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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사회과학 “지식청년시대知識青年時代”의 종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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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사회과학 “지식청년시대知識青年時代”의 종언 (2)

admin | 목, 2021/05/13- 19:26

왜 규범화는 체제화를 불러오는가?

”대단히 말솜씨가 뛰어나고, 엄청나게 날카롭다” 많은 학자들, 특히 타이완과 해외에서 온 학자들이 지청시대의 학자들을 평가하는 전형적인 말이다. 말솜씨를 갈고 닦는 것은 당시 지청학자들의 중요한 일의 방식이었다. 1990년대초, 대학과 연구소의 중년, 청년학자들은 업무가 끝나면 거실이 딸린 기숙사로 돌아가곤 했다. 냉동만두와 쏘세지등의 인스턴트 식품이 보급되기 시작해서, 이를 안주삼아 즉흥적인 심야 혹은 철야토론이 가능했다. 말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글로 쓰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일이다. 말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핵심, 즉 ‘점’을 짚을 수 있어야 한다: 한가운데 ‘점’을 겨눠, 그 ‘점’에 도달한다. 그리고 나서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도약한다. 이렇게 핵심을 짚기 위해서는 충격과 폭발력이 필요하다. 어떤 주제든 2~3분내에 듣는 사람이 이해가능하도록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점들을 이어서 선을 긋는다면, 즉, 점을 글에 담아 생각하기 시작하면,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글로 쓰기 위해서는 선을 그어야만 한다. 쓰기 전에 머릿속에 종이에 선을 긋기 위한 틀을 짜야 한다. 쓰는 과정에서, 다른 내용간의 관계를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명료한 분류歸類, 선긋기劃分, 한계정하기界定가 필요하다. 정밀한 논리, 촘촘한 디테일, 물흐르는듯한 연속성이 필요하다. 글쓰기에서 돌파력과 임팩이 목적이 될 수 없다. 전문적인 학술 작법은 독자들을 흥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독자는 에디터, 심사평가원을 포함해서 다섯명을 넘지 않는다). 구두발언조차 교과서를 또박또박 읽는 것처럼 답답하게 들린다. 학자나 관료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혁명가라고 해서 글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에겐 밀실에서의 토론과 광장에서의 연설이 더 중요하다. 밤을 세우며 급하게 준비하는 신문평론이나 소책자도 이러한 토론과 연설의 연속선상에 있다. 이렇게 말로 표현하는 것은, 즉흥적일뿐더러, 예측이 불가능하다.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보수파를 불안하게 만든다. 영국 수상 앤서니 에덴은 당시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나세르의 연설방식이 무쏠리니나 레닌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이 1956년 수에즈운하 전쟁의 숨은 원인이기도 하다.

잡담같은 대화로 생각을 나누면 생각이 두루 퍼지고, 도약하게 된다. 이런 대화는 고도의 상상력에 의존해서 지속된다. 모두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상상을 해야 한다. 저런 관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떤 감춰진 의미가 있는 것일까? 썰렁해지지 않도록 평범해 보이는 현상에서 어떻게 재미있는 화제를 끌어낼 수 있을지 미리 생각을 해야 한다. 지식청년시대 학자들은 그래서 상상력이 뛰어나다 대신에 당시에 학술적인 능력은 좀 빈곤하기도 했다. 한번은 쑨리핑孫立平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잘모르겠다고 고백했다. 대답이 걸작이었다. “누구는 제대로 알아?”   고개를 들고, 눈을 가늘게 뜨며 말씀하셨다 “우리들도 어떨 때는 해외문헌을 보면서 큰 영감을 얻고 흥분하는데, 어쩌면 제대로 이해를 못해서 그럴지도 몰라”. “외국 이론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경우도 많아. 잘못 읽은게 오히려 ‘큰 깨달음’으로 다가 오는거지. “ 사상의 자주성이 자원의 빈곤을 오히려 혁신의 원천으로 전환시킨 셈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사회현상에 대한 통합적 판단을 하고 싶다는 욕망과도 연관이 있다. 무엇을 토론하든, “사회주의의 본질은 이것이다”라든가 “중국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등의 지청학자들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점’에서 (‘선’을 거치지 않고) ‘면’으로 도약한다. 학제를 뛰어넘거나 아예 특정 학과에 소속되지 않으려는 그들의 경향도 상상력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 중국사회에 대해서 통합적인 평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자연히 철학, 역사, 정치, 경제의 각 영역을 넘나들게 된다.

대화와 토론은 단체 행동이다. 대화를 통해 사상이 전파되며 친구들간에 공명을 일으키고, 이때 저작권은 고려하지 않는다. 누가 먼저 제안한 생각인지도 따지지 않는다. 1990년대 중국은 가정전화 의 시대로 접어드는데, 작은 범위안에서 연락하고 동태를 전파하는데 매우 도움이 됐다. 당시의 인터넷은 기본적으로 문헌검색기능이 없었다. 개인 PC를 사용하면서, 프린터와 복사기가 보급됐다. 소그룹안에서 끼리끼리 책을 복사하고, 돌려 읽고, 이렇게 출력된 원고에 대해서 평했다. 타이완 사회학자 까오청슈高承恕교수가 왕선생님 소그룹의 허베이河北성 바이꺼우白溝시장 필드조사에 참여했다. 그를 매우 흥분시켰던 것이, 다함께 자전거를 타고 시골로 내려갈 때였다. 대오를 만들어 페달을 밟으며 서로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언제든지 멈춰서 군고구마를 사먹기도 하고, 그러면서 군고구마 장수의 살림살이에 대해서 물어보기도 했다. 나중에 자전거가 자가용으로 대체됐다. 각자 자기 차를 몰아서 간다. 물리적 공간이 닫히고 개별화된다. 아마 이런 변화도 지청시대의 끝을 알리는 지표일 수 있다.

당시 학생들은 자기보다 20~30세가 더 많은 학계의 중진, 원로나 그들의 동료들과도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사상적 교류를 할 수 있었다. 격의없는 논쟁과 대화가 가능했다. 아마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일 것이다. 지금 스승과 제자 사이가 꼭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진짜 중요한 변화는 동료들간에조차 제대로된 토론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로 재미없는 사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런 행운을 누린 것은, 왕선생님이 학생들을 대단히 중시했기 때문이다. 아니 정반대로 그때는 사제관계라는 개념자체가 없었다. 세대의식조차 없었다. 만일 학생이 어떤 문제에 대해서 흥미가 있다면, 왜 와서 한번 들어 보라고 할 수 없나? 만일 친구 사이에 절실히 어떤 문제를 궁리하고 있다면, 왜 학생이 뭐라 하는지 들어볼 필요가 없나 ? 한번은 농민공에 대한 이론의 함의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데, 쑨리핑선생님이 말했다. “눈앞 탕속에 들어 있는 고기 한점이 보이는데, 왜 건져 먹지 않나?” “꼭 모든 생각을 다 받아들일만큼 마음이 넓은 것은 아니다 등등. 그냥 눈앞의 고깃덩어리는 건지면 되는 것이고, 그 사상의 탐색이 그들의 반권위적 생활태도의 일부분이기도 했다. 그냥 원래 분위기가 개방적이고 평등했다.

이 학자들의 실천방식은 그들의 생활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동료들간에 질투와 시기하는 법이 없이, 철저하게 함께 생각을 나누는 것은, 아마도 하방시기 단체 생활의 연속선상에 있을지도 모른다. 1990년대 학술계에는 서로 다툴 이익도 없었고, 관리도 엄격하지 않았다 (밤새 토론을 했다면, 아침에 새벽같이 출근해서 정시에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고도로 농축된, 혹은 희극적이기까지 했던 역사적 경험이, 그들에게 매우 특별한 넓은 시야와, 작은 일에서 큰 의미를 포착하는 능력을 선사했다. 어디에 고기덩어리가 있는지  냄새를 맡을 줄 알았다. 이런 밑바닥 생활의 체험이, 각종 생활의 지혜를 근거리에서 관찰할 기회를 주었고, 평범함속에서 보물을 찾아내는 민감함을 선사했다. “점”을 직관적으로 찾아냈다. 계획없이 책을 무차별적으로 읽었고, 다양한 전공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왕선생님 자신이 원래 수학전공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철학과 기계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들의 사고는 틀에 갇히지 않고 튈 수 있었다. 그들이 사회과학을 공부한 것은 완전히 흥미와 사명감 때문이었다.

<사진3> 지청학자들의 경계없는 학술실천방식은 그들의 생활경험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동료들간에 질투와 시기도 없었고, 밤새워 함께 토론을 하던 것은 하방때 단체생활의 연속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학술실천은 1990년대 지청학자들의 자기비판적 태도를 키웠다. 당시의 공통인식은 전문적인 학과건설을 시급한 임무로 삼았으니, 학술활동은 반드시 지식공동체의 일정한 표준에 의한 대화에 기반한 것이어야 했고, 규범형식이 대화의 기초가 됐다. 그래서, 문헌리뷰와 분석의 틀을 명확히 하는 등, 모두 중요했다. 당시 우리가 시급히 보완해야 할 것들이었다. 왕선생님은 비록 외국에서 공부하거나 일을 해본 경험이 없었지만, 베이징 사회학계의 국제협력을 열심히 추진했다. 많은 지식청년들이 1980년대 특히 1990년대초에 서방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90년대 이후 서구학계의 연구방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왕선생님의 또다른 업적은 전문과제형식의 사회학 연구방법을 도입한 것이다. 경험소재에 대해서 계획을 가지고 접근한다, 체계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그저 관점을 내세우는 식의 주관적 글쓰기와 구분한다. 하지만 1990년대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상황은 관리자들의 학술규범화 열정이 생각보다 빠르게 학자들을 앞지른 것이라는 점이었다. 중국어 사회과학 검색 및 인용 시스템 (CSSCI), 학술지 평가 및 등급, 임팩트, 인프라 건설, 펀드신청, 과제평가, 국제협력, 국제순위 등과 같은 키워드가 아주 빠르게 학술업무의 황금률이 됐다. 1990년대 추진된 중국사회과학의 규범화속에서 기수역할을 한 덩정라이鄧正來는 그의 말년에는 규범화에 대해서 언급을 삼가하는 대신, 자주성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했고, 특히, ‘지식계획시대’에 대해서 반대했다. 그는 지식계획시대에 연구가 정치적 권력과 그로부터 확정되는 학술제도상 자원분배를 기초로 삼으면, 그 기초가 우리의 지식생산방식을 대부분 결정할뿐 아니라 우리 지식생산물의 구체적 내용까지 간섭할 것이라고 염려했다. 량용자梁永佳는 이에 대해, 덩과 그의 지지자들이 자신들이 초기에 규범화에 기울인 노력이 오히려 학문을 속박하게 될 것을 염려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규범화의 노력은 본뜻과 달리 ‘체제화’를 촉진한다. 이것은 국가 거버넌스 방식의 전환과 따로 떼어 말할 수 없다. 1990년대 이래, 원래 장기혁명과정에 형성된 것으로써, 사회주의 개혁의 공식인증을 통해서 정당하게 획득한 정부의 합법성은 더 이상 불가침의 영역이 아니게 됐다. 이제 정부는 새로운 합법성을 만들 필요가 생겼으며, 관리자에게 ‘동의’를 얻어야 했다. 학술연구형식상의 규범화와 운영사이의 상대적 독립은 학술에 대한 행정관리 합법성의 기초가 된다. 행정지도하의 규범화는 확실히 연구의 독립성을 강화한다. 장기간의 훈련이 없으면, 학술과 행정용어를 이해할 수 없다. 각종 명시적 규칙과 암묵적 규칙도 알 수 없다. 그렇게 학술 영역의 문턱을 높이게 된다. 학과내부에서 학자들은 고도의 학술화된 언어를 사용하여 다른 경우에는 사용할 수 없는 화법으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사진4> 덩졍라이(1956-2013)선생이 창간한 <<중국사회과학계간>>과 <<중국서평>>은 1990년대 중국사회과학의 규범화, 본토화의 출발점이었다.

