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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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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3)

admin | 목, 2021/04/29-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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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3)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관지 <기억과 전망> 43호(2021)에 실린 글로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임헌영 소장은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1979년에는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 글에는 문인간첩단 사건 당시 ‘빙고호텔’(육군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의 끔찍한 고문의 과정, 서대문 귀소에서의 생활, 재판 진행과정, 석방 후 요시찰 인물로 살아야 했던 이야기 등이 담겼다. ― 편집자주

 

7. 진달래 활짝 피다
감방에서는 겨울과 여름은 길고 봄과 가을은 짧다. 춥거나 덥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독재 권력이 땡깡을 부려도 시간은 흘러 추위가 풀리고 4월이 되자 온 구치소는 축제를 맞은 분위기로 변했다. 진달래가 활짝 폈기 때문이다. 내가 구속됐던 그 삼엄한 겨울에 피신 중이었던 김지하가 무슨 재주로 영치금을 넣어줘 깜짝 놀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잡혀와 나와 같은 처지가 되어버렸다. 바로 4.3 긴급조치 3호 위반자들과 함께였다. 유홍준(미술평론가, 명지대 교수)이 바로 내 옆방에 들어오더니 이어 강진 출신의 윤한봉(민주화 운동가), 일본인 하야가와 요시하루(早川嘉春) 등이 나와 같은 5사 하층으로 들어왔고, 앞 뒷동에도 낯익은 얼굴들이 꽉 들어차 서대문 구치소는 광복 이후 정치범이 가장 북적대는 때를 맞았다. 5동의 내 방과 거의 마주보고 있던 3동에는 인혁당의 서도원이 들어와, 자주 통방을 하면서 계속 안부를 확인했다. 그들은 우리의 빨간 딱지와는 달리 노란 걸 달았기에 ‘진달래’로 호칭했다. 온 구치소가 진달래 천지였다.
이때 같은 5사에는 방동규도 있었다. 문단에서는 구라라면 단연 황구라(황석영)판이었는데, 재야의 구라는 방동규였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주먹으로 날렸던 미남에 몸집이 튼실한 문제아였는데, 아버지가 백기완에게 아들 버릇 좀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백기완이 그에게 너 쌈 잘하니, 라고 물으니 한꺼번에 너덧 명은 문제없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귀싸대기를 갈기고는 “이눔아, 기껏 그런 조무래기들을 패대는 게 힘자랑이냐! 너 같은 녀석이 패대기쳐야 할 상대는 따로 있어!”라는 일갈로 대오 각성시켜 정작 싸울 상대가 누구인가를 일깨워 주었다는 설이 있다.
저 당송팔대가의 하나인 증공(曾鞏)이 천하장사 항우를 일러 “영웅본학만인적(英雄本學萬人敵, 영웅은 본래 만인을 대적하는 법을 배운다)”(<虞美人草>) 라는 명 구절을 상기시키는 멋진 장면이다. 이후 방동규는 백기완 사단에서 열심이었으나, 밥벌이 때문에 서독 광부 파견 1기생으로 나갔다. 돈을 모은 그는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동물사회학을 청강한 뒤 조용히 귀국, 명동의 한 골목에다 양장점을 차렸다. 미남에다 건장한 체격, 거기다가 소르본 출신이라니까 뭇 숙녀들이 운집하여 엄청나게 돈을 모우는 재미에 주변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숙녀들의 예방에 묻혀 재미가 쏠쏠했던 그의 은밀한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문학평론가 구중서였다. 경기도 광주 곤지암 출신인 그는 고향의 풍광을 자랑하며 작가 신상웅, 등단하기 직전의 김지하, 서울대 철학과의 기인으로 <청맥> 편집으로 통혁당 때 혼쭐이 났던 시인 주성윤, 평론가 백승철, 그리고 나를 초대하여 곤지암 강변에서 천렵으로 한 나절을 즐기고 상경, 헤어진 뒤 몇몇(구중서, 신상웅, 김지하, 나)이 남아 명동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구중서가 한 미남을 맞닥뜨리더니 “어, 너 언제 왔어?”하고 물었고, 그는 곤혹스러운 듯 어물거리더니 “나, 여기서 가게 해. 쉬었다가!”해서 들어가 보니 멋진 양장점이었고, 의자에는 아름다운 숙녀들이 디자인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방 배추(그의 별명)는 고객들에게 나중에 들려달라고 내보내더니 얼른 중국집에다 각종 요리와 술을 주문했다. 구중서가 우리 일행을 소개했고, 그는 촌각이 아깝다는 듯이 서독에서의 광부 체험부터 파리 풍경 등등으로 썰을 풀었다. 그의 썰 즉 구라에 우리는 웃기에 바빴는데, 구라라면 뒤지지 않는 김지하는 대뜸 그의 추임새부터 말꼬리를 잡아 자신의 썰을 풀어대며 제법 말상대가 되자 “형님, 형님이 배추니까 나는 동생으로 상추로 합시다.”하며 궁합을 맞춰버렸다.
아마 밤이 깊어서야 우리는 헤어졌을 것이다. 방 배추는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하며, 우리만 알고 자주 들리라고 했다. 우리는 그 당부를 지켜 전혀 소문을 안 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한량기질이 도져서 스스로 백기완을 비롯한 여럿에게 연락, 거의 매일 양장점이 술판으로 이어지자 숙녀들이 다 발길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다시 빈털터리 처지에서 최전방 산악지대에다 엄청난 면적의 야산 개발권을 얻어 목장을 하게 되었다며 우리를 초청했다. 버스도 드문 그곳엘 찾아 갔더니 산 입구에서 해가 저물어야 밤에 산길을 더듬어 “방 배추”라고 고함을 질러대면서 찾아갔다. 명산대찰이 서기에 적합한 야산 중의 심산이었다. 거기서 우리가 갖고 간 술과 각종 간식을 다 털어먹으며 밤을 샌 후 헤어진 게 나와는 마지막 만남이었다가 서대문 호텔에서 대면하게 된 것이었다. 목장 일을 돕는 경상도 총각 하나를 데리고 있었는데, 북에서 내려오는 삐라를 주워 열심히 읽더라는 것이다. 그걸 소지만 해도 불법이었기에 모아서 다 태워버리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이 총각이 설날 귀향해서 벗들에게 그 내용을 자랑삼아 북쪽 이야길 하니까 신고를 당해 연행, 어디서 들었느냐니까 방 배추를 지목하여 졸지에 연행, 구속당한 처지였다. 대질심문을 요청해 내가 언제 그랬냐고 그 총각에게 물으니 그는 쳐다보기는커녕 대답도 못했다. 그러자 조사관이 그럼 누구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었느냐고 다그치니 고개를 푹 숙인 채 팔로 불쑥 방 배추를 가리켰다는 것이다. 이내 풀려나긴 했으나 억울함으로 따지면 나보다 더했다.

 

8. 재판, 그리고 석방 후 으악새 모임
문인간첩단 사건은 언론 방송들이 방정을 떨었던 것에서 날이 갈수록 점점 빛이 바래져 갔다. 더구나 우리 다섯 보다 더 <한양>지와 관계가 깊었던 문인들이 증인으로 나오면서 재판은 점점 희극처럼 변해갔다. 특히 구상 시인, 조연현 평론가의 증언은 분수령을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구상 시인의 증언은 관심의 대상이었는데, 감방 안으로 그가 증인으로 못 나올 것 같다는 소문이 들려와서 우리들은 서운하게 여기며 영감님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런데 어느 재판 땐가 느닷없이 판사석으로 메모지가 전해졌다. 바빠서 증인으로 오기 어려운데 지금 시간이 나서 왔으니 당장 법정 증인석에 세워주길 바란다는 요지였다. 그는 여러 정황으로 미뤄볼 때 자신이 증인으로 출두한다면 온갖 반작용이 일어날 것 같아 안 나간다고 소문을 내고는 불쑥 후배 문인들을 위하여 등장한 것이었다. 이 사려 깊은 시인은 증인석에서 “여기 앉은 이 사람들보다 내가 <한양>지 사장(김기심 발행인과 그는 동향의 친구)이나 편집장과는 훨씬 더 가깝다”고 잘라 말하며, 무죄를 강변해 주었다. 조연현은 나의 등단 은사로 가까우면서도 문학관에서는 너무나 달랐는데, 매우 단호하게 자신과 <한양>지와의 친근감을 강조하며 이 사건의 무죄를 논리적으로 입증해 주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별로 가깝지 않았던 작가 손소희 역시 단호하게 <한양>지의 발행인이나 편집장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언명해 주었다. 나의 대학 은사 백철은 일제하에서 카프 사건으로 투옥 경험이 있는 데다, 한국전쟁 전후해서도 온갖 풍상을 겪었기에 무척 긴장된 표정으로 어물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곤란한 대목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네요”라고 하여 우리를 긴장시켰으나 결정적인 쟁점에서는 분명히 부인해 주었다. 
1972년부터 안양교도소에 갇혀있던 마당발 정치인 김상현도 증인으로 등장했다. 기결수라 죄수복을 단정하게 입은 당찬 모습으로 그는 법정에 들어서면서 경호원들이 양쪽에서 부축하자 강하게 뿌리치며 혼자서 당당하게 우리에게 다가와 다섯 피고들에게 차례로 다 고생한다며 악수를 했다. 증인이 이렇게 당당한 건 처음 봤다.

 

<월간 다리> 1970년 9월호(창간), 10월호, 11월호

이 책을 들어 이런 저술을 남긴 김상현 의원 같은 분들도 있다며 반론의 자료로 삼았다. 박정희는 경제기획원 장관 김학렬로 하여금 이 책 5천 권 값 6백만 원을 지불토록 했고, 김상현은 그 돈을 밑천으로 윤형두(범우사 회장)에게 잡지를 하나 만들어 보자고 해서 시작한 게 월간 <다리>지였다. 창간 때 주간은 평론가 구중서였고, 그가 가톨릭에서 월간 <창조>를 창간하자 그리로 옮겨간 뒤에 내가 후임으로 갔다. 이래서 1970년대 초기의 박 정권 비판 잡지의 트리오였던 게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다리>, <창조>가 되었다. 이 잡지들은 끊임없는 필화와 직간접적인 탄압에 시달렸다. <다리>지의 권두언(김상현 명의)이 <아사히신문>에도 소개되는 등 당시 일본 언론은 무척 진보적이었다. 김상현이 나에게 일본에 가서 푹 쉬고 오라는 선심을 쓴 건 1972년 1월이었다. 나 같은 요시찰 인물이 여권을 내려면 3급 이상 비선출직 공직자의 보증인을 둘 이상 내세워야 했는데, 나를 하루아침에 국회의원 수행비서로 등록시켜 신원조회도 없이 며칠 만에 여권과 비자를 다 얻었다.
김상현과 함께 일본 여행 중 내가 소개해서 <한양>지의 편집장과 호텔에서 만나 축사도 구두로 불러주곤 했었다. 더구나 그는 일본문제의 전문가라 김기심이나 한양이 조총련이 아니라 민단 소속임을 분명히 했고 충분히 재판부에게 신뢰감을 주었다.
그밖에도 남파 전향 간첩을 비롯해 여러 증인이 나왔는데,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한양>지 편집장 김인재의 고향인 남해에서 상경한 모 농민이었다. 검찰 측 증인이라 우리는 무슨 거짓말을 하려나 바짝 긴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검찰은 김인재가 6.25 때 ‘빨갱이’로 나서서 마을 사람들을 죽이는 등 만행을 저질렀지요? 라고 묻자, 그는 서슴없이 “아입니더. 그는 절대로 그런 일을 않았심더. 그는 아주 얌전하고 착했심더.”라고 단호하게 잘라버렸다. 당황한 검찰은 “그럼 이 조서에 왜 날인을 했느냐?”니까 “보안대에서 와서 찍어라 캐서 찍은 겁니더.”라고 해서 온 법정은 와르르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 판사는 얼른 그에게 끝났으니 나가라고 하자, “그냥 가면 됩니꺼?”라고 물어 된다고 하니 문을 열고 순순히 나가더니 이내 바로 되돌아 왔다. 판사가 왜 들어왔느냐니까 “차비를 준다고 캤는데 어디서 줍니꺼?”라고 해서 또 한 바탕 마음 푹 놓고 웃었지만 판사도 웃음을 제지하지 않았다.

국제앰네스티의 문인간첩단 피고인 석방운동 영문자료집인 <남한의 솔제니친> 표지와 목차

 

이쯤 되니 재판은 희극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양>지에 글을 많이 쓴 순서도 아니고, 그들과 자주 만난 친분관계의 깊이로 따진 것도 아니며, 돈과 선물을 많이 받은 서열도 아닌 그야말로 무작위로 뽑힌 다섯 명이었다.
여론은 단연 우리 편이었다. 문학인 297명의 진정서 제출, 국제앰네스티는 <남한의 솔제니친>이란 책자 발간과 세계적인 석방운동, 일본 문인들의 발빠른 석방운동과 서명 작업 등등으로 국제적인 관심사로 변해버린 ‘문인간첩단 사건’은 정작 한국 사회에서도 ‘간첩’이란 게 어마어마한 죄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조작될 수도 있구나 하는 인식의 변모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소책자를 만들어 대량 배포했는데,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 대학 교수가 나를 만났던 기억을 되살리며 지원을 호소해 주었다. 일본에서는 진보적인 인권변호사의 상징이었던 나카다이라 겐키치 변호사가 재판 때마다 거의 방청하여 그 정황을 해외에 널리 알려주기도 했다. 그는 일본의 그릇된 역사교과서 바로잡기부터 재일한국교민의 인권문제와 북한 돕기 등에 관여해 온 잊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감방의 밤은 왁자지껄하다. 그건 느끼기에 따라 시장바닥 같기도 하지만 온갖 벌레와 동물들의 대화로 시끌시끌한 여름 밤 숲속 같기도 하다. 그 소리들은 불협화음이지만 재밌다, “야, 이 도둑놈들아, 욕 좀 하자아아아”하면 바로 “네에미 씹니다.”가 나오고 이어 “네에미 씹이 씹이다.
”에 꼬리를 물고 “네에미 씹이 씹이 씹이다”라며 ‘씹’자가 한자씩 이자를 붙여 나가다가 “X방 000 깨져라” 하면 “*** 뒷문 가서 깨져라” 소리 지른다. 깨져라는 죽으라는 것, 뒷문은 사형장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어떤 죄인도 깨지기를 바라진 않는 게 감방의 정서다. 
“야 임마, 3대 째 징역 살아라”, “X방, 원숭이 폭 삶아 보낸다”라고도 했다. 원숭이는 일제 때부터 끔찍하게 재수 없는 상징으로 써온 저주로 그걸 삶기까지 했으니!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어머니—”하고 목 놓아 부르는 소리가 며칠 째 계속 나기도 했다. 어느 날에는 “아, 집에 가고 싶다”는 하소연도 나왔다.
“어이 X방 000, 잘 자. ***(여자 이름) 참 안 됐어. 그 애 십년 후에 애나 낳을 수 있을까?”라는 근심도 터져 나왔다. 어떤 노처녀가 개나리(긴급조치 위반 상징)로 잡혀 온 걸 동정하는 말에, “야, 걱정 마. 그땐 국민소득 1천 5백 달러는 될 테니까 자식 없어도 사회보장제도가 잘 될 테지”라는 처방전도 나왔다. 이어 누군가 “잘 있거라, 나는 내일 목포 간다”라고 소리 지르니 얼른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 목포행 완행열차”라는 구성진 <대전 발 0시 50분>(원제목은 <대전 브루스>)을 불러준다. 실제로 서울역을 출발, 대전에서 0시 50분에 대전으로 출발했던 제33열차는 1959년에 생겼다가 이듬해에 시간이 바뀌어 사라졌으나 노래는 그대로 남았다.
8차에 걸친 지루하고 따분한 심리가 끝나고 6월 28일 금요일이 제1심 판결 날이었다. 밖에서는 아예 다 풀려날 줄 알고 리영희 선생은 희대의 명저 <전환시대의 논리>를 출간하고서 그 출판기념회를 그날 저녁으로 잡았다. 우리가 풀려나면 다 참석하기 쉽게 하려는 배려였다. 그런데 기대를 저버린 채 정을병 혼자만 무죄였고, 김우종과 나는 집행유예, 이호철과 장백일은 실형이 선고되었다. 풀려나도 개운찮은 건 이호철・장백일의 실형(둘 다 2심에서 석방)과, 결국 그간 지녔던 사회적인 모든 직책과 활동이 깡그리 백지화 되어버린 때문이었다. 우리는 모두 복직도 복권도 안 된 채 요시찰인물로 살아야만 했다.
‘관제(官製) 빨갱이‘란 단어가 얼마나 허황된 독재권력의 산물인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자, 그 피해로 일생을 불행하게 살아야만 되었던가의 본보기가 바로 이 사건이었다. 내가 정식으로 복권된 것은 1998년이었다.

