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영화 조정래 감독

지역

영화 조정래 감독

admin | 토, 2021/06/26- 00:06

[인터뷰]

영화 <광대 : 소리꾼 감독판> 조정래 감독

 

인터뷰 :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민족의 흥과 한이 다시 울려 퍼진다. ’ 작년 7월, 코로나19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독창성과 풍부한 볼거리로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던 영화 <소리꾼>이 <광대>라는 이름의 ‘감독판’ 영화로 다시 돌아온다.
감독판이니 만큼 이전 개봉작에서 다루어지지 못한 서사들이 과연 어떤식으로 가미되었을지, 연출자의 시선을 따라 가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포인트다. 연구소에서는 오는 9월 전격 재개봉을 앞두고 전국을 돌며 시사회를 진행하고 있는 <광대 : 소리꾼 감독판>의 조정래 감독을 만나 보았다.

● 개봉 1년여 만에 ‘감독판’으로 다시 돌아왔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나?

● 일단 나부터가 판소리 고수(鼓手), 즉 국악인 출신이다. 인간문화재이신 정철호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이수자 자격까지 얻었다. 대학교 시절 영화 <서편제>를 보고 국악에 빠져들기 시작했는데 거의 미쳐있다시피 했던것 같다. 졸업 후 ‘바닥소리’라는 단체를 만들고 전국으로 공연을 다닐 정도였
으니까.(웃음) 어쨌든 대학교 때 판소리를 주제로 한 단편시나리오를 하나 구상했는데 그게 바로 이 영화의 모태가 된 ‘회심곡’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다. 영화 <귀향> 역시 판소리와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나눔의 집’과 수요집회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판소리 공연을 나가게 되면서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판소리는 영화감독인 나 스스로의 서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콘텐츠다. 이런 판소리를 주제로 한 영화 <소리꾼>, 게다가 그걸 감독판으로까지 선보일 수 있게 됐으니 감회가 남다르다. 보면 알게 되겠지만 기존 개봉작에 비해 소리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장면이나 음성, 관련 이야기들이 다수 살아났다.

● 영화 기획단계에서는 ‘남북합작영화’로 추진되었다고 들었다. 특별한 준비과정이 있었을 것 같은데?
● ‘남북합작’이라는 키워드는 이 영화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데 중요한 포스트를 차지한다. 제작 초기 단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서울과 평양 동시개봉을 준비했을 정도다. 지금이야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있지만 영화를 기획할 2018년 당시만 해도 평창올림픽과 4.27 판문점선언을 계기로 남북 간의 평화
무드가 펼쳐지던 시기였다. 나 역시 그 바람을 타고 그해 11월 당시 김덕룡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방북단에 함께했었는데 바로 그때 영화의 북한 로케이션 기회를 얻게 됐다. 방북 기간 내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준비해간 <광대> 제작계획과 시나리오 등을 소개하고 다녔는데 다행히 북측 주관 단체에서 관심을 가져줬다. 어느 날 새벽 호텔로비로 나오라고 하더니 시나리오를 소개해보라고 하더라.(웃음) 그후로 남북합작영화 계획이 급물살을 타게 됐고 귀국 후에는 협의를 진행해보자는 연락이 북측으로부터 왔다. 그때가 2018년 12월경이었다. 협의는 중국 북경에서 남북 측 관계자가 만나 이뤄졌는데 우리가 쓴 제작 계획서를 북한 측에서 따져보고 실행 가능한 부분을 검토하는 형식이었다. 협
의 과정 내내 북측은 대단히 진중한 태도로 임했다. 단 한 줄도 그냥 넘어가는 일 없이 꼼꼼하게 묻고 가능 여부를 검증하더라. 시나리오의 취지는 물론이고 촬영 장소는 어디로 하는지, 어떻게 이동하는지, 엑스트라는 어떻게 지원하는지 등등 … 합의서만 해도 10번은 수정한 것 같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오히려 이런 꼼꼼하고 진지한 북측의 태도 덕분에 이 영화의 남북합작이 성사될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그래서 영화 촬영기간 중 보름에서 한 달 정도를 북측에서 촬영하고 엑스트라까지 지원받기로 합의됐었다. 다만 영화 메인 캐릭터 중 한 명을 북측 배우로 하자는 제안은 거절당했다. “북한에서 영화는 사상이란 말이오!” 라며 단호히 거절하더라. (웃음) 아참, 이 만남은 물론 통일부의 정식허가를 받고 이뤄진 것이다. 귀국보고도 꼼꼼히 했다.

