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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만장 – 침략전쟁의 총알받이가 된 식민지 조선의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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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만장 – 침략전쟁의 총알받이가 된 식민지 조선의 청년

admin | 금, 2021/06/25- 23:09

[소장자료 톺아보기 27]

청춘만장

– 침략전쟁의 총알받이가 된 식민지 조선의 청년

 

• 강동민 자료팀장

 

 장행기壯行旗, 170X56
“축 육군병 지원자 훈련소 입소 궁본은휘 군 국민총력 김제군 월촌면 제남부락연맹”
지원병 출정 깃발인 장행기는 ‘장렬하게 떠난다’는 뜻이지만 조선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죽으러 가는 깃발과 같다고 해서 ‘청춘만장靑春輓章’이라고 불렀다. 깃발 상단에는 금치훈장金鵄勳章을 중심으로
뒤에 일장기와 일군기를 어긋나게 배치하였다. 깃봉에 금치金鵄가 앉았는데 마치 훈장 위에 앉은 것처럼 보이도록 그려넣었다.

 

 

 금치훈장이 새겨진 엽서, 9.1X14.1
1890년에 제정된 일본의 훈장 가운데 하나로 일본제국의 육군과 해군을 대상으로 수여하였다. 금치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 건국의 상징새로 전쟁 승리의 대명사로 표현되어 메이지 유신 이후 다양
한 디자인으로 활용되었다.

 

 훈련소 시절 이은휘, 5.9X8.6, 1942년
한 집안의 가장으로 부모를 모시는 아들이며 신혼을 시작한 남편이자 갓 태어난 아들의 아버지였던 이은휘는 일본제국의 총알받이가 되어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 만주사변기념일 스모대회에 출전해 우등상을 수상한 뒤 기념촬영, 15.7X11.5, 1941.9.12.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모든 자원의 효과적 동원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무엇보다 병력이 부족해지자 그동안 조선인에게 허락되지 않은 ‘무기’를 쥐어주게 된다.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여 조선인 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하게 한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바로 ‘육군특별지원병’으로 입소한 청년, 이은휘가 남긴 유품인 장행기다. 장행기는 지원병으로 차출되어 가는 청년들을 환송하기 위해 면에서 만들어 준 깃발이다. 이은휘는 1921년 9월 9일 전북 김제군 월촌면 입석리 606번지에서 태어났다. 1940년 옆마을인 월촌면 복죽리의 처녀 정복례(당시 19세)와 결혼했다. 한 집안의 가장이 된 이은휘는 부인과 곧 태어날 아이와 함께 살림을 꾸리기 위해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이리농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1년 지방공무원 시험을 보기 위해 면사무소에 갔다가 지원병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하필 이때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어 지방 관청들이 경쟁적으로 지원병 수를 늘리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던 시기였다. 말이 ‘지원’이지 사실상 강제였다. 이은휘가 일본군으로 강제동원된 것은 ‘특별지원병’이라는 형식이었다.
당시 임신 8개월인 아내를 두고 이은휘는 1941년 6월 특별지원병훈련소에 입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훈련생 때 휴가를 받고 집에 와서 막 태어난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부인과 눈물을 흘리던 것이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갓난아기와 사랑스런 신혼의 아내를 두고 생이별을 해야 했던 이은휘는 특별지원병이 아니라 특별희생자였던 것이다.
참혹한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가족들에게 결국 ‘전장에서 왼쪽 가슴에 총상을 입어 전사’했다는 소식만 돌아왔다. 유골도 유품도 아무것도 없었다. 유수명부에 따르면 이은휘는 남방군 제8방면군 제20사단에서 보병으로 근무하다 1944년 7월 11일 전사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일제는 유족들의 의향에 관계없이 이은휘를 침략전쟁의 신으로 만들어 야스쿠니신사에 무단 합사시켜 버린 것이다. 결국 이은휘는 해방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한 채 영혼마저 야스쿠니신사에 유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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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18]