동시에, 처음부터 금단의 영역을 설정함으로써 연구내용의 방법을 통제하는 것이 갈수록 원하는 효과를 얻기 어렵게 됐다. 그래서, 점점 학술연구의 일상적 운용기술 규정으로 전환되는 것을 관리한다.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 – 행정요원은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다. 자원을 농단하는 것은  소수파이고, 주로 여러가지 규칙이나 양식을 채우게 하기, 신청, 평가 등의 수단으로 이를 실현한다. 중년, 청년 학자들은 자기 커리어를 위해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체제화한다: 우선 직위를 추구하고, 점수를 따기 위해 노력하고, 나중에 행정직 수장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자기몫으로 할당된 머릿수 쿼터를 받아서, 독립적인 파벌을 만들고 싶어한다. 전속사무원을 배정 받고, 가장 이상적인 것은 독립건물을 가진 자기 연구센터를 하나 꿰차는 것이다. 학술연구로부터 행정직으로 들어가면 물만난 고기와 같다. 일단 이런 위치에 오르면, 다시 학술연구직으로 돌아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두려운 일이다. 한명의 학자가 조직에 들어가서, 직함을 얻고, 자원을 확보하는 것은 그의 경력의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주요한 표준이 된다. 그 연구내용과 업적은 부차적인 것일뿐이다. 후지청학자들이 중년이 되면서, 체제화된 학술연구는 이미 관행이 됐다. 동료간에는 덕담만을 주고 받고, 조화와 평형을 추구하며, 각자 자기 몫을 챙긴다. (공무원 조직이 원래 그렇다. 중하급관원이 정확하게 당신의 연구에 대해서 가치를 평가한다. 하지만 모든 문제는 이미 정부의 손아귀안에 들어가 있다; 그리고 나서 매우 친근하게 당신의 가정생활과 건강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물어본다. 유교, 선불교, 차도에 대해서 한담을 나누는 관계가 된다). 거버넌스 기술의 정교화가 학자들의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역으로 이런 구조는 등급화가 되고 심지어는 가부장제 형태로 틀이 짜여, 타파가 아주 어려워진다.

형식상 독립적인 사회과학 연구는 학력, 직책, 지명도 등 관련된 상징자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부는 이런 상징자본을 직접 장악한 것은 아니지만, 자본형성과 전환과정을 통제할 수 있다. 상징자본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조속에서 만들어진다. 이 구조는 복잡한 사회과정이고, 자금을 투입하고 이익을 허락하는 것이, 이 과정속에서 아마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상징자본도 결국 다른 자본과의 상호작용속에 그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연구 프로젝트가 학계의 인정을 받을 때 (예를 들어 발표를 하거나 상을 받는다) 직접 상금을 받을 수도 있고, 이 자체가 일정 정도 학술상징자본의 독립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로도 작동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인정은 공정가격이 되고, 상품은 가격표가 달려야 계속 장사가 되는 법이다. 상징자본의 형성과 자본사이의 전환과정에서 층층이 쌓인 이익위탁대리관계가 다시 형성된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학술체제화과정의 거의 정신분열적으로 보이는 면도 쉽게 이해가 된다. 이를테면, 정부는 대학이 서방사상에 침식당하지 않도록 저항할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동시에 연구 성과가 서방의 인정을 받도록 격려한다. 어떤 대학의 규정은 외국의 저널에 발표하고 정부 지도자의 인정을 받은 연구는 모두 추가 보너스 점수를 얻게 한다. 구체적인 점수값과 이 점수를 인민폐로 환산하는 비율은 저널의 등급과 지도자의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의 연구가 정부의 관료를 기쁘게 하고 동시에 서양사람들의 칭찬도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체제화된 학술관리는 두가지 모두를 필요로 한다. 관료는 자원의 공급을 결정하고, 서양 사람들은 체제에 합법성을 부여한다. 관료와 서양사람들 모두가 연구 바깥에 있는 인정 표준의 중요성으로 드러난다. 관료와 서양사람들의 공통점은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는 서민들이 아니며, 그들의 인정이 인민폐로 환전가능하다는 점이다.

지청학자들이 추구하던 규범화와 후지청학자들이 직면하게 된 체제화는 당연히 같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돌아봐야 하는 것은, 규범화의 요구가 체제화에 제공하는 합법성이고, 최소한 이 것들이 우리들의 체제화에 대한 경계를 늦추게 하고, 저항감을 줄인다는 것이다. 사회과학의 규범화 자체는 원래 제한을 의미하지 않지만, 대신 일종의 독립성에 대한 환상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사회과학은 만일 사회의 기타부문과 유기적 연관성을 맺지 못하고, 누구를 위해 발언을 하는지, 누가 듣게 하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으면, 형식상의 독립은 사실상의 고립이 되고, 쉽게 체제에 편입되어 버린다. 체제화가 바로 학술연구를 자족적인 시스템으로 만든다. 발전하면 할수록 인볼루션involution內卷 (역자 주 – 생산요소 투입이 늘고, 기술이 점차 발전하면서, 생산량이 늘다가, 그 성장 속도가 줄고 더 이상 생산성이 향상되지 않으면서도, 돌파구가 생기지 않는 상황. 중국과 인도네시아 자바의 쌀농사 발전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의 결과로 만들어진 표현)이 일어난다. 그렇게 닫힌 시스템은 스스로의 논리는 강화되지만, 그 생존은 더욱 외부자원에 의존하게 된다.

독립성은 확실히 프랑크푸르트사회연구소가 20세기초에 결성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중요한 조건이다. 하지만, 그 독립이라는 것은 정치와 사회에서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독립된 학계에서 독립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비판해야 하는 대상은 바로 독립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전통이론’이었다. 연구소는 독일이 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아마도 소련식 무산계급혁명을 맞이할 것이라는 신기원에 대한 기대와 충동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노동자운동은 금방 실패로 돌아갔고, 나치가 등장했다. 이러한 반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최대 관심사였다. 이 이론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과 혁신성은 이러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강박이 바탕에 깔려있었다. 우리가 오늘날 직면한 문제는 학계와 국가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누구를 대표해서 국가와 상호작용할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 우리가 반드시 인위적인 ‘탈규범화’를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관건은 왜 규범화가 필요한지 분명히 하고, 규범화가 사상적 좀비가 입는 비단옷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체제화가 된 학술연구가 다시 유기적이고 자연적으로 하나의 장기적 투쟁과 탁마의 과정을 겪게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경험’이라는 이 범주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아마도 도움을 줄 것이다.

(2/3)

 

샹뺘오 项飙

옥스포드대학교 인류학과

 

이글은 <<문화종횡文化縱橫>> 2015년12월호에 실렸으며, 저작권은 문화종횡에 속한다. 

원문링크

https://mp.weixin.qq.com/s/KYkgtq_1fIMIbKVCwZRYZ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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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스트-웨스트(Post-West)

복병이 있었습니다. 하노이에 들르기 전 싱가포르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곳입니다. ‘미래도시’에 가장 근접한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다운타운을 걷노라면 수많은 언어가 동시에 들려옵니다. 영어와 중국어, 힌디어와 아랍어, 독일어와 일본어, 말레이어에 한국어도 곧잘 들립니다. 그만큼 다인종, 다민족, 다종교, 다문명 도시입니다. 지구촌을 축약시킨 듯한 이 글로벌 시티를 산책하노라면 뇌가 말랑말랑 활성화되어 풀가동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참새 방앗간, 단골 서점 또한 빠뜨릴 수 없었습니다. 오차드(Orchard) 거리에 있는 키노쿠니야(紀伊國屋)입니다. 일본의 대형서점 체인이 동남아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방콕에도 자카르타에도 쿠알라룸푸르에도 키노쿠니야가 있지요. 하지만 단연 싱가포르가 빼어납니다. 구미는 물론이요 중화권과 일본까지 아울러 최신의 서적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의 정보와 지식이 실시간으로 유통되고 세상의 변화에 가장 기민하게 반응하는 곳이 싱가포르이기 때문입니다. 베스트셀러를 진열해 둔 곳부터 단박에 시선을 끌었습니다. 『The Future is Asian』, 『The New Silk Roads』, 『Belt and Road : A Chinese World Order』. 세 권 모두 딱 제 취향입니다. 거시적이고 종합적이며 전망적입니다. 토막토막 일국학도 아니며, 꼬장꼬장 인문학도 아닙니다. 시원시원한 지구학이자 호쾌장쾌한 미래학입니다. 빅픽쳐를 그려가며 메가트렌드를 추적합니다. 공항에서도 비행기에서도, 심지어 하노이에 도착해서도 틈나는 대로 탐독했습니다. 간만에 상하이와 뭄바이와 두바이에 이스탄불과 카불과 모스크바를 아우르는 저작들을 읽어가니 시야가 뻥뻥 뚫리는 쾌감이 입니다.

하노이 시민

싱가포르 직전에는 조호루에도 다녀왔습니다. 말레이시아와의 국경에 자리한 접경 도시입니다. CJ그룹의 아시아태평양 사업본부에서 열린 전략회의에 초청받았습니다. 미얀마부터 파키스탄까지 16개국 주재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간 여러 자리에서 강연을 해왔지만 단연 생산적이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질문과 응답, 토론으로만 1시간 반을 훌쩍 넘겼습니다. 역시나 현장감을 익힌 기업인들이기에 생동감 넘치는 대화가 오갈 수 있었습니다. 몇 차례는 도리어 제가 질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일정을 다 마치고도 에너지를 소진했다기보다는 기운을 얻어간다고 느낀 적은 이 번이 두 번째입니다. 처음이 바로 작년 초여름 하자센터에서의 강연이었죠. 푸릇푸릇한 청년들과의 대화와 펄떡펄떡한 기업인들과의 소통 속에서 저 또한 신이 나고 흥이 돋습니다. 그에 견주자면 상아탑의 학술회의는 어쩐지 영 맥이 빠집니다. 형식적인 발표와 의례적인 토론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일쑤입니다. 저는 <개벽파 선언> 연재를 준비하면서부터 출간 이후의 북 콘서트를 줄곧 궁리해오고 있습니다. 미래세대와 소통하고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는 분들과의 결합으로 책 잔치와 말잔치 또한 풍성하게 이끌어보고 싶습니다.

19세기 수운과 해월은 전국 방방곳곳에 접(接)을 만들어 동학을 전파했다 했습니다. 우리는 지구촌 구석구석에 개벽학을 소개하고 ‘글로벌 개벽파’와 연대하는 거점(hub)을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Think Global, Act Local)는 개벽파에 더욱 요청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천지만물과 천하를 숙고하면서, 가정과 마을에서부터 성심성의를 발휘해야 하겠습니다.

 

2. 다시 천하

공교롭게도 세 권의 책이 공히 포스트-웨스트를 논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아시아의 세기’라고도 하고 다른 이는 ‘유라시아의 세기’라고도 하지만, 서방세계 즉 유럽과 미국이 주도한 세계질서가 끝나가고 있다는 전망만은 일치합니다. 아니 끝나가고 있다, 도 아닙니다. 유라시아의 세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아시아의 세기의 초입에 진입했다, 가 공통된 서술입니다. 하긴 21세기도 벌써 19년차, 1/5을 지나고 있습니다. 20세기는 과거완료형, 21세기는 미래진행형이 더욱 어울리는 시점입니다.

