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한겨레] “독립운동 정신적 지주 ‘대종교의 혼’ 아직도 간도 떠도니 통탄스럽죠”

지역

[한겨레] “독립운동 정신적 지주 ‘대종교의 혼’ 아직도 간도 떠도니 통탄스럽죠”

admin | 화, 2021/06/15- 00:22

[짬]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대종교를 중광해 독립운동가들의 스승으로 불렸던 홍암 나철의 일대기인 <나철평전>을 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조현 기자

청산리전투의 김좌진, 봉오동전투의 홍범도,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역사가 신채호,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과 국무령 이상룡, 작사가 이은상, 최초 비행사 안창남, 마라토너 손기정, 이동휘, 정인보, 안희제, 지청천, 이범석, 지석영, 이동녕, 김규식, 신익희…. 독립운동사의 주역인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대종교인으로, 대종교를 부활시킨 스승 홍암 나철(1863~1916)의 대의를 따랐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종교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나철의 삶을 조명한 <나철평전>(꽃자리 펴냄)을 낸 김삼웅(78) 전 독립기념관장을 지난 4일 만났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꼽은 친일부역자 5천명 가운데 종교인이 200여명인데, 대종교인은 한 명도 없었다”며 “그런데도 나철과 2대 교주 김교헌, 청산리전투를 이끈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종사 등 대종교 지도자 3인의 묘소가 아직도 간도 들판에 방치돼 있으니 한민족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통탄했다.

대종교 부활시킨 스승 ‘나철평전’ 펴내
김좌진·홍범도·이회영·신채호 등등
수많은 항일지사들 대부분 ‘대종교인’
“친일부역자 종교인 중엔 한명도 없어”

박정희때 고문 후유증으로 집필 힘들어
“알수록 ‘놀라운 인물’ 전율 느끼며 써”

대종교를 중광한 독립운동 지도자 홍암 나철. <한겨레> 자료사진

“2·8독립선언과 3·1혁명을 촉발한 대한(무오)독립선언은 대종교가 주도했다. 또 3·1혁명 이후 중국 상하이에 세운 임시정부의 의정원 35인 중 28인이 대종교인이다.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등 항일투쟁의 주력도 대종교인들이었고, 국학·역사·한글운동도 대종교가 주도했다. 그 뿌리가 나철 대종사다. 독립운동사에서 기억해야 할 첫번째 인물로 꼽힐 만한 나철의 이름만이라도 들어본 사람이 몇명이나 될지….”

김 전 관장은 말문을 잇지 못했다. 온몸을 민족의 재단에 바쳐 신자 10여만명이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고 종단 자체가 산산이 부서져 버린 대종교와 나철을 언급할 때마다 그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지금까지 최제우, 황현, 전봉준, 김개남, 손병희, 안창호, 김성숙, 한용운, 안중근, 김창숙, 여운형, 함석헌, 장준하, 장일순, 송건호, 김대중, 노무현, 신영복 등 줄잡아 40여명의 평전을 썼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타자를 칠 줄 모른다. 오직 손글씨로만 써왔다. 근래 들어서는 손이 많이 떨려 원고 작업이 더욱 어렵다. 박정희 독재 시절 <민주전선>을 발간하면서 끌려가 고문 당한 후유증 때문이다. 떨린 것은 손만이 아니었다. <나철평전>에는 ‘한 놀라운 인간’에 대한 필자의 전율이 스며있다.

나철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 석학 왕석보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29살에 과거 급제해 고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사관을 맡았다. 33살 때 징세국장에 임명됐으나 사양하고 낙향했다고 한다. 이후 10년간 민족의 뿌리인 단군사상을 기초로 입산수도한 나철은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비밀결사 ‘자신회’를 조직해 을사오적 처단을 주도했다가 1907년 10년 유배형을 받았다. 외딴섬인 전남 신안 지도로 유배를 갔다가 민심을 두려워한 고종의 특사로 석방됐다.