영화 <광대 : 소리꾼 감독판> 포스터

● 그러나 2019년 하노이 북미회담 이후부터는 남북관계가 급속히 얼어붙었다. 영향을 받았을 것 같은데?

● 맞다. 개인적으로도 제일 아쉬운 부분이다. 하노이 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야심차게 기획했던 북측 촬영이 무산됐다. 최대한 남북합작영화로 완성을 시키고 싶었기에 긴장이 완화되는 시점을 기다려보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속절없이 시간이 가고 2019년 여름이 지나면서부터는 더 늦어져서는 이도저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결국 남한만을 무대로 영화를 찍게 됐다. 정말 아쉬웠다. 등장인물들이 한반도 강산을 방랑하는 로드무비적인 느낌이 중요했는데 남쪽의 풍경만으로 묘사해야 했으니. 최후의 수단으로 북측에 사전 답사를 가서 촬영한 영상(주로 자연을 소재로 한)이라도 써보려 했는데 그 시도조차 무산됐다. 아무리 자연풍경이라지만 남북관계가 워낙 안 좋은 상황인지라 북한과 관련된 어떤 것도 담을 수 없었다. 색안경 낀 여론몰이에 당할 수도 있고 영화 흥행에도 타격을 받을 거라는 우려들이 많았다. 괴로웠다. 주위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의 의견이기에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었던 거다. 그래서 2020년에 개봉한 <소리꾼>은 감독 입장에서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 물론 영화의 작품성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코로나 때문에 흥행은 잘 안됐지만. (웃음) 동경국제영화제, 스
페인 한국영화제, 중동한국영화제 등에 개막작으로 초청됐고 배우들의 연기력도 주목받았다.

● 말이 나온 김에 감독판 <광대>와 기존 개봉작 <소리꾼>의 차별점을 이야기해 달라

● 아까 잠시 언급했지만, 기존 개봉작에서는 담지 못한 사전답사 영상, 북한의 자연풍경 영상들이 이번 감독판에는 전부 녹아들어 있다. 사전답사 당시 묘향산부터 황해도를 돌면서 북한의 풍광명미(風光明媚)를 찍어놨었는데 그걸 잘 편집하여 영화의 배경으로 대폭 활용했다. 이런 측면에서 <소리꾼>은 감독판인 <광대>에 와서야 ‘남북합작’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 이 영화를 봤을런지 잘 모르겠으나 만약 볼 수 있다면 <광대 : 소리꾼 감독판>을 봐줬으면 좋겠다. 또 하나의 차별점은 비주류의 이야기, 즉 기존 영화에서 생략됐던 조연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났다는 점이다.
한 예로 <소리꾼>의 광대패들에 대한 이야기를 완결성 있게 보강했다. 그리고 한국판 레미제라블 같
은 느낌을 조금이라도 살려보고자 민중의 저항적 측면, 혁명적이고 반봉건적 요소도 조금 강화시켰다. 물론 이런 부분들은 재촬영을 한 것이 아니라 기존 개봉작에서는 생략됐던 부분을 최대한 살린 것이다. 배우들, 이유리 씨나 김하연 양(아역배우)이 노래하는 장면도 좀 더 추가했다. 그러다보니 러닝 타임이 좀 길어졌는데 시청각적 감상이 풍부해지고 서사의 흐름을 빠르게 하는 것으로 보완해보려 했다.

● 감독판 개봉을 맞아 공개할 수 있는 촬영 에피소드가 있다면?