 

출소 후 나카다이라 겐키치 변호사 초대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어머니, 두 살 된 아들(민)을 안은 아내 고경숙, 나카다이라 변호사와 동행자, 뒷줄 정을병, 임헌영, 미상

 

바로 그해 여름 즉 1974년 8.15 경축식은 육영수의 저격 사건이 있었는데, 이호철은 감방 안에서 밥맛이 떨어질 정도로 흥분하며 석방을 고대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둘은 예상대로 우리보다 3개월 더 옥살이를 한 뒤에야 2심에서 석방됐다.
그해 연말, 정확히는 12월 9일에 유신반대파였던 정치인 3인방인 김상현, 조연하, 조윤형이 안양교도소에서 출감했다. 갓 출옥한 김상현 환영을 겸한 송년 모임에서 이 풍진 세상을 소일하고자 으악새 모임이 만들어졌다. 한승헌, 장을병, 리영희, 이상두, 윤현, 김상현, 윤형두에다 나중 김중배, 한완상이 추가됐고 나는 최연소 회원으로 합세했다. 유신통치 시절의 유일한 여흥이었던이 모임의 <으악새 선언>은 한승헌이 작성했는데 실로 명문이다.

 

오늘 우리는 ‘체’에서 벗어나기로 한다.
허울 좋은 도덕의 멍에 때문에, 처세와 체면 때문에 ‘나’를 속박해온 ‘체’를 벗어 던지기로 한다. 자신을 학대해온 1년을 묻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발산하기로 한다. 생각하면 얼마나 거짓생활에 이끌려 다녔던가. 우리의 고뇌와 피로를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 아니던가. 화려한 위장보다는 처참하더라도 진실의 목소리를 우리는 그리워한다. 남을 속이는 기만보다는 자신을 속이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럽고도 불가한 것인가를 새삼 느낀다….
이에 우리는 겉으로 그럴듯하면서도 내심으로 외롭고 불행했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나아가 그런 위로라도 없이는 이 해를 잊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가슴을 마주 대하는 공동의 술상 앞에 나와 다음과 같은 행동강령을 전원의 뜻으로 선포한다.

1. 오늘 이 자리에서는 누구나 솔직해야 한다. 솔직할까 말까 망설이는 자는 천추의 한을 면치 못할 것이다.
1. 오늘 이 자리는 저질을 우대하는 자리다. 인간의 태어남이 곧 저질의 부산물인 고로 저질을 욕하는 자야말로, 태어남을 욕하는 자니라.
1. 오늘 우리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도록 한다. 어제와 오늘뿐 아니라 내일도 잊어버리라. 내일 내일 하지만 언제 내일이라는 것이 한 번이라도 있어봤나. 기다렸던 내일이란 것도 당하고 보면 항상 오늘이었지 않은가.
1. 오늘 우리는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기를 맹세한다. 사람에게서 기분을 빼놓으면 주민등록증밖에 남을 것이 없다. 괜히 호마이카질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발산에 일로매진하기를 다짐한다.
1. 만일 위와 같은 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거나 그로 인해서 이 자리의 무드에 금이 갈 염려가 있을 때에는 사회자가 본의 아닌 긴급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이 긴급조치를 위반하거나 비방하는 자는 아무런 벌도 받는 일이 없다.

 

주로 김상현이 스폰서를 모셔 오거나 자신이 지불하면서 맘껏 즐겼는데, 한정식, 양식, 일식집 고급부터 싸구려까지 두루 섭렵, 전전했다. 온갖 음담패설과 욕설이 담긴 속요들을 맘대로 불렀으나 춤을 추거나 여성을 들이진 않았다. 리영희가 여성이 동석하자 “낡은 부르주아” 운운하며 비토를 놓은 결과였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뭇 여성 펜이 많았던 한승헌이 자기 펜들만 초청하여 함께 하기도 했다.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발광을 했을까. 익살과 와이당(猥談의 일어)에 일가견을 가졌던 김상현은 월남전에 참전했던 한 장군이 처했던 매독의 비극을 설파했다. 국제매독이라 고칠 수 없는 단계라서 그는 국내 명 의원은 물론이고 이웃나라까지 원정을 갔으나 한결같이 “잘라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점점 썩어 들어가 죽게 됩니다.”라는 진단이었다. 차마 그걸 잘라내기가 아쉬웠던 장군은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을지로 6가 허름한 골목의 중국인 명 한의를 찾아갔다. 늙은 한의는 안경 너머로 물끄러미 그 흉물을 쳐다보더니 “다른 병원에도 가 보셨습니까?” 정중히 물었고 “예, 다 다녀봤습니다”고 답하니 “뭐랍디까?”고 물었다. 장군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답했다. “다들 똑 같이 이걸 잘라내야 한답니다.
”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의는 “미친놈들! 자르긴 왜 잘라!” 했다. 이에 용기백배한 장군은 “그렇지요? 안 잘라도 되지요?” 하자 한의는 다시 “미친놈들!”을 서너 번 반복하기에 장군은 아예 희색을 띄우며, “예, 그렇지요! 안 잘라도 되지요?” 라고 용기 있게 답했다. 지그시 쳐다보던 그 명의는 다시 “미친 놈들! 그냥 둬도 뚝 떨어질 걸!”이라고 조용히 말했다.

이걸 1970년대의 유신통치 아래서 최상급 와이당이라고 내가 감히 평하는 것은 바로 그 한의사가 ‘역사적인 필연성’을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그냥 둬도 떨어질 건 떨어지고 만다! 실제로 1970년대 중반 이후 모든 민주투사들과 학자들은 박정희가 죽어야만 유신헌법이 끝날 것으로 전망했다. 10.26 이후에 다들 망할 걸 알았다고들 하지만 내가 감히 증언한다. 이미 민주화 운동권조차도 그 군부독재 체제가 쉬 붕괴할 것이란 기대는 갖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적 필연성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포기하자는 건 아니니 오해 없기 바란다. 결국 그는 이로부터 5년 뒤인 1979년 10월 26일에 저격당함으로써 유신통치의 막은 내렸다. 그냥 둬도 뚝 떨어진 것이다. 그러고도 사건 44년 뒤인 2018년 6월에야 나는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고, 이에 따른 형사적인 배상도 끝났다. 그러나 내 청춘을 빼앗겼던 민사적 배상 재판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세칭 ‘문인간첩단 사건’은 산적한 간첩조작사건의 목록 중 비정치적인 것이라 대중적인 선동력이 강했다. 이승만 치하에서 첫 간첩 조작이었던 ‘국회프락치 사’에 이어 ‘조봉암 조작사건’을 거쳤는데, 박정희 치하에서는 ‘인혁당 사건’이 대중들에게 가장 강력한 호소력으로 작용했고, 유신통치 아래서는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간첩도 만들어 내는 독재’라는 인식을 널리 퍼트리게 작동됐다.

임헌영을 비롯한 문인간첩단 사건 관련자 전원 무죄 기사. <한국경제> 2018년 6월 24일자 기사

 

이런 조작술은 선거 때마다 ‘북풍’을 이용한 수구세력들의 기교가 다양화되어 널리 활용하므로써 각계각층에서 언제라도 필요하면 ‘간첩조작’을 수행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도록 해 주었기 때문에 크게 보면 모든 조작사건은 다 정치권력이 날조해낸 결과였다. 민주화와 인권의 첫 걸음은 이런 ‘조작’이 불가능하도록 세상을 바꾸는 일인데, 정작 그 조작 전문가 집단이 민주화되자 사회의 그늘에서 여전히 ‘간첩’이 아닌 ‘여론’ 조작에 나서는 모양새가 참 우려스럽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자신들이 조작했던 사건들이 진짜라고 억지를 쓰고 있다. 진정한 민주화란 그 날조범들이 다시는 어떤 ‘조작’도 불가능하도록 사회를 정화하는 노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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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비

김해규

세월호 7주기였다
7년 전 오늘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에
비가 내렸다
그날
병풍도 북쪽 20km 맹골수도에도 파도가 일었고
가끔씩 비도 뿌렸다
철썩이는 파도소리에 실려
기울어가는 여객선 속에서 비명이 들렸다
“엄마, 엄마 숨막혀 …. 보고 싶어”
아, 가슴에서 천불이 났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졌다
생때같은 아이들 목숨이 아래로 깊이 가라앉을 때
성형한 얼굴로 깔깔대며 드라마에 몰두했던 사람이 있었다
서초동 룸싸롱에 앉아 갖은 음모와 술수로 희락하던 놈들도 있었다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쳐 나와 소주 한잔 들이키며 안도하는 놈들
팽목항 어귀에서 꺼이꺼이 울어대던 부모와 가족들을 조롱하고 모독했던 놈들
그들을 비호하고 동조했던 보수언론과 검찰놈들
제 자식 아니라고 아이들 목숨을 값싸게 버린 놈들도 있었다
그놈들은 아직도 팔팔하게 살아서
세상이 자기 것인냥 거리를 활보하며
자식새끼 입에 맛난 것 넣어주고 좋은 옷 입히고
땅값 오르고 아파트값 올랐다며 희희락락 거리는데…
철수야

순이야 미안하다
팽목항 방파제에서 들리는 엄마의 통곡소리
맹골수도 바다 속에 뚝뚝 떨어졌던 아빠의 눈물
누가 소매를 걷어 그들의 눈물 닦아줄 것인가
하늘은 뭘 하는지
하늘 … 이놈의 하늘은
아이들의 죽음 잊지 않겠다,
생장(生葬)시킨 놈들 반드시 벌 받게 하겠다 약속했던 하늘은 지금 뭘 하는지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그래서 오늘 흙비가 내렸나 (2021.04.16.)

목, 2021/06/03-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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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정관장’, 조선총독부가 버리고 간 이름

문성규

 

‘친일부역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홍삼에게도 해당되는 모양이다. 부역이름 ‘정관장’을 보면. 홍삼에 붙어 우리 민족을 수탈하는 수단으로 부역한 1급 친일반민족행위 이름(‘정관장’)이 해방 독립된 나라에서는 홍삼의 대표 노릇을 하고 있다. 우리는 배알도 없나?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다. 먹고 살길이 없어 해외에 홍삼 몇 뿌리 가지고 나가 행상하고 있던 한인 홍삼장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그날 그날 홍삼 판 돈에서 조금씩 모아 애국금 독립의연금을 내고 독립공채를 사서 상해임시정부에 보내고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도왔다.
그같은 동포들의 도움으로 임시정부와 독립군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은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었다. 1939년까지 활발하게 진행되던 홍삼 팔아 독립자금 마련하는 일이, 1940년 일제의 홍삼 감시딱지 ‘정관장’이 홍삼에 붙어 홍삼을 감시하기 시작한 뒤로는 홍삼 팔아 독립자금 마련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실제로 1940년 이후로는 눈에 띄는 독립운동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결과의 원흉인 ‘정관장’은 1급 친일반민족 부역이름으로 해방 후 즉시 처단되어 이 땅에서 척결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한국인삼공사는 일제 조선총독부가 버리고 간 부역이름 ‘정관장’을 주워다가 지금까지 애지중지 쓰고 있다.

이름에는 목적이 있다. ‘정관장’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세금 수탈, 홍삼상권 강탈, 그리고 독립자금 차단을 통한 한민족의 말살이었다. 이 사실을 한국인삼공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우리 민족을 말살시키기 위해 만든 그 ‘저주스런’ 이름을 쓰면 안된다는 사실을 한국인삼공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인삼공사는 굳이 이 ‘저주스런’ 이름을 쓰고 있다. 혹 ‘저주’의 기운이 우리 민족에게 스며들지도 모르는데 그것도 자사의 대표 상표이름으로… 그렇다면 한국인삼공사에게는 우리 민족에 대한 ‘저주’를 감수하면서까지이 ‘저주’스런 부역이름 ‘정관장’을 써야 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돈 즉 부(富)일 것이다. 그렇다면 유관순 열사의 귀를 자른 가위가 잘 든다는 이유로 주워다 쓰는 행위와 다를 게 무엇인가? 한국인삼공사는 현대판 을사오적에 다름없지 않는가? 민족을 일본에 팔아 호의호식 부귀영화를 누린 그 매국노들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기미독립선언 102주년을 맞는 금년 3월 3일에 한국인삼공사에 “식민잔재 정관장 간판을 내려라!”는 제목의 탄원서(내용증명)를 보냈다.
한국인삼공사는 어느 기업보다도 국민들로부터 사랑받아온 대기업이다. 더더구나 여느 대기업과는 다르게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특산품이며 영혼의 먹거리인 홍삼을 거의 독점적으로 제조 판매하고 있는 독보적인 회사이다. 그만큼 국가와 민족과 국민을 생각해야 되는 기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피를 빨고 우리 민족을 말살시키는 일을 앞장섰던 ‘저주스런’ 일제잔재 부역이름 ‘정관장’을 굳이 주워다가 그것도 주된 상표이름으로 쓰는 한국인삼공사의 뱃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 대기업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기업을 운영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의 홍삼장수 한 사람으로서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늦었지만 제2의 반민특위가 꼭 필요한 시점이다. 이 고개를 넘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한국인삼공사는 치욕스런 이름 ‘정관장’이란 간판을 당장 떼어내어 우리 민족의 자존심인 홍삼의 위상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을 엄중히 촉구한다. 2021. 4. 8 대한민국 홍삼장수 문성규

목, 2021/06/03-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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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70]

평식원(平式院) 혹은 상공과 용산분실 자리의 공간 내력
일본의 기준과 합치되도록 만든 것이 근대 도량형법(度量衡法)

이순우 책임연구원

지난 2006년 12월 4일에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의 관리유물인 「국가표준 근대도량형기」(154건, 331점)가 문화재청 고시 제2006-103호를 통해 등록문화재 제320호로 등록고시되었다. 이와관련하여 문화재청에서는 2006년 11월 8일자로 「근대기(1902~1945) ‘국가표준 도량형기’ 문화재로 등록예고, 대한제국 법률 제1호로 탄생된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는데, 그 가운데 이러한 구절이 보인다.

