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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에 그리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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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에 그리는 얼굴

admin | 목, 2021/04/29- 19:55

[후원회원 마당]

노을에 그리는 얼굴

최홍이 전 서울시 교육위원장

살아서 죽고 죽어서 산 천부의 아들
아무나 낯익은 타향
누구도 낯선 고향 노을에
약지 자른 왼손 낙관
그 유묵 그리며 마음 숙인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순국 111주년 오늘에
2021. 3. 26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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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시대 민족음악의 스승이셨던 노동은 교수님!
선생님께서 2016년 12월 2일 국민적인 애도 속에 우리 곁을 떠나실 무렵,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은 촛불시민혁명의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촛불은 마치 선생님께서 일생 동안 민족음악의 역사적 실현이란 과업을 이룩하고자 노심초사하시던 열망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민족적인 소망은 결실을 맺고 전기를 맞이하였으나, 선생님은 그 국민적인 승리의 합창을 듣지 못한 채 기어이 소천하시고 말았습니다.
민주화의 깃발 아래서 보다 자유롭고 넉넉하게 선생님께서 탐구해 오셨던 민족음악의 세계를 구축하실 수 있게 된 새로운 세상을 향유하시지 못한 채 떠나버린 선생님이시기에 저희들은 더더욱 안타깝습니다.
민족음악의 발전을 위하여 혼신을 다하셨던 노동은 교수님이시여!
선생님은 일찍이 음악이란 “인간을 위한 인간의 조직화된 소리”라고 정의하여, 음악을 전문 음악인의 전유물에서 모든 인간이 함께 즐겨 듣고 감동하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으로 풀이해 주었습니다. “음악은 국경이 없다”며, 베토벤이 너무나도 좋아 그의 머리를 흉내 내려고 미장원엘 다녔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좋아하던 베토벤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 예술을 고통 받는 인간들을 위하여 사용하겠다는 정열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면서 내적인 만족감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보상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국경이 없이 모든 ‘고통 받는 인간들’을 위로하고자 음악활동을 했다는 베토벤의 예술적 투지는 바로 노동은 선생님의 예술적 투혼이기도 합니다.
국경이 없다는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 굳이 민족음악을 강조하시며 일생을 민족음악의 구축에 심혈을 기울인 까닭은 바로 고통 받는 민족을 위로하고 용기와 투지를 북돋아 주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일찍이 이강숙, 이건용 선생님과 함께 ‘민족음악 연구자 3총사’로 맹활약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참다운 민족음악의 얼을 찾고자 작곡가 김순남과 정율성 등과 같은 격변기의 민족해방투사의 음악에 대한 연구와 보급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이어 선생님께서는 일제가 남긴 폐해에도 주목하여 친일음악과 왜색가요의 청산을 강력히 주장하셨습니다. ‘결혼행진곡’의 작곡자가 나치가 숭앙했던 바그너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곡은 물론이고 바그너 음악 전체를 연주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를 어기면 끝까지 추적하여 벌한다고 알려준 것도 바로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렇다고 선생님은 결코 폐쇄적이거나 배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피아노와 풍물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선생님이셨습니다.
나아가 “우리 문화 속에 이미 널리 스며든 뽕짝 같은 왜색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것조차도 우리 문화의 일부이므로 비판적으로 수용, 발전시켜 역수출을 해야 한다”고 우문에 현답을 내놓기도 하셨습니다. 피아노를 치며 노래와 강의를 겸하시던 그 열강을 이제 우리는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선생님은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민족음악사에 길이 남을 ????항일음악 330곡집????을 남겨 주셨습니다.
노동은 선생님! 선생님을 잃은 저희들이 슬픔을 딛고 그나마 위안을 삼는 점은 선생님의 유업들이 끊이지 않고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명진 사모님과 아드님 노관우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 그리고 우리 민족문제연구소가 힘을 합해 선생님께서 터 잡은 민족음악의 고귀한 과업을 이어 가겠습니다.
그러니 선생님, 이제 모든 염려 놓으시고 편안히 영면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삼가명복을 빕니다.

