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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나 철을 남기는 것은 부끄러움을 남긴다? – 전시체제기 금속류 공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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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나 철을 남기는 것은 부끄러움을 남긴다? – 전시체제기 금속류 공출

admin | 수, 2021/06/02- 23:10

[소장자료 톺아보기 26]

구리나 철을 남기는 것은 부끄러움을 남긴다?
– 전시체제기 금속류 공출

강동민 자료팀장

 

애국부인회의 금속류 공출 장면, 사진주보 <싸우는 조선(戰ふ朝鮮)>, 1945

 

 

금속류 공출식 사진, 국민총력 개정면 연맹, 15.2×10.6‘구리나 철을 남기는 것은 부끄러움을 남긴다’
, ‘결전 아래 금속류 공출을 앞장서서 실행하자’는 표어가 창에 붙어 있다.

 

‘보전 김교장의 수범’, 매일신보 1943년 4월 2일자 김성수가 전시물자 부족현상을 메우기 위한 ‘금속
회수운동’에 적극 동참하기 위해 자택 철문 등 약 2백관(750kg)을 떼어 해군무관부에 헌납했다는 기사

 

놋그릇 공출,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2, 동아일보사, 1978

 

공출유기 대용 그릇, 지름 14.6×높이 8.3 일본은 온갖 놋그릇을 빼앗아가고 일부는 대용품으로 사기그릇을 주었다. 공출로 나라에 보답하자라는 뜻의 ‘공출보국(供出報國)’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故 송병준 백(伯)의 동상 헌납’, 매일신보 1943년 8월 8일자 ‘한일병합’의 훈공이 컸던 백작 송병준의 동상 2개를 송병준의 손자 노다(野田太郞)가 ‘금속회수운동’에 적극 동참하기 위해 유기금속과 함께 헌납하였는데 수많은 일반인이 이를 보고 유기그릇을 헌납하였다는 기사

 

일본의 침략전쟁이 확대될수록 식민지조선은 더욱 황폐해갔다. 강제병합 후 식민지조선의 ‘땅’과 함께 ‘쌀’의 수탈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중일전쟁 이후에는 한반도 곳곳의 지하자원과 해양자원 그리고 삼림까지 통제해 전쟁자원으로 동원했다. 흔히 ‘공출’이라고 하면 전쟁에 사용할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곡물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전쟁은 막대한 물자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행위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쌀 이외의 전시수탈이 더욱 강화되었다. 무기생산을 위해 전쟁 직전인 1941년 9월 <금속류회수령>을 공포하여 조선에 남아 있는 온갖 쇠붙이를 약탈해 갔다.
식기, 제기와 같은 그릇은 물론이고 농기구를 비롯해 교회의 종이나 절의 불상까지 빼앗아 무기로 만들었다.
특히 구리는 해군함정 중 잠수함 건조에 필요한 재료로 막대한 수량이 필요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놋그릇을 식기로 사용하고 청동화로를 난방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을 그냥 두고 보고있을 침략자들이 아니다. 일본 당국은 조선인들의 각 가정에 엄청나게 사용되는 놋그릇과 청동화로 같은 구리제품 공출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최말단 조직인 애국반 등에 의해 금속류의 공출이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미국에서 수입하던 설철(屑鐵:쇠 부스러기)마저 단절되자 무기생산에 큰 타격을 입은 일제는 전국에서 쇠붙이란 쇠붙이는 죄다 긁어모았다. 구리로 제작한 동상(銅像)이나 쇠 난간, 철제 가로등을 비롯해 가마솥까지 공출됐다.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밥그릇은 물론 숟가락 젓가락마저 빼앗겨야 했던 식민지조선의 민중은 이제 일제가 나누어주는 소량의 배급품으로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가야만 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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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초대의 날’ 첫 행사

