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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과 양승태 사법부의 추악한 재판거래, 그 책임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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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과 양승태 사법부의 추악한 재판거래, 그 책임을 묻다

admin | 금, 2021/06/25- 23:45

[초점]

박근혜 정권과 양승태 사법부의 추악한 재판거래, 그 책임을 묻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지난 5월 25일 일제강점기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와 고 김규수 할아버지의 유족은 박근혜 정부 시기 사법농단, 재판거래의 불법행위에 대해 국가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했다.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아 지원해 온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은 지난 2018년 역사적인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냈음에도 일본 정부의 방해로 가해 기업이 아직까지 판결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이번 소송은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 비서실장을 비롯하여 정무수석, 윤병세 외교부 장관, 피고기업의 대리인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들과 양승태 대법원장, 임종헌 법원행정처장 등 법관다수가 조직적으로 공모하여 실행한 재판거래에 대해 국가배상법에 따라 공무원의 불법행위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을 묻는 소송이다. 이 사건 원고들은 2005년 2월 한국에서 소송을 제기하여 1, 2심에서 패소하였으나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에서 역전 승소했다. 2013년 7월 10일 서울고등법원의 파기환송심에서 승소한 원고들은 대법원 재상고심의 최종 승소 판결이 곧 내려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최종 확정판결이 내려지기까지 5년의 시간 동안 박근혜 청와대와 양승태 사법부는 판결을 뒤엎기 위해 피고기업의 대리인까지 동원하여 조직적인 재판거래를 자행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숨을 대가로 추악한 재판거래가 이루어지는 동안 연구소와 원고들은 조속한 판결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고 기자회견을 여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사법농단으로 판결이 지연되는 동안 네 분의 원고 가운데 세 분이 돌아가시고 말았다(여운택 2013년 12월, 신천수 2014년 10월, 김규수 2018년 6월 사망). 1965년 박정희의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인권회복이 가로막혀 온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21년의 재판투쟁 끝에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65년 체제’를 극복한 역사적인 대법원 판결을 쟁취했지만 끝내 법정에서 승소 판결을 듣지 못한 것이다. 국가는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재판거래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명확히 사죄하고 배상해야 할 것이다. 또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숨을 대가로 한 사법농단에 관여하여 불법행위를 저지른 모든 자들의 잘못을 명확히
하고, 그 책임을 묻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이번 소송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회복과 역사정의의 실현, 그리고 사법개혁과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소중한 디딤돌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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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제작하는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역적 시즌2’(이하 역적 시즌2)가 12월 18일 시작했다. 촛불혁명 이후 역사적폐의 시대적 소명을 담아 제작된 시즌1은 시민들의 많은 관심과 지지를 받아 애플 팟캐스트에서 발표된, 2017년 새로 출시된 최다 다운로드 팟캐스트 20위 안에 드는 쾌거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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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2는 매회 1, 2부로 구성된다. 1부는 역사적폐의 근원적인 뿌리를 되돌아보는 지난 100년의 한국 근현대사를 다룰 예정이다. 100년이란 긴 시대를 다루는 만큼 1년 동안 진행하는 장기프로젝트로 기획했고, 지난 시즌과 마찬가지로 박한용 교육홍보실장과 MC노가 호흡을 맞춘다. 박 실장은 역사 사실의 전달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이슈와 연결고리를 찾아 설명함으로써 시청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계획이다. 1~2월 방송에서는 19세기말 내우외환의 조선사회가 반봉건 반외세의 과제를 어떻게 풀어갔는지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2부는 연구소의 초기부터 현재까지 전개된 주요 활동을 전달하는 내용으로 방학진 기획실장과 연구소 회원인 김광진 전 국회의원이 공동으로 진행한다. 또한 매주 주제에 맞게 이야기 손님이 초대하는데 첫 회에는 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선생을 모시고 효창원과 역사적폐청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아들인 김정륙 선생, 석주 이상룡의 증손자인 이항증 선생 등을 모시고 반민특위와 임청각의 뒷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역적 시즌2는 많은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미디어협동조합인 국민TV와 공동으로 제작하여 기존 오디오방송뿐 아니라 영상방송으로 채널을 확장하였다. 오디오방송은 팟캐스트 전문채널인 팟빵과 아이튠즈를 통해서 들을 수 있으며 영상방송은 유튜브 국민TV채널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또한 앞으로 1, 2부와 별도로 영상방송에 걸맞은 새로운 특집기획을 준비 중이다. 연구소가 보유한 자료를 활용한 역사덕후방송, 대중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전달하는 역사토크쇼 등을 상반기에 만나볼 수 있다.

