립될 수 있다.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에 악용된 춘향제가 아니라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민족운동의 하나로서 말이다. 그렇기에 이 싸움은 뒤틀린 역사를 바로 잡는 매우 가치있는 일이고 굵은 땀방울이 아깝지 않은 뜻깊은 일이다. 1931년작 최초 춘향영정은 미술 작품이 아니고 영정이며, 박물관이 아니라 반드시 사당에 봉안되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남원작은변화포럼 대표이자 역사동화작가입니다.

<2021-07-2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춘향 영정 공모하겠단 남원시… 납득할 수 없는 이유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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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시민노래] [다운로드]

안양시민의 노래/ⓒ안양시

[경기=뉴스프리존] 김현무 기자=경기 안양시가 신곡 ‘안양시민의 노래’ 음원을 시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고 10일 밝혔다.

개정된‘안양시민의 노래’는 안양출신 고 김대규 시인의 노랫말은 그대로 사용하고, 공모전을 통해 선정된 안예림 작곡가의 멜로디와 안양시립합창단의 합창이 곁들여지면서 새 음원으로 재탄생했다.

안양시청 홈페이지‘안양소개’메뉴에서 개정된 안양시민의 노래를 감상할 수 있다. 시민의 노래 – 안양시청 (anyang.go.kr)(클릭)

재탄생한‘안양시민의 노래’는 잔잔하면서도 우렁차고 희망에 찬 선율로 와 닿는 느낌이다. 다소 진군가적 분위기가 느껴졌던 기존 곡과 차이를 보인다.

예전‘안양시민의 노래’를 작곡한‘김동진’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음악 부문에 수록돼 친일작가임이 드러났다.

시는 이에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되는 해였던 2019년부터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사용을 중지하고, 지난해 작곡을 공모해 안예림 작곡가의 멜로디를 선정한 바 있다.

최대호 안양시장은 새롭게 만들어진 안양시민의 노래를 각종 행사 시 선보여 안양시민의 자긍심과 위상을 드높이겠다고 전했다.

<2021-06-10> 뉴스 프리존

☞기사원문: 안양시, 신곡 ‘안양시민의 노래’ 시 홈페이지 음원 공개

※관련기사 

☞여성종합뉴스: 안양시, 새롭게 작곡한 ‘안양시민의 노래’ 음원 공개

☞아투시티뉴스: 안양시, 새롭게 만들어진 ‘안양시민의 노래’홈페이지에 공개

금, 2021/06/11-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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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21편 : 독립군행진곡 _ 김완태(전 육군사관학교장)

☞ 20편 : 영웅추도가 _ 김성태(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 19편 : 선봉대가 _ 권현(권기옥 선생 후손)

☞ 18편 : 대한혼가 _ 김재홍 함경북도지사(규암 김약연 선생 증손자)

☞ 17편 : 희망가 _ 김수옥(우사 김규식 선생 손녀)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우원식 국회의원(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 _ 김주(심산 김창숙 손녀)

☞ 10편 : 광복군아리랑 _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 9편 : 앞으로행진곡 _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 _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우당 이회영 손자)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 _ 정남기(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 5편 : 격검가 _ 차영조(동암 차리석 아들)

☞ 4편 : 압록강행진곡 _ 광복군 김영관 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 _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자)

☞ 2편 : 안중근옥중가 _ 함세웅 신부

☞ 1편 : 국치추념가 _ 이준식 독립기념관장(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금, 2021/06/11-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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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대종교를 중광해 독립운동가들의 스승으로 불렸던 홍암 나철의 일대기인 <나철평전>을 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조현 기자

청산리전투의 김좌진, 봉오동전투의 홍범도,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역사가 신채호,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과 국무령 이상룡, 작사가 이은상, 최초 비행사 안창남, 마라토너 손기정, 이동휘, 정인보, 안희제, 지청천, 이범석, 지석영, 이동녕, 김규식, 신익희…. 독립운동사의 주역인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대종교인으로, 대종교를 부활시킨 스승 홍암 나철(1863~1916)의 대의를 따랐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종교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나철의 삶을 조명한 <나철평전>(꽃자리 펴냄)을 낸 김삼웅(78) 전 독립기념관장을 지난 4일 만났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꼽은 친일부역자 5천명 가운데 종교인이 200여명인데, 대종교인은 한 명도 없었다”며 “그런데도 나철과 2대 교주 김교헌, 청산리전투를 이끈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종사 등 대종교 지도자 3인의 묘소가 아직도 간도 들판에 방치돼 있으니 한민족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통탄했다.

대종교 부활시킨 스승 ‘나철평전’ 펴내
김좌진·홍범도·이회영·신채호 등등
수많은 항일지사들 대부분 ‘대종교인’
“친일부역자 종교인 중엔 한명도 없어”

박정희때 고문 후유증으로 집필 힘들어
“알수록 ‘놀라운 인물’ 전율 느끼며 써”

대종교를 중광한 독립운동 지도자 홍암 나철. <한겨레> 자료사진

“2·8독립선언과 3·1혁명을 촉발한 대한(무오)독립선언은 대종교가 주도했다. 또 3·1혁명 이후 중국 상하이에 세운 임시정부의 의정원 35인 중 28인이 대종교인이다.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등 항일투쟁의 주력도 대종교인들이었고, 국학·역사·한글운동도 대종교가 주도했다. 그 뿌리가 나철 대종사다. 독립운동사에서 기억해야 할 첫번째 인물로 꼽힐 만한 나철의 이름만이라도 들어본 사람이 몇명이나 될지….”