다만 포스트-웨스트가 전혀 새로운 현상만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기시감이 없지 않습니다. 기해년으로부터 꼬박 일백년 전, 1919년 기미년도 그러했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대반전의 분수령이 됩니다. 근대문명의 원조이자 총아라고 간주된 유럽에서 발발한 전대미문의 세계전쟁이 비서구의 맹목적 서구화에 급제동을 걸었습니다.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1권이 출간된 해가 바로 1918년입니다. 비유컨대 ‘개화의 몰락’을 목도한 것입니다.

량치차오

그 세계사적 전환의 기운을 가장 예리하게 흡입하여 사상적 회심을 단행한 이로 량치차오를 꼽을 수 있습니다.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경험한 인물입니다. 중국 근대 계몽주의의 기수이자 개화파의 선봉이었습니다. 양무운동에서 변법자강운동으로 진화할 때 그가 있었습니다. 변법으로도 모자라 다시 신해혁명을 추진할 때도 그가 자리했습니다. 양무에서 변법으로, 변법에서 혁명으로 반세기를 거쳐 서구화 노선이 더더욱 강화된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1919년을 기점으로 “탈서방화, 재동방화”의 사상적 회향을 감행합니다. 1918년부터 두 발로 직접 유럽을 방문하여 두 눈으로 몸소 유럽을 관찰했기 때문입니다. 그 체험과 체득을 기록으로 남긴 문헌이 <구유심영록>(歐遊心影錄)입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에서 ‘동방문화 구세론’이 부상하고 있는 지적 풍경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유교와 불교, 도교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던 대학생들이 <도덕경>을 들고 다니며 ‘유럽의 중국인’을 자처하는 ‘신청년’으로 변모한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량치차오 또한 더 이상 중국의 서방 학습이 아니라 중국의 세계 구제를 골똘하게 궁리하게 됩니다. ‘과학만능의 꿈’(물질개벽?)이 초래한 폐허를 직시하고 중국은 신문명 재건의 길(정신개벽?)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가 보건대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근원은 둘이었습니다. 첫째가 자본주의요, 둘째가 국민국가입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처방전으로 사회주의가 흥기하고 있음을 면밀하게 학습했습니다. 국민국가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국제연맹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표하고 논평을 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후자에서 중국의 사상과 역사적 경험이 일조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전후 신문명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족주의 국가가 아니라 ‘세계주의 국가’(Cosmopolitan nation)를 건설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세계주의 국가를 만들어야만 일국의 발전을 넘어서 전 인류의 행복을 위한 문명의 기초가 될 수 있습니다. 개개인이 인생의 최대 목적을 인류 전체를 위해 공헌하는 일에서 찾는 인생관도 공유해야 했습니다.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아니, 익숙했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대학>의 현대적 의의를 확인한 것입니다. 중국은 일찍이 천하위공(天下爲公)을 지고의 이념으로 삼는 역사적 실천 경험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즉 국제연맹을 성공적으로 건설하기 위한 사상적 자원으로 ‘천하’를 재발견했던 것입니다. 량치차오가 누굽니까. 앞장서서 ‘신민’(新民)을 만들자고 목청껏 외쳤던 사상가였습니다. 신민이란 곧 국민(國民)이었습니다. 중국인의 희박한 국가의식을 타박하며 국민 만들기에 노심초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새파란 국민 너머의 지긋한 천하인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신문화운동 또한 극적으로 방향을 전환합니다. 신해혁명의 좌절 속에서 신세대들은 1915년 <신청년>(청년잡지>를 창간했습니다. 좌와 우의 차이는 있으되 대저 전반서화, 전면적 서구화를 표방했습니다. 그러나 아뿔싸, 창간 1년 전에 이미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스승이자 선배였던 량치차오마저 탈서방화와 재동방화를 피력하게 된 것입니다. 하여 신/구 간에 동/서 간에 일대 논전이 벌어집니다. 1920년대의 대사상 논쟁, 동서문화논전이 격발된 것입니다. 허나 량치차오는 더 이상 전위가 될 수 없었습니다. 1873년생, 1929년에 숨을 거둡니다. 그의 말년 사상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동방문명의 가치를 사수하는 신성(新星)으로 부상한 인물이 바로 량수밍입니다. 제가 ‘중국의 개벽파’로서 아껴 부르는 바로 그 분입니다. 1893년생, <동서 문화와 그 철학>을 탈고한 1922년만 해도 여전히 파릇파릇할 시절입니다. 하기에 그를 ‘최후의 유학자’라고 일컫는 수사가 마땅치 않습니다. 20세기의 감각이 부여한 어긋난 별칭입니다. ‘개신유학의 원조’이자 ‘생태문명의 태두’라고 기려야 모자람이 없습니다. 다른 백년을 앞서 사셨던 분입니다. 선구자이자 선지자였습니다. 두어 달 후면 5.4운동 100주년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개벽파’ 량수밍 이야기는 그 무렵에 더욱 보태볼까 싶습니다.

 

3. 다시 개벽

5.4와 3.1은 긴밀합니다. 구태여 선후를 따질 것은 없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후폭풍, 전 지구적인 동시대 운동이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헌데 3.1운동 전후로 불거진 공화정 논의가 신해혁명의 영향이라는 설이 없지 않습니다. 이웃나라의 대혁명이었으니 어찌 영향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피상적입니다.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공화춘(共和春), 공화의 봄은 짧디 짧았습니다. 곧바로 왕정복고, 반동의 시절로 접어듭니다. 그래서 신청년들이 신문화운동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중국의 신해혁명은 반면교사에 더 가까웠을 법합니다. 무엇보다 선생님이 거듭 강조하시는 것처럼 조선은 이미 1860년 동학 창도 이래 중국으로부터 사상적 독립을 완수한 터였습니다. 독립문이 그 물질적 기표라면, ‘동학’이라는 말은 그 사상적 기호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기미년 3.1혁명 또한 포스트-동학의 장기 지속적 지평에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동학혁명의 환생이 3.1혁명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개벽의 부활절이 바로 3.1절이었습니다. 고로 ‘개벽절’이라 고쳐 부른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정명(正名)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개화파(일본)과 척사파(조선왕조)의 협공에 처절하게/철저하게 패배했던 동학몽이 다시금 그 거대한 뿌리를 역사의 전면에 드러냈던 것입니다.

사진(좌): 3.1혁명의 주역, 손병희 선생(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우): 손병희의 _준비시대

와신상담 반세기를 거치며 동학은 더더욱 단련되고 진화했습니다. 도전(道戰), 언전(言戰), 재전(財戰)을 태비한 손병희의 <준비시대>부터 이미 동학 2.0, 다시 개벽과 ‘도의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철저한 비폭력운동으로 대안 문명으로서의 합법성을 쟁취합니다. 서학을 거부하고 유학에 도전하며 동학만을 고수하는 배타성도 떨쳐냈습니다. 서학과의 합작에도 앞장섰습니다. 개화를 배타하지 않고 개벽과 개화의 공진화를 꾀합니다. 천도교가 선봉에 서되 기독교도 더불어 가는 득의의 지혜를 발휘합니다. 불교와 유교도 폭넓게 아우르고자 품을 넓혔습니다. 3.1운동이 이 땅에서 펼쳐지는 동서종교 화해운동, 동서문명 회통운동으로서 세계사적 장관을 연출할 수 있었던 기저입니다. 기미독립선언서가 일제에 맞선 일국의 민족주의 선언이 아니라, 신문명 건설을 촉구하는 온누리와 만천하의 헌장으로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미하고 완숙한 까닭입니다.

무엇보다 천도교 진영의 공화국 담론이 탁월합니다. 얼마 전 오상준이 지은 <초등교서>(1907)를 탄복하며 읽어갔습니다. 세속적 정치문명과 영성적 종교문명을 무 자르듯 가르지 않습니다. 성과 속의 공진화를 통한 도덕문명을 궁리합니다. 종교란 religion의 번역어가 아닙니다. 일신교의 배타성이라고는 한 움큼도 없습니다. 종교(宗敎)는 문자 그대로 종지가 되는 가르침일 뿐입니다. 개인과 국가의 근간을 떠받치는 정신적 힘이자 사상을 말합니다. <초등교서>에서 모색하는 공화국은 천인(天人) 정신에 입각한 합의체입니다. 천인의 마음을 통한 사회의 영성화를 지향합니다. 천인은 요즘말로 ‘호모 데우스’라 고쳐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모 데우스의 집합의지와 집합행동으로 만들어가는 공화국, 지상의 천국을 염원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권이 아니라 ‘천권’(天權)이라 명명했음이 눈을 찌릅니다. 응당 천부인권과도 발상이 다릅니다. 인권은 그저 신으로부터 소여된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늘과 하나로 합일된 사람, 그 천격(天格)을 이룬 천인으로서 천권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부단한 인성 도야로 천성(天性)을 발현할 것을 당부하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화국 인민의 의무라고 하겠습니다. 응당 인격을 천격에 부합하도록 부단하게 수양하고 수행하고 수련해야 합니다. 인격을 끊임없이 고양하는 근본적인 정치운동이자 근원적인 영성운동이었던 것입니다. 고로 천직(天職)이라 함은 곧 천성을 따르는 삶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그래야 이 세계는 천계(天界)가 될 것이요, 온누리 만인은 천인(天人)이요, 온천하 만물은 천물(天物)이 됩니다. 그래야만 개별나라들 또한 국격을 드높여 천국(天國)으로 환골탈태합니다. 그래야만이 비로소 태평천국의 인류운명공동체, 태평천하도 완수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한울님/하느님/하는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다시 개벽과 다시 천하의 상호진화가 영구혁명과 영구평화의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천인공화국의 발상에 앞으로 우리가 모색해야 할 다종다양한 ‘제도개벽’의 단서 또한 무궁무진 담겨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4. 개조 : 다시 개화

그러나 일백년 전 개벽천하 운동은 좌초되었습니다. 개화의 새 바람이 불어 닥칩니다. 이번에는 북풍이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성공한 것입니다. 1922년에는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도 출범합니다. 자본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참신한 대안이 등장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개화 신파’가 부상한 것입니다. 개화 좌파라고도 하겠습니다. 개화 구파, 개화 우파의 세속주의, 이성주의를 더욱 극단적으로 밀어부칩니다. 일체의 영성을 허용하지 않는 과학적 무신론 국가를 완성시킵니다. 때를 맞춤하여 서유럽의 몰락으로 수세에 몰렸던 신청년들이 대거 개화좌파로 갈아탑니다. 신상(품)을 좋아하고 유행을 쫓는 그 얄팍한 면모를 탈피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동유럽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홀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좌파의 언어로 동아시아의 전통을 타박합니다. 중국공산당이 창당한 것이 1921년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논쟁의 방향도 일변합니다. 동서문명논쟁은 흐릿해지고 동서이념논쟁, 동서체제대결이 뾰족해집니다. 량수밍이 북경대 교수직을 내던지고 향촌건설운동에 투신한 것에도 공산주의에 대한 대응이 한 몫 했음은 의미심장한 대목입니다.

개화좌파의 약진은 개화우파의 소생에도 일조했습니다. 좌우투쟁이 격화될수록 동아시아 전통을 일신하여 신문명을 건설하자는 세력들은 ‘문화보수주의’로 기각되고 소외되어갔습니다. 1945년 이후 동서냉전의 먼 기원이라 하겠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특히나 치명적입니다. 북조선과 남한, 대륙과 대만,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분단의 씨앗이 바로 1920년대에 뿌려지기 때문입니다. 동서문명회통에서 좌우이념대결로의 퇴행, 돌아보면 볼수록 뼈가 아프고 피눈물이 나는 지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사상적 분화로 말미암아 동아시아는 중국전쟁(국공내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으로 이어지는 ‘제3차 세계대전’의 화약고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개화우파와 개화좌파의 아웅다웅에 신물이 나다못해 진물이 흐른다고 표현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동북아 전체의 수렁이고 구렁이라 하겠습니다.