• 김세호 PD

목, 2018/01/25-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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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44

청일전쟁 때 일본군 개선식은 왜 용산 벌판에서 벌어졌을까?
– 과장된 전공(戰功)이 곳곳에 만들어낸 그들의 전승 기념물들

이순우 책임연구원

1894년(갑오년) 여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감당하지 못한 조선국 정부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이에 맞서 일본도 10년 전 갑신정변의 여파로 맺은 천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동시 개입을 적극 시도하면서 끝내 이러한 군사충돌은 바로 이 땅에서 청일전쟁이 촉발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해 6월 8일 청국군은 아산만(牙山灣, 마산포와 백석포)을 통해 상륙하여 아산과 성환 일대에 주둔했고, 일본군은 이보다 하루 늦게 인천항을 거쳐 서울에 들어온 뒤 선발부대인 오시마 혼성여단(大島混成旅團)이 만리창(萬里倉, 효창동 199번지 지점)에 본부를 마련하고 예하 주력부대는 효창원 계곡과 아현리 주변에 포진하였다.

<일청전쟁사진첩> (1895)에 수록된 효창원 만리창 지역의 일본군 숙영지 전경이다.

 

이때 오시마 병력이 한강을 건너 남하하여 청국군의 방어진을 향해 진군함에 따라 7월 29일 새벽 성환의 북쪽 안성도(安城渡, 안성나루;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중리)에서 두 외국 군대 사이에 첫 육상 전투가 벌어졌다. 불과 이틀 사이에 일본군은 청국군의 아산 본영까지 점령하고막대한 전리품을 수습하여 서울로 귀환하였고, 다수의 사상자를 낸 청국군은 홍주 방면으로 패주하였다가 강원도 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방식으로 행군하여 8월 하순에 평양(平壤)에 대기하고 있던 자신들의 군영으로 간신히 합류하였다.

1894년 7월 29일 청국군과 일본군의 첫 전투가 벌어진 안성나루의 모습이다. 이 자리에는 나중에 안성교(安城橋)라는 다리가 설치되었다.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조선지풍광>, 1922)

 

이른바 ‘성환역(成歡役)’으로 표기되는 이 전투에서 크게 이긴 일본군이 이 좋은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이때의 전투 장면은 당시에 크게 유행하던 다색인쇄 목판화 기법인 니시키에(錦繪)로 만들어져 대량 보급되었고, 이를 통해 전쟁분위기를 고취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여기에는 대개 승승장구하는 일본 군대의 모습이 화려하고 과장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이 당시에도 ‘보도사진’이나 ‘종군기자’와 같은 존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진을 인쇄물로 전환하는 기술이 원활하지 않았으므로, 무엇보다도 속보성(速報性)을 생명으로 하는 전쟁화보와 같은 매체조차 제작의 편의성을 고려하여 대개 인화사진을 보고 다시 목판화로 그려 찍어내는 기법이 선호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청일전쟁 시기에 관한 자료는 일정한 시차를 두고 묶음 제작된 전쟁사진첩보다는 그때그때마다 제작된 목판화 종류의 기록물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은 수량이 남아 있다.

