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대륙고무, 친일귀족세력과 일본자본의 결합체 용산 원정에 자리했던 조선 고무신의 대명사

지역

대륙고무, 친일귀족세력과 일본자본의 결합체 용산 원정에 자리했던 조선 고무신의 대명사

admin | 토, 2021/06/26- 00:42

[식민지비망록 71]

대륙고무, 친일귀족세력과 일본자본의 결합체
용산 원정에 자리했던 조선 고무신의 대명사

 

이순우 책임연구원

 

조선총독부에서 매달 발행하던 기관잡지(機關雜誌) <조선(朝鮮)> 1924년 3월호에는 「호모화(護謨靴) 전성(全盛)의 조선(朝鮮)」이라는 제목의 토막글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호모’는 ‘고무(ゴム)’의 일본어식 음차(音借) 표기이므로, ‘호모화’는 곧 ‘고무신’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근시(近時) 호모화공업의 발달에 따라 가격이 저렴하고 내구력(耐久力)과 방수력(防水力)이 있어서 중류자 이하(中流者 以下)의 수요가 격증(激增)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선내생산(鮮內生産)의 상황을 보면, 대정 9년(1920년)에는 극히 미미했던 것이었으나 10년(1921년)에는 가격(價格) 17만 8천 원(圓)에 13만 7천 족(足)의 생산이 있었고, 11년(1922년)에는 일약(一躍) 94만 원에 달했으며, 12년(1923년)에는 아직 정확한 숫자를 판별하지는 못하나 적어도 280만 원(400만 족)의 거액에 달할 것이다. 이밖에 내지(內地, 일본)에서의 이입액(移入額)은 12년에는 약 480만 원(685만 족)이었으니까 내선(內鮮)을 합산하면 실로 1,165만 족이라는 놀랄만한 수요를 나타내고 있다.
호모화의 수용(需用) 탓에 양화(洋靴) 및 조선화(朝鮮靴)는 비상한 타격을 받았고, 대정 9년에는 양화의 생산이 32만 6천 족이었으나, 동 10년에는 18만 8천 족, 동 11년에는 다시 13만 3천 족으로 줄어들고 있다. 또 선화(鮮靴)의 쪽은 대정 9년에는 54만 4천 족이었다가, 10년에는 일시(一時) 70만 4천족으로 증가하였으나 11년에는 급전직하 32만 8천 족으로 감소했다.

이 글은 바야흐로 조선 고무신의 탄생과 더불어 가히 고무신의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일찍이 이 땅에 고무신의 등장은 1919년 무렵에 시작된 일이었는데, 이때까지는 일본 쪽에서 건너온 ‘단화형(短靴型)’ 고무화가 전부였다. 이것은 서양식 구두를 본떠 만든 형태이며, 구두 자체를 전부 고무로 만들었다고 하여 ‘총고무화(總ゴム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기존의 ‘경제화(經濟靴)’ 또는 ‘편리화(便利靴)’에 고무바닥만을 덧댄 ‘고무저화(底靴)’ 형태가 나타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값싸고 질기다”는 고무신 자체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조선신발’ 형태의 고무신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21년 봄의 일이었다. 그 선두에 선 업체는 국산 고무신의 대명사로 여겨질 만큼 유명했던 대륙고무공업소(大陸ゴム工業所)였다. 

 

(왼쪽) <매일신보> 1921년 2월 1일자에는 대륙고무공업소와 원창양행의 공동명의로 나온 ‘순고무 경제화 및 순고무 양화’ 광고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대륙고무신과 관련하여 최초로 등장한 광고문안이다. (오른쪽) <매일신보> 1919년 9월 28일자에 게재된 원창양행(종로 1정목 47번지)의 광고문안이다. 이곳은 원래 이하영 자작의 아들인 이규원이 수출입 무역업을 목적으로 개설한 가게였으나, 1921년에 대륙고무신이 본격 생산되면서 자연스레 대륙고무공업소의 총판매부(總販賣部)로 전환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21년 2월 1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순고무 경제화 및 순고무 양화 광고문안’이 처음으로 수록된 것이 눈에 띈다.