 

5. 삼일절과 개벽절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

그 동서냉전의 잔상이 마침내 종언을 구하는 줄 알았습니다. 나흘째 온종일 하노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던 까닭입니다. 그 역사적 획기를 개화세에서 개벽세로 이행하는 터닝포인트로 기념하고파서 굳이 이 곳까지 찾았던 것입니다. 이 곳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깊이 음미해보겠노라는 약속은 지키지 못합니다. 김정은과 트럼프의 회담에 온신경이 쏠려서 백년 전 문자가 영 눈에 들지 않았습니다. 호안끼엠 호수를 에둘러 멜리아 호텔과 메트로폴 호텔과 오페라하우스를 걷고 또 서성거렸습니다. 지금 이 글 전체가 하노이 시내를 오가며 짬짬이 떠오르는 대로 핸드폰 메모장에 휘갈긴 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뜻밖의 협상 결렬 소식에 망연자실, 무릎이 꺽입니다.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는 책망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기차를 타고 삼일 동안이나 대륙을 주파했던 정은이와 여정이에게 토닥토닥 소주라도 한 잔 사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싱가포르 서점의 베스트셀러

돌연 삼일혁명 백돌에 친일 잔재 청산만 운운해서는 한가로운 일이라는 냉철한 판단마저 일어납니다. 일백년 전에도 일본의 뒷배는 미국이었습니다. 제2의 동학운동, 다시 개벽 운동이 좌초한 데에도 그 심급에는 전후 세계의 리더로 부상한 미국이 자리했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는 더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1860년 중국으로부터 사상적 독립을 감행한 것처럼, 1919년 일본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선언했던 것처럼, 2019년에는 필히 ‘개화의 지존’ 미국으로부터의 자립과 자주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딴청을 피우는 미국에 연연하여 남북관계를 북미관계에 연동시킬 것이 아니라, 남북이 선도하고 중국과 러시아가 협조함으로써 미국과 일본을 견인하는 ‘새로운 길’을 탐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시아 퍼스트, 아메리카 라스트, 그편이 목하 개창되고 있는 포스트-웨스트, 포스트-아메리카, 유라시아의 세기와도 정합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싱가포르의 그 베스트셀러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미래는 아시아입니다.(The Future is Asian.)

다소 거칠고 산만한 글을 정리되지 않은 채로 보냅니다. 그래도 되지 않을까 뻔뻔해 진 것은 요사이 강호와 재야의 ‘샤이 개벽파’들이 속속 커밍아웃하여 개진하고 있는 언설들이 워낙 빼어나서입니다. 이남곡 선생님, 박길수 선생님, 유상용 선생님, 강주영 선생님, 이은선 선생님 등등이 토해내고 계신 절창들이 휘황합니다. 더할 것도 없고 덜어낼 것도 없는 훌륭한 문장들로 빼곡합니다. 굳이 저 같은 풋내기가 설익은 말을 섞지 않아도 3.1절이 곧 ‘다시 개벽절’이라는 진의는 충분히 전달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서울로 돌아가서 연구자의 자세로 올해 ‘범개벽파’의 집합지성이 쏟아낸 각종 3.1혁명론을 요령껏 갈무리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제 3.1 백돌, 개벽절 100주년을 맞이하러 광화문으로 이동합니다. 인천행 비행기의 탑승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막 시작되었습니다. 응답하라 1919, 기해년에서 기미년으로 이륙합니다.

금, 2019/03/0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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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에 ‘을의 경제학’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장흥배 님이 1월 10일 ‘시장은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주제로 쓴 글의 일부를 아래로 다시 소개한다..

최저임금제의 의의는 임금 최저선의 결정(이라는 영역)에서 시장에 대한 사회의 우위를 확인한 것이다. (중략) 문재인 정부하에서 최저임금제의 역사적 의미는 시장의 힘을 극복하려는 것이었지, 이에 굴복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촛불항쟁, 여야 대선주자들의 공약 경쟁, 이를 통해 들어선 정부의 정책 수립을 통해 탄생한 최저임금 1만원이 가리키는 정책 방향은 공룡 재벌에 의해 망가진 공정거래 질서의 복원, 만약의 고용 위기를 상쇄할 과감한 복지와 소득재분배, 부동산 지대경제의 청산 등이었다. 요컨대 시장과 경제를 16.4%의 최저임금 인상이 수용될 수 있는 환경으로 개혁한다는 것이 인상을 결정한 사회적 합의의 요구였던 것이다. 달리 보면 이 모든 과제에서 허탕을 치고 역진하는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 효과를 무력화하는 온갖 꼼수로 나가는 것은 예정된 수순일 수밖에 없다.

좌절로 가는 최저임금 1만원 실험에서 남아야 할 교훈이 있다. 지배계급은 언제나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에 따른 선택을 객관적인 시장의 힘에 의한 제약으로 위장한다는 것이다. (반작용적) 역효과 명제는 이를 통해 대중의 사고를 효과적으로 지배한다. 실상 신비한 시장의 힘으로 포장된 상자를 뜯어보면 재벌, 상가와 아파트 자산가, 상위 10% 고소득자들의 경제적 이권을 유지·확대하려는 (탐욕의) 이해가 대개의 내용물이다”

 

명쾌한 선언이다! 시장은 당연히 시민사회의 필요와 합의에 따라 작동하고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촛불의 이름을 앞세워 집권한 문재인 정부에서조차 한국 사회의 모습은 시장논리와 경제성과라는 미명으로 극소수의 기득권층 탐욕이 합리적인 것처럼 포장되고 이들에 의해 전일적으로 지배당하는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본인과 가족들의 패악행위 등으로 스스로 경영능력이 없음을 만천하에 노출한 조양호 대한항공 그룹회장의 경영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연기금 등 공공투자 지분의 주주권 행사(stewardship)를 유보하면서 오히려 수구언론과 보수진영에서 이를 마치 사유재산권과 경영권의 침해하는 것으로 오도하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명백하고 노골적으로 탈법과 불법을 저지른 이재용을 삼성이라는 한국 대표기업의 주주이자 경영자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구속을 면책하고 석방하였다. 결국 대한항공과 삼성이라는 거대한 기업집단들이 국민적 자산이 아니라 일개 가문의 전횡적 사유물이라는 것을 공인한 셈이다.

시민들에게서 수임한 개혁을 추진하는 대신 애매하게 삼성과 연대하며 황당하게 시장의 논리를 전면적으로 내세웠던 지난 세월의 참여정부에 이어, 역시나 이익 방어에 노련한 기득권의 간교와 교언영색으로 포장된 예의 시장논리에 포획되고 투항하면서,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최저임금제 실현과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역사적 명제에서 말머리를 돌려 뒷걸음친 문재인 정부는 이제 더 이상 촛불과 시민을 정권의 명분과 장식용으로 운운해서는 아니 된다.

1924 pixabay
사진: pixabay

시장은 기본적으로 무죄이다. 문제는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작동하는 기득권과 자본의 탐욕과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와 이데올로기와 매카니즘, 그리고 이에 조응하여 형성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구조가 문제이다. 이에 한걸음 더 들어가 시장이라는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용어를 시장, 시장가격, 시장기구(역할), 시장경제 등으로 다시 세분하여 들여다 보고자 한다.

경제학 사전에 의하면 시장은 일군의 공급자와 수요간에 성립하는 재화 내지는 용역의 교환 또는 매매의 관계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역사적 흐름으로 볼 때 상품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는 교환 내지는 매매 행위가 특정 장소에서 이루어졌으나, 상품경제가 일반화된 이후에는 구체적 매매 행위에 더하여 개념적 추상으로서 시장이 존재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관계와 범위의 내용이 특정 장소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아담 스미스 이래 경제학의 핵심은 가치에 대한 논쟁과 시장에서 가격이 형성되는 과정에 관한 것일 것이다. 개념으로서 가치와 시장 가격 간에 존재하는 괴리에 대한 관점과 해석이 지난 수백 년간 서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경제 산업의 내용을 역동적으로 규정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은 필자는 다만 기업인으로서 30여 년간 실물 경제를 체험한 바탕으로 경제와 시장에 대해 기존의 논쟁과는 다른 의견을 만용스럽게 개진해 보고자 한다.

육체라는 유기체적 형태를 지닌 인간에게는 의식주의 해결이라는 절대적 필요가 존재하며 어떠한 상황과 조건에서도 이를 충족하는 재화와 서비스가 제공되어야 비로소 해당 사회가 지속될 수 있다. 이를 해결하려는 국가단위의 시스템을 현대적 의미에서 복지의 사회안전망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수 차례의 산업적 혁명과정을 통하여 인류의 노동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지고 기본적으로 의식주의 수요를 해결하면서, 이제 추가적으로 진행되는 생산(경제)활동은 역사의 흐름이라는 시간적 요소와 더불어 사회와 정치적 관계구조 속에서 상대적이며 개별적으로 형성되는 수요와 연동하여 다양하게 전개된다.

현장에서 물물교환과 단순한 매매가 이루어지던 시대를 지나 근대에 이르면 위에 언급한 다양한 형태의 시장과 사회적 권력구조 속에서 집단적 공급과 수요의 균형적 만남을 통하여 시장가격이 형성된다. 이때 시장이라는 구체적 또는 추상적 공간에서 현상적으로는 수급상황과 한계효용의 논리에 따라 가격이 형성되지만, 실현된 가격이라는 현상 뒤에는 생산 및 공급의 수단과 유통망 기반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형성된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권력구조가 실제적인 힘으로 작동하게 된다.

현대의 대부분 경제학자들은, 알프레드 마샬이 제시하였듯이 일군의 공급과 수요에 의한 균형에 의해서 합리적으로 시장가격이 형성되고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규정된 인간들에 의해 한계효용적이고 판단논리적인 행위에 의해, 기존에 형성된 가격선이 수학의 법칙처럼 이동한다고 곧이 곧대로 믿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시장가격과 변동은 사회평균 생산력에 의한 노동가치에 기반하되 혁신적 기제와 더불어 사회구조와 세력간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에 더하여 체제의 주류집단이 주도하는 미디어 매체의 홍보와 문화적 환경 속에서 개별적 집단적 심리 욕구가 인위적으로 형성되면서 소비자들로 하여금 의도하지 않은 수요를 촉발하게 만든다.

권력구조에 따라서 전개되는 시장 현실과는 별도로, 이론적으로 이상적인 조건하에 수급 균형과 한계적 효용가치 이론이 작동하는 시장경제에서는 매체 또는 공간이라는 장소를 통하여 재화와 서비스의 공급지를 확인할 수 있으며 가격을 매개로 실제적인 수요가 보내는 신호를 확인하면서, 일차적인 수요와 공급에 대한 정보와 균형의 기능에 더하여, 경제적 유효 자원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배분하고 결합시키는 역할과 기능을 갖게 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관점에 서면 20세기 전체주의적인 극우 파시즘과 극좌적인 스탈린 시대의 경제체제를 경험하였던 빈 학파의 미제스와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적 이론과 입장이 일면 타당하고 이해할 만한 것이다. 혹독한 시대적 경험을 겪은 빈 학파의 입장에서 보면 시장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핵심 사항으로 반드시 개인적 자유주의와 무제한적 사유재산권이 전제되어야 하며 국가의 역할을 상기 요소들을 보호하고 보장하는 것으로 제한해야 한다. 좀더 나가서는 인간의 자의적 판단을 배제하면서 시장에게 만능의 능력을 부여하여 신과 동등한 위치까지 올려 놓는다. 이제 시장 만능주의는 ‘반드시 시장에 복종해야 하며 다른 대안은 없다(TINA’)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발전해 나간다.

