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메이지산업혁명유산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를 지지합니다.






[다운로드] [판결문]
남겨진 시간이 없습니다. 신일철주금은 즉시 피해자에게 보상하라!
오늘 한국 대법원은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중에 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에 강제연행, 강제노동을 당한 전 징용공 피해자가 제소한 사건에서 2012년 대법원 판결에 따라 피해자의 손해배상을 인정한 파기환송심 판결에 대해 신일철주금이 상고한 재판의 최종판단을 내렸습니다.
이번 재판은 식민지 지배 아래 일본 기업이 행한 강제노동(노예노동)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할 것인가, 또한 전 징용공 피해자의 인권회복을 법적 구제로 도모할 것인가, 즉 식민지지배로 침해된 개인의 존엄성을 회복할 것인가를 묻는 재판이었습니다. 이것은 1965년 체결된 한일조약 등의 양자협약에 의해 피해자의 인권이 침해되어도 되는가 하는 국제인권법에 따른 개인의 권리 문제를 묻는 중요한 재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번 판결을 전면적으로 환영합니다. 신일철주금은 즉각 판결에 따라 원고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고, 제소하지 않은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구제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 동안 한일협정으로 모두 해결되었다고 주장해온 일본 정부에 대해서는 판결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강제노동 문제의 전면적 해결을 위한 대책을 실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그러나 너무 뒤늦은 판결입니다. 재판의 원고 가운데 여운택, 신천수 두 사람은 1997년에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제소한 뒤 사법에 의한 정의가 실현되기를 기다렸지만 오늘의 판결을 받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원고인 여운택 씨는 “일본제철에서 일한 경험은 그것이 힘든 것이든 즐거운 것이든 내 삶의 일부이며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그 시기에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한 대가를 꼭 인정해 주었으면 합니다. 일본제철은 법이라든가 외교협정 같은 정치적 결정 뒤에 숨지 말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와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십시요”라며 회사가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하는 통한의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4명의 원고 가운데 3명이 이미 돌아가셨고 후속 재판의 원고도 모두 고령의 피해자들입니다.
피해자에게 더 이상 남겨진 시간은 없습니다. 신일철주금은 판결에 따라 즉각 피해자에게 보상할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2018년 10월 30일
민족문제연구소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일본제철 전 징용공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보도자료] [다운로드]
3·1운동 때 처단된 일제경찰 추모비 사진 발굴
1919년 3·1운동 당시 경기도 화성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하다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처단된 일본인 경찰들을 위령하기 위해 일제가 건립한 추모비 사진이 최초로 확인되었다.

경기도가 추진하고 있는 일제잔재 전수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용역을 수행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는 기초 문헌자료 조사과정에서 관련 사진자료를 발굴하여 3·1운동 101주년을 앞두고 이를 공개했다. 그간 일제가 3·1운동 때 ‘순직’한 경찰관을 위해 초혼비를 세웠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으나 실물사진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비석의 전면에 ‘순직경찰관초혼비(殉職警察官招魂碑)’란 비명이 새겨져 있는데, 주인공은 수원경찰서 소속 순사부장 노구치 히로조(野口廣三)와 화수리경찰관주재소 소속 순사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로 3·1운동 전시기에 걸쳐 시위현장에서 처단된 일제경찰은 이 둘 밖에 없다. 이 비석은 수원화성 화홍문 옆 방화수류정 언덕에 세워져 1926년 6월 27일 제막식을 가졌으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매년 4월 이곳에서 초혼제가 열렸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관련자료로, 소장하고 있는 『순직경찰 소방직원 초혼향사록(殉職警察 消防職員 招魂享祀錄)』(1937)도 함께 공개했는데, 여기에는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의 순직 원인을 “경기도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소요사건 때에 폭동 진압 중 투석(投石)으로 중상을 입어 사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1운동이 비폭력저항을 지향하고 있었음에도 2명의 일경이 처단당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화성 일대의 항쟁이 워낙 치열하였고 일제가 총칼로 이를 진압하고자 했던 탓이 컸다. 제암리학살사건 등 화성 지역에서 벌어진 일제의 조직적이고 무자비한 만행은, 국제사회가 3·1운동을 주목하고 한 목소리로 일제의 반인도적 행위를 규탄하게 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순직경찰관초혼비’는 해방 직후에 파괴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 그 자리에 ‘대한민국독립기념비’가 건립되어 1949년 1월 16일에 이승만 대통령의 대리(代理)로 신성모 내무부장관과 안호상 문교부장관을 비롯하여 신익희 국회의장과 구자옥 경기도지사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제막식이 열렸다. 대한민국독립기념비는 1969년 10월 15일(수원시민의 날) 3·1동지회가 주관하여 3·1독립기념탑과 함께 수원 팔달산 중턱으로 이전 설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관련 문헌자료]
– 『조선신문(朝鮮新聞)』 1926년 6월 27일자, 「충혼비 제막식(忠魂碑 除幕式)」
수원에 있어서 순직경찰관 충혼비(殉職警察官 忠魂碑) 제막식은 27일 거행할 예정으로 경기도에서는 안도 경찰부장(安藤警察部長), 히가시(東), 시로이(白石) 양 경시(兩 警視)가 임장(臨場)한다고.