대한제국 시기에 공포된 「도량형법」의 제정 및 개정 내용을 담고 있는 <대한제국관보> 1905년 3월 29일자(오른쪽)와 1909년 9월 21일자(왼쪽)의 1면 모습이다. 1909년의 개정 내용을 보면 종전의 ‘척량법(尺兩法)’은 일본식 ‘척관법(尺貫法)’을 기본으로 하는 형태로 바뀌었고, 더구나 척(尺), 승(升), 관(貫)은 ‘일본 도량형법이 정한 바와 같다’는 구절을 노골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 그러나 과거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도량형이 지역마다 달랐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도량형을 정리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개항 이후 근대적인 도량형을 도입하기 위하여 1902년(광무 6년)에 평식원(平式院)이라는 담당 관청을 설립하여 서양식 도량형제(미터법)를 일부 채택하고 1905년(광무 9년) 3월 21일에 이것을 바탕으로 대한제국 최초의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정하였다. 이처럼 당시 고종은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제정할 정도로 이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으나 새로운 도량형이 정착되기까지는 그 후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미돌법(米突法)을 아시나요?」라는 별도의 첨부자료를 통해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다.

 

…… 이러한 당시 사회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에서는 1905년(광무 9년) 3월에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정하고 농상공부에서 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 법은 1902년에 발표되었던 도량형법과 내용은 같으나 법률 제1호로 공표할 정도로 도량형 개정에 대하여 당시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면 근대적 도량형 제도의 도입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어서, 도량형법이 당시 법률 제1호였다는 사실에 기대어 그 의의를 더욱 확대해석하고 있는 부분이 확연히 눈에 띈다. 그런데 도량형법(度量衡法)을 일컬어 대한제국 최초의 법률이었다는 맥락과 결부시키는 것은 명백한 착오이다. 그 시절에는 지금의 법률이나 대통령령처럼 일련번호가 축차적으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연도별로 제1호부터 번호를 새로 붙여나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량형법이 법률 제1호인 것은 맞으나, 이건 광무 9년 즉, 1905년 바로 그해에 만들어진 첫 번째 법률이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아닌 게 아니라,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출범한 것이 1897년인데 무려 8년이나 지나서야 겨우 법률 제1호가 제정되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이를 테면, 법률 제1호가 해마다 하나씩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므로 이들 법률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통상 당해연도의 연호(年號)를 앞쪽에 덧붙여 표기하는 것이 적절한 용법이라고 하겠다.

도량형 관련 법률 제정 연혁

통감부 통감관방에서 펴낸 <한국시정연보(韓國施政年報)>(1908), 264~265쪽을 보면, 근대시기 도량형 제도의 도입 연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 대목이 남아 있다.

<조선지실업(朝鮮之實業)> 제19호(1907년 1월 1일)에 수록된 도량형제조소 기사인 일본인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의 인물사진과 그 시절에 사용되던 도량형 원기(度量衡 原器)의 모습이다.

 

본디 한국의 도량형제도는 매우 불규율(不規律), 불완전(不完全)하여 거의 계량(計量)의 표준(標準)으로 삼기에 충분한 것이 없어서 명치 35년(1902년) 궁내부(宮內府)에 평식원(平式院)을 설치하고 도량형 개정의 사무를 관장하는 동시에 도량형기 전매(度量衡器 專賣)의 목적으로 동원중(同院中)에 도량형기제조소(度量衡器製造所)를 세워 일본인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로 하여금 제조검정(製造檢定)의 일을 전담시켰으며 또한 도량형규칙(度量衡規則)을 제정 공포하였으나 신제(新制)의 실시(實施)가 전국(全國)에 미칠 수 없었고 가까스로 경성(京城)과 인천(仁川) 등의 일부에 다소간 신도량형기(新度量衡器)의 판출(販出)이 있었을 뿐 곧이어 평식원을 폐지하고 농상공부(農商工部)에 도량형과(度量衡課)를 설치하였다가 명치 40년(1907년)에 다시 관제(官制)를 개정하여 도량형사무국(度量衡事務局)으로 하고 이노우에 요시후미의 관리(管理)를 해제하였으며, 동년말(同年末)의 관제개정에 따라 재차 이를 농상공부의 일과(一課)로 복귀시켰다. 법규(法規)에 관해서도 그 후 다소 개정(改訂)한 바가 있었지만 불비(不備)의 점(點)이 여전히 적지 않으므로 목하(目下) 법률을 개정(改正)하여 제도를 확정(確定)할 필요를 인식하고 있으나 그 실시의 곤란을 염려하여 아직 수행(遂行)에 이르지 못하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 1868~?)라는 일본인은 일본 교토 출신의 철도차량 기술자이며, 일찍이 1899년 4월에 한국으로 들어와 전차 차량의 납품에 관여했고 1900년 3월에는 경부철도 철도위원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그 이후에 평식원 도량형제조소의 기사 및 도량형제조검정소(度量衡製造檢定所)의 관리책임자로 일한 경력을 거쳐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는 합자회사 이노우에 기스도(合資會社井上宜壽堂, 1911년 12월 10일 설립)를 만들어 이곳에서 소독약이나 제약, 약품판매, 약종무역(藥種貿易), 비누제조 등의 사업을 전개한 바 있다.
그러한 그에게 도량형기 제조와 관련한 제반 설법(設法), 설비(設費), 용빙(傭聘)에 관한 사항을 위임(委任)하기 위해 평식원의 도량형기 제조기술자로 채용한다는 계약서가 성립한 것은 1902년 8월 26일의 일이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6권에 수록되어 있는 관련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담긴 것으로 확인된다.

 

일(一), 평식원(平式院)은 이노우에 요시후미의 입안(立案)에 계(係)한 도량형법(度量衡法)을 채용시행(用施行)하고 기(其) 제조사업(製造事業)을 일체위임(一切委任)하되 제반사무(諸般事務)를 총무과장(總務課長; 한상룡)과 협의(協議)하여 타판(辦)할 사(事).
이(二), 도량형기제조장(度量衡器製造場) 설비(設備)는 별지(別紙) 설계품목서(設計品目書)에 유(由)하여 기(其) 경비수소용지발(經費隨用支撥)할 사(事). 단(但), 해설비(該設備)의 부족(不足) 급() 부득이(不得已) 증가(增加)하는 경비(經費)는 이노우에 요시후미에게 차용(借用)하여 지급(支給)할 사(事).
삼(三), 제작기계(製作機械) 재료(材料) 급(及) 공급품(供給品) 등(等)의 가격임기(價格臨機)하여 정(定)할 사(事).
사(四), 평식원(式院)은 이노우에 요시후미의 입안(立案)에 계(係)한 도량형법(度量衡法)을 의용(依用)하되 장래(將來) 무단(無端)히 내외인(內外人)에게 해제조권(該製造權)을 이허(移許)치 아니할 사(事).

 

이러한 사정에 비춰보면 1902년에 제정된 「도량형규칙(1903.7.1. 시행)」도 이노우에의 의중이 전적으로 반영된 결과인 듯하다. 그는 이곳에서 도량형 관련 법제를 정비하는 일은 물론이고 도량형기의 제작 및 수입과 검증 등 일련의 과정을 독식하다시피 하였고, 그의 이러한 지위는 농상공부 도량형사무국이 신설되는 1907년 2월의 시점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1905년 3월에 이르러 ‘척량법(尺兩法)’을 기본으로 한 「광무 9년 법률 제1호 도량형법(1905.11.1. 시행)」이 새로 제정된 것도 알고 보니, 기존의 「도량형규칙」에서 도형기(度衡器)는 일본의 것과 동일하게 되어 있었으나 양기(量器, 되의 크기)는 서로 달랐기 때문에 이것마저도 일본의 단위에 통일시키려는 의도에 따른 조치였던 것이다.
그 이후에 다시 1909년 9월에 이르러 ‘척관법(尺貫法)’을 기본으로 삼아 새로 개정된 「융희 3년 법률 제26호 도량형법」에서는 아예 드러내고 도량형의 단위를 일본의 그것과 그대로 일치시키고 있었다. 가령, 정(町, 60칸)이니 평(坪, 6척 평방)이니 돈(匁, 1천분의 1관)이니 하는 일본식 계량단위가 법률조문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실제로 이 법률의 조문에는 이러한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조선불교(朝鮮佛敎)> 제23호(1926년 3월호)에 포함되어 배포된 ‘미터법 환산 조견표’이다. 「대정 15년 제령 제6호 조선도량형령」의 제정에 따라 외견상으로는 미터법이 전면 시행되긴 했으나, 실제로는 여전히 돈(匁)이라든가 관(貫)이라든가 하는 일본식 계량단위를 그대로 미터단위로 대입하여 사용하는 방식이 유지되었다.

 

<경성일보> 1928년 4월 1일자에 수록된 야마나시 조선총독(山梨 朝鮮總督)의 미터법 전면시행 2주년 기념휘호이다. 여기에는 “적적분명 호리차(的的分明 毫釐差)”라고 적고 있는데, ‘호리’는 아주 작은 길이 단위를 말하는 것이므로, 이는 결국 “미세한 차이까지 뚜렷하게 분간한다”는 정도의 뜻이 된다.

 

제1조(第一條) 매매수수(賣買授受) 우(又)는 증명(證明)에 사용하는 도량형(度量衡)의 명칭(名稱), 명위(命位) 급(及) 도량형기(度量衡器)에 관하여는 본법 소정(本法所定)에 의(依)함.
제2조(第二條) 도량형(度量衡)의 명칭(名稱) 급(及) 명위(命位)는 좌(左)와 여(如)함.…… (중간생략) …… 척(尺), 승(升) 급(及) 관(貫)은 일본 도량형법(日本度量衡法)의 소정(所定)과 동(同)함. 제1항(第一項) 외(外)에 일본 도량형법(日本度量衡法)의 인(認)한 도량형(度量衡)의 명칭(名稱), 명위(命位) 급(及) 비교(比較)는 차(此)를 적법(適法)한 자(者)로 함.

 

애당초 도량형제와 관련한 일제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주한일본공사관기록> 22권에 수록된 「전원국(典圜局) 건물 및 평식원(平式院) 부지수용에 관한 건(1904년 11월 25일 발신)」 제하의 문건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당시 경의철도의 부설로 인하여 하마터면 평식원 자리가 고스란히 그 안쪽으로 편입되어 사라질 뻔한 일이 전개되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 일을 막아준 사람은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주한일본공사였던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연유는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 앞으로 또 경의선로(京義線路)는 지금까지 평식원(平式院)의 한쪽 옆을 통과하고 있습니다만, 혹은 그 선로를 변경하여 평식원의 중앙부를 재단(裁斷)하는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해원 주관인(該院 主管人)으로부터 신고한 바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평식원이라는 것의 설립은 본래 제국정부(帝國政府)의 권고(勸告)에 따라 불규율(不規律)한 한국 전체의 도량형기를 거의 우리(즉, 일본)제도와 동일한 단위(單位) 아래에 두려는 저의(底意)에서 나왔으며, 그 설립에 관해 우리 제일은행(第一銀行)으로부터 차관(借款)을 일으켜 겨우 현재의 건물을 건설하여 경영에 착수한 내력(來歷)에 비춰, 만일 우리 군용철도(軍用鐵)의 필요상(必要上) 선로를 해원 부지내(該院地內)로 변경함에 있어서는 자연히 해건물(該建物)을 다른 곳으로 이전할 필요가 생길 것이므로 이에 상당한 이전료(移轉料), 기타 건축비(建築費) 등을 지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일껏 우리의 권유에 기초한 도량형사업(度量衡事業)을 중도에 좌절(挫折)시킬 염려가 있사오니, 이 점을 이해하시도록 이상의 개략 내용은 와타나베 소좌(渡邊少佐)에게 내화(內話, 비공식 대화)해두었습니다. 공염(共念)하기 위해 고량(考量)을 얻고자 합니다. 명치 37년(1904년) 11월 25일. 임시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府) 야마네 소장 각하(山根少將閣下) 친전(親展).

 

결국에 잇따른 도량형 관련 법률의 제정 및 개정은 그 자체가 일본세력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그들에게 익숙한 방식의 도량형 단위 및 제도를 바로 이 땅에 그대로 옮겨놓고자 하는 저의를 바탕에 깔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중에 일제강점기로 접어들어 1926년 2월에 제정된 「대정 15년 제령 제6호 조선도량형령」에 따라 ‘미터법(米突法)’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식 척관법(尺貫法)에다 단지 미터법의 수치를 대입하여 사용하는 관행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그런데 근대시기 도량형제의 도입 및 시행과 관련하여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의 하나는 평식원에 속한 ‘도량형제조소(용산 소재)’였다. 원래 「궁내부 관제(宮內府 官制)」의 개정을 통해 평식원이 처음 설치된 때는 1902년 7월 21일이었는데, 이 당시에는 아직 따로 정해진 공간이 없었으므로 북일영(北一營)이라거나 원동(院洞)의 전군수 이종석 씨가(前郡守 李奭鍾氏家)로 그 위치를 정한다는 신문기사가 몇 차례 등장한 적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도량형제조소의 청사가 마련된 곳이 바로 용산 당현(堂峴, 당고개) 지역이었다.
정확한 시기까지는 가늠하기 어려우나 <황성신문> 1903년 9월 9일자에 수록된 「평식실시(平式實施)」 제하의 기사를 보면, 여기에 처음으로 ‘용산방’이라는 지명이 구체적으로 언급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평식원(平式院)에서 도량형척제조사무소(度量衡尺製造事務所)를 용산방(龍山坊)에 설치(設寘)하고 견습생(見生)을 시취(試取)하는데 경성학당(京城學堂) 학원중(學員中)으로 10인(人)을 선택(擇)하였다더라.

 

<경성일보> 1929년 4월 1일자에 수록된 미터법 시행 3주년 특집기사에는 상공과 용산분실의 모습도 함께 소개되어 있다. 대문의 기둥에는 ‘조선총독부 식산국 상공과분실’과 ‘조선미터협회’의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고, 사진 아래의 설명문에는 이곳이 “미터법의 참모본부”라는 수식어가 포함되어 있다.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1929)에 나타난 총독부 식산국 상공과 용산분실(원정1정목 25번지 구역)의 표시 위치이다. 이곳의 전면 도로변에는 용산경찰서(龍山警察署)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지금의 원효로와 백범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해당하며, 흔히 1978년 이후 30년 가량 용산구청이 있었던 곳으로도 기억되는 공간이다.

상공과 용산분실의 구내 배치 상황이 담겨 있는 「용산 상공과분실 창고 기타 부지평면도」이다. 각종 창고와 검정실 및 사무소의 위치가 잘 묘사되어 있으며, 왼쪽 아래에는 도로면에 접한 곳에 자리한 용산경찰서(龍山警察署)의 구역도 함께 표시되어 있다. (ⓒ국가기록원)

<대경성사진첩>(1937)에 수록된 용산경찰서의 전경이다. 용산경찰서가 상공과 용산분실 바로 앞쪽에 처음 터를 잡은 것은 1911년 4월의 일이며, 중간에 용산헌병분견소로 전환된 시절이 있긴 했으나 그 이후 1977년 7월 2일에 도로확장 때문에 철거되어 시립남부병원 자리(원효로 1가 12번지)로 청사를 옮길 때까지 줄곧 이곳에 머물렀다.