 

본소(本)에서 수년래(數年來) 고무품 제조(製造)에 대하여 기다(幾多) 연구(硏究)를 중(重)하여 금(今) 기 연찬(其 硏鑽)을 수성(成)하고 구주(歐洲)에 전왕견학(專往見學)한 기사(技師)를 고빙(
聘)하여 공장(工場)을 신축(新築)하고 제조(製造)를 개시(開始)함은 아 조선(我 朝鮮)에서 본소(本
所)가 비조(祖)가 되고 취중(就中) 순(純)고무 경제화(經濟靴) 제조(製造)는 세계중(世界中) 다만
본소(本所)뿐이압. …… (중략)
경성부 용산 원정 1정목(京城府 龍山 元町 一丁目) 대륙고무공업소(大陸ゴム工業所)
경성 종로 1정목(京城 鐘路 一丁目) 위탁판매부(委託販賣部) 원창양행(元昌洋行)

 

여기에 대륙고무의 위탁판매부로 등장하는 ‘원창양행’(1919년 8월 18일 상호등록)은 원래 면포(綿布), 주단(綢緞), 저포(苧布), 모직(毛織) 등을 수입 판매하는 가게였으나 이때부터 고무신 총판매점으로 변신하였다. 이곳의 주인은 이하영(李夏榮, 1858~1929)의 장남 이규원(李圭元, 1890~1945)이었으며, 이하영은 익히 알려진 바대로 영어통역으로 관직에 발을 들여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러 외부대신과 법부대신을 지냈고 국권피탈 후에는 일제로부터 자작(子爵)의 작위를 부여받은 인물이었다.
대륙고무의 연혁을 서술한 몇몇 자료에 이곳에서 고무신을 생산 개시한 때가 1919년이라고 적어놓은 것이 곧잘 눈에 띄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회사에서 첫 고무신이 탄생한 것은 1921년의 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선> 1923년 1월호에는 조선총독부 상공과(商工課)에서 정리한 「호모화(護謨靴)에 관한 조사」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이 자료에는 ‘내지품(內地品)과 조선품(朝鮮品)의 공급상황’을 정리한 통계표도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이 가운데 1919년도와 1920년도의 해당부분에는 ‘내지품 이입고’만 표시되어 있을 뿐 ‘조선내 고무신 생산고’에 관한 집계수치는 전무한 것으로 보더라도 고무신의 국내생산은 1921년부터 개시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大陸護謨工業株式會社) 관련 주요 연혁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시정이십오년사>(1935)에 수록된 종로거리의 방공연습(防空演習) 사진자료를 보면 뒷 배경에 우연히 대륙고무총판매부(종로 1정목 47번지)의 간판이 포착된 모습이 눈에 띈다. 참고로 왼쪽 전봇대와 인접하여 조선광무소(朝鮮鑛務所, 종로 1정목 44번지) 간판이 붙어 있는 건물의 1층이 바로 그 유명한 이상(李箱)의 ‘제비다방’이 있던 공간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매일신보> 1922년 4월 6일자에 수록된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주식모집광고이다. 여기에 수록된 발기인 명부를 보면 창립위원장인 남작 이윤용을 비롯하여 후작 박영효, 자작 이하영, 자작 이창훈, 남작 이근호 등 친일귀족세력의 다수와 여러 일본인 실업가들이 동시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조선 고무신이 크게 득세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대륙고무공업소에서는 사세를 더욱 확장하기 위해 주식회사로 전환하기로 하고, 이에 따라 1922년 4월 6일에는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전체 발행 주식수 1만 주 가운데 1천 주에 대하여 주식공모를 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각 신문지상에 발표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창립 발기인(創立 發起人)의 명단에 포함된 인사들의 면면이었다.