 

<도쿄아사히신문> 1894년 8월 28일자 부록으로 배포된 ‘일본군 경성 개선식 장면’이다. (이치노헤 쇼코 기증,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그런데 이 와중에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은 드물게도 1894년 8월 28일자의 부록으로 ‘명치 27년(1894년) 8월 5일 아병경성개선지도(我兵京城凱旋之圖)’라는 제목을 붙여 3매 연속 사진을 파노라마 형태로 담아낸 인쇄물을 배포하였다. 이미 20여 일 전의 상황이긴 하지만 생생한 전투소식을 알리는 나름의 전쟁 속보였던 셈이다.

<일청전쟁사진첩> (1895)에 수록된 일본군 개선식 장면이다. 사진촬영자는 조선 인천항에 거주하는 히구치 사이조(樋口宰藏)로 표시되어 있다.

 

여길 보면 벌판의 한쪽에 ‘개선문’이라고 써 붙인 커다란 일본식 녹문(綠門)이 서 있고, 그 앞으로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일본군대가 도열한 상태이며, 그 뒤쪽으로 약간 비탈진 언덕 위에는 구경꾼들이 뒤섞인 모습이 포착된다. 사진의 설명문에 이미 그해 8월 5일의 개선상황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므로, 이를 단서로 몇 가지 자료를 뒤져보았더니 <경성부사> 제1권 (1934), 590~591쪽에 이 사진 장면과 딱 일치하는 설명이 수록되어 있었다.

 

일본군의 승전소식이 경성에 알려지자 …… 일본인 측에 있어서는 수비군, 공사관원, 거류민 등의 환희는 비할 바가 없었고, 곧장 환영을 협의하여 구용산 문평산(舊龍山 文平山)의 동측 평지에 높이 4장(丈) 가량의 녹문(綠門, 료쿠몬)을 만들어 중앙에 오토리 공사(大鳥公使)가 쓴 ‘개선문(凱旋門, 아산을 바라보는 방향)’과 ‘환영문(歡迎門, 경성을 바라보는 방향)’이란 편액을 걸었다. 8월 5일 공사관원은 소와 술독을 문 옆으로 옮겼고, 일본거류민은 얼음을 멀리 한강 남안까지 운반하여 향응 준비를 전부 마쳤다. 이날 이른 아침부터 경성수비의 일본병은 도로의 양측에 나란히 늘어서고, 공병(工兵)은 동작진(銅雀津)에서 강을 건너도록 배를 띄울 준비를 했다. 오토리 공사는 관원들을 거느리고, 칙사 이윤용(勅使 李允用)과 군국기무소(軍國機務所, 군국기무처) 대표 정경원(鄭敬源)은 박홍천록(薄紅淺綠)의 조선예장(
朝鮮禮裝)을 갖추고 개선문 옆에 도착했다.
일군(日軍)은 매일 황혼에 출발하여 진위(振威), 수원(水原), 과천(果川) 등으로 주간의 더위를 피하며, 선두에는 조선인 인부가 노획품인 징과 큰북을 난타하고 또 포획품인 황룡기(黃龍旗) 여러 유(旒) 및 엽자(葉字; 葉志超), 섭자(聶字; 聶士成), 위자(魏字), 상자(商字), 풍자(馮字) 등의 문자를 수(繡)로 새긴 군기(軍旗) 27류, 기타 당(幢)이라고 하는 간봉(竿棒), 새깃털을 부착한 장창(長槍) 등 20여 개를 들어올리며, 대포 8문(門)은 소가 이끌었는데 각각에 ‘성환(成歡)의 전리품(戰利品)’, ‘청병 대패(淸兵 大敗)의 증(證)’ 등을 묵서(墨書)한 작은 깃발이 더하였고, 초병(哨兵)이 이를 감시하며 전군이 그 뒤를 따랐다. 처음 출정할 당시 흰색이었던 융의(戎衣, 군복)는 전부 갈색으로 염색되어 있어서 한눈에 보더라도 격전(激戰)의 정도를 떠올리는 것이 가능했다.
오시마 여단장(大島旅團長), 나가오카 참모장(長岡參謀長) 등이 앞서 말에서 내리자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 공사관 통역관)는 이윤용에 의한 국왕전하로부터의 감사위로 칙지(勅旨)를 옮겨 전하고, 정경원의 축사를 통역하였다. 이어서 주객(主客)이 서로 교환(交歡)하는 바가 있었고, 공사는 ‘천황폐하만세’를, 여단장은 ‘조선국대군주만세’, 정경원은 ‘대일본황제폐하만세’를 소리 질러 일동 제창하며 개선의 식을 마쳤다. 때는 정각 오전 9시,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은 그 빛을 한강변 백사장 위에 정렬한 개선군에게 뿌렸다. 이로부터 분포품(分捕品)을 선두로 하여 전군 진행을 개시하여 선두가 막영지에 도달할 무렵에는 대행리(大行李, 군수품)는 여전히 개선문의 옆에 있었는데, 구불구불한 장사(長蛇)의 부대는 숙숙(肅肅)하게 만리창(萬里倉)을 향하고 군중은 도로의 양측에 운집하여 이 장관을 마주했다. (하략)