용산꿈나무종합타운(2017.12.1일 개관)으로 변신한 옛 용산구청 청사의 모습이다. 현재 이 구역 안에는 원효지구대, 용산경찰서 방법순찰대, 용산경찰서 교통센터 등의 시설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데, 이것은 옛날 용산경찰서 시절의 흔적인 동시에 여전히 토지의 지분 일부가 경찰서의 몫으로 남아 있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이 주로 ‘상공과 용산분실(商工課 龍山分室)’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었고, 한때 ‘도량형소(度量衡所)’라고 불렀던 시절도 있었다. 해방 이후의 시기에도 이곳은 역시 ‘도량형소’라거나 ‘중앙계량국(中央計量局)’이라는 이름을 달고 예나 다를 바 없는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으로 남았다. 이 구역은 일제강점기의 지번상으로 “원정 1정목(元町 一丁目, 지금의 원효로 1가) 25번지(면적 2,702평)”에 해당하며, 그 전면의 도로변에는 일찍이 1911년 4월 이후 용산경찰서(龍山警察署, 용산헌병분견소 시절 포함)가 줄곧 자리했던 곳으로도 기억되는 공간이다.
이 자리는 특히 용산구청(龍山區廳, 1978.4.18~2010.4.8)이 30년 가까이 터를 잡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듯하다. 용산구청이 들어서기 직전에는 이곳이 ‘통일연수소(統一硏修所)’로 사용되었던 흔적도 확인되는데, 정작 1970년대 초반까지는 확실하게 남아 있던 중앙계량국이 정확하게 언제 이곳에서 사라진 것인지는 아쉽게도 관련자료가 확인되지 않는다.
2010년 4월에 용산구청이 이태원 쪽에 신청사를 건립하여 그곳으로 옮겨간 이후 원효로에 남은 옛 청사는 용산꿈나무종합타운(2017.12.1일 개관)으로 바뀌었고, 지금 이 구역 안에는 용산구 보건분소, 원효지구대, 용산경찰서 방범순찰대와 교통센터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 옛날 평리원 도량형제조소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곳에 도량형 또는 계량관련 시설이 자리했던 기간을 통틀어 합쳐보면, 세월이 무려 70년도 더 된 것으로 나타난다.
비록 근대시기 도량형제도의 도입과 시행과정이란 것이 다분히 일제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물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 오랜 세월에 걸쳐 이곳이 도량형 제도의 본거지였다는 점에서 그러한 내력을 나타내는 작은 표석 하나쯤은 남겨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목, 2021/06/03-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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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특별사진전 개최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은 5월 18일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 기념 특별사진전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를 개막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는 이번 전시는 오랜 기간 쿠바, 멕시코, 만주, 연해주 등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현장을 찾고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을 만나 한인 디아스포라의 흔적을 기록한 김동우 작가의 사진 52점이 전시되었다.
쿠바 한인 이주의 시작점인 마나티 항구, 멕시코 한인 독립운동의 성지 메리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국방경위대, 헤이그특사가 참석하지 못한 네덜란드 빈넨호프,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의 인도 레드포트 훈련지, 카자흐스탄 바슈토베의 고려인 무덤, 경학사가 설립된 중국 길림성 삼원보 대고산 일대,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의 전로한족대표자회의 개최지 등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사진으로 만나 볼 수 있다. 또한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모습을 통해 한인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개막식은 사회적 분위기에 맞춰 5월 18일 오전 11시 2층 기획전시실 앞에서 윤경로 전 한성대총장, 박겸수 강북구청장,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 김동우 작가 등 관계자 20여 명이 참석하여 개막사와 격려사, 작가의 인사말, 테이프커팅식 순서로 간소하게 진행하였다. 테이프커팅식 이후에는 김동우 작가의 설명과 함께 전시를 관람하였다.
이번 특별사진전은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2021년 8월 18일까지 사전예약을 통해서 관람할 수 있으며 VR전시로도 제작되어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에서 만나볼 수있다.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 기념 특별사진전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는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의 길, 생존을 위한 이민을 길을 택하여 만주와 연해주, 미주로 떠난 사람들의 잊혀져가는 역사의 흔적을 기억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금, 2021/06/25-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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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신흥무관학교 110주년 기념 특강
〈항일무장투쟁의 뿌리-신흥무관학교〉 진행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은 2021년 신흥무관학교 설립 110주년을 맞아 신흥무관학교 출범의 시대적 배경과 중심세력, 독립전쟁사에서의 위상,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을 조명하는 독립민주시민학교 특별강좌 <항일무장투쟁의 뿌리-신흥무관학교>를 진행하였다. 강좌는 5월 22일에서 5월 30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 근현대사기념관 2층 강의실에서 현장수강과 함께 온라인 수강을 위한 촬영도 병행하였다.
첫 번째 강의는 원광대학교 김주용 교수의 <간도 한인사회와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을 주제로 진행되었다. 서북간도 지역 이주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과 신흥무관학교로 상징되는 국외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대해 현장답사를 통해 축적된 다양한 자료들과 함께 설명하여 항일무장투쟁의 공간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었다.
2강은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운영의 중심역량>이란 주제로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가 강의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핵심적 인물들과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독립을 향한 의지, 3·1운동 이후 독립전쟁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중요성에 이르기까지 신흥무관학교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강의였다.
3강 <신흥무관학교와 초기 독립전쟁>은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 관장이 강의하였다.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독립전쟁에 미친 영향에 대해 알아보고 독립전쟁의 분수령인 3·1운동 이후 늘어난 신흥무관학교 출신자들, 그들의 독립운동 방향에 대해서 알아봄으로써 항일무장투쟁의 뿌리로서 신흥무관학교를 이해할 수있었다.

마지막 4강은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항일투쟁 -‘아리랑’ 김산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강의하였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과 작가 님웨일즈의 옌안에서의 만남을 시작으로 김산이 기억하고 있는 신흥무관학교, 김산의 항일투쟁에 영향을 준 많은 인물들, 그리고 역경의 항일투쟁의 과정을 알 수 있는 강의였다. 신흥무관학교 110주년 기념 특강은 근현대사기념관, 민족문제연구소, 강북구 홈페이지를 통해서 6월 30일까지 누구나 수강할 수 있다. 온라인 강의를 통해 항일무장투쟁에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고귀한 희생을 다시한 번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란다.

금, 2021/06/25-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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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박근혜 정권과 양승태 사법부의 추악한 재판거래, 그 책임을 묻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지난 5월 25일 일제강점기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와 고 김규수 할아버지의 유족은 박근혜 정부 시기 사법농단, 재판거래의 불법행위에 대해 국가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했다.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아 지원해 온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은 지난 2018년 역사적인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냈음에도 일본 정부의 방해로 가해 기업이 아직까지 판결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이번 소송은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 비서실장을 비롯하여 정무수석, 윤병세 외교부 장관, 피고기업의 대리인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들과 양승태 대법원장, 임종헌 법원행정처장 등 법관다수가 조직적으로 공모하여 실행한 재판거래에 대해 국가배상법에 따라 공무원의 불법행위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을 묻는 소송이다. 이 사건 원고들은 2005년 2월 한국에서 소송을 제기하여 1, 2심에서 패소하였으나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에서 역전 승소했다. 2013년 7월 10일 서울고등법원의 파기환송심에서 승소한 원고들은 대법원 재상고심의 최종 승소 판결이 곧 내려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최종 확정판결이 내려지기까지 5년의 시간 동안 박근혜 청와대와 양승태 사법부는 판결을 뒤엎기 위해 피고기업의 대리인까지 동원하여 조직적인 재판거래를 자행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숨을 대가로 추악한 재판거래가 이루어지는 동안 연구소와 원고들은 조속한 판결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고 기자회견을 여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사법농단으로 판결이 지연되는 동안 네 분의 원고 가운데 세 분이 돌아가시고 말았다(여운택 2013년 12월, 신천수 2014년 10월, 김규수 2018년 6월 사망). 1965년 박정희의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인권회복이 가로막혀 온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21년의 재판투쟁 끝에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65년 체제’를 극복한 역사적인 대법원 판결을 쟁취했지만 끝내 법정에서 승소 판결을 듣지 못한 것이다. 국가는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재판거래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명확히 사죄하고 배상해야 할 것이다. 또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숨을 대가로 한 사법농단에 관여하여 불법행위를 저지른 모든 자들의 잘못을 명확히
하고, 그 책임을 묻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이번 소송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회복과 역사정의의 실현, 그리고 사법개혁과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소중한 디딤돌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금, 2021/06/25-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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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신흥무관학교 설립 110주년 온라인 기념식

• 방학진 기획실장

올해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10주년이 되는 해이다. 2011년부터 연구소가 사무국을 맞고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상임대표 윤경로, www.sh100th.org)는 설립 기념일인 6월 10일 온라인 기념식을 진행했다. 이날 기념식은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하여 모든 순서를 사전녹화를 통해 제작한 영상을 6월 10일 유튜브 등에 공개했다. 온라인 기념식의 첫 순서는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를 ‘드로잉 쇼’로 제작하여 선보였다. 드로잉 쇼는 안중걸 만화가의 작품에 이은혜(경희대 동문) 님이 내레이션을 맡아 주었다. 드로잉 쇼에 이어서 윤경로 상임대표의 기념사, 김정수 육사 교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끝으로 신흥무관학교가 육사의 뿌리임을 상징하기 위해 6월 4일 육사 모든 생도들이 펼친 ‘화랑의식’(분열)으로 온라인 기념식을 마무리했다. 한편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는 110주년을 맞아 음악회, 전시회, 학술회의, 국내 유적지 답사, 콘텐츠 공모전 등을 계획하고 있다.

금, 2021/06/25-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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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화 <광대 : 소리꾼 감독판> 조정래 감독

 

인터뷰 :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민족의 흥과 한이 다시 울려 퍼진다. ’ 작년 7월, 코로나19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독창성과 풍부한 볼거리로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던 영화 <소리꾼>이 <광대>라는 이름의 ‘감독판’ 영화로 다시 돌아온다.
감독판이니 만큼 이전 개봉작에서 다루어지지 못한 서사들이 과연 어떤식으로 가미되었을지, 연출자의 시선을 따라 가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포인트다. 연구소에서는 오는 9월 전격 재개봉을 앞두고 전국을 돌며 시사회를 진행하고 있는 <광대 : 소리꾼 감독판>의 조정래 감독을 만나 보았다.

● 개봉 1년여 만에 ‘감독판’으로 다시 돌아왔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나?

● 일단 나부터가 판소리 고수(鼓手), 즉 국악인 출신이다. 인간문화재이신 정철호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이수자 자격까지 얻었다. 대학교 시절 영화 <서편제>를 보고 국악에 빠져들기 시작했는데 거의 미쳐있다시피 했던것 같다. 졸업 후 ‘바닥소리’라는 단체를 만들고 전국으로 공연을 다닐 정도였
으니까.(웃음) 어쨌든 대학교 때 판소리를 주제로 한 단편시나리오를 하나 구상했는데 그게 바로 이 영화의 모태가 된 ‘회심곡’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다. 영화 <귀향> 역시 판소리와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나눔의 집’과 수요집회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판소리 공연을 나가게 되면서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판소리는 영화감독인 나 스스로의 서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콘텐츠다. 이런 판소리를 주제로 한 영화 <소리꾼>, 게다가 그걸 감독판으로까지 선보일 수 있게 됐으니 감회가 남다르다. 보면 알게 되겠지만 기존 개봉작에 비해 소리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장면이나 음성, 관련 이야기들이 다수 살아났다.

● 영화 기획단계에서는 ‘남북합작영화’로 추진되었다고 들었다. 특별한 준비과정이 있었을 것 같은데?
● ‘남북합작’이라는 키워드는 이 영화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데 중요한 포스트를 차지한다. 제작 초기 단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서울과 평양 동시개봉을 준비했을 정도다. 지금이야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있지만 영화를 기획할 2018년 당시만 해도 평창올림픽과 4.27 판문점선언을 계기로 남북 간의 평화
무드가 펼쳐지던 시기였다. 나 역시 그 바람을 타고 그해 11월 당시 김덕룡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방북단에 함께했었는데 바로 그때 영화의 북한 로케이션 기회를 얻게 됐다. 방북 기간 내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준비해간 <광대> 제작계획과 시나리오 등을 소개하고 다녔는데 다행히 북측 주관 단체에서 관심을 가져줬다. 어느 날 새벽 호텔로비로 나오라고 하더니 시나리오를 소개해보라고 하더라.(웃음) 그후로 남북합작영화 계획이 급물살을 타게 됐고 귀국 후에는 협의를 진행해보자는 연락이 북측으로부터 왔다. 그때가 2018년 12월경이었다. 협의는 중국 북경에서 남북 측 관계자가 만나 이뤄졌는데 우리가 쓴 제작 계획서를 북한 측에서 따져보고 실행 가능한 부분을 검토하는 형식이었다. 협
의 과정 내내 북측은 대단히 진중한 태도로 임했다. 단 한 줄도 그냥 넘어가는 일 없이 꼼꼼하게 묻고 가능 여부를 검증하더라. 시나리오의 취지는 물론이고 촬영 장소는 어디로 하는지, 어떻게 이동하는지, 엑스트라는 어떻게 지원하는지 등등 … 합의서만 해도 10번은 수정한 것 같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오히려 이런 꼼꼼하고 진지한 북측의 태도 덕분에 이 영화의 남북합작이 성사될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그래서 영화 촬영기간 중 보름에서 한 달 정도를 북측에서 촬영하고 엑스트라까지 지원받기로 합의됐었다. 다만 영화 메인 캐릭터 중 한 명을 북측 배우로 하자는 제안은 거절당했다. “북한에서 영화는 사상이란 말이오!” 라며 단호히 거절하더라. (웃음) 아참, 이 만남은 물론 통일부의 정식허가를 받고 이뤄진 것이다. 귀국보고도 꼼꼼히 했다.

영화 <광대 : 소리꾼 감독판> 포스터

● 그러나 2019년 하노이 북미회담 이후부터는 남북관계가 급속히 얼어붙었다. 영향을 받았을 것 같은데?

● 맞다. 개인적으로도 제일 아쉬운 부분이다. 하노이 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야심차게 기획했던 북측 촬영이 무산됐다. 최대한 남북합작영화로 완성을 시키고 싶었기에 긴장이 완화되는 시점을 기다려보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속절없이 시간이 가고 2019년 여름이 지나면서부터는 더 늦어져서는 이도저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결국 남한만을 무대로 영화를 찍게 됐다. 정말 아쉬웠다. 등장인물들이 한반도 강산을 방랑하는 로드무비적인 느낌이 중요했는데 남쪽의 풍경만으로 묘사해야 했으니. 최후의 수단으로 북측에 사전 답사를 가서 촬영한 영상(주로 자연을 소재로 한)이라도 써보려 했는데 그 시도조차 무산됐다. 아무리 자연풍경이라지만 남북관계가 워낙 안 좋은 상황인지라 북한과 관련된 어떤 것도 담을 수 없었다. 색안경 낀 여론몰이에 당할 수도 있고 영화 흥행에도 타격을 받을 거라는 우려들이 많았다. 괴로웠다. 주위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의 의견이기에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었던 거다. 그래서 2020년에 개봉한 <소리꾼>은 감독 입장에서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 물론 영화의 작품성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코로나 때문에 흥행은 잘 안됐지만. (웃음) 동경국제영화제, 스
페인 한국영화제, 중동한국영화제 등에 개막작으로 초청됐고 배우들의 연기력도 주목받았다.

