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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정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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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정래 감독

admin | 토, 2021/06/26- 00:06

[인터뷰]

영화 <광대 : 소리꾼 감독판> 조정래 감독

 

인터뷰 :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민족의 흥과 한이 다시 울려 퍼진다. ’ 작년 7월, 코로나19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독창성과 풍부한 볼거리로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던 영화 <소리꾼>이 <광대>라는 이름의 ‘감독판’ 영화로 다시 돌아온다.
감독판이니 만큼 이전 개봉작에서 다루어지지 못한 서사들이 과연 어떤식으로 가미되었을지, 연출자의 시선을 따라 가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포인트다. 연구소에서는 오는 9월 전격 재개봉을 앞두고 전국을 돌며 시사회를 진행하고 있는 <광대 : 소리꾼 감독판>의 조정래 감독을 만나 보았다.

● 개봉 1년여 만에 ‘감독판’으로 다시 돌아왔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나?

● 일단 나부터가 판소리 고수(鼓手), 즉 국악인 출신이다. 인간문화재이신 정철호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이수자 자격까지 얻었다. 대학교 시절 영화 <서편제>를 보고 국악에 빠져들기 시작했는데 거의 미쳐있다시피 했던것 같다. 졸업 후 ‘바닥소리’라는 단체를 만들고 전국으로 공연을 다닐 정도였
으니까.(웃음) 어쨌든 대학교 때 판소리를 주제로 한 단편시나리오를 하나 구상했는데 그게 바로 이 영화의 모태가 된 ‘회심곡’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다. 영화 <귀향> 역시 판소리와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나눔의 집’과 수요집회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판소리 공연을 나가게 되면서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판소리는 영화감독인 나 스스로의 서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콘텐츠다. 이런 판소리를 주제로 한 영화 <소리꾼>, 게다가 그걸 감독판으로까지 선보일 수 있게 됐으니 감회가 남다르다. 보면 알게 되겠지만 기존 개봉작에 비해 소리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장면이나 음성, 관련 이야기들이 다수 살아났다.

● 영화 기획단계에서는 ‘남북합작영화’로 추진되었다고 들었다. 특별한 준비과정이 있었을 것 같은데?
● ‘남북합작’이라는 키워드는 이 영화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데 중요한 포스트를 차지한다. 제작 초기 단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서울과 평양 동시개봉을 준비했을 정도다. 지금이야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있지만 영화를 기획할 2018년 당시만 해도 평창올림픽과 4.27 판문점선언을 계기로 남북 간의 평화
무드가 펼쳐지던 시기였다. 나 역시 그 바람을 타고 그해 11월 당시 김덕룡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방북단에 함께했었는데 바로 그때 영화의 북한 로케이션 기회를 얻게 됐다. 방북 기간 내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준비해간 <광대> 제작계획과 시나리오 등을 소개하고 다녔는데 다행히 북측 주관 단체에서 관심을 가져줬다. 어느 날 새벽 호텔로비로 나오라고 하더니 시나리오를 소개해보라고 하더라.(웃음) 그후로 남북합작영화 계획이 급물살을 타게 됐고 귀국 후에는 협의를 진행해보자는 연락이 북측으로부터 왔다. 그때가 2018년 12월경이었다. 협의는 중국 북경에서 남북 측 관계자가 만나 이뤄졌는데 우리가 쓴 제작 계획서를 북한 측에서 따져보고 실행 가능한 부분을 검토하는 형식이었다. 협
의 과정 내내 북측은 대단히 진중한 태도로 임했다. 단 한 줄도 그냥 넘어가는 일 없이 꼼꼼하게 묻고 가능 여부를 검증하더라. 시나리오의 취지는 물론이고 촬영 장소는 어디로 하는지, 어떻게 이동하는지, 엑스트라는 어떻게 지원하는지 등등 … 합의서만 해도 10번은 수정한 것 같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오히려 이런 꼼꼼하고 진지한 북측의 태도 덕분에 이 영화의 남북합작이 성사될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그래서 영화 촬영기간 중 보름에서 한 달 정도를 북측에서 촬영하고 엑스트라까지 지원받기로 합의됐었다. 다만 영화 메인 캐릭터 중 한 명을 북측 배우로 하자는 제안은 거절당했다. “북한에서 영화는 사상이란 말이오!” 라며 단호히 거절하더라. (웃음) 아참, 이 만남은 물론 통일부의 정식허가를 받고 이뤄진 것이다. 귀국보고도 꼼꼼히 했다.