– 『경성일보(京城日報)』 1926년 6월 30일자, 「순직경관 기념비, 27일 성대한 제막식을 거행」
[수원] 전부터 화홍문(華虹門)의 고대(高臺)에 건설중이던 순직경관(殉職警官)의 초혼기념비(招魂記念碑)가 준공되어 27일 오전 10시부터 성대한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참렬자는 지원(地元, 그 지방) 수원(水原) 및 경성의 관민 수백 명으로 순직자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의 유족(遺族, 모당, 누이, 딸)이 제막의 거적을 당겼고, 남성적인 여름의 햇볕을 받아 눈부시게 서 있는 기념비는 영원히 빛나는 순직자의 영예 그것과도 같으며, 식후 비전(碑前)에서는 무도대회(武道大會)를 거행, 도내 각서(各署)에서 30조(組)가 출장하여 장렬한 시합을 벌였고, 본사 기증의 특제메달을 받은 고점시합(高點試合)의 우승자는 다음과 같다. (사진은 기념비) (이하 내용 생략)
– 『매일신보』 1933년 4월 28일자, 「수원서(水原署)에서도 순직경관 초혼(招魂)」
[수원] 수원경찰서 내에서는 지난 24일 오전 11시 당지 화홍문 부근 초혼비가 있는 곳에서 제4회 순직경찰관 초혼제를 거행하였다는 바 경찰관은 물론이요 지방 유지 일동이 기타 관공서의 다대한 참가로 매우 성황리에 초혼식을 거행하였다.
– 『매일신보』 1934년 4월 26일자, 「순직경관 초혼제 거행, 수원읍(水原邑)에서」
[수원] 23일 오전 11시에 수원에서는 순직경찰관 제9회 초혼제를 기보(旣報)와 같이 화홍문 방화수류정(華虹門 訪花隨柳亭)에서 관민 합동으로 성대히 거행하였다 한다.
–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4월 29일자, 「수원경찰관(水原警察官) 초혼제(招魂祭) 집행」
[수원] 일찍이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폭민(暴民) 때문에 순직(殉職)했던 노구치(野口), 가와바다(川端) 양 경찰관에 대한 제17회 초혼제는 수원경찰서 및 경우회(警友會) 주최 아래 4월 27일 오후 1시부터 양씨 기념비전에서 집행할 예정이었으나 공교롭게도 당일 우천(雨天) 탓에 공립보통학교 강당에서 집행, 제주(祭主) 후지타 서장(藤田署長), 경우회장(警友會長), 곤도 토라노스케(近藤虎之助), 내빈(來賓) 오카와우치 군수(大河內郡守)의 제사(祭詞)와 옥관봉전(玉串奉典) 등이 있은 후에 후지타 서장으로부터 경우회 및 내빈에 대한 인사를 마치고 개연(開宴)이 있었는데 당일의 인원은 이백여 명으로 종래 그 예를 보면 성의(盛儀)를 이뤘다.