반면에 폴라니와 케인즈 등의 입장에 서면 자본가들의 지나친 탐욕으로 자유시장의 기능이 실패하고 독점의 폐해가 커져가면서 사유적 자본의 자기조정과 이익실현이라는 매카니즘이 망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을 무리하게 강행하여 한편에서는 과잉생산물이 누적되는 반면에 식민지를 포함하여 빈곤과 결핍으로 탈진한 시장의 과소소비 상황이 겹치면서, 이러한 공황적 상황을 정치권력의 강제이던 군사적 물리력이던 국가단위 또는 연합적 지역단위에서 폭력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으로 파시즘이 태동한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한마디로 파시즘은 탐욕 때문에 실패한 시장 기능을 강제적으로 작동시키면서 발생하는 반동적 현상인 것이다. 따라서 민주적 절차에 따라 시민들의 선택에 의해 위임된 정치적 강제력으로 잘못된 시장질서와 왜곡된 산업구조에 개입하고 수정을 시도하는 것은 정당하고 마땅한 일이다.

상기의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대치하는 가운데, 지난 백여 년간 경험을 통하여 되돌아 보면 시장기능과 시장경제의 역할은 결국 역사적 상황에 따른 사회적 정치적 관점과 입장의 문제로 다시 귀결된다. 마치 근대 정치철학의 출발점에서 공히 국가의 성립을 사회계약론으로 해석하면서도, 홉즈는 기존 질서의 권력자인 군주의 입장에 서고 로크는 신흥 유산자 계층의 편협한 이익을 옹호하는 논리를 전개하지만 루소는 모든 공민들의 참여와 합의에 의한 일반의지에 기초하여 근대적 민주주의를 주창한 역사적 경험을 되돌아 보게 한다. 판단의 기준은 ‘무엇과 누구를 위한 것 인가’ 이다.

이에 더하여 제3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제조업과 서비스업 간의 생산성 격차에 따른 보몰 효과가 나타나고 제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절대적 경제력에 의해 달러에 기초하여 형성된 기존의 통화시스템에 미국경제가 위축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비대칭성이 형성되면서 고전적인 경제와 통화의 이론에 괴리와 변종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무형재를 중심으로 하는 제4차 산업혁명의 출현과정에서는 기존의 시장경제 이론인 재화 및 서비스의 배타성과 경쟁의 논리 및 수확체감의 법칙 등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금융과 산업변천의 경제사를 오랜동안 연구해온 건국대의 최배근 교수는 최근의 저작 ‘위기의 경제학? 공동체의 경제학!’을 통하여 (기존의) 경제학은 없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에 의하면 현재의 경제적 위기는 지난 시기 공업화에서 벗어나는 탈공업화 과정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지 못하면서 과다하게 금융산업에 의존하게 되었고 위에 언급한 달러 중심의 통화시스템과 금융산업이 미국의 패권과 결합하고 세계화를 통하여 전지구적 불균형과 극심한 소득불평등이 확대를 거듭하면서 양극화의 위기 상황을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적나라한 현실이다.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최교수는 인터넷 망과 ICT 기술의 기반을 전제하는 미래적 사회에서는 탈물질적인 무형재를 중심으로 전개될 것으로 예상하면서 이러한 무형재적 미래의 산업에는 혁신적 창의성과 자율성이 가치창출의 핵심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존 경제와 산업의 영역에서 지배적 형태였던 소모적이고 경쟁적이고 배제적인 방식에서 탈피하고 데이터와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협력과 공유라는 새로운 방식과 논리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혁신 역시 협력과 공동작업을 통해서만 실현가능하고 가치창출방식과 사업모델에도 다다익선의 가치체증의 법칙이 작동하면서 이타자리(利他自利)형 경제 모델과 법칙이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교육 역시 타인과 경쟁적인 지식축적의 암기형에서 협력을 기반으로 더불어 함께 과제를 인식하고 문제의 해결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하며, 금융도 기축통화 중심과 중앙은행의 통제적 개입 방식에서 벗어나 블록체인과 플랫홈 공유를 통한 민주적이며 다원적인 시스템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기술하고 있다.

1924(1)

필자는 최배근 교수가 ‘공동체 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던지는 새로운 문제의식의 도전과 혁신적인 패러다임의 전망에 전적으로 지지하고 동의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을 보완하여 지적하고자 한다. .

우선 인간이 유기적 육체를 지닌 존재라는 조건으로 인하여, 자연재에 노동을 가하여 의식주의 수요를 해결하는 절대적 기초재와 인터넷 기반과 ICT 기술에 기반으로 새로이 형성되는 무형재를 구별하여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기초재 중에서도 의복은 대충 해결된 상태이지만 식량은 여전히 국가단위에서는 안보적 차원의 주제이고 개별적인 시민에게도 일상적으로 중요한 주제이다. 주거의 문제는 특히 투기가 극성을 부리는 한국사회에서는 사회 안전망으로서 복지의 핵심적 내용을 차지하면서 공공의 개입과 역할이 반드시 요구되는 영역이다. 양보할 수 없는 의식주의 전반적 영역에서는 고전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배타적 경합성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무형재 일반 역시 성격에 따라 섬세한 재분류가 필요할 것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 및 제공의 효율을 드높이고 자유의 가능성을 제고하는 역할이 있는가 하면, 제한된 인생의 시간을 사이버 공간에서 허비하고 무의미하게 하는 낭비성 또는 중독성의 문제를 야기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경제는 시장에서 표현되는 단순히 수치로만 평가해서는 안되며 인간적 삶의 가치를 고양하는데 주어진 역할을 하여야만 한다.

따라서 최교수도 언급하였듯이 경제학 또는 시장의 개념을 단순히 과거형으로 고전적 해석과 영역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이에 더하여 새로이 전개되는 조건과 상황에 응동하고 변화를 추구하고 내용을 확장하여야 한다. 마치 물리학에서 뉴톤의 법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그리고 또 다시 양자론으로 변신을 시도하듯이, 폴라니가 언급하는 복합사회(정치, 산업, 사회, 문화, 기술 등이 상호작용하는)속에서 조건과 상황에 따라 과거의 이론을 포괄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실험정신으로 접근해야 할 것으로 본다. 역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한 시장논리이고 누구를 향한 경제이론인가 라는 근본적 질문에 응답해야 하는 것이다.

인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과학과 기술이라면 이도 역시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강제를 통하여 개입하고 전향적인 방향으로 유도하여야 한다. 과학과 기술에 중립성은 없다. 지난 칼럼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인터넷 환경이라는 공유재와 이를 기반으로 하는 공유경제를 명확히 구분해야 하며 구글과 폐북 그리고 우버 등에서 경험하였듯이 설령 이들이 인류에게 보편적인 편이와 효율성을 제공한다 하더라도 기술 특성상 어마어마한 운용의 과정과 성과를 개인과 특정 기업이 독점하는 것에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따라서 공유기반의 소유와 운용의 과정에 공공적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며, 실현된 운용의 성과를 시민사회 또는 인류가 함께 향유할 때만이 명실공히 공유경제라는 용어를 비로소 부여할 수 있다. 지혜와 합의가 필요한 영역이다.

미래에 전개되는 산업사회에서는 로봇과 AI에 의해 대부분의 반복적인 육체노동뿐만 아니라 단순한 정신적인 판단과 관리업무도 대체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물론 진행 과정에서 새로운 직업과 일자리가 생기겠지만 숫자나 내용에 있어서 소멸되는 기존의 직업군을 모두 보충하고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점이 기존에 있었던 산업혁명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속도를 조절하여 실업의 충격을 완화할 수는 있겠지만 단기적인 해결책일 뿐이다. 기존의 산업과 체계에서 새로운 일자리가 자연스레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적 행위이다.

근본적으로 기존적인 계약방식의 전일적인 직업으로 받아들이는 일자리의 개념을 바꾸어 가야 한다. 많은 학자들은 자본제 이전에 있었던 자기실현적 자영 형태의 농업과 수공업이라는 오래된 과거에서 새로움을 찾고자 한다. 미래 사회에서는 시장과 기업의 요구사항 대부분이 사회적 역사적 노동의 축적된 형태인 과학기술로써 해결될 것이다. 기존의 방식과 다른 ‘새로운 일자리’라는 개념의 도입은 기존 복지체계의 재구성, 기본소득의 도입 그리고 조세체계의 대변화를 요구하는 매우 광범하고 중요한 주제이기에 추후에 다시 언급해 보기로 한다.

결론은 인간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복합적 공간으로서 시민사회가 만능적 시장의 일방적 지배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동물들은 자연의 법칙에 지배를 받고 진화하면서 살아 남았지만, 인간은 언어와 대화라는 방식으로 인위적인 합의와 협력을 통하여 역사를 이루어 왔고, 대자적인 질문과 성찰을 통해 누적된 지식을 기반으로 발전을 이루고 자유의 범위를 확대하여 왔다.

시장은 신이 만든 만능의 법칙이 아니라, 인간들이 일구어낸 매우 소중한 인공적 성과물의 하나이며, 따라서 시장은 시민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효율적 수단과 관계적 방식으로 작동해야만 한다. 시장이라는 이름과 논리로써 오히려 인간의 삶을 왜곡시키고 구속하려고 한다면, 정치적 영역에서 혁명을 일으켜서 폭군을 몰아내었듯이, 시장이라는 포장의 뒤에 숨어 있는 탐욕을 제거하고 기득권 체계를 전복시켜서라도 시장으로 하여금 시민사회에 풍요로운 삶의 조건을 제공하고 봉사하는 충복으로 역할을 다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시장은 인간사회에 봉사하는 유능하고 유용한 도구이어야 한다. 이것이 경세제민經世濟民이요, 제민지산制民之産의 요체이다.  2019-01-21.

목, 2019/01/24-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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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벽의 바람

이병한 선생님, 두 번째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먼저 편지를 쓰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는 말을 듣고서 저도 덩달아 기뻤습니다. 뭔가 답답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서요. 마침 엊그제 원불교대학원대학교의 김경일 총장님도 페이스북에서 비슷한 표현을 쓰셨더군요. “서구 근대문명이 들어올 때 위정척사나 개화파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동학류의 개벽에 대한 자리매김이 늘 고민이었는데 (『한국 근대의 탄생』을 읽으니) 이것을 풀어낼 단서를 찾아주신 것 같아 저도 가슴이 후련했습니다.” 아마도 전통(척사파)과 현대(개화파)라는 양분법으로 단절된 한국사상사에서 ‘근대’(개벽파)라는 연결고리를 찾으셔서 이런 표현을 쓰신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뭔가 막혀있는 지금의 상황을 뚫을 수 있는 사상적 실마리는 역시 ‘개벽’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성환 사진2 유상용선생님과
유상용 선생님과~

실제로 요즘 제 주위를 보면 여기저기에서 개벽바람이 불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한국 근대의 탄생』을 읽으셨다는 유상용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30년 동안 국내외에서 공동체운동을 하다가 개벽으로 돌아오신 분인데, 그 귀환의 심정을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고 계십니다: “나는 92년 이래로 정신과 물질이 고루 발달한 풍요로운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야마기시즘’을 현실사회에 실현하기 위한 실천과 활동을 지속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된 나의 ‘뿌리찾기’의 과정에서 시작된 탐구와 실천의 한 과정일 뿐이지 전부는 아니다. 뿌리찾기 과정에서 도착한 곳은 조선 정신의 용출인 개벽사상이었고, 그것을 사회화하기 위해 시도했던 것이 원불교사상을 기반한 새로운 사회 만들기였다. … 작년 말에 나는 다시 돌아왔다, <개벽>으로 -. 한국의 상황에서, 지금 여기로, 뿌리에서 올라오는 울림으로, 나의 느낌으로…”

이렇게 ‘다시 한국’으로 귀환하신 분과 원광대학교에서 6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30년 동안의 체험과 실천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으로부터 개벽학과 관련해서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가령 동학은 일종의 한국인의 사상적 뿌리찾기로 해석할 수 있고,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개벽적 주체의 정립이며, 한살림은 생산성 중심의 과학농업에서 철학에 기반한 인문농업으로의 전환을 시도한 운동이다 등등… 유상용 선생님도 며칠 뒤에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리셨더군요.