‘한국병합’을 기념한 침략의 주범들
– 「한국병합기념화보」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오사카신보大阪新報>가 제7666호 부록으로 제작한 「한국병합기념화보」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한 달 후인 1910년 9월 28일에 발행된 화보로 일본 내각의 주요 인물과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소개하고 있다.
일본의 최고 권력자 메이지‘천황’ 무쓰히토의 사진을 중앙 상단에 배치하였는데 ‘메이지明治’의 이름을 생략하였다.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성스러운 천황의 이름’이라 표기하지 않고 비워 둔 것이다. 바로 밑에 고종과 순종의 사진을 나란히 게재했다. 태황제인 고종을 ‘이태왕’으로, 순종 황제는 ‘이왕’으로 표기했다. 이는 일본이 병합과 동시에 한국의 황제·황족을 왕족·공족으로 전락시키고 519년 동안 27대에 걸쳐 이어온 조선왕조를 패망시켰음을 알리기 위한 의도로 표기한 것이다.
메이지 사진 양측에는 조선침략에 앞장선 주요 인물들과 병합의 공로가 있는 조선의 인물을 배치하였다. 우측에는 강화도조약을 체결해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필두로 ‘소야만국小野蠻國’이라며 조선을 멸시한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정한론의 중심인물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명성황후를 살해하고도 무죄를 확신한 극악무도한 범죄자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의병 대탄압을 지휘하고 헌병경찰제도를 도입한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 등 32명의 인물사진이 게재되어 있다. 좌측에는 을사늑약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시작으로, ‘이익선 보호’라며 조선 침략을 주창한 일본 군부 세력의 거물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강제병합을 자랑하고 무단통치를 감행한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금융지배를 확립하고 ‘한국병합기념장’ 수여받은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와 ‘일본의 보호정치는 한국의 이권’이라고 주장한 친일 미국 외교관 스티븐스가 유일하게 외국인으로 실려 있다.
이들 사진 밑에 대원군 이하응을 비롯한 조선왕실 종친들, 개화파 김옥균과 박영효, 을사늑약과 병합조약을 주도한 이완용, 이지용 등 주요 관리들의 사진을 게재했다. 이렇게 하여 강제병합과 관련된 일본의 주요 인물 57명, 유일한 외국인 스티븐스, 조선인 주요인물 17명 등 총 75명의 강제병합 주역들이 화보 상단을 채우고 있다. 화보의 하단에는 조선 13도를 그린 지도를 싣고 있는데 금, 은, 동, 철 등 조선의 지하자원 분포와 담배, 면화, 목화 등 재배 식물과 철도가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일제의 침탈 야욕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도와 함께 ‘일한연표’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내용이 기가 막히다. 한일관계를 ‘숭신천황 65년 7월, 임나국任那國의 소나카시치蘇那曷叱知가 조공을 받치면서 시작되었다.
’고 하면서 ‘신공황후가 여러 제국에 명하여 배를 타고 삼한 정벌’을 감행한 결과로 기술하고 있다. 주
로 일본이 한반도를 정벌하거나 조공을 바쳐온 관계로 설정하고 있는데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의 과정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고 강화도 개항의 시초인 운요호 사건, 청일·러일전쟁으로 맺은 각종 조약의 과정들을 기술하였다. 연표의 마지막은 ‘명치 43년 8월 29일 한국병합을 달성하여 관보 호외에 발표’한 것으로 끝맺고 있는데 메이지유신 이후 일제의 침략과정을 서술하는데 연표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마지막에 1909년 12월 말 통계조사에 따른 ‘조선국세일람’으로 조선의 면적, 인구, 재정 현황, 중요 생산액 등의 정보를 실었다.
「한국병합기념화보」를 발행한 <오사카신보>는 오사카에서 발행된 3대 신문 중 하나로 1900년 9월 15일에 결성된 입헌정우회의 기관지이다. 입헌정우회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총재를 맡은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정당으로 한때 3·1운동 탄압을 총지휘한 하라 타카시原敬가 사장이었다.
「한국병합기념화보」에도 등장하는 하라 타카시는 3·1운동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이번 사건을 국내외에 극히 가벼운 문제로 알리되 실제로는 엄중한 처치를 취하고 재발방지를 기하라’는 훈령을 내린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었다.
2020년 8월 29일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지 110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강점기 징용문제, 일본군 성노예문제 등 아베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인식은 「한국병합기념화보」에 실려 있는 침략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파렴치한 저들의 행보를 끝까지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해방 후 75년이 지나도 지속되고 있는 저들의 가해에 저항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1910년 8월 29일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 강동민 자료팀장

수, 2020/08/26-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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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11 ]

전쟁포로가 된 식민지 조선인의 恨 – 시베리아 한恨의 노래

 

일본과 한국 정부를 대상으로 시베리아 억류기간중 미불임금 반환과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활동을 벌인 故 이규철

 

시베리아 한의 노래 육필 원고

 

일제강점기 징병·징용으로 끌려갔다가 만주·사할린·쿠릴열도 등지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일대를 중심으로 집단 수용소 생활을 하며 수년간 가혹한 강제노동에 복역한 조선인들이 있다. 이들을 시베리아 억류자라고 한다. 조선인 시베리아 억류자는 무려 1만여 명에 달했지만 현재 한국 내 생존자는 10여 명뿐이다. 1991년 한국 거주 생존자들이 ‘시베리아삭풍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피해보상운동을 전개했다. 2010년 일본국회는 ‘전후 강제억류자 특별조치법안’을 제정 했으나 한국인 피해자들에게는 국적조항을 들어 보상에서 제외하였다. 끌고 갈 때는 일본인, 보상할 때는 한국인의 논리를 적용한 것이다.