 

후작 박영효(侯爵 朴泳孝), 자작 이하영(子爵 李夏榮), 자작 이창훈(子爵 李昌薰), 남작 이윤용(男爵 李允用), 남작 이근호(男爵 李根澔), 주성근(朱性根), 박용삼(朴容三), 박종환(朴宗桓), 유혁로(柳赫魯), 야마기시 유타로(山岸佑太郞), 토미타 기사쿠(富田儀作), 나카니시 토라히코(中西虎彦), 타나카 요시지로(田中吉次郞),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오키 야스노스케(大木安之助), 후쿠다겐이치(福田源一), 텐니치 츠네지로(天日常次郞).

 

여기에는 조선귀족 5인을 포함한 조선인 9인과 일본인 실업가 8인의 이름이 죽 나열되어 있는데, 가히 친일귀족세력과 일본자본의 결합체라는 평가가 나올만한 구성이었다. 천도교에서 발간한 월간잡지 <개벽(開闢)> 제33호(1923년 3월호)에는 농구생(弄球生) 필명의 「천현지황(天玄地黃)」이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고, 이 가운데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실체를 꼬집는 내용도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조선인 전용(朝鮮人 專用)의 고무화(靴)]

일조결하(一朝決河)의 세(勢)로써 조선인의 이물계(履物界)를 여지없이 점탈(占奪)하여 매년 수천만 원의 이금(利金)을 흡수(吸收)하는 고무화(靴), 그야말로 식자(識者)의 혼담(魂膽)을 서늘케 한다. 참패를 당한 건유혜(乾油鞋), 목리(木履), 망혜(芒鞋) 등의 재래상(在來商)은 한번 개량책(改良策)도 강구해 볼 여지가 없이 그냥 무조건(無條件)으로 영원히 수(手)를 속(束)할 뿐인가.… (중략) … 요사이에 이것을 경영(經營) 보려고 소자본(小�本)으로써 공장배치(工場排置)를 한 데가 기개소(幾箇所)가 있는 듯하나 이런 것들은 아직 아희적 작업(兒戱的 作業)에 지나지 못할 뿐이오, 개중(箇中)에 가장 우승(優勝)한 지위(地位)에 서서 인기(人氣)를 끄으는 자(者)는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大陸護謨工業株式會社)이다. 그러나 이 회사(會社)의 조직(組織)이야말로 좀 자미(滋味)스럽지 못하다. 표면(表面)의 광고(廣告)로는 조선인(朝鮮人)의 명의(名義)를 내여 세우고 이면(裏面)의 실권(實權)은 전부 일본인(日本人)의 장중(掌中)에서 놀아난다. 아아 천하(天下)가 받지 않는 고무화, 오직 조선사람의 돈이 맛나는가? 살피여라! 백천(百川)이 동해(東海)로만 경주(傾注)되는 줄을!!

 

(왼쪽) <동아일보> 1922년 9월 16일자에 수록된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광고문안이다. 여기에는 흥미롭게도 “이왕 전하(李王 殿下, 즉 순종)께서 어용(御用)하심에 황송함을 비롯하여 각 궁가(宮家)와 여관(女官) 각위의 애용을 받았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는 문구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오른쪽) <매일신보> 1925년 4월 5일자에 수록된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광고문안에는 용산 원정(龍山 元町)에 자리했던 대륙고무공장의 전경 사진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1926년 1월 25일에 발생한 고무증기가마 폭발사건으로 인해 인명피해와 함께 큰 재산손실이 빚어지기도 했다.

 

<조선총독부관보> 1922년 9월 8일자에 수록된 「상업 및 법인등기」 항목을 보면, 1922년 8월 15일에 설립된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본점 소재지는 경성부 원정 1정목 124번지(京城府 元町一丁目 24番地)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사업목적은 “호모(護謨, 고무)를 원료로 한 선화(鮮靴), 양화(洋靴), 지나화(支那靴) 및 기타 고무를 원료로 한 물품 일체의 제조 판매”라고 기재되어 있다.