“요즘 동학‧증산‧원불교 관련 글들을 읽으며 그 때 선조들의 바람은 무엇이었는지, 시대적 과제와 자각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많이 읽고 떠올려 보았다. 특히 최제우 선생은 조선과 동양의 몰락을 감지하고, 유학이 당면한 과제를 알고, 기독교-서학의 내용이 의미있다는 것을 이해한 후에, 유학이 현상의 관찰에 머물러 초월을 몰랐고, 서학이 초월을 인간 밖에 두어 외화되었다고 판단하고서, 스스로 기도를 통한 초월적 체험을 시도하여 새로운 길을 열고, 양쪽의 모순을 극복한 ‘내안의 하느님을 모시는’ 시천주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전에도 비슷하게 생각했었지만, 조선 문명의 절실한 과제의 해결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이해하니 더욱 선생과 선조들의 마음이 가깝게 느껴진다.”

탁월한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초월의 문제와 관련해서 동학의 입장에서 유학과 서학의 한계를 지적한 부분은 왜 개벽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사상사적으로 정확히 짚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분들의 도움을 받으면 이 시대에 필요한 개벽학을 정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날 유상용 선생님의 소개로 마침 익산에 오신 이남곡 선생님도 함께 만나뵐 수 있었습니다. 30년 전에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감옥에서 나온 뒤에 어느 사찰에 들어가서 「혁명에서 개벽으로」라는 글을 쓰신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벽’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냐고 여쭤봤더니 “밝음을 창출하는 에너지”라는 한마디로 명료하게 정의해 주셨습니다. 어둠과의 싸움이나 정치적 투쟁이 아니라 “자기 안의 밝음을 신장시키려는 노력”이라는 것입니다.

순간 저는 한국의 전통적인 ‘신명사상’과 장일순 선생의 ‘보듬는 혁명론’이 떠올랐습니다. ‘신명’이 바로 ‘밝음의 에너지’이고, ‘신명난다’는 말은 “밝은 기운이 나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투쟁이나 저항의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전환시키는 길은 밝음의 에너지로 상대를 보듬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남곡 선생님이 작년에 『논어: 삶에서 실천하는 고전의 지혜』의 개정판을 내셨다고 하는데, 이런 마인드로 『논어』를 독해하셨다면 저로서는 일종의 『개벽논어』와 같은 느낌이 듭니다.

 

2. 창조성과 도덕성

선생님의 편지에서 두 번째로 인상적이었던 점은 “정신을 개벽하여 물질을 개벽하자!”는 역발상입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정신개벽은 ‘서구중심주의’로부터의 탈피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최제우가 ‘중국중심주의’로부터의 탈피를 ‘다시 개벽’이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종래의 성학(聖學)을 술(述)하지 않고 동학(東學)을 작(作)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한국 근대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적어도 사상사적으로는 이렇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중심주의나 민족주의로 나가자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 모든 ‘중심주의’로부터의 탈피가 정신개벽이라고 생각합니다. 뭔가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지요. 천도교나 원불교 경전에서 마음/정신의 최고 상태를 ‘자유심’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로운 마음/정신 상태가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새로운 생각, 새로운 학문, 새로운 동학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다고 봅니다. 뭔가에 얽매여 있는 상태에서는 새로움을 창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움’이 바로 이남곡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밝음’이나 한국사상에서 말하는 ‘신명’ 그리고 선생님이 말씀하신 ‘유레카’와도 상통하고요. 아울러 이렇게 정신이 개벽되면, 즉 정신이 자유로워지만 창조적인 주체가 될 수 있고, 이렇게 창조성이 발현될 수 있을 때 새로운 물질개벽의 차원이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이 ‘창조경제’이고, 인문디자인의 관점에서 본 정신개벽과 물질개벽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해석입니다.

조성환 사진2 새교포럼 박맹수 강연1
세교포럼 박맹수 강연(왼)

물론 정신개벽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자각하여 구세하자”는 자각정신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지난주에 창비빌딩에서 있었던 세교포럼에서 원광대학교 박맹수 총장님이 “문명전환기에 다시 보는 한국근현대사상”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셨는데, 이에 대해 세교연구소 고문이신 백낙청 교수님께서 이중과제론적 입장에서 코멘트를 하셨습니다. 원불교에서 말하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슬로건의 의의는 이 시대를 물질개벽, 즉 자본주의의 시대로 설정하고 그것에 대한 정신적 대응으로써 정신개벽을 주장했다는 데에 있고, 그래서 원불교에는 근대적응(물질개벽)과 근대극복(정신개벽)이라는 이중과제가 다 들어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이 한마디에 그동안 말로만 듣던 백낙청교수님의 이중과제론의 내용이 명료하게 들어왔습니다. 아울러 원불교의 개벽론이 지니는 현대적인 의미도요. 물론 개인적으로는 “물질개벽=자본주의”보다는 “물질개벽=과학혁명”이라고 하는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과학혁명과 자본주의가 현실적으로 맞물려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강같습니다.

저는 이런 의미의 정신개벽을 나타내는 말이 개벽파가 주장한 ‘도덕’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월 최시형이 말하는 ‘도덕문명’(『해월신사법설』「기타」)이나, 소태산 박중빈이 말하는 물질문명과 대비되는 ‘도덕문명’(『대종경』 「교의품」 32장)이 그러한 예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정신개벽이라는 말에서 도덕성과 창조성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읽어내고 싶습니다. 도덕성이 원 문맥에 충실한 개념이고, 선생님이나 백낙청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자본주의라는 근대를 극복하는 정신적 태도나 삶의 자세라고 한다면, 창조성은 정신개벽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신을 개벽해서 물질을 개벽하자”는 선생님의 역발상에서의 정신개벽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성환 사진2 새교포럼 박맹수 강연2

 

3. 한국학과 신동학

마지막 부분에서 “동학을 연구하기보다는 신동학을 하자!”는 선생님의 제언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다만 제가 ‘개벽사’라는 사상사 서술에 집착하는 이유는 역사에 대한 인식이 우리의 실천을 결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실천이나 현장을 우선시하는 분들과 저 같은 연구자와의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학의 틀을 바꾸고 싶습니다. 척사와 개화, 유학과 서학에 치우친 한국학에서 ‘척사-개화-개벽’이 천지인(天地人) 삼재처럼 균형이 잡힌, ‘유학-서학-동학’이 삼발이처럼 정립된, 그런 한국학을 그리고 싶습니다. 유학이 동아시아라는 전통적 배경이고, 서학이 세계라는 현대적 환경이라고 한다면, 동학은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재적 풍토입니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소외되고 무시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 현재적 풍토는 잊혀지고 무시된 감이 있습니다. 그것이 개벽이라는 근대였습니다. 이 폄하되고 경시된 한국적 근대에 대한 기억을 복원시키는 일이야말로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균형잡힌 한국학이 정립되지 않으면 실천도 방향을 상실하리라 생각합니다. 개벽의 근대를 제외한 유학 중심의 ‘전통과 현대’라는 틀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제 입장에서는 “동학을 연구하는” 것도 일종의 “동학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에 『한국 근대의 탄생』의 출간을 인연으로, 한평생 실천현장에 몸담고 계셨던 실천가들을 만나 뵙고, 아울러 선생님과의 만남으로 자극을 받고서, 저도 비로소 실천에 대한 필요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도 새로운 ‘자각’이 생겨난 셈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25년이 문헌연구-사상연구에 치중했다고 한다면, 앞으로의 25년은 실천현장에 계셨던 분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새로운 ‘학’의 정립과 실천에도 힘을 기울이고 싶습니다.

 

4. 언어의 한계

마지막으로 맨 처음에 제기해 주신 ‘일본의 개벽’이니 ‘토착적 근대’에 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이번 답장을 마치고자 합니다. 당연히 지적하신대로 일본의 개벽파를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에는 개벽파라고 할만한 운동은 희미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기타지마 기신 교수님도 동의하시는 바입니다. 다만 우리와 같은 개벽의 흔적이 있는지를 찾고 싶었고, 그것이 안도 쇼에키와 같은 사상가가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코 한국 개벽의 원형이나 시작이 일본에 있었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동학=개벽’의 가장 큰 사상사적 의의는 중국적 성인질서로부터의 탈피인데, 이런 주장을 안도 쇼에키가 이미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안도 쇼에키는 사회운동의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이것이 한국과 일본의 가장 큰 차이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관점이 제가 ‘근대=자본주의’와 등치시킬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세계’의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한국’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입니다(물론 한국은 세계 안에 있지만요-.). 그래서 근대의 기준이나 내용을 규정할 때에도 저로서는 중국(유학)과의 관계가 중요해지고요. 마치 서양 근대가 중세(신학)와의 관계 속에서 나왔듯이 말입니다. 단지 관점이 달라서 표현이 달라질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본의 개벽’이라는 표현은 ‘한국의 근대’라는 표현과 유사하게 생각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즉 modern의 번역어로서의 ‘근대’라는 말을 한국의 ‘개벽’을 설명하기 위해서 차용해서, 그 상대적 특징을 드러내기 위해서 ‘영성적 근대’니 ‘자생적 근대’라는 말을 썼듯이, 이번에는 반대로 한국의 ‘개벽’과 유사한 현상을, 즉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이라는 현상을 일본사상사에서 찾아서 적용해 본 용어입니다. 그래서 서양의 근대와 한국의 근대의 내용이 완전히 일치할 수 없듯이, 한국의 개벽과 일본의 개벽도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토착적 근대’니 ‘비서구적 근대’니 하는 용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시기에 굳이 ‘토착’이니 ‘비서구’니 하는 용어를 쓸 필요가 있느냐는 문제제기에는 충분히 공감합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적인 용어에 불과합니다. 서구중심주의를 상대화시키기 위해서요. 가령 김치가 한국의 토착음식이라고 할 때, 김치의 재료나 요소가 한국에만 국한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해외에도 김치가 보급되고 있는 상황에서 김치가 한국만의 음식이라는 뜻도 아니고요. 다만 김치라는 음식이 나온 고장이 한국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존재론적으로는 모든 게 연결되어 있지만요. 토착적 근대니 비서구적 근대라는 말도 이 정도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우려하는 것은 보편이니 지구화니 글로벌이라는 말에 의해서 놓칠 수 있는 한국이라는 로컬이나 지역이나 특수성이었습니다. 이것은 제 전공이 한국사상사이기 때문에 강조되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오랜만에 개벽에 대해 쓰고 나니 가슴이 후련해졌습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개벽에 대해 호응해 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힘이 납니다. 선생님을 비롯하여 여러분들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금, 2019/01/25-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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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강원도 화실로 들어오는 길에 반계리 은행나무를 보러 갔다. 1년 중 시월이 맘 때면 꼭 가서 만나고 싶은 나무다. 천 년을 살아온 이 은행나무는 가을이 되면 잎이 노랗게 물들어 장관을 이룬다. 나는 이 나무 앞에 서서 두 손 모아 묵시로 노래 했다.

 

천년 나무 앞에서.

오전 내내 내린 비에도 안 떨어지네.

노랑 은행잎은 비바람에 지지도 않고

자기 때를 맞추어 지게 하려나 보다.

천년이 가도 의연한 은행나무여.

귀귀형용한 가지들마다 세월 비바람 사연들 다

받아 새기며 하늘 향해 두 팔 벌리니

나는 마침내 시월 상달에 대지신의 빛을 보았다.

노란빛으로 맞이하는 천신의례를 하노라.

여기 강원도 초입 문막의 신목은 따로 없구나.

반계리 천년 은행나무가 우주목이고 당산목 일세.