“나철은 일제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국조 단군을 구심점으로 삼아야 한다며 단군교를 ‘중광’했다. 중광이란 우리 민족이 믿었던 옛 종교를 되살린다는 것이다. 그러자 기라성 같은 지식인과 우국지사들이 몰려들었다. 일제는 국권침탈 뒤 제일 먼저 단군 관련 책 20여만권을 압수해 불태우거나 일본으로 밀반출하며 1918년까지 민족말살책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나철은 이런 일제의 탄압을 피해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고 1914년 망명해 백두산 인근 청파호로 본부를 옮겼다. 대종교 신자가 수십만명으로 늘자 일제총독부는 기독교, 불교, 유교만 공인 종교로 인정하고 대종교는 ‘유사종교단체’로 분리해 악명 높은 경무국에서 감시하게 했다. 더 이상 포교가 어렵게 되자 나철은 1916년 일왕과 총독, 신자들에게 글을 남기고 구월산 단군사당에서 순명을 택했다. 그의 죽음 뒤 대종교인들의 항일투쟁이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김 전 관장은 “일제 때 수많은 사이비 교주들과 달리 나철은 종교적 위세를 보이지 않았고 대단히 검소하고 서민적이었다. 주검도 상여가 아닌 지게로 옮겨 화장하고, 부고도 돌리지 말고, 제사에도 밥 한그릇 찬 하나만 놓으라고 유언했다”며 “박은식은 추도사에서 그를 ‘민족사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이란 뜻으로 ‘만세의 종사’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런데도 최근 여당 국회의원들이 교육이념에서 단군사상의 핵심인 ‘홍익인간’을 빼려는 시도를 했던 것에 대해 “역사 공부를 안한 것인지, 역사의식이 없는 것인지”라며 혀를 찼다. 그는 “목사인 규암 김약연의 용정 명동학교는 기독교학교임에도 교가에 ‘한배검 단군의 자손의 긍지’를 담았고, 교실 뒤엔 예수 사진과 함께 단군 영정을 걸었다. 기독교인 도산 안창호는 평생 단군상을 몸에 지니고,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대규모 단군 집회를 개최했다. 이승만도 1921년 <독립신문>에 ‘한배검은 인류의 스승이셨다’고 썼고, 기독교인 백범 김구도 조선인 치고 대종교인 아닌 사람이 없다고 했다”며 “해방 후 미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홍인인간을 ‘인간에 대한 최대한의 봉사’로 번역해 교육기본이념으로 삼게 한 것도 기독교인 백낙준 박사였다”고 설명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mail protected]

<2021-06-08> 한겨레

☞기사원문: “독립운동 정신적 지주 ‘대종교의 혼’ 아직도 간도 떠도니 통탄스럽죠”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다운로드]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년 의의 및 기념사업 추진 방향 연구보고서

0417-3

화, 2018/04/17- 20:32
122
0

월 평균 7만원이던 기부금, 金 비서실장 취임 이후 월 7억원대로 급증

1117-32

▲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사진=이한형 기자/노컷뉴스)

국정원의 특수활동비가 박근혜 청와대에 상납된 사실이 드러난 가운데 상납이 빈번하던 그 무렵에 ‘박정희 대통령 기념 재단'(이하 재단)으로도 수상한 뭉칫돈이 흘러들어간 정황이 포착돼 주목된다.

민주당 김경협 의원과 CBS노컷뉴스가 국세청 공익법인공시를 확인한 결과 재단으로 2013년 11월과 12월 두 차례 거액이 기부금이 들어갔다.

11월에 재단 계좌에 찍힌 기부금은 10억 6천 만 원. 이어 12월에도 5억 원을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으로 돼 있다.

사단법인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가 재단법인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으로 전환한 이후 5개월간 월 평균 7만 원 정도 밖에 안됐던 기부금이 두 달 간 월 평균 7억 원 넘게 늘어난 것이다.

1117-33

재단의 기부금이 돌연 1만 배 넘게 폭등한 시점이 묘하게 김기춘 씨의 청와대 입성직후다.

김 씨는 재단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3개월 만에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영전한다.

김 씨가 재단 이사장으로 있을 때는 재단의 기부금이 7만 원 선이었는데, 김 씨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옮긴 이후 기부금이 7억 원으로 늘어난 셈이다.

이는 최근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난 바처럼 그해 5월부터 청와대로 국정원 특수활동비가 상납되던 시기와도 겹친다.

하지만 문제의 기부금이 국정원 특활비에서 나온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김경협 의원은 재단으로 수상한 돈의 흐름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2014년 문창극 당시 총리 후보자 청문회를 준비하면서 파악했다.

