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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러시아의 위험한 결탁 – 미국의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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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러시아의 위험한 결탁 – 미국의 시각

admin | 수, 2021/06/30- 20:04

편집자 주:

아래의 칼럼은 바이든과 푸틴의 정상회담이 6월16일 제네바에서 열리기 직전 작성된 것으로써, 중국과 러시아가 전략적인 파트너로 상호결합되는 것에 대한 미국측의 우려와 더불어 이에 대한 대응(꼼수)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상기의 회담에서 바이든은 사이버공격과 전략무기에 대한 미러 쌍무적인 이행과 동의 이외 수많은 현안에 대한 쌍방간의 견해차이만 확인한 채, 별무 소득의 빈손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미국측은 대중 대러의 제재강화와 강경입장을 공언하고 있는 상황이다. 자신의 패권적 일방주의를 지키려는 미국의 노력은 가히 필사적이다.


지난 3월 23일 왕이 중국 외무장관과 러시아의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 장관은 절묘한 시간에 맞춰 회의를 가졌다. 이번의 고위급 회담은 알래스카 앵커리지에서 미국과 중국의 고위관리들 사이에 공개적으로 상호 비난하는 열띤 접촉이 있은 지 불과 하루 만에 이루어졌으며, 대조적으로 중국과 러시아 외무장관들은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중러의 인권사항에 대한 서구의 비판을 기각하고 글로벌 거버넌스에 대한 대안적 비전을 제시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주도의 국제질서는 “국제사회의 의지를 전혀 대변하지 않는다”고 Lavrov는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이번 회합은 수사 이상의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후 러시아는 2014년 모스크바가 크림반도를 합병한 이래 가장 많은 인원으로 우크라이나 국경을 따라 군대를 집결시켰다. 동시에 중국은 이미 예고된 상륙작전 훈련과 대만의 방공식별 구역에 대한 전투기 침범을 높은 빈도로 실시하였다. 거의 25년 만에 이러한 동시적 군사 움직임은 중국-러시아 결합의 깊이에 대한 우려를 다시 불러 일으켰다.

미국의 경우 이처럼 상대적국들의 분명한 결탁에 맞서기가 쉽지 않을 것이며, 양국의 연대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워싱턴의 관심과 능력 그리고 동원자원을 분열시킬 것이다. 지난 몇 주 동안의 상황으로 바이든 행정부는 향후 모스크바의 베이징 지원에 대응하지 않고는 중국의 행동을 관리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며, 이제 하나의 적국에 대한 대응이 다른 적국에 미칠 영향에 대하여 미국이 대비하고 계산해야 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두 나라가 워싱턴에 제기하는 문제는 분명하지만, 그들 이해관계의 수렴과 군사적 능력과 기타의 상호보완성으로 인해, 미국의 권력에 대한 이들의 결합된 도전은 각자 부분의 합보다 매우 크다. 특히 중국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통해 군사력의 격차를 메우고 기술혁신을 가속화하며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훼손하려는 노력을 보완하고 있다. 미국은 러시아 또는 중국의 불안정한 행동을 해결하려는 모든 노력에 이제 양국의 파트너십 심화를 제어하는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AN EMERGING LINK – 강화되는 중러의 결탁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이 외교정책의 최우선 순위’라는 신호를 보냈다. 대통령은 ‘베이징이 워싱턴의 가장 심각한 경쟁자’ 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였으며, 중국의 경제적 남용, 인권침해, 군사능력이 미국의 이익과 가치에 위협이라고 강조하면서, 동시에 미행정부는 러시아의 위협을 2단계로 하향 조정했다. 그러나 워싱턴은 모스크바를 과소 평가해서는 안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고도로 유능한 군대를 보유 감독하고 있으며 이를 사용할 의사가 분명하게 있음을 보여주었다. 국제사회의 냉대를 두려워하는 푸틴은 미국이 모스크바를 중요하게 다루도록 강요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으며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자신의 입지를 직접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는 정교한 무기를 중국에 판매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진전된 관계를 추구해 왔다. 러시아제 시스템은 중국의 방공, 대함, 잠수함 능력을 강화시키며 인도-태평양에서 미국에 대한 중국의 대응능력을 증가시킨다. 러시아와 중국은 인도-태평양 지역의 전략폭격기 순찰과 인도양에서 이란과의 해군훈련을 포함한 합동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들은 중국과 모스크바가 미국의 지배력에 도전할 의사가 있으며 양국이 협력하면 미국의 독자적인 역량보다 훨씬 빠르게 기술의 혁신과 협력을 이룰 수 있음을 전세계의 국가들에게 알리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권위주의적 방식에 관해 상대방에게서 서로 배우고 있기 때문에 양국 간의 연결 고리는 전략적으로 대단한 힘을 갖는다. 예를 들어, 중국의 COVID-19 허위정보 캠페인의 공격적인 방식은 양국의 지도자들이 오랜 크렘린 방식을 채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중국의 캠페인은 단순히 공산당에 대한 긍정적인 내러티브를 홍보하고 증폭시키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혼란, 불화 및 의심을 심어 주려고 한다(?).

베이징의 경험신호에 따라 모스크바는 러시아 온라인 영역의 자유를 제한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지난 1월 알렉세이 나발니가 러시아로 돌아오면서 대규모 시위가 전국을 휩쓸었던 이래 온라인 자유의 제한은 매우 시급한 과제이었다. 공공수단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는 권위주의적 거버넌스를 대중화하고 인권보호를 약화시키고 사이버 및 인터넷 주권에 대한 위험한 규범을 만들고 있다. 양국은 다자간 포럼을 통하여 이러한 문제에 대해 서로를 지원하고 조정하면서, 의도적이라기 보다는 우연한 것이지만, 양국이 같은 악보로 노래하고 있다.

중국과 강력한 관계는 러시아에게 많은 경제적 이점을 가져다 준다. 모스크바는 중국과 협력하여 미국과 유럽의 제재효과를 완화하고 궁극적으로 미국의 경제제재라는 도구의 효율성을 감소시키면서, 세계경제 시스템에 대한 워싱턴의 통제력을 약화시키려고 한다. 크렘린은 자본투자, 무기수출시장 등 러시아가 서구국가들에게 접근할 수 없는 방위제품의 수출을 위해 베이징으로 눈을 돌렸다. 알래스카에서 미중 회의가 냉냉하게 끝난 후, Lavrov 는 달러가 통제하는 국제결제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을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HOW TO PUSH BACK- 등떠밀기 수법

미국의 새행정부는 바이든이 말했듯이 “세계의 미래와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논쟁 ”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용어로 중국 및 러시아와 경쟁을 선택했다. 이러한 접근법은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중국과 러시아는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양국의 권력자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자신들의 열망과 권력장악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양국은 중요한 지역과 국제기구에서 미국의 지위를 약화시키려 할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동맹국과 다자주의에 대한 공감은 그러한 중러의 방해노력을 어렵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강화하려는 바이든의 노력은 중국과 러시아의 욕망에 대한 의심을 심어주려는 시도를 해칠 것이다. 탄력적인 사이버 및 선거인프라를 개발하고 부패방지 정책을 높이기 위한 공동노력은 악성간섭의 영향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자신만의 지도력을 주장하고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전략을 세울 수 없다. 중국과 러시아는 세계관이 일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원과 능력의 상보성에 의해서도 상호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크렘린은 서방의 경제적 미래가 밝다고 믿지 않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의 재정침체와 국내불안정의 위험이 높아지면서, 중국은 푸틴에게 더욱 중요한 파트너가 되고 있다.

양국관계의 토대를 흔들기 위해서는 러시아가 중국에 의존하는 것보다 미국과 어느 정도의 협력을 유지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모스크바에 보여 주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모스크바에게 미국의 미적분을 형성한다고 해서 중국과 러시아의 협력이 완전히 막을 수는 없지만 이들의 협력이 가장 위험한 악성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제한할 수 있다.

 

Chinese-Russian relationship is not impermeable.- 중러의 관계는 공략불가능한 수준이 아니다

일부 정책입안자들과 분석가들은 러시아를 중국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러시아를 포용하는 “역- 닉슨” 전략을 권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푸틴과 주변인사들에게보다 균형잡히고 독립적인 러시아 외교정책의 이점을 보여주기 위해 설계된 훨씬 겸손하고 점진적인 접근 방식을 대안으로 제안한다.

그러한 전략을 추구하는 근거는, 비록 빈약하지만, 워싱턴은 지난 2월의 New START 핵무기감축조약의 연장을 무기통제, 전략적 안정성 및 비확산에 대한 대화의 출발점으로 사용하겠다는 명시적인 의지로 활용할 수 있다. 미국은 이란의 2015년의 JCPOA 핵협상 복귀를 촉진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안정된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모스크바와 더욱 긴밀하게 협력 할 수 있다.

북극지역에서도 미국은 모스크바의 베이징으로 방향전환을 늦추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워싱턴은 즉시 북극지역의 군사화에 대해 러시아 및 기타 파트너들과의 대화공간 인 북극국방장관(CHODS) 포럼을 재개해야 한다. 북극위원회가 지역의 주요 관리기관이지만 임무에는 안보 및 군사문제가 아직 포함되지 않다. 북극의 CHODS포럼은 모든 당사자 간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군사지침을 설계하는 책임을 질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미국정책의 우선순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의 확대를 막을 뿐만 아니라 추가로 미-러 협력을 위한 발판을 제공한다.

 

DRIVE SMALL WEDGES – 중러의 결탁에 조그만 쐐기라도 심어야

군사적 확대와 민주적 제도를 훼손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포함한 러시아의 행동은 단기적으로 외교적 가능성을 제한하며, 푸틴이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의미있는 개입이 최소의 영역에 머물 것이지만, 그러나 미국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방식으로 모스크바와 협력하려는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노력으로 푸틴 주변의 엘리트들에게 중국에 대한 의존의 대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앞으로 미국은 베이징과 모스크바의 협력효과를 모니터링하고 대응하는 데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과 러시아 반대편에서 잠재적으로 NATO 동맹국과 관계를 강화하는 정기적인 전쟁게임의 훈련을 실시해야 한다. 또한 워싱턴은 시민담론을 조작하고 미국선거 제도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키기 위한 러시아의 간섭캠페인에 대응할 준비를 해야 한다.

중국과 러시아는 양국이 미국 정보작전에 대응하기 위해 정보공유와 노력을 강화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미국기관은 국방협력, 기술 공동개발 및 미공개 무기이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려는 시도에 고도화된 정보대응을 고려해야 한다.

중국과 러시아의 결탁은 결코 공격불가능한 수준이 아니며 미국은 양국간에 균열을 발생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주저해서는 안된다. 미미한 긴장을 활용하려는 미국의 노력은 양국관계의 전반적인 궤도를 바꾸지는 못할 것이지만, 그러나 파트너간의 작은 쐐기조차도 이들 간에 협력의 범위를 제한하는 마찰과 불신을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러시아는 북극의 지역 가버넌스로, 북극에 속하지 않은 국가, 특히 중국의 역할을 제한하고자 한다. 미국은 이러한 노력에 대해서 모스크바를 지지해야 한다.

별도로 러시아는 인도, 베트남 등 중국과 영토분쟁이 있는 국가에 주요무기 판매국가이다. 그러나 미국의 적대국-대처법 (2017년 의회에서 무기수출로 인한 크렘린 수입을 제한하기 위해 통과됨)은 러시아가 뉴델리에 무기를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데, 정책입안자들은 인도에 러시아산 무기구매의 면제를 제공하여 베이징과 모스크바 사이의 자연균열이 커지도록 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중국의 행동이 러시아의 이익에 해를 끼치는 점에 대해 모스크바에게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러시아 외교정책의 오랜 신조는 모스크바를 다극세계에서 독립적이고 비동맹적인 행위자로 설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분석가와 러시아 엘리트들은 러시아의 중국에 대한 의존증가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중국이 벨로루시, 이란 및 기타 지역에서 러시아의 위상을 침범함에 따라 미국은 러시아의 미래지도자들이 중립적인 방향을 계획할 수 있기를 바라며 현재의 접근방식에 대해 러시아 국민과 지배엘리트 사이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 및 러시아에 관련한 긴급과제의 목록을 이미 많이 가지고 있지만, 양국관계를 축소하려는 노력을 추가하여야 한다. 베이징과 모스크바의 협력을 제한하는 방법에 대한 창의적인 사고는 향후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이익과 자유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출처 : Foreign Affairs(포린어페어) on 2021-05-03.

Andrea Kendall-Taylor and David Shullman

두 사람 모두 새로운 미국안보센터의 대서양 안보프로그램의 선임연구원이자 조지타운 대학교 겸임교수직을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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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탄생과 변화

대학은 1000년전 지금과는 매우 다른 환경에서 탄생했다. 그때는 인구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고, 기술도 거의 발달하지 않았으며,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어서 지상에서의 존재란 영원한 삶으로 가는 중간단계라는 종교적 사고방식이 지배했다. 그때 이후 많은 것이 변했고 대학도 중세에서 현대, 후현대로의 역사적 변천으로 규정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 대응해 여러 차례의 중요한 변형을 겪었다. 현재 세계의 상태를 고려할 때 고등교육의 주요한 목적은 무엇일까? 중요한 전제 가운데 하나는 고등교육은 인간이 더 의미 있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도록 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적 정의와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증진시키도록 도움으로써 이 세계를 더 나은 곳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학은 이런 역할에 실패하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 도덕적 헌신을 상실하고, 다른 면에서 잘못되고 파괴적인 사고방식에 헌신하며, 또 다른 면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아는 걸 어렵게 만들기조차 한다.

현대 대학은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이다. 과거에는 기독교에 뿌리를 두었지만 이제 매우 세속적인 기관이 됐다. 한때는 엘리트 집단이었으나 이제 수백만의 학생들에게 열려있다. 이론을 모든 것의 우위에 놓는 동시에 지극히 실용적이어서 문학비평과 이론물리학이 컴퓨터 프로그래밍, 엔지니어링, 경영, 디자인과 나란히 존재한다. 대부분 학문분과들이 각자의 형이상학적 배경을 가졌지만, 대학의 전반적 구조는 통일된 세계관의 가능성을 갉아먹는다. 대학들은 경제성장에의 헌신이라는 지배적 문화에 긴밀하게 묶여있는 동시에 이성과 숙고의 삶을 증진시키는 것을 추구한다. 문화적 전통을 보존하려는 기관이면서도 이런 전통의 기본적 가정들이 타당한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 세계의 상태가 전반적으로 좋거나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현재 형식의 대학을 심각하게 재고할 이유가 없다. 현대 대학들은 세계가 현재의 상태에 이르게 하는데 공로를 세웠다.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에 공헌했으며 부분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기여했다. 그러나 최소한 진보의 길에 서지는 않았다. 현대 대학들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자신의 목적과 바탕의 가정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대학은 산업과 정치의 지도자들, 계획가와 분석가들, 교사와 시민들을 교육하며 우리의 파괴적 관행을 떠받치는 세계에 대한 이해의 방식을 발전시키고 합법화한다. 현대 대학의 영향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환경위기가 가장 심각하고 사회적 부정의(이는 환경의 쇠퇴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가 역사상 가장 증가한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공동체 해체와 환경 파괴에서 대학이 해온 역할은 크게 주목 받지 않는다. 환경위기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과잉인구, 과소비, 대규모 산업, 공공정책, 생육하고 번성하고 정복하라는 성경의 가르침 등에 초점을 두었다. 대학은 대규모 산업, 정부, 종교의 이해와는 떨어져 있거나 거기에 적대적이라고 스스로를 이해했다. 전반적으로 대학구성원들의 입장은 자연세계의 파괴에 대한 비난이 다른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동체 붕괴에 있어서도 대학의 책임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현대 대학들이 도시화를 촉진하는 이동성과 개인주의를 교육한다는 사실은 대체로 간과돼왔다.

 

현대적 믿음에 대한 대학의 헌신

나는 현재 형식의 대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데, 특히 학문분과, 철학적 유물론, 그리고 경제주의-무한한 경제성장이 가능하고 바람직하다는 믿음-에 대한 헌신 때문이다. 대학이 세계의 선을 위한 세력이 되려면 이 세 가지를 넘어서야 하며 인간의 삶이 갖는 의미, 지구와 모든 서식자의 내재적 가치, 생명이 갖는 상대적 속성을 긍정하는 세계관을 보증해야 한다.

학문분과는 매우 강력한 동시에 통일된 세계관의 가능성을 저해하는 특별한 방식의 구조적 사고이다. 대학이 분과 형식의 사고에 매진하는 한, 대학은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학문분과의 시각에서 보면 세계는 일관성과 통일성과 의미가 부족하다. 한 분과의 다양한 전제와 발견은 다른 분과의 전제와 발견에 의해 영향 받거나 점검되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은 무제한의 경제성장이 가능하고 바람직하다고 가정하는 반면 물리학자들은 지구의 파괴를 경고하는데, 이런 경고와 발견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고려되지 않은 채 넘어간다. 마찬가지로 물리학자들은 모든 실재가 물질로 환원되고 그런 물질은 내재적 가치, 경험, 자유가 없다고 가정하는데 비해 (암묵적으로는 대다수 과학자들을 포함해서) 대학의 다른 학자들은 최소한 인간의 삶에는 의미가 있고 어느 정도까지 스스로의 행동과 믿음에 책임이 있다고 가정한다. 대학의 분과구조는 이런 모순적 관점이 어떻게 두 가지 모두 진리로 통용되는지 생각하지 않은 채 공존하는 것을 허용한다. 전반적으로 통일된 실재에 대한 관념을 공유하는 대신, 서로 정반대인 추상적 개념을 내놓는다.

이런 방식으로 현대 대학은 현대성의 한 버전인 철학적 유물론이라는 후현대적 입장을 보태놓는다. 이 견해에 따르면 실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 그리고 중력 같은 물질적 힘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은 현대 대학에서 발견되는 근대적 세계관, 즉 오래 되고 이원론적인 세계관의 잔여일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과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세계관이다. 유물론은 초기의 이원론에 비해 더 큰 장점을 갖는다. 비이원론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으로 분명한 실체들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데 따른 문제를 피해간다. 이렇게 설명되지 않는 것에는 경험(인간의 경험을 포함), 자유(인간의 자유를 포함), 내재적 가치(인간의 내재적 가치를 포함), 도덕적 미적 규범 등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생명이 없고 의미와 목적을 피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유물론이라는 세계관을 향유하는 개인의 존재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현대 대학은 또한 경제주의에 경도돼 있다. 경제주의에 따르면 세계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돈으로 해결되며 돈은 은총처럼 무한하다. 세계경제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섯 배나 팽창했는데도 세계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다수가 더 나빠졌다는 사실, 전반적인 환경이 전지구적 부의 증가에도 불구하고(대개는 바로 그것 때문에) 심각하게 쇠퇴했다는 사실은 이런 믿음에 대한 반증이 되지 않는다. 세계의 경제활동이 무한히 팽창하며 모든 이들에게 이익을 주고 건강한 생태권역과 양립 가능하다는 믿음이 너무 깊은 나머지, 경제주의가 보편적 부라는 공공연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에 설득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주의는 잘못되고 파괴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점점 큰 지구의 쇠퇴와 인간의 고통을 가져온다. 단순히 말해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경제성장은 가능하지 않다. 현대 대학들이 직간접적으로 경제주의를 지지하는 한, 환경적으로 건강하고 사회적으로 공정한 세계와 한편이 될 수 없다. 경제주의는 삶의 의미를 소비와 소득의 관점에서 정의하기 때문에 이런 목적을 수용한 대학은 자연세계의 파괴를 가속화하고 인간의 고통을 증진시킬 뿐이다.

 

대학이 토론하지 않는 열세 가지 생각

우리가 사는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데도 대학에서 공개적으로 토론하지 않는 열세 가지 생각이 있다. 더 나쁜 것은 이 모든 생각이 진리로 간주되며, 전 세계의 고등교육기관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인증됐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대학들은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바로 그 생각들에 자신의 권위를 부여한다. 그 열세 가지 생각은 다음과 같다.

1. 실재는 내재적 가치를 갖지 않는다.

2. 우주는 목적이 없다.

3. 진리, 정의, 아름다움은 완전히 주관적이어서 중요하지 않다.

4. 사회 전반의 건전도는 GDP로 측정될 수 있다.

5. 광범위한 경제적 불평등은 문제가 아니다.

6. 교육은 직업훈련과 출세에 관련된 것이다.

7. 공장식 농축산업은 효율적이고 필요하며 지속가능하다.

8. 모든 중요한 문제는 시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9. 개인이 사회보다 더 현실적이다.

10. 가능한 최선의 세계질서는 하나의 슈퍼파워만 존재하는 것이며, 이것은 미국이다.

11. 글로벌 경제는 필연적이고 지속 가능하다.

12. 전쟁과 부정의는 피할 수 없다.

13. 경제성장은 기후안정성이나 생물다양성만큼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하다.

만약 한국과 미국이 지속 가능한 문명을 이루려면, 고등교육을 재발명하거나 현재 상태의 고등교육을 다른 종류의 고등교육으로 보완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세계를 파괴하는 생각에 도전하고 그것을 보다 진실에 가까운 생각으로 바꾸도록 해주는 형식의 고등교육이 필요하다.

나는 위에 제시한 열세 가지 생각에 대해 토론하고 이 목록에 다른 생각들이 추가되기를 바란다. 아마 내가 만든 목록은 의도하지 않고 의식하지 못했지만, 미국 중심적일 것이다. 그러나 내 요점은 대학들이 당대의 문화적 가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몇몇 중요한 생각들은 현재 구축된 고등교육의 맥락에서는 추호의 의심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형식의 대학이 세계를 파괴하는 생각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대학의 구조와 관련이 있고, 둘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형태 짓는 광범위한 문화적 가정과 관련이 있으며, 셋째는 정치적인 문제이다.

 

대학이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세 가지 이유

오늘날 대학은 학문분과에 따라 조직돼 왔다. 과거에는 반드시 그렇지 않았고 미래에도 그럴 필요가 없다. 학문분과는 탐구분야, 기본적 가정의 세트, 방법론으로 구성된다. 학문분과에 맞지 않거나 현재 분과의 기본가정과 모순되는 생각은 오늘날 고등교육의 맥락 안에서는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내가 지구에서 인간이 영위하는 삶에 해롭다고 꼽았던 위의 모든 생각들은 이런 범주에 들어간다.

만물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을 예로 들어보자. 물리학과 화학이라는 분과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가정 위에 놓여있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가능성을 음미하는데 닫혀있다. 이론상 철학 같은 다른 분과는 실재하는 모든 것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거나 이것이 실재에 대해 생각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생각을 출발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현대 철학자들은 인간의 인식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없으며, 따라서 만물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은 말이 안 된다거나 우리는 물리학자들의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초점은 실재하는 것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가정이 더 개연성이 있다고 설득하려는 게 아니다. 현재 대학이 구조화된 방식 때문에 이런 생각이 대학에서 타당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사례로, 산업화된 농업은 산출하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토양을 파괴하기 때문에 지속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들어보겠다. 농경제학이라는 분과는 그것이 바이오기술과 결합돼 있는데다 대규모 농화학제품 기업들과 밀접하게 연계돼 있기 때문에 위의 생각이 사실이 아니라고 가정한다. 이런 생각이 잘못됐다고 증명하거나 토론하지도 않는다. 그냥 무시해버린다. 많은 대학에 있는 환경연구, 지속가능발전, 음식연구 관련 학과들이 현대 농업은 지속 가능하다는 생각을 공개적으로 거부하지만, 이런 학과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고 일반적으로 대학 안에서 낮은 지위를 차지한다. 이 학과들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농업정책과 관행을 만들어내는 농과대학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대학들이 위의 열세 가지 생각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하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대부분이 이미 “상식”이 되어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심각하게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등교육의 목적은 개인의 성취라는 생각과 끝없는 경제성장이 가능하며 바람직하다는 쌍둥이 생각을 예로 들어보자. 모든 사람들이 경제성장은 끝없이 가능하며 대학에 가는 이유는 좋은 직업을 얻는 것, 즉 많은 돈을 버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국의 경우 고등교육이 고강도 노동, 탁월한 경제정책과 함께 삶을 엄청나게 개선한 주역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런 생각에 도전하는 것은 상식을 배반한다. 그러나 전체 그림은 좀더 복잡하다. 한국의 삶이 모든 면에서 과거보다 나아진 것은 아니며, 10년마다 두 배가 되는 경제성장 역시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한강의 기적은 그림자를 드리웠으며 이것은 경제성장이 끝없이 가능하다는 잘못된 가정에 그 뿌리가 있다.

대학은 바깥 세계로부터 단절된 “상아탑”으로 불려왔다.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다. 그러나 더 깊은 진실은 대학이 사회적 구성물이며 문명의 상식이 교육과정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경영대학원과 경제학과는 경제학이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도덕규범에 순응해야 한다는 생각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대학, 최소한 미국 대학들이 “경제학은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도덕규범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처럼 위험한 생각을 고려하는 게 지극히 어려운 세 번째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다. 미국에는 대개 소규모인 사립대학들과 대개 대규모인 공립대학들이 섞여 있다. 미국의 대다수 학생들은 공립 대학에 다니고 있다. 공립대학 교수들은 각 주에 고용돼 있다. 일부는 종신직위를 보장받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현재는 70%의 교수들이 종신고용을 보장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다.

공식적으로는 모든 교수들이 어느 정도의 학문적 자유를 누리지만, 매년 계약이 끝나는 비정규직 교수들에게 이런 자유는 다음 학년초에 계약을 연장해야 한다는 열망에 의해 제한된다. 비정규직 교수들은 다시 고용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는 생각들을 강의하는 게 결코 편안하지 않다. 슬프게도 정규직 교수들조차 종종 승진하지 못하거나 학생들의 평가에서 별점을 덜 받을까 두려워서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는 생각들을 피한다.

한국 대학들이 대개 사립이라고 하더라도, 내 짐작으로는 상식적 생각들에 도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정치적 압력들이 존재할 것 같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전반적으로 대학들은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바로 그 생각들에 대해 다루지 못한다. 이런 일반화에는 예외가 있으며 이런 예외를 축하해야 하지만, 이런 예외가 더 큰 진실을 가리도록 허용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대학들은 상황을 호전시키지 않는다. 대체로 자신들의 상당한 권위를 공개적으로, 비공개적으로 잘못되고 파괴적인 생각에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지구를 파괴하는 “지식”을 재생산함으로써 상황을 점점 나쁘게 몰아간다.

 

대학을 변화시키는 두 가지 제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미국과 한국에서 모두 통할 수 있는 두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두 가지 제안은 가능성의 전부가 아니며 얼마든지 다른 제안이 더해지길 바란다.

큰 대학의 교수들은 위에 제시된 위험한 생각들 가운데 하나 혹은 그 이상에 대해 탐구하는 독서그룹을 조직할 수 있다. 대여섯 명으로 구성된 독서그룹에서 한 학기 동안 한두 권의 책을 공들여 읽도록 한 다음, 이 문제들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자신들과 전공이 다른 동료들과 서너 번 만나도록 하면 된다.

우리는 애팔래치안 주립대학(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중간규모 주립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이것과 비슷한 강의를 시도했다. 주제는 기후변화와 그것의 사회적 함의였다. 결과는 희망적이었다. 많은 교수들이 같은 대학에서 가르치는 다른 교수들과 만나고, 자신들의 특수한 학문분과 바깥에서 중요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환영했다. 이런 위험한 생각을 가르치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대학의 분과구조였다. 비록 임시적 토대에서 이뤄진 일이지만, 교수들이 자신의 전공을 넘어 함께 생각하도록 만든 것은 현재의 대학 구조를 변화시키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 독서그룹이 거둔 눈에 띄는 성과는 어떤 생물학과 조교수가 학생들이 생물학 전공기초 강의에서 전지구적 기후변화의 생물학적 함의에 대해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기후변화의 생물학적 함의 부분은 선택강의이며 많은 강사들이 이 부분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 이후로 생물학과는 전공기초 강의에서 기후변화의 생물학적 함의를 필수강의로 지정했다. 이론상 다른 학과의 교수들도 전공기초를 정하면서 비슷한 결정을 할 수 있다.