영화 <광대 : 소리꾼 감독판> 포스터

● 그러나 2019년 하노이 북미회담 이후부터는 남북관계가 급속히 얼어붙었다. 영향을 받았을 것 같은데?

● 맞다. 개인적으로도 제일 아쉬운 부분이다. 하노이 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야심차게 기획했던 북측 촬영이 무산됐다. 최대한 남북합작영화로 완성을 시키고 싶었기에 긴장이 완화되는 시점을 기다려보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속절없이 시간이 가고 2019년 여름이 지나면서부터는 더 늦어져서는 이도저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결국 남한만을 무대로 영화를 찍게 됐다. 정말 아쉬웠다. 등장인물들이 한반도 강산을 방랑하는 로드무비적인 느낌이 중요했는데 남쪽의 풍경만으로 묘사해야 했으니. 최후의 수단으로 북측에 사전 답사를 가서 촬영한 영상(주로 자연을 소재로 한)이라도 써보려 했는데 그 시도조차 무산됐다. 아무리 자연풍경이라지만 남북관계가 워낙 안 좋은 상황인지라 북한과 관련된 어떤 것도 담을 수 없었다. 색안경 낀 여론몰이에 당할 수도 있고 영화 흥행에도 타격을 받을 거라는 우려들이 많았다. 괴로웠다. 주위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의 의견이기에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었던 거다. 그래서 2020년에 개봉한 <소리꾼>은 감독 입장에서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 물론 영화의 작품성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코로나 때문에 흥행은 잘 안됐지만. (웃음) 동경국제영화제, 스
페인 한국영화제, 중동한국영화제 등에 개막작으로 초청됐고 배우들의 연기력도 주목받았다.

● 말이 나온 김에 감독판 <광대>와 기존 개봉작 <소리꾼>의 차별점을 이야기해 달라

● 아까 잠시 언급했지만, 기존 개봉작에서는 담지 못한 사전답사 영상, 북한의 자연풍경 영상들이 이번 감독판에는 전부 녹아들어 있다. 사전답사 당시 묘향산부터 황해도를 돌면서 북한의 풍광명미(風光明媚)를 찍어놨었는데 그걸 잘 편집하여 영화의 배경으로 대폭 활용했다. 이런 측면에서 <소리꾼>은 감독판인 <광대>에 와서야 ‘남북합작’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 이 영화를 봤을런지 잘 모르겠으나 만약 볼 수 있다면 <광대 : 소리꾼 감독판>을 봐줬으면 좋겠다. 또 하나의 차별점은 비주류의 이야기, 즉 기존 영화에서 생략됐던 조연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났다는 점이다.
한 예로 <소리꾼>의 광대패들에 대한 이야기를 완결성 있게 보강했다. 그리고 한국판 레미제라블 같
은 느낌을 조금이라도 살려보고자 민중의 저항적 측면, 혁명적이고 반봉건적 요소도 조금 강화시켰다. 물론 이런 부분들은 재촬영을 한 것이 아니라 기존 개봉작에서는 생략됐던 부분을 최대한 살린 것이다. 배우들, 이유리 씨나 김하연 양(아역배우)이 노래하는 장면도 좀 더 추가했다. 그러다보니 러닝 타임이 좀 길어졌는데 시청각적 감상이 풍부해지고 서사의 흐름을 빠르게 하는 것으로 보완해보려 했다.