 

이 내용에 따르면 이들은 한강을 건너 자신들의 주둔지인 ‘만리창’으로 가는 도중에 ‘개선문’ 앞에서 거창한 의식을 벌이는 장면인 것으로 드러난다. 사진에 포착된 작은 개울은 만초천(蔓草川; 너추내, 너푸내)인 듯도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물줄기가 약해보이는 것이 지류(支流)의 한가닥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뒤쪽으로 효창원을 품고 있는 연화봉 자락이 드러난 것으로 보아 개선식장은 대략 지금의 ‘삼각지(三角地)’에 가까운 어느 지점인 것으로 짐작된다.

<경성부사> 제1권(1934)에 수록된 종군화가 쿠보다 베이센의 개선식 삽화이다. 여기에는 이 행사가 벌어진 장소가 ‘문평산 동쪽’이라고 적고 있다.

 

실제로 <경성부사> 제1권 (1934), 591쪽에는 종군화가(從軍畫家)로 이름을 날린 쿠보다 베이센(久保田米僊, 1852~1906)이 그린 개선식 삽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에 대해 “장소는 구용산 문평산 동측(舊龍山 文平山 東側)”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문평산’은 일제 때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에 있던 당현(堂峴, 당고개) 일대의 작은 봉우리를 일컫는 용도로 곧잘 사용된 지명이었다. 따라서 문평산의 동쪽이라고 함은 지금의 ‘삼각지’ 언저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1925년 을축대홍수 당시 경정(京町, 지금의 문배동) 일대의 침수상황이다. 사진촬영지점은 ‘문평산’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전면으로 남산 자락과 삼각지 일대가 포착되어 있다. (조선총독부, <조선의 홍수>, 1926)

 

이보다 훨씬 나중의 일이지만, 일본군대가 효창원 일대에 포진한 내력은 그들만의 전쟁기념물을 곳곳에 설치하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1929년 6월에 건립된 ‘오시마 혼성여단막영지적(大島混成旅團幕營之跡) 기념비’와 1931년 6월에 건립된 ‘합리비행기발상지지(合理飛行機發祥之地) 기념비’가 바로 그것들이었다.
우선 앞의 것은 1926년 6월 24일에 오시마 혼성여단 전몰장졸을 위한 추도회를 열면서 그 기념으로 ‘오시마 여단주둔지(大島旅團駐屯地)’라고 쓴 표목(標木)을 우선 세웠다가 이를 대체하는 형태로 효창공원 서쪽고지에 세운 것이었다. 그리고 뒤의 것은 오시마 여단이 주둔하던 때에 제1야전병원부 육군일등조제수(陸軍一等調劑手)이던 니노미야 츄하치(二宮忠八, 1866~1936)가 이곳에서 비행기의 설계를 떠올려 발표했음을 기리기 위해 효창공립보통학교(청파동 3가 115번지 구역)의 경계면에 접한 동쪽고지에 설치한 비석이었다.