 

 

취체역(取締役)에는 자작 이하영, 이규원, 자작 이창훈(자작 이근택의 습작자), 이명구(李明九, 남작 이윤용의 아들)와 일본인 이와마 료(岩間亮, 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서기 출신)가 이름을 올렸고, 이들 가운데 이하영이 대표취체역에 선임되었다. 이와 함께 감사역(監査役)에는 창립위원장이던 남작 이윤용을 비롯하여 조준식(趙俊植, 익산 거주)과 일본인 텐니치 츠네지로(天日常次郞)가 공동 취임하였다. 일본인 이와마 료는 1926년 1월 23일에 취체역에서 퇴임하였고, 도장관 출신의 중추원 참의였던 유혁로(柳赫魯, 1855~1940)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선임되어 종신재직(終身在職)하였다.
대륙고무의 유명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이곳이 조선총독의 순시행로에 포함된 적도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확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륙고무의 유명세에 편승하여 무단으로 상표(商標)를 도용(盜用)하였다가 결국 신문지상을 통해 공개적인 사죄광고(謝罪廣告)를 게재해야 했던 사례들도 여러 건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와중에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의 대표취체역 사장이면서 실질적인 소유주였던 자작 이하영이 1929년 3월 1일에 숨지자 그해 7월 26일에는 그동안 감사역 자리에 있던 남작 이윤용이 대표취체역 사장에 올랐고, 이하영의 아들인 이규원 역시 대표취체역 전무에 선임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의 하나는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본점과 공장 소재지가 용산원정(龍山 元町, 지금의 원효로 1가)에서 벗어나 경성부 중림동(京城府 中林洞) 155번지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총독부관보>에 게재되는 「상업 및 법인등기」 항목을 통해 확인해본즉, 이 일이 벌어진 때는 1932년 10월 20일이었다.
다시 1938년 9월 8일에 이르러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대표취체역 사장이던 남작 이윤용이 숨지자, 자연스레 자작 이규원이 홀로 대표취체역의 역할을 수행하는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관보> 1941년 3월 28일자에 수록된 「상업 및 법인등기」 항목을 보면, 1941년 1월 31일자로 기존의 취체역이던 권영일(權寧一), 윤정석(尹晶錫), 권영순(權寧順)은 물론이고 대표취체역이던 이규원(李圭元)과 감사역(監査役)이던 최상집(崔相集), 후지노 아이센(藤野愛泉), 이재영(李宰榮) 등이 일괄 사임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경성일보> 1929년 3월 10일자에 수록된 이하영 자작의 장의관련 기사이다. 그의 영결식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는 독립문외 광장(獨立門外 廣場)이다. 그가 죽은 후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대표취체역 사장은 이윤용 남작이 물려 받았고, 다시 그가 사망한 1938년 이후에 그 자리는 이규원 자작에게로 돌아갔다.

<조선일보> 1927년 3월 3일자에 수록된 대륙고무 상표도용에 관한 사죄광고이다. 대륙고무신이 하도 유명세를 떨치다 보니 이것과 흡사하게 대승표(大陞標)라는 글자로 소비자들을 현혹한 사례에 해당한다. 이것 말고도 1929년 12월에는 대축표(大祝標)라는 글자로 상표도용을 하다가 적발되어 사죄광고를 낸 별개의 사례도 있었다.

 

이들을 대신하여 이날 츠지모토 케이조(辻本敬三)와 카네코 요지로(金子要次郞)가 새로운 대표취체역에 공동 취임하였고, 츠지모토 에이이치(辻本英一), 이모세 기이치로(妹背義一郞), 츠지모토 노보루(辻本昇) 등이 취체역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감사역에는 쿠와바라 칸이치(桑原貫一)와 시모무라 카메(下村龜)가 선임되었는데, 여기에 나열된 이들은 모두 일본 오사카(大阪) 지역에 주소지를 두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었다.
이것으로 보면 바로 이 시기에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경영권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주식 지분 역시 이들의 수중으로 넘겨지면서 이 회사는 실질적으로 일본인 기업체로 전환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둔 바로 그 시기에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창설 이후 줄곧 전무와 사장으로 있던 자작 이규원이 숨졌다. <매일신보> 1945년 4월 28일자의 관련기사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알리고 있다.

