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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고무, 친일귀족세력과 일본자본의 결합체 용산 원정에 자리했던 조선 고무신의 대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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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고무, 친일귀족세력과 일본자본의 결합체 용산 원정에 자리했던 조선 고무신의 대명사

admin | 토, 2021/06/26- 00:42

[식민지비망록 71]

대륙고무, 친일귀족세력과 일본자본의 결합체
용산 원정에 자리했던 조선 고무신의 대명사

 

이순우 책임연구원

 

조선총독부에서 매달 발행하던 기관잡지(機關雜誌) <조선(朝鮮)> 1924년 3월호에는 「호모화(護謨靴) 전성(全盛)의 조선(朝鮮)」이라는 제목의 토막글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호모’는 ‘고무(ゴム)’의 일본어식 음차(音借) 표기이므로, ‘호모화’는 곧 ‘고무신’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근시(近時) 호모화공업의 발달에 따라 가격이 저렴하고 내구력(耐久力)과 방수력(防水力)이 있어서 중류자 이하(中流者 以下)의 수요가 격증(激增)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선내생산(鮮內生産)의 상황을 보면, 대정 9년(1920년)에는 극히 미미했던 것이었으나 10년(1921년)에는 가격(價格) 17만 8천 원(圓)에 13만 7천 족(足)의 생산이 있었고, 11년(1922년)에는 일약(一躍) 94만 원에 달했으며, 12년(1923년)에는 아직 정확한 숫자를 판별하지는 못하나 적어도 280만 원(400만 족)의 거액에 달할 것이다. 이밖에 내지(內地, 일본)에서의 이입액(移入額)은 12년에는 약 480만 원(685만 족)이었으니까 내선(內鮮)을 합산하면 실로 1,165만 족이라는 놀랄만한 수요를 나타내고 있다.
호모화의 수용(需用) 탓에 양화(洋靴) 및 조선화(朝鮮靴)는 비상한 타격을 받았고, 대정 9년에는 양화의 생산이 32만 6천 족이었으나, 동 10년에는 18만 8천 족, 동 11년에는 다시 13만 3천 족으로 줄어들고 있다. 또 선화(鮮靴)의 쪽은 대정 9년에는 54만 4천 족이었다가, 10년에는 일시(一時) 70만 4천족으로 증가하였으나 11년에는 급전직하 32만 8천 족으로 감소했다.

이 글은 바야흐로 조선 고무신의 탄생과 더불어 가히 고무신의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일찍이 이 땅에 고무신의 등장은 1919년 무렵에 시작된 일이었는데, 이때까지는 일본 쪽에서 건너온 ‘단화형(短靴型)’ 고무화가 전부였다. 이것은 서양식 구두를 본떠 만든 형태이며, 구두 자체를 전부 고무로 만들었다고 하여 ‘총고무화(總ゴム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기존의 ‘경제화(經濟靴)’ 또는 ‘편리화(便利靴)’에 고무바닥만을 덧댄 ‘고무저화(底靴)’ 형태가 나타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값싸고 질기다”는 고무신 자체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조선신발’ 형태의 고무신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21년 봄의 일이었다. 그 선두에 선 업체는 국산 고무신의 대명사로 여겨질 만큼 유명했던 대륙고무공업소(大陸ゴム工業所)였다. 

 

(왼쪽) <매일신보> 1921년 2월 1일자에는 대륙고무공업소와 원창양행의 공동명의로 나온 ‘순고무 경제화 및 순고무 양화’ 광고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대륙고무신과 관련하여 최초로 등장한 광고문안이다. (오른쪽) <매일신보> 1919년 9월 28일자에 게재된 원창양행(종로 1정목 47번지)의 광고문안이다. 이곳은 원래 이하영 자작의 아들인 이규원이 수출입 무역업을 목적으로 개설한 가게였으나, 1921년에 대륙고무신이 본격 생산되면서 자연스레 대륙고무공업소의 총판매부(總販賣部)로 전환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21년 2월 1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순고무 경제화 및 순고무 양화 광고문안’이 처음으로 수록된 것이 눈에 띈다.