● 2020년 개봉 뒤에 인상 깊었던 장면으로 ‘학규(극중 주연)’가 피투성이의 몸으로 최후의 판소리를 하는 장면을 많이 말씀해주시더라. 실제로 그 장면은 현장에서도 굉장히 깊은 울림을 줬다. 괴산에 있는 세트장에서 촬영했는데 매서운 겨울 날씨로 입과 손이 얼어붙은 상황에서도 배우들이 완전히 몰입해줬다. 영화상 어떤 사운드 효과도 주지 않고 오로지 현장음만으로 소리를 전달한다는 원칙으로 촬영했기에 ‘학규’ 역을 맡은 이봉근 배우로서도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혼신을 다해 소리를 내줬다. 그 진심이 전해졌던지 당시 세트장에 있는 배우와 스텝들이 그 장면을 촬영하며 모두 울었다. 곤란했던 것은 악역들도 울고 있어서(웃음). 어쨌거나 바로 그런 혼신의 소리가 판소리의 ‘프로토타입’이 아닌가 생각한다.
극중 ‘청이(아역)’가 강물에 뛰어드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실제 시퍼런 강물에 뛰어들어야 했기 때
문에 배역을 맡은 김하연 양의 고생이 많았다. 처음에는 대역을 쓰려고 했는데 자신이 직접 하겠다고
나섰다. 전체적으로 배우, 스태프들의 팀워크가 좋았고 협력이 잘 이뤄졌다. 그리고 이건 영화 스토리
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에피소드인데 영화에 나오는 전통 공예품, 이를테면 괴불노리개나 복주머
니 같은 소품들은 전통공예작가인 이혜진 님, 내 아내가 직접 만든 것이다.(웃음) 아내가 미술팀 일
원으로 참여하며 많은 도움을 줬는데 한번쯤 소개하고 싶었다.

● 감독판인 만큼 영화를 통해 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 것 같다.

● 가족의 복원이다. <광대 : 소리꾼 감독판>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갈등으로 얽히고설키는 것이 아
닌, 길 위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이웃들이 점차 하나의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남북합작
의 영화를 만들어보고자 시도한 것 또한 바로 그런 지향에서다. 분단된 남북이 ‘가족의 복원’을 이루어가며 통일까지 꿈꾸는 것, 그런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북한에서 촬영한 풍경들을 이번 <광대 : 소리꾼 감독판>에 넣으면서 이런 감정은 더 절실해졌다. 북한의 자연은 아름다우면서도 이질감이 없다. 외국에 온 것 같은 낯선 느낌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어디 자연뿐이겠는가. 북한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직접 대면했을 때 느낀 감정은 그냥 ‘똑같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식, 술을 좋아하는 것, 흥 많고 신명 있는 것 … 다르고 이질적인 것은 우리들의 심리적 거리일 뿐이다. 이렇게 꼭 닮은 자연, 사람을 느끼면서 ‘가족의 복원’에 대한 꿈을 관객 분들과 공유하고 싶다.

 

 

● 조금 이른 감이 있는 질문이지만 혹시 지금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이 있는지? 있다면 간단히 소개를 부탁드리면서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싶다.

●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일본 홋카이도 조선인 강제노동자와 아이누족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디어는 몇 년 전, 일본 홋카이도에서 <귀향> 시사회를 통해 만나게 된 교수님으로부터 제공받았다. 그 교수님이 식민지 당시, 홋카이도로 끌려온 조선인 강제징용노동자들의 사연과 아이누족에 대한 일제의 탄압정책에 대해 설명해주시면서 꽤나 많은 사진과 자료들을 함께 주셨다. 그리고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유골이 묻혀있는 장소들과 아이누 인종연구의 현장 훗카이도대 ‘동물실험실’, 아이누 박물관 등을 안내 받았다. 일본이 조선인과 아이누 인들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조선인들이 끌려간 군수공장이나 탄광 등의 실상은 어땠는지, 그곳에서 탈출하려던 조선인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
는지 등등. 그 참상이라는 게 듣기만 해도 괴로운 것이어서 참 많이도 울었다. 그렇게 아픈 감정을 느끼면서 시나리오를 써내려가게 됐고 대략적인 뼈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걸 영화로 만들려면 만만치 않은 돈이 필요할 것 같다. (웃음) 아무튼 지금은 <광대 : 소리꾼 감독판> 관련 활동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차차 구체화시켜 나갈 예정이다.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면 아마 민족문제연구소에도 종종 도움을 요청드리게 될 것 같다. 부족함이 많겠지만 회원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기대를 부탁드린다.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14