김 의원은 문창극 씨가 총리후보로 지명되기 직전까지 재단의 이사로 재직중이었던 만큼 재단 ‘회보’ 등을 바탕으로 문 씨의 재단 내 역할 등을 살펴보던 중 거액의 기부금이 모금된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당시 재단 회보와 재단 홈페이지 등에는 대략적인 기부금 액수만 공개돼 있었다고 한다. 정확한 기부 금액과 기부 시점이 확인된 것은 이번 국세청 자료를 통해 새로 밝혀진 부분이다.

더욱이 재단이 기부금 관련 내용을 은폐하고 있다는 의혹까지 일고 있다.

2014년 문창극 씨 청문회를 앞둔 시점에 재단 홈페이지에는 2013년 기부금이 뭉칫돈으로 들어왔다는 내용이 게재돼 있었지만 지금은 관련 내용이 삭제돼 있다.

국세청 자료에는 2013년 15억 원의 기부금이 재단에 들어간 이후 기부금 규모가 다시 수 백 만 원 대로 줄어든 것으로 돼 있다.

다만 지난해 말까지 5차례 정도 거액의 기부금이 추가로 들어간 것으로 돼 있다.

5천 만원(2014년 1월), 1억 1800만원(2015년 5월), 1억 1600만원(2015년 9월), 2억 1,111만원(2015년 12월), 1억 원(2016년 12월) 등이다.

김경협 의원은 “국정원 적폐 청산 과정에서 박근혜 정권의 권력자들이 국정원 예산을 쌈짓돈으로 사용하거나 전경련에 압력을 가해 기업 돈을 보수단체에 지원한 사례 등을 봤을 때 박근혜 정권이 박정희 재단에도 금전적 지원을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며 “이 부분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재단측은 기자의 통화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서울시 부지에 박정희 동상을 설립하는 문제가 사회 이슈가 된 이후 재단의 공식 반응은 나오지 않고 있다.

<2017-11-17> 노컷뉴스

 ☞기사원문: [단독] 김기춘 靑 입성하자 박정희재단에 수상한 뭉칫돈

금, 2017/11/17- 20:35
121
0

방송인 김미화 씨 등 각계인사들 ‘우토로 지킴이’로 나서…“우토로의 인간 존엄과 평화, 오랫동안 기억할 것”

0114-5

▲ 12일 ‘우토로 역사관을 위한 시민모임이 결성식을 가졌다.ⓒ민중의소리

‘마지막 일제징용 마을’로 기억되는 일본 우토로에 역사관을 만들자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 방영된 이후, 국민적 관심을 받게된 우토로 마을은 일제 식민지 정책과 전쟁 수행의 피해자였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집단 합숙소이자 60여년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다.

토지 소유권자들의 분쟁 탓에 강제철거 위기까지 겪었던 이 곳은 가까스로 한국 정부의 지원과 민간 모금 등으로 안정을 찾긴 했지만, 우토로 동포들의 흔적 또는 추억이 점차 지워져가고 있다. 특히 최근 일본 정부의 마을 정비 사업이 진행되면서 우토로를 기억할 수 있는 역사관 설립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우토로 역사관을 위한 시민모임’이 12일 서울시NPO지원센터에서 결성식을 갖고, 그 시작을 알렸다. 시민모임의 주축이 된 57명의 ‘우토로 지킴이’에는 방송인 김미화 씨를 비롯 이장희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진관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함께했다. 공동대표는 류종열 흥사단 이사장, 박연철 전 우토로국제대책회의 상임대표, 정진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부이사장이 맡았다.

이들은 이날 결성선언문을 통해 “지금 우토로는 조선사람이 사는 낯익은 마을 풍경이 사라지고, 장구소리와 김치냄새가 사라져가고 있다. 마을을 일구고 지킨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면서 “그러나 우리는 우토로가 외쳐온 인간 존엄과 평화를 향한 간절한 소망을 기억하고 있고,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0114-6

▲ 우토로 마을의 재일동포 모습이 담긴 전시물ⓒ민중의소리

또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소중한 가치들이 우리 후세에, 한국과 일본, 재일동포 모두에게 오랫동안 전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저항과 분노를 넘어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발할 수 있는 곳이 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우토로 역사관을 위한 시민모임’은 우토로 동포들의 버팀목이 되어 이상의 노력을 다해나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향후 이들은 민간 모금 등으로 매입한 우토로 토지 위에 세워진 공적주택에 동포들이 첫 입주하는 기념행사를 시작으로 우토로 동포들의 구술기록집과 사진집(正史) 발간 등 다양한 사업을 벌인다는 계획이다.