● 감독판 개봉을 맞아 공개할 수 있는 촬영 에피소드가 있다면?

● 2020년 개봉 뒤에 인상 깊었던 장면으로 ‘학규(극중 주연)’가 피투성이의 몸으로 최후의 판소리를 하는 장면을 많이 말씀해주시더라. 실제로 그 장면은 현장에서도 굉장히 깊은 울림을 줬다. 괴산에 있는 세트장에서 촬영했는데 매서운 겨울 날씨로 입과 손이 얼어붙은 상황에서도 배우들이 완전히 몰입해줬다. 영화상 어떤 사운드 효과도 주지 않고 오로지 현장음만으로 소리를 전달한다는 원칙으로 촬영했기에 ‘학규’ 역을 맡은 이봉근 배우로서도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혼신을 다해 소리를 내줬다. 그 진심이 전해졌던지 당시 세트장에 있는 배우와 스텝들이 그 장면을 촬영하며 모두 울었다. 곤란했던 것은 악역들도 울고 있어서(웃음). 어쨌거나 바로 그런 혼신의 소리가 판소리의 ‘프로토타입’이 아닌가 생각한다.
극중 ‘청이(아역)’가 강물에 뛰어드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실제 시퍼런 강물에 뛰어들어야 했기 때
문에 배역을 맡은 김하연 양의 고생이 많았다. 처음에는 대역을 쓰려고 했는데 자신이 직접 하겠다고
나섰다. 전체적으로 배우, 스태프들의 팀워크가 좋았고 협력이 잘 이뤄졌다. 그리고 이건 영화 스토리
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에피소드인데 영화에 나오는 전통 공예품, 이를테면 괴불노리개나 복주머
니 같은 소품들은 전통공예작가인 이혜진 님, 내 아내가 직접 만든 것이다.(웃음) 아내가 미술팀 일
원으로 참여하며 많은 도움을 줬는데 한번쯤 소개하고 싶었다.

● 감독판인 만큼 영화를 통해 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 것 같다.

● 가족의 복원이다. <광대 : 소리꾼 감독판>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갈등으로 얽히고설키는 것이 아
닌, 길 위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이웃들이 점차 하나의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남북합작
의 영화를 만들어보고자 시도한 것 또한 바로 그런 지향에서다. 분단된 남북이 ‘가족의 복원’을 이루어가며 통일까지 꿈꾸는 것, 그런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북한에서 촬영한 풍경들을 이번 <광대 : 소리꾼 감독판>에 넣으면서 이런 감정은 더 절실해졌다. 북한의 자연은 아름다우면서도 이질감이 없다. 외국에 온 것 같은 낯선 느낌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어디 자연뿐이겠는가. 북한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직접 대면했을 때 느낀 감정은 그냥 ‘똑같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식, 술을 좋아하는 것, 흥 많고 신명 있는 것 … 다르고 이질적인 것은 우리들의 심리적 거리일 뿐이다. 이렇게 꼭 닮은 자연, 사람을 느끼면서 ‘가족의 복원’에 대한 꿈을 관객 분들과 공유하고 싶다.

 

 

● 조금 이른 감이 있는 질문이지만 혹시 지금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이 있는지? 있다면 간단히 소개를 부탁드리면서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싶다.