2017년 12월 18일 첫 방송을 시작한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내역사) 시즌2가 2018년 8월 20일 마지막 방송으로 9개월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시민들의 많은 관심으로 좋은 성과를 냈던 시즌1 〈역적〉을 발판삼아 시즌2는 연구소가 보유한 콘텐츠를 활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외부단체와 제휴를 통해 청취자를 늘려 장기적으로 연구소 미디어로 발전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내역사 시즌2에서는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의 대중역사강의 ‘근현대사 100년의 역사여행’(아쉽게도 개인사정으로 중단됨)을 필두로 조한성 연구원, 방은희 교육팀장, MC노가 사건과 인물 중심으로 역사를 알기 쉽게 풀어간 ‘역전다방(역사를 전하는 수다방)’과 이순우 연구원의 식민지시대 자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돋보인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가다)’ 그리고 역사이슈에 대한 뒷담화를 나누는 ‘방학진 기획실장의 바하인드히스토리’까지 4개의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총 55개의 에피소드를 방송하였다.
국민TV와 협력하여 3개월간 영상방송을 제작하여 영상방송의 가능성도 타진하였다. 특히 역사적인 4.27남북정상회담에 맞춰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와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을 모시고 특별대담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청취자들의 많은 관심을 이끌어냈다. 그 결과 내역사 시즌2는 5천여 명의 고정 청취자를 확보해 월 8만 이상의 다운로드를 기록했고, 역사 팟캐스트 분야에서 10위권에 진입하여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는 시즌1, 2를 거치면서 안정적인 제작노하우를 습득해 향후 장기적인 방송을 할 수 가능성을 열었다. 연구소는 두 달 간 충전기를 갖고 나서 10월말쯤 시즌3에 들어갈 예정이다. 회원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내역사 시즌2의 모든 에피소드는 오디오 팟빵, 아이튠즈 팟캐스트, 유튜브와 팟티를 통해서 다시 들을 수 있다.

• 김세호 PD

목, 2018/09/06- 17:14
97
0

진주지회 회원인 박노정 시인이 7월 4일 6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박 시인의 부고기사가 여러 언론에 났지만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가 쓴 기사 제목에 가장 공감이 간다.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 별세〉.
박 시인을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박 시인이 ????진주신문????대표이사 시절 그의 소개로 진주의 어른인 남성(南星) 김장하 선생을 만났으니 아마도 1990년대 후반으로 짐작한다.

▲ 박노정 시인./경남도민일보DB

????진주신문????은1990년진주시민들이모여창간한신문으로지역의수구적인여론에맞서 정론직필 그리고 ‘진주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정신을 ‘신분해방운동인 형평, 임진왜란 때 2차례에 걸친 진주성 전투에서 민관군이 일체가 돼 보여준 주체, 남명 조식 선생의 호의’ 등 3가지를 꼽았다.
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이사뿐아니라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진주민예총회장,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 진주문인협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를 빼놓고 진주의 시민운동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로 있던 2005년 5월, 박 시인은 지역의 후배들과 함께 진주성 촉석루 옆 의기사에 있던 친일화가 김은호의 ‘미인도 논개’(일명 논개영정)을 뜯어내 박 시인을 포함해 4명이 각각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선고가 부당하다며 모두 노역장 유치를 자원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벌금 대납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다. 당시 4명의 벌금은 2,000만원이었지만 나중에 보니 성금이 이보다 더 많은 2,370만원이나 모아졌다. 박 시인 등은 나중에 이 성금 중 일부를 연구소 진주지회 결성(2012년 3월) 자금으로 내놓았다. 실제로 박 시인은 연구소 진주지회의 숨은 설계자였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시절이던1990년대초부터논개영정폐출운동을시작해 2008년 충남대 윤여환 교수가 그린 새로운 논개 영정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기까지 거의 20년이 걸렸다. 박 시인은 2006년에 친일잔재청산을위한진주시민운동을 만들어 진주 출신 친일가수 남인수의 이름을 딴 ‘남인수 가요제’를 ‘진주 가요제’로 바꾸기도 했고 ‘을사늑약 100년 남북공동사진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친일잔재 지도’ 제작도 추진했다. 이처럼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의 일생은 올바른 ‘진주정신’의 발굴과 계승이었다. 그와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을 간직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방학진 기획실장