시민모임의 배지원 사무국장(전 우토로국제대책회의 사무국장)은 “역사관은 우토로 동포들과 한국 시민들의 약속이자 꿈이었다”면서 “작고 소박하지만 자자손손 평화의 홀씨를 퍼뜨리는, 우토로의 파수꾼이 되어줄 역사관이 우토로 땅에 세워질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참여해달라”고 당부했다.

<2018-01-12>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조선인들의 우토로, 영원히 기억하자” 우토로 역사관 위한 시민모임 발족

일, 2018/01/14- 14:35
121
0

[기고] 3·1혁명 100년, 그 역사적 무게를 생각한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2019년은 폭압적인 식민통치에 맞서 독립을 선언하고 거족적인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킨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런데 1919년의 항쟁은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이상의 거대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우리 역사상 최초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민주공화정을 잉태시켰다. 3·1혁명 이후 왕정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으며 복벽파는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제국’에서 ‘민국’으로, ‘신민’에서 ‘국민’으로의 전환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를 만들어 낸 것이다.

둘째, 처음으로 여성들이 사회변혁의 전면에 나섰다. 나라와 민족을 구하겠다는 일념에 남녀노유가 차이가 있을 까닭이 없었겠으나, 여성들이 대거 현실참여에 나섰다는 사실 자체가 이전 시기에 비할 때 획기적 국면이 아닐 수 없었다.

셋째, 기생·해녀·백정·광부 등 아직 봉건사회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분적 차별을 받던 계층이 주체적으로 참여했다. 전통적으로 외세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이에 맞선 주력이 민중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천민으로 취급받던 이들이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했다는 사실이 내포한 현상타파적 의미가 결코 적지 않다.

넷째, 전면적인 항일무장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3·1혁명을 계기로 식민지 조선의 수다한 젊은이들이 국경을 넘어 무관학교와 독립군을 찾았다. 이들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로 상징되는 독립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전사들로 거듭났다.

다섯째, 좌우세력이 통합하여 민족협동전선을 구축하였다. 초기 임시정부가 그러하였으며 이후 부침이 있었으나 이러한 통합 지향은 일제의 패망 때까지 지속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좌우통합, 통일국가 수립의 여망으로 맥을 이어나갔다.

여섯째, 제국주의 지배하에 신음하던 피압박 민족들에게 영감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중국 신해혁명의 주역 쑨원이 독립선언에 이은 만세시위를 ‘혁명’이라 평가하였으며,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조선을 가리켜 ‘동방의 등불’이라 칭송하기에 이르렀다.

항쟁의 전개과정과 그 영향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3·1정신은 민족이 당면했던 자주독립이라는 목표와 자유 민주 평등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로 정리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성격을 반제국주의 민족혁명인 동시에 반봉건적 민주혁명이라 규정하는 것이다. 더욱이 3·1항쟁이 배태하고 있던 이러한 혁명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강 정책에 반영되고 항일세력 전체의 시대정신으로 발전 확산되어 갔다는 측면에서 선언적 차원을 넘는 성취를 이루었다고 평가해야 마땅하다.

0322-5

▲ 1944년 3·1절을 맞아 중국 서안에서 공연됐던 대형 항일 오페라 〈아리랑〉 기념사진. ‘삼일혁명절’ 표기가 선명하다. 1940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소속 한유한이 대본을 쓰고 작곡한 〈아리랑〉은 해방 전까지 10여 차례 상연됐다. ⓒ민족문제연구소

1930년대 들어 항일세력의 3·1인식이 좌우를 막론하고 ‘혁명’ 또는 ‘대혁명’으로 통일되어 가고 있었던 사실을 우리는 다시 주목해야 한다. 일제 침략전쟁의 확대,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 등 시대적 상황이 3·1정신이 내포한 혁명성을 재평가하고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항일세력이 공유하였던 3·1정신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해방 후 제헌헌법에서 현행헌법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기본이념으로 관철되고 있다. 또 ‘촛불’들이 외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명제도 기실 그 원천을 3·1정신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를 재확인하고 실천하려는 의지의 표명과 다름없었다.