김 전 관장은 말문을 잇지 못했다. 온몸을 민족의 재단에 바쳐 신자 10여만명이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고 종단 자체가 산산이 부서져 버린 대종교와 나철을 언급할 때마다 그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지금까지 최제우, 황현, 전봉준, 김개남, 손병희, 안창호, 김성숙, 한용운, 안중근, 김창숙, 여운형, 함석헌, 장준하, 장일순, 송건호, 김대중, 노무현, 신영복 등 줄잡아 40여명의 평전을 썼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타자를 칠 줄 모른다. 오직 손글씨로만 써왔다. 근래 들어서는 손이 많이 떨려 원고 작업이 더욱 어렵다. 박정희 독재 시절 <민주전선>을 발간하면서 끌려가 고문 당한 후유증 때문이다. 떨린 것은 손만이 아니었다. <나철평전>에는 ‘한 놀라운 인간’에 대한 필자의 전율이 스며있다.

나철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 석학 왕석보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29살에 과거 급제해 고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사관을 맡았다. 33살 때 징세국장에 임명됐으나 사양하고 낙향했다고 한다. 이후 10년간 민족의 뿌리인 단군사상을 기초로 입산수도한 나철은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비밀결사 ‘자신회’를 조직해 을사오적 처단을 주도했다가 1907년 10년 유배형을 받았다. 외딴섬인 전남 신안 지도로 유배를 갔다가 민심을 두려워한 고종의 특사로 석방됐다.

“나철은 일제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국조 단군을 구심점으로 삼아야 한다며 단군교를 ‘중광’했다. 중광이란 우리 민족이 믿었던 옛 종교를 되살린다는 것이다. 그러자 기라성 같은 지식인과 우국지사들이 몰려들었다. 일제는 국권침탈 뒤 제일 먼저 단군 관련 책 20여만권을 압수해 불태우거나 일본으로 밀반출하며 1918년까지 민족말살책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나철은 이런 일제의 탄압을 피해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고 1914년 망명해 백두산 인근 청파호로 본부를 옮겼다. 대종교 신자가 수십만명으로 늘자 일제총독부는 기독교, 불교, 유교만 공인 종교로 인정하고 대종교는 ‘유사종교단체’로 분리해 악명 높은 경무국에서 감시하게 했다. 더 이상 포교가 어렵게 되자 나철은 1916년 일왕과 총독, 신자들에게 글을 남기고 구월산 단군사당에서 순명을 택했다. 그의 죽음 뒤 대종교인들의 항일투쟁이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김 전 관장은 “일제 때 수많은 사이비 교주들과 달리 나철은 종교적 위세를 보이지 않았고 대단히 검소하고 서민적이었다. 주검도 상여가 아닌 지게로 옮겨 화장하고, 부고도 돌리지 말고, 제사에도 밥 한그릇 찬 하나만 놓으라고 유언했다”며 “박은식은 추도사에서 그를 ‘민족사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이란 뜻으로 ‘만세의 종사’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런데도 최근 여당 국회의원들이 교육이념에서 단군사상의 핵심인 ‘홍익인간’을 빼려는 시도를 했던 것에 대해 “역사 공부를 안한 것인지, 역사의식이 없는 것인지”라며 혀를 찼다. 그는 “목사인 규암 김약연의 용정 명동학교는 기독교학교임에도 교가에 ‘한배검 단군의 자손의 긍지’를 담았고, 교실 뒤엔 예수 사진과 함께 단군 영정을 걸었다. 기독교인 도산 안창호는 평생 단군상을 몸에 지니고,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대규모 단군 집회를 개최했다. 이승만도 1921년 <독립신문>에 ‘한배검은 인류의 스승이셨다’고 썼고, 기독교인 백범 김구도 조선인 치고 대종교인 아닌 사람이 없다고 했다”며 “해방 후 미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홍인인간을 ‘인간에 대한 최대한의 봉사’로 번역해 교육기본이념으로 삼게 한 것도 기독교인 백낙준 박사였다”고 설명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mail protected]

<2021-06-08> 한겨레

☞기사원문: “독립운동 정신적 지주 ‘대종교의 혼’ 아직도 간도 떠도니 통탄스럽죠”

화, 2021/06/15-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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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 격전지에서 미군기지 건설용 매립재 채취 추진
일본 정부 “채취 장소 미정…유골 안 들어가도록 눈으로 확인”

일본 오키나와(沖繩)현 소재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 일본 정부는 이 비행장을 대체할 군사 시설을 건설하겠다며 오키나와 헤노코(邊野古) 연안을 매립하는 공사를 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제 강점기 희생된 조선인 유골이 섞인 토사가 일본 오키나와(沖繩)현 미군 기지 공사에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유해 수습 운동을 벌여 온 일본 시민단체는 한국·미국 유족과 힘을 모아 공사 중단을 촉구할 계획이다.