 

수, 2018/08/01- 17:29
94
0

심정섭 지도위원 제57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50점 보내와
7월 26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제57차 자료기증을 했다. 주요자료는
1942년생 황OO가 경기도 강화국민학교, 강화중학교, 강화여자상업고등학교, 경기도농촌진흥
원 등을 거치면서 받은 상장과 수료증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자료 기증 잇달아
8월 2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의 히구치 유이치 공동대표가 연구소를 직접
방문하여 ????해협????, ????재일조선인사연구???? 등 소장자료 10점을 기증하였는데, 일본으로 돌아간 후인
8월 8일, 자택에서 소장자료를 정리하다가 기증자료를 발견하여 <조선신궁연보>(1936), <조선문
학사>(1981) 등 26점을 추가로 기증했다.

26

8월 12일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의 유족들과 오랫동안 교류를 가지고 있는 사노 미찌오 호우센 대학 교수가 「야스쿠니의 집靖國の家」 문패 1점을 기증했다.
8월 12일 야노 히데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이 <구일본군조선반도출신군인·군속사망자명부>(2017) 1권을 기증했다.

27

8월 9일 홍종화 작가가 <혈의 누> 등 도서 3권을 기증했다.

8월 18일 김민철 책임연구원이 단행본 등 다수의 책을 기증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 피해를 입은 후 현재까지 피폭자들의 권익을 확보하고
인권을 옹호하는 운동에 앞장서 온 곽귀훈 회원(경기동부지부)이 8월 21일 <世界>(2016~2017)
총 14권을 기증했다.

8월 25일 김승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民族日報>(1990) 1권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월, 2017/09/25- 13:21
90
0

18

일본에서 수화 통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회원이 교류하고 있는 청각장애우들의 소장자료를 전달받아 5월 29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이번에전달한 기증자료는 도서, 엽서, 박물류이고 기타무라 메구미씨도 <日鮮同祖論>(1943) 등 소장 도서 2권을 기증하였다. 뿐만 아니라 메구미 씨는 역사관 홍보용 사탕을 제작하여 일본인을 상대로 홍보활동을 펼치고 있다.

 

심정섭 지도위원 자료기증(54, 55차) 도서류, 문서류 총 100점 보내와

19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은 4월 26일과 5월 23일 각각 54번째와 55번째로 자료를 정리해 보내왔다. 조선총독부체신국에서 발행한 보험증서, 보험료영수장와 해방 후에 발행된 생활통
지표, 저축예금통장 등 문서류와 도서들이다.
특히 1938년에 비안(比安)공립 심상소학교에서 발행한 「학교가정통신부」에는 학업성적과 학교 출석상황 및 신체검진상황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학생들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금, 2017/07/28- 18:40
89
0

서경덕 교수가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 ‘군함도의 진실’이라는 영상을 홍보해 여론의 주목을 끌었다. 유네스코세계유산위원회가 유네스코산업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근대산업시설 중 한국인 등의 강제동원 관련 시설에 ‘역사의 전모’를 밝히라고 일본정부에게 권고한 사항을 이행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영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영상에는 몇 가지 부정확한 사실이 담겨 있다. 영상에서는 군함도에 강제동원되어 죽은 한국인이 120명이라 한다. 그러나 1984년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찾아낸 〈화장인허증하부신청서(火葬認許證下附申請書)〉 등 일명 ‘하시마자료’에 따르면 1925년부터 1945년까지 하시마에서 죽은 한국인은 123명이다. 여기에는 여자와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사망한 수가 64명이니 굳이 따지자면 강제동원 희생자는 50여 명이라 해야 맞다.
영상에 사용된 사진들도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누워서 탄을 캐는 장면은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정확한 연도와 지역을 알 수 없다.