이 강의에서 얻은 또 다른 결과는 약 100명의 교수들이 기후문제에 대해 자신들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정보를 자신들의 강의에 넣겠다고 자발적으로 서약한 것이다. 이런 서약은 교수들에게 부과된 의무사항이 아니라 개인적 결정이었으나, 그들이 이 서약을 따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현대 대학처럼 오래 되고 존경 받는 제도를 금방 뜯어고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함께 독서를 하는 것 같은 간단한 일들이 변화를 위한 맥락을 만들어내는데 놀라운 효과를 거두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런 종류의 분과를 횡단하는 노력들이 현대 대학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잠재력을 가질 것이다.

나의 두 번째 제안은 대학 바깥에 대규모로 존재하는 성인학습센터와 관련된 것이다. 1920년에 독일 철학자 프란츠 로젠츠바이그는 독일 대학들의 비인격적 교육에 맞서 레흐르하우스(Lehrhaus, 교육의 집)로 알려진 기관을 설립했다. (역자주: 당시 독일에서 제기된 평생교육의 필요성에 부응하면서도 유대의 전통에 기초한 성인교육기관으로, 회당(synagogue)을 학교(lehrhaus)로 바꾸되 거꾸로 하지 말라는 탈무드의 가르침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유대역사에서 첫번째 레흐르하우스는 제1차 바빌론 유수때 세워졌으며 혁신적 교육방법으로 신앙의 의무를 지켰다.) 레흐르하우스의 강조점은 전통적인 유대식 삶에 대한 현대성의 도전에 대응하고 비위계적인 교수법을 도입하는데 있었다. 1930년대에 나치에 의해 폐쇄될 때까지 레흐르하우스는 독일에서 가장 활기 있는 교육기관이었다. 1970년에 레흐르하우스 모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느 정도 부활했다.

1960년대에는 몇몇 “대안대학”들이 미국에 설립됐는데, 이는 그 시대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제도권 대학들이 실패한 데 대한 대응이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지속 가능한 농업, 건강한 공동체, 지속 가능한 경제학 같은 구체적인 문제 혹은 생태적이고 정의로운 문명을 증진시키는 발상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조직하는 성인학습센터 혹은 “대학”을 설립하는 게 가능하다. 이런 “대학” 혹은 성인학습센터는 위에 제시된 위험한 생각들을 얼마든지 탐구할 수 있다.

나의 주안점은 현재 형식의 대학들이 문제의 일부라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운영하는 대학들은 구조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지구를 파괴하는 생각들을 분석하고 평가하는데 무능력하다. 물론 문화 자체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고등교육을 변화시킨다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는 대학을 내부와 외부에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하며, 동시에 현대 문화의 모든 다른 측면들까지 변화시키려고 힘써야 한다.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출발점은 없다. 그럼에도 새로운 종류의 문명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식의 고등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마커스 피터 포드

철학자, 『현대 대학을 넘어: 구성적 후현대 대학을 향해』 저자

월, 2019/12/23-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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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대표는 말한다. “미국에 협상 마감 시한은 없다.(12.16)” 발언 취지로만 본다면 미국은 ‘북이 얘기해온 연말’이란 시한에 개의치 않으며 계속 협상해 나가고 싶다는 정도의 의미 같다. “우리는 시한 없다. 일하자”는 동 발언에서도 같은 속내가 읽혀진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하지만, 이 발언은 명명백배하게 틀렸다. 이유는 미국 자신은 갑(甲)이고, 북은 을(乙)이라는 인식과 비례되어져 이 인식은 결국 마감 시한 결정권은 오직 미국 자신에게만 있다는 오만함으로 연결되어져서 그렇다.

그래서 만약 이 논리를 북이 수용하게 된다면 북은 협상 종료될 때까지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 아무런 국가적 행위 없이 무조건적으로 인내하고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 시한과 기간에 대한 보상은 누가 해줘야한단 말인가? 동등하지 않는 공정성이다.

시한이 있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지금의 문제, 즉 미국이 북의 요구인 ‘새로운 계산법’에 대해 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이 시간의 문제라기보다는 자국이 처해있는 정치·군사적 및 정파적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는 미국이 풀어내어야 할 숙제이지, (이 숙제를) 자신들이 풀지 못한다하여 그 책임모두를 상대방인 북에게만 전가한다? 정직하지도 외교적이지도 않다.

구체적으로는 ▲먼저, 협상을 계속 하겠다 면서도 미국은 북에게 줘야할 보상과 양보가 전혀 없다. 이른바 북은 미국과의 적대 관계개선을 위해 핵실험도, ICBM발사도,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등도 단행하였지만, 이 선의에 대해 미국은 그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

명백한 대북제재결의 위반이다. 웬 대북제재결의 위반? 유엔결의안 239728(강조, 필자. 이 결의안에는 명백하게 대북제재 결의안이란 용어는 없다. 원문도 제재를 의미하는 ‘sanction’이 아닌 ‘Resolution’ 결의안또는 해결책이 나오며 연번호가 있을 뿐이다. 해서 결의 제0‘ ‘0호 결의라 번역하는 것이 맞는 말이다. 그런데도 유독 북에게만 대북제재 결의안이라고 번역하고 일반화하는 것은 분명 다른 의도 때문이다. ‘해결보다는 제재에 방점 찍고 싶어 하는 미국과 분단적폐세력들의 농간 말이다.)에는 ‘북(조선)이 결의안을 준수하는 정도에 따라 (제재를 강화 또는) 수정·중단·해제할 수 있도록’한 조항이 있는데, 이 조항을 과연 미국은 이행하고 있으며 그럴 의지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과 미국은 ‘유엔결의안 2397호 28항을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이고,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역행하여 제재를 강화한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즉, 자신들은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으면서 협상을 계속 하자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은 하나도 보상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목적인 북의 추가적 군사도발을 막고자 하는 자신들의 국익만 앞세우는 이율배반적 도발행위 다름 아니다.

공정하고 대등해 될 약속이 이렇게 어느 일방(=북한)에만 적용되고, 희생적으로 적용되어져서는 안 된다는 일반적 정의를 위배한다.

그래놓고 생각을 한번 잠깐 해보자. 미국은 당연히 자신들이 지켜져야 할 시간이 없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트럼프에게는 당장 좋다. 재선활용카드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적으로도 패권지위를 계속 유지하는데 시간에 쫒기지 않는다. 북의 군사적 도발이 없는 한 손해 볼 것이 없다.

그러니 계속 그렇게 갑 질 해나가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북은? 절대적으로 그렇지(=괜찮지) 않다. 모든 주권국가가 규범적으로 보장되어있는 자주권과 발전권이 침해당해 북은 엄청난 고통과 곤란을 계속 겪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①대북제재가 지속됨으로 인해 국가의 정상적인 경제발전 경로를 왜곡시킨다.

②국가 간 외교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아 국가경쟁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다.

③정전협정의 지속으로 인해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계속 시달려야만 한다.

▲다음으로는 등가의 문제이다. 즉, 북의 비핵화에 대한 미국의 대가는 경제적 혜택이나 번영에 대한 언급 정도이다. 이걸 믿고 북이 핵을 포기한다? 너무나도 처절한 반면교사가 있어 이 논리는 북으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날강도의 논리와 똑같다.

리비아의 경우가 그 예다. 미국으로부터 핵프로그램을 폐기만 하면 경제지원 하겠다는 (미국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리비아는 핵프로그램 폐기했다. 그런데 돌아온 미국의 약속은 약속한 경제지원은 고사하고, 내전을 빙자한 미국의 공격에 무너졌다. 이걸 너무나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북이 그 말만 믿고 핵을 폐기한다? 불가능한 상상력이다.

동시에 확실한 등가가 보장된 것도 아닌데, 달리 말하면 안보와 군사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등가가 안보와 군사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등가여야 한다고 한다면 북과 미국 사이에 존재하는 공정하고도 공평한 등가는 적대정책 철회 대(對) 평화협정체결을 중심에 놓는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 보장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이 약속은 하지도 않고, 양보해 지금 한 약속도 미국 자신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쥐꼬리만 하게, 그것도 가역적인 방식으로만 하겠다는 것이고, 반면 북에게는 사실상 모든 것을 내놓으라고 하는 미국의 태도야 말로 현찰 받고 어음 주는 격, 그것도 의도된 부도어음에 가까운 것을 주겠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미국은 위에서 확인받듯이 자신들이 지켜야 할 유엔의무는 하나도 지키지 않으면서 북 보고는 핵·미사일 활동을 재개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며 전면전을 경고하는 미국이야 말로 완전 사기범이고 범죄국가가 아니고 뭣이란 말인가?

하여 굳이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정당하지도 외교적이지도 못한 방식으로 시한을 무한정 연장하려는 미국의 태도야 말로 제아무리 선의적으로 이해하려 해도 일방적이며 패권적이고, 마피아집단과 너무나도 똑같은 폭력적 범죄 집단이라고. 또 이런 ‘나쁜’폐단을 막으려면 오히려 국제사회가 미국에게 (마감)시한을 줘 유엔외교를 정상화해야 된다고.

해서 다시한번 강조할 수밖에 없다. 백번양보해 재선을 앞두고 반드시 외교성과를 보여줘야 할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리고 그 유일한 외교적 성과가 북의 추가 군사행동(ICBM 발사 등)은 막아지면서도 예의 ‘bad deal’까지는 안가는 그런 외교적 성과라고 한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트럼프 행정부가 풀어야 할 숙제이자 곤궁함이지 북이 풀어야 할 숙제이고 곤궁함은 아니지 않는가?

다른 말로는 북의 입장에서는 계속 시간을 유예하고, 고통을 감내해가며 인내해야 할 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협상이 결렬되면 결렬된 상태에서 주권국가로서의 국가행위를 정상적으로 할 수 있으며 그 활동으로 미국과 다시 협상의 룰(rule)을 마련하면 되는 것이다.

연동해 지금의 문제가 시한의 문제라기보다는 위에서 확인받듯이 미국이 처해있는 정치·군사적 환경과 정파적 이해관계로 인해 발생한 문제라고 한다면 북은 이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질 필요는 없다. 하여 북의 입장에서는 협상 시한을 정해놓고 미국에게 요구할 자기근거와 주장, 입장을 충분히 분명하게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정당성도 비교적 명확하다.

▲우선은, 2017년 11월 29일 국가핵무력완성 선언이후 단 한 번도 유엔결의 위반을 한 적이 없다. 핵실험과 ICBM을 발사한 적이 없다는 말이고, 비례해 이에 대한 상응 대가를 유엔결의 정신에 비춰 미국에게 충분히 요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시한을 정해 그 이행정도에 따라 다음 전략을 선택해야 될 명백하고도 분명한 근거가 북에게는 있다. 다름 아닌, 김정은 위원장이 2019년 4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올 12월 31일까지 ‘새로운 계산법’을 제시하라며 충분한 시간과 명분을 줬기 때문이다.

적용하려면 이렇듯 그것이 비록 시한이라 하더라도 똑 같이 두 국가(=북, 미국)모두에게 공히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

 

민플러스, 2019년 12월 21일에 게재된 글입니다 (필자와 협의하여 수정 후 본지에 실린 것임).

수, 2019/12/25-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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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연과 과학의 재정의가 필요한가

나는 자연과 과학이 이해되는 방식의 혁명적인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런 설명은 역사 혹은 철학 수업이 아니다. 이것은 정책결정, 정책의 프레임 구축, 지구의 미래에 관한 장기적인 비전 마련에 필요한 설명이다. 현대적 가정의 바깥에서 “자연”과 “과학”을 생각하는 방식을 배움으로써만 우리는 문명적 변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통제 아래 놓인 지구와 생태계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또 “과학”은 이런 지배력을 뒷받침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인류는 자동차에서부터 화력발전소, 핵무기에 이르는 많은 기술을 통해 지구의 미래에 대해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한다. 이런 기술은 폭발적인 과학지식을 통해 발명되고 실용화됐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를 바꿈으로써만 우리는 자연과 과학을 다르게 이용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자연과 과학을 다르게 이용할 때만 새롭고 진정한 생태문명을 향해 진전하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이것은 “큰 그림”의 문제이지만 추상적이지도, 우리와 무관하지도 않다. 정부, 교육, 산업, NGO 등이 정책과 우선순위를 바꾸려면, 현재를 넘어 우리가 생태문명이라고 부르는 목표를 향한 장기적 안목이 필요하다. 정책변화를 위해서는 우리 인간이 급속도로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현대(지난 50년 정도) 이전까지 아주 명백하게 보였던 근본적 가정을 의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생태문명연구소는 전 세계에 있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조직들과 협력한다. 이들은 이미 기후위기와 그것이 지구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지구상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재해석을 내릴 때만, 인류는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사실상 생태계 전체가 인간의 통제에 들어간 후현대에 자연과 과학이 어떻게 이해되는지 인식하는 것이다.

 

현대 이전의 자연과 과학

오늘날 자연세계에 가해진 피해의 많은 부분은 자연이 “몰가치하다”, 즉 인간이 원하는 방식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현대 이전의 어떤 시대에도 자연이 이런 방식으로 몰가치하다고 여겨진 적은 없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서구의 철학적 전통에서도 그랬고 동양도 마찬가지다. 만약 자연이 몰가치하다면, 과학도 몰가치하다.

서양철학의 탄생을 생각해보자.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자연을 이해한다는 것은 데이터와 패턴뿐만 아니라 자연의 기본원리(archē)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의 과학은 실증적이기보다 철학적이었다. 심지어 서양역사상 최초의 실증주의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물리학이나 생물학을 배우는 목적은 인간이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얻는 수단이었다. 이 초기 과학자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 신에게 호소해야 한다고 믿지 않았다. 대신 위대한 유교사상가들처럼 가치의 패턴이 이미 자연 속에 들어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결코 자연을 지배의 대상이나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만 이용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600년경 현대가 시작되기 직전, 만물의 가치에 대한 믿음은 서양철학에서 정점에 달했다. 유럽 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이 만물을 창조한 데는 각각의 이유가 있고 모든 것이 신성한 질서에 따라 적절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믿었다. 전체로서의 자연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신의 선함을 드러냈으며, 모든 생명은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여겼다. 신이 창조한 모든 것은 좋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과학은 일종의 자연신학, 즉 신의 과학이었다. 자연신학에서 신은 부분적으로 세계를 통해 이해됐으며, 세계는 신을 통해 온전히 이해됐다.

 

과학과 현대 세계

오늘날 환경위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시기인 이른바 현대를 끝내고 있다. 현대의 기원은 약 400년전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인간이 유일하게 생각하는 존재(res cogitans)라고 가르쳤다. 동물은 “단지 기계”이며 자연은 인간의 문명과 사고의 확장을 위한 배경에 그쳤다. 그렇다면 현대인에게 과학이 그저 인간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인간의 지구 지배를 위한 도구로 여겨지는 것도 놀랍지 않다.

이런 자연의 모습을 감안할 때 데카르트가 선택한 과학이 어떤 종류인지 상상할 수 있다. 바로 물리학이다. 동시대에 토마스 홉스가 주장한 것처럼 만물이 “움직이는 물질”에 불과하다면,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은 운동의 방정식이다. 실제로 토마스 홉스가 이런 말을 한 뒤 40년이 지나기 전에 뉴턴이 운동의 방정식을 제시했다.

이제 이 글의 핵심적 생각에 이르렀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자연에 대한 연구, 즉 우리가 선호하는 과학의 종류를 결정한다. 즉, 자연이 과학을 결정한다. 만약 자연이 생명체를 포함한다면, 자연은 생명과학을 이용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자연이 실재하는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포함한다면, 자연에 대한 연구는 심리학, 인류학, 역사, 문학, 그리고 예술을 포함해야 한다. 그러나 서구에서 근대가 탄생할 때 선구적인 과학자들은 이 모든 것을 거부했다. 그들에게 자연은 기본적으로 원자, 나중에는 부원자적 입자가 된 물질이었다. 유럽과 미국이 전 세계로 수출한 세계관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생각을 퍼트리기 쉬웠던 이유가 있다. 자연을 단지 객체로 바꿔놓는 게 인간에게 강력한 힘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자연관이 배와 비행기, 총과 핵폭탄,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만들어냈다. 전세계 지도자들은 이런 세계관이 생산한 기술에 대한 대가로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과 상충하는 세계관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문제는 이런 기술들이 이윤의 극대화를 주장하는 주주들과 “공동선”을 위해 조금도 헌신하지 않는 다국적 기업들을 양산한다는 점이다.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지속적인 성장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를 원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의 권력을 잃으니까!) 국내총생산(GDP)을 기반으로 성공을 측정한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통제에 저항하는 국가들은 가난에 허덕이다가 국민들의 반란에 직면한다. 사람들은 작은 거라도 원한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권력을 유지하려면 설사 기후변화를 일으킬지라도 국민들이 원하는 단기적 이익을 제공해야 한다.

여기에서 교훈은 분명하다. 자연은 과학을 결정하고, 과학은 기술을 결정하며, 기술은 정치와 경제적 전지구화의 형식을 결정한다.

그런데 과학과 자연 사이에 형성된 역학의 나머지 절반이 있다. 자연이 과학을 결정하는 게 맞지만, 과학도 자연을 결정한다. 즉, 우리가 자연을 연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과 가정들은 결국 우리가 연구하는 자연을 정의하게 된다. 아브라함 매슬로우가 썼던 오래된 표현인 “당신이 가진 유일한 도구가 망치라면, 모든 것을 못처럼 다루고 싶어질 것이다.”라는 말을 떠올려보라.

과학에 반대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과학도로서 과학의 진보가 인간의 생존에 결 정적임을 강조하고 싶다. 점점 더 정교한 도구를 사용하는 실험가들은 세계에 대한 풍부한 데이터를 얻고, 과학자들은 이 데이터를 이용해 경험적 일반화를 도출하고 자연의 기본법칙을 공식화한다. 이런 지식 없이는 기후파괴의 실제 규모를 알지 못했을 것이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비하는 방법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400년 동안 과학은 현대적 세계관의 시종으로 이용됐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과학과 가치 사이에 더 견고한 장벽을 쌓기 위해 투쟁해왔다. 과학자들은 “문화적 전통과 미신에 구속되면 과학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제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래된 미신을 없애고 그것을 (과학이라는) 새로운 미신으로 대체하기 위해 현대적 지식을 수용해야 한다.

가장 최악은 현대적 세계관이 과학은 몰가치적이어야 한다, 즉 모든 가치를 넘어 존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점이다. 이런 잘못된 주장은 지난 400년 동안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과학자들은 과학의 우위가 전통적 가치를 현대성의 세계관과 가치로 대체하는 비용을 치렀다는 명백한 사실마저 부인한다. 예를 들어 객관적이고 입증 가능한 지식만이 가치가 있다, 자연은 인간의 목적을 위해 정량화되고 통제되고 사용될 때만 정확하게 이해된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를 지배하고 우리의 필요에 맞게 이용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모든 생명체 가운데 가장 독보적이다, 물질 이상인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생기, 의식, 예술과 종교, 선악-은 물질/에너지가 진화과정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복잡한 방식일 뿐이다 등의 주장이 우위를 얻었다. 어느 신경학자가 내게 말했듯, “전선과 화학물질, 그게 우리의 전부이다.”

어떤 실수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자연을 인간이 제약 없이 사용하는 자원의 집합으로 만든 게 그런 경우다. 결과적으로 깨끗한 공기, 파란 하늘, 마실 수 있는 물, 건강한 토양이 손상됐다. 기업농이 전통적인 농장을 대체했고, 교통체증은 세계의 거의 모든 대도시에서 자전거와 보행자들을 대체했으며, 알고 통제하려는 욕구가 연결하고 보살피고 보호하려는 바람을 대체했다. 대학과 기업은 가치중립적인 곳이므로 학생과 노동자들은 가치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게 됐다. 현대성은 식민권력의 확장과 함께 지구 전체에 자본주의와 개인주의를 전파했다.

 

몰가치의 과학과 몰가치의 자연을 넘어

과학이 승리를 선언한 이후 수세기 동안 상황은 급격하게 변했다. 독립성에 기초한 실증과학은 이제 위협적 존재가 되었다. 오늘날 과학, 기술, 산업이 “몰가치적”이라는 생각은 지구와 우리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종을 위험에 빠트렸다. 자연에 대한 현대적 관점은 대양의 산성화, 토양이 죽은 농경지, 사막의 확장, 지하수면의 감소, 급속한 지구온난화라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현대과학이 지식과 가치를 분리하고,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몰아내고, 지혜의 단련을 끝없는 소비의 즐거움으로 대체하도록 허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고 지구 생태계가 붕괴지경에 이르렀음을 발견했다.

좋은 소식은 대안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성이 붕괴하면서 후현대가 등장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이 새로운 대안은 사람들이 땅, 공동체, 그들의 거처를 구성하는 생태계와 유기적으로 상호 연결돼 살아갔던 근대 이전시기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근대성이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붕괴하면서 우리는 전근대의 선조들과 원주민들의 가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물론 전근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이것은 일종의 낭만주의이다-지구와 더불어 사는 새롭고 지속 가능한 방식을 창조하는데 과거의 중요한 요소들을 혼합할 수 있다.

이 과정에는 두 가지 중요한 단계가 있다. 첫째, 과학은 자연을 단지 “움직이는 물질”의 연구로 해석하는 관점을 버려야 한다. 인간사회도 수많은 생태계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양한 생태계의 상호연관성을 연구하는 새로운 생태과학이 이를 대체해야 한다. 둘째, 근대성을 벗어나 지속가능성으로 이동하는 것은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는 만큼 과거의 잔재로부터 새로운 문명이 탄생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생태적 사고와 문명적 변화가 필요하다.

 

생태문명을 향하여

“생태문명”은 네 층위의 조화가 이뤄진 후현대적 비전인데, 이는 사회, 과학, 전통적 가치, 생태적 사고를 규정하는 방식들 사이의 조화를 가리킨다. 이는 강력한 비전이다. 이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문명”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사회를 전체적으로 어떻게 조직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뜻한다. 문명은 개별적인 법, 정치, 기술 이상이다. 문명이란 한 집단의 전체 생활방식, 지구화 시대에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생활방식을 의미한다.

우리는 집단이 공유한 가치와 열망을 가리켜 영어로 “에토스”란 단어를 사용한다. 한 집단의 에토스를 보존하는 것은 오래된 풍습과 가장 깊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환경문제는 단순히 개별적 정책들, 즉 정부가 원자력의 사용을 승인할지 말지, 누가 자동차를 소유할지, 혹은 사회가 어떻게 농업을 조직할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생태문명이란 용어는 환경이란 용어를 확장시켜 한 집단의 모든 생활방식을 포함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예를 들어 생태농업은 기업농이 해온 고도의 석유의존 관행을 줄이고, 보다 전통적이며 지속 가능한 방식의 농업을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 생태경제학은 단순한 GDP를 넘어 경제적 성공을 측정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인간의 복지와 화합을 강조하는 것을 뜻한다. 사회의 다른 분야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새로운 네 층위의 비전에서 두 번째는 과학이다. 현대과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가끔 과학과 기술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자고 주장한다. 많은 이들이 복잡한 문제를 가진 현대 세계로부터 등을 돌리고 원시적 농업이나 토착민의 생활방식, 즉 삶이 보다 단순하고 과학이나 기술이 없던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러나 생태문명 건설이라는 목표는 과거로의 퇴행을 허용하지 않는다. 생태문명은 과학이 여전히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계를 계승하므로 전근대가 아니라 후현대라는 목표를 갖는다. 과학으로부터 도망치기보다 과학을 통합시킨다. 생태문명은 탈과학(post-scientific)이 아니라 현대가 가진 해로운 가정들에서 벗어나 자연과 과학을 보다 유기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과거의 과학은 사회와 지구를 위해 봉사하는 시종이었으나 지금의 과학은 주인이 되어 인간과 문화를 노예로 만들었다. 이런 추세를 역전시키려면, 공동선을 위한 과학에 재정지원을 하는 등 사회와 지도자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 후현대의 우선순위에 봉사하는 과학의 인도에 따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기술이 개발될 수 있다.

네 층위의 비전 중 세 번째는 전통문화의 가치이다. 이것은 서구인들이 종교라고 지칭하는 믿음과 실천의 집합인데 종교라는 말은 동양보다는 서구의 문화적 맥락에 좀더 편안하게 맞는다. 만약 우리가 종교라는 용어를 쓴다면, 후현대 종교만이 이런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역자주: 불교나 힌두교는 서구인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체계화하기 이전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체계화, 권력화된 서구의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배타성과 획일성으로 인해 수많은 분쟁과 갈등의 원인이 됐다.)

후현대 종교는 현대 종교와 완전히 다르다. 각 문명이 가진 오랜 지혜를 돌아보며 우리가 사는 후현대 세계에 각자의 전통을 적용한다. 자신의 종교적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대신, 상대방의 문화적 전통이 가진 지혜를 배우려고 한다. 후현대인들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을 실천할 수 있다. 믿음과 실천이 사회에 유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객관적이거나 보편적일 필요는 없다.

누구나 “생태문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종교적 헌신 없이도 환경이라는 최우선의 가치를 위해 깊이 헌신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과 동물의 합일은 여전히 전통적인 종교적 가치의 심오한 표현이 될 수 있다. 두 가지 예를 생각해 보자. 유교는 상반된 힘과 이해들, 즉 남성과 여성, 통치자와 백성, 하늘과 땅 사이의 조화를 강조한다. 지구와 조화롭게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라는 요구는 아마 우리 시대의 가장 높은 가치일 것이다. 도교는 차이간의 균형을 강조하는 또 다른 모델을 제공한다. 균형이란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 사회의 각 부분들, 혹은 과학과 가치 사이의 균형을 의미할 것이다. 한쪽이 다른 쪽을 힘으로 억누를 때 불균형이 발생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 군사강국과 약소국가, 북반구와 남반구가 그런 사례들이다.

생태문명의 네 층위의 비전 가운데 마지막은 생태적 사고, 즉 환경 전체를 고려하는 과학, 철학, 정책이다. 생태학은 모든 존재의 상호의존성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건강한 생태계는 그 생태계의 모든 유기체들 사이의 적절한 균형에 달려있다고 가르친다. 환경이 균형에서 벗어나면 생태과학이 균형을 회복할 수 있는 행동지침을 제공한다. 정책이 확고한 생태적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다면 그 정책은 모든 구성 요소들 사이의 균형이 깨지더라도 바로 회복되도록 사회를 구조화할 것이다.

 

간단한 예: 과학 정책

한국과 미국 같은 국가의 정부는 과학정책을 구상하고, (미국의 경우) 국립과학재단(NSF), 국립보건원(NIH) 같은 과학단체들에 기금을 할당한다. 이런 정부출연기관들은 지원기준을 정하고, 이들의 기금 지원은 해당 국가의 과학연구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런데 기금 지원결정을 내릴 때 그들은 과학을 어떻게 정의할까? 주요한 기금은 대개 매우 전문화된 프로젝트에 투입되는데, 그 이유는 확실한 결론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가치의 개입도 차단되는데, 그 이유는 “인류의 장기적 이익”과 같은 목표는 5년 이내의 지원으로는 정확히 측정되거나 시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체적 기준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어떤 “가치”가 기금 수혜자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아이러니하다. 우선 정치적 가치인데 과학계에서는 기금을 받기 위한 전투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다음은 기금 지원기관의 특수한 가치인데, 이 기관들은 현재 과학적 패러다임 안에서의 정확성과 일관성이 유지되는지, 그리고 3년 내지 5년의 수혜기간 내에 확실한 결론을 낼 수 있는지 증명하기를 요구한다.

이런 가치들이 지원기준이 되면 결국 우리와 자연세계의 관계를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이론과 기술을 지원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속 가능한 기술과 사회를 조직하는 급진적으로 새로운 방식을 연구하고 증진시키는 과학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비전이 있는 장기 연구를 지원하는 일이 어렵기는 해도 NGO나 민간기부자들을 통해 약간의 지원이 가능하다. 시민들이 지속 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지원을 요구한다면, 정부도 정책 변화로 응답할 것이다.