3·1항쟁이 운동인가? 혁명인가? 아니면 혁명적 운동인가? 서구 학문의 학술적 관점에서 보면 이론의 여지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대의 항일세력이 왜 혁명이라고 정의하고 이를 수용하였는지, 또 장기간에 걸쳐 확립된 개념이 어떻게 실종되고 말았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의 전향적이고 진지한 접근이 절실하다고 본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4년 처음으로 3·1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 창립을 주도하고 매년 심포지엄과 전시회를 여는 등 3·1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위상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애써왔다. 올해 초에는 대통령직속정책기획위원회의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년 의의 및 기념사업 추진 방향’ 연구용역을 수임해, 시민들이 주역이 되는 대대적인 100주년 기념사업을 기획하였으며 곧 보고서를 출간할 예정이다.

이제 3·1혁명 100년을 어떻게 맞이하고 자리매김해야 할 것인가를 함께 생각해 볼 때다. 여기에서 향후 전개될 기념사업을 일일이 거론할 여유는 없지만, 3·1혁명의 위상 재정립만큼은 다시 강조하고 싶다. 자국사에 대한 국수주의적 과대평가도 문제이지만 스스로 폄하하는 일도 있어서는 아니 된다.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치열하게 지속적으로 전개됐던 독립투쟁의 역사, 특히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운동 진영과 재외동포들의 정신적 지표였으며 외국에서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던 3·1혁명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 몰가치적인 3·1절이라는 명칭도 독립선언기념일 또는 3·1혁명 기념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또 3·1정신의 요체라 할 민족대단결의 뜻을 살려 남북화해와 평화구축의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나아가 민주공화정 수립 100년의 시점에서 과거를 성찰하는 한편으로, 나라와 민족의 미래 100년을 설계하고 전망을 세우는 거시적 안목을 가져야 할 때다. ‘촛불혁명’과 ‘3·1혁명’ 사이에는 100년이라는 시차가 존재하지만 그 과제는 여전히 닮은꼴이다.

<2018-03-22> 프레시안
☞기사원문: 처음으로 여성이 사회변혁 전면에 나선 이 사건!

목, 2018/03/22- 22:45
120
0


[스팟 인터뷰] 윤소하 정의당 의원이 시간에 쫓겨 못한 말 한마디

1117-3

▲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고 있다. ⓒ 이희훈

1939년 3월 31일 <만주신문>에 이런 혈서가 실렸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 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 합격을 위해 충성 맹세했을 그때, 백강 조경한 선생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선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마침내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 입교에 성공했을 즈음, 선생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있었으며, 1944년 4월은 또한 두 사람 모두에게 중대한 시점이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조경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됐다.

낯설었던 선생의 이름이 박정희 탄생 100주년에 귀에 꽂혔다. 14일 윤소하 의원(정의당)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영상 덕분이었다. 윤 의원은 지난 10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 당시 보훈차장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백강 선생 유족의 지원 요청 “몇 차례 잘려버렸다”

1117-4

▲ 백강 조경한 선생 생가 안채 후면 모습 ⓒ 윤소하 의원실 제공

“1919년 3.1 운동 후 만주로 망명해서 광복을 맞을 때까지 만주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입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으시고, 1981년에는 독립유공자협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돼 계십니다. 선생은 유언에서조차도 동작동 국립묘지에 친일파 일부가 묻혀 있다고 같이 묻힐 생각이 없다, 평생을 강직하게 살아오신 분입니다.

하지만 선생의 고향인 순천에 추모비만 있을 뿐, 제대로 된 추모시설 조차 없어요. 사진 한 번 봐주세요. 완전히 방치되어 있는 백강 선생 생가의 안채와 사랑채 전면과 후면의 현재 모습인데요. 임시정부 국무위원, 그리고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분의 기념시설조차 없고 생가마저 방치되어 있는 것은 부끄러운 겁니다. 전남 동부 보훈지청을 통해 유족들이 생가 복원 사업 계획을 제출했습니다. 자기 돈 들여서,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다”는 답과 함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이 설명을 끝으로 페이스북 영상은 끝났지만, 윤 의원으로서는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듯했다. 윤 의원의 질의가 나왔던 시점은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앞 동상 건립을 놓고 논란이 한창 뜨겁게 달아오르던 때. 14일 전화통화에서 윤 의원은 “시간이 부족해 매우 아쉬웠다”라고 말했다.