● 말이 나온 김에 감독판 <광대>와 기존 개봉작 <소리꾼>의 차별점을 이야기해 달라

● 아까 잠시 언급했지만, 기존 개봉작에서는 담지 못한 사전답사 영상, 북한의 자연풍경 영상들이 이번 감독판에는 전부 녹아들어 있다. 사전답사 당시 묘향산부터 황해도를 돌면서 북한의 풍광명미(風光明媚)를 찍어놨었는데 그걸 잘 편집하여 영화의 배경으로 대폭 활용했다. 이런 측면에서 <소리꾼>은 감독판인 <광대>에 와서야 ‘남북합작’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 이 영화를 봤을런지 잘 모르겠으나 만약 볼 수 있다면 <광대 : 소리꾼 감독판>을 봐줬으면 좋겠다. 또 하나의 차별점은 비주류의 이야기, 즉 기존 영화에서 생략됐던 조연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났다는 점이다.
한 예로 <소리꾼>의 광대패들에 대한 이야기를 완결성 있게 보강했다. 그리고 한국판 레미제라블 같
은 느낌을 조금이라도 살려보고자 민중의 저항적 측면, 혁명적이고 반봉건적 요소도 조금 강화시켰다. 물론 이런 부분들은 재촬영을 한 것이 아니라 기존 개봉작에서는 생략됐던 부분을 최대한 살린 것이다. 배우들, 이유리 씨나 김하연 양(아역배우)이 노래하는 장면도 좀 더 추가했다. 그러다보니 러닝 타임이 좀 길어졌는데 시청각적 감상이 풍부해지고 서사의 흐름을 빠르게 하는 것으로 보완해보려 했다.

● 감독판 개봉을 맞아 공개할 수 있는 촬영 에피소드가 있다면?

● 2020년 개봉 뒤에 인상 깊었던 장면으로 ‘학규(극중 주연)’가 피투성이의 몸으로 최후의 판소리를 하는 장면을 많이 말씀해주시더라. 실제로 그 장면은 현장에서도 굉장히 깊은 울림을 줬다. 괴산에 있는 세트장에서 촬영했는데 매서운 겨울 날씨로 입과 손이 얼어붙은 상황에서도 배우들이 완전히 몰입해줬다. 영화상 어떤 사운드 효과도 주지 않고 오로지 현장음만으로 소리를 전달한다는 원칙으로 촬영했기에 ‘학규’ 역을 맡은 이봉근 배우로서도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혼신을 다해 소리를 내줬다. 그 진심이 전해졌던지 당시 세트장에 있는 배우와 스텝들이 그 장면을 촬영하며 모두 울었다. 곤란했던 것은 악역들도 울고 있어서(웃음). 어쨌거나 바로 그런 혼신의 소리가 판소리의 ‘프로토타입’이 아닌가 생각한다.
극중 ‘청이(아역)’가 강물에 뛰어드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실제 시퍼런 강물에 뛰어들어야 했기 때
문에 배역을 맡은 김하연 양의 고생이 많았다. 처음에는 대역을 쓰려고 했는데 자신이 직접 하겠다고
나섰다. 전체적으로 배우, 스태프들의 팀워크가 좋았고 협력이 잘 이뤄졌다. 그리고 이건 영화 스토리
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에피소드인데 영화에 나오는 전통 공예품, 이를테면 괴불노리개나 복주머
니 같은 소품들은 전통공예작가인 이혜진 님, 내 아내가 직접 만든 것이다.(웃음) 아내가 미술팀 일
원으로 참여하며 많은 도움을 줬는데 한번쯤 소개하고 싶었다.

● 감독판인 만큼 영화를 통해 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 것 같다.

● 가족의 복원이다. <광대 : 소리꾼 감독판>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갈등으로 얽히고설키는 것이 아
닌, 길 위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이웃들이 점차 하나의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남북합작
의 영화를 만들어보고자 시도한 것 또한 바로 그런 지향에서다. 분단된 남북이 ‘가족의 복원’을 이루어가며 통일까지 꿈꾸는 것, 그런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북한에서 촬영한 풍경들을 이번 <광대 : 소리꾼 감독판>에 넣으면서 이런 감정은 더 절실해졌다. 북한의 자연은 아름다우면서도 이질감이 없다. 외국에 온 것 같은 낯선 느낌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어디 자연뿐이겠는가. 북한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직접 대면했을 때 느낀 감정은 그냥 ‘똑같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식, 술을 좋아하는 것, 흥 많고 신명 있는 것 … 다르고 이질적인 것은 우리들의 심리적 거리일 뿐이다. 이렇게 꼭 닮은 자연, 사람을 느끼면서 ‘가족의 복원’에 대한 꿈을 관객 분들과 공유하고 싶다.

 

 

● 조금 이른 감이 있는 질문이지만 혹시 지금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이 있는지? 있다면 간단히 소개를 부탁드리면서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싶다.

●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일본 홋카이도 조선인 강제노동자와 아이누족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디어는 몇 년 전, 일본 홋카이도에서 <귀향> 시사회를 통해 만나게 된 교수님으로부터 제공받았다. 그 교수님이 식민지 당시, 홋카이도로 끌려온 조선인 강제징용노동자들의 사연과 아이누족에 대한 일제의 탄압정책에 대해 설명해주시면서 꽤나 많은 사진과 자료들을 함께 주셨다. 그리고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유골이 묻혀있는 장소들과 아이누 인종연구의 현장 훗카이도대 ‘동물실험실’, 아이누 박물관 등을 안내 받았다. 일본이 조선인과 아이누 인들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조선인들이 끌려간 군수공장이나 탄광 등의 실상은 어땠는지, 그곳에서 탈출하려던 조선인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
는지 등등. 그 참상이라는 게 듣기만 해도 괴로운 것이어서 참 많이도 울었다. 그렇게 아픈 감정을 느끼면서 시나리오를 써내려가게 됐고 대략적인 뼈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걸 영화로 만들려면 만만치 않은 돈이 필요할 것 같다. (웃음) 아무튼 지금은 <광대 : 소리꾼 감독판> 관련 활동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차차 구체화시켜 나갈 예정이다.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면 아마 민족문제연구소에도 종종 도움을 요청드리게 될 것 같다. 부족함이 많겠지만 회원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기대를 부탁드린다.

토, 2021/06/26-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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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71]

대륙고무, 친일귀족세력과 일본자본의 결합체
용산 원정에 자리했던 조선 고무신의 대명사

 

이순우 책임연구원

 

조선총독부에서 매달 발행하던 기관잡지(機關雜誌) <조선(朝鮮)> 1924년 3월호에는 「호모화(護謨靴) 전성(全盛)의 조선(朝鮮)」이라는 제목의 토막글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호모’는 ‘고무(ゴム)’의 일본어식 음차(音借) 표기이므로, ‘호모화’는 곧 ‘고무신’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근시(近時) 호모화공업의 발달에 따라 가격이 저렴하고 내구력(耐久力)과 방수력(防水力)이 있어서 중류자 이하(中流者 以下)의 수요가 격증(激增)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선내생산(鮮內生産)의 상황을 보면, 대정 9년(1920년)에는 극히 미미했던 것이었으나 10년(1921년)에는 가격(價格) 17만 8천 원(圓)에 13만 7천 족(足)의 생산이 있었고, 11년(1922년)에는 일약(一躍) 94만 원에 달했으며, 12년(1923년)에는 아직 정확한 숫자를 판별하지는 못하나 적어도 280만 원(400만 족)의 거액에 달할 것이다. 이밖에 내지(內地, 일본)에서의 이입액(移入額)은 12년에는 약 480만 원(685만 족)이었으니까 내선(內鮮)을 합산하면 실로 1,165만 족이라는 놀랄만한 수요를 나타내고 있다.
호모화의 수용(需用) 탓에 양화(洋靴) 및 조선화(朝鮮靴)는 비상한 타격을 받았고, 대정 9년에는 양화의 생산이 32만 6천 족이었으나, 동 10년에는 18만 8천 족, 동 11년에는 다시 13만 3천 족으로 줄어들고 있다. 또 선화(鮮靴)의 쪽은 대정 9년에는 54만 4천 족이었다가, 10년에는 일시(一時) 70만 4천족으로 증가하였으나 11년에는 급전직하 32만 8천 족으로 감소했다.

이 글은 바야흐로 조선 고무신의 탄생과 더불어 가히 고무신의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일찍이 이 땅에 고무신의 등장은 1919년 무렵에 시작된 일이었는데, 이때까지는 일본 쪽에서 건너온 ‘단화형(短靴型)’ 고무화가 전부였다. 이것은 서양식 구두를 본떠 만든 형태이며, 구두 자체를 전부 고무로 만들었다고 하여 ‘총고무화(總ゴム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기존의 ‘경제화(經濟靴)’ 또는 ‘편리화(便利靴)’에 고무바닥만을 덧댄 ‘고무저화(底靴)’ 형태가 나타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값싸고 질기다”는 고무신 자체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조선신발’ 형태의 고무신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21년 봄의 일이었다. 그 선두에 선 업체는 국산 고무신의 대명사로 여겨질 만큼 유명했던 대륙고무공업소(大陸ゴム工業所)였다. 

 

(왼쪽) <매일신보> 1921년 2월 1일자에는 대륙고무공업소와 원창양행의 공동명의로 나온 ‘순고무 경제화 및 순고무 양화’ 광고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대륙고무신과 관련하여 최초로 등장한 광고문안이다. (오른쪽) <매일신보> 1919년 9월 28일자에 게재된 원창양행(종로 1정목 47번지)의 광고문안이다. 이곳은 원래 이하영 자작의 아들인 이규원이 수출입 무역업을 목적으로 개설한 가게였으나, 1921년에 대륙고무신이 본격 생산되면서 자연스레 대륙고무공업소의 총판매부(總販賣部)로 전환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21년 2월 1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순고무 경제화 및 순고무 양화 광고문안’이 처음으로 수록된 것이 눈에 띈다.

 

본소(本)에서 수년래(數年來) 고무품 제조(製造)에 대하여 기다(幾多) 연구(硏究)를 중(重)하여 금(今) 기 연찬(其 硏鑽)을 수성(成)하고 구주(歐洲)에 전왕견학(專往見學)한 기사(技師)를 고빙(
聘)하여 공장(工場)을 신축(新築)하고 제조(製造)를 개시(開始)함은 아 조선(我 朝鮮)에서 본소(本
所)가 비조(祖)가 되고 취중(就中) 순(純)고무 경제화(經濟靴) 제조(製造)는 세계중(世界中) 다만
본소(本所)뿐이압. …… (중략)
경성부 용산 원정 1정목(京城府 龍山 元町 一丁目) 대륙고무공업소(大陸ゴム工業所)
경성 종로 1정목(京城 鐘路 一丁目) 위탁판매부(委託販賣部) 원창양행(元昌洋行)

 

여기에 대륙고무의 위탁판매부로 등장하는 ‘원창양행’(1919년 8월 18일 상호등록)은 원래 면포(綿布), 주단(綢緞), 저포(苧布), 모직(毛織) 등을 수입 판매하는 가게였으나 이때부터 고무신 총판매점으로 변신하였다. 이곳의 주인은 이하영(李夏榮, 1858~1929)의 장남 이규원(李圭元, 1890~1945)이었으며, 이하영은 익히 알려진 바대로 영어통역으로 관직에 발을 들여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러 외부대신과 법부대신을 지냈고 국권피탈 후에는 일제로부터 자작(子爵)의 작위를 부여받은 인물이었다.
대륙고무의 연혁을 서술한 몇몇 자료에 이곳에서 고무신을 생산 개시한 때가 1919년이라고 적어놓은 것이 곧잘 눈에 띄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회사에서 첫 고무신이 탄생한 것은 1921년의 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선> 1923년 1월호에는 조선총독부 상공과(商工課)에서 정리한 「호모화(護謨靴)에 관한 조사」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이 자료에는 ‘내지품(內地品)과 조선품(朝鮮品)의 공급상황’을 정리한 통계표도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이 가운데 1919년도와 1920년도의 해당부분에는 ‘내지품 이입고’만 표시되어 있을 뿐 ‘조선내 고무신 생산고’에 관한 집계수치는 전무한 것으로 보더라도 고무신의 국내생산은 1921년부터 개시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大陸護謨工業株式會社) 관련 주요 연혁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시정이십오년사>(1935)에 수록된 종로거리의 방공연습(防空演習) 사진자료를 보면 뒷 배경에 우연히 대륙고무총판매부(종로 1정목 47번지)의 간판이 포착된 모습이 눈에 띈다. 참고로 왼쪽 전봇대와 인접하여 조선광무소(朝鮮鑛務所, 종로 1정목 44번지) 간판이 붙어 있는 건물의 1층이 바로 그 유명한 이상(李箱)의 ‘제비다방’이 있던 공간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매일신보> 1922년 4월 6일자에 수록된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주식모집광고이다. 여기에 수록된 발기인 명부를 보면 창립위원장인 남작 이윤용을 비롯하여 후작 박영효, 자작 이하영, 자작 이창훈, 남작 이근호 등 친일귀족세력의 다수와 여러 일본인 실업가들이 동시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조선 고무신이 크게 득세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대륙고무공업소에서는 사세를 더욱 확장하기 위해 주식회사로 전환하기로 하고, 이에 따라 1922년 4월 6일에는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전체 발행 주식수 1만 주 가운데 1천 주에 대하여 주식공모를 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각 신문지상에 발표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창립 발기인(創立 發起人)의 명단에 포함된 인사들의 면면이었다.

 

후작 박영효(侯爵 朴泳孝), 자작 이하영(子爵 李夏榮), 자작 이창훈(子爵 李昌薰), 남작 이윤용(男爵 李允用), 남작 이근호(男爵 李根澔), 주성근(朱性根), 박용삼(朴容三), 박종환(朴宗桓), 유혁로(柳赫魯), 야마기시 유타로(山岸佑太郞), 토미타 기사쿠(富田儀作), 나카니시 토라히코(中西虎彦), 타나카 요시지로(田中吉次郞),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오키 야스노스케(大木安之助), 후쿠다겐이치(福田源一), 텐니치 츠네지로(天日常次郞).

 

여기에는 조선귀족 5인을 포함한 조선인 9인과 일본인 실업가 8인의 이름이 죽 나열되어 있는데, 가히 친일귀족세력과 일본자본의 결합체라는 평가가 나올만한 구성이었다. 천도교에서 발간한 월간잡지 <개벽(開闢)> 제33호(1923년 3월호)에는 농구생(弄球生) 필명의 「천현지황(天玄地黃)」이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고, 이 가운데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실체를 꼬집는 내용도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조선인 전용(朝鮮人 專用)의 고무화(靴)]

일조결하(一朝決河)의 세(勢)로써 조선인의 이물계(履物界)를 여지없이 점탈(占奪)하여 매년 수천만 원의 이금(利金)을 흡수(吸收)하는 고무화(靴), 그야말로 식자(識者)의 혼담(魂膽)을 서늘케 한다. 참패를 당한 건유혜(乾油鞋), 목리(木履), 망혜(芒鞋) 등의 재래상(在來商)은 한번 개량책(改良策)도 강구해 볼 여지가 없이 그냥 무조건(無條件)으로 영원히 수(手)를 속(束)할 뿐인가.… (중략) … 요사이에 이것을 경영(經營) 보려고 소자본(小�本)으로써 공장배치(工場排置)를 한 데가 기개소(幾箇所)가 있는 듯하나 이런 것들은 아직 아희적 작업(兒戱的 作業)에 지나지 못할 뿐이오, 개중(箇中)에 가장 우승(優勝)한 지위(地位)에 서서 인기(人氣)를 끄으는 자(者)는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大陸護謨工業株式會社)이다. 그러나 이 회사(會社)의 조직(組織)이야말로 좀 자미(滋味)스럽지 못하다. 표면(表面)의 광고(廣告)로는 조선인(朝鮮人)의 명의(名義)를 내여 세우고 이면(裏面)의 실권(實權)은 전부 일본인(日本人)의 장중(掌中)에서 놀아난다. 아아 천하(天下)가 받지 않는 고무화, 오직 조선사람의 돈이 맛나는가? 살피여라! 백천(百川)이 동해(東海)로만 경주(傾注)되는 줄을!!