– 『매일신보』 1943년 4월 25일자, 「순직경찰관(殉職警察官) 수원서 초혼제」
[수원] 지난 22일 오후 3시 수원읍내 화홍문광장(華虹門廣場)에서 수원경찰서 주최하 행정경찰의 직무와 치안확보의 열렬한 성의를 다하여 마지막에는 몸으로써 바치게 된 순직경찰관의 초혼제가 성대히 거행되었는데 와타나베 서장(渡邊署長) 이하 전서원, 관하 각주재소 수석, 내빈으로 시라카와 군수(白川郡守) 이하 각관공서 대표, 단체대표자 등 참집하여 순서에 의하여 집제(執祭)로써 순직한 혼령에 대하여 위안과 명복을 빌게 되었다. 더욱이 총후국민(銃後國民)으로서 전시체제하의 치안경찰행정에 만전의 노력을 하는 경찰관에 경의와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 『조선중앙일보』 1949년 1월 18일자, 「대한독립기념비, 내무장관 참석 제막식」
16일 아침 9시 30분 경무대를 나선 내무장관 신성모(申性模) 씨 수행을 따라 경원(京原) 간 40리(哩, 마일) 연도의 싸늘한 공기를 헤치고 기자는 이곳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언덕 위에 뜻 깊이 선 대한민국독립기념비(大韓民國獨立記念碑) 제막식에 참가하였다. …… 이 기념비는 지난 10월 22일에 착공하여 준공까지 연공사일(延工事日) 80일간 그리고 52만 원의 공사비로 민(閔) 수원군수와 유지를 비롯한 26만 명의 군민과 더불어 어린 3만 명 학도들의 열렬한 지성의 결정으로 된 것이다. 그리고 더욱 이 비는 3.1독립운동 당시 우리의 애국선열들을 무참히도 학살(虐殺)하고 맞아죽은 노구치 히로조(野口廣三)와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의 가증 무쌍한 추념비(追念碑)를 8.15 해방과 함께 분쇄(粉碎)하여 버린 그 자리에 지금 맑게 개인 하늘 아래 우리가 꿈속에도 그리워 마지않던 독립비는 당당히 그 자리를 힘차게 나타낸 것이다. (하략)
– 『동아일보』 1949년 1월 18일자, 「수원에서 대한독립기념비 제막식 성대 거행」
[수원] 잔악무도한 왜적을 이 땅에서 몰라내고 또 그대들이 세운 가증한 공비를 부시고 왜적들로 말미암아 쓰러진 수많은 선열들의 거룩하신 유업을 찬향하는 동시에 이 땅의 독립을 영구히 빛내일 독립기념비의 거사는 수원읍내에 세우기로 결정되어 민(閔) 군수를 비롯한 26만에 달하는 군민들의 끊임없는 지성으로 지난 해 10월 22일부터 착공하여 오던 바 연공사일 80일만에 52만여 원에 달하는 거액을 던진 공사는 드디어 준공되었던 것이다. [사진은 동 독립기념비]
역사를 자랑하는 수원군민들의 기쁨은 더 한층 크련만 지하에 잠든 투사들의 영령 좋아 이 비(碑) 위에 감돌아 춤출 것이다. 이 뜻 깊은 기념비의 제막식은 드디어 지난 16일 상호 11시부터 이(李) 대통령 대리인 신(申性模) 안(安浩相) 신(申翼熙)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구(具) 경기도지사와 당지 유지 다수 참석하 먼저 국민의례에 이어 민(閔) 군수의 열렬한 식사가 있고 제막이 있은 후 신(申) 내무장관으로부터 뜻 깊은 독립기념비 제막에 당하여 여러 학생과 군민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 열강이 승인한 독립국가이며 이 기쁨이란 바로 여기 세운 기념비와 같이 있는 것이다. …… (하략)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지부장·김재용)는 31일 오후 인천 중구청 월디관에서 ‘인천지역 역사포럼’ 첫 번째 행사인 ‘인천에서의 독립 운동’ 토론회를 개최했다.