2017. 12. 9. 임헌영 올림

화, 2018/01/09-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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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 직후인 5월 15일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첫선을 보인 민족문제연구소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1 역적(역사적폐청산)’이 지난 9월 18일 ‘에필로그’를 끝으로 마무리 되었다. 연구소가 팟캐스트를 만든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역사적폐청산의 필요성을 알리고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연구소가 추진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을 홍보하고 후원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제작진과 집행부 단위에서 팟캐스트에 대한 평가작업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지만, 두 가지 목표에 대한 소기의 성과는 달성했다.
첫 번째 프롤로그부터 자체의 최대 예상치였던 1만 2천에 근접하는 다운로드 수치가 나왔다. 그리고 1주일 후에 공개된 1화는 1부와 2부를 합쳐서 11만 다운로드를 기록했고 그 다음주에도 10만 다운로드를 넘어섰으며 애플 팟캐스트 전체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홍보하는 역할도 톡톡히 했다. 여름특집 1편 ‘박주민의원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를 시작으로, 2편 도쿄 야스쿠니 반대 촛불행동 현장에 가다, 3편 항일음악 330곡집 북콘서트가 연달아 공개된 이후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건립을 지지하는 후원이 2배가량 증가했고 10만원 이상의 기부자(발기인)가 큰 폭으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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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기간이었던 1월부터 9월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1 역적’ 제작진-기획 박한용, PD 김세호, MC 노기환, 이게 실화냐 PD 임선화, MC 방은희, 촬영과 영상 편집 오경아, 음원편집 문영범 소닉스튜디오 대표- 모두 아이템 발굴과 원고준비, 게스트 섭외와 녹음/녹화, 편집과 검수, 업로드와 홍보까지 각자가 맡은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 연구소만의 특색있고 재미있는 주제를 가지고 시즌 2를 준비하고자 한다. 앞으로도 많은 성원을 부탁드린다.

∷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목, 2017/10/19-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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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통일의 집’ 방문기

최인담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사

 