<매일신보> 1912년 11월 20일자에 수록된 ‘마츠자키 대위 기념비’의 낙성식 광경이다. 성환역 후면에 자리한 이 비석의 전면에는 테라우치 총독이 쓴 ‘유방백세(流芳百世)’라는 글씨가 부착되었다.

 

그런데 일제가 세운 청일전쟁 관련 기념물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었고, 일본 군인들의 행적이 남겨진 공간마다 이러한 시설이 잇달아 만들어졌다. 이러한 장소들은 대개 그 지역의 관광명소로 크게 홍보되거나 일본인들이 즐겨 찾는 그들의 전적지 또는 참배의 대상물로 활용되곤 했다.
이러한 종류의 하나로 일찍이 1912년 11월 3일에는 경부선 성환역(成歡驛) 뒤편 언덕에 ‘마츠자키 대위 기념비(松崎大尉記念碑)’가 건립된 바 있었다. 그는 제21연대 제12중대장으로 안성나루전투에서 앞장서 지휘하다가 총탄을 맞아 죽었는데, 이것이 일본군 측의 최초 전사자로 기록되었다. 그의 죽음은 즉시 ‘무부(武夫)의 귀감(龜鑑)’으로 치장되어 전사 장면은 니시키에(錦繪)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급되기도 했다.

마츠자키 대위 기념비 바로 옆에 자리한 ‘육군 나팔수 키구치 코헤이 기념비’의 모습이다. (경기도,
<경기지방의 명승사적>, 1937)

 

마츠자키 기념비가 건립된 장소는 청국군 섭사평(聶士成, 니에쉬청)의 중앙 진지였다가 점령되어 일본군 포병진지로 변한 구릉을 택하여 정했으며, 성환헌병파견소(成歡憲兵派遣所)와 성환보선구사무소(成歡保線區事務所)와 직산군청(稷山郡廳; 1914년에 천안군으로 흡수되어 합병)이 합동으로 건립부지를 조성하는 일을 담당했다고 알려진다. 기념비의 높이는 30여 척(尺)이며, 위쪽에는 데라우치 총독(寺內
總督)이 휘호(揮毫)한 “유방백세(流芳百世)”라는 글씨를 달았고 아래쪽에는 옛 상관이던 오시마 요시마사 자작(大島義昌 子爵)이 쓴 “육군보병대위 마츠자키 나오오미의 비(陸軍步兵大尉 松崎直臣之碑)”라는 석판을 부착하였다.
이와 함께 육군나팔수 기구치 코헤이(陸軍喇叭手 木口小平)의 비석도 마츠자키 기념비 옆에 설치되었다. 그는 안성나루를 건너는 전투과정에서 선두에 서서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나팔을 불면서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헛웃음을 자아내는 일은 당초에 공표된 나팔수의 정체는 시라카미 겐지로(白神源次郞)라는 군인이었고 그의 미담은 이내 소학교의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일본국민의 열광적 추앙을 받았으나, 알고 보니 그는 전투 중에 익사한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불과 1년 만에 실제 주인공이 기쿠치 코헤이로 번복되는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1900년 남산 왜성대공원에 건립된 ‘갑오역기념비’의 모습이다.(<한국병합기념첩>, 1910)

 

그리고 서울 남산 기슭에 있는 남산공원(南山公園, 왜성대공원)에는 난데없이 ‘갑오역기념비(甲午役紀念碑)’라는 일종의 추모시설을 겸한 충혼비가 들어섰다. 이 장소가 선택된 것은 청일전쟁 당시 오시마 여단이 포열(砲列)을 펼쳤던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곳에는 청일전쟁 때 죽은 일본군 전몰자만이 아니라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당시의 조난자에 더하여 1907년 군대해산 당시의 전사자도 모두 합사되었다.
특히, 이 기념비 아래에는 양화진 등지에 가매장되었던 전몰자의 유골을 몰래 옮겨 파묻었던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는데, <경성부사> 제2권(1936), 687~688쪽에는 갑오역기념비의 조성 경위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수원 팔달산 정상에 설치된 ‘코시 소좌 의사지비’의 전경이다. (경기도, <경기지방의 명승사적>, 1937)