인천광역시 지원 사업으로 마련된 이날 행사는 이민우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이 좌장을, 인천지역 독립 운동사를 연구해 온 양윤모 인하대 사학과 교수가 발제를 각각 맡아 ‘인천지역 독립운동과 유적 및 기념물’에 대해 설명했다.
토론 순서에는 김우영 광복회인천광역시지부장과 이상의 인천대 교수, 이한구 전 인천광역시 의원이 ‘인천지역의 독립운동 기념 활성화 방안과 독립운동 기념하기 등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이 자리에는 홍인성 중구청장, 민주당 소속 이병래 인천시의원(남동5) 등이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인천지역 독립운동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일반 시민 50여 명과 자리를 함께 했다.

발제에 나선 양 교수는 인천지역 독립운동 역사를 ‘최초 발생지’인 동구 창영초등학교와 △인천 중부지역 △용유·덕적도 등 섬 지역 △황어장터 △주안·남동 서창리 등으로 세분해 상세히 소개했다.
이어 만국공원에서 열린 ‘13도 대표자대회’, 일제가 인천 중대사건으로 지목했던 ‘윤응념 독립군자금 모금 사건’과, 이를 주도했던 김원흡 지사, 인천지역 독립운동 유적 및 기념물 등을 재조명했다.
양 교수는 “인천에는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사건들이 있고, 인천세관에는 독립운동 임시청사와 임정 요인 숙소와 관련한 건물 자재가 보관돼 있는데도 이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고 아쉬움을 나타내며 시민사회의 관심을 촉구했다.

김우영 지부장은 토론순서에서 “인구 3백만의 대도시인 인천에는 전국 모든 지역에 있는 독립기념관이 없다”고 지적한 뒤 “시 보훈과에 수차례 입장을 밝히고 공문도 보냈지만 계속 묵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광복회가 입주한 미추홀구 문학동 광복회관에도 1층에는 무공수훈자회가 있고, 지하건물에는 다른 보훈단체를 입주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말만 광복회관이지 실상은 일반 보훈회관으로 전락할 처지에 놓여있다”며 독자적인 광복회관 건립 등 대책마련을 촉구했다.

이상의 교수는 ‘경북 안동의 독립운동기념관’과 ‘프랑스 레지스탕스 기념관’의 사례를 들어 △인천 독립운동기념관 건립 △독립운동가 생가에 현판 달기 △교육청의 독립운동, 운동가 관련 교육영상 제작과 학생교육 추진 등을 제안했다.
이 교수는 “독립운동기념관은 그 지역 주민들이 우리의 역사를 생각하며 자신의 삶의 방향을 돌아보게 하는데 기여할 것”이라며 “파편적이거나 정치적으로 기억을 강요하는 기념이 아닌, 아픈 기억까지 동시에 드러내 역사의 진실을 파악하고 통찰하는 힘을 키우는 ‘기념’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한구 시의원은 “전국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강화지역에 대한 현황과 3.1만세 운동 이후 해방 전까지 노동 및 청년운동 등과 접목된 일제 강점 하 항일독립운동 전 시기와 전 분야를 망라한 종합정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의원은 또 △인천의 독립운동 시민 주도성 확보 △학술, 교육, 문화, 교육, 홍보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 정신 계승 발전 △시 조례에 의한 기념사업회의 수익사업, 독립유공자 자녀 장학금 지급 △독립운동 각각의 지역 특성을 살린 다양한 행사 추진 등을 제시했다.
/글·사진 정찬흥 기자 [email protected]
<2021-05-31> 인천일보

[뉴스파고=한광수 기자]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지회(지회장 최기섭)는 5월 22일, 6월 26일, 9월 25일 3회에 걸쳐 임종국 선생 기념관 건립 추진을 위한 ‘친일청산 역사문화 탐방’을 진행한다.
임종국 선생은 친일청산의 선구자로 평생을 헌신하시고 친일 인명사전의 토대를 만드신 분으로, 천안에서 임종하셨으며,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지회에서는 임종국 선생 기념사업회와 함께 추모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탐방행사는 기념관 건립의 당위성을 홍보하고 해방후 왜곡된 근현대사를 바로잡아 후대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고취시키는 것과 함께, 입장 양대리 만세운동 등 관심도가 미약한 독립운동 유적지를 새롭게 발굴하고, 목천 동학군 전투현장 등 새로운 문화유적을 홍보하여 시민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마련한 체험행사다.