●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일본 홋카이도 조선인 강제노동자와 아이누족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디어는 몇 년 전, 일본 홋카이도에서 <귀향> 시사회를 통해 만나게 된 교수님으로부터 제공받았다. 그 교수님이 식민지 당시, 홋카이도로 끌려온 조선인 강제징용노동자들의 사연과 아이누족에 대한 일제의 탄압정책에 대해 설명해주시면서 꽤나 많은 사진과 자료들을 함께 주셨다. 그리고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유골이 묻혀있는 장소들과 아이누 인종연구의 현장 훗카이도대 ‘동물실험실’, 아이누 박물관 등을 안내 받았다. 일본이 조선인과 아이누 인들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조선인들이 끌려간 군수공장이나 탄광 등의 실상은 어땠는지, 그곳에서 탈출하려던 조선인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
는지 등등. 그 참상이라는 게 듣기만 해도 괴로운 것이어서 참 많이도 울었다. 그렇게 아픈 감정을 느끼면서 시나리오를 써내려가게 됐고 대략적인 뼈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걸 영화로 만들려면 만만치 않은 돈이 필요할 것 같다. (웃음) 아무튼 지금은 <광대 : 소리꾼 감독판> 관련 활동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차차 구체화시켜 나갈 예정이다.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면 아마 민족문제연구소에도 종종 도움을 요청드리게 될 것 같다. 부족함이 많겠지만 회원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기대를 부탁드린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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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시민사회, 국정 역사교과서 저지

문재인 정부는 출범 직후인 5월 31일 관보 게재를 통해 국정 역사교과서를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이는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저지넷)를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 학계의 끈질긴 투쟁의 결과였다. 저지넷은 485개 단체로 구성되었으며,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았다. 교육부는 새 정부 출범 직전까지도 국정교과서 연구학교를 지정하고 보조교재 배포를 시도하는 등 꼼수를 멈추지 않았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연구학교로 선정된 경산 문명고등학교마저 거센 반대에 부딪혀 결과적으로 국정 역사교과서 채택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운동, 국내외에 큰 반향

2016년 8월 29일 국치일부터 본격화한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운동이 2017년에 들어 국내외의 성원에 힙입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여기에는 일본과 미국의 해외동포는 물론 연구소의 취지에 공감하는 일본 시민사회도 적극 동참하였다. 특히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일본 각지의 시민과 단체로부터 1천만 엔 이상을 모았고, 1만여 점의 자료를 수집해 연구소에 전달하였다.

 

미국 3대 도시에 연구소 지부 결성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운동에 발맞추어 11월 미국의 3대 도시인 워싱턴 뉴욕 LA에 연구소 지부가 결성되었다. 미주 지부 창립식 및 준비위원회 결성식에는 임헌영 소장과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에 창립된 워싱턴지부(윤흥로 이사장, 박진영 지부장)와 LA지부(정찬열 지부장, 김창옥 사무국장), 2018년 3월 창립 예정인 뉴욕지부(이춘범 이사장)는 친일 청산운동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 적극 동참하고 현지 교민들을 대상으로 한 역사교육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다.

 

일제식민지통치기구사전: 통감부•조선총독부 편 출간

2012년부터 5년여의 작업 끝에 『일제식민지통치기구사전: 통감부•조선총독부 편』이 출간됐다. 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이후 오랜만에 펴낸 소중한 학술 성과다. 여기에 실린 통치기구는 통감부•조선총독부 본부와 소속관서(총 248개의 기구)로 각 항목마다 존속기간•성격•연혁•조직과 기능•참고문헌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기구를 총체적으로 다룬 사전은 이번이 처음으로 일제강점기 정책사•제도사 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되고 나아가 식민통치의 구조와 식민지배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항일음악회 성황리에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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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연구소는 10월 27일부터 12월 18일까지 고양 창원 대전 광주 부천에서 ‘촛불 1년, 다시 부르는 항일의 노래’ 토크 콘서트를 순회 공연하였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마련과 항일음악을 널리 알리기 위해 기획된 이 공연에 이야기 손님으로 이재명 시장, 노회찬 박주민 의원, 김광진 정청래 전 의원이 초대되어 ‘촛불혁명과 우리 시대의 적폐청산’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11회 임종국상 학술부문 조재곤 박사, 사회부문 한상권 교수 수상

11월 10일 제11회 임종국상 시상식이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렸다. 학술부문에는 러일전쟁을 한국인의 관점에서 재조명한 『전쟁과 인간 그리고 ‘평화’-러일전쟁과 한국사회』를 저술한 조재곤 박사가, 사회부문에는 오랜 기간 역사정의실천연대와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의 상임대표를 맡아 교학사 한국사교과서 보급과 한국사 국정교과서 도입을 저지한 한상권 교수가 선정돼 수상의 영예를 누렸다.