 

세계관으로서의 생태학

우리는 자연과 과학의 개념이 중요한 이유를 살펴보았다. 지구는 위기에 처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자연을 인간의 소비를 위한 자원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런 자원을 어떻게 측정하고 효과적으로 이용할지 결정하는 수단이 됐다.

나는 건강한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지구를 보호하려면 여러 과학분야의 도움이 필요하다. 생태문명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말만 하면 안 된다. 이런 종류의 사회질서가 어떤 것인지, 물리적∙생물학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지,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엄격한 자연과학은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확신하는 후현대적 맥락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의 깊은 상호연관성을 인정하면서 생태과학과의 대화 속에서 후현대적 자연관을 세워나갈 때 모든 것이 변화한다.

전근대 시대에 인간은 자연과 가치를 통합할 수 있었다. 현대과학은 인간과 생태의 심오한 가치를 저버린 대가로 성공했으나 불균형의 과학이 됐다. 후현대 과학의 임무는 높은 수준의 현대과학을 과학분야 상호간의 관계, 지구와의 온전한 관계라는 가치 아래 서로 만나게 하는 것이다. 생태연구는 지구의 미래를 담보하려면 어떤 종류의 균형이 필요한지 밝혔다. 사고방식 혹은 세계관으로서의 생태학은 사람들을 각자의 환경과 보다 가깝게 통합시키는 수단으로서 각 지역의 문화적 전통을 되살리기를 권한다. 과거의 지혜와 미래의 생태학이 함께 현재의 방향성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생태문명으로의 길은 쉽지 않을 것이다. 모더니즘의 힘은 여전히 우세하다. 자본주의 기업들은 쉽게 통제권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많은 정부들은 계속해서 지구의 이익보다 자국의 이익을 앞세울 것이다. 많은 소비자들은 사회의 이익보다 자신의 안락과 욕구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현명한 장기적 해결책보다 쉬운 단기적 대응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지구의 미래는 위태롭다. 우리가 계속 상위의 가치를 부정한다면 개인들은 계속 자신에게 가장 이익을 주는 생활방식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가치를 오직 유용성의 관점에서만 정의하는 것은 지구의 생물다양성을 파괴하고 대규모 멸종을 낳으며 지구상 생명의 정교한 균형을 손상시킨다. 새로운 생태문명은 자연 본연의 가치라는 기반 위에서, 그리고 그 가치가 지구에서 인간의 행위에 대한 지침으로 기능할 때만 이뤄질 것이다.

 

필립 클레이튼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교수, 생태문명연구소 대표

월, 2020/01/06-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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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에 따른 생태교육의 시급성

최근 수년간 급격한 기후변화와 전지구적 생태계 파괴를 경험하고 있는 이 시대의 인류는 불안한 마음으로 디스토피아가 다가옴을 지켜보거나 애써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과학기술 낙관주의에 빠져있다. 현 인류가 처한 이러한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극적인 처방은 과연 있는 것인가? 지구 환경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국제적 노력과 크고 작은 규모의 사회조직체들의 활동으로만 충분한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세계관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류 문명을 개조하지 않는다면 디스토피아는 예상보다 빠르게 도래할 수도 있다. 기존 과학기술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중심적 환경주의 운동과 교육은 임시방편적이고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반면 인간과 생태계와의 화합을 주창하는 탈인간중심적 종교와 신비주의 철학은 현 인류문명의 토대가 된 과학기술의 견고함에 쉽게 무너져 버릴 수 있다. 현 인류에 닥친 지구 생태계의 문제는 매우 복잡하지만 동시에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이다.

우선 인류 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는 곳에는 생태철학의 담론이 있어야 하는데, 현대 과학기술의 토대가 된 근대적 세계관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의 파급력을 가져야 한다. 또한 새로운 생태문명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생태교육이 학교교육 현장에 커리큘럼으로 구체화되어야 하는데, 과학적 자연관과 인본주의적 능력배양 중심의 근대 교육의 한계를 설득력 있게 지적하고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한다. 결과적으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지구의 문화는 과학기술, 생태계, 문명이 공진화하는 선순환 관계를 전제로 하는데, 현재의 환원론적이며 기계론적 과학기술에 대한 탁월한 대안으로서 생태과학의 패러다임이 과학계에서도 인정받아야 한다.

생태철학의 담론은 오랜 역사를 통해 발전하였고 현재에도 유효하지만 생태과학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가장 구체적이며 작은 실천부터 가능한 생태교육의 발걸음은 이미 시작되었고 이를 통해 철학과 과학연구의 새로운 세계관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적 세계관의 한계

17세기에 이르러 중세의 세계관이 종말을 고하면서 시작된 근대에는 인간, 신, 자연 간에 새로운 관계가 설정되었다.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인본주의는 교권과 스콜라 철학의 권위로부터 해방된 인격체로서의 개인에 관심을 갖게 하였고, 이로써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이 가능해졌다. 자연사물과 정신의 공통된 존재론적 기원으로서 그 자체가 탐구의 목적이었던 신의 위상은 중세를 벗어나면서 기껏해야 과학적 인식의 객관적 타당성과 보편성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지표로 전락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한 복음주의 신학은 각 개인이 신과의 접촉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개인주의적 구원의 체계를 교리화한 것이다.

근대철학의 합리론과 경험론을 대표하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론과 베이컨의 우상론은 자연세계의 진리에 접근하고 개인의 지적 능력을 확장할 수 있는 철학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이를 통해 과학혁명이란 이름 하에 자연세계의 여러 단면들을 탐구하는 여러 개별 과학분야가 이 시기에 태동하였다.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된 자연현상은 관찰할 수 있고 양적으로 측정 가능한 것으로 제한됐으며, 수학적 언어만이 이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수단이 되었다.

한편 개인의 자유, 평등, 인권, 복지, 자본, 부의 개념이 근대 이후의 세계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었다. 자연세계는 인간과 분리된 객관적 탐구의 대상이 되었고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자원의 의미로 전락하였다. 일부 환경주의자들에게는 지속 가능한 지구환경이란 인류가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지구자원을 잘 사용할 수 있는 경제적 관점에서 규정될 수 있다. 이는 근대의 사유체계가 지식확장의 주체인 인간과 탐구의 대상인 자연세계가 철저히 분리된 이원론적 실체론을 기반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기계론적 인과론을 기반으로 이루어졌고 더 명확한 지식을 얻기 위해 자연세계를 더 작은 단위의 현상으로 환원하여 설명하게 되었다. 예컨대 복잡한 생명현상은 더 작은 단위의 분자수준에서 설명하고, 이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해 화학과 물리학적 지식을 동원하였다. 하지만 생명현상, 기후변화, 국제정치상황 등은 단순히 환원적이고 기계론적인 방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현상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인류문명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여러 기이한 부작용들을 현재의 자연주의적 세계관으로는 설명할 수도, 해결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생태철학의 역사

지구환경 위기의 근본적 원인인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극복할 수 있는 생태적 패러다임은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것인가? 제도화된 종교에 예속된 중세의 세계관과 권위에서 해방되어 인간중심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근대의 세계관은 인류의 전 문명에서 볼 때 매우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자연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종류의 세계관이 이미 동서양에 더 넓고 깊이 퍼져 있었다. 따라서 이런 세계관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오래 전 동양의 도가사상은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지도, 자연세계를 개별화된 개체와 부분으로 나누지도 않았다. 자연에 존재하는 각 개체들의 개별적 차이를 인정하지만 배타적으로 대하지 않고 자연 개체들의 내재가치가 존재함을 믿었다. 생태학(ecology)의 어원인 그리스어 ‘oikos’(eco)는 가족, 집, 가정을 이루는 가족 구성원, 사회를 이루는 작은 단위 공동체를 의미한다. 자연은 모든 구성원들이 상호작용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함께 지어가는 가정과 같은 것이고 생태지혜(ecosophy)는 노자가 말한 ‘유무상생(有無相生, 있고 없음은 서로 상대하기 때문에 생겨남)’, 즉 타자를 향한 관계적 진상을 깨닫는 직관적 통찰을 의미한다. 불교의 근본인 연기사상과 생명존중 사상에 따르면 법계와 생태계는 모든 존재가 상호 연결된 세계라는 점에서 같고 모든 생명체에 내재된 가치가 바로 불성이라고 가르친다.

기독교에서도 인간의 타락 이전에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분리가 존재하지 않았고, 인식의 주체와 대상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죄로 분리된 관계성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이고, 사랑으로 연합되는 전 우주적인 공동체가 교회라고 여겼다. 도교, 불교,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심층생태학을 주창한 아른 네스는 자연보존운동을 지향하는 표층생태주의가 여전히 인간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소아(self)에 국한되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지구 안의 모든 것이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심층생태학은 생물권 전체와의 일체 의식을 경험하면서 최대의 대아(Self)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관이라고 주장하였다.

근대철학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정신과 철저히 분리된 물질의 개념을 공고하게 만들었지만 정신과 육체 사이의 인과적 관계에 대한 그의 기계론적 설명은 모순이 많았다. 또한 과학적 탐구의 대상인 자연은 인류의 발전과 진보의 수단으로만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아 기하학적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을 발전시키려고 한 스피노자는 아이러니하게도 데카르트의 이원론과 정반대의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윤리학)』에서 초월적 인격신을 거부하면서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 되면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의 개념을 이끌어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고 신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하거나 파악될 수 없으며 모든 개체들은 시공간 안에서 신의 속성을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양태 혹은 변형태라고 설명했다.

스피노자의 일원론적 자연관에 따르면 신은 자연에 내재할 수 밖에 없으며 신과 분리된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의 전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 사건, 경험들은 상호의존 관계에 있고 이 모든 것들은 체계적으로 통합된 전체를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란 무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스스로의 변화 생성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의 생태론은 인과적으로 연결된 유기체로서의 생명에 대한 직관적 인식을 통해 자연전체와 자연법칙을 통찰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은 니체도 초인의 정신은 바로 어린아이와 같이 자연적 삶을 누리고 스스로 자유롭게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19세기 말 이후 생태적 세계관 형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철학자는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이다. 그의 유기체철학 혹은 과정철학은 절대 시공간 속에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를 갖지 않고 동일하게 정지해 있는 것으로 존재하고 파악되는 ‘실체’라는 개념의 과학적 유물론을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로 여겨지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경험을 통해 새롭게 생성되는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에 의해 구성되어 이름 붙여진 것이다. 각각의 현실적 계기는 그에 선행하는 (과거의 세계 전체인) 경험의 계기들을 통해 자신을 구성해가는 과정으로서의 존재이다. 이런 현실적 존재가 자기를 구성하는 생성의 과정을 파악(prehension)이라고 명명하였다.

화이트헤드는 자연의 모든 생명체도 인간이 가지는 경험의 정도는 아니라 해도 파악의 과정과 경험을 가지며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또한 시공간적으로 상호 연결된 자연 내의 모든 유기체들은 내재적 가치와 도구적 가치를 동시에 가지고 생태계 내에서 생기는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간다고 했다. 이렇게 볼 때 자기(Self)의 존재를 세계와 분리시키지 않고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생태교육의 핵심인 것이다.

 

생태과학의 등장

현대 물리학에서는 기존의 환원주의와 기계론적 인과율로 설명될 수 없는 자연의 복잡한 현상을 유기체적 자연관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의 생물학과 임상의학 분야에서는 복잡한 생명현상을 기계론적이고 미시적 관점에서 다루는 것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오믹스(omics, ‘체학’이라 번역되며 생명과학에서 분자들이나 세포 등의 집합체 전체를 뜻함)라는 분야가 등장해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유전체학(Genomics), 단백질체학(Proteomics), 후성유전학(Epigenomics), 대사체학(Metabolomics), 연결체학(Connectomics) 등이 그 예인데 단백질, 신경세포 등 몸 속의 여러 단위들 간의 상호작용과 연결에 대한 패턴을 분석하여 생명현상을 설명하려는 세부 학문분야들이다. 기존의 기계론적이고 선형적인 방식으로는 복잡한 생명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으므로 실험실 연구를 넘어선 빅데이터 기반의 인공지능 방법론이 복잡한 인과성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20세기 인공지능과 로봇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이버네틱스란 분야는 시스템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상호관련성을 밝혀 시스템 스스로가 어떻게 자기를 조직하고 환경에 적응하는지를 개념화하였다. 오늘날 정보기술 분야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월드와이드웹 기술도 정보와 데이터들의 연결을 통해 엄청난 양과 종류의 정보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초연결사회를 만들어가는 4차 산업혁명의 개념 역시 사람, 기계, 데이터, 환경이 서로 연결되어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혁명적 변화를 의미한다.

이미 과학기술의 페러다임은 환원주의와 기계론을 넘어서 전체적 관점에서 관계와 상호작용을 연구하고 구현하려고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해 가고 있다. 그렇다면 교육에도 이런 패러다임을 적용할 수 있을까?

 

화이트헤드의 교수학습 원리

화이트헤드는 생태적 교육에 있어서 생태적 자기(Ecological Self)라는 개념을 제안하였다. 즉 생태교육은 한 개인이 세계의 한 부분임을 인식하게 도와주는 도덕교육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실천적 요소라고 하였다. ‘생태적 자기’는 개인을 넘어 이웃, 사회, 인류, 생태계, 우주와의 일체감을 형성하는 기본 개념이며 자기 초월성과 연결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학습자는 세계 속에서 다른 존재들과 상호 의존하면서 상호보완적 관계를 맺고 이 관계성을 통해 생명이 유기적으로 끝없이 탄생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로서의 개별 학습자는 고립된 에고(ego)가 아닌 사회적 관계를통해 다른 존재들과 연결된 자기(Self)의 존재를 경험하는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이며, 지식이 아니라 지혜의 눈으로 세상의 당면한 문제들을 바라보고 해결하는 것을 학습해야 한다. 학습자 자신과 연결된 다른 존재들의 경험을 함께할 수 있는 마음을 공감이라 하며, 생태적 교육은 자연의 모든 존재들과 공감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주장하였듯이 교육은 교실 내에서 생기 없는 관념(inert ideas)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경험과 체험을 통해 창조성을 배양할 수 있는 환경을 학습자와 교사가 함께 가꾸어가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도덕과 교수학습의 네 가지 방법적 원리를 제시하였다.

(1) 상호성의 원리는 교사와 학생이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라는 관점에 기초한다. 교사와 학생은 양방향으로 경험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상호 파악(prehension)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파악의 주체가 된다. 이렇게 교육은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세계에 대해 배우고 공통의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인 것이다.

(2) 관계성의 원리는 도덕이 기본적으로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는 입장에서 관계가 확대되어감에 따라 발생하는 도적적 개념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도덕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원리이다. 즉, 교육은 ‘관계적 자아’에 바탕을 두고 생태환경이나 주변 이웃과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책임감을 발전시키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도덕교육은 다양한 타자에 대한 공감과 배려를 통해 관계적 자아와 가치관계를 확장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3) 리듬의 원리는 학습자의 정신발달의 리듬적 특성을 고려한 교수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리로서, 인간의 삶과 교육이 주기적으로 순환되는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화이트헤드의 리듬의 원리는 그의 합생의 원리(다자가 모여 또 다른 하나의 존재가 되는 원리)와 일맥상통하는데 교육은 지속적인 파악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과정인 것이다.

(4) 조화의 원리는 추상적 사상을 현실에 응용할 수 있는 능력과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 지혜를 강조한다. 교양교육은 조화의 원리를 토대로 추상적 이론을 현실에 응용할 수 있는 조화의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자율과 훈육을 학습자의 정신발달의 특성과 전체 학습의 과정을 고려하여 학습 단계별로 조화롭게 커리큘럼에 적용함으로써 지혜롭고 창의적이며 책임감 있는 사회의 구성원을 길러내는 것이 화이트헤드 교육철학의 핵심이다.

 

생태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

생태교육은 근대의 기계론적 패러다임 안에서 생태적 내용만 교육하는 것이 아니다. 인본주의, 과학주의를 넘어 관계, 과정, 연결이라는 사고가 교육의 핵심원리가 될 때 진정한 생태적 교육이 실현될 수 있다. 생태철학과 생태과학에서 도입된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태교육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교육과정과 교수학습의 방법론이 재구성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근대적 세계관의 전환과 생태적 자기의 형성이 이뤄져야 한다.

아직 제도권 교육에는 도입되고 있지 않으나 여러 대안학교들과 지역공동체들에서 생태교육을 실천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다양한 생태교육 커리큘럼과 경험적이고 실천적인 학습을 통해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로운 유기적 관계를 깨달을 수 있는 생태적 감수성을 높이고, 타인 및 자연과의 유대감을 통해 정서적으로 안정된 건강한 자아 발달에 도움을 주려는 노력들이다.

생태교육은 과학기술, 생태계, 문명이 공진화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하고 구체적인 시도이다. 진화는 한 개체가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환경을 구성하고 관계의 연결망으로 서로 이어져 있는 모든 개체들이 서로에 대해 적응해가는 과정이다. 지구 환경도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구성원들과 함께 스스로 적응하고 자기조직화 하는 창조적 활동을 하고 있다. 생태교육은 인류가 지구와 함께 건강하게 진화할 수 있는 실천적 발걸음이다.

 

김홍기

서울대 치의과대학 교수, 의료정보학

월, 2020/01/13-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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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

1972년 로마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발표된 이후, 경제성장 위주로 달려오던 현대 문명이 지속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구환경이 더는 인류문명을 지탱할 수 없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문명의 방향을 전환하지 못하면 인류가 지속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이러한 환경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의 한 결과로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이 1987년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의 보고서 ‘우리 공동의 미래’에서 제안되었다.

이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을 사람들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이해하고 있다. 한 극단은 지식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무한의 경제성장을 지속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하는 방향이며, 다른 한 극단은 지구, 정확히 말해 인류를 위기에 봉착하게 할 경제 성장을 중단하고 지구의 지속성을 담보할 수준 내로 경제규모를 한정함으로써 인류도 지속되도록 하는 방향이다. 현실에서 각각의 집단이나 개인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 양 극단의 스펙트럼 중 어느 한 지점으로 각자 이해할 것이다.

무한 경제 성장의 욕구를 담보하는 방식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의 개념이 이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 수식어가 제안되었으며,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 언급될 때 대부분의 경우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의 해석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많은 논의에서 추구하는 바는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이라 볼 수 있다. 이 경우 지속 가능한 발전에서 ‘생태’가 중심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선 시민의 의식과 행동이 변해야 한다. 의식과 행동 변화를 유도하는 방안의 하나는 교육이다. 이러한 목적의 교육 중 하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의 큰 줄기인 생태 개념을 시민이 이해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행동으로 실천하도록 하는 생태교육이다. 하지만 생태교육의 개념에 대해 아직 명확한 정의가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

 

생태교육의 정의

생태(ecology)의 뜻은 학문으로서 생태학(ecology)의 정의가 생태학자의 수만큼 다양한 것처럼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마다 다르다. 인간의 개입이 전혀 없는 순수 자연의 상태나 그 속성을 전제하기도 하고, 인간에게 전혀 위해가 되지 않는 환경의 상태를 전제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위해가 되지 않는 상태는 인간 개입이 없는 자연이 순수하고 안전하다는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을 수도 있고, 위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인간이 철저하게 개입해야 한다는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을 수도 있다. 후자에서 인간의 개입은 전자의 순수 자연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훼손 행위를 방지하는 개입일 수도 있고, 인간이 자연을 적극적으로 안전하게 개조하는 개입일 수도 있다.

자연 개조를 옹호하는 관점에서의 생태 용어 사용은 생태농법에 대한 인식에서 볼 수 있다. 생태농법으로 생산된 농작물이 인간 건강에 좋다는 관념은 인간을 위한 식량생산의 도구로 자연을 이용하면서 인간 건강에 좋도록 자연을 개조하는 개입을 정당화하고 옹호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생태교육에서 말하는 생태는 순수 자연을 전제하며 무한의 물질순환을 통한 생태계의 지속성 개념에 바탕을 둔 개념으로 규정될 수 있다. 생태계는 개별 구성원인 종보다는 구성원들이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전체로서 하나의 계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즉 생태교육에서 생태계는 인위적인 개입 없이 무한히 지속될 수 있는 물질의 순환계로 여겨진다. 에너지는 생태계 외부에서 안으로 흘러 들어와 생태계 내 생물구성원의 연결망(관계)을 통해 전달되다가 외부로 흘러 나가는 일방향의 흐름을 보여주지만, 물질은 생물공동체 밖의 무생물 구성원에서 생물공동체 내로 들어와 생물 구성원의 연결망을 통해 전달되다가 공동체 밖의 무생물 구성원으로 되돌아가며 생태계 내에서 무한히 순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생태교육에서 생태는 인위적인 개입, 즉 에너지의 투입 없이 무한히 순환하는 상태나 속성을 말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생태 개념에 기초한 생태도시는 환경에 위해가 발생하지 않는 자연 순환의 도시로서 지속 가능한 발전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생태도시에서는 생태위기를 초래하지 않고 도시 문명이 지속되면서 자연 생태계의 생물상도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이상적으로 전제된다.

이처럼 생태교육에서 생태란 인간 문명 내에서 무한의 순환에 저해가 되지 않도록 인간 이외의 생물 구성원뿐만 아니라 인간까지 포함한 모든 생태계의 구성원이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며 공존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생태의 정의에 기초한 생태교육은 순수 자연이 무한의 순환을 하듯 인간과 자연이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며 인간 문명이 지속될 수 있는 시민의 행동 양식을 익히게 하는 교육으로 정의할 수 있다. 생태계의 원리에 대한 이해, 즉 생태주의에 이념적 바탕을 두고 있는 생태교육은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를 인식하고 인간이 소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가르치는 교육이라는 점이 강조되기도 하다.

요컨대 생태교육은 일차적으로 현대 문명의 지속 불가능성을 극복하기 위해 지속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자연 생태계의 원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민의 생태소양을 높여 생태주의 이념으로 무장된 생태시민을 양성하는 교육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이 생태교육의 목적은 생태시민이 인간 이외의 생물구성원뿐만 아니라 인간 사이의 유기적 관계에 기반을 두고 행동하도록 함으로써 현대문명이 자연과 공존하고 지속 가능하게 하며 인류공동체 구성원들도 평등하게 공존하도록 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통합적 생태교육

20세기 후반부터 융‧복합적 또는 통합적 접근이 중요시되고 통합적 접근의 교육이 강조되면서 공통과학이나 공통사회 교과목이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도입되었고, 생태교육에서도 통합적 교육의 요구가 높아졌다. 자연과학과 기술과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가치관 변화와 사회 제도와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 생태시민의 개별 행동과 사회행동이 교정되도록 하는 데 기반이 되는 생태교육은 통합과학이나 통합사회를 넘어 전 분야가 통합하는 접근이 더욱 절실하다.

‘통합’은 표준대국어사전의 정의를 참조하면 ‘둘 이상을 하나로 합치는 일’로 교육에서는 ‘학습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의 학습결과를 종합하고 통일하는 일’로 규정될 수 있다. 따라서 ‘통합적 접근’은 ‘경험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치관과 태도에 바탕을 두고 다양한 분야의 시각에서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통일된 해석과 결론을 내리는 접근’으로 규정될 수 있다. 통합적 접근을 통해 개인의 가치관과 태도는 조정 변경되고, 조정된 가치관과 태도에 따라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개인의 반응, 즉 행동이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통합적 교육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명쾌한 해답이 없다. 고등학교에서 형식적인 문∙이과 통합교육과정이 도입되었고 대학에서도 여러 분야에서 통합교육이 시도되고 있지만, 실제 교육내용이나 방법은 단순한 메들리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통합교과목이라는 명목 하에 한 교과목에 다양한 분야를 넣어놓고 한 교사가 가르치거나 다양한 전공 교사들이 연이어 가르친다고 통합적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분야를 학습하며 형성된 다양한 시각으로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분석하고 통합할 수 있게 훈련시키는 교육이 진정한 통합적 교육이다. 각 분야를 폭넓고 심도 있게 가르침으로써 배양된 학습자의 다양한 시각이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한층 더 심도 있게 분석하고 해석하며 통합할 수 있다. 이렇게 분석되고 해석된 결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충을 종합적인 틀에서 포괄하여 차이를 줄이고 조화로운 통일을 만들어가는 통합 훈련을 하는 것이 진정한 통합교육이 될 것이다.

생태교육은 이러한 진정한 통합적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교육이다. 환경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일차적인 단순한 해석들이 서로 상충되더라도 개인 또는 사회는 하나의 실천적 결론을 강제적으로라도 내려야 하며, 그러한 훈련이 이루어지는 교육이 생태교육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합적 결론을 내려야 하는 사례를 들어보자.

자동차의 연비를 개선하는 기술이 개발되었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이러한 기술 개발을 친환경적이라거나 생태적이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연비가 개선된 차를 소유하게 된 개인은 친환경 기술이 개발되기 이전보다 운행의 경제효율이 개선되어 운행 시간과 거리를 늘리기 때문에 연료의 소비량이 늘어나고 실제 배출되는 공해기체도 늘어날 수 있다. 낮은 연비 때문에 자동차 소유를 꺼렸던 사람도 자동차 운행의 경제효율이 개선됨에 따라 자동차를 구입하고 운행에 합류함으로써 사회적으로 공해기체의 배출총량이 친환경기술 개발 이전보다 훨씬 더 늘어날 수 있다. 게다가 늘어난 차량을 소화하기 위해 도로 수요까지 늘어 자연이 더욱 훼손될 수 있다. 실제 역사는 이러한 현상을 증명해왔다.

이와 같이 환경부담 감소라는 개별 기술의 분석이나 해석이 기술수요 증가라는 심리적, 경제적 사회적 분석이나 해석과 상충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상충을 해결함으로써 환경부담의 총량이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들게 하는 제도적 해결책을 생각해 보자. 단순한 접근으로 자동차 운행수요를 줄이는 방법은 연료가격을 올려 연비개선에 따른 운행의 경제효율을 이전과 같게 되돌리거나 오히려 개악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자동차 운행이 유지되거나 감소함으로써 환경부담의 총량을 줄일 수는 있다. 그런데 이런 제도적 대응을 직간접으로 경험한 기술자나 회사는 연비를 개선하는 기술을 더는 개발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복합된 환경문제나 생태문제에 대한 문제 중심 혹은 과제 중심의 생태교육은 진정한 통합적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교육을 이끌어갈 교사를 어떻게 훈련하고 양성할 수 있는지의 난제가 있다. 과학, 기술, 사회, 인문 분야의 지식을 모두 갖춘 교사가 통합적 교육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지, 각 분야의 지식이 부족한 교사라도 통합적 접근의 교육을 이끌어 갈 수 있는지 명쾌하게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지속 가능성의 생태학적 이해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개념이 중심이 되는 생태교육은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원리를 자연 스스로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생태계에서 찾으려 한다. 그런데 과거와 같은 경제성장 방식이 더는 지구에 부담을 주지 않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하에 제안된 지속 가능한 발전이 인간에게 경제 성장을 중단하거나 축소하도록 경고하기보다는 경제 성장의 부작용을 줄이거나 없앰으로써 지속적으로 경제 성장을 키우려는 욕구를 오히려 더 자극하고 있는 듯하다. 그 결과 친환경 또는 생태 기술을 개발하여 지구 자원(물질과 에너지)의 소비가 계속 늘어나도록 하는 경제 성장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물질의 상을 변환하는 모든 에너지 흐름의 과정은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지구의 무질서도(엔트로피)를 높이며 최소한 인류의 지속성을 저해한다. 이러한 엄연한 우주법칙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인류 문명은 소비를 유지하거나 줄이기보다는 늘리는 방안을 생태계의 원리에서 찾으려 노력한다. 생태계는 열역학 제2법칙을 따르는 계이기 때문에 생태위기를 악화하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물질 소비와 에너지 소비를 늘리는 경제 성장 방안을 제공할 수 없다.

성장의 욕구를 채우려는 지속 가능성 요구와 열역학 제2법칙을 따르는 생태계의 본질은 서로 모순된다. 진정한 생태교육은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고 우주의 법칙을 따르는 지속 가능성에 부응하는 인류 문명의 방향을 제시하여야 한다.