25

사진①


이 글은 2017년 7월 25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군함도의 진실 공방과 한국 정부가 할 일〉을 수정·보완한 글이다. 분량상 싣지 못한 내용을 추가하면서 기고 후에도 계속 유포되고 있는 잘못된 정보를 교정하기 위해서다.


 

(사진①) 한겨레신문에 글을 썼을 때는 연도 미상의 후쿠오카탄광에 는 연도 미상의 후쿠오카탄광에서 일하던 일본인 광부라 했으나 이 또한 정확하지 않다. 유사한 사진으로 훈도시를 입고 누워서 탄을 캐는 사진도 있다.

26(사진②) 이 사진도 자주 한국인 강제동원피해자 사진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메이지시기 치쿠호탄광에서 탄을 캐는 일본인 광부의 모습이라 한다. 누워서 탄을 캐는 광부의 구도와 이미지가 거의 같기 때문에 두 사진이 혼용되고 있다. 영상에는 폭행을 당해 등에 상처가 나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쓰였다. 1926년 <아사히카와신문>에 실린 것으로 알려진 이 사진은 홋카이도 나카가와군에 있던 노동자 합숙소에서 학대당한 토목노동자를 찍은 것이라 한다.(사진③)
서교수가 사용한 사진①과 사진③ 모두 폭력과 학대, 열악한 노동조건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었던 노동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 실태를 직접 증명하는 사진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이 받은 차별과 학대, 가혹한 노동조건 등의 실태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은 없다. 통제된, 그리고 전쟁 홍보만 허용되던 시기에 그런 사진 자체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1920~30년대 일본 언론의 고발로 확인된 이런 사진들을 통해 강제동원된 한국인 피해자들의 삶을 유추해 볼 수 있으며, 수많은 증언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내친 김에 몇 가지만 더 지적해두자. ‘어머니 보고 싶어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배가 고파요.’라는 글이 탄광벽에 적힌 사진이 있다.(사진④)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한국인 탄광노동자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진으로 한때 언론에서도 많이 쓴 장면이다. 그러나 이 사진은 훗날 강제동원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탄광을 방문한 조사단들이 연출하기 위해 쓴 걸 찍은 것이라 한다. 그러니 굳이 사용해서 시비를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다. 앙상한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난 네 명의 한국인 사진도 강제동원 피해의 증거로 이용되고 있다.(사진⑤) 이 사진의 주인공들은 신기수(辛基秀)의 사진집 <韓國倂合と獨立運動>(1995)에따르면,1945년10월 효고현 오쿠보형무소를 출옥한 조선인들로 강제동원 피해와 직접 관련이 없다.
통계상의 잘못도 있다. 군함도와 함께 등재된 다카시마탄광에 한국인 4만 명이 강제동원되었다는 통계가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건 실무자의 단순 실수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외교부가 강제동원지원위원회에 관련 정보를 요청할 때 위원회 직원이 4천 명을 4만 명으로 잘못 적어 보고했다. 나중에 수정되긴 했으나 언론과 인터넷상에는 잘못된 숫자가 이용되었고, 지금도 계속 인용되고 있다. 한 가지 더, 일제시기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가 700여 만 명이라고 한다. 이 수치를 사용할 때는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현재까지 과거 일본 정부가 발표한 공식문서를 기초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본, 중국, 사할린, 남양군도 등으로 강제동원된 노동자는 최소 72만 명, 군인․군속으로 끌려간 청장년이 최소 36만 명, 일본군‘위안부’ 등 여성 동원이 십수 만 명으로 해외로 강제동원 수가 최소 120만 명에 이른다.