두 손 저절로 모아 모시나니

천년을 더 사시며 이 땅을 빛내소서.

자랑스런 새나라 새 땅 새사람 중원에서 빛나소서

칼럼_181102
문막읍 반계리 은행나무, 수령 1000년은 족히 되었다. 매년 10월 중순이면 잎이 노랗게 물들어 더욱 장관을 이룬다. 나무 높이 40미터, 둘레가 열명의 사람들이 팔을 벌려서야 겨우 잡힌다.

 천 년이 지나도 싱싱한 나무로 살아있는 반계리 은행나무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는 것이 천 년을 넘게 살면 경이롭게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천 년을 내려온 사실에 대해선 눈길을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당장 보이는 것만 믿으려는 시대에 살기 때문인가 보다. 하지만 우리겨레는 천년을 넘게 이어온 문화가 많다.  장맛 발효음식, 온돌, 옹기, 금관, 굿, 풍물, 탈춤, 상두소리, 국악, 고구려 붓그림, 민화, 단오굿, 마을신화, 농요….. .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나열은 그만하고 천년의 무형문화가 우리 겨레의 뿌리문화가 되어 오늘의 현대 한국대중문화까지 영향을 주는 사실만은 확인하고 싶다. 우리겨레의 뿌리문화를 한마디로 특징을 말할 순 없지만 대체로 영성이 깊고, 신명이 나고, 한의 정서가 깃들고, 정이 많은 모성적 문화란 점은 그 동안 한국학에서 누누이 밝혀온 것들이다. 이런 문화를 한국의 심층문화라고 부른다. 전통문화는 시련의 역사 속에서 이렇게 ‘풍진 속 초탈’로 다져져 왔다.

 

이 심층문화는 아직도 충분히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정상적인 교육제도로 정착되지도 않고 헝클어진 채로 있다. 최근에 와서 민족문화 중흥이라는 헌법정신 차원에서 일부가 우대 보존되는 것 같지만 편의적인 발상으로 선별된다. 만일 정상적인 문화강국의 정책이 일관성 있게 펼쳐진다면 한국문화의 세계화니 한류니 민족문화 수립이니 하는 것들에 장기적 계획과 비젼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심층문화는 홀대 당하여 비주류문화로 갇혀 있다. 그나마 심층문화를 창조력으로 끌어 올리는 민간인들 덕분에 한류는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 한 복판에 예술인들과 전통장인들이 있다. 오늘은 한류의 성공적 사례로 꼽히는 BTS(방탄 소년단)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BTS는 한류문화의 세계진출 사례 중 가장 성공적인 경우로 꼽힌다. 유튜브 하루 조회수만도 4500만명이라는 신기록을 만들었고 미국 빌보드 챠트 2년 연속 1위를 차지하였다. 그들의 공연을 보러 수천명의 미국민들(주로 소녀들)이 며칠씩 탠트를 치고 4회 연속 8만명을 관람을 기록하며 트유터 팔로워 16000, 유투브 조회수18000를 기록할 정도다. 그 의 노래는 이제 유럽 거리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노래가 되었다. 이건 일본 중국 노래가 한번도 그런 적이 없는 사회에서 이제는 서구유럽의 주류음악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틀즈의 팝음악이 서구유럽의 음악문화를 바꾼 것과 맘먹는 성공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비 영미권 음악이, 가사도 한국어를 사용하는 노래로 서방 주류 음악방송을 타지 않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일인가? 그 이유를 찬찬히 찾아보자.

 

  1. BTS는 주류 언론과 방송 루트를 타지 못했다. 한국3대 메이저 음반회사에 끼어야 겨우 세계로 진출하는 구조인데 돈도 없는 방탄소년단은 유튜브를 활용했다.
  2. 유튜브에 팬덤을 형성하였다. 이는 열성팬들 인데 주로 세계 곳곳의 소녀들이다. 유튜브 조회 하루 사이에 4500만명을 조사해 보니 세계 곳곳에 골고루 널리 퍼져 있다. 주류 방송 체널을 무시하고 SNS로 일대일 소통을 하는 미디어로 꾸준히 영향을 넓혀 마침내 세계적인 주류음악을 창조했다.
  3. 음악적으로는 사우스 아프리칸 비트 음악 위로, 국악 장단과 탈춤과 추임새가 곁들고 트랩 구룹의 랩을 최신 유행의 EDM 리듬 소스가 받쳐준다. 아프리카 댄스 구아라구아라와 한국 춤이 섞이고 사바나와 북청사자놀이 이미지, 서브 컬쳐 그래픽 효과와 유라시아 건축과 한국건축양식이 섞여 백 이미지로 작동한다.- 방탄소년단 앨범 소개 글에서.
  4. 이 열성팬은 아미(ARMY)라고 명명하고 방탄소년단 측이 직접 소통하고 관리하며 관심을 저버리지 않는다. 댓 글로 반응 해주고 콘서트장에 초대장도 보내주고 생일 축하해 주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직접 팬들과 소통을 한다.
  5. 아미들은 스스로 고립을 벗어나 스스로 동아리들을 구성하고 끼리끼리 이벤트를 만들어 BTS의 메시지를 공유하고 음악 행동에 참여하고 사회적 행동도 취한다. 이제는 세계시민들에게 위로와 치유의 영상음악이 되었다.
  6. BTS는 단순히 노래만 잘하는 것이 아니다. 노래가 춤과 영상과 어울려서 종합예술을 만든다. BTS 뒤에는 스텝의 협업이 돋보인다. 작사 작곡 영상제작 안무가 유기적으로 결합해 있는 데 가사가 특히 십대 소녀 소년들의 갈망에 부응한다. 영상은 환상적이며 칼춤이라고 할 정도로 집단적 카르스마와 리비도로 넘쳐난다.
  7. 서구인들의 반응들을 보자. BTS영상을 보면서 “걸리쉬하다, 뱀파이어다, 이런 집단무용은 처음 본다, 하나의 잘 짜여진 축제 같다, 축제기념 송 부르는 거 같다. 여러가지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 전자목소리와 진짜목소리가 혼재해, 라이브로 보고 싶다, 흰 호랑이와 불과 물과 폭풍과 모래 등 신화적 상징들을 영상에 잘 사용 한다, 나를 슬프게 하는 뭐가 있다”  갇힌 공간 속에서 웅크림과 거절의 몸부림, 절망을 넘어 해방의 몸짓들이 춤이 되고 이미지로 흐른다. 물론 랩과 힙합과 아프리카 토속춤과 탈춤이 혼재되어 있다. BTS의 미학은 동서고금의 축제미학이 화려하게 섞여 있으나 자기들이 주장하려는 메시지가 분명한 축제로 젊은이들의 해방을 노래한다.             
  8. BTS는 “저는 여러분의 희망이고 여러분은 저의 희망입니다.” 팬들과 늘 일체감을 강조한다. 세계의 젊은 소녀들의 현실과 미래의 심리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고 파고 든다. 젊은이들은 BTS를 보고 ‘나를 슬프게 하는 뭐가 있어서’ 그들 스스로 뭔가를 찾게 한다. 그것은 기성사회와 다른 심리적 전선을 치게 한다. 억압으로부터의 초월, 억압의 초월이다. 전자는 역사적 혁명이고 후자는 예술적 해방감이다. 미래에 ‘역사적 혁명’으로 진화 할지는 미지수 지만 ‘촛불혁명’이 필경 배경일 것이다.
  9. 동아시아3국의 다른 나라 청년들과 다르게 자유와 해방의 몸짓이 격렬하며 어딘지 슬픔과 격조(유럽 청년의 표현에 의하면 매너)가 느껴진다. 서구유럽 청년들이 유독 동양 삼국 중에서 한국의 아이돌을 좋아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21세기 불확실성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미래가 막막한 세계의 청년들에게 세계의 정치 경제 체제는 아무런 답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사랑도 불안하고 더군다나 청년이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지 매우 불안한 시대이다. 한국 사회만 삼포세대니 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의 불안한 미래는 세계사적 현상일 것이다. 여기에 젊은 예술가들이 빛을 밝힌 것이다. 세계청년들에게 심리적 위로가 되는 가사와 희망의 노래와 초월적 이미지로 K-pop의 새 경지를 보여준다. 프랑스 미국 라이브 공연에서 아미들이 보여준 공연이 끝나고 마지막 보여준 모습은 눈물이었다. 이 눈물의 의미는 후회와 성찰의 눈물로 보인다.

 주류사회에 방해 받지 않는, 무한대로 열려있는 SNS를 수단으로 해서 세계의 젊은이와 직접 소통에 성공하고 있다. 한국이라는 시대적 특수성이 국가 경계를 너머 젊은 상상력으로 모이고 예술로 형상하여 가상적 현실을 이룬다. BTS의 가상현실- 유비코터스는 젊은이들의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청년들 스스로 만들어온 유비코터스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다. 20년전 ‘붉은 악마’ 현상은 국가주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였으나, 이제는 발달된 SNS로 국경을 너머 세계의 젊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젊은 슬픔’을 극복하려는 힘이 결집하고 있다. 국가와 기성사회의 체제와 이념으로도 못 말리는 젊은이들의 신세계를 찾는 신성한 힘이 느껴진다. 방탄소년단과 아미는 현대신화를 창조하고 있었다.

 

 신화학을 집대성한 신화학의 거장 조셉 켐밸은 무수한 저서를 남겼다. 하루는 제자가 “선생님, 선생님은 신화 이야기를 책으로 많이 쓰셨는데, 신화란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인가요?” 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신화는 신성한 힘입니다.”

 

 이 답변을 주목한다. 신화학은 20세기 인문학을 다시 종합 정리하는 21세기 인문학으로 포스트인문학이다. 20세기 인문학이 주제별로 쪼개고 쪼개서 분할 시키고 나니 인간, 자연, 우주의 유기체적 관계를 망실한 인간 중심적 학문이 되었다. 그것도 엘리트들의 아카데미즘으로 박사들만 양산시키며 세상을 하나로 보는 관점을 잃은 이기적 인간중심주의를 만연시켰다. 모든 인문학을 융합한 신화학에 와서 이 이기적 인간중심주의가 깨지기 시작한다. 선사시대 신화를 독해해봐도 그렇고 오늘날에 와서도 신화는 살아 있다. ‘신화는 신성한 힘이다’라고 한 것은 신화가 단지 과거 옛 이야기만 아니고 지금 내 안에도 있는 이야기다. 신성한 이야기라 할 적에 이것은 문학적 표현이지만 신화, 의례, 예술, 행위로 들어나는 신성한 힘을 다 뜻한다.

 

조셉 켐밸은 이어서 말한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는 행위야말로 신화다.” 오늘의 과학과 인문학으로 풀리지 않는 신성한 힘의 기적 같은 일은 얼마든지 우리 주변과 나에게도 있다. 그렇다면 종교가 말하는 기적과 영성은 무엇인가. 물론 이것들은 고대 신화시대부터 진화하며 각 지역의 큰 종교로 변화하며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종교가 신성한 힘을 독점하면 할수록 그 ‘신성한 힘’을 잃고 말 것이다. 자연과 인류의 모든 곳에서 발생하는 신화적 현상을 종교가 철기시대 빅갓(Big God)시대를 지나면서 지배적 독점을 한 결과 배타적 도그마 현상을 갖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과 한 짝을 이루어 제아무리 바꾸려고 해도 종교적 도그마는 해체되지 않는다. 아마 국가주의와 운명을 같이 할 때까지 ‘그들만의 종교’가 된다. 그래서 신화학적 관점으로 보면 오늘의 문화를 네 가지로 분류한다. 그들만의 신화를 갖고 사는 사람, 신화를 버린 유물주의자, 신화를 잊고 사는 세속주의자, 다시 신화를 갖는 자. 즉 재신화적 인간으로 분류한다. 그렇다. 재신화적 인간형은 배타적이고 유일신화적 종교적 도그마를 벗어나 내 안에 신성도 살리고 우주적 신성도 모시는 문화다원주의에서 산다. 세계시민을 지향하는 탈국가주의적 평화시민의 문화다. 인류가 창조한 ‘유일한 믿음의 신은 없다, 자기들이 믿고 의지하는 다양한 신화(원형문화)가 있을 뿐이다. 인류는 다양한 신화를 창조했듯이 저마다 스스로 신화를 창조한다.