 

본소(本)에서 수년래(數年來) 고무품 제조(製造)에 대하여 기다(幾多) 연구(硏究)를 중(重)하여 금(今) 기 연찬(其 硏鑽)을 수성(成)하고 구주(歐洲)에 전왕견학(專往見學)한 기사(技師)를 고빙(
聘)하여 공장(工場)을 신축(新築)하고 제조(製造)를 개시(開始)함은 아 조선(我 朝鮮)에서 본소(本
所)가 비조(祖)가 되고 취중(就中) 순(純)고무 경제화(經濟靴) 제조(製造)는 세계중(世界中) 다만
본소(本所)뿐이압. …… (중략)
경성부 용산 원정 1정목(京城府 龍山 元町 一丁目) 대륙고무공업소(大陸ゴム工業所)
경성 종로 1정목(京城 鐘路 一丁目) 위탁판매부(委託販賣部) 원창양행(元昌洋行)

 

여기에 대륙고무의 위탁판매부로 등장하는 ‘원창양행’(1919년 8월 18일 상호등록)은 원래 면포(綿布), 주단(綢緞), 저포(苧布), 모직(毛織) 등을 수입 판매하는 가게였으나 이때부터 고무신 총판매점으로 변신하였다. 이곳의 주인은 이하영(李夏榮, 1858~1929)의 장남 이규원(李圭元, 1890~1945)이었으며, 이하영은 익히 알려진 바대로 영어통역으로 관직에 발을 들여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러 외부대신과 법부대신을 지냈고 국권피탈 후에는 일제로부터 자작(子爵)의 작위를 부여받은 인물이었다.
대륙고무의 연혁을 서술한 몇몇 자료에 이곳에서 고무신을 생산 개시한 때가 1919년이라고 적어놓은 것이 곧잘 눈에 띄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회사에서 첫 고무신이 탄생한 것은 1921년의 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선> 1923년 1월호에는 조선총독부 상공과(商工課)에서 정리한 「호모화(護謨靴)에 관한 조사」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이 자료에는 ‘내지품(內地品)과 조선품(朝鮮品)의 공급상황’을 정리한 통계표도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이 가운데 1919년도와 1920년도의 해당부분에는 ‘내지품 이입고’만 표시되어 있을 뿐 ‘조선내 고무신 생산고’에 관한 집계수치는 전무한 것으로 보더라도 고무신의 국내생산은 1921년부터 개시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大陸護謨工業株式會社) 관련 주요 연혁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시정이십오년사>(1935)에 수록된 종로거리의 방공연습(防空演習) 사진자료를 보면 뒷 배경에 우연히 대륙고무총판매부(종로 1정목 47번지)의 간판이 포착된 모습이 눈에 띈다. 참고로 왼쪽 전봇대와 인접하여 조선광무소(朝鮮鑛務所, 종로 1정목 44번지) 간판이 붙어 있는 건물의 1층이 바로 그 유명한 이상(李箱)의 ‘제비다방’이 있던 공간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매일신보> 1922년 4월 6일자에 수록된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주식모집광고이다. 여기에 수록된 발기인 명부를 보면 창립위원장인 남작 이윤용을 비롯하여 후작 박영효, 자작 이하영, 자작 이창훈, 남작 이근호 등 친일귀족세력의 다수와 여러 일본인 실업가들이 동시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조선 고무신이 크게 득세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대륙고무공업소에서는 사세를 더욱 확장하기 위해 주식회사로 전환하기로 하고, 이에 따라 1922년 4월 6일에는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전체 발행 주식수 1만 주 가운데 1천 주에 대하여 주식공모를 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각 신문지상에 발표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창립 발기인(創立 發起人)의 명단에 포함된 인사들의 면면이었다.

 

후작 박영효(侯爵 朴泳孝), 자작 이하영(子爵 李夏榮), 자작 이창훈(子爵 李昌薰), 남작 이윤용(男爵 李允用), 남작 이근호(男爵 李根澔), 주성근(朱性根), 박용삼(朴容三), 박종환(朴宗桓), 유혁로(柳赫魯), 야마기시 유타로(山岸佑太郞), 토미타 기사쿠(富田儀作), 나카니시 토라히코(中西虎彦), 타나카 요시지로(田中吉次郞),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오키 야스노스케(大木安之助), 후쿠다겐이치(福田源一), 텐니치 츠네지로(天日常次郞).