여기에 1~3개월 단위로 한반도내에 동원된 이른바 ‘도내동원’의 연 인원이 600여 만 명도 있다. 따라서 국내외를 포함해서 총동원된 700여 만 명이라는 수치는 집집마다 한 명씩 동원되었다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다만 한국정부와 일본정부가 1965년 한일협정에서 대상이 됐던 피해자는 ‘해외동원자’들이었고, 노무현정부 때 지원(사실상의 보상)을 받은 피해자들도 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도내동원의 경우 그 실태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인 데다 식민지 시기를 살았던 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법을 통한 진상규명과 지원 대상에서 뺀 것이다. 때문에 현재 우리가 강제동원의 피해를 말할 때 대상자는 120여 만 명이라 해야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숫자 몇 개 사진 설명 하나 잘못되었다고 강제동원의 본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일본의 우익들은 오류나 실수를 공격하면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처럼 군함도의 강제동원 자체를 부정하려 한다. 아니면 피해자들의 주장에 흠집을 냄으로써 한국의 주장이 과잉된 민족 감정에 근거하고 있어 뭔가 사실을 과장하거나 날조하고 있다는 불신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국내는 모르겠으나 국제사회에서는 이게 나름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어 문제다.
군함도를 놓고 국제사회를 향해 일본 정부와 우익은 세 가지 여론전을 펼칠 전망이다. 첫째, 2015년 유네스코 총회 석상에서 일본대사가 인정한 한국인 강제노동(forced to work)은 국제법에서 규정한 강제노동에 해당하지 않는다. 1910년 일본에 의한 조선 ‘강제병합’이 합법이며, 따라서 1938년의 국가총동원법과 1944년의 징용령에 의한 동원 역시 합법이므로 강제노동의 예외규정(전시하의 동원)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둘째, 군함도에서 한국인들은 차별 받지 않고 일본인과 사이좋게 지냈다는 당시 거주자들의 회고나 미담을 적극 발굴하여 알릴 것이다. 여기에 낙성대연구소 소속 연구원이 발표한 ‘강제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과 일본인 노동자들 사이에는 민족별 임금차별이 없었다. 다만 노동의 숙련도에 따른 차이가 있었다’라고 요약할 수 있는 논문을 영문으로 번역해 홍보전에 나설 것이다. 한국의 연구자가 강제동원에 따른 민족차별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나서니 일본으로서야 얼마나 반가운 일이겠는가.
셋째, 한국은 사태를 과장하거나 심지어 엉터리 자료를 만들어 역사를 왜곡·날조함으로써 일본을 때리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 증거로서 서교수의 광고 영상이 좋은 먹이감이 된 것이다.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이 점에선 한국의 언론들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강제동원 피해 통계를 두고 벌어지는 진실 논쟁에서 놓쳐서는 안 될 게 있다. 그것은 가해자인 일본정부와 기업이 스스로 진실을 밝힌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진상규명 대부분은 모두 피해자와 한일의 시민단체가 수십 년간 싸워서 얻어낸 것들이다. 여기에는 한국정부의 책임도 크다. 특히 지난 9년간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최악이었다. 피해자 유족과 시민단체가 직접 일본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유골조사와 봉환 문제를 협의해 해결의 물꼬를 텄지만, 정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초은행에 1945년 이전 일본 내에서 일했던 한국인 우편저금 통장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부는 모른 체 했다. 국제법에 따르면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국가가 지배국가로부터 관련 문서를 인계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 한다. 식민주의 극복을 위해 지속적인 진상규명과 자료 공개, 기념․기억 사업과 교육 등 새 정부가 해야 할 긴 목록 가운데 하나다.
영화 군함도가 개봉되었다. 무더운 여름이 더 더워질 것 같다.

∷ 김민철 책임연구원

월, 2017/08/07- 14:36
89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