안녕하세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여러분. 저는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한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사 최인담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연구소가 강북구의 요청으로 기념관을 위탁운영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요? 2016년 개관 이래 제가 이곳에서 일한지 어느덧 2년 이상이 흘렀습니다.
강북구에 문익환 목사의 사택으로 알려진 통일의 집이 있다는 사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가까이에서 근무하게 된 김에 빠른 시일 내 한번 가봐야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업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좀처럼 통일의 집을 방문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통일의 집이 공사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박물관으로 새 단장을 한다는 것이었어요. 박물관 건립과 운영을 위해 사단법인 통일의 집에서도 박물관 운영을 위해 연구소에 조언을 구하고자 기념관으로 연락을 준 적도 있었어요. 그래서 기념관 위탁 운영 과정을 상세히 전달해드리고자 연구소로 직접 연결해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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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7일, 다시금 ‘통일’이라는 말이 아주 가깝게 느껴진 날이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인 상황과 마주하게 된 것이죠. 아직도 그날 아침 사무실의 분위기가 생각납니다. 다섯 명의 직원들은 지금 이 순간이 훗날 오래도록 기념할 역사적 순간임을 직감했었는지 각자 앞에 놓인 모니터에 시선을 떼지 못했어요.
군사분계선에 선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는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모습은 어느 새 악수를 나누는 모습으로, 또 악수를 나누는가 싶더니 어느새 김정은 위원장이 천진한 모습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팔을 잡아끌며 야트막한 방지턱을 넘는 모습으로 장면이 바뀌더군요. 군사분계선이 마음속에 그린 상상의 것이었나, 이렇게 넘을 수도 있는 것이었구나 싶어 울컥했습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실감나지 않던 정상회담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날 이후로 사회의 많은 곳에서 변화가 일어났음을 실감해요.
그리고 지난 6월이었습니다. 통일의 집이 박물관으로 새롭게 단장하고 관람객을 맞아들인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박원순 서울시장과 배우 문성근 씨가 손님을 맞이하는 사진도 몇 편의 기사를 통해 접했지요. 그로부터 며칠 뒤 강북구청의 담당 주무관이 기념관을 직접 방문했어요. 주무관은 통일교육원장이 새로 부임하면서 강북구청과 서로 만나기로 했대요. 이를 발판삼아 강북구가 ‘통일’을 주제로 근현대사기념관과 연계하여 역사체험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도록 도움을 구하는 것이었어요.
사실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이래 통일교육원에서 교육을 받는 수강생들이 기념관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지만 공식적으로 교육프로그램을 공유한 적은 없었거든요. 또 기념관에 전시 해설을 요청하신 적이 있지만 통일교육원의 교육프로그램의 주제와 맞지 않아 지속적으로 교류가 이어지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강북구와 근현대사기념관과 통일교육원이 서로 연계하여 통일교육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요!
그간 근현대사기념관은 기념관 인근에 있는 애국자시 16기의 묘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살려 시민들과 청소년 교육프로그램을 활성화하고 있었어요. 근현대사기념관에서 도보로 10분 이내 갈 수 있는 초대 제헌국회 부의장 신익희 선생 묘역, 1세대 검사 이준 열사 묘역,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선생 묘역, 초대 국군이라 할 수 있는 광복군 합동 묘역,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 묘역을 1시간 시간 코스로 둘러볼 수 있는 ‘초대初代길’은 근현대사기념관을 찾는 중고등학교 학급 단위의 단체관람객에게 매우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념관 설립 단계부터 민족문제연구소는 통일교육원과 국립4·19민주묘지 그리고 통일의 집을 염두하고 기념관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량으로 통일의 염원을 실현하는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2016년 8월, 광복 71년주년을 맞아 시민들의 소중한 모금과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의 회비로 후원한 독립민주기념비가 세워질 당시 기념비의 의의는 독립과 민주 그리고 통일을 기념하고 염원하는 조형물을 세우는 데 그 목적이 있었어요. 지난 10년간 냉각된 남북의 분위기에도 통일이라는 염원을 잊지 않은 연구소의 바람도 근현대사기념관의 전시와 독립민주기념비에 고스란히 녹아있었습니다. 그러던 찰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저에게 통일의 집 방문기를 써달라는 요청을 하셨어요. 아, 이제는 정말 통일의 집 방문을 미룰 수 없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2018년 7월, 여름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이었습니다. 근현대사기념관에서 통일의 집까지 걸어가는 데는 작은 골목 사이 최단거리로 15분 정도가 걸리더군요. 국립4·19민주묘지 앞을 거쳐 큰 길로 간다면 30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통일의 집 앞 골목까지 이정표가 있었는데 눈에 잘 띄지 않아서 50m 정도 지나치기도 했지만 이내 훤한 대문으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박물관과 만날 수 있었어요.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문익환 통일의 집 개관전이 열린다는 커다란 플래카드도 볼 수 있었어요. 반쪽 문이 열린 대문으로 총총 계단을 올라가니 소담한 정원이 펼쳐지더라고요. 뒤로는 야트막한 산자락이 펼쳐진 빨간 벽돌집은 문익환 목사와 가족이 1970년부터 살던 집이라고 합니다.
1994년 문 목사가 세상을 떠난 후 부인 박용길 선생님께서 ‘통일의 집’이라는 현판을 걸고 일반에 공개하면서 알려졌다고 해요.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고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시민들의 성금으로 집을 복원하였으며 2018년 6월 1일 박물관으로 재개관하였어요. 지금은 문익환 목사가 남긴 유품과 글, 서한 등 귀중한 근현대사의 자료를 보존하고 평화와 통일을 꿈꾸는 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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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하기 전에 안내판을 꼼꼼히 읽고 화단을 한번 둘러보며 숨을 가다듬었고 있노라니,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순간적으로 저는 문익환 목사 댁을 방문한 손님이 된 기분을 느꼈어요. 문영금 통일의 집 관장님은 문을 열고 친히 슬리퍼를 내어주시며 손님을 맞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둘러보는 시간을 가지시라며 관람객을 배려해 주셨어요.
거실로 들어서자 “너른마당”이라는 글자가 적힌 액자가 눈에 띄었어요. 문익환 목사의 글처럼 오래 된 피아노와 문익환 목사의 사진과 그림이 벽에 걸렸으며, 문익환 목사를 주제로 한 다양한 책들이 거실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아담한 거실에 둘러앉아 벗과 덕담을 나누는 어떤 순간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관람객을 배려한 작은 의자와 방석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아들방에서는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문익환 목사의 생애를 담은 영상을 볼 수 있었어요.
윤동주, 장준하와 같은 역사 속 인물들과 교류하며 보편적인 말과 진실함으로 사람들 한가운데 서 있으며, 김일성 위원장과 포옹하는 장면이 나지막하면서도 힘 있는 육성과 함께 지나갔습니다. 그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해방의 혼돈을 거친 젊은 청년이 종교에 헌신하면서도 민주화운동의 거목이 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느낄 수 있었지요. 특히 인상적이었던 유물은 박용길 선생님이 모아놓은 남편의 수인번호였어요. 생애 중 10여 년 이상을 춥고 고달픈 곳에서 투쟁해 왔는지를 알 수 있었지요.
다음으로 기도방은 한가운데 자그마한 탁자가 놓여있었어요. 이곳에 앉아 기도하는 목사님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다음으로 안방으로 가는 복도를 두고 널찍하고도 깔끔한 화장실이 사용한 흔적 그대로 남아있었어요. 복도 벽면에는 문익환 목사의 청년시절, 신학자의 삶, 수감생활, 방북의 과정을 지도와 연표, 사진으로 보여주는 그래픽 패널이 있었어요. 좁은 집을 전시실로 알차게 활용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안방으로 들어서니 붉은 벽돌이 노출된 천장 일부가 눈에 띄었어요. 관장님께서 함께 둘러보시며 원래 복도에서 끝나는 집을 안방 방향으로 집을 증축하면서 가려져있던 굴뚝을 이번에 노출시켰다고 하셨어요. 마당이 훤히 보이는 안방은 문익환 목사의 자필 편지, 성서 연구 노트가 가지런히 진열장에 정리되어 있었어요. 생전에 그가 읽던 책은 성서부터 역사서, 시집 등이 벽면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습니다.
그렇게 박물관을 둘러보고 문영금 관장님과 너른마당에 앉아 담소를 나눴어요. 관장님께서 제게 전시를 어떻게 보셨는지 물으시며 말씀하셨어요. 원래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니께서 통일의 집을 개방했을 때는 아버지의 유품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많은 물건들을 최대한 보여줄 수 있도록 배치하셨대요. 그러다 박물관으로 단장하면서 전문가의 의견에 따라 바꾸다보니 배치할 수 있는 물건이 줄어들어 아쉬움이 남는다고 하셨어요.
그렇지만 이 공간은 문익환 목사가 살았던 집을 고스란히 복원하고 그 안에 그의 생애와 그 시대의 치열함이 녹아있는 유물들이 놓여있어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을 살리고, 또 다른 공간에서 얼마든지 특별전을 개최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소장 자료를 가지고 계시니 그것을 활용할 수 있으면 의미 있는 공간이 될 것 같아 앞으로 더욱 기대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남과 북이 평화를 약속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은 이때, 박물관에 걸린 ‘남누리 북누리 한누리 되도록’ 이라는 글처럼 통일을 향한 염원이 한데 모여 천천히 평화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목, 2018/08/02-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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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자료]