 

여기에는 조선귀족 5인을 포함한 조선인 9인과 일본인 실업가 8인의 이름이 죽 나열되어 있는데, 가히 친일귀족세력과 일본자본의 결합체라는 평가가 나올만한 구성이었다. 천도교에서 발간한 월간잡지 <개벽(開闢)> 제33호(1923년 3월호)에는 농구생(弄球生) 필명의 「천현지황(天玄地黃)」이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고, 이 가운데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실체를 꼬집는 내용도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조선인 전용(朝鮮人 專用)의 고무화(靴)]

일조결하(一朝決河)의 세(勢)로써 조선인의 이물계(履物界)를 여지없이 점탈(占奪)하여 매년 수천만 원의 이금(利金)을 흡수(吸收)하는 고무화(靴), 그야말로 식자(識者)의 혼담(魂膽)을 서늘케 한다. 참패를 당한 건유혜(乾油鞋), 목리(木履), 망혜(芒鞋) 등의 재래상(在來商)은 한번 개량책(改良策)도 강구해 볼 여지가 없이 그냥 무조건(無條件)으로 영원히 수(手)를 속(束)할 뿐인가.… (중략) … 요사이에 이것을 경영(經營) 보려고 소자본(小�本)으로써 공장배치(工場排置)를 한 데가 기개소(幾箇所)가 있는 듯하나 이런 것들은 아직 아희적 작업(兒戱的 作業)에 지나지 못할 뿐이오, 개중(箇中)에 가장 우승(優勝)한 지위(地位)에 서서 인기(人氣)를 끄으는 자(者)는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大陸護謨工業株式會社)이다. 그러나 이 회사(會社)의 조직(組織)이야말로 좀 자미(滋味)스럽지 못하다. 표면(表面)의 광고(廣告)로는 조선인(朝鮮人)의 명의(名義)를 내여 세우고 이면(裏面)의 실권(實權)은 전부 일본인(日本人)의 장중(掌中)에서 놀아난다. 아아 천하(天下)가 받지 않는 고무화, 오직 조선사람의 돈이 맛나는가? 살피여라! 백천(百川)이 동해(東海)로만 경주(傾注)되는 줄을!!

 

(왼쪽) <동아일보> 1922년 9월 16일자에 수록된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광고문안이다. 여기에는 흥미롭게도 “이왕 전하(李王 殿下, 즉 순종)께서 어용(御用)하심에 황송함을 비롯하여 각 궁가(宮家)와 여관(女官) 각위의 애용을 받았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는 문구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오른쪽) <매일신보> 1925년 4월 5일자에 수록된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광고문안에는 용산 원정(龍山 元町)에 자리했던 대륙고무공장의 전경 사진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1926년 1월 25일에 발생한 고무증기가마 폭발사건으로 인해 인명피해와 함께 큰 재산손실이 빚어지기도 했다.

 

<조선총독부관보> 1922년 9월 8일자에 수록된 「상업 및 법인등기」 항목을 보면, 1922년 8월 15일에 설립된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본점 소재지는 경성부 원정 1정목 124번지(京城府 元町一丁目 24番地)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사업목적은 “호모(護謨, 고무)를 원료로 한 선화(鮮靴), 양화(洋靴), 지나화(支那靴) 및 기타 고무를 원료로 한 물품 일체의 제조 판매”라고 기재되어 있다.

 

 