모든 생태학 교과서는 생태계 내의 무한한 물질 순환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생태계 내에서 생물공동체를 거쳐 순환하는 물질은 전체 물질 중 극미량에 불과하다. 거의 모든 물질은 저장고에 머물러 있다. 극미량의 물질이 생물공동체를 거쳐 순환하도록 하는 데 필요한 간접적인 에너지는 상대적으로 막대하다.

광합성을 통해 생물공동체가 직접 사용하는 태양에너지의 양은 지구에 유입되는 양의 0.023%에 불과한데 비해 지구 밖으로 반사되어 나가는 34%를 제외한 66%의 태양에너지는 극미량의 물질이 순환하는 생물공동체가 지속될 수 있도록 지구의 무생물 환경을 유지하는 데 쓰인다. 극히 적은 양의 물질과 에너지를 생물공동체가 직접 이용하고 나머지 거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생물공동체 밖에 머물기 때문에 지구는 생물공동체가 지속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의 반증은 제한된 공간에서 생물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실험이었던 ‘생물권 2’(생물권 1은 지구이므로) 실험이다. 1991년 미국 아리조나 주 남부 오라클의 사막지대에 1만2000㎡의 거대한 유리온실을 지구의 축소판인 바다, 습지, 열대우림, 사막, 초원 등과 3800여 종의 각종 동식물, 자원참가자 8명이 2년간 함께 지냈다. 그러나 제한된 밀폐 공간에서 생물공동체의 생명현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계속 증가하는 무질서도를 감당할 수 있는 거대한 무생물 공간이 없던 생물권 2는 지속되지 못하고 2년 만에 종료될 수밖에 없었다.

지속 가능한 생태계의 물질 순환은 생태계 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며 지속 가능한 생물공동체가 이용하는 생태계 내 에너지도 극소 분량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의 무한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지구 내 물질과 에너지의 소비를 계속 늘리는 지속 가능한 발전은 불가능하다. 지속 가능한 생태계의 원리는 인류 문명의 물질과 에너지의 소비를 일정 수준 이하로 제한할 때만 인류 문명이 지속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류 문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은 물질과 에너지 소비의 팽창이 아니라 다른 수준의 질적 향상, 정확히 말하면 자연의 과정에 순응하고 조화를 이루며 한정된 수준 내의 물질적 풍요를 수용하고 만족하는 정신적 행복의 향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생태교육의 이념

물질과 에너지 소비를 지속적으로 팽창하려는 무한 탐욕은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 따라서 생태교육이 추구하는 지속 가능성은 인류 문명의 물질과 소비를 한정된 수준 이하로 제한하는 생태적 지속 가능성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인간 사회로 확장하는 논의가 필요하다.

(1)자기 절제와 타자 배려의 생태철학적 반성

많은 생물학과 인문사회학 책들이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을 생태계의 존속 방식인 것처럼 호도한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이 지배하는 생태계는 지속될 수 없다. 왜냐하면 강자가 약자를 초토화하고 박멸하여 강자가 취할 수 있는 약자가 더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강자로 비유되는 포식자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포식활동을 하는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포식자는 약자로 비유되는 피식자에게 무심할 수밖에 없으며, 피식자도 그렇게 무심한 포식자에게 도피활동의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무심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포식자와 피식자는 한 생태공간에서 동시에 공존한다. 필자는 이러한 공존을 ‘모자람의 지혜(frugal wisdom)’를 바탕으로 하는 ‘무심의 공존(disinterested coexistence)’이라 명명하였다. (『이해하는 생태학: 인간과 자연의 본성을 찾아서』, 공주대 출판부, 2005)

이와 반대로 인간의 탐욕 때문에 일어나는 철저한 약자의 멸살로 공존이 무너지는 것을 ‘지나침의 무지(indulgent ignorance)’라 명명하였고, 그 결과는 인류 미래의 지속 불가능성으로 나타난다. (‘함께하는 사회의 구현: 4대강 사업의 이기적 탐욕과 생명경시 극복’, 『생명연구』45호, 2017)

절제하지 못하고 탐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인류는 자연과 공존하지도 못하고 인류공동체가 갈등 없이 함께하는 공동체가 될 수도 없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은 물론, 인류공동체의 갈등 없는 공존을 위해서 인류는 생태계가 보여주는 ‘모자람의 지혜’를 탐욕을 억제하는 자기 절제의 지혜로 깨닫고, 생태계가 보여주는 ‘무심의 공존’을 타자의 생존과 권리를 존중하는 타자 배려의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류 문명은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을 토대로 자연이 보여주는 생태 평등(ecological equality, 정민걸, 위의 논문, 2017)을 인간 사회의 공동체에서도 구현하는 지혜로운 문명으로 발전해 가야 할 것이다.

(2)함께하는 생태시민의 자아실현

생태계가 지속되는 원리는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생태계가 붕괴될 수 있는 과도한 에너지 전환의 과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작동하는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이다. 이 생태계 지속성의 원리는 물질과 에너지 소비의 무한한 팽창을 희구하는 인간의 무한 탐욕과 기술능력 과신으로 공존을 무너뜨리는 지나침의 무지와 대조된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위해서 무한소비 탐욕의 발로인 지나침의 무지를 생태철학적으로 반성하고 소비를 생태적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한도 내로 절제하는 ‘모자람의 지혜’가 시민의 삶을 이끌어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소비가 절제된 이러한 시민이 생태시민이다.

생태교육은 생태계의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을 이념으로 지향하며, 학습자가 이런 이념을 체득함으로써 생태시민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이러한 생태교육은 자연과 인간, 인류공동체의 생태 평등을 구현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

생태교육은 학습자가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인간의 탐욕에 비추어 그릇되게 이해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데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생태계는 ‘모자람의 지혜’로 ‘무심의 공존’을 구현하는 체계이기 때문에 생태계 내에서 능력이 모자란 구성원들이 서로를 관조하며 공존한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도 생태교육이 학습자에게 생태계 지속성의 바탕인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을 깨닫게 하고 자연에 대해 인간의 능력을 절제하고 생태계의 존재를 무심하게 관조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무한 탐욕에 빠져 타자를 배려하지 않는 인류공동체는 구성원 간 불평등의 심화로 구성원들이 지속적으로 함께할 수 없는 사회가 될 것이다. 따라서 자기 절제와 타자 배려의 바탕인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을 이념으로 하는 생태교육은 단순히 자연과 인간의 공존만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함께 하는 생태 평등도 구현하는 교육이다.

 

정민걸

공주대 환경교육과 교수

월, 2020/01/20-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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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지의 비극”을 넘어

기후변화는 “공유지의 비극”으로 볼 수 있으며 커먼즈 운동은 21세기의 사회적, 생태적 시스템 붕괴에 대한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대응책을 제공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기후변화는 집단행동에서 비롯된 대표적 문제이며 현재의 정치제도는 사회적, 생태적 문제가 복합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개럿 하딘은 1968년에 쓴 유명한 논문「공유지의 비극」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들은 국가나 시장이 개입하지 않으면 공유지를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세이가 발표된 이후 50년 동안, 우리는 그의 주장과는 반대로 규제와 민영화가 어떻게 전세계 공유자원을 관리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 그것을 망쳐왔는지 지켜봤다.

신자유주의의 공공재 민영화는 공유지의 비극을 자연자원의 영역(공기, 물, 토양 등)으로부터 사회보장의 영역(보건, 교육 등)으로, 마침내 사회적 교류와 내적 삶의 영역(기업 소유의 디지털 기술, 소셜미디어, 광고의 확산을 통해)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기후변화는 공유자원의 민영화와 잘못된 운영의 결과이지, 하딘이 주장한 대로 민영화와 규제를 더 진전시키기 위한 구실은 될 수 없다. 하딘은 공유에 기반을 둔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못 이해한 것으로 비판 받아왔다. 공유지에 대한 그의 이해는 정치, 경제 제도에 널리 수용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경험적 관찰에 기초하는 대신, 개인을 강요당하지 않는 한 협력할 능력이 없는 자율적, 이성적, 이기적 존재로 바라보는 신고전주의적 관점의 이데올로기에 경도됐다.

엘리노어 오스트롬의 선구적인 작업은 하딘과는 대조적으로 공유자원이 협력을 장려하고 무임승차자들이 자원을 취하지 못하게 막도록 구상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의 저서 『공유자원의 관리』(1990)는 공유자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8가지 핵심 원칙을 제시했다. (역자주: 이 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명확한 경계 ②규칙의 부합성 ③집합적 선택장치 ④감시활동 ⑤점층적 제재 ⑥분쟁해결장치 ⑦규칙제정권리 ⑧최소한의 자치권 보장) 수십 년 간 오스트롬은 어떻게 공유자원이 자율 조직되고 자율 규제되는지를 경험적으로 보여주는 대규모 연구작업을 수행했다.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2009년 여성으로서는 처음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많은 주류 경제학자들에게는 놀랍게도, 오스트롬은 사람들이 시장 또는 국가의 개입이 아닌 효율적 의사소통, 신뢰, 호혜성을 바탕으로 공유자원을 자율 관리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의 업적 덕분에 공유자원은 여러 학문 분야에서 더욱 잘 이해되고 확립되었다.

 

자본주의 대안으로서의 커먼즈

지난 수십 년 동안 공유자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심오한 연구가 확산됐으며 이는 중요한 고려대상이다. 오스트롬은 제도경제학과 게임이론의 방법론을 채택했는데 이는 그의 작업이 주류학계에 호소력을 갖게 한 동시에 연구의 범위와 관련성에 제한을 가했다. 오스트롬이 채택한 방법론은 자기 이익의 최대화를 추구하는 합리적 개인을 전제했다. 개인에 대한 그의 방법론적 편견은 예컨대 마르크시즘 연구가 탐색했던 것과 같은 구조적, 정치적 해석을 폐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공유자원의 사유화, 즉 인클로저 운동은 자본주의의 출현과 시기적으로 일치했다. 역사적으로 인류에 의한 기후변화는 인류의 독특한 특성에 기인한 게 아니라 산업자본주의의 글로벌화 때문이다. 우리가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불리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지질학자들은 인류가 지질을 변화시키는 지구물리학적 세력으로 출현한 시기를 1800년 전후 산업혁명의 시작으로 잡는다. 이는 기후위기의 바탕에는 자본주의의 대안이 요구되는 정도의 시스템 위기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제이슨 무어는 인류세보다는 자본세(Capitalocene)라는 용어를 선호하는데, 이 말은 모든 인간이 기후변화에 똑 같은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훨씬 정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보다 직접적인 책임은 인간과 자원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있다.

다행히 자본주의 시스템의 대안은 이미 존재한다. 「복수우주(Pluriverse)의 공유지」(2015)라는 에세이에서 아투로 에스코바르는 공유화(commoning)의 실천이 글로벌 산업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세계 안에 여러 개의 세계들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커먼즈(역자주: 영어로는 모두 commons로 표기됐으나 이 글에서는 맥락에 따라 공유지, 공유자원, 커먼즈로 번역했다. 커먼즈는 현대 사회운동으로 물질적, 비물질적 공유자원은 물론 참여자들의 주체성 변화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원어 그대로 표기한다) 운동은 글로벌 시장 혹은 국민국가에 의한 가치의 포획과 맞서는 시스템적 대안을 위한 존재론적 복수성-Pluriverse-을 구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현재 공유화 실천의 정치적 잠재력을 간과하는데 이는 오늘날의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적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한 핵심적인 참조점으로 여전히 자본주의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J. K. 깁슨-그래함은 이런 경향을 “자본중심주의”라고 비판했다. 그와 동료들이 개발한 다양한 경제연구 프로그램은 자본주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 커먼즈에 기반한 경제의 수백 가지 사례를 보여준다. 이런 일련의 경험적 연구는 커먼즈 운동으로 자본주의의 대안들이 수렴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장, 국가, 그리고 커먼즈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여전히 지배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공유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목격하고 있다. 인류역사 전반에 걸쳐 공유화의 실천은 생산의 기본 방식이었고, 얼마나 많은 무급노동이 여성과 유색인종에 의해 수행됐는지를 고려할 때 사회적 재생산의 기본 방식 역시 대부분의 경우 공유화를 통해 이뤄졌다. 오늘날 현대 커먼즈 운동은 이런 공유지에 대한 전통적 지식과 새로운 도시, 디지털 커먼즈를 결합한다. 철학자 안드레아 베버는 심지어 공유화가 사실상 자연의 재생산에서도 기본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커먼즈로서의 실재」(2015)라는 논문에서 그는 “커먼즈는 실존적인 동시에 경제적이고 생태적인 관계의 존재론을 묘사한다. 공유화는 지구상의 생명체의 공존을 서로 연결되고 창조적인 과정, 생물권과 문화권의 활력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썼다.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활력 역시 언제나 공유화에 의존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인식된 적이 없다.

가까운 미래에는 이것이 단순히 계속될 수 없다. 세계 경제성장은 꾸준히 감소하며 우리는 경기침체의 시기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비어있는 세계에서나 제대로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착취논리는 더 이상 가득 찬 세계에서는 지속될 수 없다. 기후변화는 시장과 국가 시스템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하며 시스템의 일부는 향후 수십 년에 걸쳐 붕괴될 수도 있다. 공통의 자원을 공유하는 일은 불안정성, 갈등, 점증하는 자원부족으로 압박을 받는 점점 더워지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조건을 제공하는데 필수적이다.

최근 공유 기반 경제학의 폭발적 증가는 이런 시스템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했다. 공유에 기반한 시스템은 자원 처리량을 최대 80 %까지 줄이면서 번영을 유지할 수 있다(Rizos, X., & Piques, C. (2017). Peer to peer and the commons: A path towards transition. A matter, energy and thermodynamic perspective. Amsterdam, Netherlands: P2P Foundation). 미셀 보웬스와 호세 라모스는 공유 기반 시스템에 대한 다양한 분야의 실험이 포스트 자본주의 단계로의 전환을 위한 맹아 형태를 구성한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Bauwens, M., & Ramos, J. (2018). Re-imagining the left through an ecology of the commons: Towards a post-capitalist commons transition. Global Discourse. doi: 10.1080/23269995.2018.1461442). 공유화는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넘어선 제3의 공급부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력적인 시장과 국가 시스템은 공유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지원할 수 있다.

서울시는 이런 좋은 사례를 실천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2년부터 공유도시 정책을 시행했으며 불과 3년만에 서울시민은 연간 120억원, 서울시는 1조1800억원을 절감했다. 이 정책으로 1,280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29,800톤까지 줄었다. 여러 국제기구들이 이 정책의 성공을 인정하고 있지만, 서울시는 대중의 인식과 의지를 높이는 것이 시급한 당면과제라고 시인한다.

 

커먼즈를 위한 사고방식

패러다임 변화가 진정한 것이 되려면 사회적, 문화적 변화가 필요하다. 도넬라 메도스는 대규모 사회적 전환을 촉진하는 가장 전략적인 레버리지 포인트는 사고방식(mindset)의 차원에 있다고 주장한다.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데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현재 상황이 시사하는 것처럼 만약 커먼즈 운동이 시스템 위기의 제한된 조건에서의 자원이용에 대한 광범위한 대응이 되려면, 사람들의 사고방식, 사회적 규범, 행동양식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변화가 필요하다.

관계적 세계관과 존재론은 인류세에 인간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많은 관련이 있다. 인류세의 생명의 복잡성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질문할 뿐만 아니라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비인간 행위자들의 권위와 역할을 존중하는 윤리학의 개발을 요구한다. 내가 내부주체성(intra-subjectivity)이라고 부르는 윤리학을 따르는 공유참여자들이 늘어난다면, 단순한 P2P 경제학을 넘어 공유화를 확장함으로써 보살핌을 모든 존재로 확장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내부주체성의 윤리학은 자연이 우리로부터 분리된 요소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상호작용 안에서 공동 생산된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내부주체성의 윤리학은 관계가 외적으로 의존적일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의존적이며 내적 인식 차원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상호의존성 개념과 구별된다. 내부주체성은 어떻게 모든 존재가 서로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연결돼 있는지 설명한다. 우리가 스스로의 고통과 더 깊이 연결될수록 우리는 그것이 타자의 고통과 어떻게 구성적 관계를 갖는지 더 잘 알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확장으로서 타자에게 봉사하기 위해 더 많이 행동하게 된다.

내부주체성의 윤리학은 우리가 어떻게 자연-문화를 공동 생산하는지, 자연과 문화가 연결돼 있다는 생각의 전환이 어떻게 더 긍정적으로 사회-생태적 시스템 위기를 완화시키는지 보다 잘 이해하도록 해준다. 인류세에 각자 능력이 많이 다른 인간과 비인간 존재 모두에게로 확장되는 보살핌의 윤리학을 발전시키는 것은 주체성과 행위자라는 개념을 날카롭게 만든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의 삶이 문제인지, 우리가 어떻게 인간적 품위를 갖추고 지킬 수 있을지, 보다 생생하고 우호적인 세계를 향한 전환의 집단적 조건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지 등 복잡한 질문들의 해답을 찾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공유화는 우리의 비분리성, 상호의존성, 공존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물질적으로, 관계적으로 서로에게 연결되는 방식이다. 협동조합과 풀뿌리 조직을 결합한 잘 조직된 커먼즈는 투명성, 평등, 존중을 실천함으로써 다양한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신뢰를 만들고 책임을 실천하는 것은 성공적인 자기조직과 운영을 위한 필수 요소이다. 우분투의 서술처럼 “네가 있어서 내가 있다.”(역자주: 우분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건국이념으로 사람들간의 관계와 헌신에 중점을 둔 윤리사상이며, 그 자체로 “네가 있어서 내가 있다”는 뜻이다.) 초기불교의 보살사상에 응용한다면, 세속적이고 영적인 운명의 결합으로서 나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에서 생겨난다. 포용성의 확장은 다른 사람을 주변화하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의식은 물질적 인프라와 욕망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에 물질의 전환과 의식의 전환은 함께 이뤄진다.

거의 인식되지 않지만 공유화는 물질적, 사회영성적 교환-스스로 조직하고 서로를 책임지는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교환-이라는 형식으로서 이중의 원자가를 갖는다. 합리적인 자기이익을 정책화하고 규제함으로써 공동자원을 관리하는 정책입안자들과 달리, 공유참여자들은 커먼즈를 땅과 공동체에 대한 정서적 애착이라는 감각으로 운영한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 서부해안의 어부들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의무로부터 나온 “신사협약”을 따른다. 유사하게 오픈 소스 디지털 커먼즈 운동은 자발적인 교환이 교육과 리소스에 대한 공공의 접근을 어떻게 가능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오픈스트리트맵의 데이터와 정보를 공유하는 자원봉사자들의 글로벌 커뮤니티는 의료시설, 관공서, 공공시설에 대한 리소스와 정보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급한다. 이들은 합리적 자기이익으로부터 행동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타자에 대한 헌신의 감각에 따라 서로의 요구를 보살피는 것이다.

 

커먼즈의 생태계

개럿 하딘,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엘리노어 오스트롬도 현재 패러다임 안에서 공유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켰다. 물질적이든, 비물질적이든 공유를 대상물로 여기는 그들의 이해방식은 암묵적으로 실체의 존재론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서 커먼즈는 외부의 권위에 의해 주어진 공식적인 규범과 규칙의 존재로 인해 협력하는 합리적, 자율적 개인들에 의해 구상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개인, 시장, 국가에 대한 자유주의 이론을 경유한 커먼즈의 발전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생활을 운영하기 위해 부과된 일련의 과정과 체제로 커먼즈를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만약 커먼즈 운동이 글로벌 사회운동이 된다면 어떻게 커먼즈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사람들의 가치와 세계관을 재형성할 것인가. 공유화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공리적 차원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커먼즈 패러다임이 관계적 패러다임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로버트 울라노비치는 『세 번째 창』(2009)이라는 저서에서 근대성으로의 중요한 전환을 이룬 세 가지 세계관을 제시했다. 첫째는 기계론의 세계관으로 데카르트, 흄, 칸트, 베이컨, 특히 뉴턴과 같은 사상가들에 의해 형성됐다. 두 번째는 진화론의 세계관이며 카르노와 다윈에 의해 형성됐다. 두 번째 세계관은 첫 번째 세계관보다 진보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관계의 원동력으로서 협력의 중요성, 진화에서의 창발이론, 자연-문화의 동시생산과 같은 최근의 발견을 깎아 내린다. 세 번째 세계관인 관계적 혹은 생태적 세계관이야말로 커먼즈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가장 관련이 깊다. 아직 초기단계인 이 세계관은 생태적 혹은 과정적 형이상학이라는 특징이 있으며, 시스템을 상향과 하향의 과정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는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관계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볼 때 커먼즈는 탄생 이전에 미리 존재 지어진 대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관계와 실천에 의해 생성된다. 공유화에 대한 이런 합리적 관점은 차이들의 조화를 실현하는 데로 나아간다. 또한 “커먼즈의 생태계”를 상상하도록 만드는데 이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커먼즈 공동체들을 가로지르는 역동적 연대와 협력을 실현한다(Bauwens & Lamos, 2018). 이런 관점은 공유참여자들(commoners)이 서로의 번영을 위한 조건을 제공한다고 바라보며, 자유와 자기결정이 인간과 비인간 존재, 힘, 자원들로 이뤄진 공동체들과의 보다 풍부하고 정교하게 연결을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커먼즈는 삶의 내재적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서로 유쾌하게 어울려 사는 공동체들에 의해 활성화되는 창발적 과정으로서 나타난다. 삶의 가치를 높이는 일은 자기결정과 공동체의 연대 사이의 조화롭고 끝없이 복잡한 대조를 통해 실현된다.

마지막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대 커먼즈 운동의 가장 고무적인 측면은 그것이 생태적 방식의 사고, 존재, 행동을 선취하면서 관계적 세계관 안에서 공동체가 번영하기 위한 이미 검증된 수단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커먼즈 운동은 21세기의 시스템 위기에 대한 광범위한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집단적으로 커먼즈를 삶의 방식으로서 탐색해야 하며, 더 큰 문화적 전환의 한 부분으로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삶의 모습으로 상상해보는 일이 요구된다.

 

잭 월시

독일 포츠담 고등지속가능성연구원(IASS) 연구원

월, 2020/02/0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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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위원장은 북한 핵무기 및 장거리 미사일 프로그램 중단을 위한 협상에서 “책임 있는 어른으로서” 행동하고 있다. 어른으로서 협상을 되돌리는 동시에 동북아에서 북한이 할 수 있는 생산적 역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간 각자의 목표 달성을 위한 초반 작업에 상당한 시간과 공을 들인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다소 불공평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국가의 지도자는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다양한 힘과 그 힘을 실용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을 이해해야 하며, 주요 당사자들과 함께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국가의 “핵심” 이익을 수호해야 한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김정은 위원장은 분명 앞장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북한에 대한 논의는 당사자 그 누구보다 김 위원장에게 중요한 일이다. 또한 그는 가장 경험이 풍부한 조언자들을 등에 엎고 있는데, 이들은 하나의 행동 방침으로 단결되어 있다. 그 결과 직설적이고 명료한 언어로 북한의 목표와 필요를 표명하는 리더십이 탄생했고, 김 위원장이 이제 게임을 주도하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손에 쥔 자신들의 자산을 허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핵심 이익은 십중팔구 권력의 유지일 것이므로, 북한은 외부의 공격 시 의존할 수 있는 핵무기 및 미사일 대응책을 우선시할 것이며 정치경제적 안정성을 최대한 지키려 할 것이다. 이러한 핵심 이익은 김 위원장이 조선노동당 전체회의에서 선보인 일장연설과 지난 몇 주간 북한 고위급 관료들이 발표한 성명과도 일치한다. 나아가 2018년 3월, 김정은 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첫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강렬한 브로맨스와도 맞닿아 있다.

북한과 중국은 이후 네 차례의 정상회담을 더 가졌다. 중국은 북한 내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기댈 말한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되, 가급적 북한이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을 확대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하려는 듯하다. 북한이 불안이나 절망에 처하는 것은 중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북한에 양날의 검을 제시했다. 경제 및 안보 상 이익이 충분했다면, 한국의 경제적 개입과 인적자원의 투입도 용인될 수 있었을 것이다. 대규모 경제성장과 국제사회에서의 정통성을 얻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과 함께 평화협정을 근거로 외부 공격에 대한 안보가 적절히 확보되었다면, 미국이 주장한 개방적 사찰을 포함한 북한 핵무기 및 ICBM프로그램의 점진적 해체 역시 정당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김 위원장도 한국과 미국과 함께 그 가능성을 타진해보려는 듯 보였다.

마침내 각자의 패가 드러난 하노이 회담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트럼프와 그의 참모진이 불협화음을 낸 그 순간, 그 처참하고 무례했던 순간, 근본적으로 나약하고 무기력한 미국의 입장이 분명해졌다. 미국 최고 당국자들이 계속 입장을 거짓으로 둘러대 왔다는 사실을 통해 미국의 입장이 얼마나 현실성 없는 것인지 재확인된 셈이다. 이렇게 속이 텅 빈 미국의 입장은 이미 회담 2주 전부터 스티븐 비건(Stephen Beigun)대북정책 특별대표 그리고 앤디 김(Andy Kim) 전 CIA 코리아미션센터장에 의해 예고된 바였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이 미국의 이익 보호를 명분으로 언제든 제재를재추진할 수 있는 “스냅 백 (snap-back)”방식 쪽으로 기울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빠르게 회담장을 빠져나가려 하자 최선희 조선 외무성 제1부상은 영변의 “모든” 시설이 북한의 핵시설 해체에 포함될 것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이후 보도에 따르면 폼페이오(Pompeo) 장관과 볼튼 (Bolton) 전 보좌관이 함께 그랬는지, 아니면 볼튼 전 보좌관이 단독으로 그랬는지는 불확실하나, 이들은 치열한 협상이 이뤄지기도 전에 바로 북한과 합의하면 트럼프가 “나약해” 보일 수 있다며 트럼프를 만류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은 하노이 회담 후에 개인적으로 트럼프대통령과 전략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의 측근들은 어떨지 몰라도 트럼프는 조기 합의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이 내린 결론, 즉 트럼프를 제외한 그 누구도 북한이 수용할 만한 거래는 지지하지 않는다는 결론 역시 무시할 수 없을 듯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중단, 제한, 해체하는 동시에 이를 “힘”을 보여주고자 하는 헛된 욕구로 대체하는 것이 곧 자신의 최대 이익이라고 착각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는 유엔의 주요 제재를 경감하는 것이었으나, 그는 이를 간과했다. 게다가 그는 외교와 결합된 가상의 경제전쟁에 사로잡혔다. 이렇게 속이 뻔히 보이는 미국의 태도는 조지 부시(George W. Bush) 정권 이래 국가 정책처럼 자리를 잡았다.