심정섭 지도위원 제60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50점 보내와
10월 25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0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발행한 우편저금통장, 보험증서가 주를 이룬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자료 기증 잇달아
10월 19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의 히구치 유이치 공동대표가 연구소를 방문하여 1950~60년대 소책자와 ????民族時報????등 총 18점을기증했다.아울러11월 14일 우편으로 소장자료 5박스를 기증했는데, 주로 일본의 과거사 청산운동과 인권운동에 관한 자료로 전단, 포스터, 뉴스레터, 전단지 자료 등이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 제5차 일본 교류관계의 소장자료 전달
일본에서 수화 통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회원이 이번에도 교류단체와 개인의 소장자료를 전달받아 11월 20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1941년 태평양전쟁 등 관련 기사가 실린 일본의 주요 신문(나고야, 마이니치, 아사히, 서부마이니치 신문) 등 총 33점이다. 또한 지난 9월 26일에는 우편으로 소장자료 2점을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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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의 외증손 조근송 선생이 1961년 재건운동본부 관련 자료 3점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화, 2018/01/09-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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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노 히데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 제4회 임종국상 수상자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함께만들자! 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이라는리플릿4만부를만들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주간금요일』(시민의목소리를대변하는대중잡지), 『사회신보』(사회민주당기관지), 『신문우즈미비』(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문), 『페민』(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인식, 식민주의 청산을 둘러싼 심각한 현실이 있습니다. ‘위안부는 매춘부였다.’ ‘강제연행은 없었다.’는 등 인터넷 우익들은 여전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간토대진재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는 유언비어도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역사수정주의자와 인터넷 우익들이 입을 모아 검정을 거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가짜뉴스’가 아니라 ‘팩트’로 또한 ‘대안적인 설’로 사회적으로 ‘통용’(=소비)되는 상황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 세상에 알리고 이국 땅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분들을 추도해온 사람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분들의 존엄 회복을 위해 운동을 이어온 사람들, 강제동원 피해 보상 실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 역사 왜곡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교과서운동을 펼쳐온 사람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우호를 바라며 지속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잊혀져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패전 후 72년 일본의 현실입니다.

제2차 아베 정권은 비밀보호법, 전쟁법(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제) 등을 제정하여 일본을 ‘전쟁하는 나라’로 바꾸기 위한 법 정비를 감행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위안부’ 서술을 삭제하고 ‘도덕’ 과목을 신설하여(‘수신’ 과목 부활) ‘교육칙어’의 교재 사용을 용인하는 등 교육의 반동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모죄법안 제정을 강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9조 개정을 포함한 개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이 흐름을 끊기 위한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1995년 무라야마 담화)라는 인식이 최소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 건립 운동은 이러한 상황과 연동되어 있는 중요한 운동입니다.

한국에서는 ‘국민정부’와 ‘참여정부’의 맥을 이어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선’ 문재인 정권이 탄생하여 적폐청산, 과거청산을 추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먼저 반동과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만 역사를 정확하게 알고 기억하는 일 없이는 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역사관 건립을 함께 추진해나가는 운동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금 목표액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기증 확산하기, 역사관 유지 및 지원을 위한 네트워크 만들기 등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역사관 준공, 개관을 위해, 또 그 이후를 내다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번역 :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월, 2017/08/28-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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