취체역(取締役)에는 자작 이하영, 이규원, 자작 이창훈(자작 이근택의 습작자), 이명구(李明九, 남작 이윤용의 아들)와 일본인 이와마 료(岩間亮, 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서기 출신)가 이름을 올렸고, 이들 가운데 이하영이 대표취체역에 선임되었다. 이와 함께 감사역(監査役)에는 창립위원장이던 남작 이윤용을 비롯하여 조준식(趙俊植, 익산 거주)과 일본인 텐니치 츠네지로(天日常次郞)가 공동 취임하였다. 일본인 이와마 료는 1926년 1월 23일에 취체역에서 퇴임하였고, 도장관 출신의 중추원 참의였던 유혁로(柳赫魯, 1855~1940)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선임되어 종신재직(終身在職)하였다.
대륙고무의 유명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이곳이 조선총독의 순시행로에 포함된 적도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확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륙고무의 유명세에 편승하여 무단으로 상표(商標)를 도용(盜用)하였다가 결국 신문지상을 통해 공개적인 사죄광고(謝罪廣告)를 게재해야 했던 사례들도 여러 건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와중에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의 대표취체역 사장이면서 실질적인 소유주였던 자작 이하영이 1929년 3월 1일에 숨지자 그해 7월 26일에는 그동안 감사역 자리에 있던 남작 이윤용이 대표취체역 사장에 올랐고, 이하영의 아들인 이규원 역시 대표취체역 전무에 선임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의 하나는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본점과 공장 소재지가 용산원정(龍山 元町, 지금의 원효로 1가)에서 벗어나 경성부 중림동(京城府 中林洞) 155번지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총독부관보>에 게재되는 「상업 및 법인등기」 항목을 통해 확인해본즉, 이 일이 벌어진 때는 1932년 10월 20일이었다.
다시 1938년 9월 8일에 이르러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대표취체역 사장이던 남작 이윤용이 숨지자, 자연스레 자작 이규원이 홀로 대표취체역의 역할을 수행하는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관보> 1941년 3월 28일자에 수록된 「상업 및 법인등기」 항목을 보면, 1941년 1월 31일자로 기존의 취체역이던 권영일(權寧一), 윤정석(尹晶錫), 권영순(權寧順)은 물론이고 대표취체역이던 이규원(李圭元)과 감사역(監査役)이던 최상집(崔相集), 후지노 아이센(藤野愛泉), 이재영(李宰榮) 등이 일괄 사임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경성일보> 1929년 3월 10일자에 수록된 이하영 자작의 장의관련 기사이다. 그의 영결식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는 독립문외 광장(獨立門外 廣場)이다. 그가 죽은 후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대표취체역 사장은 이윤용 남작이 물려 받았고, 다시 그가 사망한 1938년 이후에 그 자리는 이규원 자작에게로 돌아갔다.

<조선일보> 1927년 3월 3일자에 수록된 대륙고무 상표도용에 관한 사죄광고이다. 대륙고무신이 하도 유명세를 떨치다 보니 이것과 흡사하게 대승표(大陞標)라는 글자로 소비자들을 현혹한 사례에 해당한다. 이것 말고도 1929년 12월에는 대축표(大祝標)라는 글자로 상표도용을 하다가 적발되어 사죄광고를 낸 별개의 사례도 있었다.

 

이들을 대신하여 이날 츠지모토 케이조(辻本敬三)와 카네코 요지로(金子要次郞)가 새로운 대표취체역에 공동 취임하였고, 츠지모토 에이이치(辻本英一), 이모세 기이치로(妹背義一郞), 츠지모토 노보루(辻本昇) 등이 취체역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감사역에는 쿠와바라 칸이치(桑原貫一)와 시모무라 카메(下村龜)가 선임되었는데, 여기에 나열된 이들은 모두 일본 오사카(大阪) 지역에 주소지를 두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었다.
이것으로 보면 바로 이 시기에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경영권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주식 지분 역시 이들의 수중으로 넘겨지면서 이 회사는 실질적으로 일본인 기업체로 전환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둔 바로 그 시기에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창설 이후 줄곧 전무와 사장으로 있던 자작 이규원이 숨졌다. <매일신보> 1945년 4월 28일자의 관련기사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알리고 있다.