김무성 회원사업 부팀장

연구소는 3월 19일 금요일 저녁 7시에 연구소 30주년을 맞아 기획한 ‘후원회원 초대의 날’ 행사를 처음으로 시행했다. 25년 이상 연구소를 후원해온 후원회원 중에서 수도권에 거주하는 후원회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30주년 기념식 때 방영한 회원극장의 주인공인 유동성 회원을 비롯해 김기흥 회원, 김석규 전 부 위원장, 김성종 전 이사, 김희준 회원과 동반인, 민삼홍 전 이사, 신창헌 전 이사 부부, 신희철 회원, 이수익 강남서초지부장, 이용훈 회원, 장필수 서울동부지부 자문위원, 최수전 감사, 황평우 전 부위원장 등 총 15명이 자리를 빛내주었다. 연구소는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자리를 띄워두고 칸막이를 설치하여 방역지침을 철저히 지켰다. 

1부 행사에서는 25년 이상 후원을 지속해온 회원들인 만큼 그간의 연구소 활동에 참여하며 쌓은 추억을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 2부 행사는 ‘나의 삶과 민주화 운동’이란 주제로 함세웅 이사장과 회원들 간의 토크콘서트였다. 한평생 민주화 운동에 몸 바쳐 온 함세웅 이사장의 진솔한 얘기는 회원들의 가슴속에 깊이 스며들어 크나큰 감명을 주었다. 연구소는 이번 행사를 포함해 올해 총 7회에 걸쳐 후원회원을 초대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아울러 30년 동안 꾸준하고 독보적인 연구와 실천의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근간이 바로 함께 하고 있는 후원회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다가가는 회원친화적인 사업을 준비할 계획이다.

목, 2021/03/2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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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28]

다색판화로 보는 청일전쟁

 

• 강동민 자료팀장

1. 대일본해륙군조선상륙도 大日本海陸軍朝鮮上陸之圖
일본군 제1진 해군 육전대가 전함에서 상륙정으로 갈아타고 인천에 상륙한 모습을 묘사한 다색판화.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청국이 파병 하자 일본은 텐진조약을 내세워 조선에 병력을 파견했다.

 

2. 조선경성 오오토리 공사 대원군을 호위하다 朝鮮京城 大鳥公使大 院君ヲ護衛ス
조선정부의 철병요구를 묵살한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개입할 것을 결 정하고 경복궁을 점거한 뒤 친일내각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조선군 과 전투를 벌이며 말을 탄 대원군을 호위하는 오오토리 공사가 경복 궁에 입성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3. 조선풍도근해 격전 일군함대 대승리도 朝鮮豊島近海激戰日軍艦隊 大勝利の圖
7월 25일에 일본군은 아산만의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군함을 기습 공 격, 청일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청나라의 순양함 제원(濟遠)과 광을 (廣乙)이 조선의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의 순양함 요시노(吉野)와 나 니아(浪速) 함대 사이에 포격을 벌이다 도주하였다. 일본함대가 도주하는 청나라 함대를 쫓아갔는데 광을은 결국 좌초하고 제원은 일본 에 노획되었다.

 

4. 육군사단대만세 陸軍師團大萬歲
1894년 7월 29일 아산 전투를 묘사한 다색판화. 전투에서 패한 청국 군을 끝까지 쫓아가는 대규모 일본 군인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쓰러 져 있는 군인들은 청국 병사뿐이며 쫓기듯 도망가는 청국병사들은 작 게, 쫓아가는 일본 병사들은 압도적으로 표현했다.

 

5. 조선평양대격전 朝鮮平壤大激戰
1894년 9월 15일 평양 전투를 묘사한 다색판화. 일본군이 평양으로 진 격하여 파죽지세로 청국군을 무찌르고 있다.

 

6. 아국대승리 적진 군기를 빼앗다 我軍大勝利 敵陣ニ軍旗ヲ奪ス
말을 탄 일본 장교가 청국기를 빼앗고, 이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청 국 병사의 모습을 그린 다색판화. 일본의 군대가 적군인 청국의 깃발 을 빼앗으면서 전쟁의 마지막을 가늠하게 해준다.