 

조선귀족회(朝鮮貴族會) 부회장 이규원(李圭元) 자작은 그동안 숙환으로 가료중이던 바 24일 오전 한 시 부내 서대문구 중림정(中林町) 155번지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향년은 56세이며, 영결식은 28일 오전 열 시 자택에서 집행하는데 상주는 이종찬(李鍾贊) 소좌로 현재 출정중이다. 고(故) 이 자작은 경성에서 출생하여 한문사숙(漢文私塾)을 나와 서화(書畫)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왕직 시종(李王職 侍從), 대륙고무공업 사장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조선귀족회 부회장의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해방 직후에 <동아일보> 1946년 3월 20일자에 수록된 「사복(私腹)에 걸린 국재(國財), 1억 4천만 원, 70회사 공장을 적발, 군정청 감찰부(軍政廳 監察部)에서 즉시 전부 몰수」 제하의 기사를 보면,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회사와 공장을 새조선의 산업부흥이란 미명 하에 접수니 관리니 하여 맡아가지고 사리사복을 채우고 있던 곳을 대대적으로 적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바로 이들의 목록에 ‘대륙고무’도 포함된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 이곳이 적산기업체(敵産企業體)로 분류된 탓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이보다 한참의 세월이 더 흐르고 <경향신문> 1974년 1월 26일자에는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서울 서대문구 중림동 155의 2, 대표 이종호) 2층에서 불이나 2층과 1층 일부를 불태웠다는 내용의 기사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것보다 2년 뒤에 나온 <경향신문> 1976년 9월 28일자에 수록된 「주택지 195 공해업소 내년까지 이전(移轉) 명령」 제하의 기사에 매연, 폐수, 악취, 소음 등 을 유발하는 주거지역 내 공해업소의 하나로 ‘대륙아스타일(중림동 155)’이라는 회사가 포함된 것이 눈에 띈다.
아마도 이것이 대륙고무공업에 관한 거의 막바지의 흔적인 셈인데, 한때 친일귀족들의 집합체이자 조선 고무신의 대명사로 불렸던 대륙고무의 화려했던 시절은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14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 ‘혈서 군관지원’

 

9월 6일 서울중앙지방법원 317호 법정, 10시로 예정된 재판이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선고 당일인데 정미홍씨는 10시가 넘어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무죄를 확신하는 것인지 마음이 매우 느긋한가 봅니다. 반면 연구소 법무책임자인 저는 매우 초조했습니다. 박정희 혈서기사와 관련된 형사재판은 이번이 처음이기에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싸운 만큼 패소에 대한 두려움도 컸습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정미홍씨가 법정에 들어왔고 뒤따라 수십 명의 어르신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분들은 태극기와 성조기가 교차되어있는 배지를 옷깃에 달고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법정에 자리 잡았습니다. 의자에 앉지 못한 분들은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순서가 후반부에 있는지 다른 여러 재판이 먼저 진행되었습니다. 한참 후에 시작된 재판, 정미홍씨가 선고를 받기 위해 피고인석에 섰습니다. 재판부는 판결을 내린 경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공소장의 내용, 재판의 쟁점사항, 원고와 피고 간 주장의 충돌에 대해 차분한 목소리로 정리했습니다. 마치 원고와 피고 그리고 방청객의 동의를 구하기 위한 설득 과정 같았습니다. 이 재판의 쟁점은 ‘민족문제연구소의 박정희 혈서기사 조작’ 여부였습니다. 만약 조작이 있었다면 정미홍 씨가 주장한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박정희 혈서기사조작’ 이란 트위터는 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조작이 없었다면 정미홍 씨는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이 되기 때문에 유죄가 인정될 것이었습니다.