 

조선귀족회(朝鮮貴族會) 부회장 이규원(李圭元) 자작은 그동안 숙환으로 가료중이던 바 24일 오전 한 시 부내 서대문구 중림정(中林町) 155번지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향년은 56세이며, 영결식은 28일 오전 열 시 자택에서 집행하는데 상주는 이종찬(李鍾贊) 소좌로 현재 출정중이다. 고(故) 이 자작은 경성에서 출생하여 한문사숙(漢文私塾)을 나와 서화(書畫)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왕직 시종(李王職 侍從), 대륙고무공업 사장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조선귀족회 부회장의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해방 직후에 <동아일보> 1946년 3월 20일자에 수록된 「사복(私腹)에 걸린 국재(國財), 1억 4천만 원, 70회사 공장을 적발, 군정청 감찰부(軍政廳 監察部)에서 즉시 전부 몰수」 제하의 기사를 보면,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회사와 공장을 새조선의 산업부흥이란 미명 하에 접수니 관리니 하여 맡아가지고 사리사복을 채우고 있던 곳을 대대적으로 적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바로 이들의 목록에 ‘대륙고무’도 포함된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 이곳이 적산기업체(敵産企業體)로 분류된 탓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이보다 한참의 세월이 더 흐르고 <경향신문> 1974년 1월 26일자에는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서울 서대문구 중림동 155의 2, 대표 이종호) 2층에서 불이나 2층과 1층 일부를 불태웠다는 내용의 기사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것보다 2년 뒤에 나온 <경향신문> 1976년 9월 28일자에 수록된 「주택지 195 공해업소 내년까지 이전(移轉) 명령」 제하의 기사에 매연, 폐수, 악취, 소음 등 을 유발하는 주거지역 내 공해업소의 하나로 ‘대륙아스타일(중림동 155)’이라는 회사가 포함된 것이 눈에 띈다.
아마도 이것이 대륙고무공업에 관한 거의 막바지의 흔적인 셈인데, 한때 친일귀족들의 집합체이자 조선 고무신의 대명사로 불렸던 대륙고무의 화려했던 시절은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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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8일 첫 방송을 시작한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내역사) 시즌2가 2018년 8월 20일 마지막 방송으로 9개월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시민들의 많은 관심으로 좋은 성과를 냈던 시즌1 〈역적〉을 발판삼아 시즌2는 연구소가 보유한 콘텐츠를 활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외부단체와 제휴를 통해 청취자를 늘려 장기적으로 연구소 미디어로 발전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내역사 시즌2에서는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의 대중역사강의 ‘근현대사 100년의 역사여행’(아쉽게도 개인사정으로 중단됨)을 필두로 조한성 연구원, 방은희 교육팀장, MC노가 사건과 인물 중심으로 역사를 알기 쉽게 풀어간 ‘역전다방(역사를 전하는 수다방)’과 이순우 연구원의 식민지시대 자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돋보인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가다)’ 그리고 역사이슈에 대한 뒷담화를 나누는 ‘방학진 기획실장의 바하인드히스토리’까지 4개의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총 55개의 에피소드를 방송하였다.
국민TV와 협력하여 3개월간 영상방송을 제작하여 영상방송의 가능성도 타진하였다. 특히 역사적인 4.27남북정상회담에 맞춰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와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을 모시고 특별대담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청취자들의 많은 관심을 이끌어냈다. 그 결과 내역사 시즌2는 5천여 명의 고정 청취자를 확보해 월 8만 이상의 다운로드를 기록했고, 역사 팟캐스트 분야에서 10위권에 진입하여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는 시즌1, 2를 거치면서 안정적인 제작노하우를 습득해 향후 장기적인 방송을 할 수 가능성을 열었다. 연구소는 두 달 간 충전기를 갖고 나서 10월말쯤 시즌3에 들어갈 예정이다. 회원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내역사 시즌2의 모든 에피소드는 오디오 팟빵, 아이튠즈 팟캐스트, 유튜브와 팟티를 통해서 다시 들을 수 있다.

• 김세호 PD

목, 2018/09/06-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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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회 회원인 박노정 시인이 7월 4일 6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박 시인의 부고기사가 여러 언론에 났지만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가 쓴 기사 제목에 가장 공감이 간다.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 별세〉.
박 시인을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박 시인이 ????진주신문????대표이사 시절 그의 소개로 진주의 어른인 남성(南星) 김장하 선생을 만났으니 아마도 1990년대 후반으로 짐작한다.