 

박정희 관련 명예훼손 소송, 모두 승소

1월 25일, 연구소가 박정희혈서조작설을 유포한 강용석 변호사, 정미홍 전 KBS 아나운서, 일베회원 강모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각각 500만원, 300만원, 300만원을 연구소에 배상하라는 항소심의 판결을 확정했다.
12월 12일에는 문퇴본(문재인정권 퇴진촉구 애국의병혁명본부)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방모씨를 상대로 한 박정희 합성사진 조작 관련 명예훼손 소송 2심에서 서울북부지방법원은 피고의 항소를 기각하고 연구소에 500만원을 배상하도록 결정했다.

 

‘기록으로 보는 3•1혁명’ 심포지엄을 통해 3•1혁명의 의미를 재조명해

연구소는 6월 1일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1주년 기념으로 덕성여대 인문과학연구소 지역문화연구센터와 공동으로 ‘기록으로 보는 3•1혁명’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함흥법원 검사의 기소자료와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 등 기존 연구에서 다뤄지지 않은 자료를 활용하여 3•1혁명의 새로운 양상을 도출하였고, 운동보다는 혁명으로 명명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여 3•1혁명의 역사상을 한층 풍부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2회째 맞은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

8월 12일 일본 도쿄의 한국YMCA에서 열린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 행사에 무단합사 피해자 유족들을 비롯하여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 사무국을 맡은 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관계자들이 참가했다. 이 행사는 2006년 8월부터 한국 타이완 오키나와 일본의 시민들이 침략신사 야스쿠니를 반대하고 동아시아 평화를 염원하기 위해 매년 개최해왔다.
한편 6월에는 그간 보추협의 숙원사업이었던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가 출간되어 유족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근현대사기념관, 다채로운 강좌로 학생•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어

연구소가 2016년부터 위탁 운영하고 있는 근현대사기념관이 시의적절한 다양한 주제의 강좌를 개최하여 학생과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7월 25일~28일 진행된 ‘영화로 배우는 일제강점기’ 강좌에서는 최근 흥행한 영화 <밀정> <암살>과 강제동원문제를 다룬 <안녕 사요나라> <군함도>를 소재로 삼아 연구소 상근자들이 강사로 나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강제동원 피해실태를 생생하게 설명했다. 이밖에도 ‘저항과 협력-식민지 지식인의 엇갈린 선택’(3~6월) ‘역사의 길에서 민주주의를 묻다’(6~7월)와 ‘순례길의 독립운동가’(9월) 등의 강좌를 열어 독립전신과 민주의식 고양에 앞장섰다.

목, 2018/01/2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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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소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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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항 위안소구지진열관 안에는 할머니가 된 소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답사단의 소녀가 그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청년백범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후원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사기행’이 10회를 기록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상하이를 시작으로 자싱, 하이옌, 항저우, 난징을 찾아가는 일정이다. 이번에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여든이 넘으신 민문연 이광찬 회원과 이윤 회원 등 17명이 다녀왔다.
이봉창 의사가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문을 두드렸던 상하이시기 마지막 임정 청사. 의열단원 오성륜・김익상・이종암 의사가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를 저격한 황포마두. 김구 선생 어머니가 먹을 만한 것을 고르기 위해 중국 사람들이 다듬고 버린 채소더미를 뒤지던 골목길. 아직도 조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독립운동가들의 유골이 흩어져 있는 송경령능원(상하이 외국인묘지였던 만국공묘의 현재 명칭). 김구 선생이 이봉창ㆍ윤봉길 의사 의거 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중국 뱃사공 주애보와 살았던 자싱의 피신처. 시진핑 주석이 저장성 당서기 시절에 찾아왔던 하이옌의 김구선생피난처. 중국의 ‘국가급 항전시설 및 유적지’로 지정된 항저우 서호 옆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김원봉 선생이 청년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했던 난징 산골의 천녕사, 여운형・조동호・김마리아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이 다녔고, 민족혁명당 창당식을 거행했던 난징대학교.
중일전쟁시기 일제가 난징 시민 30만 명을 학살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든 남경대도살조난동포기념관(南京大屠殺遭難同胞紀念館). 난징총독부에서 500미터도 안 되는 곳에 동양 최대 규모의 위안소를 만들어 놓고, 눈앞에서 벌였던 그 잔인한 짓을 지금도 인정조차 하지 않는 일본의 무모함에 말을 잃어버리게 되는 곳 리제항 위안소구지진열관. 그곳에는 끌려온 어린 소녀가 할머니가 되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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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천녕사 앞에서 기념촬영