정미홍 씨는 연구소가 박정희 혈서기사를 발굴했다며 언론에 만주신문을 공개한 2009년 이전 5년 동안 만주일보에 해당기사가 있다고 공식적으로 수차례 밝혔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만주일보가 1939년 당시 폐간상태였던 것으로 확인되자 만주신문으로 말을 바꾸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바꾼 사실이 조작의 증거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재판부도 이 부분을 쟁점으로 여겼습니다. 연구소가 2005년부터 2009년까지 공식적으로 만주일보에 박정희 혈서기사가 실려 있다고 말한 증거를 정미홍 씨가 제출한다면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증거는 없었습니다. 연구소는 만주신문에서 해당 기사를 발굴하기 전까지 어떤 신문에 박정희 혈서기사가 실렸다고 특정한 사실이 없었습니다. 증언만 있을 뿐 1차사료인 혈서기사를 본 적이 없으니 특정할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5년 동안 만주일보라고 주장했다는 말이 어디에서 나온것인지 출처가 궁금할 뿐입니다. 하지만 연구소는 만주일보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5년 동안’의 시작이 되는 2005년에 연구소가 공식적으로 발간한 출판도서에서 증거를 발견했고 이를 재판부에 제출했습니다.
재판부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5년간 만주일보를 근거로 박정희 혈서설을 주장해왔다는 증거는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정미홍 씨에게 “전직 아나운서로 대중적인 영향력이 큰 사람이기에 명예훼손 글을 무분별하게 실은 경우 통상에 비해 높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서 “다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용한 링크글의 논지가 분명하지 않고 전파가능성도 낮은 점을 감안해 벌금 30만원에 처한다.”고 판결했습니다.
벌금형이 내려지자 정미홍 씨는 판사를 향해 “판결을 인정할 수 없으며 역사왜곡을 바로 잡는 활동을 계속 하겠다. 이 법정에도 태극기가 걸려 있는데 잘못 걸려 있다. 제대로 다시 걸어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방청객도 술렁였습니다. 몇몇이 일어나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경위들이 나와 제지했고 그분들은 이내 복도에 나가 재판부에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 소리가 법정 안에까지 들렸습니다.
정미홍 씨는 기자 인터뷰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계속 지적하고 있기에 저에 대해 인신공격 하는 것”이라며 “판사가 링크글 내용이 불분명하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에 무식하기 때문으로, 역사공부를 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즉각 항소 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번 재판은 박정희 혈서기사와 관련된 형사재판이었습니다. 연구소는 이미 민사재판에서 최종 승소하였습니다. 지난 1월 대법원은 박정희 혈서가 날조라고 주장한 강용석 씨에게 500만원, 정미홍 씨에게 300만원, 일베회원 강모씨에게 300만원의 손해배상을 명령했습니다. 이 중 강용석 씨와 정미홍 씨는 해당 금액을 연구소에 보내왔고 일베회원 강모씨는 벌금을 연체하여 이자가 계속 불어나고 있는 상태입니다.

∷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월, 2017/09/25- 11:24
135
0

009

010

011

012

화, 2017/08/29- 14:21
133
0

0828-12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사회는 없다.’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자본주의의 황금기’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자본의 거대한 재구성’과 ‘노동의 국제 분업(화)’를 수반한 ‘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정부의 실패’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기라는 ‘신자유주의’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영국사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억압·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진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고 강조했다. 영국판 역사전쟁을 알리는 신호였다.

한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영국의 역사가들은 좌파사관에 물들어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자학사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학대하는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했다.

기존 역사교육을 ‘자학사관’으로 몰아붙인 이 주장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로널드 레이건이 정권을 잡자 위로부터의 계급전쟁과 역사전쟁이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지배계급의 역사전쟁이 ‘역사수정주의’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었다. 역사수정주의의 핵심은 홀로코스트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85년의 ‘비트부르크 사건’은 독일의 과거, 즉 나치에 대한 기억을 변조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5년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방문 때 일반 독일군인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도 묻혀 있는 비트부르크 묘지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 방문을 두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레이건은 결국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도 헌화하는 형식으로 논란을 무마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서 그는 거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 젊은이들 또한 나치의 희생자입니다. …… 그들도 강제수용소의 희생자와 똑같은 희생자입니다.” 무장친위대를 일반 독일병사와 같이 취급한 것을 넘어 희생자로 다루었다. 가해의 상대화를 넘어 희생자로 둔갑시킨 이 발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정주의 견해나 보수세력의 역사공격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미 보수세력의 역사교과서 공격과 역사전쟁은 10년 후 대양을 건너 일본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벌어졌다. 세계화라는 물결과 더불어 역사전쟁도 세계화의 흐름을 탄 것일까. 이른바 ‘자유주의사관론자’들이라 불리는 일본판 뉴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으면서 역사전쟁을 집요하게 벌였다.