▲ 박노정 시인./경남도민일보DB

????진주신문????은1990년진주시민들이모여창간한신문으로지역의수구적인여론에맞서 정론직필 그리고 ‘진주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정신을 ‘신분해방운동인 형평, 임진왜란 때 2차례에 걸친 진주성 전투에서 민관군이 일체가 돼 보여준 주체, 남명 조식 선생의 호의’ 등 3가지를 꼽았다.
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이사뿐아니라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진주민예총회장,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 진주문인협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를 빼놓고 진주의 시민운동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로 있던 2005년 5월, 박 시인은 지역의 후배들과 함께 진주성 촉석루 옆 의기사에 있던 친일화가 김은호의 ‘미인도 논개’(일명 논개영정)을 뜯어내 박 시인을 포함해 4명이 각각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선고가 부당하다며 모두 노역장 유치를 자원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벌금 대납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다. 당시 4명의 벌금은 2,000만원이었지만 나중에 보니 성금이 이보다 더 많은 2,370만원이나 모아졌다. 박 시인 등은 나중에 이 성금 중 일부를 연구소 진주지회 결성(2012년 3월) 자금으로 내놓았다. 실제로 박 시인은 연구소 진주지회의 숨은 설계자였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시절이던1990년대초부터논개영정폐출운동을시작해 2008년 충남대 윤여환 교수가 그린 새로운 논개 영정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기까지 거의 20년이 걸렸다. 박 시인은 2006년에 친일잔재청산을위한진주시민운동을 만들어 진주 출신 친일가수 남인수의 이름을 딴 ‘남인수 가요제’를 ‘진주 가요제’로 바꾸기도 했고 ‘을사늑약 100년 남북공동사진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친일잔재 지도’ 제작도 추진했다. 이처럼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의 일생은 올바른 ‘진주정신’의 발굴과 계승이었다. 그와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을 간직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방학진 기획실장

 

수, 2018/08/0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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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57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50점 보내와
7월 26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제57차 자료기증을 했다. 주요자료는
1942년생 황OO가 경기도 강화국민학교, 강화중학교, 강화여자상업고등학교, 경기도농촌진흥
원 등을 거치면서 받은 상장과 수료증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자료 기증 잇달아
8월 2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의 히구치 유이치 공동대표가 연구소를 직접
방문하여 ????해협????, ????재일조선인사연구???? 등 소장자료 10점을 기증하였는데, 일본으로 돌아간 후인
8월 8일, 자택에서 소장자료를 정리하다가 기증자료를 발견하여 <조선신궁연보>(1936), <조선문
학사>(1981) 등 26점을 추가로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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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의 유족들과 오랫동안 교류를 가지고 있는 사노 미찌오 호우센 대학 교수가 「야스쿠니의 집靖國の家」 문패 1점을 기증했다.
8월 12일 야노 히데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이 <구일본군조선반도출신군인·군속사망자명부>(2017) 1권을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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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 홍종화 작가가 <혈의 누> 등 도서 3권을 기증했다.

8월 18일 김민철 책임연구원이 단행본 등 다수의 책을 기증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 피해를 입은 후 현재까지 피폭자들의 권익을 확보하고
인권을 옹호하는 운동에 앞장서 온 곽귀훈 회원(경기동부지부)이 8월 21일 <世界>(2016~2017)
총 14권을 기증했다.

8월 25일 김승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民族日報>(1990) 1권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월, 2017/09/25-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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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수화 통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회원이 교류하고 있는 청각장애우들의 소장자료를 전달받아 5월 29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이번에전달한 기증자료는 도서, 엽서, 박물류이고 기타무라 메구미씨도 <日鮮同祖論>(1943) 등 소장 도서 2권을 기증하였다. 뿐만 아니라 메구미 씨는 역사관 홍보용 사탕을 제작하여 일본인을 상대로 홍보활동을 펼치고 있다.