윤 의원 역시 “솔직히 백강 선생을 잘 몰랐었다”고 한다. 하지만 “후손들이 자신들의 돈을 더해 복원하겠다며 몇 차례 예산 지원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과정에서 보내 온 자료들을 통해 조경한 선생이 살아오신 궤적을 살피게 됐다”고 했다. “1억 8000만 원 정도 되는 예산이 몇 차례 잘려버렸다고 하더라”는 그의 음성에는 화가 묻어 있었다.

이어 윤 의원은 “이건 예산 얼마를 확보하고 못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해방 이후 친일 잔재들이 정치·사회·경제적 기득권을 지금까지 유지하는 반대편에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애국지사들의 삶이 있다”며 “박정희 탄신 100주년이라고 동상 건립 논란이 있는 상황을 백강 선생과 대비시켜 이게 현실이라고 강조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비밀독립군”, 백강 선생 이용했던 새누리당

1117-5

▲ 임시정부 국무위원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백강 조경한 선생. 지난 8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독립운동가 조경한을 찍은 흑백 사진’을 공개하면서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맞다. 왜냐하면, 부모를 제대로 봉양 못 하게 되고, 자녀 교육도 제대로 시킬 수 없으며, 자신도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란 선생의 말을 함께 소개하기도 했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그리고 윤 의원은 거듭 “적폐 청산은 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진 대한민국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과정”이라고, “단순히 이번 정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졌다”는 이와 같은 윤 의원의 주장은 자유한국당 전신인 새누리당이 과거 백강 조경한 선생을 이용해 박 전 대통령이 ‘비밀 독립군’이었다고 강변했던 것을 떠올리면 더 명확하게 와 닿는다.

2015년 10월 새누리당은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백강 조경환(조경한의 당시 새누리당 측 표기 오류) 선생께서 박 전 대통령을 독립군을 도운 군인으로 기억했다는 증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2004년 이기청 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의 <세계일보> 기고글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선생을 찾아가 자신을 일본군 중좌 다카키 마사오라 소개했고, 이에 선생이 조선인 병사들을 상해 임시정부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이름으로 익히 알고 있어 반가워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이었다.

이와 같은 새누리당 주장은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선생 이름은 조경환이 아닌 조경한이며, 만주에 있던 박정희가 당시 중국 남서부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로 조선인 병사를 빼돌렸다는 말은 성립 불가능하다”라고 지적했다.

또 백강 선생 외손자 심정섭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역시 “박정희와 외조부가 나눈 실제 대화는 기고문과 많이 다르다”라고 반박했다. 자신이 직접 들은 바에 따르면, 쿠데타 당위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친일 행적을 고백했다는 것이었다. 그밖에 박 전 대통령 스스로 비밀 독립군설을 스스로 부정했다는 과거 증언까지 줄줄이 소개됐다.

그럼에도 ‘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진 권력’은 박 전 대통령을 어떻게든 독립군으로 공식화하려고 했다. 2016년 10월 국방부는 박 전 대통령 추모식 행사를 알리는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이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광복군에서 활동했다”고 그의 약력을 기술했다. 기자들의 반박에 당시 국방부 대변인은 “사실 관계를 확인해 알아보겠다”고 답을 피했다고 한다. 윤소하 의원은 끝으로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기념사업에 1400억원… “적폐 청산은 긴 숨 갖고 해야”

1117-6

▲ 윤소하 정의당 의원이 지난 10월 12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의 답변을 지켜보고 있다. ⓒ 남소연

“적폐 청산은 단순히 정치적 공방의 문제가 아닙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예요. 전면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적폐 청산은 계속 돼야 합니다. 이런 의지를 지금 정부가 얼마나 갖고 있는지가, 백강 선생 생가 복원에 대한 정부 입장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 정부, 전전 정부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폐 청산은 긴 숨을 갖고 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어요.”

2009년 포항시를 시작으로 박 전 대통령의 동상 세우기 경쟁이 불붙었다. 서울 중구는 신당동 박 전 대통령 가옥에 228억 원을 들여 ‘박정희 공원’을 조성했다. 경상북도 지역에서만 박정희 기념사업에 국가 예산을 포함해 1400억 원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친일파와 함께 묻히기 싫어 동작동 국립묘지를 거부했던 독립운동가, 백강 선생 생가 보존에 국가가 이제까지 쓴 돈은 공식적으로 ‘0원’이다.

<2017-11-1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혈서 쓴 박정희 1400억 독립투사 생가예산은 0원

※연관기사

☞연합뉴스TV: 내년 3월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친일청산’ 바람

금, 2017/11/17- 20:19
12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