기존 역사교과서를 자학사관으로 공격 → 권력을 이용한 정책 개악(정책 변경) → 극우 교과서 제작
→ 교사의 교재 채택권 박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에게 강요(채택 과정)

교과서 공격과 정책 변경, 극우 교과서 제작과 배포, 어디서 많이 본 경로와 방식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이 벌였던 역사전쟁, 그것과 판박이다. 십 수 년간 일본의 뉴라이트가 밟았던 과정을 우리의 보수세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대표적인 공격 대상은 일본군‘위안부’와 난징대학살 기술이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뉴라이트는 처음에는 일본군‘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역사의 증인으로 ‘커밍아웃’하자 이제는 매춘이라 몰아붙였으며, 교육에 부적절함을 내세워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의 요구는 성공했고, 역사교과서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더 커졌다. 일본사회가 우경화되는 만큼 교과서 서술도 후퇴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이들의 역사관을 ‘구린내 나는 것에 뚜껑을 덮고 좋은 점만을 가르치는 신황국사관’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명박근혜’ 정부의 역사전쟁과 파국 그리고 식민지역사박물관

이번엔 한국 차례이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정부가 ‘포괄적인 과거청산’ 정책을 추진하자 보수세력과 뉴라이트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의 반격은 정치권력에 이어 사회문화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공식 기억마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작가 이문열의 ‘아버지를 부정하는 자식들’과 경제사학자 이영훈의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이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보수세력은 연일 ‘자학사관’, ‘종북좌파사관’이라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격은 크게 두 영역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과거사 위원회를 때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학교 근현대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들은 세금을 낭비한다느니 과거를 들춰내서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세를 부담스러워한 위원회들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진상규명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용한 진상규명’은 위원회가 사회와 소통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소극적으로 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한편 교과서 때리기는 주로 검정 교과서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성사 교과서에 집중되었다. 공격의 이유는 금성사 교과서가 종북좌파사관에 빠져 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학대하고 있는 이른바 ‘자학사관’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권력을 이용한 보수세력의 역사공격이 노골화되었다. 한시적인 국가기구였던 위원회들은 정해진 시한이 끝나자마자 연장 논의도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간이 남았던 위원회도 위원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바꿔 위원회 설립 취지를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방해하는 일을 벌였다. 위원회가 권고한 과거청산 후속조치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상 국가 권력에 의한 과거청산의 중단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과서 내용에 직접 개입하고, 집필지침을 개악시켰다. 여기에 B급 뉴라이트 학자들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를 보급하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교학사 교과서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교과서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인데다 이승만, 박정희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기 위한 책이었기 때문에 권력의 뒷배를 받고서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뒤이어 집권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정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내 마음대로’였다. 여당인 새누리당 의원들도 반대하고, 교육부장관,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조차 검정제로도 충분히 역사교과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정제를 강행할 필요도 실익도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밀어붙였다. 국정화 추진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문제 이전에 그동안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적 가치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정이었다. 아버지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이라는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이다. 반민주적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박근혜 개인의 아집과 독선이 빚어낸 일탈이자 병적 행위이다. 여기에 한국판 역사전쟁의 특징이 있다. 0828-13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권력과 지배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현재의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는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게 하여 불평등과 부정의가 자연스런 현상이며 현재가 최상의 상태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도 담겨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박근혜의 고집은 거기에서 훨씬 더 나갔다. 교과서 국정화는 그렇게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개인의 독선에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탄핵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역사전쟁은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착시다. 국정화가 폐기되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동안 집필지침의 강제와 수정 요구의 확대로 교과서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침해받았고 내용은 더 나빠졌다. 이걸 다시 정상화시키고 민주적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보수세력이 벌인 역사전쟁터가 또 한군데 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자학사관’에 대응하는 ‘자긍사관’을 심어주고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의도로 건립되었다. 보수 정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든 목적이나 과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월러스가 이야기한 내용을 떠올린다.