 

(왼쪽) <동아일보> 1922년 9월 16일자에 수록된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광고문안이다. 여기에는 흥미롭게도 “이왕 전하(李王 殿下, 즉 순종)께서 어용(御用)하심에 황송함을 비롯하여 각 궁가(宮家)와 여관(女官) 각위의 애용을 받았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는 문구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오른쪽) <매일신보> 1925년 4월 5일자에 수록된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광고문안에는 용산 원정(龍山 元町)에 자리했던 대륙고무공장의 전경 사진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1926년 1월 25일에 발생한 고무증기가마 폭발사건으로 인해 인명피해와 함께 큰 재산손실이 빚어지기도 했다.

 

<조선총독부관보> 1922년 9월 8일자에 수록된 「상업 및 법인등기」 항목을 보면, 1922년 8월 15일에 설립된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본점 소재지는 경성부 원정 1정목 124번지(京城府 元町一丁目 24番地)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사업목적은 “호모(護謨, 고무)를 원료로 한 선화(鮮靴), 양화(洋靴), 지나화(支那靴) 및 기타 고무를 원료로 한 물품 일체의 제조 판매”라고 기재되어 있다.

 

 

취체역(取締役)에는 자작 이하영, 이규원, 자작 이창훈(자작 이근택의 습작자), 이명구(李明九, 남작 이윤용의 아들)와 일본인 이와마 료(岩間亮, 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서기 출신)가 이름을 올렸고, 이들 가운데 이하영이 대표취체역에 선임되었다. 이와 함께 감사역(監査役)에는 창립위원장이던 남작 이윤용을 비롯하여 조준식(趙俊植, 익산 거주)과 일본인 텐니치 츠네지로(天日常次郞)가 공동 취임하였다. 일본인 이와마 료는 1926년 1월 23일에 취체역에서 퇴임하였고, 도장관 출신의 중추원 참의였던 유혁로(柳赫魯, 1855~1940)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선임되어 종신재직(終身在職)하였다.
대륙고무의 유명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이곳이 조선총독의 순시행로에 포함된 적도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확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륙고무의 유명세에 편승하여 무단으로 상표(商標)를 도용(盜用)하였다가 결국 신문지상을 통해 공개적인 사죄광고(謝罪廣告)를 게재해야 했던 사례들도 여러 건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와중에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의 대표취체역 사장이면서 실질적인 소유주였던 자작 이하영이 1929년 3월 1일에 숨지자 그해 7월 26일에는 그동안 감사역 자리에 있던 남작 이윤용이 대표취체역 사장에 올랐고, 이하영의 아들인 이규원 역시 대표취체역 전무에 선임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의 하나는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본점과 공장 소재지가 용산원정(龍山 元町, 지금의 원효로 1가)에서 벗어나 경성부 중림동(京城府 中林洞) 155번지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총독부관보>에 게재되는 「상업 및 법인등기」 항목을 통해 확인해본즉, 이 일이 벌어진 때는 1932년 10월 20일이었다.
다시 1938년 9월 8일에 이르러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대표취체역 사장이던 남작 이윤용이 숨지자, 자연스레 자작 이규원이 홀로 대표취체역의 역할을 수행하는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관보> 1941년 3월 28일자에 수록된 「상업 및 법인등기」 항목을 보면, 1941년 1월 31일자로 기존의 취체역이던 권영일(權寧一), 윤정석(尹晶錫), 권영순(權寧順)은 물론이고 대표취체역이던 이규원(李圭元)과 감사역(監査役)이던 최상집(崔相集), 후지노 아이센(藤野愛泉), 이재영(李宰榮) 등이 일괄 사임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경성일보> 1929년 3월 10일자에 수록된 이하영 자작의 장의관련 기사이다. 그의 영결식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는 독립문외 광장(獨立門外 廣場)이다. 그가 죽은 후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대표취체역 사장은 이윤용 남작이 물려 받았고, 다시 그가 사망한 1938년 이후에 그 자리는 이규원 자작에게로 돌아갔다.

<조선일보> 1927년 3월 3일자에 수록된 대륙고무 상표도용에 관한 사죄광고이다. 대륙고무신이 하도 유명세를 떨치다 보니 이것과 흡사하게 대승표(大陞標)라는 글자로 소비자들을 현혹한 사례에 해당한다. 이것 말고도 1929년 12월에는 대축표(大祝標)라는 글자로 상표도용을 하다가 적발되어 사죄광고를 낸 별개의 사례도 있었다.

 

이들을 대신하여 이날 츠지모토 케이조(辻本敬三)와 카네코 요지로(金子要次郞)가 새로운 대표취체역에 공동 취임하였고, 츠지모토 에이이치(辻本英一), 이모세 기이치로(妹背義一郞), 츠지모토 노보루(辻本昇) 등이 취체역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감사역에는 쿠와바라 칸이치(桑原貫一)와 시모무라 카메(下村龜)가 선임되었는데, 여기에 나열된 이들은 모두 일본 오사카(大阪) 지역에 주소지를 두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었다.
이것으로 보면 바로 이 시기에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경영권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주식 지분 역시 이들의 수중으로 넘겨지면서 이 회사는 실질적으로 일본인 기업체로 전환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둔 바로 그 시기에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창설 이후 줄곧 전무와 사장으로 있던 자작 이규원이 숨졌다. <매일신보> 1945년 4월 28일자의 관련기사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알리고 있다.

 

조선귀족회(朝鮮貴族會) 부회장 이규원(李圭元) 자작은 그동안 숙환으로 가료중이던 바 24일 오전 한 시 부내 서대문구 중림정(中林町) 155번지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향년은 56세이며, 영결식은 28일 오전 열 시 자택에서 집행하는데 상주는 이종찬(李鍾贊) 소좌로 현재 출정중이다. 고(故) 이 자작은 경성에서 출생하여 한문사숙(漢文私塾)을 나와 서화(書畫)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왕직 시종(李王職 侍從), 대륙고무공업 사장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조선귀족회 부회장의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해방 직후에 <동아일보> 1946년 3월 20일자에 수록된 「사복(私腹)에 걸린 국재(國財), 1억 4천만 원, 70회사 공장을 적발, 군정청 감찰부(軍政廳 監察部)에서 즉시 전부 몰수」 제하의 기사를 보면,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회사와 공장을 새조선의 산업부흥이란 미명 하에 접수니 관리니 하여 맡아가지고 사리사복을 채우고 있던 곳을 대대적으로 적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바로 이들의 목록에 ‘대륙고무’도 포함된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 이곳이 적산기업체(敵産企業體)로 분류된 탓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이보다 한참의 세월이 더 흐르고 <경향신문> 1974년 1월 26일자에는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서울 서대문구 중림동 155의 2, 대표 이종호) 2층에서 불이나 2층과 1층 일부를 불태웠다는 내용의 기사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것보다 2년 뒤에 나온 <경향신문> 1976년 9월 28일자에 수록된 「주택지 195 공해업소 내년까지 이전(移轉) 명령」 제하의 기사에 매연, 폐수, 악취, 소음 등 을 유발하는 주거지역 내 공해업소의 하나로 ‘대륙아스타일(중림동 155)’이라는 회사가 포함된 것이 눈에 띈다.
아마도 이것이 대륙고무공업에 관한 거의 막바지의 흔적인 셈인데, 한때 친일귀족들의 집합체이자 조선 고무신의 대명사로 불렸던 대륙고무의 화려했던 시절은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토, 2021/06/26-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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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지금도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지뢰 !!!

 

이철민 전 고파지부장(현 파주지역신문 <파주에서> 편집위원)

 

 

지뢰 사고,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난 6월 4일(금요일) 오전 9시 50분경, 고양시 장항습지에서 습지 정화작업을 하던 50대 남성이 발목지뢰(M14) 폭발 사고로 무릎 아래가 절단되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장항습지는 람사르 습지에 등록된 생태계의 중요 지역으로 인구 100만의 고양은 물론 서울과 수도권 지역의 생물 다양성 보전과 인간의 환경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번 지뢰 폭발은 장항습지의 생태 보전과 정화작업을 진행하던 중 일어난 사고이기에 더욱 안타깝다.
‘지뢰’ 하면은 흔히 DMZ나 민통선 인근 군사지역에서 발생하는 사고 정도로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지뢰사고는 지금 이 순간 고양, 파주, 김포 등 수도권 일대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도 발생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휴전선 인근 지역에 지뢰가 매설된 것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으로 대량 살포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된 1964년을 기점으로 북한은 휴전선을 넘나들며 게릴라식 도발을 감행하였고, 휴전선의 철책선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던 이 시절 미군은 이 지역에 플라스틱 재질의 대인지뢰 M14를 대량으로 살포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우리군도 민통선 지역에 M14를 대량 살포한다.
이번에 장항습지에서 발견된 대인지뢰 M14는 강원도 화천, 양구, 인제 등 민통선 이북 지역에 매설해 놓은 이들 M14 대인지뢰가 장마와 폭우 등으로 유실되어 나뭇가지 등에 휩싸여 떠내려오다 장항습지에 가라앉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M14는 그 재질이 플라스틱이어서 폭우에 유실되면 땅으로 가라앉지 않고 나뭇가지 등과 함께 떠내려 오면서 한강 하류의 강기슭에 머무를 확률이 높다. 장항습지 지역은 하루 2회 서해안 밀물이 올라오다가 신곡 수중보에 막혀 물살이 머무는 곳으로 김포지역보다 수심이 얕아 플라스틱과 스티로폼 등 생활 쓰레기들이 갈대 및 버드나무 사이로 밀려와 쌓이는 곳이기도 하다. 민통선 지역에는 한국군과 미군이 매설한 M14 이외에도 북한군의 목함지뢰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목함지뢰는 평화의 댐, 화천댐, 소양강댐, 팔당댐 등 강물의 낙차가 심한 댐을 거치면서 목함지뢰 내부의 폭발장치가 분해되어 한강 하류에 이르면 나무상자만 떠내려 올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이에 비해 플라스틱 재질로 가볍고 작은(지름 4.5센티, 두께4센티 정도) M14는 폭우에 유실되어도 분해되지 않고 떠내려와 갈대밭이나 버드나무 가지 등에 걸리거나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다음은 최근 2년 동안 발생한 M14 지뢰사고 내용이다.

2019년 8월 29일 : 김포 해병 2사단 담당 장교(중위)가 철책선 바깥 갈대 제거작업 수행 중 지뢰폭발사고로 왼쪽 발목 절단

2020년 7월 4일 : 김포대교 상류 고양시 한강변에서 낚시하던 시민 지뢰폭발 사고로 다리 절단

2020년 9월 10일 : 강원도 인제군 12사단 이모 중사 수해복구 철책작업을 수행하던 중 지뢰폭발 사고로 발목 절단

2021년 6월 4일 : 고양시 장항습지 정화작업 중 민간인 지뢰폭발 사고로 오른쪽 발목 절단

가장 넓은 지역에 매설된 대인지뢰, M14

우리 국민들은 지뢰 폭발 사고가 발생하면 북한군의 짓으로 알고 있으나 지뢰 폭발사고의 90% 이상은 미군과 한국군이 매설한 대인지뢰에 의한 것이다. M14 대인지뢰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서 생산되어 DMZ 지역의 남방한계 철책선이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던 시기에 북한군의 DMZ 도발을 방어할 목적으로 약 1,300개소에 약 40만 발을 매설하여 놓았다. 한마디로 한반도 곳곳이 지뢰밭이 되어버린 것이다. 1960년대에는 미군이, 1970년대에는 한국군이 주도적으로 매설한 이 지뢰는 폭우가 내리면 빗물을 따라 강과 바다로 떠 내려와 무고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괴물이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군인과 민간인 지뢰사고자 약 6,000여 명 중 90%가 M14 대인지뢰 폭발사고 피해자이다. M14 대인지뢰는 누군가 제거하지 않는 이상 혼자서 없어지지 않는다. 

 

민통선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지뢰 매설 경고판(한국지뢰제거연구소 제공)

핵과 더불어 20세기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유해한 무기 중의 하나이다. 대인지뢰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던가 다리를 절단시키거나 동물의 목숨을 앗아가야만 자신도 소멸되는 아주 비열한 살상 무기이다.
현대식 첨단 무기의 발전으로 대인지뢰가 적의 침투를 저지하는 효과는 거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북한군이 휴전선을 넘나들며 도발하던 1960년에는 대인지뢰가 적의 침투를 저지하는 효과가 높았다. 그러나 이제 대인지뢰는 전방에 근무하는 우리 군장병, 그리고 후방 국민들의 목숨과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대인지뢰 전면 사용금지 협약에 가입해야 지뢰는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1983년 12월 특정 재래식 무기의 사용금지 및 제한에 관한 협약(CCW 제1의정서)에는 가입하였다. 그리고 1996년 9월 재래식 대인지뢰 전면 사용 금지 협약이 ICBL(국제대인지뢰금지운동)에 의해 발효되었다. 그러나 우리 정부와 미국은 북한과 군사적 대치 상황을 이유로 이 협약에는 가입을 유보하고 있다.
국내의 대인지뢰 금지운동은 시민단체와 종교단체가 주축이 된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가 국내 대인지뢰 피해자 실태 조사와 특별 보상법을 추진하고 있으나 국방부의 비협조로 법 제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뢰 문제는 이제는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특히 민통선 지역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파주는 지금도 지뢰의 위험이 상존하는 지역이다. 지뢰 폭발사고의 근본적 해결책은 개인적 차원에서 조심한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다. 지뢰 문제를 공론화하고 여론화하여 군과 자치단체는 물론 지역 주민과 전문가, 정치인 등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법제화를 이루어야 비로소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토, 2021/06/26-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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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6월 후원회원 초대의 날 행사

• 국세현 기획실 회원사업부팀장

6월 19일 후원회원 초대의 날, 후원회원들과 지인 30명이 참석한 가운데 효창원 답사와 박물관 관람으로 진행했다. 방학진 기획실장의 안내로 김구 선생 묘역을 비롯해 이동녕 주석, 차리석 비서장, 조성환 군무부장 등 임정요인의 묘역과 안중근 의사의 가묘,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삼의사 묘역을 둘러보며 한국 근현대사를 되짚어 갔다. 30도가 넘는 폭염이었지만 초등 4학년의 아이부터 고희를 훌쩍 넘긴 회원까지 한마음으로 독립운동가의 묘역을 돌며 그분들의 항일정신을 되새기는 뜻깊은 자리였다. 효창원 답사 후 충분한 사회적 거리와 시간차를 두고 학예실과 기획실 상근자의 안내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관람하였다. 1부 일제는 왜 한반도를 침략했을까, 2부 일제의 침략전쟁,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3부 한 시대의 다른 삶-친일과 항일, 4부 과거를 이겨내는 힘,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로 이어졌다. 관람 후 참석자들에게서 이번 행사와 관련해 귀중한 의견을 청취했다. 참석자들은 전시물 1~4부 모두가 유익했는데 특히 친일과 항일을 대비해서 보여준 3부가 가장 인상 깊었다고 답변했다.
그 외 특기할 만한 응답으로는 “백년전쟁과 프레이저 보고서의 영상은 참 좋았으며 최신 트랜드에 맞게 유튜브 라이브 등 좋은 컨텐츠를 기대한다.” “반일정신을 일깨우는 행사를 더 자주 했으면 한다.” “지방 답사도 재개되고, 지방 회원 배가와 결속력 강화를 위한 오프라인 활동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지금이라도 민족반역자를 색출하여 처벌하여야 하며 하루빨리 통일이 이뤄져야 한다.” 등이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을 맞는 2021년 상반기에, <민족문제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 특별한 초대> 후원회원 초대의 날이 세 차례 개최되었다. 하반기에도 더 많은 후원회원을 모시고 알찬 내용으로 초대의 날 행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화, 2021/07/27-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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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과 함께하는 시민역사강좌 열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에서 주관하는 민간연계 시민대학에 3년 연속으로 선정되어 시민역사강좌를 개최하였다. 6월 29일부터 9월 14일까지 3개월 간 진행되는 시민역사강좌는 ‘프로그램Ⅰ: 내일을 여는 선언-우리시대 표상이 된 가치들과 그 역사’ 5꼭지와 ‘프로그램Ⅱ: 한일역사부정론의 궤변’ 5꼭지로 구성되며,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식민지역사박물관 5층 강의장에서 온라인 ZOOM
화상강좌로 진행하고 있다. 수강생은 일반 시민과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 등이 참여하고 있는데, 20대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 분포를 보인다. 비대면으로 진행하는
강의지만 꾸준하게 매주 30여 명이 참여하여 시민강좌에 대한 열의를 보여주고 있다.
프로그램Ⅰ은 노동, 여성, 난민, 동물생명권, 지역을 주제로 한국현대사에서 변혁을 위해 외쳐진 각 분야의 선언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고 우리시대가 현재 지향하고 있는 다음 사회의 모습을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8월 17일부터 진행할 프로그램Ⅱ의 기획 의도는 현재의 일본과 한국에서 나타나는 역사부정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자행된 강제동원의 문제를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을 이열치열로 이겨내려는 참여자들의 열기는 우리 사회현상의 변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시민사회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실천적 움직임으로 승화하고 있다.