 

더위가 한창이던 1894년 7월, 한반도는 무더위를 집어 삼키는 화염에 휩싸였다. 국토의 곳곳이 불타고 무너지고 시체가 뒹구는 처참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던, 청일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준비가 한창이던 2018년 3월 20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해 다카하시 가즈히꼬(高橋和彦) 씨가 족자 2점을 기증했다. 바로 청일전쟁을 주제로 한 두루마리 형태의 다색판화(錦繪, 니시키에) 33점을 2개의 족자로 분할하여 제작한 것이었다.
이번 자료는 바로 다카하시 씨가 기증한 청일전쟁 판화 중 몇 점을 소개한다. 니시키에는 당대의 풍속을 서민 감각으로 그려낸 근세 일본의 회화로 목판화 방식을 채용한 에도 시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실제로 전쟁 상황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화가들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이지만 일반 민중은 청일전쟁의 동향을 니시키에를 통해 사실처럼 알게 되었다. 특히 시중에 광범위하게 유통되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조선 침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선전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청일전쟁이 조선을 사이에 두고 조선에서 일어난 전쟁임에도 니시키에 속에 조선인을 소재로 한 그림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청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조선은 이미 니시키에 화가들의 상상력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멸시의 대상은 일본군에게 패주하는 오합지졸 청국 병사들에게 옮겨갔다. 꽁무니 빼는 청나라 병사들을 멸시적인 비속어로 매도하고 조롱하며 청일전쟁을 ‘문명을 위한 전쟁’으로 미화했다. 거의 모든 그림이 근대적인 무기를 갖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전투하는 늠름하고 용감한 일본군의 모습을 묘사했다. 반면 청국 병사는 재래식 무기인 창과 칼을 지닌 오합지졸로 묘사했다. 

화, 2021/07/27-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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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계의 ‘녹두장군’ 이이화 선생 1주기 묘소 참배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3월 15일(월) 민족문제연구소 상근자들은 역사학계의 ‘녹두장군’ 이이화 선생의 별세 1주기를 추모하기 위한 성묘를 다녀왔다. 이이화 선생은 코로나19 대유행이 막 시작되던 작년 봄(3월 18일), 암 수술에 따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향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 장례 또한 수많은 시민들의 애도 속에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선생은 생전 <친일인명사전> 편찬,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등에 함께 참여하며 연구소와 깊은 인연을 맺어온 바 있다.
선생의 묘소는 파주 동화경모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별세 후 1년이 지났음에도 선생을 기리고 존경하는 시민과 팬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실제 성묘 당일에도 어느 시민이 두고 간 듯한 꽃이 묘소 곁에 놓여있었다. 연구소에서는 제수용품과 음식, 꽃다발과 함께 생전 선생이 즐겼다던 맥주와 담배를 준비해 제단에 올렸다. 성묘는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임헌영 소장의 참배로 시작되어 조세
열 상임이사의 추도문 낭독으로 이어졌다. 추도문은 선생의 뜻을 존경하고 따랐던 후학들의 마음을 담아 조 이사가 작성한 것으로,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를 필두로 선생의 연구업적을 기리는 한편 ‘역사 대중화’를 위해 정열을 바쳤던 한 역사학자의 삶을 되새기는 내용을 담았다.

아울러 이날 성묘에는 이이화 선생의 부인 김영희 여사도 함께 자리했다. 김 여사는 묘소를 찾아온 연구소 상근자들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연구소가 이이화 선생의 유지를 이어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주길 당부했다. 코로나19로 각박한 삶이 지속되고 크고 작은 사회문제가 두드러지는 요즘, 역사학계의 ‘녹두장군’이자 한없이 따뜻한 ‘역사 할아버지’로 민중의 곁을 지켜주던 이이화 선생의 부재는 두드러진다. 하지만 100여권에 달하는 선생의 저서는 여전히 남아있으며 그가 역사학자로서 견지해온 삶의 태도 또한 ‘역사의 이정표’로 뚜렷이 노정되어 있다. 이에 부응하는 취지로 우리 연구소는 ‘이이화 선생님 추모사이 ’(http://rememberleeewha.com)를 개설, 운영 중에 있다. 선생의 1주기를 맞아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방문을 부탁드린다.

목, 2021/03/2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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