 

옛날 의병전쟁을 하시던 분들의 머리에는 꽃이 피었다고 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산과 들에서 몇날 며칠을 씻지도 못했던 그분들의 머리에, 바람에 날려 씨앗이 꽂히고 그것이 꽃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현실의 몸은 거칠고 고단했지만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꽃으로 기억돼야 하는 역사다. 우리가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그분들 같은 삶의 길을 갈 수 있었을까? 다시는 그런 삶을 걸어야만 하는 시대가 와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그분들을 잊지 않아야 하고, 그분들이 걸으셨던 길을 따라 걷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화, 2018/03/2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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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조민 평화재단 평화교육원장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

 

북한은 지난 7월 두 차례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급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마침내 미국 본토 타격 가능성이 현실화되었다. 동북아 전략 구도의 게임체인지 순간이 다가왔다.
ICBM은 현대 군사 기술의 집약체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속옷도 제대로 못 만드는 북한의 ICBM 개발이 미스터리라고 하면서, 성공 요인을 크게 세 가지로 봤다. 첫째, 지난 수십 년 간 ICBM 관련 과학자들을 꾸준히 관리했으며, 둘째 스스로 확보한 비공식 글로벌 금융 네트워크를 활용해 미사일 개발 비용을 감당했고, 마지막으로 김정은이 미사일 개발에 정권의 사활을 걸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연합뉴스???? 2017.7.10). 그러나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는 워싱턴포스트 분석보다 뿌리가 더 깊다.
북한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 고립무원의 외톨이가 됐다. 이에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에 올인했다. 모든 국가자원을 다 쏟아 부었다. 북한 스스로 핵개발 의도를 미국의 핵위협 대처, 재래식 무기의 엄청난 비용 부담에 따른 코스트 측면에서 핵개발, 그리고 민족통일의 원동력 구축임을 밝히고 있다. 북한의 ‘피포위 의식’과 미국의 대북 핵위협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통일 무기로서의 핵’이라는 데에 북핵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의 북한 비핵화 전략은 실패했다. 왜 실패하고 말았는가? 미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우려하면서도 적극적인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가 군산복합체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상황일 수도 있었고, ‘불량국가’와의 협상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제국 미국의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미국은 좀체 북한과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체결의 세 이벤트가 주목된다. 그해 말 전술핵무기가 철수되었다. 독일 통일(1990.10.3)을 전후하여 한소수교(1990.9.30), 한중수교(1992.8.24)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북한과 미일과의 교차승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2년 초 북한은 주한미군 주둔 용인을 전제로 북미수교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거절했다. 그러자 북한은 핵프로그램 추진으로 돌아섰다.