 

5월에는 왜성대(倭城臺)에 갑오기념비를 세웠다. 처음에 거류민은 명치 18년(1885년) 이래 임오(壬午) 갑신(甲申)의 양란(兩亂)에 조난된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 해마다 제사를 행해 왔으나 명치 29년(1896년) 양화진(楊花鎭)에 가장(假葬, 가매장)한 청일전쟁 때 성환, 중화 등지에서 전몰자의 유골들도 봉납하여 전자와 합사(合祀)하는 기념비를 건립하자는 논의가 관민 사이에 번져, 기부금 3천 원을 갹출하여 주조(鑄造)를 오사카포병공창(大阪砲兵工廠)에 의뢰하고, 장소는 왜성대로 하여 8월 제막식(
除幕式)을 거행했다.
당시 성내에 매골(埋骨)하는 것은 이를 꺼리는 사정이 있었으므로 비밀리에 이 비석 아래에 매몰했다. 지금 경성신사(京城神社) 앞에 있는 ‘갑오역기념(甲午役記念)’의 비가 곧 이것이다.

이밖에 성환 전투와 관련하여 설치된 또 다른 전쟁 기념물로는 경기도 수원의 팔달산 정상 남단에 자리했던 육군소좌 코시 마사츠나(陸軍少佐 古志正綱)의 비석도 있었다. 그는 오시마 혼성여단에 소속된 제21연대 제3대대장으로 부천 오류동(富川 梧柳洞)을 거쳐 성환으로 진군하는 도중에 수원에 머물 때에 치중대(輜重隊, 수송보급부대)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조선인을 대상으로 보급품을 운반할 54마리의 군마(軍馬)를 징발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야간을 틈타 마부와 함께 군량미를 실은 말들이 모두 도망을 가는 상황이 벌어지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해 7월 27일 새벽 팔달산 기슭 수원군청의 뒤쪽 소나무 숲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예외없이 분전(奮戰)을 고취하는 전쟁 미담으로 치환되기에 이르렀고, 30년가량이 지난 1932년 10월 1일 수원재향군인분회(水原在鄕軍人分會)의 주도로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던 것이다. 높이 23척에 달하는 이 비석에는 오시마 혼성여단의 참모였던 나가오카 가이시(長岡外史)의 글씨를 받아 “갑오역 코시 소좌 의사지비(甲午役古志少佐義死之碑)”라는 편액이 부착되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결과적으로 그의 자결 또한 끝내 의로운 죽음으로 승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이미 30여 년 전에 있었던 청일전쟁 당시 과장된 전공이 만들어낸 전쟁영웅의 이미지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반복 소비되는 상황이 이어졌던 것이다. 이것이 일본제국이 벌인 또 다른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독려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 아닌가 한다.

금, 2019/02/22-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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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신용옥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상임이사