1941년 12월 8일, 미국 태평양 함대의 기지인 진주만에 폭탄이 쏟아졌다. 일본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을 단행한 것이다. 태평양전쟁 발발로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만주를 침략한 이후 일본은 엄청난 양의 병력과 물자를 투입하였지만 전쟁은 쉽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특히 10여 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일본의 젊은이들이 수없이 죽어가자 일본의 눈은 조선의 젊은이들로 향했다.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것이다. 태평양전쟁은 조선에도 ‘징병제’를 실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태평양전쟁 중 강제 징집되어 일본 관동군에 편입, 전쟁에 참가한 고 이규철의 육필 회고이다.
<시베리아 恨의 노래>로 원고제목을 붙인 이규철은 징집과정부터 부대배치, 자폭특공대 훈련, 시베리아 포로생활, 귀국과정 등을 총 237쪽에 걸쳐 수기로 작성하였다

<시베리아 恨의 노래> 표지

 

이규철은 1925년 1월 21일 경남 울산군 하상면에서 태어났다. 1941년 울산공립학교를 졸업한 그는 만주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45년 8월 징집되어 일본 관동군에 편입되었다. 주요임무는 폭발물을 안고 소련 전차로 육탄 돌격하는 자폭특수대 역할이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했다. 이때 중국 동북부 만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 관동군은 대다수가 무차별 징집된 퇴역군인이나 초년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강제 징집된 만주와 조선 청년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이들은 소련군 탱크로 폭탄을 들고 돌격하는 훈련을 받았다. 바로 이들 중 한 명이 이규철이었다.
일본군은 소련군의 남하에 속수무책으로 후퇴를 거듭하다 결국 60여 만 명이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이 중 1만여 명이 조선의 젊은 청년들이었다. 이규철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함께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블라코베시첸스크에서 포로수송 화물차로 세레칸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1948년 말까지 시베리아의 혹한 속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1949년 2월 천신만고 끝에 귀국했으나 조국은 분단되었고, 부친은 이미 고인이 되어 고향에는 모친과 형 둘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일찍 건빵으로 배를 채우고 전차격파 자폭대 훈련이 시작되었다. 길이 2m가량의 장대 끝에 원반 크기의 폭탄을 장치하고 그것을 들고 숲속에서 숨어 있다가 적의 전차에 뛰어들어 슬라이딩하는 식으로 전차 캐터필러 밑에 이것을 밀어넣어 전차를 폭파하는 일본 사무라이 전술이었다. 그 다음은 작은 귤만한 급조 폭뢰爆雷를 안고 전차를 파괴하는 훈련이다. 즉 급조폭뢰의 안전핀과 군복 가슴 단추를 짧은 끈으로 연결시켜 이것을 양손으로 껴안고 1인용 참호 속에 숨어 있다가 접근하는 적의 전차에 뛰어들어 전차 캐터필러 밑으로 이것을 밀어넣는 것이다. 그 순간 안전핀이 빠지는 동시에 급조폭뢰가 폭발한다. 자기 한 몸을 희생하고 전차를 파괴하는 자폭특공대 임무를 한국인 초년병에게만 강요하였는데 불평불만이 통할 리가 없다.
8월 염천하의 고된 훈련으로 속옷은 땀으로 젖어 내의는 피부에 찰싹 붙어 걷기도 힘들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내 몸을, 내 목숨을 바치고 이런 싸움을 해야 하는가. 적함 굴뚝에 돌진한 신풍(가미카제) 특공대와 같은 무모한 짓은 하고 싶지 않다.”
– 시베리아 억류당시 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시베리아 한의 노래’ 육필 원고 중에서

• 강동민 자료팀장

화, 2020/01/21-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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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8]

 