시민과 학생 20명을 대상으로 하는 이번 탐방은, 천안삼거리공원 앞에 집결, 친일문제연구에 매진하던 임종국 선생의 거서재인 요산재, 목천 세성산 동학 전적지, 구민산 기념탑, 아우내 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 입장 기미독립운동기념공원, 망향의동산, 신부동 천안평화공원을 거쳐 천안삼거리공원 앞에서 해산하는 일정으로 진행된다.
답사 중 유적지 주변 미화작업에 참가할 경우에는 자원봉사활동 확인서 발급이 가능하다.
<2021-06-13> 뉴스파고
부천 친일파 박제봉 고택 문화재 지정 건의에 대한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성명서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가 “친일파 박제봉이 살았던 고택을 후손들이 경기도문화재로 지정해달라는 움직임이 있다”며 “집 앞에 단죄비를 세우고 이 땅에 친일파와 같은 부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3일 부천 민문연은 ‘부천 친일파 박제봉 고택 문화재 지정 건의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친일 행적이 뚜렷한 친일파 박제봉이 살았던 집을, 후손들이 경기도문화재로 지정해달라는 움직임이 있다”며 “건축학적 의미와 역사뿐만 아니라 박제봉의 친일 행적을 함께 알려 시민들이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담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후손들이 경기도문화재로 지정해달라는 이유에 대해 “128년 된 고택이 조선 말기의 건축형식과 기법을 잘 나타내 학술적·역사적·건축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이라며 “고택을 평가함에 있어 역사와 건축학적으로도 중요하지만 누가 이 집에 살았는지도 중요하다. 고택은 절대 집주인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부천 민문연에 따르면 박제봉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으며 죽성제봉으로 창씨개명을 했다. 박제봉은 1941년 10월 17일부터 11월 4일까지 일본의 이세신궁(伊勢神宮)과 메이지신궁(明治神宮) 등을 순례한 후 “저는 이세신궁 신 앞에 배례하며 황국신민의 선서를 소리 높여 제창했는데, 지금까지도 가슴이 뛸 정도로 감동이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황국신민이 되었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47년 전, 즉 일청전쟁부터라도 생각합니다. 이로부터 일로전쟁 후에는 메이지천황의 은덕이 더욱더 반도(半島)에 미쳐 결국은 한국을 병합하게 되어 완전한 황국신민이 되었던 것입니다”라는 소감을 남겼다.
또한 조선총독부 제7대 미나미(南次郞)총독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오노(대야綠一郞)가 퇴임할 때 칭송하는 전별시(餞別時)를 남기기도 했다. 이들은 “박제봉의 일생을 요약해 보면 교육자로서 또는 유학자로서 당대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방기하고 일제에 적극 조력하였으며, 심지어 친일 찬양까지 했다. ‘내선일체·황국신민화·대동아성전’ 등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합리화하는 주장을 선전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라고 밝혔다.

이어 “문화재 지정은 국민의 세금으로 중앙정부 또는 지방정부가 관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된 백인제 가옥은 친일파 한상룡이 지은 집이며, 전북 부안군 줄포면에 있는 김상만 고택은 국가민속문화재 제 150호로 지정되었다. 이들 문화재에 친일파와 관련된 내용은 들어있지 않아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사회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부천은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지우고 없애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며 기억하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 세계적으로도 홀로코스트 기념관, 남아공 넬슨 만델라의 감옥이 있는 로벤섬, 난징대학살기념관 등을 국가적으로 보존하면서 다시는 어두운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활용하고 있는 다크 투어(dark tour)가 대세인 것처럼 부천시도 박제봉 고택을 친일잔재의 문화재로 활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인수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23> IBS뉴스
☞기사원문: 부천 민문연, 친일파 박제봉 고택 ‘단죄비’ 세워야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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