지난 2018년 12월 15일 내일을여는역사재단과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대학원 언어사회연구과 한
국학연구센터가 공동으로 주최한 좌담 <역사연구의 과거 현재 미래>가 히토쓰바시대학에서 열렸습니다.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와 강덕상 전 히토쓰바시대학 교수가 참여했고, 송연옥 아오야마 가쿠인대학(
靑山學院大學) 명예교수가 사회를 맡았습니다. 좌담회 전날인 14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나의 인생과 역사학>을 주제로 강만길 교수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강만길 교수는 자본주의맹아론 연구를 통해 일제시기 반식민사학의 변혁적 전통을 복원하고, 통일이라는 민족사적 전망을 담아내지 못한 채 사용되던 ‘해방 후 시대’를 분단시대라 역사적으로 이름 지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시기 사회주의운동을 민족해방운동으로 복원하고,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을 분단시대 극복사학의 출발점으로 삼아 분단시대를 극복하고 통일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매진해 왔습니다. 또한 전두환 신군부세력에 의해 해직교수가 되기도 했고, 통일문제 강연이 빌미가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형무소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히토쓰바시대학 교정에는 이 대학 전신인 도쿄상과대학에서 교수를 지낸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의 동판이 있습니다. 후쿠다 도쿠조는 조선사회 정체후진성론을 입론한 일본 제국주의시대 경제사학자였는데, 조선사회는 19세기 후반 일본의 강요로 문호가 개방될 때까지 고대사회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중세사회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백남운은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저술해 우리 역사에도 중세사회가 있었다고 논증했는데, 자신의 도쿄상과대학 선생인 후쿠다 도쿠조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했던 것입니다.
14일의 강연에서 강만길 교수는 후쿠다 도쿠조와 백남운의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를 연구하게 된 계기, 사회경제사에서 변혁운동사로 연구 지평을 넓혀가게 되는 과정 등 그간의 연구 역정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시아 평화구축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전망했습니다.
재일조선인 역사학자 강덕상 교수는 4살 때인 1934년에 부모님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다닐 때에는 한국전쟁에 반대하고 원자폭탄 사용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사 연구를 본격화하면서 당시 일본 역사학자들이 사용하지도 않았던 ????통상휘찬???? ????통상휘편???? 같은 자료를 이용하여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와 함께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해 조선경제사를 연구했습니다. 또한 관동대지진 대학살에 관한 자료집을 펴내고,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中公新書, 1975)라는 책을 발간해 당시에 5만부 가량 팔리면서 일본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두 강 교수가 역사연구의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를 평가하고 미래를 전망해 본 이번 좌담은 여러모로 뜻 깊은 자리였습니다. 두 강 교수는 연배도 1살 차이로 비슷한데, 식민지와 해방, 분단, 6.25전쟁, 냉전, 반공독재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겪으며 극복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분단과 전쟁은 남한에서 반공독재를 낳고 고착화했으며, 일본에서는 분단된 재일조선인사회에 민족 차별이 더해졌습니다. 두 강 교수는 자기 존재의 모순을 사회 모순으로 전화시키며 실천적연구를 통해 인간해방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역사학자이기 이전에 앎과 삶을 일치시키려 한 지식인입니다.
두 강 교수는 오래 전부터 교유를 이어 왔는데, 여러모로 닮은 점도 많습니다. 자본주의맹아론과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해 경제사를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 그렇고, 경제사를 연구하다가 사회운동사로 연구를 확대해 간 것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역사학자로서 추구해온 역사인식에 공감하고 지식인으로서 추구해 온 삶의 가치와 지향에 공감하기 때문에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5일의 좌담에서도 강덕상 교수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강만길 교수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을 들고 나와 자신의 역사연구에 큰 영향을 준 책 중 하나라고 소개했습니다. 최근에는 소농사회론, 유교적인 동아시아 근대이행론 등 자본주의맹아론이나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번 좌담회에서는 자본주의맹아론이나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구체적인 검증보다는 그 역사인식 문제를 주로 다루었는데, 향후 한국 및 동아시아의 근대 이행 연구에 참조되었으면 합니다.
강덕상 교수는 ????여운형 평전???? 완성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1권과 2권은 국내에서도 번역되어 소개되었는데, 4권이 2019년 2월에 발간될 것이라 했습니다. 강덕상 교수는 1986년에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강만길 교수와 함께 여운형 묘소를 둘러보았는데, 현대사에 자리하는 여운형이라는 인물에 비하면 묘소가 너무 초라해 씁쓸했다고 합니다.
????여운형 평전????이 4권까지 완간되면 한국어로 번역되어 국내 독자들에게도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번 강연회와 좌담회에는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생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도 있었지만 재일조선인도 많았습니다. 재일조선인으로서 우리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 향후진로 문제 등과 관련해 서로 주고받은 정담이 지금도 애틋합니다. 강덕상 선생님이 사석에서 필자에게 건넨 한마디가 마음 한구석에 애잔하게 남아 있습니다.
“동족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겪는 처지가 온전한 하나의 반쪽이라면 재일조선인은 그 반의 반쪽이라고.