해방이 아닌 침략 구호, ‘대동아공영권’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41년 일본에서 제작한 <대동아공영권지도大東亞共榮圈地圖>이다. 일본의 산업조합중앙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가정의 빛(家の光)????이 창간한 지 1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부록으로 발행한 지도다.
지도는 일본과 일본의 점령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국경선과 항공로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일본의 적이 본토를 폭격하는 가상도를 최상단에 배치하고 아래로 일제가 꿈꾸었던 대동아의 인구, 면적, 일본인 진출 수 등 각종 통계표를 작성하였다.
일본의 조선침략은 메이지 유신 이후 1870년대에 본격적으로 대두한 ‘정한론(征韓論)’을 기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정한론자들이 주장한 직접적이고 전격적인 군사점령 대신 ‘함포외교(Gunship Diplomacy)’라는 우회 침략의 방식을 취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1875)과 강화도조약(1876)을 통해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고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 등 조선 민중의 강력한 저항을 유혈 진압하면서 마침내 한반도를 강점하기에 이르렀다(1910).
일본의 야욕은 이에 멈추지 않고 한반도를 전초기지로 삼아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본격화했다. 쇼와(昭和)시대로 접어들면서 일본 군부는 ‘황군(皇軍)’을 자처하며 군국주의로 나아갔고, 한반도 지배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만주와 몽고를 일본의 생명선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로 만주침략을 강행한 것이다. 여기에 대공황에 따른 정치·경제적 위기를 타개해야 할 현실적 필요성이 결합하면서 군부의 모험주의가 득세하게 되었다. 개전 두 달 만인 11월에 벌써 동북 3성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다음해인 1932년 3월에는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은 점령지역 철수를 권고한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파시즘 체제로 전환하면서 노골적으로 침략전쟁을 확대해 나갔다.
1937년 7월 일본은 베이징 교외의 루거우차오(蘆溝橋)에서 군사충돌을 유발한 뒤, 중국본토를 침략했다. 순식간에 베이징, 톈진을 함락한 일본군은 이어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수십만의 인명을 살육하며 가는 곳마다 태우고, 빼앗고, 죽이는 이른바 ‘삼광(三光)작전’을 펼쳤다(난징대학살).
그러나 중일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일본은 전쟁물자 동원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미국과 영국이 장제스 국민정부에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경제 제재를 강화해 나갔다. 이에 일본은 새로운 자원공급처가 절실하게 되었다. 결국 유럽 각국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 지역을 빼앗기 위해 인도차이나(프랑스령) 침공했다. 이에 앞서 일본내각에서는 국책요강으로 ‘대동아신질서 건설’을 결정하고 이를 전쟁확대의 명분이자 전쟁동원체제 강화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것은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아시아 민족의 해방을 위해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전체가 단결해 ‘대동아공영권’을 결성하고 서양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일본은 그들의 전쟁을 ‘아시아를 해방’시키고 ‘팔굉일우(세계를 ‘천황’ 아래에 하나의 집으로 만든다)’ 정신을 바탕으로 각 민족이 함께 번영하는 ‘대동아공영권’을 실현
할 ‘성전(聖戰)’으로 미화하면서 총동원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렇게 전쟁이 예상보다 장기화되고 전선이 확대됨에 따라 침략전쟁의 지속을 위한 인력충원과 물자 보충도 절실해져 갔다. 각종 전쟁물자를 양산하고 군사시설 등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군대의 경우 무엇보다 병력이 부족했으며 전투를 수행하는 현역 군인을 대신해 각종 군사 업무를 볼 민간인(군속)도 필요했다. 이러한 인력 수급문제는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젊은 여성의 징발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시체제 아래 조선 민중들은 오로지 일제의 대외 침략전쟁을 위해 밥그릇은 물론 숟가락·젓가락마저 빼앗겨야 했고 쥐꼬리만큼 떼어주는 배급품을 가지고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가야만 했다.

• 강동민 자료팀장

화, 2019/10/29-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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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39

국치國恥 식민지조선 방방곡곡에 펄럭이는 일장기

• 강동민 자료팀장

조선군사령부 정문에 걸려 있는 일장기, <사단대항연습사진첩>, 1931

제19사단사령부 정문, <조선사진화보>, 1916

1880년 일본공사관이 개설되자 공사관 수비를 위해 한국에 첫발을 들여놓은 일본군은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주차군사령부를 설치했다. 1910 년 강제병합 후 조선주차군으로 재편한 후 독립운동을 집중적으로 탄압하였으며 1918년 한반도에 상주하는 병력을 배치하여 제19, 20사단을 통할 하는 조선군사령부가 만들어졌다.

 

기원 2600년 기념일에 겸이포에서 열린 축하행사에 동원되어 일장기를 흔들고 있는 수많은 조선인들, <광영록>, 1941

조선총독부에서 진행된 기원 2600년 기념식에 걸린 일장기, <광영록>, 1941

 

 

일장기가 새겨진 국기함
전라남도 함평남공립소학교에서 교내에 봉안전 (奉安殿)을 건립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 작한 것이다.