하노이 회담의 실패는 문 대통령에게도 경고 사인이었다. 그는 김정은 위원장과의 첫 정상회담을 능숙하게 마무리했다. 이후 김 위원장의 초대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했고, 트럼프 대통령이 극적으로 화답하면서 이들 사이에 마치 무언가 진행되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첫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에는 오랜 긴장을 풀고 새로운 유대를 맺자는 내용이 담겼고, 이는 실로 대단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화염과 분노”를 언급하지 않고, “코피 터뜨리기”위협을 거둔 것만으로도 진정 무언가를 성취한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위협은 소용이 없었을 뿐더러, 트럼프 대통령은 물에 빠진 사람이 구명조끼를 부여잡듯 김 위원장의 초대장을 움켜잡았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줄곧, 트럼프와 참모진은 미국과 북한 모두가 수용할 만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한국은 계속 트럼프 정권에 의지했다. 하노이 회담 후, 한국에게는 상황의 재평가가 절실했다. 그러나 재평가가 이루어졌나? 물론 한국 정부와 정계 안팎에서는 엄청난 비용을 들이지 않고 핵심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일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하노이에서 중단된 잠정적 합의의 제안자이자 리더로서 한미동맹 안에서 이를 이끌어야 한다는 현실인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 달에는 트럼프 대통령 탄핵안이 하원을 통과했다. 이제 트럼프 대통령은 상원의 탄핵 심판을 기다리게 됐고, 그 자신은 물론 그 측근과 지지자들 역시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2월 5일부로 탄핵안은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이러한 미국 내 상황이 한국의 정책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지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지만,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 같지는 않다. 작년에 미국, 북한, 중국, 그리고 일본까지 문재인 대통령을 푸대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문 대통령이 한반도의 평화 및 경제발전이라는 한국의 핵심 이익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 모두 증발해버린 것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드라마 같은 대북 협상 속에서 문대통령이 가장 유연한 위치에 있다. 그는 한국의 주요 이익을 구축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풍부한 권력의 원천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한반도를 버릴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다른 미 동맹국의 반복적인 괴롭힘이 한국을 불안하고 움츠러들게 하는 듯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문 대통령이 민주주의적 정통성, 절충과 관리의 전문성 측면에서 트럼프 대통령보다 훨씬 앞서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게임의 결과는 외국의 어떠한 당사자보다 (김정은 다음으로) 문재인 대통령에게 중요하다. 다행히 문 대통령에게는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짊어진 빈곤, 고립, 취약함이 없다. 누가 동북아시아의 어른이 될 수 있는가, 또는 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스테판 코스텔로 (Stephen Costello)

미국 워싱턴DC에 위치한 조지워싱턴대학교(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서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0년대에는 아태재단(Kim Dae Jung Peace Foundation) 워싱턴 지부장을 역임했으며, 1999년부터 2004년까지 대서양위원회(Atlantic Council)에서 한국 프로그램을 지휘했다. 현재는 동북아시아의 안보, 발전, 정치에 중점을 둔 정책 이니셔티브인 AsiaEast.Org를 이끌고 있다.

금, 2020/02/07-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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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에서 강도”(intensity)라는 용어가 맡는 역할에 가장 상응하는 용어는 름다움의 힘이다. … 물론 여기서 아름다움은 자연의 미적 성질이나 예술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보는 사람의 경험이 가지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삼고 있는 것은 경험이 갖는 아름다움 그 자체다. 그 주요성분은 감각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다. 비록 감각이 감정의 깊이에 명백하게 관여하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 … 화이트헤드는 아름다움을 어떤 경험의 계기에서 주체성이 갖는 조화의 완전함이라고 이해한다. 그것의 힘은 두 가지 요소, 즉 구성요소의 다양성과 그러한 구성요소를 개별적으로 느끼면서 얻는 강도를 조합하는 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강도란 여전히 가치에 기여하는 것이지만, 여러 구성요소 중 하나로서 기여하는 것이다. – 존 캅, 화이트헤드의 가치론(https://www.openhorizons.org/whiteheads-theory-of-value.html)

어니스트 캘런벡의 1975년 소설 <에코토피아>의 영화 이미지컷. 미국 샌프란시스코 일대를 배경으로 에코토피아라는 이상향의 생활을 그렸다.

 

개요와 소개

“아름다움”은 생태문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여기서 아름다움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다: (1)일상의 직접성에서 감정적으로 느낀 경험의 조화와 강도, (2)그러한 느낌을 환기시키는 경험의 객체, 즉 타인, 다른 형태의 생명, 인간 관계, 자연 세계를 뜻한다. 아름다움이란 반드시 예쁨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삶의 예술적 측면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관계적 관점에서 볼 때 아름다움은 삶 자체의 내면에서 발현하는 활력이자 번영이다. 인간은 삶의 모든 순간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이는 다른 동물도 그렇다. 아름다움은 삶을 “삶”답게 만드는 요소이다.

아름다움의 경험에 수반되는 마음과 정신의 성질은 인간의 정신적 알파벳을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는 폭넓은 감정들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주목(attention), 연결(connection), 헌신(devotion), 열광(enthusiasm), 신념(faith), 용서(forgiveness), 감사(gratitude), 관용(generosity), 환대(hospitality), 상상(imagination), 정의(justice), 친절(kindness), 경청(listening), 사랑(love), 의미(meaning), 양육(nurturance), 개방성(openness), 재미(playfulness), 호기심(questing), 삶에 대한 열정(zest for life), 그리고 신비에 대한 감각 등이다. (번역자주: 필자는 아름다움과 관련된 감정의 요소가 갖는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해 알파벳 순서로 단어를 나열했다.) 생태문명은 교육과 예술, 건강한 가정 생활과 시민으로서의 삶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이런 감정적 성질들을 느끼고 알고 실제 그렇게 살도록 돕는다. 또한 이를 통해 타인이나 보다 큰 생명공동체에 존중과 관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 생태문명은 아주 이상적으로는 아름다움을 위한 온실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움의 다섯 가지 형식은 생태문명에서 특히 중요하다: (1)자연적 아름다움 (언덕과 강, 나무와 별), (2)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 (예술, 음악, 그림과 음악의 풍경), (3)사회적 아름다움 (사람들, 그리고 인간세계를 넘어선 사회로부터 얻는 관계의 느낌), (4)도덕적 아름다움 (연민, 친절, 정의), (5)전인적 아름다움 (깊이와 넓이를 동반하는 ‘폭넓은’ 영혼의 성장). 이러한 것들은 모두 ‘아름다움의 생태학’의 구성요소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생태문명이라고 하는 건축물을 세우고 유지하게 만드는 벽돌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인가!

이런 공동체가 “아름다운” 이유는 창조적이고 연민적이고 참여적이고 다양하고 포용적이고 동물에게 자비롭고 지구에 좋고 정신적으로 만족스러우면서 누구도 뒤처지도록 방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고등교육의 근본적인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이런 공동체를 상상하고 발전시키고 실현할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을 갖추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생태문명이라는 “전공”의 목적이다. 이 전공의 예비 과정은 “아름다움의 생태학: 세계 최고의 희망으로서의 생태문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이 이러한 다양한 아이디어에 대한 더욱 심화된 고찰을 이끌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글은 네 부분으로 나눠진다: (1)왜 아름다움이며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2)아름다운 공동체, (3)대학의 생태문명 전공에 아름다움을 도입하기, (4) 아름다움의 생태학.

 

1. 왜 아름다움이며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수 년 전에 맥신 홍 킹스톤(湯婷婷)이 우리 대학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명예교수인 그녀는 재능 있는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중국계 미국인이 미국에서 겪는 경험에 대한 여러 편의 논픽션 저자이기도 하다.

킹스톤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탄생일에 강연을 했는데, 그녀는 킹의 연민적 공동체에 대한 구상을 자신의 참조틀로 사용하였다. 알다시피 킹은 연민적 공동체를 “사랑의 공동체”(beloved community)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서로를 걱정하며 보살피는, 그러면서 누구도 뒤처지도록 방치하지 않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문구였다. 사랑의 공동체는 연민적인 공동체이며 애정 어린 공동체이다.

킹스톤은 킹의 문구에 기대어 예술이 어떻게 그러한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배려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는 킹의 문구를 인용할 때마다 실수로 “사랑의 공동체” 대신 “아름다운 공동체”(beautiful community)라고 말하곤 했다. 그 때마다 그녀와 청중들은 매번 웃음을 터트렸다. 어떤 지점에서 킹스톤은 결국 고쳐 말하기를 그만두고 강연 내내 예술과 정의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계속해서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나를 포함한 청중들은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문구에 익숙해졌고 또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그리고 킹스톤에게 사랑의 공동체는 사실상 아름다운 공동체였던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름다움 자체처럼 본질적으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러한 언어가 필요하다. 우리 자신을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시적인 언어 말이다. 이 점은 뛰어난 과정철학자인 샌드라 루버스키가 쓴 「아름다움을 말하라(Speak the Name of Beauty)」라는 짧지만 우아한 글을 떠올리게 만든다.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과 아름다움 사이의 연결을 분명히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자연의 질에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중요하다. … 자연 세계는 인간의 경험을 위한 미결정적인 배경이나 인간이 가치를 매기는 마술봉을 휘두른 다음에야 가치를 얻는 중립적 캔버스가 아니다. 자연 세계는 각자 가치를 가지는 생명들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경이로운 풍성함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삶을 격상시키는 만드는 관계들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가치다.

이처럼 자연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 그리고 삶을 격상시키는 아름다움이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킹스톤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녀의 강연이 끝나갈 즈음에 한 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지구와 다른 생명체를 어떻게 취급하게 될까요? 그들은 올바른 대접을 받게 될까요?” 그녀의 대답은 긍정이었다. 킹스톤은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생명의 그물의 아름다움에 대해, 인간과 다른 생명체에 대해 수용적일 것입니다. 그것은 생태 공동체가 될 거예요.”

그 순간 우리는 단순히 인간에 기반을 둔 공동체가 아니라 지구에 기반을 둔 공동체로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개념을 확장시켜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자신은 대학생들이 그러한 공동체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공부할 수 있는 “전공” 혹은 전문분야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2. 아름다운 공동체

세계 어딘가의 대학에 생태문명 전공이 개설되어 있다고 상상해보라. 나아가 그 전공이 캠퍼스 내에서 가장 인기 있다고 상상해보라. 학생들은 그 전공이 실천적이면서 희망적이고 전일적이면서 창조적이기에 매력을 느낀다. 생태문명 전공의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활기차고 삶을 격상시키는 공동체를 지역 단위로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기술과 능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킹스톤의 말을 빌리자면, 아름다운 공동체 말이다.

이런 공동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그런 공동체의 아홉 가지 중요한 특성 혹은 성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창조적이다.

(2)연민적이다.

(3)참여적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참여한다.)

(4)다양하다. (공동체가 종교적, 문화적인 다양성을 환영한다.)

(5)경제적으로 포용적이다. (기본적인 필요가 충족되며 경제적 격차가 크지 않다.)

(6)동물에게 자비롭다.

(7)지구에 좋다. (오염을 수용하고 자원을 공급하는 한계 내에서 살며 다른 생명체의 서식지를 남겨둔다.)

(8)정신적으로 만족스럽다.

(9)누구도 뒤쳐지지 않는다.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보살핀다.)

이러한 공동체의 “영성”은 감성적 지성과 일상에서 구현된 지혜가 조합된 것으로, 종교를 갖고 자신의 종교로부터 “영성”을 찾아내는 사람들에게도, 영성에는 관심이 있으나 특정 종교에 연계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수용 가능한 것이다. 영성은 인간성의 영적 알파벳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서로 관련된 형식의 마음과 정신의 광범위한 특성을 포함한다: 주목(attention), 연민(compassion), 연결(connections), 친절(kindness), 경청(listening), 상상(imagination), 재미(playfulness), 호기심(wonder), 침묵(silence), 정의(justice), 숭배(reverence), 삶에 대한 열정(zest for life). (번역자주: 여기서도 다시 알파벳 순으로 단어를 나열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내가 “전인적 아름다움”이라 부르는 것의 부분들이다.

물론 이러한 공동체는 바람직한 이상이다. 지구상의 어떤 공동체도 이러한 특성들을 완전히 구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아홉 가지 이상을 상당한 정도로 실현한 현존하는 공동체들은 사실상 생태문명이라고 하는 건축물을 구축하는 벽돌들이다. 생태문명 전공은 학생들이 이러한 공동체를 세우고 발전시키도록 돕는 걸 목적으로 한다. 그 과정에는 긍정심리학, 도시계획, 유기농업, 사회정의, 영성, 종교 간 대화, 교육, 건강 관리, 환경경제학, 진화생물학, 생태학 실습 등의 과목이 포함된다. 생태문명 전공은 또한 학생들이 스스로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실행하며 평가함으로써 생태문명의 역동성을 구현하는 실천적이며 능동적인 배움의 요소가 요구된다.

 

3. 대학의 생태문명 전공에 아름다움을 도입하기

생태문명 전공을 위한 예비 과정은 “아름다움의 생태학: 세계 최고의 희망으로서의 생태문명”이라 부른다. 이 과목은 학생들에게 생태문명의 철학적 기반이 될 수 있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전반적인 사상,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이상인 “아름다움의 힘”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생각을 가르친다.

처음에 학생들은 교과목의 제목에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있는 것을 듣고 놀랄 것이다. 기계론적 세계관과 개별적인 주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서양철학의 편협한 척도에 영향을 받은 그들은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사적인 감각, 개인의 취향 혹은 예술에만 한정된 어떤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움은 공공의 선도 아니며 “실제 세계”에 속하는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교수들은 이 과목에서 아름다움이 사실은 공공의 선이라는 점을 설명한다. 아름다움은 단순한 예쁨도 아니며 예술 작품에서 발견되는 성질에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아름다움은 화이트헤드가 “아름다움의 힘”을 통해 말하고자 한 어떤 것이다. 아름다움은 조화와 강도의 조합이며 경험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드는 활력이다. 아름다움은 인간과 여타의 생명체들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힘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인간, 그리고 인간을 넘어선 것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활력과 살아있음(강도)의 감각을 조합한다.

교수들이 강조하듯 아름다움을 이렇게 이해할 때 그것은 우리를 이끄는 이상이자 희망의 원천으로서 생태문명과 그것의 출현을 위한 일차적인 가치가 된다. 학생들은 곧바로 이 점을 이해하게 된다. 그들은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생태문명이 파국적인 미래에 대한 공포나 현재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분노로부터 출현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이해한다. 생태문명은 좀 더 창조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살아갈 수 있다는 감각으로부터 등장해야 한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것보다 좀더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는 감각 말이다. 아름다움은 희망을 제공한다.

다음으로 학생들은 몇몇 화이트헤드의 관념을 배우며 그 관념들을 통해 교수들이 “아름다움의 우주론”이라 부르는 것을 형성하게 된다. 이 관념들은 다음과 같다.

(1)인간은 생명의 그물의 일부다: 인간이 거대한 생명의 그물의 일부이지 그 바깥에 있지 않다는 관념.

(2)모든 것은 상호 생성의 과정에 있다: 전체로서의 그물, 그리고 그물의 각 매듭은 언제나 과정 혹은 되어감에 있다는 관념.

(3)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내재적 가치가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각자의 권리로서 가치를 지니며 존중 받아 마땅하다는 관념.

(4)모든 곳에 살아있음의 활력과 같은 것이 있다: 땅의 가장 깊은 곳부터 하늘의 가장 높은 곳까지 “생명” 혹은 “살아있음”과 같은 것이 있다는 관념.

(5)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아름다움을 향한 에로스에 의해서 내면적인 활력을 얻는다: 살아있는 것이라면, 그 안에 만족 혹은 삶의 충족을 향한 에로스가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경험의 풍부함 혹은 “아름다움”을 지향한다는 관념.

(6)전체로서의 우주 또한 아름다움을 향한 에로스에 의해 움직인다: 우주 안에서 모든 것이 살아가고 움직이고 자신의 존재를 갖는 동시에 전체로서의 우주 자체가 어떤 종류의 생명이며 우주 역시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향한 에로스를 갖고 있다는 관념.

이러한 관념들은 학생들이 지식을 얻기 위해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는 식의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이런 관념들은 고려해볼 가치가 있는 것으로, 또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질 때 아름다움의 생태학을 위한 우주론적 배경을 형성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여기서 다른 철학적, 문화적 전통, 아마도 특히 동아시아 전통들에서 유사한 관념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도 강조된다.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전통으로부터 비슷한 관념을 찾고 공유하도록 권장된다.

 

4. 아름다움의 생태학

이렇게 학생들은 아름다움의 생태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입문한다. 생태문명을 건설하고 유지하려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종류의 아름다움들이 있다. 자연적 아름다움, 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 관계적 아름다움, 도덕적 아름다움, 전인적 아름다움이 그것이다. 이 다섯 가지는 몇몇 중요한 점에서 구분되기는 하지만, 서로 통합되어 생태문명의 아름다움이 된다. 아름다움의 생태학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자연적 아름다움: 언덕, 강, 나무, 별, 동물, 식물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서로 연결돼 존재한다.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삶에서 외경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과학연구가 증명하듯 인간의 행복에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샌드라 루버스키의 말의 떠올려라: “자연 세계는 인간의 경험을 위한 미결정적인 배경이나 인간이 가치를 매기는 마술봉을 휘두른 다음에야 가치를 얻는 중립적 캔버스가 아니다. 자연 세계는 각자 가치를 가지는 생명들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경이로운 풍성함이다.”

(2)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 인간이 설계한 다양한 형식의 아름다움. 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은 도구와 가구, 건물과 도시경관 같은 유형의 생산물을 포함하며 상징과 로고스, 이야기와 시, 춤과 음악 또한 포함한다. 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참여하거나 그것과 협동한다. 그것은 거대한 생명의 그물과 함께하는 공동창조의 행위이다.

(3)관계적 혹은 사회적 아름다움: 사람들이 우정과 가정생활, 그리고 인간을 넘어선 세계와 맺는 만족스러운 관계에서 오는 아름다움. 이런 아름다움은 예를 들어 유교경전, 성경, 코란의 세계관에서 찾을 수 있는 긍정적 연결의 영성에도 내포돼 있다.

(4)도덕적 아름다움: 연민, 봉사, 정의를 추구하는 행위에서 오는 아름다움. 수필가 이푸 투안은 이를 이렇게서술했다: “사심 없는 기품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관용의 행위는 용기 있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아름다움의 사례이다. 진실된 겸손도 이타적인 사랑과 마찬가지로 예시가 될 수 있겠다. 몇몇 사람이 신체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듯이 몇몇 사람은 도덕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도덕적 아름다움은 타고 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고무하는 사회에서는 쉽게 등장하고 번창한다.”

(5)전인적 아름다움: “통합적인 되어감”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지혜와 연민, 창조성을 키우는 전인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혹은 되고자 추구하는 아름다움. 아일랜드의 시인 존 오도노휴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아름다움은 멋진 사랑스러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보다 통합적인 것, 실체가 있는 되어감, 원만함의 출현, 은혜로움과 우아함의 위대한 감각, 깊이에 대한 깊은 감각, 그리고 만개하는 삶에 대한 풍성한 기억으로의 돌아감에 관한 것이다.”

예비과정의 끝에서 학생들은 아름다움이란 관념이 이처럼 생태적인 문맥에서 이해될 때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생태문명을 실현시키고자 활기차게 노력하기 위한 촉매로 작용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학생들은 또한 지구에 기반을 둔 사랑의 공동체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공동체이며, 아름다움이 갖는 매력은 삶의 활력과 격상을 위한 영감을 제공한다는 맥신 홍 킹스톤의 생각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제이 맥다니엘

미 헨드릭스대 철학과 교수, 웹사이트 오픈 호라이즌즈 운영자

월, 2020/02/10-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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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을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과제 가운데 하나는 인간을 ‘재발명’하는 일이다. 만물의 영장이자 자연의 정복자로 군림해온 인간이 지구생태계의 모든 존재와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뿌리깊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간의 위치를 다시 규정해야 한다. 문화사학자이자 환경사상가인 토마스 베리는 이를 인간의 ‘재발명’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종의 차원에서, 비판적 숙고를 통해, 공동체의 생명체계를 고려하여,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야기와 꿈을 공유하는 경험을 수단으로” 실천해야 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Thomas Berry, The Great Work, New York: Bell Tower, 1999, p.159)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의 키케로는 “인간다움”을 뜻하는 라틴어 “후마니타스”로부터 인문학(humanities)을 구상했다. 이는 세계 만물의 공통된 본질인 아르케를 탐구한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이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거리를 두고 인간에 집중한 결과였다. 이 때부터 인문학은 과학과 거리를 두었으며 르네상스 이후에는 인간중심주의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탐구는 우주와 자연의 질서에 대한 이해와 분리될 수 없다. 인문학의 목표인 “인간다움”이 갖는 의미는 인간과 다른 존재의 연관 속에서 상대적으로 규정된다. 때문에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좁은 정의를 벗어나 상호 연결된 존재로서의 진정한 인간다움을 탐구해야 한다. 근대화 이후 시민계급이 갖춰야 할 교양으로 자리매김된 인문학(liberal arts)이 점차 분과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을 중심에 둔 통섭의 학문으로 변신하는 이유다.

환경인문학(environmental humanities)은 전지구적 생태위기에 대한 인문학의 응답으로, 2000년대 이후 환경철학, 환경사, 생태비평, 문화·생물 인류학, 문화지리학, 정치생태학,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연구, 젠더연구, 종교학 등 다양한 인문학과들 사이의 연결을 추구하는 지적 프레임워크로서 등장했다.

환경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점차 고조되는 생태위기와 생태적 인식의 중요성 때문이다. 기후위기와 자본주의위기라는 두 가지 문제는 과학기술이나 정책 영역의 한계를 넘어섰다. 1992년 UN 리우정상회의 이후 한 세대가 지났지만 기술, 경제학, 정책에 의존한 해결책은 효과를 내지 못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은 어려우며 이 부분에서 인문학은 환경문제에 개입하고 대중의 의식을 바꿔놓을 수 있다.

 

환경인문학의 정의

19세기 후반 생물학의 하위분야로 출발한 생태학이 학제적 영역으로서의 환경연구로 확장된 것은 1960년대부터이지만 대부분 자연과학의 관련 전공, 혹은 자연과학과 산업, 정책, 제도를 다루는 사회과학과의 결합이 초점이었고, 인문학은 그런 학제적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았다. 물론 인문학의 여러 분과학문들은 1970년대 이후 각자 이론적 프레임과의 연관성에 따라 생태적 관점을 점차 도입했다. 환경철학이 1970년대에 나왔고, 환경사는 1980년대부터 역사학의 하위분야로서 자리잡았다. 생태비평 역시 1990년대 초반 제도화됐으며, 학제적 성격이 강한 인류학이나 지리학은 더 쉽게 생태적 사고와 결합했다. 이는 환경에 대한 관심이나 환경적 사고를 소재로 끌어들여 분과학문의 틀 안에서 연구하는 방식이었다.

환경철학과 환경사, 생태비평의 발전은 이전까지 생태학적 사고를 지배했던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라는 이분법을 해체했다. 자연, 야생, 생태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담론적 구성물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원초적 자연”을 전제로 한 “보호” “보존” “복원” 등의 개념에 의문이 제기됐고, 환경 담론을 분석하는 것이 인문학계 환경연구의 핵심이 됐다. 자연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자연과의 연속선상에서 인간을 파악함으로써 독립적·자율적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는 근대적 인간관을 극복, 보완하기에 이르렀다. 18세기 계몽주의적 사고가 이성적·합리적 인간성을 중심으로 지식체계를 재편한 것처럼, 제2의 계몽주의에 비견되는 생태적 사고는 인간과 자연이 연결된 생명관을 중심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할 필요에 직면했다. 이 과정에서 인문학 상호간, 인문학과 자연과학 간의 소통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생태적 인문학”을 처음 제안한 호주의 철학자 발 플럼우드는 두 가지 이론적 과제로 (1)인간을 환경 안에 재위치 짓는 것, (2)비인간을 문화적이고 윤리적인 영역 안에 재위치 짓는 것을 들었다. (Val Plumwood, Environmental Culture: The Ecological Crisis of Reason, Routledge, 2002) 즉 인간을 자연과 분리시켜 정신성을 가진 우월한 지위에 올려놓고 의미, 가치, 윤리가 없는 물리적 자연세계 안에서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조종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연-문화 이분법을 극복하자는 뜻이다. 이는 생태위기를 가져온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인간을 비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게 하며, 하나의 연결된 세계로서 지구시스템의 동력과 변화를 고려하면서 인간적 삶의 방식과 사회구조를 재편해야 한다는 필연성으로 이어진다.

 

이론적 과제

(1)인간을 환경 안에 재위치 짓는 것

인문학에서 환경철학, 환경사, 생태비평의 역할은 인간을 환경 안에 재위치 짓는 것이었다. 심층생태학(Deep Ecology)은 생태계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자연을 인간적 측면에서 평가하고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원 또는 물질로 파악하는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을 들었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을 하나의 전체로 바라보아야 하고, 인간은 최소한의 생존적 필요를 제외하고는 생명의 풍부함과 다양성이라는 근본적 가치를 해칠 권리가 없다고 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과도한 간섭을 줄이기 위해 경제, 기술, 이데올로기를 고려한 정책 변화가 필요하며 생태적 세계관으로 전환하기 위해 선불교, 노장사상, 기독교 영성주의가 고려돼야 한다. 노르웨이 철학자 안 네스와 미국의 환경운동가 조지 세션스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8개의 강령을 발표했다.

환경사의 개척자인 미국 사학자 도널드 워스터는 『Nature’s Economy: A History of Ecological Ideas』(1977, 한국어 번역서 『생태학, 그 열림과 닫힘의 역사』, 문순홍∙강헌 옮김, 아카넷, 2002)에서 18세기 이후 서구생태사상에 나타난 자연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라는 두 가지 흐름을 “목가주의적 입장”과 “제국주의적 입장”으로 명명하고 양자의 긴장관계를 부각시켰다. 목가주의적 입장은 자연의 내적 가치와 인간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인정한다. 고대 및 중세의 이교도적 물활론에 기원을 둔 이 관점은 다른 유기체와의 평화로운 상호공존을 복원하기 위해 검소한 생활을 지지하며 18세기 낭만주의에서 부활했다. 기독교 전통에서 기원한 제국주의적 입장은 인간에 의한 자원의 조작성을 강조하며 이성의 엄밀한 사용을 통해 인간의 자연지배를 확립했다. 생태학의 역사는 이런 두 가지 흐름의 경합과 갈등으로 구성됐으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다양한 시대적, 문화사적 연관 속에서 끊임없이 변모하는 역동적 과정이다.

생태비평의 경우, 생태적 관점을 문학연구의 중요한 도구로 수용하면서 주제 수준에서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생태문제를 다룬 새로운 정전을 발굴했고, 전통적 고전 텍스트를 생태적으로 재해석했으며, 제국주의가 식민지의 사람뿐 아니라 생태를 어떻게 착취했는지 분석했다. 문학텍스트에서 식물, 동물, 사물, 풍경, 날씨 등 비인간 작용자의 역할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이런 과정에서 순수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판타지, SF, 에세이, 여행기, 극영화, 애니메이션, 민속지까지 텍스트의 범위가 확대됐다.

생태비평은 문학사 전체를 생태적 관점에서 재구성했으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주목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을 교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장소성의 회복은 생태비평의 중요한 기여로 평가 받는다. 근대 이전의 설화나 서사문학, 비극 혹은 지방색문학에서 물리적 환경은 결코 장식적 배경이 아니었다. 자연환경과 대지는 나날의 삶을 방향 지으며 인간의 내밀한 정서와 상상력을 빚어내는 근원적 힘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인물의 행동과 사건이 펼쳐지는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별로 주목 받지 못했던 자연환경은 생태비평의 발전과 함께 문학적 상상력의 중요한 원동력으로 복권됐다.

 

(2)비인간을 문화적이고 윤리적인 영역 안에 재위치 짓는 것

최신 과학적 연구성과를 수용한 포스트휴머니즘은 비인간 존재가 어떻게 인간의 역사에 간섭하는지 드러낸다. 포스트휴머니즘은 같은 용어로 묶이기 어려운 다양한 이론을 포함하고 있으나 공통적으로 다른 종, 기계, 물건, 시스템과의 관련 속에서 자유적 인간 주체를 탈중심화하는 운동이다. 포스트휴머니즘 이론의 지형은 다채롭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브루노 라투어)은 물질적·기호적 방식으로 서로에게 관여하는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비생물 행위자로 구성된 이질적 사회네트워크에 강조점이 있다. 시스템 이론(니콜라스 루먼)은 개인이 사회의 부분이라는 관념을 벗어나 양자를 서로의 환경에서 작용하는 시스템으로 바라본다. 신유물론(스테이시 알라이모)은 생태적 네트워크에서 인간 주체의 구성과 물질적 흐름, 즉 인간의 마음과 육체를 “트랜스코포리얼 벡터”로 정의한다. 신물활론(제인 베냇)은 환경주의자의 방식과는 다르게 물질의 살아있는 행위성을 탐구한다. 사물이론(빌 브라운)은 사물의 외양이 인간과의 관계 및 중요성에 따라 구성됨을 밝히는 반면, 물체지향존재론(그래험 허먼)은 상호관계성에서 물체를 해방시켜 그 자체의 견지에서 탐구하면서 물체가 궁극적으로 인간지식으로부터 분리돼 있다고 주장한다. 동물연구(자크 데리다, 조르지오 아감벤, 다나 해러웨이)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정치적 함의로부터 찾는다. 복수종 민속지(안나 칭)는 인간에게만 한정되지 않는 여러 종류의 살아있는 주체들과 인간의 얽힘의 효과에 관심을 가지며, 윤리적 민속지 혹은 민속적 윤리학(도미니크 레스텔)은 의미와 관심, 영향을 공유하는 혼성 인간-동물 공동체를 탐험하기 위해 사회과학과 동물과학의 방법론을 활용한다.