 

심정섭 지도위원 자료기증(54, 55차) 도서류, 문서류 총 100점 보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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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은 4월 26일과 5월 23일 각각 54번째와 55번째로 자료를 정리해 보내왔다. 조선총독부체신국에서 발행한 보험증서, 보험료영수장와 해방 후에 발행된 생활통
지표, 저축예금통장 등 문서류와 도서들이다.
특히 1938년에 비안(比安)공립 심상소학교에서 발행한 「학교가정통신부」에는 학업성적과 학교 출석상황 및 신체검진상황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학생들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금, 2017/07/28-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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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 교수가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 ‘군함도의 진실’이라는 영상을 홍보해 여론의 주목을 끌었다. 유네스코세계유산위원회가 유네스코산업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근대산업시설 중 한국인 등의 강제동원 관련 시설에 ‘역사의 전모’를 밝히라고 일본정부에게 권고한 사항을 이행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영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영상에는 몇 가지 부정확한 사실이 담겨 있다. 영상에서는 군함도에 강제동원되어 죽은 한국인이 120명이라 한다. 그러나 1984년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찾아낸 〈화장인허증하부신청서(火葬認許證下附申請書)〉 등 일명 ‘하시마자료’에 따르면 1925년부터 1945년까지 하시마에서 죽은 한국인은 123명이다. 여기에는 여자와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사망한 수가 64명이니 굳이 따지자면 강제동원 희생자는 50여 명이라 해야 맞다.
영상에 사용된 사진들도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누워서 탄을 캐는 장면은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정확한 연도와 지역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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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①


이 글은 2017년 7월 25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군함도의 진실 공방과 한국 정부가 할 일〉을 수정·보완한 글이다. 분량상 싣지 못한 내용을 추가하면서 기고 후에도 계속 유포되고 있는 잘못된 정보를 교정하기 위해서다.


 

(사진①) 한겨레신문에 글을 썼을 때는 연도 미상의 후쿠오카탄광에 는 연도 미상의 후쿠오카탄광에서 일하던 일본인 광부라 했으나 이 또한 정확하지 않다. 유사한 사진으로 훈도시를 입고 누워서 탄을 캐는 사진도 있다.