화, 2021/07/27-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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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강제동원증언전 개막

 

•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피해자들의 목소리로 일본의 산업유산 시설이 지워버린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역사를 ‘증언’하는 기획전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가 7월 16일(금)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개막했다. 이번 전시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공동으로 주최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시작하는 날에 맞춰 개막한 이 전시회는 강제동원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통해 일본에 ‘전체 역사를 알게 하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 이행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있다. 전시는 크게 2부로 나눠진다. 먼저 제1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에서는 ▲‘가라면 가는 거지’ – 식민지 조선 청년의 강제동원 실상 ▲‘갇혀서 일하는 신세야’ – 강제노동 현장의 일상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 반인권적인 처우와 사건·사고 ▲‘다 같은 노예 신세였어’ – 중국인 피해자와 연합군 포로의 강제노동 실태 등이 피해자들의 증언영상을 중심으로 전시된다. 이 같은 증언영상들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20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채록」 사업(민족문제연구소 수행)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2004년 출범) 조사활동 ▲강제동원피해자 소송운동 ▲일본 시민단체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과 ‘나가사키 중국인 강제연행의 진상을 조사하는 모임’을 통해 확보된 것들이다.

 

특히 하시마 강제동원 피해자인 서정우 씨, 이경운·이지창 씨의 증언영상과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강제노동실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자료들이다. 수십 년간 이 문제에 천착해온 일본 시민단체 POW연구회와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의 협력으로 공개가 가능했다. 제2부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에서는 유네스코 일본 산업유산의 등재 논란과 현재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역사를 부정하는 산업유산정보센터의 문제점을 다루었다. 특히, 제2부는 2015년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린 독일 본에서 일본 산업유산 전시(戰時) 강제노동의 어두운 역사를 세계유산위원들에게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민족문제연구소 주최·주관)의 확장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에 폴란드 아우슈비츠수용소, 독일 푈클링겐 제철소 등과 같은 ‘부정적 세계유산Negative Heritage)’이 어떤 방식으로 후대에 교훈을 전하고 있는지를 소개하면서 일본 산업유산의 역사부정 실태를 꼬집는다. 
아울러 연구소는 이날 전시 개막과 함께 강제동원의 전체 역사를 전시하도록 촉구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안을 지지하고 일본 정부의 충실한 이행을 촉구하는 한일 시민단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같은 활동들은 일본 산업유산 현장에서 한국인, 중국인, 연합군 포로 등에게 가해진 전시 강제노동의 역사를 알리는 온라인 한일시민연대공동행동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 앞으로도 다양한 캠페인 및 이벤트가 기획·추진될 예정으로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

수, 2021/07/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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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일제잔재 청산 조례를 앞장서 발의한 김영진 경남도의원

인터뷰 : 방학진 기획실장

 

전국적으로 친일 및 일제잔재 청산을 위한 지자체의 조례는 18개로 모두 3·1운동 100주년이었던 2019년 이후 제정되었다. 광역단체로는 서울, 부산, 광주, 울산, 경기, 경남, 전남, 충남, 충북, 제주이며 기초단체로는 경기 고양, 경남 김해이다. 이는 일제잔재 청산운동의 전국적 확산이라는 면에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례는 민간 차원을 넘어 지방 정부가 예산을 투입하여 실제 사업을 집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이다. 또한 지방 의회의 논의 과정을 거쳐 제정되어 주민들의 공감대가 일정하게 반영되기 때문에 친일청산운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경남의 경우 2020년 12월 31일 「경상남도 일제잔재 청산 등에 관한 조례」 제정에 이어 2021년 6월 3일 「경상남도교육청 일제잔재 청산에 관한 조례」가 제정되었다. 지자체와 교육청 모두 관련 조례를 제정한 지역은 경남 외에도 서울, 광주, 충남, 전남, 제주가 있다. 이번 달 민족사랑에서는 「경상남도 일제잔재 청산 등에 관한 조례」와
「경상남도교육청 일제잔재 청산에 관한 조례」를 모두 대표 발의하여 통과시킨 김영진 경남도의원(창원)을 소개한다. 김영진 의원은 2018년 창원 용지동·봉림동에 출마하여 창원 최고 득표율(58.1%)로 당선되었다.

 

 

● 도의원이 되시기 전에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해오셨는지요?
● 홍준표 경남도지사 시절, 경남의 학생 무상급식 중단과 진주의료원 강제폐쇄 등 지역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특히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처벌을 촉구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2013년과 2014년에는 10개월 동안 창원시청 사거리에서 이명박 구속을 촉구하는 1
인 시위를 했고, 2016년과 2017년에는 경남도청 정문, 명서사거리, 도계삼거리 등에서 박근혜 구속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5개월 간 진행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검찰개혁의 목소리를 내는 데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본업으로 해법다산학원을 경영하였습니다. 도의원 당선 후 2018년 7월부터 의정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학원 운영을 아내에게 넘겼습니다.

● 친일청산 관련 조례를 다수 발의, 제정하셨는데요.
● 대한민국 정신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단죄와 학생들에 대한 올바른 역사교육이 없이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의회 5분 자유발언을 통해 <친일인명사전> 보급을 촉구했습니다. 또한 이승만 정부 아래서 자행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인 국민보도연맹사건 피해자들에 대해 법원의 무죄 선고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경상남도 일제잔재 청산 등에 관한 조례」, 「경상남도교육청 일제잔재 청산에 관한 조례」 외에도 「경상남도교육청 역사교육 활성화 조례」와 「경상남도 독립유공자 묘지 지원에 관한 조례」를 발의하여 제정했습니다. 알다시피 국립묘지 밖에 있는 독립유공자의 묘지가 방치되거나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조례에는 벌초비 지원, 묘지 보수 비용 지원, 안내판 설치 등의 내용을 담았습니다. 묘지 지원 조례는 강원, 경기에 이어 3번째입니다.
조례 외에도 ‘친일재산귀속법 재·개정 등 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 촉구 건의안’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 무덤 이장과 서훈 취소를 위한 국립묘지법, 상훈법 개정 촉구 결의안’도 발의하였습니다. 2020년 7월 23일 결의안 통과 소식을 듣고 김원웅 광복회장님이 경남도의회까지 오셔서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태극기와 ‘역사정의실천 정치인’ 선정패를 주시며 축하해 주셨습니다.
김영진 의원의 관심사는 비단 친일문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경남도 내에 남아 있는 전두환의 흔적을 지우는 일, 독립운동가를 지역화폐의 도안으로 넣는 일, 강제징용 피해자 지원 등 다양하다. 특히 올해 3월에는 김영진 의원의 제안을 받아들여 창원시가 전국 최초로 지역 독립운동가(이교재, 명도석, 배중세, 김진훈, 주기철)를 새긴 새로운 창원사랑상품권(누비전)을 발행해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김영진 의원은 자기 동네에 도로를 내거나 지역구 유권자들에게 눈도장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하지 않
는다. 우리나라의 지방정치의 현실로 보자면 내년 재선이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김영진 의원이 정치에 입문하면서 다짐했던 말을 보면, 그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모범으로 삼고 있는 정치인이 누구인지 짐작된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람 사는 세상을 함께 만들겠습니다.”앞으로 지방의회든 국회든 이런 정치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수, 2021/07/28-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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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소개]

노신 추도문

이육사

 

이 글은 1936년 10월 23일부터 29일까지 5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발표된 이육사의 노신 추도문이다. ― 편집자주

 

노신(魯迅)의 본명은 주수인(周樹人)이며 자는 예재(豫才)다. 1881년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탄생.
남경에서 광산학교에 입학하여 양학에 흥미를 가지고 자연과학에 몰두하였으며, 그 후 동경에 건너가
서 홍문학원을 마치고 선대 의학전문학교와 동경 독일협회학교에서 배운 일이 있다. 1917년에 귀국하
여 절강성 내의 사범학교와 소흥중학교 등에서 이화학 교사로 있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오사문학운동 후 중국문학사조가 최고조에 달하였을 시대에 북경에서 주작인(周作人) 경제
지(耿濟之) 심안영(沈雁永)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고 곽채약(郭採若) 등의 로맨티시즘 문학
에 대하여 자연주의 문학운동에 종사하고 잡지 <어사(語絲)>를 주재하는 한편, 북경정부 교육부 문서
과장 및 국립북경대학 국립북경사범대학 북경여자사범대학 등의 강사로 있었으나 학생운동에 관계되
어 북경을 탈출하였다.
1926년 하문대학 교수로서 재직하다가 남하, 그 후 광주중산대학 문과 주임교수에 있다가 1928년 사직하고 상해에서 저작에 종사하는 한편 1930년 <맹아월간(萌芽月刊)>이란 잡지를 주재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문학태도는 점점 좌익으로 전향하여 1930년 ‘중국좌익작가연맹’이 결성되자 여기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국민정부의 탄압을 받아서 1931년 상해에서 체포되었다. 그 뒤 끊임없는 국민정부의 간섭과 남의사(藍衣社)의 박해에서 꾸준히 문학적 활동을 하고 국민정부의 어용단체인 ‘중국작가협회’를 반
대하던 중 지난 10월 19일 오전 5시 25분 상해시 고탑 자택에서 서거하였다. 향년 56세.
주요 작품은 <아큐정전(阿Q正傳)> <납함(吶喊)> <방황(彷徨)> <화개집(華蓋集)> <중국소설사략(
中國小說史略)> <약(藥)> <공을기(孔乙己)>등이다. ― 조선일보 편집자주

 

1932년 6월초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식당에서 나온 나와 M은 네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조간신문을 사서 들고 근육신경이 떨리도록 굵은 활자를 한숨에 내려 읽은 것은 당시 중국과학원 부주석이요 민국혁명의 원로이던 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을 당하였다는 기사이었다.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하게 늘어선 프랑스공무국 순경들의 예리한 눈초리를 등으로 하나 가득 느끼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까지 올 동안은 침점이 계속되었다. 문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 R씨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노신 임종

 

중국 좌익작가연맹의 발안에 의하여 전세계에 진보적인 학자와 작가들이 상해에 모여서 중국 문화를 옹호할 대회를 그해 8월에 갖게 된다는 것과 이에 불안을 느끼는 국민당 통치자들이 먼저 진보적 작가진영의 중요분자인 반재년(潘梓年. 현재 남경유폐)과 이제는 고인이 된 여류작가 정령(丁玲)을 체포하여 행방불명케 한 것이며 여기 동정을 가지는 송경령(宋慶齡) 여사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자유주의자들과 작가연맹이 맹렬한 구명운동을 한 사실이며 그것이 국민당 통치자들의 눈에 거슬려서 양행불이 희생된 것과 그 외에도 송경령 채원배(蔡元培) 노신 등등 상해 안에서만 30명에 가까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의사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 3일이 지난 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자는 만국빈의사 앞에 닿았다. 간단한 소향(燒香)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 때 젊은 두 여자 수행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마기에 검은 마고자를 입은 중년 늙은이, 생화에 쌓인 관을 붙들고 통곡하던 그가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라고 말하고 난 10분쯤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 앞이며 처소가 처소인 만치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아줄 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었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시 고탑 9호에서 영서(永逝)하였다는 부보(訃報)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니 어찌 조선의 한 사람 후배로써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

 

중국 문학사상에 남긴 그의 위치

“「아큐정전(阿Q正傳)」을 다 읽고 났을 때 나는 아직까지 아큐의 운명이 걱정되어 못 견디겠다”고 한 로망 롤랑의 말과 같이 현대중국문학의 아버지인 노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아큐정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의 아큐들은 벌써 로망 롤랑으로 하여금 그 운명을 걱정할 필요는 없이 되었다. 실로 수많은 아큐들은 벌써 자신들의 운명을 열어 갈 길을 노신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노동층들은 남경로의 아스팔트가 자신들의 발밑에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시고탑 노신촌의 9호로 그들이 가졌던 위대한 문호의 최후를 애도하는 마음들은 황포탄(黃浦灘)의 붉은 파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큐시대를 고찰하여 보는데 따라서 노신 정신의 3단적 변천과 아울러 현대중국문학의 발전과정을 알아보는 것도 그를 추억하는 의미에서 그다지 허무한 일은 아닐 것이다.

 

노신 서거 기사, 매일신보 1936.10.20

 

중국에는 고래로 소설이라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완전한 예술적 형태는 존재하지 못했다. 삼국연의나 수호지가 아니면 홍루몽쯤이 있었고 다소의 전기가 있었을 뿐으로서 일반 교양있는 집 자제들은 과거제도에 화(禍)를 받아 문어체의 고문만 숭상하고 백화소설 같은 것은 속인의 할일이라 하여 쓰지 않는 한편 소위 문단은 당송 팔가와 팔고의 혼합체인 상성파와 사기당과 원수원의 유파를 따라가는 사륙병체문과 황산곡을 본존으로 하는 강서파 등등이 당시 정통파의 문학으로서 과장과 허위와 아유(阿諛)로서 고전문학을 모방한데 지나지 못하였으며 새로운 사회를 창생할 하등의 힘도 가지지 못한 것은 미루어 알기도 어렵지 않은 분위기 속에 중국문학사상에 찬연한 봉화가 일어난 것은 1915년 잡지 <신청년>의 창간이 그것이다.
이것이 처음 발간되자 당시 아메리카에 있던 호적(胡適) 박사는 「문학개량 추의(芻議)」를 1917년 신년호에 게재하였고 진독수(陳獨秀)가 이에 찬의를 표하고 「문학혁명론」을 발표하였으며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교수들이 합류하게 되자 종래의 고문가들은 이 운동을 방해코자 가진 야비한 정치적 수단을 써보았으나 1918년 4월호에 노신의 「광인일기(狂人日記)」란 백화소설이 발표되었을 때는 문학혁명운동은 실천의 거대 보무를 옮기게 되고 벌써 고문가들은 추악한 꼬리를 감추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후 얼마 뒤에 노신이 광동에 갔을 때 어떤 흥분한 청년은 그를 맞이하는 문장 속에 「광인일기」를 처
음 읽었을 때 문학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차차 읽어내려 가면서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
그래서 동무를 만나기만 하면 곧 붙들고 말하기를 ― 중국 문학은 이제 바야흐로 한 시대를 짓고있다. 그대는 「광인일기」를 읽어 보았는가, 또 거리를 걸어가면 길 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내 의견을 발표하리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魯迅在廣東) 이 문제의 소설 「광인일기」의 내용은 한 망상광(妄想狂)의 일기체 소설로서 이 주인공은 실로 대담하게 또 명확하게 봉건적인 중국 구사회의 악폐를 통매한다. 자기의 이웃사람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자기 가정을 격렬히 공격하는 것이다. 가정―가족제도라는 것이 중국봉건사회의 사회적 단위로서 일반에 얼마나 해독을 끼쳐왔는가. 봉건적 가족제도는 고형화한 유교류의 종법(宗法) 사회관념 하에 당연히 붕괴되어야 할 것이면서 붕괴되지 못하고 근대사회의 성장
에 가장 근본적인 장애로 되어있는 낡은 도덕과 인습을 여지없이 통매했다. 이에 「광인일기」 중에 한 절을 초하면

 

나는 역사를 뒤적거려 보았다. 역사란 건 어느 시대에나 인의도덕이란 몇 줄로 치덕치덕 씌어져 있었
다. 나는 밤잠도 안 자고 뒹굴뒹굴 굴러가며 생각하여 보았으나 겨우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사람을
먹는다”는 몇 자가 씌어 있었을 뿐이었다.