이런 학문들은 서로 공통의 기반이 없거나 서로를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그럼에도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라벨 아래 분류되는 넓은 범위의 이론들은 인간 존재와 의도를 포함해 네트워크의 한 행위자로서 우리를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다. 인간이 동물, 식물, 자연 등 비인간주체와 독립해 존재하며 자율적으로 사고한다는 계몽주의의 자유적 인간주체의 중심성은 급격히 해체된다.

 

인류세와 인문학

크뢰첸과 스톨머가 제안한 인류세(Anthropocene)라는 개념(Crutzen and Stoermer, The “Anthropocene”, Global Change Newsletter 41, 2000, p.17-18)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지구의 물리적 변화를 일으킬 만큼 중대하다는 인식을 급속히 확산시킴으로써 많은 논쟁과 함께 학문간 융합의 가능성을 낳았다. 인류세는 1만년 전 시작된 홀로세(현세)에서 인류가 지구환경에 큰 영향을 미친 시기를 분리하자는 주장이다. 크뢰첸 등은 산업혁명이 시작된 18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제안한 반면, 루디먼은 신석기시대의 농업혁명 이후 대기 중 온실가스가 증가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William Ruddiman, The Anthropocene, Annual Review of Earth and Planetary Sciences, Vol 41: 45-68, 2013) 핵실험 성공 이후 방사성 물질의 확산, 플라스틱의 발명,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공해 등을 근거로 1950년대 이후를 기점으로 삼기도 한다.

인류세 논쟁은 인류세라는 규정이 적절한 지에 대한 지질학계의 대립에서 시작됐지만, 인류세가 또 다른 형태의 인간중심주의라는 반론을 거쳐 인간의 부정적 역할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인간의 중심적 역할과 이를 위한 사고와 가치의 재정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향으로 확산됐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은 결과적으로 다양한 텍스트를 읽고 분석하는데 장점을 가진 인문학이 환경담론에 개입하고 현실의 변화를 견인하는 가능성을 높였다.

환경담론으로서 인류세는 자원환경의 복원과 유지에 인간의 개입을 제한했던 기존 사고와 달리, 자연과학,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통합적 관점을 통해 자연-인간의 상호성을 바탕으로 인간문명이 환경문제에 긍정적으로 개입할 수 있고, 일반대중이 참여하는 공동체 문화가 필요하다는 함의를 내포한다. 인류세는 지구를 상호의존적인 하나의 복잡한 사회-생태적 시스템으로 본다. 즉, 전지구적으로 연결된 사회의 경제, 인구, 생태, 정치, 상징적·문화적 측면의 분석을 모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한다. 지구의 모든 사람과 사회를 포함하기 때문에 분과를 넘는 다리놓기와 지식생산의 개방된 시스템에 대한 접근의 기회를 제공한다.

다리 개념으로서 인류세의 가능성은 단순히 다양한 학문을 통합하는 게 아니라 학문 내부, 혹은 학문 사이의 담론적 분할을 전경화한다는 점이다. 인류세는 사회와 정책결정자에게 과학적·기술적 지식을 제공하는 자연중심주의 내러티브, 인류의 행위가 지구의 종말을 가져온다는 반성과 전망이 담긴 재난적 내러티브, 기술발전과 성장을 촉진하는 동시에 불평등과 환경재난을 야기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는 생태마르크시즘 내러티브, 문화와 자연의 이분법이 해소되는 포스트모더니즘 내러티브, 지구시스템의 상호의존성이란 인식을 바탕으로 한 임파워먼트(역량강화 혹은 권한부여)와 실천의 내러티브 등을 담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내러티브는 인식론의 모순을 드러내며 인류세를 경합적 개념으로 만든다. 예컨대 인류세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글로벌 변화에 대한 인간의 기여를 가리키며 여기서 인간은 ‘범죄자’로 여겨지는 단일한 글로벌 세력으로 재현된다. 그러나 인간행위자가 글로벌 규모의 변화를 일으키는 하나의 차별화되지 않은 세력으로 축소돼서 지역간의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인 차이가 사라진다면 사회적 변화가 인류세를 가져온 근본적인 동력이라는 점이 상실되고 만다. 인류세라는 개념은 또한 자연을 인간에 의해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변형되는 것으로 재상상함으로써 환경주의 정치경제의 핵심인 지속가능성과 모순을 일으킨다. 지속가능성이란 자연의 일정한 용량과 회복가능성을 전제로 하는데 비해, 인류세가 제시하는 대기와 지질의 변화는 불가역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류세의 핵심은 통합된 지구시스템을 이해하고, 이를 위한 글로벌 사회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지구화의 결과로 등장한 통합된 인간사회 역시 지구시스템의 일부로 인식함으로써 인간의 역할을 부정에서 긍정의 방향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 복잡하고 변화하는 지구시스템에 대한 인간의 영향력을 긍정하는 것은 과학적, 사회적, 경제적, 윤리적 측면을 가지며 더 지속가능하고 평등한 선택을 향한 정책 결정과 상호작용하며 돕는다.

인류세 담론의 분석에서 보듯이 환경인문학은 단순히 과학과 기술의 변화를 이해하는 개선된 방식을 제시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이런 변화의 인간적 원인, 인간과 환경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다. 기술적 생활세계가 변화함에 따라 인간은 이런 자연과 문화의 구성물에 대한 자신들의 관계를 끊임없이 재발명해 왔다. 자연과 문화가 결합된 이런 영역은 언어, 관념, 태도, 예술, 장소감각 등에 들어있다. 에너지 전환, 재활용 등 환경정책과 관련된 결정에서 역사, 철학, 문학, 예술에서 나온 인간적 지식을 제공받을 수 없다면 단순히 경제적 손익계산에 의존해야 한다. 그런 결정이 현명하게 이뤄지기 위해 환경인문학의 역할이 필요하다.

 

환경과 인문학의 대화

환경과 인문학은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준다. 인문학이 환경연구에 기여하는 바는 환경담론의 분석이다. 저널 “레질리언스”는 환경인문학의 존재 이유로 “환경문제를 진단하는 과학논문은 여전히 일관성 있는 지속가능성의 비전으로 번역되지 않는다. 인문학과 인문사회학에 중심적인 내러티브 기술, 비판적 사고, 역사성, 문화, 미학과 윤리학은 과학자들의 노력에 중요한 보완적 연구를 제공한다. 인문학의 생태적 가치가 지금보다 더 분명했던 적은 없다. 환경인문학은 우리의 생태적 미래에 대한 대화에서 중심에 서야 한다”(http://www.resiliencejournal.org/about/overview)고 밝혔다. 인문학은 여러 분야의 연구자료에 바탕이 된 전제를 분석함으로써 일관성 있고 조화로운 시각으로 이를 해석하고 활용하도록 돕는다. 현재 생태위기의 복합성과 지구시스템과학이 생산한 난해하고 엄청난 정보량은 인문학의 관점에서 정리될 필요가 있다.

반대로 환경연구는 인문학에게 스스로의 존재기반을 묻도록 자극한다. 인문학은 비인간세계를 배제하거나 배경으로 삼는 방식으로 “인간”에 초점을 두었으나 환경연구의 성과와 그것이 인문학의 분과학문에 끼친 영향력은 더 이상 이런 전제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자립적이고 이성적이고 결정하는 주체라는 환원주의적 설명을 거부하면서 인간을 의미와 가치가 살아있는 생태계의 참여자로 위치 짓고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타자들과 공존할 수 있는지 연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인간성을 일컬어 “두터운 인간성(thicker notion of humanity)”(Deborah Bird Rose, etc., Thinking through the Environment, Unsettling the Humanities, Environmental Humanities, Vol.1, 2012, p. 1-5)이라 한다. 환경 안에 재위치된 주체는 인간을 자연 바깥에 놓음으로써 인간은 의미, 가치, 윤리가 없는 넓은 “자연” 세계 안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조종하고 결정할 자유가 있다고 여겨온 근대적 주체의 자연관을 넘어선다.

이처럼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문화의 양분법이 붕괴하면서 기존 지식과 사고의 체계가 불안정해진다. 즉 인문학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의 상당 부분은 과감하게 재구성돼야 한다. 일례로 환경사가들의 연구 결과는 전통적인 인간의 역사를 더 넓은 지구사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인간의 이야기는 지질학, 진화생물학, 기후과학이 제공하는 시간에 대한 깊은 고려 위에 다시 씌어야 하는 과제와 만났다. 기존 학문의 재구성과 다양한 종류의 신생 학문은 머레이 북친이 지적했던 대로 계몽주의가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낸 기본사상이 된 것처럼 오늘날 생태주의가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를 만들기 위한 종합사상이 돼야 한다는 당위성을 입증한다.

한편 인문학 연구경향의 변화는 인문학 교육의 목적과 방법을 변화시킨다. 인간의 정의가 아무리 변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란 점에서 인문학의 역할은 변함이 없다. 오늘날 인문학은 전지구적 위기에 대응하는 이론을 개발하고 현재의 도전을 받아들일 학생을 키우는 임무가 있다. 미국대학교육협회는 교육의 가치로서 “윤리적 판단, 통합성, 간문화적 기술, 계속적인 학습능력”(Hart Research Associate, It Takes More than a Major: Employer Priorities for College Learning and Student Success, Liberal Education, vol. 99 no.2, spring 2013, p. 22-29)을 들었는데, 이는 환경인문학이 추구하는 가치와 일치한다. 생태위기와 경제위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과학기술과 윤리가 첨예하게 맞서는 상황에서 환경인문학의 이론과 실천은 중요한 교육적 수단이 된다. 미래세대가 자신들 앞에 놓인 세계를 보고 그 복잡함을 받아들이며 “지구의 청지기”로서 행동하도록 능력과 용기를 줄 수 있다.

 

한윤정

한국생태문명 프로젝트 디렉터

화, 2020/03/03-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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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지역으로 가져오기

때론 세상에 온통 나쁜 소식만 들려오는 것 같다. 기후혼란, 생물멸종, 고용불안, 빈곤, 폭력사태∙∙∙. 이런 소식들은 우리를 답답하고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대부분 같은 원인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여러 문제를 따로 해결할 필요 없이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다.

나는 저개발국가에서 가장 산업화된 선진국까지, 세계 여러 곳을 관찰하고 연구한 끝에 무엇이 문제인지 확실히 알았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경제체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의 우선순위를 혼동하는 바람에 잘못된 순위를 앞세워 다른 대안들을 묵살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글로벌 경제를 지지한다. 글로벌 경제는 몹시 비대하고 강해져서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글로벌 경제는 기술-경제 체제로서 인간생활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까지도 상품으로 만든다. 글로벌 경제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을 분리시키며 번영하고 있다.

그러나 꼭 이런 길로 가야 할 필요는 없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구태의연한 권력기관과는 전혀 다른 풀뿌리 운동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경제구조를 지역화하여 생태계와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육대주에서 일어나 힘을 모으고 있다. 이들은 경제가 문화와 생태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생태가 경제를 주도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풀뿌리 운동은 사람들의 힘과 인내, 선한 의지를 증명하고, 신속하게 확산하여 앞으로의 정치와 경제 지형을 바꿔놓을 것이다.

지역화는 글로벌 경제가 입힌 손상을 만회하는 가장 전략적이고 효과적이며 상식적인 방법이다. 지역경제가 튼튼해지면 개인, 즉 ‘내부’의 변화뿐 아니라 정치 변화, 곧 ‘외부’의 변화까지 일어난다. 지역화는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정의롭고 지속 가능한 경제학이다. 빈부 격차를 크게 줄이고, 에너지 사용과 공해를 줄인다. 아울러 지역화는 행복의 경제학이다. 개개인을 공동체, 그리고 자연과 다시 이어주기 때문이다.

지역화는 고립화가 아니다. 사실 정책적으로 세계화에서 지역화로 전환하려면 국제협력이 필요하다. 글로벌 은행과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는 자유무역조약이 아니라 환경을 보호하는 구속력이 있는 협정을 맺어야 한다. 풀뿌리 운동에서도 시급히 정보를 공유하고, 국가와 사회 안팎의 각계각층과 협력해야 한다. 지역화는 융통성 없이 꽉 막힌 처방이 아니다. 오히려 경제활동을 변화시켜서 지역사회와 인간을 다양하게 만든다. 나는 지역화를 ‘경제를 지역으로 가져오기(bring the economy home)’라고 부르고 있다.

 

큰 그림 행동주의

글로벌에서 로컬로 방향을 바꾸는 지역화를 위해서는 두 가지 사뭇 다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즉 풀뿌리 운동과 정책 변화를 동시에 병행해야 한다. 상향식 풀뿌리 차원에서 로컬의 수많은 기업은 현재 기본수요를 장악하고 있는 소수의 독점기업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이미 증명해 보였다. 이러한 지역사회기반의 경제구조는 사회와 경제 구조를 재편하여 자연과 인간의 기본욕구를 모두 충족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을 더 확대하려면 하향식 정책변화도 필요하다. 세금혜택과 보조금을 로컬로 돌려야 하고, 무역과 금융을 규제해서 (은행을 포함한) 기업들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사회가 정한 규칙과 법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

세계화를 지원하는 공공정책의 방향을 지역화로 바꾸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까닭은 전 세계의 정책결정권자들이 대기업과 은행의 요구를 계속 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운동이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 운동은 발전의 방법(동반경제성장, 무역진흥, 첨단기술, 기업후원 등)이 정확히 일치하는 보수나 진보의 정치인들에게 희망을 걸기 보다는, 사회의 근본적인 구조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시민운동은 서로 연대하여 양분된 좌우를 초월하고, 구태의연한 정치를 넘어서고 있다. 사람들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 현 체제를 조금 손보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근본적인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의 수가 임계치에 달했다. 이제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직면한 위기의 근본 원인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의미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변화를 만들어낼 결정적 다수를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 내가 말하는 ‘큰 그림 행동주의(big picture activism)’의 목표다. 시민의 의식을 높이려면 이론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새로운 지역화 사업의 감동적인 사례를 날마다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북반구와 남반구에서, 도시와 농촌에서, 사람들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건하자마자 다양한 정신적∙심리적∙실용적 혜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큰 그림 행동주의는 기본 전제에 잘못이 없는지 폭넓게 재검토한다. 신화와 잘못된 정보를 기반으로 한 오늘날의 소비자문화는 모순적인 개념으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고 당황하게 만든다. 한편에서는 저녁뉴스에서 소비자 지출이 감소하면 당장 세상이 멈출 것처럼 말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소비자의 탐욕이 세상을 파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경제체제를 만든 것은 개인의 탐욕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도 보조금과 법, 세금을 이용해 지구와 개인의 안녕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제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다.

최근까지 글로벌 경제를 해체하는데 필요한 폭넓은 관점은 찬밥 신세였고, 그 분야에는 편협한 시장근본주의자들이 득세했다. 결과적으로 유일한 길은 계속 팽창하는 비인간적인 경제규모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고, 부와 권력은 더 적은 소수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큰 그림 행동주의는 우리에게 다른 길이 있다고 말해준다.

큰 그림 행동주의가 성공하려면 몇 가지 장벽을 극복해야만 한다. 어떤 문제를 발견하면 곧장 해결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우리는 이미 경제가 문제라는 것도 알고 있고 기업이 너무 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안다. 왜 그걸 계속 논의하고 앉아있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제세력이 환경문제와 사회정의문제 이면에 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많아도, 경제가 문화와 개인의 자부심을 허물고, 민족∙인종∙종교 갈등을 높이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해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무역조약이 기업과 은행에 막대한 힘을 실어준 덕분에 그들은 사실상 세계정부가 되고 좌익이든 우익이든 어떤 정당이 선출되더라도 그 정당을 배후에서 지배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이미 기업의 지배에 반대하는 사람이 글로벌과 로컬을 아우르는 폭넓은 관점을 가지면 문제에 더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로컬의 미래를 위한 정책 제안

(1) 로컬 경제를 위한 대안무역 지침

국가들은 글로벌 무역규제를 계속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대신 함께 힘을 모아 건강한 국가경제와 로컬경제를 우선하는 협약을 체결할 수 있다. 앞으로 무역의 목적은 기업의 이윤과 국내총생산(GDP)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잉여생산물을 시장에 공급하고 국내에서 생산할 수 없는 재화를 획득하는 것이다.

무역규제철폐를 더 이상 관용할 수 없는 개인과 단체들이 이미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유럽에서는 80개가 넘는 단체들이 연대해서 대안무역지침의 초안을 마련했고 총선후보자 193명이 그 지침의 목표를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2) 지역기반의 금융체계 확립

은행과 금융체계를 다시 규제해서 유령자산을 만들지 못하게 제한하고 무질서한 자본의 흐름을 줄여야 한다. 아울러 지역투자부문에서는 지역민이 연금기금과 증권교환을 통해서 지역사회에 투자하는 길이 거의 막혀있는 구시대적인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

은행의 대출관행도 변해야 한다. 상업은행들은 대기업에 비해 상당히 높은 대출이자를 요구하면서 작은 기업들을 차별해왔다. 게다가 대기업 중역들에게는 개인대출보증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소상공인들에게는 요구하기도 한다. 지역사회의 은행과 신용협동조합을 더 많이 지원하고 이용하면 훨씬 더 다양한 중소기업이 번영할 수 있다.

(3) 건전한 경제지표 적용

의사결정권자들은 흔히 국내총생산(GDP)이 성장하면 이를 가리켜 정책이 주효한 증거라고 말한다. 국부의 척도라는 GDP가 끔찍한 혼선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모르는 소리다. GDP는 시장의 활동, 주인을 갈아타는 돈의 총량을 말해줄 뿐이다. GDP는 바람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비용과 이익을 구별하지 않는다. 암, 범죄, 교통사고, 기름유출에서 나가는 지출이 증가하면 GDP도 덩달아 오른다. GDP에는 돈이 오가는 거래만 고려하고 가족과 공동체, 환경의 기능은 산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녀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돈은 GDP에 들어가는 반면 가족이 집에서 자녀를 돌보는 것은 들어가지 않는다.

이에 사람들은 GDP를 대신할 다양한 대안을 만들어 적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실질진보지표(GPI)이다. 기존의 지표에다 경제∙환경∙사회의 중요한 요소를 단일체계에 넣어서 발전과 실패의 정확한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지표다. 오스트리아, 캐나다, 칠레, 프랑스, 핀란드,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영국에서는 이미 GPI를 계산해서 발표하고 있다.

(4) 편파적인 세금체계의 개선

거의 모든 나라가 체계적인 세금규제로 중소기업을 차별한다. 지속 가능한 소규모 생산은 보통 더 노동집약적인데 소득세, 사회복지세, 근로소득세 등 무거운 세금을 노동에 부과한다. 한편 자본집약적, 에너지집약적 기술을 사용하는 대기업 생산자는 세금우대(가속상각, 투자세공제, 세액공제)를 받는다. 편파적인 세금체계를 바꾸면 로컬경제를 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기계보다 사람을 더 선호하게 되어 일자리도 더 많이 창출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생산에 쓰는 에너지에 세금을 물리면 첨단기술투입에 덜 의존하는 기업, 곧 노동집약적인 소기업이 진흥한다. 게다가 생산과 소비로 일어나는 환경파괴대책을 포함해 화석연료에 세금을 부과하면 실비가 가격에 반영될 테니 운송은 줄고 지역소비를 위한 생산은 늘며 경제는 건강하게 다각화될 것이다.

(5) 재생에너지의 분산작업

현재 재생에너지 기술로 받을 수 있는 보조금은 화석연료에 비해 5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이러한 불균형을 뒤집으면 오염은 줄어들고 일자리는 늘어나며 장기적인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재생에너지를 비롯해 어떤 형태의 에너지든 발전소는 분산하는 것이 좋다. 에너지원을 최종 용도에 가까이 두면 전송망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 에너지원을 분산하면 지역경제에서 돈이 새는 것을 막을 수 있어 정치권력도 확실히 분권화한다.

완벽한 정책은 없지만 전 세계 중앙정부와 지자체는 분산된 재생에너지의 확산을 촉진하는 새로운 법을 채택하고 있다. 이를테면 세금우대, 보조금, 발전차액지원제도 같은 금융지원, 재생에너지공급의무화제도 등이 있다. 미국은 주 차원에서 재생에너지를 일정비율 의무적으로 공급하도록 하는 정책인 재생에너지공급의무화제도(RPS)가 불씨가 되어 태양광발전소와 풍력발전소가 급격히 늘어났다.

(6) 다품종 유기농 생산지의 확대

대다수 국가는 농업보조금을 대규모 산업농 기업에 몰아준다. 세계무역기구 회원국 사이에서 보조금의 3분의 2는 부유한 거대농가가 받는다. 농업연구자금도 생명공학과 화학∙에너지 집약 단일품종농업에 크게 편중되어 있다.

소규모 다품종 농업을 장려하는 연구를 더 많이 지원하면 농촌경제가 활기를 띨 뿐 아니라 생물이 다양해지고 토양이 건강해지며 식량안보를 이룩할 수 있다. 또한 식단에 균형과 다양성이 생기고 식재료가 더 신선해질 것이다.

(7) 소규모 로컬생산자를 위한 규제 완화

소규모 기업은 대규모 생산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규제하는 법 때문에 부당한 세금을 내야 하는 일이 빈번하다. 예를 들어 공장형 밀집사육방식의 양계장은 분명히 환경과 보건규제를 철저히 받아야 한다. 그러나 닭 여남은 마리를 놓아 기르는 소농 같은 소규모 생산자도 기본적으로 같은 규제를 받기 때문에 치솟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서 사업을 접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일리노이주는 일명 ‘코티지푸드’ 법안을 통해 잼과 피클 같은 여러 보존식품을 소규모로 생산하는 생산자를 위한 규제완화를 고려하고 있다. 비슷한 법안 17개가 미국 전역에 도입되었다.

(8) 토지사용규제의 합리적 개선

지역과 지방의 토지사용규정을 개정하면 야생지와 공지, 농지를 개발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된 토지신탁에 정치지원과 금융지원을 해야 한다. 지방정부가 공공자금으로 농지개발권을 사서 교외 확장을 막고 농부들의 금융부담을 덜어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둔 사례도 있다.

(9) 로컬미디어와 로컬엔터테인먼트 지원

지역사회 라디오 방송국부터 라이브 뮤직과 극장 등에 이르기까지, 지역의 공연예술문화시설을 지원하면 세계화한 미디어를 대신할 대안으로 발돋움할 것이다. 춤과 노래, 축제 같은 공동창작 엔터테인먼트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지역사회의 유대감은 한층 더 튼튼해질 것이다.

(10) 로컬에 기반한 교육으로의 전환

학교교육은 장차 현재의 아이들을 고용할 기업의 요구에 맞게 점차 변하고 있다. 기업에 맞춘 교과과정에서 벗어나 지역에 기반한 다양한 형태의 학습으로 전환하면 막대한 혜택을 얻을 것이다. ‘고용 없는 성장’ 경제를 위한 경쟁적이고 전문화를 장려하는 교육이 아니라 다양한 환경과 문화, 지역화한 경제에 맞게 변할 것이다. 지역에 맞는 농업과 건축, 적합한 기술교육을 제공하면 기본수요를 충족시키는 생산분권화가 더욱 진전할 수 있다.

 

세계 지역사회의 다양한 풀뿌리 활동

(1) 로컬금융

공동체은행과 신용협동조합은 주민들이 멀리 있는 기업이 아니라 마을과 지역사회에 투자할 수 있는 금융기관이다. 이 두 곳에서는 창업자금을 대기업에만 대출해주는 시중은행과 달리 소기업에도 낮은 금리로 대출해준다.

지역투자는 앞으로 새로운 트렌드를 이룰 것이다. 슬로머니(로컬 식량체계에 대한 자본투자를 돕는 비영리단체)의 여러 지부에서는 이미 많은 투자를 소농과 식품기업에 유치했다. 지역증권거래, 소액투자편드, 협동조합투자편드, 지역에서 투자하는 연금펀드 같은 여러 구상도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지역화폐를 만들어 사용하면 돈을 지역경제 안에 붙잡아둘 수 있다. 마찬가지로 타임뱅크(비시장영역에서 봉사활동을 시간가치로 환산하여 기록, 저장, 교환하여 공동체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운동으로, 시간의 가치교환을 위해 가상화폐를 발행하기도 한다)와 지역통화운동(Local Exchange Trading System)은 사실 대규모 지역사회 물물교환체계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제공할 수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희망금액을 게시한다. 따라서 돈이 부족하거나 실물화폐가 없는 사람들도 지역경제 안에서 돈을 흐르게 할 수 있고 혜택을 받을 수도 있다.

(2) 바이 로컬, 로컬기업

바이 로컬(Buy Local)운동은 막대한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로컬기업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 운동은 지역경제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먼 곳에서 제조해서 인위적으로 가격을 낮춘 상품에는 환경과 지역사회가 지불할 비용이 숨어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교육효과도 있다.

지역의 중소기업들이 연대해서 연합체를 만들면 서로 지원하고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북미의 자영업자 약 3만개는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80개 이상의 네트워크를 갖춘 지역생활경제기업연합(BALLE)을 조직했다.

(3) 로컬에너지

전 세계에는 지역사회가 소유하는 분산형 에너지시설에 투자한 도시가 많다. 예를 들어 콜로라도주 포트콜린스에서는 600킬로와트 ‘태양광 정원’ 설립을 계획하고 있고, 인도 비하르주 다니이마을에서는 350가구에 전기를 공급할 태양광 에너지 ‘마이크로 그리드’를 설치하고 있다. 이러한 소규모 사업들은 무공해 재생에너지원을 이용한다는 것 이상의 이점이 있다. 첫째, 현지에서 전력을 생산하기 때문에 송전인프라를 확충할 필요가 없다. 둘째, 주민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전력회사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에너지 비용을 관리한다. 셋째, 지역투자자들은 남는 전기로 수익을 얻는다.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시민들이 다른 지역 투자자 소유 전력회사(IOU)에 넘어간 에너지체계의 소유권과 운영권을 되찾으려고 지방정부를 설득하고 있다.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완전히 다시 공영소유로 만들거나 시와 군이 IOU 외에 지역에서 새로운 전력공급자를 지정할 수 있는 지역사회 선정권(Community Choice)이라는 정책을 채택하면 된다.

(4) 로컬푸드

로컬푸드 운동은 전 세계에서 매우 큰 성공을 거둔 풀뿌리 활동이다. 소비자와 근거리에 있는 농부를 직접 연결하는 공동체지원농업(CSA) 덕분에 규모가 작은 다품종 농장들이 번창하고 점점 더 늘어났다. 소비자들은 대개 자신이 먹을 식재료가 자라는 농장을 직접 알고 있고, 농장에서는 일손이 부족하면 소비자들의 도움을 반긴다. 소농들은 믿을 수 있는 안정된 시장을 확보할 수 있고, 소비자들은 슈퍼마켓보다 더 신선하고 건강한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다. 미국은 1986년에 단 두 개였던 CSA의 수가 2014년에는 6200개 이상으로 급증했다.

농부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농부직거래장터 역시 지역경제와 환경에 이롭다. 미국의 농부 직거래 장터의 수는 1994년 1755개에서 2014년 8268개 이상으로 증가했다. 직거래장터와 관련해 로컬 유기농 먹거리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추세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유기농 농지면적이 2001년부터 두 배로 증가했다.

지난 50년동안 북반구와 남반구에서는 청년들이 농촌을 떠나는 추세여서 도시화가 빠르게 이어졌고 농촌사회도 사라졌다. 오늘날 여러 청년농부는 그러한 트렌드를 뒤집고 있다. 미국에서 결성된 전국청년농업인연합(NYFC)은 600명이 넘는 회원이 가입했다. 전 세계 73개국 2억 농민이 연대한 비아캄페시나에는 청년들이 활발히 활동하는 회원단체가 있다.