26(사진②) 이 사진도 자주 한국인 강제동원피해자 사진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메이지시기 치쿠호탄광에서 탄을 캐는 일본인 광부의 모습이라 한다. 누워서 탄을 캐는 광부의 구도와 이미지가 거의 같기 때문에 두 사진이 혼용되고 있다. 영상에는 폭행을 당해 등에 상처가 나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쓰였다. 1926년 <아사히카와신문>에 실린 것으로 알려진 이 사진은 홋카이도 나카가와군에 있던 노동자 합숙소에서 학대당한 토목노동자를 찍은 것이라 한다.(사진③)
서교수가 사용한 사진①과 사진③ 모두 폭력과 학대, 열악한 노동조건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었던 노동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 실태를 직접 증명하는 사진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이 받은 차별과 학대, 가혹한 노동조건 등의 실태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은 없다. 통제된, 그리고 전쟁 홍보만 허용되던 시기에 그런 사진 자체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1920~30년대 일본 언론의 고발로 확인된 이런 사진들을 통해 강제동원된 한국인 피해자들의 삶을 유추해 볼 수 있으며, 수많은 증언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내친 김에 몇 가지만 더 지적해두자. ‘어머니 보고 싶어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배가 고파요.’라는 글이 탄광벽에 적힌 사진이 있다.(사진④)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한국인 탄광노동자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진으로 한때 언론에서도 많이 쓴 장면이다. 그러나 이 사진은 훗날 강제동원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탄광을 방문한 조사단들이 연출하기 위해 쓴 걸 찍은 것이라 한다. 그러니 굳이 사용해서 시비를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다. 앙상한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난 네 명의 한국인 사진도 강제동원 피해의 증거로 이용되고 있다.(사진⑤) 이 사진의 주인공들은 신기수(辛基秀)의 사진집 <韓國倂合と獨立運動>(1995)에따르면,1945년10월 효고현 오쿠보형무소를 출옥한 조선인들로 강제동원 피해와 직접 관련이 없다.
통계상의 잘못도 있다. 군함도와 함께 등재된 다카시마탄광에 한국인 4만 명이 강제동원되었다는 통계가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건 실무자의 단순 실수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외교부가 강제동원지원위원회에 관련 정보를 요청할 때 위원회 직원이 4천 명을 4만 명으로 잘못 적어 보고했다. 나중에 수정되긴 했으나 언론과 인터넷상에는 잘못된 숫자가 이용되었고, 지금도 계속 인용되고 있다. 한 가지 더, 일제시기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가 700여 만 명이라고 한다. 이 수치를 사용할 때는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현재까지 과거 일본 정부가 발표한 공식문서를 기초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본, 중국, 사할린, 남양군도 등으로 강제동원된 노동자는 최소 72만 명, 군인․군속으로 끌려간 청장년이 최소 36만 명, 일본군‘위안부’ 등 여성 동원이 십수 만 명으로 해외로 강제동원 수가 최소 120만 명에 이른다.
여기에 1~3개월 단위로 한반도내에 동원된 이른바 ‘도내동원’의 연 인원이 600여 만 명도 있다. 따라서 국내외를 포함해서 총동원된 700여 만 명이라는 수치는 집집마다 한 명씩 동원되었다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다만 한국정부와 일본정부가 1965년 한일협정에서 대상이 됐던 피해자는 ‘해외동원자’들이었고, 노무현정부 때 지원(사실상의 보상)을 받은 피해자들도 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도내동원의 경우 그 실태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인 데다 식민지 시기를 살았던 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법을 통한 진상규명과 지원 대상에서 뺀 것이다. 때문에 현재 우리가 강제동원의 피해를 말할 때 대상자는 120여 만 명이라 해야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숫자 몇 개 사진 설명 하나 잘못되었다고 강제동원의 본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일본의 우익들은 오류나 실수를 공격하면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처럼 군함도의 강제동원 자체를 부정하려 한다. 아니면 피해자들의 주장에 흠집을 냄으로써 한국의 주장이 과잉된 민족 감정에 근거하고 있어 뭔가 사실을 과장하거나 날조하고 있다는 불신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국내는 모르겠으나 국제사회에서는 이게 나름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어 문제다.
군함도를 놓고 국제사회를 향해 일본 정부와 우익은 세 가지 여론전을 펼칠 전망이다. 첫째, 2015년 유네스코 총회 석상에서 일본대사가 인정한 한국인 강제노동(forced to work)은 국제법에서 규정한 강제노동에 해당하지 않는다. 1910년 일본에 의한 조선 ‘강제병합’이 합법이며, 따라서 1938년의 국가총동원법과 1944년의 징용령에 의한 동원 역시 합법이므로 강제노동의 예외규정(전시하의 동원)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둘째, 군함도에서 한국인들은 차별 받지 않고 일본인과 사이좋게 지냈다는 당시 거주자들의 회고나 미담을 적극 발굴하여 알릴 것이다. 여기에 낙성대연구소 소속 연구원이 발표한 ‘강제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과 일본인 노동자들 사이에는 민족별 임금차별이 없었다. 다만 노동의 숙련도에 따른 차이가 있었다’라고 요약할 수 있는 논문을 영문으로 번역해 홍보전에 나설 것이다. 한국의 연구자가 강제동원에 따른 민족차별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나서니 일본으로서야 얼마나 반가운 일이겠는가.
셋째, 한국은 사태를 과장하거나 심지어 엉터리 자료를 만들어 역사를 왜곡·날조함으로써 일본을 때리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 증거로서 서교수의 광고 영상이 좋은 먹이감이 된 것이다.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이 점에선 한국의 언론들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강제동원 피해 통계를 두고 벌어지는 진실 논쟁에서 놓쳐서는 안 될 게 있다. 그것은 가해자인 일본정부와 기업이 스스로 진실을 밝힌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진상규명 대부분은 모두 피해자와 한일의 시민단체가 수십 년간 싸워서 얻어낸 것들이다. 여기에는 한국정부의 책임도 크다. 특히 지난 9년간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최악이었다. 피해자 유족과 시민단체가 직접 일본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유골조사와 봉환 문제를 협의해 해결의 물꼬를 텄지만, 정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초은행에 1945년 이전 일본 내에서 일했던 한국인 우편저금 통장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부는 모른 체 했다. 국제법에 따르면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국가가 지배국가로부터 관련 문서를 인계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 한다. 식민주의 극복을 위해 지속적인 진상규명과 자료 공개, 기념․기억 사업과 교육 등 새 정부가 해야 할 긴 목록 가운데 하나다.
영화 군함도가 개봉되었다. 무더운 여름이 더 더워질 것 같다.

∷ 김민철 책임연구원

월, 2017/08/0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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