병중에 계신 강덕상 선생님이 오랜 친구 강만길 선생님을 만나러 나오셔서 저녁 식사 자리도 마련해 주시고 좌담도 참석해 주셨습니다. 두 분의 애틋한 정담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강덕상 선생님의 완쾌를 바랍니다.

목, 2019/01/24-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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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흩뿌리는 주말 오후 가슴 벅차고 감동이 넘치는 뮤지컬을 보았다. 사실 배우로 나오는 지창욱을 좋아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신났던 나는 그곳에서 내 이름을 남기지 않아도 나라의 독립만 이뤄진다면 목숨도 아낌없이 내놓은 독립운동가 팔도를 만났고, 밀정 동규와 죽은 군인들도 깨워서 독립을 이루겠다는 나팔을 만나게 된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 오프닝 곡은 지금도 입속에 맴돈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군무와 장면마다 표현되는 색조와 같은 듯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무대는 순간순간을 집중하게 만든다. 독립은 가난하고 무학의 사람이 하는 하찮은 일로 여기는 이완용의 대사에 분노했고, 독립을 위해 신분, 재산, 목숨까지 바쳤던 선조들은 동지를 위해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고, 기록을 남기지 않아서 훗날 그들을 기억할 수 없는 아쉬움을 남겼으며, 다음날 나라를 위해 죽으러 가는 처연한 모습과 동지의 죽음을 알면서 다음은 내 차례라며 격려하고 안아주는 장면에서는 가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고맙습니다. 당신들이 있어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1910년 그때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나라 잃은 백성의 치욕을 온몸으로 감당했을 선조들은 힘 있는 나라를 위해 무장하고 훈련하는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독립을 꿈꾸고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모습은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관람 내내 내가 팔도가 되기도 하고, 나팔이 되었다가, 반전 포인트 밀정 동규는 안타까움이고, 끝까지 친구로 남았던 팔도의 의리의리한 의리는 먹먹함으로 남는다. 젊음을 대한독립을 위해 바칠 수 있다니 나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싶다. 동규가 적었던 ‘사랑하는 내 친구들 예쁘다’ 짧은 구절에 밀정으로 살았지만 고민하는 동규를 봤고 독립이 오지 않을 듯하여 목숨을 위해 일본에게 고개를 숙였을 백성은 이해가 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친일하며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과 후손들은 끝까지 찾아내고 처벌함이 맞다.
애국자 후손은 고아원에서 혹은 고아로 자라는데 친일, 매국놈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잘살고 있으니 바로잡지 못한 역사의 뼈아픔이 사무친다.
뒤풀이에서 뵙게 된 신흥무관학교 설립하신 석주 이상룡 선생의 증손자 이항증 선생님과 신흥무관학교 교장과 오산학교 교사를 하셨던 윤기섭 선생님의 외손자 정철승 변호사님과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이자 한성대 총장을 역임하신 윤경로 선생님을 만날 수 있어서 영광이다. 역사적 사실과 애국을 바탕으로 하시는 그분들의 모든 말씀에 힘이 있어 존경스러웠다. 초대해 주신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실장님께도 감사드린다.

.오은희 용산역사모임, 어린이와 작은도서관협회 사무국장

목, 2018/09/2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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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박운음

홍익미술대학 출신의 SNS 1인 미디어 만화가로서 고 노무현대통령 캐릭터를 이용한 만화와 일러스트 등을 그리며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노무현 대통령의 드라마틱한 정치역정을 다룬 웹툰 ????노공이산????과 캐릭터 일러스트 모음집 ????바보 노공화????가 있으며, 청진기를 들고 독립운동에 몸 바친 이태준, 김필순, 박서양, 황에스더 의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만화 <조국의 심장을 지켜라>를 펴냈다.

금, 2018/04/20-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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