(5) 로컬미디어

지역사회의 대중매체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목소리를 낼 기회를 주고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안을 알려준다. 아울러 시민들의 힘을 모아서 지역사회문제를 해결하고 결속을 다지고 지역문화를 유지하는 역할도 한다.

‘망 중립성’이 공격을 받아 위협에 처하자 통신망 접근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유지하려는 여러 단체가 힘을 합쳐서 싸우고 있다. 최근 ‘지역사회가소유한브로드밴드’ 운동이 일어나 지역사회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제하는 힘을 기르고 있다. 2015년 현재 미국 전역에서 500개가 넘는 지자체들은 자체 브로드밴드 망을 구축하고 더 많은 주민이 믿고 쓸 수 있는 빠른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여 지역경제를 살린다.

(6) 대안교육

자연결핍장애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자 야생지나 농지를 교육장소로 활용하는 학교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다. 예를 들어 숲속 학교에서는 어린 학생들이 종일 야외에서 지내면서 현지에서 자라는 식물과 버섯 종류에 정통한 전문가가 된다. 청소년과 성인에게 야생에서 자립할 수 있는 지식을 가르치는 학교들이 서서히 늘어나고 있는데 미국 버몬트주에 있는, 전통기술을 익혀서 뿌리를 되찾겠다는 뜻의 루츠(ROOTS) 학교도 그러한 곳이다.

(7) 로컬기반의 보건의료

몇 해 사이에 전통대체의학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일반의사들조차 약초치료법, 동종요법, 바디워크요법, 이완요법에 관심을 가질 정도다. 이같이 차분하게 예방을 강조하는 의술은 더 인간적인 보건의료체계로 돌아가는 길이다. 지역에 기반한 보건의료체계는 인간의 전인(全人)을 강조하며 생명을 더 넓게 바라본다.

(8) 로컬 계획공동체의 건설

규모가 몇몇 가구에서 수백 가구에 이르는 생태마을은 매우 인기가 높고 성공적이고 다양한 계획공동체의 하나다.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연합체로서 ‘글로벌 에코빌리지 네트워크’를 통해서 연결된 생태마을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에 걸쳐 수백 곳에 이른다.

전환마을은 탄소집약적인 글로벌 경제에서 전환을 선택한 소도시와 대도시의 공동체 모임으로, 북미와 유럽에서 인기가 높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모여서 식량, 에너지, 상업, 예술, 교통, 보건 등 로컬 경제의 여러 부문별 사업을 계획한다.

 

갈림길에서

우리는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수십 년 동안 경제성장을 강조하는 길을 걸어왔지만 이제 다른 길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현재의 글로벌 경제체제는 더 이상 대다수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하지 못하고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인식하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다. 이 체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진정한 지속 가능성을 실현하려면 지금까지와는 반대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거주형태, 에너지원, 식량생산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분산을 시켜서 사람과 자연의 밀접한 관계를 재건해야 한다.

이 새로운 경제의 중요한 요소는 규모이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자립경제에 기초한 경제적 지역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지역중심의 경제에서는 사람과 환경을 소중하게 여기고, 금융구조와 상업활동이 지역과 문화에 맞춰 변화할 것이며 문화와 생물, 농업 등 모든 면에서 다양성을 존중할 것이다. 진정한 지역화가 이루어진다면 의미 있는 일자리들이 많이 생기고, 튼튼하고 탄력 있는 지역사회의 토대도 구축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의 소속감과 목적의식, 결속력이 높아지면서 마음 충만한 행복을 누릴 것이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로컬퓨처스 대표, 『오래된 미래』 저자

화, 2020/03/10-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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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계로서의 도시

도시는 인간활동의 중요한 공간이 되었다. 2014년 기준으로 전 세계 인구의 54%가 도시에 거주하며 한국의 경우 이 비율은 2015년 기준 92%에 이른다. 도시는 생태적 위기의 주된 원인이며, 동시에 환경문제에 취약한 만큼 생태적 전환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많은 도시들이 생태적 위기에 대응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생태적 전환이라고 할 만한 근본적 변화가 없이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도시의 생태적 전환과 관련된 문제는 무엇일까.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는 도시가 다양한 이익집단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유지된다는 사실이다. 즉 도시는 거주자들의 일상생활로 구성된 복잡계이다.

따라서 좋은 의도를 가진 정책만 있다면 도시의 생태적 전환이 가능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예를 들어 행정적, 법적, 경제적 수단을 동원해 도시계획을 집행하는 공적 부문이 있는 한편, 이에 반해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간지대에 많은 무관심한 시민들이 있다.

완전한 해체에 이른 푸룻-아이고(Pruitt-Igoe) 주거계획보다 더 스펙터클한 사례는 없다. 1950년대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시행된 이 프로젝트는 좋은 의도로 시작했다가 최악의 결과를 낳은 극적인 정부 실패의 상징이다. 푸룻-아이고 프로젝트는 주정부와 연방정부의 막대한 재정지원 아래 도시재생과 빈곤층 주거안정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착수됐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결국 33채의 건물을 모두 폭파시켰다. 정책실패의 원인은 여전히 많은 논쟁과 이야기를 낳고 있지만, 어쨌든 이 프로젝트는 도시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통합적 관점이 부족한 채 하향식으로 진행된 관료적 도시정책의 무능함을 보여준다. 도시주거정책, 경제정책, 도시재생정책의 실패에다 인종차별이 합쳐진 결과였다.

제인 제이콥스는 역저 『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1961)에서 도시는 인간의 자연적 거주지이며 사람들은 자연의 과정과 복잡계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자연생태계와 인간경제의 과정들이 놀랍도록 유사하다”고 강조했다.

레이첼 카슨이 자연생태계에 관심을 가졌다면 제이콥스의 주제는 인간생태계였다. 그 시대에는 그가 환경주의자로 간주되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 제이콥스는 당대의 현대화, 자동차 중심성에 반대하면서 활기찬 이웃, 도보구역, 사람들의 상호작용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또 도시정책은 엔지니어와 하드웨어가 아니라 자연적 진화가 일어날 삶의 장소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도시정책은 소프트웨어와 콘텐츠에 기초해 기억과 이야기를 창조하는 인간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전환관리

도시를 생태계 혹은 복잡계로 이해하는 관점은 도시계획이나 도시정책에 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접근을 요청한다. 도시의 생태적 전환을 위한 정책도 예외가 아니다. 유럽에서는 이런 전환실험이 진행 중이며 이런 실험의 과정과 결과를 분석해 전환관리에 대한 이론적 토론으로 이어진다. “전환관리란 사회적 전환과 지속 가능한 발전의 개념에 기초한 대규모 사회변화의 속도와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통합 조정된 노력을 말한다” (Derk Loorbach, Governance for sustainability, Sustainability: Science, Practice, & Policy, Fall 2007, Volume 3, Issue 2).

예를 들어 (1)네덜란드에서는 2001년부터 재생에너지, 농업, 의료, 수자원관리 등의 영역에서의 거버넌스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또한 (2)유럽 6개 지역(스페인 발렌시아, 독일 헤센, 이탈리아 에밀리아 로마냐, 중부 헝가리, 폴란드 실레지아, 영국 웨스트 미드랜드)은 “기후-KIC”의 유럽 지역연합 프로그램(“2013 Pioneers into Practice” program)에 참여한다. “기후-KIC”는 유럽의 야심 찬 기후변화의제를 만들기 위한 혁신, 기업가정신, 교육, 전문가 지도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네트워크 프로그램이다. 이 중 “2013 Pioneers into Practice”는 기후변화 측정, 유발요인 관리, 회복적인 저탄소 도시로의 전환, 탄소제로 생산시스템 개발과 적정 수자원관리 개선 등 4개 주제에 초점을 둔 상향식 지역 프로그램이다. (3)OECD 시스템 혁신 프로젝트는 OECD 기술과 혁신 정책(TIP) 워킹그룹 활동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목표는 지속가능성과 녹색성장의 맥락에서 정책입안자들을 돕는 것이다. 2015-2016년 계속된 프로젝트 2단계는 시스템혁신 접근이 어떻게 녹색혁신을 증진시킬 수 있는지 실험했다.

전환관리 접근의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시스템 동력과 참여자 행동에 대한 종합 분석은 사회동력에 대한 일반적 아이디어를 산출해서 전환과정에서 참여자의 행동과 전략을 숙고하고 분석할 수 있게 해준다.

(2) 전환관리는 학자, 정책입안자, 산업계, NGO 간의 폭넓은 네트워크에서 나온 이론과 실천을 통해 개발된다.

(3) 사회를 전형적인 행동과 메커니즘(예를 들면 공진화, 창발, 적응)에 기반한 복잡계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4) 하향식 정부 정책도, 상향식 시장권력도 여러 섹터에 걸친 장기간의 변화를 단독으로 유도할 수 없다. 정부정책, 시장권력, 시민사회의 상향식 이니셔티브가 결합될 때 변화가 가능하다.

(5) 전환관리는 이륙기, 가속기, 안정기 등 전환의 단계를 구분해야 한다.

OECD 시스템 혁신 프로젝트의 첫 번째 단계에서 나온 결과물은 다음과 같다.

(1) 정책입안자는 문제의 체계적 성질과 혁신을 통해 변화를 구성하는데 있어 자신들의 역할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2) 지속가능한 건물, 바이오경제, 스마트시티 등의 분야에서 이미 전환을 가능하게 할 만한 기술들이 개발돼 있다. 그러나 제도, 법률, 규제, 시장메커니즘, 사회문화적 태도의 변화가 없이는 많은 해결책들이 실패로 돌아간다.

(3) 전환관리와 참여적 접근이 바람직하지만 이것은 시간, 일관성, 정책방향의 안정성이 필요하다.

(4) 변화에 대한 저항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것이 시스템 혁신의 핵심이다. 사례연구에 따르면,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 가능한 해결책 가운데 하나는 문제를 작은 부분으로 쪼개거나 공공민간 파트너십, 새로운 행정능력과 부처간 조정능력을 통해 혁신의 생태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5) 장기적 정책전략과 함께 정교한 로드맵, 중간점검과 영향평가를 포함한 정책목표가 필요하다.

 

서울의 동북4구의 지역협력 실험

전환관리 연구의 중요한 문제는 현재 사회를 어떻게 지속 가능한 상태로 만드느냐 하는 것이다. 전환관리 접근은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강력하고 통일된 접근으로는 전환이 실현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전환은 다양한 접근, 즉 경계를 넘나드는 혁신실험, 다양한 이해와 갈등집단을 포함한 참여적 프로그램, 다양한 분야의 학제적 협업, 공통의 목표를 향한 기술∙제도∙문화의 적용 등이 결합될 때만 가능하다.

서울 동북4구(강북구, 성북구, 도봉구, 노원구)의 협력실험은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2008년 시작된 이 실험은 당시 대학과 기업간 산학협력이 대세이자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여지던 흐름을 거부하면서 지역 시민사회와 협력하는 새로운 대학의 모델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한신대학교 서울캠퍼스에 평생교육원을 개설하면서 지역사회 풀뿌리활동가들을 초대한 포럼(강북지역 풀뿌리 활동가 포럼, 일명 강풀포럼)을 만든 게 시작이었다. 강풀포럼은 4개구에서 오랜 기간 활동해온 풀뿌리 활동가들이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행정구역의 경계를 넘어 지역사회간 협력과 발전이라는 의제를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해 활동했으며, 그 성과는 4개구청과 서울시의 참여로 이어졌다. 그 결과 시민사회-기초자치단체(4개구청), 광역자치단체(서울시)라는 3중의 협력적 거버넌스를 통해 낙후된 서울의 “원조 강북”인 동북4구 지역에 새롭고 지속 가능한 방식의 지역발전과 도시재생을 실현하는 정책(서울 행복4구 플랜)이 마련되고 사업이 추진됐다.

여전히 진행형인 이 프로젝트는 명시적으로 생태적 전환을 목표로 내세우지 않았고 계속 진화하는 과정과 실천을 더욱 철저하게 분석, 평가해야 하지만, 장기적 안목으로 지역을 변화시키고자 한 혁신적이고 참여적인 시도로 평가될 만하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협력, 상호신뢰, 거주자 역량 강화, 지역수용성 확대 등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는데 이런 것들은 장기적인 전환을 성취하기 위한 보이지 않으면서 중요한 자산이다.

역사적으로 서울의 동북지역은 서울과 한반도 북부를 연결하는 사람과 물자의 집결지였다. 현대사를 거치면서 이 지역은 6.25전쟁과 분단의 희생양이 됐다. 발전이 중단되고 장기간 도시계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건물, 도로와 교통체계 등 도시 인프라 역시 노후했으며 주거지역은 계속 쇠락했다. 지속적인 경제적 쇠퇴로 인해 이 지역은 서울의 “베드타운”으로 변했다.

동북4구 발전전략은 산으로 둘러싸인 경관이나 유서 깊은 도로와 전통가옥 등 과거에는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던 자원을 자산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또한 지역개발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혁신 전략으로 접근했으며, 지역주민들의 역량을 강화함으로써 아래로부터 지역발전의 원동력을 끌어내는 참여적이고 내생적인 발전 전략인 동시에 사회적 경제에 기반을 둔 지역경제의 순환시스템을 창조하는 대안적 발전 전략이기도 하다. 즉, 재생가능 에너지, 로컬푸드, 공동체 형성을 지역경제 순환시스템에 연결시키는 지속 가능한 발전 전략이다. 이런 점에서 동북4구의 실험은 이 지역의 생태적 전환을 위한 예비실험의 성격이 있다.

참여와 협력의 관점에서 볼 때 삼중의 협력 실험이 진행됐다. 대학, 지역주민 등 시민사회와 동북4구의 각 구청, 서울시가 참여한 민간-공공 파트너십을 통해 민주적 거버넌스에 대한 상호학습과 혁신역량 상승이 시도됐다. 특히 사회적 경제와 공동체 형성을 지원화는 과정에서 공공영역의 인큐베이팅 기능이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장기목표는 공공영역의 혁신지도자들이 없이도 공동체 스스로 혁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다. 한국은 정부와 기업이 많은 자원을 소유하고 모든 문제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회인데 반해 시민참여와 풀뿌리의 의견 개진은 약하다. 따라서 시민사회의 자원이 불충분하고 연약할 때는 변화의 도입과 가속 단계에서는 공공영역의 주도가 불가피하다.

이 프로젝트의 비전을 서술한 핵심어는 “오래된 미래”이다. 이 말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저서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우다』(1991)의 제목에서 왔다. 이 책은 발전의 개념에 대해 중요한 질문을 던졌고 선진산업사회가 당면한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탐구했다. “오래된 미래”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지역에서 통합된 삶의 원리를 발견함으로써 전통과 현대성을 재해석하고 그로부터 대안적 미래를 찾자는 뜻이다. 지역의 미래 비전으로서 “오래된 미래”는 자기 지역의 역사적 특성, 즉 자원순환과 문화교류의 결절점을 참조하면서 다른 지역과 협력하는 자족적이고 지속 가능한 도시를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시민사회가 이런 변화를 선제하고 주도하기까지는 큰 도전이 남아있다. 2020년 현재 서울 동북4구의 지역협력 실험은 서울시 예산이 투입돼 도시재생, 캠퍼스타운, 지역혁신 등의 사업으로 지속되고 있지만, 구청장이 바뀌고 시민사회 풀뿌리활동가들의 세대교체가 일어나는 등의 변화를 겪으면서 그 비전과 가치의 실현이 시험대에 서있다. 종종 그렇듯 공공영역은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결과를 얻는데 초점을 두며 장기적 안목에서 시민사회의 역량을 강화하는데 거의 무관심하다. 이외에도 많은 목표들이 있는데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간”이다. 가시적 성과가 나올 때까지 길고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드는 것,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는 것,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지속성, 헌신, 고통을 감내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접근에 비한다면 하드웨어를 중심에 둔 접근은 목표를 이루기가 비교적 쉽다. 정책시행 과정에서 자원할당의 우선권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바뀌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자칫 토건사업이 마무리된 다음, 하드웨어의 내용을 채울 컨텐츠와 그 하드웨어를 운영하고 활용할 시민주체의 형성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채 미완의 과제로 남겨질 가능성도 크다.

 

회복탄력성을 가진 도시를 향해

생태적 전환은 기후변화와 자원고갈 등 현재 부딪친 생태위기에 대한 필수적 응답의 결과물이다. 생태위기에 대한 응답으로서 도시의 생태적 전환은 도시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회복탄력성이란 “근본적인 구조, 기능, 내부피드백을 유지하면서 혼란을 견디는 시스템 능력”으로 정의된다(William E. Rees, “Thinking ‘Resilience,’” in Richard Heinberg and Daniel Lerch, eds., The Post Carbon Reader: Managing the 21st Century’s Sustainability Crises, 2010).

공동체 건설, 사회적 경제, 에너지 분산, 재생에너지 사용, 공동체지원농업 등 모든 프로그램은 도시의 회복탄력성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공동체가 음식, 주거, 교육, 교통, 보살핌을 스스로 해결할수록 그 공동체는 스스로의 재화와 서비스를 더 많이 생산하며 잠복한 금융위기의 영향을 덜 받는다.” (Michael Shuman, Local Dollars, Local Sense: How to Shift Your Money from Wall Street to Main Street and Achieve Real Prosperity, Community Resilience Guides, Kindle Edition, 2010)

빈곤 해결 역시 도시의 회복탄력성을 강화하는데 기여한다. 경제적으로 박탈된 지역의 가난은 개발에 대한 숨겨진 열망을 자극함으로써 생태적 전환을 위한 자원의 보존과 보호에 대한 동의를 형성하는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한 경제적 순환을 창조하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생태적 전환은 더욱 어려워진다. 이런 점에서 도로, 교통, 의료시설, 교육문화시설 등 인프라 건설은 생태적 전환을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서울의 지역협력 프로젝트는 도시빈곤 문제 해결과 생태적 전환을 연결시켜 선순환을 이루도록 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도시경제의 순환시스템이 만들어져 지속 가능한 도시를 유지할 수 있을 때까지 지속되는 장기간의 생태적 전환 프로젝트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제인 제이콥스는 이런 유형의 도시경제에 대한 위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도시경제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가장 기본적 조건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러나 경제학에 대한 제이콥스의 관심은 대기업이나 프렌차이즈로 대표되는 이윤경제에 대한 것이 아니라 도시경제에 대한 주류 분석에서 종종 제외되는 지역기반의 작은 경제, 그리고 젠트리피케이션에의 저항으로서의 도시경제에 대한 관심이었다. 지역경제에 대한 그의 이해는 자연생태계와 유사한 자발적 도시경제를 뜻하며 이는 “오래된 미래”로서 도시의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회복탄력성을 가진 “지속 가능한 도시”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자연생태계에서는 틈이 많이 채워질수록 생태계의 가용 에너지를 더 효과적으로 쓸 수 있으며 생명과 생명을 부양하는 수단이 더욱 풍부해진다. 우리 도시경제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틈이 많이 메워질수록 생명을 부양하는 수단이 더 풍성해진다. 이것이 바로 특화된 경제보다 지역경제가 훨씬 좋은 이유이다. ∙∙∙ 자연생태계에서는 다양성이 존재할수록 안정성도 늘어난다. 생태주의자들이 말하는 항상성 피드백 루프가 늘어나기 때문인데 이는 자동자기조절을 위한 피드백 조절기능이 잘 작동한다는 뜻이다. 우리 경제도 똑같다. 이것이 도시에서 지역경제가 다른 형태의 경제보다 더욱 회복탄력적이며 쉽게 붕괴되지 않는 이유이다.”  -Jane jacobs, “The Economy of Regions”, Annual E. F. Schumacher Lectures Book 3, Kindle Locations 101-107, Schumacher Center for a New Economics, Kindle Edition.

 

정건화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

월, 2020/03/16-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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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언론을 보면 매일매일 코로나19 확진자 및 사망자 수 관련 기사와 마스크 대란 기사가 도배된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늘어나는 코로나19 확진자 및 사망자 수를 농구경기 스코어 중계하듯 보도한다.

더 한심한 건 마스크 관련 기사다. 거의 모든 언론이 ‘마스크 대란’, ‘마스크 품절’, ‘마스크 구입 위한 장사진’ 따위의 기사를 쏟아낸다. 이런 기사들은 마스크 수급을 위한 대안은 없이 마스크 공급을 제대로 못하는 정부 성토로 가득하다.

 

시장경제원리가 정확히 작동하는 마스크 시장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히 생각해보자. 마스크를 생산하는 국내 민간기업들의 공급 한계량은 하루 1000만장 남짓이다. 그럼 국내 마스크 생산 업체들이 지금처럼 생산능력의 한계까지 기계를 돌려 마스크를 생산한 때가 또 있었을까? 단언컨대 없었을 것이다.

마스크 소비가 과거에 비해 크게 증가한 것도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린 근년부터인데, 소비가 크게 늘었다고 해봐야 마스크 제조업체들의 생산능력 한계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을 것이 자명하다.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의 일 평균 마스크 생산량은 최대 생산가능량의 몇분의 1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신천지 교인들의 집단 감염 등으로 코로나19가 전국으로 번지면서 너나 할 것 없이 공포에 질린 채 마스크 구입에 혈안이다. 쉽게 말해 가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부당이득을 노린 생산업체·유통업체의 사재기도 마스크 가수요 증가에 일조했음은 물론이다)했고, 이 가수요는 국내 마스크 제조업체들의 생산능력한계를 가볍게 넘어선다.

전 국민이 매일 마스크 한 개씩만 구입하려해도 매일 5000만개의 마스크가 필요하다. 현재 마스크 생산능력의 5배에 달하는 수요를 당장 해결할 길은 전혀 없다.

그리고 감염병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생긴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민간업체들이 생산 시설과 인력을 대거 늘릴 리도 만무하다. 감염병이 잦아들고, 해 뜨면 사라지는 아침안개처럼 가수요가 소멸되면, 생산 시설을 확장한 기업들을 기다리는 건 파산이기 때문이다. 설사 일부 기업들이 그런 무모한 선택을 한다해도 시차효과 때문에 지금의 공급부족 현상을 타개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게 대한민국 경제가 채택하고 있는 시장경제원리의 작동 방식이다. 감염병으로 인해 가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마스크 가격이 폭등하고, 마스크가 품귀 현상을 빚는 건 시장경제원리상 지극히 당연하다. 시장원리를 조금만 알아도 지금의 마스크 부족을 정부 탓만으로 돌릴 수 없다.

 

정부가 마스크 공급? 엄청난 낭비와 비효율도 감수해야

그러거나 말거나 언론과 야당, 일부 시민들이 문재인 정부에 요구하는 건 이런 것 같다.

‘코로나 사태 이전과 같이 KF80, KF94마스크를 1000원 남짓의 저렴한 가격에 맘 편하게 구입하고 싶다. 정부가 무능해서 혹은 사태 초기에 중국에 퍼줘서 마스크가 모자라니 정부는 책임져라.’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매일 5000만장의 저렴한 마스크를 전 국민에게 신원을 확인해 배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 보다 다섯 배 이상의 마스크 생산능력을 확보해야 하고, 매일 전 국민에게 1인 1장의 마스크를 제공하는 배급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정부가 마스크 생산업체를 전부 국영으로 만들든, 아니면 지금의 마스크 생산업체들이 매일 5000만장의 생산능력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데 드는 천문학적 비용(공장증설, 기계구입, 인력확충 비용 및 그 유지비용)에 대해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든 어마어마한 비용이 발생하는 건 불문가지다.

생산능력만 확보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사재기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매일 1인 1장의 마스크 배급이 정확히 이뤄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신원 확인 시스템과 배급 장소 및 배급 담당 인력의 확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모두 엄청난 비용이 발생할 게 자명하다. 마스크 5000만장 생산능력 확보 및 유지, 마스크 배급체계의 구축 및 유지 등에 들어가는 천문학적 비용은 모두 세금이다.

그런데 이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어쩌다 발생하는 전염력 강한 역병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가 천문학적 낭비와 비효율을 감수하는 게 말이다. ‘모든 시민들에게 매일 저렴한 마스크를!’을 외치며 정부를 성토하는 자들은 적어도 그에 따르는 천문학적 낭비와 비효율을 감수할 각오는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시장경제와 작은 정부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자들이 그럴 리 없다.

 

지금은 마스크 가수요를 억제하는 방법뿐

거듭 말하지만 지금의 마스크 품귀와 가격 상승은 감염증 공포로 인한 가수요 때문이다. 이로 인한 일시적 마스크 부족 해결 방법은 가수요를 통제하는 길 뿐이다. 사재기에 대한 단속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이 특정 기간 동안 구입할 수 있는 마스크의 수를 제한해야 한다. 정부도 그렇게 가닥을 잡은 것 같아 다행이다.

코로나19 공포 마케팅을 통해 마스크 가수요를 폭발시킨 언론은 이제 마스크 타령 좀 그만하기 바란다. 이 마당에도 배급제 운운하며 정부를 공격하는 언론도 있다. 공격하더라도 대안을 내놓고 하기 바란다.

토, 2020/03/21-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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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긴 몰라도 역사와 변화는 우연과 필연의 변증법적인 교집합에 의해 발전되어 갈 것이다. 대입하면 지금의 남북관계가 바로 그 우연에 의해 획기적으로 전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듯하다.

타이밍이 꼭 그렇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근거첫째, 필자 본인이 누누이 얘기해오고 있지만 제비 한 마리가 왔다하여 봄이 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희망적 사고로 본다면), 친서는 분명 잔뜩 움츠렸던 남북관계가 이 친서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기지개를 펼 수도 있는 좋은 청신호임에는 분명하다. 그것도 시차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거의 동시적으로 남과 북, 북과 미 정상들 사이에 이뤄진 친서교환이니 더더욱 폄훼할 이유는 없다.

둘째근거, 유엔(UN)이 G20정상회의(현지시각,3.26)를 앞두고 각국 정상들에게 서신 하나를 보냈다. 모든 제재완화가 핵심인데, 쿠테흐스 사무총장은 “제재대상의 국가들이 식량, 의약품 그리고 코로나-19(COVID-19 )퇴치에 필요한 지원을 쉽게 받기 위한 조치로 제재를 완화하도록 촉구하고자 합니다. 지금은 연대할 시점이지, 배제를 지속할 때가 아닙니다(강조, 필자)”라고 언급했다. 앞서 미첼 바첼레트 유엔 인권최고대표도 지난 24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북을 언급하며 “코로나19 확산이 전 세계에 미치는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대북 제재 완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두 발언을 대북제재에 대입시키면 쉽게 답은 나온다.

셋째근거, 코로나-19가 준 역설의 선물이 또한 그 중 하나이다. 다름 아닌, 2020년 3월에 실시되려든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중단된 것이 그것이고, 이는 정치적 산물로서 연기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좋은 기회인 것만은 분명하다.

해서 위 3요인을 조합해 해석하면 이렇다.

3요인, 하나하나는 제비 한마일 뿐이고, 각기 다른 우연이겠지만, 3요인이 합해지면 인식은 사 못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양질전환의 법칙에 따라 필연으로 전환된다.

필연으로써 남북관계가 그렇게 찾아왔다.

이제 그 활용은 대한민국 정부의 능력문제이다. 좀 더 직설하자면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의 정무적 판단 능력의 문제이고, 좁히면 청와대 통일·외교 관련 참모들이 이 상황을 정확히 캐치해내고, 대통령께 보고(혹은, 직언)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첫째, 정치적 타이밍이 정말 좋다.

분명, 역발상하면 그렇게 보이는데, 문재인 대통령은 4월 총선국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선거라는 것이 각 정당이 중심되어 치러지는 치킨게임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대통령은 한 발 빠져 있을 수 있다.

반면, 트럼프 美대통령의 상황은 영 다르다. 연말 대선에서 본인이 반드시 승리해야만 하는 재선문제가 달려있어 자기 코가 석자일 수밖에 없다. 대선에 올인 해야 할 수밖에 없고, 남북-북미문제는 당략과 관련된 대선의 직접적 이슈가 아니니 관심 밖이 된다.