 

 미래의 인간형은 세계의 젊은이들이 BTS의 노래를 따라 부르듯이 “Love Yourself, Love Myself”에 기초하는 인간형 사회일 것이다. 20세기 산업사회에 개개인을 도구로 사용했다. 그런 인간형을 기르기 위해 경쟁력 교육을 시켰다. 자기 스스로 행복을 노래해도 모자랄 판에 자학과 열등의식에 젖게 하는 성적순위 교육, 산업 일꾼 교육, 애국교육이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긍정하며 오직 나에게서 만이 희망이 있다. 희망은 나에게서 발견하고 내가 창조하는 것이다. 거기서 신화를 창조한다. 신화창조는 자기를 긍정하고 사랑하는 자기 원형 에너지로부터 만들어진다. 신성한 힘을 벗겨버리고 거대한 신의 한낱 피조물이고 국가와 사회의 모범이 되는 시민이 되는 것을 젊은이들은 거부하기 시작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BTS가 국가를 너머 서구사회까지 진출해서 당당히 세계주류가 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현상이다. 세계 젊음의 반란은 과거처럼 이데올로기에 맹종하는 혁명의 전사가 아니라 ‘문화 아미’가 되어가는 것이고 자기들의 신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칼럼_181102(1)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서울공원에서 열린 강명구 유라시아평화마라톤 환영문화제, 2018년 4월17일 유라시아의 절반을 달려온 강명구 마라토너를 환영하는 소년소녀들이 김봉준 작가와 타슈켄트 시민이 제작한 평화그림 깃발을 들고 환영하고 있다. 이곳 중앙아시아도 K-pop과 한국문화를 좋아하는 청년들이 많다.

그렇다면 “종교가 한계를 들어 낸 오늘날 신화를 주력은 누구입니까?” 라는 물음에 조셉 켐밸은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예술가입니다.”

 왜 그런지는 이 글에서 상세히 말하지 않으리라. 앞으로 계속 이어지는 예술가란 무엇인지,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만 언급한다면 20세기가 이기적 인간중심주의 인본주의 시대였다면21세기는 포스트모던이즘의 다원주의시대로 간다. 감성과 영성이 리드하는 시대가 분명하다. 나의 행복은 내 스스로 찾지 않으면 안된 다는 시민적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다원주의다. 세계의 젊은이들 중심으로 반란은 시작되었다. 그 젊은 마음들 속에 BTS가 잠시 꽂힌 것뿐이다. 이 거대한 세계청년의 문화반란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며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을 사냥하면서 유비코터스를 형성할 것이다. 그러다가 어딘가 현실공간에서 청년의 창조도시라도 만들 것인가.

 20세기 기성사회가 스스로 개혁하는 힘은 상실한 것 같다. ‘거짓 사랑’에 염증을 느낀 21세기 소년소녀들이 문화반란으로 꿈꾸는 ‘행복한 세상’을 목도하는 세상까지 왔다. 그러나 이런 가상현실적 현상은 당분간 계속 될 것이다. 촛불혁명도 다르지 않다. 시민이 꿈꾸고 이루려는 유비코터스 같은 현장을 한겨울 맛본 것이고 도로 20세기 국가주의 제도 속으로 들어가며 적폐청산을 하는 둥 마는 둥하며 ‘역사는 점진적 개혁’이라고 변명할 것이다. 이렇게 휩쓸고 한 세대를 걸친 문화전쟁을 세계는 열풍처럼 볼 것이다. 나는 기성세대에 별로 희망이 없다고 본다. 그렇게 되어 먹으며 살라왔고, 거기다 집을 짓고 시스템을 만들어 살아왔다. 청년의 반란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신화를 잃어 버렸다. 자기를 창조한 신성한 힘을 버린 채 굳어졌다.

젊음만이 희망이다. 그러나 무조건 젊음만이 희망은 아니다. 저 천년의 은행나무 앞에서 비손으로 빌었다. 젊음이 보이지 않는 오랜 미래를 볼 적에, 예술에 그치지 않고 가상공간을 너머 현실공간에 초월적 상상이 창조도시로 뿌리를 내릴 적에 천년의 나무처럼 인류 미래의 희망의 싹이 나기를 빌었다. BTS 는 보여주고 있는 세계 청년문화는 집단무의식이 의식화하는 영성이 깊고, 일상을 축제화하는 신명이 나고, 한의 정서가 깃들어 있지만 슬픔을 이기고 나가는 매너 있는 젊음이 있고, 자유와 평화를 몸짓으로 외치며, 정이 많은 모성문화란 점들은 분명히 보인다. 신세계 청년문화의 비젼이 보인다.  BTS는 시련의 역사 속에서 ‘풍진 속 초탈’한 세계인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금, 2018/11/02-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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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의 영웅 너마저 ‘미투’를 외치고 있다. 그녀가 올림픽 스타이기 때문에 더 놀라는 것이 싫지만 스타마저도 당한다면 나머지는 오죽하랴라는 생각을 끌어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용기가 더 값지게 다가온다. 그녀가 스타의 신화와 눈부심으로 가려진 장막을 젖히고 민낯을 보여준 용기에 더 부끄럽다. 무대 전면만 보고 환호해 온 어른으로서 하루 이틀도 아닌 장기간의 ‘폭력’을 방치해 왔다는 공범 같은 느낌이 든다.

‘미투’와 ‘갑질’의 사례가 봇물 터지듯이 등장한다. ‘미투’를 외치는 비명은 ‘갑질’을 폭로하는 저항의 용기와 일맥상통한다. 한 끗발만 더 유리한 고지에 있어도 상대에게 무제한의 권력을 휘두르는 ‘갑질’은 ‘신분에서 계약’으로 이행했다는 근대사회의 논리가 허구인가라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왜 ‘미투’와 ‘갑질’을 함께 다루는 지 의아할지 모른다. ‘미투’의 문제를 성 대결의 특수성으로 잘 못 보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갑질’과 함께 다룬다. 그것은 사회발전의 지체가 응어리지고 곪아터져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건이 오랜 동안 잠복되어 왔던 사건들이다. 수면아래 잠자던 또는 ‘침묵의 카르텔’ 속에 봉인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만들어 준 작은 영웅들을 지켜주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내 아이를 위한 보호막을 일류학교 졸업장과 ‘갑질’할 수 있는 지위 획득이라고 생각하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가르쳐 왔다. 모든 사회문제에 눈을 감고 질주하라고 부추겨 온 어른으로서 젊은이들이 도처에서 마주치는 ‘갑질’의 폭력을 눈을 감고 외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갑을’관계는 모든 거래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설사 특정 상황에서는 갑이라고 해도 언제든 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갑질은 누군가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며 ‘사회문제’이다. ‘미투’와 ‘갑질’의 문제가 소송으로 귀결되고 있지만 해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연대’와 사회적 합의 그리고 공론의 구성이 필요하다. 법정에서의 사실의 다툼은 가치 판단을 해체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더 많은 폭로와 ‘함께’를 외치는 힘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일단 확인 시켜주는 의미도 있고 무엇보다 피해자에게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사막을 혼자 걷는 것과 누구라도 함께 걷는 것을 비교해 보면 ‘함께’가 주는 위안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면 예견된 일이었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유보해도 좋다는 사회적 묵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을 위해 권위주의 정권을 용인해야 한다는 담론이 오랫동안 정설로 자리 잡았다. 담론이 공론은 아니다. 냉전 속에 ‘열전’을 치르면서 ‘사회’ 또는 사회적이라는 단어를 금기로 만들었다. 1960년대부터 이어진 경제성장 중심의 담론은 정치발전의 과제를 미루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심지어 민주정권 통치 기간에도 정치 발전의 성패는 경제발전에 의해 재단되는 것을 수용하는 분위기다. 정치발전은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양보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만드는 담론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정치발전의 토대가 없는 상황에서 정치발전은 이익집단의 무한 경쟁, 정치적 대표성의 이름으로 다당제에 대한 예찬 등으로 이해되는 중이다. 민주화가 표현의 자유, 사유재산권의 신성불가침, 시장의 자유로 해석되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정책 결정의 공공성 구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정당 이름이 변화무쌍 하여 정당의 정체성과 당명을 일치 시키는 것도 어렵다. 당원자격이 주어지는 방식, 당원과 선출직과의 관계 등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이런 차원에서 정당 투표를 강화하려는 주장이 정치적 올바름인 양 제시되고 있다.

정치발전이 장기적인 집합적 저항을 통해 틀을 갖추어가는 반면 사회 발전의 과제는 ‘ 전통의 미화라는 가면으로 위장 되어 수면에 드러나지도 않았다. 법인의 성격을 띠는 회사가 주인 노예의 관계의 관행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학교에서는 근대적 가치를 가르치고 헌법에서도 기본인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사회관계는 봉건제 이전의 노예제적 성격을 지닌다. 이 불균형 속에 발랄한 21세기의 미래 세대가 갇혀 있다. 그들의 단말마적인 외침을 외면한다면 미래는 없다. 사회발전을 기초로 정치 발전과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는 서구 근대사와는 반대로 선 경제 발전 정치발전 그리고 장기간 유보된 사회발전이라는 기형적 구조 속에서 터진 아우성이 바로 ‘미투’와 ‘갑질’의 폭로로 드러나고 있다.

이 폭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외면하는 가운데 이 외침은 지속적이었고 그 울림은 새로운 규범을 지구촌 차원에서 만들어 낸지 오래다. 1992년 1월 8일부터 시작된 수요 집회가 이제 26년을 넘겼다. 한주도 거르지 않고 일본대사관 앞에서 이어진 전시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사죄요구는 국경을 넘었고 지구촌의 규범을 만들어 내었다. 전시 성폭력 문제가 국제 형사 재판소에서 반인권적 전쟁 범죄로 규정된 것이 2000년이다. 2000년 10월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가 결의안 1325를 채택하였다. 성폭력 피해자인 여성이 평화프로세스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지구촌은 21세기를 맞아하였다. 성폭력피해자가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지구촌의 침묵의 카르텔을 깬 것은 ‘살아남은’ 할머니 들이었다. 이 기간 동안 할머니들은 소녀가 되어 갔다. 할머니가 ‘소녀상’으로 바뀌면서 성폭력 피해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 싫은 입장에서는 소녀상을 치울 수 있는 물건으로 보았고 소녀상을 세운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기억해야할 역사였다. 어느 해 기록적인 한파가 찾아온 날 일본 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다. 영하 수십 도의 날씨에 일본 대사관 앞에서 소녀상을 철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천막을 치고 새우잠을 자고 있는 젊은이들을 보았다. 시대의 과제를 그 때 그 때 해결하지 못하고 미뤄온 어른으로서의 부끄러움이 앞섰다. 그 생생한 기억 속에 떨리는 듯한 미투의 외침이 겹쳐 들려온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일제 강점기를 다룬 영화 그리고 드라마가 등장하고 있다. 지난 100년의 반성의 끝자락에서 폭로된 ‘미투’와 갑질은 100년 동안 미뤄온 사회발전의 지체된 과제를 이행하라는 준엄한 명령이다. 이 명령을 외면하고 4차 산업의 화려한 어휘로 도피한다면 정말 우리에게 지속가능한 미래는 없다.

화, 2019/02/05-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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