오키나와 본섬 남부에 있는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을 같은 섬 중부 헤노코(邊野古) 연안으로 옮기는 사업이 진행 중인데 일본 정부가 공사 계획을 일부 변경하겠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오키나와의 미군 해병대 기지인 ‘캠프 슈와브’ 인근 바다에서 매립 공사 등이 진행 중이다. 일본 정부는 후텐마 비행장을 대신할 새로운 기지를 이곳에 건설 중이다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전쟁 희생자 유해가 다량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채취한 토사 등을 매립재로 사용할 가능성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일본 방위성은 오키나와의 미군 해병대 기지인 ‘캠프 슈와브’ 앞바다를 매립해 후텐마 기지를 대체할 새 비행장을 만들고 있는데 연약한 지반을 개량하기 위해 매립재 종류 등을 바꾸겠다며 작년 4월 21일 오키나와현에 공사 계획 변경 승인을 신청했다.

7일 연합뉴스가 계획서의 세부 내용을 확인해보니 2차 대전 말기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 현장인 오키나와 본섬 남부 이토만(絲滿)시와 야에세초(八重瀨町)가 매립용 토사 등을 채취할 장소로 기재돼 있었다.

[그래픽]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 공사 매립재 채취 장소 (서울=연합뉴스) 장예진 기자 = [email protected]

오키나와에서는 1945년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격렬한 지상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주민, 일본군, 미군 등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오키나와현 집계)된다. 희생자 중에는 한반도에서 동원된 조선인도 포함된다.

희생자 유해 수습이 미흡해 이토만을 비롯한 격전지에서 발굴이 계속 진행 중인 상황이다. 변경된 공사 계획이 승인되면 유골이 섞인 토사가 매립용으로 투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유해를 수습해 유족에게 돌려주는 운동을 하는 현지 시민단체 ‘가마후야'(ガマフヤ-) 등은 일본 정부의 공사 계획 변경에 반대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토사 등을 어디서 조달할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계획서가 “적정한 조사를 거쳐 채취 장소 등을 결정한다”며 여지를 남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존 계획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이토만과 야에세가 변경된 계획서에 파쇄된 암석을 채취할 후보지로 명시된 것을 보면 결국 이 지역에서 채취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19년 2월 15일 일본 오키나와(沖繩) 기노자손(宜野座村)의 미군의 옛 민간인 포로수용소 주변 유골 발굴 현장에서 오키나와의 시민단체 ‘가마후야’의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 대표가 유골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계획서는 이토만과 야에세에서 파쇄된 암석 3천160만㎥를 채취하는 방안이 기재돼 있다. 이는 오키나와현 내부에서 조달할 파쇄석(4천476만㎥)의 약 70% 해당한다.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67) 가마후야 대표가 올해 3월 단식 투쟁까지 하며 반대에 나서자 기시 노부오(岸信夫) 방위상은 “개발 전에 유골이 없는지 육안으로 사전 조사를 하고 유골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호(壕·구덩이)가 있는 장소는 개발하지 않는 등 유골을 배려하며 사업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맨눈으로 유골 유무를 파악하는 것이 현실성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오랜 기간 방치된 뼈는 전문가가 아니면 식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채취할 토사 등의 양에 비춰보면 유해가 포함됐는지 철저히 확인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가마후야는 한국 단체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02-2139-0462)와 민족문제연구소(☎ 02-969-0226)를 통해 오키나와 유골 발굴 및 DNA 감정에 참여할 한국인 유족을 모집하고 이들과 힘을 합해 일본 정부에 매립 계획 취소를 요구할 계획이다.

한국인 희생자 이름 (오키나와=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오키나와(沖繩)현 이토만(絲滿)시 소재 ‘평화기념(祈念:이뤄지기를 비는 것)공원’에 한국인 전쟁 희생자 이름을 새긴 비석인 각명비(刻銘碑)가 설치돼 있다.(위) 각명비에는 히코산마루 피격 사건으로 희생된 명장모(왼쪽 하단) 씨와 김만두(오른쪽 하단) 씨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이들은 미국 유족 참가자도 모집한다.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오키나와대 지역연구소 특별연구원이 현대사 연구자 다케우치 야스토(竹內康人) 씨가 발간한 명부 자료와 자체 조사를 토대로 분석한 바에 의하면 오키나와 전투에 조선인 3천461명이 군인이나 군속(군무원에 해당)으로 동원됐고 이 가운데 701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노무 동원된 이들이나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이들을 제외한 숫자다.

기록으로 파악되지 않은 이들을 포함하면 실제로 동원되거나 사망한 조선인은 이보다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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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7> 연합뉴스

☞기사원문: 조선인 유골 공사장에 묻히나…日NGO “한미 유족과 반대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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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21/06/15-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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