 

북핵, 협상 실패의 역사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몇 차례의 협상 타결이 있었다. 1994년 10월의 제네바 기본합의로 제1차 핵위기가 봉합되었다. 그러나 당시 클린턴 행정부와는 달리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의 발목잡기에 걸려 경수로 건설의 첫 삽을 뜨는데 3년 가까이 걸렸다. 1998년 8월 31일 대포동 미사일 발사로 다시 미국의 주목을 끌었다. 2000년 10월 12일 워싱턴의 「북미 공동코뮤니케」(US-DPRK Joint Communique)로 한반도의 새 역사의 장이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공동코뮤니케는 다음해 부시 대통령에 의해 찢겨지고 말았다.
2002년 10월 고농축우라늄(HEU) 핵개발 의혹으로 제2차 핵위기가 불거졌다. 우여곡절 끝에 다음해 8월 다자간 협상틀인 6자회담이 개최되어 커다란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2005년 「9·19 공동성명」으로 거의 완벽한 합의문이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 합의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북한 자금을 묶은 BDA(방코델타아시아)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북한은 다음해(2006.10.9) 마침내 제1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에 놀란 미국은 다시 북미 양자 협상을 서둘렀다.
2008년 6월 영변 5MW 원자로 냉각탑 폭파, 10월 테러지원국 해제 등 북핵 협상이 순항하는 듯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6자회담은 2008년 12월의 6차 회담을 끝으로 지금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김정일이 2008년 8월 스트로크(뇌졸중)를 맞았다. 갑자기 건국기념일(9월 9일) 행사가 취소되었다. 그러자 김정일 사망 관련 예측 보도가 봇물을 이루었다. 미국 정보기관을 중심으로 김정일 사망 후 대책이 얘기됐고, 미국과 한국에서 북한붕괴론이 크게 부각되었다. 학술 세미나, 언론은 호들갑을 떨었다. 미국은 협상 판을 걷어 치웠다.
김정일은 ‘유감스럽게도’ 3년이나 더 살았다. 그 3년 동안 중국과 러시아를 수차례 방문했고, 핵미사일 소요 첨단 소재와 장비들을 구입했다. 2009년 1월 김정은을 세습 후계자로 내세웠다. 김정일은 3년의 후견 기간을 통해 절대 미국을 믿어서는 안 되고, 핵미사일만이 살 길이라는 점을 확신시켜주고 떠났다. 김정일의 사망이 급변사태나 붕괴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북한 비핵화, 2단계 접근
미국은 본토 침공을 두 번 당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1941.12.7), 2001년의 9․11 테러가 그것이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과 언어폭탄으로 미국 시민의 충격은 크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오바마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는 사실상 전략적 무대책으로 실패했다. 그렇다고 선제타격(preemptive strike), 예방전쟁(preventive war) 카드를 함부로 휘두를 형편은 못된다.
북미 간 치킨게임이 진정 국면에 들어서는가? 북한의 협박 자제와 한미연합훈련 축소로 일단 긴장국면을 넘긴다면, 이제 본격적인 협상 모멘텀을 찾아 나서야 한다.
2단계 접근이 가능하다. 1단계는 위기 봉합과 핵·미사일 상황 악화 방지에 초점이 있다. 이는 ‘동결 vs 제재·압박 해제(완화)’의 맞교환이다. 2단계는 장기전망 구도 위에서 ‘핵폐기 vs 평화체제’ 협상틀이 예상된다. 1단계 진입이 쉽지는 않지만, 협상 이외에 다른 길이 있겠는가?

편집자주 – 이 시론은 8월 25일 접수된 글이라 이후 북핵 위기의 변동 사항이 반영되지 않았다.

월, 2017/09/25-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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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63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20점 보내와
2월 28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3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공무여행증명서, 1940년도 소작료납입고지서 등 문서류와 일제강점기 농업교과서 등 도서류다.

조영숙 회원(도쿄지회 총무) 자료 기증
2월 1일 조영숙 회원이 지난해 재일동포들의 고단한 삶이 묻어있는 자료에 이어 남편의 자료 5점을 기증했다.

이건제 회원 자료기증
2월 20일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을교주했던이건제회원이「노동자신문」(1989~1996)과 도서 16권 등 총 464점의 소장자료를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월, 2018/03/2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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