박물관들은 자본가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고, 자본가의 권위에 일종의 자연주의불가피성을 보태주는 상투적인 역사 파악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박물관들이 역사를 은폐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과 발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착취·인종차별·성차별 그리고 계급투쟁을 지워버림으로써,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대항적 전통과 민중문화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형성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박물관들은 관람객이 과거나 미래의 대안적 사회체제들을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도록 했다.”(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박물관의 본질을 명쾌하게 지적한 글이 또 있을까. 물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시민사회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아 애초의 박물관 전시 구성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위주의 역사, 발전 중심의 전시, 너무나 진부한 성공한 이야기들, 그리고 구색 갖추기에 동원된 약자들의 땀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피가 무덤덤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과연 우리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규범과 가치를 꿈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온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역시 박제화된 과거의 기억 창고 이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문제 해결은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운영과 구성부터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전시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비로소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들이 살아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나마 제 이름에 맞는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어떤 가치를 존중하며 민주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박물관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한, 역사교과서가 국가의 검정을 받는 한 국가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박물관과 교과서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사회가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이자 인간 조건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소외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수자들의 목소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던 수많은 ‘난쟁이’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약자들의 연대와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과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광장, 보수세력의 집요한 역사전쟁을 막아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보루, 여러분과 나의 이야기가 역사로 재현되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는 가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월, 2017/08/28- 16:09
130
0

강만길 지도위원, 소장자료 75점 기증

10월 16일, 강만길 지도위원(고려대 명예교수)이 북한 방문증명서, 리영희·이우성 선생 등과 주고받은 서신, 2004년 평양 남북학술토론회 관련 자료 등 소장자료 75점을 기증했다. 특히 이번 기증자료에는 강만길 지도위원이 1984년 ‘통일문제에 관한 교과서 분석사업’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을 당시의 사정을 알려주는 보고서, 탄원서, 공동성명 등도 포함되어 있다.

12

 

심정섭 지도위원 제59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50점 보내와
9월 19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59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각종 보험증서와 통장, 해방 직후 학교 관련 문서 등이 주를 이룬다. 또한 ????새농민????(1970),????국민독본????(1964),????지방행정????(1964)등박정희 정권기에발행된도서류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목, 2017/11/16- 15:45
130
0

[기증자료] 

• 자료실 안미정

아버지의 기록을 찾는 아들 진광홍 씨가 연구소에 자료 기탁

13

기증자료를 설명하고 있는 진광홍 씨

 

작년에 진행한 ‘근현대사기념관과 함께하는 서울시민대학’ 수강생으로 인연을 맺은 진광홍 씨가 1월 23일에 자료 기증차 연구소를 방문했다. 기탁한 자료는 아버지 진기섭 선생의 기록을 모은 자료로 사진, 도서, 일기 등이다. 진기섭 선생은 1943년 7월 31일 일본북지파견군에 징집돼 중국 천진에서 훈련을 받고 등원중대에 배속됐다. 그 후 일본 군대에서 탈출해 일본 점령지 수복활동 및 한인회 조직과 교포들
의 안전 귀국을 선도했다.
그러나 환국하면서 신분보호상 서류를 소각해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진광홍 씨가 국가보훈처에 지속적으로 독립활동 재심사를 청구했지만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공문만 받았다. 연구소는 진기섭 선생의 독립활동 자료를 추적 조사할 예정이다.

 

박동규 회원(경북북부지부) 생활사 자료 기증

1415

 

박동규 회원이 1월 17일과 22일 두 차례 가족들의 손때가 묻은 생활사 자료들을 기증했다. 어머니가 직접 지으신 수의 치마저고리, 할아버지가 쓰던 갓, 망건, 초등학교 졸업앨범, 주산 등이다. 조부가 간직했던 매도증서는 일제시대에 작성되고 해방 후에 작성된 등기필증과 함께 동봉되어 있다.

 

심정섭 지도위원 제62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60점 보내와
1월 17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2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체신국에서 발행한 보험료영수장, 전시채권 등
이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목, 2018/02/22- 17:44
12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