 

이같이 추악한 사회면을 폭로한 다음, 오는 시대의 건설은 젊은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이 소설의 일편은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로서 끝맺는다. 실로 이 한 말은 당시의 어린이인 중국청년들에게는 사상적으로는 폭탄선언 이상으로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작품이 백화로 쓰여지는 데 따라 문학혁명이 완전히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된 공적도 태반은 노신에 돌려야 하는 것이다.
「광인일기」의 다음 연속해 나온 작품으로 「공을기(孔乙己)」 「약(藥)」 「내일」 「하나의 작은사건(一個小事件)」 「머리카락 이야기(頭髮的故事)」 「풍파」 「고향」 등은 모두 <신청년>을 통해서 세상에 물의를 일으켰으나 그 후 1921년 <북경신보> 문학부간에 그 유명한 「아큐정전」이 연재 되면서부터는 노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문단 제1인적 작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작은 모두 신해혁명 전후의 봉건사회의 생활을 그린 것으로 어떻게 필연적으로 붕괴하지 않으면 안 될 특징을 가졌는가를 묘사하고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살아갈까를 암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혁명과 혁명적인 사조가 민중 심리에 생활 디테일에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가장 리얼하게 묘사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농민작가라고 할만큼 농민생활을 그리는데 교묘하다는 것도 한 가지 조건이 되겠지만 그의 소설에는 주장이 개념에 흐른다거나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은 그의 작가적 수완이 탁월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늘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과 때로는 인텔리일지라도 예를 들면 「공을기」의 공을기나 「아큐정전」의 아큐가 모두 일맥상통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이니 공을기는 구시대의 지식인으로 시대에 떨어져서 무슨 일에도 쓰이지 못하고 기품만은 높았으나 생활력은 없고 걸인이 되어 선술집 술상대에 일금 19조의 주채가 어느 때까지 쓰여져 있는대로 언제인지 행방불명된 채로 나중에 죽어졌던 것이라던지 룸펜 농민인 아큐가 또한 쑥스러운 녀석으로 혁명 혁명을 떠들어놓고는 그것이 몹시 유쾌해서 반취(半醉)한 기분이 폭동대의 일군에 참가는 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허풍만 치고 아무것도 못하다가 때마침 일어난 폭도의 약탈사건에 도당으로 오해되어(그의 평소 삼가지 못한 언동에 의하여) 피살되는 아큐의 성격은 그때 중국의 누구라도 전부 혹은 일부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큐나 공을기가 모두 사고와 행동이 루즈하고 확호한 한 개의 정신도 없으며 유약하면서도 몹시 건방지고 남에게 한대 쥐어박히면 아무런 반항도 못하면서 남이 자신을 연민하면 제 도량이 커서 남이 못 덤비는 것이라고 제대로 도취하여 남을 되는대로 해치는 무지하고 우수면서도 가엷고 괴팍스러운 것을 노신은 그 리얼리스틱한 문장으로 폭로한 것이 특징이었으니 당시 「아큐정전」이 발표될 때 평소 노신과 교분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모델로 고의로 쓴 것이라고들 떠드는 자가 있은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중국은 시대적으로 아큐시대이었으며 노신의 「아큐정전」이 발표될 때는 비평계를 비롯하여 일반 지식군들은 아큐상(相)이라거나 아큐시대라는 말을 평상 대화에 사용하기를 항상 다반으로 하게 된 것은 중국문학사상에 남겨놓은 노신의 위치를 짐작하기에 좋은 한 개의 재료이거니와 그의 작가로서의 태도를 통하여 일관하여 있는 노신정신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는데 적지 않은 흥미를 갖게 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조선문단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예술과 정치의 혼동이니 분립이니 하여 문제가 어찌 보면 결말이 난 듯도 하고 어찌 보면 미해결 그대로 있는 듯도 한 현상인데 노신같이 자기 신념이 굳은 사람은 이 예술과 정치란 것을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이 문제는 그의 작가로서의 출발점부터 구명해야 한다.
노신은 본래 의사가 되려고 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할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의 자기의 ‘할일’이란 것은 민족개량이라는 신념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훗날 <납함(呐喊: 외침)> 서문에 다음 같이 썼다.

 

나의 학적은 일본 어느 지방의 의학전문학교에 두었다. 나의 꿈은 이것으로 매우 아름답고 만족했다.
졸업만 하고 고국에 돌아오면 아버지와 같이 치료 못하는 병자를 살리고 전쟁이 나면 출정도 하려니
와 국인의 유신에 대한 신앙에까지 나아갈 것

이것은 물론 소년다운 노신의 로맨틱한 인도주의적 흥분이었겠지만 이 꿈도 결국은 깨어지고 말았다.

의학은 결코 긴요하지 않다. 우약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또 아무리 강장해도 무의미
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꾼이 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중략) 그럼으로 긴요한 것은 그들을
정신적으로 잘 개조할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때 당연 문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예운동을 제창
하기로 했다 (<呐喊>서문)

 

이리하여 그가 당시 동경에 망명해 있는 중국사람들의 기관지인 <절강조(浙江潮)> <하남(河南)> 등에 쓰던 과학사나 진화론의 해설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을 번역한 것은 그리스의 독립운동을 원조한 바이런과 폴란드의 복수시인 아담 미케비치, 헝가리의 애국시인 베트피 산더, 필리핀의 문인으로 스페인 정부에 사형받은 리샬 등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노신의 문학행정에 있어서 가장 초기에 속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번역까지라도 그의 일정한 목적 즉 정치적 목적 밑에 수행된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위에 말한 「광인일기」의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도 순수한 청년들에 의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그의 이상을 단적으로 고백한 것으로써 이 말은 당시 일반 청년들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깨닫게 한 것은 물론 지난 수천 년 동안의 봉건사회로부터 청년을 해방하라는 슬로건으로 널리 쓰였고 사실 그 뒤의 중국청년학생들은 모든 대중적 사회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발 과감한 지도와 조직을 하였으며 그 유명한 오사운동이나 오주운동이나 국민혁명까지도 늘 최전선에 서서 대중을 지도한 것은 이들 청년학생이었다.
그러므로 노신에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 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도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인 작품을 산출하는 데만 문호 노신의 지위는 높아갔고 아큐도 여기서 비로소 탄생하였으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좋은 예가 있다. 1928년경 무한으로부터 쫓겨 와서 상해에서 태양사를 조직한 청년비평가 전행촌(錢杏邨)이 때마침 프로문학론이 드셀 때인 만큼 노신을 대담하게 공격을 시작해 보았다. 그 소론에 의하면 노신의 작품은 비계급적이다, 아큐에게 어디 계급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당한 말이다. 노신의 작품에서 우리는 눈 닦고 보아도 프롤레타리아적 특성은 조금도 볼 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사람의 작품을 비평할 때는 그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니 노신이 작가로 활동하고 있을 때는 중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정의를 내릴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는 없을 뿐 아니라 그때쯤은 부르조아 민주주의적인 정치사조조차도 아직 경계선이 분명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부르조아 혁명이라는 소위 국민혁명도 정직하게 말하자면 사오운동을 전초전으로 한 것만큼 여기서 역시 중국의 비평가인 병신(丙申)은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그가 현재 중국좌익작가연맹을 지지하고 있다 해서 그의 사오(四五) 전후의 작품을 프로문학이라고
지목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를 우수한 농민작가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고

 

그렇다. 이 말은 어느 정도까지 정당에 가까운 말로서 그를 프로작가가 아니고 농민작가라고
해서 작가 노신의 명예를 더럽힐 조건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가 얼마나 창작에 있
어서 진실하게 명확하게 묘사하는 태도를 가지는가 그의 한 말을 써보기로 하자

 

현재 좌익작가는 훌륭한 자신들의 문학을 쓸 수 있을까? 생각건대 이것은 매우 곤란하다. 현재의 이
런 부류의 작가들은 모두 인텔리다. 그들은 현실의 진실한 정형은 쓸려고 해도 용이치 않다. 어떤 사
람이 일찍이 이런 문제를 제출한 것이 있었다. “작가가 묘사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가 경험한 것이라
야만 될 것인가? 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하기를 반드시 안 그래도 좋다. 왜 그러냐면 그들은 잘 추찰
(推察)할 수가 있으므로 절도하는 장면을 묘사하려면 작가는 반드시 자신이 절도질할 필요도 없고
간통하는 장면을 묘사할 필요를 느낄 때 작가 자신이 간통할 필요도 없다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가 구사회 속에서 생장해서 그 사회의 모든 일을 잘 알고 그 사회의 인간들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추찰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래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새 사회의 정형과 인물에 대해서
는 작가가 무능하다면 아마 그릇된 묘사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문학가는 반드시 참된 현실과
생명을 같이하고 혹은 보다 깊이 현실의 맥박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또 다시 말을 계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사회를 조그만치 공격하는 작품일지라도 만약 그 결점을 분명히 모르고 그 병근을 투철히 파악치 못하면 그것은 유해할 뿐이다. 애석한 일이나마 현재의 프로작가들은 비평가까지도 왕왕 그것을 못한다. 혹 사회를 정시해서 그 진상을 알려고도 않고 그 중에는 상대자라고 생각하는 편의 실정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비근한 예로는 얼마 전 모 지상에 중국문학계를 비평한 문장을 한 편 보았는데 중국문학계를 3파에 나눠서 먼저 창조파를 들어 프로파라 하여 매우 상세하게 논급하고 다음 어사사(語絲社)를 소부르조아파라고 조그만치 말한 후 신월사(新月社)를 부르조아문학파라 해서 겨우 붓을 대다가만 젊은 비평가가 있었다. 이것은 젊은 기질의 상대자라고 생각하는 파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세밀하게 고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표명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서적을 볼 때 상대자의 것을 보는 것은 동 파(派)의 것을 보는 안심과 유쾌와 유익한데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일개 전투자라면 나는 생각건대 현실과 상대자를 이해하는 편의상보다 당면의 상대자에 대한 해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옛것을 분명히 알고 새로운 것에 간도하고 과거를 요해하여 장래를 추단하는 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 발전은 희망이 있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와 같은 환경에 있는 작가들은 부단히 노력할 것이고 그래야만 참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라고.
이 간단한 몇 마디 말이 문호 노신의 창작에 대한 모럴인 것이다. 이 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 만한 시사인고! 이래서 현대중국문단의 아버지이며 비평가의 비평으로서 자타가 그 지위를 함께 긍정하던 그의 작가로서의 생애는 너무나 짧은 것이었으니 1926년 3월 「이혼」이란 작품을 최후로 남긴 그는 교수로서 작가로서의 화려한 생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왔다.
그는 지금부터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아나기가 더 바빴다.” 1926년 북양군벌을 배경으로한 안복파(安福派)의 수령 단기서(段祺瑞) 정부는 급진적인 좌파 교수와 우수한 지식분자 50여명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우리 노신은 이 50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1924년 국민당의 연아용공책(聯俄容共策)이 결정되어 그 다음해 가을 보로딘 등이 고문으로 광동에 오고 ‘전국민적 공동전선’이었던 국민혁명의 제1단계인 광동시기에는 프롤레타리아의 동맹자는 농민 도시빈민 소프로지식계급 국민적 부르조아였다.
그래서 급진 교수들은 교육부총장과 군벌정부를 육박하였으며 이러한 신흥세력에게 낭패와 공포를 느낀 군벌정부는 이러한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체포령을 내리고 학생들의 행렬은 정부 위병들의 발포로 인하여 남녀 수백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그때 노신은 북경 동교민항의 공사관구역의 외국인 병원이나 공장 안으로 돌아다니며 찬물로 기아를 참아가면서도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여 군벌정부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중에도 ‘국민 이래 최암흑일에 지(至)’하였다는 명문은 단기서로 하여금 의자에서 내려앉게 되었다.

 

붓으로 쓴 헛소리는 피로 쓴 사실을 간과하지 못한다 … 붓으로 쓴 것이 무슨 힘이 있으랴! 실탄을 쏘
는 것은 오직 청년의 피다.(<華蓋集續編>)

 

오늘날까지 중국문단의 막심 고리키이던 그는 지금부터는 문화의 전사로서 앙리 바르뷔스보다 비장한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의 말과 같이 최암흑한 50일이 지나고 그는 북경을 탈출했다. 하문대학(厦門大學)에 초청을 받아갔으나 대학기업가의 음흉수인 것을 안 그는 광동중산대학으로 갔다. 그러나 1926년 6월 15일 장개석의 쿠데타는 광동성만 노동자 농민 급진지식분자 3천여 명을 살해하였으며 한때는 “혁명 전사”라고 간판을 지은 노신도 상해로 달아나야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그에게 흥미보다는 최대의 경의를 갖게 되는 것은 다음의 일문이다.

 

나의 일종 망상은 깨어졌다. 나는 지금까지 때때로 낙관을 가졌었다. 청년을 압박하고 ―하는 것은
대개 노인이다. 이들 노물들이 다 죽어지면 중국은 보다 더 생기 있는 것이 되리라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러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청년을 ―하는 것은 대개는 청년인 듯하다. 또 달리 재조할 수 없는
생명과 청춘에 대해서 한층 더 아낌이 없이― (<而己集>)

 

이 글은 그가 침묵하고 있는 것을 ‘공포’ 때문이라고 조소한 사람에게 답한 통신문의 일절로서 이때까지 진화론자이던 그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양기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단계로 보인 것이라고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상해에 왔을 때는 국민당의 쿠데타로 혁명군에서 쫓겨온 젊은 프로문학자가 만났다. <혁명문학론>이 불려지고 실제 정치행동의 전선을 떠난 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 잡았다. 원기왕성하게 실제공작의 경험에서 매우 견실한 것도 있었으나 때로는 자부적인 영웅주의가 화를 끼치고—에 실패한 분만(憤懣)과 극좌적인 기회주의자들은 노신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프로문학이란 어떤 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해 아버지 같은 애무로서 플레하노프와 루나차르스키의 문학론과 소비에트의 문예정책을 번역 소개하여 중국 프로문학을 건설하고 있는 동안에 “노신을 타도치 않으면 중국에 프로문학은 생기지 못한다”는 문학소아병자들은 그 자신들이 먼저 넘어지고 이제 그마저 가고 말았다.
이 위대한 중국문학가의 영령 앞에 고요히 머리를 숙이면서 나의 개인적으로 곤란한 정형에 의하여 문호 노신의 윤곽을 뚜렷이 그리지 못함을 참괴(慙愧)히 여기며 붓을 놓기로 한다.

수, 2021/07/28-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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