두 상황은 이렇듯 두 대통령으로 하여금 전혀 다른 시선을 향하게 한다. 문재인 대통령으로 하여금은 당면한 코로나-19대응은 물론, 남북문제에 집중할 수 있게 하고, 반면 트럼프 美대통령은 자신의 재선문제에 올인 해야 하게 한다. 때문에 득표요인에 결정변수가 아닌 남북관계 문제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

비례하여 문재인 대통령으로 하여금 남북문제에 있어 독자적 공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기회가 그렇게 찾아온다.

어떻게?

①미국 국내 상황이 대선국면으로 급격히 빠져들어 가버리기 때문에, 이때를 활용해 남북관계 내정간섭 기제인 한미 워킹그룹을 무력화 할 수 있다. (해체까지 검토 가능)

②동시적으로 남북관계에 있어서는 총선이 끝나자마자(물밑에서는 지금부터 남북관계 복원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 직후 코로나-19협력을 매개로 하는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해나갈 수 있다.

물론 대전제는 있다.

제3차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북에게 분명한 시그널을 보내야 하는데, 그 핵심에 기간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에 대해서는 반드시 약속이행을 하겠다는 보장을 해 주어야 하고, 동시적으로 이제까지 해 왔던 先한미협의-後남북협의 방식이 아니라, 先남북합의-後미국설득(남북공동으로)이라는 민족공조방식에 대한 확실한 시그널을 줘야 한다.

결과는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다. 의제도 6.15와 10.4, 4.27과 9월 평양선언 모두 다 총화 되는 집적으로서의 통일회담이다. 그렇게 남북관계가 민족자주의 관점에서 순항하게 되는 것이다.(“양 정상은 민족자주와 민족자결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중략)”, <9월 평양공동선언 전문> 중에서)

위 사진은 문재인 대통령(우)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좌)이 27일 오전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 공동취재단 제공)

둘째, 한미동맹체제에 의존하지 않는 남북관계 모멘텀(momentum)도 반드시 만들어 낼 수 있다.

근거는 이렇다.

코로나-19로 인해 南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모범국가로 칭송받는다. 미국, 캐나다 등 세계 각국에서 ‘한국의 방역 시스템을 채택 하겠다’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 그 예다. 北도 오랜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의료체계특성(무상의료체계와 예방의학)과 여러 요인들이 겹쳐 현재까지 단 한명도 코로나-19확진자가 없는 유일국가(?)이다.

사실로부터 남북관계도 모범적으로 해날 갈 수 있다는 충분한 명분이 우리 (민족)에게 있고, 국제사회의 지지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즉, 南은 방역시스템과 진단키트 등 우수한 의료기술과 제도를, 北은 개성공단 재가동을 통한 마스크 대량생산, 그렇게 남과 북이 힘을 합쳐 전 세계의 의료 방역시스템에 획기적으로 기여한다면 이는 우리 민족이 21세기형 인도주의 모범국가로 우뚝 설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 바탕위에서 우리(민족)는 코로나-19만큼이나 한반도평화와 통일문제도 절체절명의 과제임을 국제사회에 주지시킬 수 있고, 동시적으로 ‘한국식 모델로 분단 문제도 반드시 풀릴 수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던져줄 수 있다.

활용할 수 있는 카드는 아래와 같다.

①코로나-19남북협력은 전 세계의 지지를 받으면서 남북관계를 복원하고, 이를 통해 미국 등 국제사회를 설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②개성공단 재가동은 전 세계에 공급될 코로나-19마스크 생산을 명분으로 제재해제를 보장받고, 국제사회로부터 대북제재 해제 전반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강력한 명분이다.

③코로나-19계기로 ‘잠정’중단된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영구’중단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왜냐하면 만약 이 기간 안에-잠정 중단된 한미합동군사훈련 그 기간 안에 3차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만 된다면 이는 당연히 통일회담일 수밖에 없고, 그러면 한미동맹체제는 자연스럽게 그 운명이 다하고, 남북 사이에 존재하는 군사적 긴장고조의 근원적(본질적) 원인이 제거된다.

결론적으로 이렇듯 지금의 국면은 위 ‘첫째’와 ‘둘째’를 상상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좋은 기회이다. 그러니 문재인 정부는 절대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한낱 一場春夢이 정말 아니길 바란다.

 

통일뉴스, 2020년 3월 28일에 게재된 글입니다 (필자와 협의하여 수정 후 본지에 실린 것임).

수, 2020/04/08-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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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문명이 단지 유토피아적 아이디어라는 의견에 대해 우리는 생태적 토대 위에 사회를 재건하기 위한 첫 걸음을 떼었을 때 실제 세계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려줄 수 있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생태문명을 위해 일하는 게 그들에게 희망을 준다고 이야기한다. 베이비 부머부터 밀레니얼 세대까지 희망의 상실이 가장 큰 화두가 된 시대에 이런 희망은 어떻게 가능할까.

기후변화에 대해 자주 강연하는 이들은 좌절의 위험을 안다.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후 데이터를 스크린에 올릴 때마다 방 안의 분위기가 심각해진다. 청중들은 날마다 더욱 공포스러운 데이터가 전 세계에서 신문에 나온다고 느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희망을 붙잡아두려고 애쓴다. 때로는 축구코치처럼 말한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이번 시합을 이길 수 있다니까!” 어쨌든 우리는 절망이 우리의 가장 큰 적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과제가 불가능한 것처럼 들리면 사람들은 포기할 것이다. 위기가 요청하는 일들을 하지 않을 것이다. 목소리 높은 제안자나 힘있는 활동가가 되는 대신 압도적인 절망에 빠질 것이다.

공개 대담이 끝나고 발표자들끼리 술이나 커피를 한잔 하려 모일 때 우리의 대화는 더욱 진지해진다. 최신 데이터는 무엇을 가리키며 기후 모델은 무엇을 예측하는가. 정부와 기업들은 무엇을 하거나 안하고 있는가. 이런 대화를 듣고 있자면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인류는 분명한 진리를 깨닫고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일까. 최악의 경우, 즉 인류가 살아남지 않을 것이란 예상이 맞아떨어지면 어떻게 할까. 경제적∙환경적 붕괴를 방지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을까. 과학적∙사회적 정보를 끼고 살면서 우리 전문가들도 절망을 이기기 위해 몸부림친다.

매우 위험부담이 크다. 만약 우리가 기후위기에 대한 응답에 실패한다면 우리가 아는 것만 해도 150만종에이르는 생명을 유지하는 지구의 용량이 파괴되는 걸 보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매우 거대하고 복잡하다. 과학부터 철학까지, 정치부터 경제까지, 농업부터 교육까지 여러 분과학문과 분야에 걸쳐있다. 요구되는 개혁의 규모도 엄청나다. 전 세계의 국가, 산업, 그리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제외한 전 세계 중산층 소비자들의 생활양식이 바뀌어야 한다. 이런 현실인식은 깊은 걱정을 만들어내며 쉽게 우울, 냉담, 절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오래된 응답이 자본주의의 영향과 글로벌 착취구조를 목격하는 이들을 유혹한다. 어떻게 하면 거대한 규모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젊은이들과 활동가들의 눈에서 빛나는 이상주의는 우리 앞에 던져진 문제의 규모에 눌려 사그라질 수도 있는데 말이다.

 

‘생태문명’: ‘뭔가’ 하는 빅 아이디어

생태문명이란 개념은 이런 상황에 직접 응답한다. 환경운동단체, 시위, 행동주의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그 모두에 깊이 의존하면서도 “큰 그림”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방식으로 이들을 보완한다. 장기적으로 확장된 현실주의라 생각하면 된다. 문명적 변화를 공부한다는 것은 결코 이상적인 일이 아니다. “걱정 마, 완벽한 문명이 곧 올 거야”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팔을 걷어붙이고 지속 불가능한 근대문명 다음에 올 문명의 기초를 쌓는 것이다. 그것이 5년이 걸리든 50년이 걸리든, 점진적으로 전환하든 격렬하게 붕괴하든 말이다.

그렇다면 왜 문명적 변화라는 거시적 관점은 우리에게 희망을 줄까.

(1) 방향을 제시한다. 생태문명이라는 가능성을 사색할 때 인간의 문명이 진정으로 지속 가능하려면 어떻게 조직돼야 하는지 숙고하게 된다. 이런 목표를 더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세운다. 지속가능하고 공정한 사회에 대한 개념이 분명해짐에 따라 현재의 정책에 대한 분명한 지침이 생긴다. 최소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대략의 로드맵, 즉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약간의 아이디어를 얻는다. 황야에서 목적 없이 방황하다 보면 희망이 사라진다. 그러나 목적지를 알면 아무리 큰 산이 앞을 가로막더라도 희망이 생긴다.

(2) 통합적 비전에서 나온다. 생태문명이라는 용어 자체가 희망을 준다. 이 말은 인류의 장기적 목표로서 다 함께 오랫동안 지속 가능하게 살아가는 글로벌 문명, 자원을 공유하고 소수의 잘못으로 다수가 고통 받지 않는 문명을 뜻한다. 우리가 당면한 위기의 복합적 성격은 똑같이 복합적 해결책을 통해서만 풀어갈 수 있다. 문명적 변화라는 비전을 제시하는 생태문명은 시스템 전환을 위한 시스템적 전략을 요청한다.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의 끝없는 목록이 우리를 압도한다. 그러나 통합적 접근법을 채택함으로써 길고 파편화된 문제들의 목록은 통합적인 문명 시스템이라는 렌즈를 통해 재정렬된다. 수없이 잘게 쪼개진 사회적, 환경적 문제들이 하나의 문명적 문제로 모아짐으로써 보다 통제할 수 있다고 느껴지고 희망의 감각을 불어넣는다.

(3) 이미 지금 여기서 실현되고 있다. 로드맵이 생기면 행동이 가능해지며 이것이 새로운 희망을 준다. 목표에 이르려면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차이를 만들어낼 때 기분 좋게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절망은 절대적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때 온다. 우리가 병과 캔을 재활용하고 운전을 덜하거나 전기자동차를 타고 지구적으로 생각하되 지역적으로 행동하면, 환경을 보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기가 있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런 실천들이 그 자체로 기후변화를 막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이런 단계에서 우리는 성공을 다르게 정의해야 한다. 이제 기후변화나 멸종을 피할 수 없다. 이미 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성공이란 새로운 문명으로 전진하는 것이며, 이런 방향으로의 활동이라면 경제적 붕괴를 비켜가든, 붕괴한 다음 재건하든 모두 가치 있는 일이다. 새로운 문명을 향한 움직임은 이미 시작됐고, 생태문명이 출현하고 있다.

(4)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 희망의 마지막 근거는 좀 이상하게 보이지만 아마 가장 심오한 것인데, 바로 현실주의(realism)이다.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는 두려운 일을 억누르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근심을 더욱 깊게 만든다. 반면 두려움을 꺼내놓고 직시하면 이상한 종류의 자유가 느껴진다. 현재의 “현대문명”과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 사이에는 깊은 협곡이 있다. 이런 위협은 우리가 적기에 대응하지 않아서 생긴 “현실”이다. 그대로 두면 세계화에 토대한 현재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구조의 상당 부분이 붕괴될 것이다. 그 결과는 엄청날 것이다. 우리가 당면한 게 무엇인지 알 때 가장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전지구적 상황을 확실히 가늠해보더라도 우리가 개입할 가능성은 남아있다.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아는 것(사실주의), 우리가 어디로 가는 지 아는 것(목표),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아는 것(로드맵), 그것을 하는 것(행동주의),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음을 아는 것(희망)은 전환을 만들어낸다. 지속가능한 문명을 향한 여정은 놀라운 기술적 돌파, 기득권층의 막대한 자원 공유, 나머지 계층의 자발적인 자기희생이 있다면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다. 그게 아니면 생태문명에 도달하기 전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골짜기를 먼저 건너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우리는, 우리 중 누군가는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장기적 결과를 깊이 고려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심오하고 현실적인 희망을 준다.

 

틀을 만들고 협력을 장려하기

생태문명은 일반적인 환경주의, 그리고 지속가능성을 위한 “녹색”운동과 어떻게 다를까.

정책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식량, 물, 에너지 같은 특정 영역의 전문가가 돼야 한다는 강한 압력을 받는다. 물론 우리에게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농업과 경제에서 지속가능한 관행을 만들고 재생에너지를 개발하고 대기 중 이산화탄소와 메탄가스를 줄이는 생활 방식을 장려해야 한다. 많은 비영리단체들이 이런 다양한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다. 정책 관련 일을 하지 않는 단체들은 풀뿌리 혁신과 운동을 지지하거나 새로운 영감을 주는 비전을 개발한다. 그러나 다양한 분야의 정책을 이어주는 다리가 필요하다.

가장 구체적인 데서 가장 통합적인 데까지 연속성을 생각해보자.

(1) 특정 이슈에 대한 전문적 토론: 인도의 표범 보존하기, 원자력 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하기.

(2) 에너지 분야 같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

(3) 두 분야 사이의 토론: 어떻게 에너지와 교통이 연관돼 있나.

(4) 어떤 이슈, 예컨대 기후변화를 전도시키는데 필요한 여러 단계들에 대한, 분야를 가로지르는 토론.

(5) 여러 단계와 분석을 글로벌 행동계획으로 통합하는 틀.

(6) 새로운 이야기, 패러다임, 혹은 통합적 사고 같은 세계관.

생태문명이라는 개념은 이중 5단계에서 작동한다. 앞의 4단계에서 마지막 6단계로, 그리고 마지막 6단계에서 각각의 단계로 가도록 만든다. 문제를 통합적으로 보고, 각 분야들 사이의 연관성을 찾고, 장기적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분야들 사이의 연결을 만든다.

협력을 장려하는 것과 틀을 만들어내는 것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협력을 장려하고 유지하는 것은 네트워크를 작동시키고, 조직적 구조를 만들어 지원하고, 소통을 유지하고, “활발한 후원자”를 발굴하고, 컨퍼런스와 공적 행동을 조직하는 것을 뜻한다. 365.org(편집자주: 작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빌 맥기번이 이끄는 글로벌 기후변화 NGO), 그린피스, 시에라클럽, 세계야생동물기금 같은 단체들은 이런 일을 매우 잘 한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아우르는 틀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르다. 지속가능한 미래 문명은 사회의 모든 분야를 다시 디자인하는 차원의 틀이 필요하다. 이런 통합성은 특정 환경분야의 성취가 아닌, 문명적 변화를 요구한다. 모든 분야의 활동은 이런 목표를 향한 과정의 단계에서 각자 어떤 역할이 필요한지에 근거해 평가돼야 한다. 전체 숲을 바라볼 수 있다면 개별적 나무들을 어떻게 보전해야 할 지 알 수 있다.

“통합적, 시스템적, 장기적”이라는 방향은 환경운동을 규정하고 구조화하고 수행하는데 중요한 지침이다. 문명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요소들의 연관성을 추적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고 다듬고 시험하고 적용할 수 있다. 이것이 식량정의, 농업개혁, 식수, 여성과 소녀들의 역량강화, 사회적∙개인적 생활양식 변화까지 아우른 전 분야의 협력을 유지하는 필수적 틀이다. 특정 정책분야에서 일하는 씽크탱크, 특정한 개혁을 주장하는 단체들은 생태적 전환의 핵심이다. 그러나 장기과정의 조정을 위해서는 예컨대 종교간의 연합이나 정부, 산업, NGO 사이의 협력처럼 사회 여러 분야를 가로지르는 통합이 요구된다.

심지어 여러 분야에 걸친 제안조차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다. 폴 호컨의 최근 저서인 『드로다운(Drawdown)』(국내번역서 제목은 『플랜 드로다운』) 은 “지구 온난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지금까지의 제안을 모두 망라한 계획”으로 소개된다. 저자는 기후변화에 대한 100가지 해결책으로 “드로다운 아젠다”를 구성했다. 에너지, 식량, 여성, 도시건설, 토지이용, 교통, 재료, 그리고 “매력적인 미래에너지”로 분야를 나눴다. 호컨은 매우 다양한 분야를 한 권의 책으로 모으는 작업을 통해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묻고 싶은 것은 기후변화와 그것에 기여한 수십 가지 요소들이 문명적 변화라는 보다 넓은 운동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되느냐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 앞에 놓인 자기희생에 필요한 희망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궁금하다. 기후변화를 막으려면 단순히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 서로 다른 분야들을 개념적으로 연결하는 글로벌 차원의 사고가 필요하다. 다양한 분야를 가로지르는 높은 수준의 통합이 시급하며, 이론적으로 더욱 정교하고 높은 수준에서 어떻게 변화를 만들어낼지 사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백캐스팅’: 목표를 향한 행동을 만들어내기

장기적 목표를 분명히 함으로써 현재의 행동에 지침을 제공할 수 있다. 학자들은 이 과정을 ‘백캐스팅’ 이란 용어로 부른다. 백캐스팅은 미래의 특정한 결과에서 시작해서 현재의 조건으로 거슬러 내려오는 반전 예측 기술이며 1970년대 이래로 주요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사용돼왔다. 우리는 종종 50년 후의 미래에 성취하고 싶은 결과를 그려볼 수 있지만, 그렇게 되려면 현재 어떤 단계가 필요한지 확실히 모른다. 디자인 연구에서 사람들은 미래의 사건이나 상황을 제안한 다음, 현재로 이동해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어지는 타당한 인과 사슬을 구성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현재에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면서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한다. 이와 반대로 백캐스팅은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가능한 한 자세히 서술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장기적 성과를 촉진할 수 있는 단기계획 및 정책목표를 끌어낸다.

‘리버스 엔지니어링’(역공학)이란 용어 역시 함축은 약간 다르지만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된다. 컴퓨터과학에서 유래한 이 개념은 하드웨어이든 소프트웨어이든 완성된 제품을 분해해서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보고 다시 새로운 결과를 내도록 조립한다. 리버스 엔지니어링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움직이며, 그런 다음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시 조립한다. 이 기법을 은유로 가져오자면, 우리가 원하는 성과를 내기 위해 사회의 부분이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볼 수 있도록 생태문명이라는 넓은 개념을 조심스럽게 분석하거나 쪼개볼 수 있다.

용어가 무엇이든, 핵심 아이디어는 같다. 미래에서 시작해서 현재 필요한 행동을 끌어낸다. 원환을 추적하고 재추적하는 게 필수적이다. 현재의 의사결정에 대한 지침을 얻기 위해 기 위해 우리가 원하는 결과(지속가능한 사회)로부터 백캐스팅하기, 그리고 현재의 의사결정이 가져온 성과가 목표를 이루는 단계로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내다봄으로써(forecasting) 목표를 보다 분명히 하고 백캐스팅을 더욱 정확하게 만들며 나아가 현재의 행동을 방향 짓는 일이 반복돼야 한다.

이것이 생태문명 운동이다. 각각의 분야를 가로지르는 생태적 원리에 기초한, 새로운 종류의 문명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거슬러 내려와 일해야 한다. 백캐스팅은 현재의 환경정책을 결정하는데 기준을 제시한다. 학자와 지도자들은 우리가 실제 하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대조한다. 예컨대 에너지와 교통 분야에서 현재의 관행들은 기후변화를 가속화시켜 현재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시스템에 위협이 된다. 대체에너지 자원과 지속가능한 교통에 대한 예측은 생태적 원리에 기반한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보다 구체적으로 상상하도록 해준다. 다시 한번 백캐스팅함으로써 정책입안자들은 현재 시점에서 보다 자세한 목표와 전략적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다.

정부,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많은 경우 NGO 지도자들도 이런 방식을 잘 채택하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민간분문에서는 백캐스팅 기법을 많이 응용한다. 산업계는 미래의 수요공급 패턴을 계산하고 가용자원과 수요를 추산한다. 그런 다음 미래상황에 대한 예측에 기반해 투자를 결정한다. 아마 이런 종류의 계산이 석유회사 쉘로 하여금 수소차 개발을 선도하게 했을 것이다. 앞서 말한 드로다운 프로젝트는 여러 분야에 걸쳐 기후변화를 늦추는 방법들을 모았으며 이는 중요한 진전이다. 그러나 백캐스팅 기법을 활용했더라면 특정한 문명적 목표를 위해 어떻게 다양한 단계를 통합하고 우선순위를 정할지, 여러 다양한 요소들이 합쳐지면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질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실적인 희망

백캐스팅 기법을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동의는 무엇일까. 우선 목표에 동의해야 한다. 우리는 진정으로 생태적인 문명이 목표라고 생각하는데 이 목표는 얼마든지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목표를 어떻게 이름 짓든, 이런 문명은 기계와 개인보다 유기체와 생태학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이항대립으로 세계를 표현하지만, 새로운 사고는 세계를 구성하는 두 용어쌍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생각하는 철학을 가르친다. 개인들의 소비에 대한 욕망이 인류를 붕괴의 끝까지 데려왔다면, 생태적 원리 위에 세워진 사회는 상호의존성, 즉 경쟁보다는 협력을 중심에 두는 데서 출발할 것이다. 보다 효율적인 기술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공동의 이익을 목표로 살기 전까지는 아직 전환운동에 완전히 참여한 게 아니다.

우리는 장기적 비전, 즉 현재 많은 이들이 하는 일을 넘어선 비전에 중점을 둔다. 상황을 개선하려는 많은 노력들이 있고, 그것을 지지하거나 돕는 것도 중요하다. 현재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들은 에너지, 교통, 무역, 개발, 농업, 교육, 도시화, 경제, 정치, 국제관계 등 모든 분야에 걸쳐있다. 그러나 우리 목표는 현재 구조를 “개선”하는 게 아니라 현재 구조를 “전환”하는 것이 돼야 한다.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려면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뒤 캠프 1, 2, 3, 4로 계속 목표를 옮겨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환경주의를 넘어 “녹색화”를 넘어, 지속가능한 발전을 넘어, 물질주의를 넘어, 자본주의를 넘어, 사회주의를 넘어, 심지어 생태정의도 넘어 계속 나아가야 한다.

재생에너지를 예로 들어보자. 풍력이나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사용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현재 에너지 소비수준을 유지하면서 탄소배출량을 줄이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지속가능성”이란 용어는 종종 현재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사용된다. 반면 생태문명이 재생에너지 사용을 장려할 때는 자연과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현재의 착취적 시스템”을 넘어서는 보다 근본적인 전환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는 생활양식과 소비수준을 바꾸는 마인드셋의 전환이다.

현재 상황은 희망이 없지 않다. 전문가들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행동은 정확하고 시급하다. 전 세계의 NGO, 용기 있는 개인, 종교 공동체, 몇몇 정부와 기업들이 필요한 변화를 만들기 위해 구체적이고 희생적이기까지 한 단계들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 그리고 승산을 가늠하는 일은 여전히 부족하다. 일부 환경주의자와 활동가들은 우리가 열심히 하면 재난을 피할 수 있다는 낙관적 생각을 갖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데이터나 현재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를 보면서 이미 늦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희망 없이 사는 것은 행동을 무력화시키지만, 순진한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것 역시 무기력으로 빠지는 절망을 낳는다. 제3의 가능성은 생각과 행동에 지침을 주는 접근인데, 이 역시 태도라는 중요한 문제로 돌아간다. 현재 지구의 상황을 문명적 변화로 통합하기 시작하면 “현실적이면서 장기적인” 새로운 종류의 희망이 생긴다.

현실적인 희망에는 두 가지 토대가 있다. 첫째는 지금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활양식을 바꾸고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강화하고 자급자족 기술을 배워서 탄소발자국을 급격하게 줄이자. 이런 지식을 나누고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전환운동을 확산시키자. 이미 전세계에서 인류는 움직이고 있다. 아직 난파위험에 빠진 배를 되돌릴 시간이 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남아있다. 현재의 우리 문명이 새로운 사막과 농작물이 자라지 않는 황무지, 오염된 물과 공기를 만들어낸다면 문명의 하부구조는 붕괴하고 우리 문명은 앞선 다른 문명들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생존자들이 지속 불가능한 문명을 다시 만든다면 또다시 같은 운명을 겪을 것이다. 오로지 지속가능한 문명만이 살아남고 오래 번성할 수 있다. 그래서 장기적 해결책은 단 하나, 진정으로 생태적 문명을 만드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이런 문명을 만들기 위해 한걸음씩 내딛는 것이 현실적인 희망의 토대이다.

 

필립 클레이튼

미국 생태문명연구소 대표

화, 2020/04/21-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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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세 강화법안이 미통당의 몽니와 패악으로 20대 국회를 통과 못하고 사실상 주저앉았다. 종부세 강화 법안이 무산되자 시장에선 즉각 매물을 거둬드리는 소유자가 등장했다.

 

확실한 신호를 줘야 부동산이 제자리 찾을 것

21대 국회가 개원하면 할 일이 차고 넘치지만 무엇보다 먼저 처리할 게 종부세 강화 법안의 처리다. 시장참가자들에게 확실한 신호를 줘야 부동산 시장이 제자리를 찾는다. 시장참가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부의 신호는 보유세에 대한 태도다.

기실 2012~2013년 대바닥을 찍고 2014년부터 상승하던 서울 아파트 시장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더 가파르게 상승한 데에는 시장참여자들의 광기를 제어하지 못한 문재인 정부의 정책실패 탓이 컸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실패는 시장안정 대책의 축차적 투입으로 인한 정책효과의 감소에서도 기인하지만, 보유세에 대한 극히 미온적인 태도 탓이 결정적이었다.

보유세 강화만큼 부동산에 대한 기대수익률을 낮추는 정책수단도 찾기 힘든데 문재인 정부는 한사코 이를 회피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직접 경험한 바와 같다. 서울 아파트 시장은 2014년부터 2019년까지 장장 6년 간의 상승랠리를 구가했다. 이는 역대 최장기간 상승기록이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2014년 9월 4억 6186만원에 불과(?)했던 서울아파트 매매중위가격은 올 4월 8억 3666만원을 찍었다. 무려 80%가 상승한 것이다.

그나마 이건 약과다. 신축아파트로 눈을 돌리면 정말 쇼킹한 장면들을 볼 수 있다. 서초의 랜드마크 신축 아파트가 평당 1억원을 돌파했다느니 하는 소식은 그들만의 리그로 여기면 된다 싶지만, 사정이 그리 녹록치 않다. 마포의 랜드마크 신축 아파트가 전용 84제곱미터 기준으로 15억원을 넘고 영등포와 중구의 랜드마크 신축 아파트가 13억원을 넘는다. 교통이 그리 좋지 않은 뉴타운의 신축아파트가 전용 84제곱미터 기준으로 12억 내외이며, 변두리로 불러도 좋을 로케이션의 신축 아파트도 10억원 내외를 호가한다.

시간을 거슬러서 2014년 10월로 가보자. 지금은 서울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라고 불러도 좋을 한강변 서초 아크로리버파크가 2회차 분양을 했을 때로 말이다. 당시 아크로리버파크의 평당 분양가는 5천만원이었는데 이는 당시까지 역대 최고가였다. 이 분양가가 현재 마포의 대장 아파트 매매가격과 비슷하다. 한마디로 불과 6년만에 ‘서울 아파트값의 강남화’가 진행된 것이다.

부동산에 관한 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대오각성해야

부동산만 놓고 보면 문재인 정부는 무주택자들에게 악몽을 선사한 정부, 꿈과 희망을 앗아간 정부다. 반면 문재인 정부 아래서 서울에 신축 아파트(전용 84제곱미터 기준)를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최소한 10억원대 부자로 비상했다. 투기에 가담하지 않은 무주택자들은 너무나 가난해진 반면 주택을 소유한 이들은 가치의 생산에 아무 기여도 없이 천문학적 부를 거머쥔 것이다. 이 대목에 대해선 정말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맹성해야 옳다.

각설하고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결자해지의 각오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서울 아파트값을 문재인 정부 출범 직전 수준으로 돌리겠다는 목표를 천명하고 이를 달성할 정책수단들을 투사해야 한다. 그 첫걸음이 종부세 강화임은 긴말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압도적 다수의 시민들에게 경제는 곧 부동산임을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한다.

화, 2020/05/12-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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