 

장기를 내건 삼척수비대 앞에서 양반유생에 대한 은사금 수여식이 이뤄 지고 있는 광경, <애뉴얼리포트>, 1911

일제는 한국을 강제 병합한 직후,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한 회유책의 하나로 친일귀족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은사금을 광범위하게 살포하였다.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 <역사사진> 33호, 1915

경술국치의 상징처럼 사용되는 ‘근정전 일장기’ 사진은 1915년 물산공진회 당시 촬영된 것이다.

 

유난히도 뜨거웠던 2021년 8월, 도쿄 상공에 태극기가 펄럭였다. 우여곡절 끝에 치러진 2020 도쿄올림픽에서 선전한 우리 선수들이 구슬땀을 흘린 보상이었다. 100여 년 전 일본의 힘에 짓눌려 굴욕적인 강제조약을 맺고 대한제국의 하늘에 나부끼는 일장기를 떠올리면 믿기 어려운 광경이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순종의 칙유를 통해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공포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식민지 조선’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온갖 시련에도 꿋꿋하게 버텨낸 우리 민족이 마침내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35년간의 뼈아픈 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일장기’다. 이 나라에 가장 먼저 온갖 살육을 저지른 일본군사령부를 시작으로, 조선의 궁궐, 행정기관인 관공서,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치는 학교, ‘천황의 신민’이 된 가정 등 주변 어디에서든 일장기가 펄럭이게 되었다.
온갖 행사에 동원되어 수많은 일장기를 흔드는 조선 민중들의 모습과 집집마다 일장기를 내걸고 ‘천황’에 예를 올리는 장면은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식민지기 동안 계속된 치욕적인 이 광경은 1945년 8월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나라를 뺏긴 지 111년이 되는 해이자 해방을 맞은 지 76년, 기나긴 시간이 주어졌건만 반성과 화해의 길은 아직도 멀어 보인다.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모진 상흔은 계속 남아 있다. 일본정부는 피해 당사자가 빠진 잘못된 ‘위안부’ 합의와 일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거부, 유네스코 산업유산 등재 시설물에서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주장하며 관련 내용을 기록하지 않는 등 우리와의 관계를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망명 독립지사와 동포들이 끼니를 거르면서 가슴에 새기고자 했던 치욕의 망국일인 ‘8월 29일’을 모든 달력에 ‘국치일’로 새겨야 한다. 그리고 조기(弔旗)를 게양하여 잊지 말아야 한다.
기억하자, 피눈물을 흘리던 1910년의 8월을,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1945년의 8월을, 가슴 벅찬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2021년 8월을.

금, 2021/08/27-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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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초대의 날’ 첫 행사

김무성 회원사업 부팀장

연구소는 3월 19일 금요일 저녁 7시에 연구소 30주년을 맞아 기획한 ‘후원회원 초대의 날’ 행사를 처음으로 시행했다. 25년 이상 연구소를 후원해온 후원회원 중에서 수도권에 거주하는 후원회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30주년 기념식 때 방영한 회원극장의 주인공인 유동성 회원을 비롯해 김기흥 회원, 김석규 전 부 위원장, 김성종 전 이사, 김희준 회원과 동반인, 민삼홍 전 이사, 신창헌 전 이사 부부, 신희철 회원, 이수익 강남서초지부장, 이용훈 회원, 장필수 서울동부지부 자문위원, 최수전 감사, 황평우 전 부위원장 등 총 15명이 자리를 빛내주었다. 연구소는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자리를 띄워두고 칸막이를 설치하여 방역지침을 철저히 지켰다. 

1부 행사에서는 25년 이상 후원을 지속해온 회원들인 만큼 그간의 연구소 활동에 참여하며 쌓은 추억을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 2부 행사는 ‘나의 삶과 민주화 운동’이란 주제로 함세웅 이사장과 회원들 간의 토크콘서트였다. 한평생 민주화 운동에 몸 바쳐 온 함세웅 이사장의 진솔한 얘기는 회원들의 가슴속에 깊이 스며들어 크나큰 감명을 주었다. 연구소는 이번 행사를 포함해 올해 총 7회에 걸쳐 후원회원을 초대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아울러 30년 동안 꾸준하고 독보적인 연구와 실천의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근간이 바로 함께 하고 있는 후원회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다가가는 회원친화적인 사업을 준비할 계획이다.

목, 2021/03/2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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